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 번역 진행
- 4,537 / 4,537
- 원문 언어
- en
학습 자료
여러 공개 도메인 주석서와 성서하우 한글 번역을 책과 장별로 탐색합니다. 주석서를 전환하며 번역만 읽거나 원문과 번역을 나란히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주석서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전체 항목
4,537
번역 4,537건
주석서 원문, 저자, 번역 진행률, 라이선스 정보를 출처별로 구분해 표시합니다. 성서하우의 한글 번역·편집물은 원문 자료와 별도로 관리됩니다.
¹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²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여기에 그리스도의 이동에 관한 기록이 있다. 살펴보자.
1. 그분께서 갈릴리를 떠나셨다. 그곳은 그분께서 자라나신 곳이요, 생애의 대부분을 그 외지고 멸시받던 시골 지방에서 보내신 곳이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거기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은 오직 명절을 기회로 삼으셨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추측해 보건대, 그분께서 거기 오셨을 때 일정한 거처가 없으셨기에 그분의 설교와 기적이 더욱 주목받고 더욱 환영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낮아지심의 한 예였으니, 이 일에서도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분은 비천한 신분으로 나타나셔서, 갈릴리 사람, 곧 북쪽 지방 사람이요 그 나라에서 가장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 없는 지역 출신이라는 명칭을 지니고 다니셨다. 그리스도의 설교 대부분은 지금까지 갈릴리에서 전파되었고, 기적 대부분도 갈릴리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이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셨으니, 그것은 그분의 마지막 작별이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신 일, 곧 눅 17:11이 이 일 이후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지나가시는 길에—in transitu, 즉 그 지방을 통과하시면서 들르신 방문에 불과하였으나) 그분은 부활하시기까지 다시는 갈릴리에 오지 않으셨으니, 이는 이 전환을 매우 주목할 만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릴리에서 자신의 일을 마치시기 전까지는 갈릴리를 떠나지 아니하셨고, 그 일을 마치신 후에야 거기서 떠나셨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들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받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어느 곳에서든 그 장소에서 자기의 증거를 마치기까지는 그곳에서 옮겨지지 아니한다(계 11:7). 이것은 자기 변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좇아 거처를 옮기는 자들에게 매우 위로가 되는 것이니, 곧 그들이 떠나기 전에 그들의 말씀이 마쳐지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할 일이 있는 동안보다 더 오래 어디든 머무르기를 누가 바라겠는가?
2. 그분께서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셨으니, 이는 그들도 갈릴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권고의 날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다른 민족들을 향하여 자리 잡은 가나안의 그 지역들에 머무르셨다. 갈릴리는 이방의 갈릴리라 불리며, 수리아 사람들은 요단 강 건너편에 거하였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유대 민족의 경계 안에 머무르고 계실 때라도 이방인들을 바라보고 계셨으며, 그분의 복음이 이방인들을 겨냥하고 그들에게로 다가가고 있음을 암시하셨다.
3. 큰 무리가 그분을 따랐다. 실로(Shiloh)가 계신 곳, 그곳으로 백성들이 모여들리라. 주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다(계 14:4). 그리스도께서 떠나실 때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것이 최선이다. 이렇게 그분께서 가시는 곳마다 무리가 그분을 둘러싸고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일종의 존경이었으나, 동시에 끊임없는 수고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자신의 안일을 구하지 아니하셨고, (어떤 이들이 이르듯) 이 무리가 얼마나 비천하고 멸시받을 만한 자들인지를 고려하실 때, 세상의 눈으로 보아 자신의 영예 또한 크게 구하지 아니하셨다. 그분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으니, 이어서 이렇게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거기서 그들을 고치셨다. 이는 그들이 무엇을 위하여 그분을 따랐는지를 보여 주니, 곧 자기들의 병자를 고침받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께서 갈릴리에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여기서도 도우실 능력과 준비가 되어 계심을 발견하였다. 왜냐하면 이 의로운 해가 떠오르는 곳마다, 그것은 그 날개 아래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거기서 그들을 고치셨으니, 이는 그들이 자기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기 때문이요, 그것이 거치는 것이 될까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다투지도 아니하시며 들레지도 아니하시리라.
³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지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⁵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⁶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⁷ 그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⁸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⁹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요 또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¹⁰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만일 사람이 그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¹¹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¹²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여기서 우리는 이혼의 경우에 관한 그리스도의 율법을 보게 되는데, 그의 다른 어떤 뜻의 선언들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 그분은 죄인들의 반대를 너무도 인내로 견디셨기에, 그것을 도리어 자기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으로 바꾸어 놓으셨도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라.
I.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질문(마 19:3),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들은 그분께 배우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를 시험하려고 이것을 물었다. 얼마 전 그분은 갈릴리에서 통상적인 관행에 반하여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뜻을 선언하신 바 있었으며(마 5:31,32), 만일 그분이 이번에도 그와 같이 이혼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신다면, 그들은 이를 이용하여 이 지방 백성들의 편견과 분노를 그분께로 향하게 하려 하였으니, 그 백성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자유를 제한하려 드는 자를 시기하는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분이 다른 어떤 교훈으로써 그러하듯 이 일로도 백성의 호감을 잃어버리시기를 바랐다. 혹은 이 시험이 이렇게 의도된 것일 수도 있다. 곧 만일 그분이 이혼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면, 그들은 그분이 이혼을 허용한 모세의 율법에 대적하는 자라고 비방했을 것이요, 만일 옳다고 말씀하시면,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메시아의 가르침에 마땅히 기대되는 그 온전함이 결여된 것으로 묘사했을 것이니, 비록 이혼이 용인되기는 했어도 더 엄격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곧 모세의 율법이 이혼을 허락하기는 했으나, 그 정당한 사유를 규정하는 일에 있어서 바리새인들 사이에 서로 논쟁이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에 대해 무엇이라 하실지 알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혼인에 관한 사례들은 수없이 많았고 때로는 복잡하고 얽혀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율법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들에서 사람들은 흔히 묻기도 전에 자기가 어떻게 할지를 이미 정해 놓는다.
그들의 질문은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지 그 아내를 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유, 곧 음행의 사유로는 그렇게 할 수 있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지금 흔히 행해지듯, 더 방종한 부류의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든지, 곧 사람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적당하다고 여겨 내세우는 어떤 이유로든지, 어떤 싫음이나 불쾌함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경우의 용인은 그 여자가 그의 눈에 호의를 얻지 못함은 그가 그에게서 무슨 수치되는 일을 발견하였음이라(신 24:1) 하여 그것을 허락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매우 폭넓게 해석하여, 까닭 없는 것일지라도 어떤 거슬림이든 이혼의 근거로 삼았다.
II.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이다. 비록 그것이 그분을 시험하려고 제기된 것이었으나, 이것은 양심의 문제요 또한 중대한 문제였으므로, 그분은 직접적인 답은 아니되 충분하고도 효력 있는 답을 주셨다. 곧 그 당시 통용되던 그런 자의적 이혼들—혼인의 매임을 그토록 위태롭게 만든 그 이혼들—이 결코 옳지 못함을 반박할 수 없게 증명하는 원리들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도 이유 없이 규칙을 세우려 하지 않으셨고, 그것을 뒷받침할 성경의 증거 없이 자신의 판단을 내리지 않으셨다. 그분의 논증은 이러하다. "만일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의 뜻과 정하심을 따라 가장 엄밀하고 가장 긴밀한 연합으로 짝지어졌다면, 그들은 가볍게 그리고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갈라서서는 안 된다. 만일 그 서약이 거룩하다면, 그것은 쉽게 풀릴 수 없다." 이제 남편과 아내 사이에 그러한 연합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분은 세 가지를 내세우신다.
1. 아담과 하와의 창조이니, 이에 관하여 그분은 그들 자신이 성경에 대해 아는 바에 호소하신다. 읽지 못하였느냐? 논증함에 있어서, 성경을 가졌고 또 읽은 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어느 정도 유리하다. 너희가 읽었으되(다만 깊이 생각하지는 못하였으니),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창 1:27, 5:2). 주목하라. 우리가 어떻게 또 누구에 의해, 무엇으로 또 무엇을 위하여 창조되었는지 우리의 창조를 자주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그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한 남자에게 한 여자라. 그러므로 아담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취할 수 없었으니, 취할 다른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그들 사이의 분리될 수 없는 연합을 함축한다. 하와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갈빗대였으므로, 그가 그 여자를 버린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한 부분을 버리는 것이요 그 여자의 창조가 명백히 보여 주는 바를 거스르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간략히 암시하시지만, 그들이 읽은 바에 호소하심으로써 그들을 원래의 기록으로 이끄시는데, 거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비록 다른 살아 있는 피조물들도 암수로 지음받았으나 그중 어느 것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에 대해서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이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결합은 이성적이며, 단지 감각의 즐거움이나 후손을 보존하는 것보다 더 고귀한 목적을 위해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짐승들 사이의 암수의 결합보다 더 긴밀하고 견고하니, 짐승들은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서로의 합당한 돕는 배필이 될 수 없었다. 이런 까닭에 그 표현 방식이 다소 독특하다(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에서 *사람을(him)*과 *그들을(them)*이 구별 없이 함께 쓰였으니, 그들이 둘이 되기 전에 창조에 의해 이미 하나였고, 혼인 언약으로 다시 하나가 되었을 때 그 하나 됨은 더욱 긴밀하고 끊을 수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2. 혼인의 근본 법이니, 곧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할지니라(마 19:5) 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보다 더 가깝다. 그런데 만일 자녀의 관계가 쉽게 깨뜨려져서는 안 된다면, 하물며 혼인의 연합은 더더욱 깨뜨려져서는 안 된다. 자녀가 어떤 이유로, 어떤 이유로든지 그 부모를 저버릴 수 있는가, 또는 부모가 그 자녀를 내버릴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물며 남편이 그 아내를 버릴 수 있겠는가? 그들 사이의 관계는, 본성에 의한 것은 아니나 하나님의 정하심에 의해, 부모와 자녀 사이보다 더 가깝고 그 연합의 매임도 더 강하니,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는 혼인으로 인해 상당 부분 대체되어,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제도가 지닌 능력을 보라. 곧 그 결과가, 본성의 가장 높은 의무로부터 비롯되는 연합보다도 더 강한 연합이라는 사실이다.
