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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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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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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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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서론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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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은 우리 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사도의 지위와 직분으로 세우실 때 전하신 안수 설교(ordination sermon)이다. 앞 장 끝부분에서 주님은 제자들과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일꾼들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권면하셨는데(마 9:38), 여기서 우리는 그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보게 된다. 곧 그들이 아직 말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이루신다(사 65:24 참조).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우리가 구하는 것은 받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을 보게 된다.

I. 그들에게 주어진 일반적 위임(commission), 마 10:1.

II. 이 위임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 마 10:2-4.

III. 그들에게 주어진 지침들로서, 이는 매우 충분하고 구체적이다.

  1. 그들이 행해야 할 사역들에 관하여 — 그들의 전도(설교), 그들의 이적 행함, 그들이 누구에게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야 하는지, 마 10:5-15.

  2. 그들이 겪어야 할 고난들에 관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또 누구로부터 고난받게 될지 듣게 되며, 박해받을 때 어떤 길을 취해야 할지에 대한 권고를 받고, 또한 자기들의 고난 가운데서 기쁘게 견뎌 내라는 격려를 받는다, 마 10:16-42.

이런 것들은 비록 일차적으로는 사도들을 향한 지침으로 의도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자에게 유익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말씀으로 그들과 함께하시며, 세상 끝날까지 항상 그리하실 것이다(마 28:20 참조).

마태복음 10장 1-4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The Apostles Sent F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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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을 보내심

¹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²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³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라 하는 렙배오,
⁴ 가나안인 시몬과 또 예수를 판 가룟 유다라.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듣게 된다. I.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도 곧 대사(大使)로 세우신 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그들은 그의 제자들이었다(마 10:1). 그는 얼마 전에 이미 그들을 부르사 제자로 삼으셨으니, 곧 자기를 직접 따르는 자요 늘 곁에서 수종드는 자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때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그 약속을 이루신 것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흔히 영예와 은혜를 단계적으로 베푸신다. 그 둘의 빛은 새벽의 빛과 같이 점점 더 밝아져 환한 데 이른다. 이 모든 기간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이 열둘을 다음과 같이 두셨다.

1. 시험의 상태(state of probation)에 두셨다. 비록 그는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시며, 처음부터 그들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셨으나(요 6:70), 그럼에도 그는 자기 교회에 본을 보이시려고 이 방법을 취하셨다. 주목하라. 사역은 큰 위탁(trust)이므로, 사람이 그것을 맡기 전에 한동안 시험받는 것이 마땅하다. 먼저 그들을 시험하여 보고 그리한 후에 직분을 맡기라(딤전 3:10). 그러므로 아무에게나 급하게 안수하지 말고, 먼저 후보자요 시험받는 자, 곧 (프랑스 교회들이 쓰는 용어로) "프로포장(proposant)"으로서 관찰을 받게 하라. 이는 어떤 사람의 죄는 미리 드러나고 어떤 사람의 죄는 그 뒤를 따르기 때문이다(딤전 5:22).

2. 준비의 상태(state of preparation)에 두셨다. 이 모든 기간 동안 그는 그들을 이 큰 일에 합당하게 만들고 계셨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위하여 정하시고 부르시는 자들은, 먼저 그가 그들을 어느 정도 그 일에 합당하도록 준비시키시고 자격을 갖추게 하신다. 그는 그들을 준비시키셨으니, (1.)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심으로써 그리하셨다. 주목하라. 사역의 일에 가장 좋은 준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acquaintance and communion)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려는 자들은 먼저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요 12:26). 바울은 이방인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러 나아가기 전에, 그리스도가 그에게 뿐 아니라 그 안에 나타나셨다(갈 1:16). 믿음의 살아 있는 행위와 기도와 묵상의 잦은 실행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유지하고 지속해야 하나니, 이것이 사역의 일에 필요한 자격이다. (2.) 그들을 가르치심으로써 그리하셨다. 그들은 학생이나 문하생으로서 그와 함께 있었고, 그는 자신의 공적 설교에서 그들이 얻는 유익 외에도 사사로이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는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셨고 또 성경을 깨닫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그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그들에게는 그것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주목하라. 가르치는 자가 되려는 자들은 먼저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주려면 받아야 하고,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딤후 2:2). 복음의 진리가 먼저 그들에게 맡겨진 후에야, 그들이 복음의 일꾼이 되도록 위임받는 것이다.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가르칠 권한을 주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를 조롱하는 것이며, 곧 미련한 자의 손에 소식을 부치는 것이다(잠 26:6).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신 후에 그들을 내보내셨고(마 5:2), 후에 그들의 위임을 확대하셨을 때에 더욱 풍성한 가르침을 주셨다(행 1:3).

II. 그가 그들에게 주신 위임(commission)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1. 그는 그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셨다(마 10:1). 그는 전에 그들을 자기 뒤로 따라오라고 부르셨으나, 이제는 그들을 자기 에게로 오라고 부르사 더 큰 친밀함을 허락하시며, 지금껏 그들이 지켜 온 그런 거리를 두게 하지 않으셨다. 자기를 낮추는 자들은 이렇게 높여지리라. 율법 아래의 제사장들은 백성보다 더 가까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가까이 간다고 일컬어졌는데, 복음의 일꾼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것이 영예인 동시에 그들에게 경외심을 일으켜야 마땅하다.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는 자들 가운데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아야 할 때에는 그들이 스스로 자원하여 그에게 나아갔으나(마 5:1), 이제 그들이 안수받아 세워져야 할 때에는 그가 그들을 부르셨다는 점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가르치기보다 배우기를 더 힘쓰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가르침 받을 기회를 구해야 하며, 같은 의미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떠맡기 전에 부르심 곧 분명한 부르심을 기다려야 한다. 이는 아무도 이 영예를 스스로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그는 그들에게 권능, 곧 엑수시안(exousian) 곧 그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순종을 명할 권위를 주셨고, 또 그 권위를 확증하기 위하여 귀신들까지도 복종하도록 명할 권위를 주셨다. 주목하라. 모든 정당한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모든 권세가 제한 없이 그에게 주어졌고, 있는 바 하위의 권세들은 그로부터 임명된 것이다. 모세가 자기의 영예의 일부를 여호수아에게 입혔듯이, 그는 자기의 영예의 일부를 자기의 일꾼들에게 입히셨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행사하신 권능의 충만함을 부인할 수 없게 입증하는 것은, 그가 자기의 권능을 자기가 부리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었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자기 이름으로 행한 동일한 기적을 행하게 하실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다스리는 권능과 모든 병을 다스리는 권능을 주셨다. 주목하라. 복음의 목적은 마귀를 정복하고 세상을 고치는 것이었다. 이 전파자들은 그들을 추천할 만한 외적 이점이 전혀 없이 보냄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재물도 학식도 명예의 칭호도 없었고 매우 보잘것없는 모양이었으므로, 그들을 서기관들 위로 높일 어떤 특별한 권능을 가지는 것이 필요했다.

(1.) 그는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 맡겨진 권능은 곧바로 마귀와 그의 나라를 겨냥한다. 마귀는 더러운 귀신으로서 교리적 오류 안에서도(계 16:13) 또 실제적 방탕 안에서도(벧후 2:10) 역사하고 있으며, 이 두 가지 모두에서 일꾼들은 마귀를 대적하여 직무를 맡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사람들의 몸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는데, 이는 그의 영적 나라와 마귀의 모든 일이 멸망함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니,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셨다.

(2.) 그는 그들에게 모든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 교훈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적을 행할 권한을 주셨으니, 곧 그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게 하셨다. 또 그것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유익한 기적을 행하게 하셨으니, 그 교훈이 미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것임을 입증하며, 복음의 목적이 고치고 구원하는 데 있음을 입증하게 하셨다. 모세의 기적은 그 다수가 멸망을 위한 것이었고, 마호메트가 행한 체했던 것들은 과시를 위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그의 사도들에게 행하도록 정해 주신 기적들은 모두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가 세상의 위대한 교사요 통치자이실 뿐 아니라 위대한 구속자이심을 증명한다. 그들의 권능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에 미친다고, 곧 불치병이라 여겨지고 의사들에게 책망거리가 되는 것들까지도 예외 없이 미친다고 하면서 그 범위에 얼마나 강조가 놓여 있는지를 보라. 주목하라. 복음의 은혜 안에는 모든 상처를 위한 고약이 있고, 모든 질병을 위한 치료약이 있다. 아무리 악성이고 고질적인 영적 질병이라도, 그것을 고치기에 충분한 권능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아무도 소망이 없다거나, 그 상한 것이 바다처럼 넓어 고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III. 위임받은 자들의 수효와 이름이다. 그들은 사도(apostles), 곧 보냄을 받은 자(messengers)로 세워졌다. 천사(angel)와 사도(apostle)는 둘 다 같은 뜻을 가지니, 곧 심부름을 받아 보냄을 받은 자 곧 대사이다. 모든 신실한 일꾼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자이나, 처음으로 또 직접 그가 보내신 자들은 특별히 사도들이라 일컬어지니, 곧 그의 나라에서 최고위의 신하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그들의 직분의 초기에 불과했다. 그리스도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셨을 때에 비로소 어떤 사람은 사도로 주셨다(엡 4:11). 그리스도 자신도 사도라 일컬어지시니(히 3:1), 이는 그가 아버지께 보냄을 받으셨고 또 그렇게 그들을 보내셨기 때문이다(요 20:21).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사자(messengers)라 일컬어졌다.

1. 그들의 수효는 열둘이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지파의 수효와 그 지파들의 족장이 된 야곱의 아들들의 수효를 가리킨다. 복음의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며, 유대인들이 먼저 그 안으로 초청받아야 하고, 사도들은 그리스도께 후손을 낳아 드릴 영적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육체를 따른 이스라엘은 그 불신앙으로 인하여 버림받게 되었으므로, 이 열둘은 또 다른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도록 임명되었다. 이 열둘은 자기들의 교훈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되어 있었다(눅 22:30). 이들은 교회의 면류관을 이루는 열두 별이었고(계 12:1),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였으며(계 21:12, 14), 아론의 흉패에 박힌 열두 보석과 진설병 상 위의 떡 열두 개와 엘림의 열두 샘물로 예표되었다. 이들은 (바울이 더해져 대배심을 이루게 된) 그 유명한 배심이었으니, 곧 만왕의 왕과 온 인류 사이를 심리하도록 소집된 배심이었다. 그리고 이 장에서, 모든 심판을 맡으신 분에 의해 그들에게 직무가 부여된다.

2. 그들의 이름이 여기 기록에 남아 있으니 이는 그들의 영예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보다 더 기뻐할 까닭이 있었으니, 곧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며(눅 10:20), 반면에 땅의 위대한 자들의 높고 위세 있는 이름들은 티끌 속에 묻혀 있다. 주목하라.

(1.) 이 열두 사도 가운데 어떤 이들에 대해서는, 성경으로부터 그 이름밖에는 더 아는 것이 없으니, 바돌로매와 가나안인 시몬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신실한 종들이었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들이 다 똑같이 유명한 것도 아니요, 그들의 행적이 다 똑같이 칭송받는 것도 아니다.

(2.) 그들은 짝을 지어 이름이 붙여졌다. 이는 처음에 그들이 둘씩 둘씩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니, 곧 둘이 하나보다 나음이라. 그들은 서로에게 유익이 되었고, 함께 그리스도와 영혼들에게 더욱 유익이 되었다. 한 사람이 잊은 것을 다른 사람이 기억하였고, 두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이 확정될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세 쌍은 형제였으니,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또 다른 야고보와 렙배오였다. 주목하라. 친족 사이에 우정과 교제가 유지되어야 하며, 그것이 신앙에 유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 본성으로 형제 된 자들이 은혜로도 형제가 되고, 이 두 끈이 서로를 견고하게 할 때, 그것은 탁월한 일이다.

