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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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여호와께서 다시 욥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되,
² 전능자와 다투는 자가 그를 가르치려 하느냐? 하나님을 책망하는 자는 이에 대답할지니라.
³ 그때에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말하되,
⁴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주께 무엇이라 대답하리이까? 내 손으로 내 입을 막겠나이다.
⁵ 내가 한 번 말하였으나 대답하지 않겠고 두 번 말하였으나 더 나아가지 않겠나이다.
여기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
I.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그를 낮추는 도전이다. 하나님은 자연의 작용에 관한 욥의 명백한 무지를 드러내는 어려운 질문을 많이 쌓아 놓으심으로써, 욥이 섭리의 방식과 목적을 판단하기에 얼마나 부적격한지를 보여 주셨다. 이제 전체 말씀의 적용으로 독립된 한 질문을 더하여 못을 단단히 박으신다. 하나님은 엘리후가 그랬던 것처럼 욥이 할 말을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시간을 주려고 잠시 멈추신 듯하다. 그러나 욥은 너무 당황하여 침묵했고, 하나님은 여기서 대답하라고 요구하신다(욥 40:1, 2).
이 말씀은 앞에서처럼 ‘회오리바람 가운데서’ 하셨다고 기록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작고 고요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으며, 그 음성이 엘리야에게 그랬듯 회오리바람보다 욥에게 더 크게 역사했다고 생각한다(왕상 19:12, 13). ‘내 가르침은 비처럼 내릴 것이며’, 그렇게 내릴 때 놀라운 일을 이룬다. 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대답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아시며 그들의 침묵에도 알맞게 응답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은 정당하게 하나님의 원수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가 다툼에서 이긴 듯 하나님께 명령하려 하겠는가? 우리는 무지하고 시야가 짧지만 하나님 앞에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채 드러난다. 우리는 의존하는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주권적인 창조주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을 가르치려 하겠는가? 어떤 이들은 ‘전능자와 다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냐?’고 읽는다. 답은 쉽다.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어리석음이다. 맞서면 반드시 멸망하고 복종하면 말할 수 없는 유익을 얻을 분과 다투는 것이 지혜이겠는가?
II. 이에 따른 욥의 겸손한 복종이다. 이제 욥은 제정신으로 돌아와 경건한 슬픔으로 녹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논증할 때에는 굴복하지 않았지만 주님의 음성은 능력이 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죄를 깨닫게 하실 것이다.’ 친구들은 욥을 악인으로 정죄했고, 엘리후도 그를 매우 날카롭게 책망했다(욥 34:7, 8, 37). 그러나 하나님은 그처럼 가혹한 말을 하지 않으셨다. 때로 우리는 친구들에게 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나은 대우와 행위에 대한 더 너그러운 해석을 기대할 수 있다. 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대우에 압도되어 하나님의 은혜에 정복된 포로로 자신을 내어 드린다.
욥은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너무 대담하게 요구하며 자기 주장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서거나 하나님이 주목하실 만한 것을 내놓을 능력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땅을 기어 다니는 가장 비천한 거름더미의 벌레와 같다고 인정한다. 친구들이 말할 때에는 자신도 그들만큼 낫다고 생각하여 대답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할 말이 없었다. 하나님과 비교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보다 못하며, 허무와 비천함 자체임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께 무엇이라 대답하리이까?’라고 한다.
하나님은 욥 40:2에서 대답을 요구하셨다. 욥은 여기서 침묵한 이유를 밝힌다. 완고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잘못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자기 죄성과 비천함을 참으로 깨닫는 사람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하지 못하며,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조차 부끄러워한다. 그 부끄러움의 표로 손으로 입을 막는다.
