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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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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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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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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장 서론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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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관하여 이 장에 기록된 이야기는 매우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이다. 그 사건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수는 없을 것이다. 무죄하고 탁월하신 한 분이 이처럼 학대당하는 것을 보면, 보통의 인지상정만으로도 마음이 녹아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의 목적과 그 열매를 생각한다면, 이는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이처럼 내어줌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자랑할 만한 이유를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장에서 다음을 주목하라. I. 그가 어떻게 고소당하셨는가. 1. 그를 빌라도에게 넘긴 일, 마 27:1,2. 2. 유다의 절망, 마 27:3-10. 3. 빌라도 앞에서 그리스도를 심문하고 재판한 일, 마 27:11-14. 4. 백성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은 아우성, 마 27:15-25. 5. 선고가 내려지고 그의 처형을 위한 영장이 서명된 일, 마 27:26. II. 그가 어떻게 처형당하셨는가. 1. 그가 야만적으로 다루어지신 일, 마 27:27-30. 2. 처형 장소로 끌려가신 일, 마 27:31-33. 3. 거기서 그가 온갖 모욕을 당하시고 비방을 받으신 일, 마 27:34-44. 4. 하늘이 그를 향하여 찡그린 일, 마 27:45-49. 5. 그의 죽음에 수반된 여러 주목할 만한 일들, 마 27:50-56. 그가 장사되시고 그의 무덤에 파수꾼이 세워진 일, 마 27:57-66.

마태복음 27장 1-10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The Repentance of Judas; The Confession of Judas; The Death of Judas; Disposal of the Thirty Pieces of Sil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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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뉘우침, 유다의 자백, 유다의 죽음, 은 삼십에 대한 처분

¹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²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³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⁴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⁵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⁶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⁷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⁸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⁹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은 삼십을 가졌으니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값 매긴 자의 몸값이라
¹⁰ 그들이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 값을 주고 주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하였느니라 하였더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손에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으신 채로 두었는데, 그러나 그들은 이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었다(즉 위협만 할 수 있었다). 이 일이 있기 약 이 년 전에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사형 집행의 권한을 거두어 갔으므로 그들은 어느 누구도 죽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른 새벽에 또 다른 회의가 소집되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의논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두세 시간 동안 베개와 상의한(즉 잠자리에서 궁리한) 후 그 새벽 회의에서 무슨 일이 이루어졌는지를 듣게 된다.

I.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에게 넘겨졌으니, 이는 그들이 그분께 선고한 판결을 빌라도로 하여금 집행하게 하려 함이었다. 유대는 이 일이 있기 거의 백 년 전에 폼페이우스(Pompey)에게 정복당한 이래로 로마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어 왔고, 최근에는 시리아 속주의 일부가 되어 시리아 총독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 총독 아래에는 여러 프로쿠라토르(procurator, 행정장관) 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세입(歲入) 업무를 담당하였으나, 특히 빌라도처럼 때로는 총독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기도 하였다. 이것은 규(圭, 통치권)가 유다를 떠났다 는 명백한 증거였고, 따라서 이제 야곱의 예언(창 49:10)을 따라 실로(Shiloh)가 오셔야만 하였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 저술가들에 의해 거칠고 오만한 기질의 사람, 고집스럽고 무자비하며 극도로 탐욕스럽고 압제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유대인들은 그의 인격을 몹시 미워하였고 그의 통치에 진력이 나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그들의 악의의 도구로 그를 이용하였다.

1. 그들은 예수를 결박하였다. 그분은 처음 붙잡히실 때 결박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공회 앞에 서 계실 때 그 결박을 풀어 주었거나, 아니면 이제 거기에 결박을 더한 것이다. 그분을 유죄로 판결한 후 그들은 통상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에게 하듯이 그분의 손을 등 뒤로 묶었다. 그분은 이미 사람을 향한 사랑의 줄과 친히 떠맡으신 일의 줄로 매여 계셨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삼손이 그러했듯이 이 결박을 곧 끊어 버리셨을 것이다. 우리는 불의의 줄 에 매였고 우리 죄의 줄에 사로잡혀 있었으나(잠 10:2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의 멍에 를 주 예수의 목에 매어 두셨으니(사 50:14[참조: 사 53장의 정서로 해석]), 이는 우리가 그분의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은 것처럼 그분의 결박으로 풀려나게 하려 하심이었다.

2. 그들이 그분을 끌고 갔으니, 일종의 개선 행렬처럼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끌고 갔다. 그렇게 그분은 옥과 심문에서 끌려가셨다(사 53:7,8). 가야바의 집에서 빌라도의 관저까지는 거의 일 마일 정도였다. 그 길을 따라 내내 그들은 예루살렘의 거리를 통과하여 그분을 끌고 갔으니, 아침이 되어 거리가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할 무렵 그분을 세상의 구경거리로 삼으려 함이었다.

3. 그들은 그분을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으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 번 말씀하신 바, 곧 자신이 이방인에게 넘겨지리라 하신 대로였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에 노출되어 있었고 죄 아래 갇혀 있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구주가 되셔야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의 재판에 넘겨지셨고, 둘 다 그분의 죽음에 손을 댄 것이다. 이 부패한 교회의 통치자들이 어떻게 세속 위정자를 악용하여, 자기들의 불의한 결정을 집행하는 데 그를 이용하고, 그들이 미리 정한 학대를 가하게 하였는지(사 10:1) 보라. 이와 같이 땅의 왕들이 교황권에 의해 비참하게 농락당하여, 옳든 그르든 이단으로 낙인찍은 자들을 정의의 칼뿐 아니라 전쟁의 칼로도 근절하는 고역에 떠밀려, 자기 자신의 이익에 큰 손해를 입어 왔다.

II.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신한 대가로 유다에게 지불한 돈은 유다에 의해 그들에게 도로 돌려지고, 유다는 절망 가운데 스스로 목을 매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리스도를 고소하면서 이것, 곧 그분의 제자가 그분을 자기들에게 팔아넘겼다는 사실로 자기를 든든히 하였다. 그러나 이제 고소가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그 끈이 그들을 저버리게 되었고, 심지어 그 사람(유다) 마저도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무죄함의 증인 이자 하나님의 공의의 기념비가 되었다. 이것은 다음을 이바지하였다. 1. 그리스도의 고난 한복판에서 그분께 영광이 되었고, 또 유다 안에 들어갔던 사탄을 이기신 그분의 승리의 본보기가 되었다. 2. 그분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경고가 되었고, 그들로 하여금 더욱 변명할 수 없게 하였다. 만일 그들의 마음이 이 악을 행하기로 온전히 굳어 있지 않았다면, 유다가 말하고 행한 것이 고소를 멈추게 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1.) 유다가 어떻게 뉘우쳤는지 여기서 보라. 그것은 회개하고 믿고 용서받은 베드로와 같지 않았다. 그렇다, 그는 뉘우쳤으나 절망하였고 멸망하였다. 자, 여기서 살펴보라.

[1.] 무엇이 그로 하여금 뉘우치게 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정죄됨을 보았을 때 였다. 유다는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시거나, 아니면 그들의 재판정에서 친히 자기 사정을 변호하여 무사히 풀려나시리라고,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영예를, 유대인들은 수치를, 자기는 돈을 차지하고 아무 해도 없으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는 이를 기대할 근거가 없었으니, 자기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하리라 고 그토록 자주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가 그 헛된 공상에 부응하지 않자 그제야 이 공포에 빠졌으니, 곧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거센 흐름과 그분이 그것에 굴복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주목하라. 행위를 하나님의 법으로가 아니라 그 결과로 가늠하는 자들은 그 가늠에서 자신이 틀렸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죄의 길은 내리막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조차 쉽게 멈추지 못한다면, 우리가 죄의 길로 들어서게 한 다른 이들은 더더욱 멈출 수 없다. 그가 스스로 뉘우쳤으니, 곧 자기가 행한 일을 돌이켜 볼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슬픔과 고뇌와 분노로 가득 찼다. 그가 자기 주님을 배신하도록 유혹받았을 때, 은 삼십은 붉고 잔에서 그 빛을 내는 포도주 처럼 매우 곱고 번쩍여 보였다. 그러나 그 일이 행해지고 돈이 지불되자 그 은은 찌꺼기가 되었으니, 그것은 뱀같이 물고 독사같이 쏘았다. 이제 그의 양심이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내가 무슨 짓을 하였는가! 이런 하찮은 것을 위해 내 주님을, 그리고 그분 안에 있는 내 모든 위로와 행복을 팔아 버리다니, 나는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한 자인가! 그분께 가해진 이 모든 학대와 모욕이 다 내게 돌려지는구나. 그분이 결박되고 정죄되며 침 뱉음을 당하고 매 맞으신 것이 다 나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 악한 거래를 했을 때 나는 일이 이 지경에 이르리라고는 거의 생각지 못하였으니, 그토록 나는 어리석고 무지하여 마치 짐승과 같았도다." 이제 그는 자기가 메었던 돈주머니를, 자기가 탐했던 그 돈을, 자기가 거래했던 제사장들을, 그리고 자기가 태어난 그 날을 저주한다. 자기에게 베푸셨으나 그토록 비열하게 갚아 드린 주님의 선하심에 대한 기억, 자기가 짓밟아 버린 그 긍휼의 심정, 그리고 자기가 무시해 버린 그 정당한 경고들이 그의 깨달음을 단단하게 벼리어 더욱 사무치게 만들었다. 이제 그는 주님의 말씀이 참됨을 알게 되었으니,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주목하라. 죄는 곧 그 맛을 바꿀 것이다. 그것이 혀 밑에 단 것같이 머금어진다 할지라도, 뱃속에서는 독사의 쓸개 로 변할 것이니(욥 20:12-14), 마치 요한의 책과 같다(계 10:9).

[2.] 그의 뉘우침의 표징들은 무엇이었는가.

첫째, 그는 배상하였다. 그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으니, 그들이 모두 함께 공개적으로 모여 있을 때였다. 이제 그 돈은 그의 양심을 불태웠고, 그는 일찍이 그것을 좋아했던 만큼이나 이제는 그것에 진저리를 쳤다. 주목하라. 부정하게 얻은 것은 그것을 얻은 자들에게 결코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다(렘 13:10, 욥 20:15).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배신하기 전에 뉘우치고 그 돈을 도로 가져왔더라면 위로 가운데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아직 길에 함께 있을 때에 화해한 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으니, 이제 그는 공포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차라리 그것에 손대지 않았더라면 좋았으리라고 만 번이라도 바랐을 것이다. 약 5:3을 보라. 그는 그것을 도로 가져왔다. 주목하라. 불의하게 얻은 것은 간직해서는 안 되니, 그렇게 하는 것은 그것을 얻게 한 그 죄를 계속하는 것이며,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으로서 회개와 양립할 수 없다. 그는 그것을 자기에게 준 자들에게 가져왔으니, 자기 거래를 뉘우쳤음을 그들에게 알리려 함이었다. 주목하라. 다른 이들이 죄를 짓도록 부추기고 그들을 죄 가운데 완고하게 만든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를 주실 때 자기가 함께 죄에 가담했던 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그것이 그들을 회개로 이끄는 수단이 되게 해야 한다.

둘째, 그는 자백하였다(마 27:4).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1. 그리스도의 영예를 위하여, 그는 그분의 피를 무죄하다 고 선언한다. 만일 그분이 어떤 죄된 행실을 범하셨다면, 그분의 제자인 유다는 분명히 그것을 알았을 것이며, 그분을 배신한 자로서 분명히 그것을 폭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유로이, 강요받지 않고서, 그분을 유죄하다 고 선언한 자들의 면전에서 그분을 무죄하다고 선언한다. 2. 자기 자신의 수치를 위하여, 그는 이 피를 배신함으로 자기가 죄를 범하였음을 자백한다. 그는 그 책임을 다른 누구에게도 돌리지 않는다. "당신들이 나를 고용하여 이 일을 시켰으니 당신들이 죄를 범한 것이오"라고 말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 "내가 이 일을 함으로 죄를 범하였도다." 유다는 여기까지 회개를 향해 나아갔으나,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었다. 그는 자백하였으나 하나님께 한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아버지여, 하늘에 대하여 죄를 지었나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무죄한 피를 배신한 것은 자백하였으나, 이 악의 뿌리였던 그 악한 돈 사랑은 자백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배신하고도 자기 자신을 그 일에서 의롭다 하는 자들이 있으니, 이런 자들은 유다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유다의 참회의 자백을 어떻게 대했는지 여기서 보라. 그들은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였다. 그는 그들을 자기의 고해 신부로 삼았는데, 그것이 그들이 그에게 준 사죄(赦罪) 였다. 그들은 거룩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라기보다 마귀들의 제사장에 더 가까웠다.

[1.]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신한 일에 대해 얼마나 무심하게 말하는지 여기서 보라. 유다는 그리스도의 피가 무죄한 피라고 그들에게 말하였는데, 그들은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하였다. 그들이 이 피를 갈망하고, 그것을 배신하도록 유다를 고용하고, 이제 그것을 불의하게 흘리도록 정죄한 것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이것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그것이 그들의 격렬한 고소에 아무런 제동도 걸지 못하고, 이 의로운 사람에게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조심하라는 아무런 경고도 주지 못한단 말인가? 이같이 어리석은 자들은 죄를 비웃으니, 마치 가장 큰 악행을 저질러도 아무 해도 없고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지 않는 것처럼 여긴다. 이같이 많은 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가벼이 여기니, 그분이 그런 일들을 당하신 것이 그들에게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

[2.] 그들이 유다의 죄에 대해 얼마나 무심하게 말하는지 여기서 보라. 그는 이르되 내가 죄를 범하였노라 하였는데, 그들은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우리에게 말하는 네 죄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였다. 주목하라. 다른 이들의 죄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니, 특히 우리가 어떻게든 가담하였거나 함께 동참한 죄들이 그러하다. 하나님이 욕을 당하시고, 영혼들이 상하며, 사탄이 만족하고 그의 이익이 도모되는 것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돕고 부추긴 것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단 말인가? 만일 이스르엘의 장로들이 이세벨을 기쁘게 하려고 나봇을 죽였다면, 그것이 아합과 아무 상관이 없는가? 아니다, 그가 죽였으니, 이는 그가 소유를 차지하였기 때문이다(왕상 21:19). 죄의 책임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전가되지 않는다. 만일 이 일에 죄가 있다면, 그들은 유다에게 그가 그것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고 그가 그것을 짊어져야 한다 고 말한다. 첫째, 그가 그분을 자기들에게 배신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죄가 참으로 더 큰 죄 였다(요 19:11).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죄가 아니라는 결론이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들의 죄를 가중시켜 우리 자신의 죄를 경감시키는 것은 우리 마음의 속임수가 흔히 드러나는 한 사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비교에 따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따른 것이다. 둘째, 그가 그분을 무죄하다고 알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무죄하다면 그것은 네가 당할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바를 넘어선다. 우리는 그를 유죄하다 고 판결하였으니, 따라서 그를 그러한 자로 정당하게 고소할 수 있다." 악한 행실은 악한 원리들에 의해 지탱되니, 특히 다음과 같은 원리가 그러하다. 곧 죄는 그것을 죄라고 여기는 자들에게만 죄이며, 선한 사람을 박해하더라도 우리가 그를 악한 사람으로 여긴다면 아무 해가 없다는 원리이다. 그러나 이같이 하나님을 조롱하려고 생각하는 자들은 다만 자기 자신을 속이고 멸망시킬 뿐이다.

[3.] 유다가 처한 깨달음과 공포와 가책에 대해 그들이 얼마나 무심하게 말하는지 보라. 그들은 그 죄에 그를 기꺼이 이용하였고 그때는 그를 매우 아꼈다. 그가 당신들이 내게 무엇을 주려느냐 내가 그를 당신들에게 넘기리라 라고 말하였을 때, 유다보다 그들에게 더 환영받는 자는 없었다. 그때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의 죄가 그를 두려움에 빠뜨리자 그들은 그를 멸시하였고, 그에게 할 말이 아무것도 없어 그를 그 자신의 공포에 떠넘겨 버렸다. 그가 무엇하러 와서 자기의 우울한 공상으로 그들을 괴롭히는가? 그들에게는 그에게 신경 쓰는 것 말고 할 다른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왜 그토록 그를 멀리하는가? 첫째, 아마도 그들은 그의 깨달음의 불씨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자기들 자신의 양심에 불을 댕길까, 또 그의 신음을 듣다가 자기들 자신의 양심에 경종이 울릴까 어느 정도 두려워했을 것이다. 주목하라. 완고한 죄인들은 깨달음에 맞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작정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회개하는 자를 멸시의 눈으로 바라본다. 둘째, 어쨌든 그들은 유다를 도우려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를 올무에 빠뜨려 놓고 나서 그들은 그를 버렸을 뿐 아니라 그를 비웃었다. 주목하라. 깨달음 가운데 처한 죄인들은 죄 가운데 사귀던 옛 동무들이 비참한 위로자에 불과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반역(배신) 행위는 좋아하면서 그 반역자(배신자)는 미워하는 것이 흔한 일이다.

(3.) 여기에 유다가 이로 말미암아 내몰린 철저한 절망이 있다. 만일 대제사장들이 그에게 고소를 멈추겠다고 약속하였더라면 그것이 그에게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이 보이지 않자 그는 자포자기하게 되었다(마 27:5).

[1.] 그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었다. 대제사장들은 그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죄책을 자기들에게 떠안게 될까 두려워서였고, 그 짐은 유다가 지기를 그들이 바랐기 때문이다. 유다는 그것을 간직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그가 쥐기에는 너무 뜨거웠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성소에 던졌으니,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것이 대제사장들의 손에 떨어지게 하려 함이었다. 죄의 죄책이 결부되거나 결부되었다고 여겨질 때 돈이 얼마나 독약 같은 것이 되는지 보라.

[2.] 그는 가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첫째, 그는 물러갔다—아네코레세(anechorese)—그는 어떤 외딴 곳으로 물러갔으니, 마귀에게 이끌려 광야로 내몰린 그 귀신 들린 사람과 같았다(눅 8:29). 절망 가운데 홀로 있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만일 유다가 그리스도께로, 혹은 제자들 중 누구에게라도 갔더라면, 사정이 아무리 나빴어도 어쩌면 도움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에게서 그것을 얻지 못하자 그는 자기 자신을 절망에 내맡겼다. 그리고 제사장들의 도움으로 그를 죄로 이끌었던 바로 그 마귀가 그들의 도움으로 그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둘째, 그는 자기 자신의 형 집행인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목을 매었다. 그가 슬픔으로 질식하였다 는 것이 해먼드 박사(Dr. Hammond)의 견해이다. 그러나 휘트비 박사(Dr. Whitby)는 우리 번역(스스로 목매어 죽었다)이 옳다고 확언한다. 유다는 죄에 대한 직시 와 자각 은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깨달음은 없었으니, 그리하여 그는 자기 죄악 가운데 쇠잔하였다. 우리가 짐작건대 그의 죄는 그 본성상 사함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죽인 자들 가운데서도 구원받은 자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가인처럼 자기 죄악이 사함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크다고 단정하였고, 하나님의 자비보다는 차라리 마귀의 자비에 자기를 내던지려 하였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자기 주님의 피를 배신한 것보다 하나님의 자비를 절망한 데서 더 큰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제 전능자의 공포가 그를 향해 진을 쳤다.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이제 그에 관하여 예언된 대로 물같이 그의 뱃속으로, 기름같이 그의 뼈로 들어왔고(시 109:18,19), 그를 이 자포자기의 수단으로 내몰았으니, 곧 그 안에 있는 지옥 을 피하려고 그 앞에 있는 저것 으로 뛰어들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앞에 있는 것은 이 공포와 절망의 완성이요 영속에 불과하였다. 그는 불꽃을 피하려고 불 속으로 자기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평안을 얻으려고 지옥으로 가야만 한다면 그 처지는 비참한 것이다.

