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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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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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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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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장 서론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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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章)은 앞 장에서 시작된 우리 구주의 강론, 곧 그의 재림과 세상 끝에 관한 강론을 이어받아 마무리한다. 이것은 그가 제자들에게 주신 경계(警戒)의 고별 설교였으니, 요 14:15,16의 말씀이 그들에게 위로의 고별이었던 것과 같다. 이 세상처럼 시험과 환난이 가득한 곳에서 제자들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하였다. 저 위로의 강론을 적용한 결론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이제 이처럼 진지하게 일깨우는 경계의 말씀을 이어가면서, 이 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나오는데, 그 취지는 모두 동일하다—곧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도록 우리 모두를 지극한 주의와 부지런함으로 분발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분께서 자기 교회에 작별을 고하실 때마다 이 재림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았으니, 돌아가시기 전의 작별(요 14:2)에서도, 승천하실 때의 작별(행 1:11)에서도, 그리고 성경 정경(正經)을 닫으실 때의 작별(계 22:20)에서도 그러하였다. 이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에게 긴요하니, 그 이유는 이러하다.

I. 그때에 우리가 그분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게 하려 함이니, 이것은 열 처녀의 비유에서 보여 준다(마 25:1-13).

II. 그때에 우리가 그분께 우리의 회계(會計)를 드릴 준비가 되어 있게 하려 함이니, 이것은 세 종의 비유에서 보여 준다(마 25:14-30).

III. 그때에 우리가 그분께로부터 우리의 최종 선고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게 하며, 또 그 선고가 영생에 이르는 것이 되게 하려 함이니, 이것은 마지막 심판의 과정을 한층 명료하게 묘사하는 가운데 보여 준다(마 25:31-46).

이것들은 두렵게 살펴야 할 일들이니, 이는 우리 각 사람에게 영원토록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장 1-13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The Parable of the Ten Virg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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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처녀의 비유

¹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으리니
² 그 중의 다섯은 슬기 있고 다섯은 미련한지라
³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⁴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⁵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⁶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⁷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⁸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⁹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¹⁰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¹¹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¹²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¹³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I. 일반적으로 비유로 설명되는 대상은 천국, 곧 복음 아래에서의 사물의 상태, 그리스도의 외적 왕국, 그리고 그 왕국의 시행과 성공이다. 그리스도의 비유들 가운데 어떤 것은 천국이 현재 받아들여지는 모습에서 지금 어떠한지를 보여 주었으나(마 13:1-52), 이 비유는 하나님의 비밀이 마침내 이루어지고 그 왕국이 아버지께 바쳐질 때 천국이 어떠할 것인지를 말해 준다. 그 큰 날에 준비된 자들과 준비되지 못한 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통치의 시행이 이 비유로 설명될 수 있다. 혹은 여기서 왕국은 그 왕국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그 때에 그리스도교를 고백하는 자들이 이 열 처녀에 비유될 것이며, 또 이와 같이 구별될 것이다.

II. 그것을 설명하는 비유의 소재는 혼인 예식이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경우에 때때로 다음과 같은 풍습이 있었다. 신랑이 자기 친구들을 거느리고 밤늦게 신부의 집에 이르면, 신부는 신랑을 기다리며 들러리 처녀들을 거느리고 있다가, 신랑이 가까이 왔다는 기별을 받으면 손에 등을 들고 나가, 격식과 예법을 갖추어 신랑을 집 안으로 인도해 들이고, 그리하여 큰 즐거움으로 혼례를 거행하게 되어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경우에 흔히 열 처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회당 집회를 열거나, 할례를 행하거나, 유월절을 지키거나, 혼약을 맺을 때 적어도 열 사람은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보아스도 룻과 혼인할 때 열 명의 증인을 두었다(룻 4:2). 이제 이 비유에서,

1. 신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시편 45편(시 45:1-17, 1)과 신약에서 여러 번 그렇게 묘사되신다. 이것은 그분께서 그 신부인 교회를 향하여 가지신 유일무이하고 지극히 뛰어난 사랑과, 또 신부와 맺으신 신실하고 깨뜨릴 수 없는 언약을 나타낸다. 신자들은 지금 그리스도와 정혼한 상태이지만(호 2:19), 그 혼인을 엄숙히 거행하는 일은 어린 양의 아내인 신부가 자기를 온전히 준비하게 될 그 큰 날을 위하여 남겨져 있다(계 19:7,9).

2. 처녀들은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 곧 교회의 구성원들이다. 다만 여기서는 신부의 동무(시 45:14)로 묘사되었는데, 다른 곳에서는 신부의 자녀(사 54:1)로, 또 신부의 장식(사 49:18)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은 처녀라 일컬어지며(계 14:4), 이는 그들의 아름다움과 순결을 뜻한다. 그들은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려질 것이다(고후 11:2). 신랑은 왕이시니, 이 처녀들은 시녀들이요, 수없이 많은 처녀들이지만(아 6:8), 여기서는 열 명이라 일컬어진다.

3. 이 처녀들의 직무는 신랑을 맞이하는 것인데, 이는 그들의 의무인 동시에 그들의 행복이기도 하다. 그들은 신랑이 나타날 때 그를 시중들기 위해(upon) 나아가며, 그 동안에는 그를 기다린다(for).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보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자임을 고백한다. (1.) 그리스도를 시중드는 자. 영광스러운 신랑이신 그분께 영예를 돌리며, 특히 그분께서 자기 성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러 오실 그 때에 그분께 이름과 찬송이 되기 위함이다. 우리는 명예로운 종이 자기 주인을 따르듯 그분을 따라야 한다(요 12:26). 높임을 받으신 예수의 이름을 받들고 그 찬송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일이다. (2.) 그리스도와 그분의 재림을 고대하는 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믿고 바라볼 뿐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우리의 모든 삶의 행실을 그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행할 것을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 신앙의 모든 선이 만나는 중심점이며, 신적 생명 전체가 끊임없이 참조하고 향하여 나아가는 지향점이다.

4.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신랑을 시중들 때 손에 등불을 드는 것이니, 이로써 그분께 영예를 돌리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인은 빛의 자녀이다. 복음은 빛이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스스로 그 빛으로 조명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빛으로 빛나야 하며 그것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빌 2:15,16). 이것이 일반적인 내용이다.

이제 이 열 처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들의 서로 다른 성품과, 그 성품의 증거와 표적.

[1.] 그들의 성품은 다섯은 슬기 있고 다섯은 미련하다는 것이었으며(마 25:2),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같이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났다. 솔로몬이 그렇게 말하였으니, 그는 이를 판단하기에 합당한 자이다(전 2:13). 주목하라. 사람들 사이에서 동일한 신앙 고백과 명칭을 가진 자들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성품이 천양지차일 수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슬기 있는 처녀요, 위선자는 미련한 처녀이니, 다른 비유에서 그들이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로 묘사된 것과 같다. 주목하라. 자기 영혼의 일에 있어서 지혜롭거나 미련한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롭거나 미련한 자이다. 참된 신앙은 참된 지혜요, 죄는 우매함이며, 특히 위선의 죄가 그러하다. 이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큰 바보요, 자기를 의인인 체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악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슬기 있는 자와 미련한 자의 수가 똑같은 것에서, 그리스도께서 지키시는 자비로운 예법(이는 틸럿슨 대주교의 표현이다)을 본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참된 신자의 수가 위선자의 수와 거의 같기를 바라시기라도 하는 듯이, 혹은 적어도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에 관하여 우리가 가장 좋게 바라며 자비로운 쪽으로 기울어 그들을 생각하도록 가르치시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비록 우리 자신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그 문이 좁아 찾는 자가 적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지만, 다른 이들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우리 구원의 대장이 많은 아들을 영광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 이 성품의 증거는 그들이 마땅히 유의해야 할 바로 그 일 안에 있었으니, 그것으로 그들이 판단을 받는다.

첫째, 미련한 처녀들의 우매함은 그들이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한 데 있었다(마 25:3). 그들은 단지 당장 등에 불을 켜기에, 곧 마치 신랑을 맞으려는 듯이 겉치레를 하기에 충분한 만큼의 기름만 가졌을 뿐, 신랑이 더디 올 경우에 보충할 기름 한 병이나 한 통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위선자들이 이러하니,

1. 그들은 내면에 아무런 원리가 없다. 그들은 손에 신앙 고백이라는 등불을 들고 있으나, 현재 상태의 봉사와 시련을 견디어 내는 데 필요한 건전한 지식과 뿌리내린 성향과 굳은 결심이라는 비축물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외적인 유인에 따라 움직일 뿐 영적 생명이 없으니, 마치 자본 없이 장사를 시작하는 상인이나, 뿌리가 없는 돌밭의 씨와 같다.

2. 그들은 장차 임할 일에 대한 전망이 없고 그에 대한 준비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장의 겉치레를 위해 등은 가졌으나 나중에 쓸 기름은 가지지 않았다. 이러한 무사려함이 많은 신앙 고백자들의 파멸이다. 그들의 모든 관심사는 지금 자기와 더불어 사귀는 이웃에게 자기를 추천하는 것일 뿐, 장차 그 앞에 나타나야 할 그리스도께 자기를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마치 무엇이든 당장만 쓸모 있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그들에게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을 말해 주면, 당신은 마치 사위들에게 농담하는 자 같이 보인 롯과 같이 된다(창 19:14 참조). 그들은 개미처럼 장래를 준비하지 않으며,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쌓아 두지도 않는다(딤전 6:19).

둘째, 슬기 있는 처녀들의 지혜는 그들이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간 데 있었다(마 25:4). 그들은 내면에 자기 신앙 고백을 유지하고 지탱해 줄 선한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1. 마음은 그릇이니, 그것을 갖추어 두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다. 그 안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뿌리가 썩으면 그 꽃도 티끌이 될 것이다(사 5:24 참조). 2. 은혜는 우리가 이 그릇에 담아 두어야 할 기름이다. 성막 안에는 등불을 위한 기름이 끊임없이 공급되었다(출 35:14). 우리의 빛은 선행으로 사람들 앞에 비쳐야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 및 우리 형제를 향한 사랑이라는, 마음속에 고정되어 활동하는 원리가 없으면, 곧 우리가 신앙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우리 앞에 놓인 일에 눈을 두고 그 원리에서부터 행하지 않으면, 그 빛은 비칠 수 없거나 오래 비칠 수 없다. 그릇에 기름을 담은 자들은, 혹 신랑이 더디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상정하고 그렇게 한 것이다. 주목하라. 앞날을 내다봄에 있어서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 곧 긴 포위 공격을 견디도록 비축해 두는 것이 좋다. 그러나 등불이 계속 타게 하는 이 기름은, 그 환상(슥 4:2,3,12)에 묘사된 대로, 크고 선하신 감람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규례라는 금관을 통하여 등잔대로 흘러 들어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 환상은 요한복음 1:16에서 설명되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2.) 신랑이 더딘 동안에 그들 모두가 범한 공통의 허물. 그들이 다 졸며 잘새(마 25:5). 여기서 살펴보라.

[1.] 신랑이 더디 왔으니, 곧 그들이 기대한 만큼 빨리 오지 않았다. 우리는 확실하다고 여기며 고대하는 것을 매우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도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주의 날이 가까웠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는 더디 오시는 듯보이나, 실제로는 더디 오시는 것이 아니다(합 2:3). 신랑이 더디 오시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루어져야 할 중간의 많은 경륜과 목적들이 있으니, 택하신 자들이 모두 부르심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나타나야 하며, 성도들의 인내가 시험을 받아야 하고, 땅의 추수가 무르익어야 하며, 또한 하늘의 추수도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때를 지나서 더디 오실지라도, 마땅한 때를 지나서 더디 오시지는 않을 것이다.