욥은 악한 생각을 말로 터뜨렸다. ‘내가 한 번 잘못 말했고, 참으로 두 번 말했다.’ 곧 이 담론과 저 담론에서 여러 번 말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그만하겠다. 대답하지 않겠고, 내가 말한 것을 고집하거나 되풀이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지 않겠다.’ 여기서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보라. (1) 잘못과 그 행동의 근거가 된 그릇된 원리를 바로잡는 것이다. 한 번, 두 번, 오래도록 자주 힘껏 주장한 것이라도 잘못임을 깨닫는 즉시 철회해야 한다. 더는 고집하지 않고 오랫동안 붙든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2) 모든 곁길에서 돌아와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더 보태지 않겠다. 다시는 격정에 그만큼 빠지거나 그런 말의 자유를 스스로 허용하지 않으며, 전에 말하고 행동한 방식으로 다시 하지 않겠다.’ 여기까지 이르지 않으면 회개에 못 미친다.
하나님과 논쟁하는 자는 마침내 잠잠해질 것임도 주목하라. 욥은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몹시 대담하게 요구했고, 자기 사건을 얼마나 분명히 밝히며 반드시 의롭다 인정받을 것인지 장담했다. ‘군주처럼 그에게 가까이 나가고’(욥 31:37), ‘그의 보좌까지 나아가겠다’고 했다(욥 23:3). 그러나 곧 충분히 경험하고 자기 변론을 내려놓으며 대답하지 않는다. ‘주여, 지혜와 권리는 모두 주께 있으며, 그것을 의심한 나는 어리석고 악하게 행했습니다.’
욥기 40장 6-14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⁶ 그때에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 가운데서 욥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되,
⁷ 이제 너는 남자답게 허리를 동이라. 내가 네게 묻겠으니 너는 내게 밝히 말하라.
⁸ 네가 내 심판을 무효로 만들겠느냐? 너를 의롭게 하려고 나를 정죄하겠느냐?
⁹ 네게 하나님과 같은 팔이 있느냐? 그와 같은 음성으로 천둥을 칠 수 있느냐?
¹⁰ 이제 위엄과 탁월함으로 자신을 꾸미고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차려입으라.
¹¹ 네 진노의 격렬함을 널리 쏟고 모든 교만한 자를 보아 낮추라.
¹² 모든 교만한 자를 보아 굴복시키고 악인들을 그 자리에서 짓밟으라.
¹³ 그들을 함께 티끌 속에 감추고 그 얼굴을 은밀한 곳에 싸매라.
¹⁴ 그러면 나도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인정하리라.
욥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으로 크게 낮아졌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낮아졌으나 아직 더 낮아져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앞서와 같은 방식과 목적으로 계속 논증하신다(욥 40:6).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라. 1.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합당하게 받아 유익을 얻는 사람은 그분께 더 많은 말씀을 들을 것이다. 2. 참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도 더 철저히 깨닫고 더 깊이 회개할 필요가 있다.
죄가 눈앞에 차례로 놓이고 마음이 상한 사람도 위로를 너무 빨리 붙잡지 말아야 한다. 위로는 일단 오면 영원할 것이므로, 상처를 끝까지 살피고 겉만 아물게 하지 않는 깊은 낮아짐으로 준비해야 한다. 죄를 깨닫는 자리에서 성급히 빠져나오려 하기보다 바르게 나아가야 한다. 마음이 녹고 부드러워지기 시작할 때에는 철저하고 효과적으로 완전히 녹이는 데 도움이 되는 생각을 계속 붙들고 깊이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앞서처럼(욥 38:3) 도전으로 시작하신다(욥 40:7). ‘이제 남자답게 허리를 동이라. 네가 주장하던 용기와 확신이 있다면 지금 보여라. 그러나 곧 네가 나와 상대가 되지 못함을 보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모든 교만한 마음은 마침내 회개하거나 멸망함으로 이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 모든 산과 언덕도 조만간 이렇게 낮아져야 한다. 우리는 다음을 인정해야 한다.
