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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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²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³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마땅히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⁴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⁵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⁶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⁷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령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⁸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⁹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두 편지, 곧 그가 영감으로 기록한 처음 두 편지는 그 교회에 대해 너무도 빛나는 성품을 그려 주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그 교회가 처음 세워진 경위에 관한 기록을 만나게 되어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I. 여기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이른 일이 있다. 데살로니가는 이 지방의 주요 도시였으며, 오늘날에는 튀르키예의 영토 안에 있는 살로네크(Salonech) 라고 불린다. 살펴보라. 1. 바울은 빌립보에서 당한 모진 학대에도 불구하고 자기 일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실패하지도 않았고 낙담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 교회에 보낸 첫째 편지에서 이 점을 언급한다(살전 2:2). 우리가 이미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담대히 전하였노라. 그가 만난 반대와 박해는 도리어 그를 더욱 결연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일들 가운데 어느 것도 그를 움직이지 못하였다. 만일 그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영으로 힘을 얻지 못하였다면, 그는 결코 그가 한 것처럼 끝까지 견디고 끝까지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그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다녀가기만 하였는데, 전자는 빌립보 가까이에 있는 도시요 후자는 데살로니가 가까이에 있는 도시였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있었으며, (바람처럼 임의로 부는) 성령께서 그가 어느 곳을 다녀가야 하고 어느 곳에 머물러야 할지를 그에게 일러 주셨을 것이다. 아볼로니아는 일루리곤(Illyricum)의 한 도시였는데, 어떤 이들은 이것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 말씀(롬 15:19)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곧 그가 지금 있던 곳인 일루리곤의 경계까지 전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이 도시들을 단지 다녀갔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나, 우리는 그가 거기서 복음을 전파하고 또 그가 후에 보낼 다른 사역자들이 그들 가운데로 들어갈 길을 예비할 만큼 오래 머물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II. 데살로니가에서 그가 회당에서 유대인에게 먼저 전도한 일. 그는 거기서 유대인의 회당을 발견하였다(행 17:1). 이것은 그가 앞서 언급한 다른 도시들을 다녀가면서 거기 오래 머물지 않은 한 가지 이유가, 그 도시들에는 회당이 없었기 때문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서 회당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통하여 들어갔다. 1. 유대인에게 먼저 시작하는 것, 곧 그들에게 복음을 먼저 제시하고 그들이 그것을 거절하기 전에는 이방인에게로 돌이키지 않는 것은 언제나 그의 관례였다. 이는 그가 이방인에게 전한다고 그들이 그를 향해 떠들지 못하도록 그 입을 막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새로운 회심자들을 기꺼이 품었을 것이요, 만일 그들이 거절하였다면 사도들이 복음을 기쁘게 맞아들일 자들에게 가져갔다 해도 자기들을 탓해야 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라는 그 명령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에게 먼저 시작하라는 지시로 정당하게 해석되었다. 2. 그는 안식일에 그들의 회당에서 그들을 만났으니, 그들의 장소에서 그들의 모이는 때에 만난 것이다. 이렇게 그는 그 둘 다에 대해 존중을 표하였다. 안식일과 거룩한 집회는 그리스도를 귀히 여기는 자들에게 언제나 매우 귀한 것이다(시 84:10). 주의 날에 주의 전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관례였고 바울의 관례였으며, 모든 성도가 행한 관례였으니, 곧 그들이 걸어온 옛적 좋은 길이었다. 3. 그는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강론하였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받아들이는 점에서는 그와 일치하였으니, 거기까지는 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받아들였기에 그리스도를 배척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바울은 성경을 받아들였기에 그리스도를 영접할 큰 이유를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는, 그가 그들과 강론함으로써, 또한 성령께서 그와 함께 역사하심으로써, 성경으로부터 자기가 끌어낸 추론이 옳고 그들의 추론이 그르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키는 일이 필요하였다. 주목하라. 복음 전파는 성경적인 전파인 동시에 합리적인 전파여야 한다. 바울의 전파가 그러하였으니, 그가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우리의 기초와 신탁(oracle)과 시금석으로 삼아야 하며, 그런 다음 그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 위에서 추론해야 한다. 또한 유대인들이 그러하였듯이 성경에 대한 열심을 가장하면서도 그것을 억지로 풀어 자기 멸망에 이르게 하는 자들을 향하여 그렇게 추론해야 한다. 이성을 성경과 경쟁하도록 내세워서는 안 되며, 다만 성경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4. 그는 연이은 세 안식일에 걸쳐 이 일을 계속하였다. 첫째 안식일에 그들을 확신시킬 수 없으면, 둘째와 셋째 안식일에 시도하려 하였다. 이는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줄에 줄을 더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회심을 기다리시니, 그분의 사역자들도 그래야 한다. 모든 일꾼이 첫째 시간에 포도원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요, 첫 부르심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그 간수처럼 그렇게 갑작스럽게 변화되는 것도 아니다. 5. 그가 전파하고 변론한 취지와 목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그가 뜻을 풀어 증명한 바였다(행 17:3). 그는 먼저 자기의 명제를 설명하고 용어들을 풀이한 다음, 그것을 주장하고 또 자기가 고수할 바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동의하기를 요구하는 바로서 그것을 내세웠다. 바울은 탁월한 강론 방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기가 전파하는 교리를 잘 파악하고 철저히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진리를 온전히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믿는 자로서 그것을 풀어 밝혔다. 그는 그들에게 보여 주었으니, (1.)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고 다시 살아나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메시아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이 그 일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에 반대하여 내세운 큰 이의는 그의 치욕적인 죽음과 고난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었으니, 그것이 그들이 메시아에 대해 그려 놓은 관념과 결코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가 고난을 받았다 할지라도 메시아일 수 있다는 것뿐 아니라, 메시아이시기에 마땅히 고난을 받으셔야 했다는 것을 반박할 수 없게 증명하고 밝혀 낸다. 그는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온전하게 되실 수 없었으니, 만일 죽지 않으셨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강조하신 바였다(눅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또 다시(눅 24:46),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이렇게 기록되었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그러해야 하리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마땅히 고난을 받으셔야 했으니, 그렇지 않고는 우리를 위하여 구속을 이루실 수 없었기 때문이요, 또 마땅히 다시 살아나셔야 했으니, 그렇지 않고는 그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2.)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 "내가 너희에게 전하고 또 너희에게 믿으라고 촉구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요, 그 그리스도시며,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시며, 오실 그분이시니, 너희는 다른 이를 찾지 말 것이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또 그의 일하심으로(인생들에게 말씀하시는 두 가지 방식), 곧 성경으로 또 기적으로, 또 이 둘을 다 효력 있게 하시는 성령의 선물로 그를 증언하셨기 때문이라." 주목하라. [1.] 복음의 사역자들은 예수를 전파해야 한다. 그가 그들의 주된 주제가 되어야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알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2.] 우리가 예수에 관하여 전파해야 할 것은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기를 소망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III. 거기서 그의 전파가 거둔 성과(행 17:4). 1. 어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에도 불구하고 믿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 그들은 단지 친구나 동료로서 그들과 어울린 것이 아니라, 영적 인도자인 그들의 지도에 자기 자신을 내맡겼다. 그들은 마치 정당한 소유주의 소유로 들어가는 기업처럼 자기 자신을 그들의 소유로 내어드렸으니,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이러하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들에게 드렸다(고후 8:5). 그들은 바울과 실라에게 붙어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동행하였다. 주목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의 신실한 사역자들과 교제하게 되고 그들과 어울리게 된다. 2. 더 많은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성문에 있는 개종자들이었으니, 이방인 중에 경건한 자들(유대인들이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이었다. 이들은 비록 모세의 율법에는 복종하지 않았으나, 우상 숭배와 부도덕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아무에게도 잘못을 행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호이 세보메노이 헬레네스(hoi sebomenoi Hellenes), 곧 경배하는 이방인들이었으니, 마치 아메리카에서 원주민 가운데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회심한 자들을 기도하는 인디언들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이들은 회당 예배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참여하도록 허락받았다. 이들 중에 큰 무리가 믿었으니, 의식법(ceremonial law)에 매여 있던 철저한 유대인들보다 더 많은 수가 믿었다. 또 그 성의 귀부인 중에서도 적지 않은 자들, 곧 경건하고 종교적 의식을 지닌 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 점이 특별히 언급되어 있으니, 이는 부녀들, 곧 귀부인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또 그들이 경건의 훈련에 힘쓰며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가 명하는 능력에 자신을 복종시키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받으실 만한 일이며, 그리스도께 얼마나 영광이 되며, 또 그들 자신의 영혼에 유익이 될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암시한다. 여기서 그들이 데살로니가의 이방인 우상 숭배자들에게 복음을 전한 일은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그들이 그렇게 하였고 또 큰 무리가 회심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 비록 여기서 그들에 대해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그 교회는 주로 이방인 회심자들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울이 그곳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하였고(살전 1:9), 또 사도들이 처음 그들 가운데로 들어갔을 때에 그러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IV. 데살로니가에서 바울과 실라에게 가해진 곤경. 그들은 어디서 전파하든지 반드시 박해를 받았으니, 결박과 환난이 각 성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펴보라.
1. 그들의 곤경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였는가. 믿지 아니하고 시기하는 유대인들이었다(행 17:5). 유대인들은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에게 가장 완고한 원수였으니, 그들은 그런 자들을 배신자로 여겨 특별한 원한을 품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내신다고 하신 그 분열이 무엇인지 보라(눅 12:51 참조). 어떤 유대인들은 복음을 믿고 믿지 않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으나, 믿지 않는 자들은 믿는 자들을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성 바울은 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복음 전파자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격노와 적의를, 그들의 죄악을 가득 채우는 죄로 언급한다(살전 2:15, 16).
2. 그 곤경의 도구가 된 자들이 누구였는가. 유대인들은 그들이 끌어모은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이용하였으니, 이들은 사도들에 대한 성읍의 여론을 떠맡아 대변하기로 한 자들이었다. 모든 지혜롭고 분별 있는 자들은 사도들을 존경하고 귀히 여겼으며, 그들에게 맞서 나설 자라고는 성읍의 찌꺼기, 곧 온갖 악행에 빠진 비천한 자들의 무리뿐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는 기독교를 반대하던 자들을 향하여, 기독교의 원수들이 대체로 가장 악한 자들이었다고 변론한다. Tales semper nobis insecutores, injusti, impii, turpes, quos, et ipsi damnare consuestis—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은 언제나 불의하고 불경하며 수치스러운 자들로서, 너희 자신도 으레 정죄해 온 자들이라.—『변증론(Apologia)』 5장. 종교를 미워하는 자들이 대체로 정의와 덕에 대한 모든 분별을 잃어버린 저자의 불량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종교의 영예가 된다.
