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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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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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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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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서론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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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I. 복음을 전파하시는 위대한 사역에서 보여 주신 우리 주 예수님의 한결같고 지칠 줄 모르는 부지런하심(마 11:1). II. 자신이 메시아이심에 관하여 요한의 제자들과 나누신 말씀(마 11:2-6). III.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베푸신 영예로운 증언(마 11:7-15). IV. 요한의 사역과 자신의 사역이 거둔 결실과 관련하여, 그 세대 전반과 또 몇몇 특정 지역들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슬픈 평가(마 11:16-24). V. 복음의 위대한 비밀들을 계시하시는 데에 취하신 지혜롭고 은혜로운 방법에 대하여 아버지께 드리신 감사(마 11:25,26). VI. 가난한 죄인들을 향하여 자기에게 나아와 자기에게 다스림과 가르침과 구원을 받으라고 부르시는 은혜로운 초청(마 11:27-30). 우리를 향한 경고로서의 복음적 화(禍)의 두려움이나, 우리를 향한 격려로서의 복음적 은혜의 달콤함을 이 장에서보다 더 풍성하게 드러내 보이는 곳은 어디에도 없으니, 이 장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마태복음 11장 1-6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John's Disciples Come to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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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다

¹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²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³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⁵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⁶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이 장의 첫 절을 어떤 이들은 앞 장에 붙여서, (어색하지 않게) 그 장의 결론으로 삼는다.

1. 그리스도께서 앞 장에서 제자들에게 베푸신 임직 설교는 여기서 그들에게 명하심이라고 불린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위임은 명령을 내포한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들에게 단지 허락된 것일 뿐 아니라, 그들에게 부과된 일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에 맡겨진 일이 아니었으니,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고전 9:16). 그분이 그들에게 하신 약속들은 이 명령들에 포함되어 있으니, 은혜의 언약은 그분이 명령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시 105:8). 그분은 명하심을 마치셨으니, 에텔레센 디아타손(ἐτέλεσεν διατάσσων, "명하시기를 마치셨다")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가르침은 온전한 가르침이다. 그분은 자신의 일을 끝까지 이루신다.

2.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실 말씀을 다 하신 후에 거기를 떠나가셨다. 그들은 그분이 떠나가셔서 자신들에게서 분리되시기까지 자기들의 주님을 떠나기를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유모가 아이로 하여금 혼자 걷는 법을 배우게 하려고 손을 거두는 것과 같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육신적 임재 없이 어떻게 살며 어떻게 일하는지를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잠시 떠나가시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였으니, 그것은 그분의 오랜 떠나심을 위해 그들이 준비되게 하려는 것이요, 또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들 자신의 손이 그들에게 족하게 하고(신 33:7), 그들이 늘 어린아이로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제 그 위임을 따라 무엇을 행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된 바가 없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두루 다녔으니, 아마도 유대 지방으로 갔을 것이다(이제까지 갈릴리에는 복음이 대부분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파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으나, 여전히 그분께 더 직접적으로 의존하였고, 그분에게서 오래 떠나 있지 않았다. 이렇게 그들은 점차로 자기들의 큰 사역을 위해 훈련받았다.

3. 그리스도께서는 가르치고 전파하시려고 떠나가셨으니, 곧 그분이 자기보다 앞서 제자들을 보내어 기적을 행하게 하신(마 10:1-8) 그 동네들에서였다. 이는 사람들의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그분이 영접받을 길을 예비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주의 길이 예비되었으니, 요한은 사람들을 회개에 이르게 함으로 그 길을 예비하였으나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아니하였다. 제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확증을 위하여 기적을 행하였다. 주목하라. 회개와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천국의 복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킨다. 살펴보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기적을 행할 권능을 주셨을 때, 그분 자신은 가르치며 전파하는 일에 힘쓰셨으니, 마치 이 둘 가운데 후자가 더 존귀한 일인 것처럼 하셨다. 전자는 후자를 위한 것에 불과하였다. 병자를 고치는 것은 몸을 구원하는 것이었으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전파하라고 명하셨으나(마 10:7), 그렇다고 친히 전파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셨다. 그분이 그들을 일하게 하신 것은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지방의 안식을 위해서였으며, 그들을 부리신다고 해서 덜 분주하신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한가하려고 다른 이들에게만 멍에를 메우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얼마나 다른가! 주목하라. 주의 사역에 일꾼이 늘어나고 많아지는 것은 우리의 태만을 위한 핑계가 아니라 우리의 부지런함을 위한 격려가 되어야 한다. 다른 이들이 분주할수록 우리는 더 분주해야 하며, 그래도 다 부족하니, 행해야 할 일이 그토록 많기 때문이다. 살펴보라. 그분은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전파하셨으니, 그곳들은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그분은 가장 많은 물고기를 에워쌀 수 있는 곳에 복음의 그물을 던지셨다. 지혜가 성중에서 부르며(잠 1:21), 성문 어귀에서 부르며(잠 8:3), 유대인의 성읍들에서, 곧 그분을 가볍게 여긴 자들 가운데서도 부르짖었으니, 그럼에도 그들은 먼저 그 제안을 받았다.

그분이 무엇을 전파하셨는지는 우리에게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아마도 그분의 산상수훈과 같은 취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다음으로 기록된 것은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께 보낸 전갈과 그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이다(마 11:2-6). 우리는 앞서 예수께서 요한의 고난을 들으셨음을 들었다(마 4:12). 이제 우리는 옥에 갇힌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듣게 됨을 듣는다. 그는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들었으니, 의심할 바 없이 그는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다. 이는 그가 신랑의 참된 친구였기 때문이다(요 3:29). 주목하라. 한 유용한 도구가 한쪽으로 치워질 때, 하나님은 그 대신에 많은 다른 도구를 일으키실 줄을 아신다. 요한이 옥에 갇혔어도 그 일은 계속되었으니, 이는 그의 결박에 아무런 괴로움도 더하지 않고 도리어 큰 위로를 더하였다. 환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듣는 것보다, 특히 자기 영혼 속에서 그것들을 체험하는 것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 이것은 옥을 궁전으로 바꾼다.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께서는 양심을 위하여 환난당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사랑의 소식을 전하실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볼 수 없었으나, 기쁨으로 그것들을 들었다. 그리고 보지 못하고, 다만 듣고도, 믿는 자들은 복이 있다.

이제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듣고 자기 제자 둘을 그분께 보냈으니, 그들과 그분 사이에 오간 일에 대한 기록을 우리는 여기서 본다. 여기에 다음이 있다.

I. 그들이 그분께 여쭙고자 한 질문이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것은 진지하고 중대한 질문이었다. 당신이 약속된 메시아입니까, 아닙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1.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것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구약의 성도들에게 그분이 알려졌던 이름들 중 하나였으니, 곧 오시는 이, 곧 오실 이이다(시 118:26). 그분은 이제 오셨으나, 우리가 여전히 기다리는 그분의 또 다른 오심이 있다. 2. 그들은 만일 이분이 그분이 아니라면 다른 이를 기다리겠다고 넌지시 비친다. 주목하라. 우리는 오실 그분을 기다리기에 지쳐서는 안 되며, 또한 그분을 누리게 되기까지는 더 이상 그분을 기다리지 않겠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비록 그분이 더디 오실지라도 그분을 기다리라. 오실 그분은 비록 우리의 때에는 아닐지라도 반드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들은 또한, 만일 이분이 그분이심을 확신하게 되면 회의적인 자들이 되지 않고 만족하여 다른 이를 기다리지 않겠다고 넌지시 비친다. 4. 그리하여 그들은 *당신이 그분이오니이까?*라고 묻는다. 요한은 자기로서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요 1:20). 이제, (1.) 어떤 이들은 요한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이 질문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리스도께 고귀한 증언을 한 것은 사실이니, 그는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요 1:34),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이(요 1:33),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요 3:34)라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위대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분이 그토록 오래 약속되고 기대되어 온 그 메시아이심을 더욱 충분히 확신하기를 원하였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와 그분으로 말미암는 우리의 구원에 관한 일에서는 확실히 아는 것이 좋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그분이 나타나시리라 기대했던 그런 외적인 영화와 권세 가운데 나타나지 않으셨으니, 그분 자신의 제자들도 이것을 인하여 걸려 넘어졌고, 어쩌면 요한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의 밑바닥에 그러한 것이 어느 정도 있음을 보시고,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목하라. 선한 사람들조차 통속적인 오류에 맞서 굳건히 서기는 어렵다. (2.) 요한의 의심은 그 자신의 당시 처지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그는 죄수였으니, 이렇게 생각하도록 유혹받았을 수 있다. "만일 예수가 참으로 메시아라면, 어찌하여 그의 친구요 선구자인 내가 이 환난에 빠지고 이토록 오래 그 가운데 버려져 있는데, 그는 결코 나를 돌아보지 않고, 결코 나를 찾아오지 않으며, 내게 사람을 보내지도 않고, 나의 안부를 묻지도 않으며, 나의 옥살이를 누그러뜨리거나 나의 석방을 앞당기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의심할 바 없이 우리 주 예수께서 옥에 있는 요한에게 가지 않으신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그들 사이에 어떤 결탁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것을 소홀히 여김으로 해석하였고, 그것은 어쩌면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믿음에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주목하라. [1.]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도 불신이 섞여 있을 수 있다. 가장 훌륭한 자들도 늘 한결같이 강한 것은 아니다. [2.] 그리스도를 위한 환난은, 특히 그것이 오래도록 풀리지 않고 지속될 때, 때로는 맞서 견디기에 너무 버거운 믿음의 시련이 된다. [3.] 선한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불신은 때로 시험의 때에 뿌리를 치고 들어와, 잘 정착되었다고 여겨졌던 가장 근본적인 진리들마저 의심하게 만들 수 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시 77:7). 그러나 우리는 요한의 믿음이 이 일에서 실패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가 그것을 더 굳세게 하고 확증받기를 원하였을 뿐이라고 소망한다. 주목하라. 가장 훌륭한 성도들도 자기 믿음을 굳건히 하고 불신앙의 유혹에 맞서 무장하기 위해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믿었으나 표징을 구하였고(창 15:6,8), 기드온도 그러하였다(삿 6:36). 그러나 (3.) 다른 이들은 요한이 이 질문을 가지고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보낸 것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기보다 그들의 만족을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살펴보라. 그가 죄수였음에도 그들은 그를 따르고 시중들며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그들은 그를 사랑하여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제, [1.] 그들은 지식이 약하고 믿음이 흔들렸으므로 가르침과 확증이 필요하였다. 또한 이 일에서 그들은 다소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니, 자기들의 스승을 위하여 시샘한 나머지 우리 주님을 시기하였고,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꺼려하였다. 이는 그분이 요한을 가리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스승이 자기 자신과 자기들을 거슬러 말한다고 여겨질 때 그를 믿기를 꺼려하였다. 선한 사람들도 흔히 자기 이익으로 인해 판단이 흐려지기 쉽다. 이제 요한은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고, 그들도 자기 자신처럼 만족하기를 바랐다. 주목하라.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헤아리고, 그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행해야 한다. 또한 우리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자들은 도울 수 있는 분께 보내야 한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2.] 요한은 처음부터 부지런히 자기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넘겨주려 하였으니, 마치 문법학교에서 대학으로 보내듯 하였다. 어쩌면 그는 자기 죽음이 가까웠음을 내다보았기에, 자기가 그들을 맡기고 떠나야 할 그리스도와 그들이 더 잘 친숙해지도록 데려가려 하였을 것이다. 주목하라. 사역자의 임무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교리의 확실함을 알고자 하는 자들은 깨달음을 주려고 오신 그분께 자신을 의탁해야 한다. 은혜 안에서 자라고자 하는 자들은 묻기를 힘써야 한다.