자, 이 이야기에서 다음을 보게 된다. 1. 우리는 사탄이 들어간 자들, 특히 돈 사랑에 내맡겨진 자들이 맞이하는 비참한 종말의 한 사례를 본다. 이것이 곧 많은 이들이 그것에 빠져 들게 되는 멸망이다(딤전 6:9,10). 마귀가 들어간 그 돼지가 어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마귀가 들어간 그 배신자가 어찌 되었는지 기억하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 우리는 사람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한 사례를 본다(롬 1:18). 베드로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어떤 죄인들의 회심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의 승리를 보는 것처럼, 유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다른 죄인들이 멸망을 당하는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권능과 공의의 승리를 본다. 사탄이 들어갔던 유다가 이같이 달려 죽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그 노략을 떠맡으신 그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다(골 2:15). 3. 우리는 절망의 무서운 결과의 한 사례를 본다. 그것은 흔히 자살로 끝난다. 슬픔 은, 죄에 대한 슬픔이라 할지라도, 만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망을 이루나니(고후 7:10), 그 가장 끔찍한 종류의 사망을 이룬다. 심령의 상함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우리는 죄를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나쁘게 여기되, 다만 그것을 사함받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도움에 대해서는 절망하되, 하나님 안에 있는 도움에 대해서는 절망하지 말자. 자기 생명을 끊음으로 양심을 진정시키려고 생각하는 자는, 사실상 전능하신 하나님께 그분의 최악의 것을 행해 보시라고 도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살은 비록 일부 이교 도덕가들에 의해 처방되었으나, 그 병이 아무리 심하다 한들 분명히 그 병보다 더 나쁜 처방이다. 우울증의 시작을 경계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자.

(4.) 유다가 도로 가져온 그 돈의 처분(마 27:6-10). 그것은 토기장이의 밭 이라 불리는 밭을 사는 데 쓰였다. 그것이 그렇게 불린 것은 어떤 토기장이가 그것을 소유했거나, 경작했거나, 그 근처에 살았거나, 아니면 깨진 토기 그릇들이 거기에 버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밭은 나그네들, 곧 다른 민족 출신으로 유대 종교에 개종한 자들로서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거기서 죽게 된 이들을 위한 묘지가 되게 하려 함이었다. [1.] 그들이 나그네들을 매장하는 일에 마음을 쓴 것은 인도적인 행위의 한 사례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 스스로도(바울이 말하듯이, 행 24:15)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다 있으리라 는 것을 인정하였음을 시사한다. 우리가 그러므로 죽은 몸을 돌보는 것은, 그것이 이성적 영혼의 처소였기 때문일 뿐 아니라 다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 나그네들을 따로 떨어진 곳에 묻은 것은 그들의 겸손의 사례는 아니었으니, 마치 그들이 자기들의 묘지에 함께 누일 만한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여긴 것이다. 나그네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거리를 두어야 했고, 너는 네 자리에 서 있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하니라(사 65:5) 하는 그 원리가 무덤에까지 내려가야 했던 것이다. 셋의 자손들은 비록 아브라함이 그들 가운데 나그네였음에도 그를 더 호의적으로 대하여 자기들의 묘실 중 가장 좋은 것을 그에게 내어 주었다(창 23:6). 그러나 주께 자기를 연합한 나그네의 자손들 은 비록 따로 묻힌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와 함께 일어날 것이다.

이 토기장이의 밭을 산 일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날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그날 그들은 그분을 끝까지 추적하는 일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 쓰기에는 너무 바빴다). 그러나 그것은 그 후 오래지 않아 일어났으니,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승천 직후에 그것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첫째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위선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들은 악의를 품고 복되신 예수를 박해하고 있었으면서, 이제,

1. 그들은 그 반역자(배신자)를 고용하였던 그 돈을 성전의 성전고(聖殿庫), 곧 고르반(corban) 에 넣기를 꺼린다. 비록 아마도 그들은 그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둘러대며 그것을 성전고에서 꺼냈을 것이고, 또 그들이 고르반 의 대단한 열성가들로서 온 나라의 재물을 그리로 끌어들이려고 애썼음에도, 핏값이었던 그 돈은 거기에 넣으려 하지 않았다. 반역자의 삯을 그들은 창기의 화대와 같은 것으로, 또 악행자(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러한 자로 만들었다)의 값을 개의 값과 동등한 것으로 여겼으니, 그 둘 중 어느 것도 여호와의 전에 가져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신 23:18). 그들은 이렇게 하여, 성전에 대한 자기들의 깊은 경외심을 백성에게 심어 줌으로써 자기들의 평판을 지키려 하였다. 이같이 그들은 낙타는 삼키면서 하루살이는 걸러 내었다.

2. 그들은 비록 자기 비용으로는 아니지만, 나그네들을 위한 묘지를 마련하는 이 공익적인 선행으로 자기들이 행한 일을 속죄하려고 생각한다. 이같이 무지의 시대에 사람들은 교회를 짓고 수도원에 기부하는 것이 부도덕한 행위들을 보상해 주리라고 믿게끔 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나그네들 과 이방인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은혜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분의 피의 값을 통해 죽음 이후 그들을 위한 안식처가 마련된 것이다. 이같이 많은 고대 교부들이 이 구절을 적용한다. 무덤 은 토기장이의 밭이니, 거기에 그 몸들이 멸시받는 깨진 그릇들처럼 던져진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스스로 땅에서 나그네 됨 을 고백하며 더 나은 본향을 찾는 자들을 위해 그것을 사셨고, (구입자가 그렇게 하듯) 그 소유권을 바꾸어 놓으셨으니, 그리하여 이제 죽음이 우리의 것이요 무덤이 우리의 것이며 우리를 위한 안식의 침상이 되었다. 독일인들은 자기들의 언어로 묘지를 하나님의 밭 이라 부르니, 이는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한 알의 밀 처럼 뿌리시기 때문이다(요 12:24). 호 2:23, 사 26:19을 보라.

셋째로, 그리스도의 피를 사고판 자들의 오명을 영구히 남기기 위함이다. 이 밭은 흔히 아겔다마(Aceldama)—피밭 이라 불렸다. 그것은 대제사장들에 의해서가 아니었으니, 그들은 이 묘지에 자기들 자신의 범죄에 대한 기억을 묻어 버리기를 바랐다. 그것은 백성에 의해서였으니, 그들은 대제사장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 자기가 무죄한 피를 배신하였다는 유다의 시인을 주목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 이름을 영구한 기념을 위하여(in perpetuam rei memoriam) 그 밭에 붙였다. 주목하라. 하나님의 섭리는, 비록 큰 인물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악한 행위에 불명예를 영구히 물려주는 여러 방도를 가지고 계시니, 그들이 비록 자기 수치를 가리려 애쓸지라도 영원한 책망거리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넷째로, 성경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우리가 보게 하기 위함이다(마 27:9,10).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여기 인용된 말씀은 스가랴의 예언(슥 11:12)에서 발견된다. 그것이 어떻게 여기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일컬어지는지는 난해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리의 신빙성이 그것에 달려 있지는 않으니, 그 교리는 비록 그것을 기록한 자들에게서 사소한 정황에 관한 한 어떤 인간적인 면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 완전히 신적임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고대의 시리아어 역본은 다만 그것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라 고만 읽으며 아무 이름도 거명하지 않는데, 이로부터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 라는 이름이 어떤 필사자에 의해 덧붙여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떤 이들은, 선지서 전체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있고 예레미야의 예언이 맨 앞에 놓여 있었으므로, 필사자가 붓 가는 대로(currente calamo) 그 책에서 어떤 구절을 인용할 때 그것을 그의 이름 아래 인용하는 것이 부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흔히 예레미야의 영이 스가랴 안에 있었다 고 말하곤 하였으니, 그리하여 그 둘은 한 선지자와 같았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예레미야에 의해 말해졌으나 스가랴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혹은 예레미야가 스가랴의 9, 10, 11장을 기록하였다고 시사한다. 자, 선지서의 이 구절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발견되던 하나님께 대한 극심한 멸시와, 그분께로부터 받은 풍성한 은택에 대해 그들이 그분께 돌려 드린 보잘것없는 보답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는 비유적으로 표현되었던 것이 여기서는 실제로 행해진 것이다. 그 돈의 액수는 동일하니, 곧 은 삼십 이다. 이것을 그들이 그의 값으로 달아 주었으니, 이 값으로 그들이 그분을 매겼다. 어처구니없는 값이로다! 그리고 이것이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져졌으니, 이는 여기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주목하라. 우리가 성경의 어법과 표현에까지 더 익숙하다면 섭리의 사건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그것들 또한 때때로 섭리의 경륜 위에 너무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어서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비유적으로 말한 것을(시 42:7) 요나는 문자 그대로 적용하였으니,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내 위에 넘쳤나이다(욘 2:3) 하였다.

값 매긴 자의 값을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토기장이의 밭 을 위해 준 일은 다음을 말해 준다. 1. 그리스도께 마땅히 두어야 할 높은 가치. 그 값은 그분을 위해 준 것이 아니었다. 아니다, 그것이 그분을 위해 주어졌을 때, 그것은 곧 그분의 가치에 무한히 못 미치는 것이라 하여 멸시 가운데 도로 돌려졌다. 그분은 오빌의 금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으며, 이 말할 수 없는 선물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2. 그분께 매겨진 낮은 가치. 이스라엘 자손들 은 그분을 이상하리만큼 과소평가하였으니, 그분의 값이 겨우 토기장이의 밭, 곧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한 뙈기 땅, 쳐다볼 가치도 없는 땅을 사는 데에나 이를 정도였다. 그분이 사고팔리신 것이 그토록 헐값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 치욕을 더하였다. 스가랴서에는 그것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고 되어 있다. 그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장사꾼이지, 값진 물건을 다루는 상인이 아니다. 그리고 주목하라. 이스라엘 자손들 이 이같이 그분을 과소평가하였으니, 곧 그분의 백성이요, 그분께 어떤 가치를 매겨야 할지 마땅히 더 잘 알았어야 할 자들이요, 그분이 처음 보내심을 받은 대상이요, 그분의 영광이었으며, 그분이 그토록 높이 평가하시고 그토록 비싼 값으로 사신 그 백성이었다. 그분은 그들을 위해 왕들의 몸값과 가장 부유한 나라들을, 곧 (그들이 그분 보시기에 그토록 보배로웠기에, 사 43:3,4)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내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위해 한 종의 몸값을 주었고(출 21:32을 보라), 그분을 겨우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매겼다. 이같이 우리를 위해 하늘나라를 사신 그 피가 발에 짓밟혔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주께서 정하신 대로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예표한 그 예언적 환상이 그러하였고, 또 그리스도의 고난의 다른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그 사건 자체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심을 따라 된 것이다.

마태복음 27장 11-25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Christ at the Bar of Pi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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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의 법정에 선 그리스도

¹¹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시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¹²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니
¹³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¹⁴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랍게 여기더라
¹⁵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¹⁶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¹⁷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¹⁸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¹⁹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²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²¹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²²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²³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²⁴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²⁵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여기서 우리는, 복되신 예수께서 이른 아침에 그곳으로 끌려가셨을 때 빌라도의 법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을 보게 된다. 비록 그날이 재판일이 아니었음에도, 빌라도는 즉시 그분의 사건을 직접 다루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보게 된다.

I.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받으신 재판.

  1. 그분의 기소 절차.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시매, 마치 죄수가 재판관 앞에 선 것과 같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었을 것이요, 그분의 면전에서 얼굴을 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분이 기소되심은 우리가 무죄 방면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그분의 용기와 담대함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그들의 모든 분노에도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서 계셨다. 그분은 이 재판에서 이렇게 서 계셨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게 하시려 함이었다. 그분은 나봇이 기소될 때 백성 가운데 높은 곳에 앉혀졌던 것처럼, 구경거리로 서 계셨다.

  2. 그분에 대한 공소장.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유대인들은 이제 로마 권력의 통치 아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권력의 매우 시기 어린 감시 아래 있었다. 그들은 그 권력에 대해 극도로 반감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지금은 이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 그 권력에 대한 관심을 가장하며, 예수를 가이사의 원수로 고발하였다(눅 23:2). 그러나 그들이 이에 대해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증거란, 예수께서 친히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막 인정하셨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되는 자는 반드시 유대인의 왕이 되어야 하고, 자기들을 로마의 권력에서 구해 주며, 세상적 통치권을 자기들에게 회복시켜 주고, 자기들로 하여금 모든 이웃을 짓밟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자기들 스스로 지어낸 이 망상(키마이라, chimera)에 따라, 그들은 우리 주 예수를 로마의 멍에에 맞서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 되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이런 의미의 그리스도를 뜻하신 것이 아니었다. 주목하라,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의 본질을 오해하여 그것을 반대한다. 그들은 그것을 거짓된 색채로 꾸며 놓고는 그것과 맞서 싸운다. 그들이 총독에게 만일 예수가 자기를 그리스도로 자처하면 곧 자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자처하는 것이라고 확언하니, 총독은 그가 그 나라를 미혹하고 그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고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다. 네가 왕이냐? 그가 사실상(de facto, 실제로) 왕이 아닌 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너는 통치권에 대해 어떤 권리를 주장하거나, 유대인을 다스릴 권리가 있는 척하느냐?"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가 마치 왕들과 지방들에 해를 끼치는 것인 양 세속 권력의 의심을 부당하게 받는 것은, 흔히 있어 온 가혹한 운명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 종교는 양쪽 모두에게 크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3. 그분의 답변.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곧 "그것은 네 말 그대로이나, 네가 뜻하는 그대로는 아니다. 나는 왕이로되, 네가 의심하는 그런 왕은 아니다." 이리하여 그분은 빌라도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셨으니, 비록 그것이 우스꽝스럽게 보였을지라도 스스로 왕이심을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고, 또한 이때에 그것이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하셨다.

  4. 증거(마 27:12). 그분은 대제사장들에게 고발을 당하셨다. 빌라도는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였다. 무슨 말이 떠들어졌든 아무것도 입증되지 못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은 내용에서 부족한 것을 소란과 폭력으로 메우며, 전에 진술했던 것과 똑같은 고발을 반복하여 그분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반복으로 총독에게서 믿음을 강제로 끌어내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단지 **중상하는 것(calumniari)**뿐만 아니라 **강력하게 중상하는 것(fortiter calumniari)**까지 배워 둔 것이다. 가장 선한 사람들이 흔히 가장 악한 죄목으로 고발을 당해 왔다.

  5. 고발자들의 비난에 대한 죄수의 침묵. 그가 아무 대답도 아니하셨다. (1.) 대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기된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자기 논박의 근거를 지니고 있었다. (2.) 그분은 이제 자기와 자기 아버지 사이에 놓인 큰 관심사에 몰두해 계셨으니, 곧 자기 아버지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일이었다. 그분은 이 일에 너무도 골몰하셨기에 그들이 자기를 거슬러 하는 말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셨다. (3.) 그분의 때가 이르렀으므로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분은 자기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아셨으므로, 묵묵히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자기를 부탁하셨다. 우리는 이렇게 침묵으로 우리의 생명을 내던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의 주인이셨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생명의 주인이 아니며, 또 그분이 아셨던 것처럼 우리의 때가 언제 이르렀는지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욕을 욕으로 갚지 말 것을 배워야 한다(벧전 2:23).

이제 [1.] 빌라도는 그분께 무슨 대답이라도 하도록 압박하였다(마 27:13).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이것들이 무엇이었는지는 눅 23:3,5과 요 19:7에서 짐작할 수 있다. 빌라도는 그분께 아무런 악의도 품지 않았기에, 그분이 스스로 결백을 입증하기를 바라며 그렇게 하도록 권하였고, 또 그분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듣지 못하느냐? 그렇다, 그분은 들으셨다. 그리고 지금도 그분은 자기의 진리와 도(道)를 거슬러 부당하게 증언되는 모든 것을 들으신다. 그러나 그분이 침묵을 지키시는 것은 지금이 그분의 오래 참으시는 날이기 때문이요, 머지않아 그렇게 하실 것처럼은 대답하지 아니하시는 것이다(시 50:3). [2.] 빌라도는 그분의 침묵에 놀랐다. 그 침묵은 법정에 대한 멸시라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멸시로 해석되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것에 화를 냈다고는 말하지 않고, 매우 이례적인 일로 여겨 크게 놀랍게 여겼다고 한다. 그는 그분이 무죄하다고 믿었고, 또 아마도 이 사람처럼 말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자기 변호를 위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보게 된다.

II. 백성이 총독에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압박하면서 보인 난동과 폭력. 대제사장들은 백성에 대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을 랍비여, 랍비여 하고 부르며, 백성을 우상으로 삼고, 백성이 하는 모든 말을 신탁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예수를 분노하게 만들었으니, 군중의 힘을 빌려 그렇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었던 목적을 달성하였다. 여기에 그들의 난동에 대한 두 가지 사례가 있다.

  1. 그들이 예수보다 바라바를 더 선호하여, 예수보다 그를 놓아 주기를 택한 것.

(1.) 로마 총독들이 유대인을 존중하는 의미로 유월절 명절을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일로써 빛내 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마 27:15). 그들은 이것이 명절을 영예롭게 하고, 자기들의 구원을 기념하는 일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 자신이 고안한 것이었지 신적인 제정은 아니었다. 다만 어떤 이들은 이 관례가 오래된 것이며, 유대인이 제국의 한 지방이 되기 이전에 유대인 군주들에 의해 유지되어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것은 나쁜 관례요, 정의를 가로막는 것이며, 악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복음의 유월절은 죄수들의 석방으로써 기념되거니와, 이는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신 분에 의해서이다.

(2.) 우리 주 예수와 경쟁하도록 내세워진 죄수는 바라바였다. 그는 여기서 유명한 죄수라 불린다(마 27:16). 이는 그가 출생과 양육에 있어 어느 정도 이름과 신분이 있는 자였거나, 혹은 그의 범죄에 무언가 두드러진 점이 있어 자기를 부각시킨 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백성의 호의를 더 잘 끌어내어 더 변호받기 쉬울 만큼 유명했던 것인지, 아니면 백성의 분노를 더 많이 받을 만큼 유명했던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떤 이들은 후자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빌라도가 그를 거론한 것은 백성이 그보다는 차라리 다른 누구의 석방이라도 원하리라고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본다. **반역과 살인과 중죄(felony)**는 정의의 칼로 흔히 처벌되는 가장 극악한 세 가지 죄인데, 바라바는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해 유죄였다(눅 23:19, 요 18:40). 그 죄가 이토록 복합적이었으니, 참으로 유명한 죄수였다.

