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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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²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³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과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⁴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⁵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⁶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⁷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⁸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⁹ 거기를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¹⁰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¹¹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
¹²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¹³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유대인 교사들은 많은 계명들을, 본래 의도된 것보다 더 느슨하게 해석함으로써 변질시켰다.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에서(마 5:1-48) 이러한 잘못을 들춰내어 바로잡으셨다. 그러나 넷째 계명에 관해서는 그들이 정반대 극단으로 잘못을 범하여, 그것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하였다. 주목하라.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이 의식(儀式)과 종교의 외적 봉사에 대한 열심으로써 자기 도덕적 방종을 속죄하려 드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의 말씀에서 덜어 내는 자들뿐 아니라 더하는 자들 역시 저주를 받는다(계 22:16,19, 잠 30:6).
이제 우리 주 예수께서 여기서 천명하시는 바는, 부득이한 일과 자비의 일은 안식일에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여러 경우에 이를 거리끼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넷째 계명을 애써 설명하신 것은, 이레 중 하루를 거룩한 안식일로서 종교적으로 준수해야 할 영구적 의무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분은 곧 폐기될 율법을 해석하려 하셨을 리 없으며, 의심할 바 없이 이로써 모든 시대에 자기 교회에 유익이 될 한 가지 요점을 확립하려 하셨다. 그리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비록 우리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 넷째 계명의 지도 아래 있을지라도, 유대인 장로들의 명령 아래 있지는 않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한 율법의 의미는 실제로 일어난 사례들에 대해 내려진 판단으로써 확정하는 것이 보통이며, 이 율법의 의미도 같은 방식으로 확정된다. 여기 이 목적을 위해 두 가지 이야기가 함께 제시되어 있는데, 서로 어느 정도 시간 차이를 두고 일어났고 성격도 다르지만, 둘 다 이 의도에 부합한다.
I.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이삭을 자른 제자들을 옳다 하심으로써, 부득이한 일은 그날에 합당함을 보이신다. 이제 여기서 살펴보라.
1. 제자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어느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자기들의 선생님을 따라가고 있었다. 아마도 회당으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마 12:9). 그날에 한가로이 거니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시장하였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살림살이에 흠이 되지는 않게 하라. 다만 우리는 그들이 안식일의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음식 먹는 것을 잊었으리라고, 아침 예배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인 나머지 아침 식사할 겨를이 없었으리라고, 회당에 늦지 않으려고 금식한 채 나섰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섭리는 그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도록 정하셨고, 거기서 그들에게 양식이 공급되었다. 주목하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양식이 필요할 때 알맞은 양식을 가져다주시는 길을 많이 가지고 계시며, 그들이 회당으로 가는 길에 있을 때 그들을 특별히 돌보신다. 옛적에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가는 자들을 돌보셨던 것처럼 말이다(시 84:6,7). 그들이 쓰도록 비가 못을 채웠다. 우리가 의무의 길에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도록 맡겨 두라. 밀밭 가운데 있게 되자 그들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것을 허락하였으니(신 23:25), 이는 사람들이 이웃을 사랑하도록, 그리고 다른 이가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사소한 일에서 소유권을 고집하지 않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에게는 빈약한 양식이었으나, 그들이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이었고,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위트모어(Whitmore)의 유명한 볼(Ball) 씨는 안식일 만찬에 고기 두 접시가 있다고 말하곤 하였으니, 하나는 뜨거운 우유 한 접시요 다른 하나는 찬 우유 한 접시인데, 그것으로 넉넉하고 또 넉넉하다고 하였다.
2. 바리새인들이 이 일에 무엇을 트집 잡았는가. 그것은 변변찮은 아침 식사에 불과하였으나,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그것조차 평온히 먹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들은 제자들이 남의 곡식을 취한 것을 두고 시비한 것이 아니라(그들은 정의에 그리 열심인 자들이 아니었다), 안식일에 그 일을 한 것을 두고 시비하였다. 그날에 이삭을 자르고 비비는 것은 장로들의 전통으로 명백히 금지되어 있었으니, 그것이 일종의 추수에 해당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행한 가장 무해하고 무죄한 행동이 비방받고 불법인 양 책잡히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자기들의 고안물과 규정에 열심인 자들에게 그러하다. 바리새인들은 행해서는 안 될 일을 하였다고 그들을 그들의 선생님에게 고발하였다. 주목하라. 하나님께서 불법으로 정하지 않으신 것을 불법으로 만드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친구가 아니다.
3. 이 바리새인들의 트집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이 무엇이었는가. 제자들은 스스로를 위해 별로 할 말이 없었으니, 특히 그들과 시비하는 자들이 안식일 성별의 엄격함을 자기편으로 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며, 그쪽으로 잘못을 범하는 것이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따르는 자들을 바리새인들의 부패뿐 아니라 그들의 비성경적 규정으로부터도 해방시키러 오셨으므로, 그들을 위해 할 말이 있으셨고, 비록 그것이 규례를 어긴 것일지라도 그들이 한 일을 옳다 하셨다.
(1.) 그분은 바리새인들 자신도 합당하다고 인정하는 선례들로써 그들을 변호하신다.
[1.] 그분은 다윗의 옛 사례를 드시는데, 다윗은 부득이한 경우에 평소 같으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였다(마 12:3,4). "다윗이 율법상 제사장에게만 돌려진 진설병을 먹은 이야기(삼상 21:6)를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레 24:5-9) 그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지극히 거룩한 것이며(출 29:33) 외인은 먹지 못할지라. 그럼에도 제사장은 그것을 다윗과 그 사람들에게 주었으니, 비록 부득이한 경우의 예외가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그것과 다른 모든 의식적 규례 안에 함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진설병을 먹는 것을 정당화한 것은 그의 지위가 아니라(교만한 마음으로 제사장의 직분을 침범한 웃시야는 왕이었음에도 그로 인해 나병에 걸렸다, 대하 26:16 이하) 그의 굶주림이었다. 가장 높은 자라도 자기 정욕을 채우도록 허락받지 못하나, 가장 천한 자라도 자기 궁핍을 헤아림 받을 것이다. 굶주림은 죽일 수 없고 채워야만 하는 자연적 욕구이며, 음식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미룰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돌담을 뚫고 나간다고 말한다. 이제 주께서는 몸을 위하시며(고전 6:13 참조), 곤궁한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규례조차 면제되도록 허락하셨다. 하물며 장로들의 전통이야 더욱 면제될 수 있다. 주목하라. 부득이한 경우에는 다른 때에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할 수 있다. 부득이함이 가지지 못하는 율법들이 있으나, 부득이함 자체가 스스로에게 율법이다. 사람들은 시장하여 자기 영혼을 채우려고 도둑질하는 자를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히 여긴다(잠 6:30).
[2.] 그분은 제사장들의 일상적 사례를 드시는데, 그들 역시 이것을 율법에서 읽었고, 이에 따른 것이 항상 행해 온 관례였다(마 12:5). 성전 안의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적지 않은 노역을 행하였으니, 제물 짐승을 잡고 가죽을 벗기고 태우는 일은 보통의 경우라면 안식을 범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결코 넷째 계명을 어긴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니, 성전 봉사가 그것을 요구하고 정당화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명의 유지뿐 아니라 그날의 봉사에도 필요한 수고는 안식일에 합당함을 암시한다. 회중을 불러 모으기 위해 종을 치는 것, 교회에 가기 위해 이동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안식의 쉼은 안식일 예배를 촉진하기 위함이지 방해하기 위함이 아니다.
(2.) 그분은 세 가지 강력한 논거로써 그들을 변호하신다.
[1.]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마 12:6). 성전 봉사가 제사장들이 그 직무에서 행한 바를 정당화한다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은 제자들이 그분을 수종드는 일에서 행한 바를 훨씬 더 정당화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지극히 숭상하였으니, 그것이 금을 거룩하게 한다고 여겼다(마 23:17 참조). 스데반은 그 거룩한 곳을 모독한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하였다(행 6:13). 그러나 밀밭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었으니,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상징적으로 거하신 것이 아니라 신성의 모든 충만하심이 육체로 거하셨기 때문이다(골 2:9). 주목하라.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께 하듯이 한다면, 비록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트집 잡힐지라도 하나님께 은혜롭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2.]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신다(마 12:7). 의식적 의무는 도덕적 의무에 양보해야 하며, 사랑과 자기 보존이라는 자연적이고 으뜸가는 율법이 의식적 준수에 우선해야 한다. 이것은 호 6:6에서 인용되었다. 앞서 마 9:13에서도,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자비를 변호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여기서는 그들의 몸에 대한 자비를 변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안식일의 쉼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제정되었다(신 5:14). 이제 어떤 율법도 자기 자신의 목적과 모순되도록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이 뜻을 알았더라면, 자비로운 성품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들이 굶주림을 채우려고 부득이 이렇게 한 것을 안타까워하였을 것이요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주목하라. 첫째, 무지는 우리가 형제들을 성급하고 무자비하게 비난하는 원인이다. 둘째, 우리가 성경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의미를 알기 위해 힘써야 한다.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셋째, 성경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다른 이들을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자들에게 특히 부끄러운 일이다.
[3.]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마 12:8). 다른 모든 율법과 마찬가지로 그 율법도, 그분이 합당히 여기시는 대로 변경하시고 시행하시고 면제하시도록 그리스도의 손에 맡겨졌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것은 아들로 말미암았으며, 무죄한 상태에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도 그로 말미암았다.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주신 것도 그로 말미암았으며, 중보자로서 그분은 규례를 제정하고 합당하다 여기시는 변경을 가하는 일을 위임받으셨다. 특히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그분은 그날을, 그날이 주의 날 곧 주 그리스도의 날이 되도록 변경하실 권세를 받으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면, 그날과 그날의 모든 일이 그분께 바쳐지는 것이 마땅하다. 이 권세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부득이한 일이 — 그것이 가장된 것이거나 스스로 만들어 낸 부득이함이 아니라 참으로 부득이한 것이라면 — 안식일에 합당하다고 제정하신다. 그리고 이 율법 해석은 그것이 영구적인 것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Exceptio firmat regulam — 예외가 규칙을 확증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바리새인들을 잠잠케 하시고 그들에게서 벗어나신 후(마 12:9), 떠나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으니, 곧 그 바리새인들이 주관하던 회당이요, 그들이 그분과 이 시비를 일으켰을 때 그분이 향해 가시던 회당이었다. 주목하라. 첫째, 우리가 거룩한 규례로 나아가는 길에 일어나는 무슨 일로 인해 그 규례에 합당히 참여할 준비가 흐트러지거나 그 일에서 빗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탄이 마음이 부패한 자들의 비뚤어진 논쟁과 그 밖의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흔들고 어지럽히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의무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사사로운 불화와 개인적인 앙심 때문에 공적 예배에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악의로 그리스도께 트집을 잡았으나, 그분은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 사탄이 형제 사이에 불화를 뿌림으로써 그들을, 혹은 그들 중 누구라도 회당과 신실한 자들의 교제로부터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II.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으로써, 자비의 일이 그날에 행해지기에 합당하고 적절함을 보이신다. 부득이한 일은 제자들이 행하였고 그분이 정당화하셨으며, 자비의 일은 그분 자신이 행하셨다. 자비의 일은 그분의 부득이한 일이었으니, 선을 행하는 것이 그분의 양식이요 음료였다. 나는 전파하여야 하리니라고 그분은 말씀하신다(눅 4:43). 이 치유는 그것이 행해진 때, 곧 안식일이라는 그 시점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여기에 이러한 것들이 있다. 1. 이 가련한 사람이 처한 곤경. 그의 손이 말라서 손으로 일하여 생계를 꾸리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였다. 제롬(St. Jerome, 히에로니무스)은, 나사렛파와 에비온파가 사용하던 히브리어 마태복음이 손 마른 사람의 이 이야기에 한 가지 정황을 덧붙인다고 말한다. 곧 그가 Cæmentarius — 벽돌공이었으며, 그리스도께 이렇게 청하였다는 것이다. "주여, 저는 벽돌공이며 제 노동으로 생계를 얻어 왔나이다(manibus victum quæritans). 예수여 간구하오니, 제가 빌어먹지 않도록(ne turpiter mendicem cibos) 제 손의 사용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히에로니무스, 해당 구절 주해.) 이 가련한 사람은 회당 안에 있었다. 주목하라.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적거나 할 일이 적은 자들은 그만큼 자기 영혼을 위해 더 많이 행해야 한다. 부자, 노인, 병약한 자가 그러하다.