[2.] 그분이 더딘 동안에 그분을 기다리던 자들이 부주의해지고, 자기들이 무엇을 시중들고 있었는지를 잊어버렸다. 그들이 다 졸며 잘새, 마치 그분 찾기를 그만둔 것처럼 되었다. 인자가 올 때에 그가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그것의 확실함에서 그 갑작스러움을 추론하던 자들이, 그 추론이 자기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자, 그 더딤에서 그것의 불확실함을 추론하기 쉬웠다. 슬기 있는 처녀들은 졸았고 미련한 처녀들은 잠들었다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구별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둘 다 허물이 있었다. 슬기 있는 처녀들은 등불은 계속 타게 하였으나 자기들 자신은 깨어 있게 하지 못하였다. 주목하라. 너무 많은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오랫동안 신앙을 고백하고 나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준비에 해이해진다. 그들은 경계를 늦추고, 열심을 식히며, 그 은혜가 생기를 잃고,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여겨지지 못한다. 비록 모든 사랑을 잃지는 않았으나, 처음 사랑은 버린 바 된다(계 2:4 참조).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시간 깨어 있기도 어려웠다면, 한 시대 동안 그분과 함께 깨어 있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신부가 이르되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라고 하였다(아 5:2). 주목하라. 첫째, 그들이 졸다가 그 다음에 잠들었다. 주목하라. 부주의함과 해이함의 한 단계가 또 다른 단계로 가는 길을 연다. 졸기를 스스로 허락하는 자들은 좀처럼 잠들지 않고 견디기 어렵다. 그러므로 영적 쇠퇴의 시작을 두려워하라. Venienti occurrite morbo—질병의 첫 증상에 대처하라. 옛 사람들은 대체로 처녀들이 졸며 잠든 것을 그들의 죽음으로 이해하였다. 슬기 있는 자나 미련한 자나 다 심판의 날 전에 죽었다는 것이다(시 49:10). 그래서 페루스(Ferus)는 이렇게 말한다. Antequam veniat sponsus omnibus obdormiscendum est, hoc est, moriendum—신랑이 오기 전에 모두가 잠들어야 한다, 곧 죽어야 한다. 칼뱅도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우리가 앞에서 풀어 놓은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3.) 그들에게 신랑을 시중들도록 내려진 놀라운 소집 명령(마 25: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주목하라. [1.] 그리스도께서 비록 오래 더디 오실지라도 마침내 오실 것이다. 비록 더디신 듯하여도 그분은 틀림없으시다. 그분의 초림 때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자들은 그분이 더디 오신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분은 때가 차매 오셨다(갈 4:4 참조). 그러므로 그분의 재림도, 비록 오래 미루어질지라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분의 원수들은 오래 참으심이 면죄가 아님을 자기들의 손해로써 알게 될 것이요, 그분의 친구들은 이 묵시가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다는 것을 자기들의 위로로써 알게 될 것이다(합 2:3). 속량 받은 자들의 해는 정해져 있고, 그 해는 올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밤중에, 곧 우리가 가장 그분을 고대하지 않으며 가장 쉬고 싶어 할 그 때에 있을 것이다. 그분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위로하시러 오시는 것은, 흔히 의도하신 그 선이 가장 멀리 있는 듯 보일 때이다. 또 그분이 자기 원수들을 셈하시러 오시는 것은, 그들이 그 악한 날을 자기들에게서 가장 멀리 밀쳐 둘 때이다.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이 멸망당하고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도 밤중이었다(출 12:29). 죽음은 흔히 가장 예기치 못할 때에 온다. 그 영혼을 오늘 밤에 도로 찾으리니(눅 12:20).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주권을 나타내시려고 자기 기뻐하시는 때에 오실 것이요,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시려고 그 때를 우리에게 알리지 않으실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우리는 그를 맞으러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주 예수의 모든 움직임에 유의하고 그분의 모든 나오심에 그분을 맞이할 의무가 있다. 그분이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몸에서, 세상에서 나아가, 그 때에 그분이 자기를 드러내실 것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것에 합당한 영혼의 정과 움직임을 가지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야 한다. 그를 맞으러 나오라는 것은, 습관적으로 준비된 자들에게 실제로 준비되어 있으라는 부르심이다. [4.] 그리스도의 임하심을 알리는 기별과 그분을 맞으라는 부르심은 깨우치는 것이 될 것이다. 소리가 나되. 그분의 초림은 도무지 사람들이 알아보는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보라 여기 그리스도가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지도 않았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요 1:10). 그러나 그분의 재림은 온 세상이 알아보는 가운데 있을 것이니,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계 1:7).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을 것이니, 이는 그분이 호령과 함께 강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아 일어나 심판을 받으러 오라. 또 땅에서도 외치는 소리가 있을 것이니, 곧 산들과 바위들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이다(계 6:16).

(4.) 그들 모두가 이 소집에 응답하여 행한 채비(마 25:7). 그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등의 심지를 다듬고 거기에 기름을 채워 넣으며, 신랑을 맞이할 채비를 갖추려고 온갖 서두름으로 분주히 움직였다. 그런데 [1.] 이것이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는 신랑의 오심을 위한 실제적인 준비를 뜻한다. 주목하라. 죽음에 가장 잘 대비한 자들이라도, 죽음이 즉각 들이닥칠 때에는 자기를 실제로 준비시켜야 할 일이 있으니, 곧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벧후 3:14)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을 보이기(마 24:46) 위하여, 그리고 벗은 자로 나타나지(고후 5:3) 않기 위함이다. 그 날은 살피고 검토하는 날이 될 것이니, 우리가 그 때에 어떻게 발견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긴요하다.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우리의 죽는 일을 준비하여, 죄에 대한 회개를 새롭게 하고, 언약에 대한 우리의 동의를 새롭게 하며, 세상에 대한 작별을 새롭게 해야 한다. 또 우리의 영혼은 합당한 호흡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2.] 미련한 처녀들에게는 이것이 헛된 확신과, 자기 상태가 좋다는, 그리고 자기가 다른 세상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자만을 나타낸다. 주목하라. 가짜 은혜라도 사람이 죽음에 이를 때 겉치레로 내보이는 데에는, 평생 그래 왔던 것처럼 쓸모가 있을 것이다. 위선자의 소망은 막 꺼져 갈 때에 타오르니, 마치 죽음 직전의 번득임과 같다.

(5.)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이 없어 빠진 곤경(마 25:8,9). 이것은 다음을 뜻한다. [1.] 어떤 위선자들이, 죽음의 이편에서, 곧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어 자기의 우매함을 보게 하시고 오른손에 거짓을 가지고 멸망하는 자기를 보게 하실 때에, 자기 상태가 비참함을 깨닫게 되는 것. 혹은 그렇지 않다면, [2.] 죽음의 저편에서, 그리고 심판 가운데서 그들의 상태가 실제로 비참하다는 것. 곧 그들의 화려하나 거짓된 신앙 고백이 그 큰 날에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라.

첫째, 그들의 등불이 꺼진다. 위선자의 등불은 흔히 이생에서 꺼진다. 곧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며, 그 위선이 드러나 공공연한 배교로 터져 나올 때이다(벧후 2:20). 신앙 고백은 시들고, 그 신용은 잃어버린다. 소망은 사라지고, 그에 따른 위안도 가 버린다. 악인의 등불이 이렇게 꺼지는 일이 얼마나 잦은가(욥 21:17). 그러나 많은 위선자가 자기 신용과, 그러한 것이긴 하나 자기 신앙 고백의 위안을 끝까지 유지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 그것이 무엇이겠는가(욥 27:8). 그의 등불이 그보다 먼저 꺼지지 않으면 그와 함께 꺼지고 만다(욥 18:5,6). 그는 슬픔 중에 누우리라(사 50:11). 위선적인 신앙 고백의 소득은 사람을 따라 심판에 이르지 못한다(마 7:22,23). 위선자의 소망이 거미줄 같이(욥 8:14 등) 되고, 기절하여 죽는 것 같이(욥 11:20) 되며, 압살롬을 상수리나무에 버려둔 노새 같이 될 때, 그 등불은 꺼지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막 꺼져 가는 등불에 보충할 기름이 없었다. 주목하라. 참된 은혜에 미치지 못한 채 멈추는 자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그 결핍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잘 꾸민 외적인 신앙 고백은 사람을 멀리까지 데려갈 수 있으나, 끝까지 데려가지는 못한다. 그것은 이 세상을 지나는 동안에는 그에게 빛을 비춰 줄 수 있으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습기가 그 빛을 꺼 버릴 것이다.

셋째, 그들은 슬기 있는 처녀들의 그릇에서 기꺼이 신세를 지어 기름을 보충받고자 하였다.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주목하라. 육신적인 위선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처지에 기꺼이 있고 싶어 할 날이 오고 있다. 지금은 신앙의 엄격함을 미워하는 자들이, 죽음과 심판 때에는 그것의 견고한 위로를 사모할 것이다. 의인의 삶은 살려 하지 않으면서도 의인의 죽음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이 그러하다. 지금은 겸손하고 통회하는 성도들을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기꺼이 그들과의 관계를 얻고자 하며, 지금은 자기 양 떼의 개들과 함께 두는 그 사람들을 자기의 가장 좋은 친구요 은인으로 여길 날이 오고 있다(욥 30:1).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는 것은, 곧 "우리를 위해 좋은 말을 해 달라"는 뜻이라고, 어떤 이들은 본다. 그러나 그 큰 날에는 보증인이 필요 없으니, 재판장께서 각 사람의 참된 성품이 무엇인지 아신다. 그러나 그들이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말하게 된 것은 잘된 일이 아닌가? 그러하다. 그러나, 1. 이 청은 절실한 필요에 의해 억지로 짜낸 것이다. 주목하라. 지금 은혜가 자기를 거룩하게 하고 다스려야 할 때에 은혜의 필요를 보지 않으려는 자들이, 장차 은혜가 자기를 구원해야 할 때에 가서야 자기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보게 될 것이다. (2.) 그것은 너무 늦게 왔다. 그들이 제때에 구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름을 주셨을 것이나, 장이 파한 후에는 살 수 없고, 양초의 마지막 토막이 떨어진 후에는 값을 부를 수 없다.

넷째, 그들은 동무들의 기름을 나누어 받기를 거절당하였다. 선한 자들에게서 이렇게 퇴짜를 맞은 것은 하나님께도 퇴짜 맞을 것을 미리 알리는 슬픈 전조이다.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되 아니라. 이 단호한 거절은 원문에는 없고 번역자들이 보충한 것이다. 이 슬기 있는 처녀들은 (많은 이들이 하듯이) 이유 없이 단호하게 거절하기보다는, 단호한 거절 없이 이유를 대는 편을 택하였다. 그들은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돕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있었으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우리가 그리해서는 안 되며, 그리할 수도 없고, 감히 그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선은 자기 집에서 시작되는 법이니, 차라리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주목하라. 1.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의 은혜를 가져야 한다. 비록 우리가 성도의 교제로 유익을 얻고, 다른 이들의 믿음과 기도가 지금 우리의 유익에 보탬이 될지라도, 우리 자신의 성화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이다.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각 사람이 자기 일을 직고할 것이니,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피라(갈 6:4). 그 날에 자기를 대신해 다른 사람을 점호에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2. 은혜를 가장 많이 가진 자라도 남에게 나눠 줄 만큼 가진 것은 없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에 우리 자신에게도 너무나 부족하다. 가장 선한 자라도 그리스도께 빌려야 할 처지이지, 자기 이웃 누구에게도 빌려 줄 것이 없다. 공로의 잉여와 성도의 의의 전가를 꿈꾸는 로마 교회는, 자기들에게는 자기들 쓸 만큼의 기름밖에 없고 남에게 줄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야말로 슬기 있는 처녀들의 지혜였음을 잊고 있다. 그러나 주목하라. 이 슬기 있는 처녀들은 미련한 처녀들의 태만을 책망하지 않으며, 자기들의 선견지명을 자랑하지 않고, 절망으로 몰아가는 암시로 그들을 괴롭히지도 않는다. 다만 그 형편이 허락하는 한 가장 좋은 조언을 해 줄 뿐이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라는 것이다. 주목하라. 자기 영혼의 일에 있어서 어리석게 처신하는 자들은 가엾이 여길 일이지 모욕할 일이 아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고전 4:7). 목사들이, 평생 하나님과 자기 영혼에 무심하다가 임종의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은 자들을 돌볼 때에, 참된 회개는 결코 너무 늦은 법이 없으므로 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며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지시하기는 하지만, 늦은 회개는 좀처럼 참된 것이 되지 못하므로, 목사들은 이 슬기 있는 처녀들이 미련한 처녀들에게 한 그대로 할 뿐이니, 곧 나쁜 형편 중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너무 늦지 않았다면, 말해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기 전에 문이 닫혀 버리지 않을지는 형언할 수 없이 위태로운 일이다. 제때에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이는 지금도 좋은 조언이다.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주목하라. 은혜를 얻고자 하는 자들은 은혜의 방편에 의지하고 그것에 유의해야 한다(사 55:1 참조).

