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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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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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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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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장 서론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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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에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을 만난다. 곧 가르치시는 위대한 선지자로서, 병을 고치시는 위대한 의사로서, 양 떼를 먹이시는 위대한 목자로서, 영들을 교훈하시는 영들의 아버지로서, 사탄을 쫓아내시며 그를 굴복시키시는 정복자로서, 또한 자기 백성의 육신을 돌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공급하시는 분으로서 만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I. 인간의 전통과 명령에 관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그리스도의 담론(마 15:1-9). II. 무리와 그분의 제자들에게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들에 관하여 하신 담론(마 15:10-20). III. 가나안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일(마 15:21-28). IV. 그분께로 데려온 모든 자를 고치신 일(마 15:29-31). V. 떡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일(마 15:32-39).

마태복음 15장 1-9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Jesus Reproves the Scribes and Pharis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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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책망하시다

¹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²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그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³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⁴ 하나님이 명하여 이르시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⁵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받으실 것이 다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하기만 하면, ⁶ 그 아버지나 어머니를 공경하지 아니하여도 되리라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⁷ 너희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⁸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⁹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악한 풍습이 좋은 법을 낳는다고 우리는 말한다. 유대 교사들이 자기들의 위계 질서를 떠받치기 위해 품었던 무절제한 열심은, 여기서처럼 진리를 확립하기 위한 우리 구주의 탁월한 강론을 여러 차례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

I. 여기서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두고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트집 잡는 것을 본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유대 교회의 거물들로서,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은 자들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크게 대적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반대를 모세의 율법에 대한 열심이라는 명분으로 위장하였으니, 실상은 사람들의 양심을 짓누르는 자기들의 폭정을 떠받치는 것 외에 다른 의도가 없었다. 그들은 학식 있는 자들이요 일에 능한 자들이었다. 여기 등장하는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성, 으뜸 되는 성, 지파들이 올라가는 곳이요 재판의 보좌가 베풀어진 예루살렘에서 온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나았어야 마땅하건만, 도리어 더 악하였다. 주목하라. 외적인 특권이란 합당하게 활용되지 않으면, 흔히 사람을 교만과 악독으로 더욱 부풀게 만든다. 마땅히 맑은 샘이 되었어야 할 예루살렘이 이제 독이 든 소굴이 되어 버렸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이제 이 거물들이 고발자라면, 부디 묻노니 그 고발 내용은 무엇인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해 제기하는 조항은 무엇인가? 참으로, 그들이 제자들에게 씌운 죄목은 그들 교회의 규례에 순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마 15:2).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그들은 이 고발을 한 가지 구체적 사례로 입증하니, 그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비행이로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씌울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었다는 사실은, 곧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다는 증거이다.

주목하라. 1. 장로들의 전통이란 무엇이었는가—사람이 자주 손을 씻되 식사 때에는 반드시 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여기에 대단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씻지 않은 손으로 만진 음식이 자기들을 더럽힌다고 여겼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이것을 행하였고, 또 지극한 엄격함으로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되, 시민적 형벌로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로 부과하였으며,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으로 만들었다. 랍비 요세스(Rabbi Joses)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간음하는 것만큼 큰 죄"라고 단정하였다. 또 랍비 아키바(Rabbi Akiba)는 엄중한 옥에 갇혔을 때 손 씻을 물과 식사 때 마실 물을 함께 받았는데, 그 대부분이 뜻하지 않게 쏟아져 버리자, 남은 물로 손을 씻고 정작 마실 물은 자기 몫으로 남기지 않으면서,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하였다. 아니, 그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은 사람과는 함께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 그처럼 대단한 열심을 내는 것이 무척 기이하게 보일 법하지만, 교회의 압제자들에게는 그것이 여전히 따라붙는 속성임을—곧 자기들이 고안해 낸 것을 즐겨 행할 뿐 아니라 자기들이 강요하는 규례를 밀어붙이는 데 광적이라는 것을—우리가 지금도 보고 있다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2. 제자들이 이 전통 곧 규정을 범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보아하니 그들은 떡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았으니, 이것은 바리새인들에게 더욱 거슬리는 일이었다. 그들이 다른 일에 있어서는 엄격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관습 자체는 충분히 무해한 것이요, 시민적 용도로 쓰일 때에는 적절함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셨던 혼인 잔치에서 정결케 하는 물에 관해 읽거니와(요 2:6),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심으로써 그러한 용도에 종지부를 찍으셨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적 의식과 예식으로 실행되고 강요되며, 그토록 큰 비중이 거기 실리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비록 지식에는 약하였으나, 그것에 순응하거나 준행하지 않을 만큼은 잘 가르침을 받았으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을 주시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이미 사도 바울의 교훈을 배웠던 것이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식사 전에 손 씻는 것이 가한 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나는 무엇에든지 그 권세 아래 매이지 아니하리라. 더욱이 우리가 넘어가게 네 몸을 굽히라 네 영혼에게 명하는 자들에게는 그러하지 않으리라(고전 6:12).

3.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향해 제기한 불평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이 일을 두고 그리스도와 다투었으니,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이심으로—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하셨다—제자들에게 그것을 허락하셨다고 여긴 까닭이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이 교회의 규례를 범하나이까? 또 어찌하여 당신은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나이까?" 이 불평이 그리스도께 제기된 것은 잘된 일이었다. 제자들 자신은 비록 이 경우에 자기들의 본분을 알고는 있었으나, 자기들이 행한 바에 대해 바라는 만큼 충분한 이유를 댈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II. 여기에 이 트집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이 있으니, 곧 제자들에게 범법으로 씌워진 그 일에 대하여 제자들을 변호하시는 것이다. 주목하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 안에 굳게 서 있는 한, 그분은 반드시 그 일에 있어 우리를 든든히 지지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그들에게 응답하신다.

1. 역공의 방식으로 응답하신다(마 15:3-6). 그들은 제자들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살피고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여 주신다. 그러나 그분이 그들에게 씌우시는 것은 단순한 맞고발이 아니다. 우리를 책망하는 자들을 정죄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변호하는 일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전통(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고발의 근거로 삼은 것이 바로 그 전통의 권위였다)에 대한 책망이니, 그 전통에 순응하지 않는 것을 가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거스르는 것을 본분이 되게 하는 책망이다. 신적 권위와 경쟁하여 자신을 내세우는 인간적 권위에는 결코 복종해서는 안 된다.

(1.) 전체적인 고발은 이것이다. 너희가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도다. 그들은 그것을 장로들의 전통이라 일컬으며, 그 관행의 오래됨과 그것을 부과한 자들의 권위에 무게를 두었으니, 마치 로마 교회가 교부들과 공의회에 무게를 두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그들의 전통이라 부르신다. 주목하라. 불법한 강요는 그것을 처음 고안하고 명령한 자들뿐 아니라, 그것을 떠받치고 유지하며 존속시키는 자들에게도 그 죄책이 돌아갈 것이다(미 4:16 참조).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도다. 주목하라. 자기들의 강요에 가장 열심인 자들이 흔히 하나님의 계명에는 가장 무심한 법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러한 강요에 맞서 경계해야 할 좋은 이유이니, 그러한 강요가 처음에는 단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마침내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정면으로 맞서기에 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비록 바리새인들이 식사 전에 손 씻는 이 규정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어떤 계명도 침범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다른 사례들에서는 그렇게 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이 규정에 불순종한 것을 정당하다 하신다.

(2.) 이 고발의 증거는 한 가지 구체적 사례, 곧 그들이 제오계명을 범하였다는 사례에 있다.

[1.]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지(마 15:4), 그 율법의 명령이 무엇이며 그 제재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 명령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공통된 아버지 되시는 분께서 명하신 바이니, 섭리께서 우리 존재의 도구로 삼으신 부모를 존중함으로써, 우리는 그 존재의 창시자 되시는 분께—그분이 그로써, 우리에 대하여, 자기 형상의 얼마간을 부모에게 입히셨거니와—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에게 행할 본분의 전부가 부모를 공경하는 이 한 가지에 포함되어 있으니, 이것이 나머지 모든 본분의 원천이요 기초이다.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우리 구주께서는 여기서 이 명령이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고, 필요할 경우 부모의 궁핍을 채워 드리며, 모든 면에서 부모의 평안을 위해 섬기는 본분을 뜻하는 것으로 전제하신다. 과부를 공경하라는 것은 곧 과부를 부양하라는 뜻이다(딤전 5:3).

제오계명에 담긴 이 율법의 제재는 네 생명이 길리라는 약속이다. 그러나 우리 구주께서는 그 약속을 잠시 제쳐 두시니, 누구라도 그로부터 이 본분이 단지 칭찬할 만하고 유익한 것일 뿐이라고 추론할까 염려하심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다른 성경 구절에 명시된, 이 계명을 어기는 데 따르는 형벌을 강조하시니, 이는 그 본분이 지극히 또 불가결하게 필수적임을 드러낸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이 율법은 우리가 출애굽기 21장 17절에서 보는 것이다(출 21:17). 부모를 저주하는 죄는 여기서 부모를 공경하는 본분과 대조된다. 부모를 악담하거나 부모에게 악을 빌거나, 부모를 조롱하거나 부모에게 비웃고 욕되게 하는 말을 하는 자는 이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형제를 *라가(Raca)*라 부르는 것이 그토록 큰 벌을 받는다면, 아버지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어떠하겠는가(마 5:22 참조)? 우리 구주께서 이 율법을 적용하시는 데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부모에게 섬김이나 도움을 거절하는 것이 부모를 저주하는 일에 포함된다. 비록 말은 충분히 공손하여 거기에 모욕적인 것이 전혀 없을지라도, 만일 행위가 그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내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한 자와 같을 뿐이다(마 21:30).

[2.] 장로들의 전통이 이 계명에 어떻게 모순되었는지 살펴보자. 그것은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모순이 아니라, 암묵적인 모순이었다. 그들의 결의론자들은 이 계명의 의무에서 손쉽게 빠져나갈 도피처를 제공하는 규칙들을 그들에게 주었던 것이다(마 15:5,6).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너희는 이르되 이러쿵저러쿵 하는도다. 주목하라. 사람이 말하는 바는, 비록 그가 거물이든 학식 있는 자이든 권위 있는 자이든 간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어긋나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것은 마땅히 거부될 수 있고 또 거부되어야 한다(행 4:19). 주목하라.

첫째, 그들의 전통이 무엇이었는가. 사람이 자기 세상 재산을 처분하는 데 있어 제사장들에게 주어 성전 섬김에 바치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은 없으며, 어떤 것이든 일단 그렇게 바쳐지면 그것을 양도하는 것이 불법일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의무가—그것이 아무리 정당하고 거룩한 것일지라도—그로 인해 무효가 되어 사람이 그 의무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의식주의(儀式主義)와 성전에 대한 미신적 존중에서 비롯되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탐욕과 돈을 사랑함에서 비롯되었으니, 성전에 바쳐진 것으로 그들이 이익을 얻은 까닭이다. 전자는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었고, 후자는 실상 이 전통의 밑바닥에 있던 것이었다.