3. 혼인 계약의 본질이니, 그것은 인격들의 연합이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 그러므로(마 19:6)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라. 사람의 자녀들은 그 자신의 부분들이지만, 그의 아내는 곧 그 자신이다. 부부의 연합이 부모와 자녀 사이의 연합보다 더 긴밀한 것처럼,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본래의 몸 안에서 한 지체와 다른 지체 사이의 연합에 맞먹는다. 이것이 남편들이 그 아내를 사랑해야 할 이유인 것처럼, 또한 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될 이유이니,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그것을 잘라내지 아니하며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하며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 둘이 하나가 될지니, 그러므로 아내는 오직 하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 아담을 위해 오직 한 하와만 지으셨기 때문이다(말 2:15).
여기서 그분은 다음을 추론하신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주목하라. (1.)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다. 쉬네쥑센(synezeuxen)—그가 그들을 한 멍에로 묶으셨다는 것이 그 단어의 뜻이니, 매우 의미심장하다. 하나님께서 친히 순결한 상태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제정하셨다. 혼인과 안식일은 하나님의 규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비록 혼인이 교회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공통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제도로 인침을 받았고 또 여기서 우리 주 예수님에 의해 확증되었으니, 경건하게 처신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함을 받아 운영되어야 마땅하다. 이 규례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양심적인 존중은 그 관계의 의무에, 따라서 그 관계의 위로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2.) 하나님의 규례로 짝지어진 남편과 아내는 사람의 어떤 규례로도 나뉠 수 없다. 사람이 그들을 나누지 못할지니, 남편 자신도, 그를 대신한 어느 누구도, 그리고 위정자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위정자에게 그렇게 할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내쫓는 일을 미워하노라 하셨다(말 2:16).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의 일반 원칙이다.
III.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한 가지 반론이니, 빛깔과 그럴듯함이 없지 않은 반론이었다(마 19:7). "만일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는 경우라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라 명하였나이까?" 그분이 이혼에 반대하여 성경적 이유를 내세우시자, 그들은 그것을 옹호하는 성경적 권위를 끌어댄다. 주목하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듯이 보이는 모순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들에게 큰 걸림돌이 된다. 모세는 그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였고, 주께 받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명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일 자체로 말하면, 그들이 명령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허용이었으며(신 24:1), 그 일 자체를 두둔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지나친 폐단을 억제하기 위한 의도였다. 유대 학자들 자신도 그 율법에서 이러한 제한들을 지적하니, 그것은 큰 숙고 없이는 행해질 수 없었다. 특정한 이유가 명시되어야 했고, 이혼 증서가 작성되어야 했으며, 하나의 법적 행위로서 그것은 작성되고 등록된 증서의 모든 격식을 갖추어야 했다. 그것은 아내 자신의 손에 건네져야 했으며, (만일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분별이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인데) 그들은 다시는 함께 모이는 것이 명백히 금지되었다.
IV. 이 반론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이니, 그 안에서 그분은,
1. 모세의 율법에 관한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으신다. 그들은 그것을 명령이라 불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다만 허용, 곧 용인이라 부르신다. 육신에 속한 마음은 한 치를 주면 한 자를 취한다. 이 경우의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통치자로서 주신 정치적 법이었으며, 이혼이 용인된 것은 국가적 이유 때문이었다. 혼인 연합의 엄격함은 자연법이 아니라 실정법의 결과였으므로, 하나님의 지혜는 그분의 거룩하심에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 어떤 경우들에 이혼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이 용인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으되 결코 그들의 명예가 될 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너희가 아내 버림을 허락받은 것이라. 모세는 그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다고 탄식하였으니(신 9:6, 31:27), 하나님을 향해 완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들의 관계들을 향하여 완악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대체로 그 식욕에서나 그 격정에서나 어느 길로 향하든 난폭하고 격렬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아내에게 싫증을 느꼈을 때 아내 버리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아내를 잔인하게 대하여 때리고 학대했을 것이요, 어쩌면 죽였을지도 모른다. 주목하라.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 모질고 가혹하게 구는 것보다 더 큰 마음의 완악함은 세상에 없다. 유대인들은 이 점에서 악명이 높았던 것 같으며, 그래서 아내 버림을 허락받은 것이다. 더 나쁜 일을 행하는 것보다, 주의 제단이 눈물로 덮이게 하는 것(말 2:13)보다는 차라리 아내를 내보내는 것이 나았다. 광인이나 광기에 빠진 사람의 기분을 맞추려는 약간의 양보가 더 큰 해악을 막을 수 있다. 실정법은 자연법의 보존을 위하여 면제될 수 있으니, 하나님께서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자들은 마음이 완악한 가련한 자들이며, 누구든지 이혼의 자유를 갖기를 바라는 자는 사실상 자기 마음의 완악함을 시인하는 것이다. 주목하라. 그분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라 하시니, 그 당시 살던 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후손을 가리키신 것이다. 주목하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을 보실 뿐 아니라 미리 보신다. 그분은 구약의 규례들과 섭리들을 모두 그 백성의 기질에 맞추셨으니, 둘 다 두렵게 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주목하라. 모세의 율법은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을 고려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을 고치며, 그분의 은혜는 돌 같은 마음을 제하고 살 같은 마음을 주신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되었으나, 복음으로는 죄를 이기게 되었다.
2. 그분은 그들을 원래의 제도로 되돌리신다. 그러나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주목하라. 하나님의 어떤 규례 속에 스며든 부패는 원래의 제도로 돌아감으로써 깨끗이 제해져야 한다. 만일 사본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원본에 비추어 검토되고 교정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의 성찬에 관한 폐단들을 바로잡고자 했을 때 그 제정에 호소하여(고전 11:23) 내가 주께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노니, 라고 말하였다. 진리는 본래부터 있었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옛적 길(렘 6:16)을 물어야 하며, 후대의 본보기가 아니라 옛 규례를 따라 개혁해야 한다.
3. 그분은 명백한 율법으로 그 문제를 확정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19:9), 이것은 그분이 전에 말씀하신 바(마 5:32)와 일치한다. 거기서는 설교 중에 말씀하셨고 여기서는 논쟁 중에 말씀하셨으나, 그 내용은 동일하니,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과 한결같으시기 때문이다. 이제 이 두 곳 모두에서,
(1.) 그분은 간음의 경우에 이혼을 허락하신다. 이혼을 금하는 율법의 이유는 곧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아내가 음행하여 간음한 자와 더불어 자신을 한 몸으로 만든다면, 그 율법의 이유가 사라지고 따라서 율법도 사라진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은 사형으로 벌하였다(신 22:22). 이제 우리 구주께서는 그 엄격함을 완화하사 이혼을 그 형벌로 정하신다. 휘트비 박사는 이것을 간음이 아니라 (우리 구주께서 포르네이아(porneia)—음행이라는 단어를 쓰셨으므로) 혼인 전에 범하였으나 그 후에 발각된 부정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혼인 후에 범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으니 이혼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분은 그 밖의 모든 경우에는 이혼을 금하신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것은 그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니, 곧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서도, 복음의 때는 개혁의 때이다(히 9:10). 그리스도의 율법은 사람을 그 원래의 온전함으로 회복시키는 데로 향한다. 사랑의 법, 곧 부부간의 사랑의 법은 새 계명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의적 이혼으로 인해 가정들과 국가들에 어떤 해악이, 어떤 혼란과 무질서가 뒤따를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 그리스도의 율법이 얼마나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또 기독교가 우리의 세속적 이익에도 얼마나 좋은 벗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모세의 율법이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이혼을 허락하고, 그리스도의 율법이 그것을 금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자유의 경륜 아래 있으므로 그들 가운데 마음의 부드러움이 마땅히 기대될 수 있음을, 곧 그들이 유대인들처럼 완악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화평 가운데서 부르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용서받았고 또 용서받기를 바라는 자로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쫓기에 더디신 분임을 발견한 자로서,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한다면(사 50:1), 이혼이 필요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만일 남편이 그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그 남편에게 순종하며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서 함께 살아간다면, 이혼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곧 그리스도의 율법이니, 모세의 온 율법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V. 여기 이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제자들의 한 가지 제안이 있다(마 19:10). 만일 사람이 그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제자들 자신도 이혼의 자유를 포기하기를 꺼려, 그것을 혼인 상태에서 위로를 보존하기 위한 좋은 방편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치 토라진 아이들처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가진 것마저 내던지려 한다. 만일 마음대로 아내를 버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차라리 아내를 아예 두지 않으려 한다. 비록 본래, 곧 어떤 이혼도 허락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사, 이같이 굳게 결합된 자들을 복되다 선언하셨으나, 그들은 이혼의 자유가 없다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생각한다. 주목하라. 1. 부패한 본성은 속박을 견디지 못하며, 기꺼이 그리스도의 결박을 끊어 버리고 자기 정욕을 위한 자유를 누리려 한다. 2. 사람이 이 세상 삶의 위로들을, 흔히 그것들과 엮여 있는 십자가들 때문에 저버리는 것은 어리석고 까다로운 짓이니, 마치 세상에서 모든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세상을 떠나야 하는 것처럼, 또는 어떤 처지 안에 머무는 것이 우리의 의무로 정해졌다고 하여 어떤 유익한 소명이나 처지에도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구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우리의 처지가 어떠하든,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그것에 맞추어, 그 위로들에 감사하고 그 십자가들에 순복하며, 하나님께서 하셨듯이 이것과 저것을 병행하게 하사 현재 있는 그것을 최대한 선용해야 한다(전 7:14). 만일 혼인의 멍에를 마음대로 벗어 던질 수 없다면, 그러므로 그 멍에 아래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러므로 우리가 그 아래로 들어갈 때에는 사랑과 온유와 인내로써 그것에 잘 적응하기로 결심해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이혼을 가장 불필요하고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만들 것이다.
