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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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²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여기에는 이 설교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이 제시된다.
I. 설교자는 우리 주 예수, 곧 설교자들의 으뜸이며 교회의 위대한 선지자로서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다. 선지자들과 요한도 설교에서 훌륭히 행했지만, 그리스도는 그들 모두를 능가하셨다. 그는 만세 전에 아버지 품에 계셔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아신 영원한 지혜이며(요 1:18),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말씀하신 영원한 말씀이다. 앞 장 끝에 기록된 갈릴리의 많은 기적적 치유는 이 설교의 길을 예비하고, 신적 권능과 선하심이 그토록 풍성히 나타난 분의 교훈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설교는 아마도 그가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파하신 말씀의 요약이었을 것이다. 그 본문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 이 설교는 본문의 앞부분, 곧 회개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회개는 판단과 실천 모두를 개혁하는 일이며, 그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는 질문(말 3:7)에 답하여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후에는 여러 비유로 천국이 무엇과 같은지를 밝히며 본문의 뒷부분을 설교하셨다(마 13:1-52).
II. 장소는 갈릴리의 한 산이었다.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는 이 일에서도 편의를 거의 누리지 못했다. 머리 둘 곳이 없었던 것처럼 설교할 마땅한 장소도 없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안락과 명예와 위엄을 갖춘 모세의 자리에 앉아 율법을 부패시켰지만, 진리의 위대한 교사이신 주 예수는 광야로 내몰려 평범한 산보다 나은 강단을 얻지 못했다. 그것은 거룩한 산이나 시온의 산도 아니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복음 아래에서는 율법 아래에서처럼 장소 자체를 구별하여 거룩하게 여기지 않으며, 단정하고 합당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어디서든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암시하셨다. 율법의 해설인 이 설교가 산에서 선포된 것은 율법도 산에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법을 엄숙히 공포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율법이 주어질 때 주께서는 산에 내려오셨지만, 이제는 산에 올라가셨다. 그때는 우레와 번개 가운데서, 이제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그때 백성은 멀리 서야 했지만 이제는 가까이 오도록 초청받았다. 얼마나 복된 변화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이 그의 영광이라면, 복음의 영광은 더욱 뛰어나다. 은혜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기 때문이다(고후 3:7; 히 12:18 이하). 갈릴리의 두 지파 스불론과 잇사갈에 관해서도 그들이 백성을 산으로 부르리라고 예언되었다(신 33:19). 우리는 이 산으로 불려 와 의의 제사를 드리는 법을 배운다. 이곳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그의 길을 가르치신 여호와의 산이었다(사 2:2,3; 미 4:1,2).
III. 청중은 부르심을 받고 그에게 나아온 제자들이었다(막 3:13; 눅 6:13). 다른 사람들은 주로 치유를 바라며 따랐지만, 제자들은 사랑하고 배우기 위해 따랐으므로 그는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그들이 기꺼이 가르침을 받고—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그의 길을 가르치신다—다른 이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교훈을 깨달으며, 장차 다른 이들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 진리를 분명하고 구별되게 알아야 했다. 이 설교가 명하는 의무는 그들이 세우도록 보내심을 받은 천국에 들어가 그 유익을 얻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양심껏 행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 강론은 제자들을 향했어도 무리가 듣는 가운데 선포되었다. 마 7:28은 무리가 놀랐다고 한다. 시내 산 둘레에 세웠던 경계와 달리(출 19:12), 이 산에는 백성을 물리치는 경계가 없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말할 뿐 아니라 그에게서 말씀을 듣기 위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 설교에서 무리도 염두에 두셨다. 기적에 대한 소문으로 큰 군중이 모이자 그들을 가르칠 기회로 삼으셨다. 많은 물고기가 있는 곳에 복음의 그물을 던져 얼마라도 잡히기를 바라는 일은 신실한 사역자에게 격려가 된다. 무리를 보는 일은 설교자에게 활력을 주지만, 그 활력은 자기 칭찬이 아니라 그들의 유익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IV. 앉으시니라는 말은 이 설교의 엄숙함을 암시한다. 그리스도는 때에 따라 대화 형식으로 자주 설교했지만, 이것은 정식으로 마련된 설교였다. 카티산토스 아우투(kathisantos autou), 곧 사람들이 가장 잘 들을 수 있도록 자리를 잡으셨다. 그는 재판관과 입법자처럼 앉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일을 침착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말하고 들어야 함을 나타낸다. 그는 연단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의 부패한 교리라는 찌꺼기를 제거하리라는 성경을 이루기 위해 앉으셨고(말 3:3), 보좌에 앉아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처럼 앉으셨다(시 9:4). 그가 하신 말씀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입을 여시니는 욥 3:1에서처럼 말한다는 뜻의 히브리식 우언법일 뿐이지만, 어떤 이들은 이 표현도 강론의 엄숙함을 나타낸다고 본다. 큰 회중을 위해 목소리를 평소보다 높이셨다는 뜻이다. 그는 오래도록 종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고 그들의 입을 여셨지만(겔 3:27; 24:27; 33:22), 이제 친히 입을 열어 권위 있는 자처럼 자유롭게 말씀하셨다. 한 고대 교부는 그리스도께서 입을 열지 않고도 거룩하고 모범적인 삶으로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고 설명한다. 또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입을 열지 않으셨을 때도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제 입을 열어 가르치심으로 잠 8:1,2,6을 이루셨다. 지혜가 높은 곳 꼭대기에서 부르지 아니하느냐? 그 입술을 여는 것이 정직한 것을 내느니라. 그는 약속대로 그들을 가르치셨다.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사 54:13). 이를 위해 그는 학자의 혀(사 50:4)와 주의 영(사 61:1)을 가지셨다. 그들이 미워해야 할 악과 머물며 풍성히 행해야 할 선을 가르치셨다. 기독교는 사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성품과 생활의 방향을 규율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때는 개혁의 때이며(히 9:10), 우리는 복음으로 개혁되어 선하게 되고 더 나아져야 한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는 경건에 관한 진리이다(딛 1:1).
³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⁵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⁶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⁷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⁹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¹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¹¹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¹²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설교를 복으로 시작하신다. 이는 그분이 우리를 복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행 3:26). 그분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큰 대제사장으로서, 복된 멜기세덱으로서,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그분 안에서 복을 받게 될 그분으로서 오셨다(창 12:3). 그분은 단지 우리를 위하여 복을 사 두려고만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복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고 선포하시려고 오셨다. 여기서 그분은 권위 있는 자처럼, 그 복 곧 영생을 명령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그 일을 행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여기서 선한 자들에게 거듭거듭 약속된 복이다. 그분이 그들을 복되다고 선언하시매 그들이 복되게 되는 것이니, 그분이 복 주시는 자들은 참으로 복된 자들이다. 구약은 저주로 끝났으나(말 4:6), 복음은 복으로 시작한다. 이는 우리가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려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여기 선포하시는 각 복은 두 가지 의도를 담고 있다. 1. 누가 참으로 복되다고 여겨져야 하는지, 그들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2.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곧 특정한 성품을 지닌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들 안에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니, 그 약속이 성취되면 그들은 복되게 될 것이다. 자, 이제,
1. 이것은 눈멀고 육적인 세상의 파멸적인 오류를 바로잡으려고 의도된 것이다. 복됨이란 사람들이 추구한다고 자처하는 바로 그것이다. 누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보이리요?(시 4:6).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목표를 잘못 알고 행복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형성한다. 그러니 그들이 길을 놓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미혹을 택하고 그림자를 좇는다. 일반적인 견해는 이러하다. 복 있는 자는 세상에서 부하고 위대하며 존귀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즐거움 가운데 날을 보내고 쾌락 가운데 해를 보내며, 기름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며, 높은 손으로 모든 일을 휘어잡고, 모든 곡식 단이 자기 곡식 단에게 절하게 한다. 형편이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는 것이다. 그들의 계획과 목표와 의도도 이에 따라 정해진다. 그들은 탐욕을 부리는 자를 축복하며(시 10:3), 부하려 한다. 이제 우리 주 예수께서 오셔서 이 근본적인 오류를 교정하시고, 새로운 명제를 제시하시며, 복됨과 복된 사람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을 우리에게 주시려 한다. 이것은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아무리 역설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자체로는, 또 구원에 이르도록 조명을 받은 모든 자에게는, 영원한 진리와 확실성의 규범이요 교훈이며, 우리가 머지않아 그것으로 심판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훈의 시작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실천의 시작은 마땅히 이 격언들에서 행복의 척도를 취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추구를 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2.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낙심을 제거하려고 의도된 것이다. 곧 그분의 복음은 은사와 은혜와 위로와 유익함에서 뛰어난 자들만을 복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면 그 나라의 영광과 특권 안에서 복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려는 것이다.
3. 이것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초대하고, 그분의 율법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갈 길을 예비하려고 의도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복들을 선포하시되, 설교의 끝에서 백성을 돌려보내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설교의 시작에서 그분이 더 하실 말씀에 그들을 준비시키려고 하셨다. 이는 우리에게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을 떠올리게 한다. 그 위에서 율법의 복과 저주가 낭독되었다(신 27:12 이하). 거기서는 저주가 분명히 표현되고 복은 암시될 뿐이었으나, 여기서는 복이 분명히 표현되고 저주는 암시된다. 두 경우 모두 생명과 사망이 우리 앞에 제시되나, 율법은 우리를 죄에서 억제하기 위한 죽음의 직분으로 더 많이 나타났고, 복음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한 생명의 경륜으로 나타났으니, 오직 그분 안에서만 모든 선한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은혜로운 치유를 본 자들(마 4:23,24)이, 이제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은 그분이 한결같으시며 사랑과 온유로 이루어진 분이라고 말할 것이다.
4.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 조항들을 확정하고 요약하려고 의도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토록 짧은 말로, 이토록 정확히 서로 호응하여 충만히 제시된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도록 요구받는 복음이다. 믿음이란 이 성품들에 부합하는 것이요 이 약속들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행복에 이르는 길이 여기 열려 있고 대로가 되었다(사 35:8). 그리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왔으니, 우리가 씨앗과 열매를, 곧 요구된 은혜와 약속된 영광을 모두 그분에게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받게 됨이 암시된다. 하나님과 타락한 사람 사이에는 그분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아무것도 오가지 않는다. 더 지혜로운 일부 이방인들은 나머지 인류와는 다른, 우리 구주의 이 가르침을 향한 복됨의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 세네카는 복된 사람을 묘사하면서, 정직하고 선한 사람만이 그렇게 불릴 수 있음을 밝힌다. (《행복한 삶에 관하여》De vita beata 4장.) Cui nullum bonum malumque sit, nisi bonus malusque animus—Quem nec extollant fortuita, nec frangant—Cui vera voluptas erit voluptatum comtemplio—Cui unum bonum honestas, unum malum turpitudo.—그 판단에 있어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선하거나 악하지 않은 자, 어떤 일도 그를 들뜨게 하거나 낙심하게 하지 못하는 자, 그의 참된 즐거움이 쾌락을 멸시하는 데 있는 자, 그에게 유일한 선은 덕이요 유일한 악은 악덕인 자.
