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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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보라, 그 날이 오나니 화덕같이 타오를 것이라. 모든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모든 자가 지푸라기 같을 것이요, 오는 그 날이 그들을 불살라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²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해가 떠올라 그 날개에 치유를 가지고 오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의 송아지처럼 자라리라.
³ 또 너희가 악인들을 밟을 것이니, 내가 이 일을 행하는 날에 그들이 너희 발바닥 아래 재가 될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여기서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예언된다. 이 날은 구름과 불기둥처럼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애굽 사람들에게는 어두운 면을, 그를 따르는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밝은 면을 보일 것이다. 그 날이 온다는 말은 곧 주께서 오신다는 뜻,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둘 다를 가리킨다. 두 날 모두 정해져 있었고, 여기서 주어진 성격에 부합할 것이다.
I. 두 경우 모두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소멸하는 불이시다. 그의 오시는 날은 화덕같이 탈 것이다. 그것은 진노의 날, 불같은 진노의 날이 될 것이다. 메시아에 대해 이미 예언되었다. 주의 손이 주의 모든 원수를 찾아내며, 주의 진노의 때에 그들을 불 화덕 같게 하리라(시편 21:9의 취지). 그것은 성읍이 불타는 것 같은, 아니 오히려 숲이 타는 것 같은 공포와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그 숲의 나무들은 시들고 말라 있다. 이사야 10:17,18의 말씀처럼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한 이는 불꽃이 되어 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을 사를 것이다.
여기서 보라. 1. 누가 이 불의 땔감이 될 것인가? 마음이 교만한 모든 자, 곧 그 말이 하나님을 거슬러 완강했고 목이 뻣뻣하여 그의 계명의 멍에에 굴복하려 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 얼굴의 교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자,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교만하게 말하는 모든 자이다. 또한 애정과 삶에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 곧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하고 거슬러 고의로 죄 가운데 머무는 자들이다. 다른 선지자가 최근 표현한 것처럼 그들은 언약을 거슬러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다니엘 11:32).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성격을 완전히 아시므로 누가 교만한 자인지 아시고, 각 사람의 행위를 아시므로 누가 악을 행하는 자인지 아신다. 그들은 이 불 앞에서 지푸라기와 같을 것이다. 이 불에 쉽게, 완전히 소멸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 지푸라기, 곧 이 불에 타기 쉬운 물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푸라기가 아니라면 그 불은 그들을 태우지 않을 것이다. 그 불은 각 사람과 그의 일이 어떤 것으로 드러나느냐에 따라 작용할 것이다. 그것들이 나무와 풀과 짚이면 불타 없어질 것이고, 금과 은과 보석이면 불을 견디고 그 불로 정결하게 될 것이다(고린도전서 3:13-15). 불신앙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삼키는 불 앞의 가시와 찔레로 세운다(이사야 27:4,5).
이 말씀은 이렇게 성취되었다. (1.)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훈으로 교만한 바리새인들과 악을 행하는 다른 유대인들에게 두려움과 정죄를 말씀하셨을 때이다. 그는 땅에 불을 보내셔서 장로들의 전통과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붙인 부패한 해석이라는 쭉정이를 태우셨다. (2.)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게 파괴되고 유대 민족이 한 민족으로서 하늘 아래에서 완전히 지워져 뿌리도 가지도 남지 않았을 때이다. 여기서 주로 의도된 것은 이것인 듯하다. 우리 구주께서는 그 날들을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보복의 날이라고 하셨다(누가복음 21:22). 그때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삼키는 불 앞에서 지푸라기와 같았고, 독수리가 시체에 모이듯 심판이 그들에게 모였다. (3.) 이것은 분명히 심판의 날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죽음 때의 개인 심판에도, 특히 세상 끝의 일반 심판에도 적용된다. 어떤 유대 교사들은 이것을 악인의 영혼이 몸을 떠난 직후 붙잡는 형벌로 보았다. 그러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타오르는 불 가운데 나타나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모든 자에게 심판을 행하실 마지막 심판에 적용된다. 그때 온 세상은 화덕같이 탈 것이고, 그 마음을 세상에 두고 자기 몫을 세상에서 택한 모든 세상 자녀들은 세상과 함께 멸망을 받을 것이며, 그때 붙은 불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II. 두 경우 모두에서 그리스도는 신실하게 그를 섬기는 자들, 그의 이름을 경외하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자들에게 기쁨의 빛이시다(말라기 4:2). 그들은 악인들이 더럽히고 짓밟는 그 이름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이름을 생각하는 모든 자들을 위해 긍휼과 위로가 예비되어 있다.