(3.) 그 제안은 총독 빌라도에 의해 제시되었다(마 27:17). 너희는 내가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아마도 재판관에게는 두 사람을 지명할 권한이 있었고, 백성은 그중 한 사람을 선택하게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빌라도는 그들에게 예수를 놓아 주자고 제안하였다. 그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였고 그 고발이 악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신하였으나, 자기 권한으로 마땅히 했어야 할 대로 그분을 무죄 방면할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백성의 선택으로 그분이 석방되도록 하려 하였으니,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양심도, 또 백성도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분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한 이상, 그는 그분을 백성의 판단에 맡기거나 그분을 생명의 위험에 처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일을 어물쩍 넘기고 양심과 세상에 동시에 잘 보이려는 이런 사소한 술책과 잔꾀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더 애쓰는 자들이 흔히 하는 짓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는 백성에게, 자기가 석방을 제안한 이 예수가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에 의해 메시아로 여겨졌으며 또 그러하다는 충분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이다. "너희 민족이 그토록 기대를 고백해 온 그분을 거절하지 말라."

빌라도가 이렇게 예수를 풀어 주려 애쓴 이유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알았기 때문이다(마 27:18). 곧 그들이 분개한 것은 그분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선함 때문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백성의 행위로 그분을 구해 낼 수 있으리라, 또 백성이 그분의 석방을 지지하리라 바랐다. 다윗이 사울에게 시기를 받았을 때 그는 백성의 사랑을 받는 자였다. 그리고 불과 며칠 전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울려 퍼진 호산나 소리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분도 그런 분이시라고, 빌라도가 이 문제를 안심하고 민중에게 맡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그처럼 악명 높은 악당이 백성의 호의를 두고 그분과 겨루는 경쟁자로 내세워졌을 때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4.) 빌라도가 이렇게 이 일에 애쓰고 있을 때, 그는 자기 아내가 보낸 전갈로 인해 예수를 정죄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마 27:19). 그 전갈은 경고의 형식이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그리고 그 이유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아마도 이 전갈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듣는 가운데 빌라도에게 공개적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는 그에게만이 아니라 고발자들에게도 경고가 되도록 의도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1.] 빌라도의 아내에게 이 꿈을 보내신 일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그 여인이 이전에 그리스도에 관해 무엇인가를 들었으리라고는, 적어도 그분에 관한 꿈을 꿀 만큼 들었으리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다. 어쩌면 그 여인은 경건하고 존귀한 여인들 중 하나였고 종교에 대한 어떤 감각을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의 경우처럼 그런 감각이 없는 자들에게도 꿈으로 자기를 계시하셨다. 그 여인은 이 꿈에서 애를 많이 태웠다. 무죄한 사람을 잔혹하게 다루는 것을 꿈에서 보았는지, 아니면 그의 죽음에 가담하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을 보았는지, 혹은 그 둘 다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무서운 꿈이었고 그 여인의 생각이 그 여인을 번뇌하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다니엘 2:1, 4:5에서처럼 말이다. 주목하라, 영들의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의 영혼에 이르는 많은 길을 가지고 계시며, 꿈으로나 밤의 환상으로 그들에게 교훈을 인 치실 수 있다(욥 33:15,16). 그러나 기록된 말씀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깊은 잠이 사람에게 임할 때 꿈으로 말씀하시기보다는, 깨어 누운 자리에서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2.] 그러한 일에 즈음하여 자기 남편에게 이 경고를 보낸 빌라도 아내의 다정함과 염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첫째, 이는 우리 주 예수께 대한 영예로운 증언이었으니, 그분이 가장 악한 죄인으로 박해받으시는 바로 그때에 그분이 옳은 사람이심을 증언한 것이다. 그분의 친구들이 그분을 변호하기 위해 나서기를 두려워할 때, 하나님은 심지어 이방인과 원수까지도 그분에게 유리하게 말하도록 하셨다. 베드로가 그분을 부인할 때 유다는 그분을 시인하였고, 대제사장들이 그분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선고할 때 빌라도는 그분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였다고 선언하였으며, 그분을 사랑하던 여인들이 멀리 서 있을 때 그분을 거의 알지 못하던 빌라도의 아내가 그분에 대한 염려를 나타내었다. 주목하라, 하나님은 자기 대의(大義)의 진리와 공정성에 대하여, 그것이 원수들에게 가장 악의적으로 짓밟히고 친구들에게 가장 부끄럽게 버림받는 듯이 보일 때에도, 자기 자신을 증언할 자들이 없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신다. 둘째, 그것은 빌라도에게 정당한 경고였다. 그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주목하라, 하나님은 죄인들이 죄악된 추구를 행할 때 그것을 제지하시는 많은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섭리로부터, 신실한 친구들로부터, 또 우리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그러한 제지를 받는 것은 큰 자비이며, 그것에 귀 기울이는 것은 우리의 큰 의무이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는 말씀은, 우리가 시험에 들어갈 때 우리가 주의만 기울인다면 들을 수 있는 말씀이다. 빌라도의 부인은 그에 대한 사랑에서 이 경고를 그에게 보냈다. 그 여인은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일에 참견한다고 남편에게서 책망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 여인은 그 경고를 주려 한 것이다. 주목하라, 우리의 친구와 친척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참된 사랑의 한 표징이다. 그리고 어떤 이가 우리에게 더 가까울수록, 또 우리가 그에 대해 더 큰 애정을 가질수록, 우리는 그에게 죄가 임하거나 머물지 않도록 더욱 마음을 써야 한다(레 19:17). 가장 좋은 우정은 영혼에 대한 우정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어떻게 흘려버렸는지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으나, 아마도 농담으로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옳은 사람에 대해 일을 진행한 것을 보면, 그가 그것을 무시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신실한 권고들은 죄에 대한 경고로 주어질 때에는 가볍게 여겨지지만, 죄를 가중시키는 정황으로 돌이켜 회고될 때에는 그처럼 쉽게 가볍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5.)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 모든 동안에 바라바에게 유리하도록 백성을 움직이느라 분주하였다(마 27:20).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도, 또 백성 가운데 보낸 자기들의 앞잡이들을 통해서도,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다. 그들은 이 예수가 사탄과 결탁한 미혹하는 자요, 자기들의 교회와 성전의 원수라고 암시하였다. 만일 그를 그대로 두면 로마인들이 와서 자기들의 땅과 민족을 빼앗을 것이며, 바라바는 비록 악한 사람이지만 예수만큼의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그만큼의 해를 끼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군중을 조종하였으니, 군중은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께 호의적이었을 것이요, 만일 그들이 그렇게까지 제사장들의 손짓에 좌우되지 않았더라면 예수보다 바라바를 더 선호하는 것 같은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1.] 우리는 이 사악한 제사장들을 분노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율법에 의하면, 피와 피 사이의 분쟁의 일들에 있어 백성은 제사장들의 인도를 받아 그들이 알려 주는 대로 행하게 되어 있었다(신 17:8,9).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손에 맡겨진 이 큰 권한을 비참하게도 남용하였고, 백성의 지도자들이 백성을 미혹하게 하였다. [2.] 우리는 미혹된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그토록 큰 악으로 그렇게 격렬하게 몰리는 것을, 또 그들이 이렇게 제사장들에게 휘둘리며 그들의 눈먼 인도자들과 함께 구덩이에 빠지는 것을 보고서 말이다.

(6.) 이렇게 제사장들에게 좌우되어, 마침내 그들은 자기들의 선택을 하였다(마 27:21). 빌라도가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그는 예수를 석방시키려는 자기 목적을 이루었다고 바랐다. 그러나 크게 놀랍게도, 그들은 바라바라고 하였다. 마치 바라바의 죄가 더 가벼우니 따라서 그가 죽어야 할 이유가 덜하다는 듯이, 혹은 마치 그의 공로가 더 크니 따라서 그가 사는 것이 더 마땅하다는 듯이 말이다. 바라바를 외치는 소리가 너무도 보편적이어서, 하나같이 한목소리였으므로 두 후보를 두고 표결을 요구할 빌미조차 없었다.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너 땅이여, 심히 떨지어다! 일찍이 이성이나 종교를 자처하던 사람들이 그토록 엄청난 광기와 그토록 끔찍한 악을 범한 적이 있었던가!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그토록 절실하게 그들을 책망한 내용이었다(행 3:14). 너희가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였으니. 그러나 하나님보다 세상을 자기의 통치자와 분깃으로 택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자신의 미혹을 택한다.

  1.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간절히 압박한 것(마 27:22,23). 빌라도는 그들이 바라바를 택한 것에 어리둥절하여, 그것이 예수에 대한 적의에서라기보다는 바라바에 대한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기꺼이 바랐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묻기를, "그러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너희 명절을 더욱 영예롭게 하기 위해 그도 석방할까, 아니면 너희가 나에게 맡기겠느냐?" 그러나 아니었다.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그들이 그분이 그러한 죽음을 당하시기를 원한 것은, 그것이 가장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죽음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분을 따르던 자들로 하여금 그분과 그분과의 관계를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게 만들려고 바랐던 것이다. 그들이 재판관에게 어떤 선고를 내려야 할지 지시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악의와 분노가 그들로 하여금 모든 질서와 예의의 규칙을 잊게 하였고, 정의의 법정을 소란하고 무질서하며 선동적인 집회로 바꾸어 버렸다. 이제 진리가 거리에 엎드러졌고 공의가 들어오지 못하였다. 공평을 바랐더니, 보라 학대요, 가장 악한 종류의 학대였으며, 공의를 바랐더니, 보라 부르짖음이라, 일찍이 있었던 것 중 가장 악한 부르짖음, 곧 영광의 주를 향한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 하는 소리였다. 비록 이렇게 외친 자들이 며칠 전 호산나라고 외쳤던 바로 그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짧은 시간에 민중의 마음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는지 보라. 그분이 개선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는 찬양의 환호가 너무도 보편적이어서 그분에게는 원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빌라도의 재판석으로 끌려가실 때에는 적의의 부르짖음이 너무도 보편적이어서 그분에게는 친구가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하늘로 가는 길도 그 가운데로 지나가는 이 변덕스러운 세상에는 이러한 격변이 있으니, 영광과 욕됨으로,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번갈아 바뀌어 가는 것이다(고후 6:8). 이는 우리가 영광으로 인해 우쭐대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 마치 우리가 갈채와 환대를 받을 때 우리가 별들 가운데 우리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였고 또 그 보금자리에서 죽으리라고 여기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요, 또한 욕됨으로 인해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 마치 우리가 가장 낮은 지옥으로 짓밟혔을 때 거기서는 건짐이 없다고 여기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Bides tu istos qui te laudant; omnes aut sunt hostes, aut (quod in æquo est) esse possunt—너를 칭송하는 저들을 보라. 그들은 모두 네 원수이거나,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수 있는 자들이다. 세네카, 행복한 삶에 관하여(de Vita Beata).

이제 이 요구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의 것을 더 듣게 된다.

(1.) 빌라도가 어떻게 그것에 이의를 제기했는가.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이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누구를 비난하기 전에도 마땅히 물어야 할 적절한 질문이거니와, 하물며 재판관이 사형 선고를 내리기 전에는 더욱 그러하다. 주목하라, 비록 그분이 행악자로서 고난을 받으셨음에도, 그분의 재판관이나 고발자들이 그분이 어떤 악을 행하였음을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은 주 예수의 영예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다. 그분이 하나님께 무슨 악을 행하셨던가? 아니다, 그분은 항상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셨다. 그분이 세속 정부에 무슨 악을 행하셨던가? 아니다, 그분은 자기가 친히 행하신 것처럼, 또 다른 이들에게도 가르치시기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하셨다. 그분이 공공의 평화에 무슨 악을 행하셨던가? 아니다, 그분은 다투지도 아니하시고 들레지도 아니하셨으며, 그분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지 아니하였다. 그분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무슨 악을 행하셨던가? 그분이 누구의 소를 빼앗았으며, 누구를 속였던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 그분의 흠 없는 무죄에 대한 이 거듭된 단언은, 그분이 다른 이들의 죄를 만족시키기 위해 죽으셨음을 분명히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렇게 상하신 것이 우리의 허물 때문이 아니었고, 그분이 넘겨지신 것이 우리의 죄악 때문이 아니었으며, 그것이 그 죄들을 속하시려는 그분 자신의 자발적 떠맡으심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면, 일찍이 어떤 잘못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한 적이 없는 한 인격체가 받으신 이 비상한 고난이,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시며 적어도 이 일이 세상에서 일어나도록 허용하신 그 섭리의 공의와 공정과 조화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고집했는가.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그들은 그분이 행한 어떤 악도 보여 주려 하지 않으면서, 옳든 그르든 그분은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제(前提)에 대한 입증의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서, 그들은 결론을 고수하기로 결심하였으니, 증거에서 부족한 것을 외침으로 메우려 한 것이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비유에 나오는 그 재판관이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정의로운 판결을 내린 것처럼(눅 18:4,5),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불의한 선고를 내리게 되었으니, 그 사건은 순전히 소란으로 결판이 났다.

III. 여기에 그리스도의 피의 죄책이 백성과 제사장들에게로 넘어가는 일이 있다.

  1. 빌라도는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옮기려 한다(마 27:24).

(1.) 그는 더 다투어 봐야 소용없음을 안다. 그가 한 말은, [1.]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었다. 그는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가 무죄하다고 믿는 사람, 또 그들이 유죄임을 입증하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자기로서 얼마나 불의하고 부당한 일인지를 그들에게 납득시킬 수 없었다. 정욕과 분노의 흐름이 때로 얼마나 거센지 보라. 권위로도 이성으로도 그것을 제지하지 못한다. 아니, [2.] 오히려 해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는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았다. 이 거칠고 짐승 같은 백성은 격한 말을 쏟아내며, 만일 빌라도가 자기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고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저 큰 선동자들인 제사장들이 그 불씨에 부채질을 해댈 때, 이 불이 얼마나 큰 것을 태울 수 있었겠는가! 빌라도로 하여금 자기 양심을 거슬러 그리스도를 정죄하도록 위협했던 유대인들의 이 소란스럽고 난폭한 기질은,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그 민족의 멸망에 그 무엇보다도 더 크게 기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잦은 폭동이 로마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멸하게끔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이 그들을 굴복시켰음에도 그러하였고, 또 그들 사이의 뿌리 깊은 다툼이 그들을 공동의 원수에게 쉬운 먹잇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의 죄가 그들의 멸망이 되었다.

우리가 일반 민중의 성향에 대해 얼마나 쉽게 오판할 수 있는지 주목하라. 제사장들은 그리스도를 붙잡으려는 자기들의 시도가, 특히 명절날에 소동을 일으킬까 봐 염려하였다. 그런데 도리어 그분을 구하려는 빌라도의 시도가, 그것도 명절날에 소동을 일으킨 것으로 드러났다. 군중의 정서란 이토록 종잡을 수 없다.

(2.) 이로 인해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의 평안과 도시의 평안 사이에서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는 무죄한 사람을 정죄하기도 꺼려지고, 그러면서도 백성의 비위를 거스르고 한번 일어나면 쉽게 가라앉지 않을 화근을 불러일으키기도 꺼려진다. 만일 그가 재판관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했을 대로, 거룩한 정의의 법을 확고하고 단호하게 고수하였더라면 그는 어떤 곤혹에도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핑계로도 아무 잘못도 발견되지 않은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는 안 된다는 것, 또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무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도 불의한 일이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명백하여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 사안은 곧 결판이 난다. 하늘과 땅이 한데 부딪쳐 무너질지라도 정의는 행해지게 하라—Fiat justitia, ruat cœlum. 만일 악이 악인에게서 나온다 할지라도, 비록 그들이 제사장일지라도 내 손은 그를 해하지 아니하리라.

(3.) 빌라도는 일을 어물쩍 넘기려 하여, 일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부인함으로써, 곧 그 일을 저지르면서도 동시에 그것에서 자기를 방면함으로써, 백성과 자기 양심을 둘 다 달래려 한다. 확신은 강하나 그 부패가 더 강한 자들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과 자기모순에 빠진다. 사도가 이르되(롬 14:22)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자기가 정죄하는 바를 스스로 행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제 빌라도는 그 죄책에서 자기를 깨끗이 하려 한다.

[1.] 표징으로써. 그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이전에 지은 어떤 죄책을 씻어 낸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 일에서 어떤 죄책이라도 짊어지는 것에서마저 백성 앞에서 자기를 방면하려는 것이었다. 마치 그가 "만일 이 일이 행해진다면, 그것이 내 소행이 아님을 증언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발견되지 않은 살인의 죄책에서 그 지방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도록 정한 율법에서 그 의식을 빌려 왔다(신 21:6,7). 그리고 그는 그 죄수의 무죄에 대해 자기가 받은 확신을 백성에게 더욱 각인시키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아마도 무리의 소란이 너무도 컸기에, 만일 그가 그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런 놀랄 만한 표징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2.] 말로써. 그 말 가운데서, 첫째, 그는 자기를 깨끗하다 한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그를 정죄하면서도 그의 피에 대해 무죄하다고 항변하다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사람이 어떤 일에 항변하면서도 그것을 행한다면, 그것은 단지 자기가 자기 양심을 거슬러 죄를 짓는다고 선언하는 것일 뿐이다. 비록 빌라도가 자기의 무죄를 공언하였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죄책을 물으신다(행 4:27). 어떤 이들은 자기 손이 그 죄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여 자기를 의롭다 하려 한다. 그러나 다윗은 암몬 자손의 칼로 사람을 죽였고, 아합은 이스르엘의 장로들로 사람을 죽였다. 빌라도는 여기서 자기 마음이 그 행위에 있지 않았다고 변명하여 자기를 의롭다 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항변이다. Protestatio non valet contra factum—사람이 동시에 어떤 행위를 저지르면서 그것에 항변하는 것은 헛되다. 둘째, 그는 그것을 제사장들과 백성에게 떠넘긴다. "너희가 당하라. 만일 이 일이 행해져야 한다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으니,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너희가 그것을 책임지라." 주목하라, 죄란 아무도 기꺼이 떠맡으려 하지 않는 자식과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 책임을 떠넘길 누군가를 찾기만 하면 자기는 아무 비난도 받지 않으리라고 자기를 속인다. 그러나 죄의 죄책을 떠넘기는 것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전염병에 걸린 자의 처지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서 그 전염을 옮았다고 해서, 혹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그 전염을 옮긴다고 해서 그 위험이 덜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를 짓도록 유혹받을 수는 있으나, 강요받을 수는 없다. 제사장들은 그것을 유다에게 떠넘겼다. 네가 당하라. 그리고 이제 빌라도는 그것을 그들에게 떠넘긴다. 너희가 당하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제사장들과 백성은 그 죄책을 자기들 위에 떠맡기를 동의하였다. 그들이 다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우리는 그를 죽이는 데 죄도 위험도 없다고 너무도 확신하므로, 기꺼이 그 위험을 무릅쓰겠노라." 마치 그 죄책이 자기들이나 자기 자손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으리라는 듯이 말이다. 그들은 죄책에 대한 두려움이 빌라도로 하여금 주저하게 만드는 것을 보았고, 또 그가 그것을 떠넘긴다는 발상으로 그 난관을 넘어서려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가 다시 주저하지 못하게 하고, 또 그 발상을 굳히게 하려고, 그들은 자기들 손에 넣은 먹잇감을 잃느니 차라리 분노의 격정 가운데 그것에 동의하며 그 피를 우리에게 돌릴지어다 하고 외쳤다. 이제,

(1.) 이로써 그들은 빌라도를 면책시키려고, 곧 자기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매여 그를 무해하게 지켜 줌으로써 그가 자기 자신을 면책된 것으로 여기게 만들려고 의도하였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파산하고 빈털터리인 자들은 결코 다른 이들을 위한 보증인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며, 그들을 위한 보석(保釋)으로도 인정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이 책임져야 할 죄가 없는 분 외에는 아무도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질 수 없다. 한 죄인을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보증인이 되는 것은 담대한 떠맡음이요, 어떤 피조물에게도 너무나 벅찬 일이다.

