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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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²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바울은 행 21:40에서, 그토록 요란한 소란이 일어난 뒤에 그처럼 깊은 침묵을 명령함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 여기서 주목하라.
I. 그가 말하기 위해 자신을 가다듬는 그 놀라운 침착함과 정신의 평정에 관하여. 이 가련한 사람만큼 더 소란스러운 방식으로, 또 더 큰 분노와 광기로 공격을 당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말한 바에서, 1.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도리어 그의 마음은 차분하고 평온하다. 이로써 그는 자기 자신의 말, 곧 이 모든 일이 나를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다(행 20:24 참조)는 말과, 다윗의 말(시 3:6),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라는 말을 그대로 실현한다. 2. 격정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에 대한 모든 비방이 하찮고 부당한 것이었음에도, 또 바로 그가 성전에 대한 자신의 존경을 나타내려고 계획하고 도모하던 바로 그때에 성전을 더럽혔다는 혐의를 받는 것이 살아 있는 누구에게라도 분통 터지는 일이었음에도, 그는 어떠한 노여운 표현도 터뜨리지 않고 도리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사 53:7 참조) 이끌려 간다.
II. 그가 자기를 그토록 학대한 자들에게조차 얼마나 공손한 호칭을 부여하며, 또 얼마나 겸손히 그들의 경청을 간청하는가에 관하여. "부형들아, 행 22:1. 오 사람들아, 내가 너희에게 호소하노라. 곧 이성에 귀 기울이고 그것에 다스림 받아야 할 사람들이여, 우리가 인간다움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여. 너희, 평민의 형제들이여, 너희, 제사장들의 아버지들이여." 이렇게 그는 자신이 그들 중 하나이며, 유대 민족과의 관계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민족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지니고 있음을 그들에게 알린다. 주목하라. 우리가 그 누구에게도 아첨하는 호칭을 부여해서는 안 되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마땅히 합당한 존경의 호칭을 부여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선을 베풀고자 하는 자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비록 그가 그들의 손에서 구출되어 천부장의 보호를 받게 되었음에도, 그는 "이제 들으라, 너희 반역자들아"라며 그들에게 거칠게 대들지 않고, 도리어 "부형들아"라고 그들을 정중히 부른다. 그리고 주목하라. 그는 그들에 대한 고소를 제기하지 않으며, 맞고소하지도 않는다. 곧 "내가 너희에 대해 할 말이 있으니 이제 들으라"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할 말이 있으니 이제 들으라"이다. 나의 변명을 들으라. 이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요청이니, 고발당한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답변할 권리가 있으며, 그 답변이 인내로써 또 공정하게 경청되지 않는다면 그는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다.
III. 그가 말한 언어에 관하여. 이는 그가 말한 바를 청중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하였다.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곧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로 말한 것인데, 이는 이 당시에 순수한 구약의 히브리어가 아니라 시리아어, 곧 히브리어의 한 방언, 더 정확히는 마치 이탈리아어가 라틴어의 변형이듯 히브리어의 변형이었다. 그러나, 1. 이것은 그의 동족 유대인들에 대한 변함없는 존경을 보여 주었다. 그가 이방인들과 그토록 많이 교제하였음에도 그는 여전히 유대인들의 언어를 간직하고 있었고 그것을 능숙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가 유대인임이 드러나니, 그의 말이 그를 표출하기(마 26:73 참조) 때문이다. 2. 그가 말한 바가 더 널리 이해되었으니, 이는 그것이 모든 사람이 쓰는 언어였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 언어로 말한 것은 참으로 백성에게 호소한 것이어서, 이로써 그는 그들의 애정 속으로 다소간 파고들 만한 무언가를 지닐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하였다. 사람들이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자기에게 말해지는 것에 어찌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겠는가? 천부장은 그가 헬라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놀랐고(행 21:37), 유대인들은 그가 히브리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놀랐으며, 따라서 양쪽 다 그를 더 좋게 여겼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마땅히 했어야 하듯 물어보아, 성령이 그에게 말하게 하신(행 2:4 참조) 그토록 다양한 방언을 알게 되었더라면 그들은 얼마나 더 놀랐겠는가! 고전 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그러나 사실인즉, 많은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이 단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
³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여러분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⁴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⁵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⁶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⁷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⁸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⁹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¹⁰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행하도록 정하여진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¹¹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¹²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¹³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¹⁴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¹⁵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¹⁶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¹⁷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¹⁸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¹⁹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²⁰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를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²¹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는데, 이는 천부장에게 자기가 그가 생각하던 그 애굽인이 아님을 납득시킬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자기가 그들이 생각하던 그들의 교회와 민족과 율법과 성전의 원수가 아님을 보이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자기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 특히 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전파하는 일이 신적 위임에 따른 것임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는 여기서 그들에게 다음을 알려 준다.
