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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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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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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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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서론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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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혈통과 탄생, 그분이 후손으로 나신 조상들, 그리고 세상에 들어오신 정황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그분이 참으로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 되시며 동정녀에게서 나시리라고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실제로 그러하셨음이 여기서 분명히 제시된다. 곧 여기에는 다음이 담겨 있다. I.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그분의 족보, 곧 마흔두 대(代), 즉 세 번의 십사 대(代)이다(마 1:1-17). II. 그분이 동정녀에게서 나셨음을 보이기에 필요한 한도 내에서, 그분의 탄생 정황에 대한 기록이다(마 1:18-25). 이처럼 우리의 복되신 구주의 생애는, 그 본보기를 더욱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하여, 마땅히 생애가 기록되어야 할 방식대로 체계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장 1-17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The Genealogy of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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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족보

¹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²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³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⁴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⁵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⁶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인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⁷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⁸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⁹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¹⁰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¹¹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¹²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¹³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¹⁴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¹⁵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¹⁶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¹⁷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우리 구주의 이 족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을 살펴보자.

I. 그 표제. 이것은 책(또는 히브리어 세페르[sepher], 곧 책이라는 단어가 때때로 의미하듯이 기록)이니, 곧 육신을 따른 그의 조상들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의 책이다. 다시 말해, 이는 그의 탄생에 관한 기록이다. 이것은 비블로스 게네세오스(Biblos Geneseos)—곧 세계(창세)의 책이다. 구약은 세상의 창조(세계)의 책으로 시작하며, 그렇게 시작한다는 것이 구약의 영광이다. 그러나 신약은 이 점에서 더 뛰어난 영광을 지니니, 곧 세상을 지으신 분의 세계의 책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서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었으나(미 5:2), 아무도 그 세대(나심)를 능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그는 때가 차매 보내심을 받아 여자에게서 나셨으니, 여기에 선포된 것이 바로 그 세계(나심)이다.

II. 그 주된 의도. 이것은 끝없거나 쓸데없는 족보가 아니며, 위대한 인물들의 족보가 흔히 그러하듯 헛된 자랑을 위한 것도 아니다. 스템마타, 퀴드 파키운트?(Stemmata, quid faciunt?)—고대의 혈통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족보는 권리를 증명하고 청구를 입증하기 위해 증거로 제시되는 혈통서와 같다. 그 목적은 우리 주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며, 따라서 메시아가 나오기로 되어 있던 그 민족과 가문에서 나셨음을 증명하는 데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당대에 메시아와 관련된 약속을 맡은 위대한 수탁자들이었다. 복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졌고, 통치의 약속은 다윗과 그 후손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분깃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땅의 모든 족속을 다스릴 다윗의 자손이신 그분께 신실하고 충성된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에게서 나오시리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고(창 12:3, 22:18), 다윗에게서 나오시리라는 것은 다윗에게 약속되었다(삼하 7:12, 시 89:3, 132:11).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심을 증명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다. 이제 이것이 여기서 문장관(紋章官)의 관청에 보존된 진본 기록들로부터 증명된다. 유대인들은 자기 혈통을 보존하는 일에 매우 정확하였으니, 이는 아버지들로부터 이어지는 메시아의 혈통을 밝히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리고 그분이 오신 이후로 그 민족이 너무나 흩어지고 혼란하여, 오늘날 세상의 어느 누가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합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도 자기가 아론의 자손이나 다윗의 자손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제사장직과 왕직은 영원히 잃어버린 것으로 포기되든지, 아니면 우리 주 예수의 손에 맡겨지든지 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먼저 다윗의 자손이라 일컬어지시는데, 이는 그 칭호로 그분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흔히 일컬어지고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을 그리스도로 인정한 자들은 그분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다(마 15:22, 20:31, 21:15).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는 이와 같이, 그분이 단지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그 정사를 어깨에 메기로 한 다윗의 자손이시며, 단지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 아니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기로 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심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름으로써,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에 신실하시며 친히 하신 모든 말씀을 이루실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는 다음과 같다. 1. 비록 그 성취가 오래 지연될지라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큰 복이 될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 아마도 그는 그것이 자기 직계 아들이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흔두 대, 곧 약 2000년이나 떨어진 후손으로 드러났다. 하나님은 이토록 오래 전에 무엇이 이루어질지를 미리 말씀하실 수 있고, 또한 때로는 약속하신 것을 이토록 오랜 후에 이루신다. 주목하라. 약속된 자비가 지연되는 것은 우리의 인내를 연단할지언정 하나님의 약속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2. 비록 그 성취가 절망스럽게 보이기 시작할지라도 그러하다. 아버지 집의 영광이 되기로 한 이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멸시받는 백성이 되어 최근 로마의 멍에 아래 조공을 바치게 되고 다윗의 집이 무명(無名) 가운데 묻혀 있을 때에 나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으셨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성취하실 때는, 그것이 가장 일어날 법하지 않은 정황 가운데 놓여 있을 때이다.