(3.) 베드로가 첫째로 이름 붙여졌으니, 이는 그가 먼저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거나, 그가 그들 가운데 가장 앞장서는 자였고 매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이들의 대변자가 되었기 때문이거나, 그가 할례자의 사도가 될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다른 사도들 위의 권세를 준 것은 아니며, 이 거룩한 사도단(sacred college)에서 그에게 어떤 수위권(supremacy)이 주어졌다거나 그가 그것을 주장했다는 흔적은 조금도 없다.

(4.) 이 복음서의 기록자인 마태가 여기서는 도마와 짝지어 있는데(마 10:3), 두 가지 점에서 마가와 누가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막 3:18, 눅 6:15). 거기서는 마태가 먼저 놓여 있으니, 그 순서로 보아 그가 도마보다 먼저 안수받아 세워졌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 자기 자신의 명부에서는 도마를 먼저 놓는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영예에 있어서 서로 남을 앞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거기서는 그가 단지 마태라고만 일컬어지나, 여기서는 세리 마태, 곧 통행세 징수원 또는 세금 징수원이라 일컬어지니, 그 악명 높은 직업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된 것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예에 오른 자들은 자기가 떠 온 반석을 바라보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르시기 전에 자기가 어떤 자였는지를 자주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 이로써 그들은 겸손하게 유지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영광을 받게 된다. 사도 마태는 곧 세리 마태였다.

(5.) 시몬은 가나안인(Canaanite), 더 정확히는 가나 출신(Canite)이라 일컬어지니, 이는 그가 아마 태어난 갈릴리 가나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또는 시몬 셀롯(Zealot,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니, 어떤 이들은 이것을 *카나니테스(Kananites)*의 뜻으로 본다.

(6.) 가룟 유다는 항상 맨 마지막에 이름이 붙여지며, 예수를 판 자라는 저 검은 낙인이 그 이름에 찍혀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그가 어떤 악한이며, 그 속에 마귀가 있어 배신자가 될 것임을 아셨음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사도들 가운데 두셨으니, 이는 가장 좋은 사회에서라도 언제든 가장 추악한 추문이 터져 나올 때에, 그것이 그의 교회에 놀라움이나 낙심거리가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우리의 애찬(feasts of charity) 가운데도 그런 오점들이 있어 왔으니, 알곡 가운데 가라지요 양 떼 가운데 이리였다. 그러나 위선자들이 가면이 벗겨지고 버림받게 될, 드러남과 분리의 날이 오고 있다. 유다가 열둘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로 인해, 그의 악함이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동안에는, 사도직 자체나 다른 사도들이 조금도 손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마태복음 10장 5-15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Instructions to the Apos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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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에게 주신 지시

⁵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어느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⁶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⁷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라.
⁸ 병든 자를 고치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⁹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¹⁰ 너희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발이나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¹¹ 어느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¹²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¹³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¹⁴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갈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¹⁵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위임하실 때 주신 지시를 보게 된다. 이 명령이 하나로 이어진 강론으로 그들에게 주어졌는지, 아니면 그 여러 항목이 여러 차례에 걸쳐 그들에게 일러진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이 일에서 그분은 그들에게 명하셨다.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한 것을 그가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고 일컫는데(창 49장), 그리스도께서는 이 명령들로 한 가지 복을 명하신 것이다. 살펴보자.

I. 그분이 그들을 보내신 대상이 되는 사람들. 이 사신들은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지시를 받는다.

1. 이방인에게도 사마리아인에게도 아니다. 그들은 어떤 유혹이 있을지라도 이방인의 길로 가서도 안 되고, 이스라엘 땅을 벗어난 어떤 길로도 가서는 안 되었다. 유대인이 먼저 복음을 거절하기 전까지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져서는 안 되었다. 사마리아인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 부근에 이주시킨 혼혈 민족의 후손이었고, 그들의 땅이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 놓여 있었으므로 사도들이 사마리아인의 길로 들어가는 것은 피할 수 없었으나, 그들의 어느 성에도 들어가서는 안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에게 나타내기를 거절하셨으므로, 사도들도 그들에게 전파해서는 안 되었다. 만일 어느 곳에서 복음이 가려진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로써 그곳으로부터 자신을 숨기시는 것이다. 이 제한은 그들의 첫 번째 파송에서만 그들에게 부과된 것이었고, 그 후에는 그들이 온 천하로 가서 모든 민족을 가르치도록 임명받았다.

2.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한정하셨으니(마 15:24), 이는 그분이 *할례의 추종자(직역: 할례를 위한 일꾼)*이셨기 때문이다(롬 15:8). 그러므로 그분의 시종이요 대리인에 불과한 사도들도 그들에게 한정되어야 했다. 구원의 첫 제안은 반드시 유대인에게 이루어져야 했다(행 3:26).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집에 대해 특별하고도 지극히 부드러운 관심을 가지셨으니, 그들은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들이었다(롬 11:28). 그분은 그들을 잃어버린 양으로서 긍휼히 바라보셨으니, 그분이 목자로서 그들을 그들이 잘못 들어선 죄와 오류의 샛길에서 모아들이려 하셨다. 만일 그 길에서 도로 데려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끝없이 방황할 것이었다(렘 2:6 참조). 이방인 또한 잃어버린 양과 같았었다(벧전 2:25).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보냄받은 대상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심으로써 그들이 그 일에 부지런하도록 자극하셨으니, 그들은 (얼마 전까지 그들 자신도 그 일원이었던) 이스라엘 집으로 보냄을 받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돕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II. 그분이 그들에게 맡기신 전파의 사역. 그분은 그들을 사명 없이 내보내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다. 가면서 전파하라(마 10:7). 그들은 순회 전도자가 되어야 했으니, 어디로 가든지 복음의 시작을 선포하여 이르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해야 했다. 그들이 이 말 외에는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들의 본문이 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 주제 위에서 그들은 부연 설명해야 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오신 주이신 메시아의 나라가 이제 성경대로 세워질 것임을 알게 해야 했다. 거기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은, 사람들이 그 나라의 특권에 들어가도록 자기 죄를 회개하고 그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막 6:12에서) 그들이 나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전파하니라 하였는데, 이것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이 교리의 합당한 활용이요 적용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오래 고대하던 메시아에 관하여 머지않아 더 듣게 될 것을 기대하고, 그분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그분을 믿으며 그분의 멍에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이것을 전파하는 것은 아침 빛이 떠오르는 해의 접근을 알리는 것과 같았다. 이것이 임박한 멸망을 선포한 요나의 전파(욘 3:4)와는 얼마나 다른가! 이것은 임박한 구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운 구원을 선포한다. 긍휼과 진리가 함께 만나니(시 85:9, 10), 곧 천국이 가까이 온 것이다. 이는 왕의 인격적 임재라기보다는—그것에 지나치게 몰두해서는 안 된다—그분의 육신적 임재가 거두어질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세워질 영적인 나라를 가리킨다.

이제 이것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께서 이전에 전파하셨던 바로 그것과 동일했다. 주목하라. 사람들은 선한 진리들이 거듭거듭 자신에게 강조될 필요가 있으며, 만일 그것들이 새로운 감격으로 전파되고 들려진다면 우리에게 마치 새 것인 양 다가온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안에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후에, 참으로 성령이 부어지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형성되었을 때, 지금 가까이 왔다고 언급된 이 천국이 임하였다. 그러나 천국은 여전히 우리의 전파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이제 그것이 임하였으니,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들에게 임하였다고 말하고 그 나라의 계명과 특권을 그들 앞에 펼쳐 놓아야 한다. 또한 아직 임할 영광의 나라가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가까이 온 것으로 말하고 그것을 고려함으로써 사람들을 부지런하도록 자극해야 한다.

III. 그들의 교리를 확증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도록 그들에게 주신 능력(마 10:8). 그분이 자신이 전파하셨던 바로 그 교리를 전파하도록 그들을 보내실 때, 그분은 그들로 하여금 결코 거짓에 찍힐 수 없는 동일한 신적 인장으로써 그것을 확증할 수 있도록 권능을 주셨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으니 이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건물이 다 세워졌는데 지금 기적을 구하는 것은 다시금 기초를 놓는 것이다. 그 문제가 확정되었고 그리스도의 교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로써 충분히 입증되었으니, 더 많은 표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이렇게 지시받는다.

1. 그들의 능력을 선을 행하는 데 사용하도록. "가서 산을 옮기라"거나 "하늘에서 불을 내리라"가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라. 그들은 공적인 복으로 세상에 보냄을 받았으니, 사랑과 선하심이 그들이 와서 전파하려는 그 복음과 그들이 세우도록 부름받은 그 나라의 정신이요 본질임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들이 선하시고 선을 행하시며 그 긍휼이 그 지으신 모든 것 위에 있는 그 하나님의 종임이 드러날 것이요, 그들이 전파하는 교리의 의도가 병든 영혼을 고치고 죄 가운데 죽은 자들을 살리려는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언급된 것일 텐데, 비록 우리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에 누군가를 살려낸 것을 읽지 못하지만, 그들은 많은 이들을 영적 생명으로 일으키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2. 선을 거저 행하는 데 사용하도록.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모든 질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진 자들은 자기를 부유하게 할 기회를 가졌으니, 어떤 값을 치르고서라도 누가 그토록 손쉽고 확실한 치유를 사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기적 행하는 능력으로 이득을 취하지 말라고 경고받는다. 그들은 값없이(gratis) 고쳐야 했으니, 이는 은혜뿐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혜로 이루어진 복음 나라의 본성과 성격을 더욱 잘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값없이 주신 은혜(Gratia gratis data)(롬 3:24), 그의 은혜로 거저. 돈 없이 값없이 약을 사라(사 55:1). 그 이유는 너희가 거저 받았기 때문이다. 병든 자를 고치는 그들의 능력은 그들에게 아무 값도 들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으로 자기에게 어떤 세속적 이익도 취해서는 안 되었다. 만일 시몬 마구스가 성령의 은사로 돈을 벌기를 바라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위해 돈을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행 8:18).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거저 선을 베푸셨음을 생각하면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거저 선을 베풀게 될 것이다.

IV. 이 원정에서 그들을 위해 마련되어야 할 양식. 사신을 보낼 때 누가 그 사절의 비용을 부담할 것인지는 고려해야 할 사안이다. 그 점에 관하여,

1. 그들은 그것을 위해 스스로 아무 준비도 해서는 안 되었다(마 10:9, 10). 금이나 은을 가지지 말라. 한편으로 그들은 자신의 일로 재산을 모아서도 안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가진 얼마 안 되는 자기 것을 그 일에 써서도 안 되었다. 이것은 지금의 파송에 한정된 것이었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이것을 가르치려 하셨다. (1.) 인간적 분별의 인도 아래 행동하도록. 그들은 이제 짧은 외유를 떠나는 것이었고 곧 그들의 주님께로, 그들의 본부로 다시 돌아올 것이었으니, 그러므로 그들이 쓸 일이 없을 것을 무엇 때문에 짊어지고 다니겠는가? (2.) 신적 섭리에 의존하여 행동하도록. 그들은 생명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고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마 6:25 이하).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사명을 띠고 가는 자들은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그분을 필요한 양식에 대해 신뢰할 만한 이유가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분은 자기를 위해 일하는 자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이다. 그분이 쓰시는 자들은 특별한 보호 아래 들임을 받았으니, 또한 특별한 양식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리스도의 삯꾼들은 남을 만큼 충분한 빵을 얻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의 의무에 신실하게 머물고 우리의 일을 잘 하기를 힘쓰는 동안에는, 우리의 다른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여호와 이레, 주께서 적당하다고 여기시는 대로 우리와 우리의 것을 위해 예비하시게 하라.

