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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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²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났다.
³ 그의 소유는 양 칠천 마리와 낙타 삼천 마리와 소 오백 겨리와 암나귀 오백 마리였으며 종도 매우 많았다. 이 사람은 동방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자였다.
여기서는 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한다.
I. 그는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자였다. 그는 이쉬(Ish), 곧 존귀한 사람이며 이름나고 탁월한 사람, 관리이자 권세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살던 곳은 아라비아 동부의 우스 땅으로, 갈대아 쪽 유브라데 가까이에 있었으며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갈대아 우르에서도 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나라에서 한 선한 사람을 불러내셨지만, 그곳에 자신을 증거 없이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또 다른 사람을 일으켜 의를 전파하는 자로 삼으셨다. 하나님께는 어디에나 남은 자가 있으며, 이스라엘 각 지파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도 인침 받은 자들이 나온다(계 7:9). 욥과 같은 선한 사람을 둔 것은 우스 땅의 특권이었다. 그리하여 그곳은 참으로 행복한 아라비아가 되었다. 악한 곳에서 유난히 선했다는 사실은 욥의 칭찬이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이 악할수록 그는 더욱 선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이름 욥(Job) 또는 *이욥(Jjob)*이 ‘미움을 받는 자’, 곧 원수로 여겨지는 자를 뜻한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슬퍼하거나 신음하는 자를 뜻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에 담긴 슬픔은 번영 가운데 누린 기쁨을 절제하게 했을 것이다. 케이브 박사(Dr. Cave)는 이 이름을 ‘사랑하다’ 또는 ‘바라다’라는 뜻의 *야아브(Jaab)*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이는 그의 출생이 부모에게 얼마나 반가웠으며 그가 얼마나 그들의 눈에 사모하는 자였는지를 암시한다. 그러나 그도 자신의 출생일을 저주한 때가 있었다. 밝은 아침으로 시작한 날이 마침내 어떤 날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II. 그는 매우 선한 사람이며 경건이 탁월하여 이웃들보다 나았다. 그는 온전하고 정직했다. 이는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얻은 평판, 곧 일반적으로 정직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만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실제 성품이 어떠했는지를 밝히려는 말이다. 이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며,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에 부합함을 우리는 확신한다. 1. 욥은 경건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곧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을 예배하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규범으로 삼아 자신을 다스렸다. 2. 그의 신앙은 진실했다. 그는 온전했다. 이는 그 자신도 인정하듯 죄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욥 9:20). 내가 온전하다 하여도 내 입이 나를 패역하다고 증명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존중하고 온전을 지향했으며, 겉으로 보이는 만큼 실제로도 선했고 경건을 고백하면서 위선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건전했고 그의 눈은 한결같았다. 진실함은 복음적 온전함이다. 진실함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다. 3.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대할 때 정직했다. 약속에 충실하고 계획에 확고했으며, 맡겨진 모든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양심에 따라 행했다. 사 33:15을 보라. 그는 이스라엘 출신은 아니었지만 참으로 간사함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4. 그의 마음을 지배한 하나님 경외가 그의 모든 행실을 다스리는 원리였다. 이 경외가 그를 온전하고 정직하게 하며, 하나님을 향해 속사람과 전 존재를 드리고 신앙의 모든 면에서 일관되게 했다. 또한 그로 하여금 의무에 밀착하여 꾸준히 행하게 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의 위엄을 높이고 그 권위를 존중하며 그 진노를 두려워했다. 5. 그는 그릇된 일을 행한다는 생각 자체를 두려워했다. 지극한 혐오와 미움, 끊임없는 주의와 경계로 악에서 떠나 죄의 모든 모양과 죄로 다가가는 길을 피했으며, 이는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었다(느 5:15).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며(잠 8:13), 그 결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악에서 떠난다(잠 16:6).
III. 그는 이 세상에서 크게 번영하고 자기 나라에서 상당한 위상을 차지한 사람이었다. 그는 번영하면서도 경건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고 드물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나님께는 이 일도 가능하며, 그분의 은혜로 세상 재물의 유혹도 극복할 수 있다. 그는 경건했고 그의 경건은 번영에 도움이 되었다. 경건에는 현세의 생명에 관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번영했고, 그 번영은 그의 경건을 더욱 빛나게 했으며 그토록 선한 사람에게 선을 행할 더 큰 기회를 주었다. 그의 경건한 행위는 그가 누린 번영의 여러 증거에 대해 하나님께 드린 감사의 응답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이 풍성할수록 그는 더욱 기쁘게 하나님을 섬겼다. 1. 그의 가족은 많았다. 그는 신앙에서 탁월했지만 은둔자나 세상을 등진 사람이 아니라 한 가정의 아버지요 주인이었다. 여호와의 기업이며 그분이 주시는 상급인 자녀들로 집이 가득한 것은 그가 누린 번영의 한 증거였다(시 127:3).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다(욥 1:2). 남녀 자녀를 모두 두었고, 당시 가문을 이어 세우는 쪽으로 여겨지던 아들이 더 많았다. 자녀는 축복으로 여겨야 한다. 참으로 자녀는 축복이며, 특히 선한 교훈과 본을 주고 그들을 위해 선한 기도를 올리는 경건한 부모에게 그러하다. 욥은 자녀가 많았지만 압제하거나 인색하지 않았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매우 너그러웠다(욥 31:17-21 등). 부양할 대가족을 둔 사람은 지혜롭게 구제에 내놓은 것이 가장 좋은 이익을 위해 투자되고 자녀의 유익을 위한 가장 좋은 기금에 맡겨지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2. 그는 가족을 부양할 만한 좋은 재산을 지녔다. 그의 소유는 상당했다(욥 1:3). 재물을 *소유(substance)*라고 부르는 것은 일상적인 표현을 따른 것이다. 영혼과 내세의 관점에서 보면 재물은 그림자이며 실재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잠 23:5). 오직 하늘의 지혜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재산을 기업으로 받는다(잠 8:21). 당시에는 아직 땅에 사람이 가득하지 않았으므로 오늘날 일부 식민지에서처럼, 가축을 채워 넣을 수단만 있다면 적은 비용으로도 넓은 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욥의 재산은 그가 소유한 토지의 면적이 아니라 다음 두 가지로 묘사된다. (1.) 그의 가축, 곧 양과 낙타와 소와 나귀이다. 각 수가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숫자라기보다는 그보다 조금 많거나 적은 어림수였을 것이다. 양이 먼저 나온 것은 솔로몬이 말하듯 가정에서 가장 쓸모가 많았기 때문이다(잠 27:23, 26-27). 어린 양은 네 옷을 위한 것이며 젖은 네 집의 양식이 된다. 욥도 아브라함처럼 은과 금을 소유했을 것이다(창 13:2).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과시와 체면에 쓰이고 쌓아 두기에만 알맞은 재물보다, 실제 봉사와 당장의 용도에 쓰이는 것으로 자기와 이웃의 재산을 평가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채소와 열매로 생계를 마련해 주신 직후, 그에게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어 부유하고 위대하게 하셨다(창 1:28). 인간의 타락에도 이 권세가 계속 주어졌으므로(창 9:2), 이는 여전히 사람의 부와 명예와 권세를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한다(시 8:6). (2.) 그의 종들이다. 그는 규모가 매우 큰 가속과 농업 경영을 갖추었으며, 그를 위해 일하고 그에게서 생계를 얻는 이가 많았다. 이로써 그는 명예를 얻는 동시에 선을 행했다. 그러나 그만큼 많은 염려와 큰 비용도 짊어졌다. 이 세상의 헛됨을 보라. 재산이 늘면 그것을 돌보고 관리하는 사람도 늘어야 하고, 그것을 먹는 자도 늘어난다. 그 소유주가 눈으로 바라보는 것 외에 무슨 유익을 얻겠는가?(전 5:11). 한마디로 욥은 모든 동방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자였으며, 동방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이들이었다. 동방의 풍속으로 충만한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부유한 자들이었다(사 2:6 난외주). 욥은 재물과 지혜로 자기 나라에서 명예와 권세를 얻어 으뜸 자리에 앉았으며, 욥 29:1-25에서 그 지위를 직접 묘사한다. 욥은 올곧고 정직하면서도 부유해졌을 뿐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부유해졌다.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며 경건과 자선은 대개 번영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큰 가속과 많은 일을 거느리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일을 지켰으며, 그와 그의 집은 주를 섬겼다. 욥의 큰 환난을 기록하기 전에 그의 경건과 번영을 먼저 말한 것은, 그 어느 것도 인생의 일상적 재난은 물론 이례적 재난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함을 보여 준다. 욥의 잘못된 친구들이 생각한 것과 달리 경건도 우리를 재난에서 면제하지 않는다. 모든 일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닥치기 때문이다. 무심한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번영도 우리를 지켜 주지 않는다(사 47:8). 나는 여왕처럼 앉았으므로 슬픔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욥기 1장 4-5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⁴ 그의 아들들은 저마다 자기 날에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고, 사람을 보내어 그들의 세 자매도 불러 함께 먹고 마시게 했다.
