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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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구제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²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³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⁴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가 마음의 죄, 마음의 간음, 마음의 살인을 피하는 일에 있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하듯이, 마음의 신앙(heart-religion)을 유지하고 지켜 가는 일에서도 그러해야 한다. 즉 우리가 행하는 바를 내면의, 생명력 있는 원리(inward, vital principle)에서 우러나와 행함으로써, 사람에게서 갈채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하여 행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바리새인의 교훈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들의 누룩이었던 외식(위선)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눅 12:1).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큰 본분이다—아라비아 사람들의 말로는 율법의 세 기둥이다. 이 세 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세 가지 주된 소유로 하나님께 경의와 섬김을 드린다. 곧 기도로는 우리의 영혼으로, 금식으로는 우리의 육체로, 구제로는 우리의 재산으로 드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악에서 떠날 뿐 아니라 선을 행하며, 그것을 잘 행하여, 그리하여 영원히 거하여야 한다.
이제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구제할 때의 외식에 대하여 경계를 받는다. 그것을 주의하라. 우리가 그것을 주의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그것이 죄임을 암시한다. 1. 우리는 그 죄에 빠질 큰 위험 가운데 있다. 그것은 교묘한 죄다. 헛된 영광(vain-glory)은 우리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우리가 행하는 일 속에 슬며시 끼어든다. 제자들은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능력으로 인하여, 또 그들을 흠모하는 어떤 이들과 그들을 멸시하는 다른 이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까닭에 이 죄에 유혹을 받았을 것이니, 이 둘은 다 육체로 그럴듯한 외양을 드러내고자 탐하게 만드는 유혹이다. 2. 그것은 우리가 그로 인해 큰 위험에 처하는 죄다. 외식을 주의하라. 만일 그것이 너희 속에서 다스리면, 그것은 너희를 파멸시킬 것이다. 그것은 향기로운 향유 한 상자 전체를 못 쓰게 만드는 죽은 파리다(전 10:1).
여기 두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I. 구제하는 것은 큰 본분이며,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가 그 능력에 따라 풍성히 행하여야 할 본분이다. 그것은 자연의 법과 모세의 율법으로 명령되어 있으며, 선지자들도 그것에 큰 비중을 두었다. 여기서 여러 고대 사본들은 τὴν ἐλεημοσύνην(ten eleemosynen)—너희의 구제 대신에 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ten dikaiosynen)—너희의 의로 읽으니, 이는 구제가 곧 의이기 때문이다(시 112:9; 잠 10:2). 유대인들은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함을 의의 상자라 불렀다.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그들의 마땅한 몫이라고 일컬어진다(잠 3:27). 외식하는 자들이 자기 교만을 채우려고 이 본분을 오용한다 하여 그 본분이 덜 필요하거나 덜 탁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미신적인 교황주의자들(papists)이 자선 행위에 공로(merit)를 두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러한 선한 일에 인색한 탐욕스러운 개신교도들에게 변명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의 구제 행위가 천국을 받을 자격을 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 없이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그것은 *정결한 경건(순수한 신앙)*이며(약 1:27), 큰 날에 시금석이 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구제한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시며, 그렇게 하지 않는 자들을 자기 사람으로 인정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II. 그것은 큰 상이 따르는 본분이지만, 외식으로 행하면 그 상을 잃게 되는 본분이다. 그것은 때때로 현세적인 것들로 보상을 받으니, 풍성함으로(잠 11:24,25; 19:17), 궁핍으로부터의 안전으로(잠 28:27; 시 37:21,25), 환난 중의 도움으로(시 41:1,2), 또 그것을 가장 적게 탐하는 자들을 가장 많이 따르는 존귀와 좋은 평판으로 보상받는다(시 112:9). 그러나 무엇보다 그것은 의인의 부활 때에(눅 14:14) 영원한 부유함으로 보응받을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었으니, 이제 다음을 살펴보라.
1. 이 본분에 관한 외식하는 자들의 행태가 어떠하였는가. 그들은 과연 구제를 행하기는 하였으나,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원리나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교만과 헛된 영광에서 행하였으며,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과시를 위하여 행하였다. 곧 그들이 선한 사람으로 떠받들어져 백성의 존경을 사고자 하였으니, 그들은 그 존경을 이용하여 자기 잇속을 챙기고 자기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의도에 따라 그들은 자기들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회당과 거리에서 구제하기를 택하였으니, 그 사람들은 그들의 후함을 갈채하였다. 자기들도 그 혜택에 한몫을 끼었기 때문이지만, 또한 너무 무지하여 그들의 가증한 교만을 분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회당에서는 가난한 자를 위한 모금이 있었고, 흔한 거지들이 거리와 큰길에 들끓었을 것이니, 그들은 이런 공적인 기회를 택하여 구제하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구제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도 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리를 보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사람들의 눈에 덜 띄는 자선의 대상들을 택하여야 한다. 외식하는 자들은 자기 집에서 구제할 때에라도, 가난한 자들을 한데 불러 모아 대접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나팔을 불었으나, 실은 자기 자선을 널리 알리고 그것이 주목받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이에 대하여 내리시는 선고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언뜻 보기에 이것은 약속처럼 보인다—그들이 상을 받았다면 충분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안의 두 단어가 이것을 위협으로 만든다.
(1.) 그것은 상이지만, 그들의 상이다.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시는 상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자기에게 약속한 상이며, 보잘것없는 상이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였고, 과연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속인 자기 자신의 허망한 것들을 택하였으니, 자기가 택한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육에 속한 신앙 고백자들은 하나님께 영달과 명예와 부를 조건으로 내거니, 그들은 그러한 것들로 자기 배를 채우게 될 것이다(시 17:14). 그러나 그 이상은 기대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이 그들의 위로요(눅 6:24), 그들의 좋은 것이니(눅 16:25), 그들은 이것들로 만족하고 물러나야 할 것이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마 20:13) 그것이 네가 지켜야 할 흥정이니라."
(2.) 그것은 상이지만, 현재의 상이다. 그들은 그것을 이미 받았으며, 장래의 상태를 위하여 그들을 위해 남겨진 것은 없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만한 모든 것을 이미 받았다. 그들은 여기서 자기 상을 받았으니, 이후로 바랄 것이 없다. Ἀπέχουσι τὸν μισθόν(Apechousi ton misthon). 이는 *전액 영수(완불)*를 의미한다. 경건한 자들이 이생에서 받는 상은 지급의 일부일 뿐이다. 그 뒤에 더 많은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이 남아 있다.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 전부를 받으니, 그들의 운명도 그러할 것이다. 그들 자신이 그것을 결정한 것이다. 세상은 성도들에게는 단지 양식 마련을 위한 것이요, 그들의 *노자(여비)*일 뿐이다.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삯이요, 그들의 분깃이다.
2. 이에 관한 우리 주 예수님의 명령이 무엇인가(마 6:3,4). 친히 겸손의 본을 보이신 그분께서는 그것을 제자들의 행함이 받아들여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서 그들에게 권면하셨다.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아마도 이것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통로 오른편에 고르반(corban), 곧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함, 또는 자원하는 예물을 던져 넣는 궤를 두었던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른손으로 예물을 그 안에 넣었던 것이다. 혹은 오른손으로 구제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준비됨과 그 일에서의 결단을 암시하니, 그것을 능숙하게(dexterously) 하고, 서투르게나 음흉한 의도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른손은 가난한 자를 돕는 일, 곧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글을 써 주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는 일 등 그들에게 무엇을 주는 일 외에도 여러 방식으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네 오른손이 가난한 자에게 무슨 친절을 베풀든지, 왼손이 그것을 모르게 하라. 될 수 있는 한 그것을 감추고, 부지런히 그것을 은밀히 간직하라. 그것이 선한 일이기 때문에 행하라. 그것이 네게 좋은 평판을 주리라 하여 행하지 말라." In omnibus factis, re, non teste, moveamur—우리의 모든 행동에서 우리는 행위의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 움직여야 하며, 그것을 지켜보는 자에 대한 관심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키케로, 『선악의 한계에 관하여(De Finibus)』).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1.) 우리가 행하는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니, 우리 왼편에 서 있는, 곧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조차 그러하다. 그들에게 그것을 알리는 대신, 가능하면 그들로부터 숨기라.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그들로부터 숨기려고 간절히 애쓰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들이 예의상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하고 그것을 자기들끼리만 간직하여 더 멀리 퍼지지 않게 하도록 하라. (2.)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도 너무 의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왼손은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선을 너무 주목해서는 안 되며, 우리 자신을 갈채하고 흠모해서는 안 된다. 자만(self-conceit)과 자기 만족(self-complacency), 그리고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숭배하는 것은 교만의 가지들이니, 이는 사람들 앞에서의 헛된 영광이나 과시만큼이나 위험하다. 우리는 자기들이 행한 선한 일을 스스로 잊고 있던 자들이 그 일을 기억하여 그들의 영예가 되는 것을 본다.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을 보았나이까?(마 25:37)
3. 구제할 때에 이처럼 진실하고 겸손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무엇인가. 네 구제를 은밀하게 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그것을 보실 것이다. 주목하라. 우리가 우리의 선한 행위를 우리 자신은 가장 적게 의식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장 많이 주목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해진 부당한 일을 우리가 듣지 못할 때에도 들으시듯이(시 38:14,15), 우리가 행한 선을 우리가 보지 못할 때에도 보신다.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보신다는 것은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되지만,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위로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주목하시고 칭찬하시는 것뿐 아니라, 보응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친히 네게 갚으시리라. 주목하라. 구제할 때에 하나님께 자기를 인정받기를 힘쓰는 자들은, 단지 자기 자신을 그분께 자기 보수의 지불자(Paymaster)로 맡기는 것이다. 외식하는 자는 그림자를 붙잡으려 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실체를 확실히 손에 넣는다. 그것이 얼마나 힘주어 표현되었는지 주목하라. 친히 갚으시리라—그분께서 친히 갚으시는 분이 되실 것이다(히 11:6). 그것을 같은 것으로든 친절로든 채우시는 일은 그분께 맡기라. 아니, 그분께서는 친히 그 상이 되실 것이다(창 15:1), 곧 너의 지극히 큰 상이 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너의 아버지로서 네게 갚으실 것이니, 종이 벌어들인 것만큼만 정확히 주고 그 이상은 주지 않는 주인처럼이 아니라, 자기를 섬기는 아들에게 한없이 더 풍성하게, 아낌없이 주는 아버지처럼 갚으실 것이다. 아니, 그분께서는 네게 드러나게 갚으실 것이다. 비록 현세에서는 아닐지라도, 큰 날에는 그리하실 것이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곧 공개적인 칭찬이니, 네가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 일은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 상은 드러날 것이니, 그것이 더 나은 것이다.
⁵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⁶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⁷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⁸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에 있어서 우리는 구제에서보다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관계하게 되므로, 그만큼 더욱 진실해야 할 책임이 있다. 바로 이것이 여기서 우리에게 지시되는 바이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마 6:5).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가 기도한다는 것은 당연한 전제이다. 바울이 회심하자마자, 보라 그가 기도하더라. 숨 쉬지 않는 산 사람을 찾는 것이, 기도하지 않는 산 그리스도인을 찾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경건한 자는 다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기도하지 않는다면 은혜가 없는 것이다. "이제 너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며, 그들이 하는 대로 행하지 말라"(마 6:2). 주목하라. 외식하는 자들이 그들의 길과 행위에서 행하는 것과 같이 하지 않으려는 자는, 그 마음의 틀과 기질에서도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아무도 지목하시지 않지만, 마 23:13에 의하면 여기서 외식하는 자라 하실 때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가리키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에서 범한 큰 잘못이 두 가지 있었으니, 여기서는 그 각각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곧 헛된 영광을 구함(마 6:5,6)과, 중언부언함(마 6:7,8)이다.
I. 우리는 기도에서 교만하거나 헛된 영광을 구해서는 안 되며, 사람의 칭찬을 목표로 삼아서도 안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외식하는 자들의 방식과 관행이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행한 모든 경건의 행위에서, 그들이 노린 주된 것은 이웃에게 칭찬받는 것, 그리고 그로써 자기 자신을 위한 이권을 도모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기도 중에 위를 향해 솟아오르는 듯 보였을 때에도(기도가 옳다면, 그것은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다), 그때조차 그들의 눈은 아래를 향하여 이것을 자기들의 먹잇감으로 노리고 있었다. 주목하라.
