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ipture.how 성경 주석서

학습 자료

성경 주석서

여러 공개 도메인 주석서와 성서하우 한글 번역을 책과 장별로 탐색합니다. 주석서를 전환하며 번역만 읽거나 원문과 번역을 나란히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주석서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전체 항목

4,537

번역 4,537건

라이선스

공개 도메인

원문 출처

출처와 라이선스

주석서 원문, 저자, 번역 진행률, 라이선스 정보를 출처별로 구분해 표시합니다. 성서하우의 한글 번역·편집물은 원문 자료와 별도로 관리됩니다.

전체 라이선스 보기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공개 도메인

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번역 진행
4,537 / 4,537
원문 언어
en
보기 방식
번역 언어
번역 상태

마태복음 9장 서론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제목 없음

번역 있음 본문 열기

이 장에는 주 예수의 권능과 긍휼을 보여 주는 주목할 만한 사례들이 나온다. 이는 그가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을 온전히 구원하실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능력만큼이나 기꺼이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증한다. 그의 권능과 긍휼은 다음과 같이 베푸신 선한 사역에서 드러난다. I. 사람들의 몸을 위하여: 중풍병자를 고치고(마 9:2-8), 한 관리의 딸을 살리며 혈루증 앓는 여인을 낫게 하고(마 9:18-26), 두 맹인에게 시력을 주며(마 9:27-31),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고(마 9:32-34), 모든 종류의 질병을 고치셨다(마 9:35). II.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죄를 용서하고(마 9:2), 마태를 부르며 세리와 죄인들과 거리낌 없이 교제하고(마 9:9-13), 금식의 의무와 관련하여 제자들의 형편을 헤아리며(마 9:14-17), 복음을 전파하고 무리를 긍휼히 여겨 그들을 위한 전도자들을 마련하셨다(마 9:35-38). 이로써 그는 영혼과 몸 모두의 능숙하고 신실한 의사이심을 입증하셨다. 실제로 그는 두 영역의 모든 질병에 충분한 치료책을 지니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나아가야 하며, 우리의 몸과 영혼 모두에 베푸신 선하심에 응답하여 그의 소유인 몸과 영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마태복음 9장 1-8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Christ Heals a Man Sick of the Palsy

번역 있음 본문 열기

그리스도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¹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²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³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⁴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⁵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⁶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⁷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⁸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 장의 첫말은 앞 장의 결말을 돌아보게 한다. 거기서 거라사 사람들은 돼지를 잃은 일을 몹시 못마땅히 여긴 나머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싫어하여 그에게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청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셨다고 한다. 그들이 떠나 달라고 하자 그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후 그 지방에 다시 오셨다는 기록은 없다. 여기서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1. 그가 그들을 떠나신 공의이다. 그리스도는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 오래 머물지 않으신다. 의로운 심판으로 자기를 싫어하는 장소와 사람을 버리시지만, 자기가 머물기를 사모하고 간청하는 이들과는 함께하신다. 믿지 아니하는 자가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려거든 떠나게 하라. 그 위험은 그 자신이 감당한다(고전 7:15). 2. 그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남겨 그들의 멸시와 완고함을 벌하지 않으신 오래 참으심이다. 이미 마귀의 권세 아래 깊이 놓인 그들을 돼지들 뒤로 보내 버리는 일은 쉽고도 정당했을 것이다. 도발은 참으로 컸으나 그는 참으며 지나치셨고, 분노하거나 꾸짖지 않은 채 배에 오르사 건너가셨다. 이때는 그의 오래 참으심의 날이었다. 그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죽이러가 아니라 고치러 오셨다. 영적인 심판은 복음 시대의 성격에 더 부합한다. 다만 어떤 이들은 이 일이 있은 지 오래되지 않아 로마인이 유대인과 벌인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거라사 사람들이 살던 가다라가 먼저 포위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를 자기에게서 내쫓는 자는 모든 재앙을 자기 위에 끌어들인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떠나시면 화가 있다.

그는 당시 주로 거주하시던 본 동네 가버나움으로 오셨다(막 2:1). 그래서 이곳을 본 동네라고 부른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동네에서 가장 존경받지 못한다고 친히 증언하셨지만, 그는 그곳으로 오셨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고, 낮아지신 상태에서 백성에게 멸시받는 일을 감수하셨기 때문이다. 이 장에 기록된 모든 사건은 가버나움에서 일어났으므로, 복음서의 사건 순서상 그 사이에 다른 일들이 있었어도 마태는 이곳에 함께 묶어 기록한다. 거라사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떠나시기를 청했을 때 가버나움 사람들은 그를 영접했다.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를 모욕해도 그가 영광을 받으실 다른 이들이 있다. 한 사람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원한다.

그리스도께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온 뒤 처음 일어난 사건은 마 9:1-8에 기록된 중풍병자의 치유였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볼 수 있다.

I. 그를 그리스도께 데려온 친구들의 믿음. 병 때문에 그는 남에게 들려 오는 것 외에는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었다. 다리 저는 자와 걷지 못하는 자도 그리스도께 데려올 수 있으며, 그는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면 그는 받아 주신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믿음을 주목하셨다.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지만, 그는 그들을 데려오는 이들의 믿음을 보시며 그 믿음은 헛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이는 중풍병자 자신과 그를 데려온 이들의 믿음을 함께 가리킨다. 그의 병이 지력을 약화하고 믿음의 활동을 막았을지라도 예수께서는 그 안에 자리 잡은 믿음을 보셨다. 그들의 믿음은 1. 강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히 그를 고칠 수 있고 또 고치기를 원하신다고 굳게 믿었기에, 그처럼 공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병자를 데려왔다. 2. 겸손했다. 병자가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께 와 달라고 청하지 않고 그를 그리스도께 데려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 합당하다. 3. 행동하는 믿음이었다. 그리스도의 권능과 선하심을 믿었기에 많은 수고를 들여 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데려왔다. 강한 믿음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의 장애물을 개의치 않는다.

II. 그에게 하신 말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 곧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말씀이다. 이는 병자에게 주신 주권적인 강장제이며, 그의 병중에 그 자리를 온통 고쳐 편안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무슨 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병자는 말할 수 없었을지 모르며, 그를 데려온 이들도 말보다 행동으로 간구하기를 택했다. 그를 그리스도 앞에 놓은 것으로 충분했다. 우리 자신과 친구들을 그리스도의 긍휼의 대상으로 그 앞에 내놓는 일은 헛되지 않다. 비참함도 죄처럼 부르짖고, 긍휼은 공의에 못지않게 빨리 듣는다. 이 말씀에는 1. 작은 자야라는 다정한 호칭이 있다. 고난받는 이들에게 주는 권면과 위로는 그들을 아들처럼 대한다. 고난은 아버지의 훈육이기 때문이다(히 12:5). 2. 안심하라는 은혜로운 격려가 있다. 모든 사람 사이로 침상째 내려진 병자는 당황하고, 무례하게 들어온 일로 책망받을까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격식을 따지지 않고 안심하라고 하신다. 모든 일이 잘될 것이며, 그 앞에 놓인 일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안심하라고 하신 뒤 고치셨다. 그는 은사를 받는 이들이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자기를 찾고 신뢰하기를 원하신다. 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는 (1.) 육신의 치유에 대한 서론으로 볼 수 있다. “네 죄가 용서받았으므로 네가 나음을 입을 것이다.” 죄가 병의 원인이듯 죄 사함은 병에서 회복될 때 누리는 위로이다. 죄가 용서되어도 병이 남을 수 있고, 병이 나아도 죄가 용서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위로와 질병에서 회복된 위로를 함께 누린다면, 히스기야의 경우처럼 그것은 참된 긍휼이 된다(사 38:17). 또는 (2.) 병이 낫든 낫지 않든 안심해야 할 이유이다. “내가 너를 고치지 않더라도 네 죄가 용서받았음을 확증한다면 네가 헛되이 구했다고 하겠느냐? 계속 중풍으로 누워 있더라도 그것을 충분한 위로로 여기지 않겠느냐?” 은혜로 죄 용서의 증거를 가진 사람은 어떤 외적 환난과 고난 아래서도 안심할 이유가 있다(사 33:24).

III. 그리스도의 말씀을 향한 서기관들의 트집(마 9:3). 그들은 마음속으로, 서로 은밀히 수군거리며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말했다. 하늘의 권능과 은혜가 가장 크게 나타난 사건에 지옥의 적의가 가장 검은 낙인을 찍는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하신 일을 신성모독이라 불렀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그 권한을 받지 않았다면 실제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권한 없이 죄를 용서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다.

IV. 그리스도께서 일을 계속하기 전에 이 트집이 부당함을 깨닫게 하신 일.

1. 그는 그것을 지적하셨다. 그들이 마음속으로만 말했어도 그는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주 예수는 우리가 마음속으로 말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아신다. 생각은 은밀하고 순간적이나 영원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앞에는 벌거벗은 듯 드러나며(히 4:12,13), 그는 멀리서도 그것을 아신다(시 139:2). 그래서 단순한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질문, 곧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물으셨다. 죄악된 생각에는 많은 악이 있으며 주 예수께 크게 거슬린다. 그는 마음의 주권자이므로 죄악된 생각은 그의 권리를 침범하고 그의 소유를 어지럽힌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주목하고 불쾌히 여기신다. 그 안에 쓴 뿌리가 있다(창 6:5). 마음에서 시작하고 끝나 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죄도 다른 죄 못지않게 위험하다.

2. 그는 논증으로 그들을 반박하셨다(마 9:5,6). 여기서 다음을 살펴본다.

(1.) 그가 은혜의 나라에서 자신의 권위를 어떻게 주장하시는가. 그는 인자, 곧 중보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을 가졌음을 밝히신다.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고 이 권세를 주신 것은 그가 인자이기 때문이다(요 5:22,27). 그가 분명히 영생을 주는 권세를 가지셨다면(요 17:2), 죄를 용서하는 권세도 가져야 한다. 죄책은 제거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하는 권능이 우리와 같은 본성을 지니신 인자의 손에 있다는 사실은 가련한 죄인에게 회개하도록 주는 큰 격려이다. 그가 세상에서 이 권능을 가지셨다면, 아버지의 오른편에 높아져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고 임금과 구주가 되신 지금은 더욱 그러하다(행 5:31).

(2.) 그가 자연의 나라에서 질병을 고치는 권능으로 이를 어떻게 증명하시는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는 일과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일 중 어느 것이 쉬운가? 선지자로서 선언적으로든 하나님으로서 권위 있게든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은 같은 방식으로 죄도 용서할 수 있다. [1.] 이는 그리스도께서 신적 사명을 받으셨음을 입증하는 일반 논증이다. 그의 기적, 특히 치유의 기적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말씀을 확증한다. 치유에 나타난 권능은 그가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음을, 거기에 나타난 긍휼은 고치고 구원하도록 보내심을 받았음을 입증한다. 진리의 하나님은 거짓에 자기 인을 치지 않으신다. [2.] 이 사건에는 특별한 설득력이 있다. 중풍은 죄라는 질병의 한 증상일 뿐이었다. 그는 그 증상을 즉시 제거함으로 근원 질병도 효과적으로 고칠 수 있음을 보이셨다. 죄와 병 사이에는 그처럼 긴밀한 연관이 있었다. 형벌을 제거할 권능을 가진 분은 의심할 여지 없이 죄를 면제할 권능도 있다. 서기관들은 율법적 의를 크게 의지하고 죄 사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죄 사함을 높이고, 세상에 오신 큰 사명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것임을 보이셨다.