(6.) 신랑의 오심과, 슬기 있는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이 서로 다른 성품의 결말.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보라.

[1.]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주목하라. 자기의 큰 일을 마지막까지 미루는 자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 때에 가서 그 일을 할 시간이 없는 경우가 천에 하나는 고사하고 거의 다 그러하다. 은혜를 얻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어서, 황급히 해치울 수 없다. 가엾게 깨우침을 받은 영혼이 병상에서 회개와 기도에 자기를 쏟으려 하나, 두려운 혼란 가운데 어느 쪽 끝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에 곧 죽음이 오고 심판이 오니, 그 일은 끝내지 못한 채로 남고, 그 가엾은 죄인은 영원히 끝장나고 만다. 이것이 곧 기름을 태워야 할 때에 사러 가고, 은혜를 써야 할 때에 얻으려 하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

신랑이 오므로. 주목하라.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 큰 날에 신랑으로 자기 백성에게 오실 것이니, 화려한 영광과 값진 예복을 입으시고 자기 친구들을 거느리고 오실 것이다. 이제 신랑을 우리에게서 빼앗긴지라 우리가 금식하나(마 9:15), 그 때에는 영원한 잔치가 있을 것이다. 그 때에 신랑은 자기 신부를 본가로 데려가, 그 신부로 자기 있는 곳에 있게 하시며(요 17:24), 자기 신부를 기뻐하시리라(사 62:5).

[2.]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주목하라. 첫째, 영원히 영화롭게 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이요, 그분의 직접적인 임재 안에 있으며, 영원한 안식과 기쁨과 풍성함의 상태에서 그분과 가장 친밀한 사귐과 교제 가운데 있는 것이다. 둘째, 이 땅에서 하늘을 위해 준비된 자들, 곧 바로 이것을 위하여 지음 받은(고후 5:5) 자들, 그리고 오직 그러한 자들만이 장차 하늘에 들어갈 것이다. 셋째, 우리가 습관적으로 준비되어 있기만 하다면, 죽음의 갑작스러움과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의 갑작스러움이 우리의 행복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3.] 문은 닫힌지라. 이는 들어올 무리가 다 들어왔을 때에 으레 그러하듯이 그러하였다. 문이 닫힌 것은, 첫째, 안에 있는 자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함이니, 이제 그들이 우리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어 다시 나가지 아니하게 하려는 것이다(계 3:12). 아담은 낙원에 들여졌으나 문이 열린 채로 두어졌기에 그가 다시 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영화롭게 된 성도들이 하늘 낙원에 들여질 때에는, 그들은 안에 갇히게 된다. 둘째, 밖에 있는 자들을 내쫓기 위함이다. 그 때에 성도와 죄인의 상태는 변할 수 없이 고정될 것이며, 그 때에 밖에 내쫓긴 자들은 영원히 내쫓긴 채로 있을 것이다. 지금은 문이 좁기는 하나 그래도 열려 있다. 그러나 그 때에는 닫히고 빗장이 질러질 것이며, 큰 구렁이 놓여 있을 것이다(눅 16:26). 이는 노아가 안에 들어갔을 때 방주의 문이 닫힌 것과 같았으니, 그가 그로써 보존된 것처럼 나머지 모든 자들은 마침내 버림받았다.

[4.] 미련한 처녀들은 너무 늦게 왔다(마 25: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주목하라. 첫째, 너무 늦었을 때에 가서 하늘에 들어가기를 구할 자들이 많을 것이니, 마치 그 후에 그 축복을 이어받으려 한 속된 에서와 같다(히 12:16,17 참조). 비록 죄인들이 그러한 뒤늦은 간청으로 구원받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과 신앙은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지금 주여 주여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이 머지않아 그것에로, 곧 간절하고 끈질긴 기도에로 피하게 되리니, 그것이 주여 주여의 영예이며, 그 때에는 그것을 두고 우는소리니 가식이니 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위선자들의 헛된 확신은 그들의 행복에 대한 기대를 매우 멀리까지 끌고 갈 것이다. 그들은 하늘 문에 이르러 들어가기를 요구하나, 결국 내쫓긴다. 자기 상태가 좋다는 어리석은 자만으로 하늘까지 들려 올라갔다가, 결국 지옥으로 내던져진다.

[5.] 그들은 에서가 그러하였듯이 배척당하였다(마 25:12).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주목하라. 우리는 모두 만날 만한 때에 여호와를 찾아야 한다(사 55:6). 그분을 만날 수 없는 때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가 잘 통하던 때가 있었으니, 곧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서였다(마 7:7).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너무 늦게 온다. 그 선고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로 엄숙하게 매여 묶이는데, 이는 그들이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그가 진노 중에 맹세하신 것에 다름 아니다(시 95:11 참조). 이는 그분이 단호하시며, 그들은 그로 인해 입막음당함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이 비유에서 끌어낸 실천적 결론이 있다(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우리는 이것을 앞에서도 보았거니와(마 24:42), 여기서는 가장 긴요한 경계로서 다시 반복된다. 주목하라. 1. 우리의 큰 의무는 깨어 있는 것이니, 곧 더할 나위 없는 부지런함과 신중함으로 우리 영혼의 일에 유의하는 것이다. 깨어 있으라, 그리고 늘 정신을 차리라. 2.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좋은 이유는, 우리 주께서 오시는 때가 매우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때마다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일 년 중 어느 날도, 하루 중 어느 때도 우리의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날마다, 온종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운데 있으라(잠 23:17 참조).

마태복음 25장 14-30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The Parable of the Tal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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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 비유

¹⁴ 또 천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¹⁵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¹⁶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¹⁷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¹⁸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¹⁹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²⁰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²¹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²²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²³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²⁴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²⁵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²⁶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²⁷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²⁸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²⁹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³⁰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여기 세 명의 종에게 맡겨진 달란트의 비유가 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일과 사업의 상태에 있음을 함축하는데, 이는 앞의 (열 처녀) 비유가 우리가 기다림의 상태에 있음을 함축하는 것과 같다. 앞의 비유는 습관적인 준비의 필요성을 보여 주었고, 이 비유는 우리가 현재 맡은 일과 봉사에 있어서 실제적인 부지런함의 필요성을 보여 준다. 앞의 비유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잘 행하도록 자극을 받았고,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쏟아붓도록 자극을 받는다.

이 비유에서, 1. 주인은 그리스도시니, 그는 모든 사람과 사물의, 그리고 특별한 의미에서 그의 교회의 절대적 소유주이시며 주관자이시다. 그의 손에 만물이 맡겨져 있다. 2. 종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니, 그들은 그의 종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들은 그의 집에서 태어났고,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바 되었으며, 그의 찬송에 헌신되었고, 그의 일에 고용되었다. 아마도 여기서는 사역자들(목회자들)을 특별히 가리키는 것 같으니, 그들은 더욱 직접적으로 그를 수종들며 그에게 보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종종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 일컫는다. 딤후 2:24을 보라.

이 비유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가 들어 있다.

I. 이 종들에게 맡겨진 위탁물. 그들의 주인은 그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겼다. 그들을 일하도록 임명하신 후(그리스도는 빈둥거리도록 종을 두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에게 일할 무엇인가를 남겨 두셨다. 주목하라. 1.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들의 모든 것을 그에게서 가지며 받는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는 아무 가치도 없으며, 죄 외에는 자기 것이라 부를 만한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2.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것은 그를 위하여 일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특권은 우리에게 할 일을 마련해 주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성령을 나타내심은 각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 3.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받은 것이 무엇이든지, 그 소유권은 여전히 그에게 있다. 우리는 다만 그의 땅을 부치는 소작인이며,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일 뿐이다(벧전 4:10). 이제 여기서 주목하라.

(1.) 어떤 계기로 이 위탁물이 이 종들에게 맡겨졌는가.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려 하였다. 이것은 엡 4:8에 설명되어 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도다. 주목하라. [1.]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가셨을 때, 그는 타국으로 떠나는 사람과 같으셨다. 곧 그는 오래 떠나 있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가셨다. [2.] 그가 떠나실 때, 그는 자신이 친히 부재하는 동안 자기 교회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어 두기를 잊지 않으셨다. 그는 자신의 떠나심을 인하여, 또한 떠나심을 고려하여, 진리와 율법과 약속과 권능을 자기 교회에 맡기셨다. 이것들이 곧 파라카타테케(parakatatheke)—*그 큰 의탁물(委託物, the great depositum)*이었으니(딤전 6:20, 딤후 1:14에서 그렇게 일컬어지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 맡겨진 선한 것이다. 또한 그는 자기 영을 보내사 자기 종들로 하여금 그 진리들을 가르치고 고백하며, 그 율법들을 권하고 지키며, 그 약속들을 향상시키고 적용하며, 그 권능들을 일상적으로든 비상하게든 행사하고 활용하게 하셨다. 이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실 때에 자기 교회에 자기 소유를 남겨 두셨다.

(2.) 이 위탁물이 어떤 분량으로 맡겨졌는가. [1.] 그는 달란트를 주셨다. 은 한 달란트는 우리 화폐로 환산하면 353파운드 11실링 10펜스 반 페니에 해당한다고 박식한 컴벌랜드(Cumberland) 주교가 계산하였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선물은 풍성하고 값진 것이니, 그의 피로 사신 것이므로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니며, 그 가운데 하찮은 것은 하나도 없다. [2.] 그는 어떤 자들에게는 더 많이, 다른 자들에게는 더 적게 주셨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각각 그 재능대로 주셨다. 신적 섭리가 마음과 몸과 재산과 관계와 이해(利害)에 있어서 사람들의 능력에 차이를 두셨을 때, 신적 은혜는 그에 따라 영적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 그러나 그 능력 자체도 여전히 그에게서 온 것이다. 주목하라. 첫째,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하나의 달란트는 가지고 있었으니, 이는 가난한 종이 가지고 시작하기에 결코 보잘것없는 밑천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이 곧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한 달란트이니, 그것이 우리에게 할 일을 마련해 줄 것이다. Hoc nempe ab homine exigitur, ut prosit hominibus; si fieri potest, multis; si minus, paucis; si minus, proximis, si minus, sibi: nam cum se utilem cæteris efficit, commune agit negotium. Et si quis bene de se meretur, hoc ipso aliis prodest quod aliis profuturum parat—사람의 의무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니, 가능하다면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허락되지 않으면 소수에게, 곧 자기 가까운 이들에게,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라도 그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자는 공동의 선(善)으로 여겨질 수 있다. 또한 누구든지 자기 스스로 인정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는 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그러한 습관을 자기 안에 형성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 세네카의 「현자의 한가로움에 관하여(de Otio Sapientis)」. 둘째,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다 똑같은 능력과 기회를 가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행위자이시니,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 어떤 이들은 한 종류의 봉사를 위하여, 다른 이들은 또 다른 종류의 봉사를 위하여 마련되었으니, 마치 자연적인 몸의 지체들과 같다. 집주인이 이같이 자기 일들을 정돈한 후에, 그는 바로 길을 떠났다. 우리 주 예수께서도 자기 사도들에게 명령을 주신 후에, 마치 서둘러 떠나려는 자처럼, 하늘로 가셨다.

II. 이 위탁물에 대한 서로 다른 관리와 활용이니, 이에 관하여는 마 25:16-18에 기록되어 있다.

1. 두 종은 잘 행하였다.

(1.) 그들은 부지런하고 충성스러웠다. 그들은 가서 장사하였으니, 그들에게 맡겨진 돈을 그것이 의도된 용도대로 사용하여—물품에 투자하고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거두었으니, 주인이 떠나가자마자 그들은 즉시 자기 일에 착수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러하듯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할 자들은, 그 일을 속히 시작하여 시간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가서 장사하였다. 주목하라. 참된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장사꾼이다. 여러 직업(trade)은 *비밀(mysteries)*이라 불리는데, 논란의 여지 없이 경건의 비밀(mystery)은 크도다. 그것은 제조업과 같으니,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또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행하여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상인의 장사와 같으니, 우리에게 가치가 덜한 것을 더 큰 가치를 지닌 것을 위하여 내어 준다. 이것이 곧 지혜의 장사이다(잠 3:15, 마 13:45). 장사꾼이란, 자기 직업을 스스로 택하여 그것을 배우기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그것을 따르는 것을 자기 본업으로 삼으며, 그 직업의 발전을 위하여 자기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고, 다른 모든 일을 거기에 종속시키며, 그 이익으로 살아가는 자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종교(신앙)의 일에 있어서 바로 이같이 행한다. 우리에게는 장사할 우리 자신의 밑천이 없으며, 다만 우리 주인의 밑천을 가지고 대리인으로서 장사할 뿐이다. 마음의 자질들—이성, 기지, 학식은 종교에 종속시켜 사용하여야 하며, 세상의 향유들—재산, 신용, 이해, 권력, 지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향상시켜야 한다. 복음의 규례들과 그것들에 참여하는 우리의 기회들—성경, 사역자, 안식일, 성례는 그것들이 제정된 목적을 위하여 향상시켜야 하며,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여야 하고, 성령의 은사와 은혜는 행사하여야 한다. 이것이 곧 우리의 달란트로 장사하는 것이다.