2. 그들은 자기들이 보냄받은 대상이 필요한 것을 그들에게 마련해 줄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마 10:10). 일꾼이 자기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은 엘리야가 그랬듯이 기적으로 먹여지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었으나, 자기들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움직이셔서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들을 위해 마련하게 하실 것을 의지할 수 있었다. 비록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이 제단으로 부유해지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더라도, 그것으로 살고 또 편안히 살기를 기대할 수는 있다(고전 9:13, 14). 그들이 자기 일에서 생계를 얻는 것이 마땅하다. 사역자는 일꾼이요 수고하는 자이며, 또 그래야만 하고, 그런 자는 자기 먹을 것을 받기에 합당하니, 그것을 벌기 위해 다른 노동을 강요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이 자기들의 하나님을 불신하지 않듯이, 자기들의 동족도 불신하지 않아서 그들 가운데서 편안한 생계를 얻을 것을 의심하지 않기를 바라셨다. 만일 너희가 그들에게 전파하고 그들 가운데서 선을 행하기를 힘쓴다면, 분명 그들은 너희의 필요를 위해 충분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줄 것이다. 또 그렇게 한다면 결코 진미를 탐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후에 너희에게 너희 삯을 갚으실 것이요, 그동안에 그것은 쌓여 갈 것이다.

V. 그들이 어느 곳을 대할 때 지켜야 할 절차(마 10:11-15).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초대받지도 않고 기대받지도 않은 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떠났다. 그들이 태어난 땅이 그들에게 낯선 땅이었다. 그들은 무슨 규칙을 따라야 했는가? 무슨 방침을 취해야 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충분한 지시 없이 내보내려 하지 않으셨으니, 여기에 그 지시가 있다.

1. 그들은 여기서 자기들에게 낯선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지시받는다. 어떻게 행할지를,

(1.) 낯선 읍과 성에서. 어느 성에 들어가거든 그 중에 합당한 자가 누구인지 찾아내라. [1.] 모든 곳에 다른 이들보다 복음과 그 전파자를 더 잘 영접할 마음을 가진 어떤 자들이 있었으리라고 상정된다. 비록 전반적인 부패와 배교의 시대였을지라도 말이다. 주목하라. 가장 나쁜 때와 곳에서도 우리는 자기를 구별하여 이웃보다 더 나은 어떤 자들이 있다고 사랑으로 소망할 수 있으니,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며 쭉정이 가운데 알곡 같은 어떤 자들이 있는 것이다. 네로의 집안에도 성도들이 있었다. 합당한 자가 누구인지, 곧 자기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얼마간 있고 자기가 가진 빛과 지식을 잘 활용한 자가 누구인지 찾아내라. 가장 나은 자도 복음의 제안이라는 호의를 받을 공로가 있기에는 한참 멀었으나,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사도들과 그들의 메시지에 호의적인 영접을 베풀 가능성이 더 높았고, 이 진주들을 자기 발 아래 짓밟지 않을 것이었다. 주목하라. 선한 것에 대한 미리 있는 성향은, 사역자들이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에게 지침이자 격려가 된다. 이미 그 말씀이 받아들여질 만큼 잘 기울어진 자들에게는 그 말씀이 유익할 소망이 가장 크니, 여기저기에 그런 한두 사람이 있다. [2.] 그들은 그런 자들을 수소문해야 했고, 가장 좋은 여관을 찾아서는 안 되었다. 객줏집은 돈을 가지고 가지도 않고(마 10:9) 받기를 기대하지도 않은(마 10:8) 그들에게 합당한 곳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은 자기들을 잘 대접해 주고 선지자의 상, 사도의 상, 곧 그들의 기도와 전파 외에는 다른 어떤 보답도 기대하지 않을 자들의 사사로운 집에서 묵을 곳을 찾아야 했다. 주목하라. 복음을 영접하는 자들은 그 비용을 아까워해서도 안 되고 이 세상에서 그것으로 이득 얻기를 스스로 약속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누가 부자인지가 아니라 누가 합당한지를 수소문해야 했고, 누가 가장 훌륭한 신사인지가 아니라 누가 가장 선한 사람인지를 수소문해야 했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디에 가든지 그곳의 선한 사람들을 찾고 그들과 사귀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삼았을 때 우리는 그분의 백성을 우리의 백성으로 삼았으니, 같은 것은 같은 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바울은 그의 모든 여행에서 형제들이 있으면 그들을 찾아냈다(행 28:14). 만일 그들이 누가 합당한지를 수소문한다면 그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이웃보다 나은 자들은 주목을 받았을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에게 "저기 정직하고 진중하고 선한 사람이 산다"고 일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오른손의 향유처럼 그 자신을 드러내고 그 향기로 온 집을 채우는 그런 성품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알았다(삼상 9:18). [3.] 그들이 합당하다고 판단한 자들의 집에서 그들은 계속 머물러야 했으니, 이는 그들이 각 성에서 너무 짧게 머물러 숙소를 바꿀 필요가 없을 것이요, 섭리가 처음에 어느 집으로 그들을 인도하든지 그 성을 떠날 때까지 거기서 계속 머물러야 했음을 암시한다. 자주 거처를 바꾸는 자들은 좋은 의도가 없다고 의심받는 것이 마땅하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있는 것으로 최선을 삼고 그것을 지키며, 매번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편하다고 옮겨 다녀서는 안 되는 법이다.

(2.) 낯선 집에서. 그들이 합당하다고 여긴 어떤 자의 집을 찾았을 때, 그들은 들어가면서 그 집에 평안을 빌어야 했다. "그런 일상적인 예의에서는 너희의 겸손의 표시로 사람들보다 앞서 행하라. 한 집에 너희 스스로 청하여 들어가는 것을 체면이 깎이는 일로 여기지 말고, 초대받아야 한다는 격식을 따지지도 말라. 그 집에 평안을 빌라. [1.] 더 나아간 대화를 이끌어 내고 그리하여 너희의 메시지를 도입하기 위함이다." (일상적인 대화의 소재에서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덕을 세우는 데 유익한 교제로 넘어갈 수 있다.) [2.] "너희가 환영받는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위함이다. 너희는 그 인사가 수줍음과 냉랭함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아니면 선뜻한 화답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알아챌 것이다. 너희의 인사를 친절히 받지 않는 자는 너희의 메시지도 친절히 받지 않을 것이니, 이는 지극히 작은 것에 서툴고 불충한 자는 큰 것에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눅 16:10). [3.] 그들의 호의적인 평판을 얻기 위함이다. 그 집에 평안을 빌라, 너희가 진지하기는 하나 무뚝뚝하지는 않다는 것을 그들이 보도록." 주목하라. 신앙은 우리에게 우리가 상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예의 바르고 정중하며 친절하게 대하도록 가르친다. 비록 사도들이 하나님의 아들 자신의 권위로 뒷받침되어 나갔을지라도, 그들의 지시는 한 집에 들어갈 때 그것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평안을 비는 것이었다. 이는 사랑을 위하여 차라리 간구하는 것이 복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몬 1:8, 9). 영혼들은 먼저 사람의 줄로 그리스도께 이끌리고 사랑의 띠로 그분께 매여 있게 된다(호 11:4).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의 첫 제안을 했을 때, 베드로가 먼저 인사를 받았다(행 10:25 참조). 이는 유대인이 권유받던 것을 이방인이 권유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경건한 방식으로 그 집에 평안을 빈 후에는, 그 화답으로써 그 집에 관하여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해야 했다. 주목하라. 하나님의 눈이 우리 위에 계셔서 우리가 선한 사람들과 선한 사역자들에게 어떤 영접을 베푸는지 살피신다. 그 집이 합당하면 너희의 평안이 임하여 그 위에 머물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너희에게 돌아오게 하라(마 10:13). 그렇다면 그들이 가장 합당한 자를 수소문한 후에도(마 10:11) 합당하지 않은 자들을 만날 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목하라. 통상의 소문과 여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지혜이나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분별의 판단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명철한 자의 지혜는 자기 자신의 길을 깨닫는 데 있다. 이제 이 규칙은 다음을 의도한 것이다.

첫째, 사도들의 안심을 위함이다. 통상의 인사는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였다. 그들이 사용한 대로 이것은 복음으로 바뀌었으니, 그들이 빈 것은 하나님의 평안, 천국의 평안이었다. 이제 그들이 이 복을 모든 자에게 무차별하게 선포하기를 망설일까 봐—많은 자가 그럴 자격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이 규칙은 그들을 그 망설임에서 풀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이 복음의 기도(이제 그것은 그렇게 되었으므로)가 모든 자를 위해 드려져야 함을, 마치 복음의 제안이 모든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진 것처럼 드려져야 함을 말씀하시고, 또 마음과 각 사람의 참된 성품을 아시는 하나님께 그 결과를 결정하시도록 맡기라고 하셨다. 만일 그 집이 합당하면 그것은 너희의 복의 유익을 거둘 것이요, 그렇지 않더라도 아무 해가 없으니, 너희가 그 유익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 마치 다윗이 자기의 배은망덕한 원수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그러했듯이 말이다(시 35:13). 주목하라. 모든 자에 대해 사랑으로 판단하고, 모든 자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며, 모든 자에게 정중하게 처신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 이것이 우리의 몫이요, 그러고 나서 그것이 그들에게 어떤 효력을 미칠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길 일이니, 이것이 그분의 몫이다.

둘째, 그들에게 지침을 주기 위함이다. "만일 너희의 인사로 그들이 참으로 합당하다는 것이 드러나거든 너희와 더 함께하게 하고, 그리하여 너희의 평안이 그들에게 임하게 하라. 그들에게 복음을,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평안을 전파하라. 그러나 그렇지 않거든, 그들이 너희를 무례하게 대하고 너희에게 그 문을 닫거든, 너희의 평안을 너희가 할 수 있는 한 너희에게 돌아오게 하라. 너희가 말한 것을 거두어들이고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라. 이것을 가볍게 여김으로써 그들은 너희의 나머지 호의를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않게 되었고,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끊어낸 것이다." 주목하라. 사람들이 그들의 시험기에 있고 그 처신을 시험받고 있을 때, 큰 복이 작고 하찮아 보이는 소홀함으로 인해 종종 상실된다. 이렇게 에서는 그의 장자권을 잃었고(창 25:34), 사울은 그의 나라를 잃었다(삼상 13:13, 14).

2. 그들은 여기서 자기들을 거절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지시받는다. 그 경우가 (마 10:14에서)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는 자들에 관하여 제시된다. 사도들은 이제 자기들에게 전파할 그런 교리가 있고 그것을 확증할 기적을 행하는 그런 능력이 있으니, 의심할 바 없이 보편적으로 대접받고 환영받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리, 자기들을 멸시하고 자기들과 자기들의 메시지를 모욕할 자들이 있으리라는 말을 듣는다. 주목하라. 복음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능력 있는 전파자들도 자기들의 말을 들어 주지조차 않고 자기들에게 아무 존경의 표시도 보이지 않을 어떤 자들을 만나게 될 것을 예상해야 한다. 많은 자가 기쁜 소리에까지도 귀를 막고, 술사가 아무리 묘하게 술법을 행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한다. 살펴보라. "그들은 너희를 영접하지 않을 것이요, 너희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주목하라. 복음을 멸시하는 것과 복음의 사역자들을 멸시하는 것은 흔히 함께 가며, 그 둘 다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것이요, 그에 따라 처리될 것이다.