II. 여기에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이 있다(마 11:4-6). 그것은 너와 말하는 내가 그라(요 4:26)라고 하셨을 때처럼 직접적이고 분명한 대답은 아니었으나, 실제적인 대답, 곧 사실로써 보여 주신 대답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복음 진리의 설득력 있는 증거들을 풀어 헤아리며, 지식을 캐내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기를 원하신다.

1. 그분은 그들이 듣고 본 것을 가리키시며, 그것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셨으니, 이는 요한이 거기서 기회를 얻어 그들의 입으로 그들 자신을 더욱 충분히 가르치고 설득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그에게 전하라. 주목하라. 우리의 감각은 그것이 본래 다루는 대상에 관하여는 호소할 수 있고 또 호소해야 한다. 그러므로 화체설(化體說, 가톨릭의 실재적 임재 교리)은 예수 안에 있는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듣고 보는 것들을 가리켜 보이시기 때문이다. 가서 요한에게 전하라.

(1.) 너희가 본 그리스도의 기적의 능력을 전하라. 너희는 예수의 말씀으로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등을 어떻게 보는가. 그리스도의 기적은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행해졌으니, 이는 가장 강하고 가장 엄정한 조사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Veritas non quaerit angulos(베리타스 논 쿠아에리트 앙굴로스)—진리는 숨을 곳을 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이 여겨져야 한다. [1.] 신적 능력의 행위로서. 자연의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이렇게 자연의 권능을 다스리고 능가할 수 없다. 맹인의 눈을 여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특권으로 말해진다(시 146:8). 그러므로 기적은 하늘의 옥새이며, 그것이 인봉하는 교리는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어야 한다. 이는 그분의 능력이 결코 그분의 진리와 모순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분이 자기 인장을 거짓말에 찍으시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거짓 이적이 거짓 교리를 증명한다고 주장될 수는 있을지라도, 참된 기적은 신적 위임을 입증한다. 그리스도의 기적이 그러하였으니, 그것들은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으며 그분의 교리가 그를 보내신 이의 교리임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2.] 신적 예언의 성취로서. 우리 하나님이 오실 것과, 그때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 예언되었다(사 35:5,6). 이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이 선지자의 말과 일치한다면—명백히 그러하듯—그렇다면 이분은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기다려 온 우리 하나님이시니, 보복으로 임하시는 분이시며,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바로 그분이시다.

(2.) 그분의 기적과 함께 따르는 그분의 복음 전파에 관하여 너희가 들은 것을 그에게 전하라. 믿음은 비록 봄으로 확증되기도 하나, 들음에서 난다. 그에게 전하라. [1.]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읽는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적 사명을 입증하니, 그분이 자기 나라를 세우는 데 쓰신 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이요, 온갖 세속적 이점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적 능력으로 이끌리지 않았더라면 결코 자기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2.]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청중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멸시하고 경멸하여 내려다본 자들, 곧 랍비들이 보수를 줄 수 없다 하여 가르치려 하지 않았던 자들로 이루어졌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대개 왕들과 군왕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회중에게 전파하셨다. 양 떼 중 가난한 자들이 그분을 기다리리라고 예언되었다(슥 11:11). 주목하라. 가난한 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낮추심과 긍휼은, 우리 하나님의 부드러운 자비를 세상에 가져오실 이가 바로 그분이심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다윗의 자손이 가난한 자의 왕이 되시리라고 예언되었다(시 72:2,4,12,13). 또는 우리는 이것을 세상의 가난한 자보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 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 그러면 저 성경 말씀이 성취된다. 곧 겸손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사 61:1)는 말씀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교리가 참으로 복음, 곧 자기 죄로 인하여 슬픔 가운데 참으로 낮아진 자들과 자기를 부인함으로 참으로 겸손해진 자들에게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그분의 신적 사명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그분의 교리는 그들에게 맞추어졌으니, 하나님은 늘 그들을 위해 자비를 예비하셨다고 선언하셨다. [3.]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며, 복음화되며, 복음을 받아 영접하고, 그것으로 누룩이 되며, 거푸집에 부어지듯 그 속에 부어진다는 것을. 주목하라. 복음의 놀라운 효력은 그것의 신적 기원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가난한 자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변화된다. 선지자들은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알지 못한다고 탄식하였다(렘 5:4).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서 아무런 선한 결과도 얻어낼 수 없었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들의 가르침받지 못한 마음속으로 길을 뚫고 들어갔다.

2. 그분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복을 선언하신다(마 11:6).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이 증거들이 너무도 명백하여, 그분에 대하여 고의로 편견을 품지 않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지지(원어가 그러하다) 않는 자들은 그분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며, 그리하여 그분 안에서 복을 받게 된다. 주목하라. (1.) 무지하고 생각이 없는 자들이 걸려 넘어지기 쉬운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 많이 있으니, 그들은 어떤 정황들 때문에 그분의 복음의 본질을 거부한다. 그분의 보잘것없는 외모, 나사렛에서의 성장, 그분의 삶의 가난함,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비천함, 위대한 자들이 그분에게 던지는 멸시, 그분의 교리의 엄격함, 그 교리가 혈과 육에 주는 거스름,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데 따르는 고난, 이러한 것들이 많은 사람을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하니,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많은 것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그분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려고 세움을 입으셨으며(눅 2:34), 걸림돌의 반석이 되셨다(벧전 2:8). (2.) 이러한 걸림돌들을 극복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복이 있도다. 이 표현은, 이러한 편견들을 이기는 것이 어려운 일이며, 그것들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넌지시 비친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 말하면, 그들의 믿음은 그만큼 더욱 칭찬과 영광과 존귀에 이르게 될 것이다(벧전 1:7).

마태복음 11장 7-15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Christ's Testimony of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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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언

⁷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⁸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부드러운 옷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⁹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¹⁰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서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¹¹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¹²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¹³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라. ¹⁴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¹⁵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베푸신 높은 찬사를 본다. 이는 그의 영예를 되살릴 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을 되살리려 하심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어떤 이들은 요한이 보낸 그 질문을 빌미로 삼아, 그를 연약하고 흔들리며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못하는 자로 여겨 비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 방지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이러한 인격을 부여하신다. 주목하라. 우리 형제들의 명성을 살피고, 그들에 대한 시기와 악한 생각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기회를, 특히 어떤 연약함이 드러나는 경우에, 칭찬받을 만한 자들에 대해 잘 말해 주고 그들에게 그 손의 열매(잠 31:31)를 돌려주는 데 사용해야 한다. 세례 요한이 무대 위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사사로이 은둔해 계실 때에는, 요한이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공개적으로 나타나시고 요한이 구름 아래 가려졌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요한을 증언하신다. 주목하라. 자신은 확고한 입지를 가진 자들은, 마땅히 그러한 인격을 인정받아야 하나 그 기질이나 현재의 상황 때문에 그것을 누릴 길에서 벗어나 있는 다른 이들의 신용과 명성을 돕는 데 그 입지를 활용해야 한다. 이것이 곧 영예 받을 자에게 영예를 돌리는 것(롬 13:7)이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자기를 낮추었으며(요 3:20,30, 마 3:11),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인격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신다. 주목하라.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요(눅 14:11),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자를 그분께서 영화롭게 하실 것이며, 사람 앞에서 그분을 시인하는 자를 그분께서 시인하시되,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도, 곧 이 세상에서도 그리하실 것이다. 요한은 이제 그 증언을 마쳤고(행 13:25 비교),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를 칭찬하신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종들이 그 일을 마쳤을 때 그들을 위하여 영예를 예비해 두신다(요 12:26).

이제 요한에 대한 이 칭찬에 관하여 다음을 주목하라.

I. 그리스도께서 요한에 대해 이처럼 영예롭게 말씀하신 것은, 요한의 제자들이 듣는 데서가 아니라 그들이 떠나매, 곧 그들이 떠나간 직후였다(눅 7:24). 그분께서는 요한에게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조차 하지 않으시고, 이러한 그에 대한 칭찬이 그에게 전해지는 일도 원하지 않으셨다. 주목하라.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격려를 위하여 마땅한 칭찬을 기꺼이 베풀어야 하지만, 아첨처럼 보이거나 그들을 교만하게 부풀게 할 위험이 있는 모든 것은 피해야 한다. 다른 일에서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칭찬만큼은 잘 견디지 못하는 법이다. 교만은 부패한 기질이니, 우리는 다른 사람 안에서든 우리 자신 안에서든 그것을 키워서는 안 된다.

II. 그리스도께서 요한에 관하여 하신 말씀은, 요한의 칭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으니, 곧 한때 잘 받아들여졌으나 이제는 (다른 그런 일들이 으레 그러하듯) 이상하게도 잊혀 버린 요한의 사역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그 빛 안에서 즐거워하였으나, 단지 한동안만 그러하였다(요 5:35). "이제 생각해 보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이 질문을 너희 자신에게 던져 보라." 1. 요한은 광야에서 전파하였고, 그곳이 외딴 곳이요 불편한 곳이었음에도 사람들이 무리 지어 그에게로 몰려갔다. 만일 가르치는 자들이 외진 구석으로 옮겨졌다면, 그들 없이 지내는 것보다 그들을 찾아가는 것이 낫다. 이제 그의 설교가 그토록 많은 수고를 들여 들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면, 분명 그것은 어느 정도의 정성을 들여 다시 마음에 새길 가치가 있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우리가 헤쳐 나간 어려움이 클수록, 우리는 그 말씀으로 유익을 얻는 데 더욱 힘써야 한다. 2. 그들은 그를 보려고 그에게 나아갔으되, 그의 건전한 가르침으로 자기 영혼을 먹이려 하기보다는 그의 인물의 진귀한 모습으로 자기 눈을 즐겁게 하려는 마음이 더 컸으며, 양심을 위해서라기보다 호기심을 위해서였다. 주목하라. 말씀을 들으러 나오는 많은 이들이, 배우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 보고 또 보이기 위해 나오며,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무언가 이야깃거리를 얻기 위해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물으신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주목하라. 말씀을 듣는 자들은 그 의도가 무엇이었으며 그 유익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결산을 요구받을 것이다. 우리는 설교가 끝나면 그 책임도 끝났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그때에 가장 큰 책임이 시작된다. 머지않아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 때에 그러한 예배에 참석하였느냐? 무엇이 너를 그리로 데려왔느냐? 관습이었느냐 동행이었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선을 얻으려는 소망이었느냐? 거기서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어떤 지식과 은혜와 위로를 얻었느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갔더냐?" 주목하라.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으러 갈 때에는, 우리가 행하는 그 일에서 올바른 목적을 겨냥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III. 이제 요한에 대한 칭찬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그리스도의 질문에 무어라 대답할지 알지 못한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너희에게 일러 주리라."