3. 그들이 사도들을 대적하여 진행한 방식. (1.) 그들은 성을 소동하게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소란을 일으켰으니, 그리하여 모두가 무슨 일인가 보려고 달려 나왔다. 그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그러자 곧 군중이 들고일어났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누구인지 보라(왕상 18:17, 18 참조). 그것은 복음의 신실한 전파자들이 아니라 복음의 원수들이다. 마귀가 어떻게 자기 계략을 수행하는지 보라. 그는 성읍을 소동하게 하고 영혼들을 소동하게 한 다음, 흐려진 물에서 고기를 낚는다. (2.) 그들은 사도들이 묵고 있던 야손의 집에 침입하였으니,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는 의도였다. 그들은 그 백성을 사도들에게 격분하게 하여, 그들에 의해 사도들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기를 바랐다. 여기서의 절차는 전적으로 불법이었다. 야손의 집을 수색해야 한다면, 그것은 영장 없이가 아니라 마땅히 정당한 관원들에 의해 행해져야 했다. 법은 말하기를 "사람의 집은 그의 성채라"고 하는데, 그들이 폭도처럼 사람의 집에 침입하여 그와 그의 식구를 두려움에 빠뜨린 것은, 박해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어떤 만행에까지 이르는지를 보여 줄 따름이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다면, 관원들이 임명되어 그 죄를 조사하고 판단하는 것이거늘, (이 유대인들이 의도하였듯이) 폭도를 재판관이자 집행관으로 삼는 것은, 진리를 거리에 넘어지게 하고, 종을 말 위에 올려놓으며, 군주를 종처럼 땅에서 걷게 하는 것이요(전 10:7 참조), 공의를 폐위시키고 분노를 왕좌에 앉히는 것이었다. (3.) 사도들을 자기들 손아귀에 넣을 수 없게 되자(그들은 사도들을 떠돌이로 처벌하고, 또 그 땅을 정탐하여 그 힘을 삼키고 그들의 입에서 빵을 빼앗아 가려는 이방인으로서 백성을 격분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 성읍의 정직한 한 시민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사도들을 자기 집에 영접한 자였으니, 그 이름은 야손이요 회심한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그를 다른 몇몇 형제들과 함께 끌어내어 성읍의 읍장들 앞에 데려갔다. 사도들은 물러가는 것이 좋겠다는 권면을 받았으니, 그들이 더 큰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Currenti cede furori—격류 앞에서는 물러서라. 그러나 그들의 친구들은 자신을 기꺼이 내놓으려 하였으니, 그들이 이 폭풍을 더 잘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을 위하여, 곧 사도들과 같은 그런 선한 사람들을 위하여 혹 담대히 죽는 자도 있을 것이라(롬 5:7). (4.) 그들은 사도들을 읍장들에게 고발하여 위험한 인물들로, 용납될 수 없는 자들로 묘사하였다. 야손에게 씌워진 죄는 사도들을 받아들이고 숨겨 준 것이었으며(행 17:7), 그들을 두둔하고 그들의 이익을 도모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숙소를 제공한 것이 반역죄를 알고도 숨긴 죄(misprision of treason)와 다름없을 정도라니, 사도들의 죄가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 사도들에게 두 가지 매우 검은 성격이 씌워졌으니, 만일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그들을 백성에게 미움 받게 하고 관원들에게 죄인이 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 [1.] 그들이 공공의 평화에 대한 원수요,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을 무질서에 빠뜨린다는 것.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렀도다. 한 의미에서는, 복음이 어떤 장소에든 어떤 영혼에든 그 능력으로 임하는 곳마다 거기에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며, 흐름의 방향을 너무도 크게 바꾸어 이전과 정반대가 되게 하므로, 그 장소와 그 영혼 안에서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마음에서 뿌리 뽑히고, 세상의 길이 삶에서 거스름을 받으므로, 거기서 세상이 뒤집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의도한 의미로 본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거짓이다. 그들은 복음의 전파자들이 가는 곳마다 선동자요 말썽꾼이며, 친족 사이에 불화를 심고 이웃을 서로 다투게 하며 통상을 가로막고 모든 질서와 규율을 뒤엎는다고 여겨지게 하려 하였다.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악에서 덕으로, 우상에서 살아 계신 참 하나님께로, 악의와 시기에서 사랑과 화평으로 돌이키도록 권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는 죄목을 뒤집어썼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뒤엎은 것은 오직 세상 속에 있는 마귀의 나라였을 뿐이다. 그들의 원수들이 성을 소동하게 하고는 그 책임을 사도들에게 돌렸으니, 마치 네로(Nero)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는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운 것과 같다. 만일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들이, 곧 그 땅에서 가장 조용한 자들조차 이렇게 악의적으로 잘못 표현되고 오명을 입는다면, 그들은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로 인해 분개하지도 말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학대받은 바울과 실라보다 나은 자가 아니다. 고발하는 자들이 외치기를, "그들이 여기도 이르렀도다. 그들이 다른 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해악을 행하여 왔고, 이제 그 전염병을 여기까지 가져왔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발하여 그들에 맞서야 할 때라" 하였다. [2.] 그들이 확립된 정부의 원수요, 그것에 대해 불충하며, 그들의 원리와 행위가 군주제를 파괴하고 국가 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행 17:7). 그들이 다 가이사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이니, 이는 어떤 특정한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이 아니라(당시에는 아직 제국의 법 가운데 기독교를 금하는 것이 없었다), 명령을 제정하는 가이사의 권세 일반을 거역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기를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구주께서 빌라도 앞에서 친히 고발당하셨듯이 단지 유대인의 왕일 뿐 아니라, 만유의 주이시니,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처음 전한 설교에서 그를 그렇게 불렀다(행 10:36). 로마 정부는 공화국이었을 때나 가이사들의 손에 들어간 후에나, 그 통치 아래 있는 어떤 총독이 왕의 칭호를 취하는 것에 대해 매우 경계하였으며, 이를 명백히 금하는 법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과연 예수가 왕이라고 말하였으나, 그는 세상의 왕이 아니요, 가이사와 경쟁하는 자도 아니며, 그의 규례들이 가이사의 명령들과 충돌하는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것을 자기 나라의 법으로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교리 가운데는 군주들을 폐위시키거나 그들의 어떤 특권을 박탈하는 데로 향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이 사도들에게 이러한 죄목을 씌운 것은 자기 양심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 중에서도 유대인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으니, 그들은 가이사와 그의 정부를 미워하여 그와 그것의 멸망을 꾀하던 자들이요, 또한 세속의 군주가 되어 여러 나라의 보좌를 뒤엎을 메시아를 기대하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주 예수께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셨다는 이유로 그를 반대하던 자들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가이사의 원수요 왕들과 지방들에 해로운 자로 묘사하는 데 가장 악의에 찬 자들은, 자기 자신이 imperium in imperio—나라 안의 나라, 곧 가이사의 권세와 경쟁할 뿐 아니라 그보다 우월한 권세, 곧 교황 수위권(papal supremacy)을 세우는 자들이었다.
4. 이 일이 이 성읍에 안겨 준 큰 불안(행 17: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였더라. 그들은 사도들이나 그들의 교리에 대해 나쁜 생각을 가지지 않았고, 그들에게서 국가에 대한 어떤 위험도 알아챌 수 없었으므로 그들을 묵인하려 하였다. 그러나 만일 사도들이 고발하는 자들에 의해 가이사의 원수로 묘사된다면, 그들은 정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부득이 그 일을 처리하고 사도들을 억눌러야 했으니, 이것이 그들을 괴롭게 하였다. 당시 통치권을 쥐고 있던 클라우디우스(Claudius)는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의해 아주 작은 소요조차 매우 경계하며 극도로 소심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로 인해 그 아래 있는 통치자들은 위험해 보이거나 조금이라도 의심의 빌미를 주는 모든 일에 대해 경계해야 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들을 부득이 괴롭혀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 그들을 괴롭게 한 것이다.
5. 이 골치 아픈 사건의 결말. 읍장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기소할 마음이 없었다. 사도들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조치가 취해졌으니, 그들은 몸을 숨기고 피하여 그들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리하여 야손과 그의 친구들을 보석으로 풀어 주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행 17:9). 여기 읍장들은 빌립보의 관원들처럼 그렇게 쉽게 사도들에게 격분하지 않았으며, 더 신중하고 더 나은 성품을 지녔다. 그래서 그들은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아, 그들에게 선한 처신을 약속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혹 후에 그들에 대해 무슨 고발할 일이 생겨 부름을 받게 되면 출두하리라는 것을 보증하게 하였을 것이다. 기독교를 박해한 자들 가운데는, 짐승 같은 광기와 격노의 사례들이 있었던 것처럼, 또한 사람다운 신중함과 절제의 사례들도 있었으니, 절제는 하나의 덕이었다.
사도행전 17장 10-15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¹⁰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¹¹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¹²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¹³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¹⁴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¹⁵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바울의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게 된다.
I. 바울과 실라가 베뢰아로 옮겨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받음(행 17:10). 그들은 데살로니가에서 교회의 기초가 놓일 만큼 일을 진척시켰고, 시작된 사역을 이어갈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는데, 통치자들과 백성은 바울과 실라에게 그랬던 것만큼 그들에게는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폭풍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물러갔으니, 이를 지금으로서는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표시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그 명령, 곧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는 말씀은, 그들의 피신이 그들 자신의 안전을 위한 것("저 동네로 피하여 거기 숨으라")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사역을 이어가기 위한 것("저 동네로 피하여 거기서 전파하라")임을 의도한 것이다. 이는 그 이유로 주신 말씀—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3)—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리하여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왔고, 마귀는 자기 자신의 활에 자기가 쏘여 패하였다. 마귀는 사도들을 박해함으로써 복음의 진전을 막으려 하였으나, 도리어 그것이 복음을 더 진전시키도록 다스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보라. 1.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위하여 베푼 돌봄을. 그들을 대적하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그들은 즉시 밤에 그들을 베뢰아로 보냈으니, 은밀하게(incognito) 그리하였다. 이것은 갓 믿은 사람들에게 놀랄 일이 될 수 없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살전 3:4에서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 가운데 처음 왔을 때에 우리가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형제들이 허락하였더라면 바울과 실라는 기꺼이 머물러 폭풍에 맞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형제들은 사도들의 도움을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생명을 위험에 노출시키려 하지 않았으니, 그 생명이 그들 자신보다 친구들에게 더 소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형제들은 마치 악을 행하는 자들인 것처럼, 밤의 어둠을 가림막 삼아 밤에 그들을 보냈다. 2. 바울과 실라가 그들의 사역에 변함없이 충실하였음을. 비록 그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도망쳤으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도망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베뢰아에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거기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악의에 찬 원수였고, 또 그들이 아는 한 베뢰아의 유대인들도 그러할지 모르는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마땅한 도리를 표하기를 거절하지 않았으니, 받은 상처에 대한 복수로도, 또 받을지 모르는 해를 두려워하여서도 그리하지 않았다. 비록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마땅한 도리를 다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II. 베뢰아 유대인들의 선한 성품(행 17:11).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웠다. 베뢰아 회당의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 회당의 유대인들보다 복음을 받아들일 마음 자세가 더 나았다. 그들은 그처럼 완고하거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고, 그처럼 까다롭거나 심술궂지도 않았다. 그들은 더 너그러웠으니, eugenesteroi—곧 더 잘 자란(better bred) 사람들이었다.