III. 그 구체적인 계보. 이는 역대기 첫머리에 기록된 족보들을 따라(그 족보가 미치는 데까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아래로 직계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그 족보들의 쓰임새를 본다.

이 족보에서 우리가 살펴볼 만한 몇 가지 세부 사항이 있다.

1. 형제가 있었던 그리스도의 조상들 가운데, 그는 대체로 동생으로부터 나셨다. 아브라함 자신과 야곱, 유다, 다윗, 나단, 르사가 그러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이 지상의 군주들의 경우처럼 조상들의 장자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섭리의 방식을 따라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부족한 부분에 더욱 귀중함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2.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실로가 나오기로 한 유다 외에도 그의 형제들이 여기 언급된다. 곧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나 이삭의 아들 에서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으니, 이는 그들이 교회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야곱의 모든 자녀는 받아들여졌으며,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의 직접 조상은 아닐지라도 교회의 족장들이었으므로(행 7:8) 이 족보에 언급된다. 이는 흩어진 열두 지파를 격려하기 위함이니, 그들도 유다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분깃을 가지며 그분과 관계 가운데 있음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3. 유다의 쌍둥이 아들 베레스와 세라도 마찬가지로 둘 다 거명된다. 비록 베레스만이 그리스도의 조상이지만, 유다의 형제들이 언급된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베레스와 세라의 출생에 무언가 알레고리적인 것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라가 장자처럼 먼저 손을 내밀었으나 그 손을 도로 들이매 베레스가 장자권을 얻었다. 유대 교회는 세라처럼 먼저 장자권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불신앙으로 그 손을 거두어들였고, 이방 교회는 베레스처럼 터져 나와 장자권을 가지고 갔다. 이와 같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되었으니, 그 후에야 세라가 태어나리라—곧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5, 26).

4. 이 족보에는 네 여인, 오직 네 여인만이 거명된다. 그중 둘은 본래 이스라엘 나라 밖의 이방인이었으니, 곧 가나안 여인이며 또한 기생이었던 라합과 모압 여인 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으며, 외인이요 나그네였던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와 함께 한 시민이 되도록 환영받기 때문이다. 다른 둘은 간음한 여인들이니, 곧 다말과 밧세바이다. 이는 우리 주 예수께 더해진 또 하나의 낮아지심의 표징이었으니, 곧 그가 그러한 자들에게서 나셨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서 나신 그의 혈통이 그의 족보에 특별히 기록되어 아무 가림막도 드리워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고(롬 8:3),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회개할 때에 자기와 가장 가까운 관계 안으로 받아들이신다. 주목하라. 우리는 사람들을 그 조상들의 추문으로 책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들이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가장 선한 자들, 심지어 우리 주님 자신의 처지이기도 하였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인에게서 솔로몬을 낳은 것이 언급된 것은 (휘트비 박사[Dr. Whitby]의 말에 따르면), 회개한 다윗의 죄가 그에게 하신 약속을 막기는커녕, 하나님께서 바로 이 여인을 통하여 그 약속을 이루기를 기뻐하셨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5. 비록 여기 여러 왕이 거명되지만, 다윗 외에는 아무도 명시적으로 왕이라 일컬어지지 않는다(마 1:6). 다윗 왕이라 하니, 이는 왕권의 언약이 그와 더불어 맺어졌고 메시아 왕국의 약속이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 조상 다윗의 위를 물려받으신다고 일컬어진다(눅 1:32).

6. 유다 왕들의 혈통에서 요람과 웃시야 사이에(마 1:8) 셋이 빠져 있으니, 곧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이다. 그러므로 요람이 웃시야를 낳았다고 할 때, 이는 히브리어 어법을 따라 웃시야가 그에게서 직계로 내려왔다는 뜻이다. 마치 히스기야에게 그가 낳을 아들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리라고 한 것과 같으니, 실제로 그들은 그로부터 여러 대 떨어져 있었다. 이 셋이 빠진 것은 오류나 망각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복음서 기자가 참고한 족보표에서 이미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족보표는 그럼에도 진본으로 인정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든다. 곧 기억하기 쉽도록 그리스도의 조상 수를 열넷씩 세 묶음으로 줄이는 것이 마태의 의도였으므로, 이 시기에 셋을 빼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리고 저주받은 아달랴—아합의 우상 숭배를 다윗의 집에 끌어들인 자—의 직계 후손들보다 더 적합한 자들은 없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 가문에 이러한 낙인이 찍혔고, 그 죄악이 삼사 대까지 이렇게 갚아졌다. 이 셋 중 둘은 배교자였으니, 하나님은 흔히 그러한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그 진노의 표를 두신다. 그리고 이 셋 모두 그 머리가 피와 함께 무덤으로 내려갔다.