V. 병자의 즉각적인 치유. 그리스도는 그들과 논쟁하는 데서 돌이켜 병자에게 치유의 말씀을 하셨다. 아무리 필요한 논변이라도 손이 닿는 대로 해야 할 선한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고, 치유하고 살리며 힘을 주는 권능이 이 말씀과 함께했다(마 9:7). 그래서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1. 그리스도께서 침상을 가지고 가라고 하신 것은 그가 완전히 나았음을 보이려는 것이었다. 더는 침상에 실릴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짊어질 힘도 생겼다. 2. 그를 집으로 보내신 것은 오랫동안 짐이 되었던 가정에 이제 복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자라면 그를 구경거리로 데리고 다녔겠지만,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VI. 이 일이 무리에게 남긴 인상(마 9:8). 그들은 놀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의 모든 놀라움은 마음을 넓혀 홀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가련한 사람에게 행하신 일 때문에 영광을 돌렸다. 다른 이가 받은 긍휼도 우리의 찬양이 되어야 하며, 우리는 서로 지체이므로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 무리 중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정도로 확신한 이는 거의 없었지만, 그들은 그를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아들로 보기보다 하나님께서 이런 권능을 주신 한 사람으로 보고 경탄했다. 선을 행하도록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권능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모든 권능은 본래 그의 것이며, 샘으로서는 하나님 안에 있고 저수조로서는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9장 9-13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Called

번역 있음 본문 열기

마태를 부르심

⁹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¹⁰ 예수께서 그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¹¹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¹²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¹³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가난한 세리들, 특별히 마태에게 베푸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은총에 대한 기록을 보게 된다. 그분께서 사람들의 몸에 행하신 일은, 그들의 영혼을 향한 자비로운 계획을 이루기 위한 길을 마련하려 하심이었다. 이제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자.

I. 이 복음서의 기록자인 마태를 부르심. 마가와 누가는 그를 레위라 부른다. 같은 사람이 두 이름을 가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아마도 마태는 세리로 있을 때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을 것이고,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겸손함에서, 더 명예로운 이름인 레위보다 그 이름으로 스스로를 불렀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시몬을 베드로라 일컬으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도로 부르실 때 마태라는 이름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 이라는 뜻이다. 사역자들은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들의 사역과 그 사역을 감당할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물이다. 이제 다음을 살펴보자.

1.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마태를 발견했을 때 그가 처해 있던 자세. 그는 세관에 앉아 있었으니, 이는 그가 세리였기 때문이다(눅 5:27). 그는 가버나움 항구의 세관 관리였거나, 소비세 징수원이거나, 토지세 징수원이었다. 이제, (1.)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생업에 종사하던 중이었다(마 4:18). 주목하라. 사탄이 자기의 유혹을 가지고 게으른 자들에게 오기를 택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부르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 자들에게 오기를 택하신다. 그러나 (2.) 그것은 진지한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쁜 직업이었으니, 이는 그 일에 그토록 많은 부패와 유혹이 따랐고, 그 업에 종사하면서 정직한 사람이 그토록 드물었기 때문이다. 마태 자신은 회심하기 전에 자기가 어떤 자였는지를 인정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도 그러하다(딤전 1:13). 이는 그를 부르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크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요, 또한 하나님께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남은 자를 두고 계심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 누구도 세상에서의 자기 직업을 핑계로 자신의 불신앙을 정당화할 수 없다. 어떤 죄악된 직업에서도 거기서 벗어나 구원받은 자들이 있었고, 어떤 합법적인 직업에서도 거기에 머물러 구원받은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2. 이 부르심의 선행하는 능력. 우리는 마태가 그리스도를 찾았다거나, 그를 따르려는 어떤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비록 그의 친족 중 몇몇이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였음에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선하심의 복으로 그를 앞서 찾아오셨다. 그분은 자기를 찾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발견되신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그를 택한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택하셨다. 그분이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셨고,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일어나 걸어가라(마 9:6) 하신 말씀에 함께한 것과 동일한, 신적이며 전능하신 능력이 마태를 회심시키기 위해 이 말씀에 함께하였다. 주목하라. 영혼 안에 일어나는 구원의 변화는 저자(著者)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고 수단인 그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분의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그 부르심은 효력이 있었으니, 이는 그가 부르심에 응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가 일어나 즉시 그를 따랐으니, 순종을 거부하지도 미루지도 않았다. 신적 은혜의 능력은 모든 반론에 곧 응답하여 그것을 이긴다. 그가 맡은 직책에 대한 위임장도, 그것으로 얻는 이익도, 그리스도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였다(갈 1:15,16). 그는 자기의 직위와 그 길에서의 출세에 대한 소망을 버렸다. 그리고 어부였던 제자들은 후에 이따금 다시 고기 잡는 모습을 보게 되지만, 우리는 마태가 다시 세관에 앉아 있는 모습은 결코 보지 못한다.

II. 이 일을 계기로 한 그리스도와 세리 및 죄인들과의 교제. 그리스도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친히 사귀시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 그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마 9:10).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마태가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는데,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가난한 어부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태가 이 일을 스스로 말할 때에는, 그것이 자기 집이었다고도, 잔치였다고도 말하지 않고, 다만 그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셨다고만 말한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께 표한 존경의 기억보다, 그리스도께서 세리들에게 베푸신 은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주목하라. 우리 자신의 선행에 대해서는 아껴서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제 다음을 살펴보자. 1. 마태가 그리스도를 초청했을 때, 그는 그의 제자들도 함께 오도록 초청하였다. 주목하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그를 위하여 그에게 속한 모든 자도 영접해야 하며, 그들에게 자기 마음속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2. 그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그와 함께 만나도록 초청하였다. 이 대접에서 마태가 주로 목표한 것은, 자기의 옛 동료들을 그리스도와 사귀게 할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들에 대하여 절망하려 하지 않았다. 주목하라. 자신이 그리스도께 효력 있게 이끌려 온 자들은, 다른 이들도 그에게로 이끌려 오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일에 무언가 기여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참된 은혜는 자기 음식을 홀로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초청한다. 마태의 회심으로 그 무리가 깨어졌을 때, 곧 그의 집은 세리들로 가득 찼고, 분명 그들 중 몇몇은, 마태가 그리스도를 따랐듯이 그를 따를 것이다. 안드레와 빌립도 그렇게 하였다(요 1:41,45, 요 4:29). 또한 삿 14:9를 보라.

III. 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불쾌함(마 9:11). 그들은 이를 트집 잡았으니,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였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라. 1. 그리스도께서 시비를 당하셨다는 것. 그분께서 죄인들이 자기를 거슬러 거역한 일을 참으신 것은 그의 고난 중에서도 작지 않은 것이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큰 다툼을 해결하러 오신 그분보다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비를 당한 자는 없었다. 이렇게 그분은 성육신하신 신성에 합당한 영광, 곧 자기가 말씀하시는 바에서 옳다 인정받으시고 자기가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즉시 받아들여지는 영광을 스스로 부인하셨다. 비록 그분은 결코 그릇되게 말씀하시거나 행하신 적이 없으셨지만, 그분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이 흠잡혔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분은 우리에게 비방을 예상하고 그에 대비할 것과, 그것을 인내로 감당할 것을 가르치셨다. 2. 그분께 시비를 건 자들은 바리새인들이었으니, 그들은 교만한 부류의 사람들로서, 스스로를 자만하고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선지자 시대에 너는 네 자리에 서 있고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하니라(사 65:5) 하던 자들과 같은 기질을 지녔다. 그들은 죄인들을 피하는 데는 매우 엄격하였으나 죄를 피하는 데는 그렇지 못하였다. 경건의 모양에 대해서는 그들보다 더한 열심당이 없었으나, 경건의 능력에 대해서는 그들보다 더한 원수가 없었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세세한 것까지 지키려 하였고, 그리하여 자기들을 지배하는 바로 그 영을 퍼뜨렸다. 3. 그들은 자기들의 트집을 그리스도 자신에게 가져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그분을 직접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에, 그의 제자들에게 가져갔다. 제자들도 같은 자리에 있었으나, 다툼은 그 선생에게 향한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선지자인 그분에게 있어서 이 일이 제자들에게 있어서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분의 위엄이 다른 이들보다 그분을 그런 무리에게서 더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 선생에게 노여워하면서 그들은 제자들과 다투는 것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과 율법을 변호하고 입증할 수 있어야 하며,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항상 대답할 것을 준비할(벧전 3:15) 줄 알아야 한다. 그분이 하늘에서 우리를 위한 변호자가 되시는 동안, 우리는 땅에서 그를 위한 변호자가 되어, 그분이 받으신 비방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자. 4. 그 불평은 그분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신 것이었다. 악한 사람들과 친밀히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난다(시 119:115, 시 1:1).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이 일로 그리스도를 그의 제자들에게 고발함으로써, 제자들을 그분에게서 떠나게 유혹하고, 그분에 대한 호감을 잃게 하여, 더 나은 무리와 사귀는 자기들에게로 끌어와 자기들의 제자로 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들은 교인 하나를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기 때문이다. 세리들과 친밀히 지내는 것은 장로들의 전통에 어긋났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가증한 일로 여겼다. 그들이 이 일로 그리스도께 노여워한 것은, (1.) 그들이 그분을 미워하여 그분을 곡해할 구실을 찾았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가장 선한 말과 행위에 가장 악한 해석을 붙이는 것은 쉽고도 매우 흔한 일이다. (2.) 그들이 세리와 죄인들에게 아무 선의도 품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시기하며, 그들이 회개에 이르는 것을 보고 슬퍼하였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다른 이들이 은혜에 참여하는 것을 시기하고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마땅히 의심받을 만하다.

IV. 세리와 죄인들과의 교제를 정당화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제자들을 위하여 펴신 변호. 제자들은 아직 연약했던 것으로 보이며, 바리새인들의 트집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 했으므로, 그것을 그리스도께 가져왔고, 그분이 그것을 들으셨다(마 9:12). 혹은 아마도 그들이 제자들에게 수군대는 것을 그분이 우연히 들으셨을 것이다. 그분 홀로 자기를 변호하시고 자기의 사정을 변론하시며, 자기를 위해서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답하시도록 그분께 맡기자. 그분은 자기 변호에서 두 가지를 역설하신다.

1. 세리들의 형편의 필요와 긴급함이니, 이것이 그분의 도우심을 큰 소리로 요청하였고, 그러므로 그가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들과 교제하신 것을 정당화한다. 그리스도를 저 위 순결한 영역에서 이 부정한 영역으로 데려온 것은 가난하고 잃어버린 죄인들의 극심한 필요였다. 그리고 그분을 부정하다 여겨지는 이 무리 가운데로 데려온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

(1.) 그분은 세리들의 형편의 필요성을 입증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세리들은 병들었으므로, 그들을 돕고 고쳐 줄 이가 필요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에게 그런 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주목하라.