1. 그들은 더 자유로운 사고를 지녔고, 확신을 받아들일 여지가 더 열려 있었으며, 이치를 들으려 하였고, 그 힘을 인정하였으며, 비록 자기들의 이전 견해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자기들에게 진리로 보이는 것에는 동의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더 너그러운 것이었다.
2. 그들은 더 나은 기질을 지녔고, 자기들과 견해가 다른 모든 자들에 대하여 그처럼 신랄하거나, 무뚝뚝하거나, 고약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합의에 이르게 된 자들과 한마음으로 연합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처럼, 자기들이 보기에 의견을 달리할 만한 이유가 있는 자들과도 사랑 안에서 계속 머물렀다. 이것이 더 너그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처럼 그 일을 미리 판단하지도 않았고, 그 일을 주관하는 자들을 시기하여 동요하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매우 관대하게 그 일과 그 사람들 모두에게 분노나 편파 없이 공정한 청문의 기회를 주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1.)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자 매우 기꺼워하였고, 그 뜻을 즉시 깨달았으며, 그 빛에 자기들의 눈을 닫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이 말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였으니, 루디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하였고, 그것들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들은 말씀과 시비를 가리려 하지 않았고, 흠을 잡으려 하지도 않았으며, 그것을 전하는 자들을 걸고넘어질 빌미를 찾지도 않았다. 도리어 말씀을 환영하였고, 말한 모든 것에 대해 호의적인 해석을 내렸다. 이 점에서 그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보다 더 너그러웠으나, 거기의 이방인들과는 같은 심령으로, 같은 발걸음으로 행하였으니, 이방인들에 대하여는 그들이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고 또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살전 1:6-9). 이것이 참된 고귀함이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크게 자랑하였고, 자기들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더 좋게 태어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 중에 누가 가장 고귀하고 가장 잘 자란 사람들인지가 여기서 그들에게 말씀하여진다—곧 복음을 받아들일 마음이 가장 잘 갖추어진 자들, 그들 안에 있던 높고 우쭐대는 생각들이 굴복되어 그리스도께 순종함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그들이 가장 고귀하였으며,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가장 신사다운 사람들이었다. Nobilitas sola est atque unica virtus—덕과 경건이 참된 고귀함이요 참된 명예이니, 이것이 없이는 Stemmata quid prosunt?—족보와 거창한 칭호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틴어 풍자시 인용) (2.) 그들은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해서 어떤 것이든 곧이곧대로 믿거나 맹목적인 믿음으로 삼키는 식은 아니었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바울이 성경으로부터 변론하며 자기가 말한 것의 증거로 그들을 구약으로 인도하였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성경책을 펼쳐 그가 가리킨 곳을 찾아보고, 문맥을 읽고, 그 범위와 취지를 살피고, 다른 성경 구절들과 비교하고, 바울이 거기서 이끌어낸 추론들이 자연스럽고 진정한 것인지, 또 그것들에 근거한 그의 논증이 설득력 있는 것인지를 검토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였다. 주목하라. [1.] 그리스도의 교리는 면밀한 검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분의 대의를 변호하는 우리는, 사람들이 편견이나 편파 없이 먼저 이것이 과연 그러한지 아닌지를 검토하기 전에는 이것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2.] 신약은 구약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받아들였으니, 그리한 자들은 만일 일들을 바르게 살폈더라면 신약을 받아들일 충분한 이유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 안에서 그들은 구약의 모든 예언과 약속이 온전하고 정확하게 성취된 것을 보기 때문이다. [3.] 성경을 읽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반드시 그것을 상고해야 하며(요 5:39), 그것을 연구하고 살피는 데 수고를 들여야 하니, 이는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찾아내기 위함이요, 또 그 의미를 오해하여 오류에 빠지거나 그 안에 머물지 않기 위함이며, 또한 그 안에 담긴 온전한 진리를 찾아내어 피상적인 지식에, 곧 성경의 바깥뜰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친밀히 사귀게 되기 위함이다. [4.] 성경을 상고하는 일은 우리의 날마다의 일이 되어야 한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들은 자들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고, 한 주간의 매일같이 그것을 상고하였으니, 이는 그 전 안식일에 들은 것을 더 깊이 익히고 다음 안식일에 들을 것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5.] 성경을 자기들의 신탁(oracle)이자 시금석(touchstone)으로 삼고 그에 따라 상고하는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고귀하며,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는 올바른 길에 있는 자들이다.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며 그 안에서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은 그 마음이 고귀한 생각으로 채워지고, 고귀한 원칙에 고정되며, 고귀한 목표와 계획을 향해 빚어진다. 이들이 더 너그러운(고귀한) 자들이다.
III.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한 일의 선한 결과. 그것은 바라던 성공을 거두었으니, 사람들의 마음이 예비되어 있었으므로 많은 일이 단번에 이루어졌다(행 17:12). 1. 유대인들 중에 믿는 자가 많았다. 데살로니가에서는 그 중에 어떤 사람만 믿었으나(행 17:4), 베뢰아에서는 그들이 편견 없는 마음으로 들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믿었으니, 데살로니가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유대인이 믿은 것이다. 주목하라. 하나님은 자기가 먼저 은혜의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하도록, 특히 성경을 상고하도록 마음을 기울이게 하신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2. 헬라인들, 곧 이방인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믿었으니, 귀부인들, 곧 지체 높은 부인들과 적지 아니한 남자들, 곧 일류 신분의 남자들이 그러하였는데, 이들이 귀부인들과 함께 언급된 것으로 보아 신분이 높은 자들이었던 듯하다. 아내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 남편들을 설득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고전 7:16).
IV. 베뢰아에서 바울과 실라를 대적하여 일어난 박해, 곧 바울로 하여금 그곳을 떠나게 만든 박해. 1.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에서 해악을 부추긴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베뢰아에서 전파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고(시기와 질투는 정보를 빠르게 가져오는 법이다), 또한 거기의 유대인들이 자기들처럼 그렇게 골수까지 그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들은 거기서도 세상을 뒤집어 놓으려고 그리로 갔고, 무리를 충동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해 분노하게 하였으니, 마치 사도들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처럼, 자기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대적하라는 사명을 어둠의 임금에게서 받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리하여 우리는 앞서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일부러 루스드라에 와서 백성을 충동하여 사도들을 대적하게 하였음을 읽는다(행 14:19). 보라, 사탄의 앞잡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대적하는 일에 얼마나 쉼 없는지를. 이는 옛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향해 품은 적의의 한 본보기이니, 우리는 본거지의 박해자들이 그 광기를 뻗쳐 타지에서까지 박해를 부추긴다 해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2. 이 일이 바울로 하여금 아덴으로 옮겨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지피신 이 신성한 불을 끄려고 함으로써 그들은 도리어 그것을 더 멀리, 더 빠르게 번지게 하였을 뿐이다. 바울이 베뢰아에 그토록 오래 머물렀고 거기서 그러한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그곳에는 형제들이 있었고, 그것도 분별 있고 적극적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는 그들이 바울을 위하여 베푼 돌봄에서 드러났다(행 17:14). 그들은 박해하는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에서 오고 있다는 것과, 또 그들이 백성을 자극하여 바울을 대적하게 하는 일에 분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사태가 어디까지 갈지 두려워하여 지체하지 않고 즉시 바울을 떠나보냈으니, 그는 그들이 가장 미워하고 가장 격분한 대상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을 진정시키리라 기대하면서, 실라와 디모데는 거기 그대로 머물게 하였으니, 이제 바울이 얼음을 깨뜨려 놓았으므로 이 둘이 바울을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고도 사역을 이어가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바다까지 가게 하였다고 어떤 이들은 읽고, 마치 바다로 가는 것처럼 가게 하였다고 우리는 읽으니, hos epi ten thalassan(헬라어 "바다 쪽으로")이다. 그는 바다로 가는 길로 베뢰아를 떠났으니, 이는 유대인들이 그의 행방을 물을 경우 그가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고 여기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육로로 아덴까지 갔으니, 거기에는 비난받을 만한 어떤 위장도 전혀 없었다. 바울을 인도하는 자들이(이방 땅에서는 나그네였고 또 많은 원수를 둔 그를 위한 길잡이요 호위병으로서) 그를 아덴까지 데려갔다. 하나님의 영이 그의 심령을 움직이사 그를 그 유명한 도시로 인도하셨으니—옛적에는 아덴 공화국이 스파르타와 겨루던 시절 그 권세와 통치로 유명하였고, 후에는 학문으로 유명하여 학자들의 집결지였던 도시다. 학식이 부족한 자들은 그것을 자랑하려고 그리로 갔다. 그곳은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큰 대학과 같은 곳이었으니, 그러므로 복음의 빛을 더 잘 퍼뜨리기 위하여 바울이 그리로 보내진 것이다. 그는 거기 철학자들 가운데 자기 얼굴을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였으니, 비록 그것이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었던 것처럼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될 줄을 알았으나 그리하였다. 3. 그는 거기서 선을 행할 전망이 있음을 알았을 때, 실라와 디모데에게 아덴으로 자기에게 오라고 명하였다. 혹은, 거기에 그가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들 없이는 외롭고 울적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그토록 급히 부르고 있었음에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데살로니가 부근으로 가서 그 교회의 형편에 관한 소식을 자기에게 가져오도록 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우리가 아덴에 홀로 있는 것이 좋은 줄로 생각하여 디모데를 보내어 너희를 굳건하게 하였노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살전 3:1,2).
¹⁶ 바울이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 성이 온통 우상으로 가득한 것을 보고 그의 마음에 분이 일어났다. ¹⁷ 그러므로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과 변론하고,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였다. ¹⁸ 그때에 에피쿠로스파와 스토아파의 어떤 철학자들이 그와 마주쳐 논쟁하였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고,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이방 신들을 전하는 자인 듯하다 하였으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그들에게 전하였기 때문이다. ¹⁹ 그래서 그들이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가서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²⁰ 네가 어떤 이상한 것들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러므로 이것들이 무슨 뜻인지 우리가 알고자 하노라 하였다. ²¹ (모든 아테네 사람과 거기에 사는 외국인들은 다른 일에는 시간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무슨 새로운 것을 말하거나 듣는 일에만 시간을 보냈더라.)