7. 어떤 이들은 이 왕들의 계승에 선과 악이 어떻게 뒤섞여 있는지를 주목한다. 예컨대(마 1:7, 8), 악한 르호보암이 악한 아비야를 낳고, 악한 아비야가 선한 아사를 낳고, 선한 아사가 선한 여호사밧을 낳고, 선한 여호사밧이 악한 요람을 낳았다. 은혜는 혈통을 따라 흐르지 않으며, 지배하는 죄 또한 그러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 자신의 것이니, 그분은 기뻐하시는 대로 그것을 주시거나 거두신다.

8. 바벨론 포로는 이 계보에서 주목할 만한 한 시기로 언급된다(마 1:11, 12).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다른 민족들이 그러하였듯이 유대인이 그 포로 가운데 사라지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 민족의 줄기가 그 사해(死海)를 통과하면서도 순수하게 흐르도록 지켜진 까닭을 알려 준다. 곧 육신을 따라서는 그들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시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상하게 하지 말라 그 가운데 복이 있느니라—곧 복 중의 복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 계셨다(사 65:8, 9). 그들이 회복된 것은 그분을 바라봄에서였으며, 황폐해진 성소가 주를 위하여 은혜로운 눈길로 돌아보아진 것도 그러하였다(단 9:17).

9. 요시야가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고 한다(마 1:11). 여기서 여고냐는 요시야의 장자인 여호야김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고냐가 스알디엘을 낳았다고 할 때(마 1:12), 그 여고냐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저 여호야김의 아들로서 거기서 스알디엘을 낳은 자이다(휘트비 박사가 밝히는 바와 같이). 그리고 여고냐가 자식이 없을 것이라고 기록된 것은(렘 22:30) 이렇게 설명된다. 곧 그의 자손 중 형통한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스알디엘이 스룹바벨을 낳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스알디엘이 브다야를 낳고 그가 스룹바벨을 낳았다(대상 3:19). 그러나 앞에서와 같이 손자가 흔히 아들이라 일컬어지니, 브다야는 아마도 그 아버지의 생전에 죽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그의 아들 스룹바벨이 스알디엘의 아들이라 일컬어진 것이다.

10. 이 계보는 우리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까지가 아니라 마리아의 남편 요셉까지 내려온다(마 1:16). 이는 유대인이 항상 남자 계통으로 족보를 셈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요셉과 같은 지파와 가문 출신이었으므로, 그분은 어머니로 보나 명목상의 아버지로 보나 다윗의 집안에 속하셨다. 그러나 그 존귀에 대한 그분의 권리는 요셉을 통하여 이어지니, 정작 육신을 따라서는 그분이 요셉과 실제 혈연 관계가 없었다. 이는 메시아의 왕국이 다윗으로부터의 자연적 혈통에 기초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11. 이 모든 계보가 만나는 중심점은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이시다(마 1:16). 이분이야말로 그토록 간절히 사모하고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분이시며, 족장들이 그토록 자녀를 갈망했던 것도—그리하여 그 거룩한 혈통에 들어오는 영예를 얻고자 했던 것도—이분을 바라봄에서였다. 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 우리는 이제 그때 그들이 처했던 것과 같은 어둡고 흐릿한 기대의 상태에 있지 않고, 그 선지자들과 왕들이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았던 것을 분명하게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면, 그들이 그토록 사모하던 것보다 더 큰 영예를 누릴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육신을 따라 그분과 친족이었던 자들보다 그리스도와 더 존귀한 관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마 12:50). 예수는 그리스도라 일컬어지니, 곧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며, 이는 히브리어 이름 메시아와 같다. 그분은 메시아 곧 왕이라 일컬어지며(단 9:25), 또 자주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 일컬어진다(시 2:2). 그분은 이 칭호 아래 기대되었으니, 당신이 그리스도—곧 기름 부음 받은 자—냐? 다윗 왕도 기름 부음을 받았고(삼상 16:13), 제사장 아론도(레 8:12), 선지자 엘리사도(왕상 19:16), 선지자 이사야도(사 61:1) 그러하였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직분에 임명되시고 또 그에 합당하게 갖추어지셨으므로 기름 부음 받은 자—곧 그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즐거움의 기름으로 부음 받으신 분이라 일컬어지신다. 그리고 부어진 향유와 같은 이 이름에서 비롯하여, 그의 모든 추종자가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어지니, 이는 그들 또한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모든 족보의 일반적 요약은 마 1:17에 있으니, 여기서 그것은 주목할 만한 시기들로 구분된 열넷씩 세 묶음으로 요약된다. 첫째 열넷에서 우리는 다윗의 가문이 일어나 아침처럼 비쳐 나오는 것을 본다. 둘째 열넷에서 우리는 그것이 정오의 광채 가운데 번성하는 것을 본다. 셋째 열넷에서 우리는 그것이 점점 더 쇠하여 가난한 목수의 집안으로 쪼그라드는 것을 보며, 그런 후에 그리스도께서 그 가운데서 비쳐 나오시니, 곧 그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시다.