(2.) 그들은 성공하였다. 그들은 자기 밑천을 갑절로 만들었고, 짧은 시간에 *백 퍼센트(cent. per cent.)*의 수익을 거두었다. 다섯 달란트를 가진 자는 곧 또 다섯 달란트를 만들었다. 우리의 달란트로 장사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언제나 성공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우리 자신에 대하여는 그것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사 49:4). 주목하라. 부지런한 자의 손은 은혜와 위로와 선한 행실의 보화에 있어서 부하게 한다. 종교에서의 근면으로 얻을 것이 많이 있다.

주목하라. 거둔 것은 받은 것에 비례하였다. [1.] 하나님께서 다섯 달란트를 주신 자들에게서, 그는 다섯의 수익을 기대하시며, 많이 뿌린 곳에서 풍성히 거두기를 기대하신다. 누구든지 더 큰 은사를 가진 자는, 큰 밑천을 관리해야 하는 자들이 그러하듯, 더 많은 수고를 들여야 한다. [2.] 그가 두 달란트밖에 주지 않은 자들에게서는, 그는 단지 둘의 수익만을 기대하시니, 이는 더 낮고 더 좁은 유익의 영역에 놓인 자들을 격려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자기 능력과 기회의 최선을 다하여 선을 행하기 위해 자신을 쏟는다면, 비록 다른 자들만큼 많은 선을 행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은 받아들여질 것이다.

2. 셋째 종은 악하게 행하였다(마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 비록 이 비유는 셋 중 한 명만 불충실한 것으로 나타내지만, 이 비유에 상응하는 역사(歷史)에서는 그 비율이 정반대로 나타난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았을 때, 열 중 아홉이 달란트를 묻어 두었고, 오직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하였다(눅 17:17,18). 불충실한 종은 한 달란트밖에 받지 못한 자였다. 분명히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도 그것을 모두 묻어 버리는 자들이 많이 있으니—큰 능력과 큰 이점을 가지고도 그것으로 아무 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음을 암시하시려 하셨다. (1.) 만일 한 달란트밖에 받지 못한 자가 그 하나를 묻어 둔 일로 이렇게 책임을 추궁당한다면, 더 많이, 곧 여럿을 가지고도 그것들을 묻어 두는 자들은 훨씬 더 큰 범죄자로 여겨지리라. 작은 능력을 가진 자도 자기가 받은 것을 마땅히 향상시킬 수 있었던 만큼 향상시키지 않았으므로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겼다면, 가장 큰 이점들을 발로 짓밟는 자는 얼마나 더 중한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너희는 생각하느냐? (2.) 하나님을 위하여 할 일이 가장 적은 자들이, 자주 자기가 해야 할 일 가운데서도 가장 적게 행한다. 어떤 이들은 다른 자들이 누리는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자기는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을 자기 게으름의 변명으로 삼으며, 자기가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행할 만한 것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우리가 그가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아는 것조차 행하지 않고, 그래서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단지 한 달란트밖에 돌볼 것이 없는데도 그 하나를 소홀히 하는 것은, 실로 그들의 나태함을 가중시키는 일이다.

그는 땅을 파고 달란트를 감추어 두었으니, 그것을 도둑맞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잘못 쓰거나 오용하지 않았고, 횡령하거나 탕진하지도 않았으나, 다만 그것을 감추어 두었다. 돈은 거름과 같아서(베이컨 경이 늘 말하던 대로), 무더기로 쌓여 있을 때에는 아무 쓸모가 없고 반드시 흩어 뿌려야 한다. 그러나 재물이 쌓여 있는 것은(약 5:3, 전 6:1,2) 아무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니, 이는 우리가 해 아래서 종종 보아 온 악이다. 영적 은사도 이와 같으니, 많은 이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주어진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재산을 가지고도 그것을 경건과 자선의 일에 쓰지 않는 자들, 권력과 영향력을 가지고도 그것으로 자기가 사는 곳에서 종교를 증진시키지 않는 자들, 선을 행할 능력과 기회를 가진 사역자들로서 자기 속에 있는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보다 자기 일을 더 구하는 게으른 종들이다.

그는 그의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 만일 그것이 그 자신의 것이었다면,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능력과 이점이 무엇이든지, 그것들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우리는 다만 그것들의 청지기일 뿐이요, 그 소유주이신 우리 주께 결산을 드려야 한다. 그의 동료 종들은 장사에 분주하고 성공적이어서 그들의 열심이 마땅히 그를 자극했어야 했는데도 그러하지 못한 것은, 그의 나태함을 가중시키는 일이었다. 다른 이들은 활동적인데, 우리는 게으름을 피울 것인가?

III. 이 활용에 대한 결산이니, 마 25:19에 기록되어 있다. 1. 결산은 미루어진다. 그들과 결산하는 것은 오랜 후에야 이루어진다. 이는 주인이 자기 일을 소홀히 하기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더디 행하시기 때문도 아니다(벧후 3:9). 결코 그렇지 않으니, 그는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이다(벧전 4:5). 그러나 모든 일은 그 때와 순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2. 그러나 결산의 날은 마침내 이른다. 그 종들의 주인이 그들과 결산하였다. 주목하라.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청지기들은 머지않아 자기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결산하여야 한다. 우리는 모두 결산을 받아야 하니—우리가 누린 이점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무슨 선을 얻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선을 행하였는지 결산하여야 한다. 롬 14:10,11을 보라. 이제 여기에 다음이 있다.

(1.) 충성스러운 종들의 좋은 결산. 여기서 주목하라.

[1.] 종들이 결산을 드리는 것(마 25:20,22).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또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다섯 달란트를, 또 내가 두 달란트를 더 남겼나이다."

첫째,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종들은 그가 그들에게 베푸신 것을 감사함으로 인정한다. 주인이여 당신이 내게 이러이러한 것들을 주셨나이다. 주목하라. 1.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결산을 간직하는 것, 곧 우리가 받은 것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무엇이 기대되는지를 알고 그 받은 은혜에 따라 드릴 수 있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2. 우리는 결코 우리의 향상을,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 곧 자기 소유를 우리에게 맡기심으로 우리에게 두신 영예,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과 우리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모든 선의 원천이요 근원인 그 은혜를 일반적으로 언급함이 없이는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진실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더 많이 행할수록, 우리는 그가 우리를 사용하시고 자기 봉사를 위하여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 것에 대하여 그에게 더욱 빚진 자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자기들의 충성됨의 증거로서 자기들이 남긴 것을 내어 놓는다. 주목하라.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들은 자기들의 근면을 보일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네 행함으로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선한 사람이 있거든, 그로 그것을 보이게 하라(약 3:13).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적 장사에 신중하다면, 그것은 곧 우리에게서 드러날 것이며, 우리의 행한 일이 우리를 따를 것이다(계 14:13). 이는 성도들이 그 큰 날에 자기들의 선행을 스스로 언급하리라는 뜻이 아니니—결코 그렇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그것을 하실 것이다(마 25:35). 그러나 이는 자기 달란트를 충실히 향상시키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날에 담대함을 가지리라는 것을 암시한다(요일 2:28; 4:17).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두 달란트밖에 가지지 못한 자도 다섯 달란트를 가진 자와 똑같이 기쁘게 자기 결산을 드렸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의 위로가, 결산의 날에 우리의 유용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충성됨에 따라, 우리의 성공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진실함에 따라, 우리의 기회의 정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정직함에 따라 있을 것임을 보여 준다.

[2.] 주인이 그들의 결산을 받아들이고 인정함(마 25:21,23).

첫째, 그는 그들을 칭찬하였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목하라.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게 하는 자들의 근면과 진실은, 그의 나타나실 때에 반드시 칭찬과 영예와 영광이 될 것이다(벧전 1:7). 지금 하나님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들을, 그도 머지않아 인정하고 존중하실 것이다. 1. 그들의 인격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지금 자기 종들의 진실을 아시는 분이, 그 큰 날에 그것을 증언하실 것이요, 충성된 자로 발견된 자들은 그렇게 일컬어질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의롭다고 비난받았을지 모르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합당한 성품, 곧 착하고 충성됨을 부여하실 것이다. 2. 그들의 행함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잘하였도다. 그리스도께서는 잘 행한 자들만을, 오직 그들만을 착한 종이라 일컬으실 것이다. 이는 우리가 참고 선을 행함으로 이 영광과 존귀를 구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구하면 얻을 것이고, 선한 것을 행하되 그것을 잘 행하면 동일한 것에 대한 칭찬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주인들은 너무 까다로워서, 자기 종들이 아무리 일을 잘하여도 칭찬하지 않으며, 책망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잘 행하는 자기 종들을 칭찬하실 것이다. 그들의 칭찬이 사람들에게서 오든 안 오든, 그것은 그에게서 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주인의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우리의 동료 종들이 우리에 대하여 무어라 말하든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만일 그가 잘하였도다 하시면, 우리는 행복한 것이요, 그렇다면 사람의 판단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사소한 일이 되어야 한다. 반대로, 자기를 칭찬하는 자나 자기 이웃이 칭찬하는 자가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가 인정받는 것이다.

둘째, 그는 그들에게 상을 주신다.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종들은 단순한 칭찬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니, 그들의 모든 일과 사랑의 수고가 상 받을 것이다.

이제 이 상은 여기서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1. 비유에 어울리는 한 표현으로.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군주들의 궁정과 위인들의 가문에서는, 낮은 직분에 충실하였던 자들을 더 높은 직분으로 승진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는 잘 처신하는 자기 종들을 높이실 주인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존중하는 자들을 위하여 존귀를 예비해 두셨으니—면류관(딤후 4:8), 보좌(계 3:21), 나라가 그것이다(마 25:34). 여기서 그들은 거지이나, 하늘에서는 통치자가 될 것이다. 정직한 자들이 권세를 잡을 것이니, 그리스도의 종들은 모두 군왕이다.

일과 상 사이의 불균형을 주목하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은 적은 일이 몇 가지뿐이지만,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화롭게 될 일은 많은 것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책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행한 일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 앞에 놓인 즐거움에 비하면 적은 것, 매우 적은 것일 뿐이다. 우리의 모든 봉사, 모든 고난, 모든 향상,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선, 우리 자신에게 얻은 모든 것을 다 합쳐도, 그것은 다만 적은 것들,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니,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도, 같은 날에 거론할 수도 없다.

2. 또 다른 표현으로, 이것은 비유에서 벗어나 그것이 의미하는 실체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주목하라. (1.) 복 받은 자들의 상태는 즐거움의 상태이니, 이는 모든 눈물이 그때에 씻겨질 뿐만 아니라, 모든 위로의 샘이 그들에게 열리고 즐거움의 원천이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뵙고 누리는 일, 거룩함의 완성, 복 받은 자들의 교제가 있는 곳에는, 충만한 즐거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2.) 이 즐거움은 그들의 주인의 즐거움이니, 곧 그가 친히 그들을 위하여 사서 예비하신 즐거움이요, 구속받은 자들의 즐거움, 구속자의 슬픔으로 값주고 산 즐거움이다. 그것은 그가 친히 소유하고 계신 즐거움이요, 그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을 때 바라보셨던 즐거움이다(히 12:2). 그것은 그 자신이 친히 그 원천이요 중심이신 즐거움이다. 그것은 우리 주의 즐거움이니, 이는 주 안에서의 즐거움이기 때문이요, 그가 우리의 심히 큰 즐거움이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의 청지기가 비록 충성스러울지라도 그를 자기 상속자로 삼기를 원치 않았으나(창 15:3),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충성스러운 청지기들을 자기 자신의 즐거움 안으로 받아들이사 자기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 (3.)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이 즐거움 안으로 들어갈 것이요, 마치 상속자가 성년이 되어 자기 재산을 차지하듯, 또는 예비하였던 자들이 혼인 잔치에 들어가듯, 그것을 충만하고 완전하게 소유할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 주의 즐거움이 성령의 보증으로 성도들 안으로 들어오나, 머지않아 그들이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이요, 마치 자기의 본 영역에 있듯 영원토록 그 안에 있을 것이다.