(1.) 그들이 경건의 행위를 위해 택한 장소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회당에서 기도하였으니, 회당은 공적 기도에는 참으로 적절한 장소였으나 개인 기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로써 그들의 집회 장소를 영화롭게 하는 척하였으나, 실은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 한 것이었다. 그들은 큰 거리 어귀, 곧 가장 사람이 많이 다니는 넓은 거리(원어가 그런 뜻이다)에서 기도하였다. 그들은 마치 지체할 수 없는 경건한 충동에 사로잡힌 것처럼 그리로 물러갔으나, 실은 자기 자신을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거기, 두 거리가 만나는 곳에서, 그들은 양쪽 거리에서 다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 곁을 바싹 지나가는 행인마다 그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2.) 그들이 기도할 때 취한 자세. 그들은 서서 기도하였다. 이것은 기도에 합당하고 적절한 자세이지만(막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무릎 꿇는 것이 더 겸손하고 경건한 자세이므로(눅 22:41, 행 7:60, 엡 3:14), 그들이 서 있는 것은 교만과 자기 신뢰의 기미를 풍기는 것으로 보였다(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기도하되).
(3.) 이런 공개된 장소를 택하는 데서 드러난 그들의 교만. 이는 두 가지로 표현된다. [1.] 그들은 거기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들은 기도 자체를 위해 기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기도가 자기를 드러낼 기회를 줄 때에 그것을 사랑하였다. 사정에 따라 우리의 선행이 부득이 공개적으로 행해져, 다른 이들의 관찰 아래 들어가고 그들에게 칭찬을 받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이 교만한 기질을 충족시켜 준다는 이유로 거기에 기뻐할 때, 바로 거기에 죄와 위험이 있다. [2.]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었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를 흠모하고 갈채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또한 과부와 고아의 재산을 손쉽게 자기 손에 넣고(이렇게 경건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누가 신뢰하지 않겠는가?), 일단 그것을 차지하고 나면 의심받지 않으면서 삼켜버리고(마 23:14), 또 백성을 노예로 삼으려는 그들의 공적 음모를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4.) 이 모든 것의 결과,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들은 자기의 봉사에 대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보상을 다 받았으니, 그것은 보잘것없는 보상이다. 우리의 주인 되시는 분께서 잘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동료 종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은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고 있을 때처럼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그토록 큰 거래에서, 사람의 칭찬과 같은 그토록 보잘것없는 고려 사항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상의 전부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것을 행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보였으니, 그것이 그들에게 큰 유익이 되기를! 주목하라. 그들의 종교적 행위에 있어서 자기의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의 칭찬을 조금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사람에게가 아니며, 우리가 응답을 기대하는 것도 사람에게서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심판자가 될 수 없으니,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티끌과 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눈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영혼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마땅히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회당 예배에서, 우리는 자기 목소리를 높이 들리게 하던 자들처럼(사 58:4) 우리의 개인적 경건을 드러나게 하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한다. 공개된 장소는 개인적이고 엄숙한 기도에 적합하지 않다.
2. 이에 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가. 겸손과 진실함,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큰 교훈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이러이러하게 하라(마 6:6). 너는 특별히 너 혼자, 너 자신을 위하여. 개인 기도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의 본분이요 관행으로 전제된다.
주목하라. (1.) 이에 관하여 여기 주어진 지시들.
[1.]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는 대신, 네 골방에 들어가라, 곧 어떤 은밀하고 한적한 장소로 들어가라. 이삭은 들로 나갔고(창 24:63), 그리스도는 산으로, 베드로는 지붕 위로 갔다. 그 목적에만 부합한다면, 의식적인 면에서 부적합한 장소란 없다. 주목하라. 은밀한 기도는 한적한 곳에서 행해야 하니, 그래야 남의 눈에 띄지 않아 과시를 피할 수 있고, 방해받지 않아 산만함을 피할 수 있으며, 남이 듣지 않아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러하여 도저히 남의 주목을 피할 수 없다면, 그렇다고 이 본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 본분을 행함이 남의 눈에 띄는 것보다 그것을 빠뜨림이 더 큰 걸림돌이 될까 함이다.
[2.]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것을 행하는 대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내게, 곧 내게 하라(슥 7:5,6). 바리새인은 하나님께라기보다 사람에게 기도하였으니, 그들의 기도 형식이 어떠하든 그 의도하는 바는 사람의 갈채를 구하고 그들의 호의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것으로 네게 충분하게 하라. 그분께 아버지로서, 네 아버지로서 기도하라. 곧 기꺼이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너를 불쌍히 여기시고 돕고 구원하시기를 은혜로이 기뻐하시는 분으로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주목하라. 은밀한 기도에서 우리는 모든 곳에 임재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아무도 거기 없을 때에도 그분은 네 골방에 계시며, 네가 간구하는 바로 그 일 가운데서 특별히 네게 가까이 계신다. 은밀한 기도로 우리는 하나님께 그분의 보편적 임재의 영광을 돌리며(행 17:24), 그 위로를 우리 자신에게 취할 수 있다.
(2.) 이를 위해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격려들.
[1.] 네 아버지께서 은밀한 중에 보신다. 아무 사람의 눈도 너를 갈채하려고 네게 향하지 않을 때에도, 그분의 눈은 너를 받으시려고 네게 향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나다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하셨다(요 1:48). 그분은 바울이 어느 거리, 어느 집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셨다(행 9:11). 하나님을 향한 은밀하고 갑작스러운 한 가닥 한숨조차도 그분이 살피지 않으시는 것이 없다.
[2.] 그분이 네게 갚으시리라. 공개적으로 행하는 자들은 자기 상을 받거니와, 너는 은밀히 행한다 하여 네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그것을 상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빚에서가 아니라 은혜에서 나온 것이다. 구걸하는 데에 무슨 공로가 있겠는가? 그 상은 공개적일 것이니, 그들은 그것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영예롭게 받을 것이다. 외식하는 자들이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 공개적인 상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기다릴 인내가 없다. 진실한 자들은 그것에 대하여 죽은 자이지만, 그들은 도리어 그것을 덤으로 받을 것이다. 때로는 은밀한 기도가 이 세상에서 공개적으로 보상받기도 하니, 곧 그 기도에 대한 뚜렷한 응답을 통하여 그러하며, 이는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을 그 대적들의 양심 가운데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마지막 큰 날에 공개적인 상이 있을 것이니, 그때에 모든 기도하는 백성이 위대하신 중보자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바리새인은 온 동네 앞에서 자기 상을 받았으나, 그것은 한낱 섬광이요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참 그리스도인은 온 세상 앞에서, 천사와 사람 앞에서 자기 상을 받을 것이며, 그것은 영광의 중한 것이 될 것이다.
II. 우리는 기도에서 중언부언해서는 안 된다(마 6:7,8). 비록 기도의 생명은 영혼을 들어 올리고 마음을 쏟아 붓는 데 있지만, 그래도 말이 기도에서 차지하는 몫이 어느 정도 있으니, 특히 함께 드리는 기도에서 그러하다. 함께 드리는 기도에서는 말이 필요하며, 우리 구주께서 여기서 특히 그것을 말씀하시는 듯하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네가 기도할 때에라 하셨으나, 여기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라 하셨고, 또 뒤따르는 주기도문은 함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도에서는 남들을 대표하여 입이 되는 자가 언어와 표현의 과시에 가장 쉽게 유혹받는데, 여기서 우리는 바로 그것에 대해 경고를 받는다. 중언부언하지 말라. 혼자서든 다른 이들과 함께든 그리하지 말라. 바리새인은 이것을 좋아하였으니, 그들은 길게 기도하였고(마 23:14), 그들의 모든 관심은 기도를 길게 만드는 데 있었다. 이제 주목하라.
1. 여기서 책망받고 정죄받는 잘못이 무엇인가. 그것은 기도의 본분을 한낱 입술의 수고로, 곧 영혼의 봉사가 아닌 혀의 봉사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여기서 두 단어로 표현된다. 곧 *바톨로기아(Battologia), 폴리로기아(Polylogia)*이다. (1.) 중언부언—동어반복(tautology), 바톨로기(battology), 곧 아무 목적 없이 같은 말을 거듭하여 부질없이 지껄이는 것이니, 마치 *바투스(Battus)*가 "Sub illis montibus erant, erant sub montibus illis(저 산들 아래 있었네, 산들 아래 저들이 있었네)"라고 한 것과 같고, 어리석은 자의 장황함을 본뜬 전 10:14의 모방, 곧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후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어떤 담화에서든 무례하고 역겨운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께 아뢸 때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정죄되는 것은 기도에서 모든 반복이 아니라, 헛된 반복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으니(마 26:44), 이는 보통 이상의 간절함과 열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눅 22:44). 다니엘도 그러하였다(단 9:18,19). 또한 시 136:1-26에는 같은 말의 매우 우아한 반복이 있다. 이는 우리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고 다른 이들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데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뜻에는 아랑곳없이 미신적으로 말의 타령을 되뇌는 것—마치 천주교도들이 묵주를 굴리며 그토록 많은 아베마리아(Ave-Maria, 성모송)와 파테르노스테르(Paternoster, 주기도)를 외우는 것처럼—이나, 단지 기도를 그만한 길이로 늘이려고, 또 실제로는 아무 정성도 없으면서 정성 있는 척하려고 같은 것을 메마르고 무미하게 거듭 되풀이하는 것, 바로 이것들이 여기서 정죄되는 헛된 반복이다. 우리가 많은 말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핵심에 닿는 말은 많이 할 수 없을 때, 이것은 하나님과 모든 지혜로운 사람에게 거슬리는 것이다. (2.) 말을 많이 함, 곧 기도에서 장황함을 추구하는 것이니, 교만이나 미신에서 비롯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보를 듣거나 우리와 논쟁하셔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거나, 혹은 사람들이 자기 말소리 듣기를 좋아하는 까닭에 한낱 어리석음과 분별없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긴 기도가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고(눅 6:12), 솔로몬의 기도도 긴 기도였다. 우리의 사정과 정서가 비상할 때에는 때때로 긴 기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마치 기도를 늘이면 그것이 하나님께 더 기쁘게 되거나 더 효력 있게 되기라도 하는 양 단지 기도를 늘이려는 것, 바로 이것이 여기서 정죄되는 것이다. 정죄되는 것은 많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우리는 항상 기도하라는 명을 받았다. 정죄되는 것은 많이 말하는 것이다. 이 잘못의 위험은 우리가 단지 기도를 외울 뿐, 기도로 드리지 않을 때 있다. 이 경계는 솔로몬의 말씀으로 설명된다(전 5:2). 너는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 곧 신중히 헤아려 잘 따져 본 말이어야 한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호 14:2), 말을 가려서(욥 9:14),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하지 말라.
2. 이에 반하여 제시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1.) 이것은 이방인이 행하는 대로, 곧 이방인의 방식이다. 이방인이 자기 신을 섬기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자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이방인은 본성의 빛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가르침을 받았으나, 그들의 예배 대상에 관하여 그 생각이 허망하게 되었으니, 그 예배의 방식에 관하여서도, 특히 이 점에 있어서도 그렇게 된 것이 이상할 것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과 똑같은 분으로 여겨, 자기들에게 한 말을 그분이 알아들으시게 하거나 그분이 자기들의 요청에 응하도록 만들려면 많은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마치 그분이 약하고 무지하며 간청에 잘 응하지 않으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하여 바알의 제사장들은 아침부터 거의 저녁까지 중언부언하기에 열을 올렸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그러나 그것은 헛된 간구였다. 반면 엘리야는 진중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매우 간결한 기도를 드려, 먼저 하늘에서 불을, 그다음에는 비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왕상 18:26,36). 기도에서의 입술의 수고는 아무리 잘 수고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부라면 한낱 헛된 수고일 뿐이다.
(2.) "그것이 너희의 방식이 될 필요가 없으니, 너희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셔서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토록 많은 말을 늘어놓을 까닭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너희가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너희가 그분을 향한 필요와 그분께 대한 의존을 인정하고 그분의 약속들을 의지하도록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너희는 너희의 사정을 펼쳐 놓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부은 다음, 그것을 그분께 맡길 것이니라." 생각해 보라. [1.]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창조로 말미암아, 또 언약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드리는 우리의 간구는 마땅히 편안하고 자연스러우며 꾸밈없어야 한다. 자녀들은 무엇을 원할 때 부모에게 긴 연설을 늘어놓지 않는다.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면 족하다. 우리는 자녀의 심정으로, 곧 사랑과 경외와 의존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자. 그리하면 그들은 많은 말이 필요 없으니, 양자의 영을 받아 아바 아버지라는 그 한마디를 옳게 말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분은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아버지요, 우리의 필요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 그분의 눈은 온 땅을 두루 살피사 자기 백성의 궁핍을 헤아리시며(대하 16:9), 종종 우리가 부르기 전에 주시고(사 65:24),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신다(엡 3:20). 만일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그들이 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그것이 필요 없으며 그들에게 유익하지 않음을 그분이 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판단하는 것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판단하시기에 더 합당하시다.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아뢰는 데 길게 할 필요도, 많은 말을 쓸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것보다 그것을 더 잘 아시기 때문이다. 다만 그분은 그것을 우리에게서 들으시고자 하실 따름이니(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가 그분께 그것이 무엇인지 아뢰고 나면,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겨야 한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나이다(시 38:9). 하나님은 우리 기도의 길이나 언변에 좌우되시기는커녕, 가장 능력 있는 중보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드려지는 것이다(롬 8:26). 우리는 하나님께 처방하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서명하여 순복해야 한다.