마태복음 1장 18-25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The Birth of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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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탄생

¹⁸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¹⁹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²⁰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²¹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²²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²³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²⁴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²⁵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는 캐묻고 파헤칠 것이 아니라 경배할 것이다.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 형성될 때 영의 길도 알지 못하고, 아이 밴 자의 태 속에서 어떻게 뼈가 이루어지는지(전 11:5)도 알지 못한다면, 복되신 예수께서 복되신 동정녀의 태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셨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다윗이 자기 자신이 어떻게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신묘막측하게 지어졌는지(시 139:13-16)를 찬탄할 때, 아마도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예표하는 심정으로 말한 것이리라. 그리스도의 탄생에 따르는 어떤 정황들은 여기에 더 길게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누가복음에는 없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본다.

I.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한 일. 우리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하였으니, 완전히 결혼한 것이 아니라 정혼한 것이었다. 곧 de futuro—장래에 관한 말로 엄숙히 선언된 결혼의 약속이요,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루겠다는 언약이었다. 우리는 여자와 약혼하고 아직 데려오지 못한 사람에 관한 기록을 읽는다(신 20:7). 그리스도는 동정녀에게서 나셨으되, 약혼한 동정녀에게서 나셨으니, 1. 결혼 상태에 존귀를 부여하시고, 결혼을 모든 사람에게 귀히 여기게 하사, 혼인을 금하며 독신 상태에 완전이 있다고 두는 저 귀신의 가르침에 맞서게 하시기 위함이다. 마리아가 그의 약혼에서 받은 은총보다 더 높은 은총을 받은 자가 누구이겠는가? 2. 그렇지 않았다면 위태로웠을 복되신 동정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의 잉태가 결혼으로 보호받고, 그리하여 세상의 눈앞에서 정당화되는 것이 마땅하였다. 옛 교부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분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묻게 되는 편이 "이분이 창녀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묻게 되는 것보다 나았다고 하였다. 3. 복되신 동정녀가 그의 젊음의 인도자, 그의 외로움과 여정의 동반자, 그의 염려를 나눌 동무, 그리고 그에게 합당한 돕는 배필을 한 사람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어떤 이들은 요셉이 이때 홀아비였으며,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라 불리는 자들(마 13:55)이 요셉이 전처에게서 얻은 자녀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많은 옛 교부들의 추측이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요, 그 여자는 덕 있는 여자였다. 믿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신앙 있는 자들은 그 관계의 위로와 그 안에서 임하는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는 만큼, 신앙 있는 자와 결혼하기를 택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 본보기에서 배울 수 있으니, 결혼 상태에 들어갈 때 성급하게가 아니라 신중히 들어가는 것이 좋고—혼례에 앞서 언약을 두는 것이 좋다. 후에 후회할 시간을 내는 것보다 미리 숙고할 시간을 내는 것이 낫다.

II. 약속된 씨를 그가 잉태한 일. 동거하기 전에 그는 잉태된 것이 나타났으니, 그것은 참으로 성령으로 된 것이었다. 약혼 후 결혼이 그토록 오래 미루어진 까닭에, 그가 잉태하기 전에 정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거행할 때가 이르기 전에 그가 잉태한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아마도 그가 사촌 엘리사벳에게서 석 달 동안 머물다가(눅 1:56) 돌아온 후에, 요셉이 그가 잉태한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며, 그 자신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는 자들은 그것을 드러내리니,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하나님의 일임이 드러나게 되리라. 이제 우리는 이 일이 복되신 동정녀에게 얼마나 큰 곤혹을 정당하게 일으켰을지 능히 상상할 수 있다. 그 자신은 이 잉태의 신적 기원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창녀처럼 취급받게 될 것이었다. 주목하라, 크고 높은 영광을 받은 후에는, 우리가 그것으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우리를 낮추는 무엇인가를, 곧 어떤 비방을, 육체의 가시처럼, 아니 뼈를 찌르는 칼처럼 기대해야 한다. 하와의 그 어떤 딸도 동정녀 마리아만큼 존귀하게 된 적이 없으되, 그럼에도 그는 가장 끔찍한 죄 중 하나라는 누명을 쓸 위험에 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 일로 스스로 괴로워하였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다만 자신의 무죄함을 의식하면서, 그는 자기 마음을 고요하고 평안하게 지켰으며, 자기 사정을 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맡겼다. 주목하라, 선한 양심을 지키기에 힘쓰는 자들은 자기들의 좋은 평판을 지키는 일을 기쁘게 하나님께 맡길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진실함뿐 아니라 그들의 명예까지도 정오의 해처럼 밝히 드러내시리라고 소망할 근거가 있다.