I. 그의 출신과 교육이 어떠하였는가. 1. 그는 그들과 같은 동족, 곧 이스라엘 족속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으며(빌 3:5 참조), 어떤 미천한 가문 출신도 아니었고 다른 민족에서 변절한 자도 아니었다. "아닙니다, 나는 참으로 유대인입니다. aner Ioudaios(아네르 유다이오스)—유대인 남자입니다. 나는 사람이니 짐승처럼 취급받아서는 안 됩니다. 야만인이 아니라 유대인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민족의 진실한 친구입니다. 나도 그 일원이니 내가 만일 여러분의 율법과 성전의 영광을 부당하게 깎아내린다면 내 자신의 둥지를 더럽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2. 그는 명망 있고 평판 좋은 곳, 곧 길리기아의 도시 다소에서 났으며, 출생으로 그 도시의 자유민이었다. 그는 흩어진 유대인들 가운데 더러 그러했을 법한 종살이 신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신사로 태어났으며, 아마도 그 유서 깊고 영예로운 도시에서 자기 자유민 증서를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 자랑할 만한 큰일은 아니었으나, 그를 무례하게 짓밟던 자들, 마치 그를 어리석은 자의 자식들, 아니 천한 자들의 자식들과 같은 부류로 여기던 자들(욥 30:8)에게는 이때에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3. 그는 학식 있고 자유로운 교육을 받았다. 그는 유대인일 뿐 아니라 신사였으며, 또한 학자였다. 그는 유대 학문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자랐는데, 그들 모두 가말리엘이 유대 율법의 저명한 박사임을 알고 있었으며, 바울 자신도 그 율법의 교사가 되도록 정해진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율법에 무지할 수 없었으며, 율법을 알지 못해서 경시한다고 여겨질 수도 없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아주 어렸을 때 그를 바리새인으로 만들고자 이 도시에 데려왔으며, 어떤 이들은 그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자랐다는 것이 그가 단지 그의 제자였을 뿐 아니라, 다른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한결같이 그의 강의에 출석하고, 그가 말하는 모든 것에 그를 주목하고 순종하였음을 암시한다고 본다. 마치 예수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듣던 마리아처럼 말이다(눅 10:39 참조). 4. 그는 젊은 시절에 유대교를 매우 열렬하고 두드러지게 신봉하는 자였다. 그의 학업과 학식은 모두 그 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그는 젊어서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에 대하여 어떤 반감을 품도록 길러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 가운데 그보다 더 그것을 크고 온전히 존중하거나, 그것을 스스로 더 엄격히 준행하거나,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데 더 열렬한 젊은이가 없을 정도였다. (1.) 그는 그들의 종교를 지적으로 신봉하는 자였으며,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자기 일에 전념하였고, 거기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따라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율법에서 떠난 것은 율법에 대한 어떤 혼란되거나 잘못된 관념 때문이 아니었으니, 그는 율법을 정밀하게, 곧 kata akribeian(카타 아크리베이안)—가장 정확하고 엄밀한 방법에 따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주의적 관용주의자들의 원리로 양육된 것이 아니었고, 사두개인적인 면도 전혀 없었으며, 도리어 율법을 가장 열심히 연구하고 가장 엄밀히 지키는 분파에 속하여, 율법을 본래보다 더 엄격하게 하려고 거기에 장로들의 전통, 곧 조상들의 율법을 더하였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졌고 그들이 자녀에게 전하여 그렇게 우리에게까지 전수된 율법이었다. 바울은 그들 누구 못지않게 고대성과 전통과 교회의 권위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유대인 중에 바울보다 자기 종교를 더 잘 이해하거나 그것을 더 잘 설명하거나 그 이유를 더 잘 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2.) 그는 그들의 종교를 능동적으로 신봉하는 자였으며, 뜨거운 마음을 가졌다. 나는 오늘 여러분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입니다. 종교의 이론에 매우 능통한 많은 자들이 그 실천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 하지만, 바울은 랍비인 동시에 열심당원이었다. 그는 율법이 금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열심을 다해 반대하였고, 율법이 명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열심을 다해 행하였으니,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었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일을 섬기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청중에 대하여 솔직하고 너그러운 견해를 표하며 그들을 칭찬하기를, 그들이 오늘 다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다고 한다. 그는 그들에게 증언하기를(롬 10:2),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를 미워하여 내쫓으면서 그들은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시리라고 말하였으나(사 66:5), 비록 이것이 결코 그들의 분노를 정당화하지는 못하나,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던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변호할 수 있게 하였다. 바울이 자기가 모세의 율법 안에서 하나님께 그들이 오늘 그러하듯 열심이었다고 인정할 때, 그는 그들도 그가 오늘 그러하듯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열심을 낼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을 내비친 것이다.
II. 그가 초기에 기독교를 얼마나 맹렬하고 격렬하게 박해하던 자였는가(행 22:4,5). 그가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그가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하였을 때 그에게 일어난 변화가 순전히 신적 능력의 결과였음을 더욱 분명하고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어떤 이전의 호의나 호감을 품기는커녕, 그에게 그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기독교에 대하여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반감을 품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격노로 극도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현재 자기가 겪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의롭다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를 박해하던 자들이 아무리 불의하였을지라도,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셨으니, 그도 한때 박해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의도는, 이 사람들을 회개로 초청하고 격려하기 위함일 것이다. 자기 자신도 비방자요 박해자였으나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다(딤전 1:13 참조). 박해자였을 때의 바울의 자화상을 살펴보자. 1. 그는 죽음에 이르는 적대감으로 기독교를 미워하였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곧 "이 도를 따라 행하는 자들을 가능하다면 죽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뜻이다. 그는 그들을 향하여 위협과 살기를 등등히 내뿜었다(행 9:1). 그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 그도 찬성하였다(행 26:10). 아니, 그는 이 도를 따라 행하는 자들뿐 아니라 그 도 자체, 곧 하나의 이단, 하나의 분파로 낙인찍힌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그는 이것을 죽음에 이르도록 박해하여, 이 종교의 멸망을 목표로 삼았다. 그가 그것을 죽기까지 박해하였다는 것은, 어떤 이들이 이해하기로는, 그 자신이 기독교에 반대하다가 기꺼이 죽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만족스럽게 자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으며, 조상들의 율법과 전통을 변호하다가 그렇게 하는 것을 잘한 일로 여겼을 것이다. 2. 그는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김으로써 사람들을 이 도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것에서 나오도록 두렵게 하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였다. 그는 감옥을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채웠다. 이제 자기 자신이 결박을 당한 지금,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옥에 끌고 갔다는, 자기에 대한 이 고발의 한 부분에 특별히 강조점을 둔다. 또한 그는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 곧 특별히 부드러움과 동정으로 대하여야 마땅한 연약한 성을 가둔 것에 대하여 특별한 후회로 돌아본다. 3. 그는 이 새 분파를 진압하는 일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의 회, 곧 대산헤드린의 대리인으로 고용되었다. 그가 그것에 대한 자기 열심으로 이미 그토록 두드러진 자였기 때문이다(행 22:5). 대제사장은 그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어떤 일에든 고용될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증언할 수 있었다. 다메섹의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들었을 때, 다른 이들이 그같이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그들을 극도로 엄히 다루기로 결의하였고, 그 일에 고용하기에 바울보다 더 적합한 사람, 또 그 일을 끝까지 해낼 가능성이 더 큰 사람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보내며, 다메섹의 유대인들에게 보내는 공문을 그의 손에 들려 보냈는데, 여기서 그들을 형제들이라 부른 것은, 그들이 모두 한 조상에게서 났고 또한 종교에 있어서도 한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 공문은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을 잡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오는 일에서 바울을 도우라고 명하는 것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신앙과 예배에서 탈퇴한 자들로 처벌받게 하기 위함이었고, 그리하여 철회하도록 강요받거나,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로서 두려움을 주기 위해 죽임을 당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였으며, 만일 그가 한동안 계속 그리하였다면 교회를 멸하고 뿌리 뽑을 만한 형세였다. 바울은 말한다. "나는 처음에 그런 자였으니, 바로 지금의 여러분과 같았습니다. 나는 박해자의 마음을 알기에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곧 나로 하여금 알게 하셨듯이 여러분도 회심한 자의 마음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능히 하나님을 막겠습니까?"(행 11:17 참조)