⁹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¹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¹¹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¹²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¹³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¹⁴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¹⁵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리스도께서 잘못된 것을 책망하신 후에는, 더 나은 것을 행하도록 인도하신다. 이는 그분의 책망이 가르침을 위한 책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하므로, 그분은 여기서 우리 입에 말을 넣어 주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 기도의 의무에 너무나 많은 부패가 스며들었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기도를 위한 새로운 지침서를 주실 필요가 있다고 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에게 그들의 기도가 통상적으로 어떤 내용과 어떤 순서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보여 주셨는데, 그분은 이를 하나의 정형 기도문으로도 능히 사용될 수 있는 말씀으로 주셨다. 즉, 우리 기도의 여러 항목들의 요약 또는 개요로서 주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오직 이 형식만을, 또는 항상 이것만을 사용하도록 매여 있다는 뜻은 아니다. 마치 이것이 우리의 다른 기도들을 거룩하게 하는 데 필수적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방식으로, 이러한 말로, 또는 이러한 취지로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누가복음에 있는 것은 이것과 다르며, 우리는 그것이 사도들에 의해 사용된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나중에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이 부어지셨을 때 임한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배운다.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을 하나의 정형 기도문으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며, 이는 성도의 교제의 보증이 된다. 이는 적어도 (휘트비 박사가 말하듯이) 3세기 이래로 모든 시대의 교회에 의해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주님의 기도이며, 그분이 친히 지으시고 친히 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매우 포괄적인데, 이는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 내용은 정선되었고 필수적이며, 그 방법은 교훈적이고, 그 표현은 매우 간결하다. 그것은 적은 분량 속에 많은 것을 담고 있으니, 우리가 그 뜻과 의미를 익히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이 기도가 깨달음으로, 그리고 헛된 반복 없이 사용될 때에만 그만큼 합당하게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은 (사실 모든 기도가 그러하듯이) 땅에서 하늘로 보내는 한 통의 편지이다. 여기에는 편지의 수신인, 곧 편지가 보내지는 대상이 있으니 우리 아버지요, 그 장소는 하늘이다. 그 내용은 여러 청원의 사연들로 되어 있고, 그 맺음말은 대개 나라가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이며, 그 봉인은 아멘이다. 그리고 원한다면 날짜도 있으니, 곧 오늘이다.
쉽게 말하면, 이 기도에는 세 부분이 있다.
I. 서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의 용무로 들어가기 전에, 그 용무의 상대가 되시는 분께 먼저 엄숙히 아뢰는 것이 있어야 하니, 곧 우리 아버지이다. 이는 우리가 혼자서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이며, 서로 교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곧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하며, 성인들이나 천사들에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우리에 대해 알지 못하고, 우리가 기도 중에 드리는 높은 존귀를 받아서도 안 되며, 우리가 기대하는 은혜를 베풀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우리 자신을 아뢰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분께 어떤 칭호를 드려야 하는지를 배운다. 그 칭호는 그분을 위엄 있는 분이라기보다는 은혜로우신 분으로 일컫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 아버지로 아뢰어야 하며, 반드시 그렇게 불러야 한다. 그분은 창조로 말미암아 온 인류의 공통된 아버지가 되신다(말 2:10; 행 17:28). 그분은 특별한 방식으로, 곧 양자 됨과 거듭남을 통해 성도들의 아버지가 되시며(엡 1:5; 갈 4:6), 이는 형언할 수 없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중에 그분을 이렇게 바라보아야 하며, 그분에 대해 격려가 되고 두려움이 되지 않는 좋은 생각들을 품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기쁨이 되고 우리 자신에게 더 즐거운 것은 없다. 그리스도께서도 기도하실 때 대부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다. 만일 그분이 우리 아버지시라면,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과 무력함 가운데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시 103:13), 우리를 아끼시며(말 3:17), 비록 매우 부족할지라도 우리의 행위를 가장 좋게 받아 주시며,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다(눅 11:11-13).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가듯 담대히 그분께 나아갈 수 있으며,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와 양자의 영을 모시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탕자가 그러했듯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라보아야 하며(눅 15:18; 렘 3:19), 우리가 은혜와 평강과 아들들의 기업과 복을 간구하러 나아갈 때, 우리가 화목하지 못한, 복수하시는 재판장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화목하게 되신 아버지로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격려가 된다(렘 3:4).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서: 그분은 하늘에 계시지만 동시에 다른 모든 곳에도 계시니, 이는 하늘이 그분을 가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거기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의미에서 하늘에 계시니, 이는 하늘이 그분의 보좌이기 때문이며(시 103:19),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의 보좌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그곳을 향하여 드려야 하니, 이는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히 8:1). 하늘은 보이지 않는 곳이요 영들의 세계이므로, 우리가 기도 중에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는 영적이어야 한다. 그곳은 높은 곳이므로, 우리는 기도 중에 세상 위로 들려 올라가 우리의 마음을 들어야 한다(시 5:1). 하늘은 완전히 순결한 곳이므로, 우리는 그러므로 정결한 손을 들어야 하고, 그 거룩한 곳에 거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신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레 10:3).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인생들을 굽어보시며(시 33:13,14), 우리는 기도 중에 그분의 눈이 우리 위에 계심을 보아야 한다. 그곳에서 그분은 우리의 모든 궁핍과 짐과 소원과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충만히 그리고 명확히 보고 계신다. 하늘은 또한 그분의 조망의 궁창일 뿐 아니라 그분의 권능의 궁창이기도 하다(시 150:1). 그분은 아버지로서 우리를 도우실 능력이 있으시고, 우리를 위해 큰일을,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일을 행하실 능력이 있으실 뿐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울 것을 가지고 계시니, 이는 모든 좋은 은사가 위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시므로 우리는 담대히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므로, 우리는 경외함으로 나아가야 한다(전 5:2).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큰 목표와 일치해야 하니, 그 목표는 곧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늘, 곧 우리의 모든 생활의 목적이 모든 기도에서 특별히 주목되어야 한다. 거기에 우리 모두가 향해 가는 중심이 있다. 기도로써 우리는 우리가 가고 있다고 고백하는 그곳으로 우리 자신을 미리 보내는 것이다.
II. 청원, 그리고 그것은 여섯 가지이다. 처음 세 가지는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관한 것이고, 나중 세 가지는 일시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우리 자신의 관심사에 관한 것이다. 마치 십계명에서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고, 나중 여섯 계명은 우리 이웃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 기도의 순서는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그런 다음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것을 소망하도록 가르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것은 다른 곳에서 성결하게 하다로 번역되는 것과 같은 단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옛 단어인 거룩히 여김을 받다(hallowed)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니, 이는 다만 사람들이 주기도문에서 그 단어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1.)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것은 청원으로서가 아니라 경배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곧 여호와는 위대하시도다 또는 영화로우시도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그분의 모든 완전하심의 위대함이요 영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을 찬미함으로 시작해야 하며, 그분이 먼저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매우 합당하다. 또한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자비와 은혜 받기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합당하다. 그분으로 하여금 그분의 완전하심에 대한 찬미를 받으시게 하고, 그런 다음 우리가 그 완전하심의 유익을 누리게 하라. (2.)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정하는데, 이는 마땅히 지향해야 할 올바른 목적이며, 우리의 모든 청원에서 우리의 으뜸가고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하니, 곧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우리의 다른 모든 간구는 이것에 종속되어야 하고 이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있어야 한다. "아버지여, 제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의 죄를 사하심으로 아버지 자신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등등.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통하여 나오므로, 모든 것이 그분께로 돌아가고 그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기도 중에 우리의 생각과 정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해 나아가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자기 기도의 으뜸 목적으로 삼았으나(마 6:5,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와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의 으뜸 목적으로 삼도록 인도함을 받는다. 우리의 모든 청원으로 하여금 이것에 중심을 두고 이것에 의해 규제받게 하라. "아버지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 영광을 위하는 한도까지, 저를 위해 이러이러한 일을 행하옵소서." (3.)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곧 하나님 자신이, 그분이 자신을 알리신 모든 것에서, 우리와 다른 이들에 의해, 그리고 특별히 그분 자신에 의해 거룩하게 되고 영화롭게 되기를 갈망하고 기도한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아버지로서,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서 영화롭게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선하심과 높으심, 아버지의 위엄과 자비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옵소서, 이는 그것이 거룩한 이름이기 때문이옵니다. 우리의 더럽혀진 이름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사오나, 주여,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기를 기도할 때, [1.] 우리는 부득이한 일을 미덕으로 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방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시 46:10). [2.] 우리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 확실한 것을 구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구주께서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 때,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또다시 영화롭게 하리라고 즉시 응답되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 청원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이때 전파하셨던 교리, 곧 그 이전에 세례 요한이 전파했고 그분이 나중에 사도들을 보내어 전파하게 하신 교리—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를 가리킨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나라, 곧 메시아의 나라, 이것이 가까이 왔으니, 그것이 임하기를 기도하라. 주목하라, 우리는 우리가 듣는 말씀을 기도로 바꾸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이 그것에 응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시는가? 우리의 마음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응답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말씀을 두고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전파할 때, 아버지여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이는 약속이 기도를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도를 촉진하고 격려하기 위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속의 성취가 가까이 와서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천국이 가까이 왔을 때, 우리는 그때 더욱 간절히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마치 다니엘이 이스라엘의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깨달았을 때 그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기로 얼굴을 향했던 것과 같다(단 9:2). 눅 19:11을 보라. 하나님께 드리는 유대인들의 매일의 기도는 이러했다. 그로 하여금 그의 나라가 다스리게 하시고, 그의 구속이 번성하게 하시며, 그의 메시아가 와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게 하옵소서. 휘트비 박사, 비트링가에서 인용함.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복음이 모두에게 전파되고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게 하옵소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그의 말씀 가운데 주신 증거에 동의하고, 그를 자기의 구주와 주권자로 영접하게 하옵소서. 복음 교회의 경계가 확장되고,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며, 모든 사람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 그들의 신분에 합당하게 살게 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우리와 다른 이들이 그 나라의 모든 법과 규례에 순종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했음이 드러나게 하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라. 그리고 이로써 그 나라가 하늘의 나라로서 임했음이 드러나게 하라, 그 나라로 하여금 땅 위에 하늘을 들이게 하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이라 부르면서 그분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을 단지 이름뿐인 군주로 만드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다스리시기를 기도한 후에는, 우리가 모든 일에서 그분의 다스림을 받게 되기를 기도한다. 관찰하라, (1.) 기도하는 그 대상, 곧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주여, 저와 저의 것에 대하여 주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옵소서(삼상 3:18). 저는 제 자신을 주께 맡기오며, 저에 관한 주의 모든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흡족히 만족하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 "주께 기쁨이 되는 것을 제가 행하도록 능력을 주시옵고, 주의 뜻을 바르게 아는 것과 그것에 합당하게 순종하는 데 필요한 그 은혜를 제게 주시옵소서. 주의 뜻이 저와 다른 이들에 의해 양심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시고, 우리 자신의 뜻이나 육신이나 마음의 뜻이나, 사람의 뜻(벧전 4:2)이나, 더욱이 사탄의 뜻(요 8:44)대로 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지 않게 하옵시고(ut nihil nostrum displiceat Deo, 우리의 어떤 것도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어떤 일에도 우리가 불쾌해하지 않게 하옵소서(ut nihil Dei displiceat nobis, 하나님의 어떤 것도 우리를 불쾌하게 하지 않도록)." (2.) 그것의 본보기, 곧 우리의 시련과 시험의 이곳, 즉 우리의 일이 행해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결코 행해지지 않을 이곳인 땅에서도, 그 안식과 기쁨의 처소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준행함으로써 땅이 더욱 하늘과 같이 되기를 기도하며(사탄의 뜻이 우세함으로 인해 지옥과 그토록 가까운 친족이 되어 버린 이 땅이), 또 성도들이 그들의 헌신과 순종에 있어서 거룩한 천사들과 더욱 같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땅 위에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아직 땅 아래에 있지 않다. 우리는 오직 살아 있는 자들만을 위하여 기도하며, 잠잠한 데로 내려간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의 본성적인 존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영적인 안녕에 필수적이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와 뜻에 관한 것들 다음에, 우리는 이 현세 생명의 필수적인 부양과 위안을 위하여 기도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분께 구해야 하는 것이다. Ton arton epiousion(τὸν ἄρτον ἐπιούσιον)—다가오는 날을 위한 양식, 곧 우리 생애의 남은 모든 날을 위한 양식이다. 장차 올 시간을 위한 양식, 또는 우리의 존재와 생계를 위한 양식, 곧 세상에서 우리의 형편에 합당한 것이며(잠 30:8), 우리의 지위와 처지에 따라 우리와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양식이다.