I. 공의에서 하나님과 겨룰 수 없다. 주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일은 의롭고 거룩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대하는 행위는 불의하고 거룩하지 못하다. 우리 자신에게 책망할 것은 많지만 하나님께 책망할 것은 없다(욥 40:8). ‘네가 내 심판을 무효로 만들겠느냐? 내가 말하고 행한 일에 이의를 제기하고, 내가 내린 판결이 잘못되고 불의하다며 취소하려고 오류 심사를 청구하겠느냐?’ 욥의 많은 불평은 이 방향으로 지나치게 기울었다. 그는 ‘내가 부당함을 외쳐도 응답받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에 따른 것임이 확실하므로 무효로 만들 수도, 만들어서도 안 된다.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큰 뻔뻔함이자 불의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를 의롭게 하려고 나를 정죄하겠느냐? 네 평판을 지키기 위해 내 영예가 손상되어야 하느냐? 네게 쏟아진 비난을 다른 방식으로 벗을 수 없다고 해서 내가 너를 불의하게 대했다고 고발해야 하느냐?’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되시도록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의롭다 인정되고 심판하실 때 깨끗하시도록 하나님 앞에서 행한 악을 기꺼이 인정했다(시 51:4; 느 9:33; 단 9:7 참조).
자기를 무죄하게 하려고 하나님을 정죄하는 사람은 극도로 교만하며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모두 크게 오해한다. 회개로 이 잘못을 제때 고치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이 그 변론을 논박하고 죄수를 수치에 빠뜨릴 것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고 온 세상이 그 앞에서 유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II. 능력에서도 하나님과 겨룰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다투는 일은 큰 불경건인 동시에 큰 뻔뻔함이며, 이성과 공의만큼 우리의 유익에도 어긋난다(욥 40:9). ‘네게 길이와 힘에서 하나님의 팔과 같은 팔이 있느냐? 욥 37:1, 2에서 하셨듯, 또는 지금 회오리바람 가운데서 하시듯 하나님과 같은 음성으로 천둥을 칠 수 있느냐?’ 하나님은 욥이 생각한 것만큼 자신과 다툴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하려고 다음을 보여 주신다.
욥은 하나님과 끝까지 싸워 무력으로 자기 사건을 이길 수 없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때로 싸움으로 논쟁을 결정하고 이긴 투사에게 정의가 있다고 판정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의 논쟁을 이 방식으로 결정한다면 사람은 반드시 패한다. 전능자를 대적하여 모을 수 있는 모든 힘은 소멸하는 불 앞의 가시나 찔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사 27:4). ‘땅의 가련하고 연약한 벌레인 네게 만물을 붙드시는 분과 비교할 팔이 있느냐?’ 천사까지 포함한 피조물의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의 제한을 받으며 하나님께 의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본래적이고 독립적이며 무제한이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그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같은 팔이 없다.
욥은 말로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때로 목적 달성에 큰 도움이 되는 소란과 과장된 말로 자기 사건을 이길 수도 없다. ‘하나님과 같은 음성으로 천둥을 칠 수 있느냐?’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음성이 곧 욥의 음성을 삼키며, 한 번의 천둥이 그의 모든 속삭임을 압도하고 무효로 만든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확신 있게, 능력 있게, 명령하고 정복하는 힘으로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창조하는 음성은 ‘천둥’이라 불리고(시 104:7), 원수를 두렵게 하고 패배시키는 음성도 그렇게 불린다(삼상 2:10). 왕의 진노가 사자의 포효와 같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천둥을 흉내 낼 수는 없다.
III. 아름다움과 위엄에서도 하나님과 겨룰 수 없다(욥 40:10). ‘하나님과 비교하여 더 사랑스럽게 보이려 한다면 가장 좋은 옷을 입어라. 이제 위엄과 탁월함으로 자신을 꾸미라. 네가 가진 모든 군사적 장관과 왕실의 화려함을 나타내고, 너를 돋보이게 할 모든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차려입으라. 원수를 두렵게 하고 친구를 매혹할 만하게 해 보라.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엄과 아름다움에 비하면 무엇인가?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 앞 반딧불의 빛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마귀와 모든 어둠의 권세를 두렵고 떨게 하는 위엄과 영광으로 자신을 꾸미신다. 천사와 빛 가운데 있는 모든 성도를 놀랍고 기쁘게 하는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차려입으신다. 다윗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평생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바랐다. 이에 비하면 군주가 두려움을 얻으려고 두르는 모든 위엄과 탁월함, 사랑받으려는 이들이 꾸미는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욥이 하나님과 다투면서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빛을 발하실 때 해가 부끄러워하고 달이 수치를 당할 것이다.’