2. 이 사람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께 던진 악의에 찬 질문. 그들이 물어 이르되,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가련한 사람이 치유를 구하여 그리스도께 무슨 청을 드렸다는 기록은 여기 없으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주목하기 시작하시는 것을 보았고, 그분이 자기를 찾지 않는 자들에게 만나지심(사 65:1 참조)이 예사인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악함으로 그분의 선하심을 앞질러, 이 사건을 선을 행하는 길에 걸림돌로 내세웠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날에 의사가 병 고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 이것이 그들의 책에서 논쟁되던 문제였다 — 는 차치하고라도, 선지자가 병 고치는 것, 이런 종류의 일을 행하실 때마다 신적 능력과 선하심을 드러내시고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임을 나타내신 그분이 병 고치시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을 줄로 생각할 만하다. 하나님께서 병 고치시는 것, 그분이 말씀을 보내어 고치시는 것이 옳은지 누가 일찍이 물은 적이 있는가?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자원하여 율법에 복종하심으로 율법 아래 나신 바 되셨으나(갈 4:4), 장로들의 규례 아래 나신 적은 결코 없으셨다.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행동의 합법성과 불법성을 캐묻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며, 우리는 그러한 질문을 그리스도께보다 더 합당하게 가지고 갈 데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여기서 물은 것은 그분께 배우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을 고발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그분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그분이 넷째 계명을 거스른다고 고발하였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의 쉼을 너무도 미신적으로 만들어,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어떤 의료 행위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였다. 만일 그분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그분이 최근에 그날에 이삭을 자른 제자들을 옳다 하신 일을 들어 그분의 편파성을 고발하였을 것이다.
3.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그분은 그들 자신과, 그들 자신의 견해와 관행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답하신다(마 12:11,12). 양 한 마리가 — 비록 한 마리뿐이어서 그 손실이 그리 크지 않을지라도 —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경우에, 그들이 그것을 끌어내지 않겠는가?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그렇게 해도 되며 넷째 계명도 그것을 허락한다. 또한 그들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니, 의로운 자는 자기 짐승의 생명을 돌보기 때문이다(잠 12:10). 그리고 그들로서도 양을 잃기보다는 차라리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양을 돌보시는가? 그렇다, 그분은 돌보신다. 그분은 사람과 짐승을 함께 보존하시고 부양하신다. 그러나 여기서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말씀하시며(고전 9:9,10), 이로부터 논증하신다. 그렇다면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양은 무해할 뿐 아니라 유익한 동물이며, 그에 따라 귀히 여겨지고 보살핌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은 그것들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겨진다. 주목하라. 사람은 그 존재에 있어서, 짐승 가운데 가장 나은 것보다 훨씬 더 낫고 더 가치 있다. 사람은 이성을 가진 피조물이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양보다 낫다. 그러므로 양의 제사는 한 영혼의 죄를 속할 수 없었다. 자기 말과 개를 교육하고 보존하고 부양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가난한 자들이나 어쩌면 자기 집안 식구보다도 더 마음을 쓰는 자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그리스도께서는 한 가지 진리를 이끌어 내시는데, 그것은 언뜻 보아도 매우 합리적이고 인정 있게 보인다. 곧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들은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고 물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음을 증명하시며, 그리스도께서 고치신 것과 같은 치유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었는지는 누구든 판단해 보라 하신다. 주목하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길은 하나님을 직접 예배하는 의무 외에도 더 많이 있다. 병자를 돌보는 것,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 갑작스러운 곤경에 빠져 신속한 구원이 필요한 자들을 돕는 것, 이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과 자비의 원리에서, 겸손과 자기 부인으로, 하늘에 속한 심령의 상태로 행해야 하며, 이것이 선하게 행하는 것이요 받아들여질 것이다(창 4:7).
4. 바리새인들이 이 일에 트집 잡을 것을 미리 아셨음에도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고치심(마 12:13). 그들은 그리스도의 논증에 대답할 수 없었으나, 자기들의 편견과 적의를 고집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럼에도 자기 일을 계속하셨다. 주목하라. 거치게 할까 두려워하여 의무를 행하지 않은 채 두거나 선을 행할 기회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제 그 치유의 방식이 주목할 만하다. 그분은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네가 할 수 있는 대로 힘써 보라" 하셨고, 그가 그대로 하매 그 손이 온전히 회복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다른 치유들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의미를 지닌다. (1.) 본성상 우리 손은 말랐으니, 우리는 스스로는 선한 일을 전혀 행할 수 없다. (2.) 그분의 은혜의 능력으로 우리를 고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시니, 그분은 죽은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마른 손을 고치시며,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 2:13). (3.)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 그분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라고, 우리의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여 할 수 있는 대로 행하라고 명하신다. 곧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손을 내밀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으려고 손을 내밀고, 거룩한 노력으로 손을 내밀라고 명하신다. 이제 이 사람은 손 마른 자가 스스로 자기 손을 내밀 수 없었던 것이, 중풍병자가 스스로 일어나 자기 자리를 들 수 없었던 것이나 나사로가 스스로 자기 무덤에서 나올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그리하라 명하셨다. 우리가 스스로는 행할 수 없는 의무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신 이 명령보다 더 불합리하거나 부당하지 않다. 명령과 함께, 말씀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리라(잠 1:23). 멸망하는 자들은, 만일 이 사람이 자기 손을 내밀려 시도하지 않아 고침을 받지 못하였을 경우와 마찬가지로,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구원받는 자들은, 이 사람이 자기 손을 내밂으로써 자기 자신의 치유에 기여하였노라고 자랑할 것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랑할 것이 없으며, 도리어 그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에 온전히 빚진 자들이다.
마태복음 12장 14-21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¹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¹⁵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서 떠나가시니 많은 무리가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¹⁶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¹⁷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를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¹⁸ 보라 내가 택한 나의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¹⁹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²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²¹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그리스도께서 가장 큰 비하(卑下) 가운데서도 그의 존엄을 증명하시는 표적들이 있었던 것처럼, 가장 큰 영예 가운데서도 그분은 자신의 겸손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행하신 능력 있는 일들이 그분으로 하여금 위풍당당하게 나타날 기회를 주었음에도, 그분은 자기를 비워 아무 명성도 없는 자로 만드셨음을 드러내셨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보게 된다.
I. 그리스도를 향한 바리새인들의 저주받을 악의(마 12:14).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의 확실한 증거에 격분하여, 그들은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였다. 그들을 괴롭게 한 것은, 그분의 기적들로 인해 그분의 영예가 자기들의 영예를 가려 버린 것뿐만이 아니라, 그분이 전파하신 교훈이 그들의 교만과 위선과 세속적 이익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 분개하는 척했으니,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율법상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출 35:2). 주목하라, 가장 비열한 행위가 가장 그럴듯한 구실로 가려지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술책을 보라. 그들은 그 일에 관하여 의논하였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을지 스스로 궁리하였다. 그들은 그것에 관하여 은밀한 도당을 이루어 함께 의논하였으니, 이는 서로를 부추기고 돕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잔인함을 보라. 그들은 그분을 가두거나 추방할 의논을 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죽일 의논을 하였으니,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분의 죽음을 도모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 주 예수께 얼마나 큰 모욕이 가해졌는가. 그 나라의 가장 큰 복이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분을, 무법자(qui caput gerit lupinum—이리의 머리를 쓴 자, 즉 누구든지 죽여도 되는 무법자)요 그 나라의 재앙으로 몰아간 것이다!