우리 구주께서는 여기서 복된 사람의 여덟 가지 특성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주요한 은혜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 각각에 대하여 현재의 복이 선포되니, 복이 있나니 그들이라 하는 것이며, 또 각각에 대하여 미래의 복이 약속되는데, 이는 권장된 은혜나 의무의 성격에 맞도록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러면 우리가 누가 복된 자인지 묻는가? 이에 대하여 답하노니,
I.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되다(마 5:3). 사람을 복되게 하기는커녕 죄요 올무가 되는 심령의 가난함이 있으니, 곧 비겁함과 비열한 두려움, 그리고 사람들의 정욕에 기꺼이 굴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심령의 가난함은 영혼의 은혜로운 성향으로서, 이로써 우리가 자아에서 비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게 된다. 심령이 가난하다 함은, 1. 만족하며 가난하게 되는 것, 곧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의 분깃으로 정하신다면 세상의 부에서 기꺼이 비워지는 것이다. 우리의 형편이 낮을 때 우리의 마음을 그 형편에 맞추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는 가난하나 심령은 높아서, 가난하면서도 교만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며 자기 분깃을 탓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가난에 우리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며,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한다(빌 4:12). 우리를 가난에 두신 하나님의 지혜를 인정하면서, 우리는 그 가운데서 평안하며, 그 불편을 인내로 견디고,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며, 있는 것을 최선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는 세상의 모든 부에 초연하여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요, 가장 번성한 처지에서도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손실과 실망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이는 교만이나 가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내버려 스스로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특히 로마 교회의 사람들처럼, 청빈을 서원하면서도 여러 나라의 부를 독점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다만 우리가 세상에서 부하더라도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 곧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을 낮추고, 그들의 연약함을 느끼는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아파해야 한다. 우리는 가난을 예상하고 그에 대비해야 하며, 그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도리어 환영해야 한다. 특히 선한 양심을 지키느라 가난이 우리에게 임할 때 더욱 그러하다(히 10:34). 욥은 주실 때뿐 아니라 거두실 때도 하나님을 송축하였으니, 심령이 가난한 자였다. 2. 자기 자신의 눈에 겸손하고 낮은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다 함은 우리 자신에 대해, 곧 우리가 무엇이며 무엇을 가졌고 무엇을 행하는지에 대해 비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가난한 자는 종종 편안한 자와 교만한 자에 대비되는, 겸손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는 우리 자신에 대한 견해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니, 곧 약하고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것이다(마 18:4; 19:14). 라오디게아는 영적으로 가난하여 곤고하고 가련하게 가난하였으나, 심령으로는 부유하여, 재물이 늘어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계 3:17). 반면에 바울은 영적으로 부유하여 은사와 은혜에서 대부분의 사람보다 뛰어났으나, 심령으로는 가난하여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며, 자기 생각에는 아무것도 아닌 자였다. 이는 거룩한 멸시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며,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그들을 높이고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이는 선을 행하기 위하여 기꺼이 우리 자신을 값싸고 천하며 작게 만드는 것이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우리는 비천하며, 그분은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악되며, 그분은 모든 것이시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닐 뿐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못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악함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서 또 그분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3. 우리 자신의 의와 힘에 대한 모든 신뢰에서 떠나,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고,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는 그리스도의 영과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세리가 불쌍한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던 그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바로 이 심령의 가난함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에, 항상 하나님의 문 앞에서 구걸하기에, 항상 그분의 집에 매달려 있기에, 우리 자신을 가난하다 일컬어야 한다.
자, (1.) 이 심령의 가난함은 그리스도인의 은혜들 가운데 첫째로 놓인다. 철학자들은 겸손을 도덕적 덕목 가운데 꼽지 않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첫째로 놓으신다. 자기 부인은 그분의 학교에서 배워야 할 첫 교훈이요, 심령의 가난함은 첫째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 다른 모든 은혜의 기초가 겸손 안에 놓인다. 높이 세우려는 자는 낮게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복음의 은혜가 영혼에 들어오기 위한 탁월한 준비이니, 그것은 씨앗을 받아들이도록 토양을 마련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곧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니,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얻을 것이다.
(2.) 그들은 복되다. 그들은 이제,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 하나님이 그들을 은혜로이 바라보신다. 그들은 그분의 작은 자들이요, 그들에게는 자기들의 천사가 있다. 그분은 그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 그들은 가장 평안한 삶을 살며, 자신에게도 또 주위의 모든 이에게도 편안하며, 그 무엇도 그들에게 거슬리지 않는다. 반면에 높은 심령은 항상 불안하다.
(3.)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 은혜의 나라는 이러한 자들로 이루어진다. 오직 그들만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되기에 합당하니, 그 교회는 가난한 자의 회중이라 불린다(시 74:19). 영광의 나라가 그들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다. 이같이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실 때 그분께 순응하는 자들은 이같이 높아질 것이다. 위대하고 높은 심령들은 땅의 나라들의 영광을 가지고 가나, 겸손하고 온유하며 순복하는 영혼들은 천국의 영광을 얻는다. 우리는 부유하여 그 부로 선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 의심할 바 없이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는 그들이 장래를 위하여 좋은 보증을 쌓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을 행할 만한 것이 없는 가난한 자는 어찌해야 하는가? 보라, 만족하며 가난한 자들에게도 유익하게 부유한 자들과 똑같은 행복이 약속되어 있다. 내가 그분을 위하여 기꺼이 쓸 수 없을지라도, 내가 그분을 위하여 기꺼이 없이 지낼 수만 있다면, 그것마저도 보상받을 것이다. 그러니 그렇다면 우리가 섬기는 분은 선한 주인이 아니신가?
II. 애통하는 자가 복되다(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은 또 하나의 이상한 복이며, 앞의 것에 적절히 뒤따른다. 가난한 자는 애통하는 데 익숙하고, 은혜로이 가난한 자는 은혜로이 애통한다.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가 복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친히 크게 애통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신다. 복됨을 대적하는 죄악된 애통이 있으니, 곧 세상 근심이다. 이는 영적인 일로 인한 절망적 우울과, 세상일로 인한 위로받지 못하는 슬픔이다. 또한 본성적인 애통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함께 역사하여 우리가 애통하는 그 고난을 우리에게 거룩하게 만드시면 복됨의 벗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복됨에 합당하게 하는 은혜로운 애통이 있으니, 이는 습관적인 진지함이요, 즐거움에 대해 죽은 마음이요, 실제적인 슬픔이다. 1.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의 애통이니, 이것이 경건한 슬픔이요 하나님을 따르는 슬픔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죄로 인하여 슬퍼하는 것이다(슥 12:10). 회개의 삶을 사는 자들, 곧 자기 본성의 부패와 자신의 많은 실제 범죄와 하나님이 자기에게서 떠나심을 슬퍼하는 자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른 이들의 죄로 인하여도 애통하며 그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들(겔 9:4)이 하나님의 애통하는 자들이다. 2. 다른 이들의 고난에 대한 동정의 애통이니,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의 애통이요, 성회로 말미암아, 시온의 황폐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는(습 3:18; 시 137:1) 자들의 애통이다. 특히 멸망하는 영혼들을 긍휼히 바라보며,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두고 우셨듯이 그들을 두고 우는 자들의 애통이다.
자, 이 은혜로이 애통하는 자들은, (1.) 복되다. 헛되고 죄악된 웃음 가운데서도 마음은 슬프듯이, 은혜로운 애통 가운데서는 마음이 진지한 기쁨을, 곧 타인은 참여하지 못하는 은밀한 만족을 누린다. 그들은 복되니, 이는 그들이 슬픔의 사람이셨던, 또 우리가 웃으셨다는 기록은 결코 읽지 못하나 우셨다는 기록은 자주 읽는 주 예수와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헛된 즐거움에 따르는 많은 유혹에 대비하여 무장되어 있으며, 인 치신 사면과 확정된 평강의 위로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2.)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 비록 그들이 즉시 위로받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의 위로를 위한 풍성한 준비가 마련되어 있다. 그들을 위하여 빛이 뿌려져 있으며, 하늘에서는 분명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니, 나사로와 같다(눅 16:25). 주목하라. 하늘의 행복은 온전하고 영원히 위로받는 데 있으며,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심에 있다. 그것은 우리 주인의 즐거움이요, 충만한 기쁨이며 영원한 즐거움이니, 이 경건한 슬픔으로 그것을 위해 준비된 자들에게는 곱절로 달콤할 것이다. 애통하며 그리로 가는 자들에게는 하늘이 참으로 하늘이 될 것이다. 그것은 기쁨의 추수요, 눈물의 파종기의 결실이며(시 126:5,6), 눈물 골짜기를 지나야 이르게 되는 기쁨의 산이다. 사 66:10을 보라.
III. 온유한 자가 복되다(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하나님께, 곧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매에 자신을 조용히 복종시키는 자들이요,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그분의 뜻에 순응하는 자들이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한 자들이다(딛 3:2). 그들은 자극을 받아도 그로 인해 격분하지 않으며, 잠잠하거나 부드러운 대답을 돌려보내는 자들이다. 또한 필요한 경우에는 무례함에 빠지지 않고도 자기 노여움을 드러낼 수 있는 자들이요, 다른 이들이 뜨거울 때 냉정할 수 있는 자들이며, 다른 어떤 것도 거의 지키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자기 인내 속에서 자기 영혼을 지키는 자들이다. 좀처럼 또 어렵게 자극을 받으나 빠르고 쉽게 가라앉으며, 자기 심령을 다스려 한 번의 모욕을 보복하기보다 스무 번의 해를 차라리 용서하려는 자들이 온유한 자들이다.
이 온유한 자들은 여기서, 이 세상에서조차 복된 자로 나타난다. 1. 그들은 복되니, 이는 특별히 그들이 그분에게서 배워야 할 바로 그 점에서(마 11:29) 복되신 예수와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노여움의 주인이시며 그 안에 분노가 없으신 복되신 하나님 자신과 같다. 그들은 복되니, 자신과 자기 친구와 자기 하나님을 가장 평안하고 흔들림 없이 누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관계와 형편에도, 어떤 무리에도 적합하며, 살기에도 적합하고 죽기에도 적합하다. 2.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이는 시 37:11에서 인용된 것이며, 신약 전체에서 거의 유일하게 명시적인 현세적 약속이다. 그들이 항상 땅의 많은 것을 가지리라는 것도, 더욱이 오직 그것만으로 떠나보내지리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경건의 이 한 가지는 특별한 방식으로 현세의 생명의 약속을 지닌다. 온유함은 아무리 조롱당하고 멸시당할지라도, 이 세상에서조차 우리의 건강과 부와 평안과 안전을 증진하는 실제적인 경향이 있다. 온유하고 조용한 자들이 비뚤어지고 소란한 자들에 비하여 가장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이 관찰된다. 또는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그들이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니, 곧 하늘의 모형인 가나안 땅이다. 그리하여 위로는 하늘의 모든 복됨과 아래로는 땅의 모든 복이 온유한 자의 분깃이 된다.
IV.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되다(마 5:6). 어떤 이들은 이것을, 사람을 침해와 부당함에 노출시킬 뿐 아니라 정의를 이루려 애써도 헛되게 만드는, 우리의 외적인 가난과 이 세상에서의 낮은 처지의 또 하나의 사례로 이해한다. 그들은 그것에 주리고 목말라하나, 그들을 압제하는 자들의 편에 권세가 있어 그것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오직 공정하고 합당한 것만을 원하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사람을 무시하지도 않는 자들에 의해 그것이 거부된다. 이는 슬픈 형편이로다! 그러나 그들이 선한 양심을 위하여 또 선한 양심을 지니고 이 고난을 당한다면 그들은 복되다. 그들로 하여금, 정의가 이루어지게 하시고 옳음이 행해지게 하시며 가난한 자를 압제자에게서 건지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라(시 103:6). 압제를 만족히 견디며 조용히 자기 사정을 하나님께 맡겨 변론하시게 하는 자들은, 때가 되면 만족하게, 풍성히 만족하게 될 것이니, 그분이 그들을 위해 나타나심 가운데 드러내실 지혜와 인자하심 안에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니, 곧 그러한 대상에 귀결됨으로써 은혜로운, 영혼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며, 신적 은총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게 하는 그런 갈망을 가리킨다. 1. 여기서 의는 모든 영적인 복을 가리킨다. 시 24:5; 마 6:33을 보라. 이 복들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값 주고 사진 것이요,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우리에게 전달되고 보증되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확증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의가 되시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 전인이 의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 그리스도와 그 약속들 안에 분깃을 가지는 것—이것이 의다. 2. 우리는 이것들에 주리고 목말라해야 한다. 우리는, 주리고 목마른 자가 음식과 음료를 갈망하듯이, 곧 음식과 음료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으며 다른 것이 없어도 그것으로 만족할 자처럼, 그것들을 참되고 진실하게 갈망해야 한다. 영적인 복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간절하고 절박해야 한다. "이것들을 내게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나이다. 다른 모든 것은 찌꺼기요 쭉정이며 만족을 주지 못하나이다. 이것들을 내게 주소서, 그러면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내게 족하나이다." 주림과 목마름은 자주 되돌아와 새로운 채움을 구하는 식욕이니, 이 거룩한 갈망도 이미 얻은 어떤 것에 머물지 않고, 거듭되는 사면과 날마다의 새로운 은혜 공급을 향해 나아간다. 살아난 영혼은, 산 몸이 음식을 구하듯이, 마땅히 매일의 일을 그날에 행할 은혜를, 곧 의의 끊임없는 양식을 구한다.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공급을 위해 수고할 것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복을 갈망할 뿐 아니라 정해진 수단을 사용하여 그것을 위해 애써야 한다. 해먼드 박사(Dr. Hammond)는 그의 《실천 교리문답》(Practical Catechism)에서 주림과 목마름을 구분한다. 주림은 지탱해 주는 양식에 대한 갈망이니, 성화시키는 의와 같은 것이다. 목마름은 새롭게 해 주는 음료에 대한 갈망이니, 칭의의 의와 우리의 사면에 대한 깨달음과 같은 것이다.