[1.] 죄는 영혼의 질병이니, 죄인들은 영적으로 병든 자들이다. 원죄의 부패는 영혼의 질병이요, 실제로 범한 범죄들은 그 상처들이며, 그 질병의 발진이다. 그것은 영혼을 일그러뜨리고, 약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쇠하게 하고,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고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의 위대한 의사이시다. 그분이 육신의 질병을 고치신 것은 그분이 그 날개에 치유함을 가지고(말 4:2) 떠오르셨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분은 능숙하고, 신실하며, 긍휼이 풍성한 의사이시며,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 그분의 직무요 사명이다.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은 자기 주위의 모든 이에게 의사와 같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다. Hunc affectum versus omnes habet sapiens, quem versus ægros suos medicus(지혜로운 사람은 의사가 자기 환자를 향해 품는 그런 마음을 자기 주위의 모든 이를 향해 품는다). 세네카, De Const.(『현자의 항심에 관하여』). [3.] 죄로 병든 영혼들은 이 의사가 필요하니, 이는 그들의 병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자연(본성)은 스스로를 돕지 못하며, 그 누구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그토록 필요하여, 그가 없이는 우리가 망하며, 영원히 망한다. 깨달은 죄인들은 자기의 필요를 보고, 그에 따라 그분께 자신을 의탁한다. [4.] 자기가 온전하고 건강하다고 여기는 자들, 자기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그가 없이도 스스로 충분히 잘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무수히 많으니, 라오디게아가 그러하였다(계 3:17).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길에 대한 지식을 원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에게 그분이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들에게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 9:40,41을 보라.

(2.) 그분은 그들의 필요가 그분의 행동, 곧 그들과 친밀히 교제하시는 것을 충분히 정당화하며, 그것으로 책망받지 않으셔야 함을 입증하신다. 그 필요가 그것을 자비의 행위로 만들기 때문이니, 자비는 언제나 종교적 직업의 형식적 의례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거기서 실체가 보이는 것이나 그림자보다 나은 만큼, 선행(beneficence)과 후한 베풂(munificence)이 장려함(magnificence)보다 훨씬 낫다. 도덕적이고 본성적인 의무에 속하는 의무들은,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저 신적 율법들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며, 하물며 하나님의 율법을 그가 만드신 것보다 더 엄격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규정과 장로들의 전통보다는 더욱더 우선되어야 한다. 그분은 이것을 호 6:6에서 인용하신 한 구절로 입증하신다(마 9:13).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바리새인들이 명한 바, 세리들의 무리에게서 무뚝뚝하게 분리되는 것은 제사만도 못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교제하신 것은 일반적인 긍휼의 행위 이상이었으므로, 그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사무엘이 보여 주듯이(삼상 15:22,23), 우리 자신이 선을 행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면, 다른 이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교제하신 것을 여기서 긍휼이라 부른다. 영혼들의 회심을 촉진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긍휼의 행위이니, 이는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이다(약 5:20).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어떻게 인용하시는지 주목하라. 너희는 가서 그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주목하라. 성경의 글자만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 뜻을 깨닫도록 배워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자기 허물에 대한 책망으로, 또 자기 실천의 규칙으로 적용하는 법을 배운 자들이야말로 성경의 뜻을 가장 잘 배운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인용하신 이 성경은 그분을 변호하는 데 쓰였을 뿐 아니라, 다음의 역할도 하였다. [1.] 참된 신앙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이는 것. 그것은 외적 의례에 있지 않으며, 먹고 마시는 것과 거룩함을 가장하는 것에 있지 않고, 사소하고 특이한 의견들이나 의심스러운 논쟁들에 있지 않고, 다른 이들의 몸과 영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는 데 있으며, 의와 화평에 있으며,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데 있다. [2.] 도덕보다 의례에 신앙을 두는 자들의 바리새인적 위선을 정죄하는 것(마 23:23). 그들은 자기들의 교만, 탐욕, 야망, 악의와 양립할 수 있으며 어쩌면 그것들에 도움이 되는 경건의 모양들은 받아들이면서, 그러한 정욕들을 죽이는 경건의 능력은 미워한다.

2. 그분은 자기 사명의 본질과 목적을 역설하신다. 그분은 자기에게 주어진 명령을 지키시고, 자기가 위대한 교사로 세움받은 그 일을 이루셔야 한다. 이제 그분이 이르시되,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그러므로 세리들과 교제해야 한다" 하신다. 살펴보라. (1.) 그분의 사명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회개로 부르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분의 첫 본문이었으며(마 4:17), 그분의 모든 설교가 지향한 바였다. 주목하라. 복음의 부르심은 회개로의 부르심이니,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우리의 길을 바꾸라는 부르심이다. (2.) 그분의 사명이 누구에게 있었는가. 그것은 의인에게 있지 않고 죄인에게 있었다. 곧, [1.] 사람의 자녀들이 죄인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오실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그분은 사람을 사람으로서 구원하시는 구주가 아니라, 타락한 사람으로서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첫 사람 아담이 자기의 본래 의 안에 머물러 있었다면, 우리에게 둘째 아담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2.] 그러므로 그분의 가장 큰 일은 가장 큰 죄인들에게 있다. 병자의 상태가 더 위험할수록 의사의 도움이 더 필요한 법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려 함이었으나, 특별히 죄인 중에 괴수를 구원하시려 함이었다(딤전 1:15). 곧, 비록 죄인이지만 상대적으로 의로운 자들을 부르시려는 것이라기보다, 가장 악한 죄인들을 부르시려는 것이다. [3.] 어떤 죄인이든 자기의 죄됨을 더 깊이 자각할수록,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그들에게 더욱 환영받게 된다. 또한 누구든지 자기의 동석을 바라는 곳으로 가기를 택하지, 차라리 자기가 비워 주기를 바라는 자들에게로 가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의인들, 곧 스스로를 그렇게 자만하여 자기 죄에 싫증 내기보다 차라리 자기 구주에게 더 빨리 싫증 낼 자들 가운데서 성공하기를 기대하심이 아니라, 깨달은 겸손한 죄인들 가운데서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니, 이는 그들에게 그분이 환영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9장 14-17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Christ's Reply to the Disciples of John

번역 있음 본문 열기

요한의 제자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대답

¹⁴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거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¹⁵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니라
¹⁶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¹⁷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을 향해 제기된 반론들은 그분의 가장 유익한 강론들 가운데 일부를 베푸실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진리의 유익은 흔히 반대자들에게서 만나는 반대를 통해서도 도리어 진척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지혜는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신다. 이 장(章)에서 그러한 사례가 나타나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죄를 용서하시는 그분의 권능과 죄인을 영접하실 그분의 기꺼우심에 관한 강론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트집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분의 가족(제자들)의 행실에 대한 비난에서 그 가족을 향한 그분의 자상하심에 관한 강론이 일어났다. 살펴보자.

I.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향하여, 자기들만큼 자주 금식하지 않는다고 제기한 반론이다. 이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 외에, 그들의 신앙고백이 느슨하다는 또 하나의 증거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씌워진 혐의였다. 따라서 그들은 그 신앙고백을 좀 더 엄격한 다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암시를 받은 것이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막 2:18, 눅 5:33)을 통해 드러나듯이,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그들과 합세하였으며,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부추겼으리라고 의심할 만한 근거를 갖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요한의 제자들을 자기들의 대변자로 내세운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및 그분의 제자들에게 더 호의를 받고 있어서 그 일을 더 그럴듯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서로 다투게 만드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 생각하는 바가 서로 다를 때,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그 기회를 틈타 불화를 심고, 그들을 서로 격분케 하며, 서로 멀어지게 하여, 그리하여 그들을 손쉬운 먹잇감으로 삼는다.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충돌한다면,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배후에서 손을 써 불을 부채질해 왔으리라고 의심할 만하다. 그런데 그 불평은 이러하였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거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거룩한 사랑을 굳건케 하는 확증이 되어야 마땅한 종교의 의무들이 다툼과 분쟁의 빌미가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처럼 흔히 그렇게 되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들이 자기들의 금식을 어떻게 자랑하였는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거늘. 금식은 교회의 모든 시대에 걸쳐 특별한 경우에 종교적인 일을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되어 왔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매우 많이 행하여, 그들 중 다수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일을 지켰다. 그럼에도 그들 대다수는 위선자요 악한 사람들이었다. 주목하라. 거짓되고 형식적인 신앙고백자들은 흔히 외적인 경건의 행위에서, 심지어 자기 부정(克己)의 행위에서까지 남들을 능가한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였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그들 스승의 행실을 본받은 것이다. 요한은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며 왔기 때문이다(마 11:18). 사람들은 비록 언제나 동일한 내적 원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라도 자기 지도자를 본받기 쉽다. 또 부분적으로는 회개에 관한 그들 스승의 교훈을 따른 것이다. 주목하라. 종교의 더 엄격한 부분은 흔히, 아직 얽매임의 영으로서의 성령의 훈련 아래 있는 자들이 가장 마음을 쏟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 자리에서는 선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이것들을 거쳐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의 삶과 그분을 의지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런 것들은 마땅히 그 삶으로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께 나아와, 자기들이 자주 금식한다고, 적어도 자기들이 자주 한다고 여기는 바를 아뢴다. 주목하라. 사람마다 대부분 자기의 선함을 자랑하느니라(잠 20:6). 신앙고백자들에게는 종교에서 자기가 행한 바를, 특히 그들에게 무언가 비범한 것이 있을 경우, 자랑하는 성향이 있다. 아니,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변론하며, 마치 그것이 하나의 의(義)인 양 그것을 의지하기까지 한다.

2.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자기들만큼 자주 금식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비난하였는가.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다. 그들도,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금식을 사사로이 지키며 사람에게 금식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처신하라고 가르치셨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자기들의 금식을 떠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이 금식하지 않는다고 단정한 것은 매우 무자비한 일이었다. 주목하라. 우리는 세상의 눈과 관찰에 드러나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의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설령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들만큼 자주 혹은 오래 금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보다 더 신앙심이 있다고 여겨지기를 바랐단 말인가. 주목하라. 헛된 신앙고백자들이 자신을 종교의 표준으로 삼아 그것으로 사람과 사물을 시험하고 재는 것은 흔한 일이다. 마치 자기들과 다른 모든 사람은 그만큼 잘못된 것인 양, 자기들보다 적게 하는 모든 사람은 너무 적게 한 것이요, 자기들보다 많이 하는 모든 사람은 너무 많이 한 것인 양 여기니, 이는 그들에게 겸손과 사랑이 결여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증거이다.