III. 요셉의 곤혹과, 이 경우에 어떻게 할지에 대한 그의 염려. 그가 그토록 높이 평가하고 귀히 여기던 사람이 그런 흉악한 죄의 혐의 아래 놓인 것을 발견하였을 때, 그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번민과 실망이었을지 우리는 능히 상상할 수 있다. 이가 마리아인가? 그는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가장 좋게 여기는 자들에게서도 이렇게 속을 수 있구나! 우리가 가장 많이 기대하는 데서 이렇게 실망할 수 있구나!" 그토록 선한 여자라 믿었던 사람에 대하여 그토록 악한 일을 믿기를 그는 꺼렸다. 그러나 이 일은, 변명하기에는 너무나 나쁘고, 또한 부인하기에는 너무나 분명하였다. 한편에는 무덤같이 잔혹하고 사람의 분노인 그 질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마리아에 대한 그의 애정이 있으니, 이것이 그의 가슴속에 얼마나 큰 다툼을 일으켰겠는가!

주목하라, 1. 그가 피하고자 애쓴 극단적인 처사. 그는 그를 드러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으니, 율법에 의하면 약혼한 처녀가 음행하면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신 22:23,24). 그러나 그는 그를 거슬러 율법의 이점을 취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 설령 그가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를 통하여서는 알려지지 않을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에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창 38:24)는 그 가혹한 선고를 성급히 내린 유다의 정신과는 요셉이 보여준 정신이 얼마나 달랐던가! 요셉이 여기서 한 것처럼 일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우리의 비판과 판단에 더 많은 숙고가 있다면, 그 안에 더 많은 자비와 절제가 있으리라. 그를 형벌에 처하는 것이 여기서는 그를 드러내는 것이라 일컬어진다. 이는 형벌에서 겨냥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니—곧 다른 이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in terrorem—두려움을 일으키기 위함, 곧 주위의 모든 사람이 듣고 두려워하게 하기 위함이다.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가 조심하리라.

엄격한 기질의 어떤 사람들은 요셉의 관대함을 비난할 것이나, 여기서는 그것이 그의 칭찬으로 언급된다. 이는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드러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 있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워지기를, 그리고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하기를 기울었다. 약혼한 처녀의 경우에, 만일 그가 들에서 욕을 당하였다면, 율법은 자비롭게도 그가 부르짖었다고(신 22:26) 추정하였고, 그는 형벌을 받지 않아야 했다. 요셉은 이 일에 대하여 어떤 자비로운 해석을 내릴 것이며, 이 점에서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전에 자기 명예에 흠을 끼치는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의 좋은 이름을 아끼는 자이다. 주목하라, 많은 경우에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혐의를 받게 된 자들에게 온유하게 대하고, 그들에 관하여 가장 좋은 것을 소망하며, 처음에는 나쁘게 보이는 것을 더 나은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소망 가운데 가장 좋게 해석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Summum jus summa injuria—율법의 엄격함이 (때로는) 불의의 극치이다. 율법의 엄격함을 완화하는 그 양심의 법정을 우리는 형평의 법정이라 부른다. 잘못이 발견된 자들은 아마도 그 잘못에 사로잡힌 것일 수 있으며, 그러므로 온유한 심령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위협은, 그것이 정당할 때라도 절제되어야 한다.

2. 그가 이 극단을 피하기 위하여 찾아낸 방책. 그는 가만히 끊고자 하였으니, 곧 두 증인 앞에서 그의 손에 이혼 증서를 주어, 그리하여 그 일을 자기들끼리 조용히 덮으려 한 것이다. 의로운 사람, 곧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자였으므로, 그는 그와 결혼을 진행하려 하지 않고 그를 끊기로 결심하였으나, 그럼에도 그를 향한 온정에서 가능한 한 은밀하게 행하기로 작정하였다. 주목하라,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한 필요한 책망은 소란 없이 다루어져야 한다. 지혜자의 말은 조용히 들려야 한다. 그리스도 자신도 다투지도 아니하고 들레지도 아니하시리라.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은, 그것에 동참하지 않으면서 행할 수 있는 한, 허다한 죄를, 그것도 큰 죄들을 덮어 줄 것이다.