II. 이 일을 당하여 그리스도께서 몸을 피하시고 은신을 택하셨으니, 이는 그분의 사역이 아니라 위험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마 12:15). 그분은 거기서 떠나가셨다. 그분은 기적으로 자신을 지키실 수도 있었으나, 도피하여 물러나는 통상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기를 택하셨다. 이는 다른 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서도 우리 본성의 죄 없는 연약함에 자신을 복종시키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로써 자신을 낮추셨으니, 곧 가장 무력한 자들이 흔히 취하는 방편으로 내몰리신 것이다. 또한 이로써 그분은 자신의 규례에 대한 본을 보이셨으니,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성이나 기적으로 설득될 수 있었더라면 이 바리새인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한 말씀과 행위를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확신에 굴복하기는커녕 도리어 완악해지고 격분하였으므로, 그분은 그들을 치유 불가능한 자들로 여겨 떠나셨다(렘 51:9).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안락을 위해 물러나신 것도 아니요, 사역을 그만둘 핑계를 찾으신 것도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분이 물러나신 시간은 일로 가득 채워졌으며, 동일한 사역으로 인해 피하도록 내몰리신 바로 그때에도 그분은 선을 행하고 계셨다. 이로써 그분은 자신의 일꾼들에게 본을 보이셨으니, 곧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할 수 없을 때에는 할 수 있는 바라도 하고, 구석으로 쫓겨났을 때에도 계속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 나라의 위대한 지도자요 박사들인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거기서 몰아내고 그분으로 하여금 물러가시게 했을 때에도, 보통 백성들은 그분을 좇아 모여들었다. 많은 무리가 그분을 따랐고 그분을 찾아내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분의 수치로 돌려 그분을 폭도의 우두머리라 부를 것이나, 사실 이는 그분의 영예였다. 곧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세상의 화려함에 눈멀지 아니한 모든 사람이 그분께 그토록 진심으로, 그토록 열심으로 헌신하여, 그분이 어디로 가시든지, 그분과 함께 어떤 위험을 무릅쓰든지 그분을 따르려 했던 것이다. 또한 이는 그분의 은혜의 영예였으니, 곧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이다. 그들이 그분을 영접할 때, 그분은 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의 병을 다 고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만민의 의사로 오셨으니, 마치 태양이 아래 세상에 떠오르듯이 그 날개에 치료하는 광선을 품고 오셨다(말 4:2 참조). 바리새인들이 선을 행하신다는 이유로 그리스도를 박해하였으나, 그분은 계속하여 선을 행하셨으며, 통치자들의 악행으로 인해 백성이 더 나쁜 처지에 놓이게 하지 않으셨다. 주목하라,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매정하게 굴지라도, 우리는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매정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익함과 은밀함을 조화시키려 힘쓰셨다. 그분은 그들의 병을 다 고치셨으나, 또한(마 12: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그들에게 경고하셨다. 이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1. 이는 신중함의 행위였다. 바리새인들을 격분하게 한 것은 기적들 자체라기보다는 그것들에 관한 공개적인 소문이었다(마 12:23,24).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선을 행하기를 그치려 하지는 않으셨으나, 그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고 자신에게 위험이 되는 것을 피하시려고 가능한 한 떠들썩하지 않게 그것을 행하려 하셨다. 주목하라,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를 갈망하면서도, 그 선이 행해진 후에 그것이 회자되기를 갈망하기는커녕 도리어 멀리한다. 이는 그들이 목표로 삼는 것이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핍박의 때에는, 우리가 비록 의무의 길을 담대히 나아가야 하지만, 우리를 해하려 기회를 엿보는 자들을 필요 이상으로 격분시키지 않도록 그 정황을 조심스럽게 헤아려야 한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우라(마 10:16). 2. 이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의로운 심판의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미 본 기적들을 그토록 가볍게 여겼으므로, 그분의 기적에 관하여 더 들을 자격이 없었다. 그들은 빛을 향해 눈을 감음으로써 그 유익을 누릴 권리를 상실하였다. 3. 이는 겸손과 자기 부인의 행위로 볼 수 있다. 비록 그분이 기적을 행하신 의도는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여 사람들로 자신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기적들이 알려질 필요가 있었으나, 그분은 때때로 백성에게 그것들을 숨기라고 명하셨다. 이는 우리에게 겸손의 본을 보이시고, 우리 자신의 선함이나 유익함을 드러내거나 그것이 드러나기를 바라지 말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모든 일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자들과 정반대가 되기를 원하셨다.
III. 이 모든 일에서 성경이 이루어짐(마 12:17). 그리스도께서는 은밀함과 가려진 처지로 물러나셨으니, 이는 비록 그분이 가려지셨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리하여 그 말씀이 밝히 드러나 영광을 받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분의 마음이 두신 바였다.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성경은 이사야 42장 1-4절이며, 이는 마태복음 12장 18-21절에 자세히 인용되어 있다. 그 요지는 우리 주 예수께서 그분의 사역에서 얼마나 온유하고 조용하시면서도 또한 얼마나 성공적이실지를 보여 주는 것이며, 그 둘에 대한 실례를 우리는 앞선 본문들에서 보았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라.
1. 그리스도를 향한 아버지의 기뻐하심(마 12:18). 보라 내가 택한 나의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을 배울 수 있다.
(1.) 우리 구주께서는 우리의 구속이라는 위대한 사역에서 하나님의 종이셨다. 그분은 그 일에서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셨으며(히 10:7), 사람의 배교로 생긴 틈을 메우는 일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과 그 영광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셨다. 종으로서 그분께는 위대한 사역이 맡겨졌고 큰 신임이 부여되었다. 이는 그분의 비하의 한 부분이었으니, 곧 그분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우리의 구원 사역에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율법 아래 놓이시며 속박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이 군주의 표어는 Ich dien—나는 섬긴다(독일어로 "나는 봉사한다"는 뜻, 영국 왕세자의 좌우명)이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속이라는 위대한 사역의 수행에 유일하게 합당하고 적합한 분으로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으셨다. 그분은 par negotio—그 사역에 동등하신, 내가 택한 나의 종이시다. 그분 외에는 아무도 구속자의 일을 능히 행하거나 구속자의 면류관을 쓰기에 합당하지 못하였다. 그분은 백성 중에서 택함을 받은 자이시니(시 89:19), 사람이나 천사도 자격을 갖추지 못한 그 섬김과 영예의 자리에 무한하신 지혜로 택함을 받으셨다.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합당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분이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역에 자신을 억지로 밀어붙이신 것이 아니라, 합당하게 그 일에 택함을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택하심의 머리가 되시며 또한 다른 모든 택함받은 자들의 머리가 되시도록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다(엡 1:4).
(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곧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다.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영원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고(요 1:18), 날마다 그의 기뻐하심이 되셨다(잠 8:30).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모든 시간 이전부터 영원하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교통과 교류가 있었으니, 이로써 주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그를 가지셨다(잠 8:22). 중보자로서 아버지께서 그분을 사랑하셨으니, 여호와께서 그를 상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그분이 거기에 복종하셨으므로 이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셨다(요 10:17).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자, 곧 그분의 마음이 기뻐하시는 자이시니, 이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만족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로 그분이 자신의 기뻐하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분을 기뻐하셨으니, 이는 그분이 하나님의 마음이 그토록 두셨던 그 놀라운 사역을 기꺼이 즐거이 떠맡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분 안에서 우리를 기뻐하시니, 이는 그분이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셨기 때문이다(엡 1:6).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갖거나 가질 수 있는 모든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근거하고 그것에 빚지고 있으니, 이는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기 때문이다(요 14:6).
2. 그분께 주신 아버지의 약속, 두 가지에 관하여.
(1.) 그분이 자신의 사역을 위해 모든 면에서 온전히 자격을 갖추시리라는 것.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주리라고 하셨으니, 곧 지혜와 모략의 영으로서이다(사 11:2,3). 하나님이 어떤 섬김으로 부르시는 자들을, 그분은 반드시 그 일에 적합하게 하시고 자격을 갖추게 하신다.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그들을 그 일에 부르셨음이 드러날 것이니, 모세의 경우와 같다(출 4:12).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하셨다. 중보자로서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능력과 영광을 받으셨으며, 또한 주시기 위하여 받으셨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그분을 사역에 적합하게 하시려고 그분께 주신 모든 것은 이 한 가지로 요약된다. 곧 자신의 영을 그분 위에 두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그 동료보다 뛰어나게 부음 받으신 기쁨의 기름이었다(히 1:9). 그분은 성령을 한량으로 받지 않으시고 한량 없이 받으셨다(요 3:34). 주목하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또 그 안에서 기뻐하시는 자들이 누구든지, 그분은 반드시 자신의 영을 그들 위에 두신다. 그분은 자신의 사랑을 부어 주시는 곳마다, 자신의 형상의 무언가를 부어 주신다.
(2.) 그분이 자신의 사역에서 풍성히 성공하시리라는 것. 하나님이 보내시는 자들을, 그분은 반드시 인정하신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그의 손에서 형통하리라는 것은 오래전에 우리 주 예수께 약속으로 보증된 바였다(사 53:10).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 형통할 기쁨의 뜻에 대한 설명을 보게 된다.
[1.] 그분이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방 나라들과 인접한 자들에게 전파하셨고(막 3:6-8 참조), 자신의 사도들을 통하여 여기서 그분의 심판이라 일컬어진 복음을 이방 세계에 알리셨다. 구원의 길과 방식, 곧 아들에게 맡겨진 그 심판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으로서 그분에 의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위대한 선지자로서 그분에 의해 드러나고 선포되었다.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개혁하고 더 낫게 하는 데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실천과 행실의 규범으로서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의 율례는 유대인들의 독점물이었으나(시 147:19),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드러나리라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자주 예언된 바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토록 놀랄 일이 되어서는 안 되었으며, 하물며 분개할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2.]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마 12:21). 그분이 그들에게 심판을 드러내시되, 그들이 그분이 드러내시는 바를 유념하고 지켜, 그것에 영향을 받아 그분을 의지하고 자신을 그분께 바치며 그 심판에 순응하게 하시리라는 것이다. 주목하라, 복음의 위대한 목적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신뢰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 예수, 곧 구주이시니, 그분이 일컬음 받으시는 그 보배로운 이름은 마치 쏟은 향기름과 같다. 여호와 우리의 의이시다(렘 23:6). 여기서 복음서 기자는 칠십인역(Septuagint, 70인역 그리스어 구약 번역)을 따르고 있다(혹은 후대의 칠십인역 판본들이 복음서 기자를 따르는 것일 수도 있다). 히브리어 원문(사 42:4)은 섬들이 그의 율법을 앙망하리라이다. 이방의 섬들에 대하여는(창 10:5) 야벳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에 관하여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리라고 하셨다(창 9:27). 이제 섬들(선지자의 말)이, 곧 이방인들(복음서 기자의 말)이 그의 율법을 앙망하고 그의 이름을 신뢰할 때에 이 말씀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둘을 함께 비교하여 주목하라. 곧 그의 율법에 다스림 받기로 결심하고 그의 율법을 앙망하는 자들만이, 오직 그들만이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신뢰할 수 있다. 또한 주목하라, 우리가 앙망하는 율법은 믿음의 율법, 곧 그분의 이름을 신뢰하는 율법이다. 이것이 이제 그분의 큰 계명이니,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요일 3:23).
3. 그분에 관한 예언, 그리고 그분이 자신의 사역을 온유하고 조용하게 다루심(마 12:19,20). 이것이 여기 인용된 주된 이유는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니, 곧 그리스도께서 은밀함과 숨으심을 의도하신 일과 관련된다.
(1.) 그분이 떠들썩함이나 과시 없이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시리라는 것.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라.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지 아니한다(눅 17:20,21). 그 처음 나신 자가 세상에 오셨을 때, 그것은 위엄과 의식을 갖춘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공개적인 입성을 하지 않으셨고, 그분을 왕으로 선포할 선구자도 두지 않으셨다. 그분이 세상에 계셨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위풍당당한 구주를 바라며 그 소망으로 자신을 만족시킨 자들은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길에서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 "보라 여기 그리스도가 있다" 혹은 "보라 저기 그가 있다"고 외치지 아니하셨다. 그분은 세미하고 잔잔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모든 이에게 매력적이되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분은 떠들썩하게 나타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시고, 이슬처럼 조용히 내려오셨다. 그분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바는 가능한 한 가장 큰 겸손과 자기 부인으로 이루어졌다. 그분의 나라는 영적인 것이었으므로, 힘이나 폭력으로, 또는 거창한 허세로 진전될 것이 아니었다. 결코 그렇지 않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전 4:20).