IV. 교만한 자를 다스리는 통치권에서도 하나님과 겨룰 수 없다(욥 40:11-14). 여기서 논점은 짧은 시험으로 모아진다. 욥이 하나님처럼 쉽고 효과적으로 교만한 폭군과 압제자를 낮출 수 있다면 하나님과 겨룰 만한 근거가 조금은 있다고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을 보라. [1] 교만한 사람은 악한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행하는 많은 악의 밑바닥에는 교만이 있다. [2]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낮아지고 굴복할 것이다. ‘교만은 멸망보다 앞선다.’ 굽히지 않으면 부러지고, 참된 회개로 스스로 낮추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영원한 수치에 이르도록 낮추실 것이다. 악인은 ‘그 자리에서 짓밟힐’ 것이다. 어디서 발견되든, 자기 자리라고 주장하고 거기 뿌리내린 듯해도 바로 그곳에서 짓밟힌다. 그 자리가 주는 모든 부와 권세와 영향력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3] 교만한 자들에게 널리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낮추고 꺾어 굴복시킬 것이다. 큰 날에 하실 것처럼, 또 이생에서도 때때로 하시듯 진노의 격렬함을 쏟으시면 가장 완고한 마음도 버티지 못한다. ‘누가 그의 진노의 능력을 알겠는가?’ [4] 하나님은 교만한 폭군을 쉽게 낮추실 수 있고 실제로 낮추신다. 그들을 한 번 보고 낮추시며, 진노의 눈길 한 번으로 수치와 두려움과 완전한 파멸에 빠뜨리신다. 은혜로운 눈길로는 통회하는 마음을 소생시키신다.
[5] 마침내 철저하게 행하신다(욥 40:13). 다시 일어나기를 바랄 수 있는 티끌에 넘어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모세가 죽인 교만한 애굽 사람을 모래 속에 감춘 것처럼 ‘티끌 속에 감추신다’(출 2:12). 곧 죽음뿐 아니라 돌아올 수 없는 구덩이인 무덤에 이르게 하신다. 그들은 자기 위세를 자랑했지만 망각 속에 묻혀, 눈과 생각에서 사라진 티끌 속의 자들처럼 더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악을 행하려고 동맹과 연합으로 서로 얽혔으므로 이제 묶음으로 함께 결박되고 ‘함께’ 감추어진다. 그들의 안식이 아니라 수치가 함께 티끌 속에 있다(욥 17:16).
더 나아가 정죄된 뒤 얼굴을 가렸던 하만처럼 범죄자 취급을 받아 ‘그 얼굴이 은밀한 곳에서 싸매이고’, 무덤에서 얼굴이 싸매였던 나사로처럼 죽은 자 취급을 받는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죄인을 향해 하나님께서 마침내 거두실 승리는 이처럼 완전하다. 하나님은 이로써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신다.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므로 거룩하시고, 벌하시므로 세상의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낮추실 수 있으므로 전능하신 주이시다. 교만한 바로를 낮추어 홍해의 모래 속에 감추셨을 때 이드로는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교만하게 대할 때 여호와께서 그들보다 높으셨다’고 결론 내렸다(출 18:11; 계 19:1, 2 참조).
(2) 욥에게 이 일을 해 보라고 제안하신다. 욥은 하나님과 섭리를 향해 격정적으로 다투며, 마치 진노를 하늘로 쏟아 하나님까지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여겼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먼저 교만한 사람에게 네 솜씨를 시험해 보라. 그들이 네 진노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곧 알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중히 여기거나 그것 때문에 움직여야 하겠느냐?’