이제 이 경우에 우리는 여기에서,

(1.) 사도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주신 지시. 그들은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야 했다. 주목하라. 복음은 그것을 자기에게서 밀어내는 자들에게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떠날 때 그들은 자기 발의 먼지를 떨어 버려야 했으니, [1.] 그들의 악함을 혐오함으로써. 그것이 너무도 가증하여 그들이 밟고 다닌 땅조차 더럽혔으니, 그러므로 그것을 더러운 것으로 떨어 버려야 했다. 사도들은 그들과 아무 교류도 교제도 가져서는 안 되었으니, 심지어 그들의 성의 먼지조차 자기들과 함께 가져가서는 안 되었다. 배교하는 자들의 행위가 내게 붙지 못하리이다(시 101:3). 선지자는 벧엘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되어 있었다(왕상 13:9). [2.] 그들에 대한 진노의 선언으로서. 이는 그들이 먼지처럼 천하고 가증함을,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떨어 버리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도들이 뒤에 남기고 간 그들의 발의 먼지가 그들에게 불리하게 증언하고,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증거로 제시될 것이었다(막 6:11; 약 5:3). 이것이 실행된 것을 보라(행 13:51; 18:6). 주목하라. 하나님과 그분의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은 가벼이 여김을 받을 것이다.

(2.) 그런 고의적인 거부자들에게 내려진 선고(마 10:15). 심판 날에 소돔 땅이, 그곳이 아무리 악했을지라도, 더 견디기 쉬우리라. 주목하라. [1.] 심판 날이 오고 있으니, 그때에 복음을 거절한 모든 자가 그것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추궁받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은 그것을 농담거리로 삼을지라도 말이다. 자기를 구원할 교리를 들으려 하지 않은 자들은 자기를 파멸시킬 선고를 듣게 될 것이다. 그들의 심판은 그날까지 유예된다. [2.] 그날에는 형벌에 여러 차등이 있다. 지옥의 모든 고통이 견딜 수 없는 것이겠으나,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할 것이다. 어떤 죄인들은 다른 자들보다 지옥에 더 깊이 가라앉고 더 많은 매를 맞을 것이다. [3.]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의 정죄는 그날에 소돔과 고모라의 정죄보다 더 엄하고 더 무거울 것이다. 소돔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유 1:7). 그러나 그 형벌은 이 큰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가중되어 임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지극히 악하였으나(창 13:13), 그들의 죄악을 가득 채운 것은 그들이 자기들에게 보냄받은 천사들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들을 욕보였으며(창 19:4, 5)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한 것이었다(마 10:14).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들보다는 그들이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더 맹렬히 타오를 것이요, 그들 자신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그 회한이 더 가슴을 도려낼 것이다. 아들아, 기억하라는 말씀이, 영원한 생명의 정당한 제안을 받고도 도리어 죽음을 택한 자들의 귀에 가장 무섭게 울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분의 종 선지자들을 보내셨을 때의 이스라엘의 죄악은, 그런 점에서 소돔의 죄악보다 더 극악한 것으로 묘사되었거늘(겔 16:48, 49), 하물며 이제 그분이 그들에게 자기 아들, 곧 그 위대한 선지자를 보내신 마당에야 더욱 그러하다.

마태복음 10장 16-42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Instructions to the Apos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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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을 향한 교훈

¹⁶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¹⁷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¹⁸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¹⁹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무슨 말을 할 것을 주시리니
²⁰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²¹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²²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²³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²⁴ 제자가 그 선생보다,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²⁵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²⁶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²⁷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²⁸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²⁹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³⁰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³¹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³²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³³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³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³⁵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³⁶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³⁷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³⁸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³⁹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⁴⁰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⁴¹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⁴²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이 모든 구절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그들의 사역 중에 당하게 될 고난과 관련된 것으로, 여기서 그들은 그러한 고난을 예상하고 그에 대비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또한 그 고난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그리고 그 고난 가운데서도 어떻게 자신들의 사역을 계속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지시를 받는다. 이 설교의 이 부분은 그들의 현재의 파송보다 더 멀리 내다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에는 그들이 어떤 큰 환난이나 박해를 만났다는 기록을 찾지 못하며, 또한 그때에는 그들이 그러한 고난을 능히 감당할 만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그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그들의 위임이 확대되고, 아직은 가까이 오지 아니한 천국이 실제로 세워질 때에 만나게 될 환난에 대하여 미리 경고를 받는 것이다. 그때 그들은 외적인 영화와 권세 외에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아직 부름받지 않은 더 큰 고난을 예상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즉 그들이 군주가 되리라 기대하는 그때에 도리어 죄수가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장차 만날지도 모르는 환난이 무엇인지 미리 듣는 것은 유익하다. 그래야 우리가 그에 따라 대비할 수 있고, 또 아직 갑옷을 입는 중일 뿐인데 마치 이미 갑옷을 벗기라도 한 것처럼 자랑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다음 두 가지가 서로 섞여 있다. I. 환난에 대한 예언, 그리고 II. 그 환난과 관련된 권면과 위로의 처방.

I. 여기에 제자들이 그들의 사역 중에 만나게 될 환난에 대한 예언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고난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난도 미리 아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친히 나아가셨듯이 그들도 나아가게 하신다. 그리고 그분이 이를 미리 알려 주신 것은, 그 환난이 그들에게 놀라움이 되어 그들의 믿음에 충격을 주지 않게 하시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예언의 성취가 됨으로써 그들의 믿음에 확증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분은 그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당할 것인지, 또 누구에게서 당할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1. 그들이 무엇을 당할 것인가: 분명히 험한 일들이다. 왜냐하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 10:16). 가련하고 무력하며 보호받지 못하는 한 무리의 양들이 굶주린 이리 떼 가운데서 물어뜯기고 찢기는 것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주목하라. 악인들은 이리와 같으니, 그 본성에 삼키고 멸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 특히 그분의 사역자들은 그들 가운데 있는 양과 같아서, 본성과 기질이 정반대이며, 그들에게 노출되어 있고 흔히 그들의 손쉬운 먹이가 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따른 자들을 이토록 큰 위험에 노출시키시는 그리스도의 처사가 매정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광—그 큰 날에 그들이 그분의 우편에 서게 될 때의 영광—이 그들의 수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고난에 대해서도 충분한 보상이 되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들은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으니, 이는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내보내시니, 이는 위로가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내보내시는 분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끝까지 견디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최악의 경우를 알게 하시려고, 그분은 그들이 무엇을 예상해야 하는지 특별히 일러 주신다.

(1.) 그들은 미움받을 것을 예상해야 한다(마 10:22).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미움을 받을 것이니, 이것이 나머지 모든 것의 뿌리요, 쓴 뿌리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세상은 미워한다. 궁정이 축복하는 자를 시골은 저주하는 것과 같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까닭 없이 미워하였다면(요 15:25), 그분의 형상을 지니고 그분의 일을 섬기는 자들을 미워하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 우리는 역겨운 것을 미워하는데, 그들은 만물의 찌꺼기 같이 여김을 받는다(고전 4:13). 우리는 해로운 것을 미워하는데, 그들은 나라를 괴롭게 하는 자(왕상 18:17)요, 이웃을 괴롭게 하는 자(계 11:10)로 여겨진다. 미움받는 것, 그토록 많은 악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는 미움의 참된 이유가—무엇이 핑계로 내세워지든—무엇인지를 말해 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미움받는 자들에게 위로의 말이 된다. 그것은 선한 명분을 위한 것이요, 그 명분을 그들과 함께 나누시고 자신의 것으로 받으시는 선한 친구가 그들에게 계신 것이다.

(2.) 그들은 악행자처럼 체포되고 심문받을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들의 끊임없는 악의는 거역할 수 없는 악의여서, 그들은 시도할 뿐만 아니라 끝내 너희를 공회에(마 10:17,18), 곧 공공의 평화를 책임지는 장로들이나 재판관들의 법정에 넘기는 데 성공할 것이다. 주목하라. 법과 정의의 명목 아래 선한 자들에게 적지 않은 해악이 종종 자행된다. 재판하는 곳, 그 곳에도 악이 있으니(전 3:16), 곧 박해하는 악이 있다. 그들은 공회의 하급 관리들에게서뿐만 아니라, 최고 관원인 총독과 임금에게서도 환난을 예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해 흔히 만들어진 그런 시커먼 허위 묘사 아래 그들 앞에 끌려가는 것은 무섭고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일이 사도행전에서 자주 성취되는 것을 본다.

(3.) 그들은 죽임당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마 10:21). 그들이 그들을 죽는 데에 내주리라, 곧 죽음—그것도 위세와 격식을 갖춘 정식의 죽음, 곧 죽음이 가장 공포의 왕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그런 죽음—에 내준다는 것이다. 원수들의 악의가 이런 일을 가할 만큼 높이 격노하니, 그들이 갈망하는 것은 성도의 피이다. 또한 성도들의 믿음과 인내는 이를 예상할 만큼 굳게 서 있으니, 나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참조). 그리고 그리스도의 지혜는 이를 허용하시니, 그분은 순교자의 피를 진리의 인침과 교회의 씨앗으로 어떻게 만드실지를 아시기 때문이다. 이 고귀한 군대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함으로써 사탄은 패배하였고,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일들이 크게 진전되었다(계 11:11). 그들은 범죄자처럼 죽임당하였으니, 이는 원수들이 의도한 바이지만, 실상은 제물로서 죽임당한 것이다(빌 2:17, 딤후 4:6).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진리와 명분을 위하여 드려진 감사의 제물인 번제물로서 죽임당한 것이다.

(4.) 그들은 이러한 고난 가운데서, 붙일 수 있는 가장 가증스럽고 치욕적인 이름과 별명으로 낙인찍힐 것을 예상해야 한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이 이렇게 괴롭히는 자들에게 먼저 곰 가죽을 입히고, 그러한 잔혹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색깔로 그들을 그려 놓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그들이 그들에게 붙이는 온갖 악명 중 가장 시커먼 것이 여기 진술되어 있으니, 그들은 그들을 마귀의 왕의 이름인 바알세불이라 부른다(마 10:25). 그들은 그들을 어둠의 나라의 우두머리로 묘사하며, 누구나 자기는 마귀를 미워한다고 여기므로,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온 인류에게 가증스럽게 만들려고 애쓴다. 이 세상이 어떻게 속고 있는지 보라, 그리고 놀라며 보라. [1.] 사탄의 맹세한 원수들이 그의 친구로 묘사된다. 마귀의 나라를 무너뜨린 사도들이 마귀라 불렸다. 이렇게 사람들이 그들에게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혐오하던 것, 정면으로 반대되고 정반대인 것까지 뒤집어씌웠다. [2.] 사탄의 맹세한 종들은 자기들이 그의 원수인 척하려 하는데, 그들은 사탄과 싸우는 척할 때 그의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종종 자기 자신이 마귀와 가장 가까운 친족인 자들이, 도리어 남들을 마귀의 자식으로 몰아세우기를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마귀를 남의 옷에 그려 넣는 자들은 정작 자기 마음속에 마귀가 군림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마 10:26에 이어지는 대로) 숨은 것이 드러나게 될 날이 오리니, 이것은 다행한 일이다.