III. 그가 어떤 방식으로 회심하여 지금의 그가 되었는가. 그것은 어떤 자연적이거나 외부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새것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종교를 바꾼 것이 아니었으니, 그때에도 그는 늘 그래왔듯이 고대성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그의 출세가 좌절되어 생긴 불만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으니, 그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유대 교회에서 출세할 길에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은 탐욕이나 야망에서, 혹은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세상에서 자기 처지가 나아지리라는 어떤 희망에서 비롯된 것일 수 없었으니, 그것은 도리어 온갖 종류의 수치와 고난에 자기를 내어 던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사도들이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어떤 교제를 가진 적도 없었으니, 그들의 교묘함과 궤변으로 그가 이런 변화에 꾀임을 당하였다고 여겨질 수도 없었다. 아니, 그것은 주께서 행하신 일이었고, 그것이 행해진 정황은 초자연적 능력이 있음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그 변화에 대하여 그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그가 거기서 압도되어 따른 그 신적 능력을 비난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그를 정죄할 수 없다. 그는 여기서 자기 회심의 이야기를 우리가 앞서 본 대로(행 9:1-19) 매우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이는 그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행위였음을 보이려는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로잡으시기 바로 직전까지도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전적으로 골몰해 있었다. 그는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갔으며(행 22:6), 자기가 보냄을 받은 그 잔혹한 계획을 실행하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가련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일말의 동정 어린 마음의 누그러짐도 의식하지 못한 채, 여전히 그들을 자기 자신에게 이단자요 분파주의자요 교회와 국가 모두에 위험한 원수로 표상하고 있었다. 2. 처음에 그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하늘로부터 온 빛, 곧 홀연히 그를 둘러 비춘 큰 빛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빛이시며 그의 천사들이 빛의 천사들임을 알았고, 정오에 비치어 따라서 해의 빛을 능가하는 이러한 빛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분명함을 알았다. 만일 그것이 어떤 밀실 안으로 그에게 비치었다면 거기에는 속임이 있었을 수도 있었으나, 그것은 환한 정오에 트인 길 위에서 그를 비추었고, 너무도 강하여 그를 땅에 엎드러지게 하였으며(행 22:7), 또한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자도 엎드러지게 하였다(행 26:14). 그들은 분명 주께서 이 빛 가운데 계심을 부인할 수 없었다. 3. 그에게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스러운 생각을 일으킨 것은 하늘로부터 온 음성이었으니, 그는 전에는 그분에 대하여 미워하고 악의에 찬 생각밖에는 가진 것이 없었다. 그 음성은 그와 함께 길을 가던 자들과 그를 구별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가 *주님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는 응답이 있었다(행 22:8). 이로써 그들이 지금 박해하고 있는 이 나사렛 예수가 하늘로부터 말씀하시는 분임이 드러났으니, 그들은 그같이 말씀하시는 이를 거스르는 것이 위험함을 알고 있었다(히 12:25). 4. "어찌하여 이 빛과 음성이 그에게는 이런 변화를 일으키고 그와 함께 길을 가던 자들에게는 일으키지 못하였는가?"라는 반론이 제기될까 하여(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도 선한 영향을 미쳐 그들도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는 그의 동행자들이 빛은 분명히 보고서 하늘로부터의 불에 사를까 두려워하였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들 자신의 양심이 이제 그들에게 자기들이 가던 길이 선하지 못함을 일러 주었으니, 마치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던 발람의 양심과 같았고, 그래서 그들은 불타는 번쩍이는 칼을 가진 천사를 만나리라 예상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 빛이 그들을 두렵게 하였으나, 그들은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은 듣지 못하였으니, 곧 그 말씀을 또렷이 듣지 못한 것이다. 이제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므로(롬 10:17), 그 변화는 그 말씀을 듣고 또 그것이 자기를 향한 것임을 들은 자에게 곧바로 이루어졌으나, 빛만 본 자들에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는 그들에게도 그 변화가 이루어졌을 수 있다. 5. 그는 그들에게 자기가 이렇게 깜짝 놀랐을 때 자기를 전적으로 신적 인도에 맡겼음을 확언한다. 그는 이에 즉시 "좋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라고 외친 것이 아니라,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나를 그릇된 길에서 멈춰 세우신 그 하늘로부터의 동일한 음성이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소서(행 22:10). 주님 내가 무엇을 할지 일러 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행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즉시 그는 다메섹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거기서 지금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이로부터 더 들으리라 하였다. "더 이상 하늘로부터 말할 필요가 없으니, 거기서 네게 일러질 것이다. 너와 같은 한 사람에 의하여, 지금 네게 말하는 이의 이름으로, 네가 행하도록 정하여진 모든 것이 일러질 것이다." 환상과 음성과 천사의 나타남으로 이루어지는 신적 계시의 비상한 방식들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오직 성경과 항존하는 사역(常存職分)이라는 통상적 방법을 도입하고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것들이 확립되었을 때는 일반적으로 폐하여졌다. 천사는 고넬료에게 직접 설교하지 않고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였으며(행 10장),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 음성은 바울에게 무엇을 할지 일러 주지 않고 다메섹으로 가라 하며 거기서 일러지리라고 한다. 6. 그를 사로잡은 그 빛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그것이 자기 시력에 즉시 미친 영향을 그들에게 말한다(행 22:11).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일시적으로 눈멀게 하였다. Nimium sensibile lædit sensum(니미움 센시빌레 레디트 센숨)—지나치게 강한 감각 대상은 감각 기관을 손상시킨다. 그 광채가 그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정죄받은 죄인들은 소돔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이 그러하였듯이, 어둠의 권세로 눈이 머는데, 그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경우처럼 지속되는 멂이다(롬 11장 참조). 그러나 깨달은 죄인들은 여기서 바울이 그러하였듯이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눈이 머니, 그들은 일시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지만, 그것은 그들이 빛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마치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른 것이 그의 고침을 위해 정해진 방법이었던 것과 같다(요 9:6 참조). 바울과 함께 있던 자들은 바울이 그러하였듯이 빛이 그들의 얼굴에 그토록 곧바로 쏘여 들지 않았기에, 그가 그러하였듯이 눈이 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결말을 생각할 때, 누가 그들의 처지보다 도리어 그의 처지를 택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자기 시력을 그대로 가진 채 바울의 손을 이끌어 성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으므로 자기 영적 시력을 자랑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하였다(요 9:40). 아니, 그들은 자기 자신이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라고 확신하였다(롬 2:19). 이제 바울은 이렇게 육신의 눈이 멀게 됨으로써 자기 영적 멂과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 곧 자기가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 살았다고 여긴 것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롬 7:9).