(2.) 그러나 그들은 실로 자기 자신과 자기 후손에게 진노와 보응을 자초하였다. 이 얼마나 무모한 말이며, 그들은 그 말의 무서운 함의가 무엇인지, 혹은 그것이 자기들과 자기 자손을 얼마나 깊은 비참의 심연으로 끌고 갈지를 얼마나 생각지 못하였던가! 그리스도께서는 얼마 전에 그들에게,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시작하여 땅 위에 흘린 모든 의로운 피가 그들 위에 돌아오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마치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그들은 여기서 그 모든 피보다 더 귀하며 그 죄책이 더 무겁게 짓누를 그 피의 죄책을 자기 자신에게 자초한다. 오, 하나님께로 달려들어 그의 목을 들이받고 그의 공의에 맞서는 고의적 죄인들의 무모한 주제넘음이여(욥 15:25,26)! 주목하라.

[1.] 그들의 자초가 얼마나 잔혹했는가. 그들은 이 죄의 형벌을 자기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들까지 포함하여 자기 자손에게도 자초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그 저주의 상속을 삼사 대까지로 제한하기를 기뻐하셨던 것처럼 그것을 제한하지도 않았다.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끌어들인 것은 미친 짓이었으나, 그것을 자기 후손에게 상속시킨 것은 야만의 극치였다. 참으로 그들은 타조와 같았으니, 그들은 자기 새끼들이 마치 자기 것이 아닌 양 그들을 향하여 무정하였다. 이 얼마나 무서운 죄책과 진노의 양도가 그들과 그들의 상속자들에게 영원히 이루어진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그들 자신의 행위와 증서로서 만장일치로, nemine contradicente—이론(異論)을 다는 자가 하나도 없이 전달되었으니, 이는 확실히 저 옛 언약, 곧 내가 네게와 네 후손에게 하나님이 되리라 하신 그 언약을 박탈하고 무효화하는 것에 해당하였다. 메시아의 피의 저주를 자기 민족에게 상속시킴으로써, 그들은 그 피의 복이 자기들 가문에 상속되는 것을 끊어 버렸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또 다른 약속, 곧 그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따른 복을 끊어 버린 것이다. 악한 자들이 자기 자신의 자녀와 가문에게 얼마나 큰 원수인지 보라. 자기 자신의 영혼을 정죄하는 자들은 자기와 함께 얼마나 많은 자를 지옥으로 데려가는지 개의치 않는다.

[2.] 이 자초에 따른 보응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셨는가. 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고 말하였고,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아멘이라고 하셨다. 곧 네 선고가 그러하리라 하셨다. 그들이 저주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그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였다. 저 버림받은 백성의 비참한 남은 자들이 오늘날까지도 그것을 겪고 있다. 그들이 이 피를 자기 위에 자초한 그때로부터, 그들은 하나의 심판에 또 하나의 심판이 잇따라 따라붙어, 마침내 완전히 황폐하게 되고 놀람과 조롱과 속담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에게는, 또 그들의 자손 가운데 어떤 이들에게는 이 피가 임하였으되, 그들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회개하고 믿을 때 하나님의 자비가 이 상속을 끊으셨고, 그때 그 약속이 다시 그들과 그들의 자녀에게 이르렀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손에게 대하는 것보다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더 선하시다.

마태복음 27장 26-32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Christ Scourged and Derided; Christ Mocked by the Soldi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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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질당하고 조롱당하신 그리스도; 군병들에게 희롱당하신 그리스도

²⁶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²⁷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²⁸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²⁹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³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³¹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³²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위한 준비와 그에 앞서는 서막을 보게 된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I. 그의 처형을 위한 판결이 선고되고 영장이 서명되었다. 그리고 이 일이 즉시, 곧 그 시각에 이루어졌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점들이 있다.

1. 저 악명 높은 죄수 바라바가 풀려났다. 만일 그가 백성의 호의를 얻는 일에서 그리스도와 경쟁하도록 세워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자기 죄로 인하여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그의 탈출 수단이 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곧 죄인들, 심지어 죄인의 괴수까지도 풀려나게 하시려고 정죄받으셨음을 암시한다. 그는 넘겨지셨으니, 이는 우리가 풀려나게 하려 하심이었다. 신적 섭리의 일반적인 경우는 악인은 의인의 대속물이 되고 사악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는(잠 21:18, 잠 11:18) 것이다. 그러나 이 비할 데 없는 신적 은혜의 경우에는, 정직한 자가 범죄한 자들의 대속물이 되고,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들을 위한 대속물이 된다.

2. 예수님은 채찍질당하셨다. 이는 수치스럽고 잔인한 형벌이었으며, 특히 로마인들에 의해 가해질 때 그러하였다. 로마인들은 사십 대 이상의 채찍질을 금하는 유대 율법의 절제 아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형벌은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자에게 가해졌으니 지극히 부당한 것이었다. *매(rods)*는 도끼를 도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끼를 대신하기 위한 것이어야 했다(즉, 채찍질은 보통 처형 대신 가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렇게 하여 성경이 이루어졌으니,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시 129:3),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겼다(사 50:6), 그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고 하셨다. 그는 채찍으로 징계받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전갈로 영원히 징계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었다.

3. 그런 다음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지셨다. 그의 징계가 우리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으나, 그의 십자가의 피(골 1:20)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채찍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다. 이는 오직 로마인들 사이에서만 사용된 사형 방식이었다. 그 방식은 잔인함과 교묘함이 결합되어, 각각이 그 극한까지 발휘되어 죽음을 가장 끔찍하고 비참하게 만들도록 고안된 결과인 듯하다. 십자가를 땅에 세우고 거기에 손과 발을 못 박았으며, 그 못에 몸의 무게가 매달려 고통으로 죽을 때까지 견디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정죄받으신 죽음이었으니, 이는 그가 장대 위에 들린 놋뱀의 예표에 부응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것은 피 흘리는 죽음이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우며 저주받은 죽음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비참한 죽음이어서, 자비로운 군주들은 율법에 의해 이 형벌에 처해진 자들을 먼저 목 졸라 죽인 후에 십자가에 못 박도록 명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æsar)도 일부 해적들에게 그렇게 하였다(수에토니우스[Sueton.] 제1권). 첫 그리스도인 황제인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는 칙령으로 로마인들 사이에서 그 형벌의 사용을 폐지하였다(소조멘[Sozomen], 역사[Hist.] 제1권 제8장). 구원의 표적이 희생자의 멸망에 이바지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Ne salutare signum subserviret ad perniciem).

II. 그의 처형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군병들이 그에게 가한 야만적인 처사. 그가 정죄받았을 때, 그에게는 죽음을 준비할 얼마간의 시간이 허락되었어야 마땅했다. 티베리우스(Tiberius) 시대에 로마 원로원이 제정한 법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와 같은 성급한 처형에 대한 불평으로 인하여, 범죄자의 처형은 선고 후 적어도 열흘은 연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수에토니우스[Sueton], 티베리우스전[in Tiber.] 제25장).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께는 그만큼의 분(分)조차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그에게는 한순간의 숨 돌릴 틈도 없었다. 그것은 위기였고, 그에게는 한순간의 *맑은 정신의 틈(lucid intervals)*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깊음이 깊음을 부르듯, 폭풍은 한 차례의 멈춤도 없이 계속되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졌을 때,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몸을 죽이는 자들은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더 많은 일을 하려 하였고, 가능하다면 천 번의 죽음을 한 번에 몰아넣으려 하였다. 빌라도가 그를 무죄하다고 선언하였으나, 그의 군병들, 그의 호위병들은 그를 학대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그를 위한 그들 주인의 증언보다 그를 향한 백성의 분노에 더 휘둘렸기 때문이다. 유대의 폭도가 로마 군병들을 물들였거나, 혹은 어쩌면 그것은 그에 대한 악의에서라기보다 자기들의 *재미(sport)*를 위하여 그를 이처럼 학대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그가 왕위를 자처하였음을 알았으니, 그것을 가지고 그를 조롱하는 것이 그들에게 약간의 오락거리가 되었고, 자기들끼리 즐거워할 기회가 되었다. 주목하라,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 모욕을 가하고, 어떤 이의 재난을 가지고 재미와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비천하고 노예 같으며 추악한 영혼의 증거다.

다음을 살펴보라. 1. 이 일이 어디서 행해졌는가—관정(common hall) 안에서였다. 부당하게 학대당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었어야 할 총독의 집이 이 야만 행위의 무대가 되었다. 이 의로운 분의 피로부터 자신을 결백케 하기를 그토록 갈망하던 총독이, 어찌하여 이 일이 자기 집에서 행해지도록 용납하였는지 놀랍다. 어쩌면 그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묵인(connived)*하였을 것이다. 권위를 가진 자들은 자기들이 행하거나 명령하는 악행뿐만 아니라, 자기 손의 권한 안에 있을 때 억제하지 않은 악행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한 집안의 가장들은 자기 집이 누구에게든 학대의 장소가 되거나, 자기 종들이 다른 사람의 죄나 비참함이나 신앙을 가지고 놀잇거리로 삼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2. 누가 이 일에 관여하였는가. 그들은 *온 군대(whole band)*를 모았다. 처형에 동참할 군병들은 온 부대(적어도 오백 명, 어떤 이들은 천이백 또는 천삼백 명으로 본다)가 이 오락에 참여하기를 원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구경거리가 되셨다면, 그의 추종자들 중 누구도 그렇게 취급받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 것이다(고전 4:9, 히 10:33).

3. 그에게 어떤 특별한 모욕이 가해졌는가.

(1.) 그들은 그의 옷을 벗겼다(마 27:28). 벌거벗음의 수치는 죄와 함께 들어왔다(창 3: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죄를 속하고 그것을 제거하러 오셨을 때, 벌거벗겨지셨고 그 수치에 복종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가리울 흰 옷을 예비하려 하심이었다(계 3:18).

(2.) 그들은 그에게 홍포를 입혔다. 이는 로마 군병들이 입던 어떤 낡은 붉은 외투로, 왕들과 황제들이 입던 홍포를 흉내 내어 그가 왕이라 칭함받은 것을 가지고 비웃은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비천함과 비참함밖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들은 그의 옷차림에 이 거짓 왕위의 *허울(sham)*을 씌워 그를 구경꾼들에게 더욱 우스꽝스러운 자로 노출시킬 뿐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신비(mystery)*가 있었다. 이는 그의 의복이 붉은(사 63:1,2) 자요, 그의 옷을 포도주에 빠는(창 49:11)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홍포를 입으셨다. 우리의 죄는 주홍 같고 진홍 같았다(사 1:18 참조). 그리스도께서 홍포를 입으심은, 그가 나무 위에서 친히 그 몸으로 우리 죄를 짊어지심을 그의 수치로 나타낸 것이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어린양의 피에 우리 옷을 씻어 희게 하려 하심이었다(계 7:14 참조).

(3.) 그들은 가시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웠다(마 27:29). 이는 그를 *가짜 왕(mock-king)*으로 삼는 익살을 이어가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단지 모욕으로만 의도하였다면, 그들은 짚이나 골풀로 관을 엮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그에게 고통스럽게 하려고 의도하였으니, 비유적으로 관에 대해 가시로 둘렀다고 말하는 것을 문자 그대로 실현한 것이었다. 이 학대를 고안한 자는 아마도 그 기발함을 자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신비가 있었다. [1.] 가시는 죄와 함께 들어왔고, 죄의 산물인 저주의 일부였다(창 3:18).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에게서 저주를 제거하려고 죽으심으로 그 가시들의 아픔과 쓰라림을 느끼셨고, 아니, 그것들을 관으로 자기에게 묶기까지 하셨다(욥 31:36). 이는 우리를 위한 그의 고난이 그의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2.] 이제 그는 수풀에 걸려 이삭 대신 드려진 아브라함의 숫양의 예표에 부응하셨다(창 22:13). [3.] 가시는 환난을 의미한다(대하 33:11). 이것들을 그리스도께서 관으로 삼으셨다. 그가 가시의 성질을 자기 백성에게 그처럼 변화시키셨으니, 그들로 하여금 환난 중에 자랑할 까닭을 주시고, 그것이 그들을 위하여 중한 영광을 이루도록 하셨다. [4.] 그리스도께서 가시관을 쓰심은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그 영광이 세상적 영광이 아니라, 여기서는 결박과 환난을 동반하나 그 영광은 장차 나타날 것임을 보이려 하심이었다. [5.] 어떤 이방 나라들에서는 화관을 씌운 제물을 제단으로 가져오는 풍습이 있었다. 이 가시들은 이 위대한 제물에게 씌워진 화관이었다. [6.] 이 가시들은 아마도 그의 복된 머리에서 피를 흘리게 하였을 것이며, 그 피가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으니, 마치 머리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내림 같았다(시 133:2)—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시는 데 쓰신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한 것이다. 이처럼, 그가 자기에게로 자기 사랑, 자기 비둘기, 자기 흠 없는 교회를 정혼하러 오셨을 때, 그의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였고 그의 머리털에는 밤 이슬방울이 가득하였다(아 5:2).

(4.) 그들은 갈대를 그의 오른손에 들렸다. 이는 *가짜 홀(mock-sceptre)*로 의도된 것으로, 그들이 그를 조롱한 또 하나의 왕권의 *표상(insignia)*이었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마 11:7) 같은 그런 왕에게는 이런 홀이 적당하다는 듯이 말이다. 왕이 그러하니 그 나라도 그러하리라는 식으로, 둘 다 연약하고 흔들리며 시들고 무가치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잘못 알았으니, 이는 그의 보좌가 영원무궁하고 그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기 때문이다(시 45:6).

(5.) 그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였다. 그를 가짜 왕으로 만든 후, 그들은 이처럼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농담거리로 삼아, 그의 왕권 주장을 비웃었으니, 마치 요셉의 형제들이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창 37:8) 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그에게 절하고 그의 꿈을 풍성하게 이룬 것처럼, 여기서 무릎을 꿇은 이 자들도 곧 이후에 하나님 우편으로 높임을 받으사 그의 이름에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되거나 그 앞에서 꺾이게 될 그분을 조롱하며 무릎을 꿇은 것이다. 머지않아 진지하게 닥칠 일을 가지고 농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6.) 그들은 그에게 침을 뱉었다. 이렇게 그는 대제사장의 뜰에서도 학대당하셨다(마 26:67). 경의를 표할 때 신하는 군주에게 입을 맞추어 자기의 충성을 표하였다. 이처럼 사무엘이 사울에게 입을 맞추었고(삼상 10:1), 우리도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시 2:12)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가짜 경의 표시에서 그에게 입 맞추는 대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해보다 더 밝게 빛나며 천사들이 그 앞에서 자기 얼굴을 가리는 그 복된 얼굴이 이처럼 더럽혀졌다. 사람의 아들들이 이런 악행을 행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치욕을 당하셨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7.) 그들은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쳤다. 그들이 그의 왕권을 *조롱하는 표징(mock-ensign)*으로 삼았던 것을, 이제는 자기들의 잔인함과 그의 고통의 실제 도구로 삼았다. 그들은 아마도 가시관 위를 쳐서, 가시들을 그의 머리에 박아 넣어 더 깊이 상처 입혔을 것이니, 이는 그의 고통이 곧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던 자들에게 더 큰 놀잇거리가 되게 하였다. 이처럼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였다(사 53:3). 이 모든 비참함과 수치를 그가 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위하여 영생과 기쁨과 영광을 사려 하심이었다.

III. 그를 처형 장소로 데려감. 그들이 합당하다고 여기는 만큼 그를 조롱하고 학대한 후에, 그들은 그에게서 홍포를 벗겼다. 이는 그에게 입힘으로써 부여하였던 모든 왕권을 그에게서 박탈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도로 그의 옷을 입혔으니, 이는 그 옷이 처형에 동원된 군병들의 몫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홍포는 벗겼으나 가시관을 벗긴 것은 언급되지 않았으니, 이로부터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가 그것을 머리에 쓴 채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흔히 추정한다. 이는 그가 자기 보좌 위의 제사장이신 것처럼, 자기 십자가 위의 왕이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옷을 입은 채로 십자가에 못 박히러 끌려가셨으니, 이는 그가 친히 나무 위에서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실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다음과 같은 점들이 있다.

1. 그들은 그를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제단으로 끌려가는 제물같이 끌려가셨다. 우리는 그들이 그를 어떻게 재촉하며 끌고 갔는지, 그의 보배로운 피로 자기들의 잔인한 분노를 채우는 것을 막을 어떤 일이 끼어들까 하여 가능한 한 온갖 속도로 그를 끌어당겼는지 능히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아마도 이제 그에게 조롱과 모욕을 퍼부으며, 그를 만물의 찌꺼기처럼 취급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백성을 성화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기(히 13:12) 때문이니, 마치 예루살렘에서 구속을 기다리는 자들의 영광이신 그분이 그들 가운데 살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듯하였다. 이 점에 대해 그 자신도 주목하셨으니, 비유에서 그가 포도원 밖으로 내쫓김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21:39).

2. 그들은 구레네 시몬을 억지로 그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마 27:32). 처음에는 그가 친히 십자가를 졌던 것으로 보이니, 마치 이삭이 자기를 태울 번제의 나무를 진 것과 같았다(창 22:6). 그리고 이것은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고통과 수치를 함께 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은 십자가를 그에게서 벗겼으니, 그 까닭은 다음 중 하나일 것이다. (1.) 그에 대한 연민에서였을 수 있다. 그것이 그에게 너무 무거운 짐임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그런 것을 고려하였으리라고 거의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체질을 기억하시며,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시험받도록 두지 않으심(고전 10:13)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는 그들에게 숨 돌릴 틈을 주시나, 그들은 십자가가 다시 돌아올 것을 예상해야 하며, 맑은 정신의 틈은 단지 다음 발작을 준비할 여유를 줄 뿐이다. 그러나 (2.) 어쩌면 그것은 그가 십자가를 등에 진 채로는 그들이 원하는 만큼 빨리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3.) 그들은 그가 십자가의 짐 아래 기절하여 죽음으로써, 그들의 악의가 그에게 더 행하려고 의도한 일을 막아버릴까 두려워하였을 수도 있다. 이처럼 (그렇게 보이는) 악인의 긍휼조차도 실은 잔인한(잠 12:10) 것이다. 십자가를 그에게서 벗긴 후, 그들은 어떤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그것을 지게 하였으니, 총독이나 제사장들의 권위로 그를 이 일에 강요한 것이다. 그것은 치욕이었기에, 강요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것을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시몬이 그리스도의 제자였거나, 적어도 그를 호의로 대하는 자였으며, 그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 일을 그에게 떠넘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목하라, 참으로 제자임을 인정받으려는 모든 자는 그리스도를 따라 그의 십자가를 지고(마 16:24), 그의 능욕을 짊어져야 한다(히 13:13). 우리는 우리를 위한 그의 고난의 교제를 알아야 하고, 그를 위하여 우리가 부름받은 모든 고난에 인내로 복종해야 한다. 이는 그와 함께 고난받는 자만이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며, 그의 잔을 마시고 그의 세례로 세례 받는 자만이 그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앉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7장 33-49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The Crucifix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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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히심

³³ 골고다 곧 해골의 곳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³⁴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³⁵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앉아 지키더라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그들이 내 겉옷을 나누며 내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함을 이루려 함이러라
³⁶ 거기 앉아 지키더라
³⁷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³⁸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³⁹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⁴⁰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⁴¹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⁴²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⁴³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⁴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⁴⁵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⁴⁶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⁴⁷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⁴⁸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⁴⁹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본다.