여기서 의의 해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그는 유대인들의 일반적 멸망의 날에 믿는 남은 자들이 나머지와 함께 쓰러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그 고난과 혼란의 날에 자신의 위로로 그들을 위로하실 분이다. 그는 유대에 있는 자들에게 산으로 도망하라(마태복음 24:16)고 지시하셨고, 그들은 그렇게 하여 펠라에서 모두 안전하고 편안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일반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1.)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일에 적용된다. 그때 의의 해가 이 어두운 세상 위에 떠올랐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 참 빛, 낮을 만들고 낮을 다스리는 큰 빛이시다(요한복음 8:12). 그는 사람들의 빛(요한복음 1:4)이시며, 태양이 보이는 세계에 대해 그러하듯 사람의 영혼에 대해 그러하시다. 태양이 없다면 세상은 감옥이 되듯,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없다면 인류는 어둠 자체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 빛을 가진 해, 빛의 근원이시다(시편 19:4-6). 그는 의의 해이시다. 그 자신이 의로운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의는 이 해의 빛이자 열이다. 그의 의의 말씀도 그러하여 인도하고 가르치고 살린다. 그가 가져오신 영원한 의도 그러하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의가 되셨고, 여호와 우리의 의이시므로, 적절히 의의 해라 불리신다. 그를 통해 우리는 의롭다 하심과 거룩하게 하심을 받아 빛을 보게 된다. 이 의의 해는 때가 차매 세상 위에 떠올랐고, 그와 함께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복음 3:19). 곧 큰 빛(마태복음 4:16)이 왔다. 그 안에서 위로부터 돋는 해가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에 앉은 자들에게 비추었다(누가복음 1:78,79). 의는 때로 긍휼과 인자함을 뜻하기도 하는데, 우리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찾아온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였다. (2.) 이것은 사람의 영혼에 들어오는 성령의 은혜와 위로에도 적용된다. 그로티우스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 마음에 비추게 하시고 위로자, 해와 방패가 되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을 거룩하게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을 경외하는 자들은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짐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해가 떠오르고, 즐거운 낮과 풍성한 봄을 함께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이름을 경외하는 모든 자에게 영광스럽고 환영할 만한 해돋이가 될 것이다. 그것은 정직한 자들이 다스릴 부활의 아침이 될 것이다(시편 49:14). 악인에게 화덕같이 탈 그 날은 의인에게 아침처럼 밝을 것이며, 그들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그 날을 기다린다.