3. 그들이 이 불평을 어떻게 그리스도께 가져왔는가. 주목하라. 만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빠뜨림으로든 행함으로든 거리낌을 일으키면, 그리스도 자신이 반드시 그 말을 듣게 되며 그 일로 비난을 받으신다. 오, 예수여, 이들이 당신의 그리스도인들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소중히 여긴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르게 처신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살펴보라. 그리스도와의 다툼은 제자들에게 가져갔고(마 9:11), 제자들과의 다툼은 그리스도께 가져갔다(마 9:14). 이것이 불화를 심고 사랑을 죽이는 방식이니, 곧 백성을 사역자에게 맞서게 하고, 사역자를 백성에게 맞서게 하며, 한 친구를 다른 친구에게 맞서게 하는 것이다.

II. 이 일에 관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베푸신 변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의 앞부분을 들어, 어찌하여 너희는 자주 금식하느냐? 하고 책망하실 수도 있었다. "아니다, 너희가 그것을 행하는 까닭은 너희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많은 이들이 외적인 경건의 행위에 풍성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그 까닭과 이유를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은 다만 그분 제자들의 행실을 변호하셨다.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 할 말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분은 그들을 위해 하실 말씀을 준비해 두고 계셨다. 주목하라. 지혜가 그 모든 자녀로 인해 옳다 함을 얻는 것이 지혜의 영광이듯이, 지혜로 인해 옳다 함을 얻는 것은 지혜의 자녀들의 행복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과 본을 따라 행하는 바는 그분이 반드시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실 것이니, 우리는 우리의 진실함을 밝혀 주시는 일을 확신을 가지고 그분께 맡길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금식하지 않은 것을 변호하시며 두 가지를 변론하신다.

1. 그것이 그 의무에 적합한 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마 9:15).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살펴보라. 그리스도의 대답은, 그분 자신의 제자들의 행실을 충분히 정당화하면서도 동시에 요한의 제정(制定)이나 요한의 제자들의 행실을 정죄하지 않도록 짜여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 논쟁을 부추기면서,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의 제자들이나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 어느 한쪽에 비난을 돌리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분은 어느 쪽에도 그리하지 않으셨다. 주목하라. 언제든지 우리가 부당하게 비난을 받을 때, 우리의 관심은 오직 우리 자신을 변명하는 데에만 두어야 하며, 맞받아 비난하거나 남에게 흙탕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 또한 여러 정황이 다양할 수 있어서, 다르게 행하는 자들을 정죄하지 않고도 우리 자신의 행실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분의 논증은 혼인 예식이 계속되는 동안의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일반적인 관습에서 취하신 것이다. 이때에는 모든 우울과 슬픔의 표현이 부적절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니, 삼손의 혼인 잔치에서도 그러하였다(삿 14:17). 이제 보자.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그 자리에서 환영받는 혼인집의 손님들이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고, 어둠과 두려움의 경륜 아래 계속 머물러 있는 여종의 자녀들이었다(갈 4:25, 31). 주목하라. 양자(養子)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추종자들은 끊임없는 잔치를 누리지만, 얽매임과 두려움의 영을 받은 자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기쁨으로 즐거워하지 못한다(호 9:1). (2.)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신랑을 그들과 함께 모시고 있었으나, 요한의 제자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들의 스승은 이제 옥에 갇혀, 끊임없이 그 생명이 위태로운 가운데 있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자주 금식하는 것이 시의적절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날, 곧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그분의 육체적 임재를 빼앗기는 날이 닥칠 것이니, 그때에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그분이 떠나가실 때 이별의 생각이 그들을 슬프게 하였고(요 16:6), 그분이 가신 후에는 환난과 고난이 그들에게 임하여 애통하며 기도할, 곧 종교적 금식을 행할 기회를 그들에게 주었다. 주목하라. [1.]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 교회의 신랑이시며, 그분의 제자들은 혼인집의 손님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요한이 자기를 일컬어 신랑의 친구라 하였을 때 이 비유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요 3:29). 만일 그들이 이 암시로써 자기 스승이 그때 한 말을 떠올렸다면, 그들 스스로 자기들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혼인집의 손님들의 처지는 이 세상에서 많은 변천과 변화에 노출되어 있으니, 그들은 인자와 심판을 노래한다. [3.] 혼인집의 손님들이 즐거운가 우울한가는, 그들이 신랑의 임재를 더 많이 누리느냐 적게 누리느냐에 달려 있다. 신랑이 그들과 함께 계실 때에는 하나님의 등불이 그들의 머리 위에 비치어 모든 것이 형통하지만, 비록 잠시일지라도 그분이 물러나시면 그들은 괴로워하며 무겁게 걸어간다. 해가 가까이 임하면 낮과 여름이 되고, 해가 멀리 떠나면 밤과 겨울이 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기쁨에 있어 그 전부이시다. [4.] 모든 의무는 그 합당한 때에 행하여야 한다. 전 7:14, 약 5:13을 보라. 슬퍼할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니, 우리는 그 각각에 우리 자신을 맞추어 때를 따라 열매를 맺어야 한다. 금식에 있어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을 살펴야 하니, 그분이 우리에게 애곡하실 때 우리도 애통해야 하며, 또한 우리에 관한 그분의 섭리의 경륜도 살펴야 한다. 주 하나님이 통곡하며 애통하라고 부르시는 때가 있다(사 22:12 참조). 마찬가지로, 우리 앞에 놓인 어떤 특별한 일에 대해서도 살펴야 한다(마 17:21, 행 13:2).

2. 그들에게는 그 의무를 감당할 만한 충분한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두 가지 비유로 제시되는데, 하나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것으로 이는 도리어 낡은 옷을 찢어 놓을 뿐이요(마 9:16), 다른 하나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으로 이는 도리어 부대를 터뜨릴 뿐이다(마 9:17).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요한과 바리새인의 제자들만큼 이러한 엄격한 수련들을 잘 감당할 수가 없었는데, 학식 있는 위트비 박사(Dr. Whitby)는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엄격한 생활을 하던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의 종파들뿐만 아니라, 선지자의 생도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흔히 산과 광야에서 살았고 그들 중 다수는 나실인이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사람들을 엄격한 규율로 훈련시키는 사사로운 학원들도 있었는데, 어쩌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 가운데 다수가 이런 곳에서 나왔을 수 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곧바로 자기들의 생업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어서, 그러한 종교적 엄격에 익숙하지 못했고 그것에 적합하지도 않았으니, 도리어 그런 것들로 인해 그들의 다른 사역에 부적합해질 수 있었다. 주목하라. (1.) 어떤 종교적 의무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어렵고 힘드니, 마치 생베와 새 포도주처럼 가장 강렬한 정신의 집중을 요구하며 혈과 육에 가장 거슬리는 것들이다. 종교적 금식과 그에 따르는 의무들이 바로 그러하다. (2.) 그리스도의 가장 훌륭한 제자들도 유아기의 상태를 거친다. 그리스도의 동산에 있는 나무들이 다 같은 키로 자란 것은 아니며, 그분의 생도들이 다 같은 학급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 있고 장성한 사람들이 있다. (3.) 종교적 수련을 명할 때에는 어린 그리스도인들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마땅히 고려해야 한다. 그들에게 마련해 주는 양식이 그 나이에 합당한 것이어야 하듯이(고전 3:2, 히 5:12), 그들에게 재단해 주는 일거리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이 그때에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려 하지 않으셨다(요 16:12). 종교에 갓 입문한 자들에게 처음부터 가장 어려운 의무들을 지워서는 안 되니, 그들이 낙심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에 그들을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인도하지 않으신 것과 같은 그 배려(출 13:17, 18), 또한 야곱이 자기 자녀와 가축을 몰아치지 않으려 한 그 배려와 같이(창 33:13),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가족의 어린 자들과 그분 양 떼의 어린 양들을 그렇게 배려하시니, 곧 그들을 온유하게 인도하신다. 이러한 배려가 없기 때문에 흔히 부대가 터지고 포도주가 쏟아지는 것이며, 처음부터의 무분별로 인해 많은 사람의 신앙고백이 어그러지고 무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주목하라. 선을 행하는 데에서도 지나침이 있을 수 있으니, 곧 지나치게 의로운 것이며, 사탄의 교활함으로 인해 그러한 지나침이 도리어 그르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9장 18-26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The Ruler's Daughter Raised

번역 있음 본문 열기

회당장의 딸이 살아나다

¹⁸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보라, 한 관원이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¹⁹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그러하더라. ²⁰ 그런데 보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한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자락을 만지니, ²¹ 이는 그가 마음속으로 이르되,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음이라. ²² 그러나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²³ 예수께서 그 관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²⁴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²⁵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²⁶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여기에는 두 가지 사건의 기록이 함께 묶여 있다. 하나는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신 일이요, 다른 하나는 그가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던 도중에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치신 일인데, 후자는 전자의 한가운데에 삽입구처럼 끼어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기적들이 빽빽하게 뿌려져 서로 얽혀 있었기 때문이며, 그를 보내신 이의 일이 그의 날마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앞서 하신 말씀, 곧 바리새인들의 시비에 답하시던 일(마 9: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에서 부름을 받아 이 선한 일들을 행하러 가셨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저 즐겁지 못한 논쟁의 일에 주어진 기쁜 중단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논쟁이란 때로 필요하기는 하나, 선한 사람은 헌신이나 자비의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것을 내려놓는 법이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I. 관원이 그리스도께 드린 청원(마 9:18). 한 관원, 곧 회당장이 와서 그에게 절하였다. 관원들 중에 그를 믿은 자가 있느냐? 그렇다, 여기 한 사람이 있었으니, 곧 교회의 관원이었다. 그의 믿음은 다른 관원들의 불신앙을 정죄하였다. 이 관원에게는 열두 살 된 어린 딸이 있었는데, 방금 죽었고, 그의 가정의 위안에 생긴 이 균열이 그가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된 계기였다. 주목하라. 환난 중에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 친족의 죽음은 마땅히 우리를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 몰아가야 한다. 무엇이라도 그렇게 하게 만든다면 다행이다. 환난이 우리 가정에 임할 때, 우리는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욥처럼 엎드려 경배해야 한다. 이제 살펴보라.

1. 그가 그리스도께 드린 이 청원에서 그의 겸손을 보라. 그는 자기 일을 가지고 직접 그리스도께 나아왔으며, 종을 보내지 않았다. 주목하라. 아무리 높은 관원이라 할지라도 친히 주 예수께 나아가 시중드는 것은 결코 체면 깎이는 일이 아니다. 그는 그분께 절하였고, 그분께 무릎을 꿇었으며, 가능한 모든 존경을 그분께 드렸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 긍휼을 받고자 하는 자는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2. 그가 이 청원에서 보인 믿음을 보라. "내 딸이 방금 죽었나이다." 다른 어떤 의원이라면 이제 너무 늦게 왔을 것이로되(죽은 후의 의술—post mortem medicina, 곧 사후의 약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리스도는 결코 너무 늦게 오시지 않는다. 그는 죽음 이후의 의원이시니, 이는 그가 부활이요 생명이심이라. "그러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이것은 자연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일이었으되(상실에서 소유로의 회귀는 없다—a privatione ad habitum non datur regressus, 곧 한번 잃은 생명은 회복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는 일이었으니, 이는 그가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지셨고, 원하는 자를 살리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보통의 경우 자연을 통하여 일하시며 자연을 거슬러 일하시지 않으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께 이와 같은 청을 드릴 수 없다.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소망이 있고 기도할 여지가 있으나, 우리의 벗들이 죽으면 그 일은 이미 결정된 것이니, 우리가 그들에게로 가려니와 그들이 우리에게로 돌아오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 이 땅에 계시며 기적을 행하시던 동안에는, 이와 같은 확신이 허용될 만하였을 뿐 아니라 매우 칭찬받을 만한 것이었다.