(2.) 그분이 가혹함이나 준엄함 없이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시리라는 것(마 12:20). 상한 갈대를 그가 꺾지 아니하시리라. 어떤 이들은 이것을 악인들을 향한 그분의 오래 참으심으로 이해한다. 그분은 이 바리새인들을 상한 갈대처럼 쉽게 꺾으실 수 있었고, 꺼져 가는 심지처럼 단번에 끄실 수 있었으나, 모든 원수를 그분의 발등상이 되게 하실 심판 날까지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리라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차라리 이것을 연약한 자들을 붙드시는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 이해한다. 대체로 그분의 복음의 의도는, 비록 많은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진실함을 격려하는 그러한 구원의 방식을 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죄 없는 순종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정직하고 자원하는 마음을 받아 주신다. 온유함과 두려움과 심히 떨림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특정한 사람들에 관하여, 다음을 주목하라. [1.] 그들의 처지가 여기서 어떻게 묘사되는가—그들은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다. 신앙에 갓 입문한 자들은 상한 갈대처럼 약하며, 그들의 연약함은 꺼져 가는 심지처럼 불쾌함을 준다. 그들에게 약간의 생명은 있으나 그것은 상한 갈대의 생명과 같고, 약간의 열은 있으나 꺼져 가는 심지의 열과 같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아직 연약할 뿐이었으며, 그분의 가족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많은 이들이 그러하다. 그들 속에 있는 은혜와 선함은 상한 갈대와 같고, 그들 속에 있는 부패와 악함은 꺼져 가는 심지, 곧 꺼진 후에도 여전히 연기를 내는 촛불 심지와 같다. [2.] 그들을 향한 우리 주 예수의 긍휼은 어떠한가? 그분은 그들을 낙심시키지 아니하시고, 하물며 그들을 거절하거나 버리시지도 아니하신다. 상한 갈대는 꺾이거나 짓밟히지 아니하고 도리어 붙들림을 받아 백향목이나 무성한 종려나무처럼 강하게 될 것이다. 갓 켜진 촛불은 비록 연기만 내고 불꽃을 내지 못할지라도 불어 꺼지지 아니하고 도리어 불어 일으켜질 것이다. 작은 일의 날은 보배로운 것들의 날이므로, 그분은 그것을 멸시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그것을 큰 일의 날이 되게 하실 것이다(슥 4:10). 주목하라, 우리 주 예수께서는 비록 참 은혜에 있어서 연약할지라도 그 은혜를 지닌 자들을 매우 부드럽게 다루신다(사 40:11, 히 5:2). 그분은 우리가 티끌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육체인 것도 기억하신다. [3.] 이것의 좋은 결말과 성공은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라는 말씀에 암시되어 있다. 그분이 이방에 드러내신 그 심판은 승리할 것이며, 그분은 이기고 또 이기려고 나아가실 것이다(계 6:2). 세상에서의 복음 전파와 마음속에서의 복음의 능력이 모두 승리할 것이다. 은혜가 부패를 이기고 우위를 차지할 것이며, 마침내 영광 가운데서 온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로 인도될 것이니, 이는 그분이 심판하실 때에 이기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진리로 심판을 베푸시리라고 하였으니, 이사야 42장 3절에 그렇게 되어 있다. 진리와 승리는 거의 같은 것이니, 이는 진리가 위대하여 반드시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²² 그 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²³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²⁴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²⁵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²⁶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서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²⁷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²⁸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²⁹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³⁰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³¹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³²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³³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³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³⁵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³⁶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³⁷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보게 된다.
I.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영광스럽게 정복하심이니, 곧 하나님의 허용으로 사탄의 권세 아래 있어 그에게 사로잡혔던 한 사람을 은혜로이 고쳐 주심으로 이루신 것이다(마 12:22). 여기서 살펴보자.
1. 그 사람의 처지는 매우 비참하였다. 그는 귀신 들려 있었다. 그리스도 당시에 이런 종류의 사례가 평소보다 더 많이 일어났는데, 이는 사탄을 대적하고 그의 사로잡음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일에서 그리스도의 권능이 더욱 크게 드러나고 그분의 목적이 더욱 분명히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그분이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음이 더욱 명백히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귀신 들린 이 가련한 사람은 눈멀고 말 못하는 자였으니, 참으로 비참한 처지였다! 그는 스스로를 돕기 위해 볼 수도 없었고, 자신을 도와 달라고 남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사탄의 권세 아래 있어 그에게 사로잡힌 영혼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눈이 멀고, 은혜의 보좌 앞에서 말 못하는 자이다. 곧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합당한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사탄은 믿음의 눈을 멀게 하고, 기도의 입술을 봉인한다.
2. 그의 고침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으며, 그것이 갑작스러웠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셨다. 주목하라. 사탄을 정복하고 그의 사로잡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곧 영혼의 치유이다. 그리고 원인이 제거되매 즉시 그 결과도 그쳤으니, 눈멀고 말 못하던 자가 말하며 보게 되었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자비는 사탄의 악의와 정반대이며, 그분의 은총은 마귀의 해악과 정반대이다. 사탄의 권세가 영혼 안에서 깨어질 때,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입술이 열려 그분을 찬송하게 된다.
II. 이 일이 백성에게, 곧 모든 백성에게 준 깨달음이다. 그들은 놀랐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에도 이런 종류의 여러 기적을 행하셨지만, 자주 반복된다고 해서 그분의 일들이 덜 놀라운 것이 되거나 덜 놀랍게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 일로부터 이렇게 추론하였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다윗의 허리에서 나리라고 약속된 메시야가 아니냐? 이가 오시기로 된 그분이 아니냐?" 우리는 이것을 두 가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첫째, 묻는 질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고 물었으나, 그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인상은 강렬하였으나 일시적이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좋은 질문이었으나, 곧 사라져 버리고 끝까지 추구되지 않은 듯하다. 이런 종류의 깨달음은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며, 그래야 마음에 이르게 되는 법이다. 둘째, 확정하는 질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그렇다, 분명히 그러하다. 다른 이일 수 없다. 이런 기적들은 이제 메시야의 나라가 세워지고 있음을 명백히 증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기적들에서 이러한 결론을 끌어낸 것은 바로 백성, 곧 구경하던 무리 가운데서도 비천한 자들이었다. 무신론자들은 "그것은 그들이 바리새인들보다 통찰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 사실 자체는 명백하여 많은 탐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세상적 이해관계에 덜 편견을 갖고 덜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시요 세상의 구주이심이라는 이 위대한 진리에 이르는 길은 너무도 평탄하고 쉬워서, 평범한 백성도 놓칠 수가 없었으니, 나그네는 미련한 자라도 그 길에서 잃지 아니하겠고 라고 하였다(사 35:8을 보라). 이는 그것을 찾는 자들에게 발견되었다. 곧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를 낮추신 한 본보기이다.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미련한 것들로 지혜 있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였다.
III. 바리새인들의 모독적인 트집이다(마 12:24).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더 많은 지식과 열심을 가진 척하는 부류였으나,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훈에 대하여 가장 완고한 원수들이었다. 그들은 백성 가운데서 누리던 명성을 자랑스러워하였으니, 그것이 그들의 교만을 살찌우고, 그들의 권력을 지탱하며, 그들의 지갑을 채웠다. 그러므로 백성이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은 기적 자체보다도 그 말에 극도로 격분하였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에 대하여 그들을 시기하게 만들었고, 그분에 대한 백성의 존경이 커질수록 자기들에 대한 존경은 당연히 가려지고 줄어들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였던 것처럼 그분을 시기하였으니, 곧 여인들이 다윗에 대하여 노래한 것 때문이었다(삼상 18:7,8). 주목하라. 사람들의 칭찬과 갈채에 자기 행복을 묶어 두는 자들은, 다른 누군가에 대하여 좋은 말이 들릴 때마다 끊임없는 불안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명예의 그림자는 그것에서 도망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다녔고, 그것을 열심히 쫓던 바리새인들에게서는 도망쳤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람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이 아니다." 살펴보자.
1. 그들이 얼마나 멸시하며 그리스도를 두고 이 사람이라고 말하는가. 마치 부은 향기름 같은 그분의 그 보배로운 이름이 그들의 입술에 올려질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말하였다. 백성이 그리스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그들은 더욱 부지런히 그분을 헐뜯었으니, 이것이 그들의 교만과 거만함, 그리고 마귀적인 시기심의 한 본보기이다. 선한 사람을 가난하다는 이유로 멸시하며 말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2. 그들이 얼마나 모독적으로 그분의 기적을 두고 말하는가. 그들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으니,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귀신들이 쫓겨난 것은 해처럼 명백하였다. 또한 그것이 비범하고 초자연적인 일이었음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렇게 그 전제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결론을 피할 다른 길이 없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곧 그리스도와 마귀 사이에 결탁이 있다고 암시하였다. 그 결탁에 따라 귀신은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물러난 것이며, 합의하에 의도적으로 뒤로 양보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혹은 마치 으뜸 귀신과의 합의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하급 귀신들을 쫓아낼 권능을 얻었다는 듯이 말하였다. 이보다 더 명백히 거짓되고 비열한 억측은 있을 수 없었으니, 곧 진리 자체이신 그분이 세상을 속이기 위하여 거짓의 아비와 결탁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명백한 깨달음 앞에서도 끝까지 버티기로 작정한 완고한 불신앙의 마지막 도피처, 아니 차라리 마지막 핑계였다. 살펴보라. 귀신들 가운데에는 왕이 하나 있으니, 곧 하나님께로부터의 배도와 그분을 거스르는 반역의 주모자이다. 그런데 이 왕은 바알세불, 곧 파리의 신, 곧 거름 더미의 신이다. 오 루시퍼(Lucifer, 새벽별)야, 네가 어찌 그리 빛의 천사에서 파리들의 주인으로 떨어졌느냐! 그러나 이 자 역시 귀신들의 왕이니, 곧 지옥의 영들의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이다.
IV. 이 비열한 암시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이다(마 12:25-30).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주목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때든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시며,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신다. 그분은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통촉하신다. 바리새인들은 부끄러워서 그것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 둔 듯하다. 그들은 그것으로 백성을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자기 양심의 깨달음을 잠재우기 위하여 그것을 간직해 두었다. 주목하라. 많은 사람이 자기 의무에서 벗어나는데, 이는 차마 드러내 인정하지 못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는 숨길 수 없는 무언가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마음을 굳히도록 돕기 위하여 자기들이 생각한 바를 수군거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의 대답이 그들의 생각에 대한 것이라고 한 까닭은, 그분이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원리에서 그 말을 하였는지 아셨기 때문이다. 곧 그들이 성급함에서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뿌리 깊은 악의의 산물이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이 비방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은 풍성하고 강력하니, 이는 불과 유황으로 모든 입이 막히기 전에 먼저 양식과 이치로 막히게 하려 하심이다. 여기에 이 억측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입증하시는 세 가지 논증이 있다.
1. 사탄이 그런 결탁으로 쫓겨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고 지극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사탄의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 될 터인데, 그의 교활함을 생각할 때 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마 12:25,26).
(1.) 여기에 잘 알려진 한 법칙이 제시된다. 곧 모든 사회에서 서로 다투는 것은 공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모든 집안도 그러하다. Quæ enim domus tam stabilis est, quæ tam firma civitas, quæ non odiis atque dissidiis funditus everti possit?(라틴어: 곧 미움과 분열로 송두리째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한 집안이 어디 있으며, 그토록 굳건한 공동체가 어디 있겠는가?) — 키케로, 『우정론』(Læl.) 7장. 분열은 흔히 황폐로 끝난다. 우리가 충돌하면 깨어지고, 서로 갈라서면 공동의 원수에게 쉬운 먹잇감이 된다. 하물며 우리가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갈 5:15). 교회들과 나라들이 슬픈 경험으로 이것을 알아 왔다.