1. "그는 굳건하고 결연한 사람이었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다. 너희는 그를 그렇게 생각해 왔으나, 그는 그러한 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원칙에서 흔들리지 않았고, 그 처신에서 들쭉날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기 자신과의 한결같은 일관성과 흔들림 없음으로 두드러진 자였다." 갈대처럼 연약한 자들은 갈대처럼 흔들릴 것이나, 요한은 심령이 강하였다(엡 4:14, 눅 1:80). 한편으로 대중의 갈채라는 바람이 시원하고 순조롭게 불어올 때에도, 다른 한편으로 헤롯의 분노라는 폭풍이 사납고 거세게 일어날 때에도, 요한은 여전히 동일하였으니, 어떤 날씨에서도 동일하였다. 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한 증언은 갈대의 증언, 곧 오늘은 이 마음이었다가 내일은 저 마음이 되는 사람의 증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풍향계 같은 증언이 아니었다. 아니, 그 증언에 대한 그의 한결같음이 (요 1:20에) 암시되어 있으니, 그는 드러내어 말하고 부인하지 아니하고, 드러내어 말하였으며, 그 후에도 그것을 고수하였다(요 3:28).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이 보낸 이 질문은 그가 전에 한 말의 진실성에 대한 어떤 의심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백성이 그에게로 몰려간 것은 그가 갈대 같은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사람들의 미소를 구하지도 않고 그들의 찌푸린 얼굴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우리의 일을 흔들림 없이 계속해 나가겠다는 굳건한 결심에는, 결국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2. 그는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었고,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였다. "그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었더냐? 만일 그러하였다면, 너희는 그를 보려고 광야로 나가지 않고 궁정으로 갔을 것이다. 너희가 보러 간 자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띤 자였으니, 그의 풍모와 차림새는 그가 세상의 모든 화려함과 감각의 쾌락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보여 주었다. 그의 의복은 그가 살던 광야와, 그가 거기서 전파한 교리, 곧 회개의 교리와 어울렸다. 그러니 너희는 궁정의 쾌락에 대하여 그토록 낯선 자였던 그가, 감옥의 공포로 인하여 그 마음을 바꾸어 이제 와서 예수가 메시야이신지 아닌지를 의심하게 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주목하라.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온 자들은, 핍박으로 인하여 자기 신앙에서 떠나갈 가능성이 가장 적다. 그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한 자들이 있기는 하나, 그들은 왕궁에 있다. 주목하라. 사람이 그 모든 모습에서 자기 인격과 자기 처지에 일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설교하는 자들은 궁정 사람처럼 보이려 해서는 안 되며, 또한 평범한 거처에 그 분깃이 던져진 자들은 왕궁에 있는 자들이 입는 부드러운 옷을 탐내서는 안 된다. 분별력은 우리에게 한결같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요한은 거칠고 볼품없어 보였으나, 그래도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갔다. 주목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갔던 우리의 이전 열심에 대한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일을 향해, 그리고 그 일 안에서 분발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토록 많은 일을 헛되이 행하고 당하였으며, 헛되이 달음질하고 헛되이 수고하였다(빌 2:16, 갈 4:11)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하자.

3. 그의 가장 큰 칭찬은 무엇보다 그의 직분과 사역이었으니, 이는 어떤 개인적 자질이나 능력보다 그에게 더 큰 영예였다. 그러므로 이것이 충만한 찬사로써 가장 폭넓게 다루어진다.

(1.) 그는 선지자였으며, 더 나아가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였다(마 11:9). 모든 선지자가 증언하는 그 위대한 선지자께서 그를 두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요한은 자기에 대하여, 자기는 그 선지자, 곧 그 위대한 선지자이신 메시야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였다(요 1:21).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합당한 심판자로서) 그를 두고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보다 못함을 인정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다른 모든 선지자보다 뛰어남을 인정하셨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선구자는 왕이 아니라 선지자였으니, 이는 메시야의 나라가 세상 권력 위에 세워진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직속 선구자는, 그러한 자로서, 탁월한 선지자였으니,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였다. 그들은 모두 훌륭히 행하였으나, 요한은 그들 모두를 능가하였다(잠 31:29 참조). 그들은 그리스도의 날을 멀리서 보았으며 그들의 환상은 아직도 한참 후에 이루어질 것이었으나(단 10:14 비교), 요한은 동이 트는 것을 보았고,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으며, 백성에게 메시야를 그들 가운데 서 계신 분으로 일러 주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였으나, 요한은 그분을 가리켰다. 그들은 처녀가 잉태하리라(사 7:14) 말하였으나, 요한은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하고 말하였다.

(2.)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되리라고 예언된 바로 그 사람이었다(마 11:10).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 기록된 바이니라. 그는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으며, 그러므로 그들보다 더 나은 자였다. 말라기는 요한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라(말 3:1) 하였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영예 중 일부가 그에게 부여되었으니, 곧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하여 말하고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도가 누리는 이 영예가 있으니, 곧 그들의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빌 4:3, 계 21:27)는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된 것은 다른 모든 선지자보다 뛰어난 큰 특권이었다. 그는 큰 사명을 띠고 보내심을 받은 사자였다. 사자는 천 명 중 하나(욥 33:23)로서, 자기가 보내심을 받은 그분으로부터 자기 영예를 이끌어 내는 자였으니,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내 사자다. 그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것, 곧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와 비참함과 구주가 필요함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구주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요한은 이것을 자기에 대하여 말하였고(요 1:23),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그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사역에 영예를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메시야를 위한 길을 예비하는 것이기에 그것에 대한 백성의 존중을 되살리려 하셨다. 주목하라. 하나님의 경륜의 아름다움의 많은 부분은,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고 일관되며 서로를 가리키는 데 있다. 요한을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높인 것은, 그가 그리스도 바로 앞에 갔다는 것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 가까운 자일수록 참으로 더욱 영예로운 자다.

(3.) 세례 요한보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더 큰 이가 없었다(마 11:11).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그 가치의 정도에 따라 평가하실 줄 아셨으니, 그분께서는 요한을 그보다 앞서간 모든 자보다, 곧 보통의 출생으로 여자에게서 난 모든 자보다 앞세우신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어 그분의 교회에서 어떤 직분으로 부르신 모든 자 중에, 요한은 모세 자신보다도 더 뛰어날 만큼 가장 탁월하다. 이는 그가 진실로 통회하는 자들에게 죄 사함의 복음 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요, 또한 그가 그들 중 누구보다도 하늘로부터 더 두드러진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성령이 강림하시는 것을 보았다(마 3:16). 그는 또한 그의 사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니, 거의 온 민족이 그에게로 몰려갔다. 요한처럼 그토록 위대한 목적으로 일어선 자도, 그토록 고귀한 사명을 띠고 온 자도, 그토록 환영받는 영접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 자도 없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상에서 큰 인물이 된 자가 많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보다 요한을 앞세우신다. 주목하라. 위대함은 겉모습과 외적인 화려함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가장 위대한 성도요 가장 큰 복이 되는 자들이니, 요한이 그러하였듯이 주 앞에서 큰 자(눅 1:15)다.

그러나 요한에 대한 이 높은 찬사에는 놀라운 한정이 따른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 영광의 나라에서 그러하다. 요한은 크고 선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여전히 연약함과 불완전함의 상태에 있었으며, 그러므로 영화롭게 된 성도들과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 12:23)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주목하라. 첫째, 하늘에는 영광의 등급이 있어, 거기에 다른 이들보다 작은 자들이 있다. 비록 모든 그릇이 똑같이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모두가 똑같이 크고 넉넉한 것은 아니다. 둘째, 하늘에 있는 가장 작은 성도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보다 더 크니,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사랑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더 많이 하고, 그분으로부터 더 많이 받는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뛰어난 자들이나(시 16:3), 하늘에 있는 자들은 훨씬 더 뛰어나다. 이 세상의 가장 나은 자도 천사보다 못하나(시 8:5), 거기 있는 가장 작은 자도 천사와 동등하다. 이것은 마땅히 우리로 하여금 저 복된 상태를 사모하게 해야 하니, 거기서는 약한 자가 다윗 같을 것이다(슥 12:8). [2.] 여기서 천국이라 함은, 오히려 은혜의 나라, 곧 그 능력과 순결의 완전함에 이른 복음의 경륜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면 호 미크로테로스(ho mikroteros)—그 안에서 더 작은 자가 요한보다 크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리스도 자신으로 이해하니, 그분은 요한보다 나이가 어렸고, 어떤 이들의 견해로는 요한보다 작았으며,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하여 낮추어 말씀하셨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시 22:6) 하셨으나, 그래도 요한보다 크시다. 그러므로 이것은 세례 요한이 한 말(요 1:15)과 일치한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신약의 사도들과 일꾼들, 곧 복음적 선지자들로 이해해야 한다. 그들과 요한의 비교는 그들의 개인적 거룩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요한은 오시는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으나, 그들은 오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요한은 복음의 날의 동틈에 이르렀고, 그 점에서 그 앞의 선지자들을 능가하였으나, 그는 그 날의 정오 이전에, 곧 휘장이 찢어지기 전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이전에, 그리고 성령이 부어지기 이전에 데려감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복음 전하는 자들 중 가장 작은 자라도, 더 큰 계시를 받았고 더 큰 사절의 임무를 맡았으므로 요한보다 크다. 요한은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았으나(요 10:41), 사도들은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이 우위의 근거는 구약의 경륜에 대한 신약의 경륜의 우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일꾼들이 뛰어난 것은 그들의 직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고후 3:6 이하). 요한은 막시뭄 쿼드 시크(maximum quod sic)—자기 부류 중 가장 큰 자였으니, 그는 자기가 처한 경륜이 허용하는 극한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미니뭄 막시미 에스트 마유스 막시모 미니미(minimum maximi est majus maximo minimi)—가장 높은 부류의 가장 작은 자가 가장 낮은 부류의 가장 첫째 되는 자보다 우월하다. 산 위의 난쟁이가 골짜기의 거인보다 멀리 본다. 주목하라. 사람의 모든 참된 위대함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은혜로이 자신을 나타내심에서 비롯되며 그것으로 일컬어진다. 가장 선한 사람도, 그분께서 기뻐하사 만드시는 그 이상은 아니다. 우리의 분깃이 천국의 시대에, 그토록 큰 빛과 사랑의 유익 아래 던져진 것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그 유익이 클수록,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면(고후 6:1) 그 결산은 더욱 클 것이다.

(4.) 세례 요한의 큰 칭찬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인정하시고, 얼음을 깨뜨려 사람들을 천국을 위해 준비시키는 데 그것을 놀랍게 성공시키셨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처음 나타난 때부터 지금까지 (이는 두 해를 그리 넘기지 않은 기간이었다), 많은 선한 일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중심이신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움직임이 그토록 빨라졌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비아제타이(biazetai)—빔 파티투르(vim patitur)—마치 군대가 도성을 맹렬히 공격하여 빼앗는 폭력이나, 무리가 집으로 밀고 들어가는 폭력처럼, 그렇게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것의 의미는 병행 본문(눅 16:16)에 나와 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무리가 요한의 사역으로 감동을 받아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1.] 있을 법하지 않은 무리였다. 거기에 권리도 자격도 없어 보이는 자들, 그래서 침입자처럼 보이고 우리 법이 일컫는 바 불법 점거(tortuous entry), 곧 부당하고 강제적인 진입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이 나라에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그 나라의 본 자손이 그 나라에서 쫓겨나고, 많은 이가 동과 서로부터 거기에 들어올 때(마 8:11,12), 그 나라는 침노를 당하는 것이다. 이것을 마 21:31,32와 비교해 보라. 세리와 창기들은 요한을 믿었으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를 배척하였으니, 그리하여 세리와 창기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그들이 머뭇거리는 동안 그들의 머리 위로 그것을 차지하였다. 주목하라. 우리보다 나은 자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복음이 그 태동기로부터, 매우 가망 없어 보이던 많은 이들을 거룩함으로 이끌어 왔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큰 칭찬이다.