⁵ 잔칫날이 한 차례 다 지나가면 욥은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성결하게 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그들 모두의 수대로 번제를 드렸다.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저주했을지도 모른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욥은 언제나 이와 같이 행했다.
여기에는 욥의 번영과 경건에 관한 설명이 더 나온다.
I. 욥이 자녀들로 말미암아 누린 큰 위로는 그의 번영을 보여 주는 한 사례로 언급된다. 우리의 현세적 위로는 빌려 온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므로, 우리 주위 사람들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 모습도 달라진다. 욥 자신도 번영하던 시절의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로 자녀들이 자기 주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욥 29:5). 그들은 정해진 때에 차례로 잔치를 베풀어 저마다 자기 집에서 잔치했다(욥 1:4).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이 선한 사람에게 위로가 되었다. 1. 자녀들이 장성하여 세상에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았다. 아들들은 모두 자기 집을 가졌고 아마 결혼했을 것이며, 욥은 각자가 살림을 시작할 만한 적절한 몫을 주었을 것이다. 한때 그의 식탁을 둘러쌌던 감람나무 같은 자녀들이 이제 저마다 자기 식탁을 갖게 되었다. 2. 자녀들이 자기 일을 번창시켜 스스로 먹고살 뿐 아니라 서로 잔치를 베풀 능력도 갖춘 것을 보았다. 선한 부모는 자녀의 부와 번영을 자기 것처럼 바라며 북돋우고 기뻐한다. 3. 그들이 건강한 것을 보았다. 집안에 병이 있었다면 잔치는 깨지고 애통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4. 무엇보다 그들이 사랑과 연합과 서로를 향한 선한 애정 가운데 사는 것을 보았다. 그들 사이에는 불화나 다툼이 없었고, 서로 낯설어하거나 피하지 않았으며, 인색하지도 않았다. 저마다 자기 소유를 알았지만 모든 것을 공동으로 가진 것처럼 자유롭게 교제했다. 형제들이 이처럼 하나로 결속된 모습을 보는 일은 부모의 마음에 위로가 되고 모든 사람의 눈에도 아름답다. 보라,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아름다운가!(시 133:1). 5. 형제들이 자매들에게도 매우 친절하여 잔치에 함께하도록 사람을 보내어 부른 것은 욥의 위로를 더했다. 자매들은 부름받지 않고는 스스로 찾아가지 않을 만큼 단정했다. 자기 자매를 업신여기고 그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며 그들의 평안을 염려하지 않는 형제는 교양도 성품도 좋지 않고 욥의 아들들과 매우 다르다. 그들의 잔치는 자매들도 좋은 동료로 함께할 수 있을 만큼 절제되고 품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그들은 유혹에 더 많이 노출되고 평판도 좋지 않은 공공의 유흥장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잔치했다. 욥 자신이 그 잔치에 함께했다는 기록은 없다. 분명 자녀들은 그를 초대했을 것이고, 그는 어느 자녀의 식탁에서든 가장 반가운 손님이 되었을 것이다. 욥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까다롭고 침울한 성품이나 타고난 애정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바르실래처럼 늙어 이런 즐거움에서 물러나 있었으며(삼하 19:35), 젊은이들끼리 있을 때 더 자유롭고 유쾌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삼간 오락을 자녀들에게까지 금하지는 않았다. 젊은이들이 청년의 정욕을 피한다면 젊은 시절에 합당한 자유를 누리도록 허용할 수 있다.
II. 욥이 자녀들에게 기울인 큰 관심은 그의 경건을 보여 주는 사례로 언급된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실제 됨됨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은 자기 자녀에게 선하게 대하고, 특히 그들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한다. 욥 1:5에 나타난 자녀들의 영적 복지를 향한 욥의 경건한 관심을 살펴보라.
1.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염려로 자녀들을 살폈다. 우리도 자신과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필요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범위에서 그와 같은 염려를 품어야 한다. 욥은 자녀들을 잘 교육했고 그들에게서 위로를 얻으며 그들에 관해 좋은 소망을 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했을지도 모른다. 잔칫날에는 평소보다 지나치게 즐거워하고 먹고 마시는 데 너무 큰 자유를 누린 나머지 마음으로 하나님을 저주했을지도 모른다.” 곧 그들이 마음속에 무신론적이거나 불경한 생각, 하나님과 그분의 섭리와 신앙의 실천에 합당하지 않은 관념을 품었을 가능성을 염려했다. 사람은 배부를 때 하나님을 부인하며 여호와가 누구냐고 말하기 쉽고(잠 30:9), 하나님을 잊고 우리 손의 능력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고 말하기 쉽다(신 8:12-17 등). 육신을 방종하게 하는 것보다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없다.
2. 자녀들의 잔칫날이 끝나자마자 욥은 그들을 불러 엄숙한 신앙의 일을 행하게 했다. 잔치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으므로 잔치에도 그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잔치가 끝났을 때 이 선한 아버지는 그들에게 멈출 때를 알아야 하며 날마다 호화롭게 지낼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일깨웠다. 그들이 한 주간 내내 돌아가며 잔칫날을 가졌더라도 한 해 내내 잔치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에게는 해야 할 다른 일도 있었다. 즐거워하는 사람도 진지해질 시간을 찾아야 한다.