II. 그의 청원에 응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속하심(마 9:19). 예수께서 즉시 일어나, 그의 무리를 떠나 그를 따라가셨다. 그는 그가 원하던 것, 곧 그의 딸을 다시 살리는 일을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그 일을 위해 그의 집까지 가심으로 그를 흡족하게 해 주셨다. 진실로 그는 야곱의 후손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요 4:48-50) 하던 그 귀족과는 함께 가기를 거절하셨으나, "주여, 내려오소서, 그러면 내 아이가 살겠나이다" 하던 회당장과는 함께 가셨다.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취하신 방법들이 다양했던 것은, 아마도 그분께 나아온 자들의 서로 다른 마음의 틀과 기질에 기인할 것이다. 마음을 살피시는 그분은 그것을 완전히 아셔서 그에 맞추셨던 것이다. 그는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람에게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지를 아신다. 그리고 주목하라. 예수께서 그를 따라가실 때, 제자들도 그러하였으니, 곧 그가 자신의 항상 동행하는 자들로 택하신 자들이었다. 그가 시종을 데리고 가신 것은 위세를 부리기 위함이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오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그의 기적의 증인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으니, 이들은 후에 그의 교리를 전파하는 자들이 될 사람들이었다.

III. 그 가련한 여인의 혈루증을 고치심. 내가 그를 가련한 여인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그의 처지가 측은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자기 병을 고치려고 가진 것을 다 의원들에게 허비하였으되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비참한 처지를 이중으로 가중시킨 것이니, 곧 그가 한때는 넉넉하였으나 이제는 빈털터리가 된 것이요, 또 건강을 회복하려고 스스로 가난해졌으되 건강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 여자는 열두 해 동안 끊이지 않는 혈루증을 앓았는데(마 9:20), 이는 몸을 쇠약하게 하고 소모시켜 몸이 반드시 시들어갈 수밖에 없는 병이었을 뿐 아니라, 그를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만들어 주의 전 뜰에서 그를 내쫓는 병이었다. 그러나 그 병이 그를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일에서까지 끊어 놓지는 못하였다. 그는 죽은 딸을 둔 회당장을 따라가시던 길에서, 그리스도께 자신을 의탁하여 그분께로부터 긍휼을 받았다. 이는 회당장에게도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을 굳건히 지켜 주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연약한 신자들의 형편을 은혜로이 헤아리시고 그들의 처지를 살피신다. 주목하라.

1. 그리스도와 그의 능력에 대한 그 여인의 큰 믿음. 그의 병은 그 성질상, 그의 정숙함으로 인해 다른 이들처럼 그리스도께 공공연히 나아가 고침을 구할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믿음의 영의 특별한 충동에 의해, 그는 그분께 넘쳐흐르는 치유의 능력이 가득하여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자기 병이 나으리라고 믿었다. 여기에는 아마 믿음에 약간의 공상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 그가 엘리사의 뼈에 닿아 죽은 사람이 살아난 일(왕하 13:21)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면, 그에게는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간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이해의 연약함이 있었든지 간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기꺼이 못 본 체하시고, 그의 믿음의 진실함과 강함을 받아 주셨다. 이는 그가 꿀을 꿀송이째 잡수시기 때문이다(아 4:11). 그는 그의 옷의 바로 그 자락, 곧 그 옷의 맨 끝부분에만 손을 대어도 고침을 받으리라 믿었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에는 능력이 있다. 대제사장에게 부었던 거룩한 기름이 그 옷자락까지 흘러내렸다(시 133:2). 그리스도 안에는 그러한 은혜의 충만함이 있어서, 우리가 다 그에게서 받을 수 있다(요 1:16).

2. 이 여인에게 베푸신 그리스도의 큰 은혜. 그는 (하실 수도 있었으나) 자신의 치유의 영향력을 거두지 않으시고, 이 부끄러움 많은 환자가 아무도 모르게 고침을 훔쳐 가도록 허락하셨다. 비록 그가 그분 모르게 그렇게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그 여인은 자기가 구하러 온 것을 얻었으니 기꺼이 떠나려 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그렇게 보내려 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 여인의 치유에서 자신의 능력이 높임을 받게 하실 뿐 아니라, 그를 위로하고 칭찬하심으로 자신의 은혜도 높임을 받게 하려 하셨다. 그의 믿음의 승리는 마땅히 그에게 칭찬과 영예가 되어야 했다. 그는 그를 찾으려고 돌이키시어(마 9:22) 곧 그를 알아보셨다. 주목하라.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숨기는 자들이 그리스도께는 알려져 있다는 것, 곧 가장 은밀할 때에라도 그들이 하늘을 향해 드리는 간구를 은밀한 중에 보시는 그분께 알려져 있다는 것은,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격려가 된다. 이제 여기서,

(1.) 그는 딸아, 안심하라는 그 말씀으로 그의 마음에 기쁨을 넣어 주신다. 그는 몰래 나아온 일로 책망 들을까 두려워했으나, 도리어 격려를 받는다. [1.] 그는 그를 딸이라 부르신다. 이는 그가 중풍병자(마 9:2)에게 아들이라 부르며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버지의 부드러움으로 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한나가 그러했듯이(삼상 1:15) 슬픈 심령을 가진 시온의 딸들을 위해 준비된 위안을 가지고 계신다. 믿는 여인들은 그리스도의 딸들이며, 그는 그들을 그러한 자로 인정하실 것이다. [2.] 그는 그에게 안심하라고 명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딸로 인정하신다면 그는 안심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주목하라. 성도의 위안은 그들의 양자됨에 그 근거를 둔다. 그가 그에게 위안을 받으라 명하신 것은, 너희는 나으라 하신 말씀이 건강을 가져왔던 것처럼 그 자체로 위안을 가져왔다. 주목하라. 그의 백성이 위안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요, 괴로워하는 심령에게 위안을 명하는 것은 그의 특권이다. 그는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시되 곧 평강이라(사 57:19).

(2.) 그는 그의 믿음에 영예를 입히신다. 다른 어떤 은혜보다도 믿음이 그리스도께 가장 큰 영예를 돌리므로, 그는 믿음에 가장 큰 영예를 입히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렇게 하여 믿음으로 그는 좋은 평판을 얻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은혜 중에 믿음에 가장 큰 영예를 입히시듯이, 모든 신자 중에서는 가장 겸손한 자들에게 가장 큰 영예를 입히신다. 여기 이 여인이 그러하였으니, 그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안심할 이유가 있었으니, 단지 그가 나음을 입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 그를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곧, [1.] 그는 영적으로 고침을 받았다. 그에게는 믿음의 합당한 열매요 결과인 치유, 곧 죄 사함과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졌다. 주목하라. 우리의 일시적인 긍휼이, 그것을 닮은 영적인 복들과 함께 따라올 때, 우리는 그 긍휼 안에서 풍성히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우리의 양식과 의복은, 믿음으로 우리가 생명의 떡을 먹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을 때에 위안이 될 것이다. 우리의 안식과 잠은,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쉬고 그 안에 평안히 거할 때에 위안이 될 것이다. 우리의 건강과 형통은, 믿음으로 우리 영혼이 잘되고 강건할 때에 위안이 될 것이다. 사 38:16,17을 보라. [2.] 그의 육신의 치유는 믿음의 열매, 곧 그 자신의 믿음의 열매였으니, 그것이 그 치유를 참으로 복되고 위안이 되는 치유로 만들었다. 귀신 들렸던 자들이 쫓겨난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적 능력으로 도움을 받은 것이요,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믿음으로 (마 9:2처럼) 도움을 받았으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주목하라. 일시적인 긍휼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것은 우리에게 참된 위안이 된다. 만일 우리가 긍휼을 구할 때, 약속에 눈을 두고 그 약속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것을 위해 기도하였다면,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것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그것을 구하였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 마음이 믿음과 사랑과 순종 안에서 넓어졌다면, 우리는 그것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IV. 그가 관원의 집에서 발견하신 광경(마 9:23). 그는 그 무리와 피리 부는 자들, 곧 악사들이 떠드는 것을 보셨다. 그 집은 소란스러웠다. 죽음이 한 가정에 들이닥칠 때 그것이 만들어 내는 일이 그러하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의 죽은 자를 우리 눈앞에서 단정히 장사 지내야 하는 그때에 일어나는 불가피한 근심들은, 우세하여 폭군처럼 군림하기 쉬운 그 슬픔으로부터 어느 정도 유익한 주의 전환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그 죽음을 함께 애도하고 부모를 위로하며, 유대인들이 오래 미루는 법이 없던 장례를 준비하고 거기에 참석하려고 함께 모여들었다. 그들 가운데 악사들이 있었으니, 이는 이방인들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그들은 구슬프고 우울한 곡조로 슬픔을 더하고 이런 경우에 참석한 자들의 통곡을 자아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일랜드인들이 "아호네, 아호네(Ahone, Ahone)"라며 그렇게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그들은 그 자체로도 도를 넘기 쉬운 정념에 빠져들어, 소망 없는 자들처럼 슬퍼하기를 일삼았다. 보라. 신앙은 강심제를 마련해 주는 데 반해, 무신앙은 부식제를 들이댄다. 이교 신앙은 기독교가 누그러뜨리려 애쓰는 그 슬픔을 도리어 가중시킨다. 혹은 어쩌면 이 악사들이 도리어 슬픔을 돌이키고 그 가정을 기쁘게 하려 애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으니라. 주목하라. 직접 그 환난을 당하여 마음에 사무친 부모는 잠잠하였던 반면, 그 무리와 피리 부는 자들은 억지로 짜낸 통곡으로 그토록 시끄럽게 떠들었다. 주목하라.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슬픔이 항상 가장 큰 슬픔인 것은 아니다. 강은 얕게 흐르는 곳에서 가장 요란한 소리를 낸다. 증인 없이 슬퍼하는 자가 가장 진실로 슬퍼하는 자라—Ille dolet vere, qui sine teste dolet(곧, 남의 이목을 피하는 슬픔이 가장 진실한 슬픔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점이 기록된 것은, 그 소녀가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의심할 바 없는 인식 속에서 참으로 죽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V. 이 소란과 떠들썩함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주신 책망(마 9:24). 그가 이르시되, 물러가라. 주목하라. 때로 세상의 슬픔이 우세할 때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위안이 들어가기가 어렵다. 슬픔 속에 자기를 완고하게 만들어, 라헬처럼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불안케 하는 생각들에게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고 여겨야 한다. 곧 "이스라엘의 위안이시며, 이 세상 슬픔의 혼란과 폭정을, 영혼 안에 받아들여지기만 한다면 능히 이길 만큼 강한 위안을 가지고 오시는 그분을 위하여 자리를 비우라"는 것이다. 그는 그들이 그렇게 스스로를, 또 서로를 불안케 해서는 안 되는 합당한 이유를 주신다.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1. 이것은 곧 다시 살아날 이 소녀에게 특히 참되었다. 그는 참으로 죽었으나, 자신이 무엇을 행하실지, 또 행하실 수 있는지를 속으로 아시며, 그의 죽음을 한낱 잠에 불과하게 만들기로 작정하신 그리스도께는 그렇지 않았다. 잠과 죽음 사이에는 지속 기간 외에는 거의 차이가 없으며, 그 밖에 어떤 차이가 있든 그것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 이 죽음은 잠시뿐일 것이기에 하룻밤의 쉼과 같은 잠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분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실 수 있다(롬 4:17). 2.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죽는 모든 자에게, 특히 주 안에서 죽는 자들에게 참되다. 주목하라. (1.) 죽음은 잠이다. 모든 민족과 언어가, 그토록 두렵고 또 피할 수 없는 그것을 부드럽게 하고 또 그것과 화해하기 위하여, 그것을 그렇게 부르기로 일치하였다. 악한 왕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그 조상들과 함께 잤다고 하였고, 영원한 부끄러움에 이르도록 일어날 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티끌 속에서 잔다고 하였다(단 12:2). 이는 영혼의 잠이 아니다. 영혼의 활동은 그치지 않는다. 다만 몸의 잠이니, 몸은 무덤에 누워 고요하고 잠잠하며, 무관심하고 또 외면당한 채, 어둠과 흐릿함에 싸여 있다. 잠은 짧은 죽음이요, 죽음은 긴 잠이다. 그러나 의인의 죽음은 특별한 의미에서 잠으로 여겨져야 한다(사 57:2). 그들은 예수 안에서 잔다(살전 4:14). 그들은 단지 낮의 수고와 노동에서 쉴 뿐 아니라, 부활의 아침에 기쁘게 다시 깨어날 소망 중에 쉬는 것이니, 그때에 그들은 상쾌하게 깨어나, 새 생명으로 깨어나, 풍성하게 단장되고 면류관을 쓰도록 깨어나, 다시는 잠들지 않도록 깨어날 것이다. (2.)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사랑하는 친족이 죽었을 때 우리의 슬픔이 누그러질 것이다. "그들이 없어졌다 하지 말라. 아니, 그들은 단지 먼저 갔을 뿐이다. 그들이 죽임을 당했다 하지 말라. 아니, 그들은 단지 잠들었을 뿐이다."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이 멸망하였다(고전 15:18)고 상상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로 말한다. "그러니 물러가라. 은혜 언약이 베푸는 그 위안들, 곧 장차 올 상태와 나타날 영광에서 길어 올린 그 위안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그런데 우리 주 예수의 입에서 나온 이토록 위안이 되는 말씀이, 실제로 그러했던 것처럼 조롱당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들이 비웃었다. 이 사람들은 가버나움에 살았기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곧 그가 결코 경솔하거나 어리석은 말씀을 하신 적이 없음을 알았고, 그가 얼마나 많은 권능 있는 일을 행하셨는지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가 이 말씀으로 무엇을 뜻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결과를 기다리며 잠잠히 있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주목하라.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이라 하여 멸시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신적인 말씀의 신비를, 그것이 우리가 가장 확신하는 바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마땅히 경배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그 기적을 확증하는 데 기여하였으니, 이는 그가 너무도 명백히 죽은 것처럼 보였기에 달리 말하는 것이 매우 우스운 일로 여겨졌던 까닭이다.