[2.] 간절한 무리였다. 이 침노는 요한의 사역을 따른 자들 안에 있던 갈망과 노력의 힘과 활기와 진지함을 나타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것을 위해 그토록 멀리까지 나아가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자기 신앙으로 하늘을 삼으려는 모든 자에게 어떠한 열렬함과 열심이 요구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주목하라.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들은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눅 13:24). 그 나라는 거룩한 침노를 받는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마음의 성향과 편향, 틀과 기질이 변화되어야 하며, 견뎌야 할 혹독한 고난이 있고, 부패한 본성에 가해야 할 힘이 있다. 우리는 달려가고 씨름하고 싸워야 하며 사투를 벌여야 하니(눅 22:44 비교), 그러한 상을 얻고 안팎으로부터 오는 그러한 대적을 이기는 데에는 이 모든 것으로도 부족하다.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큰 구원에 분깃을 가지려는 자들은 강한 갈망으로 그것을 향해 나아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것을 얻으려 하며, 그 대가를 어렵게 여기지 않고, 복을 받지 아니하고는 그 붙든 것을 놓지 않는다(창 32:26).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려는 자들은 부지런해야 한다(벧후 1:10). 천국은 결코 게으른 자들의 안일을 봐주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수고하는 자들의 안식이 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그것은 복된 광경이다. 오, 우리가 더 많은 무리를, 성난 다툼으로 다른 이들을 천국에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다툼으로 자기 자신을 그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을 볼 수 있다면!

(5.) 요한의 사역은 복음의 시작이었으니, 마 1:1과 행 1:22에서 그렇게 헤아려진다(막 1:1, 행 1:22). 이것은 여기서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요한에게서 구약의 경륜이 죽기 시작하였다(마 11:13). 그토록 오랫동안 그 직무는 충만한 효력과 능력으로 지속되었으나, 그때 그것이 쇠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모세의 율법의 의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이르기까지 제거되지 않았으나, 구약의 계시들은 가까이 온 천국에 대한 더 분명한 나타남에 의해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복음의 빛은 (본성의 빛이 그러하듯) 그 율법에 앞서 가서 길을 예비해야 했으므로,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들은 그 계명들보다 먼저 종말에 이르렀다(피니스 페르피키엔스[finis perficiens]이지 인테르피키엔스[interficiens]가 아니니—존속의 끝이 아니라 완성의 끝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다음을 보여 주신다. 첫째, 구약의 빛이 어떻게 세워졌는가.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 안에 세워졌으니, 그들은 비록 희미하게나마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관하여 말하였다. 주목하라. 율법도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오실 그분에 관하여 예언하였다고 일컬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에서 시작하셨다(눅 24:27).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들의 더 분명한 음성으로 예언되셨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일이라는 말 없는 표상들로도 예언되셨으며, 말로 된 예언들에서뿐만 아니라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모형들에서도 나타나셨다. 우리가 구약의 예언들을 설명해 주는 신약의 교리와, 신약의 교리를 확증하고 밝혀 주는 구약의 예언들을 둘 다 가진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복이 있을지어다(히 1:1). 두 그룹(그룹들, cherubim)처럼, 그것들은 서로를 마주 본다(출 25:20 비교). 율법은 오래전에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고, 요한 이전 삼백 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으나, 그래도 그 둘은 다 요한까지 예언하였다고 일컬어진다. 이는 율법이 여전히 지켜졌고, 모세와 선지자가 여전히 읽혔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성경은 그 기록자들이 떠나갔어도 오늘날까지 가르치고 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죽었고, 사도들과 복음 전하는 자들도 죽었으나(슥 1:5), 주의 말씀은 영원히 있도다(벧전 1:25). 성경은 그 기록자들이 흙 속에서 잠잠할지라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둘째, 이 빛이 어떻게 제쳐졌는가. 그분께서 그들이 요한까지 예언하였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그들의 영광이 더 뛰어난 영광에 의해 가려졌으며(고후 3:10 비교), 그들의 예언이 요한의 증언, 곧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에 의해 대체되었음을 암시하신다.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새벽빛은 촛불을 어둑하게 만든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그들의 예언은, 요한이 그분이 오셨다고 말하였을 때 시효가 지났다.

[2.] 요한에게서 신약의 날이 동트기 시작하였다. 이는 (마 11:14에)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요한은 두 언약을 잇는 고리 같았다. 노아가 피불라 우트리우스퀘 문디(Fibula utriusque mundi)—두 세계를 잇는 고리였던 것처럼, 그는 우트리우스퀘 테스타멘티(utriusque Testamenti)—두 언약을 잇는 고리였다. 구약을 맺는 예언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를 보내리라(말 4:5,6)였다. 그 말씀은 요한까지 예언이었고, 그때에 이르러 역사(歷史)로 바뀌어 예언이기를 그쳤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요한이 신약의 엘리야라는 것을 큰 진리로 말씀하신다. 이는 육적인 유대인들이 기대한 것처럼 인 프로프리아 페르소나(in propria persona)—엘리야 본인—은 아니다. 요한은 그것을 부인하였다(요 1:21). 그러나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올 자(눅 1:17), 곧 기질과 처신에서 그를 닮은 자, 두려움으로 회개를 촉구할 자, 특히 그 예언에 있는 대로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킬 자였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진리로 말씀하시되, 메시야의 지상 왕국과 그에 어울리는 서곡들에 그 기대를 고정시킨 자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진리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환영받지 못하리라고 짐작하신다.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그들이 받든 받지 않든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나, 그분은 그들의 편견을 책망하신다. 곧 그들이 자기들의 생각에 반대되는 가장 위대한 진리들은, 비록 그것이 자기들의 유익에 그토록 유리한 것일지라도, 더디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또는, "만일 너희가 그를 받아들인다면, 또는 만일 너희가 요한의 사역을 약속된 엘리야의 사역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너희에게 엘리야가 되어, 너희를 돌이키고 너희를 주를 위해 준비시킬 것이다." 주목하라. 복음의 진리들은, 받아들여지는 바에 따라, 생명의 향기가 되기도 하고 사망의 향기가 되기도 한다(고후 2:16). 그리스도는 구주이시며, 요한은 엘리야이니, 그들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강론을 주의를 기울이라는 엄숙한 요구로 마무리하신다(마 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는 그것들이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워 주의가 필요하지만, 또한 크게 중요하고 결과가 막중하여 마땅히 주의를 기울일 만한 것임을 암시한다. "만일 요한이 예언된 그 엘리야라면, 분명 여기에 큰 변혁이 진행되고 있으며, 메시야의 나라가 문 앞에 있고, 세상은 머지않아 행복한 변화로 놀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든 백성이 유의하라. 이것들은 너희의 진지한 숙고를 요구하는 일들이니, 그러므로 너희는 모두 내가 말하는 바에 귀 기울일 책임이 있다." 주목하라. 하나님의 일들은 크고도 공통된 관심사다. 어떤 것이든 들을 귀가 있는 모든 자는, 이것을 들을 책임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그분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바르게 사용하고 활용하는 것뿐임을 암시한다. 그분은 귀가 있는 자들에게 들으라 요구하시며, 이성이 있는 자들에게 그 이성을 사용하라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무지한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다. 그러므로 그들이 듣지 않는 것은, 귀먹은 독사처럼 자기 귀를 막기(시 58:4,5) 때문이다.

마태복음 11장 16-24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Christ Reproaches Chorazin,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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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고라신 등을 책망하시다

¹⁶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¹⁷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¹⁸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¹⁹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²⁰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²¹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²²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²³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²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요한과 그의 사역을 계속 칭찬하시던 중, 여기서 갑자기 멈추시고 그 말씀을 돌려, 요한의 사역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의 사역까지 누리고도 헛되이 흘려보낸 자들을 책망하신다. 그 세대에 관하여는, 주께서 그들을 무엇에 비유하시는지(마 11:16-19)를 살펴볼 수 있으며, 그가 특별히 지목하시는 고을들에 관하여는, 그들을 누구와 비교하시는지(마 11:20-24)를 살펴볼 수 있다.

I. 그 세대, 곧 그 당시 유대 백성 전체에 관하여. 참으로 천국으로 힘써 밀고 들어간 자들이 많이 있었으나, 대다수는 여전히 불신과 완고함에 머물러 있었다. 요한은 위대하고 선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운명이 던져진 그 세대는 더할 나위 없이 메마르고 무익하였으며, 그를 누릴 자격이 없는 세대였다. 주목하라. 선한 사역자들이 사는 곳의 악함은 도리어 그들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 된다. 노아가 그 세대 중에서 의로웠다는 것이 그의 칭찬이었다. 주께서는 요한을 칭찬하신 다음, 그를 자기들 가운데 두고도 그의 사역으로 유익을 얻지 못한 자들을 정죄하신다. 주목하라. 사람들이 더 칭찬받을 만할수록, 그들이 사역자를 멸시한다면, 심판의 날에 그러함이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를 여기서 한 비유로 제시하시되, 마치 이것을 적절히 나타낼 만한 비교를 찾지 못하시는 듯 말씀하신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주목하라. 좋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자들이 범하는 죄보다 더 큰 어리석음은 없다. 그들이 무엇과 같은지 말하기가 어렵다. 이 비유는 유대 아이들이 놀이할 때의 흔한 관습에서 취한 것인데, 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들은 어른들의 혼인과 장례의 풍습을 흉내 내어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장난이었기에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였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나 그리스도의 사역도 그 세대에게 그러하였다. 주께서는 특히 자기들을 스스로 높이 여기며 교만한 자만에 빠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빗대어 말씀하시는 것이니, 그들을 낮추시려고 그들을 아이들에, 그들의 행실을 아이들의 놀이에 비유하신다.

이 비유는 그것을 풀어내고 그 해설을 함께 펼침으로써 다음 다섯 가지 주목할 점으로 가장 잘 설명될 것이다.

주목하라. 1.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불쌍한 영혼들의 회심과 구원을 위하여 다양한 합당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그러므로 그 일을 이루시려고 손대지 않으신 돌이 하나도 없으시다. 그가 목표로 삼으시는 가장 큰 일은 우리의 의지를 녹여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게 하시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그가 자신을 계시하신 것들로 우리를 감동시키시는 것이다. 일하실 다양한 감정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그는 그것들에 일하시는 다양한 길을 사용하시는데, 그 길들이 서로 다를지라도 모두 동일한 한 가지를 지향하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길 속에서 동일한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이 비유에서 이것은 우리를 향한 그의 피리 불기와 우리를 향한 그의 애곡으로 불린다. 그는 소망에 작용하기에 합당한 복음의 귀한 약속들로 우리를 향해 피리를 부셨고, 두려움에 작용하기에 합당한 율법의 무서운 경고들로 우리를 향해 애곡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두렵게 하여 죄에서 빠져나오게 하시고 자기에게로 이끄시려 함이었다. 그는 은혜롭고 자비로운 섭리들로 우리를 향해 피리를 부셨고, 재앙과 환난의 섭리들로 우리를 향해 애곡하셨으며, 이 둘을 서로 마주 세우셨다. 그는 자기 사역자들에게 그 음성을 바꾸도록(갈 4:20) 가르치셨으니, 어떤 때에는 시내 산에서 우레와 같이 말하게 하시고, 어떤 때에는 시온 산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말하게 하셨다.