(2.) 게으른 종의 나쁜 결산. 주목하라.

[1.] 그 자신을 위한 변명(마 25:24,25). 비록 그가 한 달란트밖에 받지 못하였을지라도, 그 하나에 대하여도 그는 결산하도록 부름받는다. 우리가 받은 것이 적다는 것은 우리를 결산에서 면제해 주지 못한다. 아무도 자기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에 대하여 결산하도록 부름받지는 않으나,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하여는 우리 모두 결산하여야 한다.

주목하라. 첫째, 그가 무엇을 신뢰하는가. 그는 자기가 제출할 수 있는 변론, 곧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비록 내가 다른 자들처럼 그것을 더 많게 만들지는 못하였으나, 적어도 이것만은 말할 수 있으니, 나는 그것을 더 적게 만들지도 않았나이다" 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에 의지하여, 자못 확신을 가지고 결산하러 나온다. 그는 이것이, 비록 칭찬을 받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안전하게는 자기를 통과시켜 주기에 족하리라고 생각한다.

주목하라. 많은 이들이 헛되고 경박한 것으로 기각될 변론의 유효함을 자만하면서, 매우 안심하고 심판에 나아간다. 하나님을 위하여 너무 많이 행할까 두려워하는 게으른 신앙 고백자들이, 그러면서도 종교에 그렇게 많은 수고를 들이는 자들만큼 잘 통과되기를 바란다. 이같이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일곱 사람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긴다(잠 26:16). 이 종은 자기가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하고 말할 수 있으므로 자기 결산이 충분히 무난하게 통과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주인이여, 나는 내 재산을 낭비하지 아니하였고, 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지 아니하였고, 선한 사역자들과 선한 설교를 반대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인이여, 나는 내 성경을 조롱한 적이 없고, 종교를 비웃으려고 내 재주를 부린 적도 없으며, 어떤 선한 사람을 박해하려고 내 권력을 남용한 적도 없나이다. 나는 내 재능을 (술로) 마비시킨 적도 없고, 하나님의 좋은 피조물을 술 취함과 탐식으로 허비한 적도 없으며, 내가 아는 한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나이다."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 받는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결산을 드릴 수 있다는 것에 근거하여 하늘에 대한 큰 소망을 쌓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하는 것 이상이 아니니, 마치 그 이상은 요구되지도, 기대될 수도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둘째, 그가 무엇을 고백하는가. 그는 자기 달란트를 묻어 둔 것을 인정한다.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그는 마치 그것이 큰 잘못이 아닌 것처럼 말하며, 아니 오히려 그것을 안전한 곳에 두어 아무 위험도 무릅쓰지 않은 자기 신중함으로 인하여 칭찬받아 마땅한 것처럼 말한다. 주목하라. 사람들이 그 큰 날에 자기를 정죄할 일을 매우 가벼운 일로 여기는 것은 흔한 일이다. 혹은 만일 그가 그것이 자기 잘못임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었다면, 이는 게으른 종들이 심판에서 얼마나 쉽게 정죄받을 것인지를 암시한다. 증거를 위하여 굳이 크게 조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니, 이는 그들 자신의 혀가 그들에게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가 무엇을 자기 핑계로 삼는가. 나는 당신이 굳은 사람인 줄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였나이다. 하나님에 대한 선한 생각은 사랑을 낳을 것이요, 그 사랑은 우리로 부지런하고 충성스럽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가혹한 생각은 두려움을 낳고, 그 두려움은 우리로 게으르고 불충실하게 한다. 그의 핑계는 다음을 드러낸다.

1. 원수의 심정. 나는 당신이 굳은 사람인 줄 알았나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의 저 악한 말, 곧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겔 18:25) 하는 것과 같다. 이같이 그의 변명이 곧 그의 범죄가 된다. 사람의 미련함이 그 길을 굽게 하나니, 그러고 나서 마치 그것이 사태를 개선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마음은 여호와를 원망한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그러하였듯, 그 허물을 암암리에 하나님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주목하라. 육신적인 마음은 하나님에 관하여 거짓되고 악한 견해를 품기 쉬우며, 그것을 가지고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스스로를 완고하게 한다. 그가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지 주목하라. 나는 당신이 그러한 줄 알았나이다. 그가 어떻게 그를 그러한 줄 알 수 있었겠는가? 우리나 우리 조상이 그에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느냐(렘 2:5)? 그가 어디에서 그의 일로 우리를 괴롭게 하였으며, 그의 삯에서 우리를 속였느냐(미 6:3)? 그가 우리에게 광야가 되었느냐, 흑암의 땅이 되었느냐?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려 오셨으니, 사무엘 자신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정당하게 이렇게 물으실 수 있다. 내가 누구를 속였느냐? 내가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온 세상이 그 반대를 알지 않느냐? 곧 그는 가혹한 주인이기는커녕, 땅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충만하며, 심지 않은 데서 거두기는커녕, 거둘 것이 없는 곳에도 많이 뿌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이는 그가 해를 비추시고 그의 비를 악한 자와 감사할 줄 모르는 자에게 내리시며, 전능자에게 우리를 떠나소서 하고 말하는 자들의 마음을 양식과 기쁨으로 채우시기 때문이다. 이 암시는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던지는 흔한 비난을 드러내니, 마치 그들의 죄와 멸망의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기 은혜를 거부하신 탓으로, 그의 문 앞에 놓여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일반 은혜를 충실히 향상시킨 자가 특별 은혜의 부족으로 멸망한 일은 결코 없으며, 하나님께서 열매 없는 포도원에 행하신 것 이상으로 그것을 위하여 합리적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지 아무도 보일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은 짚을 주지 않으시면서 벽돌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으니, 언약에서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든지 언약에서 약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멸망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2. 종의 심성. 나는 두려워하였나이다. 하나님을 향한 이 악한 정서는 그에 대한 그의 그릇된 관념에서 일어났다. 노예적인 두려움보다 하나님께 더 합당하지 못하고, 그를 향한 우리의 의무를 더 방해하는 것은 없다. 이 두려움에는 속박과 고통이 있으며, 큰 계명이 요구하는 그 온전한 사랑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주목하라. 하나님에 대한 가혹한 생각은 우리를 그의 봉사에서 몰아내며, 그 봉사 안에서 우리를 위축시킨다.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를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종교에서 아무 보람된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2.] 이 변명에 대한 그의 주인의 답변. 그의 변론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니, 그것은 기각되고, 아니 오히려 그를 거스르도록 돌려지며, 그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말문이 막힌다. 이는 여기 그의 정죄됨과 그의 형 선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그의 정죄됨(마 25:26,27). 그는 두 가지로 정죄된다.

1. 게으름. 악하고 게으른 종아. 주목하라. 게으른 종은 악한 종이며, 그 주인에게 그러한 자로 취급될 것이다. 이는 자기 일을 게을리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명하신 선을 소홀히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악을 행함으로 크게 패가하는 자의 형제이기 때문이다(잠 18:9). 하나님의 일에 부주의한 자는 마귀의 일에 분주한 자와 거의 한 혈족이다. Satis est mali nihil fecisse boni—아무 선도 행하지 않은 것은 매우 중한 책망을 받기에 족하다. 행하지 않음(태만)도 죄이며, 반드시 심판에 들어와야 한다. 게으름은 악을 위한 길을 닦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므로 모두가 더러워진다(시 14:3). 집이 비어 있으면, 더러운 영이 들어와 차지한다. 자기 영혼의 일에 게으른 자들은 단지 게으른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못한 무엇이 된다(딤전 5:13).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가라지를 뿌린다.

2. 자기모순(마 25:26,27).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줄을 네가 알았으니,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겼어야 할 것이니라. 주목하라. 죄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품는 가혹한 생각은, 비록 거짓되고 부당할지라도, 그들의 악함과 게으름을 정당화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의 죄책을 가중시키고 더할 것이다. 이것은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내가 그렇게 가혹한 주인이었다 할지라도, 그렇다면 너는 나를 기쁘게 하려고, 사랑으로는 아닐지라도 두려움으로라도 더욱 부지런하고 신중하였어야 하지 않았겠느냐? 그 이유로라도 너는 네 일에 마음을 두었어야 하지 않았겠느냐?" 만일 우리 하나님이 소멸하는 불이시라면, 그것을 고려하여 우리는 어떻게 그를 섬길지 연구하자. 혹은 이같이 (2.) "만일 네가 나를 가혹한 주인으로 생각하여 그 돈으로 손해 보고 그 손실을 책임지게 될까 두려워 친히 장사하기를 감히 못하였다 할지라도, 너는 그것을 취리하는 자들이나 금세공인들의 손에 맡겨, 곧 은행에 들여놓을 수도 있었으리니, 그러면 내가 돌아왔을 때 (다른 달란트들처럼) 무역과 상업을 통한 더 큰 향상은 얻지 못하였을지라도, 적어도 단순한 이자를 통한 더 적은 향상은 얻을 수 있었을 것이요, 내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니라." 이는 당시의 흔한 관행이었던 것 같으며, 우리 구주께서도 그것을 금하지 않으셨다. 주목하라. 만일 우리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었거나 감히 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고 감히 할 수 있었던 것을 하지 않았음이 드러날 때에는, 그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더 어렵고 위험한 봉사에 마음을 두어 모험할 수 없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더 안전하고 쉬운 봉사에서 움츠러든 것을 정당화해 주겠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나으니, 만일 우리가 담대한 모험에서 우리의 용기를 보이지 못한다 할지라도, 정직한 노력에서 우리의 선한 뜻을 증언하기를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의 주인은 작은 일의 날을 멸시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혹은 이같이 (3.)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이는 내가 네게 뿌렸고, 그 달란트는 내 돈으로서, 단지 지키도록만이 아니라 향상시키도록 네게 맡긴 것이기 때문이니라." 주목하라. 결산의 날에, 악하고 게으른 종들은 아무런 변명의 여지 없이 남겨질 것이다. 경박한 변론들은 기각될 것이요, 모든 입이 막힐 것이며, 지금 그렇게나 자기들의 자기 정당화를 내세우는 자들이 자기를 위하여 할 말이 한마디도 없을 것이다.

둘째, 그의 형 선고. 게으른 종은 다음과 같이 선고받는다.

1. 그의 달란트를 빼앗기는 것(마 25:28,29). 그러므로 그에게서 그 달란트를 빼앗으라. 달란트들은 처음에 주인에 의하여, 절대적 소유주로서, 처분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것이 그에 의하여 재판관으로서 처분된다. 그는 그것을 불충실한 종에게서 빼앗아 그를 벌하시고, 그것을 두드러지게 충성스러웠던 자에게 주어 그를 상 주신다. 그리고 이 비유의 이 부분의 의미는 그 선고의 이유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을 것이라. 이것은 다음에 적용될 수 있다. (1.) 이생의 복들—세상의 부와 소유에. 이것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주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제 이것들을 가진 자로서 그것들을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자는 풍족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 사물들 자체가 풍족하게 되거나, 적어도 그 안에서의 위로와 더 나은 것들이 풍족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없는 자, 곧 이것들을 가지고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그것을 누릴 능력도 없고 그것으로 선을 행할 능력도 없는 자에게서는(Avaro deest, tam quod habet, quam quod non habet—구두쇠는 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뿐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하여도 빈궁한 자로 여겨질 수 있다),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솔로몬이 이것을 설명한다(잠 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자가 있고,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인 자가 있느니라.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 장사하는 것이니, 그 수익은 풍성할 것이다. 그것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을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인색하고 야박하며 자선을 베풀지 않는 자들은, 그렇게 모은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전 5:13,14). 때때로 섭리는 재산을 그것으로 아무 선도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서 행하는 자들에게로 기이하게 옮기시니, 그것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모이는 것이다(잠 28:8). 잠 13:22; 욥 27:16,17; 전 2:26을 보라. (2.) 우리는 이것을 은혜의 방편들에 적용할 수 있다. 자기가 가진 기회를 부지런히 향상시키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것을 넓혀 주실 것이요,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두실 것이다(계 3:8). 그러나 자기에게 권고하시는 날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평안에 관한 것들이 자기 눈에 숨겨질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 내가 실로에 행한 것을 가서 보라(렘 7:12). (3.) 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일반 은사들에 적용할 수 있다. 이것들을 가지고 그것으로 선을 행하는 자는 풍족하게 될 것이니, 이 은사들은 사용함으로 향상되고 씀으로 빛난다. 우리가 더 많이 행할수록, 우리는 종교에서 더 많이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기 속에 있는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하지 않는 자들, 자기 능력대로 자신을 발휘하지 않는 자들은, 그 은사가 녹슬고 쇠하며 소홀히 한 불처럼 꺼져 버린다. 자기 영혼에 살아 있는 은혜의 원리가 없는 자에게서는 그가 가진 일반 은사가 빼앗길 것이니, 마치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기름이 없어 꺼진 것과 같다(마 25:8). 이같이 게으른 목자가 자기 품에 게으르게 접어 두었던 팔이 말라 버리고, 그가 부주의하게 또는 고의로 감았던 그의 오른눈이 완전히 어두워지니, 이는 슥 11:17에 위협된 바와 같다.