둘째, 그들이 이것을 자녀의 경우에 어떻게 적용하도록 허용하였는가. 부모의 궁핍이 자녀의 도움을 요청할 때, 그들은 자기와 자기 자녀에게서 떼어 둘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전 금고에 바쳤다고 변명하니, 내게서 받으실 것이 다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것이요, 그러므로 그 부모는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바쳐진 것의 영적 유익이 부모에게 돌아갈 터이니, 부모는 그 공기로 살아가야 한다고 암시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선하고 유효한 변명이라고 가르쳤으며, 불효하고 인륜을 저버린 많은 자녀들이 이를 이용하였고, 그들은 그 자녀들을 그 일에 있어 정당하다 하며 그는 자유로우리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 뜻을 이렇게 보충한다. 어떤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보충한다. "그는 잘하는 것이요 그 날이 땅에서 길 것이며, 제오계명을 합당하게 지킨 것으로 여겨지리라."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우면 부모 봉양을 거절하는 일이 통과될 만할 뿐 아니라 그럴듯하게까지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전통의 부조리함과 불경함은 매우 명백하였다. 계시된 종교(성경 종교)는 자연 종교(이성적 도덕)를 개선하기 위함이지 뒤엎기 위함이 아니었으며, 그 자연 종교의 근본 율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율법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의 뜻을 알았더라면, 가장 필수적인 도덕을 가장 자의적인 의식으로 무너뜨리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것이었다. 주목하라. 무엇이든 불순종으로 이끌거나 불순종을 두둔하는 것은, 사실상 그 계명을 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함부로 면제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그 율법을 폐기하고 무효로 만드는 자들이다. 율법을 어기는 것도 나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듯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훨씬 더 나쁘다(마 5:19). 계명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주어진 것이 무슨 소용인가? 우리가 그 규칙에 의해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면, 그 규칙은 우리에게 무효한 것이다. 여호와여 지금은 일하실 때니이다. 그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으니(시 119:126), 위대한 개혁자, 위대한 정련자께서 나타나실 때가 무르익었으며, 한시가 급하였다. 그들은 그 계명을 거슬러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자기들의 힘이 닿는 한 그 계명을 없애 버리는 죄를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들과 그들의 모든 전통에도 불구하고, 그 계명은 온전한 효력과 권능과 효능 가운데 굳게 서 있다.

2. 그리스도의 답변의 또 다른 부분은 책망의 방식이니, 그분이 여기서 그들에게 씌우시는 죄는 외식이다. 너희 외식하는 자들아(마 15:7). 주목하라. 누가 외식하는 자인지 선언하시는 것은, 마음을 살피시며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분의 특권이다. 사람의 눈은 드러난 불경건을 분별할 수 있으나, 외식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눈뿐이다(눅 16:15). 그리고 외식이 그분의 눈이 드러내시는 죄인 것처럼, 그것은 또한 다른 무엇보다도 그분의 영혼이 미워하시는 죄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책망을 이사야 29장 13절에서 끌어오신다(사 29:13).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이사야는 그것을 자기가 예언하던 그 세대의 사람들을 두고 말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적용하신다. 주목하라.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죄와 죄인에 대한 책망은, 세상 끝날까지 그와 같은 인물들과 행위들에 미치도록 의도된 것이다. 그것들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벧후 1:20). 말세의 죄인들이 예언되어 있으니(딤전 4:1; 딤후 3:1,2,3). 다른 이들을 겨냥한 위협이라도, 우리가 동일한 죄를 범한다면 우리에게 해당된다. 이사야는 그들에 관해서만 예언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외식하는 자들에 관해서도 예언하였으니, 그의 그 말씀은 여전히 그들을 겨누어 효력 가운데 서 있다. 성경의 예언은 날마다 성취되고 있다.

이 예언은 외식하는 백성을 정확히 그려 낸다(사 9:17, 10:6). 여기에 다음의 것이 있다.

(1.)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묘사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그들 자신의 종교적 예배 행위에 있어서이다(9절).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그를 존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그에게서 멀다. 주목하라.

첫째, 외식하는 자가 어디까지 나아가는가.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그분을 존경한다.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이다. 바리새인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이 떨어져 있는 그 거리에 머물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 가까운 백성 가운데 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분을 존경한다. 곧 그들은 하나님을 존경하는 체하며, 그렇게 하는 자들과 합세한다. 외식하는 자들의 봉사로부터도 하나님께서는 얼마간의 영광을 받으시니, 그들이 세상에서 경건의 외양과 형식을 유지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요, 비록 그들이 그분께 영광 돌리려는 뜻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자기에게 영광을 취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원수들이 거짓으로 복종할 때, 곧 그들이 그분께 거짓을 행할 때(원어가 그러하다, 시 66:3), 그것은 그분의 영광으로 돌아가며 그분은 자기에게 이름을 얻으신다.

둘째, 그가 어디에 머물러 안주하는가. 이것은 그의 입과 그의 입술로만 행해진다. 그것은 이빨 바깥에서만 나오는 경건이다. 그는 많은 사랑을 보이지만, 그것이 전부이다. 그의 마음에는 참된 사랑이 없다.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들리게 하며(사 58:4),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사 48:1). 외식하는 자들이란 종교와 종교적 예배를 단지 입술의 수고로만 삼는 자들이다. 말과 혀로는, 가장 악한 외식자라도 가장 선한 성도만큼 잘할 수 있고, 야곱의 목소리로 그처럼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다.

셋째, 그가 무엇에 있어서 부족한가. 그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이다.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 마음은 습관적으로 멀어지고 소외되어 있고(엡 4:18), 실제로는 방황하며 다른 무언가에 머물러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생각도, 그분을 향한 경건한 정도, 영혼과 영원에 대한 관심도, 그 예배에 부합하는 생각도 전혀 없다. 하나님이 그들의 입에는 가까우나 그들의 심장에서는 머시니(렘 12:2; 겔 33:31). 그 마음은 미련한 자의 눈과 함께 땅끝에 가 있다. 마음이 없는 어리석은 비둘기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어리석은 본분이다(호 7:11). 외식하는 자는 한 가지를 말하면서 다른 것을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살피시며 요구하시는 가장 큰 것은 마음이니(잠 23:26), 만일 그것이 그분에게서 멀다면, 그것은 합당한 예배가 아니요 따라서 받으실 만한 예배도 아니다. 그것은 미련한 자들의 제사이다(전 5:1).

[2.] 다른 이들에게 내리는 그들의 규정에 있어서이다. 이것은 그들의 외식의 한 사례이니, 곧 그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훗날 교황주의자들이 그러하였듯이, 구전 전통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바치는 것과 동일한 존중을 바쳤으니, 그것을 pari pietatis affectu ac reverentiâ—곧 동일한 경건의 애정과 경외심으로—받아들였다(트리엔트 공의회, 제4회기, 제1교령). 사람의 고안물이 하나님의 제도에 덧붙여지고 또 그에 따라 강요될 때, 이것이 곧 외식이요 한낱 인간적 종교이다. 사람의 계명이란 본래 사람의 일에 관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이 자기의 규칙대로 행해지기를 원하시며, 자기가 친히 정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아니하신다. 그분에게서 나온 것만이 그분에게로 나아간다.

(2.) 외식하는 자들의 정죄이니, 그것은 짧은 한마디에 담겨 있다.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그들의 예배는 그것이 정해진 본래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도, 자기들에게 유익을 끼치지도 못한다. 만일 그것이 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진리로 하는 것도 아니니, 따라서 그것은 모두 헛것이다. 단지 경건한 것처럼 보이기만 하고 실상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다(약 1:26). 그리고 우리의 종교가 헛된 제물, 헛된 종교라면, 그 헛됨이 얼마나 크겠는가! 기도와 설교, 안식일과 성례가 가득한 시대를 살면서 그 모든 것을 헛되이 하는 것, 이 모든 일에서 허공을 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만일 그 가운데서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다면 정녕 그러하다. 입술의 수고는 헛수고이다(사 1:11). 외식하는 자들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며, 헛된 것을 의지하니 헛됨이 그들의 보응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장로들의 전통에 대한 제자들의 불순종에 있어 그들을 정당하다 하셨으니,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트집으로 얻은 바였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반박을 하였다는 것을 읽지 못한다. 비록 그들이 만족하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들은 잠잠해졌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 함께하신 그 권능을 능히 당해 내지 못하였다.

마태복음 15장 10-20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What Defileth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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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가

¹⁰ 예수께서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¹¹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¹²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¹³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¹⁴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¹⁵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¹⁶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¹⁷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¹⁸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¹⁹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²⁰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먹은 일이, 장로들의 전통과 명령을 어긴 것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님을 증명하신 다음, 이제 그것이 그 자체로 악한 일을 한 것으로도 비난받을 일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고 여기 오신다. 그분은 강론의 앞부분에서 그 법의 권위를 무너뜨리셨고, 이 부분에서는 그 법의 근거를 무너뜨리신다. 살펴보자.

I. 이 강론에 대한 엄숙한 서론 (마 15:10). 그가 무리를 부르셨다. 그리스도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강론하시는 동안 무리는 물러나 있었다. 아마도 저 교만한 자들이 무리를 물러가게 했을 것이니, 무리가 듣는 데서 그리스도와 이야기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자기들 마음대로 사사로이 강론으로 자기들을 만족시켜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무리를 돌아보셨다. 그분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곧 보내 버리시고, 그들을 떠나보내신 후, 군중을, 곧 무리를 불러 자기 청중이 되게 하셨다. 이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며(마 11:5 참조), 세상의 미련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것이다(고전 1:27,28 참조). 겸손하신 예수께서는 교만한 바리새인들이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던 자들을 품으셨으니, 그것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그분은 고집스럽고 가르칠 수 없는 그들에게서 돌이키시고, 비록 연약하나 겸손하며 기꺼이 배우려 하는 무리에게로 돌이키신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하셨다. 주목하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입에서 듣는 것은 깨닫기 위해 온갖 힘을 다해야 한다. 학자들뿐 아니라 무리, 곧 보통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는 데 그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분이 그러므로 그들에게 깨달으라고 명하시는 까닭은, 지금 가르치려 하시는 교훈이 그들이 스승들에게서 젖과 함께 빨아들인 관념과 상반되며, 그들이 매여 있고 중히 여기던 많은 관습과 관행을 뒤엎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사람을, 그들이 자라며 오랫동안 익혀 온 부패한 원리와 관행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큰 정신의 집중과 명료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깨달음은 흔히 편견에 매수되고 치우치기 때문이다.

II. 진리 자체가 (마 15:11) 두 명제로 제시되었으니, 그것은 당시의 통속적인 오류들과 정면으로 대립되었으므로 놀라운 것이었다.

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 우리 영혼에 어떤 도덕적 오염이나 더러움을 입히는 것은 우리가 먹는 음식의 종류나 질이 아니며, 우리 손의 상태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롬 14:17) 하셨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지고, 사람이 하나님께 가증하게 되며, 그분과의 교제에 부적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먹는 것은, 무분별하게 또 절제 없이 먹지 않는 한 이런 일을 하지 않으니,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기(딛 1:15)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러저러한 음식을 먹음으로 생기는 의식적(儀式的) 오염을 율법이 의도한 것보다 훨씬 멀리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 자기들 멋대로의 것을 덧붙여 짐을 지웠는데, 우리 구주께서 이를 반대하여 증언하시니, 이로써 그 문제에 있어 의식법(儀式法)의 폐지로 나아갈 길을 닦으려 하셨던 것이다. 그분은 이제 자기 따르는 자들에게 아무것도 속되거나 부정하다고 부르지 말라고 가르치기 시작하셨으며, 베드로가 잡아 먹으라는 명을 받았을 때 이 말씀을 기억하였더라면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행 10:13-15,28).