이 긍휼과 위로가 그들에게 무엇을 가져올지 보라. 그는 그 날개 아래, 혹은 해의 날개와 같은 광선과 빛살 안에 치유를 가지고 떠오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해처럼 오셔서 어두운 세상에 빛만이 아니라 병들고 어그러진 세상에 건강을 가져오셨다. 유대인들에게는 “해가 떠오르면 병이 줄어든다”는 속담이 있다고 포콕 박사는 말한다. 밤새 시들고 축 늘어진 꽃들이 아침에 되살아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큰 의사, 참으로 큰 약이 되셨다. 그는 길르앗의 유향이자 거기 있는 의사이시다. 땅에 계실 때 그는 해가 그 길을 도는 것처럼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셨다. 백성 가운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 해가 그러하듯 대량으로 고치셨다. 어떤 이들은 그가 그 옷자락에 치유를 가지고 떠오른다고 읽고, 이것을 여인이 그의 옷자락을 만져 온전하게 되고 그에게서 능력이 나간 사건에 적용한다(마가복음 5:28-30). 그러나 그가 육체의 병을 고치신 것은 세상에 오신 큰 목적, 곧 사람 영혼의 병을 고치고 그들이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섬기고 누릴 수 있도록 건강한 상태에 두시는 일을 보여 주는 표본이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미칠 선한 효과를 보라. (1.) 그것은 그들 자신을 활기 있게 만들 것이다. “너희가 나갈 것이다. 고침받은 자들이 밖으로 나가 자기 일로 돌아가듯 말이다.” 영혼은 죽을 때 몸에서 나가고, 몸은 부활 때 무덤에서 나올 것이다. 감옥에서 나온 죄수들처럼 빛을 보고 자유를 얻을 것이다. “너희가 나갈 것이다. 봄에 해가 돌아올 때 식물이 땅에서 나오듯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나가 그 멸망에서 피한 일로 이해한다. 이처럼 의의 해가 떠오른 영혼들은 세상에서 나가고, 바벨론에서 나가며, 참으로 자유롭게 된 자들처럼 나간다. “너희가 또한 자랄 것이다. 건강과 자유를 회복한 뒤 지식과 은혜와 영적 힘에서 증가할 것이다.” 의의 해가 떠오른 영혼들은 온전한 사람을 향해 자라간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롭고 선하게 된 자들은 같은 은혜로 더 지혜롭고 더 선하게 된다. 그들의 길은 떠오르는 해의 길처럼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잠언 4:18). 그 성장은 외양간의 송아지의 성장에 비유된다. 그것은 빠르고 강하며 유익한 성장이다. “너희는 들의 꽃처럼 자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가늘고 약하고 별 쓸모가 없으며, 자란 뒤 곧 시든다. 너희는 외양간의 송아지처럼 자랄 것이다.” 한 랍비는 그것을 “살과 기름이 크게 자라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제단과 사람의 식탁이 채워진다. 이처럼 의의 해가 떠오른 성도들의 성장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영예가 된다. 어떤 이들은 너희가 자라리라 대신 “너희가 몸을 움직이며” 또는 “기뻐 뛰리라”고 읽는다. 외양간의 송아지들이 넓은 들에 풀려날 때 즐겁게 뛰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는 성도들의 기쁨을 나타낸다. 그들은 기뻐 뛰며, 항상 승리하게 하심을 받는다.
(2.) 그것은 그들이 원수들을 이기게 할 것이다(말라기 4:3).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다. 한때 악인들이 그들을 밟고 그들의 영혼에게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악인을 밟을 날이 올 것이다. 악인은 그리스도의 발판이 될 뿐 아니라 그들의 발판도 된다(시편 110:1). 그들은 와서 교회의 발 앞에 절할 것이다(요한계시록 3:9).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 믿는 자들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자기의 부패한 욕망과 정욕을 억누르며, 평강의 하나님께서 사탄을 그들의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실 때, 그들은 악인을 밟는 것이다. 자신들을 모욕했던 유대인들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할 차례가 왔을 때 이 약속이 성취되었다. 그들이 너희 발바닥 아래 재가 될 것이라. 그들은 밟힐 뿐 아니라 진흙처럼 짓밟힐 것이다. 오는 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린 뒤, 의인들은 재를 밟듯 그들을 밟을 것이다. 의인들이 영생으로 일어날 때, 악인들은 영원한 수치로 일어날 것이다. 성도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승리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멸망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가 영광을 받는 하나님 안에서 승리할 것이다. 영광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는 민족들을 다스릴 권세, 철장으로 다스릴 권세가 주어졌다고 말한다(요한계시록 2:26,27). 이것을 내가 이 일을 행하는 날에 너희가 하리라. 성도들의 승리는 모두 하나님의 승리에 의존한다. 이것을 행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밟으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이들은 “내가 만드는 날, 내가 특별하게 만들 큰 날에”라고 읽는다. 너희가 기뻐하며 이는 여호와께서 만드신 날이라고 말할 그 날이다. 예루살렘 멸망의 날은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사도행전 2:20)이라 불린다. 우리 구주께서 그 멸망을 예언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들은 이 말씀들처럼 세상의 끝과 마지막 심판에도 적용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게 드러난 일이었고, 이 땅 위에 공포의 장면을 일으켜 시간의 날들이 끝나고 영원의 날들이 시작되는 그 영광스러운 사건의 모형이 되기에 적절했다. 유대 민족의 멸망 가운데 이 예언들이 성취된 것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의 해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주신 확신 안에서 믿음을 굳게 해야 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만군의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⁴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⁵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⁶ 그가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들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와서 땅을 저주로 치리라.
