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am Clarke's Commentary and Critical Notes on the Bible
Adam Clarke ·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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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 서문
에베소는 소아시아 이오니아의 도시였고, 한때 그 지역 세계의 수도였다. 옛 도시는 에게 해 연안, 카이스테르 강 어귀에 있었으며, 서머나 남쪽 약 50마일 지점에 자리했다. 바울 사도가 교회를 세웠고 한동안 영광스럽게 번성했던 에베소는 이 옛 에베소가 아니었다. 옛 도시는 파괴되었고, 리시마코스가 같은 이름의 새 도시를 세웠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모든 도시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이 도시는 지금은 비참한 마을이 되어, 한때 장엄했던 건축물의 폐허에서 나온 초라한 오두막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오두막들은 지금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없이 터키인 가정 마흔 내지 쉰 가구의 거처가 되어 있다! 다른 자세한 사항은 사도행전 18:19 주석을 보라.
그러나 이 서신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졌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에게 의문이 있다. 그들은 올바른 수신 표제가 ‘바울 사도의 라오디게아인들에게 보낸 서신’이라고 생각하며, 사도가 골로새서 4:16에서 언급한 바로 그 서신이라고 본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이 견해를 긍정하는 페일리 박사의 논증은 상당히 존중할 만하다.
“우리 앞의 이 서신이 바울 사도가 쓴 것이라는 점은 결코 논쟁된 일이 없는 듯하지만, 이 서신이 누구에게 보낸 것인가에 관하여는 오래전부터 의문이 제기되어 온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이 문제는 부분적으로 외적 증거의 어떤 모호함에 근거한다. 2세기의 이단자 마르키온은, 3세기 초의 교부 터툴리아누스가 인용한 바에 따르면, 이 서신을 ‘라오디게아인들에게 보낸 서신’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마르키온에 대해 아는 바로는 그의 판단은 거의 의지할 만하지 않다. 또한 터툴리아누스가 마르키온을 바르게 이해했는지도 완전히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마르키온이 자기 시대의 어떤 사본들이 표제에 εν Λαοδικειᾳ, 곧 ‘라오디게아에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로 제시된다면, 그의 증언은 참되게 해석되는 한 그의 이단성 때문에 약화되지 않는다. 그로티우스가 말하듯이 ‘cur in ea re mentiretur nihil erat causae’, 곧 ‘그 일에서 그가 거짓말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 절의 εν Εφεσῳ, 곧 ‘에베소에서’라는 이름은 이 서신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쓰였다는 증거가 전적으로 그 한 단어에 달려 있는데, 현존하는 모든 사본에 읽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외적 증거가 수용 본문 쪽으로 명백하고도 큰 우세를 보인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반론은 주로 서신 자체의 내용에서 생긴다. 그 내용은 여러 면에서 이 서신이 에베소 교회에 쓰였다는 가정과 맞지 않는다. 역사에 따르면 바울 사도는 에베소에서 꼬박 두 해를 지냈다. 사도행전 19: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그리고 이 점, 곧 바울 사도가 상당한 기간 에베소에서 전도했다는 사실은 고린도전후서 두 서신과 디모데전후서 두 서신으로도 확증된다.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고린도전서 16: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고린도후서 1:8.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디모데전서 1:3.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디모데후서 1:18. 내가 이 증언들을 제시하는 것은, 역사 기록과 서신 사이에 신뢰의 경쟁이 있었다면 나는 서신을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자신이 세웠거나 방문했던 교회들에 보낸 모든 서신은 그가 그들 가운데 있었던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한 언급과 호소로 가득하다. 그러나 에베소서에는 그가 에베소에 있었음을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구절이 하나도 없다.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두 서신이 이 부류에 속한다. 그것들은 사도의 역사, 그가 받은 영접, 그들 가운데서의 그의 행실에 대한 암시로 가득하다. 우리 앞의 이 서신에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만일 이 서신이 실제로 그가 그토록 오래 머물렀던 에베소 교회에 보낸 것이라면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 이것이 첫째이자 가장 강한 반론이다. 더 나아가 골로새서는 바울 사도가 방문한 적이 없는 교회에 보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2장 첫 절에서 추론한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골로새 사람들과 라오디게아 사람들도 같은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과 함께 묶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방문하지 않았던 골로새 사람들에게 한 인사는, 우리가 지금 살피는 서신에서 그가 편지를 보낸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인사와 정확히 같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골로새서 1:3. 이와 같이 그는 우리 앞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에베소서 1:15. 이 인사의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너희의 믿음과 사랑을 듣고’라는 말은, 우리가 보듯이 그가 낯선 사람들에게 쓰는 바로 그 말이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사역했고,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직접 알았을 교회에 인사하면서 같은 표현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로마서는 바울 사도가 로마에 가기 전에 기록되었고, 그들에게 한 인사도 방금 인용한 것과 같은 흐름으로 되어 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로마서 1:8. 이제 우리 사도가 이미 아는 사람들에게 편지할 때 그의 서신을 어떤 형식으로 시작하곤 했는지 보자. 고린도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전서 1:4. 빌립보 사람들에게는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빌립보서 1:3.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는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전서 1:3. 디모데에게는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디모데후서 1:3. 이 인용들에서 그가 하나님께 감사의 주제로 삼는 것은 보통 그들에 대한 기억이지, 결코 그들에 대해 들은 소식이 아니다.