3. 그는 사람을 보내어 자녀들이 엄숙한 규례를 준비하게 했다. 곧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성결하게 했다. 잔치 중 잘못 행한 것이 있는지 양심을 살피고 회개하며, 허영을 떨쳐 내고 신앙의 일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으라고 명했다. 이로써 그는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그들에 대한 권위를 유지했고, 자녀들은 자기 집을 갖게 된 뒤에도 그 권위에 순종했다. 욥은 여전히 가정의 제사장이었고, 자녀들은 모두 그의 제단에 참석하여 그의 재산에서 받을 몫보다 그의 기도에 참여하는 몫을 더 귀하게 여겼다. 부모는 자녀에게 은혜를 줄 수 없다. 성결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부모는 때에 맞는 훈계와 권면으로 자녀의 성화를 촉진해야 한다. 세례로 그들이 하나님께 구별되었으니, 실제로 하나님을 위해 성결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과 노력이 되어야 한다.
4. 욥은 자녀들을 위해 제사를 드렸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잔칫날에 범했을지 모르는 죄를 속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누린 자유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품행을 부패시키지 않도록 용서하시는 긍휼과 예방하시는 은혜를 구하며 그들의 경건과 순결이 보존되기를 간구하기 위해서였다.
욥은 아브라함처럼 가족을 위한 제단을 두었으며, 아마도 그 위에서 날마다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특별한 경우에는 평소보다 많은 제사를 더욱 엄숙하게, 그들 모두의 수대로 자녀 한 사람마다 하나씩 드렸다. 부모는 가족의 각 구성원을 위해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간구해야 한다.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했다”라고 하되, 각 아이의 고유한 성향과 재능과 처지에 기도와 노력 모두를 맞추어야 한다. 이 제사들을 드릴 때 욥은 다음과 같이 행했다. (1.) 그는 일찍 일어났다. 자녀들이 오랫동안 죄책 아래 머물지 않게 하려는 염려가 있었고, 그 일과 그 일을 이루려는 열망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이다. (2.) 그는 자녀들도 제사에 참석하게 했다. 그들이 제사와 함께 드리는 기도에 동참하고, 제물이 죽임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죽어 마땅한 죄로 인해 깊이 낮아지며, 제물이 바쳐지는 모습을 통해 중보자를 바라보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엄숙한 일은 흥겨운 날들을 보낸 자녀들이 다시 진지해지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5. 그는 이와 같은 일이 되풀이될 때에만 아니라 항상 그렇게 행했다. 이미 목욕한 자도 발을 씻어야 하기 때문이다(요 13:10). 우리가 범죄를 자주 되풀이하므로 회개와 믿음의 행위도 자주 새롭게 해야 한다. 욥은 모든 날, 곧 날마다 제사를 드렸다. 그는 경건의 실천에 한결같았으며 하루도 이를 빠뜨리지 않았다. 특별한 때에 행하는 신앙의 실천이 정기적으로 행해야 할 의무를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정직하게 섬기는 사람은 그분을 끊임없이 섬긴다.
욥기 1장 6-12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⁶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다.
⁷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하니,
⁸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땅에는 그와 같은 사람이 없나니,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니라.
⁹ 이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나이까?
¹⁰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 주위에 울타리를 두르지 아니하셨나이까? 주께서 그의 손이 하는 일을 복되게 하셨고, 그의 재산이 그 땅에서 불어나게 하셨나이다.
¹¹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를 대면하여 저주하리이다.
¹²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보라,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네 손에 있느니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라 하시니, 사탄이 여호와 앞에서 물러갔다.
욥은 부유하고 위대할 뿐 아니라 지혜롭고 선했으며, 하늘과 땅 양쪽에서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사람은 그의 번영의 산이 너무 굳게 서 있어 흔들릴 수 없다고 생각할 만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무서운 폭풍을 품은 짙은 구름이 그의 머리 위에 모여드는 것을 본다. 이 낮은 영역에 사는 동안 우리는 결코 폭풍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보이는 세상에서 그의 환난이 어떻게 갑자기 그를 덮치고 붙잡았는지를 말하기 전에, 여기서는 그 일이 영들의 세계에서 어떻게 의논되었는지를 말한다. 곧 마귀가 욥의 두드러진 경건 때문에 그를 크게 미워하여 그를 괴롭힐 허락을 구하고 얻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들에 있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대화가 미가야의 환상(왕상 22:19-29 등)과 같이 비유적이며, 선한 사람들을 향한 마귀의 악의와 그 악의가 하나님의 제어와 제한 아래 있음을 나타내려는 알레고리라고 보아도 욥 이야기 전체의 신빙성이 조금도 손상되지는 않는다. 다만 여기에는 더 나아가, 이 땅의 일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의논에 매우 많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그 세계는 우리에게 어둡지만, 우리는 그 세계 앞에 매우 드러나 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본다.
I.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있는 사탄(욥 1:6). 사탄이라는 이름이 뜻하듯 그는 하나님과 사람과 모든 선한 것의 “대적”이다. 그는 “여호와 앞에 서려고” 온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임 가운데 억지로 끼어들었다. 이것은 다음 둘 중 하나를 뜻한다. 1. 땅 위 성도들의 모임일 수 있다. 족장 시대의 신앙 고백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창 6:2)이라 불렸고, 그들에게는 종교적 집회와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 왕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오셨고, 하나님의 눈은 참석한 모든 사람 위에 있었다. 그러나 낙원 안에 뱀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사탄이 있었다. 그들이 함께 모일 때 사탄은 그들 가운데 있어 그들을 산만하게 하고 어지럽히며, 그들의 오른편에 서서 그들을 대적한다. “여호와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사탄아!” 또는 2. 하늘의 천사들의 모임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욥 38:7). 그들은 땅에서 수행한 일을 보고하고 새 지시를 받으려고 왔다. 사탄도 본래 그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그는 다시는 그 회중 안에 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가 그들 가운데 온 것으로 묘사된다. 범죄자로 소환되었거나, 혹은 침입자였지만 잠시 묵인된 것이다.