이 말씀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예언뿐 아니라 구약 정경 전체의 엄숙한 결론으로 의도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메시아의 복음이 시작될 때까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이나 글, 곧 예언의 영의 지시가 주어지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알림이다. 이 사실은 외경이 성경의 일부가 아님을 배제하며, 그래서 유대인들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 예언이 그치고 봉인되려 할 때, 그 시대에 살던 하나님의 백성에게 두 가지가 요구된다.
I.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순종하는 경외를 계속 유지해야 했다(말라기 4:4). 내 종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것에 따라 행하기를 힘써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호렙에서 그에게 명령하신 율법, 곧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와 함께 주신 불 같은 율법이었다. 십계명만이 아니라 그때 거기서 주어진 모든 의식법과 재판법의 규정도 포함된다.
여기서 보라. 1. 구약의 첫 기록자인 모세가 구약의 마지막 기록자인 말라기에서 존귀하게 언급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내 종 모세라고 부르신다. 의인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아주 먼 간격을 두고 살았다. 모세에서 말라기까지는 1200년이 넘는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같은 것에 동의하고 서로를 지지했다. 모두 한 분 동일한 성령의 감동과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2. 모세의 율법이 존귀하게 언급된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의 율법으로 인정하시며, 온 이스라엘을 위해 그 나라의 민법으로 명령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하게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령하셨고 우리를 위해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 율법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스라엘과 맺어진 언약의 유익을 기대한다면(히브리서 8:10),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명령들 가운데 영구적 의무로 의도된 것들을 지켜야 한다. 3. 율법과 관련한 우리 의무의 요약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율법을 잊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모든 일의 밑바탕에 있다. 우리가 그것을 바르게 기억한다면, 그것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 기억해야 하며, 명령 자체와 그 명령을 강화하는 제재를 모두 기억해야 한다. 양심의 직무는 우리에게 율법을 기억하라고 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는 이 명령이 왜 여기 들어오는가? (1.) 이 선지자는 예배와 삶에서 많은 심각한 부패와 무질서를 책망했다. 이제 잘못된 것을 개혁하고 고치기 위해 그는 오직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고 명한다. “그 규칙을 붙들라. 그러면 해야 할 모든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들이 받은 것 외에 다른 짐을 지우지 않고, 그것을 굳게 붙들라(요한계시록 2:24,25)고 한다. 부패한 교회는 기록된 말씀으로 개혁되어야 하며, 율법과 증거의 표준으로 되돌아감으로 질서 안에 놓여야 한다(고린도전서 11:23 참조). (2.) 교회는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보내신 특별한 사자인 선지자들의 유익을 누렸고, 이제 그들의 예언 전체가 한 책으로 모여 완성된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로 인해 모세의 율법이 폐지되어 기한 지난 달력처럼 되었고, 이제 더 높은 단계에 올라 그것을 잊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아니다. 선지자들은 율법을 확증하고 적용하며, 그것을 지킬 것을 강조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율법을 기억하라. 지식에서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다 해도 우리는 실천적 종교의 첫 원리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그것에 머물기로 결심해야 한다. 선지자들의 글과 묵시록을 연구하는 자들도 모세의 율법과 네 복음서를 계속 기억해야 한다. (3.) 이제 교회에서 예언은 몇 세대 동안 그치고, 예언의 영은 복음의 시작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규칙으로 살고 그 약속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과 완성된 성경 정경이 길잡이로 있는 한, 우리는 환상과 계시가 없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가장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며, 우리가 영들을 시험할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이 없어도 성경이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키고 그의 길 안에 자신을 지킬 수 있다. (4.) 