우리 앞의 서신이 에베소 교회에 쓰였다고 가정할 때 큰 난점들이 있으므로, 나는 이 서신이 실제로 골로새서 4장에서 언급된 라오디게아인들에게 보낸 서신일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언급을 담은 본문은 이렇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골로새서 4:16.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는 바울 사도가 그 교회에 보냈고 그들이 골로새로 전달한 서신이었다. 두 교회는 서로 받은 서신을 주고받아 읽어야 했다. 이것이 대부분의 주석가가 그 지시를 설명하는 방식이며, 그 본문에 부여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뜻이다. 또한 언급된 그 서신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최근에 받은 서신이었을 개연성이 있다. 그렇다면 상당한 증거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보인다. 골로새서와 거의 같은 시기의 바울 사도의 한 서신이 존재했으며, 그것은 바울 사도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교회, 곧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서신이었다. 우리 앞의 서신에 대해 관찰한 바는 그것이 이 성격에 완전히 부합함을 보여 준다.
“또 그 착오가 설명하기 매우 어려워 보이지도 않는다. 소아시아 지도를 살피는 사람은 누구나, 로마에서 라오디게아로 가는 사람이 그 방향에서 가장 가까운 빈번한 항구인 에베소에 상륙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두기고가 에베소를 지나가면서, 자신이 맡은 그 편지를 그곳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그 편지의 사본들이 에베소에서 복제되고 보존되지 않았겠는가? 어떤 사본들은 에베소 사람에게는 보존할 필요가 없었던 수신지 표시어 εν τῃ Λαοδικειᾳ를 빠뜨리지 않았겠는가? 그 편지의 사본들이 에베소에서 넓은 그리스도 교회로 퍼져 나가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그 편지가 그 교회에 쓰였다는 믿음을 일으킬 계기가 되지 않았겠는가? 끝으로, 이 믿음이 우리가 표제에 스며들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낳지 않았겠는가?