I. 우리 주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장소.

1. 그들은 예루살렘 가까이 인접한 *골고다(Golgotha)*라 하는 곳에 이르렀으니, 아마도 통상적인 처형 장소였을 것이다. 만일 그가 예루살렘에 자신의 집을 가지고 계셨다면, 그를 더욱 욕보이기 위해 아마도 그들은 그의 집 문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범죄자들이 정부의 정의에 희생 제물로 바쳐지던 바로 그 장소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정의에 희생 제물로 바쳐지셨다. 어떤 이들은 이곳이 해골의 곳이라 불린 것이, 그곳이 공동 납골당이어서 죽은 자들의 뼈와 해골들이 사람들이 만져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한쪽에 모아져 함께 놓여 있던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사람의 자녀들 무리를 상대로 한 사망의 승리의 전리품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사망을 멸하려 하셨을 때, 그는 자신의 승리에 이 영광스러운 정황을 더하셨으니, 곧 그가 사망 자신의 두엄 더미 위에서 사망을 이기고 개선하신 것이다.

2. 거기서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마 27:35), 그의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런 다음 그것을 세워, 그가 거기 매달리게 하였다. 이는 로마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는 방식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복되신 구주께서 지금 당하신 그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감동되게 하고, 이렇게 찔리신 그분을 바라보며 애통하게 하자. 일찍이 그의 슬픔과 같은 슬픔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셨는가를 우리가 볼 때, 그 안에서 그가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보게 하자.

II. 그들이 그에게 가한 야만적이고 모욕적인 대우. 거기서 그들의 재간과 악의는 서로 누가 더 뛰어난지를 다투었다. 마치 죽음이, 그토록 큰 죽음이 충분히 나쁘지 않다는 듯이, 그들은 거기에 쓰라림과 공포를 더하려고 궁리하였다.

1.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그들이 그에게 준비해 준 마실 것으로써였다(마 27:34). 솔로몬의 지시(잠 31:6,7)에 따라, 죽임을 당하게 될 자들에게 향료를 탄 포도주 한 잔을 마시게 하는 것이 통례였으니, 죽게 된 자에게는 독한 술을 줄 것이요라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시게 될 그 잔에는 그들이 식초와 쓸개를 섞어, 그것을 시고 쓰게 만들었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하였다. (1.) 사람의 죄. 죄는 쓴 뿌리요, 쓸개와 쑥을 맺는 것이다(신 29:18). 죄인은 아마도 그것을 단 조각처럼 혀 밑에 굴리지만, 하나님께는 그것이 쓸개 같은 포도이다(신 32:32). 그것은 주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을 때 그러하였으며, 머지않아 죄인 자신에게도 그러할 것이니, 마침내는 쓰며, 죽음보다 더 쓴 것이다(전 7:26). (2.)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하였으니, 곧 아버지께서 그의 손에 쥐어 주신 그 잔이요, 참으로 쓴 잔이며, 저주가 되게 하는 쓴 물과 같은 것이다(민 5:18). 글자 그대로 예언된 바와 같이(시 69:21), 그들은 이 마실 것을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1.] 그는 그것을 맛보셨으니, 그리하여 그 최악의 것을 당하셨고, 그 쓴맛을 입에 받으셨다. 그는 우리가 금단의 열매를 모든 죄악된 맛봄으로 맛본 것에 대하여 속죄하실 때, 어떤 쓴 잔도 맛보지 않고 지나가게 두지 않으셨으니, 이제 그는 사망을 그 충만한 쓰라림 가운데 맛보고 계셨다. [2.] 그는 그것을 마시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것의 가장 좋은 점조차 취하려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의 감각을 줄여 줄 마취제 같은 어떤 것도 취하려 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그가 자신이 죽어 가는 것을 스스로 느끼며 죽고자 하셨기 때문이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고난의 사역 가운데 행하실 일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2. 그의 옷을 나눈 것으로써였다(마 27:35).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들은 그의 옷을, 적어도 그의 겉옷을 벗겼다. 이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끄럽게도 벌거벗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렇게 하여 그는 우리를 덮을 흰옷을 우리를 위하여 사신 것이다. 우리가 언제든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위안을 빼앗긴다면, 인내로써 그것을 견디자. 그는 우리를 위하여 벗기우셨다. 원수들은 우리의 옷을 벗길 수는 있으나, 우리의 가장 좋은 위안은 벗길 수 없으며, 우리에게서 찬송의 옷을 빼앗을 수 없다. 처형당하는 자들의 옷은 처형 집행관의 몫이었다. 네 명의 군병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동원되었으니, 그들은 각기 자기 몫을 가져야 했다. 그의 겉옷은 만일 나눈다면 그들 중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었을 것이므로, 그들은 그것을 두고 제비 뽑기로 합의하였다. (1.) 어떤 이들은 그 옷이 너무 곱고 값진 것이어서 다툴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가난과 부합하지 않는다. (2.) 아마도 그들은 그의 옷자락을 만져 고침을 받은 자들에 대해 들었기에, 거기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어 그것을 귀중히 여겼을 것이다. 혹은 (3.) 그들은 그러한 거룩한 유물에 대해 그의 친구들에게서 돈을 받기를 바랐을 것이다. 혹은 (4.) 조롱하느라, 그것을 마치 왕의 옷인 양 가치 있게 여기는 척하려 했을 것이다. 혹은 (5.) 그것은 심심풀이를 위함이었으니,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보내려고, 그 옷을 두고 주사위 놀이를 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의도하였든, 이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첫 마디를 사용하신 저 유명한 시편에서 이르기를,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하였다(시 22:18). 이는 다윗에게는 결코 사실이 아니었으되,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니, 다윗이 성령으로 그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이 부분의 거리낌은 사라진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심을 따른 것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려고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벗으셨다.

이제 그들은 앉아서 그를 지켰다(마 27:36). 대제사장들은 분명히 이 경비를 세우는 데 주의를 기울였으니, 이는 그들이 여전히 두려워하던 백성이 일어나 그를 구출할까 함이었다. 그러나 섭리는 그렇게 정하셔서, 그를 지키도록 임명된 자들이 그로 인하여 도리어 그를 위한 흠 잡을 데 없는 증인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이 보고 듣게 됨으로써 그들에게서 저 고귀한 고백을 자아내게 하셨다(마 27:54).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3. 그의 머리 위에 붙인 죄패로써였다(마 27:37). 공적 정의를 옹호하고 처형당하는 악인들에게 더 큰 수치를 안기기 위해, 그들 앞에서 외치는 자가 선포할 뿐 아니라, 그들이 무슨 죄로 고난당하는지를 알리기 위해 머리 위에 글을 써 붙이는 것이 통례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발 내용을 적어 그의 머리 위에 붙여, 그에게 가해진 혐의를 공적으로 알렸으니,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그의 치욕을 위해 의도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관하셔서, 그의 고발마저 그의 영광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는, (1.) 여기에 그에 대해 어떤 죄목도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 구주라거나 왕위를 찬탈한 왕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비록 그들은 그렇게 여겨지기를 바랐지만(요 19:21), 이는 예수, 곧 구주라고 하였으니, 분명 그것은 죄가 아니요,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였으니, 그것도 죄가 아니었다. 이는 그들이 메시아가 그러하시리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원수들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 그는 아무런 악도 행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아니, (2.) 여기에 그에 관한 매우 영광스러운 진리가 주장되었으니—곧 그가 유대인의 왕 예수시요, 유대인이 기대하였고 마땅히 복종하였어야 할 그 왕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고발은 그가 세상의 참 메시아요 구주시라는 데 이른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불려 왔을 때 도리어 그들을 다 함께 축복하였고, 그것도 세 번 그리한 것처럼(민 24:10), 빌라도도 그리스도를 범죄자로 고발하는 대신 그를 왕으로 선포하였고, 그것도 세 개의 명패에 세 번 그리하였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훨씬 넘어서 그분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만드신다.

4. 고난 가운데 그와 함께한 동반자들로써였다(마 27:38).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경비 아래 두 강도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 단어가 본래 의미하는 바대로 두 노상강도, 곧 길에서 약탈하는 자들이었다. 아마도 이 날이 처형일로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범죄자들과 함께 그를 처형할 수 있도록, 아침에 그리스도의 기소를 서둘렀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빌라도가 이 강도들을 처형하는 이 필수적인 정의의 행위로써 그리스도를 정죄한 자신의 불의를 속죄하려고 그렇게 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들은 유대인들이 우리 주 예수의 고난의 치욕을 더하려고 그것을 꾸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하였든, 그 안에서 성경이 성취되었으니(사 53:12),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라.

(1.) 그가 그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그에게 치욕이었다. 비록 그가 사실 때에는 죄인들과 구별되셨으나, 그들의 죽음에서는 그들이 나뉘지 않았으니, 그는 가장 비천한 악인들과 더불어 그들의 재앙에 참여하게 되셨다. 마치 그가 그들의 죄에 참여한 자였던 것처럼이니, 이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고,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죽으실 때에 범죄자 중에 헤아림을 받으셨고 악인들과 그 운명을 같이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의 죽음에 있어서 성도 중에 헤아림을 받게 하고, 택하신 자들 가운데 우리의 분깃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2.) 그가 그들 사이, 한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또 하나의 치욕이었으니, 마치 그가 셋 중에서 가장 악한 자, 곧 우두머리 악인이었던 것처럼이다. 이는 셋 가운데서 가운데가 우두머리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모든 정황이 그의 불명예를 위하여 꾸며졌으니, 마치 위대한 구주께서 다른 모든 이보다 가장 큰 죄인이셨던 것처럼이다. 그것은 또한 그의 마지막 순간에, 이 악인들의 비명과 신음과 모독으로 그를 어지럽히고 흔들려는 의도였으니,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끔찍하게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고난당하실 때, 죄인들의 비참함으로 자신을 스스로 감동시키려 하셨다.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그리스도의 사도들 중 일부가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들 중 누구도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는 않았으니, 이는 그것이 마치 그들이 사람의 죄를 만족시키는 일에 그와 공동의 시행자였고, 생명과 영광을 함께 사들인 자였던 것처럼 보일까 함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두 악인 사이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그들은 그의 죽음의 공로에 아무것도 기여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이는 그가 친히 우리의 죄를 자기 몸에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5.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그들이 그에게 퍼부은 모독과 욕설로써였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에게는 어떤 비방도 던졌다는 것을 읽지 못한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들이 자신들의 최악을 다 행하였고 악의 자체가 다 소진되었으리라 생각할 만하다. 참으로 어떤 범죄자가 칼을 쓰거나 수레에 실려 조리돌림을 당할 때는, 그것이 죽음보다 덜한 형벌이므로, 보통 그러한 욕설의 표현이 따른다. 그러나 죽어 가는 사람은, 비록 악명 높은 사람이라도, 동정으로 대하여야 마땅하다. 죽음, 곧 그토록 큰 죽음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채울 수 없는 복수이다. 그러나 주 예수의 비하를 완성하고, 그가 죽어 가실 때 죄악을 짊어지고 계셨음을 보이기 위하여, 그는 그때 비방을 짊어지게 되셨고, 보이는 바로는 며칠 전에 그에게 호산나를 외쳤던 그의 친구들 중 누구도 감히 모습을 드러내어 그에게 어떤 경의도 표하지 못하였다.

(1.) 지나가는 일반 백성이 그를 모욕하였다. 그의 극심한 비참함과 그 가운데서 보인 모범적인 인내도 그들을 누그러뜨리거나 마음을 돌이키게 하지 못하였다. 도리어 그들의 외침으로 그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자들이, 이제 자신들의 비방으로써 그렇게 한 것을 정당화하려 하였으니, 마치 자신들이 그를 정죄하기를 잘하였다는 듯이 하였다. 그들은 그를 모욕하였으니, 에블라스페문(eblasphemoun)—그들은 그를 모독하였다. 그리고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모독이었으니, 하나님과 동등됨을 빼앗을 일로 여기지 아니하신 분을 악담한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하라.

[1.] 그를 모욕한 자들. 지나가는 자들, 곧 그 길을 따라간 행인들이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기브온으로 이어지는 큰 길이었다. 그들은 대제사장의 앞잡이들의 소문과 떠들썩한 외침으로 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도처에서 거꾸러뜨려지고 비난받는 사람과 사물에 대해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보통의 경우보다 더 큰 노력과 결단을 요한다. 누구나 다수가 말하는 대로 말하기 쉽고, 악평이 붙은 것에 돌을 던지기 쉽다. Turba Remi sequitur fortunam semper et odit damnatos—로마의 군중은 사람의 운세의 변동에 따라 출렁이며, 가라앉는 자들을 짓누르기를 잊지 않는다. 유베날리스(Juvenal).

[2.] 그들이 그를 멸시하며 사용한 몸짓—머리를 흔드는 것. 이는 그의 몰락에 대한 그들의 의기양양함과 그를 향한 모욕을 나타낸다(사 37:22; 렘 18:16; 애 2:15). 그 의미는 이러하였다. 아하, 우리가 바라던 대로다(시 35:25). 이렇게 그들은 자기 나라의 구주이신 그를 모욕하였으니, 마치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멸한 삼손을 두고 그러했던 것과 같다. 바로 이 몸짓이 예언되었으니(시 22:7), 그들이 나를 보고 머리를 흔드나이다라 하였고, 또 시 109:25에서도 그러하다.

[3.] 그들이 내뱉은 조롱과 비웃음. 이것들이 여기 기록되어 있다.

첫째로, 그들은 그가 성전을 헐겠다고 한 것을 두고 그를 비난하였다. 비록 재판관들 자신은 그가 그것에 대해 한 말이 잘못 전해진 것임을 알고 있었으나(막 14:59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들은 부지런히 그것을 백성 가운데 퍼뜨려, 그가 성전을 헐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증오를 그에게 안기려 하였다. 이보다 더 백성을 그에게 격분케 할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종교와 하나님의 백성에 관하여 자신들이 거짓임을 알고 그 혐의가 부당함을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이들이 믿게 하려고 애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성전을 헐겠다는 너, 저 광대하고 견고한 건축물을 헐겠다는 너, 이제 그 십자가를 뽑고 그 못을 빼는 데 네 힘을 시험해 보고, 그래서 자기를 구원하라. 만일 네가 자랑하던 그 능력을 가졌다면, 지금이 그것을 발휘하여 증거를 보일 적절한 때이다. 누구나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유대인들에게 그토록 큰 걸림돌이 되게 하였으니, 그들은 그것을 메시아의 능력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고후 13:4), 그들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뿐, 실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다.

둘째로, 그들은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말을 두고 그를 비난하였다. 그들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러하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였다. 이제 그들은 마귀가 광야에서 그를 시험할 때 한 말(마 4:3,6)을 그 입에서 가져다가, 같은 공격을 새로이 하였으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하였다. 그들은 지금이 아니면 결코 그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였으나, 그가 행하신 이적들로, 특히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이미 그것을 증명하셨음을 잊었고, 그가 자신과 그들에게 그토록 자주 가리켜 보이신 자신의 부활로 그것이 온전히 증명되기를 기다리려 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유념하였다면 십자가의 거리낌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지나간 일을 마땅히 기억하지 않고 더 나올 수 있는 일을 인내로 기다리지 않은 채, 현재 보이는 양상으로만 사물을 판단한 데서 온 것이다.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곧 교회의 통치자들과, 장로들, 곧 나라의 통치자들이 그를 희롱하였다(마 27:41). 그들은 천한 무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부추기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지 않고, 자기들 친히 나서서 그를 비방함으로써, 그리스도께 불명예를 안기고 자신들은 즐거움을 취하였다. 그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어야 했으니, 이는 거룩한 모임이 있어야 할 무교절의 첫날이었기 때문이다(레 23:7). 그러나 그들은 여기 처형 장소에서, 주 예수께 자신들의 독을 내뿜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직분의 위엄과 진중함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었던가! 그 무엇이 백성 앞에서 그들을 경멸스럽고 비천하게 만드는 데 이보다 더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았으나, 적어도 평범한 분별력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에 그토록 큰 손을 댄 자들은 되도록 장막 뒤에 머물러 가급적 눈에 띄지 않도록 처신하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악의가 거리낄 만큼 비천한 것은 없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욕보이기 위해 이렇게 자신들을 깎아내렸다면, 우리는 무리와 함께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겠는가? 도리어 이것이 비천한 것이라면, 내가 더욱 비천하리라(삼하 6:22 참조)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두고 비난한 것이 두 가지이다.

[1.] 그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마 27:42). 그는 앞서 그의 선지자와 왕의 직분에 있어서 모욕을 당하셨고, 이제는 구주로서 그의 제사장의 직분에 있어서 모욕을 당하셨다. 첫째로, 그들은 그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고 당연시하였고, 따라서 그가 주장한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실 그는 자기를 구원하려 하지 않으셨던 것이니, 이는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땅히 이렇게 추론하였어야 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니, 그러므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었을 것이요,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어떤 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둘째로, 그들은 이렇게 넌지시 암시하려 하였다. 곧 그가 지금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니, 따라서 남을 구원한다는 그의 모든 주장이 한낱 거짓이요 속임이며, 실제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그의 이적의 진실함은 반박할 수 없도록 증명되었음에도 그러하였다. 셋째로, 그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을 두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메시아의 외적인 영화와 권세를 꿈꾸었기에, 십자가가 이스라엘의 왕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그 신분과 모순된다고 여겼다. 많은 사람들이, 만일 이스라엘의 왕이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만 한다면, 만일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마땅히 거쳐야 할 환난 없이 그의 나라를 가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를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정해져 있으니, 십자가가 없으면 그리스도도 없고, 면류관도 없다. 그와 함께 다스리려는 자들은 그와 함께 고난받기를 마다하지 않아야 하니, 이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함께 못 박혀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 그들은 그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도전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리하셨다면 그때 우리는 어찌 되었으며, 우리의 구속과 구원의 사역은 어찌 되었겠는가? 만일 그가 이 조롱에 격분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의 사역을 미완으로 두셨다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변치 않는 사랑과 결단이 그를 이 시험 위에 두고 그것에 대해 굳건하게 하셨으니, 그는 실패하지도, 낙심하지도 아니하셨다. 다섯째로, 그들은 만일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그를 믿겠다고 약속하였다. 그가 자신이 메시아라는 그 증거를 보이기만 하면, 그를 그렇게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전에 표적을 구하였을 때, 그는 자신이 그들에게 줄 표적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의 더 큰 증거인 무덤에서 올라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것을 이삼 일도 기다릴 인내가 없었다. 만일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 그들이 제자들이 밤에 와서 그를 도둑질해 갔다고 말한 것처럼, 그들은 군병들이 그를 못 박는 데 속임수를 썼다고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을 활용하지도 않으면서, 우리 스스로 정한 그러한 믿음의 수단과 동기가 주어진다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자만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속임의 심한 본보기일 뿐 아니라, 완고하게 멸망케 하는 불신앙의 가련한 도피처, 아니 차라리 핑계에 불과하다.