IV. 그가 자기가 행한 변화에서 어떻게 확증되었으며, 또 다메섹에 살던 아나니아로 말미암아 자기가 무엇을 할지에 대하여 어떻게 더 지시받았는가.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라. 1. 아나니아에 대하여 여기 주어진 성품. 그는 유대 민족이나 종교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편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이었다. 출생으로 유대인은 아니었을지라도, 유대교로 개종한 자였으므로 경건한 사람이라 불리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신앙에까지 이른 자였다. 또한 그가 처신을 잘하였으므로 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들었다. 이는 바울이 우호적인 교제를 나눈 첫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그가 율법이나 이 거룩한 곳에 해로운, 그들이 그가 신봉한다고 의심하던 그런 관념들을 바울에게 주입했을 법하지는 않았다.
2. 그가 바울의 눈에 즉시 행한 고침. 이 기적은 바울에게 보내심을 받은 아나니아의 사명을 확증하고, 그가 후에 그에게 말할 모든 것을 인준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에게 와서(행 22:13),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 곧 찢으셨다가 친히 싸매시며, 치셨다가 친히 싸매시며, 시력을 빼앗으셨다가 더하여 회복시키실 바로 그 동일한 분에게서 — 그에게 왔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그 곁에 서서 말하기를,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였다. 이 말씀과 함께 능력이 임하여 즉시 그 시각에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고, 그를 통해 보내질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그를 쳐다보았다.
3. 아나니아가 그에게, 주 예수께서 다른 누구보다도 그에게 정하신 은혜, 곧 특별한 은혜에 대하여 선포한 내용.
(1.) 현재 그분께서 그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일에 있어서(행 22:14).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셨다. 이 능력 있는 부르심은 특별한 택하심의 결과이다. 그가 하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 부른 것은, 아나니아 자신이 출생으로 유대인이며, 조상들의 율법을 지키고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에 의지하여 산 자임을 암시한다. 또한 그가 하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으로 말할 때 형제 사울아라고 부른 이유를 제시한다. 이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셨으니, 이는 너로 하여금 — [1.] 그의 뜻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곧 네가 행하여야 할 그분의 명령의 뜻과, 너에 관하여 이루어질 그분의 섭리의 뜻이다. 그가 너를 택하신 것은 너로 하여금 그것을 더욱 특별한 방식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 곧바로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알게 하려 하심이다(갈 1:1,2 참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그의 뜻을 알고 그것을 행하도록 택하신 것이다. [2.]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시며, 그리하여 곧바로 그분 자신에게서 그의 뜻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이것이 바울이 다른 이들보다 특별히 택함받은 바였으니,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서 그분을 보았다는, 그를 구별짓는 은혜였다. 스데반은 그분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바울은 그분이 자기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이 영예는 바울 외에 아무도 누리지 못하였다. 스데반은 그분을 보았으나, 바울처럼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바울은 말하기를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고 한다(고전 15:8).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 의인이라 불리시니, 이는 그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요(요일 2:1 참조),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살펴보라,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알도록 택하신 자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며, 그를 보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 곧 우리를 향한 자기의 선한 뜻을 그로 말미암아 알리셨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 17:5).
(2.) 후에 그를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그분 자신을 나타내실 일에 있어서(행 22:15). "네가 그의 증인이 되리라. 단지 기둥이 그러할 수 있듯이 그의 은혜의 기념물이 될 뿐 아니라, viva voce(비바 보케)—살아 있는 목소리로, 곧 입의 말로 증인이 되리라. 네가 그 능력을 체험하였고, 그 형틀에 부어진 바 된(롬 6:17 참조) 그의 복음을 전파하리라. 네가 모든 사람 앞에서 그의 증인이 되리라. 곧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 앞에서도, 네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곧바로 지금 이 처음부터 증인이 되리라." 그리고 바울이 여기와 행 26:1-32에서 자기 변명 가운데 자기 회심의 방식을 이토록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가 다른 이들의 회심을 위한 설교에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으리라 생각할 만한 근거를 갖는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에도 어떤 일을 행하시리라는 소망을 품도록 격려하였다.
4. 그가 그에게 세례로써 주 예수께 자기를 연합시키도록 권면하고 격려한 충고(행 22:16). 일어나 세례를 받으라. 그는 자기 할례 때에 하나님께 드려진 바 되었으나, 이제는 세례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으니, 곧 기독교와 그 특권들을 받아들이되 그 명령들에 복종함으로써여야 했다. 이것은 이제 그의 회심 즉시 행해져야 했고, 그리하여 그의 할례에 더하여졌다. 그러나 믿는 자들의 후손에게는 세례가 할례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들어선다. 세례는 할례가 아브라함과 그의 믿는 후손에게 그러하였듯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인침이기 때문이다(롬 4:11). (1.) 세례로 우리에게 인쳐지는 큰 복음의 특권은 죄 사함이다. 세례를 받아 너의 죄를 씻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네 죄의 용서의 위로를 받고, 이를 위하여 그의 의를 붙잡으며, 네 부패를 죽이기 위하여 죄를 이기는 능력을 받으라"는 뜻이다. 우리가 씻음을 받는 것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또한 거룩하여지는 것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고전 6:11). 세례를 받되 그 표징에 머무르지 말고, 그것이 표시하는 실체, 곧 죄의 더러움을 제거함을 확실히 하라. (2.) 우리가 우리의 세례로 행하도록 매인 큰 복음의 의무는 주의 이름, 곧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곧 그를 우리의 주요 우리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에 합당하게 그에게 나아가며, 그에게 영예를 돌리고, 우리의 모든 간구를 그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은 그리스도인을 일컫는 표현이다(고전 1:2).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의 죄를 씻어야 한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 그와 그의 의를 의지하여 우리 죄의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기도에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부르지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요 그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라 불러야 하며, 모든 기도에서 우리의 눈은 그리스도를 향하여야 한다. (3.) 우리는 이것을 속히 행하여야 한다. 왜 주저하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일은 미루어서는 안 될 긴요한 일이다. 그 일은 너무도 분명하여 숙고할 필요가 없으며, 그 위험은 너무도 크기에 지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행하여야 할 일, 행하지 않으면 우리가 망할 일을 어찌하여 지금 행하지 않겠는가?