II. 그가 어떻게 그곳에 왔는지에 대한 심문(욥 1:7).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나님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또 무슨 의도로 왔는지 매우 잘 알고 계셨다. 선한 천사들이 선을 행하려고 온 것처럼 그는 해를 끼칠 허락을 얻으려고 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해명을 요구하심으로써 그가 제어와 통제 아래 있음을 보이려 하셨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나님은 이 질문을 하신다. 1. 무엇이 그를 그곳으로 오게 했는지 놀라시는 듯이 하신다.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있느냐? 그렇다. 그는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고후 11:13,14) 때문에 그들 중 하나처럼 보이려 한다. 유의하라. 사람이 마귀의 자녀이면서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집회 가운데 발견될 수 있고, 거기서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추궁을 받게 된다. “친구여, 어찌하여 여기 들어왔느냐?” 또는 2. 그가 그곳에 오기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물으시는 것이다. 어쩌면 여호와 앞에 선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질문,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가 주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드나드는 모든 곳과 우리가 지나가는 모든 길에 대하여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
III. 그가 자신과 자기 순회에 대하여 내놓은 보고. 그는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말한다. 1. 그는 자신이 무슨 선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여호와 앞에 선” 하나님의 아들들처럼, 곧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그의 나라의 이익을 섬기며 구원의 상속자들을 섬기고 왔다고 말할 수 없었다. 2. 그는 자신이 무슨 해를 끼쳤다고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사람들을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서 끌어내리고, 영혼들을 속이고 멸망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결코 아니다. “나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잠 30:20)는 식이다. “주의 종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나이다”라는 식이다. 그가 “땅을 두루 돌아다녔다”고 말함으로써, 그는 자기에게 정해진 경계 안에 머물렀고 자기 한계를 넘지 않았다고 암시한다. “용이 땅으로 내쫓겼고”(계 12:9) 아직 자기 고통의 처소에 갇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우리는 그의 손이 닿는 범위 안에 있다. 그는 너무도 교묘하고 빠르며 부지런하게 땅의 모든 모퉁이까지 파고들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그의 시험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 3. 그는 또한 자기 성격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는 듯하다. (1.) 어쩌면 이것은 교만하고 거만한 태도로 말한 것일 수 있다. 마치 자신이 참으로 “이 세상의 왕”이며, “세상의 나라들과 그 영광”(눅 4:6)이 자기 것인 양, 이제 자기 영토를 순회하고 왔다는 식이다. (2.) 어쩌면 이것은 초조하고 불만스러운 말일 수 있다. 그는 여기저기 다녔지만 안식을 찾지 못했고, 놋 땅의 가인처럼 도망자요 방랑자였다. (3.) 어쩌면 이것은 신중한 말일 수도 있다. “나는 부지런히 일하며 여기저기 다녔다.” 또는 어떤 이들이 읽듯이 “땅을 샅샅이 찾아다녔다.” 실제로 해를 끼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제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IV. 하나님이 욥에 관하여 그에게 하신 질문(욥 1:8).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우리가 먼 곳에 다녀온 사람을 만났는데 그곳에 우리가 지극히 사랑하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이 그곳에 갔었다지요. 혹시 내 친구를 보았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다. 살펴보라. 1. 하나님이 욥에 대해 얼마나 존귀하게 말씀하시는가. 그는 “내 종”이다. 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섬김에서 자신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여기기를 기뻐하신다. 그들은 하나님께 “이름과 찬송”(렘 13:11)이요 “영광의 관”(사 62:3)이 된다. “저기 내 종 욥이 있다. 그와 같은 사람이 없고, 내가 땅의 모든 군주와 권세자들 가운데 그처럼 귀히 여기는 자도 없다. 그와 같은 한 성도는 그들 모두의 가치가 있다. 정직함과 진지한 경건에서 그와 같은 사람이 없다. 많은 사람이 잘하지만 그는 그들 모두보다 뛰어나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다.” 훗날 그리스도께서 백부장과 가나안 여인을 칭찬하신 것도 이와 같다. 그들은 둘 다 욥처럼 그 공동체 밖의 사람들이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자랑한다.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이가 누구니이까?” 그리고 하나님은 성도들을 자랑하기를 기뻐하신다. “백성들 가운데 이스라엘과 같은 자가 누구냐?” 여기서도 “욥과 같은 자가 없다.” 곧 불완전한 상태인 땅에서는 그와 같은 자가 없다. 하늘에 있는 자들은 참으로 그보다 훨씬 더 빛난다. 그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도 그보다 크다. 그러나 “땅에는 그와 같은 자가 없다.” 그 땅에는 그와 같은 사람이 없다. 이처럼 어떤 선한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영광이다. 2. 하나님이 욥의 이 선한 성품을 사탄에게 얼마나 직접적으로 제시하시는가. “네가 내 종 욥에게 마음을 두어 보았느냐?” 하나님은 이로써 다음을 의도하셨다. (1.) 그 악한 영의 배교와 비참함을 더욱 크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너는 그와 얼마나 다른가!” 유의하라. 성도들의 거룩함과 행복은 마귀와 마귀의 자녀들에게 수치와 고통이 된다. (2.) 사탄이 이 땅에 대해 가지고 있다고 보이는 권리를 자랑하는 데 대답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내가 땅을 두루 돌아다녔나이다”라고 말한다. “그 땅은 전부 내 것이다. 모든 육체가 자기 길을 더럽혔다. 그들은 모두 자기 죄 가운데 가만히 앉아 안식을 누리고 있다”(슥 1:10,11)는 식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아니다, 멈추어라. 욥은 내 신실한 종이다.” 사탄은 자랑할 수 있어도 승리하지는 못할 것이다. (3.) 그의 고소를 미리 막기 위해서이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사탄아, 나는 네가 온 일을 안다. 너는 욥을 고발하려고 왔다. 그러나 네가 그를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의 의심할 수 없는 성품이 네 말을 거짓으로 만들지 않느냐?” 유의하라.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향한 마귀와 그 도구들의 모든 악의를 알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고발당하기 전부터 우리를 위하여 나타날 준비가 된 변호자가 있다.
V. 하나님이 욥을 칭찬하신 데 대하여 마귀가 욥에게 던진 비열한 암시. 그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의 종교가 삯을 바라는 것이므로 그가 위선자라고 암시했다(욥 1:9).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나이까?” 살펴보라. 1. 욥을 칭찬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었는데도, 마귀는 그 칭찬을 듣는 것을 얼마나 참지 못했는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칭찬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정당하게 받는 명예의 몫을 시기하는 자들은 마귀와 같다. 사울(삼상 18:5-16 등)과 바리새인들(마 21:15)이 그러했다. 2. 그는 욥을 반대할 것을 찾는 데 얼마나 궁색했는가. 그는 그에게서 나쁜 것을 하나도 고발할 수 없었으므로, 선을 행하는 데 숨은 목적이 있다고 비난했다. 욥의 성난 친구들이 논쟁의 열기 속에서 그에게 씌운 비난(욥 15:4; 22:5)의 절반이라도 사실이었다면, 사탄은 틀림없이 지금 그것을 그에게 들이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제기할 수 없었으므로, 3. 그가 얼마나 교활하게 욥을 위선자로 판단했는지 보라. 그는 욥이 그렇다고 단정하지 않고, 다만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묻기만 했다. 이것은 중상하는 자들, 수군거리는 자들, 험담하는 자들의 흔한 방식이다. 사실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으면서도 질문의 형태로 암시한다. 유의하라. 하나님께 인정받고 받아들여진 사람들이 마귀와 그 도구들에게 부당하게 판단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달리 흠잡을 것이 없으면, 사탄이 욥에게 한 것처럼 위선이라는 혐의를 씌우기는 쉽다. 그들에게는 자신을 깨끗이 밝힐 길이 없고, 다만 인내로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는 길뿐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위선자가 되는 일이지만, 아무 이유 없이 위선자라 불리고 여겨지는 일은 가장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4. 그는 욥을 위선자로 증명하려고 그를 삯꾼처럼 섬기는 자라고 얼마나 부당하게 고발했는가.