(2.) 이를 당면한 사안에 적용함이다(마 12:26).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곧 귀신의 왕이 하급 귀신들과 불화한다면, 그 온 나라와 이해관계는 곧 무너질 것이다. 아니, 만일 사탄이 그리스도와 결탁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자기 파멸을 초래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전파와 기적의 명백한 의도와 지향은 사탄의 나라를 — 곧 어둠과 사악함과 하나님께 대한 적의의 나라를 — 무너뜨리고, 그 폐허 위에 빛과 거룩함과 사랑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요 사람들의 영혼을 짓밟는 폭군인 마귀의 일들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멸하여졌다. 그러므로 바알세불이 그러한 의도를 조금이라도 지지하거나 거기에 가담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일이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와 한편이 된다면, 그리하고서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는가? 그는 스스로 자기 나라의 멸망에 일조하는 셈이 될 것이다. 주목하라. 마귀에게는 하나의 나라가 있으니,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공동의 이해관계이다. 그는 자기 힘이 다하는 데까지 이를 굳건히 세우려 할 것이며, 결코 그리스도의 편으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정복되고 깨어져야 할 자이므로, 그분께 굴복하거나 머리를 숙일 수 없다. 빛과 어둠이,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그리스도와 바알세불이 어찌 화합하며 무슨 교제가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나라를 멸하실 것이나, 바알세불과의 은밀한 결탁 같은 그런 하찮은 술책과 모략으로 하실 필요가 없다. 아니, 이 승리는 더 고귀한 방법으로 얻으셔야 한다. 귀신의 왕이 자기의 모든 군대를 동원하고, 자기의 모든 권세와 책략을 사용하며, 자기 세력을 가장 긴밀한 동맹으로 유지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연합된 힘보다 더 강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서지 못할 것이다.
2. 귀신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쫓겨나는 것은 결코 이상하거나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1.) 그렇지 않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어떻게 귀신을 쫓아내느냐?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이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때때로 귀신을 쫓아낸 자들이 있었다. 요세푸스(Josephus)는 자기 시대에 그것을 행한 자들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는 유대인 마술사들에 대하여 읽으며(행 19:13), 또 그분을 따르지는 않았으나(막 9:38) 혹은 그분께 신실하지 못하였으나(마 7:2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자들에 대하여 읽는다. 바리새인들은 이들을 정죄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들이 행한 것을 하나님의 성령에 돌렸으며, 그것으로 자기들과 자기 민족을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분은 바알세불과 결탁하여 그리하신다고 암시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원한과 시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주목하라. 악의에 찬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악의로 박해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호감을 가진 자들 안에서는 인정하고 칭찬하던 바로 그것을, 자기들이 미워하는 자들 안에서는 정죄하는 것이 그 방식이다. 시기의 판단은 일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사람에 의하여, 이치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편견에 의하여 내려진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은 알아보면서 재판에서는 그 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기에 매우 부적합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이렇게 너희 스스로를 모순되게 하는 것이 마지막 큰 날에 너희를 심판하는 증거로 일어나 너희를 정죄하리라." 주목하라. 마지막 심판에서는 모든 죄뿐만 아니라 그 죄의 모든 가중 요소까지 다 계산에 들어갈 것이며, 옳고 선했던 우리의 어떤 견해들조차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로 제시되어 우리의 편파성을 정죄하게 될 것이다.
(2.) 이렇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서 나타났다는 확실한 표징이요 징조였다(마 12:28). "그러나 만일 참으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분명히 내가 그러하거니와, 너희는 비록 받아들이기를 꺼릴지라도, 이제 메시야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세워지려 한다고 결론지어야 하리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다른 기적들은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셨음을 증명하였으나, 이 기적은 그분이 마귀의 나라와 그의 일들을 멸하시려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셨음을 증명하였다. 이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그 위대한 약속이 명백히 성취되었다(창 3:15). "그러므로 오랫동안 고대해 오던 저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경륜이 이제 시작되었으니, 너희가 그것을 멸시한다면 그 위험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주목하라. [1.] 마귀의 권세를 멸하는 일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루어진다. 믿음의 순종을 이루시는 그 성령께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그 영의 세력을 무너뜨리신다. [2.]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확실한 입구이다. 한 영혼 안에서 마귀의 세력이 관습이나 외적인 제재로 단지 억제되는 데 그치지 않고, 성화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가라앉고 깨어진다면,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그 영혼에 임한 것이니, 곧 은혜의 나라, 영광의 나라의 복된 보증이다.
3. 그리스도의 기적들, 특히 귀신을 쫓아내신 이 기적을, 그분의 교훈 및 그분의 거룩한 종교의 의도와 지향과 비교해 보면, 그분이 사탄과 동맹을 맺으신 것이 결코 아니라, 도리어 그를 향하여 공공연한 적의와 적대 가운데 계셨음이 분명히 드러난다(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여 빼앗아 가겠는가? 결박한 후에야 그 세간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어둠에 앉아 사악함 속에 누워 있던 세상은 마치 강한 자의 손아귀에 있고 그의 권세 아래 있는 집처럼 사탄의 손아귀에 있었고 그의 권세 아래 있었으니, 거듭나지 못한 모든 영혼도 그러하다. 거기에 사탄이 거하며, 거기서 그가 다스린다. 이제, (1.)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도는 강한 자인 마귀가 세상에서 지켜 온 그 집을 늑탈하는 것이었으니, 곧 사람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죄에서 거룩함으로,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세상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여(행 26:18) 영혼들의 소속을 바꾸는 것이었다. (2.) 이 의도를 따라, 그분은 자기 말씀으로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실 때에 그 강한 자를 결박하셨다. 이렇게 그분은 마귀의 손에서 칼을 비틀어 빼앗으셨으니, 이는 그의 손에서 왕홀을 비틀어 빼앗으시려 함이었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그분의 기적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분이 사람들의 몸에서 얼마나 쉽고 효과적으로 마귀를 쫓아내실 수 있는지를 보이셨을 때, 사탄이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어떤 권세를 찬탈하여 행사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은혜로 그것을 깨뜨리시리라는 소망을 모든 신자에게 북돋우셨다. 그가 마귀를 결박하실 수 있음이 나타났으니, 그를 늑탈하실 것이다. 여러 나라가 우상 섬기던 데서 돌이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을 때, 죄인 중의 가장 악한 자들이 거룩하게 되고 의롭다 함을 받아 성도 중의 가장 선한 자들이 되었을 때,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집을 늑탈하셨으니, 앞으로도 더욱더 늑탈하실 것이다.
4.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마귀와 그의 나라를 대적하여 힘차게 수행해 오신 이 거룩한 전쟁이 중립을 허락하지 않는 것임을 암시하신다(마 12:30).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의견 차이에서는, 우리가 다툼의 사안을 줄이고 화평을 구하도록 가르침을 받으니, 곧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와 함께 하는 자로 여겨야 한다(눅 9:50). 그러나 그리스도와 마귀 사이의 큰 다툼에서는 어떤 화평도 구해서는 안 되며, 이 사안에서 어떤 미온적 태도도 호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진심으로 나서지 않는 자는 실상 그분을 반대하는 자로 셈하여질 것이며, 그 일에 미지근한 자는 원수로 간주된다. 다툼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 있을 때에는 둘 사이에서 머뭇거림이 없으니(왕상 18:21), 그리스도와 벨리알 사이에는 양다리를 걸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마귀의 나라에 영원히 대립하는 동시에 그것을 영원히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에서는 길르앗처럼 요단 저편에, 혹은 아셀처럼 바닷가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으니(삿 5:16,17), 우리는 전적으로, 신실하게, 흔들림 없이 그리스도의 편에 서야 한다. 그것이 옳은 편이요, 결국에는 이기는 편이 될 것이다. 출 32:26을 보라.
뒤따르는 어구도 같은 취지이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이다. 주목하라. (1.)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사명은 모으는 것이니, 곧 자기 추수를 모으는 것이요, 아버지께서 그분께 주신 자들을 모으는 것이었다(요 11:52, 엡 1:10). (2.)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와 함께 하는 자들에게 자기와 함께 모으기를 기대하시며 요구하신다. 곧 그들 자신이 그분께 모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여 다른 이들을 그분께 모아 그분의 세력을 강화하기를 요구하신다. (3.) 그리스도의 나라를 진전시키는 자로서 나타나고 행동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 나라를 방해하는 자로 간주되고 그렇게 취급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모으지 않으면 우리는 헤치는 것이다. 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우리는 반드시 선을 행해야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균열이 벌어지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린 것처럼 그들 사이에 그런 결탁이 없음을 보이려 하심이다.
V. 여기에 이 일을 계기로 하신 그리스도의 강화(講話)가 있으니, 곧 혀의 죄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분은 바리새인들에게서 백성에게로, 논쟁에서 교훈으로 돌이키시는 듯하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죄로부터 백성에게 세 가지 종류의 혀의 죄에 관하여 경고하신다. 다른 사람들이 받는 해는 우리에게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1.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의 말은 혀의 죄 가운데 가장 악한 종류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마 12:31,32).
(1.) 여기에 복음의 조건을 따라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는 은혜로운 보증이 있다.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거니와, 이는 위로가 되는 말씀이니, 곧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죄의 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는다. 비록 그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을지라도(사 1:18), 비록 그 본질에 있어 아무리 극악하고, 그 정황으로 인하여 아무리 가중되며, 아무리 자주 반복될지라도, 비록 그것이 하늘에 닿을지라도, 그러나 여호와께는 인자하심이 있으니, 그 인자하심은 하늘 너머까지 미친다. 자비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직접 건드리는 죄인 모독에까지도 베풀어질 것이다. 모독하는 자였던 바울이 긍휼을 입었다(딤전 1:13). 우리는 마땅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와 같이 죄악을 사유하시는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미 7:18). 인자를 거역하여 말하는 것조차 사하심을 얻으리라. 그분이 죽으실 때에 그분을 욕하던 자들이 그러하였으니, 그들 중 많은 이가 회개하고 긍휼을 입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아들들에게 자기에게 거역하는 말에 기꺼이 용서할 본을 보이셨으니, 나는 못 듣는 자같이 듣지 아니하였다(시 38:13). 살펴보라. 사람들에게는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되 마귀에게는 그렇지 않으니, 이는 타락한 천사들의 세계보다 인류의 온 세계를 향한 사랑이라, 곧 사람들에게는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여기에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이라는 예외가 있으니, 이것은 여기서 유일하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선언된다. 여기서 살펴보라.