V. 그가 어떻게 가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위임받았는가. 이것이 바로 그들이 그토록 그에게 분노한 큰 이유였으므로, 그가 특별히 이 일에 대하여 신적 위임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으며, 여기서 그는 그것을 제시한다. 그는 이 위임을 자기 회심 직후에 받은 것이 아니었으니, 이 일은 예루살렘에서 있었고, 그는 삼 년 후, 혹은 그 이상이 지나서야 그곳에 갔기 때문이다(갈 1:18). 또 여기서 말하는 이 환상을 그가 그때 받았는지 그 후에 받았는지는 우리가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그가 이방인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대하여 그들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는 다음을 말한다. 1. 그가 이 일을 행하라는 명을 받은 것은 그가 기도하던 중, 곧 하나님께 자기 일을 정하여 주시고 자기가 나아갈 길을 보여 주시기를 간구하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자들에게 어느 정도 무게를 가질 정황인데) 그가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이었으니, 그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어질 곳이었다(사 56:7 참조). 곧 모든 백성이 그 안에서 기도할 뿐 아니라, 모든 백성을 위하여 기도할 집이었다. 이제 바울이 성전에서 기도한 것은, 그들의 악의에 찬 추측과는 반대로, 비록 그가 그들처럼 성전을 우상으로 삼지는 않았으나, 그가 성전을 경외하였다는 증거였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거기서 그에게 이 위임을 주신 것은, 그를 이방인에게 보내는 일이 성전에 손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증거였으니, 다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불신앙으로 그렇게 만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제 바울에게는 후에 이 위임을 수행하는 가운데, 자기가 그것을 기도하던 중에 받았음을 돌아보는 것이 큰 만족이 되었을 것이다. 2. 그는 그것을 환상 가운데 받았다. 그는 황홀한 중에(행 22:17) 빠졌으니, 그의 외부 감각들이 그 동안 닫히고, 그는 마치 셋째 하늘로 이끌려 올라갔을 때처럼 무아경에 있어, 그때에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의식하지 못하였다(고후 12:2 참조). 이 황홀경 가운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는데, 회심 때처럼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에 나타내심을 받았다(행 22:18). 그가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입에서 율법을 받을 때 우리의 눈은 그를 향하여야 하며, 우리는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뿐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아야 한다. 3.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이방인에게로 가라는 위임을 주시기 전에, 그에게 예루살렘에서 어떤 선한 일을 행할 생각을 해 보아야 소용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이방인에게 보내심을 받았다고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탓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가 다른 사도들의 사역에 끝까지 버티던 자들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소망으로 가득 차 예루살렘에 왔다. 또 아마도 이것이 그가 지금 기도하던 바였으니, 곧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교육받았고 거기서 잘 알려진 자이니, 아직 모이지 않은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그리스도께로 모으는 일에 쓰임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그 일을 위한 특별한 유리한 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세운 계획을 가로막으신다. "속히", 그가 말씀하시기를, "어서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비록 네가 다른 이들보다 자기가 그들에게 더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지라도, 너는 그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너에게 더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며, 그러므로 "그들이 나에 관한 네 증언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누가 복음을 받아들일지 미리 아시듯이, 누가 그것을 거부할지도 아신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쓰임받을 수 있도록 자기 간청을 거듭하였다. 그들이 그가 회심 전에 어떠한 자였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므로, 그에게 일어난 그토록 큰 변화를 전능하신 은혜의 능력에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의 증언에 더 큰 무게를 둘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는 자기 자신과 더불어, 또 주와 더불어 논하며, 자기가 정당하게 논한다고 생각하였다(행 22:19,20). "주님", 그가 말하기를, "그들은 압니다, 내가 한때 그들과 같은 생각을 품었던 것을, 내가 주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 가운데 누구 못지않게 신랄한 원수였던 것을, 내가 그들에 대하여 세속 권력을 격동시키고 그들을 가두었으며, 또한 그들에 대하여 영적 권력의 칼날도 향하게 하여 각 회당에서 그들을 때렸던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다른 사역자들의 경우에 그러듯이) 교육 탓이나 그에 대한 어떤 선입견 탓으로 돌리지 않고, 도리어 내가 친히 그들 중 하나였던 것을 알기에 내 말을 더욱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특별히 스데반의 경우에, 그들은 그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 내가 곁에 서서 거들고 방조하며 그의 죽음에 찬성하였고, 그 증표로 그를 돌로 치는 자들의 옷을 지켰던 것을 압니다. 이제 "주님", 그가 말하기를, "내가 만일 그들 가운데 나타나, 스데반이 전파하고 그를 위해 고난받았던 그 교리를 전파한다면, 그들은 의심 없이 내 증언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그들이 단지 자기들의 체제에 낯선 자로만 여기는 다른 이들보다, 그 체제에서 탈퇴한 자인 너에 대하여 더욱 격분할 것이다." 5.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파하게 해 달라는 바울의 간청은 기각되고, 그는 이방인 가운데로 가라는 단호한 명령을 받는다(행 22:21).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주목하라, 하나님께서는 흔히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은혜로운 응답을 주시되, 그들이 구하는 바로 그것으로가 아니라 더 나은 어떤 것으로 주신다. 아브라함이 기도하기를, 오 이스마엘이나 주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삭에 관하여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창 17:18). 그처럼 여기서도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영혼들을 회심시키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한다.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리어 너는 이방인 가운데 쓰임받을 것이며, 홀로 사는 여인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으리라"(사 54:1 참조). 자기의 일꾼들에게 그들의 때와 그들의 자리를 모두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비록 그것이 자기들의 성향과 어긋날지라도 그분의 정하심에 순복하는 것이 그들에게 마땅하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갈망한다. 거기서 설교자가 되는 것이 그의 야망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더 큰 임무를 정하신다. 그는 (다른 사도들이 그러하였듯이, 요 4:38)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데로 들어가지 않고, 새 땅을 일구어, 그리스도의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롬 15:20). 이처럼 섭리는 흔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계획하는 것보다 우리를 위하여 더 잘 마련하시니, 따라서 우리는 그 인도하심에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기업을 택하실 것이다(시 47:4 참조). 주목하라, 바울은 위임 없이 이방인 가운데 가서 전파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를 보내리라. 또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를 보내신다면, 그의 영이 그와 함께 가실 것이며, 그의 곁에 서서 그를 끌고 나아가시며 그를 끝까지 붙드시고, 그로 하여금 자기 수고의 열매를 보게 하실 것이다. 바울은 자기 마음을 예루살렘에 두지 말지니, 그는 멀리 보내심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부르심은 전혀 다른 길로 가야 하며, 그의 일은 다른 종류의 것이라야 한다. 