VI. 이 제안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이니(마 19:11,12), 그 안에서 그분은,
1. 어떤 이들에게는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음을 허락하신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말한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들이 의도한 대로 이혼 금지에 대한 반론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어쩌면 그들에게 그에 못지않게 달갑지 않았을) 하나의 규칙을 주시는 것으로서 허락하셨다. 곧 절제의 은사를 가졌고 혼인할 어떤 필연성 아래 있지 않은 자들은 독신으로 머무르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고전 7:1). 왜냐하면 결혼하지 않은 자들은, 마음만 있다면, 이 세상의 염려에 덜 얽매이고 더 나은 일들을 생각할 생각과 시간의 여유를 더 많이 가지고 있어,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고전 7:32-34) 하고 더 마음 쓸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은혜의 증대가 가정의 증대보다 낫고,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다른 어떤 사귐보다 더 귀히 여겨져야 한다.
2. 그분은 혼인을 금하는 것을 전적으로 해로운 것으로서 불허하신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니, 참으로 받을 수 있는 자가 적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혼인 상태의 십자가들을 피하려고 스스로 시험에 빠지기보다는, 차라리 그 십자가들을 견디는 것이 마땅하니,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혼인에 대한 두 가지 부적합함을 말씀하신다.
(1.) 하나님의 섭리로 인한 일종의 재난으로서의 부적합함이니, 곧 날 때부터 고자인 자들이나 사람이 만든 고자들이 겪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들은 혼인의 한 가지 큰 목적을 이룰 수 없으므로 장가들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 재난에 대하여는, 독신 상태에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맞세워 그것을 상쇄하게 하라.
(2.)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일종의 덕으로서의 부적합함이니, 곧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것은 몸에 있어서의 혼인 부적합함이 아니라 (어떤 이들은 이 성경 구절을 오해하여 어리석고 악하게도 자기 몸에 그런 일을 행하였다) 마음에 있어서의 부적합함을 뜻한다. 혼인 상태의 모든 즐거움에 대해 거룩한 무관심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그것들을 온전히 멀리하기로 확고히 결심하였으며, 금식과 그 밖의 여러 자기 절제의 행위들로써 그것들을 향한 모든 욕망을 굴복시킨 자들이 이같이 스스로 고자가 된 것이다. 이들이 곧 이 말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도 결코 혼인하지 않겠다고 서원으로 자신을 묶을 것이 아니라, 다만 지금 가진 그 마음으로 혼인하지 않기로 작정할 따름이다.
이제, [1.] 독신 상태에 대한 이 애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타고난 자라야 그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절제는 어떤 이들에게는 주어지고 다른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다. 그리고 사람이 독신 상태에서 자기에게 이 은사가 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될 때, 그는 자신의 마음으로 작정하고, (사도가 말한 것처럼, 고전 7:37) 마음에 굳게 서서, 부득이한 일이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한이 있어 자신을 그렇게 지키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거짓 은사를 자랑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잠 25:14).
[2.] 독신 상태는 천국을 위하여 택해야 한다. 결코 혼인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다만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거나, 까다롭고 이기적인 기질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거나, 다른 정욕과 쾌락을 섬길 더 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그러하다면, 그것은 덕이기는커녕 오히려 고약한 악덕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을 위함이라면—그것이 (천주교도들이 만들어 내는 것처럼) 그 자체로 어떤 공로 있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다만 우리의 마음을 신앙의 직무들을 위하여 더 온전하고 더 집중되게 지키는 수단으로서, 또 돌볼 가족이 없어 더 많은 자선의 일들을 행할 수 있게 하는 수단으로서 그러하다면—그것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받아들여진다. 주목하라. 우리에게 가장 좋고, 따라서 그에 맞게 택하여 굳게 지켜야 할 처지는, 우리 영혼에 가장 좋으며 우리를 천국을 위하여 준비시키고 또 천국에 이르도록 보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처지이다.
¹³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¹⁴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¹⁵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여기에는 그리스도께 데려온 어린아이들을 그가 어떻게 맞아 주셨는지가 기록된다. 다음을 살펴보자.
I. 아이들을 데려온 이들의 믿음.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품에 안길 만큼 어렸으므로 한 살쯤, 많아도 두 살이었을 것이다. 기록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며 어린아이들을 데려왔다고 한다(마 19:13). 데려온 이들은 아마 부모나 보호자나 유모였을 것이다. 여기서 1. 그들은 그리스도를 존중하고 그의 은총과 축복을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나타냈다. 자신이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를 영화롭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과 영향력을 미치는 모든 사람도 그에게 데려옴으로써 그를 더욱 영화롭게 해야 한다.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의 풍성함과 넘치며 마르지 않는 충만함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활용하는 것보다 그를 더 잘 영화롭게 할 길은 없다. 2. 그들은 자녀에게 선을 베풀었다. 적어도 비범한 인물과 선지자로, 혹은 제사장과 왕으로 여긴 주 예수의 축복과 기도로 자녀들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더 복되리라고 믿었다. 이런 이의 축복은 귀하게 여겨지고 사모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병든 자녀를 고치기 위해 데려왔지만, 이 아이들은 당장 질병이 없었고 단지 축복받기를 바랐다. 화급한 곤경에 몰리기 전에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자녀도 데려가는 일은 선하다. 곤란할 때만 찾지 않고, 우리가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하며 그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아가는 일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한다.
그들은 그가 아이들에게 안수하고 기도하기를 바랐다. 안수는 특히 아버지가 축복할 때 사용하던 의식이다. 야곱도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고 양자로 삼을 때 안수했다(창 48:14). 여기에는 권능과 권위에 사랑과 친밀함이 결합되며, 축복에 실제 효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에게 그는 성령으로 손을 얹으신다. (1.) 어린아이들도 그리스도의 축복이 필요하고 그것을 받을 수 있으며 그의 중보에 참여하므로 그에게 데려올 수 있다. (2.) 그러므로 실제로 그에게 데려와야 한다.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주 예수께 맡겨 그가 역사하고 위하여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축복을 구할 수 있을 뿐이며, 축복을 명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II. 아이들을 꾸짖은 제자들의 잘못. 그들은 그 요청을 헛되고 하찮게 보아 못마땅히 여기고, 요청한 이들을 주제넘고 성가시다고 책망했다. 어린아이에게 특별한 병이 없다면 주께서 주목하는 일이 그의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나, 다른 일로 이미 수고가 많으므로 방해받지 않기를 바랐거나, 이런 요청을 받아 주면 온 지방에서 아이들을 데려와 끝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가장 훌륭한 제자보다 더 큰 사랑과 자상함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도 그에게 배워, 비록 연약하더라도 선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영혼을 물리치지 말아야 한다. 그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면 우리도 꺾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찾는 이는 선한 사람들,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의 뜻을 더 잘 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서 반대와 책망을 만나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III. 우리 주 예수의 호의. 여기서 그가 어떻게 행하셨는지 살펴보자.
1. 그는 제자들을 꾸짖어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으며(마 19:14),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고 하여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으셨다. (1.) 믿는 부모의 자녀는 천국에 속하고 보이는 교회의 구성원이다. 천국은 단지 어린아이와 같은 성향과 정서를 가진 이들의 것이 아니라—그 의미만이라면 비둘기나 어린양을 데려올 이유도 될 수 있다—실제로 나이가 어린 이런 이들의 것이다. 옛 유대 사회에서처럼 보이는 교회의 회원권과 그 특권이 그들에게 속한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에게 하신 것이라.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2.) 이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께 환영받는다. 그는 스스로 올 수 없어 다른 이에게 데려와진 사람도 기꺼이 맞아 주신다. 이는 [1.] 모든 경우에 관심을 보이신 어린아이들 자신과 관련된다. 첫째 아담의 죄가 끼친 해로운 영향에 참여한 이들은 둘째 아담의 풍성한 은혜에도 참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의 병행은 어떻게 성립하겠는가(고전 15:22; 롬 5:14,15 이하)? 그리스도께서 값을 주고 사신 이들로 그에게 주어진 사람은 결코 내쫓기지 않는다. [2.] 아이들을 데려와 산 제물로 드린 부모의 믿음도 고려된다. 부모는 자녀의 의지를 맡은 청지기이며 본성적으로 자녀의 유익을 위해 행동할 권한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부모가 자녀를 헌신하는 일을 그들의 행위로 받아들이고, 자기 보배를 모으는 날에 그렇게 드려진 이들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신다. [3.] 따라서 그가 받으신 이들을 금하고 배제하는 행위를 불쾌히 여기신다. 그런 사람들은 아이들을 주의 기업에서 내쫓고 너희는 여호와께 분깃이 없다고 말하며(수 22:27), 사 44:3의 약속이 성취된다면 우리가 아는 한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 세례를 위한 물을 금하는 셈이다.