영적인 복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그 갈망 가운데 복되며, 또 그 복들로 배부르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그 갈망 가운데 복되다. 비록 은혜에 대한 모든 갈망이 다 은혜는 아닐지라도(가장된, 희미한 갈망은 아니다), 이러한 갈망은 은혜다. 이는 무언가 선한 것의 증거요, 무언가 더 나은 것의 보증이다. 이는 하나님이 친히 일으키신 갈망이니, 그분은 자기 손으로 행하신 일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영혼은 무언가를 주리고 목말라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만족을 주고 속이지 않는 올바른 대상을 붙드는 자들은 복되며, 땅의 티끌을 사모하지 않는 자들도 복되다(암 2:7; 사 55:2). (2.) 그들은 그 복들로 배부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만족을 완전하게 하시려고 그들이 갈망하는 것을 주실 것이다. 영혼을 채우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니, 그분의 은혜와 은총은 영혼의 정당한 갈망에 합당하다. 그분은 자기 자신의 비어 있음을 깨닫고 그분의 충만하심에 의지하는 자들을 은혜 위에 은혜로 채우실 것이다. 그분은 주린 자를 채우시며(눅 1:53), 만족하게 하신다(렘 31:25). 하늘의 행복은 분명히 영혼을 채울 것이니, 그들의 의가 완전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과 그분의 형상이 둘 다 온전한 완성에 이를 것이다.
V.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되다(마 5:7). 이것도 나머지와 마찬가지로 역설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지도 않으며, 가장 부유한 자가 될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복되다고 선언하신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경건히 또 자비롭게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돕고 구원하려는 마음이 기울어진 자들이다. 후히 베풀거나 너그럽게 줄 만한 것이 없는 자라도 참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일 수 있으니, 그럴 때 하나님은 그 자원하는 마음을 받으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난을 인내로 견뎌야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동정심으로 우리 형제들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보여야 하며(욥 6:14), 긍휼의 심장을 입어야 한다(골 3:12). 또 그것을 입었으면, 어떤 식으로든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돕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베푸는 데로 그 마음이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도와야 하니, 무지한 자를 불쌍히 여겨 가르치고, 부주의한 자를 불쌍히 여겨 경고하며, 죄의 상태에 있는 자를 불 가운데서 타는 막대기처럼 끌어내야 한다. 우리는 우울과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 위로해야 하며(욥 16:5), 우리가 그들을 이길 만한 자들에게는 가혹하고 엄격하지 말아야 하고, 궁핍한 자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채워 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를 거절한다면, 무슨 핑계를 대든지 우리는 우리의 긍휼의 심장을 닫는 것이다(약 2:15,16; 요일 3:17).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줌으로 네 심령을 펼쳐라(사 58:7,10). 아니,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도 돌보느니라.
자, 긍휼히 여기는 자에 관하여는. 1. 그들은 복되다. 구약에서도 이같이 말하였으니, 가난한 자를 돌보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41:1). 이 점에서 그들은 인자하심이 영광이신 하나님을 닮는다. 그분이 긍휼히 여기시는 것같이 긍휼히 여김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분량대로 그분이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증거다. 또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도구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만족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고상한 즐거움 중의 하나가 바로 선을 행하는 즐거움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이 말씀 안에는, 그렇지 않았다면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었을 그리스도의 말씀, 곧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말씀이 담겨 있다. 2.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곧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사람들에게서 긍휼을 받을 것이다. 남에게 물을 대는 자는 자기도 물을 받을 것이다(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곧 친절을 필요로 하게 될지 알지 못하므로 마땅히 친절해야 한다). 그러나 특히 하나님께 긍휼을 받을 것이니, 이는 그분이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긍휼히 여기는 자로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18:25). 가장 긍휼히 여기고 자비로운 자라도 공로를 자처할 수는 없고 긍휼로 피해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면하시는 긍휼(마 6:14), 공급하시는 긍휼(잠 19:17), 붙드시는 긍휼(시 41:2), 그날에 베푸시는 긍휼(딤후 1:18)을 얻을 것이다. 아니, 그들은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다(마 25:34,35). 반면에 긍휼을 베풀지 아니한 자들은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니(이는 지옥 불에 다름 아니다).
VI.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되다(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것은 모든 복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것이니, 여기서 거룩함과 행복이 충만히 묘사되고 함께 놓인다.
1. 여기 복된 자의 가장 포괄적인 특성이 있으니, 그들은 마음이 청결한 자다. 주목하라. 참된 신앙은 마음의 청결함에 있다. 내적으로 청결한 자들은 자신이 정결하고 더럽지 않은 신앙의 능력 아래 있음을 드러낸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마음에, 곧 마음의 청결함에 있으니, 그 마음을 악에서 씻는 것이다(렘 4:14). 우리는 하나님께 깨끗한 손뿐 아니라 청결한 마음을 들어 올려야 한다(시 24:4,5; 딤전 1:5). 마음은 혼합에 반하여 청결해야 하니, 곧 선을 지향하는 정직한 마음이어야 한다. 또 오염과 더러움에 반하여 청결해야 하니, 섞이지 않은 포도주처럼, 흐려지지 않은 물처럼 청결해야 한다. 마음은 육신의 정욕에서, 곧 모든 부정한 생각과 욕망에서 청결하게 지켜져야 하며, 세상의 정욕에서도 그러해야 한다. 탐심은 더러운 이득이라 불린다. 마음은 모든 육과 영의 더러움에서, 곧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그 모든 것에서 청결해야 한다. 마음은 믿음으로 청결하게 되어야 하며, 온전히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니, 그리스도께 정결한 처녀로 드려지고 보존되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그러한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2. 여기 복된 자의 가장 포괄적인 위로가 있으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주목하라. (1.) 하나님을 보는 것은 영혼의 행복의 완성이다. 우리가 현재 상태에서 믿음으로 그분을 보는 것은 땅 위의 하늘이요, 우리가 장차 올 상태에서, 곧 하늘 중의 하늘에서 그분을 보게 될 것은 그 절정이다. 더 이상 거울로 희미하게가 아니라 그분을 있는 그대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 그분을 우리의 것으로 보는 것, 그분을 보며 또 누리는 것, 그분을 보며 그분과 같이 되고 그 같음으로 만족하는 것(시 17:15), 그리고 그분을 영원히 보며 결코 그분을 보는 것을 잃지 않는 것—이것이 하늘의 행복이다. (2.) 하나님을 보는 행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게만, 오직 그들에게만 약속된다. 청결한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부정한 자에게는 그것이 복락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거룩하지 못한 영혼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는 데서 무슨 기쁨을 누리겠는가? 그분이 그들의 죄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듯이, 그들도 그분의 청결하심을 차마 보지 못한다. 또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다만 마음이 청결한 모든 자, 곧 참으로 성화된 모든 자에게는, 오직 하나님을 뵙는 것만이 거룩하게 채울 수 있는 갈망이 그 안에 일어나 있으며, 신적 은혜는 그 갈망을 채워지지 않은 채 두지 않으실 것이다.
VII.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되다(마 5:9).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 복된 자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성결하고, 사람을 향하여 화평하니, 이는 그 둘 모두와 관련하여 양심이 거리낌 없이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다음을 가진 자들이다. 1. 화평한 성품.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영어 'make a lie')이 거짓말에 빠져 거기에 몰두하는 것이듯이, 화평을 만드는 것(make peace)은 화평에 대한 강하고 진실한 애착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화평을 위하노라(시 120:7). 이는 화평을 사랑하고 갈망하며 기뻐하는 것이요, 화평을 우리의 본 자리로 삼아 그 안에 거하며 조용하기를 힘쓰는 것이다. 2. 화평한 삶. 곧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부지런히 힘써, 화평이 깨어지지 않도록 지키고, 깨어졌을 때는 회복하며, 우리 자신이 화평의 제안에 귀 기울이고 또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기꺼이 제시하며, 형제와 이웃 사이에 거리가 생겼을 때 그것을 화해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여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화평을 이루는 일은 때로 감사받지 못하는 직분이며, 싸움을 말리는 자가 양쪽에서 매를 맞는 것이 그 운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한 직분이니, 우리는 그 일에 앞장서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특별히 사역자들을 위한 교훈으로 의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그들은 불화한 자들을 화해시키고 자기 맡은 자들 사이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증진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 (1.) 그러한 자들은 복되다. 이는 그들이 화평을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누리는 만족과, 다른 이들을 화평으로 이끎으로써 그들에게 참으로 유익을 끼치는 만족을 누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원수 됨을 멸하시고 땅에 화평을 선포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자들이다. (2.)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이는 그들이 그러함을 그들 자신에게 증거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인정하실 것이며, 이 점에서 그들이 그분을 닮을 것이다. 그분은 화평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의 왕이시며, 양자의 영은 화평의 영이시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와 화목하실 만한 분임을 친히 선언하셨으니, 그분은 서로에 대한 원수 됨에서 누그러지지 않는 자들을 자기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되다면, 화평을 깨뜨리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이로써 분명해지는바,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자신의 신앙을 불과 칼로, 또는 형벌법으로 전파하려 하시지 않았고, 편협함이나 무절제한 열심을 자기 제자들의 표징으로 인정하려 하시지도 않았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흐린 물에서 고기 낚기를 좋아하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하게 하는 자요 땅에서 조용한 자들이다.
VIII.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되다. 이것은 모든 것 중에 가장 큰 역설이며 기독교에 고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맨 마지막에 놓이고, 나머지 어느 것보다 더 폭넓게 다루어진다(마 5:10-12). 이 복은 바로의 꿈처럼 두 번 반복되니, 이는 좀처럼 믿기 어렵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그 일은 확실하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인칭이 바뀐다.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내 제자요 가까이 따르는 자인 너희에게라. 이것은 덕에 뛰어난 너희가 더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바다. 너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난과 환난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살펴보라.
1. 고난받는 성도들의 처지가 묘사되니, 그것은 고된 처지요 매우 가련한 처지다.
(1.) 그들은 박해를 받으며, 멸하기 위해 사냥당하는 해로운 짐승처럼 추적당하고 쫓기며 짓밟힌다. 마치 그리스도인이 caput gerere lupinum—늑대의 머리를 지닌 것처럼, 곧 무법자가 그러하다고 일컬어지듯이—그를 만나는 자는 누구나 그를 죽여도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만물의 찌꺼기처럼 버림받으며, 벌금을 물고, 투옥되고, 추방되고, 재산을 빼앗기고, 모든 이득과 신임의 자리에서 배제되고, 채찍질당하고, 형틀에 매이고, 고문당하며, 항상 사망에 넘겨지고,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다. 이는 의로운 아벨의 때 이래로 뱀의 후손이 거룩한 후손을 향해 품은 원수 됨의 결과였다.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음을 우리는 본다(히 11:35 이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그것이 훨씬 더 그러하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요일 3:13). 그분이 우리에게 본을 남기셨다.
(2.) 그들은 욕을 먹으며, 거짓으로 그들을 거슬러 온갖 악한 말을 들었다. 그들을 가증스럽게 만들려고 별명과 비방의 이름이, 개개의 인물에게 또 의인의 무리 전체에게 붙여진다. 때로는 그들을 가공할 존재로 만들어 강력히 공격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일이 그들의 죄목으로 돌려진다(시 35:11; 렘 20:18; 행 17:6). 그들에게 다른 해를 끼칠 힘이 손에 없는 자들도 이것만은 할 수 있었고, 박해할 힘을 가진 자들도, 자신들의 야만적인 처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것 또한 할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그들에게 곰 가죽을 씌우지 않고는 그들을 미끼로 몰아세울 수 없었을 것이요, 그들을 사람 중에 가장 악한 자로 먼저 그려 놓지 않고는 가장 악한 대우를 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할 것이라. 주목하라. 성도를 욕하는 것이 곧 그들을 박해하는 것이며, 완악한 말을 셈해야 할 때(유 1:15)와 심한 조롱(히 11:36)에 대해서도 머지않아 그러함이 밝혀질 것이다. 그들이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온갖 악한 말을 할 것이니, 때로는 증인으로서 재판석 앞에서, 때로는 잔치에서 위선적인 조롱꾼들과 더불어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술 취한 자들의 노래가 된다. 때로는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듯 그 얼굴을 마주하여, 때로는 예레미야의 원수들이 한 것처럼 그 등 뒤에서 그러할 것이다. 주목하라. 아무리 검고 끔찍한 악이라도,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제자와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거짓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이 없다.