욥은 폭군과 압제자의 번영과 권세를 불평하며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신 통치를 잘못이라고 비난하려 했다. 그러나 더 잘 고칠 수 없다면 흠잡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만 교만한 자를 낮추고 굴복시킬 충분한 능력이 있다면, 언제 어떻게 행할지도 아시는 지혜가 분명히 충분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시하거나 세상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칠 일이 아니다. 하나님과 같은 팔이 없다면 하나님의 일을 그 손에서 빼앗으려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 힘으로 원수를 낮출 수 없다면 자기 힘으로 자기를 구원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할 수 있다면 하나님 자신도 인정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정당한 칭찬을 빼앗지 않으며 얻을 만한 영예를 부인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자기 손으로 구원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¹⁵ 이제 내가 너와 함께 만든 베헤못을 보라. 그것은 소처럼 풀을 먹는도다.
¹⁶ 보라, 그 힘은 허리에 있고 그 기력은 배의 근육에 있도다.
¹⁷ 그것은 꼬리를 백향목처럼 움직이며 넓적다리의 힘줄은 단단히 얽혀 있도다.
¹⁸ 그 뼈는 놋쇠 조각처럼 강하며 그 골격은 쇠막대기 같도다.
¹⁹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만 자기 칼을 그것에게 가까이 가져갈 수 있느니라.
²⁰ 산들이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고 모든 들짐승이 거기서 뛰노는도다.
²¹ 그것은 그늘진 나무 아래와 갈대와 늪의 은밀한 곳에 눕는도다.
²² 그늘진 나무들이 그 그림자로 그것을 덮으며 시냇가 버드나무가 그것을 둘러싸는도다.
²³ 보라, 강물이 넘쳐도 서두르지 않고 요단강을 자기 입으로 들이마실 수 있다고 믿는도다.
²⁴ 그것은 눈으로 강을 삼킬 듯하며 그 코로 올무를 꿰뚫는도다.
하나님은 자기 능력을 더욱 증명하고 욥의 주장을 논박하려고, 사람보다 몸집과 힘이 훨씬 큰 두 동물을 묘사하며 말씀을 마치신다. 하나는 ‘베헤못’, 다른 하나는 ‘리워야단’이라 부르신다. 이 구절들은 앞의 동물을 묘사한다. ‘이제 베헤못을 보라. 이 짐승을 만들고 그 모든 힘을 준 분과 네가 다툴 수 있는지, 오히려 그분께 복종하고 화목하는 것이 지혜가 아닌지 생각해 보라.’
‘베헤못’은 일반적으로 짐승들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특정 종 하나를 가리킬 것이다. 어떤 이들은 수소로 이해하고, 다른 이들은 애굽에서 잘 알려졌다고 하는 양서 동물인 하마로 본다. 하마는 나일강의 물고기들 사이에서 살다가 땅으로 나와 먹이를 먹는다. 그러나 나는 이 동물을 코끼리로 본 고대의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에서 떠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코끼리는 매우 강하고 장엄하며 다른 모든 동물보다 몸집이 크고 총명도 놀랍다. 동물 세계에서 명성이 매우 크므로, 욥 38:1-39:30에서 수많은 네발짐승의 자연사를 다루면서 코끼리를 빠뜨렸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다음을 살펴보라.
I. 여기 제시된 베헤못의 묘사이다.
1. 몸이 매우 강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다. ‘그 힘은 허리에 있다’(욥 40:16). 다른 피조물의 뼈와 비교하면 ‘쇠막대기 같다’(욥 40:18). 척추가 매우 강하므로 꼬리가 크지 않아도 명령하는 듯한 힘으로 백향목처럼 움직인다(욥 40:17).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코끼리의 코로 이해한다. 원어가 몸의 끝부분을 가리킬 수 있고 코에는 실제로 놀라운 힘이 있기 때문이다. 코끼리는 등과 허리와 넓적다리의 힘줄이 매우 강하여 큰 나무 탑과 그 안의 많은 전투원을 짊어질 수 있다. 몸의 힘에서는 어떤 동물도 코끼리에 근접하지 못한다. 이것이 이 묘사에서 강조하는 핵심이다.