2. 그는 어린아이들을 받아 요청받은 대로 그들에게 안수하셨다. 곧 그들을 축복하셨다. 가장 강한 신자도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보다 그리스도께 붙들리는 것으로 살며(빌 3:12),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 알려진 것으로 산다(갈 4:9). 가장 어린아이도 이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손을 뻗을 수 없어도 그는 그들에게 손을 얹어 자기 것으로 삼고 자기 소유로 인정할 수 있다.
그가 이 일을 마친 뒤 거기를 떠나셨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마 19:15). 자기 양 떼의 어린양들이 지닌 권리를 확증하고, 그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도록 마련했으므로 그곳에서 할 일을 다했다고 여기신 듯하다.
마태복음 19장 16-22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¹⁶ 보라 한 사람이 와서 예수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¹⁷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¹⁸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¹⁹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²⁰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²¹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²² 그 청년이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 이는 그가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더라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진지한 용무를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온 한 소망 있는 젊은 신사 사이에 오간 일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는 청년이라 불렸으며(마 19:20), 내가 그를 신사라고 칭한 것은 그가 큰 소유를 가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관원, 곧 그 지방의 행정관이요 치안 판사였기 때문이다(눅 18:18). 그가 자기 나이를 넘어서는 능력을 가졌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젊음이 그를 관직에서 배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젊은 신사에 관하여, 우리는 그가 얼마나 천국을 향해 훌륭하게 입찰하였으나 또한 미치지 못하였는지를 듣게 된다.
I. 그가 얼마나 훌륭하게 천국을 향해 입찰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선한 출발을 가상히 여기시어 그를 얼마나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하셨는가. 여기에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 신사의 진지한 청원(마 19:16);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보다 더 나은 질문은 던져질 수 없었고, 이보다 더 진지하게 던져질 수도 없었다.
(1.) 그는 그리스도께 영예로운 칭호, 곧 선한 선생님—디다스칼레 아가테(Didaskale agathe)—을 드린다. 이는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라 가르치는 선생을 뜻한다. 그가 그리스도를 선생님이라 부른 것은 그의 순종하는 태도와 배우고자 하는 의향을 나타내며, 선한 선생님이라 부른 것은 그 가르치는 자를 향한 그의 애정과 각별한 존경을 나타내니, 이는 니고데모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그 선생(니고데모)과 이 관원보다 더 공손하게 그리스도께 나아온 자에 관하여 읽지 못한다. 사람들의 신분과 지위가 그들의 예의와 정중함을 더해 줄 때, 그것은 좋은 일이다. 비록 당시 그리스도의 외양은 보잘것없었지만, 그분께 이러한 존경의 칭호를 드린 것은 신사다운 일이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들의 선생을 선한이라는 칭호로 부르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는 그가 그리스도께 품은 비범한 존경을 나타낸다. 주목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선생, 곧 가장 뛰어난 교사이시다. 그분처럼 가르치는 이는 없다. 그분은 그 선하심으로 구별되시니, 이는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들을 능히 용납하실 수 있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이다.
(2.) 그는 (이보다 더 중대할 수 없는) 중대한 용무를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왔으며, 시험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분께 배우기를 원하여 온 것이었다. 그의 질문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는 것이었다. 이로 보아 다음의 것들이 드러난다. [1.] 그가 영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는 사두개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그것을 위해 준비된 자들을 위하여 저 세상에서 예비된 행복이 있음을 확신하였다. [2.] 그가 자신이 영원히 살리라는 것을 스스로 확실히 하는 일에 관심을 두었고, 이 세상의 어떤 즐거움보다도 그 생명을 더 사모하였다는 것. 그의 나이와 신분을 가진 자가 다른 세상에 대하여 그토록 많이 염려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부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을 자기 격에 맞지 않는다고 여기기 쉽고, 젊은이들은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 젊은이요 부자인 한 사람이 자기 영혼과 영원에 대하여 진지하게 염려하고 있었다. [3.] 그가 이 행복을 얻기 위하여 무언가가, 곧 어떤 선한 일이 행해져야 함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 참고 선을 행하여 우리는 영생을 구하는 것이다(롬 2:7). 우리는 행하여야 하며, 또한 선한 것을 행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영생의 유일한 값이며(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공로로 이루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은 영생에 이르는 정해진 길이다(히 5:9). [4.] 그가 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행할 의향이 있었거나, 적어도 자신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영생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들은 어떤 조건으로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천국은 이러한 거룩한 강청을 받는다. 주목하라. *누가 우리에게 선한 것을 보이겠느냐?*라고 말하는 자가 많은 동안, 우리의 큰 질문은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기 위하여, 곧 다른 세상에서 행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이 세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 만한 것을 그 안에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청원에 주신 격려. 이러한 용무를 가지고 그분께 나아오는 자를 응답 없이 돌려보내는 것은 그분의 방식이 아니니, 이는 이보다 더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마 19:17). 그분의 응답 안에서,
(1.) 그분은 그의 믿음을 부드럽게 도우신다. 의심할 바 없이,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그것을 책망으로 의도하신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분은 그 신사가 선한 선생님이라 불렀을 때 한 말 속에서, 그 신사 자신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을 어떤 믿음을 찾아내려 하신 것이다. 그 신사는 그분을 선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 이상을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이끌어 그분을 선한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존경하게 하려 하셨다. 이는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 잘못 말해지거나 행해진 것을 자비롭게 가장 좋게 해석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것처럼, 또한 그분은 잘 말해지고 잘 행해진 것에서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내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그분의 해석은 흔히 우리의 의도보다 더 낫다. 이를테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느니라—비록 너희가 그것이 내게 한 것인 줄 거의 생각지 못하였을지라도"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청년이 그분을 하나님으로 알든지, 아니면 그분을 선하다 부르지 말든지 하기를 원하신다. 이는 우리에게, 우리에게 돌려지는 모든 찬송을 다 하나님께 돌리도록 가르치기 위함이다. 누가 우리를 선하다고 하는가? 그렇다면 모든 선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에게가 아니라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그들에게 말하자. 모든 면류관은 그분의 보좌 앞에 놓여야 한다. 주목하라.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며,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불변하게 선하신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그분의 선하심은 그분 자신에게서 나오고 그분 자신으로 말미암으며, 피조물 안에 있는 모든 선함은 그분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분은 선함의 근원이시니, 그 줄기들이 무엇이든 모든 샘은 그분 안에 있다(약 1:17). 그분은 선함의 위대한 본보기이자 표본이시니, 모든 선함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측량되어야 한다. 그분을 닮고 그분의 뜻에 합당한 것이 선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그분을 *하나님(God)*이라 부르는데, 이는 그분이 선하시기(good)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님은 그분의 영광의 광채이셨으며(그분의 선하심이 곧 그분의 영광이다), 그분의 본체의 형상이셨다. 그러므로 선한 선생님이라 불리시기에 합당하시다.
(2.) 그분은 그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그의 실천을 분명히 지도하신다. 그분은 자신이 선하시고 그러므로 하나님이시라는 그 생각을 끄집어내셨으나, 그 위에 머무르지는 않으셨다. 이는 불필요한 논쟁과 말다툼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분이 본 주제에서 벗어나 그것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리스도의 응답은 간단히 말해 이것이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 제시된 목적은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청년은 자기 질문에서 영생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응답에서 생명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에게 영생이야말로 유일한 참 생명임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것에 관한 말씀이 곧 이 생명의 말씀이다(행 5:20). 현재의 생명은 생명이라는 이름을 받을 자격이 거의 없으니, 우리는 생명의 한가운데서 죽음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혹은 생명에 들어가라고 하심은, 영생의 시작이요 보증인 그 영적 생명을 가리킨다. 그는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알기를 원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그것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것을 얻으니, 이는 아직 완전히 계시되지 않은 신비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그것은 비켜 가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들어가는 길은 순종에 의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에서 우리를 지도하신다. 전자(그리스도의 공로)로써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얻으며, 후자로써, 곧 우리의 증거로써 우리는 그것을 입증한다. 믿음에 덕을 더함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여기서 사용된 단어)이 넉넉히 주어지는 것이다(벧후 1:5,11).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 또한 아버지를 뵙고 누림에 이르는 길이시다. 그분이 유일한 길이시나, 의무와 믿음의 순종은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이다. 죽음에 이르러, 그 큰 날에, 이후의 생명에 들어감, 곧 완전한 들어감이 있으니, 그때에는 오직 자기 의무를 행한 자들만이 생명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 주인의 즐거움에 들어갈 자는 부지런하고 충성된 종이며, 그 즐거움이 그의 영생이 될 것이다. 또한 지금 생명에 들어감이 있으니, 믿는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히 4:3). 우리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며, 이를 위해서도 진실한 순종이 반드시 필요하다.
[2.] 처방된 길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주목하라. 우리에게 계시되고 알려진 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이 일에서의 진실함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복음적 온전함으로 받아들여지니, 이는 우리가 부족하게 행하는 부분에 대하여, 회개를 조건으로 하는 용서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율법의 정죄하는 권능에서 건짐을 받았으나, 율법의 명령하는 권능은 중보자의 손에 맡겨져 있고, 우리는 여전히 그 손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다(고전 9:21). 곧 언약으로서가 아니라 규범으로서 그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포함하니, 이는 큰 계명이기 때문이며(요일 3:23), 또한 그 큰 선지자가 일어나실 때 그들이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모세의 율법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보라. 여기서와 또한 영원토록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 그것들을 우리의 길로 삼아 그 안에 거하고, 그것들을 우리의 규범으로 삼아 그것에 붙어 있으며, 그것들을 우리의 보화로 삼아 지키되, 우리의 눈동자처럼 조심스럽게 지켜야 한다.