(3.) 이 모든 것은 의를 위한 것이다(마 5:10). 나로 말미암는 것이다(마 5:11). 의를 위한 것이라면, 곧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니, 이는 그분이 의의 일에 긴밀히 관여하시기 때문이다. 의의 원수는 그리스도의 원수다. 이는 정당하게 고난당하고 자신의 실제 범죄로 인해 참으로 비방받는 자들을 그 복됨에서 제외한다. 그런 자들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게 하라. 그것은 그들의 형벌의 일부다.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 명분이다. 자기 양심을 거슬러 죄짓지 않으려 하기에 고난당하는 자들, 또 선한 일을 행하기에 고난당하는 자들이 의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자들이다. 박해자들이 무슨 핑계를 대든지, 그들이 원수 삼는 것은 경건의 능력이다. 실로 비방받고 미움받고 박해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다. 주를 위하여 내가 비방을 받았나이다(시 69:9; 롬 8:36).
2. 고난받는 성도들의 위로가 제시된다.
(1.) 그들은 복되다. 이는 그들이 이제, 생전에 그들의 나쁜 것들을 받되(눅 16:25), 좋은 근거 위에서 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되니, 그것이 그들에게 영광이기 때문이며(행 5:41),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선을 행하며 은혜의 특별한 위로와 임재의 방문과 그분의 임재의 표징을 경험할 기회이기 때문이다(고후 1:5; 단 3:25; 롬 8:29).
(2.) 그들이 보상받을 것이라.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 그들은 현재 그 나라에 대한 확실한 권리와 그것의 달콤한 맛보기를 가지며, 머지않아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 고난들 가운데는 엄밀히 말하여 하나님께 대해 공로가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가장 선한 자의 죄도 가장 나쁜 것을 받아 마땅하므로), 이것이 여기서 상으로 약속된다(마 5:12).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그 봉사를 훨씬 능가할 만큼 크다. 그것은 하늘에 있어, 장래의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나, 우연과 사기와 폭력의 손이 닿지 못하도록 잘 보장되어 있다. 주목하라. 하나님은, 그분을 위하여 잃는 자들이, 비록 그것이 생명 자체일지라도, 결국 그분으로 말미암아 손해 보지 않도록 마련하실 것이다. 마침내 하늘은 우리가 그 길에서 만나는 모든 어려움에 대한 넘치는 보상이 될 것이다. 이것이, 곧 그들 앞에 놓인 이 즐거움이 모든 시대의 고난받는 성도들을 떠받쳐 온 것이다.
(3.)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그들은 너희가 아직 이르지 못한 탁월함에서 너희보다 앞섰으며, 또 시간상으로 너희보다 앞서서, 너희에게 고난당함과 인내의 본이 되게 하셨다(약 5:10). 그들도 같은 방식으로 박해받고 학대당하였으니, 너희가 너희만의 별도의 길로 하늘에 갈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사야는 교훈에 교훈을 더한다고 조롱당하지 않았는가? 엘리사는 그의 대머리 때문에 조롱당하지 않았는가? 모든 선지자가 이같이 대우받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그것을 이상한 일로 이상히 여기지 말고, 고된 일로 원망하지 말라. 고난의 길이 이미 닦여진 길임을 보는 것은 위로요, 그러한 인도자들을 따르는 것은 영광이다. 그들을 그 고난을 통과하도록 붙들기에 그들에게 충분하였던 그 은혜가 너희에게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원수들은 예로부터 주의 사자들을 조롱하던 자들의 후손이요 후계자들이라"(대하 36:16; 마 23:31; 행 7:52).
¹³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¹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¹⁵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¹⁶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얼마 전에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을 무엇이 되도록 의도하셨는지를 말씀하신다 —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마땅히 되어야 할 그 모습이 그들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다.
I.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이것은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격려와 지지가 될 것이었다. 비록 그들이 멸시받는 대우를 받을지라도, 실제로는 세상에 복이 되는 존재이며, 그렇게 고난을 당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그러한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 앞서 갔던 선지자들은 가나안 땅의 소금이었으나, 사도들은 온 세상의 소금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온 세상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토록 적은 수이고 또 그토록 약하다는 것은 그들에게 낙심거리였다. 온 세상처럼 그렇게 광대한 지역에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들이 무력과 칼의 힘으로 일해야 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금처럼 소리 없이 일해야 했으니, 그 소금 한 줌이 그 맛을 멀리 그리고 널리 퍼뜨려, 멀리까지 미치고 누룩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러나 거역할 수 없이 작용할 것이었다(마 13:33). 복음의 교훈은 소금과 같으니, 침투력이 있고 살아 있으며 능력이 있어(히 4:12) 마음에까지 이른다(행 2:37). 그것은 정결케 하며, 맛을 내고, 부패를 막아 보존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에 대해 읽거니와(고후 2:14), 그것이 없으면 다른 모든 학문은 무미건조하다. 영원한 언약을 가리켜 소금 언약이라 부르며(민 18:19), 복음 또한 영원한 복음이다. 모든 제사에는 소금이 요구되었고(레 2:13), 에스겔의 신비로운 성전에서도 그러하였다(겔 43:24).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스스로 복음의 교훈을 배웠고 또한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쓰임받았으므로 소금과 같았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인들, 특히 사역자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1. 만일 그들이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대로 된다면 그들은 좋은 소금 같으니, 희고, 작고, 여러 알갱이로 부서져 있으나 매우 유용하고 필요한 존재이다. 플리니우스(Pliny)는 이렇게 말한다. Sine sale, vita humana non potest degere — 소금 없이는 인간의 생명이 유지될 수 없다. 이 가운데서 살펴보라. (1.) 그들이 자기 자신 안에서 마땅히 되어야 할 바 — 복음으로, 곧 은혜의 소금으로 맛을 낸 자가 되어야 하며, 생각과 정서, 말과 행동이 다 은혜로 맛을 낸 것이어야 한다(골 4:6).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퍼뜨릴 수 없다(막 9:50). (2.)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마땅히 되어야 할 바 — 그들은 단지 선한 자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선을 행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세속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복음의 맛과 향취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가야 한다. (3.) 그들이 세상에 얼마나 큰 복이 되는가. 무지와 사악함 속에 누워 있는 인류는 부패하기 직전의 맛 없는 거대한 더미와 같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보내시어, 그들의 삶과 교훈으로 그것을 지식과 은혜로 맛 내게 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과 천사들과 신적인 것을 맛보는 모든 이에게 받아들일 만하게 하셨다. (4.) 그들이 어떻게 배치되리라 기대해야 하는가. 그들은 한 무더기로 쌓여 있어서는 안 되며, 항상 예루살렘에 함께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마치 고기 위에 뿌린 소금처럼 여기 한 알, 저기 한 알 흩어져야 한다. 이는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흩어졌던 것과 같으니, 그들이 어디에 살든지 그 맛을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어떤 이들은 다음을 주목하였다. 소금이 우리 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불길한 징조라 부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거니와, 정작 진정 불길한 징조는 소금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2. 만일 그들이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 같다. 다른 이들에게 맛을 내어 주어야 할 너희가 정작 스스로 맛이 없고, 영적 생명과 맛과 활력이 없다면 — 그리스도인이 그러하다면, 특히 사역자가 그러하다면, 그의 처지는 매우 슬프다. 왜냐하면 (1.) 그는 회복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소금은 맛 없는 고기를 위한 치료제이지만, 맛 없는 소금을 위한 치료제는 없다. 기독교는 사람에게 맛을 내어 줄 것이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고 지속하면서도 여전히 맥없고 어리석으며 은혜가 없고 무미건조한 채로 남아 있다면, 그를 다시 맛 나게 할 다른 어떤 교훈도, 다른 어떤 수단도 적용될 수 없다. 만일 기독교가 그 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그것을 이룰 수 없다. (2.) 그는 무익하다. 후에는 아무 쓸데없으니, 그것을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 유익보다 해를 더 끼치지 않을 어떤 용도가 있겠는가? 이성 없는 사람과 같이, 은혜 없는 그리스도인도 그러하다. 악한 사람은 피조물 중 가장 악한 자이며, 악한 그리스도인은 사람 중 가장 악한 자이고, 악한 사역자는 그리스도인 중 가장 악한 자이다. (3.) 그는 멸망과 버림받음에 처할 운명이다. 그는 밖에 버려질 것이니 — 교회와 신실한 자들의 교제로부터 쫓겨날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오점이요 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에게 밟힐 것이다. 그분께서 모욕을 당하시게 만든 자들, 또 밟히는 것 외에 아무 쓸모도 없도록 스스로를 만든 자들의 수치와 버림받음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란다.
II.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 이 또한 앞의 것(소금)과 같이 그들이 유용함을 나타내거니와(Sole et sale nihil utilius — 해와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 그러나 더 영광스럽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빛이며(엡 5:8), 빛처럼 비추어야 하지만(빌 2:15), 사역자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 칭하시며(요 8:12), 그들은 그와 함께 일하는 동역자요, 그의 영광 중 얼마를 그들 위에 부여받았다. 참으로 빛은 아름답고 반가운 것이니, 어둠에서 빛이 비쳐 나왔던 세상 첫날의 빛이 그러하였고, 또한 날마다의 아침 빛이 그러하며, 복음과 그것을 전파하는 자들이 분별력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러하다. 세상이 어둠 속에 앉아 있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일으켜 그 가운데서 비추게 하셨으며, 그들이 그리하도록 그들은 그분에게서 빛을 빌려 받아 길어 낸다.
이 비유는 여기서 두 가지로 설명된다.
1. 세상의 빛으로서 그들은 두드러지고 눈에 띄며, 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쏠린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특히 그를 섬기는 일에 앞장서고 열심인 자들은 주목할 만한 존재가 되어 봉화처럼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들은 징조가 되며(사 7:18), 기이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 되어(슥 3:8), 모든 이웃이 그들에게 눈길을 둔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흠모하고 칭찬하며 그들로 인해 기뻐하고 그들을 본받으려 힘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들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비방하고 그들의 명성을 떨어뜨리려 힘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을 지켜보는 자들 때문에 조심하여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은 세상에 대한 구경거리이므로, 그토록 주목받기에 악하게 보이는 모든 것을 삼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가 부르시기 전에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으나, 그가 그들에게 부여하신 직임이 그들을 존귀하게 만들었으며, 복음의 전파자로서 그들은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비록 그로 인해 어떤 이들에게는 비난을 받았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그로 인해 존경을 받아 보좌에 올려졌고 재판관이 되었다(눅 22:30).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존귀하게 하는 자들을 존귀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세상의 빛으로서 그들은 다른 이들을 밝히고 빛을 비추도록 의도되었다(마 5:15). 그러므로 (1.) 그들은 빛으로서 세워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등불들을 켜셨으니, 그것들이 말 아래 놓이지 않을 것이며, 지금처럼 갈릴리의 동네들이나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만 늘 갇혀 있지 않고 온 세상으로 보내질 것이다. 교회들은 등경이요, 이 빛들이 놓이는 금 등경이니, 그 빛이 두루 퍼지게 하려 함이다. 또한 복음은 그토록 강한 빛이며 그 자체의 증거를 그토록 많이 지니고 있어서, 산 위에 있는 동네같이 숨겨질 수 없으며, 그것을 향해 고의로 눈을 감지 않는 모든 이에게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곧 그것에 가까이 나아와 그것이 있는 곳으로 오는 모든 이에게 빛을 비출 것이다. 그것이 빛을 비추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탓해야 한다. 그들은 그것과 함께 집 안에 있지 않으려 할 것이며, 그것에 대해 부지런하고 공정한 탐구를 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에 대해 편견을 품을 것이다. (2.) 그들은 빛으로서 비추어야 한다. [1.] 그들의 선한 전파로써. 그들이 가진 지식을 그들은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전해야 하며, 그것을 말 아래에 두지 말고 널리 퍼뜨려야 한다. 달란트를 수건에 싸 묻어 두지 말고 그것으로 장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묵상이나 겸손이나 자기 보존을 핑계로 은밀함과 모호함 속에 자기를 감싸 두어서는 안 되며, 은사를 받은 대로 그것으로 봉사해야 한다(눅 12:3). [2.] 그들의 선한 삶으로써. 그들은 타며 빛을 내는 등불이어야 하며(요 5:35), 그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임을 그들의 모든 삶의 행실 가운데서 증거해야 한다(약 3:13).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교훈과 인도와 소생과 위로가 되어야 한다(욥 29:11).