고대인들의 학문에 정통하고 또 그것을 사랑하는 학자라면, 자기가 지금 바울이 있는 곳, 곧 아테네에서, 여러 학파의 철학자들 한가운데 있게 된다면 무척 행복하리라고 생각할 것이며,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아테네 학문의 유산을 설명받기 위해 그들에게 묻고 싶은 진기한 질문들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비록 학자로 양육받았고 재능 있고 활동적인 사람이었으나, 아테네에서 이것을 자기의 일로 삼지 않는다. 그에게는 마음 쓸 다른 일이 있었으니, 그가 목표한 것은 그들의 철학으로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헛된 것이라 부르기를 배웠고 그것을 초월해 있었다(골 2:8). 그의 일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의 종교적 무질서를 바로잡고, 그들을 우상 숭배와 그 우상들 안에 있는 사탄을 섬기는 일에서 돌이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데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I. 여기 아테네 사람들의 가증한 무지와 미신이 바울의 영에 끼친 인상이 나온다(행 17:16). 살펴보라. 1. 여기에 그 성에 대해 주어진 설명이 있다. 그 성은 온통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 이것은 이방 저술가들이 그 성에 대해 준 설명과 일치하는데, 곧 아테네에는 헬라 전체를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우상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다른 이들보다 두 배나 많은 거룩한 절기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낯선 신들이 그들에게 추천되든지 그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신전과 제단을 허락하였으니,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사람만큼이나 많은 신이 있어—facilius possis deum quam hominem invenire(사람보다 신을 발견하기가 더 쉬웠다)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성은 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된 후에도 우상 숭배에 고질적으로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였으며, 기독교 황제들의 모든 경건한 칙령으로도 그것을 뿌리 뽑을 수 없었다. 마침내 고트족의 침입으로 그 성이 특히 심하게 황폐해져, 이제는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인간의 학문이 가장 융성했던 그곳에서 우상 숭배가 가장 만연하였고, 또 가장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러운 우상 숭배가 만연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사도가 한 말, 곧 그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었고(롬 1:22), 종교 문제에 있어서 다른 누구보다도 그 생각이 허망하여졌다는 말을 확증한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니(고전 1:21). 그들은 다신론과 우상 숭배를 반박할 만한 추론을 할 수도 있었으련만, 보아하니 이성을 가장 자처하던 자들이 우상에게 가장 종노릇하는 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종교조차 재확립되기 위해서는 신적 계시가 있어야 하고, 그 계시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야 함이 그토록 필요한 일이었다. 2. 이 광경이 바울에게 끼친 동요.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그에게 오기까지 공개적으로 나서기를 원치 않았으니, 이는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씀이 확정되게 하려 함이었다. 그러나 그동안에 그의 영이 그의 속에서 분히 일어났다. 그는 우상들에게 돌려지는 것을 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염려로, 또 그처럼 사탄에게 종노릇하며 그에게 사로잡혀 그 뜻대로 끌려가는 것을 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긍휼로 가득 찼다. 그는 이 범죄자들을 보고 슬퍼하였으며,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백성을 그토록 끝없이 우상 숭배의 길로 이끄는 이방 제사장들에 대하여, 또 더 잘 알면서도 그것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그 물결에 휩쓸려 내려간 그들의 철학자들에 대하여 거룩한 분노를 품었다.
II. 그들의 우상 숭배에 대하여 그가 증언한 바와, 그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이끌고자 한 그의 노력. 위치우스(Witsius)가 살핀 대로, 그는 자기 열심에 들떠 신전들로 쳐들어가거나, 그들의 형상들을 끌어내리거나, 그들의 제단들을 헐어 버리거나, 그들의 제사장들에게 달려들지 않았으며, 또 거리를 뛰어다니며 "너희는 다 마귀의 종이다"라고 외치지도 않았다—비록 그것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었을지라도. 도리어 그는 예의를 지키고 적절한 한계 안에 자신을 두어, 분별 있는 사람에게 합당한 그 일만을 행하였다. 1. 그는 유대인의 회당으로 갔으니, 그들은 비록 기독교의 원수였으나 우상 숭배에서는 벗어나 있었으므로, 그들 가운데 있는 선한 것에 그가 동참하였고, 거기서 주어진 기회를 타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변론하였다(행 17:17). 그는 유대인들과 강론하며 그들과 공정하게 변론하여,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어찌하여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려 하는지, 무슨 이유를 댈 수 있는지 그들에게 따져 물었다. 거기서 그는 우상의 신전들을 버렸으나 유대인의 회당에 머물러 있던 경건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 교회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려고 이 사람들과 더불어 이야기하였으니, 유대인의 회당은 그 교회로 들어가는 현관과 같은 것이었다. 2. 그는 종교 문제에 관하여 그가 마주치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다. 장터에서—en te agora, 곧 거래소 또는 상업의 장소에서, 그가 날마다 변론하였으니, 기회 닿는 대로, 그를 만나는 사람들, 또는 그가 우연히 어울리게 된 사람들, 곧 유대인의 회당에는 결코 오지 않는 이방인들과 더불어 변론하였다.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한 열심 있는 변호자들은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어떤 무리 가운데서든지 그 대의를 변론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 그리스도를 위해 좋은 말 한마디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말고, 자기와 만나는 자들에게 날마다 그분을 존귀하게 일컬어야 한다.
III. 어떤 철학자들이 바울의 교리에 관하여 한 탐문. 살펴보라.
1. 그와 마주쳐, 그와 더불어 강론에 들어가고, 그를 대적한 자들이 누구였는가. 그는 사람들이 모이는—혹은 차라리 담론하는—장소에서 그를 만나는 모든 자와 더불어 변론하였다. 대부분은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멸시하며 그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마음에 두지 않았으나, 철학자들 가운데 그를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 어떤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그 원리가 기독교와 가장 정면으로 배치되는 자들이었다. (1.) 에피쿠로스파, 곧 하나님을 자기들과 똑같은 분으로 여겨, 아무것에도 마음 쓰지 않고 선과 악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두지 않는, 게으르고 활동하지 않는 존재로 생각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거나 다스리신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또 사람이 자기가 말하거나 행하는 바에 대해 양심을 쓸 필요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으니, 이는 두려워할 형벌도 바랄 상급도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 모든 방종하고 무신론적인 관념을 겨냥하고 있다. 에피쿠로스파는 감각의 모든 쾌락에 자신을 탐닉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았으니,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먼저 부인하라고 가르치신 그것 안에서 찾은 것이다. (2.) 스토아파, 곧 자기들을 전적으로 하나님만큼 선하다고 여겨, 에피쿠로스파가 육신과 안목의 정욕에 빠진 만큼이나 자기들은 이생의 자랑에 빠진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덕 있는 사람을 어떤 점에서도 하나님 자신보다 못하지 않게 만들었고, 도리어 더 뛰어나게 만들었다. Esse aliquid quo sapiens antecedat Deum—지혜로운 자가 하나님을 앞서는 어떤 점이 있다, 세네카가 그렇게 말하였다. 기독교는 이것과 정반대인데, 이는 기독교가 우리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낮추며,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도록 자신에 대한 모든 신뢰를 버리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2. 그에 대한 그들의 서로 다른 견해.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랬던 것처럼, 그에 대하여도 그런 견해들이 있었다(행 17:18). (1.) 어떤 이들은 그를 말쟁이라 불렀고, 그가 아무런 의도 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무엇이든 지껄인다고, 정신 나간 사람들이 하듯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ho spermologos houtos—이 말 흩뿌리는 자, 곧 여기저기 다니며 한쪽에는 쓸데없는 말이나 이야기 하나를, 다른 쪽에는 또 다른 하나를, 아무런 의도나 의미도 없이 내던지는 자, 혹은 이 씨앗 줍는 자. 어떤 비평가들은 이 용어가 작은 종류의 새를 가리킨다고 말하는데, 곧 꼬챙이에 꿰어 굽기에도 새장에 두기에도 아무 쓸모없는, 들판이나 길가에 덮이지 않은 채 떨어져 있는 씨앗을 주워 먹으며 그러려고 여기저기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새—Avicula parva quæ semina in triviis dispersa colligere solet(길가에 흩어진 씨앗을 모으곤 하는 작은 새). 그들은 바울을 그처럼 보잘것없고 멸시받을 만한 짐승으로 여겼으니, 마치 그 새가 여기저기서 낟알 하나씩을 줍듯, 그가 자기 견해를 떠벌리며 이곳에서 한 푼, 저곳에서 또 한 푼 돈을 벌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를 빈둥거리는 자로 여겼고,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노래나 부르며 떠도는 가객(歌客)에 지나지 않게 그를 취급하였다. (2.) 다른 이들은 그를 이방 신들을 전하는 자라 불렀고, 그가 그 수단으로 자신을 대단한 자로 만들려는 의도로 말한다고 생각하였다. 만일 그에게 전할 이방 신들이 있었다면, 아테네보다 더 좋은 시장으로 그것들을 가져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많은 이들이 하듯 새로운 신들을 직접 내세우거나 공공연히 그러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그가 그렇게 하는 듯이 여겼으니, 이는 그가 예수와 부활을 그들에게 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 가운데 처음 온 때부터 줄곧 이 두 현(絃)을 거듭 뜯었으니,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으뜸 되는 두 교리—그리스도와 장차 올 상태—곧 우리의 길이신 그리스도와 우리의 목적지인 천국이다. 그리고 그가 이것들을 신이라 부르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그가 그것들을 신으로 삼으려는 뜻이라고 생각하였다. Ton Iesoun kai ten anastasin, "예수를 그들은 새로운 남신으로, anastasis, 곧 부활을 새로운 여신으로 여겼다." 이렇게 그들은 기독교 교리를 이방의 어법으로 옷 입힘으로써 그 유익을 잃어버렸으니, 마치 예수를 믿고 부활을 바라는 것이 새로운 신령들을 예배하는 것인 양 여긴 것이다.