2. 땅의 산물을 먹고 다른 동물을 잡아먹지 않는다. ‘소처럼 풀을 먹고’(욥 40:15), ‘산들이 그것을 위해 먹이를 낸다’(욥 40:20). 들짐승들은 사자 앞에서처럼 떨거나 도망하지 않고 위험이 없음을 알아 그 주위에서 뛰논다. 이 사실은 다음을 생각하게 한다. (1) 이렇게 몸집이 크고 많은 먹이를 필요로 하는 피조물이 육식을 하지 않도록 정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육식을 했다면 한 생명을 유지하려고 수많은 생명이 죽어야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생명의 파괴를 막으려고 들의 풀로 만족하게 하셨다.
(2) 사람의 먹이에 관한 처음의 규정대로 육식 없이 채소와 열매로 사는 일을 좋게 볼 수 있다(창 1:29). 코끼리와 말과 소의 힘도 고기 없이 유지되는데 사람의 힘이라고 그러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를 사용하더라도 ‘고기를 탐식하는 자들 가운데’ 있지 말아야 한다(잠 23:20). (3)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좋게 볼 수 있다. 사자처럼 모든 이가 자기를 무서워하게 하는 것보다 코끼리처럼 이웃이 편안하고 즐겁게 자기 곁에 있게 하는 편을 원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가?
3. 베헤못은 ‘그늘진 나무 아래에 눕고’(욥 40:21), 나무는 ‘그 그림자로 그것을 덮는다’(욥 40:22). 거기서 자유롭고 열린 공기를 마신다. 먹이를 잡아먹고 사는 사자는 쉴 때 좁고 어두운 굴로 물러가 그 은밀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욥 38:40). 다른 이에게 두려움을 주는 자는 때로 자신에게도 두려움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이가 자기 주위에서 편안하게 지내게 하는 자는 자신도 편안할 것이다. 갈대와 늪과 시냇가 버드나무는 매우 약하고 가느다란 방어물이지만, 해칠 의도가 없으므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에게는 충분한 보호와 안전이 된다.
4. 매우 많이 물을 마신다. 술이나 독주가 아니라 맑은 물을 마신다. 술을 탐하여 취함으로 자기를 짐승으로 만드는 일은 사람에게만 특별하다. (1) 베헤못의 몸집이 엄청나므로 그에 맞는 공급이 필요하다(욥 40:23). 시간을 충분히 주고 재촉하지 않으면 강 하나를 다 마실 듯 많은 물을 마신다. 또는 물을 마실 때 두려워하는 동물처럼 서두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기 힘과 안전을 확신하므로 서두르지 않으며, 천천히 하되 충분히 마신다.
(2) 눈은 실제로 마실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것을 먼저 탐한다. 오랫동안 물을 먹지 못해 몹시 목마르면 ‘요단강을 자기 입으로 마셔 버릴 수 있다고 믿으며’ 심지어 ‘눈으로 강을 삼키려’ 한다(욥 40:24). 탐욕스러운 사람이 갈망하는 세상 재물을 향해 눈을 날리듯, 이 큰 짐승은 눈으로 강을 낚아채거나 들이마신다고 표현된다. (3) 코에는 두 일을 감당할 힘이 있다. 탐욕스럽게 물을 마시러 갈 때 물고기를 잡으려고 물속에 친 올무와 그물도 코로 꿰뚫는다. 힘이 매우 크고 갈망이 강하므로 길을 막는 어려움을 아무것도 아닌 듯 여긴다.
II. 이 묘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우리 앞에 놓인 산 같은 짐승, 지나치게 크게 자란 이 동물을 살펴보았다. 이는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즐기게 하는 구경거리로만 제시된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게 하는 논증으로 주어졌다.
1. 하나님께서 이 거대한 동물을 지으셨다. 이토록 두렵고 놀랍게 지어진 존재는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 지혜의 고안, 능력의 산물이다. ‘내가 만든 베헤못’이다(욥 40:15). 이 짐승이나 다른 피조물이 가진 모든 힘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그러므로 모든 능력은 본래부터 무한히 하나님 안에 있으며, 우리는 그런 팔과 다툴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베헤못은 그 종류에서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으뜸’이라 불리며(욥 40:19), 창조주의 능력과 지혜를 탁월하게 보여 준다.
