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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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 · 1714
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Robert Jamieson, A. R. Fausset, David Brown · 1871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Whole Bible (1871). CCEL expanded electronic edition states it is in the public domain.
Albert Barnes · 1834
Albert Barnes' Notes on Revelation Of St. John The Divine (New Testament, English original, public domain). Sourced from the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CCEL). Public domain. Retrieval mirror: biblehub.com/commentaries/barnes.
Adam Clarke · 1831
Public domain English commentary by Adam Clarke, normalized from Wikisource book pages for scripture.how. Public domain. Retrieval mirror: biblehub.com/commentaries/clarke.
John Gill · 1763
John Gill(1697-1771), Exposition of the Old and New Testament(1746-1763). Public domain. Retrieval mirror: biblehub.com/commentaries/gill.
John Calvin · 1850
종교개혁 신학 원천 (영역본 PD, 대부분 — 전권 아님)
Matthew Poole · 1685
간결 절별 전권 개혁주의 주석
ed. H.D.M. Spence & Joseph S. Exell · 1890
전권 강해·설교·예화 풍부 (항목 대량)
Carl F. Keil, Franz Delitzsch · 1866
구약 학술 표준 — 히브리어·문헌비평·고대근동 배경
ed. Charles J. Ellicott · 1878
학술+가독 균형 전권 주석
Cambridge (다저자) · 1900
준전권 준학술 (권별 저자·연도 확인)
Marvin R. Vincent · 1887
신약 헬라어 단어 연구
A.T. Robertson · 1933
헬라어 시제·문법 해설 결정판 (KR PD / US 1931+ 권별)
ed. W. Robertson Nicoll (다저자) · 1910
헬라어 신약 학술 (권별 저자 PD 확인 필요)
Heinrich A.W. Meyer · 1880
신약 학술 정밀주해 (독일 — K&D 대응)
John Wesley · 1755
간결 실용 전권(NT 1755 / OT 1765) 웨슬리안
Joseph Benson · 1815
웨슬리안 전권 주석
Charles H. Spurgeon · 1885
시편 주석 고전 (설교 자료 풍부)
Alexander Maclaren · 1910
설교형 강해 명저 (전권, 절별 가공 필요)
B.W. Johnson · 1891
평이 절별 신약 해설 (일반신자·모바일)
Thomas Coke · 1803
감리교 전권 주석
John Trapp · 1660
청교도 전권 주석 — Henry/Gill 보완
Charles Hodge · 1860
프린스턴 조직신학 관점 신약 정밀 주석 (롬·고전후·엡)
이 시편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증거에 기초하여 영원한 생명과 복을 확신하며 기대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덤에 버려지지 않고 영원한 "썩음"을 보거나 무덤에서 영원히 멸망하도록 내버려지지 않으리라는 깊은 확신을 나타낸다.
시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근거로 보존해 달라고 드리는 저자의 간절한 기도이다(시편 16:1).
(2)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진술이다(시편 16:2-3). 이는 부분적으로 자신에게 그러한 사랑이 있다는 자각에 기초하고(시편 16:2),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벗들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시편 16:3).
(3) 참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에게 동조하지 않았고 그들의 예배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참여하지 않으리라는 진술이다. 여호와가 그의 몫이요 기업이셨다(시편 16:4-5).
(4) 경계선이 아름다운 곳에 놓인 것, 곧 우상 숭배자들의 땅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에서 태어나 자기 몫을 얻은 것에 대한 감사이다(시편 16:6-7).
(5)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근거로 영원히 복되리라는 확신에 찬 기대이다. 무덤에서 멸망하도록 버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영생을 얻을 것이다(시편 16:8-11). 이 기대는 다음 사항들을 함축한다.
(a)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곧 실망하거나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시편 16:8).
(b) 죽어야 하더라도 그의 육신은 소망 가운데 안식할 것이다(시편 16:9).
(c) 죽은 자들의 영역에 버려지거나 무덤에 영원히 누워 있도록 내버려지지 않을 것이다(시편 16:10).
(d) 하나님이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시고 그분의 오른쪽에 자리를 주실 것이다(시편 16:11).