여기서 모든 단어에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1.) 우리는 양식을 구한다. 이는 우리에게 절제와 절도를 가르친다. 우리는 진미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치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을 구하니, 곧 비록 까다롭지 않을지라도 건강에 유익한 것을 구한다. (2.) 우리는 우리의 양식을 구한다. 이는 우리에게 정직과 근면을 가르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빼앗은 양식을 구하지 않으며, 속이는 양식(잠 20:17)도, 게으름의 양식(잠 31:27)도 아니라, 정직하게 얻은 양식을 구한다. (3.) 우리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이는 우리에게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고(마 6:34),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자들처럼 끊임없이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도록 가르친다. (4.)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간구하니, 팔거나 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주시기를 간구한다.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도 그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하나님의 자비에 빚져야 한다. (5.) 우리는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저에게만이 아니라 저와 함께 다른 이들에게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이는 우리에게 자비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 대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르친다. 또한 이는 우리가 우리 가족과 함께 기도해야 함을 시사한다. 우리와 우리 식구들이 함께 먹으니, 그러므로 함께 기도해야 마땅하다. (6.)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오늘 주시기를 기도한다. 이는 우리의 몸의 필요가 새로워지듯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 영혼의 갈망을 새롭게 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친다. 날이 어김없이 돌아오듯이, 우리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하며, 우리가 기도 없이 하루를 지내느니 차라리 음식 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다고 여겨야 한다.
(1.) 하나의 청원,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우리 죄를, 곧 아버지께 진 우리의 빚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주목하라, [1.] 우리의 죄는 우리의 빚이다. 피조물로서 우리가 우리 창조주께 마땅히 드려야 할 의무의 빚이 있는데, 우리는 그 빚에서 면제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갚지 못함으로 형벌의 빚이 생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다하지 못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 처할 위험에 놓이게 되며, 율법의 명령을 지키지 못함으로 그 형벌에 매이게 된다. 채무자가 소송을 당하기 쉬운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며, 범죄자가 율법에 대한 채무자인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다. [2.] 우리의 마음의 소원과 우리 하늘 아버지께 드리는 매일의 기도는, 그분이 우리의 빚을 사하여 주시는 것이어야 한다. 곧 형벌에 대한 의무가 취소되고 무효화되어 우리가 정죄에 이르지 않게 되며, 우리가 면제받고 그 위안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죄의 사면을 청구함에 있어서 우리가 의지할 큰 변론은, 우리의 보증인이신, 아니 차라리 그 소송에 대한 보석인이 되어 우리의 면제를 떠맡으신 주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사람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이루신 만족이다.
(2.) 이 청원을 강화하는 하나의 논거, 곧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이것은 공로의 변론이 아니라 은혜의 변론이다. 주목하라, 자기가 하나님께 지은 죄의 용서를 구하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자기에게 잘못한 자들을 용서하는 것을 양심적으로 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주기도문을 외울 때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무는 우리의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이다. 돈의 빚에 관하여는, 우리가 자기와 자기 가족을 파멸시키지 않고는 갚을 수 없는 자들에게서 그것을 가혹하고 엄격하게 받아 내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손해의 빚이다. 우리의 빚진 자들은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 곧 우리를 친 자들이며(마 5:39,40), 율법의 엄밀함에 따르면 그로 인해 고소를 당할 수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진 모욕과 우리가 당한 부당함을 참고, 용서하고, 잊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죄와 평강을 위한 하나의 도덕적 자격이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리라는 소망을 격려해 준다. 이는 만일 우리 안에 이 은혜로운 성향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며, 그러므로 그분 자신 안에 탁월하고 초월적으로 있는 완전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분께서 용서의 조건을 우리 안에 이루셨으므로 그분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1.) 부정적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죄의 죄책이 제거되기를 기도한 후에, 우리는 마땅한 대로, 우리가 결코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기를, 우리가 그것에 유혹받지 않기를 기도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누구를 죄에 유혹하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겨서가 아니다. 오히려, "주여, 사탄을 우리에게 풀어 놓지 마옵소서. 저 우는 사자를 매어 두옵소서. 이는 그가 간교하고 악의에 차 있기 때문이옵니다. 주여,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내버려 두지 마옵소서(시 19:13). 이는 우리가 매우 연약하기 때문이옵니다. 주여, 우리 앞에 걸림돌과 올무를 두지 마옵시고, 우리를 넘어질 기회가 될 만한 상황에 빠뜨리지 마옵소서." 시험은 마땅히 기도로 막아야 하니, 이는 그것들이 주는 불안과 괴로움 때문이며, 또한 그것들에 의해 정복당할 위험과, 그 뒤에 따라오는 죄책과 슬픔 때문이다.
(2.) 긍정적으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apo tou ponerou(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악한 자에게서, 곧 마귀, 유혹하는 자에게서이다. "우리를 지키사, 우리가 그에게 공격받지 않게 하시거나, 혹은 그 공격에 정복당하지 않게 하옵소서." 또는 악한 것, 곧 죄, 곧 가장 악한 것에게서이다. 그것은 하나의 악이요 오직 악일 뿐인 것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여 이르게 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멸하는 그 악한 것이다. "주여, 우리를 세상의 악에서, 곧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 있는 부패에서 구하옵소서. 세상에 있는 모든 형편의 악에서, 죽음의 악에서, 죄인 죽음의 쏘는 것에서 구하옵소서.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에서 우리를 구하옵소서. 악한 사람들에게서 우리를 구하사, 그들이 우리에게 올무가 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III. 결론: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어떤 이들은 이것을 다윗의 송영(대상 29:11)과 관련짓는다. 여호와여 위대하심이 주께 있사오니. 이것은,
앞의 청원들을 강화하는 하나의 변론의 형식이다. 우리가 기도 중에 하나님과 더불어 변론하며 우리 입에 논거를 채우는 것(욥 23:4)이 우리의 의무이니, 이는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감동시키기 위함이요, 믿음을 격려하고 우리의 열심을 일으키며 그 둘을 다 입증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기도 중에 가장 좋은 변론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이 자신에 관하여 알리신 것으로부터 취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변론의 성격에 있어서나 그것을 간절히 호소하는 데 있어서나, 그분 자신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과 씨름해야 한다. 여기의 변론은 특별히 처음 세 청원과 관련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이는 나라가 아버지께 있기 때문이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는 권세가 아버지께 있기 때문이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이는 영광이 아버지께 있기 때문이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특정한 사연들에 관하여도, 이것들은 격려가 된다. "나라가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통치권과, 그 안에 있는 아버지의 기꺼운 백성인 성도들의 보호를 가지고 계시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처럼 주시고 왕처럼 구원하신다. "권세가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곧 그 나라를 유지하고 지탱하시며, 아버지의 백성에게 하신 모든 언약을 이루실 권세이옵니다."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곧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성도들을 위해 행해지는 그 모든 것의 목적으로서의 영광이옵니다. 이는 그들의 찬송이 그분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도 중의 위안과 거룩한 확신의 근거이다.
이것은 찬미와 감사의 형식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변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을 찬미하는 것이다. 이는 더 큰 자비를 얻는 길이니,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모든 아룀에 있어서, 찬미가 상당한 몫을 차지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는 찬송은 성도들에게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은 이름과 찬송을 위해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당하고 공평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분이 그것을 필요로 하셔서가 아니라—그분은 천사들의 세계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그분이 그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그 목적에 부응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찬미는 하늘의 일이요 행복이니, 장차 하늘에 가고자 하는 모든 자는 지금 그들의 하늘을 시작해야 한다. 주목하라, 이 송영이 얼마나 충만한지를. 나라와 권세와 영광, 그것이 모두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주목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함에 있어서 풍성한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다. 참된 성도는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존귀하게 말할 수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은혜로운 유창함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영원토록 있어야 한다. 영원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것이 영원히 마땅히 드려져야 한다는 인정과, 저 위의 천사들과 성도들과 함께 그것을 영원히 행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을 시사한다(시 71:14).
끝으로, 이 모든 것에 우리는 아멘, 곧 "그대로 될지어다"를 덧붙이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하나님의 아멘은 허락이시니, 그분의 피아트(fiat)는 "그렇게 될지어다"이다. 우리의 아멘은 단지 요약된 갈망일 뿐이니, 우리의 피아트는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이다. 우리가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들으심을 받는다는 우리의 갈망과 확신의 표시로서이다. 아멘은 앞서 나온 모든 청원과 관련되며, 그리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가운데, 우리는 그 전체를 한 단어로 묶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그렇게 하여, 개개의 항목에서 우리가 놓치고 흘려보낸 것을 전체로서 모아들이는 것이다. 종교적 의무를 어떤 따뜻함과 활기로 마무리하여, 우리의 심령에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고 그것을 떠나는 것이 좋다. 모든 기도의 끝에 아멘을 들리게 말하는 것은 예로부터 선한 사람들의 관행이었으며, 이는 칭찬할 만한 관행이다. 다만 사도가 지시하는 대로(고전 14:16) 깨달음으로 행하고, 또한 정직하게, 생명과 생기를 가지고, 갈망과 확신의 그 외적 표현에 부응하는 내적 표현을 가지고 행하는 한에서이다.
주기도문의 청원들 대부분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예배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해 온 것들이거나 같은 취지의 말들이었다. 그러나 다섯째 청원의 그 구절, 곧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구주께서는 여기서 무슨 이유로 그것을 덧붙이셨는지를 보이신다. 그것은 그 세대 사람들의 까다로움과 소송을 즐기는 성미와 악한 본성에 대한 어떤 개인적인 비난에서가 아니라—비록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지만—오직 그 일 자체의 필요성과 중요성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심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를 해친 자들을 용서하는가에 특별히 주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죄를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는 그 의무를 양심적으로 행하고 있음을 언급해야 하니, 이는 단지 우리 자신에게 그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그것에 매어 두기 위해서이다. 저 비유(마 18:23-25)를 보라. 이기적인 본성은 이것에 응하기를 꺼리므로, 여기서 이것이 거듭 강조된다(마 6:14,15).
약속으로. 너희가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시리라. 이것이 마치 요구되는 유일한 조건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회개와 믿음과 새로운 순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은혜들이 참되게 있는 곳에는 이것도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우리의 다른 은혜들의 진실함에 대한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자기 형제에게 마음이 누그러지는 자는, 그로써 자기가 자기 하나님께 회개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그 기도에서 빚이라고 불린 것들이 여기서는 과실이라고 불리니, 곧 손해의 빚, 우리의 몸이나 재물이나 명예에 가해진 부당함이다. 과실(trespasses)은 잘못에 대한 완화된 표현이니, paraptomata(παραπτώματα)—비틀거림, 실족, 넘어짐이다. 주목하라, 우리에게 가해진 손해를 완화하고 변명해 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데 좋은 증거이자 좋은 도움이 된다. 그것들을 반역이라 부르지 말고 과실이라 부르며, 고의적인 손해가 아니라 우연한 부주의라 하라. 혹시 그것은 실수였을지도 모른다(창 43:12). 그러므로 가장 좋게 받아들이라. 우리가 용서받기를 소망하는 만큼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의를 품거나 복수를 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가 우리에게 가한 손해로 그를 책망하거나 그에게 닥치는 어떤 해를 기뻐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그를 기꺼이 돕고 그에게 선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만일 그가 회개하고 다시 화친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전과 같이 그와 자유롭고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
경고로. "그러나 너희에게 해를 끼친 자들을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너희가 다른 요구되는 조건들을 갖추지 못하였고 도리어 사죄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는 나쁜 표징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아버지라 부르며, 또 아버지로서 합당한 조건으로 너희에게 그의 은혜를 베푸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리고 만일 다른 은혜는 진실하나 용서하는 일에서 크게 부족하다면, 너희는 너희 사죄의 위안을 기대할 수 없고, 도리어 이런저런 고난으로 너희 심령이 꺾여서 이 의무에 응하게 될 것이다." 주목하라, 하나님께 자비를 얻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우리가 그분께 진노함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지 않는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그의 은총의 손을 펴실 것을 기대할 수 없다(딤전 2:8). 만일 우리가 진노 가운데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노 가운데 응답하실까 두려워할 이유가 있다. 분노 중에 드린 기도는 쓸개즙으로 기록된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우리 형제들이 우리에게 진 몇 푼의 빚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분께 진 달란트의 빚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셔야 할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한 화평의 중재자로서 세상에 오셨으니, 단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화목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일에서 우리는 반드시 그분께 응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그토록 강조하시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주제넘음이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다. 사람의 정욕이 하나님의 말씀을 좌절시킬 수 없을 것이다.
¹⁶ 또 너희가 금식할 때에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¹⁷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¹⁸ 이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는 여기서 앞서 구제와 기도에서 그러했듯이 금식에서도 외식하지 말 것을 경계받는다.