IV. 하늘로부터 보내진 전령으로 요셉이 이 곤혹에서 벗어남(마 1:20,21). 이 일을 생각하며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로이 그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지시하시고 그를 평안하게 하셨다. 주목하라, 하나님께로부터 지시를 받고자 하는 자들은 일을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자신과 의논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자는 생각이 깊은 자요, 생각이 없는 자가 아니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기 생각 속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끌고 갔을 때에, 그때 하나님께서 권고를 가지고 들어오셨다. 주목하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교훈을 가지고 들어오실 때는, 그들이 난관에 부딪쳐 멈춰 섰을 때이다. 하나님의 위로는 그 영혼의 곤혹스러운 생각이 많은 중에 그 영혼을 가장 기쁘게 한다. 그 전갈은 주의 사자를 통하여 요셉에게 보내졌으니, 아마도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전한 그 사자—가브리엘 천사였을 것이다. 이제 족장들이 받았던 영광이었으나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천사들을 통한 하늘과의 교통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는 맏아들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에 천사들이 그의 행보를 모시도록 명령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그들의 곤경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천사들의 사역을 얼마나 사용하시는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그들의 유익을 위한 섬기는 영들이라는 것이다. 이 천사는 요셉이 잠들었을 때 꿈에 그에게 나타났으니, 마치 하나님께서 때때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우리가 가장 고요하고 차분할 때, 우리는 신적 뜻의 알림을 받기에 가장 좋은 상태에 있다. 성령은 잔잔한 물 위에 운행하신다. 이 꿈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헛된 공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증거를 그 자체에 지니고 있었다. 이제,

1. 요셉은 여기서 의도했던 결혼을 진행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천사는 그를 일컬어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 한다. 천사는 그가 다윗과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여, 다윗에게서 나오시리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던 메시아와 그가 맺은 관계에 대한 이 놀라운 소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하였다. 때때로 작은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 큰 영예가 돌아올 때,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기꺼이 떨쳐버리려 한다. 그러므로 이 가난한 목수에게 그의 고귀한 혈통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었다. "요셉아, 너 자신을 귀히 여기라. 너는 메시아의 계보가 그를 통하여 이어질 그 다윗의 자손이라." 우리는 이처럼 모든 참된 신자에게 말할 수 있다. "두려워 말라, 아브라함의 자손아, 하나님의 자녀야. 네 출생의 존귀함을, 네 거듭남의 존귀함을 잊지 말라." 마리아를 네 아내로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요셉은 그가 음행으로 잉태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자기에게 죄책이나 비방을 가져올까 하여 그를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였다. "아니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라.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마리아가 자기는 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그에게 말하였을 것이며, 또 그는 엘리사벳이 그에게 한 말(눅 1:43)—마리아를 자기 주의 어머니라 부른 그 말을 들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보다 그토록 높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 될까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이 어떤 원인에서 일어났든, 그것들은 모두 이 말씀으로 잠잠해졌다.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주목하라, 우리의 두려움에서 건짐을 받고, 우리의 의심이 풀려서, 만족 가운데 우리의 일을 진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은 큰 자비이다.

2. 그는 여기서 그가 약혼한 아내가 이제 잉태하고 있는 그 거룩한 것에 관하여 알게 된다. 그에게 잉태된 것은 신적 기원에 속한 것이다. 그는 그와 결혼함으로써 부정함에 동참할 위험에 처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누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존귀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는 두 가지를 듣는다.

(1.)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하였으니, 자연의 능력으로 잉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을 지으신 성령께서 이제 세상의 구주를 지으셨으며, 약속된 대로 그에게 한 몸을 예비하셨으니, 곧 그가 보시옵소서 내가 왔나이다(히 10:5)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여자에게서 나신 자(갈 4:4)라 일컬어지면서도, 또한 하늘에서 나신 주이신 그 둘째 아담(고전 15:47)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그 어머니의 본질에 참여하시는 만큼 그 태의 열매라(눅 1:42) 일컬어지신다. 그의 잉태가 일상적인 생식에 의한 것과는 달라야 했던 것은, 그가 인성에 참여하시면서도, 그럼에도 그것의 부패와 오염을 면하시며, 죄악 중에 잉태되고 빚어지지 않으시기 위함이었다.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기를,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처럼 신적 능력으로 잉태하였다고 헛되이 가장한 어떤 자들이 있었으나, 우리 주님의 어머니 외에는 참으로 그렇게 한 자가 결코 없었다. 다른 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서도 그의 이름은 기묘자이시다. 우리는 동정녀 마리아가 자기에게 베풀어진 영광을 스스로 선포하였다는 것을 읽지 못한다. 다만 그는 그것을 자기 마음에 두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증언하시려고 천사를 보내셨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예를 받으리니, 그것은 겸손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다.

(2.) 그가 세상의 구주를 낳으리라는 것이다(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어떤 분이 되실지가 암시된다.