이 시편이 어떤 계기로 지어졌는지는 확실히 판단할 수 없다. 생명과 죽음과 무덤과 저 너머의 세계, 곧 무덤이 인간의 끝인지 아니면 장래가 있을 것인지를 엄숙히 성찰할 때 언제라도 지을 수 있는 시편이다. 경건한 자의 몫과 소망에 관한 복된 성찰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이 죽어야 하더라도 저 너머에 더 밝은 세계가 있고, 무덤에 놓이더라도 언제나 그곳에 머물지는 않으며, 무덤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오른쪽으로 들림받으리라는 믿음을 표현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언제나 무덤에 머물지는 않으리라는 확신, 곧 부활 교리에 대한 믿음을 구약의 거의 어느 곳보다 분명하게 표현한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25-31에서, 바울은 사도행전 13:35-37에서 이 시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호소한다. 두 사도는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을 이 시편이 입증한다고 여겼음을 보여 주는 방식으로 이 시편을 인용한다. 시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그것이 오직 메시아만 가리킨다고 볼 필요는 없다. 다만 가장 높은 의미에서 그분을 가리키거나 그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사야서 서론 제7절 III과 비교하라. 이 시편은 의심할 바 없이 다윗이 자기 자신과 자기 죽음을 바라보며 품은 소망을 표현했다. 동시에 그는 자기 감정과 소망을 묘사하면서 오직 메시아 안에서만 완전히 성취될 수 있는 말을 사용하도록 인도받았다. 메시아가 무덤에 버려지지 않고 "썩음을 보도록" 내버려지지 않으리라는 말은 더욱 충만하고 완전한 의미에서 참이었다.
다윗이 이 용어를 자신에게 적용해 사용한 의미에서도, 그가 영구적이고 궁극적으로 무덤과 썩음의 지배 아래 "버려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실제로 참이었다. 베드로와 바울이 논증했듯 메시아가 "썩음을 보지" 않으셨다는 말, 곧 다른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하는 무덤 속 변화를 겪지 않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참이었다. 다윗이 이 말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사용했을 때 시편에 제시된 소망은 장차 있을 의인의 부활에서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때에는 썩음을 보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 베드로와 바울의 논증은 이러한 예언적 말씀이 구약에 있었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만 완전히 성취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윗은 자기가 기대한 대로 부활하겠지만 실제로는 썩음으로 돌아갔다. 메시아에 대해서는 그분의 몸이 무덤에서 아무 변화도 겪지 않았다는 말이 문자적으로 참이었다. 메시아를 가리킨다는 것은 이 시편이 그분 안에서 가장 높고 완전하게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2:25-31의 주석과 비교하라.
시편의 표제는 "다윗의 믹담"이다. "믹담"이라는 말은 다음 본문들에서만 나오며, 모든 곳에서 시편의 표제로 사용된다. 시편 16편, 56편, 57편, 58편, 59편, 60편이다. 게제니우스는 이 말이 "글", 특히 시나 시편이나 노래를 뜻하며, "글"로 번역된 이사야 38:9의 히스기야 시의 표제와 같은 의미라고 본다. 게제니우스에 따르면 여기 사용된 מכתם(miktām)은 이사야에서 사용된 מכתב(miktāb)과 같은 말이며, 마지막 글자 ב(b)가 점차 ם(m)으로 바뀐 것이다. 게제니우스의 말에 따르면 다른 이들은 적절하지 않게 이 단어를 "금"을 뜻하는 כתם(kethem)에서 파생시켜 "황금의" 시편, 곧 귀중하거나 탁월한 시편이라는 뜻으로 보았다. 데 베테는 이를 독일어 "Schrift", 곧 "글"로 번역한다. 다윗의 시들 가운데 일부는 단지 "글"이라 불리고 다른 시들은 더 구체적인 표제를 지니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이제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시편의 내용은 보통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다윗은 우상숭배자들 가운데 나그네로 지내며, 사울의 박해 때문에 자기 나라를 떠나야 했으므로 하나님께 도움을 부르짖는다. 그는 우상숭배에 대한 혐오와 하나님의 백성과 다시 연합되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한다, Psalm 16:1-4. 또한 그는 자신을 후히 대하신 하나님께 대한 강한 확신을 선언한다, Psalm 16:5-7. 그 뒤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주목할 만한 예언이 이어진다, Psalm 16:8-11.