I. 여기서는 종교적 금식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의무임을 전제한다. 곧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 가운데 그것으로 부르실 때,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자기 영혼의 형편이 그것을 요구할 때이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여기서 금식이 맨 마지막에 놓인 것은, 그것이 금식 자체를 위한 의무라기보다는 다른 의무들을 감당하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기도가 구제와 금식 사이에 들어오는 것은, 기도가 그 둘의 생명이요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특별히 사적인 금식, 곧 개개인이 경건한 유대인들 사이에서 흔히 행해지던 자원하는 예물로서 스스로에게 정하는 그런 금식을 말씀하신다. 어떤 이들은 매주 하루를, 어떤 이들은 이틀을 금식했고, 다른 이들은 합당하다고 여기는 대로 더 드물게 금식했다. 그런 날에는 해가 질 때까지 먹지 않았고, 그 후에도 매우 절제하여 먹었다. 그리스도께서 정죄하신 것은 바리새인이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랑한 것이었다(눅 18:12). 그것은 칭찬할 만한 관습이며, 그것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토록 일반적으로 소홀히 여겨지는 것을 우리는 탄식할 이유가 있다. 안나는 금식에 힘썼고(눅 2:37), 고넬료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행 10:30).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금식에 힘썼으니 행 13:3, 14:23을 보라. 사적인 금식은 고전 7:5에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자기 부인이요 육체의 죽임이며, 우리 자신에 대한 거룩한 복수요,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의 겸손이다.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이로써 자기에게 자랑할 것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자기가 매일의 양식조차 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육체와 그 욕망을 억제하는 수단이요, 우리를 종교적 활동에 더욱 활기차게 만드는 수단이니, 배부름이 우리를 졸리게 하기 쉬운 것과 같다. 바울은 여러 번 굶었고, 그리하여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였다.
II. 우리는 이 일을 외식하는 자들이 한 것처럼 행하지 말 것을 경계받으니, 이는 그 상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의무에 따르는 어려움이 클수록 그 상을 잃는 것은 더 큰 손실이다.
자, 1. 외식하는 자들은 금식을 가장했으니, 그 의무의 생명이요 영혼인 영혼의 통회나 겸손이 그들 안에 전혀 없었다. 그들의 것은 거짓 금식이요, 실체 없는 겉모습과 그림자였다. 그들은 실제보다 더 겸손한 체하였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속이려 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모욕을 그분께 끼칠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금식은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지, 갈대같이 머리를 숙이는 것도 아니요,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이것을 금식이라 부른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사 58:5). 육체의 연단은 그것이 전부라면 유익이 적으니, 그것은 하나님께, 곧 그분께 드리는 금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III. 우리는 사적인 금식을 어떻게 행할지에 대한 지침을 받으니, 우리는 그것을 은밀히 지켜야 한다(마 6:17, 18).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금식해야 하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형편이 각기 다르고, 지혜가 그 일을 지도하는 데 유익하다. 말씀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마음 안에 계신 성령께 그것을 맡기셨다. 다만 이것을 규칙으로 삼으라. 곧 너희가 언제 이 의무를 떠맡든지, 그 안에서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게 하기를 힘쓰고,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얻으려 하지 말라. 겸손이 언제나 우리의 자기 낮춤에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금식의 실재를 조금이라도 줄이라고 지시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약간의 고기나 약간의 음료나 약간의 강장제를 들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몸은 고생하게 하되, 그것의 겉치레와 외양은 치워 버리라. 평소의 표정과 모습과 옷차림으로 나타나라. 그리고 네 몸의 음식을 스스로 끊으면서도, 그것이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 그렇다, 네게 가장 가까운 자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게 하라.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평일에 하듯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일부러 네 경건을 감추기 위해서다. 그리하면 결국 그것의 칭찬에서 너는 결코 손해 보지 않으리니, 비록 그것이 사람에게서 오는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올 것이기 때문이다." 금식은 영혼을 괴롭게 하는 것이니(시 35:13), 그것이 그 의무의 속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너의 주된 관심으로 삼고, 그 겉에 관하여는 그것이 보이기를 탐하지 말라. 우리가 엄숙한 금식에서 진실하고 겸손하며, 우리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우리의 상으로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은밀한 중에 보셨고 또한 밝히 갚으실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종교적 금식은 바르게 지켜진다면 머지않아 영원한 잔치로 보상받을 것이다. 우리의 사적인 금식에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우리를 사람들의 갈채에 대하여도(우리는 이것을 바라고 그 의무를 행해서는 안 된다), 또한 사람들의 비난에 대하여도(우리는 그것이 두려워 그 의무를 피해서는 안 된다) 죽은 자가 되게 해야 한다. 다윗의 금식은 도리어 그의 비방거리가 되었으나(시 69: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69:13(원문 마 6:13으로 표기됨)에서 나로 말하면, 그들이 나를 두고 무엇이라 말하든지, 나의 기도는 주를 향하여 받으실 만한 때에 있나이다.
¹⁹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²⁰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²¹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²²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²³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²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세상적 마음(worldly-mindedness)은 다른 어떤 것 못지않게 흔하고도 치명적인 외식(外飾, hypocrisy)의 징후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눈에 보이고 그럴듯한 신앙 고백의 외투 아래 이보다 더 확실하고 단단하게 영혼을 붙드는 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칭찬을 탐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후에 이어서 세상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그들이 하는 대로 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들이 범하는 근본적인 오류는 세상을 자기의 상급으로 택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보물과 목적과 주인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 외식과 세상적 마음을 조심해야 한다.
I. 우리가 쌓아 두는 보물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사람마다 무언가를 자기의 보물, 자기의 분깃으로 삼는데, 거기에 그의 마음이 쏠려 있고,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거기로 가져가며, 장래를 위하여 거기에 의지한다. 그것이 바로 솔로몬이 그토록 강조하여 말한 그 선(善), 그 최고선(最高善)이다(전 2:3). 영혼은 무언가를 가지려 하는데, 그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고, 다른 무엇보다 거기서 만족과 신뢰를 느낀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서 보물을 빼앗으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 우리를 인도하려 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본다.
보이는 것들, 곧 잠시뿐인 것들을 우리의 가장 좋은 것으로 삼고 거기에 우리의 행복을 두지 말라는 선한 경고.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으니, 그들로 하여금 여전히 그 선한 마음을 지키게 하라. 보물이란 그 자체로, 적어도 우리의 생각으로는, 귀하고 값지며 장차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어떤 것의 풍부함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아 두어서는 안 되니, 곧 (1.) 우리는 이런 것들을 가장 좋은 것으로, 그 자체로 가장 값진 것으로,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라반의 아들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것을 영광이라 불러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것이 뛰어난 영광에 비하면 아무 영광도 없음을 보고 인정해야 한다. (2.) 우리는 이런 것들의 풍부함을 탐내거나, 사람들이 자기 보물에 더하듯이 결코 충분함을 알지 못한 채 더욱더 그것을 움켜쥐고 거기에 더하려 해서는 안 된다. (3.) 우리는 장래를 위하여, 곧 다가올 때에 우리의 보장과 공급이 되도록 그것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금에게 너는 나의 소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4.)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전부로 여겨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나가는 길의 양식으로는 적은 것에 만족할지언정, 우리의 분깃으로는 그 전부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을 우리의 위로(눅 6:24)로, 우리의 좋은 것(눅 16:25)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쌓아 두는 것은 이 세상의 우리 후손을 위함이 아니라, 저 세상의 우리 자신을 위함임을 생각하자. 우리는 선택의 자리에 놓여 있으며,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우리의 몫을 새기는 자가 되었다. 곧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쌓아 두는 것이 우리의 것이다. 너는 지혜롭게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너는 너 자신을 위하여 선택하는 것이며, 네가 선택한 대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하여 지음받았는지,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크며 우리의 존속이 얼마나 긴지,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곧 우리 자신임을 알고 깊이 생각한다면,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땅 위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의 보물로 여겨서는 안 되는 선한 이유가 주어진다. 곧 그것은 손실과 부패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1.) 내부의 부패로부터. 땅 위에 있는 보물은 좀과 동록이 해한다. 보물을 좋은 옷에 쌓아 두었다면, 좀이 그것을 갉아먹어, 우리가 가장 안전하게 두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어느새 사라지고 망가져 버린다. 곡식이나 다른 먹을 것에 두었다면, 곳간이 가득 찼던 그 사람의 경우처럼(눅 12:16, 17), 동록(우리는 이렇게 읽는다)이 그것을 해한다. Brosis—먹음, 사람들이 먹어 치우는 것이니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도 많아짐이라(전 5:11), 또한 쥐나 다른 해충이 먹어 치우는 것이다. 만나조차도 벌레가 생겼다. 혹은 그것이 곰팡이 슬고 퀴퀴해지며, 마름병이 들고, 깜부깃병이 들며, 말라죽는다. 과일은 곧 썩는다. 혹 우리가 이것을 은과 금으로 이해한다면, 그것들도 빛이 바래고 녹슨다. 그것들은 사용함으로 줄어들고 보관함으로 더 나빠진다(약 5:2, 3). 녹과 좀은 금속 자체와 의복 자체 안에서 생긴다. 주목하라, 세상의 부(富)는 그 자체 안에 부패와 쇠퇴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스스로 시들며 스스로 날개를 내어 날아가 버린다. (2.)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한다. 폭력의 모든 손길은 보물이 쌓여 있는 집을 노릴 것이다. 또한 아무리 안전하게 쌓아 두어도 우리는 그것을 빼앗길 수 있다. Numquam ego fortunæ credidi, etiam si videretur pacem agere; omnia illa quæ in me indulgentissime conferebat, pecuniam, honores, gloriam, eo loco posui, unde posset ea, since metu meo, repetere—나는 운명이 비록 평온해 보일지라도 결코 그것을 신뢰한 적이 없다. 운명이 그 후한 손길로 내게 베푼 것이 무엇이든—부(富)이든 명예이든 영광이든—나는 그것들을 처분하되, 운명이 내게 아무런 놀람도 주지 않고 그것들을 거두어 갈 수 있도록 두었다. (세네카, 헬비아에게 보내는 위로, Consol. ad Helv.) 그토록 쉽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을 우리의 보물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저 세상의 기쁨과 영광, 곧 영원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의 가장 좋은 것으로 삼고 거기에 우리의 행복을 두라는 선한 권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주목하라, (1.) 이 땅에 보물이 있는 것이 확실한 만큼 하늘에도 보물이 있으며, 하늘에 있는 것이 유일한 참된 보물이니, 곧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부와 영광과 즐거움이라. 참으로 성화된 자들은 온전히 성화될 때에 거기에 이른다. (2.) 우리의 보물을 그 보물에 쌓아 두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온갖 부지런함을 다하고, 그것을 우리의 행복으로 의지하며, 여기 아래의 모든 것을 거룩한 멸시로 바라보아 그것과 비교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우리의 지혜다. 우리는 그러한 행복이 있음을 굳게 믿고,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결심하며,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기로 결심해야 한다. 우리가 이같이 저 보물들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면, 그것들은 쌓여 있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우리를 위하여 안전하게 지켜 주시리라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로 우리의 모든 계획을 돌리고, 그리로 우리의 모든 소원을 펼치며, 그리로 우리의 가장 좋은 수고와 가장 좋은 애정을 미리 보내자. 우리를 짓누르고 더럽히며 우리를 가라앉히기 쉬운 이 세상의 현금으로 우리 자신을 짐 지우지 말고, 좋은 보증을 쌓아 두자. 약속들은 환어음(bills of exchange)이니, 그것으로 모든 참된 신자들은 그들의 보물을 하늘로 송금하여 장차 올 상태에서 지급받게 된다. 이같이 우리는 확실하게 될 것을 확실하게 만든다. (3.)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되는 까닭은 거기서는 그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스로 쇠하지 않으며, 어떤 좀이나 동록도 그것을 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힘이나 속임수로 그것을 빼앗기지도 않으니,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지 못한다. 그것은 시간의 변천과 우연을 초월한 행복, 썩지 아니하는 기업이다.
우리가 이같이 선택해야 하는 선한 이유요, 우리가 그렇게 했다는 증거(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땅에 있든 하늘에 있든,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보물을 선택하는 일에 옳고 지혜로워야 함이 중요하니, 우리 마음의 성향과, 따라서 우리 삶의 방향이 그에 따라 육적이거나 영적이며, 땅에 속하거나 하늘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보물을 따르니, 마치 바늘이 자석을 따르고, 해바라기가 해를 따름과 같다. 보물 있는 곳에 평가와 존중이 있고, 거기에 사랑과 애정이 있으며(골 3:2), 그쪽으로 소원과 추구가 향하고, 그쪽으로 목표와 의도가 겨누어지며, 모든 일이 그것을 염두에 두고 행해진다. 보물 있는 곳에, 거기에 우리의 염려와 두려움이 있으니, 혹 우리가 그것에 미치지 못할까 함이라.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가장 노심초사한다. 거기에 우리의 소망과 신뢰가 있고(잠 18:10, 11), 거기에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것이며(시 119:111), 거기에 우리의 생각이 있을 것이니, 거기에 속에 품은 생각, 처음 생각, 자유로운 생각, 고정된 생각, 빈번한 생각, 친숙한 생각이 있을 것이다. 마음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것이니(잠 23:26), 그분께서 그것을 받으시도록 우리의 보물을 그분과 함께 쌓아 두어야 하며, 그리하면 우리의 영혼이 그분께로 들리어 올라갈 것이다.