또한 그가 인근 나라들에 이방인의 교회를 세우지 않은 것은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주는 거슬림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자기들의 바로 가까운 곳에서 그 일을 하였으나, 그는 멀리 떨어진 곳, 곧 아주 먼 곳으로 보내심을 받았으니, 거기서 그가 행한 일은 그들에게 거슬림이 된다고 여겨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이 이 모든 것을 함께 고려한다면, 분명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 가운데 전파하였다고 그에게 분노하거나, 그것을 자기 동족에 대한 악의의 행위로 해석할 아무 이유가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마음과는 반대로, 하늘로부터의 거스를 수 없는 명령에 의하여 그 일에 떠밀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²²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²³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²⁴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를 향하여 이같이 외치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하니라. ²⁵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에게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²⁶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 사람은 로마 시민이라 하니, ²⁷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그러하다 하더라. ²⁸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많은 돈을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하니,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더라. ²⁹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³⁰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고발하는지 그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바울은 이렇게 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가던 중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어떤 까다로운 비난도 곁들이지 않은 채 이방인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라는 자신의 위임을 보여 주었으며, 우리가 짐작하건대 그다음으로는, 그가 어떻게 그 후 안디옥에서 성령의 특별한 지시하심에 따라 이 사역을 위하여 구별되었는지, 그가 유대인들을 얼마나 아꼈는지, 그들에게 얼마나 정중하였는지, 그리고 자기가 가는 모든 곳에서 그들에게 우선권을 주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연합시키려고 얼마나 마음을 썼는지를 보여 주려 하였던 것 같다. 그러고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그토록 놀랍게 인정하셨는지, 또 유대 교회의 어떤 참된 유익에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람들 가운데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하여 좋은 일이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주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든지, 그들은 그가 더 이상 자신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기로 작정한다. 그들은 이 말하는 것까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여기까지 그들은 인내와 어느 정도의 주의를 가지고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이방인에게 보내심을 받은 것을 말하자,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에게 하신 말씀이었음에도, 그들은 그것을 차마 견디지 못한다. 이방인이라는 이름이 거명되는 것조차 견디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그러한 적대감과 시기심을 품고 있었다. 이 말이 언급되자, 그들은 도무지 참지 못하고 모든 예의와 공정의 법도를 잊어버린다. 이렇게 그들은 백성이 아닌 자들로 말미암아 시기하도록 격동되었다(롬 10:19).
이제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권속에 속한 자들로 언급하고 그리하여 그가 그들 가운데서 전도한 것을 정당화하였다는 이유로, 백성들이 그에게 얼마나 격분하고 광포하게 반응했는지를 듣게 된다.
I. 그들은 큰 소리를 질러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를 혼란에 빠뜨리고, 아무도 그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가책받은 양심은 아주 가벼운 건드림에도 발길질을 한다. 그리고 이성에 의해 다스림받지 않기로 작정한 자들은, 할 수만 있다면 이성의 말을 듣지도 않기로 흔히 작정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는 적개심은, 흔히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사역자들을 침묵시키고 그들의 입을 막는 데서 드러난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가장 뛰어난 선견자들에게 보지 말라고 하였고(사 30:10), 그래서 그들도 가장 뛰어난 변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말하지 말라. 그치라, 어찌하여 매를 맞으려 하느냐(대하 25:16).
II. 그들은 그를 살 가치도, 더더욱 자유를 누릴 가치도 없는 자라고 외쳐 댔다. 그가 자기 변호를 위하여 제시한 논증들을 따져 보지도 않고, 거기에 어떤 대답도 하려 하지 않은 채, 그들은 혼란스러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이방인에게 전하라는 위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 같은 자를 이 땅에서 없애 버리자. 어찌, 그는 살려 둘 자가 아니다." 이처럼 자기 시대의 가장 큰 축복이 되었던 사람들이 단지 땅의 짐일 뿐만 아니라 그 세대의 재앙으로 묘사되어 왔다. 인생의 가장 큰 영예를 누릴 자격이 있는 자가 생명 자체조차 누릴 자격이 없는 자로 정죄받는다. 하나님과 사람이 선한 사람들에 대하여 얼마나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라. 그러나 둘은 이 점에서는 일치한다. 곧 선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오래 살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바울은 경건한 유대인들에 대하여, 그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히 11:38).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에서 옮겨져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그들을 잃는 것으로 마땅한 형벌을 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건치 않은 유대인들은 바울에 대하여, 그가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옮겨져야 한다. 그래야, 두 증인의 경우처럼(계 11:10), 세상이 그라는 짐에서 풀려나기 때문이다.
III. 그들은 바울을 향하여, 그리고 그들의 요구대로 그를 즉시 죽이지 않거나 그들이 삼킬 수 있도록 먹잇감으로 그들의 이빨에 던져 주지 않은 천부장을 향하여 완전히 미쳐 날뛰었다(행 22:23). 그들의 이성이 정욕에 완전히 잠겨 버린 사람들답게, 그들은 으르렁대는 사자나 성난 곰처럼 부르짖고, 저녁의 이리처럼 울부짖었다. 그들은 분노와 폭력으로 옷을 벗어 던졌으니, 마치 그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이렇게 그를 찢어 버리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그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얼마나 그를 돌로 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드러낸 것이다. 스데반을 돌로 친 자들도 그들의 옷을 벗어 던졌다(행 22:20). 또는, 그들은 그가 신성 모독의 말을 한 것처럼 옷을 찢었고, 그것을 혐오한다는 표시로 티끌을 공중에 날렸다. 혹은, 천부장이 허락하기만 했더라면 그들이 바울에게 돌을 던질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었는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던 이 광기의 표출에 대하여, 우리가 굳이 이유를 찾으려 애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의도한 전부는, 자신들이 바울에 대하여 얼마나 격분하고 격앙되었는지를 천부장이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천부장이 그들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 길은, 그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자기들의 뜻을 마음대로 하게 두는 것 이상이 없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IV.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도록 명함으로써 그의 안전을 돌보았다(행 22:24). 감옥이 때로는 군중의 분노로부터 선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곳이 되어 왔다. 바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니, 그는 아직 자기의 증언을 마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친구들 중 아무도 감히 그를 위하여 나서지 못할 때에, 그를 돌볼 한 사람을 일으키셨다.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하지 마옵소서.