히브리어에서 이 시편의 표제는 מכתם לדוד michtam ledavid인데, 칼데아역은 이것을 “다윗의 곧은 조각”이라고 번역한다. 칠십인역은 Στηλογραφια τῳ Δαυιδ, 곧 “다윗에게 속한 기둥 위의 비문”이라고 한다. 마치 이 시편이 기억에 보존되도록 기둥에 새겨졌다는 듯한 표현이다. כתם catham이 새기다 또는 도장을 찍다를 뜻하므로, 이것이 위와 같은 표제를 낳았다. מכתם michtam은 또한 순금 또는 도장 찍힌 금을 뜻한다. 그래서 이 표제가 이 시편의 탁월함 때문에 붙었다고 여겨져 왔다. 곧 황금 시편, 또는 금 글자로 기록될 만한 시편이라는 뜻이다. 피타고라스의 몇몇 구절들이 그 탁월함 때문에 황금 구절이라 불렸던 것과 같다. 금은 모든 금속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귀한 것이므로, 모든 종류의 탁월함과 완전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그래서 황금의 혀나 입은 가장 탁월한 웅변을 뜻한다. Chrysostom도 그러한 뜻인데, 이 탁월한 인물이 자기 웅변으로부터 그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한 황금 책은 그 종류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귀중한 책을 뜻하는 식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이 표제들에 부여된 의미들에 관하여 충분히 의심을 표명하였다. Psalm 60:1-12의 표제에 대한 주석을 보라.
다윗이 저자였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시편은 St. Peter에 의해 매우 분명하게 그에게 돌려진다, Acts 2:25-31. 그 주요 부분들이 다윗의 상황과 어느 정도 관련을 가졌을 수 있음도 또한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시편의 주된 범위라는 사실은, 위에서처럼 사도가 인용한 것에서뿐 아니라, 그 일부가 결코 다윗에게 적용된 적도 없고 적용될 수도 없다는 사정에서도 드러난다. 이 시편 전체를 가장 진지하고 주의 깊게 고찰한 결과, 나는 그 모든 절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며 다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찾아보니 이것이 나의 고대 시편 주석서가 취한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분은 세상의 구속자, 따라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언급되므로, 이 시편 안에도 신약 안에서처럼 신성과 인성이 별도로 말해지는 여러 부분이 있다. 이 구별을 바르게 고려한다면, 우리는 전체를 통하여 모순이 없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조화를 발견할 것이다.
INTRODUCTION TO Psalm 16
Michtam of David. This is a new title, not met with before, though it afterwards is prefixed to "five" psalms running, the fifty sixth, the fifty seventh, the fifty eighth, the fifty ninth, and the sixtieth psalms. Some take the word "michtam" to be the name of a musical instrument, as Kimchi on Psalm 4:1; others the name of one of the tunes, as Jarchi; and others the tune of a song which began with this word, as Aben Ezra observes, to which this psalm was sung; the Septuagint translate it "stelography", or an inscription upon a pillar; such an one as is erected by conquerors, as Theodoret observes, having writing on it declaring the victory obtained; suggesting that the psalm, or the subject of it,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Christ, was worthy to be inscribed on a pillar of marble; and the Targum renders it, "a right engraving", that deserves to be engraven in a monument of brass: but what seems to be the best sense of the word is, that it signifies a work of gold, and may be rendered, "a golden [psalm] of David"; so called, either because it was a dear and favourite song of his; or from the subject matter, which is more valuable and precious than the most fine gold: the title of it in the Syriac and Arabic versions is,
"concerning the election of the church, and the resurrection of Christ;''
and certain it is from Psalm 16:10, the resurrection of Christ is spoken of in it, as is clear from the testimonies of two apostles, Peter and Paul, who cite it in proof of it, Acts 2:25; and since there is but one person speaking throughout the psalm, and Christ is he that speaks in Psalm 16:10, and which cannot be understood of David, nor of any other person but Christ, the whole of the psalm must be interpreted of him.
XVI.
Ewald’s arguments for grouping this psalm with Psalms 17, 49, as those of one time, and even one author, are almost irresistible; and this not merely from the general similarity of language and sentiment, but especially from the feelings expressed about death. The vision of immortality wanting to the early Jews, to Moses, even to David, has at length, however faintly and dimly, dawned. It will be long before it becomes a world -belief, or even a definite individual hope. But the germ of a truth so great must grow, as we see it growing in the Book of Job, till the time is ripe for apostles to quote the words of the ancient poets, as if they had not only felt for themselves the necessity of an immortal existence, but had seen prophetically how in Christ it would be assured to men.