우리의 보물을 쌓아 두는 일에 관한 이 지침은 앞서 나온 경고, 곧 우리가 신앙에서 행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경고에 매우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다. 우리의 보물은 우리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 그리고 그것들의 상급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들을 오직 사람의 갈채를 얻기 위해 행했다면, 우리는 이 보물을 땅에 쌓아 둔 것이요, 그것을 사람의 손에 맡긴 것이니, 다시는 그것에 대하여 더 듣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니, 우리가 그토록 탐내는 사람의 칭찬은 부패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녹슬고 좀먹고 빛이 바랠 것이다. 작은 어리석음이 죽은 파리처럼 그것을 다 망쳐 버린다(전 10:1). 비방과 중상은 그것을 뚫고 들어와 훔쳐 가는 도둑이니,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행한 모든 보물을 잃는다. 우리는 헛되이 달음질하고 헛되이 수고한 것이니, 그것들을 행함에 있어 우리의 의도를 잘못 둔 까닭이다. 외식하는 봉사는 하늘에 아무것도 쌓아 두지 못한다(사 58:3). 그 유익은, 영혼을 도로 찾을 때에 사라진다(욥 27:8).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진실과 정직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받으심을 향하여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여, 그 일에서 그분께 우리 자신을 인정받았다면, 우리는 그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둔 것이니, 거기에 기념책이 기록되어 있고(말 3:16), 거기에 기록되었으므로 거기서 상을 받을 것이며, 우리는 죽음과 무덤 저편에서 위로 가운데 그것들을 다시 만날 것이다. 외식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나(렘 17:13),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은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눅 10:20). 하나님의 받으심이 곧 하늘의 보물이니, 그것은 부패할 수도 없고 도둑맞을 수도 없다. 그분의 잘하였도다는 영원히 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같이 우리의 보물을 그분과 함께 쌓아 두었다면, 그분과 함께 우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니, 그것이 거기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II.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목적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 외식과 세상적 마음을 조심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한 우리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가진 두 종류의 눈, 곧 성한 눈과 나쁜 눈으로 표현된다(마 6:22, 23). 여기의 표현들은 간결하기에 다소 모호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보고자 한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 이것은 분명하다. 눈은 발견하고 인도한다. 몸의 이 빛이 없다면 세상의 빛은 우리에게 거의 유익이 없을 것이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눈의 빛이다(잠 15:30). 그런데 여기서 몸의 눈에 비유된 것은 무엇인가?
눈, 곧 마음(어떤 이들은 이렇게 본다)이 성하면—haplous—자유롭고 후하면(이 단어는 흔히 이렇게 번역되니, 롬 12:8, 고후 8:2; 9:11, 13, 약 1:5을 보라. 또한 우리는 후한 눈에 관하여 읽는다, 잠 22:9). 만일 마음이 너그럽게 영향을 받고 선과 자비로 기울어져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으로 인도할 것이며, 그의 온 행실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니, 곧 참된 기독교의 증거와 실례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순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약 1:27)으로 가득할 것이요, 빛으로 가득할 것이니, 곧 선한 행실, 곧 사람 앞에서 빛나는 우리의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나쁘면, 탐욕스럽고 굳고 시기하며, 인색하고 아까워하면(이러한 마음의 성향은 흔히 나쁜 눈으로 표현되니, 마 20:15, 막 7:22, 잠 23:6), 몸이 어둠으로 가득할 것이요, 그의 온 행실이 이방인답고 비기독교적일 것이다. 인색한 자의 그릇은 항상 악할 것이로되,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도모한다(사 32:5-8). 만일 우리 안에 있는 빛, 곧 우리를 선으로 인도해야 할 그 애정이 어둠이면, 만일 그것들이 부패하고 세상적이라면, 사람 안에 선한 본성조차, 친절한 성향조차 없다면, 얼마나 큰 부패가 그 사람 안에 있으며, 얼마나 깊은 어둠 속에 그가 앉아 있겠는가! 이 의미는 문맥과 잘 부합하는 듯하다. 우리는 구제를 베푸는 후함으로, 그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즐거이(눅 12:33, 고후 9:7)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한다. 그러나 평행 본문에서는 이 말씀이 그러한 맥락에서 나오지 않으므로(눅 11:34), 여기의 연결이 그것을 그 의미로 확정짓지는 못한다.
눈, 곧 지각(知覺, understanding)(어떤 이들은 이렇게 본다). 곧 실천적 판단이요 양심이니, 이것은 영혼의 다른 기능들에 대하여, 마치 눈이 몸에 대하여 그 움직임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것과 같다. 이제 만일 이 눈이 성하면, 만일 그것이 참되고 옳은 판단을 내리며, 차이가 나는 것들을 분별하되 특히 보물을 쌓아 두는 중대한 일에서 그것을 옳게 선택하도록 분별한다면, 그것은 애정과 행동을 옳게 인도할 것이요, 그 모든 것이 은혜와 위로의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나쁘고 부패하여, 하위 기능들을 인도하는 대신 도리어 그것들에게 인도되고 매수되고 치우치면, 만일 이것이 잘못되고 잘못 알려졌다면, 마음과 삶이 어둠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고, 온 행실이 부패할 것이다. 깨닫지 못하려는 자들은 흑암 중에 왕래한다고 일컬어진다(시 82:5). 여호와의 등불이 되어야 할 사람의 영(靈)이 *도깨비불(ignis fatuus)*이 될 때, 곧 백성의 지도자들, 기능들의 지도자가 그들로 그릇 가게 할 때는 슬픈 일이니, 이는 그들에게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 멸망하기 때문이다(사 9:16). 실천적 판단의 오류는 치명적이니, 그것이 바로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하는(사 5:20)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을 옳게 깨닫고, 우리의 눈에 안약을 발라야 함이 중요하다.
눈, 곧 목표와 의도. 눈으로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우리가 겨누는 표적을, 우리가 가는 곳을 우리 앞에 설정하고, 그것을 시야에 두며, 그에 따라 우리의 움직임을 인도한다. 우리가 신앙에서 행하는 모든 일에는 우리가 눈에 두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이제 만일 우리의 눈이 성하면, 만일 우리가 정직하게 겨누고, 옳은 목적을 정하고, 그것을 향하여 바르게 움직이며, 만일 우리가 순전하게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겨누고, 그분의 영예와 은총을 구하며, 모든 것을 온전히 그분께로 돌린다면, 그때 눈이 성한 것이다. 바울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말했을 때 그의 눈은 그러했다. 만일 우리가 여기서 바르다면,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니, 모든 행동이 규모 있고 은혜로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자신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눈이 나쁘면, 만일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께 받으심만을 겨누는 대신, 곁눈질로 사람의 갈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공언하면서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고 꾀하며, 그리스도의 일을 구한다는 명목 아래 자기의 일을 구한다면, 이것이 모든 것을 망친다. 온 행실이 비뚤어지고 흔들릴 것이며, 기초가 이같이 어긋났으니, 그 위의 구조물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 외에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원주(圓周)에서 중심이 아닌 다른 점으로 선들을 그어 보라, 그러면 그것들은 서로 엇갈릴 것이다. 만일 네게 있는 빛이 단지 흐릴 뿐 아니라 어둠 자체이면, 그것은 근본적인 오류요, 뒤따르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목적이 행동을 규정한다. 신앙에서 우리가 우리의 목표에 있어 바른 것, 그리고 잠시뿐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우리의 표적으로 삼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고후 4:18). 외식하는 자는 한쪽을 바라보면서 다른 쪽으로 노 젓는 뱃사공과 같고, 참 그리스도인은 여정의 끝을 눈에 두고 있는 나그네와 같다. 외식하는 자는 솔개처럼 솟아오르되 그 눈은 아래의 먹이에 두어, 좋은 기회를 잡으면 곧 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다. 참 그리스도인은 종달새처럼 솟아오르되, 더욱더 높이 올라가며 아래에 있는 것들을 잊는다.
III.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주인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 외식과 세상적 마음을 조심해야 한다(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성한 눈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눈은 주인의 손을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시 123:1, 2). 우리 주 예수께서는 여기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나누어 땅에도 보물을 두고 하늘에도 보물을 두며, 하나님도 기쁘게 하고 사람도 기쁘게 하려는 자들이 자기 영혼에게 행하는 속임수를 폭로하신다. 왜 안 되는가? 라고 외식하는 자는 말한다. 활에 두 줄을 매어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신앙을 세속적 이익에 봉사하게 하여, 양쪽 모두에서 이득을 보기를 바란다. 거짓 어머니는 아이를 나누자고 했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과 우상 사이를 타협하려 한다. 아니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이것은 통하지 않는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여기는 것은 한낱 망상일 뿐이다(딤전 6:5). 여기에 다음이 있다.
제시된 일반적인 격언. 이것은 아마 유대인들 사이의 속담이었던 듯하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하물며 두 신(神)은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명령은 언젠가는 서로 엇갈리거나 모순되며, 그들의 일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두 주인이 함께 가는 동안에는 종이 둘 다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갈라질 때, 너는 그가 누구에게 속한지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마땅히 해야 할 만큼 둘 다를 사랑하고 섬기고 붙좇을 수 없다. 만일 한쪽에 그리한다면 다른 쪽에는 못한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상대적으로 미움받고 멸시받게 마련이다. 이 진리는 일상의 경우에서 충분히 분명하다.
이것을 당면한 문제에 적용함.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Mammon)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재물(Mammon)*은 이득을 뜻하는 수리아 말(시리아어)이니,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이득이거나 우리가 이득으로 여기는 것(빌 3:7)은 무엇이든 맘몬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맘몬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기의 배가 그들의 맘몬이라, 그들은 그것을 섬긴다(빌 3:19). 다른 이들에게는 안일함과 잠과 놀이와 오락이 그들의 맘몬이요(잠 6:9), 다른 이들에게는 세상의 부(富)요(약 4:13), 다른 이들에게는 명예와 출세다. 사람의 칭찬과 갈채는 바리새인들의 맘몬이었다. 한마디로, 세상의 삼위(三位)가 한데 모이는 그 일체(一體)인 자아(自我), 곧 육적이고 세속적인 자아가, 하나님과 함께 섬길 수 없는 맘몬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섬김을 받으면, 그것은 그분과 경쟁하며 그분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섬겨서는 안 된다거나 섬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둘 다를 사랑할 수 없고(요일 2:15, 약 4:4), 둘 다를 붙들거나, 순종과 섬김과 시중과 신뢰와 의지에 있어 둘 다에 매달릴 수 없으니, 이는 그것들이 서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라"고 하신다. 맘몬은 "아니라, 그것을 내게 달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신다. 맘몬은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움켜쥐라. Rem, rem, quocunque modo rem—돈, 돈을, 옳은 수단으로든 그릇된 수단으로든, 돈을"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속이지 말고, 결코 거짓말하지 말며, 네 모든 거래에서 정직하고 의로우라"고 하신다. 맘몬은 "그것으로 이득을 볼 수 있다면 네 친아버지라도 속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라"고 하신다. 맘몬은 "네 것을 움켜쥐라, 이렇게 베푸는 것이 우리 모두를 망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맘몬은 "모든 것을 염려하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신다. 맘몬은 "그날도 다른 날과 똑같이 세상을 위하여 이용하라"고 한다. 이같이 하나님과 맘몬의 명령은 서로 상반되어, 우리가 둘 다를 섬길 수 없다. 그러니 우리로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여, 우리의 선택을 굳게 지키게 하자.
²⁵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²⁶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²⁷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²⁸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²⁹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³⁰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³¹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³²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³³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³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살이에 관해 불안하고 산만하며 불신하는 염려의 죄보다 더 길고 진지하게 경고하시고, 더 다양한 논증으로 대비하게 하신 죄는 거의 없다. 그런 염려는 보물과 마음이 모두 땅에 있다는 나쁜 징표이므로 그분은 이 문제를 길게 다루신다. 여기에는 다음 내용이 있다.
I. 금지 명령이 제시된다. 세상 일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주 예수의 조언이자 명령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은 우리의 입법자이며 마음의 주권자로서, 또한 우리의 위로자이며 기쁨을 돕는 분으로서 말씀하신다. 무슨 말씀인가? “목숨을 위해서도 몸을 위해서도 염려하지 말라”(마 6:25).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31). 그리고 다시 “염려하지 말라”(마 6:34). 헬라어 메 메림나테는 “근심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이다. 위선에 대한 경고와 마찬가지로 세상 염려에 대한 경고도 세 번 반복되지만 헛된 반복이 아니다. 같은 뜻의 명령에 명령을, 교훈에 교훈을 거듭 더해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이는 우리를 쉽게 얽매는 죄이다. 우리가 염려 없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께 얼마나 기쁜 일이며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주 예수께서는 세상 염려로 자기 마음을 나누고 갈기갈기 찢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거듭 명하신다.