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말에는 큰 진리가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경건은 큰 유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으로 얻은 것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었다. 사건의 결과가 그것을 증명했다. 욥의 친구들은 그가 크게 고난받았기 때문에 그를 위선자라 비난했고, 사탄은 그가 크게 번영했기 때문에 그를 위선자라 비난했다. 기회를 찾는 자들에게 중상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순종할 때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는 것은 삯꾼 정신이 아니다. 그러나 종교에서 세상적 이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그 이익에 종속시키는 것은 영적 우상숭배, 곧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는 일이며, 치명적인 배교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사람은 오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VI. 사탄이 욥의 번영에 대해 제기한 불평(욥 1:10). 살펴보라. 1. 하나님이 욥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시고, 그의 인격과 가족과 모든 소유를 지키기 위하여 그 주위에 울타리를 두르셨다. 유의하라.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은 그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들어간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의 영적 생명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하나님의 섭리는 그들의 자연적 생명 주위에 울타리를 치므로 그들은 안전하고 평안하다. 하나님은 그를 게으름이나 불의 가운데서 번영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마귀도 그런 것으로 그를 고발할 수 없었다. 정직한 부지런함의 길에서 번영하게 하셨다. “주께서 그의 손이 하는 일을 복되게 하셨나이다.” 그 복이 없으면 손이 아무리 강하고 아무리 능숙해도 일이 형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복이 있으면 “그의 재산이 그 땅에서 놀랍게 불어난다.” 여호와의 복이 부하게 한다. 사탄 자신도 그것을 인정한다. 2. 마귀가 그것을 어떻게 주목하고 어떻게 그를 대적하는 데 이용했는가. 마귀는 그것을 짜증스럽게 말한다. “주께서 그 주위에 울타리를 두르신 것을 내가 보나이다.” 마치 그가 그 울타리 둘레를 돌아보며, 들어가서 해를 끼칠 틈이 하나라도 있는지 살펴보았으나 실망했다는 듯하다. 그것은 완전한 울타리였다. “악한 자가 그것을 보고 근심하였다.” 그리고 그는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번영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자기를 높여 주는 정부에 충성하고, 그렇게 잘 보상해 주는 주인을 섬기는 것은 그에게 감사받을 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VII. 욥의 재산을 벗겨 낼 허락만 받으면 그의 종교가 위선이고 삯을 바라는 것임을 증명하겠다고 사탄이 떠맡은 증명. 그는 말한다(욥 1:11). “이 문제로 시험해 보게 하소서. 그를 가난하게 하시고, 그에게 얼굴을 찌푸리시며, 주의 손을 그에게 돌리소서. 그러면 그의 종교가 어디 있는지 보실 것입니다. 그가 가진 것을 치시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그가 주를 대면하여 저주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나를 믿지 마시고 나를 거짓말쟁이와 거짓 고발자로 공표하소서. 그가 주를 저주하지 않는다면 내가 망하리이다.” 어떤 이들은 마귀 자신이 점잖게 감추었던 이 저주 맹세를 이렇게 보충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불경한 맹세자들은 그것을 뻔뻔하고 대담하게 밖으로 말해 버린다. 살펴보라. 1. 그는 욥이 시험받기를 원하는 그 고난을 얼마나 가볍게 말하는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그저 건드리기만 하소서. 그에게 시작만 하소서. 그를 가난하게 만들겠다고 위협하기만 하소서. 작은 시련 하나가 그의 어조를 바꾸게 할 것입니다.” 2. 그는 그것이 욥에게 줄 영향을 얼마나 악의적으로 말하는가. “그는 헌신을 그만둘 뿐 아니라 그것을 공개적인 반항으로 바꿀 것입니다. 주께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할 뿐 아니라, ‘주를 대면하여 저주’할 것입니다.” “저주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바라크인데, 보통 그리고 본래는 “축복하다”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저주한다는 것은 너무도 불경한 일이어서 거룩한 언어가 그 이름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문맥상 그렇게 이해해야 함은 왕상 21:10-13에서 분명하다. 거기서 그 단어는 나봇에게 씌워진 죄, 곧 그가 하나님과 왕을 모독했다는 혐의에 사용된다. 이제, (1.) 사탄은 욥이 가난해지면 자기 종교를 버리고 자기 고백이 거짓임을 입증하리라고 실제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한 학자가 그의 『영들의 산』에서 관찰했듯이, 사탄은 사람의 자녀들 가운데 자기의 보편적 지배를 입증하려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욥을 당시 살아 있는 최고의 사람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런데 사탄이 그를 위선자로 증명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는 사람들 가운데 신실한 종이 하나도 없고, 세상에는 참되고 진실한 경건이라는 것이 없으며, 종교는 모두 거짓이고, 사탄이 전 인류를 사실상 왕으로 다스린다는 결론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것과,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도 속지 않으신다는 것이 드러났다. (2.) 그러나 욥이 자기 종교를 붙든다 하더라도, 사탄은 그가 심히 고난받는 것을 보는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는 선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들의 슬픔을 기뻐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것과 반대이다.
VIII. 욥의 진실함을 시험하기 위하여 사탄에게 그를 괴롭게 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허락. 사탄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 일을 하시기를 원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소서.” 하나님은 그에게 하도록 허락하셨다(욥 1:12).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네 손에 있다. 가능한 한 날카롭게 시험해 보아라. 그에게 네 최악을 행해 보아라.” 이제, 1. 하나님이 사탄에게 이런 허락을 주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자기 산비둘기의 생명을 대적의 손에 넘기시고, 그런 어린양을 그런 사자에게 넘기신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영광과 욥의 명예와 섭리의 설명과 모든 시대의 고난받는 백성의 격려를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판결이 내려지면 유익한 선례가 될 한 사건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베드로가 체질받도록 허락하신 것처럼 욥이 시험받도록 허락하셨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눅 22:32) 돌보셨고, 그때 그 믿음의 시험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드러났다(벧전 1:7). 그러나, 2. 하나님이 마귀를 “사슬에”, 큰 사슬에 매어 두셨다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다(계 20:1). 그는 먼저 하나님께 청하여 허락을 얻지 않고는 욥을 괴롭힐 수 없었고, 허락받은 범위를 넘어설 수도 없었다.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의 몸은 건드리지 말고 재산만 건드리라는 것이다. 마귀가 가진 권세는 제한된 권세이다.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 내어 주는 것 외에는 사람들을 타락시킬 권세가 없고, “위로부터 주어진” 것 외에는 사람들을 괴롭게 할 권세도 없다.
IX. 사탄이 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임에서 떠남. 모임이 끝나기 전에 사탄은 가인처럼(창 4:16) “여호와 앞에서” 물러갔다. 그는 도엑처럼(삼상 21:7) 그 앞에 더 오래 머물지 않았고, 자기 악의적인 목적을 이룰 때까지만 있었다. 그는 물러갔다. 1. 자기 뜻을 이룬 것을 기뻐하며, 선한 사람에게 해를 끼칠 허락을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갔다. 2. 시간을 조금도 잃지 않고 곧바로 자기 계획을 실행하려고 결심하며 갔다. 이제 그는 땅을 두루 돌아다니며 방황하려고 떠난 것이 아니라, 자기 의무의 길을 조심스럽게 걷고 있으나 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가엾은 욥을 직접 공격하려고 곧장 나아갔다.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 사이에서 우리에 관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욥기 1장 13-19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¹³ 하루는 욥의 아들들과 딸들이 맏형의 집에서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¹⁴ 그때 한 사자가 욥에게 와서 말했다. “소들은 밭을 갈고 있었고 암나귀들은 그 곁에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¹⁵ 그런데 스바 사람들이 달려들어 가축을 빼앗고 종들을 칼날로 죽였습니다. 오직 저만 홀로 피하여 주인께 알리러 왔습니다.”