그들은 메시아의 오심, 그의 복음의 선포, 그의 나라의 세워짐을 기대해야 했다. 그 기대 가운데서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고 그것에 순종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면 메시아가 즐겨 순종하는 자들에게 가져올 위로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그 율법이 준 빛에 따라 산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있는 자, 그리고 자기가 가진 것을 잘 사용하는 자에게는 더 주어져 풍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II.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의 기대를 계속 유지해야 했고, 그 시작을 선지자 엘리야의 출현에서 바라보아야 했다(말라기 4:5,6). “보라,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예언의 영이 한동안 그치고 너희가 상담할 것은 율법뿐이겠지만, 그것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보내질 한 사람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누가복음 1:17).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였다(누가복음 16:16). 그 새벽별이 나타날 때까지 그것들이 교회의 유일한 빛으로 계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결코 자신을 증언 없이 두지 않으셨듯,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점점 더 완전한 낮으로 이끄셨다. 그들은 이제 모세와 선지자들을 가졌고 그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나아가실 것이다. 그는 엘리야를 보내실 것이다.
보내질 이 선지자가 누구인지 보라. 그는 엘리야이다. 유대 교사들은 그가 아합 시대 이스라엘에서 예언한 바로 그 엘리야이며, 메시아의 선구자로 다시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다른 이들은 같은 인물이 아니라 같은 영을 가진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네가 엘리야냐, 또는 그 이름을 지닐 그 선지자냐?”고 물었을 때(요한복음 1:19-21), 그들 사이에 이런 다양한 견해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 요한이 오기로 한 엘리야였음을 잘 안다(마태복음 17:10-13). 매우 분명하게도,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고 하셨다(마태복음 11:14). 또한 말라기 3:1에 기록된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라는 바로 그 사람이다. 엘리야는 매우 엄격하고 절제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을 향해 열심이 있었고, 죄를 책망하는 데 담대했으며, 배교한 백성을 하나님과 그들의 의무로 돌이키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세례 요한도 같은 심령과 능력으로 감동되어 엘리야처럼 회개와 개혁을 전파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엘리야 시대의 엘리야처럼 선지자로 여겼고, 그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난 것이라고 여겼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셔야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하실 때에는, 이전에 일으키셨던 것과 같은 사람을 일으켜 그 일을 하게 하실 수 있으며, 세례 요한 안에 엘리야의 영을 넣으실 수 있다.
그가 언제 보내질지 보라. 메시아의 나타나심 전에 보내질 것이다. 그 나타나심은 이 세상의 심판이었고 유대 교회와 민족의 멸망을 도입했으므로, 여기서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의 오심이라 불린다. 세례 요한은 임박한 진노, 곧 그들에게 급히 다가오던 끝까지 이르는 진노에 대해 말하고, 그것을 피할 길로 그들을 인도했을 때 이 날을 공정하게 경고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손에 있는 키에 대해 말하며, 그리스도께서 자기 타작마당을 완전히 정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마태복음 3:7,10,12).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신 그 날은 그가 다시 오실 날과 같았다. 그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크고 기쁜 날이었지만, 그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크고 두려운 날이었다. 세례 요한은 이 날이 오기 전에 보내져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려, 그들이 준비하고 그 날을 맞으러 나아가게 했다.