이 비유의 해설에서는 그 세대의 두 큰 빛이었던 요한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이 지닌 서로 다른 성격이 제시된다.

(1.) 한편으로,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며 그들을 향해 애곡하면서 왔다. 그는 사람들과 친밀히 어울리지도 않고, 평소에 무리와 함께 먹지도 않으며, 광야의 자기 처소에서 홀로 지냈으니, 그의 양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그런데 이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어야 마땅하였다. 이처럼 엄격하고 절제된 삶은 그가 전한 교훈과 매우 잘 어울렸으며, 그 생활이 자기 교훈에 부합하는 사역자가 선한 일을 행할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사역자의 설교조차 언제나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2.) 다른 한편으로, 인자는 먹고 마시며 왔으니, 그렇게 그들을 향하여 피리를 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특별한 엄격함이나 금욕을 표방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부류의 사람들과 친밀히 어울리셨다. 그는 다정하고 가까이하기 쉬우셨으며, 어떤 무리도 꺼리지 아니하셨고, 바리새인들과도 세리들과도 자주 잔치 자리에 함께하셨으니, 이는 요한의 절제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던 자들을 이 방법으로 얻을 수 있을지 시험하시려 함이었다. 요한의 찌푸린 얼굴에도 두려워하지 않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미소에는 이끌릴 수 있을 것이었다. 바울은 바로 여기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는(고전 9:22) 법을 배웠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 처신이 그토록 달랐음에도, 자신의 자유로운 행하심으로 결코 요한을 정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요한이 그를 정죄하지 아니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주목하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실의 선함을 아무리 확신할지라도, 그것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이는 같은 하나님이시지만(고전 12:6), 그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이 성령의 다양한 나타나심은 각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주시는 것이다(고전 12:7). 특히 주목하라.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다양하게 은사를 받았으니, 어떤 이의 능력과 기질은 이쪽으로, 다른 이의 것은 저쪽으로 향한다. 어떤 이들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들이요, 다른 이들은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시며(고전 12:11),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쪽도 정죄해서는 안 되고 둘 다 칭찬하며 그 둘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양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다루시는 다양한 길을 시도하시는데, 이는 죄인들이 순순해지거나 아니면 변명할 수 없게 되도록 하시려 함이니, 그리하여 그 결말이 어떠하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주목하라. 2.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회심을 위하여 취하시는 다양한 방법들이 많은 이들에게는 열매 없고 무익하다. "너희가 춤추지 아니하고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그 하나로도 다른 하나로도 마땅히 감동받지 아니하였다." 의술에서처럼, 특정한 수단들은 그 나름의 특정한 의도가 있어 그에 부응해야 하며, 그 나름의 특정한 인상이 있어 그에 굴복해야 하니, 이는 크고 보편적인 목적의 성공을 위함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율법으로도 매이지 않고, 약속으로도 초청받지 않으며, 경고로도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면, 가장 큰 것들로도 깨어나지 않고, 가장 달콤한 것들로도 이끌리지 않으며, 가장 무서운 것들로도 놀라지 않고, 가장 분명한 것들로도 깨닫지 못한다면, 성경의 음성에도, 이성의 음성에도, 경험의 음성에도, 섭리의 음성에도, 양심의 음성에도, 자기 유익의 음성에도 귀 기울이지 않으려 한다면, 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풀무를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니 이는 악한 자가 제거되지 아니함이라 사람들이 그들을 내버린 은이라 부르게 되리라(렘 6:29). 사역자의 수고가 헛되이 베풀어지며(사 49:4), 그리고 그보다 훨씬 큰 손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다(고후 6:1). 주목하라. 신실한 사역자들이 자기 수고의 열매를 거의 보지 못할 때에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설교자들과 가장 훌륭한 설교조차 바라던 목적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얼마간의 위로가 된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저 위대한 지휘관들이었던 그리스도와 요한의 활이, 죽임당한 자의 피에서 또 용사의 기름에서 그토록 자주 헛되이 돌아왔다면(삼하 1:22), 우리의 활이 그러하다 하여 이상할 것이 없으며, 우리가 마른 뼈들을 향하여 그토록 보람 없이 예언한다 하여 이상할 것이 없다.

주목하라. 3. 흔히 은혜의 수단으로 유익을 얻지 못하는 자들은 비뚤어져서, 그 수단을 누리게 해 준 사역자들을 비방하며, 자기들은 선한 것을 얻지 못하므로 말씀과 그 말씀의 신실한 전파자들에 대한 편견을 일으키고 퍼뜨림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온갖 해를 끼친다. 하나님께 순응하여 그를 따라 행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를 거스르며 그와 반대로 행한다. 이 세대가 그러하였으니, 그들은 그리스도와 요한을 믿지 않고 마땅히 그리해야 할 것처럼 그들을 가장 선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작정하였기에, 도리어 그들을 모욕하고 가장 악한 자로 묘사하기에 골몰하였다. (1.) 세례 요한에 대하여, 그들은 그가 귀신이 들렸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의 엄격함과 절제를 우울증과, 일종의 사탄에게 사로잡힌 어떤 상태로 돌렸다. "어찌 그를 귀히 여기겠는가? 그는 망상으로 가득하고 미친 상상에 사로잡힌, 가련한 우울증 환자에 불과하다."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들은 그의 자유롭고 친절한 교제를 도리어 방탕과 육신을 기쁘게 하는 더 악한 습성으로 돌렸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로다. 이보다 더 추하고 악의에 찬 비방은 없을 것이다. 이는 패역한 아들에 대한 고발이니(신 21:20), 그는 먹기를 탐하며 술에 잠긴 자라. 그러나 이보다 더 거짓되고 부당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롬 15:3), 그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그토록 자기를 부인하고 절제하며 세상을 멸시하는 삶을 산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흠 없으시고 죄인에게서 떠나신 분이 여기서는 죄인들과 결탁하여 그들에게 더럽혀진 것처럼 묘사된다. 주목하라. 가장 티 없는 결백과 가장 비할 데 없는 탁월함이라도 언제나 혀의 비방을 막아 주는 울타리가 되지는 못한다. 아니, 사람의 가장 좋은 은사와 가장 좋은 행위, 곧 선한 의도를 가지고 덕을 세우기에 합당하게 계획된 그것들조차 도리어 비방의 빌미가 될 수 있다. 우리의 가장 좋은 행위가 우리를 향한 가장 나쁜 고발이 될 수 있으니, 다윗의 금식이 그러하였다(시 69:10).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셨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는 그들이 가졌던 가장 좋은 친구셨다. 이는 그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기 때문인데, 곧 큰 죄인들, 심지어 죄인 중의 괴수까지도 구원하시려 함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세리와 죄인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죄인이었던 자가 매우 절실하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칭송이며 영원히 그러할 것이니, 이것을 그의 비방거리로 돌린 자들은 그 유익을 잃어버렸다.

주목하라. 4. 은혜의 수단 아래에서 사람들이 이토록 열매 없고 비뚤어지는 까닭은, 그들이 장터에 앉은 아이들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이들처럼 어리석고, 아이들처럼 고집스러우며, 아이들처럼 분별없고 장난스럽다. 그들이 깨달음에 있어서 대장부답게 행하기만 한다면, 그들에게도 얼마간 소망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앉아 있는 장터는 어떤 이들에게는 게으름의 자리요(마 20:3), 다른 이들에게는 세상 일거리의 자리이며(약 4:13), 모든 이에게는 소란과 오락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사람들이 은혜의 수단으로 그토록 적은 유익밖에 얻지 못하는지 묻는다면, 그 이유가 이러함을 알게 될 것이다. 곧 그들이 게으르고 경솔하여 수고를 들이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들의 머리와 손과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 차 있어 그 세상 염려가 말씀을 막고(겔 33:31, 암 8:5) 마침내 그들의 영혼까지 막아버리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이 진지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기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들은 장터에 있으며, 거기 앉아 있으니, 그들의 마음이 이런 것들에 머물고, 그것들 곁에 거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주목하라. 5. 비록 이렇게 많은 이들, 아니 대다수가 은혜의 수단을 멸시하고 남용할지라도, 은혜로 말미암아 그것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자기 영혼의 유익을 위해 그 수단의 목적에 부응하는 남은 자가 있다. 그러나 지혜는 그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리스도는 지혜시니, 그 안에 지혜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며,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자녀들이다(히 2:13). 복음은 지혜요, 그것은 위로부터 난 지혜이다. 참된 신자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며, 또한 위로부터 나니, 그들은 지혜로운 자녀들이요, 자기 자신과 자기 참된 유익을 위해 지혜로운 자들이며, 장터에 앉은 어리석은 자녀들과 같지 않다. 이 지혜의 자녀들은 지혜를 옳다 하니,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목적에 순응하며 그 의도에 부응하고, 그 은혜가 취하는 다양한 방법들로 합당하게 감동받고 깨달아, 그렇게 이 방법들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지혜를 입증한다. 이것은 눅 7:29에서 설명된다. 세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을 옳다 하였으며, 그 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주목하라. 은혜의 수단의 성공은 그 수단을 택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옳다 입증하니, 이는 그 일로 하나님을 어리석다 고발하는 자들을 반박한다. 의사의 지시를 지키는 모든 환자가 낫는 것은 그 의사의 지혜를 입증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복음이 다른 이들에게는 어떠하든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롬 1:16).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다른 이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거치는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일 때(고전 1:23,24), 그리하여 그들이 그것을 아는 것을 자기 야망의 절정으로 삼고(고전 2:2), 그것의 효력을 자기 자랑의 면류관으로 삼을 때(갈 6:14), 여기에 지혜가 그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음이 있다. 지혜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지혜의 증인들이며(사 43:10), 지금 성도들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은 지혜가 성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믿는 모든 자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받으실 그 날에(살후 1:10), 증인으로 세움을 받을 것이다. 혹 어떤 이들의 불신이 그리스도를 거짓되다 함으로 그를 비방한다 할지라도, 다른 이들의 믿음은 그가 참되시며 또한 지혜로우시다 하는 데에 인 침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고전 1:25). 우리가 그리하든 그리하지 않든,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심판하실 때에, 그의 공의뿐 아니라 그의 지혜도 옳다 함을 얻을 것이다.

자,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 세대에 관하여 주신 진술이며, 그 세대는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자들이 잇따라 이어짐 가운데 여전히 남아 있다. 그때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 이후로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니, 어떤 사람은 그 말한 것을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아니한다(행 28:24).

II. 그리스도께서 가장 많이 머무셨던 특정한 고을들에 관하여. 그가 그 세대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그는 그 고을들에 특별히 적용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셨다. 그 때에 그가 그들을 책망하기 시작하셨다(마 11:20). 그는 오래전부터 그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셨으나(마 4:17), 이제까지는 책망하기 시작하지 아니하셨다. 주목하라. 거칠고 불쾌한 방법은 먼저 더 부드러운 수단을 사용한 다음에라야 취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쉽게 책망하지 아니하시며,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니, 죄인들이 그 완고함으로 그것을 그에게서 억지로 끌어내기 전에는 그러하시다. 지혜가 먼저 초청하나, 그 초청이 멸시당하면 그때에야 책망한다(잠 1:20,24). 책망으로 시작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이제 주목하라.