여기서 보라. 첫째로, 우리의 빛이 어떻게 비추어야 하는가 — 사람들이 볼 수 있고 또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선한 행실을 행함으로써이니, 곧 밖에 있는 자들 가운데서 좋은 평판을 받는 행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좋게 여길 만한 근거를 주는 그런 행실로써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덕을 세우도록 보일 수 있는 선한 행실을 행해야 하지만, 우리 자신의 자랑을 위해 보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라는 명을 받았으며, 하나님과 우리 영혼 사이에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간직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 사람의 시야에 열려 있고 명백한 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에 합당하고 칭찬받을 만하도록 힘써야 한다(빌 4:8). 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은 우리의 선한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아야 하니, 이는 그들이 신앙이란 한낱 이름 그 이상의 것임을,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단지 고백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 아래 거하고 있음을 확신케 하려 함이다.
둘째로, 우리의 빛이 무슨 목적으로 비추어야 하는가 —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는 자들이 너희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 아니라(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노렸던 바이며, 그것이 그들의 모든 행위를 망쳐 놓았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주목하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신앙에서 행하는 모든 일에서 겨냥해야 할 가장 큰 목표이다(벧전 4:11). 이 중심점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의 선들이 만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힘쓸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데려와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우리의 선한 행실을 봄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지니, 그들에게 다음을 공급함으로써이다. 1. 찬양의 재료로써. "그들로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게 하라. 이는 그들이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보고, 그로 인해 그분께 감사하며, 사람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신 그분께 그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2. 경건의 동기로써. "그들로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게 하라. 이는 그들이 기독교 신앙의 진실함과 탁월함을 확신하게 되고, 거룩한 본받음으로 자극받아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본받으며,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주목하라. 성도들의 거룩하고 규모 있고 모범적인 삶의 행실은 죄인들의 회심을 위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신앙에 대해 알지 못하는 자들이 이로써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수 있다. 본보기는 가르친다. 또한 그것에 대해 편견을 품었던 자들이 이로써 그것을 사랑하게 될 수 있으니, 이렇게 하여 경건한 삶의 행실에는 사람을 이끄는 능력이 있다.
¹⁷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¹⁸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¹⁹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²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설교하신 대상, 그리고 그분이 그 제자들에게 이 교훈을 주신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신앙에 있어 다음 두 가지에 눈을 두고 있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들은 자기들의 규범으로서 구약의 성경에 눈을 두고 있었는데, 이 점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옳다고 여기에서 밝혀 주신다. 둘째로, 그들은 자기들의 본보기로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눈을 두고 있었는데, 이 점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그르다고 여기에서 밝혀 주신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I. 그리스도께서 세우려고 오신 그 규범은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라고 불리는 구약의 성경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선지자들은 율법에 대한 주석가들이었고, 이 둘이 함께 그 믿음과 실천의 규범을 이루었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교회 안에서 이 규범이 보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고, 여기서 그것을 보좌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신다.
그분은 구약을 폐기하거나 약화시키려 한다는 생각에 항변하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1.) "율법과 선지자를 사모하는 경건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내가 그것들을 폐하러 왔다고 두려워하지 말게 하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였고 또 그 능력과 순결함을 체험한 그 성경의 영광을, 그분이 세우려고 오신 이 나라가 손상시키리라는 시기심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리에 대해 편견을 품지 않게 하라.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 어떤 악한 의도를 품고 계신 것이 아님을 그들로 하여금 확신하게 하라. "율법과 선지자를 싫어하고 그 멍에에 지쳐 있는 불경건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내가 그것들을 폐하러 왔다고 바라지 못하게 하라." 육신적인 방종주의자들로 하여금, 메시아가 그들을 신적 계명의 의무에서 면제시켜 주면서도 신적 약속은 그들에게 확보해 주려고, 곧 그들을 행복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자기들 마음대로 살도록 허락하려고 오셨다고 상상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의 법이나 도덕법이 금하던 것은 지금 아무것도 명하지 않으시며, 그 법들이 명하던 것은 아무것도 금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이니, 그분은 여기서 그 오해를 바로잡아 주려고 유의하신다. 내가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주께서는 마귀의 일 외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그 무엇도 멸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하물며 우리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서 받은 그 탁월한 교훈들이야 더욱 멸하지 아니하신다. 아니다, 그분은 그것들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 곧, [1.] 율법의 명령들에 순종하시려고 오셨으니, 이는 그분이 율법 아래에 나신 까닭이다(갈 4:4). 그분은 모든 면에서 율법에 순종하시어, 부모를 공경하시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시며, 기도하시고, 구제하셨으며, 또한 다른 누구도 결코 행하지 못한 일을 행하시어, 완전하게 순종하시고 어떤 일에서도 결코 율법을 어기지 않으셨다. [2.] 율법의 약속들과 선지자들의 예언들을 이루시려고 오셨으니, 이 모두가 그분에 대해 증언하였다. 은혜 언약은 그 본질에 있어서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며, 그리스도께서 그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3.] 율법의 모형들에 응답하시려고 오셨으니, 이렇게 하여 (틸럿슨 주교가 표현한 대로) 그분은 의식법(儀式法)을 무효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셨으며, 자신이 저 모든 그림자들의 실체이심을 나타내셨다. [4.] 율법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시고, 그리하여 그것을 완성하고 온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 헬라어 플레로사이(plerosai, "성취하다, 채우다")가 본래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만일 우리가 율법을 이전에 어느 정도 물이 담겨 있던 그릇으로 여긴다면, 그분은 그 물을 쏟아내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그 그릇을 가장자리까지 가득 채우려고 오신 것이다. 또는, 먼저 거칠게 그려져서 의도한 작품의 윤곽선만을 드러내고 있다가 나중에 채워지는 그림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보충과 설명을 통해 율법과 선지자를 개선하셨다. [5.] 동일한 목적을 이어가시려고 오셨다. 기독교의 규례들은 유대 종교의 주된 목적이었던 것을 거스르거나 모순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최고도로 증진시킨다. 복음은 개혁의 때(히 9:10)이니,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그 보완이요, 따라서 그 확립인 것이다.
그분은 그것의 영속성을 단언하신다. 곧 그분이 그것의 폐기를 의도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것은 결코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 곧 아멘이요 신실한 증인인 내가 엄숙히 선언하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곧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보응의 불변한 상태가 모든 율법을 대체하기 전에는, 일점 일획도, 곧 지극히 작고 미세한 사정 하나라도 율법에서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섭리와 은혜의 모든 작용 가운데 행하시는 일이 바로 성경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라도 땅에 떨어지거나 헛되이 되느니, 차라리 천지가 한데 무너져 그 안의 충만한 것이 다 폐허와 혼돈에 싸여 버리는 편이 나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히 거하나니, 율법의 말씀도 복음의 말씀도 다 그러하다. 주목하라, 자신의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은 그 안에서 가장 하찮아 보이는 것들, 곧 일점과 일획에까지 미치니, 이는 하나님께 속하고 그분의 인(印)을 지닌 것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보존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법들은 스스로 그토록 많은 불완전함을 의식하고 있어서, "아피케스 유리스 논 순트 유라(Apices juris non sunt jura)—법의 극단적인 점들은 법이 아니다"라는 격언을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율법의 일점과 일획 하나하나를 곁에서 지키시고 보존하실 것이다.
그분은 율법을 조심스럽게 보존할 것을 자기 제자들에게 명하시며, 그것을 소홀히 하고 멸시하는 데서 오는 위험을 그들에게 보여 주신다(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모세 율법의 지극히 작은 계명 중 하나라도 버리는 자는, 하물며 더 큰 계명들 중 하나라도 버리는 자는 더욱 그러하니, 율법의 더 중한 일들을 소홀히 한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다.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자기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한 그들처럼 행하는 자(마 15:3)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바리새인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교사들로 추켜세워졌을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교사로 쓰임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자신들이 바리새인들보다 구약의 더 나은 벗임을 입증하듯이 행하는 자는, 비록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을지라도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주목하라, (1.) 하나님의 계명들 가운데는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작은 것이 있으니, 절대적으로 작은 것은 없으나 비교적으로 작은 것은 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계명 중 가장 작은 것을 새 둥지에 관한 것(신 22:6, 7)으로 여기지만, 그것조차도 매우 크고 중대한 의미와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2.) 교리에서든 실천에서든 하나님의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을 무효로 만드는 것, 곧 그것들을 버리는 것, 다시 말해 그것들의 적용 범위를 축소하려 하거나 그것들의 구속력을 약화시키려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누구든지 그렇게 하는 자는 그것이 자기 위험을 무릅쓰는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십계명 중 어느 하나라도 무효로 만드는 것은,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냥 지나치시기에는 너무도 대담한 짓이다. 그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 이상의 일이니, 곧 율법을 폐하는 것이다(시 119:126). (3.) 그러한 부패가 더 멀리 퍼질수록 더욱 악하다. 계명을 범하는 것도 충분히 뻔뻔한 일이지만, 사람을 그같이 가르치는 것은 더 큰 정도의 뻔뻔함이다. 이것은 그 당시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자기들의 해석으로 본문을 부패시키고 왜곡한 자들을 분명히 가리킨다. 성경에 대한 부패한 주석을 통해 진지한 경건과 종교의 핵심을 파괴하려는 경향이 있는 견해들은, 그것을 견지하고 있을 때에도 나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양 전파되고 가르쳐질 때에는 더욱 악하다. 그렇게 하는 자는 천국에서, 곧 영광의 나라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는 결코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영원히 배제될 것이다. 혹은, 차라리 복음 교회의 나라에서 그러하리라. 그는 그 안에서 교사의 영예를 받기에 합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일원으로조차 여겨지지 못할 것이다. 이런 거짓을 가르치는 선지자는 그 나라에서 꼬리가 될 것이다(사 9:15). 진리가 그 자체의 증거로 나타날 때에는, 바리새인들처럼 추켜세워졌던 그런 부패한 교사들도 지혜롭고 선한 자들에게는 아무 가치가 없게 될 것이다. 율법을 부패시키는 것보다 사역자들을 더 멸시받게 하고 비천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말 2:8, 11). 죄를 가볍게 여기고 부추기며, 종교에서의 엄격함과 진지한 경건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멸시하는 자들은 교회의 찌꺼기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삶과 교리로써 실천적 종교의 순결함과 엄격함을 증진하기 위해 자신을 다 쏟아붓는 자들, 곧 선한 것을 행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는 자들은 참으로 존귀하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크게 인정받는다. 그 까닭은 가르치는 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은 한 손으로 세운 것을 다른 손으로 허물어 버리고, 스스로를 거짓되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종교가 망상이라고 생각하도록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험으로부터 말하는 자들, 곧 자기가 전파하는 대로 살아내는 자들은 참으로 위대하니, 그들은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며,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존귀하게 하실 것이고(삼상 2:30), 이후에 그들은 우리 아버지의 나라에서 별과 같이 빛나리라.
II. 그리스도께서 이 규범으로 세우려고 오신 그 의(義)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마 5:20).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종교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고 여기던 자들에게는 이상한 교리였다. 서기관들은 율법의 가장 이름난 교사들이었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장 칭송받는 신봉자들이었으며, 그들은 둘 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마 23:2) 백성 가운데서 그토록 큰 명성을 누리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초월하여 지키는 자들로 여겨졌으니, 백성은 자기들이 그들만큼 선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들보다 더 나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하리라는 말을 듣는 것은 그들에게 큰 놀라움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것을 엄숙히 단언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하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리에 대한 원수들이었고 큰 압제자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어떤 칭찬할 만한 점이 있었음은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금식과 기도와 구제에 힘썼고, 의식적인 규례들을 빈틈없이 지켰으며,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들의 본분으로 삼았다. 그들은 백성 가운데 그러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어서, 만일 단 두 사람이 천국에 간다 하더라도 그중 하나는 바리새인이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는 여기서 자기 제자들에게, 자신이 세우려고 오신 종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악함을 배제할 뿐 아니라 그들의 선함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그들보다 더 낫게 행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있어서 편파적이어서 그것의 의식적인 부분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지만, 우리는 보편적이어야 하며,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한다. 그들은 오직 겉모양만을 중시하였지만, 우리는 속사람의 경건을 양심으로 행해야 한다. 그들은 사람의 칭찬과 갈채를 목표로 삼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종교에서 행한 것을 자랑하고 그것을 하나의 의로 의지하였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행하고도 자기를 부인하며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을 의지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²¹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²²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²³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²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²⁵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²⁶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러한 원칙들을 세우신 후,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에서 율법을 해설하시고, 그 해석자들이 율법에 덧씌운 부패한 주석으로부터 율법을 변호하는 일로 나아가신다. 그분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더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남용되어 온 어떤 허용들을 제한하고 억제하실 뿐이다. 그리고 계명들에 관해서는 그 넓이와 엄격함과 영적 본질을 보이시되, 그것들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고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완전하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는 설명적 규례들을 덧붙이신다. 이 구절들에서 그분은 여섯째 계명의 율법을 그 참된 의도와 충분한 범위에 따라 해설하신다.