(5.) 이러한 고난은 여기서 검과 분열로 묘사된다(마 10:34,35). 내가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곧 세상적 화평과 외적 번영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추종자에게 이 세상에서의 재물과 권세를 주러 오셨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그들에게 화평을 주려는 의도로 오지 않았다. 하늘에서의 화평은 그들이 확신할 수 있으나, 땅에서의 화평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화평, 우리 양심 안에서의 화평, 우리 형제들과의 화평을 주러 오셨으나,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리라(요 16:33 참조). 주목하라. 복음을 받아들이면 이 세상의 환난에서 보호받으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복음의 목적을 오해한 것이니, 도리어 복음은 반드시 그들을 이 세상의 환난에 노출시킨다. 온 세상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그때는 보편적 화평이 따를 것이나, 그분을 거부하는 자들이 그토록 많고 또 많을 것인 한—그리고 그들은 단지 이 세상의 자녀들만이 아니라 뱀의 후손이니—세상에서 부름받아 나온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적개심의 열매를 맛볼 것을 예상해야 한다.

[1.] 화평이 아니라 검을 기대하라.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의 검을 주러 오셨으니, 이로써 그분의 제자들이 세상과 싸우며, 이 검은 정복하는 일을 이루었다(계 6:4, 19:21). 또한 박해의 검도 있으니, 이로써 세상이 제자들과 싸운다. 세상은 말씀의 검에 의해 마음에 찔리고(행 7:54), 그리스도의 증인들의 증언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여(계 11:10), 이 검은 잔혹한 일을 이루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검을 빼게 할 빌미가 되는 복음을 보내셨으니, 그러므로 이 검을 보내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의 은혜를 시험하고 칭찬하기 위하여, 또 그들의 원수들의 죄의 분량을 채우기 위하여 자기 교회를 고난의 상태로 명하신다.

[2.] 화평이 아니라 분열을 기대하라(마 10:35). 내가 사람들을 불화하게 하려고 왔노라. 복음 전파의 이 결과는 복음의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의 잘못이다. 어떤 자들은 전해진 것을 믿고 다른 자들은 믿지 아니할 때에, 믿는 자들의 믿음이 믿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니, 그러므로 그들은 믿는 자들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는다. 주목하라. 지금까지 가장 격렬하고 화해할 수 없는 반목은 언제나 종교의 차이에서 일어난 것들이었다. 박해자의 적개심 같은 적개심이 없고, 박해받는 자의 결의 같은 결의가 없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당할 것인지 말씀하시니, 이것들은 듣기 힘든 말씀이었다. 만일 그들이 이것을 견딜 수 있다면, 그들은 무엇이든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을 섬길 때 만날 수 있는 최악의 것을 말씀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공정하고 신실하게 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도 자리에 앉아 그 대가를 계산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렇게 대하기를 원하신다.

  1. 여기서 그들은 누구에게서, 누구를 통하여 이 험한 일들을 당할 것인지를 듣는다. 분명 지옥 자체가 풀려나야 하고, 저 큰 구원에 분깃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절망적이고 자포자기한 영들인 마귀들이 사람의 몸을 입어야만, 그 본질이 사람들에 대한 선한 뜻이요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함인 그런 교리에 대하여 이토록 악독한 원수들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대는 이것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복음의 전파자들에게 닥치는 이 모든 해악이, 바로 그들이 구원을 전하러 간 그 대상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나 정직한 자는 그의 영혼을 보존하느니라(잠 29:10 참조). 그러므로 하늘이 땅에서 그토록 대적을 받으니, 이는 땅이 지옥의 권세 아래 그토록 놓여 있기 때문이다(엡 2:2).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험한 일들을 다음과 같은 자들에게서 당해야 한다.

(1.) 사람들에게서 당한다(마 10:17). "사람들을 삼가라. 너희는 너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자들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 본성의 타락과 변질이 그러하니(homo homini lupus—사람은 사람에게 이리이다), 사람으로서는 교활하고 술수에 능하나, 짐승으로서는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인간성이라 불리는 것을 완전히 벗어 버렸다. 주목하라. 박해의 격분과 적개심은 사람을 짐승으로, 마귀로 바꾸어 놓는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람의 모양을 한 짐승들과 싸웠다(고전 15:32). 가장 좋은 친구들조차도 사람들을 삼가야 할 필요가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세상은 슬픈 형편에 이른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받는 종들의 환난이 그들과 한 골육이요 같은 피로 지음받은 자들에게서 일어난다는 사실이 그 환난을 더욱 가중시킨다. 박해자들은 이 점에서 짐승보다 못하니, 그들은 자기와 같은 부류를 잡아먹기 때문이다. Sævis inter se convenit ursis—사나운 곰들끼리도 서로 화목하게 지낸다. 우리가 보호와 동정을 기대할 만한 자들에게서 사람들이 우리를 치고 일어나는 것(시 124:1-8)은 매우 괴로운 일이다. 그저 사람일 뿐, 그 이상이 아닌 자들, 단순한 사람들, 성도가 아닌 사람들, 육에 속한 사람들(고전 2:14), 세상에 속한 사람들(시 17:14)이다. 성도들은 사람 이상이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니, 그러므로 그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사람의 본성은 성화되지 않으면, 마귀의 본성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악한 본성이다. 그들은 사람이니 그러므로 종속되고, 의존하며, 죽어 가는 피조물이다. 그들은 사람이나 그들은 사람일 뿐이니(시 9:20), 너는 누구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느냐(사 51:12). 해먼드 박사(Dr. Hammond)에 따르면 그 사람들을 삼가라, 곧 너희가 아는 그 사람들, 그리스도를 버린 유대 산헤드린의 사람들을 삼가라는 것이다(벧전 2:4).

(2.)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서, 곧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종교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서 당한다. 그들이 그들의 회당에서 너희를 채찍질하리니, 그곳은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회 권징을 시행하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채찍질하는 것을 자기들 종교의 한 갈래로 여겼다. 바울은 회당에서 다섯 번 매를 맞았다(고후 11:24). 유대인들은 모세에 대한 열심을 빙자하여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가장 악독한 박해자가 되었고, 그러한 폭거를 자기들의 종교의 공로로 돌렸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양심적인 박해자들에게서 많은 고난을 당하였으니, 그들은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하고, 그들을 내쫓고 죽이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생각하고(요 16:2), 여호와께서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원하노라(사 66:5, 슥 11:4,5 참조)고 말한다. 그러나 회당은 그 박해를 거룩하게 하기는커녕, 그 박해가 의심할 바 없이 회당을 더럽히고 모독하는 것이다.

(3.) 권력자들, 곧 권세 잡은 사람들에게서 당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채찍질만 한 것이 아니라—이는 그들에게 남은 권력이 미칠 수 있는 최대치였다—더 이상 자기들이 나아갈 수 없게 되자, 그리스도를 넘긴 것처럼(요 18:30) 그들을 로마 권력에 넘겼다. 너희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마 10:18), 그들은 더 큰 권력을 가졌으므로 더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총독들과 임금들은 그리스도에게서 그 권력을 받으며(잠 8:15), 마땅히 그분의 종이요 그분의 교회의 보호자요 양육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하나, 그들은 종종 그 권력을 그분을 대적하는 데 사용하며, 그리스도에게 반역하는 자요 그분의 교회를 압제하는 자가 된다. 세상의 임금들이 그분의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선다(시 2:1,2, 행 4:25,26). 주목하라. 권력자들을 원수로 두는 것이 종종 선한 자들의 운명이었다.

(4.) 모든 사람에게서 당한다(마 10:22). 너희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니, 곧 모든 악한 사람에게서 미움받을 것인데, 이들이 사람의 대다수이다. 왜냐하면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한 까닭이다(요일 5:19). 그리스도의 의로운 명분을 사랑하고 인정하며 지지하는 자들이 너무도 적어서, 우리는 그 친구들이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다 치우쳤으니, 그러므로 내 백성 먹기를 떡 먹듯 한다(시 14:3,4). 하나님으로부터의 배교가 미치는 데까지 성도들에 대한 적개심도 미친다. 때로는 그것이 다른 때보다 더 일반적으로 드러나지만, 불순종의 아들들 모두의 마음속에 이 독의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니, 이는 세상이 그 짐승을 따라 놀랍게 여기기 때문이다(계 13:3).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며(시 116:11, 롬 3:4), 그러므로 진리를 미워하는 자이다.

(5.) 자기 친족에게서 당한다. 형제가 형제를 죽는 데에 내주리라(마 10:21). 이 일로 인하여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불화하게 될 것이다. 아니, 더 연약하고 더 여린 성(性)에 속한 자들조차도 박해자와 박해받는 자가 될 것이니, 박해하는 딸이 믿는 어머니를 대적하리라. 자연적 애정과 자녀의 도리라면 마땅히 그 다툼을 예방하거나 곧 진화시키리라 생각될 그런 관계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는 것은 이상할 것 없으니, 거기서는 너무도 자주 사랑의 식어 감이 분쟁의 빌미를 찾는다(마 10:35). 일반적으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이다(마 10:36). 그의 친구가 되어야 할 자들이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특히 그것이 박해받게 될 때에 그것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그에게 격분하여, 그를 대적하는 박해자들과 합세할 것이다. 주목하라. 가장 강한 친족 간의 사랑과 도리의 끈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리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하여 종종 끊어졌다. 참된 종교에 대한 편견과 거짓 종교에 대한 열심의 힘이 그토록 강하여, 다른 모든 정—가장 자연스럽고 거룩하며, 가장 끌리고 정겨운 정들—이 이 몰렉(Moloch)들에게 제물로 바쳐졌다.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을 대적하여 격노하는 자들은 이 맨 것도 끊어 버리고 이 결박도 벗어 던진다(시 2:2,3). 그리스도의 신부는 자기 어머니의 아들들의 분노로부터 혹독한 고난을 당한다(아 1:6). 그런 자들에게서 당하는 고난은 더욱 괴롭다. 너 곧 나와 동등한 사람(시 55:12,13)이라는 것보다 더 가슴을 베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런 자들의 적개심은 흔히 가장 화해할 수 없으니,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렵다(잠 18:19). 고대와 현대의 순교사(殉敎史)는 이러한 사례로 가득하다. 이 모든 일을 종합해 볼 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는 것과, 우리가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예상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II. 이러한 환난의 예언과 더불어, 여기에 시련의 때를 위한 권면과 위로의 처방이 있다. 그분은 그들을 참으로 위험에 노출시켜 내보내시고 또 그것을 예상하게 하시지만, 이 모든 시련 가운데서 그들을 능히 떠받치고 견디게 하기에 충분한 교훈과 격려로 잘 무장시켜 내보내신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모아 보자.

  1. 권면과 지시의 방식으로 여러 가지를 말씀하신다.

(1.)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로우라(마 10:16). "너희가 그렇게 해도 된다"(어떤 이들은 이를 단지 허락으로 받아들인다). "너희가 비둘기 같이 순결하기만 하다면, 원하는 만큼 신중해도 된다." 그러나 이는 차라리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이는 우리에게 자기 길을 분별하는 슬기로운 자의 지혜를 권하는 것으로, 언제나 유익하지만 특히 고난의 때에 유익하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리 가운데 있는 양처럼 노출되어 있으니,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로우라. 남을 속이는 것이 그 교활함인 여우처럼 지혜로우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를 방어하고 자기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그 책략인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뱀처럼 미움받고 박해받으며 그들의 파멸이 추구되니,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뱀의 지혜가 필요하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과 사역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이 세상에서 그토록 많은 환난에 노출되어 있는 만큼, 불필요하게 자신을 노출시키지 말고, 자기 보존을 위하여 온갖 정당하고 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지혜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으며(마 21:24,25, 22:17,18,19, 요 7:6,7), 이 외에도 자기 때가 이르기까지 원수들의 손에서 여러 번 벗어나셨다. 바울의 지혜의 한 사례를 보라(행 23:6,7). 그리스도의 명분을 위하여 우리는 생명과 그 모든 위안에 매여 있지 않아야 하지만, 또한 그것을 함부로 내버려서도 안 된다. 뱀의 지혜는 자기 머리가 깨지지 않도록 지키고, 술사의 소리에 귀를 막으며(시 58:4,5), 바위 틈에 피하는 것이니, 이 점에서 우리는 뱀 같이 지혜로울 수 있다. 우리는 지혜로워야 하니, 곧 환난을 우리 머리 위로 끌어들이지 않도록, 악한 때에 잠잠하도록, 그리고 막을 수 있다면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지혜로워야 한다.