[3.] 그가 더 나아가 간청하고 요청함에 따라, 그분은 그가 지켜야 할 몇 가지 특정한 계명들을 언급하신다(마 19:18,19). 그 청년이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주목하라.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고자 하는 자들은 부지런히 그것을 찾고,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에스라는 율법을 찾아 그것을 행하기로 결심하였다(스 7:10). "모세의 율법에는 많은 계명이 있었나이다. 선한 선생님이여, 그중에 어느 것이 그러한 것인지, 곧 구원을 위하여 지키는 것이 필요한 계명이 어느 것인지 제게 알려 주소서."
이에 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계명, 특히 둘째 돌판의 계명들을 명시하신다. 첫째, 우리 자신과 이웃의 생명에 관한 것; 살인하지 말라. 둘째, 우리 자신과 이웃의 정결에 관한 것이니, 이는 생명 그 자체만큼 우리에게 소중해야 한다; 간음하지 말라. 셋째, 소유의 법으로 둘러싸인, 우리 자신과 이웃의 재산과 외적 재물에 관한 것; 도둑질하지 말라. 넷째, 진실에 관한 것, 그리고 우리 자신과 이웃의 명예에 관한 것; 거짓 증언하지 말라—너 자신을 위해서도, 네 이웃을 대적하여서도 하지 말라. 이는 여기서 그 의미가 폭넓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특정한 관계의 의무에 관한 것;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여섯째, 이 모든 의무들의 근원이요 요약인 저 포괄적인 사랑의 법이니, 이 모든 것이 거기서 흘러나오고, 그 위에 세워지며, 그 안에서 다 성취된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갈 5:14, 롬 13:9), 저 최고의 법이다(약 2:8). 어떤 이들은 이것이 둘째 돌판의 요약으로서가 아니라 열째 계명의 특정한 의미로서 여기에 등장한다고 생각한다. 곧 탐내지 말라인데, 마가복음에서는 남의 것을 속여 빼앗지 말라로 되어 있다. 이는 내가 다른 사람의 손해나 손실을 통하여 나 자신의 이익이나 유익을 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곧 탐내는 것이요, 내가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해야 할 이웃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구주께서는 여기서 둘째 돌판의 의무들만을 명시하신다. 첫째 돌판의 의무가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1. 당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이 그들의 설교에서 이 교훈들을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크게 변질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강조하는 동안, 둘째 돌판의 의무들의 요약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간과되었다(마 23:23). 그들의 설교는 온통 의식적인 것으로만 흘렀고 도덕적인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가장 덜 강조한 것을 가장 강하게 강조하신 것이다. 하나의 진리가 다른 진리를 밀어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나의 의무가 다른 의무를 밀어내서는 안 되며, 각각이 그 자리를 알고 그 자리에 지켜져야 한다. 다만 공정함이 요구하는 바는, 가장 밀려날 위험에 처한 것을 일으켜 세워 주는 것이다. 우리가 증언하도록 부름 받는 그 시의적절한 진리는, 반대받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간과되는 것이다. 2. 그분은 그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도덕적 정직이 참된 그리스도교의 필수적인 한 가지이며 그에 따라 유념해야 할 것임을 가르치려 하셨기 때문이다. 단지 도덕적인 사람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에 미치지 못하지만, 부도덕한 사람은 분명히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경건하게 사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근신하고 의롭게 사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아니, 첫째 돌판의 의무가 그 안에 종교의 본질을 더 많이 지니고 있을지라도, 둘째 돌판의 의무는 그 안에 종교의 증거를 더 많이 지니고 있다. 우리의 빛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타오르지만, 우리의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비친다.
II. 그가 이처럼 훌륭하게 입찰하였으나 어떻게 미치지 못하였으며 어디에서 실패하였는지를 여기서 보라. 그는 두 가지 점에서 실패하였다.
1. 교만, 곧 자기 자신의 공로와 힘에 대한 헛된 자만에 의하여. 이것이 수천 명을 망하게 하는 것이니, 그들은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상상함으로써 자신을 비참한 상태에 묶어 둔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어떤 계명들을 지켜야 하는지 말씀하셨을 때, 그는 매우 거만하게 대답하였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사오니(마 19:20).
이제, (1.) 율법을 그가 이해한 대로, 곧 죄의 외적 행위만을 금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그가 참을 말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며, 그리스도께서도 그것을 아셨으니, 이는 그분이 그를 반박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아니, 마가복음에는 그를 사랑하사라고 되어 있으니, 거기까지는 매우 선하였고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배설물이었으나,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는 것을 그 자체로 경멸할 수 없는 특권으로 여겼다(빌 3:6). 이 계명들에 대한 그의 준행은 보편적이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다 지켰사오니. 그것은 이르고도 한결같았다. 어려서부터. 주목하라. 사람이 중대한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면서도 은혜와 영광에는 미치지 못할 수 있다. 그의 손은 외적 오염에서 깨끗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그는 그 마음의 악함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에조차 이르지 못하는 자들, 곧 그 사기와 불의, 술 취함과 부정함이 그들을 대적하여 증언하는 자들에 대하여,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일컬었을지라도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어겨 온 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이라 생각해야 하겠는가? 참으로, 천국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에게조차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또한 그가 자기 의무가 더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 것은 칭찬할 만하였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는 자기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채우기 위하여 무언가가 자기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확신하였고, 그러므로 그것을 알기를 원하였으니, 이는 만일 그가 자신에 대하여 잘못 안 것이 아니라면, 그가 그것을 행할 의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이처럼 앞으로 나아가려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그 가르침이 모세의 제도를 개량하고 완성한다고 여겨지던 그리스도께 자신을 의탁하였다. 그는 그분 종교의 독특한 교훈들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였으니, 이는 자신을 다듬고 완성할 그 안의 모든 것을 갖기 위함이었다. 누가 이보다 더 훌륭하게 입찰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2.) 그가 한 이 말 가운데서조차 그는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드러냈다. [1.] 그리스도께서 풀이하신 대로 율법을 그 영적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의심할 바 없이 그는 많은 점에서 이 모든 계명을 어겼던 것이다. 만일 그가 율법의 범위와 영적 의미를 알았더라면, *이 모든 것을 내가 다 지켰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말하는 대신, 부끄러움과 슬픔으로 "이 모든 것을 내가 다 어겼사오니, 내 죄를 사함받으려면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2.]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가 한 말은 교만과 헛된 영광의 냄새를 풍겼으며, 믿음의 법에 의하여 배제되고(롬 3:27) 또한 칭의에서 배제되는(눅 18:11,14) 저 자랑하는 것을 너무 많이 그 안에 지니고 있었다. 그는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 앞에서 그럴듯해 보이는 자기 신앙고백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였고, 바로 그것을 자랑하였으니, 그것이 도리어 그 신앙고백의 받아들여질 만함을 망쳐 버렸다. 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는 말은, 아마도 더 깊은 가르침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상상한 현재의 온전함에 대한 칭찬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그가 어디서 부족한지 단 하나의 예라도 보여 보라는, 그리스도 자신을 향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2. 그는 세상과 그 안에서의 자기 향락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에 의하여 미치지 못하였다. 이것이 그를 좌초시킨 치명적인 암초였다. 보라.
(1.) 그가 이 일에서 어떻게 시험을 받았는지(마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라.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자랑한 율법에 대한 순종의 문제를 비켜 가시고 그것을 떨어뜨리셨으니, 이는 이렇게 하는 것이 율법의 범위에 대한 논쟁보다 그를 드러내는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오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네가 네 순종에 있어서 자신이 진실함을 입증하고자 할진대(진실함이 곧 우리의 복음적 온전함이니), 네가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율법에 더하신 것에까지 이르고자 할진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네가 생명에 들어가 온전히 행복하고자 할진대." 이는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처방하시는 것이 무리한 봉사의 행위(supererogation)나 그것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는 어떤 완전함이 아니라, 그 주된 취지와 의도에 있어서 그것이 우리의 필수적이고 없어서는 안 될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그분은 여기까지 우리 모두에게도 하신 것이니, 만일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하고자 하고 마침내 영생의 상속자로 발견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행하여야 한다.