2.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선고받는다(마 25:30). 여기서,

(1.) 그의 성품은 무익한 종의 그것이다. 주목하라. 게으른 종들은 무익한 종으로 취급될 것이니, 이는 세상에 온 목적을 위하여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자기 출생이나 세례의 목적에 부응하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이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이나 자기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아무 보탬이 되지 못하는 자들이다. 게으른 종은 몸의 시든 지체요, 포도원의 열매 없는 나무요, 벌집의 게으른 수벌이니, 그는 아무 쓸모가 없다. 한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무익한 종이다(눅 17:10). 우리는 하나님께 유익을 끼칠 수 없다(욥 22:2).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또한 우리 자신에게는, 우리가 유익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만일 우리가 유익하지 못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기 종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는 선을 행하여야 하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비록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유익을 얻으시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는 영광을 받으신다(요 15:8).

(2.) 그의 형벌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기는 것이다. 여기서, 충성스러운 종들에게 하신 말씀에서와 같이, 우리 구주께서는 알아채지 못할 만큼 슬며시 비유에서 벗어나 그것이 의도하는 실체로 미끄러져 들어가시며, 그것이 전체에 대한 열쇠 역할을 한다. 이는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바깥 어두운 데가, 그리스도의 강론에서 지옥에서 멸망받은 자들의 비참함에 대한 흔한 묘사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태는, [1.] 매우 음울하니, 그것은 바깥 어둠이다. 어둠은 위로 없고 무서운 것이니, 그것은 애굽의 재앙 중 하나였다. 지옥에는 어둠의 사슬이 있다(벧후 2:4). 어둠 속에서는 아무도 일할 수 없으니, 게으른 종에게 합당한 형벌이다. 그것은 바깥 어둠이니, 하늘의 빛에서 밖으로, 충성스러운 종들이 들어간 그들의 주인의 즐거움에서 밖으로, 잔치에서 밖으로 내쫓긴 것이다. 마 8:12, 22:13을 비교하라. [2.] 매우 슬프니, 거기에는 큰 슬픔을 드러내는 슬피 욺이 있고, 큰 고통과 분노를 드러내는 이를 갊이 있다. 이것이 게으른 종의 몫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31-46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The Process of the Last Judg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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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심판의 과정

³¹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³²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³³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³⁴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³⁵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³⁶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³⁷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³⁸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³⁹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⁴⁰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⁴¹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⁴²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⁴³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⁴⁴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⁴⁵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⁴⁶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 큰 날에 있을 마지막 심판의 과정에 대한 묘사를 보게 된다. 그중에는 비유적인 구절들이 있는데, 양과 염소를 가르는 것이라든지 심판자와 심판받는 자들 사이의 대화 같은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 강론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비유적 실마리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것은 비유라기보다는 오히려 최후 심판의 초안 또는 묘사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말하자면 이것은 앞선 비유들에 대한 해설인 셈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보게 된다.

I. 심판자께서 심판의 보좌에 앉으심(마 25:31). 인자가 올 때에.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라.

1. 장차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 심판에서 모든 사람은 이 시련과 시험의 세상에서 행한 바에 따라, 보응과 응보의 세상에서 영원한 행복 또는 영원한 비참의 상태를 선고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 행한 바는 영원한 복음의 규범으로 판단받게 된다.

2. 그 큰 날의 심판 집행은 인자에게 위임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며(행 17:31), 모든 심판을 그에게 맡기셨으니, 따라서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그 날의 심판도 그에게 맡기셨다. 여기서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심판이 언급될 때 그리스도는 인자라고 불리시는데, 이는 그가 사람의 아들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그 자신이 동일한 본성을 지니셨으므로 더욱 흠 잡을 데 없으시다). 또한 그가 우리의 본성을 취하사 인자가 되시기까지 행하신 놀라운 낮아지심이 그 날에 이 높아지심으로 보상받을 것이며, 인성에 영예가 부여될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나타나심은 찬란하고 영화로울 것이다.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큰 위엄으로 재판석에 나아왔으나(행 25:23), 그것은 (원어가 표현하듯) 큰 허식에 불과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영광으로 재판석에 나아오실 것이다. 그 때에 의의 태양이 정오의 광채로 빛날 것이요, 땅의 임금들의 머리 되신 분이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풍성함과 그의 탁월한 위엄의 영예를 나타내실 것이며, 온 세상이 성도들만이 지금 믿는 바—곧 그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심—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서만 아니라 중보자로서 자신의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이다. 그의 초림은 모호함의 검은 구름 아래 있었으나, 그의 재림은 영광의 밝은 구름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장차 임할 자신의 영광을 확신시켜 주신 것은, 십자가의 거리낌과 임박한 그의 치욕과 고난을 덜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자기 영광으로 오실 때에 모든 거룩한 천사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분께는 영광스러운 수행단, 곧 그의 거룩한 무리들이 있을 것이니, 그들은 단지 그의 수행원일 뿐 아니라 그의 공의의 집행자들이 될 것이다. 그들은 위엄과 봉사를 위해 그와 함께 올 것이다. 그들은 법정을 소집하러(살전 4:16), 택하신 자들을 모으러(마 24:31), 가라지를 묶으러(마 13:40), 성도들의 영광의 증인이 되러(눅 12:8), 그리고 죄인들의 비참의 증인이 되러 와야 한다(계 14:10).

5. 그 때에 그는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 그는 지금 아버지와 함께 그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것은 은혜의 보좌이니, 우리가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곳이다. 그것은 통치의 보좌요,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이며, 그는 그 보좌에 앉으신 제사장이시다. 그러나 그 때에는 영광의 보좌, 곧 심판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 단 7:9,10을 보라. 솔로몬의 보좌는 비록 어느 나라에도 그와 같은 것이 없었으나, 그 보좌에 비하면 한낱 거름더미에 불과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의 날 동안 죄수로서 피고석에 서서 심문을 받으셨으나, 그의 재림 때에는 심판자로서 재판석에 앉으실 것이다.

II. 모든 사람의 자녀들이 그 앞에 나타남(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주목하라. 그 큰 날의 심판은 보편적 심판이 될 것이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소환되어야 한다. 세상의 시작부터 시간의 끝까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 땅 위 모든 곳, 곧 세상의 가장 외딴 구석, 가장 알려지지 않고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 곧 한 혈통으로 지음 받아 온 땅 위에 거하게 된 그 모든 민족의 사람들이 다 소환된다.

III. 그 때에 귀한 것과 천한 것 사이에 이루어질 구별. 그가 각각 구분하시리니, 마치 추수 때에 가라지와 알곡을 가르고, 해변에서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가르며, 타작마당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것과 같다. 악인과 경건한 자는 여기 이 세상에서 같은 나라, 같은 도시, 같은 교회, 같은 가정에서 함께 거하며 서로 확실히 구별되지 않는다. 성도들의 연약함이 그러하고, 죄인들의 위선이 그러하며, 둘 다에게 동일한 일이 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날에는 그들이 갈라져 영원히 나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리라(말 3:18). 그들은 이 세상에서 서로를 갈라낼 수 없으며(고전 5:10), 다른 누구도 그들을 갈라낼 수 없다(마 13:29). 그러나 주께서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아시고, 그가 그들을 갈라내실 수 있다. 이 구별은 매우 정확하여, 가장 하찮은 성도라도 죄인의 무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가장 그럴듯한 죄인이라도 성도의 무리 속에 숨지 못할 것이며(시 1:5), 각 사람이 자기 처소로 갈 것이다. 이것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는 것에 비유된다. 이는 겔 34:17에서 취한 것이니, 내가 양과 양 사이에서 심판하노라. 주목하라. 1.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목자이시다. 그는 지금 목자처럼 자기 양 떼를 먹이시며, 머지않아 자기에게 속한 자들과 속하지 않은 자들을 구별하실 것이니, 마치 라반이 자기 양을 야곱의 양에게서 갈라내어 그 사이에 사흘 길을 둔 것과 같다(창 30:35,36). 2. 경건한 자들은 양과 같으니—순결하고, 온순하며, 인내하고, 유익하다. 악인들은 염소와 같으니, 더 천한 종류의 짐승으로, 역겹고 다루기 어렵다. 양과 염소가 여기서는 낮 동안 같은 초장에서 함께 풀을 뜯으나, 밤에는 서로 다른 우리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나뉘어, 그는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실 것이다(마 25:33). 그리스도께서는 경건한 자들에게 영예를 베푸시니, 마치 우리가 오른편에 앉히는 자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악인들은 영원한 수치로 일어날 것이다(단 12:2). 그가 부자를 오른편에, 가난한 자를 왼편에 두신다거나, 배운 자와 귀한 자를 오른편에, 못 배운 자와 멸시받는 자를 왼편에 두신다고 말하지 않고, 경건한 자를 오른편에, 악인을 왼편에 두신다고 하셨다. 그 때에 다른 모든 구분과 세부 구분은 폐지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성도와 죄인, 거룩하게 된 자와 거룩하게 되지 못한 자로 나누는 그 큰 구별은 영원히 남을 것이며, 사람들의 영원한 상태가 이로써 결정될 것이다. 악인들은 왼손의 복, 곧 재물과 명예에 만족하였으니, 그들의 운명도 그러할 것이다.

IV. 이 각각에 관한 심판의 과정.

1. 오른편에 있는 경건한 자들에 관하여. 그들의 사건이 먼저 처리되어야 하니, 그래야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악인을 심판하는 배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인의 비참함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됨으로써 더욱 가중될 것이다(눅 13:28). 여기서 주목하라.

(1.) 그들에게 수여된 영광. 곧 그들이 무죄로 인정받을 뿐 아니라 높여지고 상 받게 되는 선고(마 25:34). 임금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목자였던 분(이는 그가 이 심리를 행하실 때 베푸실 돌보심과 부드러움을 나타낸다)이 여기서는 임금이시니, 이는 그가 그 때 선고를 내리실 때의 권위를 나타낸다. 이 임금의 말씀이 있는 곳에 권능이 있다. 이 선고에는 두 가지가 담겨 있다.

[1.] 성도들을 주께 복 받은 자로 인정하심.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오라. 첫째, 그가 그들을 복 있는 자로 선언하시니, 그들이 복 있다는 그의 말씀이 그들을 복되게 만든다. 율법은 그들의 수많은 어긋남으로 인해 그들을 저주하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그들을 속량하시고 그들을 위해 복을 사셨으므로, 그들에게 복을 명하신다. 둘째, 그의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 세상에게는 비방받고 저주받으나, 하나님께는 복 받은 자들이다. 성령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듯이(요 16:14), 아들은 성도들의 구원을 제일 원인이신 그분께 돌림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다. 하늘에 속한 일에서 우리의 모든 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흘러나온다(엡 1:3). 셋째, 그가 그들을 오라고 부르신다. 이 "오라"는 사실상 이런 뜻이다. "환영하노라, 만 번을 환영하노라, 내 아버지의 복으로 나아오라. 내게로 오라, 영원히 나와 함께 있으러 오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던 너희여, 이제 면류관을 쓰고 나와 함께 가자.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은 내 영혼이 사랑하는 자들이니, 너무 오래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도다. 이제 오라, 내 품으로 오라, 내 팔로 오라, 내 가장 사랑스러운 포옹 안으로 오라!" 오, 그 날에 이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을 어떤 기쁨으로 채울 것인가! 우리는 지금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가지만, 그 때에는 영광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다. 이 말씀은 금 규를 내미는 것이니, 우리의 청원이 나라의 절반보다 더한 것까지 허락되리라는 확신을 준다. 지금은 성령께서 말씀 안에서 오라 하시고, 신부는 기도 안에서 오라 하니, 그 결과로 달콤한 교제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복락의 완성은 임금이 오라 하실 때에 있을 것이다.