(2.) 너희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온유하고, 겸손하고, 격정이 없으라.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라. 비둘기가 그러하듯 독이 없으라. 이것은 항상 앞의 것과 함께 가야 한다." 그들은 이리 가운데로 보냄을 받으니 그러므로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하지만, 그들은 양으로서 보냄을 받으니 그러므로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 우리는 지혜로워야 하니, 우리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차라리 우리가 해를 입을지언정 다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의 모욕을 가하거나 되갚는 뱀의 간계보다, 차라리 스무 번의 해를 견디는 비둘기의 무해함을 사용해야 한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말과 행동에 있어서 순결하고 거치는 것이 없도록 끊임없이 힘써야 하니, 특히 그들이 그 가운데 있는 원수들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우리가 맹금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그들을 자극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자극받지도 않도록, 우리에게는 비둘기 같은 영이 필요하다. 다윗은 매의 날개가 아니라 비둘기의 날개를 사모하여, 그것을 타고 날아가 안식하기를 원하였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리스도 위에 임하셨고, 모든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영, 곧 비둘기 같은 영에 참여하니, 이는 전쟁이 아니라 사랑을 위하여 지음받은 것이다.

(3.) 사람들을 삼가라(마 10:17).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고, 위험한 자들과 사귀기를 피하라. 너희가 말하고 행하는 것을 조심하고, 아무의 신실함도 지나치게 믿지 말라. 가장 그럴듯한 핑계라도 경계하라. 친구를 믿지 말며, 심지어 네 품에 누운 아내라도 믿지 말라"(미 7:5). 주목하라. 은혜받은 자들에게는 신중함이 마땅하니,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는 그토록 비참한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 주님이 자기 제자 중 하나에게서 입맞춤으로 배신당하신 이래로, 우리는 사람들을, 거짓 형제들을 삼갈 필요가 있다.

(4.)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마 10:19). "너희가 관원들 앞에 끌려갈 때에 단정하게 처신하되, 어떻게 빠져나올까 하는 염려로 너희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 신중한 생각은 있어야 하나, 불안하고 당혹스럽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은 안 된다. 이 염려도 하나님께 맡기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라는 염려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멋진 연설을 지어내려고 애쓰지 말고, ad captandam benevolentiam—호의를 얻으려고 애쓰지 말라. 기발한 표현, 재치의 과시, 공들인 미사여구를 추구하지 말라. 이런 것은 나쁜 명분을 도금하는 데나 쓸모가 있을 뿐, 선한 명분의 금에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 이 일에 노심초사하는 것은, 마치 너희 명분이 스스로 변호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듯, 너희 명분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너희는 어떤 근거 위에 서 있는지 알고 있으니, 그렇다면 verbaque prævisam rem non invita sequentur—합당한 표현은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미리 무엇을 말할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저 세 용사보다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서 더 잘 말한 자는 일찍이 없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단 3:16). 시 119:46을 보라.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떻게 잘 말할까보다 어떻게 잘 행할까를 더 깊이 생각해야 하며, 어떻게 자신의 정직을 변호할까보다 어떻게 정직을 지킬까를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Non magna loquimur, sed vivimus—우리는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가장 좋은 변호를 한다.

(5.)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 10:23). "이렇게 너희와 너희 교리를 배척하는 자들을 배척하고, 다른 자들이 너희와 그것을 받아들이는지 시험해 보라. 이렇게 너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라." 주목하라. 임박한 위험의 경우에, 하나님이 그분의 섭리로 그들에게 피할 문을 열어 주실 때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피함으로써 자신을 지킬 수 있고 또 지켜야 한다. 피하는 자는 다시 싸울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자기 깃발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자기 진지를 떠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위험의 길에서는 벗어날 수 있으나, 의무의 길에서는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돌보시는 것을 주목하라. 그분은 그들을 위하여 피신처와 은신처를 마련해 주시며, 박해가 모든 곳에서 동시에 맹위를 떨치지 않도록 정하신다. 한 동네가 그들에게 너무 뜨거워질 때 다른 동네가 더 시원한 그늘과 작은 성소로 예비되니, 이는 사용해야 할 호의요 무시할 호의가 아니다. 그러나 항상 이런 단서가 붙는다. 곧 그 피함을 위하여 죄악되고 불법적인 수단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신 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의 역사 모두에서 이 규칙의 많은 본보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개별 상황에 적용함에 있어서는 지혜와 정직이 지도하는 데 유익하다.

(6.)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6). 왜냐하면 그들은 몸은 죽일 수 있으나(마 10:28) 그 이상은 못 하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가장 큰 원수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 제자들의 의무이자 유익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가장 작은 죄를 두려워하는 자는 가장 큰 환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잠 29:25), 이는 우리의 평안을 어지럽히는 당혹스러운 올무요, 우리를 죄에 빠뜨리는 옭아매는 올무이니,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살피고 맞서 싸우며 기도로 대적해야 한다. 시국이 아무리 어렵고, 원수가 아무리 흉포하며, 사태가 아무리 위협적일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 땅이 변하든지(시 46:2)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에게 그토록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토록 선한 명분이 있으며, 은혜를 힘입은 그토록 선한 소망이 있는 한 말이다.

이것은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막상 시험에 이르면, 고문대와 형구, 토굴과 갤리선, 도끼와 교수대, 불과 장작더미는 참으로 무서운 것들이어서, 가장 담대한 마음조차도 떨게 하고 뒷걸음치게 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몇 걸음만 물러서면 그것들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시험에 대비하여 우리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에 다음의 것들이 있다.

[1.] 이 두려움에 대한 좋은 이유로서, 원수들의 제한된 권세에서 취한 것이다. 그들은 몸을 죽인다. 이것이 그들의 격분이 미칠 수 있는 최대치이니,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여기까지는 갈 수 있으나 그 이상은 못 한다. 그들은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며, 영혼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니, 영혼이 곧 그 사람이다. 이로써 분명한 것은, (어떤 자들이 공상하듯) 영혼이 죽을 때 잠드는 것도 아니요, 사고와 지각을 박탈당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몸을 죽이는 것이 영혼을 죽이는 것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그 생명인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에서 분리되어 그분의 진노의 그릇이 될 때에 죽는 것인데, 이것은 그들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가 우리를 온 세상에서 갈라놓을 수는 있어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으니,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사랑하지 않게 하거나 그분에게 사랑받지 못하게 할 수 없다(롬 8:35,37).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우리의 보배로 여겨 더 마음을 쓴다면, 그 영혼을 빼앗을 권세가 없는 사람들을 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몸—그냥 두어도 곧 죽고 말 그 몸—만 죽일 수 있을 뿐, 그들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과 자기 하나님을 누릴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 그들은 보석함을 부술 수 있을 뿐이다. 한 이방인은 이로써 폭군을 향해 도전하였으니, Tunde capsam Anaxarchi, Anaxarchum non lædis—너는 아낙사르코스의 함은 학대할 수 있으나, 아낙사르코스 자신은 해칠 수 없다. 값진 진주는 손상되지 않는다. 세네카(Seneca)는 지혜롭고 선한 사람은 해칠 수 없음을 입증하고자 하니, 이는 죽음 자체가 그에게 실제적인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Si maximum illud ultra quod nihil habent iratæ leges, aut sævissimi domini minantur, in quo imperium suum fortuna consumit, æquo placidoque animo accipimus, et scimus mortem malum non esse ob hoc, ne injuriam quidem—만일 우리가 침착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노한 법과 무자비한 폭군이 가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는 그 마지막 극한, 곧 운명이 그 지배를 마치는 그 극한을 맞이한다면, 우리는 죽음이 악이 아님을 알게 되니, 그것은 조금의 해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세네카, De Constantia(항심론).

[2.] 그에 대한 좋은 치료책으로서,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주목하라. 첫째, 지옥은 영혼과 몸 모두의 멸망이다. 둘 중 어느 것의 존재의 멸망이 아니라 둘 다의 복된 상태의 멸망이다. 그것은 사람 전체의 파멸이니, 영혼이 멸망하면 몸도 멸망한다. 그것들은 함께 죄지었으니, 몸은 죄를 짓도록 영혼을 유혹한 자요 죄짓는 데 그 도구였으며, 그것들은 함께 영원히 고난받아야 한다. 둘째, 이 멸망은 하나님의 권세에서 온다. 그분은 능히 멸하실 수 있으니, 그것은 그분의 영광의 능력에서 오는 멸망이다(살후 1:9). 그분은 그 멸망에서 자기의 능력을 알게 하실 것이니, 곧 선고하시는 권위뿐만 아니라 그 선고를 집행하시는 능력도 알게 하실 것이다(롬 9:22). 셋째,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의 가장 훌륭한 성도들에게조차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우리가 사람들을 권하여(고후 5:11) 그분을 경외하게 한다. 그를 두려워함같이 그의 진노도 그러하다면(시 90:11 참조), 그의 진노대로 그를 두려워함도 마땅히 그러해야 하니, 특히 그 노여움의 능력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시 90:11). 죄 없던 아담이 한 경고로 인하여 두려워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누구도 거룩한 두려움의 제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도다(잠 28:14). 그때 이미 죽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때 아직 살아 있던 이삭이 두려워하는 이라 불리신다(창 31:42,53). 넷째,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그분의 권세가 영혼 안에서 다스림은 사람을 두려워함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의 찡그림 아래 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찡그림 아래 떨어지는 것보다 낫다. 그러므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행 4:19)이 그 자체로 가장 옳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안전하다.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자기를 지으신 여호와를 잊어버린 자이다(사 51:12,13, 느 4:14).

(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라(마 10:27). "너희가 어떤 위험을 무릅쓰든지, 너희 일을 계속하여 영원한 복음을 온 세상에 공표하고 선포하라. 그것이 너희 본분이니, 그것에 마음을 쓰라. 원수들의 의도는 단지 너희를 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억누르려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 결과가 어떠하든 그것을 공표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것을 너희는 말하라." 주목하라.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것과 동일한 것이다(히 2:3). 그들은 그분이 그들에게 이르신 것을 말하였으니—그것, 그 모든 것을, 그리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저 사신(使臣)들은 그들의 지시를 사사로이, 어두운 데서, 귓속말로, 구석에서, 비유로 받았다. 많은 것을 그리스도께서 드러나게 말씀하셨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그분이 공중에 전파하신 것과 다르게 말씀하지 않으셨다(요 18:20). 그러나 부활 후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주신 그 특별한 지시들은 귓속말로 주신 것이니(행 1:3), 그때는 그분이 자신을 드러나게 나타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명을 공개적으로, 광명한 데서, 집 위에서 전달해야 한다. 복음의 교리는 모든 사람이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잠 1:20,21, 8:2,3). 그러므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방인들이 교회에 받아들여진다는 첫 번째 표지가 집 위에서 있었다(행 10:9).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어떤 이유로든 감추어야 할 부분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거리낌 없이 전해야 한다(행 20:27). 아무리 뒤섞인 무리에게라도 그것을 분명하고 온전하게 전하게 하라.

  1. 위로와 격려의 방식이다. 여기에는 그 목적으로 매우 많은 것이 말해지나, 그들이 사역의 전 과정에 걸쳐 씨름해야 할 그 많은 환난과 그들의 당시의 연약함을 고려하면 이 모든 것도 부족할 뿐이다. 그들의 연약함이 어찌나 컸던지, 어떤 강력한 지지가 없이는 그러한 대우의 전망조차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어찌하여 담대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신다.