[1.] 이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을 거역하여 말하는 것이다. 혀의 죄에 얼마나 큰 악독함이 있는지를 보라. 유일하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바로 혀의 죄이니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마 12:25). 여기서 뜻하는 것은 성령의 인격이나 본질을 거역하여 말하는 모든 것, 혹은 그분의 더 은밀한 활동들 가운데 일부를 거역하는 것, 혹은 단지 죄인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그분의 내적 역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겠는가? 우리 법에서는 사면령(act of indemnity)이 언제나 그 법의 의도인 은혜와 관용에 유리하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판정한다. 그러므로 그 법의 예외 조항들은 꼭 필요한 한도 이상으로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은 하나의 사면령이다. 이름으로든 묘사로든 예외로 지목된 자는 아무도 없고, 오직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만이 예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장 좁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모든 주제넘은 죄인들은 사면령의 조건인 믿음과 회개에 의하여 실질적으로 배제된다. 그러므로 다른 예외들이 멀리까지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모독이 예외가 되는 까닭은, 하나님께 자비가 부족하거나 그리스도께 공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죄인을 불신앙과 회개치 않음 가운데 불가피하게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분의 공로와 자비에 참여하기를 진심으로 갈망하는 자는 아무도 이 죄를 짓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있다. 그리고 자기가 이 죄를 지었을까 두려워하는 자들은, 도리어 짓지 않았다는 좋은 표징을 보이는 것이다. 학식 있는 휘트비 박사(Dr. Whitby)는 매우 적절하게 관찰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장차 무엇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막 3:28, 눅 12:10). 누구든지 모독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분을 모독하여 먹기를 탐하는 자요, 미혹하는 자요, 모독하는 자라 부른 자들로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어느 정도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 그분의 외모가 보잘것없었고, 그분에 대한 그 민족의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의 신적 사명에 대한 증거가 그분의 승천 이후에야 비로소 완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회개하면 용서받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성령이 부어지심으로 깨달음을 얻기를 바랄 수 있으니, 그분을 배반하고 살해한 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실제로 그러하였다. 그러나 만일 성령이 그분의 내적 은사들, 곧 계시와 방언 같은 것들로 — 사도들 가운데 나타난 성령의 분배 같은 것으로 — 주어졌을 때에도, 그들이 그 성령마저 악한 영이라고 계속 모독한다면, 그들이 언젠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리라는 소망은 없다. 왜냐하면, 첫째, 사도들 안에 나타난 그 성령의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려고 작정하신 마지막 증거였으며, 다른 방법들이 앞서간 후에도 여전히 비축해 두신 것이었다. 둘째, 이것은 가장 강력한 증거였으며, 기적들 자체보다도 더 사람을 설득하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셋째, 그러므로 이 성령의 경륜을 모독하는 자들은 도무지 그리스도를 믿는 데로 인도될 수 없다. 바리새인들이 기적을 그리하였듯이 이 은사들을 사탄과의 결탁으로 돌리는 자들이라면, 무엇이 그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람이 결코 끌려 나올 수 없는 그런 견고한 불신앙의 요새이며, 그러므로 용서받을 수 없으니, 이는 이로 말미암아 회개가 죄인의 눈에서 숨겨지기 때문이다.
[2.] 그것에 내려지는 선고가 무엇인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당시 유대 교회의 상태에서 고의로 범죄한 영혼을 위한 속죄의 제사가 없었던 것처럼, 성경에서 흔히 오는 세상이라 불리는 복음 은혜의 경륜 아래서도 언약의 피를 발로 밟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용서가 없을 것이다. 치료법 자체를 그토록 정면으로 거스르는 죄에는 치유가 없다. 우리의 옛 법에 한 규칙이 있었으니, 곧 신성모독죄에는 피신처가 없다는 것이었다. 혹은 지금도, 곧 죄인 자신의 양심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요, 큰 날에도, 곧 용서가 공표될 때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다. 혹은 이것은 죄인을 현세적 형벌과 영원한 형벌 둘 다에, 곧 현재의 진노와 장차 올 진노 둘 다에 노출시키는 죄이다.
2.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다른 사악한 말들에 관하여 말씀하시니, 곧 마음속에서 다스리는 부패가 거기서 터져 나와 만들어 내는 산물에 관한 것이다(마 12:33-3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하였거니와(마 12:25), 여기서 그분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마음이 적의와 악의로 가득하였으니 그들이 그토록 악하게 말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님을 보이셨으나, 그들은 종종 스스로를 의로운 자인 척 꾸밈으로써 그것을 감추고 가리려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 근원을 가리키시며 그것을 고치신다. 마음이 거룩하게 되게 하라, 그러면 그것이 우리의 말에 나타날 것이다.
(1.) 마음은 뿌리요, 말은 열매이다(마 12:33). 만일 나무의 본성이 선하면, 그에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은혜가 마음을 다스리는 원리인 곳에서는 말도 가나안의 언어가 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어떤 정욕이든 마음을 다스리면 그것이 터져 나올 것이다. 병든 폐는 고약한 입김을 만든다. 사람의 언어는 그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를 드러내며, 마찬가지로 그가 어떤 영에 속하였는지도 드러낸다. "나무도 좋고 그러면 그 열매도 좋다 하라. 곧 정결한 마음을 얻으라, 그러면 정결한 입술과 정결한 삶을 갖게 되리라. 그렇지 않으면 나무가 좋지 않고 그 열매도 그에 따라 좋지 않으리라. 너희가 좋은 나무에서 난 가지를 돌능금나무 그루터기에 접붙임으로 그것을 좋은 나무가 되게 할 수 있으니, 그러면 그 열매가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가 여전히 그대로라면, 어디에 심고 어떻게 물을 주든, 그 열매는 여전히 좋지 않을 것이다." 주목하라. 마음이 변화되지(trans-formed) 않으면, 삶은 결코 온전히 개혁되지(re-formed) 않을 것이다.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들의 사악한 생각을 입 밖에 내기를 꺼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쓸개와 쑥을 맺는 그 쓴 뿌리를 결코 죽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자기들 속에 숨기려 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암시하신다. 주목하라. 우리는 겉으로 선해 보이는 것보다 실제로 선한 것에 더 마음을 써야 한다.
(2.) 마음은 샘이요, 말은 시내이다(마 12:34). 시내가 샘의 넘쳐흐름이듯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 악한 마음은 샘이 그 물을 솟구쳐 내듯이 악을 흘려 보낸다고 하였다(렘 6:7). 솔로몬이 말한 바와 같은(잠 25:26) 흐려진 샘과 더러워진 우물은 반드시 흙탕물과 불쾌한 시냇물을 흘려 보낼 수밖에 없다. 악한 말은 악한 마음의 자연스럽고도 본연의 산물이다. 샘에 던져진 은혜의 소금 외에는 그 무엇도 그 물을 고치고, 말에 맛을 내며, 부패한 대화를 정결하게 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없었으니, 그들은 악하였다.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이었다. 세례 요한이 그들을 그렇게 불렀거니와(마 3:7), 그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있겠는가?(렘 13:23). 백성은 바리새인들을 성도의 무리로 여겼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 곧 뱀의 후손이라 부르시니,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적의를 품은 자들이었다. 이제 독사의 자식들에게서 독하고 악독한 것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독사가 독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목하라. 옛 사람들의 속담이 말한 것처럼, 악은 악인에게서 나오나니(삼상 24:13), 악한 사람들에게서는 악한 것이 예상될 수 있다. 우매한 자는 우매한 것을 말한다(사 32:6). 스스로 악한 자들은 선한 것을 마땅한 방식으로 말할 재간도 의향도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이 자기들이 어떤 사람들 가운데 살아야 하는지를 알기 원하셨으니, 이는 무엇을 예상해야 할지 알게 하시려 함이었다. 그들은 에스겔이 전갈 가운데 있는 것 같으니(겔 2:6), 쏘이고 물린다 할지라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3.) 마음은 곳간이요, 말은 그 곳간에서 꺼내어진 것들이다(마 12:35). 그리고 여기서 사람의 성품을 그려 낼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
[1.] 마음에 선한 보화를 가지고 있어 거기서 기회 있을 때마다 선한 것을 내는 것은 선한 사람의 성품이다. 은혜, 위로, 체험, 선한 지식, 선한 정서, 선한 결심, 이것들이 마음의 선한 보화이다. 거기에 숨겨진 하나님의 말씀, 거기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 거기에 거하며 다스리는 신적 진리들이, 그 곳간 안의 보화이니, 값지고 합당하며, 선한 살림꾼의 비축물처럼 안전하게 또 은밀하게 간직되어 있으나, 모든 경우에 쓸 준비가 되어 있다. 이렇게 갖추어진 선한 사람은 요셉이 자기 곳간에서 내듯이 내어놓을 것이니,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이들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선한 것을 말하고 행할 것이다. 잠 10:11,13,14,20,21,31,32를 보라. 이것이 선한 것을 내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선한 보화도 없으면서 선한 지출을 자처하는데, 그런 자들은 곧 파산하고 말 것이다. 어떤 이들은 속에 선한 보화를 가졌다고 자처하면서도 그 증거를 내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속에 그것을 가졌기를 바라며, 자기 말과 행실이 어떠하든 자기들은 선한 마음을 가졌다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지혜와 지식의 선한 보화를 가졌으나 나누어 주지 않으니, 그것에서 내어놓지 않는다. 그들은 한 달란트를 가졌으나 그것으로 장사할 줄을 모른다. 이 점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니, 곧 그가 선하기도 하고 선을 행하기도 한다.
[2.] 마음에 악한 보화를 가지고 있어 거기서 악한 것을 내는 것은 악한 사람의 성품이다. 마음에 거하며 다스리는 정욕과 부패가 악한 보화이니, 죄인은 거기서 악한 말과 행실을 내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다른 이들을 해친다. 창 6:5,12, 마 15:18-20, 약 1:15를 보라. 그러나 악의 보화(잠 10:2)는 진노의 보화가 될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무익한 말에 관하여 말씀하시며, 그 안에 어떤 악이 있는지 보이신다(마 12:36,37). 하물며 바리새인들이 한 것과 같은 사악한 말에는 얼마나 더한 악이 있겠는가. 우리는 심판 날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그래야 그것이 우리의 혀에 제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자.
(1.) 그날에 혀의 죄에 대한 심문이 얼마나 세세할 것인가. 곧 사람이 말하는 무슨 무익한 말이나 담화에 대해서도 심문을 받으리라. 이것은 다음을 암시한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심지어 우리 자신도 주의하지 않는 말까지도 주목하신다는 것이다. 시 139:4를 보라.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아무런 주의나 의도 없이 한 말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인지하신다. [2.] 헛되고, 무익하며, 부적절한 말은 하나님께 거슬리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어떤 선한 목적에도 기여하지 않고, 덕을 세우는 데 아무 쓸모가 없으며, 헛되고 경박한 마음의 산물이다. 이 무익한 말은 엡 5:4에서 금하는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과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말이 많은 데, 곧 무익한 변론에 좀처럼 빠지지 않는 일이 드문 그 죄이다(욥 15:3). [3.] 우리는 머지않아 이 무익한 말들에 대하여 셈을 치러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로 제시되어, 우리가 무익한 종임을, 곧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의 일부인 이성과 언어의 능력을 잘 활용하지 못한 자임을 입증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무익한 말을 회개하지 않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셈이 그리스도의 피로 청산되지 않으면, 우리는 망하고 만다.