[1.] 그 아들에게 주어질 이름에서. 이름을 예수, 곧 구주라 하라. 예수(Jesus)는 여호수아(Joshua)와 같은 이름이니, 다만 그리스어에 맞추기 위하여 어미만 바뀐 것이다. 여호수아는 칠십인역에 따라 예수라 일컬어진다(행 7:45, 히 4:8). 구약에 그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있었는데, 둘 다 그리스도의 탁월한 모형이었다. 곧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처음 정착할 때의 그들의 지휘관이었던 여호수아와, 포로기 이후 두 번째로 정착할 때의 그들의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이다(슥 6:11,12). 그리스도는 우리의 여호수아이시니, 우리 구원의 대장이시며 우리가 믿는 도리의 대제사장이시며, 그 둘 모두에서 우리의 구주—모세를 대신하여 오셔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여호수아이시다. 여호수아는 본래 호세아라 불렸으나, 모세가 그 이름 앞에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의 첫 음절을 붙여서 *여호수아(Jehoshua)*라 만들었으니(민 13:16), 이는 그 이름을 지니실 메시아가 여호와이심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며,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2.] 그 이름의 이유에서.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유대 민족만이 아니라(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들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아버지의 택하심으로 그에게 주신 모든 자와, 자기 자신의 결단으로 자기를 그에게 드린 모든 자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왕이시며, 옛적 이스라엘의 사사들처럼 그들을 위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는 자들을 그는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 곧 그의 죽으심의 공로로 죄의 죄책에서, 그의 은혜의 영으로 죄의 지배에서 구원하신다.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심에 있어서, 그는 그들을 진노와 저주에서, 그리고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모든 비참에서 구원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것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가 아니라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러 오심이요, 그들을 위하여 사신 것은 죄지을 자유가 아니라 죄에서 벗어날 자유이니, 모든 불법에서 그들을 속량하시려(딛 2:14) 함이며, 그리하여 그들을 사람들 가운데서(계 14:4) 속량하사,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 자기에게로 이끄시려 함이다. 그러므로 자기 죄를 버리고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그의 백성으로 드리는 자들은, 그 구주와, 그가 이루신 큰 구원에 참여하는 자들이다(롬 11:26).

V. 이 모든 일에서의 성경의 성취. 이 복음서 기자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기록하였으므로, 다른 어느 복음서 기자보다 이것을 더 자주 주목한다. 여기서 구약의 예언들이 우리 주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으니, 이로써 이분이 바로 오실 그분이요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는 이분이 바로 모든 선지자가 증언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성취된 그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주신 그 표적의 약속(사 7:14)이니, 보라 처녀가 잉태하리라는 것이다. 거기서 선지자는, 산헤립의 침략으로부터의 약속된 구원을 소망하도록 하나님의 백성을 격려하면서, 유대 민족과 다윗의 집에서 나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도록 그들을 인도한다. 이로부터 추론하기 쉬운 것은, 그 백성과 그 집이 비록 고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그러한 영예와 그러한 복을 예비해 두신 동안에는, 그 백성도 그 집도 멸망에 버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약 교회를 위하여 이루신 구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큰 구원의 모형이요 예표였으니,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행하시려 한다면, 더 작은 일을 행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

여기 인용된 예언은 정당하게도 보라라는 말로 시작되니, 이는 주의와 찬탄을 동시에 명한다. 이는 우리가 여기서 경건의 신비를 보기 때문이니, 그것은 논란의 여지 없이 위대하여,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었다는 것이다.

1. 주어진 표적은 메시아가 처녀에게서 나시리라는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그를 통하여 그가 육신으로 나타나시리라. *알마(Almah)*라는 단어는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의 처녀를 뜻하니, 마리아가 자신을 그렇게 고백한 것과 같다(눅 1:34).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노라.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은 의도된 바와 같은 그러한 놀라운 표적이 결코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메시아가 여자의 후손이 되시리라고 말씀되었을 때, 그가 처녀에게서 나시리라는 것이 처음부터 암시되었으니, 곧 그가 어떤 남자의 씨도 아닌 여자의 씨이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처녀에게서 나신 것은, 그의 탄생이 초자연적이며 전적으로 비범한 것이어야 했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것이 흠 없고 순결하며 어떤 죄의 얼룩도 없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황후나 여왕에게서 나지 않으시고 처녀에게서 나신 것은—이는 그가 외적인 화려함이나 영화로움으로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며—우리에게 영적 순결을 가르치시고, 감각의 모든 쾌락에 대하여 죽으며,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세상과 육체로부터 흠 없이 지켜서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려지게 하려 하심이다.