이생의 일을 생각하는 것 가운데 허용될 뿐 아니라 의무인 생각도 있다. 현숙한 여인에게서 칭찬받는 생각이 그러하다. 잠 27:23을 보라. 바울이 교회들을 염려한 일과 디모데가 영혼들의 형편을 염려한 일에도 같은 단어가 쓰인다(고후 11:28; 빌 2:20).
그러나 여기에서 금하시는 염려는 다음과 같다. 1. 마음을 이리저리 몰아가며 불안하게 매달아 두는 초조하고 괴롭게 하는 생각이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흔들고 그분을 향한 소망을 약하게 하며, 잠을 깨뜨리고 자신과 친구들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2. 불신하고 믿지 못하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경건에 필요한 것뿐 아니라 현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 곧 음식과 덮을 것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진미가 아니라 필수품을 약속하셨다. “잔치를 누릴 것이다”라고 하시지 않고 “참으로 먹을 것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미래를 지나치게 염려하고 필요한 공급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은 이 약속과 하나님의 섭리의 지혜와 선하심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온다. 바로 이것이 그 악함이다.
현재의 생계를 위해서는 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자기 소명에 부지런하고, 가진 것에 맞추어 지출을 신중히 조절하며,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한다. 다른 모든 수단이 실패하면 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고 청해야 한다. “구걸하기는 부끄럽다”고 말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지만(눅 16:3),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기를 원했던 이는 그러했다(눅 16:21). 그러나 미래는 하나님께 염려를 맡기고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그것을 얻을 길을 우리가 몰라도 필요한 것을 주실 줄 아시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이 그분 안에서 평안히 거하게 하라. 이 은혜로운 무염려는 세상 사람의 수고와 대조하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잠과 같다(시 127:2). 여기의 경고를 살펴보자.
(1.) “너희 목숨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 목숨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위해서는 가진 것을 모두 내놓을 것이다.” 그런데도 염려하지 말라. [1.] 목숨이 얼마나 계속될지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길게 하거나 짧게 하시도록 맡기라. “내 때가 주의 손에 있다.” 참으로 좋은 손에 있다. [2.] 이 삶의 안락을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쓰게 하거나 달게 하시도록 맡기라. 이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음식과 옷조차 초조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므로 더욱 확신 있게 기대할 수 있다. “무엇을 먹을까?”라고 말하지 말라. 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거의 절망한 사람의 말이다. 많은 선한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적더라도 현재 필요한 것조차 없는 사람은 드물다.
(2.) 미래를 두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년에 어떻게 살지, 늙으면 어떻게 될지, 무엇을 남길지를 걱정하지 말라. 내일을 자랑해서도 안 되듯 내일과 그 사건들을 염려해서도 안 된다.
II. 이 금지 명령을 뒷받침하는 이유와 논증이 제시된다. 불안하고 불신하는 이 어리석은 죄를 억제하는 데에는 우리 영혼의 위로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명령만으로 충분할 듯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를 얼마나 마음에 두시며 자기 긍휼을 바라는 자들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보여 주려고 가장 강력한 논증을 덧붙이신다. 이성이 우리를 다스리기만 해도 이 가시들을 벗어 버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안한 생각을 몰아내려고 우리에게 위로하는 생각을 제시하여 그것들로 마음을 채우게 하신다. 자기 마음을 설득하여 불안한 염려에서 나오게 하고 그런 염려를 부끄럽게 여기도록 힘쓸 가치가 있다. 염려는 바른 이성으로 약해질 수 있지만, 오직 활동하는 믿음으로만 정복될 수 있다. 이제 다음을 생각하라.
(1.) 우리의 목숨은 생계 수단보다 큰 복이다. 생계 없이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목숨과 몸보다 낮다고 하는 음식과 옷은 특히 장식과 즐거움을 위한 것인데, 우리는 이런 것들을 염려하기 쉽다. 음식과 옷은 생명을 위한 수단이고, 목적은 수단보다 더 고귀하고 탁월하다. 가장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은 땅에서 나지만 생명은 하나님의 숨결에서 온다. 생명은 사람의 빛이고 음식은 그 빛을 유지하는 기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것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고 작은 것에서만 다르니, 둘의 차이는 매우 사소하다.
(2.) 이는 음식과 옷을 하나님께 신뢰하여 그것들에 관한 혼란스러운 염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격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몸을 주셨다. 이는 능력과 은총의 행위였고 우리의 염려 없이 이루어졌다. 그 일을 행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들 하지 못하시며, 무엇인들 기꺼이 하지 않으시겠는가? 몸과 목숨보다 중요한 영혼과 영원을 돌본다면, 그보다 작은 음식과 옷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시도록 맡길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우리의 목숨을 유지하셨다. 때로는 채소와 물뿐이었어도 목적을 이루었다. 그분은 우리를 보호하고 살려 두셨다. 우리가 당할 악에서 지키시는 분이 필요한 좋은 것도 공급하실 것이다. 우리를 죽이거나 굶기기를 기뻐하셨다면 우리를 지키라고 그토록 자주 천사들에게 명령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1.) 새들을 보며 음식을 하나님께 의지하고(마 6:26),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며 불안해하지 말라.
[1.] 새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관찰하라. 바라보고 교훈을 받으라. 새의 종류는 다양하고 수가 많으며 일부는 탐욕스럽지만, 모두 자기에게 알맞은 먹이를 얻는다. 겨울에도 먹이가 없어 죽는 새는 드물며 일 년 내내 그들을 먹이는 데는 적지 않은 양이 든다. 새들은 사람에게 유용한 정도가 가장 낮은 만큼 사람의 돌봄도 가장 적게 받는다. 사람은 흔히 새를 먹지만 새에게 먹이를 주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먹이를 얻고, 어떤 새는 날씨가 가장 혹독할 때 더 잘 먹는다. 그들을 먹이시는 분은 너희 하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헛간 문 앞의 길든 새를 아는 것보다 산의 모든 들새를 더 잘 아신다(시 50:11). 가장 작은 피조물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섭리가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곡식 한 알을 주우러 땅에 내려앉지 않는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할 점은 새들이 자기의 염려나 계획 없이 먹이를 얻는다는 것이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개미와 벌은 그렇게 하며 신중함과 근면의 본으로 제시되지만, 공중의 새는 미래를 스스로 준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날마다 어김없이 먹이를 공급받는다. 그들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본다. 모든 생명체에게 먹이를 마련하시는 위대하고 선한 집주인을 의지한다.
[2.] 이것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격려로 삼으라. “너희가 그들보다 훨씬 귀하지 않으냐?” 분명히 그렇다. 하늘의 상속자들은 하늘의 새들보다 훨씬 귀하고 고귀하며 탁월한 존재이고, 믿음으로 더 높이 날아오른다. 본성과 양육이 더 좋고 하늘의 새보다 지혜롭다(욥 35:11). 여호와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의 자녀들은 황새와 학과 제비보다 지혜롭지 못하지만(렘 8:7), 너희는 하나님께 더 소중하고 가까이 있다. 새들이 드넓은 하늘을 날아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주인이자 소유자이실 뿐이지만, 너희에게는 그 모든 것에 더하여 아버지이시다. 그분이 보시기에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너희는 그분의 자녀요 맏아들이다. 자기 새를 먹이시는 분이 자기 아기를 굶기시겠는가? 새들도 너희 아버지의 섭리를 의지하는데 너희가 의지하지 않겠는가? 새들은 그 섭리를 의지하여 내일을 염려하지 않고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즐겁게 산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노래하며(시 104:12) 자기 능력껏 창조주를 찬양한다. 우리도 믿음으로 새처럼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처럼 즐겁게 노래할 것이다. 세상의 염려만큼 우리의 즐거움을 망치고 기쁨을 꺾으며 찬양을 잠잠하게 하는 것도 드물다.
(2.) 백합화를 보며 옷을 하나님께 의지하라. 옷은 또 하나의 염려거리이다. 몸을 가리는 단정함과 몸을 따뜻하게 하는 보호를 위해 필요하며, 많은 사람은 위엄과 장식으로 크고 화려하게 보이려고 옷을 구한다. 그들은 화려하고 다양한 옷에 너무 마음을 써서 이런 염려가 일용할 양식에 관한 염려만큼 자주 돌아온다. 이 염려에서 벗어나려면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라. 즐거워하며 바라보는 데 그치지 말고 숙고하라. 우리가 날마다 보는 것을 숙고하기만 하면 거기에서 많은 유익을 배울 수 있다(잠 6:6; 24:32).
[1.] 백합화가 얼마나 연약한지 생각하라. 그것은 들의 풀이다. 색깔로 두드러져도 여전히 풀일 뿐이다. 이처럼 모든 육체는 풀이다. 몸과 마음의 재능이 백합화처럼 감탄을 받는 사람도 본성과 체질에서는 다른 사람과 같은 들풀이다. 사람의 날은 가장 좋을 때에도 풀과 풀의 꽃과 같다(벧전 1:24). 이 풀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진다. 잠시 뒤면 우리를 알던 곳도 다시는 우리를 알지 못한다. 무덤은 우리가 던져져 불 속의 풀처럼 소멸할 아궁이와 같다(시 49:14). 이는 내일 무엇을 입을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암시한다. 내일이면 수의가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백합화가 얼마나 염려하지 않는지 생각하라. 사람처럼 옷을 얻으려고 수고하지 않고, 종처럼 제복을 얻으려 일하지 않으며, 여인처럼 옷을 만들려고 길쌈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생의 합당한 일을 소홀히 하거나 부주의하게 해도 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현숙한 여인이 손으로 물레를 잡고 고운 베를 지어 판다는 것은 칭찬이다(잠 31:19, 24). 게으름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는 것이다. 수고 없이 열등한 피조물을 공급하시는 분은 우리의 의무로 정하신 수고에 복을 주어 우리를 더욱 공급하실 것이다. 병 때문에 수고하고 길쌈할 수 없게 되어도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마련하실 수 있다.
[3.] 백합화가 얼마나 아름답고 화려한지, 어떻게 자라며 무엇에서 자라는지 생각하라. 튤립 같은 알뿌리 식물의 뿌리는 겨울이면 보이지 않게 땅에 묻히지만 봄이 오면 나타나 짧은 시간에 솟아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백합화처럼 자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호 14:5). 그것이 무엇으로 자라나는지 생각하라. 몇 주 만에 어둠 속에서 나와 매우 화려해져서 “솔로몬도 모든 영광 가운데 이 하나처럼 입지 못했다.” 솔로몬의 옷은 매우 찬란하고 장엄했다. 왕과 지방들의 특별한 보물을 소유하고 화려함을 의도적으로 추구했으므로, 특히 큰 축일에 영광스럽게 나타날 때 구할 수 있는 가장 값비싸고 정교한 옷을 입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리 아름답게 차려입어도 백합화의 아름다움에 훨씬 못 미치며, 튤립 꽃밭이 그보다 빛난다.
그러므로 아무도 능가하지 못했던 솔로몬의 지혜, 곧 각자의 자리에서 의무를 행하는 지혜를 사모하고, 백합화가 능가한 솔로몬의 영광을 사모하지 말라. 지식과 은혜가 사람의 완전함이며, 아름다움이나 화려한 옷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들의 풀을 입히신다고 말한다. 피조물의 모든 탁월함은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말에게 힘을 주시고 백합화에 아름다움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그 자체로도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대로 존재한다.
[4.]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하라(마 6:30).
첫째, 화려한 옷에 관해서는 전혀 염려하거나 탐내거나 자랑하지 말고, 옷 입는 것을 우리의 단장으로 삼지 말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백합화가 훨씬 아름다우며, 그들처럼 입을 수 없는데 왜 경쟁하려 하는가? 그 장식도 우리 장식도 곧 사라진다. 백합화는 시들어 오늘 있다가 내일 다른 쓰레기처럼 아궁이에 던져진다. 우리가 자랑하는 옷도 낡는다. 광택은 곧 사라지고 색은 바래며 모양은 유행에서 벗어나고, 얼마 뒤에는 옷 자체가 해어진다. 모든 화려함을 누리는 사람도 이와 같고(사 40:6, 7), 특히 부자는 그러하여(약 1:10) 자기 길에서 시들어 버린다.