2.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 이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우리가 더럽게 되는 것은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음식 때문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지 못한 마음에서 우리가 내뱉는 말 때문이니, 이처럼 입은 육체로 범죄하게 한다(전 5:6). 그리스도께서 앞서의 한 강론에서 우리의 말에 큰 무게를 두셨거니와(마 12:36,37), 그것은 자기를 트집 잡던 자들을 책망하고 경고하시려는 것이었고, 여기 이것은 제자들을 트집 잡고 비난하던 자들을 책망하고 경고하시려는 것이다. 자기들이 먹는 것으로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제자들에 대하여 악의에 차서 비난조로 말함으로 스스로를 더럽히는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주목하라. 사람의 계명을 어겼다고 남에게 죄책을 씌우는 자들은, 함부로 판단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겨 도리어 더 큰 죄책을 자기 위에 끌어들이는 일이 많다. 남의 더러움을 비난하기에 가장 앞장서는 자들이야말로 스스로를 가장 더럽게 하는 자들이다.

III. 이 진리에 대하여 걸림이 일어났고, 그 걸림에 관한 보고가 그리스도께 전해진 것 (마 15:12). "제자들이 그분께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을 아시나이까, 그들이 그러하리라는 것과, 이 일로 주와 주의 교훈을 더욱 나쁘게 여기고 주께 더욱 격분하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지 못하셨나이까?"

1. 바리새인들이 이 명백한 진리에 걸림을 받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류와 적의(敵意), 오해와 악의로 뭉쳐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병든 눈은 밝은 빛을 견디지 못하며, 교만한 강요자들에게 무엇보다 분노를 일으키는 일은, 자기들이 먼저 눈을 가린 뒤 노예로 삼았던 자들의 미혹을 깨뜨려 주는 일이다. 보아하니 전통의 엄격한 준수자였던 바리새인들이, 그 전통을 가르치는 자들인 서기관들보다 더 걸림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손 씻는 일에 무관심함을 가르친 그리스도 교훈의 앞부분 못지않게, 우리의 혀를 다스리는 데 엄격할 것을 가르친 뒷부분에도 그만큼 화가 났을 것이다. 종교의 형식을 위해 크게 다투는 자들은 흔히 그 실질을 그만큼 크게 멸시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2. 제자들은 자기들의 스승이 그토록 큰 걸림이 되리라고 아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분은 본래 그렇게 하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 그것이 얼마나 분노를 자아낼지 헤아리셨더라면 그 말씀을 하시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분은 자기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누구에게 말씀하시는지, 그 결과가 어떠할지를 아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치시려는 바는, 아무래도 좋은 일들에 있어서는 걸림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걸림을 두려워하여 어떤 진리나 의무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진리는 시인되어야 하고 의무는 행해져야 하며, 누군가 걸림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잘못이니, 그것은 주어진 걸림이 아니라 스스로 받은 걸림이다.

아마도 제자들 자신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걸려 넘어졌을 것이니, 그 말씀이 대담하고,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사이에 하나님의 법이 둔 구별과 좀처럼 조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더 잘 가르침을 받고자 이것을 그리스도께 여쭌 것이다. 또한 그들은, 비록 바리새인들과 다투었으나, 그들을 위하여 마음을 쓰는 듯하다. 이는 우리에게, 우리의 원수와 박해자와 비방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유익을, 특히 영적 유익을 구하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어떤 말씀으로 인해 언짢아하며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비록 그 말씀을 거두어 주시기를 청하지는 않으나, 그분이 그것을 설명하고 바로잡고 누그러뜨려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연약한 청중은 때로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악한 청중이 걸림 받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진리를 숨기고 사람들의 오류와 부패를 두둔함으로 그들을 기쁘게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갈 1:10 참조).

IV.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부패한 전통에 내려진 선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걸림을 주신들 개의치 않으신 이유로, 따라서 제자들도 개의치 말아야 할 이유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개혁받기를 미워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으며, 멸망을 위해 표시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그들에 관하여 두 가지를 예언하신다.

1. 그들과 그들의 전통이 뿌리째 뽑힐 것 (마 15:13).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다 뽑힐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부패한 견해와 미신적인 관행뿐 아니라, 그들의 분파와 길과 체제도 하나님께서 심으신 식물이 아니었다. 그들이 표방한 규례는 그분이 정하신 것이 아니라 교만과 형식주의에서 그 기원을 둔 것이었다. 유대 백성은 귀한 포도나무로 심어졌으나(렘 2:21 참조), 이제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로 변질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가 심으신 것이 아니라 하여 내치셨다. 주목하라. (1.) 보이는 교회 안에서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식물을 발견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교회 안의 선한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이 심으신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사 41:19). 그러나 농부가 아무리 조심해도 그 밭은 스스로 더러는 적게 더러는 많게 가라지를 낸다. 그리고 원수가 바삐 가라지를 뿌린다. 부패한 것은, 비록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이라 할지라도 그분이 심으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자기 밭에 좋은 씨만 뿌리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며, 우리 아버지의 동산에서 발견하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우리 아버지께서 심으신 것이라고 속지 말자. 영을 다 믿지 말고 영들을 분별하라(요일 4:1). 렘 19:5, 23:31,32을 보라. (2.) 바리새인의 영, 곧 교만하고 형식적이며 강요하는 영을 가진 자들은, 어떤 모양새를 갖추든,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하나님께서 자기가 심으신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너희가 그들을 알리라(마 7:20). (3.) 하나님께서 심으시지 않은 식물은 그분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틀림없이 뽑힐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면 서지 못한다(행 5:38).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스스로 시들어 죽거나 교회들에 의해 정당하게 배척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큰 날에는 걸림이 되는 이 가라지들이 불사르려고 단으로 묶일 것이다(마 13:30 참조).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전통은 어찌 되었는가? 그것들은 오래전에 버림받았으나, 진리의 복음은 위대하며 길이 남으리라. 그것은 뿌리째 뽑힐 수 없다.

2. 그들의 멸망, 그리고 그들의 인격과 원리를 흠모하던 그들의 추종자들의 멸망 (마 15:14). 여기서,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을 그냥 두라고 명하신다. "그들과 사귀지도 말고 그들을 걱정하지도 말라.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도 말고 그들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들이 걸림 받든지 개의치 말라.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갈 것이니, 그 길의 결말을 그들이 스스로 받게 하라. 그들은 자기 공상에 매여 모든 것을 자기 식대로만 하려 하니, 그냥 두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살전 2:15), 너희 양심에 대한 절대적 지배보다 못한 것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을 한 무리의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 그들은 에브라임처럼 우상과 연합하였으니(호 4:17), 곧 자기 공상의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그냥 두라,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게 두라(계 22:11)." 그리스도께서 자기 일꾼들에게 그냥 두라고 명하시는 그 죄인들의 처지야말로 참으로 비참하다.

(2.) 그분이 그들에게 그에 대한 두 가지 이유를 주신다. 그들을 그냥 두라. 그 이유는,

[1.] 그들은 교만하고 무지하다. 이 두 악한 성질은 흔히 만나며, 사람을 그 어리석음에서 고칠 수 없게 만든다(잠 26:12).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심히 무지하고 신적 율법의 영적 성격에 낯선 자들이면서도, 너무나 교만하여 자기들이 그 누구보다 잘 보고 멀리 본다고 생각하므로, 다른 이들을 인도하는 자가 되겠다고 나서서, 정작 자기들은 그 길을 한 걸음도 알지 못하면서 하늘로 가는 길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 주겠다고 한다. 그러고는 그에 따라 모든 이에게 규정을 내리고, 자기들을 따르지 않으려는 자들을 정죄한다. 그들이 비록 맹인이었으나, 그것을 시인하고 안약을 구하러 그리스도께 나아왔더라면 볼 수 있었으련만, 그들은 그런 암시를 멸시하였으니(요 9:40) 우리도 맹인인가?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맹인의 인도자라고(롬 2:19,20), 그렇게 임명되었고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였으며, 자기들이 하는 모든 말이 신탁이요 법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을 그냥 두라. 그들의 처지는 절망적이다. 그들과 상관하지 말라. 너희가 그들을 격동시키기는 쉬워도 그들을 설득하기는 결코 못한다." 유대 교회의 처지가 이제 얼마나 비참하였던가. 그 인도자들은 맹인이요 어찌나 스스로 지혜로운 체 어리석은지 그 행위에 단호하였고, 백성은 너무나 미련하여 맹목적인 믿음과 순종으로 그들을 따르며 기꺼이 그 명령을 따라 걸었던 것이다(호 5:11). 이제 그 예언이 이루어졌다(사 29:10,14). 그리고 선지자는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말에는 어찌하려는가(렘 5:31)를 미루어 짐작하기 쉽다.

[2.] 그들은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머지않아 그 속에 빠지고 말 것이다.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둘 다 그렇게 눈멀었으면서도 둘 다 그렇게 대담하여, 위험을 알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간다면, 이것이 반드시 그 결말일 수밖에 없다. 둘 다 유대인에게 임할 전반적인 황폐에 휩쓸릴 것이며, 둘 다 영원한 멸망과 파멸에 빠질 것이다. 맹인 된 인도자와 맹인 된 추종자가 함께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계 22:15)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들과, 그것이 지어졌을 때 그것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지옥이 그 몫임을 본다. 속는 자와 속이는 자가 하나님의 심판에 매여 있다(욥 12:16). 주목하라. 첫째로, 교활한 술책으로 다른 이들을 죄와 오류로 이끄는 자들은, 그 온갖 술책과 교활함으로도 자기 자신은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만일 둘이 함께 구덩이에 빠지면, 맹인 된 인도자가 가장 밑에 빠져 가장 큰 화를 당할 것이다(렘 14:15,16 참조). 선지자들이 먼저 망하고, 그 다음에 그들이 예언한 백성이 망하리라(렘 20:6, 27:15,16). 둘째로, 속이는 자의 죄와 멸망이, 그들에게 속은 자들에게 아무런 안전이 되지 못한다. 비록 이 백성의 인도자들이 그들을 그릇 행하게 하였을지라도, 그 인도를 받는 자들도 멸망하나니(사 9:16),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을 빛을 향하여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대다수 사람들이 통념과 관행에 이끌리는 것을 한탄하면서(Unusquisque mavult credere quam judicare — 사람들은 무엇이든 미루어 받아들이고 결코 따져 보지 않는다), 이렇게 결론짓는다. Inde ista tanta coacervatio aliorum super alios ruentium — 이로 인하여 무리 위에 무리가 거대한 혼란 속에 무너져 쌓이는 것이라(『행복한 삶에 관하여(De Vitâ Beatâ)』). 둘이 함께 넘어지는 것이 둘 모두의 넘어짐을 더 무겁게 할 것이니, 이는 서로의 죄를 그렇게 함께 키운 자들은 서로의 멸망을 함께 더 격렬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V.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진리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 (마 15:10). 비록 그리스도께서 배우려 하지 않고 고의로 무지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기꺼이 배우려 하는 무지한 자들은 불쌍히 여기실 수 있으니(히 5:2), 만일 율법을 폐한 바리새인들이 걸림을 받거든 받게 두라. 그러나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이 큰 평안이 있으니, 무엇으로도 그들이 실족하지 아니하며(시 119:165), 어떻게 해서든 그 걸림이 제거될 것이다.