2. 이 표적으로 증명되는 진리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시라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함이니, 곧 그가 임마누엘이 되시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될 때, 그 뜻은 그가 여호와 우리의 의가 되시리라는 것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니, 신비하면서도 매우 귀한 이름이다. 곧 우리 가운데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요, 그리하여 우리와 화목하실 수 있는 하나님, 우리와 화평하시며 우리를 자기와의 언약과 교제로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이시다. 유대 백성은 그룹 사이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모형과 그림자로 그들과 함께 모셨으나, 말씀이 육신이 되셨을 때처럼 함께 모신 적은 결코 없었다—그것이 복된 *셰키나(Shechinah, 임재의 영광)*였다. 두 본성이 이렇게 중보자의 인격 안에서 함께 연합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과 교통이 자리 잡는 방향으로 얼마나 복된 한 걸음이 이로써 내디뎌졌는가! 이로써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중재자, 한 화해자가 되셨으니, 양자의 본성에 참여하시는 만큼 그 둘 위에 손을 얹기에 합당하시다. 보라, 이 안에 지금껏 있었던 가장 깊은 신비와 가장 풍성한 자비가 있다. 본성의 빛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보고, 율법의 빛으로 우리는 그를 우리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으로 본다. 그러나 복음의 빛으로 우리는 그를 임마누엘, 곧 우리 자신의 본성 안에서, 그리고 (이보다 더한 것은) 우리의 유익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 본다. 이로써 구속주께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름 임마누엘과 더불어, 우리는 복음의 교회에 주어진 이름(겔 48:35)을 견주어 볼 수 있다.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곧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임마누엘이라 일컬어지리라고 예언한 그 예언이, 그 의도와 취지에 있어서, 그가 예수라 일컬어졌을 때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부적절하지 않다. 이는 만일 그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가 아니셨다면, 그는 예수—구주가 되실 수 없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이루신 구원은 바로 이 안에, 곧 하나님과 사람을 함께 이끄심 안에 있다. 이것이 그가 의도하신 바이니, 곧 하나님을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하는 것—이것이 우리의 큰 행복이요—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는 것—이것이 우리의 큰 본분이다.

VI. 신적 명령에 대한 요셉의 순종(마 1:24). 꿈이 그에게 남긴 인상으로 인하여 잠에서 깨어 일어나, 그는 비록 그것이 그의 이전 생각과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으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였다. 그는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니, 지체 없이 신속하게, 그리고 다투지 않고 기쁘게 그리하였다. 그는 하늘의 환상에 거스르지 아니하였다. 이와 같은 비범한 지시를 우리가 이제 기대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경우에 그의 뜻을 알리시는 길들을 가지고 계시니, 곧 섭리의 암시들로, 양심의 논의들로, 그리고 신실한 벗들의 권면으로 그리하신다. 이 각각의 것으로써, 기록된 말씀의 일반 규칙들을 적용하면서,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발걸음에서, 특히 요셉의 이 일과 같은 그 큰 전환점들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하며, 그가 명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안전하고 위로가 됨을 우리가 깨닫게 될 것이다.

VII. 신적 약속의 성취(마 1:25). 그가 그의 맏아들을 낳았다. 그 정황들은 누가복음 2:1 이하에 더 길게 기록되어 있다. 주목하라, 성령으로 잉태된 것은 결코 낙태되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 때에 낳아지게 될 것이다. 육정으로 또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은 흔히 유산되지만, 만일 그리스도께서 영혼 안에 형성되시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 선한 일을 시작하셨으니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 은혜 가운데 잉태된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영광 가운데 낳아질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주목되는 것은, 1. 요셉은 비록 자기와 약혼한 아내 마리아와 혼례를 거행하였으나, 그가 이 거룩한 것을 잉태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에게서 거리를 두어, 그가 낳기까지 그를 알지 아니하였다. 우리 주님의 어머니의 영구한 동정에 관하여 많은 말이 있어 왔다. 제롬(히에로니무스)은 그것을 부인한 헬비디우스에게 매우 분노하였다. 그것이 성경으로부터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휘트비(Whitby) 박사는, 요셉이 그가 그의 맏아들을 낳기까지 그를 알지 아니하였다고 말씀될 때, 그 후에는 그 이유가 그쳤으므로 율법에 따라(출 21:10) 그가 그와 동거하였음이 암시된다고 보는 편이다. 2. 그리스도는 맏아들이셨으니, 비록 그의 어머니가 그 후에 다른 자녀를 두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의 어법에 따라 그렇게 일컬어질 수 있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맏아들이라 일컬어지신 것에 신비가 없는 것이 아니니, 이는 그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곧 만물의 상속자이시기 때문이요, 그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시니, 이는 그가 모든 일에 으뜸이 되시려 함이다. 3. 요셉이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였으니, 그에게 주어진 지시를 따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주로 정하셨으며, 그것이 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주심으로 암시되었은즉, 우리는 그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여야 하고, 그 정하심에 부응하여, 우리는 그를 예수, 곧 우리의 구주라 불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