I. 여기에 계명 자체가 제시되어 있다 (마 5:21). 우리는 그것을 들었고 기억한다. 그분은 율법을 아는 자들에게, 곧 안식일마다 그들의 회당에서 모세의 글을 낭독받던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혹은 오히려 난외주(欄外註)에 있는 대로 옛 시대의 사람들에게, 너희 조상인 유대인들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 주목하라. 하나님의 율법들은 새롭게 갑자기 생겨난 율법들이 아니라 옛 시대에 그들에게 전해진 것이니, 그것들은 오래된 율법이지만 결코 폐기되거나 낡아지지 않는 그런 본질의 것이다. 도덕법은 자연의 법, 곧 선과 악의 영원한 규칙과 이치, 즉 영원하신 마음의 올바르심과 일치한다. 여기서 금지된 것은 살인이니, 곧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 다른 어떤 사람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죽이는 것, 혹은 어떤 식으로든 그 일에 가담하는 것이다. 생명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생명을 둘러싼 보호의 울타리이다. 그것은 노아에게 주신 명령 중 하나였다 (창 9:5,6).
II. 유대인 교사들이 만족하며 머물렀던 이 계명에 대한 해석. 이에 대한 그들의 주석은 이러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그들이 이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전부는, 고의적인 살인자는 공의의 칼에 처해지고 우발적인 살인자는 도피성의 재판에 처해진다는 것뿐이었다. 재판정은 그들의 주요 성읍의 성문에서 열렸으니, 재판관은 보통 그 수가 스물세 명이었다. 이들이 살인자들을 심리하고 정죄하고 처형했으므로, 살인한 자는 누구든지 그들의 심판을 받을 위험에 처했다. 그런데 이 계명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주석은 잘못된 것이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첫째, 여섯째 계명의 율법은 단지 외적인 것일 뿐이어서, 살인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금하지 않으며, 전쟁과 다툼이 나오는 내적 정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억제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유대인 교사들의 프로톤 프세우도스(πρῶτον ψεῦδος)—근본적 오류였으니, 곧 하나님의 율법이 오직 죄된 행위만을 금지할 뿐 죄된 생각은 금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해레레 인 코르티케(hærere in cortice—율법의 문자에 머무는 데) 기우는 성향이 있어서, 결코 그 영적인 의미를 탐구하지 않았다. 바울도 바리새인이었을 동안에는, 열째 계명이라는 열쇠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나머지 모든 계명의 영적 본질에 대한 지식 안으로 인도해 주실 때까지는 그러지 못했다 (롬 7:7,14). 둘째, 그들의 또 다른 오류는, 이 율법이 단지 정치적이고 지방적인 것이어서, 그들에게만 주어졌고 그들의 법정을 위한 지침으로만 의도되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었으니, 마치 그들만이 백성이고 율법의 지혜가 그들과 함께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듯이 여긴 것이다.
III. 그리스도께서 이 계명에 대해 주신 해석. 우리는 그분의 이 해석에 따라 우리가 장차 심판받을 것을 확신하며, 그러므로 지금 그것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계명은 심히 광대하여 육신의 뜻이나 사람의 뜻으로 제한될 수 없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경솔한 분노가 곧 마음의 살인이라고 말씀하신다 (마 5:22).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 여섯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형제란, 자녀나 종처럼 우리보다 아무리 낮은 자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이든 다 이해해야 하니, 우리는 모두 한 혈통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분노는 자연스러운 정서이며, 그것이 합당하고 칭찬받을 만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까닭 없이 노할 때, 그것은 죄가 된다. 여기서 쓰인 단어는 에이케(εἰκῇ)인데, 이는 시네 카우사, 시네 에펙투, 에트 시네 모도(sine causâ, sine effectu, et sine modo—까닭 없이, 아무 선한 효과 없이, 절제 없이)를 뜻한다. 그러므로 분노가 죄가 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1.) 어떤 정당한 도발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곧 아무 까닭이 없거나, 선한 까닭이 없거나, 크고 비례하는 까닭이 없을 때이다. 어찌할 수 없었던 일, 곧 단지 우리 자신도 쉽게 저질렀을 법한, 또 그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는 노하지 않았을 한 조각의 건망증이나 실수에 불과한 일로 자녀나 종에게 노할 때, 근거 없는 의심에서 노하거나 말할 가치도 없는 사소한 모욕으로 노할 때이다. (2.) 목표로 삼는 어떤 선한 목적도 없이, 단지 우리의 권위를 과시하거나, 짐승 같은 정욕을 만족시키거나, 우리의 분개를 사람들에게 알리거나, 복수하도록 우리 자신을 부추기려고 노할 때, 그것은 헛되니, 해를 끼치는 일이다. 반면 우리가 언제든 노한다면, 그것은 잘못한 자를 일깨워 회개하게 하고 그가 다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어야 하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고후 7:11) 다른 이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3.) 그것이 합당한 한계를 넘어설 때이니, 곧 우리가 분노 가운데 완강하고 고집스러우며, 사납고 격렬하며, 난폭하고 해악을 끼치며, 우리가 불쾌하게 여기는 자들에게 해를 가하려 할 때이다. 이것은 여섯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니, 이렇게 노하는 자는 할 수만 있고 감히 그럴 수만 있다면 죽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일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가인이 그의 형제를 죽인 것도 분노에서 시작되었다. 살인이 흘러나오는 그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는 살인자이다 (마 15:19).
2. 그분은 그들에게, 우리 형제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 곧 그를 라가라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 부르는 것이 곧 혀의 살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온유함으로,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허망함과 어리석음을 깨우치려는 선한 목적으로 행해질 때는 죄가 아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오 허탄한 사람아라고 말하며, 바울은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하고, 그리스도 자신도 미련하고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내면의 분노와 악의에서 비롯될 때는, 그것은 지옥에서 붙은 그 불의 연기이며 동일한 성격에 속한다. (1.) 라가는 경멸하는 말로서 교만에서 나오니, "이 빈 녀석아"라는 뜻이다. 이것은 솔로몬이 교만한 노(잠 21:24)라고 부르는 것의 언어로서, 우리 형제를 짓밟고, 그를 우리 양 떼의 개들과도 동등하게 두기를 멸시하는 것이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는 말이 바로 그러한 언어이다 (요 7:49). (2.) 미련한 놈은 악의에 찬 말로서 증오에서 나오니, 그를 단지 보잘것없어 존중받을 수 없는 자로 볼 뿐 아니라, 비열하여 사랑받을 수 없는 자로 보는 것이다. "이 악한 자야, 이 버림받은 자야." 앞의 말은 분별없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이 말은 (성경의 언어로) 은혜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 비방이 그의 영적 상태를 건드릴수록 그것은 더 악한 것이다. 앞의 것은 우리 형제를 오만하게 비웃는 것이지만, 이것은 그를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 여겨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여섯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니, 악의에 찬 비방과 비난은 혀 밑에 있는 독으로서 은밀하고 더디게 죽이며, 쓴 말은 갑자기 쏘는 화살 (시 64:3)과 같고 뼈를 찌르는 칼과 같기 때문이다. 생명보다 나은 우리 이웃의 좋은 이름이 그것으로 인해 찔리고 살해당하며, 그것은 우리에게 능력만 있다면 그의 생명을 노릴 만한 그런 악의가 이웃을 향해 있다는 증거이다.
3. 그분은 그들에게, 그들이 이 죄들을 아무리 가볍게 여길지라도 그것들은 반드시 계산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받을 위험에 처하고, 그를 라가라 부르는 자는 이스라엘 사람을 욕한 죄로 산헤드린에게 벌받을 위험, 곧 공회에 잡혀갈 위험에 처하며, 미련한 놈, 곧 불경한 자, 지옥의 자식이라 하는 자는 그가 자기 형제를 정죄하여 빠뜨린 그 지옥 불에 들어갈 위험에 처한다. 학식 있는 휘트비 박사(Dr. Whitby)는 이렇게 본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여러 재판정에서 사용된 형벌들에 빗대어, 그리스도께서 경솔한 분노의 죄가 그 진행의 정도에 따라 사람들을 더 낮거나 더 높은 형벌에 노출시킨다는 것을 보이신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서로 더 무거운 세 가지 사형이 있었다. 곧 재판정에서 집행하는 참수형, 공회 곧 대(大)산헤드린에서 집행하는 투석형,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의 화형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경솔한 분노와 모욕적인 언어가 정죄받을 죄라는 것이지만,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죄가 무겁고, 그에 따라 그것들을 위해 예비된 더 큰 정죄와 더 혹독한 형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어떤 죄의 형벌이 가장 두려운지를 보이심으로써 어떤 죄가 가장 죄 된 것인지를 보이려 하신 것이다.
IV. 이 모든 것으로부터 여기서 추론되는 바는, 우리가 우리 형제들과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화평을 부지런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며, 만일 언제든 분열이 생기거든,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고, 우리 형제 앞에 우리 자신을 낮추고, 그의 용서를 구하며, 일의 성격에 따라 말이나 행위로 끼친 잘못에 대해 배상하거나 보상을 제안함으로써 화해를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속히 해야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이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우리가 거룩한 규례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전혀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 5:23,24). 여기서 상정된 경우는 "네 형제가 너를 대하여 무엇인가 원망할 만한 일이 있는 것", 곧 네가 실제로든 그의 생각 속에서든 그를 해하고 노엽게 한 경우이다. 만일 네가 모욕을 당한 편이라면 이렇게 지체할 필요가 없으니, 네가 네 형제를 대하여 원망할 만한 무엇이 있거든 간단히 처리하라. 그를 용서하고 (막 11:25) 그 해를 용서하는 것 외에 더 할 것이 없다. 그러나 만일 다툼이 네 편에서 시작되었고, 그 잘못이 처음에든 나중에든 네 것이어서 네 형제가 너와 시비를 가릴 일이 있거든, 네가 제단에 예물을 드리기 전에, 곧 기도와 찬송, 말씀 듣기나 성례라는 복음의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께 엄숙히 나아가기 전에, 가서 그와 화목하라. 주목하라. (1.) 우리가 어떤 종교적 예배에 임할 때, 그것을 진지한 성찰과 자기 점검의 기회로 삼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우리가 제단에 예물을 가져올 때 기억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는데, 우리 형제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할 만한 무엇이 있는지도 그중 하나이다. 만일 어느 때든 우리가 진지해질 마음이 든다면 바로 그때이니, 그러므로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2.) 우리가 진노 가운데 있을 때 행하는 종교적 예배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기, 악의, 무자비함은 하나님께 심히 거슬리는 죄들이어서, 이것들이 지배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그 무엇도 그분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딤전 2:8). 진노 가운데 드린 기도는 쓸개즙으로 기록된다 (사 1:15, 58:4). (3.) 사랑 곧 자비는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너무도 나은 것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예물을 드리기 전에 노엽게 한 형제와 먼저 화해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죄책 아래 있고 다툼에 얽힌 채 드리는 예물을 받으시기보다는, 차라리 그 예물을 받기를 미루어 기다리시는 것으로 만족하신다. (4.) 비록 우리가 형제와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에 합당치 못하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의무를 빠뜨리거나 소홀히 하는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네 예물을 제단 앞에 두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가 버린 후에 다시 오지 않으려는 유혹을 받을까 함이라." 많은 사람이 어떤 이웃과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을 자기가 교회나 성찬에 나오지 않는 이유로 댄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하나의 죄는 결코 다른 죄를 변명해 주지 못하고 도리어 죄책을 갑절로 만든다. 사랑의 결핍이 경건의 결핍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 어려움은 쉽게 극복된다.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을 우리는 용서해야 하며, 우리가 잘못한 자들에게는 우리가 보상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제안하고 우정의 회복을 바라야 한다. 그리하여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잘못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 후에 와서, 어서 오라,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 그러면 그것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도 해가 지도록 우리의 분을 품지 말아야 하니, 잠들기 전에 기도하러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안식일에는 해가 뜨도록 우리의 분을 품는 일이 더더욱 없어야 하니, 그날은 기도의 날이기 때문이다.