[2.]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지 않으시리라는 것(마 27: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곧 그가 그렇게 한다고 자처하였으니, 이는 그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신들을 그의 자녀라 부르는 자들은, 이로써 그를 신뢰함을 고백하는 것이다(시 9:10). 이제 그들은 이렇게 암시한다. 곧 그가 자신을 그토록 하늘의 총애를 받는 자로 삼았을 때, 그는 다만 자기 자신과 남들을 속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욥의 친구들이 욥에 관하여 논한 것처럼) 만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그가 이 모든 비참함에 내버려지지 않았을 것이요, 하물며 그 가운데 버림받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이 그 비슷한 일을 두고 탄식한 것처럼 그의 뼈를 찌르는 칼이었으며(시 42:10), 그것은 양날의 칼이었다. 이는 그것이 이렇게 의도되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를 천대하여, 곁에 선 자들이 그를 속이는 자요 사기꾼으로 여기게 하려 함이었으니, 마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그의 말이 이제 효과적으로 반증되었다는 듯이 함이었다. 둘째로, 그를 공포에 빠뜨려, 아버지의 능력과 사랑을 불신하고 절망하도록 몰아가려 함이었으니, 어떤 이들은 이것이 그가 두려워하신 것, 곧 경건한 두려움으로 두려워하시고 기도로 물리치시고 그로부터 건지심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히 5:7). 다윗은 그의 박해자들이 그의 보좌를 흔들고 그를 그의 나라에서 몰아내려는 시도보다도, 그의 믿음을 흔들고 그를 하나님께 둔 소망에서 몰아내려는 그들의 노력에 대해 더 많이 탄식하였다. 그들이 이르되, 하나님께 그를 도울 구원이 없다(시 3:2) 하고, 또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시 71:11) 하였다. 이 점에서도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아니, 다윗은 저 유명한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에서, 바로 이 말이 그의 원수들에 의해 발설되리라고 언급하였으니(시 22:8), 곧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여호와가 그를 구원하실 걸이라 하였다. 분명 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시편을 잊었음이 틀림없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그 모형과 예언에 그토록 정확히 들어맞는 똑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했다.

(3.) 그 치욕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그처럼 모욕을 당하지 않았으니, 마치 그들이 그에 비하면 성도였던 것처럼이다. 도리어 그들은 비록 그와 더불어 고난당하는 자들이었음에도, 그를 기소한 자들에게 합세하여 그를 향해 같은 욕을 던졌다. 곧 그들 중 하나가 그리하였으니,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였다(눅 23:39). 모든 사람 중에서 이 강도야말로 그리스도를 조롱할 이유가 가장 적고 그럴 마음이 가장 적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만하다. 비록 다른 이유로 고난을 받더라도, 고난을 함께하는 자들은 보통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무엇을 전에 행하였든 간에 비방하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자는 드물다. 그러나 보다시피, 몸의 가장 큰 고행과 섭리의 가장 낮추는 책망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그 자체로 영혼의 부패를 죽이거나 악인의 악함을 억누르지 못한다.

자, 이렇게 우리 주 예수께서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끼친 손상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기로 떠맡으셨으므로, 그는 그의 영광에 있어서 고난당하심으로 그것을 이루셨다.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에게 마땅한 것을 스스로 벗으셨을 뿐 아니라, 가장 악한 사람들에게 가해질 수 있는 극도의 모욕에 자신을 굴복시키심으로써였다. 이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기에,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고, 그리하여 우리가 언제든 비방을 받고 의를 위하여 거짓으로 온갖 악한 말을 들을 때 그 비방을 우리에게 쉽게 만드시려 함이었다.

III. 사람들에게서 받은 이 모든 부당함과 모욕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께서 처하셨던 하늘의 찌푸림. 이에 관하여 주목하라.

1. 이것이 어떻게 표시되었는가—세 시간 동안 계속된 비상하고 기적적인 일식으로써였다(마 27:45). 에피 파산 텐 겐(epi pasan ten gen)—온 땅 위에 어둠이 있었으니, 대부분의 주석가가 그렇게 이해하나, 우리 번역본은 그것을 그 땅에 국한한다. 고대의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 때에 있었던 이 비상한 일식에 관하여, 그것을 잘 알려진 일이요, 그때 무언가 큰 일이 행해지고 있음을 세상 그 지역에 알려 준 것으로 보고, 그 민족의 연대기에 호소하였으니, 마치 히스기야 때에 해가 뒤로 물러간 것과 같다. 보도된 바로는,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이집트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에서 이 어둠을 주목하고 이르기를, Aut Deus naturæ patitur, aut mundi machina dissolvitur—자연의 하나님께서 고난당하시든지, 아니면 세계의 기계가 무너져 폐허가 되든지 하는도다라고 하였다 한다. 비상한 빛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려 주었으니(마 2:2), 따라서 비상한 어둠이 그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마땅하였다. 이는 그가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께 가해진 모욕은 하늘을 놀라게 하고 심히 두렵게 하였으며, 심지어 하늘을 무질서와 혼란에 빠뜨렸다. 이와 같은 악함을 해는 전에 본 적이 없었으니, 따라서 물러가 이것을 보지 않으려 하였다. 이 놀랍고 경악스러운 어둠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그를 모욕하던 저 모독자들의 입을 막으려고 의도된 것이었다. 그리고 보이는 바로는, 당분간 그것이 그들에게 큰 공포를 안겨, 비록 그들의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잠잠하여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며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세 시간 후에 어둠이 흩어지자, 그때 (마 27:47에 나타난 바와 같이) 재앙이 지나간 후의 바로처럼 그들은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어둠 가운데 주로 의도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께서 지금 어둠의 권세와 벌이신 싸움이다. 이제 이 세상의 임금과 그의 세력, 곧 이 세상의 어둠의 주관자들이 쫓겨나, 노략당하고 패배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시려고, 그는 그들의 본거지에서 그들과 싸우시며, 이 어둠으로 그들이 그를 대적하여 가질 수 있는 모든 유리함을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이 바람과 해를 차지하게 하시고도, 그들을 좌절시키시며, 그리하여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되신다. (2.) 그가 지금 하늘의 위로를 결핍하셨음이다. 이 어둠은 우리 주 예수의 인간적 영혼이 지금 처하셨던 저 어두운 구름을 의미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해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비추게 하시나, 우리 구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을 때에는 해의 빛조차 그에게서 거두어졌다. 눈이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되(전 11:7 참조), 이제 그의 영혼이 심히 고민하였고 신적 진노의 잔이 그에게 섞인 것 없이 가득 채워졌으므로, 해의 빛조차 거두어졌다. 땅이 그에게 찬물 한 방울을 거절하였을 때, 하늘은 그에게 한 줄기 빛을 거절하였다. 그는 우리를 바깥 어둠에서 건지셔야 했기에, 친히 그의 고난의 깊은 곳에서 어둠 가운데 행하셨고 빛이 없으셨다(사 50:10). 이 어둠이 계속된 세 시간 동안, 우리는 그가 한 마디 말씀도 하셨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며, 그는 이 시간을 자신의 영혼 속으로의 침묵의 은거 가운데 보내셨다. 그의 영혼은 이제 고뇌 가운데 있어, 어둠의 권세와 씨름하며,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이제 자신의 영혼을 속죄제물로 삼고 계신 사람의 죄를 향한 아버지의 진노의 자국을 받아들이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 이래로 이와 같은 세 시간은 결코 없었으니, 이토록 어둡고 두려운 광경은 결코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구속과 구원이라는 저 위대한 일의 고비였다.

2. 그가 어떻게 이것을 탄식하셨는가(마 27:46). 길고도 침묵하는 싸움 끝에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부르짖어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Eli, Eli, lama sabachthani)? 하셨다. 이 말씀은 그것이 발설된 수리아 방언 그대로 전해지는데, 이는 그것이 거듭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요, 또한 그의 원수들이 *엘리(Eli)*를 *엘리야(Elias)*로 바꾸어 그 말에 가한 비뚤어진 해석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 주목하라.

(1.) 그가 이 탄식을 어디서 빌려 오셨는가—시 22:1에서이다. (어떤 이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가 시편 전체를 되뇌셨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로써 그는 그 전체가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함을, 그리고 다윗이 성령으로 거기서 그의 비하와 높아지심에 관하여 말한 것임을 넌지시 보이셨다. 이 말씀과, 또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저 다른 말씀을, 그는 (자신의 말로 표현하실 수도 있었으나) 다윗의 시편에서 가져오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지, 곧 그것이 우리를 기도 가운데 인도함을 가르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줄 기도 가운데 성경의 표현을 사용하기를 우리에게 권하시기 위함이었다.

(2.) 그가 그것을 어떻게 발설하셨는가—큰 소리로. 이는 그의 고통과 고뇌의 극심함을, 그에게 남아 있던 본성의 힘을, 그리고 이 항변에 담긴 그의 영의 큰 간절함을 나타낸다. 이제 성경이 성취되었으니(욜 3:15,16), 해와 달이 캄캄하며…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라 하였다. 다윗은 흔히 기도 가운데 자신이 큰 소리로 부르짖음을 말한다(시 55:17).

(3.) 그 탄식이 무엇이었는가—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 주 예수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이상한 탄식이다. 우리가 확신컨대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요, 그의 마음에 기뻐하시는 자이시며(사 42:1), 그가 항상 기뻐하시는 분이셨다. 아버지는 이제 그를 사랑하셨으니, 아니, 그는 자기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줄을 아셨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버림받으시고, 그것도 그의 고난 한가운데서라니! 분명, 완전히 죄에서 자유로워 결코 자기 자신에게 공포가 될 수 없으신 분에게서 이러한 탄식을 자아낸 그 슬픔과 같은 슬픔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자기의 고통을 안다(잠 14:10 참조). 이러한 탄식이 땅을 진동시키고 바위를 갈라지게 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 이는 그것이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두 귀를 울리게 하기에 족하며, 마땅히 큰 경외함으로 말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1.]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고난 가운데, 한동안 그의 아버지께 버림받으셨다는 것이다. 그가 친히 그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가 확신컨대 그는 자기 자신의 처지에 관하여 아무런 오해도 없으셨다.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조금이라도 약화되거나 흔들렸다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는 이제 영원하신 성령으로 자신을 드리고 계셨다. 아버지의 그에 대한 사랑이나, 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 어떤 감소가 있었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확신컨대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공포나, 그의 은총에 대한 절망이나, 지옥의 고통과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께서 그를 버리셨으니, 곧 첫째로, 그를 그의 원수들의 손에 넘기시고, 그들의 손에서 그를 건지러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는 어둠의 권세를 그에게 풀어놓으시고, 그들이 그 최악을 행하도록 두셨으니, 욥에게 한 것보다 더 악하게 두셨다. 이제 그 성경이 성취되었으니(욥 16:11),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셨도다라 하였고, 어떤 천사도 그를 건지러 하늘에서 보내지지 않았으며, 그를 위해 나설 어떤 친구도 땅에서 일으켜지지 않았다. 둘째로, 그는 그에게서 자신이 그를 기뻐하신다는 현재의 위로가 되는 의식을 거두셨다. 그의 영혼이 처음 괴로웠을 때, 그를 위로하는 하늘에서 나는 소리가 있었고(요 12:27), 그가 동산에서 고뇌 가운데 계실 때, 그를 강건하게 하는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가지지 못하셨다. 하나님이 그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숨기셨고, 어두운 골짜기에서 한동안 자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거두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으니, 사울을 버리실 때처럼 끝없는 절망에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때때로 다윗을 버리실 때처럼 현재의 낙담에 내버려두신 것이다. 셋째로, 그는 그의 영혼에 죄로 인한 사람을 향한 진노의 괴로운 의식을 쏟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고,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를 아들로서 사랑하셨으나, 보증인으로서는 그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셨다. 그는 이 자국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자신이 할 수도 있었던 그것들에 대한 저항을 기꺼이 포기하셨으니, 이는 그가 자신의 떠맡으신 이 부분에도, 피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을 때 다른 모든 부분에 그리하셨던 것처럼, 자신을 맞추려 하셨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께 버림받으신 것이 그의 고난 중에 가장 비통한 것이었고, 그가 가장 많이 탄식하신 것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그는 가장 애절한 어조를 담으셨다. 그는 "어찌하여 내가 채찍에 맞으며? 어찌하여 침 뱉음을 당하며? 어찌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나이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또한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을 때, 그는 그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버렸느냐?*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께서 멀리 서 계셨을 때, 그는 이렇게 부르짖으셨으니, 이는 이것이야말로 그 고난과 비참함에 쑥과 쓸개를 넣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물이 영혼에까지 흘러들게 하였다(시 69:1-3).

[3.] 우리 주 예수께서 이렇게 그의 아버지께 버림받으셨을 때조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붙드셨다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비록 나를 버리시나,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시라.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의 사역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종이셨고, 그에게 만족을 드려야 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끝까지 인도되고 면류관을 쓰셔야 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그를 자신의 하나님이라 부르신 것이니, 이는 그가 이제 그의 뜻을 행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사 49:5-9를 보라. 이것이 그를 떠받치고 그를 붙들어 주었으니, 곧 그의 고난의 가장 깊은 곳에서조차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심이요, 이것을 그는 굳게 붙들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4.) 그의 원수들이 어떻게 이 탄식을 불경스럽게 조롱하고 비웃었는가를 보라(마 27:47). 그들이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였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로마 군병들의 무지한 오해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엘리야에 관하여, 그리고 엘리야의 오심에 대한 유대인의 기대에 관하여 들은 적은 있었으나 *엘리 엘리(Eli, Eli)*의 뜻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해석을 붙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백성의 소란 때문에 그가 말씀하신 뒷부분을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주목하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던져지는 비방의 많은 부분이 심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신적 진리는 흔히 성경의 언어와 문체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왜곡된다. 절반만 듣는 자들은 그들이 들은 것을 곡해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것이 일부 유대인들의 고의적인 오해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매우 잘 알았으나, 그를 욕보이고, 자신들과 그 동료들을 즐겁게 하며, 그를 하나님께 버림받아 피조물에게 의지하게 된 자로 곡해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또한, 자신을 메시아라고 자처하였던 그가, 이제는 메시아의 단지 선구자요 앞서가는 자로만 기대되던 엘리야의 신세를 기꺼이 지려 한다는 것을 넌지시 비치려 하였을 것이다. 주목하라, 가장 경건한 사람들의 가장 경건한 기도가 불경한 조롱꾼들에게 비웃음과 모욕을 당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며, 우리가 기도와 설교에서 잘 말한 것이 곡해되어 우리의 비방으로 돌려지더라도 이상히 여길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러하였으니, 비록 그는 사람이 결코 말한 적 없는 것처럼 말씀하셨음에도 그러하였다.

IV. 이 고뇌 가운데 그의 원수들이 그에게 베푼 차가운 위로. 그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였다.

1. 어떤 이들은 그에게 신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하였다(마 27:48). 이 무거운 짐 아래 그를 소생시키고 새롭게 할 어떤 강심제를 주는 대신, 그들은 그가 짊어지고 있던 비방에 보탤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께서 그의 손에 쥐어 주신 저 떨림의 잔을 너무도 생생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그를 희롱하였다. 그들 중 하나가 달려가서 그것을 가져왔으니, 마치 그에게 친절을 베푸는 척하였으나, 실은 그를 학대하고 모욕할 기회를 기뻐하였고, 누군가 그것을 자기 손에서 빼앗을까 두려워하였다.

2. 다른 이들은, 그를 어지럽히고 학대하려는 같은 목적으로, 그를 엘리야에게 떠넘겼다(마 27:49).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자, 그를 내버려 두라. 그의 형편은 절망적이니, 하늘도 땅도 그를 도울 수 없다. 그의 죽음을 재촉하든 늦추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말자. 그가 엘리야에게 호소하였으니, 엘리야에게 가게 하라."

마태복음 27장 50-56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The Crucifixion; The Death of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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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리스도의 죽으심

⁵⁰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⁵¹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⁵²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⁵³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⁵⁴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⁵⁵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⁵⁶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우리는 여기에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한 기록과, 그 죽음에 수반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건들을 보게 된다.

I. 그분이 마지막 숨을 거두신 방식 (마 27:50). 제삼시와 제육시 사이, 곧 우리가 셈하는 방식으로 오전 아홉 시와 정오 사이에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제구시 직후, 곧 오후 세 시와 네 시 사이에 죽으셨다. 그때는 저녁 제사를 드리는 시각이었고, 또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시각이었다. 우리의 유월절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되셨으며, 세상의 저녁에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자기 자신을 드리셨다. 천사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저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예언을 전한 때도 바로 그 시각이었다(단 9:21, 24 등). 그리고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것을 말한 바로 그때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때까지가 정확히 칠십 이레, 곧 사백구십 년이 하루도, 한 시간도 어김없이 채워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것이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날, 바로 그 날에 이루어진 것과 같다(출 12:41).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방식에 관하여 두 가지가 언급된다.

1. 그분이 앞에서와 같이(마 27:46)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1.) 이것은 그분이 그 모든 고통과 피로를 겪으신 후에도 그분의 생명이 그분 안에 온전히 있었고, 본성이 강건했음을 보여 주는 표징이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 중 하나가 목소리이다. 헐떡이는 숨과 더듬는 혀로 몇 마디 끊어진 말을 겨우 내뱉을 뿐이며, 그것조차 듣기 어렵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온전한 기력을 가진 사람처럼 말씀하셨으니, 이는 그분의 생명이 강제로 빼앗긴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행위와 결단으로 아버지의 손에 자유로이 내어 드린 것임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죽으실 때 이렇게 부르짖을 힘이 있으셨던 분은 자신이 받은 체포에서 벗어나 죽음의 권세에 도전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친히 자기 자신을 드리셨음을, 곧 제물이실 뿐 아니라 제사장이심을 보이시려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신 것이다.

(2.) 그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이 큰 소리는 그분이 우리의 영적 원수들을 굴하지 않는 용기로, 그리고 그 싸움에 마음을 다하고 그 대결에 담대하심을 드러내는 그런 결연한 용맹으로 맞서 공격하셨음을 보여 준다. 그분은 이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고 계셨으며, 이 큰 소리로, 말하자면 구원에 능하신 분으로서(사 63:1) 승리를 위해 외치셨다. 이것을 사 62:13, 14과 비교해 보라. 그분은 이제 삼손이 나로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게 하옵소서라고 말했을 때처럼(삿 16:30) 자신의 온 힘을 다해 몸을 굽히셨다. Animamque in vulnere ponit—그리고 상처 가운데 자기 생명을 내려놓으셨다. 죽으실 때 큰 소리로 부르짖으신 것은, 그분의 죽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고 공포되어야 함을 의미하였으니, 온 인류가 그 일에 관계되어 있고 그것에 주목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큰 부르짖음은 제물 위에 울려 퍼진 나팔 소리와도 같았다.

2. 그런 다음 그분이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것은 죽음을 표현하는 통상적인 우회 표현이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이 당하신 그 격렬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또 본래적으로 죽으셨음을 보여 준다. 그분의 영혼이 그분의 몸에서 분리되었고, 그리하여 그분의 몸은 실제로 또 참으로 죽은 채 남겨졌다. 그분이 과연 죽으셨다는 것은 확실하니, 그분이 죽으셔야 함이 마땅했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곧 하나님의 경륜의 봉인된 두루마리 안에도,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공개된 문서 안에도 그렇게 기록되었으니, 그러므로 그분은 마땅히 이같이 고난을 받으셔야 했다. 죽음은 첫 언약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이었으므로(반드시 죽으리라), 새 언약의 중보자는 반드시 죽음으로 말미암아 속죄를 이루셔야 했으니, 그렇지 않으면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히 9:15). 그분은 자기 영혼을 속죄제물로 드리기로 약속하셨고, 영혼이 떠나시며 그것을 자발적으로 내어놓으실 때 그 일을 이루셨다.