[1.]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부와 재물보다 하늘의 보화를 실질적으로 더 귀히 여겨야 한다. 그 영광이 우리의 판단과 평가에서 이 영광보다 우선해야 한다. 천국을 지옥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우리에게 칭찬받을 일이 못 되니,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도 더 이상 여기 머물 수 없을 때에는 피난처로 삼을 그 예루살렘을 기뻐할 것이요 그것을 비축해 두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선택으로 삼고, 그것을 이 땅보다 더 귀히 여기는 것—이것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제, 이것의 증거로서,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것을 처분해야 한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만일 자선의 기회가 매우 절박하다면, 네 소유를 팔아 궁핍한 자들에게 줄 것을 마련하라. 이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교훈을 염두에 두고 행한 것과 같다(행 4:34). 네가 거룩한 용도를 위하여 내어줄 수 있는 것, 곧 네 모든 여분의 것을 팔라. 만일 달리 그것으로 선을 행할 수 없다면, 그것을 팔라.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하여 기꺼이 그것과 헤어지라." 세상에 대한 은혜로운 경시와, 그 안에 있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긍휼은, 모든 이에게 구원의 필수 조건이다. 그리고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 구제하는 것은 그러한 세상에 대한 경시와 우리 형제들에 대한 긍휼의 필수적인 증거이니, 그 큰 날의 심판이 이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다(마 25:35). 비록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많은 자들이 이것을 믿는 것처럼 행하지 않을지라도,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세상을 놓아야 한다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탐심이 이 청년을 가장 쉽게 사로잡는 죄임을 아셨으니, 그가 가진 것을 비록 정직하게 얻었을지라도 그것과 기꺼이 헤어질 수는 없었던 것이며, 이로써 그는 자기 불성실함을 드러냈다. 이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부르심과 같았다. 너는 너의 고향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그들의 가장 강한 은혜로 시험하시듯이, 위선자들은 그들의 가장 강한 부패로 시험하신다. 둘째,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버리고 잃고 들인 모든 것에 대한 넘치는 보상으로 의지해야 한다.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우리는 값을 치르는 의무의 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니, 그 행복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모든 지출에 대하여 우리에게 넉넉히 갚아 줄 것이다. 그 교훈은 모질고 거칠게 들렸다. "네 소유를 팔아 그것을 내어주라." 그리고 "자선은 가정에서 시작된다(가까운 데서 시작된다)"는 반론이 곧 일어날 법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하늘에 있는 보화에 대한 이 확언을 덧붙이신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약속들은 그분의 교훈들을 쉽게 만들고, 그분의 멍에를 단지 견딜 만한 것일 뿐만 아니라 즐겁고 달콤하며 매우 위안이 되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약속은, 그 교훈이 이 청년의 자선과 세상에 대한 경시를 시험한 것 못지않게,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2.]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주 예수님의 인도와 다스리심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 와서 나를 따르라. 여기서는 그분의 인격을 가까이서 그리고 한결같이 따르는 것을 뜻하는 듯하며, 이를 위하여 그가 세상에서 가진 것을 파는 일이 필요했던 것은, 다른 제자들이 자기 생업을 버리는 일이 필요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되, 그분의 규례에 합당하게 참여하고, 그분의 본을 엄격히 따르며, 그분의 처분에 기쁘게 복종하고, 정직하고 보편적인 순종으로 그분의 법도를 지키고 그분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을 그분을 향한 사랑과 그분을 향한 의지의 원리로부터, 그리고 그분과 비교할 때 다른 모든 것을, 더욱이 그분과 경쟁하는 모든 것을 거룩히 경시하는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와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 이러한 조건들로, 그리고 이보다 낮지 않은 조건들로, 구원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조건들은 매우 쉽고 합당한 것이니, 어떤 조건으로든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된 자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2.) 그가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보라. 이것이 그의 연약한 부분을 건드렸다(마 19:22). 그가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 이는 그가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더라.
[1.] 그는 부유한 사람이었고 자기 재물을 사랑하였으므로, 그래서 떠나갔다. 그는 이러한 조건으로 영생을 얻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주목하라. 첫째,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에 마음을 두려는 가장 큰 유혹 가운데 있다. 세상 재물의 매혹하는 성질이 그러하여, 그것이 가장 덜 필요한 자들이 그것을 가장 많이 갈망한다. 재물이 늘면 그때에 그것에 마음을 두는 위험이 있다(시 62:10). 만일 그가 온 세상에서 단지 두 렙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혹은 통에 단지 한 줌의 가루와 병에 약간의 기름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으로 가난한 선지자를 위하여 떡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그 시험은 훨씬 더 컸으리라고 생각될 법하다. 그러나 그러한 시험들은 극복된 적이 있으니(눅 21:4, 왕상 17:14), 이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가장 절박한 궁핍보다 더 강하게 끌어당김을 보여 준다. 둘째, 이 세상에 대한 군림하는 사랑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어떤 선한 갈망을 가진 듯 보이는 많은 자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큰 재산은, 그것을 딛고 올라선 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만, 그것을 사랑하는 데 얽매인 자들에게는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큰 방해가 된다.
그럼에도 그 안에 어느 정도 정직함이 있었으니, 그는 그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자 떠나갔고, 자기 마음으로 그 엄격함에 맞출 수 없는 것을 짐짓 따르는 척하지 않았다. 데마가 행한 것처럼 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으니, 데마는 의의 도를 알고서도 후에 이 세상을 사랑하여 곁길로 떠나, 자기 신앙고백에 더 큰 수치를 끼쳤다. 그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자, 위선자가 되지는 않으려 하였던 것이다.
[2.] 그러나 그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고 (선을 향하여) 잘 기울어진 사람이었으므로, 그래서 근심하며 갔다. 그는 그리스도께로 기우는 마음이 있었고 그분과 헤어지기를 싫어하였다. 주목하라. 많은 사람이 자기가 마지못해 짓는 죄로 말미암아 망한다. 그는 근심하며 그리스도를 떠나지만, 그리스도를 떠난 것을 결코 참으로 슬퍼하지는 않으니, 이는 만일 참으로 슬퍼한다면 그분께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사람의 재물은, 그것이 그의 유혹이 되었던 그때에, 그에게 *마음의 괴로움(번뇌)*이었다. 그렇다면 후에, 그의 소유가 다 사라지고 영생의 모든 소망도 함께 사라질 때에, 그 슬픔은 얼마나 크겠는가?
²³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²⁴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²⁵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²⁶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²⁷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²⁸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²⁹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³⁰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 부자가 그리스도와 결별한 일을 계기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나누신 강론을 보게 된다.
I.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계기로 부자들의 구원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 주신다(마 19:23-26).
1. 부자, 특히 여기 등장하는 이런 부자가 천국에 이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주목하라, 다른 사람들이 입은 해와 넘어짐으로부터 우리에게 경계가 될 만한 교훈을 끌어내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이제, (1.) 이것은 우리 구주께서 단호하게 단언하신 바이다(마 19:23,24). 그분께서 이 말씀을 가난하고 세상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제자들에게 하신 것은, 세상의 재물이 적을수록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방해받는 것도 적다는 사실로 그들이 자기 처지에 만족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주목하라, 낮은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높고 번영한 처지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만족거리가 되어야 한다. 비록 그들이 이 세상에서는 부자보다 더 고되게 살더라도, 그와 더불어 더 나은 세상에 더 쉽게 이른다면 불평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은 확증되어 있다(마 19: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국으로 가는 길이 어떠한지 알 이유가 있는 분께서, 그 길을 친히 활짝 열어 놓으셨기에, 우리에게 이것이 그 길에서 가장 큰 난관 중 하나임을 말씀하신다. 이는 반복된다(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렇게 그분께서는 사람이 깨닫기 싫어하고 믿기는 더욱 싫어하는 것을 한 번, 아니 두 번 말씀하신다.
[1.] 그분께서는 부자가 선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구원을 받는 것, 곧 이 세상에서든 저 세상에서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모든 사람에게 좁은 길이며, 그리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이지만, 부자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의무가 요구되는데, 그들은 그것을 거의 행하지 못한다. 또한 더 많은 죄가 쉽게 그들을 둘러싸는데, 그들은 그것을 거의 피하지 못한다. 부자들에게는 저항해야 할 큰 유혹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매우 교묘하게 파고든다. 미소 짓는 세상에 매혹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며, 우리가 이 감추인 보화로 가득 찰 때 그것을 우리의 분깃으로 삼지 않기란 매우 어렵다. 부자들은 자기들의 재산과 영향력, 시간,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선을 행하고 얻을 기회에 대하여 큰 회계 보고를 해야 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난관들을 뚫고 나아가게 하려면 큰 분량의 신적 은혜가 있어야 한다.
[2.] 그분께서는 부자의 회심과 구원이 너무도 지극히 어려워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신다(마 19:24). 이것은 사람의 기술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을 나타내는 속담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 무엇도 부자가 이 난관을 넘어서게 할 수 없다. 배교자들의 구원의 어려움(히 6:4)과 늙은 죄인들의 구원의 어려움(렘 13:23)이 이렇게 불가능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누구의 구원이라도 너무도 어려워서(심지어 의인이라도 겨우 구원을 얻는다면), 특별한 어려움이 있는 경우에는 이렇게 묘사하는 것이 합당하다. 사람이 부자이면서 자기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기란 매우 드문 일이며, 자기 재물에 마음을 두는 자가 천국에 이르기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요일 2:15, 약 4:4). 첫째로, 천국으로 가는 길은 바늘귀에 매우 적절하게 비유되는데, 그것은 맞히기도 어렵고 통과하기도 어렵다. 둘째로, 부자는 짐을 지는 짐승인 낙타에 적절하게 비유된다. 낙타가 짐을 지듯이 그도 재물을 가지고 있으되, 그것을 운반은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고, 곧 다른 사람들에게 남겨두어야 한다. 그것은 짐이니, 사람들이 두터운 진흙으로 스스로 짐을 지기 때문이다(합 2:6). 낙타는 큰 짐승이지만, 둔하고 다루기 힘든 짐승이다.