  1. 그들에게 지워진 죄. 그것은 도덕법을 거스른 어떤 죄가 아니었으니, 만일 그러하였다면 위로해 줄 복음에 호소할 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 곧 구속의 법을 거스른 죄였으며, 그것은 곧 회개하지 않음이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곧 그들을 향해 꾸짖으신 죄이니, 있을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럽고 배은망덕한 일, 곧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한 것이다. 주목하라. 고의적인 회개의 거부는 복음을 누리는 수많은 자들의 크나큰 정죄받을 죄이며, 죄인들이 (다른 어떤 죄보다도) 영원토록 책망받을 죄이다. 세례 요한도, 그리스도도, 사도들도 전파한 큰 교리는 회개였다. 피리 불기에서도 애곡에서도 의도된 큰 목적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 마음과 길을 바꾸고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거기로 이끌리려 하지 않았다. 주께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믿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시니(이는 그들 중 많은 이가 어떤 종류의 믿음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하신다. 그들의 믿음은 그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 삶을 개혁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회개로 이끄시려고 그들의 다른 죄들을 책망하셨으나,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하자, 치유받기를 거부한 그 죄로 그들을 책망하셨다. 그가 그것으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책망하고 마침내 그것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시려 함이었으니, 곧 오직 그 죄만이 슬픈 처지를 절망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 상처를 고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 함이었다.

  2. 그 죄의 가중 사유. 그들은 그의 권능이 가장 많이 행해진 고을들이었으니, 이는 한동안 그의 주된 거처가 그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어떤 곳들은 다른 곳들보다 더 풍성하고 강력하며 순수하게 은혜의 수단을 누린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행위자이시며, 자연의 하나님으로서나 은혜의 하나님으로서나, 일반 은혜에서나 분별하시는 은혜에서나, 그 모든 처분에 있어서 그렇게 행하신다. 그리스도의 권능 있는 일들로 말미암아 그들은 마땅히 그의 교훈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의 법에 순종하도록 설득되었어야 했다. 육신의 병을 고치신 일은 마땅히 그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일이 되었어야 했으나, 그러한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주목하라. 우리가 회개할 더 강력한 권면을 받을수록, 회개하지 않음은 더욱 가증하며 그 셈은 더욱 엄중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행해진 권능 있는 일들을, 그리고 또한 우리를 위해 행해진 은혜로운 일들을 일일이 셈하여 두시기 때문이니, 그 일들로도 우리는 마땅히 회개로 이끌려야 했다(롬 2:4).

(1.) 여기서 고라신과 벳새다가 지목된다(마 11:21,22). 그들 각각에게 화가 있으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복 주시려고 세상에 임하셨으나, 만일 그 복이 멸시받는다면 그에게는 예비된 화가 있으며, 그의 화는 무엇보다도 가장 무섭다. 이 두 고을은 갈릴리 바다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앞의 것은 동편에, 뒤의 것은 서편에 있는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곳들이었다. 벳새다는 얼마 전에 분봉왕 빌립에 의해 성읍으로 승격되었고, 그리스도께서는 그곳에서 적어도 세 명의 사도를 택하셨으니, 이렇게 이 고을들은 큰 은총을 입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돌보심을 받은 날을 알지 못하였기에, 이 화 아래 떨어졌으며, 그 화가 그들에게 단단히 들러붙어,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쇠퇴하여 보잘것없고 이름 없는 마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죄가 이토록 무섭게 성읍들을 멸망시키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토록 확실하게 이루어진다!

이제 고라신과 벳새다가 여기서 두로와 시돈과 비교되니, 이 둘은 구약에서 많이 읽게 되는 해안 도시들로서, 멸망에 이르렀으나 다시 번성하기 시작한 곳들이었다. 이 도시들은 갈릴리에 인접해 있었으나, 우상 숭배와 그 밖의 악함으로 인하여 유대인들 사이에서 매우 나쁜 평판을 받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때때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으나(마 15:21), 결코 그 안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셨다. 만일 그가 그리하셨더라면 유대인들이 그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깨우치고 낮추시려고 여기서 다음을 보이신다.

[1.] 두로와 시돈은 고라신과 벳새다만큼 악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 만일 그들이 동일한 말씀이 전파되고 동일한 기적이 그들 가운데 행해지는 것을 누렸더라면, 그들은 회개하였으리라, 그것도 벌써, 니느웨가 그러하였듯이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만물의 마음을 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그가 그들 가운데 가서 사시며 그들 가운데서 전파하셨더라면, 자기가 있던 곳에서보다 거기서 더 많은 선을 행하셨으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럼에도 그는 한동안 자기가 있던 곳에 머무셨으니, 이는 자기 사역자들로 하여금 바라던 성공을 보지 못할지라도 그리하도록 격려하시려 함이었다. 주목하라.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쉽게 마음이 움직여진다. 그리고 은혜의 수단을 풍성히 누리는 자들의 회개하지 않음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그 동일한 수단 아래 있으면서 마음이 움직여진 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만일 그 동일한 수단을 누렸더라면 마음이 움직여졌을 자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겔 3:6,7을 보라. 우리의 회개는 더디고 미루어지지만, 그들의 회개는 신속하였을 것이니,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으리라. 우리의 회개는 가볍고 피상적이었으나, 그들의 회개는 베옷을 입고 재에 앉은 깊고 진지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경배하며 주목해야 한다. 곧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비록 은혜의 수단을 누렸더라면 회개하였을지라도, 그 죄 가운데서 정당하게 멸망할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누구에게도 빚지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두로와 시돈은 고라신과 벳새다만큼 비참하지는 않을 것이요, 도리어 심판 날에 그들이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 11:22). 주목하라. 첫째, 심판 날에 사람의 자녀들의 영원한 상태가, 결코 그릇되지 않고 바꿀 수 없는 선고로 결정될 것이니, 곧 행복이냐 비참이냐, 그리고 그 각각의 여러 정도가 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한 심판이라 불리니(히 6:2), 이는 영원한 상태를 판가름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 심판에서, 시험의 상태에서 누렸던 모든 은혜의 수단이 반드시 셈에 들어올 것이며, 우리가 얼마나 악했는지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잘못만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더 나아질 수 있었는지도 물어질 것이다(사 5:3,4). 셋째, 멸망하는 모든 자의 정죄가 견딜 수 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가장 충만하고 분명한 계시를 받고도 회개하지 아니한 자들의 정죄는 무엇보다도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복음의 빛과 소리는 그것을 보고 듣는 모든 자의 기능을 열고 그 역량을 넓혀 주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받아들이게 하거나, 아니면 (그 은혜가 멸시받을 경우) 하나님의 진노가 더욱 풍성히 쏟아짐을 받아들이게 한다. 만일 자책이 지옥의 고통이라면, 천국에 이를 그토록 좋은 기회를 가졌던 자들에게는 그것이 참으로 지옥일 수밖에 없다. 아들아, 그것을 기억하라.

(2.) 여기서 가버나움이 강조점을 두고 정죄받는다(마 11:23). "가버나움아, 손을 들고 네 선고를 들으라." 가버나움은 이스라엘의 모든 고을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가장 자주 머무시는 영예를 입었으니, 그것은 옛적의 실로와 같이 그가 자기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었으나, 결국 실로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였다(렘 7:12,14). 여기서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날마다의 양식이었으며, 그러므로 옛적의 만나처럼 멸시당하여 하찮은 양식이라 불렸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은혜에 관한 달콤하고 위로가 되는 강론을 많이 들려주셨으나 보람이 없었고,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진노에 관한 무서운 강론을 읽어 주신다. 전자를 들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후자를 느끼도록 내버려질 것이다.

여기에 가버나움의 선고가 있으니,

[1.] 단정적으로 말하면, 하늘에까지 높아진 네가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주목하라. 첫째, 복음을 능력 있고 순수하게 누리는 자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늘에까지 높아진다. 그들은 그 안에서 현재로는 큰 영예를, 영원을 위해서는 큰 유익을 가지며,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진다. 그러나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땅에 들러붙어 있다면, 그들이 하늘 안으로 들어 올려지지 못하는 것은 자기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둘째, 복음의 유익과 높아짐을 남용하면 죄인들이 그만큼 더 깊이 지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우리의 외적인 특권들은 우리를 구원하기는커녕, 만일 우리의 마음과 삶이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 셈을 더 가중시킬 뿐이다. 절벽이 높을수록 거기서 떨어지는 일이 더욱 치명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며,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자. 욥 20:6,7을 보라.

[2.] 여기서 그것이 소돔의 선고와 비교되어 제시된다. 소돔은 죄에 있어서나 멸망에 있어서나 다른 어떤 곳보다도 두드러진 곳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첫째, 가버나움의 수단이라면 소돔을 구원하였으리라는 것. 만일 이 기적들이 소돔 사람들 가운데서 행해졌더라면, 그들이 아무리 악했을지라도 회개하였을 것이요, 그 성이 오늘까지 남아 지금은 멸하시는 공의의 기념물이지만 그때에는 아끼시는 자비의 기념물이 되었으리라(유 1:7). 주목하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참된 회개가 있다면, 가장 큰 죄라도 사함을 받고 가장 큰 멸망이라도 막아질 것이니, 소돔의 멸망조차 예외가 아니다. 천사들이 소돔에 보냄을 받았으나 그 성은 남지 못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거기 보냄을 받으셨더라면, 그 성은 남았으리라. 그러니 장차 올 세상이 천사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된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히 2:5) 만일 롯이 기적을 행하였더라면, 농담하는 자처럼 보이지 아니하였으리라.

둘째, 그러므로 그 큰 날에 소돔의 멸망이 가버나움의 멸망보다 가벼우리라는 것. 소돔은 답해야 할 일이 많겠으나, 가버나움처럼 그리스도를 소홀히 한 죄는 없을 것이다. 만일 복음이 사망의 냄새, 곧 죽이는 냄새가 된다면, 그것은 갑절로 그러하니, 그것은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요, 그토록 큰 사망이다(고후 2:1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사역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자기 복음을 환영하지 않는 다른 모든 곳에 대하여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으니(마 10:15), 심판 날에 소돔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셨다. 이제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손에 들고 있으며, 복음이 전파되고 복음의 규례가 우리에게 베풀어지며, 성령의 경륜 아래 살고 있으니,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이 누린 것에 못지않은 유익을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 큰 날의 셈도 그에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 것은 정당하다. 곧 이 시대의 신앙 고백자들은, 천국으로 가든 지옥으로 가든, 그 어느 곳에서나 가장 큰 빚진 자들이 되리라는 것이다. 만일 천국으로 간다면, 그들을 그리로 데려간 그 풍성한 수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비에 가장 큰 빚진 자들이요, 만일 지옥으로 간다면, 그들을 그곳에서 막아 줄 수도 있었던 그 풍성한 수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가장 큰 빚진 자들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25-30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Christ's Invitation to Burthened Sou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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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영혼을 향한 그리스도의 초청

²⁵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²⁶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²⁷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²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²⁹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³⁰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먼저 하늘을 우러러 구속 언약의 주권과 확실성을 두고 아버지께 감사하며, 이어 땅의 모든 사람을 둘러보아 이 말씀이 이르는 모든 인류에게 은혜 언약의 특권과 유익을 제안하신다. 하늘을 향한 감사와 땅을 향한 초청이 한 장면에 결합되어, 은혜의 근원이 아버지의 뜻에 있고 그 은혜의 문이 죄인에게 열려 있음을 함께 보여 준다.