Psalms 16 is decidedly individual in its experience, and the inscription to David as author receives a certain amount of probability from a comparison of Psalm 16:5 with 1Samuel 26:19. But such slight indications give way before the reference to the bloody sacrifices in Psalm 16:4, which brings the date down to a time subsequent at least to Solomon.
The parallelism in this psalm is scarcely traceable.
Title.—Michtam (Mikhtam) occurs in five other psalms (Psalms 56-60)—all, like Psalms 16, ascribed to David. The greatest uncertainty attaches to the word. The marginal explanation rests on the derivation from kethem (gold, Job 28:16-19), and may be illustrated by the “golden sayings” of Pythagoras (comp. Golden Legend), an obvious expression for something rare and precious. Others compare the Moallakat of Mecca, poems written in “golden” letters. The LXX., “a pillar inscription” (Vulg., tituli inscriptio), follows another possible derivation, but does not suit the contents of those psalms so inscribed. Some take Mikhtam as a variety of Mikhtab (a writing). Most probably some musical direction, the key to which is lost, is conveyed by the word.
This Psalm is a joyous profession of faith and hope, springing from the sense of a living fellowship with Jehovah. The danger, if special danger there was, which prompted the prayer of Psalm 16:1, lies entirely in the background. The Psalmist’s whole soul is possessed and kindled by the thought that Jehovah is his highest good.
It has been suggested that the Psalm was written by David during his outlaw life. He had been banished from his share in the inheritance of Jehovah, and exposed to the danger of apostasy (1 Samuel 26:19, R.V. marg.). In this hour of trial he triumphs in the thought that Jehovah Himself is the portion of his inheritance, a fairer portion than the goodliest fields and vineyards which could have fallen to his lot (Psalm 16:5-6); and he energetically repudiates the idea of yielding to the temptation to serve another god (Psalm 16:4).
There are many links of connexion (see Introd. to Psalms 17) between this Psalm and Psalms 17, and they may with good reason be assigned to the same author. As Psalms 17 may with much probability be referred to the time of David’s persecution by Saul, the presumption in favour of the Davidic authorship of Psalms 16 is strengthened.
Many critics however refer both Psalms to a much later period. Ewald groups together 17, 16, 49 (in this order), and on the ground of language and contents places them in the Exile.
If, as is often assumed to be the case, Psalm 16:9-11 and Psalm 17:15 explicitly declare the Psalmist’s belief in a resurrection and a future life of blessedness, in sharp contrast to such passages as Psalm 6:5, Psalm 30:9, Psalm 88:10-12, these Psalms could hardly be placed earlier than the Exile. Delitzsch indeed, while admitting that the doctrine of a Resurrection does not appear in pre-exilic times as a truth of revelation, asks why it should not appear in Davidic Psalms as ‘a bold postulate of faith.’ But if the line of interpretation adopted below is correct, the Psalmist’s thoughts are to be viewed from a different stand-point altogether. “His antithesis is not this world and the next, but life with God and life without God.” (Cheyne.)
The Psalm falls into three divisions.
i. The Psalmist grounds his prayer for protection on his relation to Jehovah, Who alone is the source of happiness. His delight is in the society of the faithful; with apostates he will have no fellowship (Psalm 16:1-4).
ii. The thought that Jehovah is his sole good, the source of all his weal, is taken up and developed (Psalm 16:5-8).
iii. Secure in this faith he anticipates a life of true felicity in unbroken fellowship with Jehovah (Psalm 16:9-11).
For a valuable exposition of this Psalm by Prof. W. Robertson Smith see The Expositor, 1876, Vol. iv. pp. 341 ff.
On the title Michtam see Introd. p. xx.
Jamieson-Fausset-Brown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Whole Bible
시편 16:1-11.