VI.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 소녀를 다시 살리심(마 9:25). 무리를 내보내셨다. 주목하라. 자기 능력 너머에 있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비웃는 조롱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일들의 합당한 증인이 되지 못한다. 그 일들의 영광은 화려함이 아니라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는 공개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나, 이 소녀는 은밀하게 살아났다. 이는 건강을 회복시키는 더 작은 기적들조차 멸시한 가버나움이 생명을 회복시키는 더 큰 기적을 볼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진주들은 그것들을 발로 짓밟을 자들 앞에 던질 것이 못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셨으니, 이는 마치 그를 잠에서 깨워 일으켜 세우려는 듯, 그가 잔다고 하신 자신의 비유를 그대로 이어가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예표한 대제사장은 죽은 자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되었으나(레 21:10,11),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를 만지셨다. 레위의 제사장 직분은 죽은 자를 그 부정함 가운데 내버려 두고 그들에게서 거리를 둔다. 이는 그것이 그들을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오염 위에 계시므로, 그들을 만지기를 꺼리지 않으신다. 그가 그의 손을 잡으시매, 그 소녀가 일어났다. 이토록 쉽게, 이토록 효력 있게 그 기적이 이루어졌다. 엘리야가 한 것처럼(왕상 17:21), 또 엘리사가 한 것처럼(왕하 4:33) 기도로 된 것이 아니라, 한 번 만지심으로 된 것이다. 그들은 종으로서 그 일을 행하였으나, 그는 아들로서, 하나님으로서, 곧 사망에서 벗어남이 속한 분으로서 그 일을 행하셨다. 주목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들의 주이시니, 그가 원하실 때 또 원하시는 대로 영혼들을 불러내기도 하고 불러들이기도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손을 잡아 주지 않으시면 죽은 영혼은 영적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그것은 그의 권능의 날에 이루어진다. 그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시거나, 아니면 우리는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이다.

VII. 이 기적이 비록 은밀하게 행해졌으나 널리 알려짐(마 9: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졌다. 그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일들은 깊이 생각되고 활용되기보다는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더 많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직접 목격한 자들뿐 아니라 그 소문만 들은 자들도 그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것들에 대한 믿을 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니, 그 기록의 신빙성에 근거하여 우리는 그의 교리를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그리고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마태복음 9장 27-34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Two Blind and a Dumb Man Healed

번역 있음 본문 열기

두 맹인과 한 벙어리를 고치심

²⁷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²⁸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²⁹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³⁰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³¹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³²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³³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 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³⁴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우리 구주께서 함께 행하신 두 가지 기적에 대한 기록을 더 보게 된다.

I. 두 맹인에게 시력을 주심, 마 9:27-31.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빛의 근원도 되신다.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써 그분은 자신이 태초에 사람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신 바로 그분이심을 보이셨고, 또한 맹인에게 시력을 주심으로써 그분은 자신이 태초에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분이심을 보이셨다. 보라.

1. 맹인들이 그리스도께 간절히 호소함. 그분은 관원의 집에서 자신의 거처로 돌아오시는 중이었는데, 이 맹인들이 그분을 따라오며, 마치 거지들처럼 끊임없이 소리를 질렀다, 마 9:27. 질병을 그토록 쉽게, 그토록 효과적으로, 게다가 그토록 값없이 고쳐 주시는 분이시니 환자가 충분히 많을 수밖에 없다. 다른 일에서도 그러하시거니와, 그분은 안과 의사(Oculist)로서도 명성이 있으셨다. 보라.

(1.) 이 맹인들이 그리스도께 드린 칭호,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 곧 그의 허리에서 메시아가 나오리라는 약속은 잘 알려져 있었고, 그러므로 메시아는 흔히 다윗의 자손이라 불렸다. 이때에 그분의 나타나심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가 있었다. 이 맹인들은 그분이 오셨다는 것과 이분이 바로 그분이심을 알고, 인정하며, 가버나움 거리에서 외쳐 선포하였으니, 이는 그분을 부인하고 대적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과 죄를 더욱 가중시킨다. 그들은 그분과 그분의 기적을 볼 수 없었으나,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주목하라. 하나님의 섭리로 육신의 시력을 잃은 자들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곧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진 하나님의 그 큰일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될 수 있다.

(2.) 그들의 간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 긍휼히 여기는 분이 되시리라고 예언되었으며(시 72:12,13), 그분 안에 우리 하나님의 긍휼이 빛난다, 눅 1:78. 주목하라. 우리의 궁핍과 짐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에게 공급과 지탱을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 주 예수의 긍휼에 참여하는 것밖에 더 없다. 그분이 우리를 고치시든 아니하시든, 그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면 우리에게 충분하다. 긍휼을 베푸시는 특정한 사례와 방법에 관하여는, 우리가 안전하고 지혜롭게 그리스도의 지혜에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을 위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지 않고, 서로를 위하여 함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다. 주목하라. 같은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구원을 위하여 같은 기도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 마땅하다. 함께 고난받는 자들은 함께 간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자를 위한 충분함이 있다.

(3.) 이 간구에 있어서 그들의 끈질김. 그들은 소리 지르며 그분을 따라왔다. 처음에는 그분이 그들을 주목하지 않으신 듯한데, 이는 그분이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려 함이니, 그분은 그 믿음이 강한 줄을 아셨다. 그분은 그들의 기도를 더욱 간절하게 하시고, 그 응답이 첫 마디에 항상 임하지는 않을 때 자신의 치유를 더욱 귀하게 여기게 하시려 하셨으며, 또 우리에게 기도에 항상 힘쓰고, 항상 기도하여 낙심하지 말 것을 가르치시려 하셨다. 그리고 응답이 즉시 오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기다리며 섭리를 따르되, 우리의 기도를 무시하거나 거스르는 듯 보이는 그 발걸음과 진행 가운데서도 그리하라고 가르치시려 하셨다. 그리스도는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그들을 고치려 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그분이 은밀히 두고자 하신 치유였기 때문이다(마 9:30). 그러나 그분이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들이 거기까지 따라와서 그분께 나아왔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문은 믿음으로 끈질기게 간구하는 자들에게 항상 열려 있다. 그분이 물러가 쉬려 하실 때에 그들이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가는 것이 무례해 보였으나, 우리 주 예수의 자애로우심이 이러하시매, 그들은 무례했던 만큼이나 환영받았다.