둘째, 필요한 옷에 관해서는 그 염려를 여호와 이레, 곧 하나님께 맡기라고 가르친다. 백합화를 입히시는 분이 우리가 입을 것도 공급하심을 신뢰하라. 풀에게 그처럼 아름다운 옷을 주신다면 자기 자녀에게는 적합한 옷을 더욱 주실 것이다. 남풍으로 땅을 고요하게 하실 때뿐 아니라 북풍으로 소란하게 하실 때에도 따뜻하게 해 줄 옷을 주실 것이다(욥 37:17). 너희는 더 고귀하고 탁월한 피조물이며, 하나님께서 짧게 사는 풀도 입히신다면 불멸하도록 지음받은 너희를 더욱 입히실 것이다. 니느웨의 자녀들도 박넝쿨보다 귀하게 여김을 받았는데(욘 4:10, 11),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시온의 자녀들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그분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부르신 것을 주목하라(마 6:30). 이는 1. 약하더라도 참된 믿음을 격려하는 말씀일 수 있다. 그런 믿음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적절한 공급의 약속에 대한 권리를 준다. 큰 믿음은 칭찬받고 큰일을 얻지만 작은 믿음도 거절되지 않으며 음식과 옷을 얻는다. 강한 신자가 아니어도 참된 신자는 공급받는다. 집안의 아기들도 장성한 사람처럼, 오히려 특별한 보살핌과 다정함으로 먹고 입는다. “나는 아이일 뿐이고 마른 나무다”라고 말하지 말라(사 56:3, 5). 가난하고 궁핍해도 주께서 너를 생각하신다. 또는 2. 참되지만 약한 믿음을 꾸짖는 말씀이다(마 14:31). 모든 지나친 염려의 밑바닥에는 약한 믿음과 남아 있는 불신앙이 있다. 믿음이 더 많다면 염려는 더 적을 것이다.
(1.) 우리는 자기 염려와 생각으로 현재의 키에 이르지 않았고 하나님의 섭리로 이르렀다. 한 뼘 길이의 아기가 여섯 피트의 어른으로 자라며 한 규빗씩 키가 더해진 것은 자기 예측과 계획 때문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으로 자랐다. 우리 몸을 만들고 이 크기로 자라게 하신 분이 틀림없이 그것을 공급하실 것이다. 몸의 힘과 키가 자라는 데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몸을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으므로 필요한 모든 공급도 그분께 신뢰해야 한다. 성장기는 생각과 염려가 없는 시기인데도 우리는 자란다. 이만큼 길러 주신 분이 다 자란 지금 우리를 공급하지 않으시겠는가?
(2.) 원해도 현재의 키를 바꿀 수 없다. 키 작은 사람이 한 규빗 더 커지는 일을 두고 괴로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머리를 짜낸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운가? 결국 불가능한 줄 알므로 만족하여 현재 상태를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사람들의 키가 모두 같지 않아도 그 차이는 중요하거나 크게 평가할 일이 아니다. 작은 사람은 누구만큼 크기를 바라다가도 소용없음을 알고 자기 키로 최선을 다해 산다. 몸의 키에 관해 그러하듯 세상의 형편에 관해서도 그래야 한다. [1.] 한 규빗은 사람 키에 엄청난 양이며 몸을 둔하고 스스로에게 짐이 되게 할 뿐이므로, 키에 한 규빗을 더 탐내지 않듯 세상 재물을 지나치게 탐내지 말아야 한다. 몇 인치씩 자라는 것으로 충분하다. [2.] 키를 받아들이듯 자기 형편과 화해해야 한다. 편리한 점과 불편한 점을 견주어 불가피한 것을 유익하게 삼으라. 고칠 수 없는 것은 최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섭리의 처분을 바꿀 수 없으므로 거기에 순응하고 적응하며 불편을 가능한 한 덜어야 한다. 삭개오도 작은 키의 불편을 이기려고 나무에 올라갔다.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마 6:32). 세상을 염려하는 것은 이교도적인 죄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이방인은 더 좋은 것을 모르므로 이런 것을 구한다. 더 나은 세상을 알지 못하므로 이 세상에 열중하고,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며 그분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염려와 불안으로 그것들을 구한다. 우상을 두려워하며 섬기지만 구원과 공급을 위해 우상을 신뢰할 줄 모르므로 자기들이 온갖 염려를 짊어진다. 그러나 더 고귀한 원칙 위에 서고, 섭리뿐 아니라 현재 삶의 유익에 관한 약속도 있으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세상을 업신여기라고 가르치며 그 두 가지 이유도 제시하는 종교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이방인처럼 살면서 머리와 마음을 이런 것으로 채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필요함을 아신다.” 음식과 옷 같은 필수품을 말한다. 그분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필요를 더 잘 아신다. 하늘에 계시고 자녀들은 땅에 있어도 가장 작고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까지 살피신다. “내가 네 궁핍을 안다”(계 2:9). 좋은 친구가 자기 궁핍과 곤경을 알기만 한다면 곧 도움받으리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그분은 너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돕기 원하시는 아버지이고, 모든 필요를 공급할 자원을 가지신 하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불안한 생각과 염려를 모두 버리라. 아버지께 가서 이런저런 것이 필요함을 이미 아신다고 말씀드리라. 그분은 “자녀들아, 먹을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신다(요 21:5). 있든 없든 말씀드리라. 필요를 아시면서도 우리에게서 듣기를 원하신다. 필요를 말씀드린 뒤에는 공급을 그분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에 기쁘게 맡기라.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염려의 짐을 던져 스스로 가볍게 해야 한다(벧전 5:7). 하나님께서 돌보시는데 이 모든 소란이 왜 필요한가? 그분이 염려하시는데 우리가 왜 염려해야 하는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마 6:33). 여기에는 염려의 죄를 반대하는 두 논증이 있다. 몸의 생명에 관해 염려하지 말라. (1.) 더 크고 좋은 것, 곧 영혼의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염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각을 기울여야 할 필요한 한 가지이며(눅 10:42), 세상 염려가 지배하는 마음에서는 보통 소홀히 여겨진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자기 구원을 이루는 일을 더 염려한다면, 자신을 기쁘게 하고 세상 재산을 이루는 데는 덜 초조할 것이다. 영혼을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염려하는 병의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이다. (2.) 애태우고 염려하며 초조해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쉽고 안전하며 짧게 이생의 필수품을 얻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곧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신앙을 자기 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굶는 길이라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도 충분히 공급받는 길이다.
[1.] 요구되는 큰 의무는 우리 모든 의무의 요약이자 본질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신앙을 가장 크고 주된 관심사로 삼으라.” 구한다는 것은 바라며 추구하고 목표로 삼는 것이다. 이 단어에는 우리를 위하는 새 언약의 성격이 많이 담겨 있다. 우리가 아직 얻지 못했고 여러 면에서 실패하고 부족해도, 진실하게 구하는 것, 곧 주의 깊은 관심과 간절한 노력은 받아들여진다.
첫째, 구할 대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이다. 하늘을 목적으로, 거룩함을 그 길로 삼아야 한다. “은혜와 영광의 나라가 주는 위로를 행복으로 구하라. 하늘나라를 목표로 삼고 그것을 향해 힘쓰며 확실히 얻도록 부지런히 행하라. 그것보다 못한 데서 멈추지 않기로 결심하라. 영광과 존귀와 불멸을 구하고, 하늘과 하늘의 복을 땅과 땅의 즐거움보다 훨씬 앞세우라.” 신앙을 통해 하늘을 얻지 못한다면 신앙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이 나라의 행복과 더불어 그 나라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 행해지기를 요구하시는 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는 화평과 거룩함을 따라야 한다(히 12:14).
둘째, 순서를 보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영혼과 내세에 대한 관심이 다른 모든 염려보다 앞서게 하고, 이생의 모든 일을 장래 생명의 일에 종속시키라. 자기 일보다 그리스도의 일을 더 구해야 하며, 서로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먼저, 곧 인생의 첫 시기에 구하라. 청춘의 아침을 하나님께 드리라. 지혜를 일찍 구해야 한다. 일찍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날마다 가장 먼저 구하라. 깨어날 때 첫 생각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라.” 가장 필요한 일을 먼저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첫째이신 분께 첫 자리를 드리라.
[2.] 여기에 은혜로운 약속이 붙는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 난외주처럼 “덤으로 주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너희가 구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얻을 것이다. 진지하게 구한 사람은 결코 헛되이 구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음식과 옷도 덤으로 받는다. 물건을 사는 사람에게 종이와 묶을 끈을 함께 주는 것과 같다. 경건은 현재 생명의 약속도 가지고 있다(딤전 4:8).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고 지혜와 더불어 다른 것들도 받았다(대하 1:11, 12). 이 세상에서 편안히 공급받는 가장 좋은 길은 다른 세상에 가장 마음을 쏟는 것이라는 진리를 굳게 믿는다면 우리의 마음과 삶에 얼마나 복된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할 때 일을 올바른 쪽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확실히 얻도록 부지런히 힘쓰면, 이생의 모든 것은 여호와 이레, 곧 주께서 우리에게 좋다고 보시는 만큼 공급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 이상을 원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에 받을 기업의 몫을 그분께 맡겼으면서, 그곳으로 가는 길에서 받을 잔의 몫을 맡기지 못하겠는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광야를 지나는 비용도 공급받았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더 생각한다면 보이는 일시적인 것은 덜 염려하게 되고, 염려할 필요도 더 적어질 것이다. “너희 물품을 아끼지 말라”(창 45:20, 23).
(1.) 내일을 염려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내일은 내일 일을 염려하게 하라.” 필요와 환난이 날마다 새로워지면 도움과 공급도 새로워진다.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다(애 3:22, 23). 성도들에게는 아침마다 그들의 팔이 되시며 그날의 필요에 따라 날마다 새로운 공급을 주시는 친구가 계신다(사 33:2; 스 3:4). 이처럼 그분은 자기 백성이 늘 자신을 의지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일의 힘이 내일의 일을 하고 내일의 짐을 지도록 맡기라. 내일과 그 일들은 우리가 없어도 공급받을 것이다. 이미 그토록 지혜롭게 돌봄받는 일을 왜 불안하게 염려해야 하는가? 이는 신중하게 내다보고 준비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초조함과, 어쩌면 결코 오지 않거나 와도 쉽게 견디고 그 악을 막을 수 있는 어려움과 재앙을 미리 끌어당기는 것을 금한다. 현재의 의무에 마음을 쓰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이다. 그날의 일을 그날에 하고, 내일이 자기 일을 가지고 오게 하라.
(2.) 내일을 염려하는 것은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빠지는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 가운데 하나이며, 그들이 자신을 찌르는 많은 고통 가운데 하나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충분하다.” 오늘은 이미 그날에 딸린 환난으로 충분하다. 고난을 미리 당겨 짐을 쌓을 필요가 없고, 내일의 악에서 혼란을 빌려 오늘의 악에 더할 필요도 없다. 내일 어떤 악이 올지는 불확실하지만, 무엇이든 실제로 올 때 염려해도 늦지 않다. 다른 날에 속한 고통을 오늘 염려와 두려움으로 떠맡고, 막상 그날이 와도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게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섭리가 여러 몫으로 나누어 지도록 지혜롭게 정하신 짐을 한꺼번에 우리 위로 끌어당기지 말라.
그러므로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은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자가 되지 말라고 뜻하시고 명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실제 환난으로 어둡고 불편하게 만드신 것보다, 환난을 미리 상상하여 이 세상 길을 더 어둡고 불편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날마다 드리는 기도로 그날의 환난을 견딜 힘과 거기에 딸린 시험에 맞설 무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이 모든 일에 흔들리지 말라.
그리스도께서는 앞 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부패한 교리와 견해, 특히 율법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것이 그들의 누룩이라 불린 것이다, 마 16:12)으로부터 제자들을 무장시키신 후에, 이 장에서는 그들의 부패한 행실에 대하여 제자들을 경계하신다. 곧 두 가지 죄에 대한 경계인데, 이는 비록 그들이 교리상으로는 정당화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삶에서는 악명 높게 범하고 있었던 죄이며, 더구나 그들을 흠모하는 자들에게 그 죄를 권장하기까지 한 죄였다. 이 두 가지는 곧 외식(僞善)과 세속에 마음을 두는 것(世俗的 心性)이니, 이는 종교를 고백하는 자들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경계해야 할 죄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죄들은 정욕을 통해 세상에 있는 더 노골적인 더러움에서 벗어난 자들을 가장 쉽게 사로잡는 죄이므로, 그만큼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계를 받는다. I. 외식에 대한 경계. 우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되어서도 안 되고, 외식하는 자들이 행하는 대로 행해서도 안 된다. 1. 구제(救濟)할 때에 그러하다, 마 6:1-4. 2. 기도할 때에 그러하다, 마 6:5-8.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지, 또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배우며(마 6:9-13), 또한 기도할 때에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 마 6:14,15. 3. 금식할 때에 그러하다, 마 6:16-18. II. 세속에 마음을 두는 것에 대한 경계. 1. 우리의 선택에 있어서 그러한데, 이것은 외식하는 자들을 파멸시키는 죄이다, 마 6:19-24. 2. 우리의 염려에 있어서 그러한데, 이것은 많은 선한 그리스도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죄이다, 마 6:2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