여기에 다음이 있다. 1. 제자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더 잘 가르침 받기를 바란 것 (마 15:15).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이 요청에서도 베드로가 그들의 대변자였다. 짐작건대 나머지가 그를 부추겨 말하게 하였거나, 동의를 표시하였을 것이다.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명백하였으나, 그것이 그들이 받아들인 관념과 일치하지 않았기에, 비록 그것을 반박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그것을 비유라 부르며 깨닫지 못한 것이다. 주목하라. (1.) 약한 깨달음은 명백한 진리를 비유로 바꾸고, 골풀에서 매듭을 찾는 일에 빠지기 쉽다(요 16:17처럼 제자들이 종종 그러하였다). 약한 위장에게는 메뚜기도 짐이 되며, 깨달음에 있어 어린아이는 단단한 음식을 견디고 소화시키지 못한다(히 5:13,14 참조). (2.) 약한 머리가 그리스도의 어떤 말씀에 관하여 의심할 때, 정직한 마음과 기꺼운 뜻은 가르침을 구한다. 바리새인들은 걸림을 받았으나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두었으니, 개혁받기를 미워하였기에 가르침 받기도 미워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비록 걸림을 받았으나 풀이를 구하였으니, 그 걸림을 전해진 교훈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들의 얕은 깨달음의 탓으로 돌렸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연약함과 무지에 대하여 주신 책망 (마 15:16).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고 가르치시는 자마다 이렇게 책망하신다(계 3:19 참조). 주목하라. 도덕적 오염이 의식적(儀式的) 오염보다 훨씬 더 나쁘고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참으로 심히 무지한 자들이다. 두 가지가 그들의 둔함과 어두움을 더 무겁게 한다.

(1.)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였다는 것. "너희도 깨달음이 없느냐? 내가 나와 그토록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큰 특권에 받아들인 너희가, 그렇게도 의의 말씀에 서투르냐?" 주목하라.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의 회원 됨의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무지와 오해는 주 예수께 마땅히 슬픔이 된다. "메시아의 나라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바리새인들이 이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스스로 받아들였으며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기까지 한 너희가, 어찌하여 그 정신과 본질에 대하여 그토록 낯선 자가 되었느냐?"

(2.) 그들이 오랫동안 그리스도의 제자로 있었다는 것. "너희가 그토록 오래 내 가르침 아래 있었거늘, 아직도 그러하냐?" 그들이 그리스도의 학교에 갓 들어온 것이었다면 다른 문제였겠으나, 여러 달 동안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청중으로 있고서도 여전히 깨달음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수치였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누린 시간과 수단에 비례하여 어느 정도의 지식과 은혜와 지혜를 우리에게 기대하신다. 요 14:9, 히 5:12, 딤후 3:7,8을 보라.

3. 그리스도께서 이 오염의 교훈에 관하여 그들에게 주신 풀이. 비록 그분이 그들의 둔함을 꾸짖으셨으나 그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가르치셨으니(눅 24:25-27처럼). 여기서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1.) 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우리가 오염될 위험이 얼마나 적은지 (마 15:17). 무절제한 식욕, 절제하지 못함, 먹는 일의 지나침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더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음식 자체는 바리새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러하지 않다. 우리 음식 속에 있는 찌꺼기와 더러움은, 자연이(아니, 오히려 자연의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에서 정결케 할 길을 마련하셨으니, 그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고, 우리에게는 순수한 양분만이 남는다. 이처럼 우리는 심히 기묘하게 지어졌고 보존되며, 우리 영혼이 생명 가운데 붙들려 있다(시 139:14 참조). 배설하는 기능은 몸의 다른 어떤 기능 못지않게 필요하니, 남거나 해로운 것을 내보내기 위함이다. 이렇게 자연은 복되게도 스스로를 돕고 제 유익을 위해 처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런 까닭에 아무것도 더럽히지 못한다. 우리가 씻지 않은 손으로 먹어 부정한 무엇이 우리 음식에 섞여 들어온다 해도, 자연이 그것을 분리하여 내보낼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더러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청결의 한 측면일 수는 있어도 양심의 문제는 아니며, 우리가 거기에 신앙을 두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리스도께서 정죄하시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마치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께 천거하기라도 하는 양(고전 8:8) 그 위에 세워진 생각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런 준수에 있지 않다.

(2.)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곧 마음에 가득한 것에서 나오는 것으로 우리가 오염될 위험이 얼마나 큰지 (마 15:18). 마 12:34과 비교하라. 하나님의 후하심의 산물에는 더러움이 없으며, 더러움은 우리 부패의 산물에서 나온다. 이제 여기에 다음이 있다.

[1.] 입에서 나오는 것의 부패한 근원. 그것은 마음에서 나오니, 마음은 모든 죄의 샘이요 원천이다(렘 8:7 참조). 마음이야말로 심히 부패한 것이며(렘 17:9), 말이나 행위 가운데 있는 죄로서 먼저 마음에 있지 않았던 것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쓴 뿌리가 있어 독초와 쑥을 낸다(신 29:18 참조). 죄인의 속이 곧 심한 악이다(시 5:9). 모든 악한 말은 마음에서 나오며 더럽게 하는 것이니, 부패한 마음에서 부패한 말이 나온다.

[2.] 이 샘에서 흘러나오는 부패한 줄기들 가운데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든 것. 그것들이 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요, 마음속에 있고 거기서 빚어지는 악의 열매들이다(시 58:2 참조).

첫째, 악한 생각. 모든 계명을 거스르는 죄다. 그러므로 다윗이 허탄한 생각을 율법 전체와 대조하여 놓았다(시 119:113). 이것들은 부패한 본성의 맏아들이요 그 힘의 시작이며, 그 본성을 가장 닮은 것이다. 이것들은 아들이요 상속자로서 집에 거하며 우리 안에 머문다.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에서 끝나고 그 너머로는 나아가지 않는 죄가 적지 않다. 육신의 공상과 상상은 악한 생각이요, 계획 속의 악함이며(디알로기스모이 포네로이, διαλογισμοὶ πονηροί),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려는 악한 음모와 의도와 궤계다(미 2:1).

둘째, 살인. 제육계명을 거스르는 죄다. 이것은 우리 형제의 생명을 향한 마음의 악의에서, 혹은 그 생명을 멸시함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 일컬어지니(요일 3:15),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러하다. 전쟁이 마음에 있다(시 55:21, 약 4:1 참조).

셋째, 간음과 음란. 제칠계명을 거스르는 죄다. 이것은 음탕하고 부정하며 육적인 마음에서 나오며, 거기서 다스리는 정욕이 거기서 잉태되어 이런 죄들을 낳는다(약 1:15). 먼저 마음에 간음이 있고 그 다음에 행위에 있다(마 5:28).

넷째, 도둑질. 제팔계명을 거스르는 죄다. 속임수, 부당함, 약탈, 그리고 모든 해로운 계약이다. 이 모든 것의 샘은 마음에 있으니, 마음이야말로 탐욕에 익숙해진 것이며(벧후 2:14), 재물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시 62:10). 아간이 탐내고서 취하였다(수 7:20,21).

다섯째, 거짓 증언. 제구계명을 거스르는 죄다. 이것은 거짓과 탐욕, 혹은 거짓과 악의가 마음속에서 얽혀 나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중심에 요구하시는 진실과 거룩과 사랑이 마땅히 다스려야 할 대로 다스린다면, 거짓 증언이 없을 것이다(시 64:6, 렘 9:8 참조).

여섯째, 비방. 곧 제삼계명을 거슬러 하나님을 모독하여 말하는 것이요, 제구계명을 거슬러 우리 이웃을 비방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속에서 그 둘을 멸시하고 가벼이 여김에서 나오니, 거기서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이 나온다(마 12:31,32). 이것들은 속에 있는 독즙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이제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마 15:20). 주목하라. 죄는 영혼을 더럽혀, 순결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에 사랑스럽지 못하고 가증하게 만들며, 그분과의 교제에 부적합하게 만들고, 더럽게 하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자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못하는 새 예루살렘에서 그분을 누리기에 부적합하게 만든다(계 21:27 참조). 마음과 양심이 죄로 더럽혀지며, 그것이 다른 모든 것을 더럽게 만든다(딛 1:15). 죄로 인한 이 더럽혀짐은 유대의 학자들이 거기에 덧붙이기는 하였으나 깨닫지는 못한 의식적(儀式的) 오염으로 표상되었다. 히 9:13,14, 요일 1:7을 보라.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우리가 조심하여 피해야 할 것들이며, 그것에 가까이 가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할 것들이지, 손 씻는 일에 무게를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음식의 구별에 관한 율법을 아직 폐하시지는 않으나(그것은 행 10:9-16에 이르러서야 행해졌다), 그 율법에 덧붙여진 장로들의 전통은 폐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이 결론지으시되 (지금 문제가 된 바인)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 이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사람이 씻는다 하여 하나님 앞에서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요, 씻지 않는다 하여 더 나빠지는 것도 아니다.

마태복음 15장 21-28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The Canaanite's Daughter Hea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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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다

²¹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라.
²²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방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²³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²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²⁵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²⁶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²⁷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²⁸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각으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가나안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그 유명한 이야기를 보게 된다. 이 이야기에는 무언가 독특하고 매우 놀라운 점이 있는데, 그것은 가련한 이방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모습이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예비해 두신 자비의 보증이 된다. 여기에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될 그 빛의 한 줄기가 비쳐 든다(눅 2:32).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시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도리어 그들 중 많은 이가 그를 시비하고 그를 인하여 실족하였다. 이제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마 15:21).

I.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시니라. 주목하라. 빛을 가지고 장난하거나 빛을 거스르는 자들에게서는 그 빛이 거두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그들 가운데서 평안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그들을 떠나셨다. 그리하여 친히 자기 규례(마 10:14)의 본을 남기셨으니, 곧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오래 참으시나, 죄인들이 자기를 거역하는 것을 언제까지나 참으시지는 않는다. 그는 이미 (마 15:14에서) 그냥 두라고 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 주목하라. 복음에 대한 고의적인 편견과 복음을 향한 트집은 종종 그리스도로 하여금 물러가시게 하고 그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시게 한다(행 13:46, 51).