(2.) 그 셈에 대한 심판이 얼마나 엄격할 것인가(마 12: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것은 사람의 재판에서 통용되는 한 규칙인데, 여기서 하나님의 재판에 적용된다. 주목하라. 우리 담화의 한결같은 기조가 은혜로운 것이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그것이 큰 날에 우리에게 유리한 증거가 되거나 불리한 증거가 될 것이다. 경건한 척하면서도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않은 자들은, 그때에 헛된 경건으로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이 드러날 것이다(약 1:26).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엘리바스의 말(욥 15:6), 곧 네 입이 너를 정죄하나니 내가 아니라를 가리키신다고 생각하며, 혹은 차라리 솔로몬의 말(잠 18:21), 곧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를 가리키신다고 생각한다.
³⁸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선생님으로부터 표적 보기를 원하나이다. ³⁹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⁴⁰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⁴¹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⁴²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⁴³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⁴⁴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⁴⁵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여기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대화하는 이 바리새인들은, 그분을 트집 잡았던 자들(마 12:24)—그분이 보이신 표적들을 믿지 않았던 자들—과는 같은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도리어 또 다른 부류로서, 그 표적들을 불신할 이유가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보이신 표적들로 만족하지 않고 그 증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자기들이 요구하는 또 다른 증거를 그분이 보이지 않으시면 안 된다고 한 자들이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I. 그분께 드린 그들의 청원(마 12:38). 그들은 선생님이라는 칭호로 그분께 아첨하며 존경하는 체하였으나, 실은 그분을 모욕하려 하였다. 그분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자가 다 그리스도의 종은 아니다. 그들의 요구는 우리에게 선생님으로부터 표적 보기를 원하나이다였다. 그들이 표적을 보기 원하는 것, 즉 그분이 이적으로써 자신의 신적 사명을 증명하시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었다(출 4:8,9 참조). 그분은 이적으로 세워진 신앙의 한 모형을 거두러 오셨으므로, 동일한 증거를 제시하셔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충분히 입증하는 수많은 표적을 이미 보이신 마당에 또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불합리한 일이었다. 주목하라. 교만한 자들이 하나님께 처방을 내리고서는 그것을 빌미로 그분께 순종하지 않으려는 것은 본성에서 나오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허물이 결코 그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II. 이 청원, 곧 이 무례한 요구에 대한 그분의 답변.
1. 그분은 그 요구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말로 정죄하신다(마 12:39). 그분은 이 비난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에게 돌리신다. 그들은 모두 자기 지도자들과 같았으니, 악을 행하는 자들의 씨요 그 대를 잇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참으로 악한 세대였으니, 그리스도의 이적이 주는 확신에 맞서 자신을 완고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분을 모욕하고 그분의 이적을 경멸하기로 작정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음란한 세대였으니, (1.) 음란한 후손으로서, 조상들의 믿음과 순종에서 너무도 비참하게 타락하여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 그들을 자기 자손으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였다(사 57:3 참조). 또는 (2.) 음란한 아내로서, 그들은 언약으로 정혼한 그 하나님을 떠났다. 그들은 포로기 이전처럼 우상 숭배라는 음행의 죄를 범한 것은 아니었으나, 불신앙과 온갖 죄악의 죄를 범하였으니, 그것 또한 음행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신들을 좇지는 않았으되, 자기들이 고안한 표적을 구하였으니, 그것이 곧 간음이었다.
2. 그분은 이미 그들에게 보이신 것 외에는 어떤 다른 표적도 주기를 거부하시되, 다만 선지자 요나의 표적만은 예외로 하신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소원과 기도를 듣고 응답하실 준비가 늘 되어 있으시나, 부패한 정욕과 변덕을 만족시켜 주지는 않으신다. 잘못 구하는 자들은 구하여도 받지 못한다. 표적은 아브라함과 기드온처럼 믿음의 확증을 위하여 구하는 자들에게는 주어졌으나, 자기 불신앙을 변명하려고 요구하는 자들에게는 거절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은 결코 또 다른 이적을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해도 마땅한 일이었으나, 그분의 놀라운 선하심을 보라. (1.) 그들은 더 큰 유익과 더욱 충분한 확신을 위하여 동일한 표적들을 여전히 거듭 보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이 모든 표적과는 다른 종류의 한 표적, 곧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권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는 것—여기서 선지자 요나의 표적이라 일컬어진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아직 그들의 확신을 위하여 남겨져 있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이심을 보여 주는 위대한 증거로 의도된 것이었다. 이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기 때문이다(롬 1:4). 그것은 다른 모든 표적을 능가하는 표적이었으니, 그것들을 완성하고 그 위에 면류관을 씌우는 표적이었다. "그들이 앞선 표적들을 믿지 아니할지라도 이 표적은 믿으리라(출 4:9). 이것으로도 그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 무엇으로도 못하리라." 그러나 유대인의 불신앙은 그것마저도 떨쳐 버릴 핑계를 찾아내어, 그의 제자들이 와서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고 말하였으니, 보지 않기로 작정한 자보다 더 고칠 수 없이 눈먼 자는 없는 법이다.
이제 그분은 여기서 이 선지자 요나의 표적을 더 풀어 설명하신다(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다시 안전하고 무사히 나온 것같이, 그리스도께서도 그만큼 무덤에 계시다가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것이다. [1.] 물고기의 뱃속이 요나에게 그러하였듯, 무덤은 그리스도께 그러하였다. 폭풍 가운데 잃게 될 목숨들을 위한 대속물로 요나가 거기에 던져졌듯, 그리스도도 그렇게 거기 던져지셨다. 요나가 스올의 뱃속같이(욘 2:2) 그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시야에서 내쳐진 것처럼 보였듯, 그리스도도 거기 누우셨다. [2.] 그분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머문 그 기간만큼, 곧 밤낮 사흘을 무덤에 머무셨으니, 만 사흘 밤낮은 아니었다. 요나도 고래 뱃속에 그렇게 오래 누워 있지는 않았을 것이며, 다만 자연적인 사흘의 일부(그리스인들이 뉘크테메라이[νυχθήμεραι, 밤낮을 합한 하루 단위]라 부른 것)였을 것이다. 그분은 한 주의 여섯째 날 오후에 장사되셨다가 첫째 날 아침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는 매우 흔히 쓰는 어법이다(왕상 20:29, 에 4:16, 에 5:1, 눅 2:21 참조). 요나가 자기 죄로 인하여 그만큼 갇힌 자가 되었듯,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만큼 갇힌 자가 되셨다. [3.]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그래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리라는 확신으로 자신을 위로하였듯(욘 2:4), 그리스도께서도 무덤에 누우셨을 때 썩음을 보지 아니하실 것을 확신하는 자로서 소망 중에 거하셨다고 분명히 일컬어진다(행 2:26,27). [4.] 요나가 셋째 날에 그 옥에서 풀려나 죽은 자들의 모임에서 산 자의 땅으로 다시 돌아왔듯(죽은 것들이 물 밑에서 떠는 것이라 일컬어진 까닭이다, 욥 26:5), 그리스도께서도 셋째 날에 생명으로 돌아오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널리 전하셨다.
3. 그리스도께서는 이 기회를 빌려, 자신이 살던 그 세대—개혁되려 하지 않았으므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세대—의 슬픈 성격과 처지를 묘사하시며, 심판 날에 그날의 온전한 폭로와 최종 선고 아래 드러날 그들의 모습대로 그 성격을 제시하신다. 사람과 사물은 지금은 거짓된 빛깔로 나타나며, 여기서의 성격과 처지는 가변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바로 평가하려면 마지막 심판에서 그 척도를 취해야 하니, 사물은 영원히 그러한 그대로가 곧 실제 그것의 모습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백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신다.
(1.) 니느웨 사람들에게 정죄받을 한 세대로 묘사하시니,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그들이 심판 때에 일어나 이 세대를 정죄하리라는 것이다(마 12:41).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들에게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이 될 것이나, 요나의 표적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미친 것만큼 복된 결과를 그들에게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그 표적으로 멸망을 막는 회개에 이르렀으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멸망을 재촉하는 불신앙으로 도리어 완고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판 날에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는, 그때 그리스도께서 전도하신 자들과 이제 그리스도께서 전파되는 자들의 죄, 따라서 그 정죄를 더 무겁게 하는 가중 요인으로 언급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요나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1.] 요나는 우리와 같은 성정, 곧 같은 죄성을 지닌 한낱 사람일 뿐이었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2.] 요나는 니느웨에서 나그네였으니, 자기 나라를 적대시하던 이방인들 가운데로 들어갔으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전도하실 때 자기 백성에게 오셨고, 그분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전파되실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3.] 요나는 단 한 편의 짧은 설교를, 그것도 별다른 엄숙함 없이 길거리를 지나가며 외쳤을 뿐이나, 그리스도는 거듭거듭 부르시고 앉아서 가르치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4.] 요나는 사십 일 안에 임할 진노와 멸망 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았으며, 회개하라는 교훈이나 지침이나 격려를 주지 않았으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하셨을 뿐 아니라 어떤 점에서 회개해야 할지를 보이셨고, 천국이 가까웠으므로 우리가 회개할 때 받아 주실 것을 확증하셨다. [5.] 요나는 자기 교훈을 확증할 이적을 하나도 행하지 않았고 니느웨 사람들에게 아무런 선의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리스도는 풍성한 이적을 행하셨으며 그것은 모두 자비의 이적이었다. 그런데도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으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전도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주목하라. 자기 영혼을 위한 도움과 유익을 적게 가진 어떤 이들의 선함은, 훨씬 큰 도움을 가진 자들의 악함을 더 무겁게 한다. 어스름한 빛 가운데서도 자기 화평에 속한 것들을 분별하는 자들은, 한낮에도 더듬거리는 자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2.) 남방 여왕, 곧 스바 여왕에게 정죄받을 한 세대로 묘사하신다(마 12:42). 니느웨 사람들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할 것이요, 스바 여왕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먼 나라에서 왔거니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면에서 솔로몬보다 더 크심에도 와서 그분의 지혜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1.]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오라는 초청도, 환영받으리라는 약속도 받지 못하였으나,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그분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도록 초청받는다. [2.] 솔로몬은 한낱 지혜로운 사람일 뿐이었으나, 그리스도는 지혜 그 자체이시니, 그 안에 지혜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3.] 스바 여왕은 헤쳐 나가야 할 많은 난관이 있었으니, 그는 여자라 여행에 부적합하였고 그 길은 멀고 위험하였으며, 그는 여왕이라 그가 없는 동안 자기 나라가 어찌 될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를 막을 그런 염려가 없다. [4.] 그는 그 먼 길을 이 일로 가는 것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으니, 명성이란 흔히 사람을 추켜세우는 법이요, 어쩌면 자기 나라나 궁정에도 자기를 가르칠 만큼 충분한 지혜자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솔로몬의 명성을 들은 그는 그를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불확실함을 안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5.] 그는 땅 끝에서 왔으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가까이 있다. 보라, 그분이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신다. [6.] 스바 여왕이 구하러 온 지혜는 철학과 정치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그리스도께 얻을 수 있는 지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이다. [7.]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을 수 있을 뿐이었으니, 솔로몬이 그에게 지혜를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지혜를 주실 것이요, 아니 그분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그들에게 지혜가 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점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혜를 듣지 않는다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온 스바 여왕의 적극성이 심판 때에 일어나 우리를 정죄하리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솔로몬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3.) 사탄을 쫓아내고 그들을 구해 내려고 동원된 온갖 방법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소유 아래 그의 권세에 머물기로 작정한 한 세대로 묘사하신다. 그들은 마귀가 떠났다가 갑절의 힘으로 되돌아오는 한 사람에 비유된다(마 12:43-45). 마귀는 여기서 더러운 귀신이라 일컬어지는데, 이는 그가 모든 순결을 잃어버렸고, 사람들 사이에 온갖 더러움을 즐기며 조장하기 때문이다. 자, 보라.