2. 그리스도께서 이 기회에 그들에게서 이끌어 내신 믿음의 고백. 그들이 긍휼을 구하러 그분께 나아왔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물으셨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주목하라. 믿음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는 큰 조건이다. 그리스도의 긍휼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능력을 굳게 믿어야 한다.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해 주시기를 바라는 그것을, 우리는 그분이 능히 하실 수 있음을 온전히 확신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랐고, 소리 지르며 따랐으나, 큰 질문은 이것이다, 너희가 믿느냐? 본성은 열심을 일으킬 수 있으나, 오직 은혜만이 믿음을 일으킬 수 있다. 영적 복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어진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그리스도의 직분과 그분의 긍휼에 대한 믿음을 암시하였으나, 그리스도는 또한 그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의 고백도 요구하신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곧 이 은총을 베풀고, 중풍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것뿐 아니라 맹인에게 시력을 주는 것을 할 줄 믿느냐? 주목하라. 믿음의 실행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것이 좋으니, 곧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신 뜻에 대한 일반적 확신과 일반적 약속들을 우리의 특정한 절박함에 적용하는 것이 좋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나니, 모든 것이 그러하다면 이것도 그러하다. "내가 능히 할 줄을 믿느냐, 곧 선지자로서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여 얻어낼 뿐 아니라, 내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행할 수 있음을 믿느냐?" 이것은 그분이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는 맹인의 눈을 여는 것이 하나님의 고유한 특권이기 때문이다(시 146:8). 그분이 보는 눈을 만드신다, 출 4:11. 욥은 맹인의 눈이 되어 주었으나(욥 29:15), 곧 그들에게 눈을 대신해 주었으나, 그는 맹인에게 눈을 줄 수는 없었다. 여전히 우리에게도 물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능히 하실 줄을 우리가 믿느냐, 곧 하늘에서의 그분의 공로와 중보의 능력으로, 마음에서의 그분의 성령과 은혜의 능력으로, 세상에서의 그분의 섭리와 통치의 능력으로 행하실 줄을 믿느냐?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것은 단지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확신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그것에 의탁하고 그것을 의지하여 우리 자신을 격려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그들은 주저함 없이 즉각 대답한다.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비록 그분이 그들을 잠시 불안한 가운데 두시고 처음에 도와주지 않으셨으나, 그들은 그것을 그분의 연약하심이 아니라 그분의 지혜에 정직하게 돌렸고, 여전히 그분의 능력을 확신하였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쌓여 있는 긍휼의 보화는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되고 베풀어진다, 시 31:19.

3.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치유. 그분이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마 9:29. 그분이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시려 함이니, 그분은 지체하심으로 그 믿음을 시험하셨던 것이다. 또한 이는 그분이 말씀에 동반하는 그분의 은혜의 역사로, 곧 눈에 안약을 발라 눈먼 영혼들에게 시력을 주신다는 것을 보이시려 함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치유를 그들의 믿음에 맡기셨으니,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들이 치유를 구하였을 때, 그분은 그들의 믿음을 살피셨다(마 9:28), 내가 능히 할 줄을 믿느냐? 그분은 그들의 재물을 살피지 않으셨으니, 곧 그들이 치유의 값을 그분께 지불할 능력이 있는지를 묻지 않으셨고, 또한 그들의 평판을 살피지 않으셨으니, 곧 그들을 고침으로써 자신이 명성을 얻게 될 것인지를 묻지 않으셨으며, 다만 그들의 믿음을 살피셨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하매, 그분은 그 문제를 그 믿음에 맡기셨다. "너희가 믿는 줄을 내가 아노니, 너희가 믿는 그 능력이 너희를 위하여 발휘되리라. 너희 믿음대로 되라." 이는 다음을 말한다. (1.) 그들의 믿음의 진실함에 대한 그분의 지식과, 그분이 그것을 받아들이시고 인정하심. 주목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믿음을 아시고 그 믿음을 기뻐하신다는 것은 참 신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비록 그 믿음이 연약하고, 다른 이들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며, 그들 자신도 그것을 의심하려 할지라도, 그것은 그분께 알려져 있다. (2.) 그들의 믿음을 필수적인 것으로 강조하심. "너희가 믿으면, 너희가 구하러 온 것을 받으라." 주목하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들은 그들의 믿음대로 대우받을 것이니, 그들의 공상대로도 아니요, 그들의 고백대로도 아니라, 그들의 믿음대로이다. 즉 불신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총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으나, 참 신자들은 복음 안에서 제시된 모든 은총을 반드시 받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위로는 우리의 믿음이 더 강하냐 더 약하냐에 따라 줄어들거나 불어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좁아지지 아니하니, 그렇다면 우리 자신 안에서도 좁아지지 말자.

4. 그분이 그것을 은밀히 두라고 그들에게 주신 명령(마 9:30),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그분이 그들에게 이 명령을 주신 것은, (1.) 그분이 우리에게 자기에게서 배우기를 원하시는 그 겸손과 마음의 낮음의 본을 우리에게 보이시기 위함이다. 주목하라. 우리가 행하는 선한 일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칭찬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해야 한다. 우리가 유익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그러한 줄로 알려지고 주목받는 것보다 더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되어야 한다, 잠 20:6, 25:27.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이 주신 규례, 곧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규례를 다시 한번 확증하셨다. (2.)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은밀히 두심으로써 그토록 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은 가버나움 사람들을 향한 그분의 진노를 나타내셨다고 한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일들을 선포해야 할 자들을 침묵하게 하는 것은 어떤 지역이나 백성에게 임하는 하나의 심판이다. 그리고 자신의 불신앙 가운데 완고한 자들에게 깨달음의 수단을 주지 않으시고, 빛에 대하여 눈을 감는 자들에게서 그 빛을 가리시는 것은 그리스도께 마땅한 일이다. (3.) 그분이 이를 행하신 것은 신중함에서요, 자신의 보존을 위함이었다. 이는 그분이 더 많이 선포될수록, 유대인의 관원들이 백성 가운데서 자라나는 그분의 영향력에 대하여 더욱 시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휘트비(Whitby) 박사는 그리스도께서 때때로 자신의 기적을 감추시고, 후에 자신의 변형(transfiguration)을 알리지 못하게 하신 또 하나의 매우 주목할 만한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곧 그들의 메시아가 세속의 군주가 되리라는, 유대인들 가운데 퍼져 있던 그 해로운 관념을 그분이 부추기려 하지 않으셨으며, 그리하여 백성이 소요와 반란으로써 그분의 나라를 세우려고 시도할 빌미를 주지 않으시려 함이었으니,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요 6:15. 그러나 그분의 부활 후에는 — 이것이 그분의 사명에 대한 온전한 증거였다 — 그분의 영적인 나라가 세워졌으니, 그때에는 그 위험이 지나갔으며, 그것들은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관찰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이방인과 거라사인들 가운데서 행하신 기적들은 선포하도록 명하셨으니, 이는 그들 가운데서는 그러한 위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명예는 그림자와 같아서,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게서는 도망하고, 그것을 피하는 자들을 따라온다(마 9:31). 그들이 그분의 소문을 널리 퍼뜨렸다. 이는 신중함에서라기보다는 열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정직하게 의도된 것으로 변명될 수는 있으나, 특별한 명령을 거슬러 행해진 것이므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우리가 우리의 의도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하게 한다고 공언할 때마다, 그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우리는 살펴야 한다.

II. 귀신 들린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치심. 여기서 보라.

1. 그의 처지, 이는 매우 비참하였다. 그는 이 특정한 경우에 있어서 마귀의 권세 아래 있었으니, 곧 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마 9:32. 이 세상의 비참한 상태와, 고난당하는 자들의 고난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보라! 우리가 두 맹인을 보내자마자, 말 못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시력과 언어 능력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가! 인류를 향한 사탄의 악의와, 그가 그것을 얼마나 여러 방식으로 드러내는지를 보라. 이 사람의 벙어리됨은 그가 귀신 들린 결과였다. 그러나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편이, 다른 귀신 들린 자들이 그러하였듯이(마 8:29)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고 억지로 말하게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둘 중에서, 말 못 하게 하는 귀신이 신성을 모독하게 하는 귀신보다 낫다. 마귀가 한 영혼을 사로잡으면, 그 영혼은 선한 것에 관하여는 말이 막히게 되니, 곧 마귀가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기도와 찬송에 있어서 벙어리가 된다. 사람들이 이 가련한 사람을 그리스도께 데려왔다. 그분은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스스로 나아온 자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믿음으로 친구들이 데려온 자들도 영접하셨다. 비록 의인은 그 믿음으로 영원히 살리라고 하였으나,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는 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일시적인 긍휼이 우리에게 베풀어질 수 있다. 그들은 마침 맹인이 나갈 때에 그를 데려왔다. 그리스도께서 선을 행하시는 데 얼마나 지치지 않으셨는지, 한 선한 일이 다른 선한 일을 얼마나 바짝 뒤따랐는지를 보라! 긍휼의 보화, 곧 놀라운 긍휼의 보화가 그분 안에 감추어져 있으니, 이는 끊임없이 베풀어질 수 있으되 결코 고갈될 수 없다.

2. 그의 치유, 이는 매우 즉각적이었다(마 9: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 하는 사람이 말하였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치유는 뿌리를 치시며, 원인을 제거하심으로써 결과를 없애신다. 그분은 영혼 안에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심으로써 그 입술을 여신다. 성화(聖化)에 있어서 그분은 샘에 소금을 던지심으로 그 물을 고치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은혜로 한 영혼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실 때, 즉시 말 못 하던 자가 말한다. 바울이 회심하였을 때, 보라 그가 기도하더라 하였으니, 그때에 말 못 하던 자가 말한 것이다.

3. 이 치유의 결과들.

(1.) 무리가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마땅히 그럴 만했으니, 믿는 자는 적었으나 놀라워하는 자는 많았다. 일반 백성의 경탄은 다른 어떤 감정보다도 더 쉽게 일어난다. 새 노래, 곧 신약의 노래가 기이한 일들로 인하여 불려지리라고 예언되었다, 시 98:1.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어디에서도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만큼 그러한 긍휼의 기사들을 경험한 백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가운데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유명한 자들이 있었으나, 그리스도는 그들 모두를 능가하셨다. 모세가 행한 기적들은 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과 관련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특정한 개인들에게 직접 이르렀다.

(2.) 바리새인들은 신성을 모독하였다, 마 9:34. 그들은 이 기적들의 확실한 증거를 반박할 수 없게 되자, 마치 그것들이 결탁과 공모로 행해진 것처럼 그것들을 마귀에게 돌렸다. 그들이 이르되, 그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 함이라 하였으니 — 이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주장이다. 우리는 이에 관하여, 그리고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에 관하여 나중에 더 듣게 될 것이다(마 12:25). 다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이 어떻게 더욱 악하여지는지이며(딤후 3:13), 그것은 그들의 죄인 동시에 그들의 형벌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자임하신다고(마 9:3),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신다고(마 9:11), 금식하지 않으신다고(마 9:14) 그들이 그리스도와 다툰 것은, 비록 충분히 악의에 차 있었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경건과 정결과 헌신의 빛깔은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그들이 저 다툼들에 대한 형벌로 이 지경에 내버려진 것인데) 오직 악의와 거짓과 가장 극도의 지옥적 적의만을 내뿜을 뿐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마귀의 짓이요, 그러므로 정당하게 용서받을 수 없는 것으로 선언되었다. 백성이 놀라워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기적을 깎아내리기 위하여 무언가 말해야만 했으니, 이것이 그들이 말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마태복음 9장 35-38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Jesus Preaching throughout the Country

번역 있음 본문 열기

온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전파하시는 예수님

³⁵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³⁶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³⁷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³⁸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I. 그리스도의 전파와 이적에 관하여 앞서 기록한 내용의 결론(마 9:35). 그분께서 모든 도시에 두루 다니사 가르치시고 고치셨다. 이는 우리가 앞서 마 4:23에서 본 것과 동일하다. 거기서는 그리스도의 전파(마 5:1-7:29)와 그분의 치유(마 8:1-9:38)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기록을 이끌어 들이는 역할을 하였고, 여기서는 그 사례들의 마무리에서 quod erat demonstrandum—증명되어야 할 요점으로서 우아하게 반복된다. 마치 복음서 기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이제 나는 개별 사례들을 귀납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시고 고치셨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그분의 설교의 요점들과, 그분의 교훈을 확증하기 위하여 행하신 몇 가지 치유의 사례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어떤 이들은 이것이 이전과 같은,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순회였다고 생각한다. 그분께서는 전에 전파하셨던 자들을 다시 방문하셨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분께 트집을 잡고 그분을 대적하였으나, 그분께서는 자신의 일을 계속하셨다. 그분께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분께서는 이제 한 중보자의 통치 아래 세워질 은혜와 영광의 나라에 관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복음이요, 기쁜 소식,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실 때 어떤 점들을 주목하셨는지 보라.