(1.) 여기에 그들의 현재의 파송에만 해당하는 한 말씀이 있다(마 10:23).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그들은 인자, 곧 메시아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파해야 했으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전파하면서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돌기도 전에, 그 나라가 그리스도의 높아지심과 성령의 부어 주심으로 임할 것이었다. 이는 위로가 되었다. [1.] 그들이 말한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위로이다. 그들이 인자가 오신다고 말하였으니, 보라 그가 오시느니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신들의 말을 굳게 세우실 것이다(사 44:26). [2.] 그것이 곧 이루어지리라는 위로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는 그들의 일하는 때가 짧고 곧 끝나리라는 것이 위로가 된다. 품꾼은 그의 날이 있으니, 일과 싸움은 잠시 후에 완수될 것이다. [3.] 그때에 그들이 더 높은 지위로 올려지리라는 위로이다. 인자가 오실 때에 그들은 위로부터 더 큰 능력을 입을 것이다. 지금은 그들이 대리인과 사신으로서 보냄을 받았으나, 잠시 후에 그들의 위임이 확대되어 그들은 온 세상으로 보내지는 전권 대사로서 보냄을 받을 것이다.

(2.) 여기에 그들의 사역 전반과 그 가운데서 만나게 될 환난과 관련된 많은 말씀이 있으니, 그것들은 선한 말씀이요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1.] 그들의 고난이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리라는 것이다(마 10:18). "유대 공의회가 너희를 죽이려고 로마 총독들에게 너희를 넘길 때에, 이렇게 너희가 한 재판석에서 다른 재판석으로 끌려다니는 것이 너희의 증거를 더욱 공개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유대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니, 너희는 너희가 당하는 바로 그 환난으로 그들에게, 또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게 될 것이다." 주목하라. 하나님의 백성, 특히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그분의 증인이니(사 43:10), 그들의 행하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난받는 일에서도 그러하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자(martyr)—그리스도를 위한 증인—라 불리는데, 이는 그분의 진리가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고 가치 있음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을 위한 증인이 됨으로써, 그들은 그분과 그분의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을 거슬러 증언하는 자가 된다. 순교자들의 고난은 그들이 고백하는 복음의 진리를 증언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박해자들의 적개심의 증거가 되니, 두 방향으로 그것은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는 것이요, 성도가 세상을 심판할 큰 날에 증거로 제출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선고의 이유는 이러할 것이다.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참조). 그렇다면 그들의 고난이 하나의 증거라면, 얼마나 기쁘게 그것을 감당해야 하겠는가! 그 증언은 그들이 마치기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계 11:7). 그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그 비용을 떠맡으심을 받을 것이다.

[2.] 모든 경우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함께하며, 그분의 성령의 직접적인 도우심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특히 그들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서 그들의 증언을 하도록 부름받을 때에 그러하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슨 말을 할 것을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의 미련한 자들 중에서, 곧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들 중에서 택함받았으니, 그러므로 자기 능력을 불신하는 것이 당연하였으며, 특히 그들이 권력자들 앞에 불려 갈 때 그러하였다. 모세가 바로에게 보냄을 받았을 때, 그는 나는 말을 잘하지 못하나이다라고 호소하였다(출 4:10). 예레미야가 여러 나라 위에 세움받았을 때, 그는 나는 아이라고 항변하였다(렘 1:6,10). 이제 이 호소에 대한 응답으로, 첫째, 그들은 여기서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지리라는 약속을 받는데, 그것도 얼마쯤 미리가 아니라 바로 그 때에 무슨 말을 할 것을 주시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즉석에서 말하지만, 그럼에도 마치 아무리 잘 연구한 것이라도 못 따라올 만큼 적절하게 말할 것이다. 주목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을 위하여 말하도록 부르실 때,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을 가르쳐 주시리라 의지할 수 있으니, 우리가 가장 큰 불리함과 낙심 가운데 처해 있을 때조차도 그러하다. 둘째, 여기서 그들은 복되신 성령께서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변론을 작성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받는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그러한 경우에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내맡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떠맡으셨으니, 그분의 지혜의 영이 그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마치 때때로 그분의 섭리가 그들을 위하여 놀랍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둘이 함께 그들의 박해자들의 양심 안에서까지 드러났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단지 적절하게 말할 능력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한 것을 거룩한 열심으로 말할 능력도 주셨다. 강단에서 그들을 도우신 동일한 성령이 법정에서도 그들을 도우셨다. 그러한 변호자를 가진 자들은 잘 빠져나올 수밖에 없으니, 하나님이 그에게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출 4:12)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고 네 마음과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그러한 변호자이다.

[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다(마 10:22). 여기서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 매우 위로가 된다. 첫째, 이 환난에 끝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오래 갈 수는 있어도 영원히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로써 자신을 위로하셨으니, 그분의 추종자들도 그리할 수 있다. 나에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가느니라(눅 22:37). Dabit Deus his quoque finem—이것들도 하나님이 끝나게 하실 것이다. 주목하라. 우리 환난의 마침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떠받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쉼을 얻는다(욥 3:17). 하나님은 예상한 끝을 주실 것이다(렘 29:11). 그 환난이 품꾼의 날들처럼 지루해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 둘째, 그것들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그것들은 견딜 수 있으니, 그것들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견딜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감당할 수 있고, 끝까지 감당할 수 있으니, 고난받는 자들이 영원하신 팔 안에서 그것들 아래 떠받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힘이 그 날과 같을 것이다(신 33:25, 고전 10:13). 셋째, 구원이 끝까지 견디는 모든 자의 영원한 보상이 될 것이다. 날씨가 사납고 길이 험하지만, 본향의 기쁨이 이 모든 것을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영광의 면류관을 믿음으로 바라봄은 모든 시대에 고난받는 성도들의 강심제요 버팀목이었다(고후 4:16,17,18, 히 10:34). 이것은 우리에게 견디라는 격려일 뿐만 아니라 끝까지 견기라는 다짐이 된다. 잠시만 견디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들은 헛되이 달음질한 것이요 그들이 얻은 모든 것을 잃지만, 끝까지 인내하는 자들은 그 상을 확실히 받으니, 오직 그들만이 받는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4.]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어떤 험한 대우를 만나든지, 그것은 그들의 주님이 이미 만나셨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마 10:24,25).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 우리는 이 말씀이, 그들이 가장 천한 의무를 행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곧 서로의 발을 씻기는 일조차도 주저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주어진 것을 본다(요 13:16). 여기서는 그들이 가장 혹독한 고난에도 걸려 넘어지지 말아야 할 이유로 주어진다. 그들은 이 말씀을 기억하라는 권면을 받는다(요 15:20). 그것은 잠언 같은 표현이니, 종은 그 상전보다 낫지 못하다. 그러므로 종이 더 나은 대우를 기대하지 말게 하라. 주목하라.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생이시니, 우리가 그분께 배우는 가르치는 선생이시요,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는 다스리는 상전이시다. 그분은 집의 주인(oikodespotes, 오이코데스포테스)이시니, 그분의 가족인 교회에 대하여 절대적 권한을 가지신다. 둘째, 우리 주님이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서 매우 험한 대우를 받으셨으니, 그들은 그분을 바알세불, 곧 파리 떼의 신이요 마귀들의 우두머리의 이름으로 부르며, 그분이 그와 결탁했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욕보인 사람들의 사악함인지, 아니면 자신이 이렇게 욕보임당하시도록 참으신 그리스도의 인내인지 말이다. 영광의 하나님이 파리 떼의 신으로 낙인찍히시고, 이스라엘의 왕이 에그론의 신으로, 빛과 생명의 왕이 사망과 흑암의 권세들의 왕으로 낙인찍히셨다는 것, 사탄의 가장 큰 원수요 멸하는 자가 그의 동맹자로 매도되셨으면서도 죄인들의 그러한 거역을 참으셨다(히 12:3)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만나신 그 악한 대우를 생각하면, 우리도 그와 같은 것을 예상하고 대비하며 인내로 감당하게 될 것이다. 그분을 미워한 자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추종자들을 미워한다 해서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 것이며, 장차 영광에서 그분처럼 되게 될 자들이 지금 고난에서 그분처럼 되게 된다 해서 그것을 힘들게 여기지 말자. 그리스도께서 쓴 잔에서 시작하셨으니, 우리도 기꺼이 그분과 함께 그 잔을 받자. 그분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우리에게는 십자가를 쉽게 만들어 주었다.

[5.]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마 10:26). 우리는 이것을 첫째, 복음이 온 세상에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너희는 그것을 공표하라(마 10:27), 그것이 공표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비처럼 사람의 자녀들에게 감추인 진리들이 모든 민족에게 그들 자신의 언어로 다 알려질 것이다"(행 2:11). 땅 끝까지 이 구원을 볼 것이다(사 52:10 참조).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이 큰 격려가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실 쟁기이다. 혹은 둘째, 바알세불이라 불리는 그리스도의 고난받는 종들의 무죄함이 밝혀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들의 참된 면모가 지금은 거짓 색깔로 악의적으로 위장되어 있으나, 그들의 무죄함과 탁월함이 지금은 감추여 있어도 드러날 것이다. 때로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상당한 정도로 이루어지니, 후속 사건들로 인하여 성도들의 의가 빛같이 나타나게 될 때 그러하다(시 37:6 참조).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것은 큰 날에 이루어질 것이니, 그때 그들의 영광이 온 세상, 곧 천사들과 사람들—그들이 지금은 그들에게 구경거리가 된(고전 4:9) 그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드러날 것이다. 그들의 모든 치욕이 굴러 떨어질 것이요, 지금은 감추인 그들의 은혜와 봉사가 드러날 것이다(고전 4:5). 주목하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사람들의 모든 비방과 비난 아래에서도, 마지막 날에 몸의 부활뿐만 아니라 이름의 부활도 있으리라는 것, 곧 의인들이 해같이 빛날 그 날이 있으리라는 것이 위로가 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로 하여금 그분의 진리를 신실하게 드러내게 하고, 그런 다음에는 합당한 때에 그들의 정직을 드러내시는 일을 그분께 맡기게 하라.

[6.] 하나님의 섭리가 성도들의 고난에 있어서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과 관계하신다는 것이다(마 10:29-31). 우리의 첫 원리들에, 특히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모든 행동—심지어 가장 작고 미세한 것까지—에 미치는 하나님의 보편적 섭리의 교리에 의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연의 빛이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치며,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특히 믿음으로 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또 그분이 다정한 관심을 두시는 모든 선한 사람에게 위로가 된다. 여기서 보라.