¹⁶ 그가 아직 말하고 있을 때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들과 종들을 불살라 없앴습니다. 오직 저만 홀로 피하여 주인께 알리러 왔습니다.”
¹⁷ 그가 아직 말하고 있을 때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 “갈대아 사람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에게 달려들어 끌고 갔고 종들을 칼날로 죽였습니다. 오직 저만 홀로 피하여 주인께 알리러 왔습니다.”
¹⁸ 그가 아직 말하고 있을 때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 “주인의 아들들과 딸들이 맏형의 집에서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¹⁹ 그런데 보십시오. 광야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집 네 모퉁이를 치자 집이 젊은이들 위로 무너져 모두 죽었습니다. 오직 저만 홀로 피하여 주인께 알리러 왔습니다.”
여기에는 욥이 당한 환난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I. 사탄은 욥의 자녀들이 맏형의 집에서 돌아가며 베푸는 잔치를 시작한 바로 그날 재난을 일으켰다(욥 1:13). 맏아들은 두 몫을 받았을 것이므로 그 집의 대접이 가장 풍성했을 것이다. 이 관습을 다시 시작하던 때 온 가족은 아무 의심 없이 온전히 안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탄은 재난이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지도록 바로 이때를 골랐다. 그가 나의 즐거운 밤을 두려움으로 바꾸었다(사 21:4).
II. 재난은 모두 한꺼번에 닥쳤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한 사자가 말하는 동안 다른 사자가 왔고, 그가 이야기를 마치기도 전에 셋째와 넷째 사자가 잇달아 도착했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이를 다음과 같이 배열했다. 1. 욥의 환난이 그를 향한 하나님의 비상한 진노처럼 보이게 하여, 섭리가 옳고 그름도 가리지 않고 그를 파멸시키기로 작정했으며 자신을 변호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고 여기게 만들고, 그로써 하나님의 섭리에 격분하게 하려 했다. 2. 욥이 생각을 가다듬고 자신을 수습하여 이성적으로 은혜로운 복종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겹친 재난에 압도되어 무너지게 하려 했다. 잠시 멈출 틈조차 없으면 사람은 성급히 말하기 쉽고, 바로 그런 때에 하나님을 저주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종종 여러 시험으로 무거운 근심을 겪는다. 깊은 곳이 깊은 곳을 부르고 파도와 물결이 연이어 덮친다. 그러므로 한 고난이 우리를 일깨워 다음 고난을 준비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가 쓴 잔을 아무리 깊이 마셨더라도,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자기 몫을 다 마셨으니 이제 잔이 완전히 지나갔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III. 재난은 욥의 모든 소유를 빼앗아 그가 누리던 것들을 완전히 끝냈다. 그가 잃은 것들의 세부 목록은 앞서 나온 소유 목록과 정확히 대응한다.
1. 욥에게는 소 오백 겨리와 암나귀 오백 마리, 그리고 그것들을 돌볼 적절한 수의 종들이 있었으나 이 모두를 한꺼번에 잃었다(욥 1:14-15). 이 보고는 다음 사실을 알려 주었다. (1.) 재난은 종들의 부주의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욥의 분노가 종들에게 쏟아졌을 것이다. 소들은 놀지 않고 밭을 갈고 있었고, 나귀들도 제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주인 없는 짐승처럼 붙잡힌 것이 아니라 종의 눈앞에서 소들 곁에 각기 제자리를 지키며 풀을 뜯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축복하며 “하나님이 이 밭갈이를 형통하게 하시기를 바란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지혜와 주의와 부지런함도 고난에서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하며, 심지어 보통은 경솔함과 태만 때문에 생기는 종류의 고난에서도 그러하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이 아무리 깨어 있어도 헛되이 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환난이 곁길이 아니라 의무의 길에서 행하던 우리를 찾아왔다면, 그것은 환난 가운데 얼마간의 위로가 된다. (2.) 재난은 이웃인 스바 사람들의 악함으로 일어났다. 그들은 약탈과 노략으로 살아가던 강도 무리였을 것이다. 그들은 소와 나귀를 빼앗고, 가축을 지키려고 신실하고 용감하게 최선을 다한 종들을 죽였다. 오직 한 사람만 피했다. 이는 그 사람이나 그의 주인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욥이 떠도는 소문을 통해 소식을 조금씩 접하기 전에 목격자에게서 확실한 보고를 한꺼번에 듣게 하기 위해서였다. 욥이나 그의 종들이 스바 사람들의 침입을 자극했다고 의심할 근거는 없다. 사탄이 그들의 마음에 이 일을, 바로 이때 행하도록 넣었다. 이로써 사탄은 욥을 고난받게 하고 스바 사람들을 죄짓게 하는 두 가지 목적을 함께 이루었다. 사탄이 해악을 행하도록 하나님의 허락을 받으면, 그 일을 수행할 악한 사람들을 부족함 없이 찾아낸다. 그는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2. 욥에게는 양 칠천 마리와 그것을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으나, 같은 때 번개로 이 모두를 잃었다(욥 1:16). 욥은 마음속으로 스바 사람들의 불의와 잔인함을 꾸짖으며 분노를 터뜨리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소식은 그에게 위를 바라보게 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천둥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번개는 그분의 불이다. 그런데 이 번개는 매우 비상하고 욥을 정확히 겨냥하여, 그의 모든 양과 목자를 한꺼번에 죽였을 뿐 아니라 불살라 버렸다. 오직 한 목자만 살아남아 가련한 욥에게 소식을 전했다. 마귀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고 신앙을 버리게 하려는 목적에 맞추어 이 시험을 매우 교묘하게 운용했다. (1.) 욥이 특별히 제사에 사용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던 양들을 모두 빼앗았다. 마치 하나님이 욥의 제물을 싫어하여, 욥이 그분을 섬기는 데 사용한 바로 그것들로 그를 벌하시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사탄은 욥을 거짓된 종이라고 하나님께 잘못 고발했다. 이제 하늘과 땅을 서로 갈라놓으려는 오랜 계략에 따라, 많은 번제물을 취한 양 떼조차 지켜 주지 않는 가혹한 주인으로 하나님을 욥에게 잘못 제시했다. 이는 욥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라고 말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2.) 사자는 번개를 하나님의 불이라고 불렀는데, 그 표현 자체에는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사탄은 이를 통해 하나님이 욥의 원수가 되어 그와 싸우신다는 생각을 욥의 마음에 심으려 했을 것이다. 이는 스바 사람들의 모든 공격보다 욥에게 훨씬 괴로운 생각이었다. 욥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멸망이 자신에게 두려움이었다고 인정했다(욥 31:23). 그렇다면 하나님의 손에서 직접 온 것처럼 보이는 이 멸망의 소식은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하늘의 불이 제단 위의 양을 살랐다면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의 표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이 목초지의 양을 살랐으므로 그는 이를 하나님의 진노의 표로 볼 수밖에 없었다. 소돔이 불탄 뒤로 이와 같은 일은 없었다.