믹담(Michtam), 또는 한 글자를 바꾸면 믹답(Michtab)--시나 노래와 같은 "글"을 뜻한다(비교
이사야 38:9).
m 글자가 b로 바뀌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이 단어가 저자의 이름과 연결되어 놓인 위치는 보통 시편 또는 노래처럼 작품의 양식이나 내용을 나타내는 용어가 오는 자리이므로, 이 의미를 지지한다. 다만 왜 이 시편과 시편 56-60편이 특별히 "글"이라고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이들은 "금시" 또는 "기념"이라는 설명을 제안하지만, 이 시편에는 적용될 수 있어도 그 용어가 나오는 다른 시편들에는 맞지 않는 듯하다. 베드로
(사도행전 2:25)
와 바울
(사도행전 13:35)
에 따르면, 이 시편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그의 고난과 죽음 및 무덤에 대한 승리, 그리고 이어지는 하나님 우편의 높임을 바라보는 그의 인성의 감정을 표현한다. 이것이 초기의 훌륭한 그리스도인 해석자들의 해석이었다. 일부 현대 해석자들은 이 시편이 오직 다윗에게만 관련된다고 보았으나, 이 견해는 사도들에 의해 명백히 반박된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시편의 말이 그리스도의 예표인 다윗에게 적용될 수 있고, 신약에서 부여된 더 높은 의미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다면
시편 16:10
의 말은 어떤 의미로도 다윗에게 사용될 수 없다. 그는 "썩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들은 앞부분은 다윗에게,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도에게 돌리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시편의 주제가 바뀐다는 표시는 전혀 없다. 실제로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는 사람은 그 도움을 얻은 것을 기뻐하는 바로 그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시편 전체를 그리스도에게 돌린다고 해서, 그 언어의 많은 부분이 그의 백성들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낮은 분량 안에서 머리와 대표이신 그분이 표현하신 하나님 신뢰의 감정을 가지는 한 그러하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그의 마지막 기도
(요한복음 17:1-26)
의 언어를 사용하거나, 겟세마네에서 비슷한 변형 아래 사용하신 말들을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적절하다. 이 시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타당성은 그 범위와 해석에서 드러날 것이다. 앞에 놓인 고난을 바라보며, 구주께서는 겟세마네에서 드러난 죽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부르신다. 그는 거룩함을 기뻐하고 악인과 그 악을 혐오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히브리서 12:2],
자신에게 정해진 기업의 영광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격려하신다. 이처럼 성취될 승리와 "그 뒤에 올 영광"
[베드로전서 1:11]
에 대한 확신 안에서, 죽음과 무덤까지도 그 두려움을 잃는다.
1. 나를 보호하소서 등--나의 유익을 지키시고 살피소서라는 뜻이다.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급박한 위험에서 피난처를 찾는 자처럼 신뢰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 나를 보존하고 보호하며 구해 달라는 뜻이다. 이 말은 어떤 종류의 임박한 위험, 아마도 시편 뒷부분이 암시하는 죽음의 위험이 있었음을 함축한다. 시편 16:8-10을 보라. 여기서는 하나님이 임박한 위험에서 그를 지키실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시기를 소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 곧 나의 소망이 주께 있다는 뜻이다. 그에게는 하나님 외에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곳에 안전이 있음을 확신했다.
이 시편에는 다윗에 관한 것이 어느 정도 들어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들어 있다. 이 시편은 그리스도께 적용될 수 있는 경건의 표현들로 시작하지만, 부활에 대한 확신, 그것도 썩음을 보지 않게 할 만큼 때맞은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끝난다. 이는 반드시 그리스도께, 오직 그분께만 적용되어야 하며,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다윗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행 2:24,13:36). 다윗은 죽어 장사되었고 썩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I. 다윗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말하며, 그렇게 하여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한다. 곧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하고(시 16:1), 하나님께 동의하며(시 16:2),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고(시 16:3), 하나님의 참된 예배를 굳게 붙들며(시 16:4),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가진 분깃에 대해 온전히 기뻐하고 만족한다(시 16:5-7). II.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말하며,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말을 한다. 시편의 나머지 모든 부분은 명백하고 폭넓게 그리스도께 적용된다(행 2:25-28 등). 다윗은 그분에 관하여, 곧 자기 자신에 관하여가 아니라,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미리 보았다" 등으로 말한다. 그리고 그는 선지자였으므로 이렇게 말했다(행 2:30,31). 그는 1. 구속주께서 섬기심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누리신 것에 대해 말했다(시 16:8). 2. 구속주께서 자신의 부활과 그 뒤에 따를 영광을 바라보신 것에 대해 말했다. 이 전망이 그분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명을 기쁘게 감당하게 하였다(시 16: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