3. 그들이 그에게 자유롭고 충분하며 공정하고 공개적인 청문의 기회를 주겠다고 한 제안(행 17:19,20). 그들은 그의 교리의 단편적인 조각들을 들었으므로, 그것을 더 온전히 알기를 원하였다. (1.) 그들은 그것을 이상하고 놀랍게, 그리고 여러 세기 동안 아테네에서 가르치고 신봉되어 온 철학과 매우 다르게 여겼다. "이것은 새로운 교리이니, 우리가 그 취지와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네가 어떤 이상한 것들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우리가 전에는 들어 본 적도 없고 이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로 보건대, 그들에게 있던 그 모든 학식 있는 책들 가운데서도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유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의 교리가 그들에게 그토록 완전히 새롭고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신적 영감으로 된 책은 단 하나뿐이었는데, 바로 그 책이 그들이 낯설어한 유일한 책이었으니, 만일 그들이 그 책에 마땅한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그 책은 바로 첫 페이지에서 우주의 기원에 관하여 그들 사이에 있던 그 큰 논쟁을 판가름해 주었을 것이다. (2.) 그들은 단지 그것이 새롭고 이상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더 알기를 원하였다. "이 새로운 교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아니면 그것은 (신들의 비의(秘儀)들처럼) 깊은 비밀로 간직해야 하는 것이냐? 만일 알 수 있다면, 우리가 기꺼이 알고자 하니, 청하건대 이것들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말해 다오. 그리하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겠다." 이것은 공정한 제안이었다. 그들이 그 교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합당하였고, 또 그들은 그것에 대해 얼마간 설명을 들어 보기 전에는 그것을 정죄하지 않을 만큼 공정하였다. (3.) 이 교리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게 하려고 그들이 그를 데려간 장소. 그것은 아레오바고였으니, (행 17:22)에서 *마르스 언덕(Mars' Hill)*으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다. 그것은 그 성의 공회당, 곧 시청과 같은 곳으로, 행정관들이 공무를 위해 모이고 재판소가 열리던 곳이며, 또한 대학의 강당이나 학교처럼 학식 있는 자들이 모여 자기 견해를 나누던 곳이었다. 거기 열렸던 재판소는 그 공정함으로 유명하여 각지에서 상소가 그곳으로 몰려들었으니, 만일 누가 신을 부인하면 그는 이 법정의 책망을 받게 되어 있었다. 디아고라스(Diagoras)는 신들을 멸시하는 자로 그들에게 사형당하였고, 또 그들의 승인 없이는 어떤 새로운 신도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들이 바울을 이리로 데려온 것은 그를 범죄자로서가 아니라 후보자로서 심사하려 함이었다.
4. 이 일에 즈음하여 그 성 백성에 대해 주어진 일반적 성품 묘사(행 17:21). 모든 아테네 사람, 곧 그곳 토박이들과, 견문을 넓히려고 거기에 머물던 외국인들이, 다른 일에는 시간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무슨 새로운 것을 말하거나 듣는 일에만 시간을 보냈으니, 이것이 그들이 바울의 교리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이유로 제시되는데, 그것이 선해서가 아니라 새로워서였다. 여기 이들에게 주어진 성품 묘사는 매우 한심한 것이건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그것을 베껴 닮는다. (1.) 그들은 온통 대화에만 빠져 있었다. 성 바울은 자기 제자에게 읽고 묵상하는 데 전념하라고 권면하였으나(딤전 4:13,15), 이 사람들은 지식을 얻는 그런 구식 방법들을 멸시하고 말하고 듣는 방법을 더 좋아하였다. 좋은 교제가 사람에게 큰 유익이 되고, 학문에서 좋은 기초를 닦은 자를 다듬어 준다는 것은 참되다. 그러나 오직 대화만으로 얻은 지식은 매우 겉만 번지르르하고 피상적일 것이다. (2.) 그들은 새것을 추구하였으니, 그들은 무슨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기를 좋아하였다. 그들은 철학에서 새로운 체계와 새로운 관념을, 정치에서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통치 방안을, 종교에서는 새로이 나타난 새 신들을(신 32:17), 새로운 신령들을, 새로운 양식의 형상과 제단들을(왕하 16:10) 추구하였으니, 그들은 변덕에 빠져 있었다. 그들 자신의 한 웅변가인 데모스테네스는, 그의 빌립보 연설(Philippic) 가운데 하나에서, 오래전에 이미 이것을 그들에게 책망한 바 있으니, 곧 장터에서나 어디서 만나든지 그들이 흔히 던지는 질문은 ei ti le etai neoteron—*무슨 새 소식이 있느냐?*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3.)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하며 그것에 대해 캐묻기를 좋아하였고, 자기 자신의 일은 결코 마음 쓰지 않았다. 수다 떠는 자들은 언제나 남의 일을 참견하는 자들이다(딤전 5:13). (4.) 그들은 다른 일에는 시간을 쓰지 아니하였으니, 시간을 이렇게 쓰는 자들이 자기 시간에 대해 내놓아야 할 결산은 참으로 비참한 것일 수밖에 없다. 시간은 귀중하며, 우리는 그것을 잘 관리하는 청지기가 되도록 마음 써야 하니, 이는 영원이 그것에 달려 있고, 또 그것이 빠르게 영원 속으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간의 많은 부분이 무익한 잡담 속에 허비된다. 우리 나라나 다른 나라의 공적인 일에 관하여, 또 우리 이웃과 벗들에 관하여 일어난 섭리의 새 소식을 말하거나 듣는 것은 이따금 좋은 유익이 된다. 그러나 새 소식이나 캐고 다니는 자로 나서서 우리 시간을 다른 일에는 쓰지 아니하는 것은, 매우 귀중한 것을 잃고 그 대가로 거의 값없는 것을 얻는 일이다.
²²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테네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²³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²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²⁵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²⁶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²⁷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²⁸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²⁹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³⁰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³¹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아테네에서 행한 사도 바울의 설교를 보게 된다. 우리는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혹은 구약을 알고 존중하며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던 이방인들에게 전한 여러 설교를 살펴보았다. 그들에게 사도들이 해야 할 일이라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열어 밝히고 입증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거짓 신들을 경배하며 세상에서 참 하나님 없이 지내던 이방인들에게 전한 설교를 보게 되는데, 이들을 향한 그의 강론의 취지는 다른 이들을 향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앞의 경우에는 예언과 기적으로 청중을 구속주를 아는 지식과 그에 대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사도의 사역이었으나, 뒤의 경우에는 섭리의 일반적 사역들을 통해 그들을 창조주를 아는 지식과 그분을 향한 경배로 이끄는 것이 사도의 사역이었다. 이런 종류의 강론 하나를 우리는 앞서 사도들을 신격화하던 루스드라의 거친 우상숭배자들에게 행한 데서(행 14:15) 보았거니와, 여기 기록된 것은 더 세련되고 교양 있는 아테네의 우상숭배자들에게 행한 것으로, 참으로 감탄할 만한 강론이며, 그의 청중과 그가 그들에게 목적한 바에 모든 면에서 적합한 것이었다.
I. 그는 자신의 강론의 취지로서 이것을 제시하는데, 곧 그들을 오직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끌어 그분만을 경배의 유일하고도 합당한 대상으로 삼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기초를 놓고 모든 종교의 첫째 원리, 곧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그가 그들이 경배하던 신들을 반박하여 설교했을 때, 그것은 그들을 무신론으로 이끌려는 의도가 아니라 참된 신성을 섬기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교의 우상숭배를 폭로했던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법정에서 기소되어 정죄되었는데, 그가 그 도시가 신으로 여기던 자들을 신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뿐 아니라 새로운 신령(demon)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이 바울에 대한 고발이었다. 이제 그는 그 고발의 앞부분은 은연중에 인정하되, 자신은 어떤 새로운 신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한 분 하나님, 곧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뒷부분에 대해서는 방어한다. 자,
그는 그들에게 이 점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아야 함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거짓 신들을 경배하면서, 자기들을 만드신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Deos qui rogat ille facit—신들에게 비는 자가 곧 신들을 만드는 자다). 내가 보니 너희가 범사에 종교심이 너무 많도다. 그가 그들에게 지운 죄는 오직 하나님께만 합당한 영광을 다른 것들에게 돌리는 것, 곧 그들이 신령(demon)들, 즉 그들이 경배의 대상으로 삼은 형상들 안에 거한다고 여기던 영들을 두려워하고 경배하던 것이었다. "너희는 이웃의 어느 누구보다도 신들을 많이 만들어 내며 너희의 모든 일에 우상숭배를 뒤섞고 있으니,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시다는 사실을 들을 때가 되었도다. 너희는 범사에 종교심이 너무 많으니—deisidaimonesteroi, 너희는 종교의 외양을 띤 것이라면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이는데, 이것이 도리어 종교를 점점 더 부패시키는 것이라. 나는 그것을 개혁할 것을 너희에게 가져왔노라." 그들의 이웃들은 이 점을 두고 그들을 경건한 백성이라고 칭찬하였으나, 바울은 이 점을 두고 그들을 정죄한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그 고발을 누그러뜨리는지, 그들을 자극하기 위해 그것을 과장하지 않는지 주목할 만하다. 그는 그들 사이에서 좋은 의미로 쓰이던 단어를 사용한다. 너희는 모든 면에서 보통 이상으로 종교적이다—어떤 이들은 이렇게 읽는다. 너희는 너희 나름으로 매우 경건하다. 혹 그것이 나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해도 완화되어 있다. "너희는 말하자면(hos) 너희에게 필요한 것보다 좀 더 미신적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직접 관찰한 것 이상으로 말하지 않는다. theoro—내가 그것을 보고 관찰하노라. 그들은 바울이 새로운 신령들을 끌어들인다고 고발했으나, 그는 말하기를 "아니라, 너희에게는 이미 충분히 많은 신령이 있으니, 나는 그 수효를 더하지 않으리라"고 한다.
그는 그들 자신이 단을 세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김으로써 이 한 분 참 하나님을 그들에게 선포할 적절한 계기를 스스로 제공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아직 그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인 어떤 신이 계심을 시인하는 것을 내비치는 것이었다. 지혜를 독점한 곳으로 여겨지던 아테네에서, 참 하나님이 알지 못하는 신이셨고, 알지 못하는 유일한 신이셨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슬픈 일이다. "이제 너희는 바울을 환영해야 마땅하니, 이가 곧 그가 너희에게 알리려 오신 그 하나님이시요,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은연중에 한탄하던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스스로 부족하고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는 바로 그곳에서 복음은 우리를 붙들어 일으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1.)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쳐진 이 단에 관하여 학자들은 여러 추측을 한다. [1.] 어떤 이들은 그 의미가 알려지지 않는 것이 그의 영광인 신에게라는 뜻이며, 그 이름이 형언할 수 없고 그 본성이 탐구할 수 없는 유대인의 하나님을 가리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마도 유대인들로부터, 또 구약 성경의 기록으로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하여 들었을 것이니, 그분은 자신이 모든 신 위에 계심을 입증하셨으되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셨다(사 45:15). 이교도들은 유대인의 하나님을 Deus incertus, incertum Mosis Numen—불확실한 신, 모세의 불확실한 신이라 불렀고, 이름 없는 신이라 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온전히 탐구하여 찾아낼 수 없는 이 하나님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노라고 한다. [2.] 다른 이들은 그 의미가 우리가 알지 못함이 우리의 불행인 신에게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분을 아는 것을 그들이 자기들의 행복으로 여기리라는 것을 내비친다.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 전하기를, 아테네에 역병이 창궐했을 때 그들이 역병을 멈추려고 자기들의 모든 신에게 차례로 제사를 드린 뒤에, 양 몇 마리를 마음대로 가게 풀어놓고 그것들이 눕는 곳에 단을 쌓되 to prosekonti Theo—합당한 신에게, 곧 이 역병을 멈추는 일이 속한 그 신에게 단을 쌓으라는 권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분을 어떻게 부를지 몰랐으므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겼다고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아테네의 가장 뛰어난 역사가 몇 사람의 기록을 근거로 우리에게 전하기를, 그들에게는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의 신들에게—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근 몇몇 나라에서는 아테네에서 알지 못하는 그 신을 두고 맹세하곤 하였다고 루키아노스(Lucian)가 전한다.