(2.) 이 진리는 제자들이 매우 놀라워하며 거의 믿지 못한 바이다(마 19:25). 그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놀라운 진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그것들에 경악하며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이것도 그중 하나였으나, 그들의 연약함이 그 놀람의 원인이었다. 그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하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를 반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주목하라, 구원의 길에 놓여 있는 많은 어려움을 생각할 때, 어떤 이라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지 생각하면 그분께 속한 자가 그토록 적다는 것이 놀라워 보일지 모르나,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 생각하면 그토록 많은 자가 그분께 속해 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안에서 영원토록 경탄을 받으실 것이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부유하여 많은 소유를 가진 자가 그토록 많고, 부자가 되기를 원하며 많은 소유에 마음이 끌린 자는 더욱 많은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재물이 부자들에게 방해가 된다면, 부자가 아닌 자들에게도 교만과 사치가 따르지 않겠으며, 그것이 그들에게도 똑같이 위험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부자들이 흐름을 거슬러 분투해야 할 좋은 이유이다.
2. 비록 어렵기는 하나, 부자가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마 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곧 돌이켜 제자들을 간절히 바라보시며, 부자들이 영적인 일에서 유리하다는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부끄럽게 하여 버리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이 난관을 이미 넘어서서 천국으로 가는 좋은 길에 있는 자들로 보셨는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난한 만큼 더욱 그러하였다.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일반적으로 이것은 위대한 진리이니, 곧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능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일을 행하실 수 있으며, 하나님께 너무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이다(창 18:14, 민 11:23).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도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시니, 그분의 능력은 무한하고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진리가 여기서 적용된다. (1.) 누구든지의 구원에 적용된다. 제자들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하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어떤 피조물의 능력으로도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니, 한 영혼의 구원을 도모하는 일에서 사람의 지혜는 곧 막혀 버리고, 그것을 이루는 일에서 사람의 능력은 좌절될 것이다. 그 어떤 피조물도 한 영혼의 구원에 필요한 변화를 자기 자신 안에서든 다른 누구 안에서든 이루어 낼 수 없다. 그토록 거센 물줄기를 돌이키는 것, 그토록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 그토록 완고한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창조요, 부활이니,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철학으로도, 의술로도, 정치로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주목하라, 구원의 사역의 시작과 진행과 완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달려 있으며, 그 능력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음은 그 능력으로 일하여지고(엡 1:19), 그 능력으로 지켜진다(벧전 1:5). 욥은 하나님께서 깨우치시고 낮추시는 은혜를 체험하고서, 그 무엇보다도 주께서는 무소불위하사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하고 고백하였다(욥 42:2). (2.) 특히 부자들의 구원에 적용된다. 그런 자들이 구원받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으로서는 이것조차 가능하다. 부자들이 그들의 세속성 안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주목하라, 이 세상의 유혹에 둘러싸인 자들의 성화와 구원도 절망할 일이 아니니, 그것은 가능하며, 신적 은혜의 충족하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 자들이 천국에 이르게 되면,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영원한 기념비가 될 것이다. 나는 이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 지금 슬퍼하며 떠나간 이 젊은 신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아직 간직하고 계신 긍휼의 암시가 담겨 있다고 기꺼이 생각하고 싶다. 그를 회복시켜 더 나은 마음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께는 여전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II. 베드로는 이 일을 계기로, 이 젊은이가 그리스도와 결별하게 된 그 조건들에 자기들은 이르렀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는데, 자기들이 그로 인해 무엇을 얻을 것인지를 물었다(마 19:27 이하).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거는 기대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약속들을 보게 된다.
1.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께 거는 기대를 본다. 베드로는 나머지 제자들을 대표하여, 자기들이 그분을 위하여 버린 것의 대가로 무언가 상당한 것을 그분께 의지하고 있음을 표한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그리스도께서 그 젊은이에게, 모든 것을 팔고 와서 자기를 따르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이제 베드로는 알고자 한다.
(1.) 그들이 그 조건들에 충분히 이르렀는지를 알고자 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팔지는 않았으나(그들 중 다수는 부양해야 할 아내와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버렸다. 그들은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어떤 식으로든 방해가 되는 한, 그것을 단념하였다. 주목하라, 구원받을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들을 때, 우리는 은혜를 통하여 우리가 그 특징들에 부합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제 베드로는, 적어도 그 조건의 주된 취지와 목적에 관하여는 자기들이 거기에 이르렀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그리스도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비하여 세상과 보이는 것들을 거룩하게 멸시하는 마음을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입증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정된 규칙을 줄 수 없으며, 우리가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나이다. 아아! 그들이 버린 모든 것이란 보잘것없는 모든 것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참으로 세관의 한 자리를 떠났으나, 베드로와 그들 대부분은 다만 몇 척의 배와 그물, 그리고 보잘것없는 고기잡이업에 딸린 도구들을 떠났을 뿐이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그것을 마치 무슨 대단한 것이나 되는 양 말하는 것을 보라.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나이다. 주목하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섬김과 고난, 우리의 지출과 손실을 지나치게 크게 부풀리고, 그분을 우리에게 크게 빚진 자로 여기기가 너무도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가지고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신다. 비록 그들이 버린 것은 보잘것없었으나, 그것은 그들의 전 재산이었고, 마치 과부의 두 렙돈과 같았으며, 더 많은 것이었다 한들 그만큼 그들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것을 버리고 자기를 따른 것을 기쁘게 받으셨으니, 그분께서는 사람이 가진 대로 받으시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그 젊은이가 모든 것을 팔았더라면 받았을 그 보화를 자기들이 기대할 수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모든 것을 버린 우리가 그것을 얻으리이까?" 모든 사람이 자기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추구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자기 자신의 참된 유익을 헤아리고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셨고, 모세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우리가 참고 선을 행함으로 그것을 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따름으로 무엇을 얻을 것인지 묻도록 격려하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우리를 우리에게 손해되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이 유익하게 부르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리이까 하고 묻는 것이 계명에 눈을 둔 순종하는 믿음의 언어이듯이,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 것은 약속에 눈을 둔, 소망하고 신뢰하는 믿음의 언어이다. 그러나 주목하라, 제자들은 오래전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섬김에 자신을 바쳤으면서도, 지금까지 한 번도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지 않았다. 비록 그로 인한 유익이 눈에 보이는 전망이 전혀 없었음에도, 그들은 그분의 선하심을 너무도 확신하여 끝내 그분으로 인해 손해 보지 않을 줄 알았으므로, 그분께서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손실을 갚아 주실지를 그분께 맡겨 두고서, 자기 일에 충실하며 자기 삯이 무엇일지를 묻지 않았다. 주목하라,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섬기되 그분과 흥정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 이제 이 젊은이가 그리스도를 떠나 자기 소유로 돌아갔으니, 제자들로서는 자기들이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무엇을 의지해야 할지 생각해 볼 때였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위선과 배교로 무엇을 지키는지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진실함과 한결같음을 대가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은혜로 무엇을 얻기를 소망하는지를 헤아려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하기보다 오히려 불쌍히 여길 이유를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2.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믿음과 순종의 발자취를 따르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들을 본다. 베드로의 말 속에 있던 헛된 영광이나 헛된 소망이 무엇이든,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눈감아 주시고 지나치게 따지지 않으시며, 도리어 이 기회를 통하여 한 약속의 보증을 주신다.
(1.) 그분을 직접 따른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다(마 19:28). 그들은 가장 먼저 그분을 따른 자로서 그분께 대한 자신들의 존경을 드러냈고,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하늘에서 보화뿐 아니라 영예도 약속하신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은 저 나라에서 영예의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부터 그 영예에 대한 하사장 곧 특허장을 받는다. 세상이 새롭게 될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가 열두 보좌에 앉으리라. 주목하라.
[1.] 그 특허장의 전문, 곧 그 하사의 근거인데, 이는 통례대로 그들의 공로를 열거하는 것이다. "너희가 세상이 새롭게 될 때에 나를 따랐으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것을 행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신 때는 거듭남의 때, 개혁의 때(히 9:10)였으니, 그때에 옛것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이기 시작하였다. 제자들은 교회가 아직 태아 상태에 있을 때, 복음의 성전이 아직 골격을 갖추는 중일 때, 그들이 사도직에 속한 위엄과 권세보다는 그 일과 섬김을 더 많이 감당하던 때에 그리스도를 따랐다. 이제 그들은 그러는 자가 거의 없을 때에 끊임없는 수고로 그리스도를 따랐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한 영예의 표를 두실 것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일찍이 그분께 나아온 자들, 곧 세상이 새롭게 될 때에 그분을 따른 자들처럼 그분을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까지 그분을 신뢰한 자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가지신다. 주목하라, 베드로는 그분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것을 말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그들이 자기를 따른 것만을 말씀하시니,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2.] 그들의 영예의 시기, 곧 그것이 언제 시작될지를 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증서의 날짜로부터 즉시는 아니다. 아니다, 그들은 지금 그러하듯이 한동안 무명한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라야 그러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상이 새롭게 될 때에라는 구절을 이와 연관시켜, "지금 나를 따른 너희가 세상이 새롭게 될 때에 이렇게 존귀하게 되리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거듭남일 것이니, 그때에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만물의 회복이 있을 것이다. 은혜 안에서 거듭남에 참여하는 모든 자(요 3:3)는 영광 안에서의 거듭남에 참여할 것이다. 은혜가 첫째 부활이듯이(계 20:6), 영광은 둘째 거듭남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의 영예가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까지 미루어진 것은 다음을 암시한다. 첫째, 그들은 그때까지 자신들의 높여짐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주목하라, 우리 주님의 영광이 미루어지는 한, 우리의 영광도 그렇게 미루어지는 것이 합당하며,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소망에 대해서처럼 간절한 기대로 그것을 기다려야 한다(롬 8:19).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인내로 살고 일하며 고난받아야 하는데, 그러므로 이것들은 이런 미루어짐으로 연단을 받아야 한다. 둘째, 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분의 높여짐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영예는 그분의 영예 안에서 그분과 누리는 교제여야 한다. 그들은 고난받으신 예수와 함께 고난받았으니, 다스리시는 예수와 함께 다스려야 한다. 이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그리스도께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 계신 곳에 있어야 하며(요 12:26), 그분과 함께 나타나야 한다(골 3:4).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손실뿐 아니라 그 미루어짐에 대해서도 넘치는 보상이 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에, 우리는 우리의 것만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을 이자와 함께 받을 것이다. 가장 긴 항해가 가장 풍성한 수익을 가져온다.