그가 어떤 사명으로 보내질지 보라. 그가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들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곧 그는 이 일에 쓰임받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시도할 것이며, 그의 교훈과 세례는 그것을 직접 지향하고 많은 사람에게 성공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도구가 되어 많은 사람을 의로, 그들의 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주를 위하여 준비된 백성을 만들 것이다(누가복음 1:16,17). 영혼들을 하나님과 그들의 의무로 돌이키는 것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위한 가장 좋은 준비이다.
요한에 대해 약속된 것은 이렇다. (1.) 그는 사물의 방향을 돌릴 것이다. 자기 백성의 자녀들 가운데 강하게 흐르며 앞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있던 죄와 불경건의 거센 흐름에 맞서 담대히 설 것이다. 이것이 그의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는 것(마태복음 17:11)이라 불린다. 그는 그것들을 바로잡아 다시 바른 물길로 흐르게 할 것이다. (2.)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닿고 그들에게 영향을 주어 변화를 일으키는 교리를 전할 것이다. 그의 입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분별하는 말씀이 될 것이다. 그의 사역으로 양심이 깨어난 자들이 많았다. 비록 모두가 완전히 변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는 그만큼의 영과 능력이 있었다. (3.) 그는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과 함께,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들과 함께 하나님과 그들의 의무로 돌이킬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읽는다. 그는 젊은이와 노인 모두에게 회개를 외칠 것이며 헛수고하지 않을 것이다. 떠나가고 있는 많은 아버지들과 자라나는 많은 자녀들이 그의 사역으로 감동을 받을 것이다. (4.) 이렇게 그는 관계들 사이의 사랑과 연합을 되살리고 굳게 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그들을 모두 하나님께로 데려오고 하나님께 묶음으로써, 서로 더 가까워지고 더 단단히 묶이게 할 것이다. 그는 하늘나라의 길을 예비할 것이다. 그 나라는 모든 신실한 백성을 한마음과 한뜻으로 만드는 나라(사도행전 4:32), 사랑의 나라가 될 것이며, 모든 원수를 죽일 것이다.
그들이 보편적으로 회개하고 개혁했다면 그들의 회개는 원하는 효과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대체로 요한의 세례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거절했으므로, 그것은 그들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었다(누가복음 7:30). 그들의 땅은 저주로 맞았고, 그 땅과 그들은 오늘날까지 그 저주 아래 놓여 있다. 막대기와 십자가로 자기를 치시는 분께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칼과 저주로 맞을 것을 기대해야 한다(이사야 9:13). 세례 요한은 “이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했다. 나무는 찍혀 넘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고, 저주로 끊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어떤 이들은 구약의 마지막 말이 땅을 위협하는 저주라는 점을 주목한다(스가랴 5:3의 취지). 우리는 그 저주를 마땅히 받을 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복을 가지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환영할 수 있다. 신약은 복, 가장 귀한 복으로 끝난다. 그 복으로 이 저주를 대적하여 우리 자신을 무장하자.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장하게 하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적절한 교훈이 있다. 구약 정경을 마무리하기에 매우 적절한 교훈이다. I. 우리 앞에 있는 보응과 갚음의 상태, 곧 그 상태에서 악인이 받을 비참과 의인이 누릴 행복에 관한 것이다(말라기 4:1-3). 이것은 예루살렘과 그 안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멸망, 그리고 그들 가운데 복음을 받은 자들의 위로와 승리에 대한 예언 아래 제시된다. II. 우리가 지금 있는 시험과 준비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눈을 두고 그것을 따르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들은 그때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했고(말라기 4:4), 선지자 엘리야, 곧 메시아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더 밝히 드러날 것을 기대해야 했다(말라기 4:5,6). 신약의 마지막 장도 거의 같은 취지로, 저 세상에서의 천국과 지옥을 우리 앞에 두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