(2.) 바울이 이것을 얼마나 겸손하게 언급하는지 주목하라. 자기가 정탐꾼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또 나그네의 분수에 넘게 그들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주제넘게 끼어든 자로 여겨지지 않도록, 그는 두루 다니며 그들의 위하는 것들, 곧 그들의 성물(聖物)을 보다가 그것을 관찰하였노라고 그들에게 말한다. 그것은 공공연한 것이어서 그가 보지 않을 수 없었고, 그곳의 종교에 대해 자기 견해를 밝히는 것은 충분히 합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로부터 얼마나 지혜롭고 재치 있게 기회를 잡아 참 하나님에 관한 자기 강론을 끌어들이는지 주목하라. [1.]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은 그들이 이미 경배하고 있던 분이며, 따라서 자기는 새롭거나 낯선 신들을 내세우는 자가 아니라고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분께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그분도 너희에게서 일종의 경배를 받아오셨도다." [2.] 그분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경배하던 분이셨으니, 이는 온 세계에 지식으로 유명한 그들에게 책망거리였다. "이제," 그는 말한다, "나는 그 책망을 제하러 왔으니, 이는 너희가 지금 알지 못하고 경배하는 그분을 깨달아 알고 경배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의 맹목적인 헌신이 합당한 섬김으로 바뀌어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경배하지 않게 되는 것이야말로 마땅히 받아들일 만한 일이로다."
II. 그는 한 분 살아 계신 참 하나님에 관한 자기 교리를 창조와 섭리의 사역으로 확증한다. "내가 너희에게 너희 헌신의 유일한 대상이라 선포하며 너희를 그분의 경배로 부르는 그 하나님은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니, 이것들의 보이는 증거를 통해 너희가 이 보이지 않는 존재께로 인도되어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깨닫게 될 것이라." 이방인들은 일반적으로, 특히 아테네 사람들은 그들의 헌신에 있어서 자기들의 철학자들의 인도를 받지 않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한 분 지고하신 *신적 존재(Numen)*에 관하여, 그분의 무한한 완전하심과 보편적 활동과 통치에 관하여 분명하고 탁월하게 말하였다(플라톤의 저작들과, 훨씬 후의 키케로의 저작들이 그 증거다). 도리어 그들은 자기들의 시인들과 그들의 헛된 허구의 인도를 받았다. 호메로스의 작품들이 이교 신학, 아니 차라리 신령학(demonology)의 성경이었지 플라톤의 작품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이에 무기력하게 굴복하여, 자기들의 사변에 안주하며 자기들끼리 그것을 토론하고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는 했으되, 우상숭배에 맞서 그것을 마땅히 활용했어야 할 대로 결코 활용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그들은 그것들에 대해 확신이 없었고, 그만큼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 끼친 인상이 적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은 도리어 자기 나라의 미신 속으로 빠져들어 갔으며,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겼다. Eamus ad communem errorem—우리도 그 통속적 오류를 받아들이자. 이제 바울은 여기서 먼저 아테네 사람들의 철학을 개혁하는 일에 착수하고(그 철학의 오류들을 바로잡으며), 그들에게 오직 한 분 살아 계신 참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개념을 주고자 하며, 그런 다음 이 문제를 한층 더 멀리 끌고 나아가 그들이 일찍이 시도한 적 없던 일, 곧 그들의 경배를 개혁하고 그들을 다신교와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에 이르고자 한다. 바울이 여기서 자기가 섬기며 또 그들도 섬기기를 바라는 그 하나님에 관하여 어떤 영광스러운 것들을 말하는지 주목하라.
그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시요, 전능하신 아버지시며 천지의 창조주시다. 이것은 많은 철학자들이 인정하던 바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에 속한 자들은 이를 부인하고 "세상은 영원 전부터 있었고, 모든 것은 항상 있어 왔으며, 모든 것은 지금 그러한 그대로 항상 그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한 자들은 "세상은 원자들의 우연한 모임으로 만들어졌으니, 그것들이 끊임없이 운동하다가 마침내 우연히 이 형태로 뛰어든 것이라"고 공상하였다. 이 둘 다에 맞서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무한한 능력의 작용으로, 무한한 지혜의 고안에 따라, 시간의 시초에 세상과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셨으며, 그 기원은 그들이 공상한 것처럼 영원한 물질에 돌릴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정신에 돌려야 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천지의 주재시니, 곧 위와 아래 세계의 모든 존재와 권능과 부요함, 곧 물질적이며 비물질적인 것, 보이며 보이지 않는 것의 정당한 소유주요 주인이요 주관자이시다. 이는 그가 천지를 지으셨다는 데서 따라 나온다. 만일 그가 만유를 창조하셨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가 만유를 처분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존재를 주시는 곳에서는 법을 주실 명백한 권리를 가지신다.
그는 특별한 방식으로 사람의, 곧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시다(행 17:26). 그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 그가 첫 사람을 지으셨고, 그가 각 사람을 지으시니, 각 사람의 몸을 빚으신 이요 각 사람의 영의 아버지시다. 그가 사람의 족속들을 지으셨으니, 족속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지으셨을 뿐 아니라 정치적 단위로서의 족속들로 지으셨다. 그는 그들의 창설자시요, 그들을 서로 보존하고 유익을 끼치도록 공동체로 배치하셨다. 그는 그들 모두를 한 혈통, 곧 하나의 동일한 본성으로 지으셨으니, 그가 그들의 마음을 똑같이 빚으셨다. 하나의 동일한 공동 조상에게서 났으니, 아담 안에서 그들은 모두 친족이요, 노아 안에서도 그러하다. 이는 그들로 동료 피조물이요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고 돕는 일에 매이게 하려 하심이었다. 우리는 다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지 아니하셨느냐?(말 2:10) 그가 그들을 온 땅 위에 거하게 하셨으니, 너그러운 시혜자로서 그 모든 충만함과 더불어 그것을 사람의 자녀들에게 주셨다. 그가 그들을 한 곳에 살게 하지 않으시고 온 땅에 흩어지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한 족속이 다른 족속을 경멸의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인들이 다른 모든 족속을 그렇게 보았던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온 땅 위에 있는 자들은 동일한 혈통이기 때문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자기들이 자기 땅에서 솟아났으며 *원주민(aborigines)*이요 혈통으로는 다른 어떤 족속과도 친족이 아니라고 자랑하였는데, 사도는 여기서 그들의 이 교만한 자만을 꺾어 내린다.
그는 온 피조물의 위대한 시혜자시다(행 17:25). 그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신다. 그는 첫 사람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각 사람에게 그것을 불어넣으신다. 그가 우리에게 이 영혼들을 주셨으니, 사람 속에 사람의 영을 지으셨다. 그가 우리를 존재하게 하실 때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 그의 섭리는 계속되는 창조다. 그가 우리의 영혼을 생명 가운데 붙드신다. 순간마다 우리의 호흡이 나가지만, 그가 은혜로이 다음 순간에 그것을 우리에게 다시 주신다. 우리가 호흡하는 것이 그의 공기일 뿐 아니라, 우리의 호흡이 그의 손에 있다(단 5:23). 그가 사람의 모든 자녀에게 그들의 생명과 호흡을 주신다. 가장 비천한 사람의 자녀들도 그를 힘입어 살며 그에게서 받는 것처럼, 가장 위대한 자들, 가장 지혜로운 철학자들과 가장 강대한 군주들도 그분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만물에게 주시니, 사람의 모든 자녀에게뿐 아니라 하등 피조물에게도, 모든 동물에게도, 생명의 호흡이 있는 모든 것에게 주신다(창 6:17). 그것들도 그에게서 생명과 호흡을 얻으며, 그가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곳에는 만물, 곧 생명 유지에 필요한 그 밖의 모든 것도 주신다. 땅에 그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 104:24,27).
그는 자기 뜻의 경륜을 따라 사람의 자녀들의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처분하시는 자시다(행 17:26). 그가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다. 여기서 살펴보라. (1.) 우리에 관한 하나님의 처분의 주권. 그가 모든 사건을 정하셨으니(horisas), 그 일이 확정되어 있다. 섭리의 처분은 다툴 수 없으며 논박해서는 안 되고, 변할 수 없으며 바꿀 수 없다. (2.) 그의 처분의 지혜. 그가 전에 정하신 것을 작정하셨다. 영원하신 정신의 결정은 갑작스러운 결의가 아니라 영원한 경륜의 사본이요 하나님의 작정의 등본이다. 그가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신다(욥 23:14).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무엇이든지 만세 전에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 (3.) 그의 섭리가 관여하는 것들, 곧 때와 곳.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때와 곳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정하시고 작정하신 것이다. [1.] 그가 우리에 관한 연대를 정하셨다. 때는 우리에게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그것들을 고정하셨다. 우리의 때가 그의 손에 있어,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늘이거나 줄이고, 쓰게 하거나 달게 하신다. 그가 우리가 세상에 들어오는 때와 우리가 세상에 머무는 때, 곧 우리가 태어날 때와 우리가 죽을 때를 정하시고 작정하셨으며(전 3:1,2), 그 사이에 놓인 그 짧은 모든 것—이 세상에서 우리와 관계된 모든 것의 때를 정하셨다. 그것들이 형통한 때이든 재앙의 때이든, 그것들을 정하신 이는 그분이시다. 우리 앞에 아직 놓인 때들에 관하여 우리는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2.] 그가 또한 우리의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시고 작정하셨다. 땅을 사람의 자녀들의 거처로 정하신 그가 사람의 자녀들에게 땅 위의 거처를 구별하여 정하셨으며, 소유라는 것을 제정하시고 우리가 서로 침해하지 못하도록 거기에 경계를 두셨다. 우리의 운명이 던져진 특정한 거처들, 곧 우리가 태어난 곳과 정착한 곳은 하나님이 정하시고 작정하신 것이니, 이는 우리가 처한 거처에 우리를 맞추고 주어진 것을 최선으로 활용해야 할 이유가 된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다(행 17:27). 그는 어디에나 임재하시니, 우리 오른쪽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 폐부를 지으셨고(시 139:13), 항상 우리를 살피시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신다. 우상숭배자들은 그 형상들 안에 하나님을 자기들과 함께 모셔 두려고 하나님의 형상들을 만들었는데, 사도는 여기서 그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그는 무한하신 영이시니 우리 중 누구에게서도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며, 우리가 어떤 형상으로 그분을 우리에게 실체화하거나 현존케 하려 한다고 해서 조금도 더 가까워지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서 더 멀어지신다.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가까이에 단도 형상도 전(殿)도 없을지라도, 우리가 그에게 드리는 경배를 받으시고 또 우리가 그에게 구하는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 만유의 주는 부요하신(롬 10:12) 것처럼, 또한 그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신 4:7) 계신다. 어디서든지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시는 이는 우리에게 자기가 어디서도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음을 확증하신다. 우리가 어느 나라, 어느 족속, 어느 직업에 속했든, 우리의 신분과 처지가 세상에서 어떠하든, 우리가 궁궐에 있든 오두막에 있든, 무리 가운데 있든 구석에 있든, 도시에 있든 광야에 있든, 바다 깊은 곳에 있든 바다 멀리에 있든, 이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행 17:28). 우리는 시냇물이 그 샘에, 햇살이 그 해에 의존하듯, 그의 섭리에 필연적이며 끊임없이 의존하고 있다. (1.)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산다. 곧 우리 생명의 지속은 그분께, 또 그의 섭리의 끊임없는 영향에 달려 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이시요 우리 날의 장수시다. 박탈당해 마땅한 우리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그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 때문일 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생명이 연장되는 것은 그의 능력과 선하심과 아버지다운 돌보심 때문이다. 우리를 멸하시는 데에 그의 진노의 적극적 작용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선하심의 적극적 작용을 멈추기만 하시면, 우리는 저절로 죽는다. (2.) 우리가 그를 힘입어 기동한다. 우리의 영혼이 그 나아감과 작용에서 움직이며, 우리의 생각이 수천 가지 주제를 두고 이리저리 달려가고, 우리의 정서가 그 합당한 대상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그의 섭리의 끊임없는 협력에 의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몸을 움직이는 것도 그분으로 말미암는다. 우리는 손이나 발이나 혀 하나도 그분 없이는 움직일 수 없으니, 그는 첫째 원인이신 것처럼 또한 첫째 동인(動因)이시다. (3.) 우리가 그를 힘입어 존재한다. 우리는 처음에 그에게서 존재를 받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를 힘입어 존재한다. 우리가 존재를 가지고 무(無)로 가라앉지 않은 것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가졌으되 이러한 존재를 가졌고 또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알고 누릴 수 있는 그토록 고귀한 등급의 존재였고 또 여전히 그러하며, 짐승의 비천함이나 마귀의 비참함 속으로 떨어지지 않은 것, 이 모두를 우리는 그의 끊임없는 돌보심과 선하심에 빚지고 있다.