V. 천부장은 바울을 고문하도록 명하였으니, 백성들이 그에게 그토록 보기 드문 폭력을 가하도록 자극한 어떤 극악한 죄를 그에게서 자백받아 내려는 것이었다. 그는 바울을 채찍질하여 신문하라고 명하였으니(오늘날 어떤 나라들에서 형틀로 하듯이), 그들이 무슨 일로 그를 향하여 이같이 외치는지 알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공정하게 처신하지 않았다. 그는 시끄럽고 소란을 피우는 고발자들 가운데서 몇몇을 가려내어, 그들을 평화를 깨뜨린 자들로 영내로 데려가 신문했어야 했다. 그것도 채찍질로써, 자기에 관하여 그토록 훌륭하게 해명할 수 있고 죽거나 결박당할 만한 어떤 일도 행한 것 같지 않은 사람을 두고서 그들이 무슨 혐의를 씌우려는지를 신문했어야 했다. 그들이 무슨 일로 그를 향하여 이같이 외치는지를 묻는 것은 그들에게는 합당했으나, 바울에게 묻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았다. 바울은 자기가 그들에게 그리할 정당한 이유를 조금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일 무슨 이유가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제시하게 하라. 누구도, 비록 죄가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을 고발할 의무가 없거늘, 하물며 무죄한 자가 자기 자신을 고발하도록 강요받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분명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부르짖어 대는 자라면 반드시 무언가 아주 나쁜 일을 저질렀음에 틀림없다고 결론지었을 때, 유대 민족을 알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이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해서도 꼭 이와 같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부르짖지 않았던가. 재판관이 어찜이냐,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한마디도 대답할 말이 없었으면서 말이다. 무례하고 소란스러운 폭도들이 바울에 대하여 부르짖되 그 까닭과 이유를 말하지도 못하고, 그래서 바울이 억지로 말하도록 강요받아야 한다는 것이 바울을 채찍질할 정당하거나 공정한 빌미가 되겠는가?
VI. 바울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기 특권을 내세웠으니, 그 특권으로 인해 그는 이런 종류의 모든 재판과 형벌에서 면제되어 있었다(행 22:25). 그들이 가죽 줄로, 곧 가죽끈으로 그를 매니, 마치 자백을 받아 내려 할 때 교도소에서 가장 비열한 죄인들을 매던 것처럼 그를 채찍질하는 기둥에 매달았는데, 그는 무죄한 사람에 대한 그들의 처사가 불의하다고 항의하여 외치지 않았다. 도리어 매우 온화하게, 로마 시민인 자기에게 행하는 그들의 처사가 불법임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는 전에도 한 번 빌립보에서 채찍질을 당한 후에 이렇게 한 적이 있었으나(행 16:37), 여기서는 그 일을 예방하는 데 사용한다. 그는 곁에 서 있는 백부장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법을 알고 있소. 부디 말해 보시오, 당신들 자신이 로마 사람이면서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하는 것이 합당하오?" 그가 말하는 태도는, 이 선한 사람이 그에게 행해진 그 모든 모욕과 그가 처한 위험 한가운데서도 분노나 두려움에 동요하지 않은, 얼마나 거룩한 안정과 평온의 마음을 누리고 있었는지를 분명히 시사한다. 로마인들에게는 (그것을 lex Sempronia, 곧 셈프로니우스 법이라 불렀다) 한 법이 있었으니, 만일 어떤 행정관이 로마의 자유민을 indicta causa, 곧 그가 자기 변호의 말을 하는 것을 듣지도 않고 또 그의 사건 전체를 숙고하지도 않은 채 징벌하거나 정죄하면, 그는 자기네 자유를 매우 소중히 여기는 백성의 판결에 회부될 책임을 지게 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행했음이 입증되지 않는 한 그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은 실로 모든 사람의 특권이다. 마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에 따라 모든 영국인이, 자기 동료 열두 사람의 평결에 의하지 않고서는 자기 생명이나 자유 토지 보유권을 박탈당하지 않는 것이 특권인 것과 같다.