1. 변변치 못한 작은 마을들에 대하여. 그분께서는 크고 부유한 도시들만 방문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이름 없는 마을들도 방문하셨다. 거기서 그분께서는 전파하시고 거기서 고치셨다.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들의 영혼도 그리스도께 귀중하며, 우리에게도 가장 큰 인물의 영혼만큼 귀중해야 한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가 그분 안에서 함께 만나며, 도시민과 시골뜨기가 함께 만난다. 그분께서 자기 마을 거민에게 행하신 의로운 일들이 기념되어야 한다(삿 5:11).

2. 공적 예배에 대하여. 그분께서는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1.) 회중 가운데 부패함이 있었던 그때조차도, 그 엄숙한 모임들에 대하여 증거를 베푸시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모이기를 폐하지 말아야 한다. (2.) 사람들이 들으려는 기대를 가지고 함께 모인 그곳에서 전파하실 기회를 얻으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복음의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스도인의 모임들이 설립된 곳에서도, 사도들은 종종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파하였다. 있는 것을 최대한 선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슬기다.

II. 다음 장에서 사도들을 파송하시는 기사에 대한 머리말, 곧 서론. 그분께서는 무리를 주목하셨다(마 9:36). 그분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뿐만 아니라, (지나가시면서) 그 지방에 가득한 것을 관찰하신 그 엄청난 수의 사람들도 주목하셨다. 그분께서는 그 마을들과 도시들이 얼마나 영혼들의 둥지였는지, 또 거민이 얼마나 빽빽했는지, 모든 회당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지, 또 성문 어귀가 얼마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는지를 주목하셨다. 그 민족은 이제 그토록 인구가 많아졌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결과였다. 이것을 보시고,

1. 그분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을 위하여 마음을 쓰셨다(마 9:36). 그분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이는 그분께서 맹인과 다리 저는 자와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처럼 세속적인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였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무지하고 무관심하며, 비전이 없어 멸망할 지경에 이른 것을 보고 마음을 쓰셨다. 주목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귀중한 영혼들에게 매우 자비로우신 친구시다. 여기서 그분의 심장이 특별한 방식으로 사무친다. 그분을 하늘에서 땅으로, 또 거기서 십자가로 이끈 것은 영혼들에 대한 긍휼이었다. 비참함은 자비의 대상이며, 죄 가운데 있고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영혼들의 비참함이야말로 가장 큰 비참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장 덜 불쌍히 여기는 자들을 가장 불쌍히 여기시니, 우리도 그리해야 한다. 가장 그리스도다운 긍휼은 영혼들에 대한 긍휼이니, 이것이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것이다.

이 긍휼을 자아낸 것이 무엇인지 보라. (1.) 그들이 기진하였다. 그들은 궁핍하고, 시달리고, 지쳐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풀려 흩어져 있었다. 결합의 막대기가 꺾였다(슥 11:14). 그들은 자기 영혼을 위한 도움을 필요로 하였으나, 곁에 그 무엇이든 유익을 줄 만한 자가 없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헛된 관념으로 그들을 채우고, 장로들의 전통으로 그들에게 짐을 지우고, 그들을 많은 잘못으로 미혹하였으되, 그들에게 마땅히 행할 의무를 가르치지도 않았고, 신적 율법의 범위와 영적 본질을 알게 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진하였다. 생명의 떡 대신에 쥐엄 열매와 재로 먹여진 영혼들에게 무슨 영적 건강과 생명과 활력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받지 못한 귀중한 영혼들은, 의무를 행해야 할 때, 시험을 물리쳐야 할 때, 환난을 견뎌야 할 때 기진하는 법이다. (2.)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흩어졌다. 이 표현은 왕상 22:17에서 빌려온 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앞서 인도해 줄 신실한 인도자가 없는 자들의 슬픈 형편을 묘사한다. 양보다 더 길을 잃기 쉬운 피조물은 없으며, 일단 길을 잃으면 더 무력하고, 속수무책이고, 위험에 노출되며,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는 데 더 부적합한 것도 없다. 죄 가운데 있는 영혼들은 잃어버린 양과 같으니, 그들을 다시 데려올 목자들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그때 유대인들이 가졌던 교사들은 목자를 자처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목자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들이 없는 것보다 더 나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 떼를 도로 인도하는 대신 미혹하여 끌어가고, 양 떼를 먹이는 대신 그 털을 깎는 게으른 목자들이었으니, 곧 렘 23:1, 겔 34:2 등에 묘사된 그런 목자들이었다. 주목하라. 아무런 사역자도 없거나, 혹은 없느니만 못한 사역자들을 둔 백성의 형편, 곧 그리스도와 영혼들에 속한 일이 아니라 자기 일을 구하는 자들을 둔 백성의 형편은 참으로 가련하다.

2. 그분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격려하셨다. 그분의 긍휼은 그분으로 하여금 이 백성의 유익을 위한 방도를 강구하게 하였다. 이 일이 있을 때, 사도들을 파송하시기 전에 그분 자신이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셨다는 것이 (눅 6:12,13에서) 나타난다. 주목하라.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자들을 위하여 우리는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아뢰신 후에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돌이켜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1.) 형편이 어떠한지를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라. 사람들은 좋은 전파를 갈망하였으나, 좋은 전파자는 적었다. 행해야 할 일은 많았고, 행해질 만한 선한 일도 많았으나, 그 일을 할 일손이 부족하였다. [1.] 추수할 것이 그토록 많았던 것은 격려가 되는 일이었다.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많았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그것을 갈망하고 그것을 받기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잘못 배운 자들이 더 잘 배우기를 원하였고, 사람들의 기대가 높아졌으며, 좋은 조짐을 약속하는 감정의 동요가 있었다. 주목하라. 사람들이 좋은 전파를 사모하는 것을 보는 것은 복된 일이다. 그러면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이고, 그것이 잘 거두어지리라는 소망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기회의 순풍이니, 그것을 선용하는 데에 갑절의 주의와 부지런함을 요구한다. 추수의 날은 마땅히 분주한 날이어야 한다. [2.] 그러할 때에 일꾼이 그토록 적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곧 거둘 사람이 없어 곡식이 떨어지고 상하며 땅에서 썩어가는 것이었다. 빈둥거리는 자는 많으나 일꾼은 매우 적었다. 주목하라. 좋은 일손이 부족하여 선한 일이 멈추거나 더디게 진행될 때, 교회는 형편이 좋지 못한 것이다. 그러할 때에는 그나마 있는 일꾼들이 매우 분주할 필요가 있다.

(2.) 이 경우에 그들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셨다(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라. 주목하라. 시대의 우울한 양상과 귀중한 영혼들의 한탄스러운 형편은 마땅히 기도를 크게 자극하고 촉진해야 한다. 형편이 낙담스러워 보일 때,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 하며, 그리하면 우리는 덜 불평하고 덜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교회의 현재의 긴급한 사정에 맞추어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이스라엘이 행해야 할 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무엇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도 알 만한 시대에 대한 통찰을 가져야 한다. 주목하라. [1.] 하나님은 추수하는 주인이시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이라(사 5:7). 추수가 거두어지는 것은 그분을 위함이요 그분께로요, 그분의 섬김과 영광을 위함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고전 3:9), 그분의 타작마당, 그분의 마당의 곡식이라(사 21:10). 그분께서는 추수에 관한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정하시니, 곧 일꾼들이 언제 어디서 얼마나 오래 일할지를 정하신다. 그리고 추수의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반드시 가장 선하게 정하실 하나님 자신이 그 일을 주관하신다는 것이 매우 위로가 된다. [2.]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추수밭에서 일꾼들이며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사역은 일이며 그에 합당하게 임해야 한다. 그것은 추수의 일이니, 곧 필요한 일이요, 모든 것을 그 시기에 맞추어 행하기를 요구하며 그것을 철저히 행하는 부지런함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일이니, 그들은 기쁨으로 거둔다. 그리고 복음 전파자들의 기쁨은 추수의 기쁨에 비유된다(사 9:2,3). 또한 거두는 자가 삯을 받으니, 하나님의 밭을 베는 일꾼들의 품삯은 그들의 것이 막혔던 것처럼 막히지 않을 것이다(약 5:4). [3.] 일꾼들을 보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사역자들을 세우신다(엡 4:11). 그 직분은 그분께서 임명하시는 것이요, 그 자격은 그분께서 일하시는 것이요, 그 부르심은 그분께서 주시는 것이다. 자격 없이, 부르심 없이, 자기 임무 없이 달려가는 자들은 일꾼으로 인정받지도 삯을 받지도 못할 것이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4.] 그리스도와 영혼들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은, 특히 추수할 것이 많을 때에, 그분께서 더 능숙하고, 신실하고, 지혜롭고, 부지런한 일꾼들을 자신의 추수밭으로 보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그것을 나타내야 한다. 곧 그분께서 죄인의 회심과 성도의 덕을 세우는 일에 친히 인정하실 자들을 일으키시기를, 그들에게 그 일을 위한 심령을 주시고, 그들을 그 일로 부르시며, 그 일에서 그들을 형통케 하시기를, 그들에게 영혼을 얻을 지혜를 주시기를, 그분께서 일꾼들을 밀어내어 보내시기를 — 어떤 이들은 이렇게 옮긴다 — 기도해야 한다. 이는 그들 자신의 연약함과 백성의 악함, 그리고 그들을 추수밭에서 밀어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반대 때문에 나아가기를 꺼리는 심정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팎의 모든 반대가 정복되고 극복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추수밭에서 수고하도록 파송하시기 바로 직전에, 자기 친구들로 하여금 이것을 기도하도록 시키신다. 주목하라. 하나님께서 어떤 백성에게 특별한 자비를 베푸시려 하실 때에, 은혜의 보좌에 영향력을 가진 자들을 일으켜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좋은 징조다(시 10:17). 더 나아가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일꾼으로 쓰임받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그들은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내 주시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주목하라.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위임이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바울은 택한 그릇이니, 보라 그가 기도하느니라(행 9:11,15). 둘째로, 그분께서 다른 이들을 보내 주시기를. 주목하라. 백성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사역자인 자들도 사역자의 증가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비록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자기 일을 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홀로 자리하기를 원하게 만들지라도(사역자가 적을수록 더 많은 자리와 특권이 돌아오니), 그리스도에게 속한 일을 구하는 자들은 더 많은 일손을 사모한다. 그리하여 비록 그로 인해 자신이 가려질지라도 더 많은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