II. 그는 거기서 나가실 때에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렇다고 그 두 성으로 들어가신 것은 아니다(그 성들은 그리스도의 능하신 일에 참여할 몫에서 제외되었다, 마 11:21, 22). 다만 그쪽 방향에 있는 이스라엘 땅의 그 지역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가 그리로 가신 것은, 엘리야가 시돈 땅에 속한 사렙다로 간 것과 같으며(눅 4:26), 그가 자비를 예비해 두신 이 가련한 여인을 찾으시려고 그리로 가신 것이다. 그는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셨으니, 결코 자기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가장 멀리 떨어진 그 땅의 어두운 구석들도 그의 은혜로운 영향력의 몫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는 그 땅의 끝들이 그러하였으나, 후에는 땅의 끝들이 그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사 49:6). 이 기적이 일어난 곳이 바로 여기였으니,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가나안 여인이 그리스도께 나아온 일(마 15:22). 그 여인은 이방인이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며, 아마도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지로다라는 그 말씀으로 정죄된 그 저주받은 민족들의 후손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주목하라. 한 정치적 공동체에 내려진 심판이 그 안의 모든 개별 구성원에게 항상 미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자기 남은 자를 두실 것이며, 가장 가망 없어 보이는 곳을 포함하여 모든 지방에서 택한 그릇들을 두실 것이다. 그 여인이 바로 그 지방에서 나아왔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때 이 지방을 방문하지 않으셨더라면, 비록 그 자비가 먼 길을 마다하지 않을 만한 가치가 있었을지라도, 아마 그 여인은 결코 그에게 나아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를 아는 기회가 우리 문 앞에까지 이르고, 그 말씀이 우리 가까이에 있게 되는 것은, 잠들어 있는 믿음과 열심을 일깨우는 자극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여인의 간구는 매우 간절하였다. 그녀는 진정으로 절박한 사람처럼 그리스도께 소리 질렀다. 그녀가 소리 지른 것은, 그에게서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니, 가나안 사람으로서 행여 불쾌함을 줄까 하여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녀의 간구 속에서,

(1.) 그녀는 자신의 비참함을 아뢴다.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카코스 다이모니제타이(kakos daimonizetai)—그녀가 심하게 마귀의 부림을 받거나 또는 사로잡혀 있다는 말이다. 그 비참함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는데, 이것은 가장 심한 종류였다. 그것은 그 당시에 흔한 일이었으며, 또한 매우 처참한 일이었다. 주목하라. 자녀의 고통은 부모의 괴로움이 되며, 자녀가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것보다 더한 괴로움은 없어야 한다. 자애로운 부모는 자기 자신의 일부인 자녀들의 비참함을 매우 절실히 느낀다. "비록 마귀에게 시달릴지라도,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내 딸이다." 우리 가족에게 닥치는 가장 큰 고난도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면제해 주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이 그들을 향한 우리의 애정을 멀어지게 해서도 안 된다. 이제 그녀를 그리스도께로 데려온 것은 그녀 가정의 곤경과 괴로움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나아온 것은 가르침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고침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믿음으로 나아왔기에, 그는 그녀를 물리치지 않으셨다. 비록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몰아가는 것이 곤경일지라도, 그렇다고 우리가 그에게서 쫓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녀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만든 계기는 그녀 딸의 고난이었다. 다른 이들의 고난을, 우리가 그것을 개선과 유익으로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하여, 먼저 우리의 인식과 동정 속에서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은 좋은 일이다.

(2.) 그녀는 자비를 구한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녀는 그가 메시아이심을 시인한다. 그것이야말로 믿음이 굳게 붙들어야 하며 또한 거기서 위로를 길어 올려야 할 중대한 것이다. *주(主)*께로부터 우리는 능력의 행위들을 기대할 수 있으니, 그는 구원을 명령하실 수 있다. 다윗의 자손께로부터 우리는 그에 관하여 예언된 모든 자비와 은혜를 기대할 수 있다.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그녀는 유대인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과 다윗의 집의 영광을 시인한다. 이방인들은 기독교를 자연 종교의 진보로서뿐만 아니라 유대 종교의 완성으로서, 구약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녀의 간구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이런저런 특정한 자비의 사례에 한정하지 않고, 다만 자비를, 곧 자비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자비에 의지한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녀에게 베푸는 자비는 부모에게 베푸는 자비이며, 우리 것에 베푸는 은혜는 우리에게 베푸는 은혜이니, 마땅히 그렇게 여겨야 한다. 주목하라. 부모가 자기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그들을 위하여 특히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이다. "내게 한 아들이, 한 딸이 있는데, 교만한 의지, 더러운 마귀, 악의에 찬 마귀에게 흉악하게 시달리며 그에게 사로잡혀 그 뜻대로 끌려다니나이다. 주여, 그들을 도우소서." 이것은 육신이 귀신 들린 경우보다 더 통탄할 만한 일이다. 그들을 믿음과 기도로 그리스도께 데려가라. 오직 그만이 그들을 능히 고치실 수 있다. 부모는 자기 자녀의 영혼 속에서 사탄의 권세가 깨어지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임한 큰 자비로 여겨야 한다.

2. 이렇게 나아간 그녀가 만난 낙담거리.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모든 이야기 가운데서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만나지 못한다. 그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를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시며, 그들이 부르기 전에 응답하시거나, 그들이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들으시는 분이셨다. 그런데 여기 한 사람은 다르게 대우받았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1.)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에게 유대인에게처럼 그렇게 거리낌 없이 또 선뜻 호의를 베푸심으로써 유대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시려고, 이 가련한 여인을 만족시켜 주시기를 짐짓 더디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라고 명하셨고(마 10:5), 그러므로 친히도 다른 이들에게처럼 그들에게 그렇게 기울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서먹하게 대하려 하신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2.)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이렇게 대하신 것은 그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아시며, 그녀의 믿음의 강함을, 또한 그녀가 그의 은혜로 이런 낙담거리들을 능히 뚫고 나아갈 수 있음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녀 믿음의 시련이 칭찬과 존귀와 영광이 되게 하시려고(벧전 1:6, 7) 이러한 낙담거리들로 그녀를 맞으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창 22:1)과 같으며, 천사가 야곱과 씨름한 것, 곧 야곱으로 하여금 씨름하게 하시려고 그리하신 것(창 32:24)과 같다. 그리스도의 섭리의, 그리고 특히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그 은혜의 여러 방식 가운데 어둡고 당혹스러운 것들이 많은데, 이는 이 이야기의 열쇠로 풀어낼 수 있다. 이 이야기가 그 목적을 위하여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니, 곧 그의 얼굴 속에 사랑이 있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며, 따라서 그가 우리를 죽이실지라도 우리가 그를 의뢰하도록 우리를 격려하기 위함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낙담거리들을 주목해 보라.

[1.] 그녀가 그의 뒤에서 소리 질렀을 때, 그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다(마 15:23). 그의 귀는 늘 가련한 간구자들의 부르짖음에 열려 있고 기울어져 있었으며, 송이꿀처럼 떨어지는 그의 입술은 언제나 평안의 응답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가련한 여인에게는 귀를 막으셨으니, 그녀는 구제도 응답도 얻지 못하였다. 그녀가 분을 내며 떠나 버리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분이 그토록 인자와 자비로 이름난 그분이란 말인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토록 많은 이가 그에게서 들으심과 응답을 받았건만, 나만 거절당한 첫 간구자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가 그토록 많은 이에게 몸을 굽히셨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찌하여 내게만은 이토록 멀리하시는가?"라고 그녀가 말할 법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무엇을 하시는지 아셨으며, 그러므로 그녀로 하여금 기도에 더욱 간절하게 하시려고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는 그녀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그녀를 기뻐하셨으며, 비록 그녀가 기대한 응답을 즉시 주지는 않으셨으나, 그녀의 간구를 계속 이어가도록 그녀의 영혼에 힘을 주어 강하게 하셨다(시 138:3, 욥 23:6). 구하는 자비를 그녀에게서 거두어 가시는 듯이 함으로써, 그는 그녀를 그 자비를 위하여 더욱더 간절히 매달리도록 이끄셨다. 주목하라. 받아들여진 기도가 모두 즉시 응답된 기도인 것은 아니다. 때로 하나님은, 잠든 사람이나 놀란 사람처럼, 자기 백성의 기도를 돌아보지 않으시는 듯하고(시 44:23, 렘 14:9, 시 22:1, 2), 도리어 그들에게 노하시는 듯하다(시 80:4, 애 3:8, 44).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단련하여 그리하여 더 낫게 하시려는 것이며, 그들을 위한 그의 나중의 나타나심을 그 자신에게는 더욱 영광스럽게, 그들에게는 더욱 반가운 것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는 그 묵시가 마침내 말할 것이요 거짓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합 2:3). 욥 35:14을 보라.

[2.] 제자들이 그녀를 위하여 좋은 말로 거들었을 때, 그는 그녀를 물리치는 이유를 대셨는데, 그 이유는 더욱더 낙담스러운 것이었다.

첫째, 제자들이 그녀를 위하여 끼어든 것은 그래도 약간의 위안이 되었다. 그들은 그를 보내소서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이다라고 말하였다. 선한 자들의 기도 속에 우리 몫이 들어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며, 우리는 그것을 사모해야 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비록 그녀가 자기가 구하러 온 것을 얻기를 바라기는 하였으나, 그 일에서 그 가련한 여인의 만족보다는 오히려 자기들의 편안함을 더 헤아렸다. "그녀를 고쳐서 보내소서.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진심으로 매달리나이다. 그녀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성가시게 하고 우리를 부끄럽게 하나이다." 끊임없는 간절함은 사람에게, 심지어 선한 사람에게도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향하여 부르짖는 것을 기뻐하신다.