첫째, 모든 피조물, 심지어 가장 작고 가장 보잘것없는 것, 곧 참새에게까지 미치는 섭리의 일반적 범위이다(마 10:29). 이 작은 동물은 그 값이 너무 보잘것없어서 한 마리는 값으로 쳐 주지도 않으니, 한 앗사리온의 값어치가 되려면 두 마리가 있어야 한다(아니, 두 앗사리온에 다섯 마리를 살 수 있다, 눅 12:6). 그럼에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즉, 1. 그것들이 한 알의 곡식을 쪼아 먹기 위하여 땅에 내려앉는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분의 섭리로 그것을 그들 앞에 예비해 두신 것이다. 이에 병행하는 곳, 곧 눅 12:6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그 하나도 하나님 앞에 잊어버린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곧 공급받기를 잊어버린 바 되지 아니하니, 그가 그것들을 먹이신다(마 6:26). 그러니 참새를 먹이시는 분이 성도들을 굶기지 않으실 것이다. 2. 그것들은 자연사든 비명사든 죽음으로 땅에 떨어질 때에 하나님의 아심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비록 그것들이 피조 세계의 그토록 작은 일부일지라도, 그것들의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의 아심 안에 들어오는데, 하물며 그분의 제자들의 죽음은 더욱 그러하다. 주목하라. 위로 솟아오르는 새들도 죽을 때에는 땅에 떨어진다. 죽음은 가장 높은 자도 땅으로 데려온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나병 환자를 정결하게 할 때 사용된 두 참새를 암시하셨다고 생각한다(레 14:4-6). 그 두 새는 난외주에서 참새라 불린다. 이 둘 중 하나는 죽임당하여 땅에 떨어졌고, 다른 하나는 놓아 보내졌다. 그런데 둘 중 어느 것이 죽임당하는지는 우연인 듯 보였으니, 이 일을 맡은 자들이 마음에 드는 것을 택하였으나, 하나님의 섭리가 어느 것인지 정하고 결정하셨다. 그러니 참새들이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그것들을 살피시는 이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인 너희를 더욱 살피실 것이다. 참새 하나도 너희 아버지 없이는 죽지 않는다면, 분명 한 사람은—한 그리스도인은—한 사역자는—나의 친구, 나의 자녀는 더욱 그러하다. 새 한 마리가 새 잡는 자의 그물에 걸리거나 그의 화살에 맞아 장터에서 팔리게 되는 것도, 섭리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다. 너희 원수들이 교활한 새 잡는 자처럼 너희를 위하여 올무를 놓고 너희를 향해 몰래 쏘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들은 너희를 잡을 수 없고 맞힐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원수들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 외에는 너희를 거스를 아무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활과 올무를 꺾으실 수 있고(시 38:12-15, 64:4,7), 우리 영혼을 새같이 벗어나게 하실 수 있다(시 124:7).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마 10:31). 주목하라.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두려움을 잠재울 만한 것이 충분히 있다.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모든 사람이 그러하니, 다른 피조물들이 사람을 위하여 지음받아 그의 발 아래 두인 까닭이다(시 8:6-8).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비록 참새 한 마리만도 못한 것처럼 멸시받을지라도, 땅의 존귀한 자들이니 더욱 그러하다.

둘째, 섭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특히 그들의 고난 중에 특별히 인지하신다는 것이다(마 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이것은 잠언 같은 표현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모든 일—심지어 가장 미세하고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일까지—을 셈하시고 기억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호기심 어린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일에 미치는 하나님의 섭리적 돌보심에 끊임없이 의지하여 살라는 격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 돌보심은 영원하신 마음(Eternal Mind)의 무한한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또 그 무한한 안식을 어지럽히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미친다.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털을 세신다면, 하물며 그들의 머리는 더욱 세시며, 그들의 생명과 위안과 영혼을 더욱 돌보신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 자신이 그들을 돌보는 것보다 그들을 더 돌보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자기 돈과 재물과 가축을 셈하기에 노심초사하는 자들도, 떨어져 잃어버려도 결코 아쉬워하지 않는 자기 머리털을 세기에는 결코 마음 쓰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머리털을 세시며, 그들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게 하신다(눅 21:18). 그들에게는 합당한 까닭 없이는 아주 작은 해도 가해지지 않으니, 하나님께 그분의 성도들이, 그리고 그들의 삶과 죽음이 이토록 귀하다!

[7.] 그분은 지금 시련의 날에 자기를 시인하는 자들을, 장차 승리의 날에 시인하실 것이요, 지금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은 영원히 그분에게 부인당하고 배척당할 것이라는 것이다(마 10:32,33). 주목하라. 첫째,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장차 우리의 말할 수 없는 영예와 행복이 될 것이다. 1.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니, 우리가 부름받을 때에 그분을 위하여 고난받음으로뿐만 아니라 그분을 섬김으로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분께 대한 시중, 그분께로부터의 기대를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이로써 우리 믿음의 진실함이 입증되고, 그분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며, 다른 이들이 세움을 받는다. 2. 이것이 지금은 우리를 비방과 환난에 노출시킬지라도, 우리는 의인의 부활 때에 그것에 대해 넘치게 보상받을 것이니, 그때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를 내가 시인하리라. 비록 그가 땅의 가련하고 무가치한 벌레일지라도, 이 사람은 나의 사람 중 하나요, 나를 사랑하였고 나에게 사랑받은 나의 친구요 사랑받는 자 중 하나이며, 내 피로 사신 바요 내 영의 작품이니,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하리라. 그것이 그에게 가장 유익할 그때에 말이다. 그가 그의 선고를 받으려고 내 아버지 앞에 설 때에 내가 그를 위하여 좋은 말로 변호하리라. 내가 그를 내 아버지께 내세우고 대변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우리의 말할 수 없는 영예와 행복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자들을 그분이 이렇게 존귀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사람 앞에서 그분을 존귀하게 하니, 그것은 작은 일이다. 그분은 그들을 그분의 아버지 앞에서 존귀하게 하시니, 그것은 큰 일이다. 둘째,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거부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자들은 큰 날에, 곧 그들이 그분을 가장 필요로 할 그때에 그분에게 거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을 자기 주인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자들을 그분은 자기 종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마 7:23). 기독교의 초기 시대에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그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거는 일이었으므로, 그것은 후대에—그것에 세속적 이익이 따르게 된 후대에—보다 진실함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8.] 그들의 제자 됨의 기초가, 고난을 그들에게 매우 가볍고 쉽게 만들어 줄 그러한 심성과 기질 위에 놓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기 추종자로 삼으신 것은 고난에 대한 준비됨을 조건으로 한 것이었다(마 10:37-39). 그분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만일 그들이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마음이 없다면 그들은 그분께 합당하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자기 직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어려움들, 곧 그 직분을 맡을 때에 이미 계산에 넣은 그 어려움들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수고와 환난에 기꺼이 복종하든지, 아니면 그 직분의 특권과 유익을 포기하든지 한다. 그런데 기독교라는 직분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분깃을 그 무엇보다 귀히 여겨 다른 어떤 관심사보다 앞세우지 않는 자들은, 그 직분의 존귀함과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 거래의 조건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은 그 거래의 이익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조건은 이렇게 정해져 있다. 만일 신앙이 무엇이라도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만큼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그것의 진리를 믿는 모든 자는 곧 그것의 값에 이를 것이며, 그것을 자기 본업이요 복으로 삼는 자들은 다른 모든 것을 그것에 양보하게 만들 것이다. 이 조건으로는 그리스도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위험을 무릅쓰고 그분을 떠나도 좋다. 주목하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버리거나 잃거나 당하든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손해 보는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격려가 된다. 이 값진 진주를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내어놓든지,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그것을 위해 내어놓는 것의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는 확신으로 우리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 그 조건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의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친족보다 앞세워야 한다. 곧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보다 앞세워야 한다. 이 관계들 사이에는 시기가 들어설 여지가 적으므로 흔히 사랑이 들어설 여지가 더 많으니, 그러므로 이것들이,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큰 관계로 예로 든 것이다. 자녀는 부모를 사랑해야 하고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보다 그들을 더 사랑한다면, 그들은 그분께 합당하지 아니하다. 그분이 말씀하신 우리 친족의 미움(마 10:21,35,36)에 의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져서는 안 되듯이, 그들의 사랑에 의해 우리가 그분에게서 이끌려 나가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레위처럼 되어야 하니, 그는 자기 아버지에 대하여 내가 그를 보지 못하였다 말하였다(신 33:9).

둘째, 우리의 안락과 안전보다 앞세워야 한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께 합당하지 아니하다. 여기서 주목하라. 1.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들은 자기 십자가를 예상하고 그것을 져야 한다. 2. 십자가를 짐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분이 지신 대로 그것을 져야 한다. 3. 우리가 십자가를 만날 때에, 그것을 지는 가운데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신실하게 따른다면 그분이 우리를 그분과 같은 고난을 거쳐 그분과 함께 영광에 이르도록 인도하시리라는 것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된다.

셋째, 생명 자체보다 앞세워야 한다(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 지켜서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자는, 영원한 죽음 가운데서 그것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 곧 그리스도를 부인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내어놓을 자는, 그것을 얻을 것이니, 말할 수 없이 유익하게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 현재의 생명에 가장 느슨하게 매여 있는 자들이 장차 올 생명을 위하여 가장 잘 준비된 자들이다.

[9.]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들의 명분을 그토록 진심으로 옹호하시어, 그들의 모든 친구에게 친구가 되어 주시고, 어느 때든 그들에게 베풀어진 모든 친절을 갚아 주시리라는 것이다(마 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첫째, 여기에 함축된 것은, 비록 대다수는 그들을 배척할지라도, 그래도 그들을 받아들이고 영접할 어떤 자들을 만나리라는 것이다. 곧 그 메시지로 인하여 그 메시지를 자기 마음에 환영하고 그 전달자를 자기 집에 환영할 자들을 만나리라는 것이다. 어찌하여 복음의 장이 섰는가? 어떤 자들은 사지 않아도 다른 자들은 살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가장 악한 때에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롬 11:5).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친절로든 불친절로든 행해진 것을 자기에게 행해진 것으로 여기시며, 자신이 그들이 대우받는 대로 대우받으시는 것으로 셈하신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대사에게 가해진 존귀나 멸시는 그를 보낸 군주에게 존귀나 멸시를 끼치는 것이니, 사역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이다(고후 5:20). 그분께 존경을 표하려는 자들이 어떻게 여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지 보라. 그분의 백성과 사역자들은 우리가 항상 우리 곁에 두고 있으며,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신다. 아니, 그 영예가 더 높이 올라가니,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자기에게 행해진 것으로 여기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도 그렇게 여기신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영접함으로써 그들은 부지중에 천사들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히 13:2 참조), 그리스도를, 아니 하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것도 부지중에 영접하는 것이니, 이는 마 25:37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다.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았나이까?

셋째, 비록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베풀어진 친절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고 그 이상은 할 능력이 없다면, 그것이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준 냉수 한 그릇일지라도 받아들여지리라는 것이다(마 10:42). 그들은 작은 자들이니, 가난하고 약하여 종종 원기를 회복할 것이 필요하며 가장 작은 것이라도 기뻐한다. 그 궁핍함이 어찌나 클 수 있는지, 냉수 한 그릇이 큰 은혜가 될 수도 있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베풀어진 친절은 그리스도의 장부에서, 그 선물의 비용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는 자의 사랑과 애정에 따라서 값매겨진다. 그 점에서 과부의 두 렙돈은 통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높이 새겨졌다(눅 21:3,4). 이렇게 은혜에 있어서 참으로 부요한 자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가난할지라도 선행에 있어서 부요할 수 있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그분의 제자들에 대한 친절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위하여 행해진 것이어야 한다. 선지자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받아야 하고, 의인은 의인의 이름으로 영접받아야 하며, 그 작은 자들 중 하나는 제자의 이름으로 영접받아야 한다. 곧 그들이 학식 있거나 재치 있어서가 아니요, 그들이 우리의 친족이거나 이웃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의롭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이 선지자요 제자여서 그리스도의 사명으로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역자들에게 베풀어진 친절에 받아들여질 만한 가치를 매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시선이다. 우리가 먼저 그분이 그 일에 관심을 갖게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Ut tibi debeam aliquid pro eo quod præstas, debes non tantum mihi præstare, sed tanquam mihi—만일 네가 베푸는 어떤 봉사에 대하여 내가 너에게 빚진 마음을 느끼기 원한다면, 너는 그 봉사를 행할 뿐만 아니라 네가 그것을 나를 위하여 행한다는 것을 내게 확신시켜야 한다. 세네카(Sene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