VII. 천부장은 이 일에 놀라며 두려움에 빠졌다. 그는 바울을 떠돌이 애굽인쯤으로 여겼었고, 그가 헬라 말을 할 수 있는 것에 의아해하였는데(행 21:37), 이제 그가 자기만큼이나 훌륭한 신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훨씬 더 놀란다.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멸시받는, 큰 가치와 공로를 지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만물의 찌꺼기처럼 여겨지고 그렇게 취급받는데, 만일 그들을 그렇게 여기는 자들이 그들의 참된 인격을 안다면, 그들이야말로 땅의 가장 뛰어난 자들에 속한다고 인정할 것이다! 천부장에게는 그를 수종드는 백부장들, 곧 하급 장교들이 있었다(행 21:32). 그들 중 하나가 이 일을 천부장에게 보고한다(행 22:26). 어찌하려 하느냐, 이 사람은 로마 시민이라. 곧 그에게 어떤 모욕이 가해진다면 그것은, 그들이 즐겨 말하던 대로, 로마 백성의 위엄에 대한 범죄로 해석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모두 로마 시민의 이 특권이 얼마나 높이 평가받는지를 알고 있었다. 툴리우스(키케로)는 베레스를 탄핵하는 그의 연설 중 하나에서 이를 격찬한다. O nomen dulce libertatis, O jus eximium nostræ civitatis! O lex Porcia! O leges Semproniæ; facinus est vincire Romanum civem, scelus verberare—"오 자유여, 나는 그대의 매혹적인 이름을 사랑하노라. 그리고 우리의 이 포르키우스 법과 셈프로니우스 법, 이 얼마나 감탄할 만한가! 로마 시민을 결박하는 것은 범죄이거니와, 그를 매질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다." (백부장이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하오. 만일 이 사람이 로마 시민인데 우리가 그에게 어떤 모욕을 가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우리 직위를 잃을 위험에 처할 것이오." 이제, 1. 천부장은 이 일의 진상을 그의 입에서 직접 확인하고자 하였다(행 22:27).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네가 로마 시민의 특권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그렇소," 바울이 말한다, "나는 그러하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을 증명하는 어떤 증서나 증명서를 제시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의 말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천부장은 이 문제에 관하여 그와 매우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바울이 로마 시민으로서 가진 특권이 둘 중에서 그 대령(천부장)의 것보다 더 명예로운 것임이 드러난다. 그 대령은 자기 것은 돈으로 산 것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나도 로마의 자유민이오. 그러나 나는 많은 돈을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으니, 그것은 내게 비싼 값이 들었소.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얻었소?" "사실은 말이오," 바울이 말한다, "나는 나면서부터 자유민이오." 어떤 이들은 그가 출생지로 인해 이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곧 로마 자체가 누리는 것과 동일한 특권을 황제에게서 부여받은 도시 다소의 토박이로서 말이다. 또 다른 이들은 오히려,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전쟁이나 로마의 다른 어떤 내전에서 복무하고 어떤 두드러진 공로로 시민권을 상으로 받았으며, 그리하여 바울이 나면서부터 자유민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자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것을 내세우거니와,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해도 될 뿐만 아니라 마땅히 사용해야 한다. 3. 이것이 바울의 곤경에 즉각적인 제동을 걸었다. 그를 채찍질하여 신문하도록 임명받은 자들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그에게서 물러갔으니(행 22:29), 스스로 올무에 빠지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가 그를 상당한 권세를 지닌 자로 짐작할 수 있는 그 대령 자신도, 그가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듣고는 두려워하였다. 비록 그가 그를 때리지는 않았으나, 그를 때리려고 결박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는 악한 행위에서 제지받지 않았을 자들이, 사람을 두려워함으로 제지를 받는다. 여기서 인간의 법과 위정자(행정관)의 유익을 보라. 또 그것들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얼마나 큰지를 보라. 비록 그것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사역자들에게 어떤 호의나 특별한 보호를 베풀지 않았을 때조차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평과 공정한 거래를 전반적으로 떠받침으로써, 그것들은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런 한계도 알지 못했을 악하고 무도하며 불법한 자들의 광기를 억제하는 데 기여해 왔고, 또 여기까지는 오되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서 그칠지니라고 말하는 데 기여해 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권세 잡은 모든 자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이 봉사, 곧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은, 우리가 그것을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가 조용하고 평온한 한 우리에게 이 유익을 기대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곧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다(딤전 2:1, 2). 4. 그 군관(천부장)은 이튿날 바울을 산헤드린(공회) 앞으로 데려갔다(행 22:30). 그는 먼저 그 결박을 풀었으니, 그것이 그의 사건을 예단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요, 또한 자기가 로마 시민을 결박하였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온 공회를 함께 모이도록 소집하여 바울의 사건을 심리하게 하였으니, 그가 보기에 이것은 종교에 관한 문제였기에 그들을 거기에 가장 합당한 재판관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갈리오는 이 같은 경우에 바울을 방면하였으니, 그것이 그들의 율법에 관한 문제임을 알고는 고발자들을 재판석에서 쫓아내고(행 18:16) 그 일에 조금도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인이었던 이 로마인은 바울을 구류해 두고서, 폭도들로부터 총회로 상소한 셈이었다. 이제, (1.) 우리는 이로써 그가 바울의 안전을 의도하였기를 바랄 수 있다. 곧 만일 바울이 무죄하고 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이라면, 비록 무리가 그에게 격분하였을지라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에게 공의를 행하여 그를 무죄로 풀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학식과 분별을 갖춘 사람들이었거나 마땅히 그래야 했고, 그들의 법정은 공평의 규칙으로 다스려졌(어야 했)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하층 백성들 가운데서 아무런 선한 것도 찾지 못했을 때, 그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도와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고, 자신이 큰 자들 가운데서는 더 나은 결과를 얻으리라고 스스로 장담하였으니—여기서 천부장이 그러했듯이 말이다—그러나 곧 거기서 자신이 실망하게 됨을 알았다. 그들도 그 멍에를 다 꺾고 그 결박을 다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렘 5:4, 5). 그러나 (2.) 여기서 그가 목표한 것이라고 말씀하는 바는, 자기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고발하는지 그 실상을 알고자 하였다. 만일 그가 바울을 자기 방으로 불러 그와 자유로이 이야기를 나누었더라면, 그는 바울에게서, 자기 궁금증을 채우고도 남을 것을, 또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설득할 만한 것을 곧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큰 자들이, 자기 양심을 일깨울 수 있는 것은 자기에게서 멀리 떼어 놓으려 하고, 하나님의 도에 관하여서는 단지 이야깃거리로 삼기에 족할 정도 이상은 알기를 원치 않는 것이 너무도 흔한 일이다.
앞 장의 끝부분에서 우리는 바울이 결박당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대우를 받으리라는 아가보의 예언대로 된 일이었다. 그러나 천부장이 그에게 자기 변호를 위해 말하도록 허락함으로써 그의 혀는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그 언론의 자유를,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그분의 일을 섬기는 데 쓰는 일에 너무도 마음을 쏟은 나머지, 자신이 결박당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서, 그것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마치 그를 동요시키거나 혼란스럽게 만든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행하신 큰 일들을 그토록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보게 된다.
I. 그가 백성에게 한 연설과, 이에 대한 그들의 주목(행 22:1,2).
II. 그가 자신에 관하여 행한 진술.
III. 이 일로 인하여 무리가 그에게 가한 방해. 그들은 이방인에게 유리한 말은 무엇이든 듣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 말에 격렬한 분노를 터뜨렸다(행 22:22,23).
IV. 바울이 다시 한 번 무리의 손에서 구출된 일과, 바울을 향한 이 엄청난 소동의 참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하여 천부장이 취한 그 후의 조치(행 22:24,25).
V. 바울이 로마 시민으로서 자신의 특권을 주장하여, 이 야만적인 심문 방식에서 면제받은 일(행 22:26-29).
VI. 천부장이 이 사건을 대제사장의 법정으로 옮긴 일과, 거기에 바울이 출두한 일(행 2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