I. 그리스도는 복음의 비밀이 나타난 어린아이들에게 베푸신 은총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신다(마 11:25,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셨다. 앞에 다른 사람의 말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 말씀은 앞선 우울한 상황에 대한 위로의 응답이며 그것과 저울을 이루므로 대답이라 한다. 비참한 도시들의 죄와 멸망은 주 예수를 슬프게 하여 예루살렘을 두고 우신 것처럼 울게 했을 것이다(눅 19:41). 그 많은 기적과 가르침에도 돌이키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무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가 비록 어린아이들에게라도 나타난 남은 자가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고, 이를 감사로 표현하여 위로를 더하셨다.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아도 그는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다수가 거부해도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으며, 은혜로 부르신 남은 자 안에서 그 영광이 보존된다.

주위에서 낙심할 일만 볼 때 하나님을 우러러 큰 격려를 얻을 수 있다. 땅의 반응만 바라보면 실패처럼 보이는 때에도 하늘의 지혜와 신실함을 바라보면 다른 결론을 얻는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행복을 무시하는 것은 슬프지만, 지혜롭고 신실한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의 권리를 확실히 지키실 것을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감사하나이다. 감사는 어둡고 불안한 생각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며 그것을 잠잠하게 하는 효과적 수단이다. 찬양은 풀이 죽은 영혼을 살리는 주권적 강장제로서 슬픔이 마음을 독점하지 못하게 한다. 슬픔과 두려움에 달리 답할 말이 없을 때 아버지여 감사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일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형편이 지금보다 더 나쁘지 않은 것을 감사할 수 있다.

1.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 또 천지의 주재라고 부른다. (1.) 찬양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아버지라는 관계를 붙잡는 일이 선하다. 필요한 긍휼을 구할 때만 아니라 이미 받은 긍휼에 감사할 때도 그러하다. 긍휼을 일반적인 행운이 아니라 아버지 사랑의 표지와 손의 선물로 받으면 두 배로 달고 찬양의 마음을 넓힌다.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1:12). 자녀는 “아버지, 주십시오”라고 하듯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기꺼이 말해야 한다. 간구할 때만 자녀의 관계를 주장하고 감사할 때 잊어서는 안 된다. (2.) 아버지께 나아가면서 그가 천지의 주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친밀함은 경외를 없애지 않고, 주권은 자녀의 확신을 없애지 않는다. 만물의 주권자께 경외함으로, 모든 필요와 소원을 이루고 악에서 지키며 선을 공급할 능력이 있는 아버지께 확신으로 나아간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 안에서 오래전에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소유주로 찬송하셨다. 흐르는 긍휼에 감사할 때 개별 선물에만 머물지 말고 그 모든 것을 내는 샘의 충족성과 주권에 영광을 돌려야 한다.

2. 감사의 내용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신 일이다. 이것은 평화에 속한 복음의 큰 진리를 뜻한다(눅 19:42).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은 것은 가리키는 대상이 작거나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득 채웠고 우리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구속과 화해와 영생에 관한 이 진리 앞에서 다른 모든 지식과 관심사는 부차적이다. 다른 모든 것은 이 진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1.) 영원한 복음의 큰 진리는 학문과 세상 지략이 뛰어난 지혜롭고 슬기 있는 많은 사람에게 숨겨졌다. 가장 위대한 학자와 정치가가 복음의 비밀에는 가장 낯선 사람이기도 했다. 세상이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고전 1:21),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이 복음을 대적한다(딤전 6:20). 인간의 지식이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자랑하고 궁극적 기준으로 삼으면 더 높은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숙련된 사람은 영적 일에 경험이 적은 경우가 많다. 자연의 비밀을 깊이 파고 국가의 복잡한 일을 능숙하게 다루어도, 복음의 능력을 마음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의 비밀에 무지하고 잘못 판단할 수 있다. 지적 탁월함이 영적 분별을 자동으로 낳지는 않는다.

(2.) 세상의 지혜로운 이들이 복음의 비밀에 어두운 동안에도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들은 거룩하게 하고 구원하는 지식을 얻는다. 어린아이라는 이름은 지능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높이는 배경과 자랑이 없고 겸손히 배우는 자라는 뜻이다. 제자들은 비천한 출생과 교육을 받은, 학자나 기술자나 정치가가 아닌 학문 없는 범인이었다(행 4:13). 그러나 현실보다 배나 깊은 지혜의 비밀이(욥 11:6) 어린아이와 젖먹이에게 알려져, 그 입에서 능력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찬양이 온전해졌다(시 8:2). 하나님은 인간적 자격이 계시의 영광을 가로채지 못하게 하셨다. 세상의 학자가 아니라 세상의 미련한 것이 복음 전파자로 선택되었고, 세상 통치자들이 알지 못한 것을 성령께서 나타내셨다(고전 1:27; 2:6,8,10).

(3.) 슬기 있는 자와 어린아이의 차이는 하나님이 만드신다. [1.] 하나님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이들에게 이것을 숨기셨다. 다른 이보다 큰 재능과 학문과 인간적 이해를 주셨지만, 그들은 교만하여 거기에 안주하고 더 나아가지 않았다. 받은 빛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 정욕과 명예를 섬기는 데 사용했으므로, 하나님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더하지 않으셨다. 그 결과 복음의 소리를 실제로 들어도 그것을 자기와 무관한 이상한 일처럼 여겼다. 하나님이 무지와 오류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그들을 자신에게 맡겨 두시니 죄가 형벌이 되며, 주는 의로우시다(요 12:39,40; 롬 11:7,8; 행 28:26,27). 그들은 먼저 교만으로 눈을 감았고, 하나님은 공의로운 판단으로 그 눈먼 상태에 내버려 두셨다. 받은 지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면 더 나은 지식을 주셨겠지만 정욕을 섬겼으므로 이 이해를 마음에서 숨기셨다. [2.] 하나님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 계시는 외부에서 사실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나타난 일은 우리 자녀에게 속하며(신 29:29), 하나님은 이 진리를 받고 그 인상을 간직할 이해력도 주신다. 말씀을 들을 귀와 마음에 새길 능력까지 은혜의 선물이다. 이처럼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4.) 이 경륜은 신적 주권으로 귀결된다. 옳소이다, 아버지여,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선함을 인정하며 온전히 동의한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방식과 도구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며, 은혜는 그의 것이므로 뜻대로 주거나 보류하신다. 그분의 선택은 인간의 명성이나 세상 지위에 빚지지 않는다. 어부 베드로가 사도가 되고 믿는 바리새인이자 유대 관원인 니고데모가 사도가 되지 않은 이유를 인간의 공로로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선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듣는 데서 이렇게 말하여 그들의 공로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이 그들을 존귀하게 하고 구별했음을 보이셨다. 선택받은 도구는 자기 우월함을 자랑하지 말고 주권적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5.) 주 예수처럼 이 은혜의 경륜을 감사로 인정해야 한다. [1.] 시대와 세대에 감추었던 복음의 비밀이 이제 나타나고, 비밀 결사처럼 소수에게만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선포되는 일을 감사해야 한다. [2.] 온유하고 겸손하여 세상에서 멸시받는 어린아이에게 구원을 아름답게 입히고 영예를 주신 일을 감사해야 한다. 세상의 평가가 낮은 자도 하나님께 배우고 구원의 지혜를 소유할 수 있다. [3.] 지혜롭고 슬기 있는 이들에게 숨기신 일은 어린아이에게 베푸신 긍휼을 더욱 크게 한다. 동일한 말씀을 듣고도 자신에게 눈과 마음이 열린 것은 특별한 은총이므로 더 큰 사랑과 순종의 의무를 낳는다. 욥이 주시는 일과 거두시는 일 모두에서 주의 이름을 찬송했듯, 우리는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과 지혜로운 이에게 숨기심을 모두 인정한다. 그들의 비참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랑과 교만을 낮추고 모든 육체를 잠잠하게 하여 신적 권능과 지혜를 더욱 밝게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고전 1:27,31).

II. 그리스도는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난 복음의 유익을 모든 사람에게 은혜롭게 제안하신다.

1. 초청 앞의 엄숙한 서문은 주의를 명하고 순종하도록 격려한다.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아 강한 위로를 얻도록 그리스도는 권위와 자격을 제시하신다.

(1.) 아버지에게서 받은 위임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지만, 중보자로서는 아버지에게서 권세를 받고 모든 심판을 맡으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 언약을 세우고, 배교한 세상에 정하신 조건으로 평화와 행복을 제안하도록 거룩히 구별되고 인침을 받은 유일한 전권대사이다. 그는 자기 개인 의견으로 화해를 제안하는 사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온전한 위임을 받아 언약을 시행한다. 이를 위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마 28:18),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요 17:2), 심판을 집행하는 권세를 받으셨다(요 5:22,2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맞아들이고 구하는 것을 주도록 정식으로 위임받았으며, 만물의 주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사실은 나아갈 용기를 준다. 용서와 은혜와 생명에 필요한 모든 권능과 보물이 그의 손에 있다.

아버지께서 자기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손에 맡기셨으므로 우리도 모든 것을 그 손에 맡기면 된다. 자기 지혜와 의와 힘을 계속 붙들면서 그리스도의 도움만 더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전부를 그에게 의탁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를 서로 멀어진 양편에 손을 얹는 위대한 중재자와 판정자로 세우셨다. 우리는 이 의뢰에 동의하고 주 예수의 중재와 판정에 복종하여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불행한 분쟁을 해결하며, 그가 정한 화해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2.) 아버지와의 친밀함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이 나타내려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 이는 그리스도의 위임에 더하여 더욱 풍성한 확신을 준다. 대사는 공개할 위임장뿐 아니라 협상 때 사용하는 비밀 지침도 갖는다. 주 예수는 단지 권위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완전하게 수행할 지식과 능력도 갖추셨다. 구속의 큰 일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주요 당사자이며 화평의 의논이 그 둘 사이에 있다(슥 6:13).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완전히 아는 상호 의식이 있으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의 의도와 권한을 오해해 계약이 무너지고 계획이 깨지는 것과 같은 착오가 없다. 구속 언약에는 정보의 부족이나 뜻의 불일치가 전혀 없다.

아들은 영원부터 아버지 품에 계신 비밀 의회의 일원이었고(요 1:18), 그의 곁에서 함께 자라난 자와 같았다(잠 8:30). 그러므로 아버지의 성품과 뜻을 추측으로 전하지 않고 직접적이고 완전한 지식으로 나타내신다. 그리고 아들이 나타내려는 자가 아버지를 안다. [1.] 하나님을 아는 것이 사람의 행복이고 영생이며 이성적 존재의 완성이다. 하나님을 모른 채 다른 지식을 많이 쌓아도 존재의 가장 높은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 [2.] 하나님을 알려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치기 때문이다(고후 4:6). 아담이 범죄한 뒤 아버지의 뜻과 사랑에 관해 우리가 받은 모든 위로의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빚진다.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는 중보자 없이 복되고 안전한 교제가 있을 수 없다(요 14:6). 그러므로 아버지를 알고자 하면서 아들을 지나치는 길은 없다.