둘째, 제자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대답은 그녀의 기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너희도 그것을 알지 않느냐. 그녀는 그들 중 하나가 아닌데, 너희는 내가 내 사명을 넘어서기를 바라느냐?" 간절함이 지혜로운 자의 확고한 이성을 정복하는 일은 좀처럼 없으며, 또한 그렇게 뒷받침된 거절이야말로 가장 입을 막는 거절이다. 그는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거슬러 논증하시며 한 가지 이유로 그녀의 입을 막으셨다. 사실 그녀는 잃어버린 양이며 누구 못지않게 그의 돌보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처음에 보내심을 받은 대상인 이스라엘 집에 속한 자가 아니며(행 3:26), 따라서 거기에 직접적으로 관련되거나 그것에 대한 자격을 가진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할례의 수종자이셨다(롬 15:8). 비록 그가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되시기로 정해져 있었으나, 그것을 위한 때가 찬 것이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고, 휘장이 아직 찢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중간에 막힌 담이 아직 헐리지 아니하였다. 그리스도의 친히 하신 사역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들 중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주목하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은 그 대상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의심할 빌미가 주어질 때, 그것은 큰 시련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러한 의심의 여지는 남아 있지 않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은 사라졌다. 우리는 그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것을 확실히 안다. 만일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어찌 나를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 그녀가 간절함을 계속하자, 그는 그 일 자체가 합당하지 않음을 주장하시며, 그녀에게 단순한 거절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책망까지도 주셨다(마 15:26).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그녀를 모든 소망에서 끊어 버리는 듯하며, 그녀가 참으로 매우 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더라면, 그녀를 절망으로 몰아넣었을 수도 있었다. 복음의 은혜와 (그에 딸린) 기적적인 고침은 자녀의 떡이었으니, 그것들은 양자 됨의 명분이 속한(롬 9:4) 자들에게 속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자기 길로 가게 버려 두신 이방인들에게 주신 저 하늘로부터의 비와 결실 맺는 계절과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행 14:16, 17). 그렇지 않다. 이것들은 특별한 은혜로서, 그 특별한 백성에게, 곧 그 닫힌 동산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전도하셨으나(요 4:41), 그가 그들 가운데서 어떤 고침을 행하셨다는 기록은 없으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그러므로 이것들을 [이방인에게] 양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큰 멸시의 대상이었으니, 개들이라 불리고 또 그렇게 여겨졌다. 그리고 그토록 존귀하고 특권을 누리던 이스라엘 집과 견주어,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그것을 인정하시는 듯하며, 따라서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베풀어진 은혜를 함께 누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기시는 듯하다. 그러나 형세가 어떻게 뒤바뀌는지 보라. 이방인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 후에는, 율법을 위하여 열심을 내던 유대인들이 개들이라 불린다(빌 3:2).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이 가나안 여인에게 이것을 강조하신다. "그 가족에 속하지도 않은 그녀가 어찌 자녀의 떡을 먹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 주목하라. 1. 그리스도께서 가장 두드러지게 존귀하게 하시려는 자들을, 그는 먼저 낮추시고 자기 자신의 비천함과 합당치 못함을 깨닫는 자리에 두신다. 우리가 그러한 은혜로 존귀해지고 특권을 누리기에 합당해지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개와 같으며 하나님의 모든 자비를 받기에 지극히 작은 자임을 보아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큰 믿음을 큰 시련으로 단련하기를 기뻐하시며, 때로는 가장 혹독한 시련을 맨 나중을 위하여 남겨 두시니, 이는 단련을 받아 우리가 금같이 나오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일반 원칙은 여기서는 오직 시험을 위하여 사용되었으나, 다른 경우들에도 지침으로 적용될 수 있다. 특별한 규례와 교회의 특권은 자녀의 떡이니, 심히 무지하고 불경한 자들에게 함부로 내주어서는 안 된다. 보편적인 자선은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져야 하지만, 영적인 존귀함은 믿음의 권속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차별 없이 무분별하게 그것에 받아들이는 것은 자녀의 떡을 낭비하는 일이며,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마 7:6) 일이다. 프로쿨 힌크, 프로쿨 인데, 프로파니(Procul hinc, procul inde, profani)—속된 자들아, 물러가라.

3. 여기에 이 모든 낙담거리를 뚫고 나아가는 그녀의 믿음과 결단의 강함이 있다. 이렇게 시험을 받았다면 많은 이가 침묵 속으로 가라앉거나 격분을 터뜨렸을 것이다. "가련한 곤경에 처한 자에게 이 무슨 냉랭한 위로란 말인가. 이렇게 조롱당하고 이런 식으로 모욕당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 머물러 있는 편이 나았겠다. 가련한 처지가 무시당했을 뿐만 아니라 개라고까지 불리다니!"라고 그녀가 말할 법도 하였다. 교만하고 겸손해지지 않은 마음이라면 그것을 견디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집의 명성이 당시 세상에서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기에, 이방인에게 가해진 이 모욕은, 만일 이 가련한 여인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되받아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비난거리가 될 수도 있었고, 그녀가 그에 대하여 품었던 좋은 생각에 충격을 주는 것은 물론, 그의 명성에 흠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우리가 직접 겪은 대로 판단하기 쉽고,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는 모습 그대로 그들의 됨됨이라고 여기기 쉽기 때문이다. "이분이 다윗의 자손이란 말인가?"라고 그녀가 말할 법도 하였다. "이분이 친절과 인자와 긍휼로 그토록 이름난 그분이란 말인가? 나는 그에게 그런 평판을 줄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하겠다. 내 평생 이렇게 거칠게 대접받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하신 만큼 나에게도 해 주실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굳이 나를 자기 양 떼의 개들과 함께 둘 필요는 없지 않았는가. 나는 개가 아니라 여인이며, 정직한 여인이며, 비참함에 처한 여인이다. 그러니 나를 개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 마땅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이런 말이 한마디도 없다. 주목하라.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하는 겸손하고 믿는 영혼은 그가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을 선하게 받아들이며, 거기에 가장 좋은 뜻을 부여한다.

그녀는 이 모든 낙담거리를 뚫고 나아간다.

(1.) 자기 간구를 계속 밀고 나가는 거룩한 열망의 간절함으로써. 이것은 앞서의 거절이 있은 뒤에 나타났다(마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1.] 그녀는 계속 기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제자들을 잠잠하게 하였으니, 그들에 관하여는 더 이상 들려오는 바가 없다. 그들은 그 대답을 받아들였으나, 그 여인은 그러지 않았다. 주목하라. 우리가 그 짐을 더욱 절실히 느낄수록, 우리는 그것이 제거되기를 더욱 굳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에 항상 힘쓰며,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2.] 그녀는 기도에 더 나아졌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비난하거나 그가 무정하다고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자신을 의심하며 허물을 자기에게 돌리는 듯하다. 그녀는 처음 간구할 때에 자기가 충분히 겸손하고 경건하지 못하였을까 염려하여, 이제 나아와 그에게 절하며 전보다 더 큰 존경을 표하였다. 또는 자기가 충분히 간절하지 못하였을까 염려하여, 이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부르짖었다. 주목하라. 기도의 응답이 미루어질 때, 하나님은 그것으로써 우리가 더 많이, 더 잘 기도하도록 가르치신다. 그때야말로 우리가 이전의 기도에서 어디가 부족하였는지를 살피어, 잘못된 점을 장차 바로잡을 때이다. 기도의 응답에서 겪는 좌절은 마땅히 기도의 의무를 향한 자극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고난당하실 때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3.] 그녀는 자기가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은 그 대상에 속한 자인지 아닌지의 문제를 제쳐 둔다. 그녀는, 비록 자기가 이스라엘 집과 어떤 친족 관계를 주장할 수 있었을지라도, 그 문제를 그와 더불어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스라엘 사람이든 아니든, 나는 다윗의 자손께 자비를 구하러 왔으니, 그가 내게 복을 주시지 아니하면 그를 보내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한다. 많은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이스라엘 집에 속하였는지 아닌지, 곧 자기의 택하심에 관하여 의문과 의심으로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 그런 자들은 차라리 하나님께 가져갈 자기 용무에 마음을 두고,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기도에 항상 힘쓰며,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발 앞에 자기를 던지고, 내가 망할지라도 여기서 망하겠나이다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그리하면 그 문제는 차차 저절로 밝혀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불신앙을 이성으로 굴복시킬 수 없거든, 기도로 그것을 굴복시키자. 간절하고 애정 어린 주여 저를 도우소서는, 때로 우리를 짓누르고 압도하려는 그 많은 낙담거리를 헤쳐 나가도록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4.] 그녀의 기도는 매우 짧지만, 포괄적이고 또 간절하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것을 이렇게 받아들이라. 첫째, 자기 처지를 탄식하는 것으로. "만일 메시아가 오직 이스라엘 집에만 보내심을 받았다면, 주여 저를 도우소서, 나와 내 식구는 어찌 되겠나이까." 주목하라. 상한 마음이 자기 자신을 두고 탄식하는 것은 헛되지 않으니, 그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돌아보신다(렘 31:18). 또는, 둘째, 이 시험의 때에 자기를 도울 은혜를 구하는 것으로. 그녀는 이렇게 인상을 찌푸리는 듯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자기 믿음을 붙들고 있기가 어려운 것을 알았고, 그러므로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이제 내 믿음을 강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는 동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소서"라고 기도한다(시 63:8). 또는, 셋째, 자기의 처음 간구를 더욱 강력히 밀어붙이는 것으로.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내가 구하러 온 것을 내게 주소서." 그녀는, 비록 자기가 이스라엘 집에 속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능히 또 기꺼이 도우실 수 있음을 믿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자기 간구를 포기하였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생각을 굳게 지키며, 자기가 붙든 것을 놓지 않으려 한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는, 합당하게 올려진다면 좋은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한낱 입버릇이 되어 버리고, 우리가 그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2.) 매우 놀라운 한 가지 논거를 제시하는 거룩한 믿음의 슬기로움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을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의 상에 둘린 어린 감람나무 같이(시 128:3) 두셨고, 이방인을 개들과 함께, 상 아래에 두셨다. 그런데 그녀는 그 비유의 적절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어떤 말씀이든, 그것이 아무리 우리를 모질게 짓누른다 하더라도, 그것을 거역하여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 가련한 여인은 그것을 반박할 수 없었기에, 그것을 최선으로 활용하기로 결심한다(마 15:27).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자, 여기서,

[1.] 그녀의 시인은 매우 겸손하였다. 주여 옳소이다. 주목하라. 그대가 겸손히 믿는 자에 대하여 아무리 천하고 가볍게 말한다 할지라도, 그는 자기 자신을 그만큼 천하고 가볍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고 폄하하는 척하면서도, 막상 다른 이들이 그렇게 하면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바르게 겸손해진 사람은 가장 자기를 낮추는 책망에도 동의하며, 그것을 모욕하는 책망이라고 일컫지 않는다. "주여 옳소이다. 내가 그것을 부인할 수 없나이다. 나는 개이며, 자녀의 떡에 대한 권리가 없나이다." 다윗은, "네가 어리석게, 심히 어리석게 행하였도다"라는 말에, 주여 옳소이다라고 하였다. 아삽은, "네가 하나님 앞에 짐승 같았도다"라는 말에, 주여 옳소이다라고 하였다. 아굴은, "네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짐승 같도다"라는 말에, 주여 옳소이다라고 하였다. 바울은, "네가 죄인 중의 괴수였으며,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으며,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도다"라는 말에, 주여 옳소이다라고 하였다.

[2.] 그녀가 이것을 한 가지 논거로 발전시킨 것은 매우 독창적이었다.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녀가 한낱 모욕처럼 보이는 그 말에서 논증의 재료를 분별해 낸 것은, 남다른 명민함과 영적인 기민함과 슬기로움에 의한 것이었다. 주목하라. 생기 있고 활동적인 믿음은, 우리에게 불리해 보이는 것을 도리어 우리에게 유리하게 만들 것이며, 먹는 자에게서 먹을 것을,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을 얻어 낼 것이다. 불신앙은 원군(援軍)을 적군으로 오인하기 쉽고, 위로가 되는 전제에서조차 암담한 결론을 끌어내기 쉽다(삿 13:22, 23). 그러나 믿음은 낙담스러운 것에서조차 격려를 찾아낼 수 있고, 자기를 밀쳐 내려고 뻗은 그 손을 붙잡음으로써 도리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명철하게 되는 것(사 11:3)은 이토록 좋은 일이다.