[3.] 이로써 하사되는 영예 그 자체이다.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 약속의 구체적인 의미를 단정하기는 어려우며, 또 이 약속이 한 번 이상 여러 번 성취되지 않았겠는가 하는데, 나는 그렇게 인정하는 데 아무 해가 없다고 본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우편으로 올라가사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 사도들은 성령으로 능력을 받을 것이며(행 1:8), 지금보다 자신들이 훨씬 높여져서,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 마치 보좌에 앉은 듯이 여길 것이다. 그들은 재판석에서 판결하는 재판관처럼 권위 있게 복음을 전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의 위임은 확대될 것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율법을 선포할 것이니, 이로써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갈 6:16)가 다스려지고, 육신을 따른 이스라엘로서 계속 불신앙에 머무는 자들과 그와 같이 행하는 모든 다른 자들은 정죄받을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영예와 권세는 렘 1:10로 설명될 수 있으니, 보라 내가 너를 여러 나라 위에 세웠나니라 하였고, 또 겔 20:4의 네가 그들을 심판하려느냐, 단 7:18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라, 그리고 계 12:1로 설명될 수 있는데, 거기서 그리스도의 교훈이 열두 별의 면류관으로 불린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위하여 나타나실 때(마 24:31), 그분께서 사도들을 보내어 유대 민족을 심판하게 하실 것이니, 이는 그 멸망 속에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그들의 예언이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어떤 이들은 이것이 아직 오지 않은, 세상 끝에 적그리스도가 무너진 후에 있을 유대인의 회심과 관련된다고 본다. 휘트비 박사가 그러하니, 그는 "이것은 사도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그들 자신이 인격적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거하던 그 영과, 그들이 세상에 전한 그 순결함과 지식이 다시 살아남으로써이며, 무엇보다도 그들의 복음이 유대인의 믿음의 표준과 삶의 지침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이다"라고 한다. 넷째, 이것은 분명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 온전한 성취를 이룰 것이니, 그때에 성도들이 전체적으로 세상을 심판할 것이며, 특히 열두 사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배심관으로서 큰 날의 심판에 참여할 것이다. 그때에 온 세상이 그 최종 판결을 받고, 그들은 그 선고를 확정하며 갈채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파가 거명된 것은, 한편으로는 사도의 수가 의도적으로 지파의 수와 같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도들이 유대인이었고 그들에게 가장 우호적이었으나 그들에게 가장 악의적으로 박해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성도들이 육신을 따른 자기 지인과 친족을 심판하리라는 것, 곧 큰 날에 자기들이 호의를 베풀었던 자들을 심판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들을 심판하던 박해자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약속의 일반적인 취지는, 성도들을 위하여 하늘에 예비된 영광과 존귀를 보여 주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당한 수치에 대한 넘치는 보상이 될 것이다. 가장 많이 행하고 가장 많이 고난받은 자들을 위하여 더 높은 영광의 등급이 있다. 사도들은 이 세상에서는 이리저리 쫓기고 시달렸으나, 거기서는 안식과 평안 가운데 앉을 것이다. 여기서는 결박과 환난과 죽음이 그들을 기다렸으나, 거기서는 그들이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들이 법정으로 끌려갔으나, 거기서는 재판석으로 높여질 것이다. 여기서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그들을 짓밟았으나, 거기서는 그들 앞에서 떨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그들의 모든 손실과 지출을 보상하기에 충분한 보상이 되지 않겠는가?(눅 22:29).
[4.] 이 하사의 확증이다. 그것은 견고하며, 침범할 수 없이 불변하게 확실하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하사를 행할 권세를 받은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인 내가 그것을 말하였으니, 그것은 폐기될 수 없느니라."
(2.) 여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를 다른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이 있다. 이렇게 높임을 받는 것은 사도들에게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 영예는 그분의 모든 성도가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중 누구도 그분으로 인해 손해 보지 않도록 보살피실 것이다(마 19:29).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린 자마다 받으리라.
[1.] 여기서 그리스도를 위한 손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자기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에게 행해지는 모든 일에서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여기서 그분께서는 구체적인 것들을 명시하시니, 이는 최악의 경우를 헤아려 두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사도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많은 것을 버렸으니, 이를테면 집을 버리고 스스로 광야로 나가 떠돌아다니거나, 함께 가려 하지 않는 소중한 친족들을 떠나 그리스도를 따랐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온유하고 은혜로운 심령이 떼어 놓기에 가장 어려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아내가 그것이며, 끝에 전토가 더해지는데, 그 소산이 가정의 생계를 떠받쳤기 때문이다.
이제, 첫째, 이런 것들의 손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으로 전제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서는 그것을 갚으실 의무를 지지 않으신다. 많은 이가 변덕과 격정으로 형제와 아내와 자식을 버리니, 이는 자기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다. 그것은 죄 된 버림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을 버리되, 곧 그들을 지키면서 선한 양심을 지킬 수 없기에, 그들을 버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분깃을 버리든지 해야 하기에, 우리가 그들에 대한 관심이나 그들에 대한 의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누리는 위로를 버리되, 그리스도를 부인하느니 차라리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것도 그분과 그분의 뜻과 영광에 눈을 두고 그리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바로 이렇게 보상받을 일이다. 순교자와 신앙고백자를 만드는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 대의이다.
둘째, 그것은 큰 손실로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갚으실 것을 책임지시니, 그것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분께서 갚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해자들의 잔인함을 보라. 그들은 그리스도께 충성한다는 죄목 외에는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의 모든 소유를 빼앗았다! 박해받는 자들의 인내를 보라. 그리고 그들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강함을 보라. 그 사랑은 이 모든 물로도 끌 수 없는 것이었다!
[2.] 여기서 이런 손실에 대한 보상이 보증되어 있다. 수천 명이 그리스도와 거래하며 그분을 멀리까지 신뢰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그분으로 인해 손해 본 적이 없으며, 도리어 셈이 맞추어질 때에는 어느 누구도 그분으로 인해 말할 수 없이 이득을 본 자가 아닌 자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친히 보증하시기를, 자기를 위해 고난받는 종들을 손해 보지 않게 하시고 무사히 지키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풍성히 상 주시리라고 하신다.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한 자기들의 손실 목록을 작성하게 하라. 그러면 그들은 반드시 받을 것이다.
첫째, 이 세상에서 여러 배를 받을 것이다. 때로는 그들이 버린 그것들 그 자체로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 고난받는 종들을 위하여, 그들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해 주던 자들을 떠나보낸 것보다 더 많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에게 그렇게 해 줄 친구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사도들은 가는 곳마다 자기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대접하며 자기들에게 마음과 문을 열어 주는 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친절함으로 곧 한없이 더 낫고 더 값진 것들로 여러 배를 받을 것이다. 그들의 은혜는 자라고, 그들의 위로는 넘치며,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들을 갖고, 그분과 더 자유로운 교제를 누리며, 그분으로부터 더 충만한 교통을 받고,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한 더 밝은 예견과 더 달콤한 맛봄을 가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참으로, 자기들이 아내나 자식들 안에서 가질 수 있었던 것보다 백 배나 더 많은 위로를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마침내 영생을 받을 것이다. 앞의 것만으로도, 설령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충분한 상이다. 백분의 백이면 큰 이익이거늘, 하물며 하나에 백 배임에랴? 그런데 이것이, 말하자면 덤으로 더하여진다. 여기 약속된 생명은 그 안에 생명의 모든 위로를 최고의 정도로, 그리고 그 모두를 영원히 포함한다. 이제 우리가 이 약속에 믿음을 섞어,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이루실 것을 신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분명코 그분을 위하여 행하기에 지나친 일이 아무것도 없고, 당하기에 너무 어려운 일이 아무것도 없으며, 떼어 놓기에 너무 아까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여겨야 마땅하다.
우리 구주께서는 마지막 절에서, 마치 영광 가운데서의 탁월함이 은혜의 분량과 등급보다는 시간상의 선후에 따라 정해지기라도 하는 양 여기는 어떤 이들의 오해를 미리 막으신다. 아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손을 엇갈리게 하실 것이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신 것을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실 것이며, 믿지 않는 유대인은 버리시고 믿는 이방인은 받으실 것이다. 하늘의 기업은 땅의 기업이 흔히 그러하듯 나이의 연장이나 출생의 우선순위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주어진다. 이것은 또 하나의 설교의 본문이니, 우리는 그것을 다음 장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게 된다. I. 그리스도께서 거처를 옮기시어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경으로 들어가심(마 19:1,2). II. 이혼에 관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제자들과 나누신 말씀(마 19:3-12). III. 그분께 데려온 어린아이들을 친절히 맞아 주심(마 19:13-15). IV. 그분께 나아온, 장래가 촉망되는 한 젊은 사람과 그리스도 사이에 오간 일에 대한 기록(마 19:16-22). V. 그 일을 계기로, 세상에서 많이 가진 자들의 구원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들에게 주어질 확실한 보상에 관하여 제자들과 나누신 말씀(마 19:2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