3. 욥에게는 낙타 삼천 마리와 그것을 돌보는 종들이 있었으나, 세 무리로 나뉘어 쳐들어와 낙타를 몰고 가고 종들을 죽인 갈대아 사람들에게 같은 때 이 모두를 잃었다(욥 1:17). 의무의 길에 있던 욥의 정직한 종들에게 떨어진 하나님의 불이 도리어 악을 행하던 스바와 갈대아 약탈자들에게 떨어졌다면, 그 일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은 큰 산처럼 명백하고 뚜렷했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의 길은 형통하여 그들이 노략물을 가지고 달아나는 반면 의롭고 선한 사람은 갑자기 끊어질 때, 하나님의 의는 그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큰 깊음과 같다(시 36:6).
4. 욥이 가장 사랑하고 귀하게 여긴 소유는 열 자녀였다. 이 비극을 마무리하듯, 잔치하던 집이 무너져 자녀들이 그 폐허에 묻혀 죽었고, 소식을 급히 전하러 온 한 사람을 제외하면 그들을 시중들던 모든 종도 함께 죽었다는 보고가 같은 때 그에게 이르렀다(욥 1:18-19). 이는 욥이 입은 손실 가운데 가장 컸고 그의 마음을 가장 깊이 찔렀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다른 자극들이 실패하더라도 이것으로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게 하려고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다. 자녀들은 우리 자신의 일부와 같다. 자녀와 헤어지는 것은 지극히 어렵고, 선한 사람의 가장 여린 부분을 건드린다. 더구나 여러 해 동안 염려하고 소망해 온 자녀 모두와 한꺼번에 헤어지고 그들 모두가 한순간에 끊어진 것은 욥의 심장을 참으로 깊이 찔렀다. (1.) 자녀들이 모두 함께 죽었고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았다. 지혜롭고 선한 다윗도 아들 하나의 죽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렇다면 모든 자녀를 잃고 한순간에 자식 없는 자로 기록된 가련한 욥에게 이 일이 얼마나 무겁게 눌렀겠는가! (2.) 그들은 갑자기 죽었다. 오랜 병으로 죽었다면 욥은 죽음을 예상하라는 예고를 받고 그 상실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닥쳤다. (3.) 그들은 잔치하며 즐거워하던 중 죽었다. 기도하던 중 갑자기 죽었다면 욥이 조금은 더 잘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음이 좋은 영적 상태에 있던 그들을 찾아왔다고 소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피가 잔치와 섞였다. 욥은 바로 그런 자리에서 그들이 죄를 범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저주했을지도 모른다고 늘 염려했다. 어쩌면 과식과 술 취함으로 마음이 둔해졌을 때 그날이 밤의 도둑처럼 예고 없이 그들에게 닥쳤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자녀들의 영혼을 늘 세심하게 염려했던 욥에게, 이제 그들이 그가 그들 모두의 수대로 드리던 제사의 도움도 미칠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생각은 슬픔을 크게 더했을 것이다. 모든 일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닥친다는 사실을 보라. 욥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늘 기도해 주었고 서로 사랑하며 살았으나, 이처럼 때 이른 죽음을 맞았다. (4.) 그들은 공중 권세 잡은 자인 마귀가 일으킨 바람으로 죽었다(엡 2:2).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손길과 진노의 표로 여겼다. 빌닷도 그렇게 해석했다. 네 자녀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으므로 그가 그들을 그 죄 가운데 버리셨다(욥 8:4). (5.) 욥이 다른 모든 상실 아래서 위로받기 위해 자녀들을 가장 필요로 하던 때 그들이 빼앗겼다. 모든 피조물은 이처럼 비참한 위로자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언제나 즉시 만날 수 있는 도움을 얻는다.
²⁰ 이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
²¹ 그리고 말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으니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갈 것이다. 여호와께서 주셨고 여호와께서 거두셨으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기를 바란다.”
²² 이 모든 일에 욥은 죄를 범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어리석은 일을 돌리지 않았다.
마귀는 욥을 자극하여 하나님을 저주하게 하려고 허락을 구했던 모든 일을 다 행했다. 욥의 모든 소유를 건드렸고, 참으로 철저히 건드렸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동방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부유했던 자가 밤이 오기 전에 가난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탄이 암시했듯 재물이 욥의 신앙을 떠받치는 유일한 원리였다면, 재물을 잃은 지금 그는 틀림없이 신앙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들이 전하는, 고난 아래서 보인 욥의 경건한 태도는 마귀가 거짓말쟁이이며 욥은 정직한 사람임을 충분히 입증했다.
I. 그는 고난 아래서 사람다운 태도를 보였다. 나무토막이나 돌처럼 둔하고 무감각하지 않았으며, 자녀와 종들의 죽음에도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비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밀었다(욥 1:20). 이는 큰 슬픔을 나타내는 통상적인 표현으로서, 자신을 치신 주의 손길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무례한 행동을 터뜨리거나 지나친 격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기절하여 쓰러지지 않고 싸움에 나서는 용사처럼 일어났다. 격분하여 옷을 벗어 던진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관습에 따라 매우 엄숙히 겉옷 곧 외투를 찢었다. 격정에 사로잡혀 머리카락을 쥐어뜯은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머리를 밀었다. 이 모든 행동은 그가 평정을 지키고, 온갖 자극 속에서도 자기 영혼을 용감하게 보존하여 안식을 유지했음을 보여 준다. 그가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점도 주목할 만하다. 자녀들의 죽음을 듣기 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 소식을 들은 뒤에야 일어나 겉옷을 찢었다. 세속적이고 믿음 없는 마음이라면 “먹일 양식이 없어졌으니 먹을 입도 없어진 것이 다행이고, 나누어 줄 재산이 없어졌으니 자녀도 없어진 것이 다행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더 잘 알았다. 자녀들에게 줄 것이 거의 또는 전혀 없더라도 섭리가 그들을 살려 주었다면 감사했을 것이다. 여호와 이레, 곧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을 들을 때 옷을 찢는 관습을 기억하면서, 사탄이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유혹하며 마음에 던져 넣은 신성모독적 생각에 욥이 거룩한 분노를 느껴 옷을 찢었다고 추정한다.
II. 그는 고난 아래서 지혜롭고 선한 사람, 곧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외적 환난이라는 악보다 죄라는 악에서 떠난 사람답게 처신했다.
1. 그는 하나님의 손 아래 자신을 낮추었고, 풍부에 처할 줄 아는 것처럼 궁핍에 처할 줄도 아는 사람답게 자신에게 임한 섭리에 순응했다. 하나님이 울고 애통하라고 부르실 때 그는 울고 애통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를 밀었다. 하나님 앞에서 티끌에까지 자신을 낮추는 사람처럼 땅에 엎드렸다. 죄를 뉘우치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에 참을성 있게 복종하는 태도로 자기 죄악의 형벌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그는 자기 신앙의 진실함을 보였다. 위선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결박하실 때 부르짖지 않기 때문이다(욥 36:13). 또한 이로써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을 준비를 했다. 우리가 느끼려고 하지 않는 슬픔을 어떻게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겠는가?