결국 모든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생이다. 그는 우리를 낳으신 우리의 아버지시요(신 32:6,18), 우리를 자녀로 양육하여 키우셨다(사 1:2). 이러한 경우에 대적의 시인(是認)은 언제나 argumentum ad hominem—그 사람을 향한 논증으로서 유익하게 여겨지므로, 사도는 여기서 그리스 시인 중 하나인 아라토스(Aratus)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바울의 동향(同鄕)인 길리기아 태생으로, 자기 책 『현상론(Phenomena)』 첫머리에서 이교의 주피터(Jupiter), 곧 시적 어법으로 지고하신 신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분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tou gar kai genos esmen—우리가 또한 그의 소생이라. 그는 자기가 말하던 바, 곧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살고 기동한다는 취지에 맞게 다른 시인들의 말도 인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라토스의 이 말을 택하였으니, 짧은 말 가운데 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바울 자신이 학식 있는 자였다는 것뿐 아니라, 인문학적 학식이 복음 사역자에게 장식이 되며 또한 유익하다는 것, 특히 밖에 있는 자들을 설복하는 데에 그러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은 사역자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무기로 그들을 이기게 하며, 골리앗의 머리를 그 자신의 칼로 베게 해주기 때문이다. 진리의 대적들을 그 견고한 진에서 몰아내려는 자가 그들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그들을 이길 수 있겠는가? 또한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고 그 관계에 어긋나게 행하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백성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한 이교 시인조차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고 그분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며, 일찍이 어떤 자녀도 부모의 돌봄을 받은 것보다 더 그의 섭리의 돌봄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의 처분에 순복하며 그에게 이름과 찬송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또 그를 의지하여 사는 만큼 우리는 그를 위하여 살아야 하며, 우리가 그를 힘입어 기동하는 만큼 우리는 그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며, 우리가 그를 힘입어 존재하며 그에게서 우리 존재의 모든 부양과 위로를 받는 만큼,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그에게 봉헌하고 새로운 존재, 더 나은 존재, 영원한 복된 존재를 위하여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
III. 하나님에 관한 이 모든 위대한 진리로부터 그는, 옛적의 선지자들이 했던 것처럼, 그들의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추론해 낸다. 만일 이것이 그러하다면, 1. 그렇다면 하나님은 형상으로 표현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이라면, 우리가 육신을 입은 영인 것처럼, 그렇다면 분명 우리 영들의 아버지이신 분(영들은 우리의 주된 부분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바로 이 부분으로 말미암는다)은 친히 영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다(행 17:29). 만일 우리가 그렇게 여긴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잘못을 범하며 그분을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심으로 사람을 존귀하게 하셨으나,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몸의 형상대로 만든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신성은 영적이며 무한하며 비물질적이며 헤아릴 수 없으니, 그러므로 형상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주는 개념은 매우 그릇되고 부당한 것이다. 그 재료가 아무리 값진 금이나 은일지라도, 그 모양이 아무리 정교하며 아무리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잘 새겨졌을지라도, 그 모습이나 자세나 옷차림이 아무리 의미심장할지라도, 그것은 거짓을 가르치는 것이다. 2. 그렇다면 그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다(행 17:24). 그는 사람이 그를 위해 지을 수 있는 어떤 전에도 초대받지 않으시며, 어떤 전에도 갇히지 않으신다. 전이 그분을 우리에게 조금도 더 가까이 모셔 오지 못하며, 그분을 우리 가운데 조금도 더 오래 붙들어 두지 못한다. 전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함께 모이기에 편리한 것이나, 하나님은 어떤 안식이나 거처의 장소도, 또 그의 나타나심의 영광을 더하기 위한 어떤 건축물의 웅장함이나 화려함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경건하고 정직한 마음, 곧 손으로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지은 전, 이것이야말로 그가 거하시며 또 거하기를 기뻐하시는 곳이다. 왕상 8:27, 사 66:1,2를 보라. 3. 그렇다면 그는 섬김을 받으시지(therapeuetai) 아니하니,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이나 시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행 17:25). 만유를 지으시고 만유를 유지하시는 이는 우리의 어떤 섬김으로도 유익을 받으실 수 없으며 그것들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신다. 우리가 모든 것을 그에게서 받고 이끌어 낸다면, 그는 온전히 자족하신 분이며, 따라서 스스로 충족하시며 독립하신 분일 수밖에 없다. 그가 자신 안에 모든 완전하심을 가지셨고 우리는 그에게서 받은 것 외에는 선한 것을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섬김에서 무슨 필요가 있으시며 그것들로 무슨 유익을 얻으시겠는가? 철학자들은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나 우리의 섬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이 진리를 깨닫고 있었으나, 일반 이교도들은 신들이 집과 음식을 필요로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자기들의 신들에게 전을 짓고 제사를 드렸다. 욥 35:5-8, 시 50:8 등을 보라. 4.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찾아 구해야 한다(행 17:27). 이는 사람으로 주를 찾게 하려 하심이니, 곧 그를 두려워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경배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의 자녀들을 생명과 생명의 모든 위로를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의존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을 자기에게 끊임없는 의무 아래 두기 위함이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과, 우리를 다스리심과, 그의 섭리가 우리를 돌보심과,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의 후하심에 대한 분명한 표징들이 있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밤중에 노래를 주시며 땅의 짐승보다 우리를 더 가르치시며 공중의 새보다 우리를 더 지혜롭게 하시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욥 35:10,11)를 찾아 구하게 하려 하심이다. 생각건대, 하나님이 계심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고, 우리의 섬김에서 그의 존귀와 영광을 구하며 그의 은총과 사랑에서 우리의 행복을 구하도록 우리를 사로잡는 데에, 우리 자신의 본성, 특히 우리 자신의 영혼의 고귀한 능력과 기능을 깊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들을 돌아보고 이것들을 깊이 묵상한다면, 우리는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와 의무를 둘 다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신적 계시로 말미암는 발견에 비하면 이 발견은 너무도 어둡고, 또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도 미흡하므로, 다른 빛이 없던 자들은 기껏해야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1.) 그들이 이 탐색으로 하나님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매우 불확실하니, 그것은 단지 어쩌다일 뿐이다. 혹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2.) 그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무언가를 찾아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에 관한 혼란한 관념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어둠 속의 사람처럼, 혹은 자기 길에 걸리는 것을 붙들기는 하지만 그것이 자기가 찾던 그것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는 맹인처럼 그를 더듬을 따름이었다. 그들의 이 시인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가진 관념, 곧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는 관념은 매우 혼란하며 매우 막연한 것이었으니, 그들의 철학자들의 관념도 그러하였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Theion genos esti brotoios—사람은 일종의 신적 본성을 가졌다고 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루키아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Theoi thnetoi—죽을 신들이라 답하였고, 신들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athanatoi anthropoi—죽지 않는 사람들이라 답하였다. 그리고 핀다로스(Pindar)는 (『네메아 송가(Nemean Ode)』 6편에서) En andron hen theon genos—신과 사람은 친족에 가깝다고 하였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될 수 있다는 것은 참이로되, 그것은 매우 혼란한 지식이다. 이것은 단지 그를 더듬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본성의 빛으로 가질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분명한 하나님에 관한 통지를 받았음을 감사할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이제 그를 더듬는 것이 아니라, 열린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IV. 그는 나아가 그들 모두에게 자기들의 우상숭배를 회개하고 거기서 돌이키라고 부른다(행 17:30,31). 이것이 대학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의 실천적 부분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선포한 후에(행 17:23), 그는 적절하게 하나님을 향한 회개를 그들에게 촉구하며, 만일 그들이 끝까지 들을 인내가 있었더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도 그들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그들에게 다른 신들을 경배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보여준 후에, 그는 그들로 더 이상 그 어리석은 경배의 길로 나아가지 말고 그것에서 살아 계신 참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설득한다. 살펴보라.