[2.] 성도들이 아버지의 복락과 나라에 들어감.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첫째, 그들이 소유하게 될 행복은 지극히 풍성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것을 그들을 위해 사시고 친히 소유하셨기에 알 만한 근거가 있으신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1. 그것은 나라이니, 이는 땅에서 가장 값진 소유로 여겨지며 가장 큰 부와 명예를 포함한다. 나라를 상속하는 자들은 면류관의 온갖 영화를 누리고, 궁정의 온갖 쾌락을 향유하며, 속주들의 특별한 보화를 다스린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하늘에서 누릴 성도들의 복락에 대한 희미한 모형에 불과하다. 여기서 거지요, 죄수요, 만물의 찌꺼기로 여겨지던 자들이 그 때에는 나라를 상속할 것이다(시 113:7, 계 2:26,27).

2. 그것은 예비된 나라이다. 그 행복은 클 수밖에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영광의 나라에서 성도들을 대접하기 위해 큰 준비가 이루어진다. 아버지께서 사랑의 생각 가운데 그들을 위해 그것을 정하셨고, 그의 위대한 지혜와 능력으로 그들을 위해 그것을 예비하셨다. 아들은 그들을 위해 그것을 사셨고, 앞서 가신 자로서 처소를 예비하러 들어가셨다(요 14:2). 또한 복되신 성령께서는 그들을 그 나라에 합당하도록 준비시키심으로써, 사실상 그들을 위해 그것을 예비하고 계신다.

3. 그것은 그들을 위하여 예비되었다. 이것은 다음을 나타낸다. (1.) 이 행복의 적합성. 그것은 모든 면에서 영혼의 본성에, 그리고 거룩하게 된 영혼의 새로운 본성에 알맞게 맞추어졌다. (2.) 그것에 대한 그들의 소유권과 권리. 그것은 일부러 그들을 위해 예비되었으니, 단지 너희 같은 자들을 위해서만 아니라 너희를 위해, 곧 너희 이름으로, 인격적으로 또 특별히 너희를 위해 예비된 것이다. 너희는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4. 그것은 창세로부터 예비되었다. 이 행복은 성도들을 위해 정해졌고, 그들은 그것을 위해 정해졌으니, 시간이 시작되기 전, 곧 영원 전부터 그러하였다(엡 1:4). 집행에서는 나중인 목적이 의도에서는 처음이다. 무한하신 지혜께서는 창조의 첫 기초를 놓으실 때부터 성도들의 영원한 영화를 염두에 두셨다.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라(고후 4:15). 또는 이것은, 복된 자들의 처소와 거처가 될 이 행복의 장소가 창조 사역의 바로 시작에 예비되었음을 나타낸다(창 1:1). 그곳 하늘들의 하늘에서 땅의 기초가 든든히 놓일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였다(욥 38:4-7).

둘째,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고 소유하게 될 권원은 매우 견고하니, 그들은 나아와 그것을 상속할 것이다. 우리가 상속으로 얻는 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마련한 것이 아니라, 법률가들의 표현대로 순전히 하나님의 행위로 얻는 것이다. 상속자, 곧 하늘의 상속자를 삼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 됨, 곧 우리의 양자 됨으로 인하여 유업에 이른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라. 상속에 의한 권원은 가장 달콤하고 가장 확실한 권원이다. 이는 가나안 땅의 소유를 빗댄 것이니, 그 땅은 상속으로 이어졌고 희년이 되기 전에는 양도되지 않았다. 이처럼 하늘의 유업은 무효화될 수 없고 양도될 수 없다. 이 세상의 성도들은 미성년 상속자와 같아서, 아버지가 정하신 때까지 후견을 받고 다스림을 받는다(갈 4:1,2). 그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지금 은혜를 통해 권원을 가진 그것을 온전히 소유하게 될 것이다. 나아와 그것을 상속하라.

(2.) 이것의 근거(마 25:35,3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어떤 선행이, 그 안에 내재한 가치나 탁월함으로 인해 하늘의 행복을 받을 공로가 된다고 추론할 수 없다. 우리의 선함은 하나님께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동일한 규범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며, 따라서 그 법에 순종한 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순종이 언급될 것이나, 이는 그들의 권원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가 사신 구속에 대한 관심의 증거로서이다. 이 행복은 순종하는 신자들에게 판결되는데, 이는 *공로의 산정(quantum meruit, 콴툼 메루이트—마땅히 받을 만한 만큼)*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러한 산정은 일과 보상 사이에 비례 관계가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것이며, 그 약속의 혜택은 일정한 조건과 한계 아래 보장된다. 권원을 부여하는 것은 그 구속과 약속이요, 순종은 단지 그 행복이 정해진 자의 자격일 뿐이다. 증서나 유언으로 조건부로 작성된 재산은, 그 조건이 증여자나 유언자의 참된 의도대로 이행될 때 절대적인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권원이 순전히 그 증서나 유언에 근거함에도 불구하고, 그 조건의 이행이 증거로 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자기에게 순종하고 선을 행함으로 참고 인내하는 자들에게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 언급된 선행은 우리가 흔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 행위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굶주린 자를 먹이거나 헐벗은 자를 입힐 형편이 전혀 못 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자선으로 먹고 입었던 자들도 오른편에 많이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순종의 한 가지 사례가 나머지 모든 것을 대표하여 제시된 것이니, 이는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다음을 가르친다. 곧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기독교에서 전부라는 것이다. 네 행함으로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또한 지금 선한 삶에서 맺는 의의 열매 외에는, 장차 어떤 것도 선한 결산에 더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 묘사된 선행은 구원받는 모든 자에게서 발견되어야 할 세 가지를 함축한다.

[1.] 자기 부인과 세상을 가볍게 여김. 세상의 것들을, 우리가 그것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한에서만 선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또한 선을 행할 만한 것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자족하며 기쁘게 가난을 견딤으로써 동일한 마음가짐을 나타내야 한다. 땅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 하늘에 합당하다.

[2.] 우리 형제에 대한 사랑. 이는 둘째 큰 계명이요, 율법의 완성이며,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위한 탁월한 준비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기를 기꺼이 함으로써 이 사랑을 증명해야 한다. 선한 행함이 없는 선한 소원은 한낱 조롱에 불과하다(약 2:15,16, 요일 3:17). 줄 것이 없는 자들은 다른 방법으로 동일한 마음가짐을 나타내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시선. 여기서 상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를 향한 사랑으로, 또 그를 바라보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선행에 탁월함을 더한다. 곧 그 안에서 우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길 때 그러하니, 다른 이들을 살리는 일을 돕는 자들뿐 아니라 자기 생계를 위해 일하는 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엡 6:5-7 참조).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선행이 그 때에 받아들여질 것이다(골 3:17).

내가 주릴 때에, 이는 곧 나의 제자와 추종자들이 주렸다는 뜻이니, 그들이 선을 행함으로 인해 원수들에게 박해를 받았거나, 혹은 섭리의 일반적 경륜으로 그러했던 것이다. 이런 일에서는 의인과 악인에게 동일한 일이 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주목하라. 첫째, 섭리는 이 세상에서 그의 백성의 형편을 이처럼 다양하게 정하시고 처리하셔서, 어떤 이들은 구제할 형편에 있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필요로 하게 하신다. 하늘의 진미로 잔치를 누리는 자들이 굶주리고 목마르며 일용할 양식이 부족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본향에 있는 자들이 타국에서 나그네 되는 것,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이 몸을 따뜻하게 할 옷이 없는 것, 건강한 영혼을 가진 자들이 병든 몸을 가지는 것,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하신 자들이 옥에 갇히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둘째, 우리의 능력에 따른 자선과 선행은 구원에 필요하며, 그 큰 날의 심판에서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무게가 그것에 두어질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우리의 고백된 복종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고후 9:13). 그러나 긍휼을 베풀지 않은 자들은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제 이 근거에 대해 의인들이 겸손히 이의를 제기하나, 심판자 자신이 이를 설명하신다.

1. 의인들이 이에 대해 묻는다(마 25:37-39). 이는 그들이 나라를 상속하기를 꺼려서도 아니요, 자기 선행을 부끄러워해서도 아니요, 그에 관한 자기 양심의 증거가 없어서도 아니다. 다만 (1.) 이 표현들은 비유적이니, 그리스도께서 자선 행위를 크게 존중하시며 특히 자기 백성에게 자기를 위하여 베푼 친절을 기뻐하신다는 이 큰 진리들을 끌어내어 각인시키기 위함이다. 또는 (2.) 이것은 영화롭게 된 성도들이, 자기들의 그토록 보잘것없고 무가치한 섬김이 그렇게 높이 칭송받고 풍성히 상 받는 것을 보고 가득 찰 겸손한 놀라움을 나타낸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나이까? 주목하라. 은혜로운 영혼들은 자기들의 선행을 하찮게 여기기 쉬우며, 특히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찌함이니이까?(사 58:3)라고 말한 자들의 기질과는 거리가 멀다. 하늘의 성도들은 무엇이 자기들을 거기에 이르게 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찌 자기들과 자기들의 섬김을 그토록 존중하셨는지 놀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다나엘을 칭찬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조차도 얼굴이 붉어졌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요 1:47,48 참조, 엡 3:20).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았나이까? 우리가 곤경에 처한 가난한 자들은 여러 번 보았으나, 어느 때에 주를 보았나이까?"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우리 가운데 계신다. 진실로 주께서 이곳에 계시되, 그의 말씀으로, 그의 규례로, 그의 사역자로, 그의 영으로, 참으로 그의 가난한 자들 가운데 계시거늘 우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요 1:48).

2. 심판자 자신이 이를 설명하신다(마 25:40).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곧 지극히 작은 자, 그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성도들의 선행은 그 큰 날에 드러날 때에, (1.) 다 기억될 것이며, 지극히 작은 것 하나, 곧 냉수 한 그릇이라도 간과되지 않을 것이다. (2.) 그것들은 그들에게 가장 유리하게 해석될 것이며, 그것에 부여될 수 있는 가장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연약함을 가장 좋게 보아 주시듯이, 그들의 섬김을 가장 크게 보아 주신다.

우리는 굶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는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어떤 보상을 예비하셨는지 본다. 그러나 그렇게 할 형편이 못 되었던 경건한 가난한 자들은 어찌 될 것인가? 그들은 쫓겨나야 하는가? 아니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곧 그들 중 지극히 작은 자라도 자기 형제로 인정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며, 그것을 자신의 위신에 손상으로 여기지 않으신다(히 2:11). 그는 자기 영광의 절정에서도 자기의 가난한 친족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사로가 거기서 친구로, 형제로 그의 품에 안긴다. 이처럼 그가 그들을 시인하실 것이다(마 10:32). [2.] 그는 그들에게 베푼 친절을 자기에게 베푼 것으로 여기실 것이다. 너희가 내게 한 것이니라. 이는 그들을 구제한 부유한 자들에 대한 존중뿐 아니라, 구제받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존중도 나타낸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의 사정을 자기 일로 삼으시고, 그들의 이익을 자기 이익으로 여기시며, 그들 안에서 자기가 영접받고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으로 여기신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난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다면, 우리가 얼마나 기꺼이 그를 구제하겠는가? 옥에 갇히셨다면, 얼마나 자주 그를 찾아가겠는가? 우리는 자기 소유로 그를 섬긴 자들(눅 8:3)이 누린 영예를 부러워하기 쉽다. 가난한 성도와 가난한 사역자가 있는 곳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우리의 친절을 기꺼이 받으실 준비가 되어 계시며, 그것은 그의 계산에 기록될 것이다.

2. 여기 왼편에 있는 자들, 곧 악인들에 관한 과정이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다음을 보게 된다.

(1.) 그들에게 내려진 선고(마 25:41). 왼편에 두임을 받는 것 자체가 치욕이었으나, 그것이 최악은 아니다. 그가 그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 모든 말에 두려움이 담겨 있으니, 마치 시내 산의 나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지듯, 한 마디 한 마디가 점점 더 비통해지고 위로를 배제한다.