II. 그분의 죽으심에 수반된 기적들. 그분이 생전에 그토록 많은 기적을 친히 행하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에 관해서도 어떤 기적이 일어나리라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 그분의 이름이 기묘자라 불렸기 때문이다. 그분이 엘리야처럼 불 수레에 실려 들려 올라가셨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한 기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치욕적인 십자가로 데려가심을 당하셨기에, 그분의 낮아지심에는 신적 영광의 어떤 두드러진 발현이 수반되는 것이 마땅하였다.

1. 보라,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이 기록은 보라로 시작된다. "곁길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고 그것에 놀라라." 우리 주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바로 그때, 곧 저녁 제사를 드리는 시각이요 엄숙한 절기여서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어 그들 자신이 그 일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그때에, 성소 휘장이 보이지 않는 권능에 의해 찢어졌다. 그것은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는 휘장이었다. 그들은 그분이 내가 이 성전을 헐겠다고 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그분을 정죄하였다. 이제 이 권능의 본보기로써 그분은, 만일 원하셨다면 자신의 말씀을 이루실 수 있었음을 그들에게 알리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다른 기적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도 한 가지 신비가 담겨 있었다.

(1.) 그것은 이제 해체되고 있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성전과 상응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참된 성전이니,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고 영혼을 내어 주심으로 그 성전을 헐어 버리셨을 때, 문자적인 성전이 말하자면 그 부르짖음에 메아리치고 그 일격에 응답하여 그 휘장을 찢음으로 화답하였다. 주목하라, 죽음이란 우리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육신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러했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죽음도 그러하다.

(2.) 그것은 구약의 신비들이 드러나고 펼쳐짐을 의미하였다. 성소의 휘장은 모세의 얼굴에 있던 수건처럼 가림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가리는 휘장이라 불렸다. 대제사장 외에는 그 누구도 지성소의 기구들을 보는 것이 매우 엄중한 죄였고, 대제사장조차도 일 년에 단 한 번, 큰 예식과 함께 자욱한 연기를 통하여서만 볼 수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은 그 경륜의 어둠을 의미하였다(고후 3:13).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활짝 열렸고 신비들이 벗겨졌으니, 이제는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그 의미가 분명해졌다. 이제 우리는 시은좌(속죄소)가 위대한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였음을,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였음을 본다. 이같이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거울은 시야를 돕는데, 이는 휘장이 시야를 가렸던 것과 반대된다) 주의 영광을 보매. 우리 눈이 그 구원을 보았느니라.

(3.)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던 칸막이 벽, 곧 의식법이 제거됨으로써 둘이 연합됨을 의미하였다. 의식법으로 인해 유대인은 다른 모든 민족과 구별되어(울타리 친 동산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던 반면, 다른 이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 의식법을 폐하시고, 저 규례의 증서를 무효로 하시며, 그것을 치워 버려 자신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리하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 또 그 규례들을 폐하심으로 원수 된 것을 폐하시고, 자기 안에서 둘로 하나의 새 사람을 지으셨다. (마치 칸막이를 헐어 두 방을 하나로 만들면 넓고 환한 한 방이 되듯이.) 그리하여 화평을 이루셨다(엡 2:14-16). 그리스도께서는 가르는 모든 휘장을 찢으시고, 자기에게 속한 모든 자를 하나 되게 하시려고 죽으셨다(요 17:21).

(4.) 그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봉헌하시고 열어 놓으심을 의미하였다. 휘장은 사람들이 *셰키나(Shechinah, 임재의 영광)*가 거하는 지성소에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그것이 찢어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셨음을 의미하였으니, [1.] 그분 자신을 위하여서이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속죄일이었으니, 우리 주 예수께서 위대한 대제사장으로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가 아니라 자기 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 표징으로 휘장이 찢어졌다(히 9:7 등). 바깥뜰에서 자신의 제물을 드리신 후, 이제 그 피를 휘장 안 시은좌(속죄소) 위에 뿌려야 했다. 그러므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곧 영광의 제사장이 들어가시리로다. 이제 그분은 가까이 나오게 되시고, 나아가게 되셨다(렘 30:21). 비록 그분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소에 친히 올라가신 것은 그로부터 사십여 일 후였으나, 그분은 즉시 들어갈 권리를 얻으셨고 사실상 입장이 허락되어 있었다. [2.] 그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서이다. 사도가 이를 그렇게 적용한다(히 10:19, 20).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로 담대히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시려고, 그리고 그러기 위하여 우리와 그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책과 진노의 휘장을 찢으시려고, 그룹과 화염검을 거두시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여시려고 죽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은혜의 보좌, 곧 시은좌(속죄소)에 자유로이 나아가며, 장차 영광의 보좌에 나아간다(히 4:16; 6:20). 휘장이 찢어진 것은 (저 오래된 찬송이 탁월하게 표현하듯이)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날카로움을 이기셨을 때, 모든 믿는 자에게 하늘나라를 여셨음을 의미하였다. 휘장이 찢어졌으니 그 무엇도 우리가 하늘로 나아감을 막거나 좌절시킬 수 없다. 하늘에 한 문이 열렸느니라(계 4:1).

2. 땅이 진동하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갈보리 산뿐 아니라 온 땅과 그 인근의 여러 지역이 진동하였다. 이 지진은 두 가지를 의미하였다.

(1.)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끔찍한 악행이다. 땅은 그러한 짐 아래 떨면서, 박해받으신 분의 무죄함을 증언하고 그분을 박해한 자들의 불경함을 고발하였다. 이전에는 온 피조물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을 못 박은 죄책 가득한 악한 자들이라는 그런 짐 아래 신음한 적이 결코 없었다. 땅이 진동하였으니, 마치 그리스도의 피를—전에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저주받았던(창 4:11, 12) 아벨의 피보다 훨씬 더 보배로운 그 피를—받아들이려고 입을 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고, 또한 마치 훨씬 더 가벼운 죄로 다단과 아비람을 삼켰던 것처럼, 그분을 죽인 그 반역자들을 삼키려고 기꺼이 그 입을 벌리고자 하는 것 같았다. 선지자가 악인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큰 진노를 표현하고자 할 때 묻기를, *이로 말미암아 땅이 떨지 않겠으며?*라고 하였다(암 8:8).

(2.)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룬 영광스러운 업적이다. 이 지진은 마귀의 나라에 가해진 강력한 충격, 아니 치명적 타격을 의미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이제 지옥의 권세들에게 가하신 공격이 어찌나 맹렬하였던지, (옛적에 그분이 세일에서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 진군하실 때처럼) 땅이 진동하였다(삿 5:4; 시 68:7, 8). 만국의 보배가 임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키시며, 아직 한 번 더가 있으니, 이는 아마도 이 진동을 가리키는 것이리라(학 2:6, 21).

3. 바위가 터지니, 땅에서 가장 단단하고 견고한 부분조차 이 강력한 충격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아이들이 호산나 부르기를 그치면 돌들이 즉시 소리 지르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사실상 그것들이 그렇게 하여 고난당하신 예수의 영광을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완악한 유대인들보다 그분께 행해진 잘못에 대해 더 민감하였다. 그러나 그 유대인들도 머지않아,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을 피해 자기를 숨기려고 바위틈과 험한 바위 틈에 한 구멍이라도 찾으면 기뻐할 것이다. 계 6:16과 사 2:21을 보라.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불같이 쏟아질 때 바위들이 그 앞에서 무너지느니라(나 1:6). 예수 그리스도는 반석이시니, 이 바위들이 터진 것은 저 반석이 터지심을 의미하였다. (1.) 그 틈 가운데 우리가 숨을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니, 마치 모세가 호렙에서 바위 틈에 숨어 그곳에서 그가 그러했듯이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심과 같다(출 33:22). 그리스도의 비둘기는 바위 틈에 숨었다고 일컬어지는데(아 2:14), 이는 어떤 이들이 그 비유를 풀이하기를, 터지신 반석이신 우리 주 예수의 상처 안에 피하여 보호받는 것이라 한다. (2.) 그 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이 광야에서 우리를 따르게 하시려는 것이니, 마치 모세가 친 반석(출 17:6)과 하나님께서 쪼개신 반석(시 78:15)에서 그러했듯이 함이라.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할 때, 우리의 단단하고 바위 같은 마음이 찢어져야 하나니—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여졌는데도 굴복하지 않고 녹지 않는 마음은 바위보다 더 단단한 것이다.

4. 무덤들이 열리니라. 이 일은 우리의 호기심이 바라는 만큼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으니, 성경은 그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의도로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바위를 터뜨린 바로 그 지진이 무덤들을 열었고,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난 듯하다. 성도에게 죽음이란 단지 몸의 잠일 뿐이요, 무덤은 그것이 잠자는 침상이다. 그들은 주 예수의 능력으로 깨어났고, (마 27:53) 그분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 자 이제 여기에서,

(1.) 우리는 이에 관하여 풀 수 없는 많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예컨대, [1.] 일어난 이 성도들이 누구였는가. 어떤 이들은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고대의 족장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이 이른 부활의 유익을 믿음으로 내다본 까닭에 그러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최근에 족장들의 사례로부터 부활 교리를 증명하셨는데(마 22:32), 여기에 그 논증의 신속한 확증이 있었다. 다른 이들은 일어난 이들이 근래의 성도들, 곧 그리스도와 육신으로 함께 지냈으나 그분보다 먼저 죽은 자들—그분의 아버지 요셉, 사가랴, 시므온, 세례 요한 등 살아 있을 때 제자들에게 알려졌던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타남으로 후에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기에 더 합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구약 시대에 자기 피로 하나님의 진리를 인친 순교자들, 곧 이같이 높여지고 구별된 자들이라고 가정해 보면 어떠한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선구자로 특별히 지목하신다(마 23:35). 그리고 우리는 (계 20:4, 5에서)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 그 나머지 죽은 자들보다 먼저 살아났음을 본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자들은 먼저 그분과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다. [2.]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그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동시에 지금 살아나 다른 곳에 머물러 있다가 그분의 부활 후에야 비로소 성에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이 생각하듯이) 바리새인들이 쌓고 단장하여(마 23:29) 그래서 눈에 띄게 된 그들의 무덤들은 비록 이제 지진으로 부서졌으나 (하나님께서 그 위선적인 경의를 그토록 개의치 않으셨으니), 그들이 부활 후에야 비로소 살아나 일어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간결함을 위하여 무덤이 열린 일을 언급하는 김에 여기에 함께 적은 것뿐이니, 이 후자가 더 개연성 있어 보인다. [3.] 어떤 이들은 그들이 단지 자신들이 나타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기 위하여 일어났다가, 그 증언을 마친 후 다시 무덤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예와 그들의 영예 모두에 비추어 볼 때, 비록 우리가 증명할 수는 없으나, 그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는 죽지 아니하려고 일어났고, 그러므로 그분과 함께 영광에 올라갔다고 가정하는 편이 더 합당하다. 분명히 그분의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권세를 부리지 못한다. [4.] 그들이 누구에게 나타났는지(모든 백성에게가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나타난 것은 확실하다), 곧 원수에게인지 친구에게인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몇 번이나 나타났는지, 무엇을 말하고 행했는지, 또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은밀한 일들이다. 우리는 기록된 것 외에 더 지혜로워지려고 탐해서는 안 된다. 이 일을 이토록 간략하게 서술한 것은,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그쪽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암시이다.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다. 눅 16:31을 보라.

(2.) 그러나 우리는 이로부터 여러 가지 좋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이전에 살고 죽은 자들조차도, 이후에 산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로 말미암아 구원의 유익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분은 오늘날과 같이 어제도 동일하셨고 영원토록 동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히 13:8).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시고, 무장 해제시키시며, 무력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일어난 이 성도들은 죽음의 권세들을 이긴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의 현재적 전리품이었으니, 그분은 이같이 그것을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다. 죽음으로써 죽음의 권세를 잡은 자를 멸하시고, 이같이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으시며, 이 되찾은 노획물들로 영광을 받으셨으니, 그들 안에서 저 성경 말씀을 이루셨다.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리라. [3.]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의 몸이 때가 차매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날의 일반적 부활에 대한 보증이었으니, 그날에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예루살렘이 여기에서 거룩한 성이라 일컬어진 것은, 성도들이 일반적 부활 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 새 예루살렘이야말로 옛 예루살렘이 단지 이름과 모형으로만 가졌던 그것, 곧 참된 거룩한 성이 될 것이다(계 21:2). [4.]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영향력으로, 또 그것을 본받아, 죄의 죽음에서 의의 생명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아 신적이고 영적인 생명에 이른다. 그들은 거룩한 성에 들어가 그 성의 시민이 되며, 그 안에서 생활하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처럼 많은 사람에게 나타난다.

III. 처형에 동원되었던 그분의 원수들이 확신하게 된 일이다(마 27:54). 어떤 이들은 모든 정황을 고려할 때 이것을 또 하나의 기적에 못지않은 일로 여긴다. 살펴보라.

1. 확신하게 된 사람들, 곧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니, 이 일을 위해 경비를 서도록 배치된 한 대장과 그의 부하들이다. (1.) 그들은 군인이었는데, 그 직업은 흔히 사람을 완악하게 하며, 그들의 가슴은 대개 다른 어떤 이들만큼 두려움이나 연민의 감화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권능이 깨뜨리고 낮출 수 없을 만큼 너무 크거나 너무 담대한 영혼은 없다. (2.) 그들은 로마인, 곧 이방인이었으니, 이제 성취되고 있던 성경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그들만이 확신하게 되었다. 이는 복음이 이방인에게 보내져 그들의 눈을 열게 될 때 이스라엘에게 임할 그 눈멂에 대한 슬픈 전조였다. 여기에서 이방인은 부드러워졌고 유대인은 완악해졌다. (3.) 그들은 그리스도를 박해한 자들이요, 바로 조금 전에 그분을 모욕하던 자들이었으니, 눅 23:36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양심을 다스리시는 권능으로, 위협과 살기와 모독 외에는 아무것도 내뿜지 않던 그 입에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진리에 대한 고백을 끌어내심으로 그들의 말을 얼마나 빨리 바꾸실 수 있는가!

2. 그들이 확신하게 된 수단, 곧 그들은 자기들을 두렵게 한 지진을 감지하였고 일어난 다른 일들을 보았다. 이것들은 고난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고, 다른 이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든 간에 이 군인들에게는 그 목적을 이루었다. 주목하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나타나는 무서운 현상들은 때로 죄인들을 확신시키고 일깨우는 데 놀랍게 작용한다.

3. 이 확신의 표현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1.) 그들에게 임한 두려움이다.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자기들도 어둠에 묻히거나 지진에 삼켜질까 두려워하였다. 주목하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대적들 가운데 가장 담대한 자도 쉽게 두렵게 하시며, 그들이 한낱 사람일 뿐임을 알게 하실 수 있다. 죄책은 사람을 두려움에 빠뜨린다. 불의가 가득할 때 경계의 두려움으로 항상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심판이 임할 때 경악의 두려움으로 심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땅이 변하여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도 있다(시 46:1, 2).

(2.) 그들에게서 강제로 나온 증언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였으니, 고귀한 고백이었다. 베드로는 이 고백으로 복이 있다 함을 받았다(마 16:16, 17). 그것은 이제 논쟁이 되던 중대한 문제였고, 그분과 그분의 원수들이 맞붙은 쟁점이었다(마 26:63, 64). 그분의 제자들은 그것을 믿었으나 이때에는 감히 고백하지 못하였다. 우리 구주 자신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을 의심하도록 시험받으셨다. 유대인들은 이제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으므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판결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도 이제 이 백부장과 군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이 고백을, 곧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를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분의 가장 뛰어난 제자들도 어느 때든 이보다 더 많이 말할 수 없었을 것이며, 이때에 그들은 이만큼 말할 믿음과 용기조차 없었다. 주목하라, 하나님께서는 한 진리가 짓밟히고 거꾸러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진리의 영광을 지키시고 주장하실 수 있으니, 진리는 위대하며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IV. 그분의 죽으심을 목격한 증인이었던 그분의 친구들의 시중함이다(마 27:55, 56). 살펴보라.

1. 그들이 누구였는가. 갈릴리에서부터 그분을 따라온 많은 여자들이었다. 그분의 사도들이 아니었으니 (다만 다른 곳에서 우리는 요한이 십자가 곁에 있었음을 본다. 요 19:26), 그들은 같은 정죄 아래 들어올까 두려워하여 마음이 약해져 감히 나타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있었으니, 어떤 이들은 그들을 어리석은 여자들이라 불렀을지 모르나, 그들은 나머지 제자들이 비겁하게 그분을 버렸을 때에도 담대하게 그리스도께 붙어 있었다. 주목하라, 연약한 성에 속한 자들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종종 믿음 안에서 강하게 되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한 용기와 결단으로 유명한 여성 순교자들이 있어 왔다. 자, 이 여자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한다. (1.) 그들이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왔다는 것이니, 이는 그분께 품은 큰 사랑과 그분의 설교를 듣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자들만 절기에 올라와 예배할 의무가 있었다. 자,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팔십 내지 백 마일이나 되는 그 먼 길을 그분을 따라온 후에, 그들은 이제 그분을 버리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주목하라,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이전 봉사와 고난은, 그분을 시중드는 일에서 끝까지 신실하게 견디는 데 우리에게 하나의 논거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그토록 멀리 또 그토록 오래 따랐고, 그토록 많은 일을 하였고, 그분을 위하여 그토록 많이 쏟아 부었는데, 이제 와서 그분을 버리겠는가? 갈 3:3, 4. (2.) 그들이 그분의 필요한 생계를 위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분을 섬겼다는 것이다. 만일 허락만 되었다면 그들은 지금 얼마나 기꺼이 그분을 섬겼을까! 그러나 그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그들은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주목하라,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제약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이제 그분이 하늘에 계셔서 비록 우리의 시중이 미칠 수 없는 곳에 계시지만, 우리의 믿음의 시선이 미칠 수 없는 곳에 계신 것은 아니다. (3.) 그들 중 몇몇은 특별히 이름이 거명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자들을 존귀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앞서 여러 번 만난 자들이었으며, 우리가 그들을 끝까지 만난다는 것이 그들의 칭찬거리였다.

2.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가. 그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1.)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그들 자신의 두려움이 그들을 멀리 떨어져 있게 한 것인지, 아니면 원수들의 격노가 그리하게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과 친구들이 그분의 상처에서 멀리 떨어져 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중시키는 일이었다(시 38:11; 욥 19:13). 아마도 그들이 원했다면 더 가까이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들 중 일부가 자기를 꺼리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바울의 위험이 임박했을 때 아무도 그의 곁에 서지 않았다(딤후 4:16). 우리가 이같이 낯설게 여겨질지라도, 우리 주께서 우리보다 앞서 그러하셨음을 기억하라.