복음이 그들 가운데 이르기 전에 이방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처사. 알지 못하던 이 시대를 하나님이 간과하셨다. (1.) 그때는 큰 무지의 시대였다. 그리스도의 시대 직전에 이방 세계에서 인문학적 학식은 그 어느 때보다 융성하였으나,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그들이 극심하게 무지하였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무지하게 그를 경배하는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무지한 자들이다. 우상숭배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 이 무지의 시대를 하나님이 간과하셨다. 이를 이렇게 이해하라. [1.] 신적 공의의 행위로서. 하나님이 이 무지의 시대를 멸시하거나 방치하셨고, 지금처럼 그들에게 복음을 보내지 않으셨다. 자기 영광이 이렇게 다른 것에게 돌려지는 것을 보는 것은 그에게 매우 노여운 일이었으니, 그가 이 시대를 미워하고 싫어하셨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받아들인다. 혹은, 차라리 [2.] 신적 인내와 오래 참으심의 행위로서. 그가 이 시대를 간과하셨다. 그가 이스라엘에게 하신 것처럼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어 이 우상숭배에서 그들을 막지 않으셨고, 이스라엘을 그렇게 하신 것처럼 그들의 우상숭배를 벌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에게 자기 섭리의 선물을 주셨다(행 14:16,17).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시 50:21). 그가 지금처럼 회개에 이르게 하는 부르심과 동기를 그들에게 주지 않으셨다. 그가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 그들이 가진 빛을 더 낫게 활용하지 않고 도리어 기꺼이 무지한 채로 있었으므로, 그가 더 큰 빛을 그들에게 보내지 않으셨다. 혹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행하였으므로 그가 그들에게 성급하거나 가혹하게 대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셨다(딤전 1:13).
하나님이 이제 그들 가운데 보내신 복음으로 이방 세계에 주신 명령.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그들의 마음과 길을 바꾸어,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고 더 지혜롭게 행하며, 우상 경배를 끊고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자기들을 매라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슬픔과 부끄러움으로 모든 죄에서 돌이키고, 기쁨과 결단으로 모든 의무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1.)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가 다만 회개의 여지가 남아 있어 우리가 그것을 허락받을 수 있다고만 우리에게 말씀하셨더라도 큰 은혜였을 것이나, 그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셔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친히 자기 권위를 개입시키시고, 우리의 특권인 것을 우리의 의무로 삼으셨다. (2.) 그것은 어디든지 모든 사람에게 주신 명령이다.—그것이 필요 없는 천사들에게가 아니라 사람들에게,—그 유익에서 제외된 마귀들에게가 아니라 사람들에게,—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다. 모든 사람이 회개를 요하는 일을 저질렀고, 회개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모든 사람이 회개하도록 초청받았고, 그 유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사도들은 이것을 어디서나 전파하도록 위임받았다. 선지자들은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 명하도록 보냄을 받았으나, 사도들은 모든 족속에게 회개와 죄 사함을 전파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3.) 이제 복음 시대에는 그것이 더 간절히 명령되니, 이는 전에보다 더 격려받기 때문이다. 이제 사함의 길이 전에보다 더 열렸고 약속이 더 충만히 확증되었으니, 그러므로 이제 그는 우리 모두가 회개하기를 기대하신다. "이제 회개하라. 이제야말로, 이제 때가 되었으니 회개하라. 너희가 너무 오래 죄 가운데 행하였도다. 이제 때 있을 때에 회개하라. 머지않아 너무 늦으리라."
이 명령을 강제하는 큰 이유, 곧 장차 올 심판에서 취한 이유.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라 명하신다. 이는 그가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고(행 17:31), 또 복음 아래에서 저 세상의 응보의 상태를 그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살펴보라. (1.)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사람의 자녀들에게 그들의 존재와 기능을 주신 이가 그들이 그것을 사용한 데 대해 그들에게 결산을 요구하시고, 그에 따라 그들에게 갚으실 것이니, 곧 몸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영혼을 섬겼는지, 아니면 영혼이 육신을 위해 채비하는 일에 몸의 종노릇을 하였는지에 따라 갚으실 것이며, 각 사람은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이다(고후 5:10). 이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니, 자기 통치의 신실한 벗들에게 상을 주시고 반역자들을 벌하실 것이다. (2.) 사람이 시간 안에서 행한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검열하고, 그들의 상태를 영원토록 최종 결정하기 위해 정하신 한 날이 있다. 그 날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 고정되어 변경될 수 없으나, 그것은 그분의 것이어서 알려질 수 없다. 그것은 판결의 날이요, 응보의 날이요, 시간의 모든 날에 최종적인 마침을 짓는 날이다. (3.) 세상은 공의로 심판받을 것이다. 보응하시는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시니, 그가 불의를 행하시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사람의 성품과 행위에 대한 그의 지식은 무류하게 참되며, 따라서 그들에 대한 그의 선고는 다툴 수 없게 의롭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상소가 없을 것처럼, 그것에 대해 이의도 없을 것이다. (4.) 하나님은 자기가 정하신 그 사람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니, 그는 모든 심판을 맡으신 주 예수 외에 다른 이일 수 없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속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다스리시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5.)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은 그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로 임명되고 정하심을 받았다는 큰 증거다. 그에게 저 영예를 베푸신 것이 그에게 이 영예를 정하셨음을 입증하였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은 그의 높아지심의 시작이었고, 그가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은 그 높아지심의 완성이 될 것이니, 시작하신 이가 끝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으니, 곧 장차 올 심판이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가 그들의 심판주가 되시리라는 것 둘 다에 대해 그들의 믿음이 세워질 충분한 근거를 주셨다. 이 일은 의심스럽게 남겨진 것이 아니라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함을 지닌 것이다. 그의 모든 원수는 이를 확신하고 그 앞에서 떨지어다. 그의 모든 벗은 이를 확신하고 그 안에서 개가를 올릴지어다. (6.) 장차 올 심판과, 그 심판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실 큰 역할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그것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마땅히 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 날에 심판주를 우리의 벗으로 만드는 유일한 길이니, 그 날은 회개하지 않은 채 살다 죽는 모든 자에게는 두려운 날이 되겠으나, 참된 회개자들은 그때에 자기들의 구속이 가까운 줄을 알고 머리를 들어 기쁨으로 우러러볼 것이다.
³²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³³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³⁴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여기에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한 결과에 대한 짧은 기록이 나온다.
I. 유익을 얻은 자는 적었다. 복음이 아덴에서만큼 결실을 거두지 못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 철학자들의 교만이, 예루살렘 바리새인들의 교만이 그러했듯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편견을 품게 하였기 때문이다. 1.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그의 설교를 비웃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기 시작할 때까지(행 17:32)는 그의 말을 참고 들었으나, 그때에 이르자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에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곧 그들은 조롱하였다. 그가 이전에 말한 내용은 그들이 자기들의 학파에서 때때로 들어 온 것과 다소 비슷하였고, 부활이란 곧 내세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들도 어느 정도 그에 관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말한다면,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일지라도, 그들에게는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어서, 그것을 듣는 것조차 견디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철학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A privatione ad habitum non datur regressus—한 번 잃어버린 생명은 회복될 수 없다(결여에서 소유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웅들을 죽은 후에 신격화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은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이 교리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었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성도들의 기쁨이 되는 이 위대한 교리가 그들에게는 농담거리였다. 그것을 그들에게 언급하기만 하여도 그들은 조롱하며 그것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중요한 거룩한 진리가 불경한 재담가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하여도 우리는 이를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니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갖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이르되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였다. 그들은 지금 당장은 바울의 말에 응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으려 하였으나, 이 일 곧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였다. 그들은 명백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간과한 채, 논란이 될 만하고 토론의 여지가 있는 것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그 적용과 실천을 회피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깊이를 넘어 논쟁 속으로 헤매 들어감으로써, 더 정확히 말하면 다소 어려움이 있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기독교의 실천적 교리가 주는 유익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계시된 만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결심하고 작정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교훈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요 7:17). 말씀이 지금 주는 책망에 굴복하려 하지 않은 자들은, 벨릭스가 그러하였듯이, 그것을 다른 기회로 미룸으로써 거기서 벗어나려 하였다. 그들은 언젠가 다시 그것을 듣겠다고 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마귀는 그들에게서 현재의 시간을 속여 빼앗음으로써 그들의 모든 시간을 속여 빼앗는다. 3. 그리하여 바울은 그들이 그것을 생각해 보도록 당분간 그들을 떠났다(행 17:33). 곧 그는 그들 가운데서 떠났으니, 이때에 그들과 더불어 어떤 선한 일을 이룰 가망이 거의 없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말을 다시 듣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원할 때 언제든지 만나 주겠다고 약속하였을 것이다.
II. 그럼에도 마음에 감동을 받은 자들이 더러 있었다(행 17:34). 어떤 이들은 그러지 않으려 했으나 다른 이들은 그리하였다. 1. 그를 가까이하여 믿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가 그들 가운데서 떠날 때에 그들은 그와 그렇게 헤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들은 그가 전한 교리에 굳게 매달리려는 결심으로 그를 따랐으니, 그들은 그 교리를 믿었던 것이다. 2. 두 사람이 특별히 그 이름이 거명되었다. 한 사람은 저명한 인물인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였으니, 그는 아레오바고 곧 마르스 언덕(Mars' Hill)에서 회의를 열던 그 최고 법정 또는 대평의회의 한 사람으로서, 재판관이요 원로원 의원이며, 바울이 소환되어 그 앞에 서야 했던 자들 중 하나였다. 곧 그의 재판관이 그의 회심자가 된 것이다. 고대 저술가들이 이 디오누시오에 관하여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아덴에서 자라났고 애굽에서 천문학을 공부하였는데, 그곳에서 우리 구주께서 수난당하실 때에 있었던 기적적인 일식을 주목하였으며, 아덴으로 돌아와 원로원 의원이 되어 바울과 논쟁하였고, 바울에 의해 그의 오류와 우상 숭배에서 회심하였으며, 바울에게서 철저히 가르침을 받아 아덴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유세비우스, 5권 4장, 4권 22장(Eusebius, lib. 5, cap. 4; lib. 4, cap. 22)*에 나온다. 다마리라 하는 여자는, 어떤 이들이 생각하기로는 디오누시오의 아내라고 하나, 차라리 다른 어떤 신분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비록 아덴에서는 다른 곳에서만큼 큰 추수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이 몇 사람이 거기서 마음에 감동을 받았으니, 바울은 자기가 헛되이 수고하였다고 말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여행과,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수고와 당한 고난에 관한 한층 더 진전된 기록을 보게 된다. 그는 한 방에만 빛을 비추는 책상 위의 촛불 같지 않았고, 도리어 그 궤도를 돌며 많은 곳에 빛을 비추는 태양과 같았다. 그는 큰 나라인 마게도냐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곧 행 16:9이다. 그는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그곳이 그가 처음 도착한 도시였으므로 거기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를 다음과 같이 만나게 된다. I. 마게도냐의 또 다른 도시인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가 핍박을 받음, 곧 행 17:1-9. II. 베뢰아에서 전도함, 거기서 그는 격려가 되는 청중을 만났으나 거기서도 핍박으로 말미암아 쫓겨남, 곧 행 17:10-15. III. 그리스의 이름난 학문의 도시인 아덴에서 변론함(행 17:16-21), 그리고 다신교와 우상 숭배에 빠진 자들을 깨우치고 그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가 자연 종교에 관하여 설명한 내용(행 17:22-31), 아울러 이 설교의 결과(행 17:3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