그녀의 논거는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이다. 사실 가득하고 정규적인 양식은 오직 자녀들만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지만, 작고 우연히 떨어진, 거들떠보지도 않는 부스러기는 개들에게도 허용되며, 또한 아까워하지도 않는 것이다. 곧 상 아래에서 그것을 바라며 거기 시중드는 그 개들에게 말이다. "우리 가련한 이방인은 다윗의 자손의 정해진 사역과 기적을 기대할 수 없으니, 그것은 유대인에게 속한 것이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 양식에 싫증을 내고 그것을 가지고 장난하기 시작하여, 그것을 흠잡고 부스러뜨리나이다. 그러하다면 분명 그 떼어진 음식 가운데 얼마는 가련한 이방인에게도 떨어질 수 있을 것이옵니다. 나는 지나가는 길에 한 번의 고침을 구하오니, 그것은 비록 같은 그 귀한 떡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한낱 부스러기에 불과하며, 그들이 가진 통째의 떡에 비하면 작고 보잘것없는 한 조각일 뿐이나이다." 주목하라. 우리가 자녀의 떡에 물려 싫증 낼 지경이 될 때, 그 부스러기라도 기뻐할 자가 얼마나 많은지를 기억해야 한다. 영적 특권에서 우리가 떼어 내고 남긴 음식이, 많은 영혼에게는 잔치가 될 것이다(행 13:42). 여기서 주목하라.

첫째, 그녀의 겸손과 궁핍이 그녀로 하여금 부스러기라도 기뻐하게 하였다. 자기가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아는 자들은 무엇이든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 가운데 가장 작은 것보다도 더 작은 자로 볼 그때에, 우리는 그의 가장 큰 자비를 받을 준비가 된다. 그리스도의 가장 작은 것이, 곧 생명의 떡의 부스러기에 불과한 것조차도, 믿는 자에게는 귀한 것이다.

둘째, 그녀의 믿음은 이 부스러기를 기대하도록 그녀를 격려하였다. 큰 사람의 집에서 개들이 자녀들 못지않게 확실히 먹이를 받는 것처럼, 어찌 그리스도의 상에서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주목하라. 그녀는 그것을 그들의 주인의 상이라 부른다. 비록 그녀가 개일지라도, 그녀는 그의 개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아무리 미천한 관계에 서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나쁠 것은 없다. "비록 자녀라 일컬음 받기에 합당하지 아니할지라도,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아니, 그보다도 차라리 나를 개들과 함께 앉히실지언정 이 집에서 쫓아내지는 마소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할 뿐 아니라 남는도다"(눅 15:17~19).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집 문지방에 누울지라도, 그의 집에 눕는 것은 좋은 일이다.

4. 이 모든 일의 복된 결말과 성공. 그녀는 이 씨름에서 명예와 위로를 안고 떠났다. 그리고 비록 가나안 사람이었으나, 왕족처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참된 이스라엘의 딸임을 입증하였다. 이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서 자기 얼굴을 숨기셨으나, 이제는 영원한 자비로 그녀를 모으신다(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이것은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린 것, 곧 나는 요셉이라고 한 것과 같다. 여기서도 사실상 나는 예수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그는 자기다운 모습으로 말씀하기 시작하시며, 자기 본래의 얼굴을 띠신다. 그는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실 것이다.

(1.) 그는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주목하라. [1.] 그가 칭찬하신 것은 그녀의 믿음이다. 이 일을 처리하는 그녀의 행실 가운데 환히 빛난 다른 여러 은혜들이 있었으니—지혜, 겸손, 온유, 인내, 기도의 끈기—그러나 이것들은 그녀의 믿음의 산물이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믿음을 가장 칭찬할 만한 것으로 붙드셨다. 모든 은혜 가운데 믿음이 그리스도를 가장 영화롭게 하므로, 모든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가장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2.] 그것은 그녀의 믿음의 큼이다. 주목하라. 첫째, 비록 모든 성도의 믿음이 다 똑같이 보배로우나, 모두 똑같이 강한 것은 아니다. 모든 믿는 자가 다 같은 크기와 분량의 것은 아니다. 둘째, 믿음의 큼은, 낙담거리들을 마주하여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구주로서 단호히 붙드는 데에, 곧 그가 우리를 향하여 마치 원수처럼 나오시는 듯할 때에도 그를 친구로서 사랑하고 의뢰하는 데에 크게 달려 있다. 이것이 큰 믿음이다! 셋째, 비록 연약한 믿음일지라도 참된 것이면 버림받지 않겠으나, 큰 믿음은 칭찬을 받을 것이며 그리스도께 크게 기쁨이 됨이 드러날 것이다. 이는 그렇게 믿는 자들 속에서 그가 가장 놀랍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는데, 그 또한 이방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하여 강한 믿음을 가졌고, 이 여인은 그리스도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 강한 믿음을 가졌으니, 둘 다 받으심직한 것이었다.

(2.) 그는 그녀의 딸을 고치셨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내가 네게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으니, 네가 구하러 온 것을 가지라." 주목하라. 큰 믿음을 가진 자들은 구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 우리의 뜻이 그리스도의 계명의 뜻에 부합할 때, 그의 뜻은 우리 소원의 뜻과 합치한다. 그리스도께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비록 한동안은 그가 자기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기시는 듯할지라도, 마침내 그가 그들에게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으심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네 죄가 사함받기를, 네 부패가 죽임당하기를, 네 본성이 성화되기를 원하느냐.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러니 네가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우리가 이 가련한 여인이 한 것처럼 사탄과 그의 나라를 대적하여 기도하러 나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와 합하게 되며,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비록 사탄이 베드로를 까부르고 바울을 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기도와 그의 은혜의 충족하심을 통하여, 우리는 넉넉히 이기느니라(눅 22:31, 32, 고후 12:7~9, 롬 16:20).

그 결과는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되었다. 그 시각으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때부터 다시는 마귀에게 시달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믿음이 딸의 고침을 위하여 효력을 발하였다. 비록 환자가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효력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하였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도다.

마태복음 15장 29-39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Four Thousand Men F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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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명을 먹이심

²⁹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³⁰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그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³¹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³²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³³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³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³⁵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³⁶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³⁷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³⁸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³⁹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

여기에는, I. 그리스도의 병 고치심에 대한 전반적인 기록, 곧 그가 도매로 병을 고치셨다는 사실이 있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선하심을 보여 주는 표징들은 결코 모자라거나 인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안에 넘쳐흐르는 충만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살펴보라.

1. 이 병 고치심이 행해진 장소이니, 그곳은 갈릴리 호숫가로서 그리스도께서 자주 다니시던 지방의 한 부분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행하신 일로는, 가나안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읽지 못하니, 마치 그가 오로지 그 일을 염두에 두시고 일부러 그 길을 가신 것 같다. 사역자들은 비록 소수의 사람에게라도 선을 행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지어다. 영혼의 가치를 아는 자라면, 한 영혼이라도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받도록 돕기 위하여 먼 길도 마다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셨다. 상 아래로 부스러기 하나를 떨어뜨리신 뒤에, 그는 여기서 자녀들을 위하여 온전한 잔치를 베풀고자 돌아오신다. 우리가 한 사람을 위하여 이따금 할 수 있는 일이라도, 그것을 끊임없는 관행으로 삼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두로와 시돈 지경에 발을 들이셨으나, 갈릴리 호숫가에 앉으시되 (마 15:29), 위엄 있는 보좌나 재판석에 앉으신 것이 아니라 산 위에 앉으셨으니, 육신의 날 동안 그의 가장 엄숙한 나타나심조차 이토록 비천하고 소박하였도다! 그가 산 위에 앉으신 것은 모든 사람이 그를 보고 자유로이 그에게 나아오게 하려 하심이니, 이는 그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거기에 앉으신 것은 여행에 지쳐 잠시 쉬기를 원하는 자처럼이거나, 아니 그보다는 은혜를 베풀고자 기다리시는 자처럼이었다. 그는 환자들을 기다리며 앉으셨으니, 마치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서 나그네들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던 것 같았다. 그는 이 선한 일에 마음을 다하셨다.

2. 그가 고치신 무리들과 그 병들 (마 15:30). 큰 무리가 그에게 나아왔으니,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라, 백성이 그에게로 모이리로다 (창 49:10). 만일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육체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로 몰려들 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고통과 질병은 곧 느끼나, 자기 영혼과 그 영적 질병을 염려하는 자는 적도다.

이제, (1.) 그리스도의 선하심이 어찌나 크셨던지, 그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받아들이셨으니, 부자뿐 아니라 가난한 자도 그리스도께 환영을 받으며, 그에게는 오는 모든 자를 위한 자리가 넉넉하다. 그는 자기를 찾는 자들의 무리나 인파를 결코 불평하지 아니하셨고, 이른바 천한 무리인 평민들을 멸시의 눈으로 보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농부들의 영혼도 그에게는 군왕들의 영혼만큼이나 귀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능력이 어찌나 크셨던지, 그는 모든 종류의 병을 고치셨다. 그에게 나아온 자들은 병든 친척과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혔다 (마 15:30). 우리는 그들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하였다는 기록은 읽지 못하나, 그들은 불쌍히 여길 만한 대상으로서 그가 돌아보아 주시도록 그 앞에 그들을 내려놓았다. 그들의 재난은 가장 능변인 웅변가의 혀보다 더 그들을 위하여 호소하였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근심을 토로하였으니 그것으로 족하였고,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 맡겼다 (시 142:2).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 평안과 구제를 얻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내려놓고, 그 앞에 펼쳐 놓아 그의 판단에 맡기며, 그런 다음 그에게 복종하여 그의 처분에 의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영적 치유를 받고자 하는 자들은,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다스림과 처분을 받도록 그의 발 앞에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여기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장애인과 기타 여럿이 그리스도께 데려와졌다. 죄가 어떤 일을 저질러 놓았는지 보라! 그것은 세상을 병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인간의 몸이 얼마나 다양한 질병에 시달리는가! 구주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 보라! 그는 인류의 원수인 이 무리를 정복하신다. 여기에는 상상의 불꽃이 그 원인에도 그 치유에도 아무것도 기여할 수 없는 병들, 곧 체액에 있지 아니하고 몸의 지체에 자리 잡은 병들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이것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그가 그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셨도다. 주목하라, 모든 질병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달려 있어, 그가 명하시는 대로 가고 온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 속에서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한 실례요, 우리의 모든 비참함 속에서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그의 긍휼의 한 실례이다.

3. 이 일이 백성에게 미친 영향 (마 15:31).

(1.) 그들은 놀라워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그리스도의 일들은 마땅히 우리의 경이가 되어야 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시 118:23).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영적 치유는 놀랍도다. 눈먼 영혼이 믿음으로 보게 되고, 말 못하는 자가 기도로 말하며, 다리 저는 자가 거룩한 순종으로 걸을 때, 그것은 마땅히 놀라워할 일이다.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라 이는 그가 기이한 일을 행하셨음이로다.

(2.)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나, 바리새인들은 이런 일들을 보고도 도리어 비방하였다. 우리의 경이의 대상인 기적은 마땅히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기쁨의 대상인 자비는 마땅히 우리의 감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고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니, 만일 그가 우리의 질병을 고쳐 주신다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또한 우리가 은혜로이 보전되어 맹인됨과 다리 절음과 말 못함을 면하였다면, 우리가 그것들에서 고침을 받은 것만큼이나 하나님을 송축할 이유가 있도다. 아니, 곁에 서 있던 자들까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주목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비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자비 안에서도 하나님을 찬양과 감사로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그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그의 교회의 하나님,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약속된 메시아를 보내신 분으로 영광을 돌렸으니, 이분이 바로 그분이시다. 눅 1:68을 보라.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이 일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해진 것이요, 다른 어떤 이도 이것을 할 수 없었다.