“또 주목할 만한 것은, 수신지 표시어가 없는, 곧 ‘에베소에서’라는 말도 ‘라오디게아에서’라는 말도 없는 고대 사본들이 있었던 듯하다는 점이다. 4세기의 저술가 성 바실리우스는 이 현재의 서신을 말하면서 매우 특이한 구절을 남긴다. ‘그리고 에베소 사람들에게 쓰면서,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참으로 연합된 자들로서, 그는 그들을 특수한 의미에서 “있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곧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보다 앞선 이들이 그렇게 전해 주었고, 우리도 고대 사본들에서 그렇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밀 박사는 바실리우스의 이 말을, 이 교부가 ‘에베소에서’라는 말이 빠진 어떤 사본들을 보았다고 선언한 것으로 해석한다. 나도 그에게 제기된 몇 가지 반론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이 옳다고 본다. 그리고 이 구절은 실제로는 부패하고 결함 있는 독법을 바실리우스가 공상적으로 설명한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서신의 저자가 본래 ἁγιοις τοις ουσιν이라고 쓰고 그 뒤에 어떤 장소 이름도 붙이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서신이 라오디게아인들에게 보낸 서신이라는 페일리 박사의 논증, 그 요약은 베트슈타인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이 그럴듯하고 강력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학자들이 언급한 예외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고대 증언은 이 서신이 본래 에베소 교회에 보내졌다는 쪽에 서 있다. 이 두 고려 사항으로 곤란을 느낀 어떤 비평가들은 중간 길을 제시했다. 그들은 이 서신의 여러 사본들이 특정 교회에 지정되지 않고 소아시아의 모든 교회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여러 사본들이 서로 다른 수신지를 가질 수 있었다고 가정한다. 그 사정은 바울 사도가 첫 절에 Παυλος αποστολος Ιησου Χριστου - τοις ἁγιοις τοις ουσιν,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은, 있는 성도들에게’라고 쓸 때 ουσιν, 곧 ‘있는’ 뒤에 빈칸을 남겨 두었고,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εν Εφεσῳ, 곧 ‘에베소에서’로, 다른 경우에는 εν Λαοδικειᾳ, 곧 ‘라오디게아에서’로 채워졌다는 것이다. 다만 그가 라오디게아인들의 교회에 명시적으로 보낸 한 사본이 있었을 수 있고, 동시에 소아시아 전역의 여러 교회에 다른 사본들이 전달되기를 바랐을 수 있다. 장소가 명시되지 않은 사본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성 바실리우스에게서 배운다. 그리고 라오디게아를 지지하는 논증은 분명 가장 강하다. 사도가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않는다는 사정은 그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라오디게아에는 잘 맞는다. 골로새서 2:1. 그러나 그가 잘 알려져 있었고 복음을 전하면서 삼 년을 보낸 에베소에는 맞을 수 없다. 사도행전 20:31을 보라.
이 점은 매우 불확실하고, 큰 능력과 학식을 지닌 사람들이 이 문제에서 서로 다른 편을 택했으므로, 나는 무엇을 결정하기에 스스로 부적격하다고 판단한다. 다만 라오디게아를 지지하는 논증들을 독자 앞에 공정하게 제시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느꼈다. 에베소를 지지하는 논증들은 어디서나 접할 수 있다. 이 주제에서 서로 반대편에 선 비평가들이 서신 본문에서 제기한 구절들은 내가 논쟁적으로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그 구절들에 대한 주석들은 마치 논쟁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구성했다.
많은 해설자들, 특히 챈들러 박사와 맥나이트 박사는 에베소의 다이아나 신전, 헬라 사람들 가운데 있던 신성한 비의, 그 유명한 여신의 신전에 있던 히에로판테스, 미스타고고이, 네오코로이 등에 대한 언급을 다수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견해들을 앞에 두고도 내가 같은 것들을 언급하지도, 설명 자료로 제시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사실은 내가 그것들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그런 암시가 존재한다고도 믿지 않는다. 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많은 암시는 보지만, 에베소의 다이아나 신전에 대한 암시는 보지 못한다. 또한 유대 성전의 거룩한 봉사와 제사장 직무자들에 대한 많은 언급은 발견하지만, 이방인들 가운데 있던 미스타고고이 등에 대한 언급은 찾지 못한다.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할 것, 곧 모든 시대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 다시 말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교회 안에서 연합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많이 말해져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엘레우시스, 바쿠스, 또는 헬라 사람들의 가증한 예배에 속한 다른 비의들이, 그들의 비의와 전능자의 비밀 사이의 어떤 병행을 사도의 마음에 떠올리게 했다는 암시는 전혀 보지 못한다. 이 존경할 만한 권위자들과 내가 견해를 달리하는 이유는 주석들에서 제시했다.
1815년 6월 20일.
사도가 교회에 문안한다. 에베소서 1:1, 에베소서 1:2.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을 자녀 삼으시는 부르심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으로 그들과 유대인들이 모두 속량을 얻는다. 에베소서 1:3-7. 그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이 매우 풍성하므로 이방인들이 구원의 상태로 부름을 받았고, 그 기업의 보증으로 성령을 받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에베소서 1:8-15. 그는 그들의 회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들이 더욱 밝히 깨달아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의 고난과 높아지심으로 마련된 복에 참여하도록 기도한다. 에베소서 1:1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