2. 그는 이 사건들로 인해 동요하여 자기 영혼을 잃지 않도록 마음을 가라앉히는 이치들을 생각했다. 그는 인간 삶의 보편적인 상태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 논증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고,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갈 것이다. 곧 아프거나 지친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머리를 대듯,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땅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흙이었고 떠날 때 흙으로 돌아가며(창 3:19), 본래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전 12:7), 우리가 취해진 곳 곧 진흙으로 알몸인 채 돌아간다(욥 33:6). 바울도 딤전 6:7에서 욥의 이 말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세상의 재물을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다른 이들에게서 받았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나갈 수 없음이 분명하므로 다른 이들에게 남겨 두어야 한다. 우리는 무장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옷도 없이, 무력하고 아무 방편도 없으며 다른 피조물들만큼 잘 덮이거나 보호받지도 못한 채 알몸으로 세상에 온다.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는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앞에서 수치스럽게 벌거벗은 자가 되게 한다. 세상을 떠날 때도 알몸으로 나간다. 성화된 영혼은 옷 입고 가지만 몸은 벌거벗는다(고후 5:3). 죽음은 우리가 누리던 모든 것을 벗겨 간다. 옷은 죽은 몸을 따뜻하게 하거나 아름답게 꾸밀 수 없다. 이 생각이 욥으로 하여금 모든 상실 아래서 잠잠하게 했다. (1.) 그는 처음 있던 자리로 돌아갔을 뿐이다. 욥은 자신을 불구가 되거나 상처 입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벌거벗은 사람으로 보았다. 다른 어떤 것도 자기 것이 아니게 되었지만 자기 자신은 여전히 온전히 남았으므로, 처음 상태로 돌아간 것뿐이었다. Nemo tam pauper potest esse quam natus est, 곧 “사람은 태어났을 때보다 더 가난해질 수 없다”(미누키우스 펠릭스(Min. Felix)). 우리가 가난해졌더라도 부당한 일을 당했거나 크게 손상된 것은 아니다. 태어났을 때와 같은 상태가 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2.) 그는 결국 반드시 이르러야 할 자리에 이른 것뿐이며, 예상보다 조금 일찍 옷을 벗었거나 오히려 짐을 내려놓은 것뿐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옷을 벗으면 조금 불편하지만, 취침 시간이 가까웠다는 생각으로 더 잘 견딜 수 있다.
3.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이 일을 맞아 하나님의 섭리를 크게 경외하고 그 처분에 온유하게 복종하는 말로 자기 마음을 나타냈다. 욥이 이처럼 선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며 기뻐할 만하다. 욥 자신은 몰랐지만 그의 온전함을 시험하는 핵심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마귀는 욥이 고난 아래서 하나님을 저주하리라고 말했으나, 욥은 도리어 하나님을 송축하여 자신이 정직한 사람임을 입증했다.
(1.) 그는 이전에 누린 긍휼과 현재 겪는 고난 모두에서 하나님의 손을 인정했다. 여호와께서 주셨고 여호와께서 거두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음 모든 일에서 인정해야 한다. [1.] 우리가 누리는 모든 위로에서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존재를 주셨고,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며, 재물을 주셨다. 우리를 부유하게 한 것은 자신의 재주나 근면이 아니라 우리의 염려와 노력에 더하신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그분은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셨고, 우리를 위해 피조물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 우리의 몫도 베푸셨다. [2.] 우리가 만나는 모든 십자가에서 인정해야 한다. 주신 바로 그분이 거두셨다. 그분이 자기 소유를 뜻대로 다루실 수 없겠는가? 욥이 수단들 너머를 바라보며 첫째 원인에 시선을 고정한 모습을 보라. 그는 “여호와께서 주셨고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이 빼앗았다. 하나님이 나를 부유하게 하셨고 마귀가 나를 가난하게 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도리어 “주신 분이 거두셨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행하셨으므로 그는 잠잠했고 할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을 주신 분은 원하시는 것을,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만큼 거두실 수 있다. 세네카(Seneca)도 Abstulit, sed et dedit, 곧 “그가 거두었으나 또한 주었다”라고 논증했다. 에픽테토스(Epictetus)는 훌륭하게도 이렇게 말한다(15장). “어떤 위로를 빼앗겼을 때, 이를테면 자녀가 죽거나 재산 일부를 잃었을 때 apolesa auto, 곧 ‘내가 그것을 잃었다’라고 말하지 말고 apedoka, 곧 ‘정당한 소유자에게 돌려주었다’라고 말하라. 그러나 그대는 kakos ho aphelomenos, 곧 ‘나를 강탈한 자는 악한 사람이다’라고 반박할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ti de soi melei, 곧 ‘주신 분이 무슨 손을 통해 자기가 준 것을 되찾으시는지가 그대에게 무슨 상관인가?’이다.”
(2.) 그는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을 경배했다.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그는 엎드려 경배했다. 고난은 우리를 신앙의 실천에서 돌아서게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실천에 더욱 힘쓰게 해야 한다. 우는 일이 씨 뿌리기를 방해해서는 안 되며 예배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욥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도 바라보고 그 이름에 영광을 돌렸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기를 바란다. 그는 하나님에 관해 늘 품었던 크고 선한 생각을 그대로 유지했고, 이전처럼 기꺼이 그것을 말하여 하나님을 찬양했다. 하나님이 주실 때뿐 아니라 거두실 때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도 인자하심과 심판을 함께 노래해야 한다(시 101:1). [1.] 그는 이제 거두어진 것일지라도 한때 주어졌다는 사실로 인해 하나님을 송축했다. 위로가 우리에게서 제거될 때, 우리는 그것을 한때 누렸고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던 것보다 훨씬 오래 누렸다는 사실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더 나아가 [2.] 욥은 거두시는 일에서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자원하여 복종함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렸다. 고난을 통해 자신에게 주려고 계획하신 선과, 고난 아래 베푸신 은혜로운 붙드심과, 마침내 행복한 결말에 이르리라는 믿음의 소망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 고난 아래 나타난 욥의 한결같음과 선한 처신에 주신 영예로운 증언이 나온다. 욥은 칭찬받으며 시험을 통과했다(욥 1:22). 이 모든 일에서 욥은 그릇되게 행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어리석음을 돌리지 않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나타난 지혜를 조금도 비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평과 조급함은 사실상 하나님을 어리석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은 그런 마음의 작용을 세심히 경계했으며, 우리도 그래야 한다. 하나님은 옳게 행하셨으나 우리는 악하게 행했고, 하나님은 지혜롭게 행하셨으나 우리는 어리석게, 참으로 매우 어리석게 행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십자가와 자극 아래서 평정만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선한 생각과 그분과의 감미로운 교제를 계속 유지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든 받지 못하든 욥처럼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것이다.
욥의 역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한다. I. 그의 큰 경건을 일반적으로 서술하고(욥 1:1), 욥 1:5에서는 그 경건이 드러난 특별한 사례를 제시한다. II. 그의 큰 번영을 서술한다(욥 1:2-4). III. 그를 향한 사탄의 악의와, 그의 한결같음을 시험하도록 사탄이 얻어 낸 허락을 서술한다(욥 1:6-12). IV. 그에게 닥친 뜻밖의 환난, 곧 재산의 몰락(욥 1:13-17)과 자녀들의 죽음(욥 1:18-19)을 서술한다. V. 이러한 환난 아래서 그가 보인 모범적인 인내와 경건을 서술한다(욥 1:20-22). 이 모든 일에서 욥은 고난을 견디는 본보기로 제시된다. 어떤 번영도 우리를 고난에서 지켜 줄 수 없지만, 온전함과 정직함은 고난을 지나는 동안 우리를 보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