2. 이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우리가 많은 위험에 노출된 채 있기 때문이다 (마 5:25,26). 우리가 화해를 위해, 그것도 속히 힘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니,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현세적인 면에서. 만일 우리가 형제에게 그의 몸이나 재물이나 평판에 끼친 잘못이 소송을 제기할 만한 것이어서 그가 상당한 손해 배상을 받아낼 수 있는 것이라면, 겸손한 굴복과 정당하고 화평한 배상으로 그것을 미리 막는 것이 우리의 지혜요, 우리 가족에 대한 우리의 의무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법으로 그것을 받아내어 우리를 옥에 갇히는 극한으로 몰아넣을까 함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끝까지 버티기보다 타협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맺는 것이 더 낫다. 법에 맞서 다투는 것은 헛되며, 우리가 그것에 짓눌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끼친 잘못을 완고하게 고집하다가 자기 재산을 망치는데, 그 잘못은 처음에 조금만 양보했더라면 곧 진정되었을 것이다. 보증의 경우에 대한 솔로몬의 충고는, 가서 스스로 겸손히 하여 너 자신을 구원하고 건지라는 것이다 (잠 6:1-5). 화해하는 것이 좋으니, 법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위에 있는 자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만, 우리보다 우위에 있는 자들에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공정해야 한다. "네 고발하는 자와 급히 사화하고 타협하라. 그가 너의 완강함에 격분하여 끝까지 요구하기를 고집하고, 처음에는 해 주었을 감액을 너에게 해 주지 않을까 함이라." 옥은 자기 자신의 교만과 방탕, 자기 자신의 고집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곳에 들어가게 된 자들에게는 위로 없는 곳이다.
(2.) 영적인 면에서. "가서 네 형제와 화목하고, 그에게 공정하며, 그와 친구가 되라. 다툼이 계속되는 동안은, 네가 예물을 제단에 가져오기에 합당치 못하고 주의 상에 나아오기에 합당치 못한 것처럼, 죽기에도 합당치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네가 이 죄에 머무른다면, 네가 피할 수도 없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갑자기 채여 가게 될 위험이 있으니, 그 죄악이 네게 돌려진다면 너는 영원히 망하게 될 것이다." 지옥은 악의와 무자비함 가운데 살다가 죽는 모든 자, 다툼을 일삼는 모든 자(롬 2:8)를 위한 옥이며, 그 옥에서는 영원토록 구출도, 구속도, 탈출도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하나님과의 화해라는 큰 일에 매우 적절히 적용된다. 네가 길에 있을 때에 급히 그와 화해하라. 주목하라. [1.] 위대하신 하나님은 모든 죄인의 대적자, 곧 안티디코스(Ἀντίδικος)—법정의 대적자이시다. 그분은 그들과 시비를 가릴 일이 있으시며, 그들을 상대로 한 소송이 있으시다. [2.] 우리가 그분과 화해하고, 그분을 깊이 알아 화평을 누리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다 (욥 22:21, 고후 5:20). [3.] 우리가 길에 있는 동안에 속히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길에 있는 것이지만, 죽은 후에는 이것을 하기에 너무 늦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네 눈에 잠을 주지 말라. [4.]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머무는 자들은 그분의 공의의 체포와 그분의 진노의 가장 두려운 사례들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재판관이시니,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그분께 넘겨질 것이다.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구주로서 거부된 그분을 재판관으로서는 피할 수 없으니 (계 6:16,17), 어린양이 사자가 되실 때에 이렇게 주 예수께 넘겨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넘기실 옥리들이며 (마 13:41,42), 마귀들 또한 그러하여, 모든 불신자에게 사형 집행관으로서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 (히 2:14). 지옥은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머무는 자들이 던져질 옥이다 (벧후 2:4). [5.] 정죄받은 죄인들은 영원토록 그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들은 한 푼이라도 다 갚기 전에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인데, 그것은 영원의 가장 먼 세대에 이르러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영원히 갚아지는 과정에 있으나 결코 다 갚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²⁷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²⁸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²⁹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³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³¹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³²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제7계명에 대한 해설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 율법을 만드신 바로 그 손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분이야말로 그 율법을 해석하시기에 가장 합당하신 분이다. 이것은 부정(不淨)에 대한 율법으로서, 앞선 율법 뒤에 적절히 이어진다. 전자가 죄 된 정념(情念)에 제재를 가했다면, 후자는 죄 된 욕정에 제재를 가하는데, 이 둘은 언제나 이성과 양심의 다스림 아래 있어야 하며, 만일 방종하게 내버려 두면 똑같이 해롭다.
I. 여기서 그 계명이 제시된다(마 5:27). 간음하지 말라. 이 계명에는 다른 모든 부정한 행위와 그것을 향한 욕망에 대한 금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계명을 해설할 때 그것이 간음의 행위 이상으로는 미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만일 그 악행이 마음에 품기기만 하고 그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으실 수도 없고 주목하지도 않으시리라(시 66:18)고 암시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 간음한 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눅 18:11).
II. 여기서 그 계명은 그 엄격함에 있어 세 가지로 설명되는데, 이 세 가지는 장로들의 전통에 늘 지배를 받아 오며 그들이 가르친 모든 것을 신탁(神託)처럼 여겼던 자들에게는 새롭고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1.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마음의 간음, 곧 결코 간음이나 음행의 행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 간음한 생각과 성향이라는 것이 존재함을 배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것들이 영혼에게 끼치는 더럽힘은—여기서 이토록 분명하게 단언되고 있는데—제7계명 안에 포함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율법 아래에서 그들이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어야 했던 많은 의식적(儀式的) 부정함 가운데서도 표징되고 의도되었을 것이다. 여자를 보고 (어떤 이들이 주장하듯 단지 다른 남자의 아내만이 아니라, 어떤 여자든) 음욕을 품는 자는 누구든지 마음에 이미 그 여자와 더불어 간음한 것이다(마 5:28). 이 계명은 음행과 간음의 행위만 금하는 것이 아니라, (1.) 그것들을 향한 모든 욕정, 곧 금지된 대상을 향한 모든 정욕을 금한다. 이것은 죄의 시작이니, 욕심이 잉태하는 것이다(약 1:15). 이는 죄로 나아가는 나쁜 걸음이며, 정욕에 머무르며 그것을 옳다 여기고, 음란한 욕망을 단 음식처럼 혀 밑에 굴린다면, 그것은 마음이 할 수 있는 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죄 자체를 위한 적당한 기회만 모자랄 뿐이다. Adultera mens est—마음이 음란해졌다.(오비디우스, Adultera mens est) 정욕은 양심이 좌절되거나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곧 양심이 죄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기울어진 것이요, 그 말하는 바가 이기지 못하면 좌절된 것이다. (2.) 그것들을 향한 모든 접근을 금하니, 금단의 열매를 바라봄으로 눈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단지 정욕을 품으려는 그 목적으로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정욕을 품을 때까지 바라보거나, 더 깊은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곳에서 정욕을 채우려고 바라보는 것이다. 눈은 이런 종류의 수많은 악의 입구이자 출구이니, 요셉의 여주인(창 39:7), 삼손(삿 16:1), 다윗(삼하 11:2)이 그 증인이다. 우리는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져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것에 대해 읽는다(벧후 2:14).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거룩한 욥처럼 우리 눈과 약속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 곧 우리 눈에게, 해의 빛과 하나님의 일들을 보는 즐거움은 누리되, 부정한 상상이나 욕망을 일으킬 만한 어떤 것에도 결코 고정되거나 머물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이 약속을 맺으며, 만일 그리한다면 회개의 눈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벌칙을 두는 것이다(욥 31:1)! 우리가 눈을 가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부패한 시선을 억제하고 그 더럽히는 인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이 계명은 또한 정욕을 일으키기 위해 우리의 다른 감각을 사용하는 것도 금한다. 만일 올무가 되는 시선이 금단의 열매라면, 이 지옥 불의 연료요 풀무인 부정한 대화와 음란한 희롱은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교훈들은 마음의 정결함이라는 율법을 둘러친 울타리다(마 5:8). 그리고 만일 바라보는 것이 정욕이라면, 보임받고 정욕의 대상이 되려는 의도로 (얼굴에 화장을 하고 머리를 꾸미고 창밖을 내다본 이세벨처럼) 단장하고 치장하며 자기를 드러내는 자들도 그에 못지않게 죄가 있다. 사람은 죄를 짓고, 마귀는 죄로 유혹한다.
2. 그러한 시선과 그러한 희롱은 영혼에 매우 위험하고 파괴적이어서, 그 죄에 길을 내주고 그 속에서 영원히 멸망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실족하게 하는 눈과 손을 잃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이 교훈이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마 5:29,30). 부패한 본성은 마음의 간음을 금하는 것에 대해 곧 반박하기를, 그것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혈과 육은 아름다운 여인을 기쁨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한 대상을 향해 정욕을 품고 희롱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이러한 핑계들은 이성으로는 좀처럼 극복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주의 두려우심으로 반박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바로 그렇게 반박되고 있다.
(1.) 이러한 육신의 정욕을 막기 위해 여기서 처방된 것은 가혹한 수술이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곧 금지된 대상을 음란하게 흘긋 보거나 음란하게 응시함으로 너로 범죄하게 하거든,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곧 음란한 희롱으로 너로 범죄하게 하거든, 그리고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정말로 눈과 손을 다스리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것들이 이러한 악한 행습에 너무 익어 거기서 떼어 놓을 수 없으며, 만일 그것들을 억제할 다른 방도가 없다면(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분의 은혜를 통해 그 방도가 있다), 더 존귀하고 유용한 오른 눈과 오른손일지라도 그것들을 죄에 방종하게 내버려 두어 영혼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눈을 빼고 손을 찍어 버리는 편이 우리에게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본성이 그 생각만으로도 소스라치는 이것에 우리가 복종해야 한다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 곧 극기와 자기 부인의 삶을 사는 것, 우리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지키며 거기서 정욕과 부패가 처음 일어나는 것을 억누르는 것, 죄의 기회를 피하고 그 시작에 저항하며, 아무리 즐거울지라도 우리에게 올무가 될 자들의 무리를 멀리하는 것, 해가 미치는 곳에서 벗어나 있고, 합법적인 것들이라도 우리에게 시험이 되는 것을 발견할 때 그것들을 사용함에 있어 우리 자신을 절제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날마다 그 은혜를 의지하여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체의 정욕을 이루지 아니하는 것에는 더욱더 결단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것은 오른손을 찍어 내거나 오른 눈을 빼는 것만큼 효과가 있을 것이며, 어쩌면 혈과 육에는 그만큼이나 거슬리는 일일 것이니, 이것이 곧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2.) 이 처방을 시행케 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논거인데(마 5:29), 그것이 똑같은 말로 반복되고 있으니(마 5:30), 이는 우리가 그러한 거친 말을 듣기 싫어하기 때문이다(사 30:10).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비록 그것이 더 아쉬운 눈이나 손일지라도,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너에게 유익하니라. 주목하라. [1.] 복음의 사역자가 지옥과 멸망에 대해 설교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이 아니다. 아니, 그는 반드시 그리해야 하니,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리하셨기 때문이다. 또 만일 우리가 장차 임할 진노에 대해 경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에 불충한 것이다. [2.] 우리가 두려움으로 구원받아야 할 어떤 죄들이 있으니, 특히 육신의 정욕이 그러하다. 이것은 겁먹게 함으로써가 아니고는 제어할 수 없는 본래 잡혀 죽기 위해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은 것이어서, 화염검을 든 그룹들에 의하지 않고는 금단의 나무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 [3.]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어렵게 여기도록 시험받을 때, 우리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영원히 누워 있는 것이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천하고 짐승 같은 정욕을 채우기를 부인하느니 차라리 그 불 속에서 영원한 파멸을 무릅쓰려는 자들은, 지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것이다. [4.] 지옥에는 몸을 위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질 것이요, 그 몸의 모든 지체에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돌본다면, 우리는 부정의 정욕으로가 아니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우리의 몸을 가질 것이다. [5.] 혈과 육에 가장 불쾌한 의무들조차 우리에게 유익하며,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그분이 아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3. 사람들이 싫증이 났다 하여, 또는 간음 외의 어떤 다른 이유로든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것은, 비록 유대인들 사이에서 용인되고 행해졌을지라도, 간음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놓는 것이므로 제7계명을 어기는 것이었다(마 5:31,32). 여기서 주목하라.