II. 여기에는 그가 최근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처럼,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일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손님은 실로 이번에는 그때만큼 많지 아니하였고 양식은 조금 더 많았으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팔이 짧아졌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형편이 요구하는 대로 자기 기적을 행하셨고, 따라서 그것을 형편에 맞추셨음을 뜻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먹여야 할 만큼의 사람을 취하셨고, 그들을 먹이기 위하여 손에 있는 것을 모두 사용하셨다. 일단 자연의 가장 큰 능력이 초과되면, 우리는 마땅히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다라고 말해야 하며, 그것이 얼마나 더 능가되었는지는 여기서도 저기서도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이것도 앞의 것에 못지않은 기적이다.

여기에는, 1. 그리스도의 긍휼이 있다 (마 15:3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가 이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긍휼을 시험하고 또한 불러일으키시기 위함이었다. 그가 이 기적을 행하려 하실 때, 그는 그들을 자기에게 불러 자기 의향을 알리시고 그것에 관하여 그들과 더불어 의논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들의 조언을 필요로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자기 겸손한 사랑의 한 실례를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들을 종이라 부르지 아니하셨으니, 종은 그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도리어 그들을 자기의 친구요 모사로 대하셨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7). 그가 그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다음을 주목하라.

(1.) 무리의 형편.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이것은 그들의 열심과,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향한 애정의 강함을 보여 주는 한 실례이니, 그들은 그를 따라다니기 위하여 평일에 자기 생업을 내려놓았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머물기 위하여 많은 고난을 감수하였다. 그들은 자연적인 휴식을 누리지 못하였고, 보아하니 들판에서 병사들처럼 누웠을 것이며, 필요한 양식이 없어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밖에 가지지 못하였다. 저 더운 지방에서는 우리가 이 추운 기후에서 견딜 수 있는 것보다 오랜 금식을 더 잘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육체에 괴롭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건강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었으나, 하나님의 집을 위하는 열심이 그들을 삼킴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기에게 필요한 양식보다 더 귀히 여겼다. 우리는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데 세 시간도 너무 길다고 여기거니와, 이 사람들은 사흘을 함께 머물면서도 그것을 콧방귀로 여기지 아니하였고, 볼지어다 이 어찌 이리 번거로운가! 하고 말하지도 아니하였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얼마나 따뜻하게 말씀하셨는가.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노라. 사흘 동안 그토록 그들을 위하여 수고하시고 가르치고 고치심에 지칠 줄 모르셨던 그를, 그들이 마땅히 불쌍히 여겼어야 했다. 그토록 많은 능력이 그에게서 나갔으나, 보아하니 그도 또한 금식 중이셨다. 그럼에도 그가 자기 긍휼로 그들을 앞서 돌보셨다. 주목하라, 우리 주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오래 자기 곁에 머무는지 헤아리시며, 그 가운데 그들이 감당하는 어려움을 주목하신다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아노니.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그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이제 백성이 처하게 된 절박한 사정은 다음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1.] 그들의 공급의 자비. 그는 그들이 굶주렸을 때에 그들을 먹이셨으니, 그러할 때에 음식은 갑절로 반가운 법이다. 그는 그들을 옛적의 이스라엘처럼 대하셨으니, 그가 그들을 주리게 하신 후에 먹이셨다 (신 8:3). 이는 배부른 영혼이 싫어하는 것도 주린 영혼에게는 단 까닭이다. [2.] 그들의 공급의 기적. 그토록 오래 금식하였으므로 그들의 식욕은 더욱 간절하였다. 만일 두 끼를 굶으면 세 끼째에 대식가가 된다면, 사흘을 굶으면 어떠하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이 다 먹고 배불렀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는 가장 간절하고 큰 갈망에도 풍성한 만족을 주실 만큼의 자비와 은혜가 충분히 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그가 주린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는도다.

(2.) 그들을 향한 우리 주인의 보살핌. 내가 그들을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길에서 기진할까 하노라. 그렇게 되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가족에게 불명예가 될 것이요, 그들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낙심거리가 될 것이다. 주목하라, 우리의 영혼이 어느 정도 고양되고 확장되었을 때에도, 우리의 몸이 선한 의무에서 그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현재 상태의 불행이다. 육신의 약함은 영의 원함에 큰 슬픔이 된다. 하늘에서는 그렇지 아니하리니, 거기서는 몸이 신령하게 되어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도 기진하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그들이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도 아니하리라 (계 7:16).

여기에는, 2.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다. 그들의 궁핍을 불쌍히 여기심이 그들의 공급을 위하여 그의 능력을 작동하게 한다. 이제 주목하라.

(1.) 그의 능력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의심받았는가 (마 15:33). 광야에서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많은 떡을 얻으리이까? 얼핏 보면 모세의 질문 (민 11:22)과 같은, 적절한 질문처럼 보인다.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그들에게 족하오리이까? 그러나 여기서 이것은 부적절한 질문이었으니,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하여 가졌던 일반적인 확신뿐 아니라, 비슷한 경우에 기적으로 때맞고 충분한 공급을 받은 최근의 특별한 경험까지 고려할 때 그러하다. 그들은 앞선 기적의 증인이었을 뿐 아니라 그 일꾼이기도 하였으니, 불어난 떡이 그들의 손을 거쳐 갔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가 어디서 떡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은 것은 큰 연약함의 한 실례였다. 그들이 자기 주인을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막막해할 수 있겠는가? 주목하라, 지난날의 경험을 잊는 것은 우리를 현재의 의심 가운데 머물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양식이 얼마나 빈약한지 아셨으나, 그것을 그들에게서 들으려 하셨다 (마 15:34).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일하시기 전에 그는 자기가 얼마나 적은 것으로 일하셔야 하는지를 드러내려 하셨으니, 이는 그의 능력이 더욱 밝게 빛나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들이 가진 것은 자기들을 위한 것이었고, 그것은 자기들 가족만으로도 넉넉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것을 다 무리에게 베풀고, 더 많은 것을 위하여는 섭리를 신뢰하기를 원하셨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마땅히 후하여야 하니, 그들의 주인이 그러하셨다. 우리가 가진 것은 형편이 닿는 대로 아끼지 말아야 하며,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써야 한다. 나발같이 (삼상 25:11) 하지 말고, 엘리사같이 하라 (왕하 4:42). 내일을 염려하여 오늘 인색하게 구는 것은 마땅히 죽여야 할 부패한 정욕의 복합체이다. 만일 우리가 가진 것으로 분별 있게 친절하고 자비를 베푼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을 보내 주시리라 경건히 소망할 수 있다. 여호와이레, 곧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 제자들은 우리가 어디서 떡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주목하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을 때에는, 우리가 가진 것을 가장 잘 활용하여 그것이 미치는 데까지 그것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을 더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마르다에게 주신 규칙대로 행하셨으니, 많은 일로 염려하거나 분주하지 말라 하심이었다. 본성은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은혜는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하나, 정욕은 아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2.) 그가 그들을 위하여 베푸신 풍성한 양식 가운데, 그의 능력이 무리에게 어떻게 드러났는가. 그 방식은 앞서 마 14:18 등에 나온 것과 거의 같다. 여기서 주목하라.

[1.] 손에 있던 양식.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 생선은 떡에 비례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떡이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 생선은 아마도 그들 자신이 잡은 것이었을 것이니, 그들은 어부였고 그때 호숫가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자기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것 (시 128:2)과, 어떤 식으로든 자기 근면의 산물인 것을 누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잠 12:27).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수고에 복 주심으로 얻은 것은 아끼지 말아야 하니, 이는 우리가 나누어 줄 것이 있게 하려고 수고해야 하는 까닭이다 (엡 4:28).

[2.] 백성을 그것을 받을 자세로 앉히심 (마 15:35). 그가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셨다. 그들은 지극히 적은 양식밖에 보지 못하였으나, 그것에서 한 끼 식사가 나오리라는 믿음으로 앉아야 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영적 양식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그의 발 앞에 앉아 그것이 보이지 않는 길로 임하기를 기대해야 한다.

[3.] 양식을 그들 가운데 나누어 주심. 그가 먼저 축사하셨으니 — 유카리스테사스(εὐχαριστήσας). 앞선 기적에서 사용된 단어는 율로게세(εὐλόγησε) — 그가 축복하셨다였다. 이 둘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합당한 방법이다. 그리고 우리가 더 많은 자비를 구하고 받으러 나아올 때에는, 우리가 이미 받은 자비에 대하여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런 다음 그는 떡을 떼시고 (이는 떡이 떼어질 때에 불어났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었다. 비록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심하였으나, 그는 앞서와 같이 이제도 그들을 사용하셨다. 그는 자기 사역자들의 약함과 결함으로 인해 마땅히 그러실 수 있었음에도 그들을 물리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그들에게 주시며 그들이 그의 백성에게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 주게 하신다.

[4.] 그들 가운데 있던 풍성함 (마 15:37). 그들이 다 먹고 배불렀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 먹이시는 자들을 그가 배부르게 하신다. 우리가 세상을 위하여 수고하는 동안에는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나 (사 55:2), 그리스도를 합당하게 기다리는 자들은 그 집의 좋은 것으로 풍족하게 만족할 것이다 (시 65:4). 그리스도께서 이같이 사람들을 거듭 먹이신 것은, 비록 그가 나사렛 예수라 불리셨으나 그가 떡의 집인 베들레헴 출신이심을, 아니 그보다는 그가 친히 생명의 떡이심을 암시하려 하심이었다.

그들이 다 충분히 먹었음을 보이기 위하여 많이 남았으니 —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에 찼다. 이전만큼은 아니었으니, 이는 그토록 많은 사람이 먹은 뒤에 거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는 떡이 넉넉하여 남음이 있음을, 곧 그것을 구하는 자들 이상을 위한, 그리고 더 많은 것을 구하는 자들을 위한 은혜의 공급이 있음을 보이기에는 충분하였다.

[5.] 손님의 수가 계수됨. 이는 그들이 자기 몫을 치르게 하려 함이 아니었으니 (여기서는 정산할 것이 없었고, 그들은 거저 먹었다), 도리어 그들이 그리스도의 능력과 선하심의 증인이 되게 하려 함이요, 또한 이것이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저 보편적 섭리를 어느 정도 닮게 하려 함이었다 (시 136:25). 여기서는 사천 명이 먹었거니와, 매일 신적 돌보심으로 공급받는 저 큰 가족에 비하면 그들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위대한 살림꾼이시니, 모든 생물의 눈이 그를 바라며 그가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시 104:27; 145:15).

[6.] 무리를 흩어 보내심과, 그리스도께서 다른 곳으로 떠나가심 (마 15:39). 그가 백성을 흩어 보내셨다. 비록 그가 그들을 두 번이나 먹이셨으나, 그들은 기적이 자기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리라고 기대해서는 아니 되었다. 이제 그들로 하여금 자기 생업으로, 그리고 자기 식탁으로 돌아가게 하라. 그리고 그 자신은 배로 다른 곳으로 떠나가셨으니, 이는 그가 세상의 빛이시므로 여전히 움직이며 두루 다니사 선을 행하셔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