(2.) 그들은 그곳에서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그들이 그분께 다른 어떤 사랑의 직무를 행하는 것이 금지되었을 때, 그들은 그분을 향하여 사랑의 시선을 던졌다. [1.] 그것은 슬픈 시선이었다. 그들은 이제 찔리신 그분을 바라보며 애통하였으니, 의심할 것 없이 그분으로 인하여 비통함에 잠겼다. 우리는 그분이 이런 고통 가운데 계신 것을 보는 것이 그들의 가슴을 얼마나 도려냈을지, 또 그것이 그들의 눈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의 강물을 자아냈을지 능히 상상할 수 있다. 우리도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바라보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에 감동받자. 그러나 [2.] 그것은 단지 시선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았으나 그분을 도울 수는 없었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 고난 가운데 계셨을 때, 그분의 가장 좋은 친구들조차도 그저 구경꾼이요 바라보는 자들일 뿐이었다. 노리스 씨가 말하기를, 천사 호위병조차도 떨면서 곁에 서 있었다고 하니, 이는 그분이 홀로 포도즙 틀을 밟으셨고 백성 중에는 그분과 함께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분 자신의 팔이 구원을 이루셨다.

마태복음 27장 57-66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The Burial of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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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장사(葬事)

⁵⁷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⁵⁸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명령하거늘 ⁵⁹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⁶⁰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⁶¹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⁶²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⁶³ 이르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⁶⁴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⁶⁵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너희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⁶⁶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사(葬事)*와 그 방식과 정황에 대한 기사를 얻는데, 이에 관하여 다음을 살펴보라. 1. 그를 무덤에 안장한 그의 친구들의 친절과 선의. 2. 그를 거기 가두어 두려고 매우 노심초사한 그의 원수들의 악의와 적의.

I.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합당한 장례를 베풀었다. 살펴보라.

1. 전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셨다는 사실. 그의 보배로운 영혼이 낙원으로 가셨을 때, 그의 복된 몸은 무덤의 방에 안치되었으니, 이는 요나의 모형을 이루시고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의 무덤을 악인들과 함께 두셨다. 이와 같이 모든 일에 그는 그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으되 오직 죄는 제외되었으며, 우리와 같이 흙으로 돌아가셔야 했다. 그가 장사되심은 그의 죽음을 더욱 확실하게 하고, 그의 부활을 더욱 빛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빌라도는 그가 참으로 죽은 줄을 충분히 확인하기까지는 그의 몸을 내어주어 장사하게 하지 않으려 하였다. 증인들이 장사되지 않고 누워 있을 동안에는 그들에 관하여 어느 정도 소망이 있었으니(계 11:8), 그러나 위대한 증인이신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 자유로운 자, 무덤에 누운 죽임 당한 자같이 되셨다. 그가 장사되심은 무덤의 공포를 제거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편안하게 하시며, 그 차갑고 역한 침상을 우리를 위하여 따뜻하게 하시고 향기롭게 하시며, 또한 우리로 그와 함께 장사되게 하시려 함이었다.

2. 여기 기록된 그의 장사의 구체적인 정황들.

(1.) 그가 장사된 때. 저물었을 때, 곧 그가 죽으신 바로 그날 저녁, 해 지기 전이었으니, 이는 죄인을 장사하는 통례대로였다. 이튿날까지 미루지 않은 것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장사하는 것은 안식일과 같은 안식의 날이나 기뻐하는 날에 합당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그 장례를 맡아 돌본 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이었다. 사도들은 모두 도망하였고, 그들 중 아무도 나타나 그들의 주께 이러한 존경을 표하지 않았으니, 이는 요한의 제자들이 그가 목 베임을 당한 후에 그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한 것(마 14:12)과는 달랐다. 그를 따르던 여인들은 감히 이 일에 나서지 못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선한 사람을 일으키사 그 일을 행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으면 그것을 행할 도구를 찾아내시기 때문이다. 요셉은 적합한 사람이었으니, [1.] 그는 그 일을 행할 만한 재력을 가졌으니,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이런 이들이야말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나라를 두루 다니기에 가장 적합하였다. 그러나 여기 재산 있는 사람을 요하는 봉사에 쓰임 받기에 합당한 부자가 한 사람 있었다. 주목하라. 세상의 재물은 비록 많은 이에게 신앙의 길에 장애가 되지만, 어떤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서는 유익과 기회가 되는 것이니, 그것을 가진 자가 함께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쓸 마음을 가졌다면 그에게 복이 있다. [2.] 그는 우리 주 예수께 잘 헌신된 사람이었으니, 비록 공개적으로 고백하지는 않았으나 그 자신이 그의 제자로서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은밀한 제자들이 있으니,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이 있었다(롬 11:4).

(3.) 빌라도에게서 시체를 받아 낸 일(마 27:58). 요셉은 빌라도에게 갔으니, 이 일에 있어서 마땅히 청해야 할 적임자였고, 시체의 처분권을 가진 자였다. 위정자의 권한이 관련된 일에서는 그 권한에 마땅한 경의를 표해야 하며, 그것을 침범하는 어떤 일도 행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하는 선한 일은 평화롭게 행해야 하며, 소란스럽게 행해서는 안 된다. 빌라도는 그 시체를 합당하게 매장할 사람에게 기꺼이 내어주려 하였으니, 이는 무죄한 사람을 정죄함으로 그의 양심이 그에게 지운 죄책에 대하여 무언가 속죄하는 일을 하려 함이었다. 요셉의 청원과 빌라도의 기꺼운 허락 가운데서, 그리스도께 영광이 돌려졌고 그의 진실성에 대한 증거가 세워졌다.

(4.) 시체에 수의(壽衣)를 입힘(마 27:59). 그는 존귀한 공회원이었으나, 보기에 그 자신이 시체를 거두어 그 수치스럽고 저주받은 나무에서 자기 팔로 받아 내린 것 같다(행 13:29).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그를 위하여 몸을 굽혀 행하는 어떤 봉사도 너무 천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거둔 후, 그는 깨끗한 세마포로 그것을 쌌으니, 당시 세마포로 장사하는 것이 통상적 관습이었고 요셉은 그것을 따른 것이다. 주목하라. 선한 사람들의 시체는 마땅히 정성껏 돌봐야 하니, 이는 부활 때에 그들을 위해 예비된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로써 그 영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증언하고, 그 시체를 더 나은 곳을 위해 예정된 것으로 여겨 싸 두어야 한다. 이 인간적인 통상의 행위도 경건한 방식으로 행해진다면, 받으실 만한 기독교적 행위가 될 수 있다.

(5.) 시체를 무덤에 안치함(마 27:60). 여기에는 세상의 권세 있는 자들이 무덤으로 인도되어 묘실에 안장되는(욥 21:32) 때에 보이는 그런 화려함이나 장엄함이 조금도 없었다. 그 나라가 보이게 임하지 아니하는 그분께는 사적인 장례가 가장 합당하였다.

[1.] 그는 빌린 무덤, 곧 요셉의 매장지에 안치되셨다. 그가 사실 때에 머리 둘 자기 집이 없으셨던 것처럼, 죽으신 후에 그의 몸을 둘 자기 무덤도 없으셨으니, 이는 그의 가난의 한 증거였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신비가 있을 수도 있다. 무덤은 죄인의 고유한 유업이다(욥 24:19). 우리가 진실로 우리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죄와 우리의 무덤밖에 없으니, 사람은 그의 흙으로 돌아간다(시 146:4). 우리가 무덤으로 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처소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죄가 없으셨던 우리 주 예수께서는 자기의 무덤도 없으셨으니, 전가된 죄 아래에서 죽으심으로 빌린 무덤에 장사되심이 합당하였다. 유대인들은 그가 그의 무덤을 악인들과 함께 두어, 그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강도들과 함께 장사되게 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관하사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무덤을 두게 하셨다(사 53:9).

[2.] 그는 새 무덤에 안치되셨으니, 요셉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마련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속히 다시 살아나실 분이 거기 누우신다고 해서 그 무덤이 조금도 못해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무덤의 성질을 바꾸어 그것을 참으로 새롭게 만드시고, 모든 성도를 위하여 그것을 안식의 침상으로, 아니 향료의 침상으로 바꾸신 그분이 거기 누우심으로 그 무덤은 크게 나아진 것이다.

[3.]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 예루살렘 근방의 땅은 대체로 바위가 많았다. 셉나도 그 부근에 바위를 깎아 자기 묘실을 만들었다(사 22:16). 섭리는 그리스도의 무덤이 견고하고 온전한 바위 속에 있도록 정하셨으니, 이는 그의 제자들이 어떤 지하 통로를 통하여 거기 접근하거나, 그 뒷벽을 뚫고 들어가 시체를 도둑질하였으리라 의심할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으려 함이었다. 왜냐하면 거기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문밖에 없었고, 그 문은 파수꾼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4.] 큰 돌을 굴려 그 무덤 문에 놓음. 이 또한 유대인들이 죽은 자를 장사할 때의 관습을 따른 것이니, 나사로의 무덤에 대한 묘사(요 11:38)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다. 이는 죽은 자들이 모든 산 자들로부터 분리되고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무덤이 그의 감옥이었다면, 이제 그 감옥 문은 잠기고 빗장이 질러진 것이다. 그들에게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 놓는 것은 우리에게 무덤을 흙으로 메우는 것과 같아서, 장례를 완결하는 일이었다. 이와 같이 침묵과 슬픔 가운데 우리 주 예수의 보배로운 몸을 무덤, 곧 모든 산 자에게 정해진 집에 안치한 후, 그들은 더 이상의 의식 없이 떠나갔다. 우리 그리스도인 벗들의 장례에서 가장 애처로운 정황은, 그들의 몸을 어둡고 적막한 무덤에 누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며 그들을 뒤에 남겨 두는 일이다. 그러나 아아, 집으로 돌아가 그들을 뒤에 남겨 두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아니, 도리어 더 나은 본향으로 가서 우리를 뒤에 남겨 둔 것은 그들이다.

(6.) 장례에 참여한 무리. 그것은 매우 적고 보잘것없었다. 여기에는 상복을 입고 관을 따르는 친족도 없었고, 그 엄숙함을 빛낼 격식도 없었으며, 오직 참된 애곡자인 몇몇 선한 여인들—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마 27:56)가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그를 십자가까지 따랐던 것처럼 그를 무덤까지 따랐으니, 마치 슬픔에 잠기기로 작정한 듯 무덤을 향하여 앉았다. 이는 행해진 일을 보고 눈을 채우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눈물의 강물로 눈을 비우려 함이었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사랑은 우리로 끝까지 그를 따르게 한다. 죽음 그 자체도 그 신적인 불을 끄지 못하는 것이다(아 8:6,7).

II. 그의 원수들은 그의 부활을 막으려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였다. 그들이 이 일에서 행한 것은 예비일 다음 날에 있었다(마 27:62). 그날은 한 주의 일곱째 날, 곧 유대인의 안식일이었으나, 명시적으로 그렇게 일컬어지지 않고 이러한 우회적 표현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이제 머지않아 그 이튿날부터 시작될 기독교의 안식일에 자리를 내어주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1. 그날 온종일 그리스도는 무덤에 죽어 누워 계셨다. 엿새 동안 수고하여 그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며 평안을 누리신 것이다. 2. 그날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마땅히 그들의 예배에 임하여 지난 한 주간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했음에도, 도리어 무덤을 단속하는 일로 빌라도와 거래하며 그들의 죄에 패역을 더하고 있었다. 그날에 행하신 가장 큰 자비의 일들을 두고 그리스도와 그토록 자주 다투던 그들이, 정작 자신들은 가장 큰 악의의 일에 분주하였다. 여기서 살펴보라.

(1.) 그들이 빌라도에게 나아간 일. 그들은 시체가 그것을 합당하게 매장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을 분히 여겼으나, 기왕 그리되었으므로 무덤에 경비병을 세워 주기를 구한 것이다.

[1.] 그들의 청원은 저 유혹하던 자(진리 자체이신 분을 그들은 이렇게 불렀다)가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말한 것을 밝힌다. 그가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의 제자들은 자기 믿음의 확증을 위하여 바로 그 말씀을 기억하였으나, 그의 박해자들은 그들의 분노와 악의를 돋우기 위하여 그것을 기억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동일한 말씀이 한쪽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향기가 되었고, 다른 쪽에게는 사망에서 사망으로 이르는 향기가 되었다. 보라, 그들이 그리스도를 유혹하던 자라는 칭호로 비방하면서, 빌라도에게는 주여라는 칭호로 아첨하는 모습을. 이와 같이 선한 사람들을 가장 악의적으로 중상하는 자들이 흔히 권세 있는 자들에게는 가장 비굴한 아첨꾼이 되는 법이다.

[2.] 그것은 또한 그들의 시기심을 드러낸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그를 도둑질하여 가고 그가 다시 살아났다 할까 하는 것이었다.

첫째로, 그들이 실제로 두려워한 것은 그의 부활이었다. 그리스도의 가장 큰 영광이요 그 백성의 기쁨인 것이, 그의 원수들에게는 가장 큰 공포가 되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을 그에 대해 격분케 한 것은 그가 일어나 그들을 다스리게 되리라는 예표였으며(창 37:8), 그들이 그를 대적하여 행한 모든 일에서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르되, 자, 그를 죽이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자 하였다. 이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예언을 좌절시키려고 애쓰며, 다윗의 원수들이 그에 대해 말하던 것처럼(시 41:8) 이르되, 그가 이제 누웠으니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였다. 만일 그가 일어나신다면 그것은 그들의 모든 계획을 깨뜨릴 것이었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자기 목적을 이루었을 때에도 여전히 그것을 다시 잃을까 두려워한다. 아마도 제사장들은 두 명의 존귀한 공회원인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리스도의 시체에 표한 존경에 놀랐을 것이며, 그것을 불길한 징조로 여겼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를 그토록 당혹하게 했던, 그가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일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척한 것은, 혹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그를 도둑질하여 갈까 하는 것이었으니, 이는 매우 일어남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1. 그들은 그가 살아 계실 때, 그에게도 자기들에게도 참된 유익이 될 수 있었던 그때에도 그를 공언할 용기가 없었거늘, 그의 죽음이 그러한 겁쟁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2. 그들이 그의 몸을 도둑질하여 사람들로 그가 살아났다고 믿게 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무슨 유익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그가 살아나지 못하여 스스로 속이는 자임이 증명된다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의 보상을 의지하여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그의 제자들이야말로 그 어떤 자보다도 그 속임수로 가장 큰 손해를 입을 것이요, 도리어 그의 이름에 첫 돌을 던질 이유를 가졌을 것이다. 자신들을 스스로 속이는 사기를 행하여 그의 몸을 도둑질하고 그가 살아났다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만일 그가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그들의 믿음은 헛것이요, 그들은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이다. 대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교리가 한 번 전파되어 믿어진다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염려하였으니, 이는 속담식 표현으로, "우리가 다 패하고 다 망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 이상의 뜻은 아니다. 그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그의 설교와 기적을 묵인한 것이 자기들의 잘못이었다고 여겼고, 그를 죽임으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그의 부활을 확신하게 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다시 그르치게 할 것이며, 그의 세력은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요, 그를 그토록 잔인하게 죽인 그들의 세력은 필연코 가라앉아야 할 것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대적하는 자들은 그들의 시도가 좌절될 뿐 아니라, 자신들이 비참하게 빠지고 얽매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그들의 잘못은 갈수록 더 심해지고 마지막 잘못이 가장 심하리라(시 2:4,5).

[3.] 이를 고려하여 그들은 무덤을 사흘까지 경비하게 해 주기를 겸손히 청한다. 명령하여 그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하소서. 빌라도는 여전히 그들의 종노릇을 해야 했고, 그의 행정권과 군사권이 모두 그들의 악의에 봉사하도록 동원되어야 했다. 죽음의 죄수에게는 다른 파수꾼이 필요 없으며 무덤 그 자체로 충분한 보장이 되리라 여길 법하건만, 주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함에 있어 자기 양심에 죄책과 무력함을 둘 다 의식하는 자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2.) 이 청원에 대한 빌라도의 대답(마 27:65).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너희 힘대로, 할 수 있는 대로 굳게 지키라. 그는 그리스도의 친구들에게는 시체를 허락함으로, 그의 원수들에게는 거기에 경비병을 세움으로 양쪽을 기꺼이 만족시키려 하였으니, 모든 편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두고 그토록 찬반양론으로 야단법석을 떠는 양쪽을 속으로 비웃으며, 한쪽의 소망과 다른 쪽의 두려움을 똑같이 우스꽝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그가 의미한 것은 안토니아 망대에 늘 두던 상비 경비대였으니, 그는 그들이 이 목적을 위하여 원하는 대로 그 중에서 인원을 빼내는 것을 허락하면서도, 마치 자신이 그런 일에 직접 관여하는 것이 부끄러운 듯이 그 처리를 온전히 그들에게 맡겼다. 내 생각에 그 말, 너희 힘대로 굳게 지키라는 것은 일종의 조롱으로 보이는데, 이는 [1.] 그들의 두려움에 대한 조롱이거나—"죽은 사람을 단단히 지키도록 강한 경비대를 세우라"—혹은 도리어 [2.] 그들의 기대에 대한 조롱일 것이다—"너희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짓을 해 보라. 너희 지혜와 힘을 다해 시험해 보라.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로 났다면 너희와 너희 모든 경비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어나실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때쯤 빌라도는 그의 부하 백부장과 모종의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니, 그가 그토록 내키지 않게 정죄한 그 의인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그에게 물어보았을 법하다. 그리고 그 백부장은 빌라도에게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는 결론에 이르게 할 만한 그 사정의 보고를 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그를 유혹하던 자라 부르는 그 악의에 찬 제사장 천 명보다 그 백부장의 말을 더 신뢰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빌라도가, 그토록 최근에 바위를 갈라지게 하고 땅을 진동케 하신 분에 대해 무덤을 단속하려는 그들의 계획을 은근히 비웃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터툴리아누스는 빌라도에 관하여 말하기를, Ipse jam pro suâ conscientiâ Christianus—"그 양심에 있어서는 그가 이미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하였다. 그가 백부장의 보고로 인하여 이때 그러한 확신 아래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아그립바나 벨릭스처럼 끝내 온전히 설득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았다.

(3.) 이에 그들이 무덤을 단속하려고 기울인 놀라운 정성(마 27:66). 그들은 돌을 인봉하였으니, 아마도 그들의 산헤드린의 큰 인장으로 하였을 것이며, 이로써 그들의 권위를 끌어들였으니, 누가 감히 공인(公印)을 깨뜨리겠는가? 그러나 거기에만 너무 의지하지 않고, 함께 경비병을 세워 그의 제자들이 와서 그를 도둑질하여 가지 못하게 하고, 가능하다면 그가 무덤에서 나오시지 못하게 막으려 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의도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로부터 이 선한 일을 이끌어 내셨으니, 곧 그의 부활을 막도록 세워진 자들이 도리어 그로 인해 그것을 목격할 기회를 얻어 그렇게 하였고, 그들이 목격한 바를 대제사장들에게 고함으로 그 대제사장들로 더욱 변명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 땅과 지옥의 모든 권세가 결탁하여 그리스도를 죄수로 가두어 두려 하였으나, 그의 때가 이르매 모두 헛수고였다. 죽음과 그 죽음의 모든 아들들과 상속자들이 그때에는 더 이상 그를 붙들 수 없었고, 더 이상 그를 다스릴 수 없었다. 가련하고 연약한 제자들로부터 무덤을 지키려 한 것은 불필요한 것이었기에 어리석은 일이었고, 하나님의 권능으로부터 그것을 지키려 한 것은 열매 없고 무익한 것이었기에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지혜롭게 처신했다고 여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