(1.) 이혼과 관련하여 이제 사정이 어떠하였는가. 일렀으되 (그분은 앞에서처럼 옛 사람에게 말한 바라고 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그것이 앞의 것들처럼 명령이 아니라—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이해하려 하였지만(마 19:7)—단지 허락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그가 격정에 사로잡혔을 때 말로 그리하려 하지 말고, 신중하게, 증인들이 입증하는 법적 문서를 글로 써서 그리할지니, 만일 그가 혼인의 매임을 끊으려거든 엄숙하게 그리할지니라." 이렇게 율법은 성급하고 경솔한 이혼을 막았다. 그리고 아마도 처음에, 글쓰기가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 흔하지 않았을 때에는 이로 인해 이혼이 드문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혼이 매우 흔해졌고,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행할지에 대한 이 지침이 어떤 이유로든 이혼을 허락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마 19:3).
(2.) 우리 구주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로잡고 고치셨는가. 그분은 혼인 제도를 그 본래의 제정으로 되돌리셨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 쉽게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니, 따라서 이혼은 혼인 언약을 깨뜨리는 간음의 경우 외에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른 어떤 구실로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그렇게 버림받은 그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 주목하라. 다른 사람들을 죄의 시험으로 이끌거나, 그 안에 내버려 두거나, 그것에 노출시키는 자들은 그들의 죄에 대해 자기 자신을 죄인 되게 하며,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간음하는 자와 동참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시 50:18).
³³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³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³⁵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³⁶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³⁷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제삼계명에 대한 해설을 보게 되는데, 우리는 이 계명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더욱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음으로써 이 계명을 범하는 자에 대하여는, 비록 자신은 스스로 죄 없다 여길지라도, 하나님께서 죄 없다 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특별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 이 계명에 관하여 보자면,
I. 이것이 위증과 거짓 맹세와 맹세 및 서원을 어기는 일을 금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이다(마 5:33). 이는 옛 사람에게 이르신 말씀이며, 제삼계명의 참된 의도와 의미이다. 너는 하나님의 이름을 (맹세로써 그러하듯이) 망령되이 곧 헛되이 혹은 거짓되이 일컫지 말라. "그의 영혼이 헛된 것을 향하여 들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그다음 말씀, 곧 "거짓되이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는 말씀으로 풀이된다(시 24:4). 위증은 자연의 빛으로도 정죄되는 죄로서, 하나님을 향한 불경건과 사람을 향한 불의가 한데 얽힌 것이며, 사람을 하나님의 진노에 심히 노출시키는 죄이다. 그 진노가 그러한 죄에 어김없이 뒤따른다고 항상 여겨졌으므로, 맹세의 형식들은 흔히 저주나 자기 저주의 형태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이나, 우리가 흔히 쓰는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라는 말이 그러하다. 이는 만일 내가 거짓되이 맹세하거든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처럼 만국이 한 목소리로, 사람들이 진리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면서 그것을 증언하시도록 하나님을 엄숙히 불러 세웠을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저주하시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고 스스로에게 저주를 빌었던 것이다.
다른 어떤 성경 구절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덧붙여졌다.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민 30:2). 이는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 당사자가 되시는 약속들, 곧 하나님께 한 서원을 가리킬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정확히 이행되어야 한다(전 5:4,5). 둘째, 우리 형제에게 한 약속들로서 하나님께서 그 증인이 되시는 약속들, 곧 우리의 진실함에 관하여 그분께 호소하며 한 약속들을 가리킬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위하여 주께 이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약속을 맹세로 확증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께 채무자가 된 것이기 때문이며, 만일 그처럼 확증한 약속을 어긴다면 우리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다.
II. 여기에 덧붙여지기를, 이 계명은 거짓 맹세만 금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솔하고 불필요한 맹세를 금한다고 하신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마 5:34, 약 5:12). 이는 모든 맹세가 죄라는 뜻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으니, 바르게 행하기만 한다면 맹세는 종교적 예배의 한 부분이며, 우리는 그것으로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신 6:13, 10:20, 사 45:23, 렘 4:2 참조). 우리는 바울이 필요가 있을 때에 그러한 엄숙한 형식으로 자기가 한 말을 확증하는 것을 본다(고후 1:23). 맹세할 때에 우리는 어떤 알려진 것의 진실성을 담보로 잡아, 의심스럽거나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의 진실성을 확증한다. 곧 우리는 더 큰 지식과 더 높은 법정에 호소하며, 만일 우리가 거짓되이 맹세하거든 의로우신 재판장의 보응이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이제 이 문제에 관한 그리스도의 뜻은 이러하다.
1. 우리는 합당하게 부름을 받았을 때, 곧 우리 형제를 향한 정의나 사랑, 또는 공공의 유익을 위하여 다툼을 끝내려고(히 6:16) 필요할 때 외에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아야 한다. 그 필요성에 대하여는 통상 세속의 위정자가 판단자가 된다. 우리는 맹세를 요구받을 수는 있으나 스스로 맹세하지는 말아야 하며, 엄숙히 맹세하도록 명령받아 거기에 매일 수는 있으나, 우리 자신의 세속적 이득을 위하여 스스로 그것을 자청하지는 말아야 한다.
2. 우리는 일상의 대화 중에 경솔하고 불경하게 맹세하지 말아야 한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위엄에 대하여 우스갯거리로 호소하는 것은 매우 큰 죄이니, 거룩한 일은 언제나 지극히 엄숙하게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린 거룩한 것들 중 하나를 심히 더럽히는 일이다. 그것은 아무런 가림막도, 변명할 구실도 없는 죄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지배하는 은혜 없는 마음의 표징이다.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나이다.
3. 우리는 특별히 약속의 맹세를 피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더욱 특별히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이는 이행되어야 할 맹세이기 때문이다. 단언의 맹세가 미치는 영향은 우리가 진실을, 곧 그 모든 진실을 신실하게 드러내고 나면 곧바로 그친다. 그러나 약속의 맹세는 그토록 오래 매이게 하며, 유혹의 강함뿐 아니라 그 갑작스러움으로 인하여 여러 방식으로 깨어질 수 있으므로, 큰 필요가 있을 때 외에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맹세를 빈번히 요구하고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오점이 되니, 그리스도인은 그 신실함이 마땅히 인정받아, 그들의 진중한 말이 그들의 엄숙한 맹세만큼이나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4. 우리는 다른 어떤 피조물로도 맹세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 생각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의에서 맹세할 때에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하늘이나 땅 등으로 맹세하려 했던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이것을 금하시며(마 5:34), 우리가 무엇으로 맹세하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음을 보이신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므로, 그것들로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으로 맹세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거기에 걸린 것은 곧 피조물의 진실성인데, 그 진실성은 최고의 진리(summum verum—숨뭄 베룸)이신 하나님과 관계될 때에만 증언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면,
(1.) 하늘로 맹세하지 말라. "하늘이 확실히 있는 것처럼, 이것은 진실하다"고 하면서 맹세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니, 그곳은 그분이 거하시며 보좌에 앉은 군주처럼 특별한 방식으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곳이다. 이것이 위에 있는 세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엄이므로, 하늘로 맹세하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으로 맹세하는 것이다.
(2.)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그의 발등상이기 때문이라. 그분은 이 아래 세계의 운행을 다스리신다. 그분이 하늘에서 다스리시듯, 땅 위에서도 다스리신다. 비록 땅이 그분의 발 아래 있으나, 또한 그분의 눈과 보살핌 아래 있으며, 그분의 것으로서 그분과 관계되어 있다(시 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여호와의 것이로다. 그러므로 땅으로 맹세하는 것은 곧 그 주인이신 분으로 맹세하는 것이다.
(3.)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유대인들은 이 장소를 너무도 숭상하여, 맹세할 때 그보다 더 거룩한 것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땅의 일부로서 하나님과 갖는 일반적인 관계 외에도, 특별한 관계로 그분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큰 임금의 성이기 때문이며(시 48:2), 하나님의 성이기 때문이다(시 46:4). 따라서 그분은 그곳에 관여하시며, 그것으로 한 모든 맹세에 관여하신다.
(4.) "네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 비록 머리가 네게 가까이 있고 네 본질적인 한 부분일지라도, 그것은 네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분이 그것을 지으셨고 그 모든 근원과 기능을 형성하셨기 때문이다. 반면에 너 자신은 어떤 타고난 내재적 능력으로도 한 터럭의 빛깔조차 바꾸어 희거나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너는 네 머리로 맹세할 수 없고, 다만 네 머리의 생명이시며 네 머리를 드시는 분으로 맹세하는 것이다."(시 3:3)
5.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대화에서 옳다 옳다 와 아니라 아니라 로 만족해야 한다(마 5:37). 일상의 대화 중에 어떤 것을 긍정한다면, 다만 옳다, 그러하다고만 말하자. 그리고 필요하다면 어떤 일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것을 거듭하여 옳다 옳다, 참으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진실로 진실로는 우리 구주의 옳다 옳다였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부인한다면 아니라고만 말하면 족하며, 혹 필요하다면 그 부인을 되풀이하여 아니라 아니라고 말하면 된다. 우리의 신실함이 알려져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신뢰를 얻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 신실함이 의심받는 처지라면, 우리가 하는 말을 맹세와 저주로 뒷받침하는 것은 도리어 그 말을 더욱 의심스럽게 만들 뿐이다. 불경한 맹세를 삼키는 자는 거짓말 앞에서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모든 제자의 입에 두신 이 말씀이, 다른 면에서는 충분히 흠 있는 한 분파에게 비방의 이름으로 덧씌워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해먼드 박사(Dr. Hammond)가 말한 대로, 우리는 옳다와 아니라 이상을 더 금지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사용하도록 인도받은 것이다.
그 이유는 주목할 만하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비록 그것이 맹세의 죄악에까지 이르지는 않더라도 그러하다. 그것은 마귀에게서 나니라(ek tou Diabolou—에크 투 디아볼루). 한 고대 사본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마귀에게서, 곧 악한 자에게서 나며, 사람 본성의 부패에서, 격정과 격렬함에서 나며, 마음을 지배하는 헛됨과 거룩한 것들에 대한 멸시에서 나온다. 그것은 사람 안에 있는 거짓에서 나오니, 모든 사람은 거짓되도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러한 단언들을 사용하는 것은 서로를 불신하며, 그러한 단언 없이는 자기가 믿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인은 자기 신앙의 명예를 위하여, 그 자체로 악한 것뿐 아니라 악으로부터 나오는 것, 곧 악의 모양을 띤 것도 피해야 한다. 악한 원인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것으로 의심받을 만하다. 맹세란 질병을 전제하는 약과 같은 것이다.
이 장과 뒤따르는 두 장은 하나의 설교, 그것도 유명한 설교, 곧 산상수훈(山上垂訓)이다. 이것은 모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 구주의 강론 가운데 가장 길고 가장 충실하게 이어지는 강론이다. 이것은 실천적인 강론이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믿어야 할 것들(credenda)—곧 믿어야 할 사항들에 관한 내용은 많지 않고, 오로지 행해야 할 것들(agenda)—곧 행해야 할 사항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전파 사역을 이것으로 시작하셨으니,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알리라"(요 7:17) 하셨기 때문이다. 이 설교의 정황이 설명된 후에(마 5:1,2), 설교 자체가 이어지는데, 그 목적은 우리의 머리를 관념들로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을 인도하고 규율하려는 데 있다.
I. 그분은 복(blessedness)을 목표로 제시하시고, 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자들의 성품을—허망한 세상의 통념과는 매우 다르게—여덟 가지 복(팔복)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데, 이것들은 마땅히 역설(paradox)이라 불릴 만하다(마 5:3-12).
II. 그분은 의무를 그 길로 규정하시고, 그 의무의 항구적인 규칙들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을 지도하시기를,
그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니—그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마 5:13-16).
그들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시니—그들은 도덕법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여기에 다음이 있다.
(1.) 율법에 대한 전반적인 비준과, 그것을 우리의 규칙으로서 우리에게 권면하심(마 5:17-20).
(2.) 여러 가지 오류에 대한 개별적인 시정.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해석하면서 끌어들인 여러 가지 고의적이고 심각한 부패에 대한 개혁이며, 또한 가장 설명과 변호가 필요했던 율법의 여러 갈래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설이다(마 5:20). 특히 여기에 다음에 대한 해설이 있다.
[1.] 살인을 금하는 제6계명에 대한 해설(마 5:21-26).
[2.] 간음을 금하는 제7계명에 대한 해설(마 5:27-32).
[3.] 제3계명에 대한 해설(마 5:33-37).
[4.] 보복법(報復法)에 대한 해설(마 5:38-42).
[5.] 형제 사랑의 법에 대한 해설(마 5:43-48).
그리고 그 전체의 목적은 율법이 신령한 것임을 보여 주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