[1.] 이 비유는 마귀가 사람의 몸을 사로잡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얼마 전에 한 귀신을 쫓아내셨는데, 그들이 그분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말한 것이 그들이 얼마나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지를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마귀와 결탁하여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아님을 더욱 증명하는 것이니, 만일 그러하였다면 마귀가 곧 다시 돌아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를 쫓아내신 것은 최종적이었으며, 다시 들어옴을 막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분이 악한 영에게 나가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시는 것을 본다(막 9:25). 마귀는 자기가 사로잡은 자들을 가지고 때로 그렇게 장난하곤 하였으니, 나갔다가는 더 큰 격분으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그래서 그런 처지에 있던 자들의 멀쩡한 시기 뒤에는 흔히 더 격렬한 발작이 따랐다. 마귀는 나갔을 때 불안해하니, 이는 그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잠 4:16). 그는 매우 우울한 자처럼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다가 다시 돌아온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에게서 군대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그들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기를 간구하였는데, 거기서 물 없는 곳으로 오래 다니지 못하고 곧장 호수로 들어가고 말았다.
[2.] 이 비유의 적용은, 이를 유대 교회와 민족 전체의 형편을 나타내는 것으로 만든다.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곧 지금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스르며 마침내 배척할 이 세대가 그러하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의 수고로 많은 유대인에게서 쫓겨난 마귀는 이방인 가운데서 쉴 곳을 찾았으나,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그 사람들과 신전들에서 그를 쫓아냈으니(휘트비 박사의 견해), 혹은 이방 세계 그 어디에서도 여기 유대인들의 마음속만큼 그를 만족시킬 만한 즐겁고 탐나는 거처를 찾지 못하였으니(해먼드 박사의 견해), 그러므로 그는 다시 그들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받아들여지지 못하셨고, 그들은 그 엄청난 사악함과 완고한 불신앙으로 인하여 그 어느 때보다 더 그를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기에 영구히 거처를 잡을 것이요, 이 백성의 형편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오시기 전이나 사탄이 결코 쫓겨나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 절망적으로 저주받을 만하게 될 것이다(해먼드 박사의 견해).
그 민족 전체가 여기에 묘사된다. 첫째, 배교한 백성으로. 바벨론 포로기 후에 그들은 개혁하기 시작하여 우상을 버리고 어느 정도 신앙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곧 다시 스스로를 부패시켰다. 비록 그들이 다시 우상 숭배로 빠져들지는 않았으나, 온갖 불경건과 모독에 빠져들어 점점 더 악해졌으며, 그 모든 다른 악함에 더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고의로 멸시하고 대적하는 죄를 더하였다. 둘째, 멸망이 정해진 백성으로. 이 위선적인 민족, 곧 하나님의 진노의 백성(사 10:6의 그것과 같이)을 대적하는 새 명령이 봉인을 통과하고 있었으며, 로마인들에 의한 그들의 멸망은 그 죄가 더욱 극심하였던 만큼 다른 어떤 멸망보다도 더 클 것이었다. 그때에 진노가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다(살전 2:15,16). 모든 민족과 교회는 이를 경고로 삼아, 자기들의 처음 사랑을 버리는 일, 자기들 가운데 시작된 선한 개혁의 역사를 떨어뜨리는 일, 그리고 떠난 줄로 여겼던 그 악함으로 돌아가는 일을 삼가도록 하라. 그런 자들의 나중 형편은 처음보다 더 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⁴⁶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⁴⁷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⁴⁸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⁴⁹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⁵⁰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우리 주 예수의 입에서는 특별한 상황마다 탁월하고 유익한 말씀이 나왔다. 정식 강론뿐 아니라 여담도 교훈적이었으며, 여기서도 그러하다.
I. 그리스도께서 설교하는 중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 서서 그에게 말하려고 하여 어떻게 방해했는지 살펴보자(마 12:46,47). 그들의 요청은 무리를 통해 그에게 전달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온 동생들이 누구였는지—아마 그를 믿지 않던 이들이었을 수 있다(요 7:5)—또 무슨 용무였는지를 캐물을 필요는 없다. 그가 피로해질까 염려하여 강론을 중단시키려 했거나, 바리새인에게 노여움을 사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려 했을 수 있다. 마치 그들이 그에게 지혜를 가르칠 수 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1. 그는 여전히 무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설교는 평이하고 쉽고 친근한 대화였으며, 듣는 이들의 역량과 형편에 맞았다. 그의 말씀에 트집이 잡혔어도 그는 계속하셨다. 사역에서 만나는 반대가 우리를 그 일에서 몰아내게 해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과는 더 유익을 줄 수 없음을 알고 대화를 그쳤지만, 그들처럼 자기 지식을 자랑하지 않고 기꺼이 배우려 하는 일반 백성에게는 계속 말씀하셨다.
2.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안에 서서 말씀을 듣기 원해야 했지만, 밖에 서서 그에게 말하기를 원했다. 날마다 사적으로 교제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공적 설교에 참석하는 일을 소홀히 했다. 흔히 지식과 은혜의 방편에 가장 가까운 이들이 가장 태만하다. 친숙함과 접근의 용이함은 어느 정도 멸시를 낳는다. 언제든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오늘 소홀히 하기 쉽지만, 확실히 소유한 때는 현재뿐이며 내일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교회에 가까울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는 속담에 진실이 있다는 것은 애석하다.
3. 그들은 스스로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쁘게 듣던 다른 이들까지 방해했다. 마귀는 구주의 설교를 대적하는 원수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부당한 트집으로 강론을 좌절시키지 못하자, 친족의 때아닌 방문으로 끊으려 했다. 우리는 곁에 있는 친구 때문에 사역의 장애를 만나고, 세속적 예의를 지키느라 영적 관심사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우리와 사역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도 분별 없이 행동하여 방해자가 될 수 있다. 베드로가 자신은 충직하다고 여기며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라고 하여 그리스도께 걸림이 된 것과 같다. 주의 어머니가 그에게 말하려 한 것을 보면, 로마 교회의 불의와 우상숭배가 후대에 주장한 것처럼 자기 아들에게 명령하는 법을 배우지는 못했다. 또한 그들이 말하듯 모든 허물과 어리석음에서 자유로운 이도 아니었다. 모든 일을 지혜롭고 선하며 때에 맞게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이지 그의 어머니의 특권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관계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하셨고, 그때 어머니는 이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눅 2:49). 지금 그것을 기억했다면 아버지의 일을 하는 그를 방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들을 때 잘 간직했다고 여긴 좋은 진리도 정작 적용할 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을 때가 많다.
II. 그가 이 방해에 어떻게 대응하셨는가(마 12:48-50).
1. 그는 그 요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다. 사역에 온전히 몰두하여 혈육이나 사회적 예의가 자신을 거기서 떼어 놓게 하지 않았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이는 혈육의 정을 버리거나 신앙을 핑계로 부모에게 무례하고 친족에게 매정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때에 아름다우므로, 더 큰 의무를 행할 동안 작은 의무는 물러서야 한다. 친족을 향한 애정이 하나님을 섬기며 선을 행할 기회를 살리는 일과 충돌한다면, 레위처럼 내 아버지를 보지 못하였다고 말해야 한다(신 33:9). 가장 가까운 친족도 비교적으로 미워해야 한다. 곧 그리스도보다 덜 사랑해야 하며(눅 14:26),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우선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심이 그를 삼켜 자신뿐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친족도 잊게 했다. 친구가 우리를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택할 때 언짢게 여기거나 악의 탓으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한 경건한 열심 때문에 생긴 소홀함은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 더 나아가 친구가 하나님께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거나 마음이 흐트러지게 하느니 우리 자신과 만족을 부인해야 한다.
2. 그는 이 기회에 영적 친족인 제자들을 혈육의 친족보다 앞세우셨다. 형제들과 말하려고 설교를 그만두지 않은 충분한 이유이다. 친족을 기쁘게 하기보다 제자를 유익하게 하기를 원하셨다.
(1.)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다. 단지 듣고 알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행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은 제자도의 가장 좋은 준비이며(요 7:17), 가장 좋은 증거이다(마 7:21). 이것이 우리를 참된 제자라 불리게 한다. 그리스도는 “내 뜻을 행하는 자”라고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뜻과 구별되는 자기 뜻을 구하거나 행하러 오지 않으셨고, 두 뜻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의 상태와 사역에서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맡겼으므로 우리도 그 뜻으로 인도하신다(요 6:38).
(2.) 그리스도의 제자는 존귀하다. 이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르며 그의 교훈을 받아들인 제자들은 육신으로 친족인 누구보다 그에게 소중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친족보다 앞세우고 아버지를 떠났다(마 4:22; 10:37). 이제 그는 잃어버린 사랑이 없음을 보이며 그들을 자기 친족보다 앞세워 보상하셨다. 이로써 영예에서 백 배를 받지 않았는가(마 19:29)?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는 말씀은 정겹고 격려가 된다. 그러나 이 특권은 그들에게만 있지 않다. 이 영광은 모든 성도에게 있다. 순종하는 모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까운 친족이다. 그의 이름과 형상과 성품을 지니며 그의 가족에 속한다. 그는 친족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자유롭게 교제하며, 자기 식탁에 맞아들이고 돌보고 공급하여 필요한 선한 것이 부족하지 않게 하신다. 죽으실 때 풍성한 유업을 남기셨고, 지금 하늘에서 교통을 유지하며, 마침내 모두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는 친족 된 자의 도리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룻 3:13), 가난한 친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사람과 천사와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인정하실 것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게 된다. I.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관한 제4계명의 율법을 명확히 밝히시고, 유대 교사들이 내세운 미신적인 견해들로부터 그것을 변호하시며, 부득이한 일과 자비의 일은 그날에 행해야 함을 보여주신 일(마 12:1-13). II. 우리 주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보이신 신중하심과 겸손과 자기 부인(마 12:14-21). III.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마귀와 결탁한 것으로 돌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신성모독적인 트집과 비방에 대해 하신 답변(마 12:22-37). IV.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며 도전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시험하는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마 12:38-45). V. 자신의 친족과 가족에 관한 그리스도의 판단(마 12:4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