2. 엄숙한 서문 뒤에 구원할 말씀이며 온전히 받을 가치가 있는 복음의 제안과 초청이 이어진다. 우리는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이신 그리스도께 와서 구원받고, 그 목적을 위해 그의 다스림과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쉼으로 삼아 그 안에 안식해야 한다(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1.] 초청받는 이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이다. 지친 사람에게 때에 맞는 말씀이다(사 50:4). 견딜 수 없는 의식법과 장로의 전통이라는 멍에를 무거워하는 이도 그리스도께 오면 편안해진다. 장로들은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더했지만, 그리스도는 교회를 육체적 규례의 멍에에서 풀고 더 순수하고 영적인 예배를 도입하러 오셨다. 그러나 주된 뜻은 죄의 죄책과 권세라는 짐이다. 죄책은 양심을 눌러 심판을 두려워하게 하고, 죄의 권세는 사람을 세상과 육신의 고된 종살이에 묶는다.

죄를 짐으로 알고 신음하며, 일반적으로 죄가 악하다고 인정할 뿐 아니라 자기 죄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이가 초청받는다. 죄의 종살이와 세상과 육신의 봉사에 지치며, 죄 때문에 자기 상태가 슬프고 위험함을 알고 아파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죄를 여전히 가벼운 오락이나 유익으로 여기는 사람은 쉼을 찾지 않지만, 그 무게를 느끼는 사람은 구원자를 찾는다. 에브라임(렘 31:18-20), 탕자(눅 15:17), 세리(눅 18:13), 베드로의 청중(행 2:37), 바울(행 9:4,6,9), 간수(행 16:29,30)가 그러했다. 각각 다른 자리에서 죄의 짐을 깨달았지만 모두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이는 용서와 평화를 위한 필수 준비이다. 보혜사는 먼저 죄를 깨닫게 하며(요 16:8), 하나님은 찢은 다음 고치신다. 상처를 느끼지 못하면 치료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초청은 내게로 오라이다. 앞에서 만물의 주로 드러난 그리스도의 위대함이 죄인을 두렵게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우리가 가까이 와 금 규의 끝을 만지고 살도록 친히 그것을 내미신다. 그의 권세는 접근을 막는 이유가 아니라 초청을 믿을 이유이다. 지치고 무거운 죄인이 예수께 오는 것은 의무이며 동시에 가장 큰 유익이다. 그와 대립하거나 구원자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의사와 변호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의와 공로와 세상의 위로를 의지하는 일을 포기하고, 그의 인도와 통치에 자신을 맡기며, 그의 방식과 조건으로 구원받기를 기꺼이 원해야 한다. 무거운 짐을 숨기거나 스스로 끝까지 지려 하지 말고 그에게 맡기라. 성령과 신부가 “오라”고 하고, 목마른 자와 원하는 자는 오라고 하는 복음의 부르심이다. 초청의 범위가 넓으므로 자기 비참함을 이유로 물러날 필요가 없다.

[3.] 오는 이에게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그리스도는 이름이 쉼을 뜻하는 노아이며 이 사람이 우리를 안위한다(창 5:29; 8:9). 수고하고 무거운 이에게 쉼은 좋다(창 49:15; 전 5:12). 이 쉼은 무감각이나 책임 회피가 아니라 죄의 지배와 공포에서 벗어난 영혼의 참된 평정이다. 살아 있는 믿음으로 오는 지친 영혼에게 죄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근거 있는 양심의 평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각 기능이 제자리를 찾는 영혼의 질서와 바른 자기 통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만족하는 쉼을 주신다(시 116:7). 그리스도는 쉼을 가리키기만 하지 않고 친히 주신다. 이는 은혜 안에서 지금 시작되고 영광 가운데 완성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안식이다(히 4:9). 현재의 평화는 완전한 안식의 첫 열매이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치자로 받아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마 11:29). 나의 멍에를 메라. 그는 임금과 구주이며 보좌에 앉은 제사장이다. 구원의 유익은 그의 통치를 거부하면서 받을 수 없다. 약속한 쉼은 죄의 고역에서 풀려나는 것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감사와 사랑의 의무에 매이게 한다. 그리스도는 머리에 씌울 면류관뿐 아니라 목에 멜 멍에도 갖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자발적으로 메고 함께 끌기를 기대하신다. 무거운 짐 진 사람에게 또 멍에를 메라는 말은 고난을 더하는 듯하지만 핵심은 나의 멍에라는 데 있다. “너희를 지치게 하는 죄와 전통의 멍에를 벗고, 순종하는 자를 편안하게 하는 내 멍에를 메라.” 모든 사람은 어떤 주인을 섬기므로 멍에가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느 멍에를 멜 것인가가 문제이다.

종과 신하는 멍에 아래 있다고 한다(딤전 6:1; 왕상 12:10). 그리스도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그의 종과 신하가 되어 모든 명령에 양심적으로 순종하고 모든 처분에 기쁘게 복종하는 것이다. 복음에 순종하고 자기 몸과 뜻과 계획을 주께 드리는 일이다. 이 멍에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먼저 메어 순종을 배우셨으며,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메어 연약함을 도우시는 멍에이다(롬 8:26). 멍에는 어느 정도의 어려움과 제한을 뜻하지만 짐승이 짐을 끌어야 한다면 힘을 바르게 모으고 짐을 감당하게 돕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우리를 해치려는 짐이 아니라 바르게 살도록 돕는 질서이다. 일하도록 묶였으므로 부지런하고, 복종하도록 묶였으므로 겸손하고 인내해야 한다. 동료 종과 함께 한 멍에를 메었으므로 혼자 고집대로 움직이지 않고 성도의 교제를 지켜야 한다. 지혜자의 말씀은 이렇게 멍에 멘 자를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채찍과 같다.

가장 어려운 교훈이므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덧붙이신다(마 11:30). 복종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멍에의 실제 성격을 알려 주신다. [1.] 명령의 멍에는 크레스토스(chrestos), 곧 쉬울 뿐 아니라 은혜롭고 달고 즐겁다. 순종하는 목을 쓸어 상하게 하는 거친 멍에가 아니라 도리어 새롭게 하는 사랑으로 안감을 댄 멍에이다. 그 명령은 본질적으로 합리적이고 우리에게 유익하며 사랑이라는 한 달콤한 말로 요약된다. 또한 그리스도는 명령만 주고 힘을 주지 않는 주인이 아니다. 도움은 강력하고 격려는 적절하며 의무의 길에서 얻는 위로는 풍성하므로 참으로 즐거운 멍에라 할 수 있다. 옛 본성에는 어렵지만 새 본성에 쉽고 깨닫는 사람에게 쉽다(잠 14:6). 처음에는 자기 부인 때문에 조금 어려워도 습관이 거룩함에 익숙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천국의 소망이 마음을 움직이면 점점 쉽게 된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짐도 가볍다. 인간으로서 공통으로 받는 고난과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를 위해 받는 고난을 모두 생각할 수 있으나, 특히 후자를 뜻한다. 고난 자체는 기쁘지 않고 슬프지만 그리스도께 속하고 그를 위해 지는 짐이므로 가볍다. 많은 고난을 누구보다 잘 안 바울도 그것을 가벼운 환난이라 했다(고후 4:17). 무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과 비교되고 하늘의 도움으로 받쳐지기 때문에 가볍다. 물과 불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사 43:2), 고난받는 백성을 향한 그리스도의 동정(사 63:9; 단 3:25), 성령의 도움과 위로가(고후 1:5)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가볍게 한다. 환난이 많고 길어지면 그에 맞는 위로도 많고 길어진다. 이 사실은 순종하며 일할 때와 진리를 위해 고난받을 때 만나는 어려움과 낙심을 모두 이겨 내게 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것을 잃을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손해 보지는 않는다.

(3.) 예수 그리스도를 교사로 받아 그에게 배워야 한다(마 11:29). 그리스도는 큰 학교를 세우고 우리를 학생으로 초청했다. 이름만 학생 명부에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학생과 교제하며, 말씀과 성령으로 주시는 교훈에 매일 참여해야 한다. 그가 하신 말씀을 자주 묵상하여 여러 형편에서 곧 꺼내 사용할 수 있게 하고, 행하신 일을 본받아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벧전 2:21).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은 특별히 배워야 할 교훈으로 볼 수 있다. 그의 가르침은 그의 삶에서 완전하게 나타났으므로, 말만 듣지 말고 그에게서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한다. 우리를 그와 다르게 만드는 교만과 격정은 그의 학교에서 반드시 죽여야 할 악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몇 가지 교리를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 자신을 배워야 한다(엡 4:20). 그는 교사이자 교훈, 안내자이자 길이며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이다.

배워야 할 두 이유가 있다. [1.]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므로 가르치기에 합당하다. 첫째, 그는 온유하여 다른 교사가 화낼 무지한 이를 불쌍히 여긴다. 유능해도 성급한 교사는 둔하고 더딘 학생을 꾸짖어 낙심시키지만, 그리스도는 약함을 참으며 이해를 열 줄 아신다. 열두 제자를 대하신 태도가 그 본보기이다. 그들의 부족함 가운데서도 장점을 살리고, 부주의하고 잘 잊어도 어리석음을 엄격히 찾아 벌하지 않으셨다. 반복해서 설명하고 실패 뒤에도 다시 가르치셨다. 둘째, 마음이 겸손하여 가난한 학생과 처음 배우는 초보자를 기꺼이 가르치신다. 궁정이나 유명 학교가 아니라 바닷가에서 제자를 택하고, 어린아이에게 젖을 주듯 첫 원리를 가르치며 가장 낮은 능력에 맞추신다.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셨다(호 11:3). 누가 그처럼 능력이 크면서 낮은 자에게까지 자신을 맞추어 가르치는가? 이러한 교사에게 배우는 것은 큰 격려가 된다. 그를 교사로 적합하게 하는 온유와 겸손은 학생에게도 가장 좋은 자격이다. 자기가 이미 안다고 높이는 사람보다 겸손히 듣는 사람이 배우며,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신다(시 25:9).

[2.] 너희 영혼이 쉼을 얻으리라. 이는 두 언약의 조화를 보이려고 선지자의 언어로 말씀하신 약속이다(렘 6:16). 그리스도는 새 진리를 옛 계시와 단절하여 제시하지 않고 선지자의 약속을 완성하신다. 첫째, 몸이 편안한 것보다 영혼이 평안히 거하는 쉼이 가장 바람직하다. 외적 형편이 넉넉해도 양심과 감정이 흔들리면 참된 안식이 없다. 둘째, 그리스도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이 영혼의 쉼을 얻는 유일하고 확실한 길이다. 의무를 버리는 길이 아니라 의무의 길이 쉼의 길이다. 지성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쉼과 만족을 얻고, 온 창조에서 헛되이 찾던 지혜를 복음에서 발견한다(욥 28:12).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진리는 불확실한 추측이 아니라 영혼을 맡길 수 있는 확실한 진리이다. 감정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세상 사물이 줄 수 없는 풍성한 만족과 영원한 평안과 확신을 얻는다. 이 만족은 천국에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고 우리 하나님으로 직접 누릴 때 완전하고 영원해진다. 그리스도에게 배우는 모든 이에게 이 쉼이 열려 있다.

이것이 복음의 부르심과 제안의 요약이다. 주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거듭 그에 관해 하신 말씀과 일치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러므로 이 초청을 듣는 이는 그리스도께 가는 일과 그에게 배우는 일을 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에게 나아가는 믿음은 그의 멍에를 받는 순종으로 나타나며, 그의 가르침을 받는 순종은 영혼을 참된 안식으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