역사가들이 전하는 코끼리 기록을 읽으면 그 능력이 다른 어떤 짐승보다 이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 아래의 창조 영역에서 그보다 뛰어난 피조물이 없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으뜸’이라 부르기에 알맞다.
2.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베헤못을 지으셨다. 다른 네발짐승들처럼 사람과 같은 날에 지으셨고(창 1:25, 26), 물고기와 새는 전날 지으셨다. 같은 땅과 같은 환경에서 살고 움직이게 하셨으므로, 사람과 짐승은 함께 자원을 누리는 존재로서 신적 섭리에 의해 함께 보존된다고 한다(시 36:6). ‘내가 너와 함께 만든 베헤못이다. 내가 그 짐승도 너도 만들었는데, 짐승은 나와 다투지 않는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다투느냐? 내가 베헤못도 너와 함께 만들었는데, 너를 만들었다고 해서(욥 10:9) 어찌 특별한 호의를 요구하느냐? 내가 그 짐승을 다루듯 너도 원하는 대로 쉽게 다룰 수 있고, 네가 거부하든 선택하든 그렇게 할 것이다. 네가 바라보고 교훈을 받도록 그것을 너와 함께 만들었다.’
하나님의 전능과 주권적 통치의 증거와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어디에 있든 그것들은 가까이, 우리와 함께, 눈앞에 있다.
3.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 칼을 그것에게 가까이 가져갈 수 있다’(욥 40:19). 그 거대한 몸집과 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만든 손은 원하실 때 다시 없애실 수 있고, 아무 어려움 없이 낭비나 부당함이라는 비난도 받지 않으면서 벌레나 파리처럼 쉽게 코끼리를 죽일 수 있다. 모든 피조물에게 존재를 주신 하나님은 자기가 준 존재를 거두실 수 있다. 자기 것에 원하는 대로 하실 수 있지 않은가? 또한 실제로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다. 말씀 한마디로 창조할 능력이 있는 분은 말씀 한마디로 멸할 능력도 있으며, 처음 무에서 피조물을 불러내셨듯 다시 무로 돌아가게 하실 수 있다.
베헤못은 뒤에 나오는 리워야단과 함께, 하나님이 조금 전 욥에게 낮추어 보라고 도전하신 교만한 폭군과 압제자를 나타낼 수도 있다. 그들은 코끼리가 놋과 쇠 같은 뼈로 무장했듯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요새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지으신 분은 그 영혼으로 들어가는 모든 길을 아시며, 공의의 칼인 진노를 가까이 가져가 가장 여리고 민감한 부분을 치실 수 있다. 기계를 설계하고 부품을 조립한 분은 그것을 분해하는 법도 아신다. 그러므로 자기 창조주와 다투는 자에게 화가 있다. 그를 지으신 분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 능력이 있으며, 그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려 하지 않으면 행복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앞 장에서 하나님은 욥을 낮추고 당황하게 하는 많은 질문을 던지셨다. 이제 이 장에서, I. 하나님은 욥에게 그 질문들에 답하라고 요구하신다(욥 40:1, 2). II. 욥은 겸손히 잠잠하여 복종한다(욥 40:3-5). III. 하나님은 욥과 자신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와 불균형을 깨닫게 하려고 계속 논증하시며, 욥이 결코 하나님과 맞설 상대가 아님을 보여 주신다. 욥이 감히 할 수 있다면 공의(욥 40:8), 능력(욥 40:9), 위엄(욥 40:10), 교만한 자를 다스리는 통치권(욥 40:11-14)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보라고 도전하신다(욥 40:6, 7). 이어서 여기서 ‘베헤못’이라 부르는 한 특별한 동물을 통해 자기 능력의 사례를 제시하신다(욥 40: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