[1.] 비록 그의 찌푸린 얼굴 아래라 할지라도 그리스도께 그토록 가까이 있는 것은 얼마간의 만족이 되었으련만,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나를 떠나라. 이 세상에서 그들은 종종 그리스도께 나아오라는, 곧 생명과 안식을 위해 나아오라는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의 부르심에 귀를 막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나아오려 하지 않았던 자들이 그리스도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모든 선의 근원인 나를 떠나라, 구주인 나를, 따라서 모든 구원의 소망을 떠나라. 나는 너희와 다시는 어떤 상관도, 어떤 거래도 하지 않으리라." 여기서 그들은 전능자에게 우리를 떠나소서라고 말하였으니, 그 때에 그가 그들의 미혹하는 것을 택하사 그들에게 나를 떠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이 지옥 중의 지옥이다.

[2.] 그들이 떠나야 한다면, 또 그리스도를 떠나야 한다면, 적어도 복을 받으며, 단 한마디 친절하고 자비로운 말이라도 들으며 보내질 수는 없는가? 아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떠나라. 복을 상속하러 그리스도께 나아오려 하지 않았던 자들은, 저주의 짐을 지고 그를 떠나야 한다. 그것은 율법을 범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는 율법의 저주이다(갈 3:10). 그들이 저주하기를 좋아하였으니 그것이 그들에게 임하리로다. 그러나 주목하라. 의인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이라 불리니, 그들의 복됨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복 주심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인은 단지 저주를 받은 자들아라고만 불리니, 그들의 정죄는 그들 자신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파셨는가? 아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을 팔았으며, 자기 자신을 저주 아래 두었다(사 50:1).

[3.] 그들이 떠나야 한다면, 또 저주를 지고 떠나야 한다면, 얼마간 편안하고 쉴 만한 곳으로 가게 할 수는 없는가? 잃은 것을 슬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비참이 되지 않겠는가? 아니다. 잃음의 형벌뿐 아니라 감각의 형벌도 있다. 그들은 불 속으로, 곧 불이 몸에 가하는 것만큼 혹은 그보다 훨씬 더 극심한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불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진노이니, 스스로 그 불의 땔감이 된 죄인들의 죄책 있는 영혼과 양심을 사로잡는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니, 죄인들은 곧바로 그의 손에 떨어진다(히 10:31, 롬 2:8,9).

[4.] 불 속이라면, 약하거나 부드러운 불일 수는 없는가? 아니다, 그것은 예비된 불이니, 옛적부터 정해진 형벌이다(사 30:33). 죄인들의 정죄는 종종 하나님의 능력의 행사로 언급된다. 그는 능히 지옥에 던지신다. 진노의 그릇에 그가 자기 능력을 알게 하시니, 그것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받는 멸망이다. 그 안에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진노케 한 피조물을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5.] 불 속이라면, 예비된 불이라면, 오 단지 잠시만 지속되게 하소서, 단지 불을 통과하게만 하소서.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영원한 불이 될 것이다. 그 불은 죽지 않는 영혼들을 사로잡아 삼키므로 땔감이 떨어져 꺼질 수 없고, 죽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진노로 점화되고 계속 타오르므로 불어 일으킬 것이 없어서 꺼질 수도 없으며, 자비와 은혜의 흐름이 영원히 배제되었으므로 그것을 끌 것이 아무것도 없다. 혀를 식힐 물 한 방울도 거절된다면, 이 불꽃을 끌 물 몇 동이는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6.] 그들이 그러한 끝없는 비참의 상태에 처해지도록 정해졌다면, 적어도 거기에 좋은 동무라도 있게 할 수는 없는가? 아니다, 마귀와 그 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으니, 그들은 그들을 이 비참에 이르게 하는 데 일조하고 그 안에서 그들을 조롱할 그들의 철천지원수들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마귀를 섬겼으니, 따라서 그가 있는 곳에 있도록 정해지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그리스도를 섬긴 자들이 그가 계신 곳에서 그와 함께 있도록 데려가지는 것과 같다. 귀신들이 들끓는 집에 거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거늘, 하물며 영원히 그들과 동무가 되는 것이야 어떠하겠는가? 여기서 주목하라.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마귀들의 우두머리, 곧 반역의 주모자가 있으며, 나머지는 그의 사자들, 곧 그의 사신들로서 그들의 활동을 통해 그가 자기 나라를 지탱한다는 것을 암시하신다. 그리스도와 그의 천사들은 그 날에 그 용과 그의 무리를 이기실 것이다(계 12:7,8). 둘째, 이 불은, 나라가 의인들을 위해 예비된 것처럼 일차적으로 악인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본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의도되었다고 한다. 만일 죄인들이 자기 정욕을 좇음으로써 사탄과 한패가 된다면, 그를 위해 또 그의 동료들을 위해 예비된 그 비참에 동참하게 되더라도 자기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칼뱅(Calvin)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저주받은 자들의 고통이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을 피할 모든 소망을 끊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마귀와 그 사자들은 이미 구덩이에 갇힌 죄수들인데, 땅의 벌레들이 어찌 피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2.) 이 선고의 이유가 제시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다 의로우며, 그는 그 안에서 옳다 함을 받으실 것이다. 그가 친히 심판자이시니, 따라서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로다.

이제 [1.] 그들에게 부과되어 선고의 근거가 된 모든 것은 *부작위(태만)*이다. 앞서 그 종이 정죄받은 것은 달란트를 낭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묻어 두었기 때문이듯이, 여기서도 그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내가 주리고 목말랐으니 이는 너희가 내게서 음식과 마실 것을 빼앗았기 때문이요, 내가 나그네 되었으니 이는 너희가 나를 추방했기 때문이요, 헐벗었으니 이는 너희가 나를 벗겼기 때문이요, 옥에 갇혔으니 이는 너희가 나를 거기 가두었기 때문이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이러한 곤경에 처했을 때에 너희가 매우 이기적이어서, 자기 안일과 쾌락에 너무 몰두하고, 자기 수고를 너무 아끼며, 자기 돈을 내놓기를 너무 꺼려서, 너희가 할 수 있었을 만큼 나의 구제와 도움을 위해 공양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신다. 너희는 시온에서 안일하며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던(암 6:4-6) 저 안락을 좇는 자들과 같았다. 주목하라. 부작위(태만)가 수천 명을 멸망시킨다.

[2.] 그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자선 행위의 부작위이다. 그들이 정죄받는 것은 자기들의 제사와 번제를 빠뜨렸기 때문이 아니다(그들은 이런 것에는 넘쳤다, 시 50:8). 오히려 율법의 더 중한 바, 곧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이스라엘을 떡과 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성회에서 제외되었다(신 23:3,4). 주목하라. 가난한 자에 대한 무자비함은 정죄받을 죄이다. 우리가 상의 소망으로 자선 행위에 이끌리지 않는다면,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라도 영향을 받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한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주목하라. 그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고치지 아니하였고, 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나를 풀어 주지 아니하였다"(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능력 밖이었을 것이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능히 할 수 있었을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다"고 하신다. 주목하라. 죄인들은 그 큰 날에, 자기 손의 능력 안에 있던 그 선을 행하지 않은 부작위로 인해 정죄받을 것이다. 그러나 무자비한 자의 운명이 그토록 끔찍하다면, 잔인한 자의 운명, 곧 박해자의 운명은 얼마나 더 견딜 수 없겠는가! 이제 이 선고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죄수들이 이에 대해 항변한다(마 25:44).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을 보았나이까? 정죄받은 죄인들은, 자기들을 변호해 줄 변론이 전혀 없음에도 헛되이 변명을 시도한다. 이제 1. 그들이 변론하는 방식은 그들의 현재의 황급함을 나타낸다. 그들은 황급한 자들처럼 말을 짧게 끊는다.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을 보았나이까? 그들은 자기 죄책을 스스로 의식하고 심판의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 고소 내용을 되풀이하기를 꺼린다. 또한 그런 하찮은 변론을 고집할 시간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니, 그것은 (우리 표현대로) 모두 "법정을 희롱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 그들의 변론 내용은, 그들이 알 수도 있었으나 이제 너무 늦어서야 알게 된 그것을 이전에 헤아리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멸시하고 박해하던 자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박해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들은 결코 그에게 모욕을 가하려 의도하지 않았고, 그토록 큰 문제가 되리라고 예상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멸시를 가한 것이 단지 가난하고 약하며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무리, 곧 종교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부산을 떠는 무리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자들은, 바울처럼 회심의 날에든, 혹은 여기 이 자들처럼 정죄의 날에든, 자기들이 박해한 것이 예수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보라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노라고 말한다면,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헤아리지 아니하시겠느냐(잠 24:11,12)?

둘째, 심판자께서 이를 옳다 하신다. 그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 안에서 자기를 향해 행한 거친 말들에 대해 모든 경건치 않은 자들을 책망하실 것이다(유 1:15). 그는 이 규칙을 따르신다(마 25:45).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와 추종자들, 곧 그들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해진 것을, 그는 자기에게 행해진 것으로 여기신다. 그가 그들 안에서 비방받고 박해받으시니, 이는 그들이 그를 위하여 비방받고 박해받기 때문이며, 그들의 모든 환난에 그가 동참하신다. 그들을 건드리는 자는, 그의 눈동자 못지않게 연약한 부분에서 그를 건드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 이 두 선고의 집행이 있다(마 25:46). 집행은 법의 생명이니,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이 선고대로 이루어지도록 보살피실 것이다.

1. 악인은 영벌에 들어갈 것이다. 그 때에 선고가 신속히 집행될 것이며, 어떤 집행유예도 주어지지 않고, 판결의 정지를 신청할 어떤 시간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악인의 집행이 먼저 언급되는데, 이는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르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1.) 장래 상태에서 악인의 형벌은 영벌이 될 것이니, 그 상태는 변경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자기 본성을 스스로 바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킬 그의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으니, 이 세상에서 은혜의 날을 허비하고, 은혜의 영을 거역하며, 은혜의 방편을 남용하고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2.) 악인들은 그 형벌 속으로 들어가도록 떠밀릴 것이다. 그들이 자원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아니, 그들은 빛에서 어둠으로 내쫓긴다. 그러나 이는 죄책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확신과 자비에 대한 최종적 절망을 나타낸다.

2. 의인은 영생에 들어갈 것이다. 곧 그들은 나라를 상속할 것이다(마 25:34). 주목하라. (1.) 하늘은 생명이니, 그것은 온전한 행복이다. 영혼의 생명은, 마치 몸의 생명이 생기(生氣)에 의해 영혼과 연합함에서 나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하나님과 연합함에서 나온다. 하늘의 생명은 하나님을 뵙고 누리는 데 있으며, 그에 대한 완전한 닮음과, 그와의 직접적이고 끊임없는 교제에 있다. (2.)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 생명 자체를 끝낼 죽음도 없고, 그 위로를 끝낼 노년도 없으며, 그것을 쓰라리게 할 어떤 슬픔도 없다. 이처럼 생명과 사망, 선과 악, 복과 저주가 우리 앞에 놓여 우리로 길을 택하게 하니, 우리가 택한 대로 우리의 끝이 될 것이다. 이방인들조차도 저세상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이 서로 다른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키케로(Cicero)는 그의 투스쿨룸 논쟁(Tusculan Questions)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소개한다. Duæ sunt viæ, duplicesque cursus è corpore exeuntium: nam qui se vitiis humanis contaminarunt, et libidinibus se tradiderunt, iis devium quoddam iter est, seclusum à consilio deorum; qui autem se integros castosque servarunt, quibusque fuerit minima cum corporibus contagio, suntque in corporibus humanis vitam imitati deorum, iis ad illos a quibus sunt profecti facile patet reditus—몸에서 떠나는 자들 앞에는 두 길, 두 갈래의 행로가 열려 있다. 인간의 악덕으로 자기를 더럽히고 자기 정욕에 자기를 내준 자들은 신들의 회의와 의논에서 멀리 떨어진, 빗나간 길을 가게 된다. 그러나 자기를 온전하고 정결하게 지킨 자들, 육체에 가장 적게 더럽혀진 자들, 그리고 몸 안에 있는 동안 신들의 삶을 본받은 자들은, 자기들이 나온 그 숭고한 존재들에게로 쉽게 돌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