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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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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Matthew Henry ·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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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Henry 사후(1714) 공개 도메인. 디지털판 CC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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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서론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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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라는 위대한 교리를 자세히 단언하고, 밝히 드러내며, 또 증명하였다. 그런데 혹 누군가가 이 아름다운 꽃에서 독을 빨아내어, 하나님의 그 은혜를 방종과 방탕으로 바꾸어 버릴까 염려하여, 그는 같은 열심과 풍성한 표현과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써, 성화와 거룩한 삶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력히 역설한다. 이는 성화와 거룩한 삶이 칭의와 분리될 수 없는 열매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무릇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영혼에게 의로움이 되시는 곳에서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 영혼에게 성화도 되시기 때문이다(고전 1:30). 물과 피가 죽으시는 예수의 찔린 옆구리에서 함께 흘러나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렇게 짝지어 주신 것을 우리가 감히 나누지 말지니라.

로마서 6장 1-23 Matthew Henry's Complete Commentary

On Sanctification (58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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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에 관하여 (주후 58년)

¹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²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³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⁵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⁶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⁷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⁸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⁹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¹⁰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¹¹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¹²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¹³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¹⁴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¹⁵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¹⁶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¹⁷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¹⁸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¹⁹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²⁰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²¹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²²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²³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사도가 이 강론을 앞의 강론과 연결하는 그 전환의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롬 6:1). 이 달콤하고도 위로가 되는 교리를 우리가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랴(롬 3:8)?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우리가 죄를 더 많이 지을수록 우리의 용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드러날 것이므로, 이로부터 우리가 더욱 담대하게 죄를 짓도록 격려를 받을 것인가? 이것이 이 교리에서 끌어낼 용도란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오용(誤用)이며, 사도는 그 생각만으로도 소스라치게 놀란다(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가 그러한 생각을 품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가장 흉악한 시험을 대하셨던 것처럼(마 4:10) 이 반론을 대한다. 사탄아 물러가라. 죄를 조금이라도 두둔하거나 실제적인 부도덕에 문을 여는 견해들은, 자유로운 은혜를 높인다는 구실로 아무리 그럴듯하고 그럴싸하게 꾸며져 있다 할지라도 가장 큰 혐오로써 배척되어야 한다. 이는 예수 안에 있는 그 진리는 경건에 관한 진리이기 때문이다(딛 1:1). 사도는 이 장에서 거룩함의 필요성을 매우 충실하게 역설하는데, 이는 두 가지 항목으로 정리할 수 있다. 곧 거룩함에 대한 그의 권면들로서, 이는 거룩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며, 또한 그 권면들을 강화하는 그의 동기 또는 논증들로서, 이는 거룩함의 필요성을 보여 준다.

I. 첫째로, 우리는 여기서 성화의 본질, 곧 그것이 무엇이며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대체로 그것은 두 가지를 그 안에 포함하니,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vivification), 곧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이다. 이는 다른 곳에서는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1. 죽임, 곧 옛 사람을 벗는 것이니, 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1.)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아야 한다(롬 6:2). 우리는 전에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있어서도 안 되고, 전에 우리가 행했던 것처럼 행해서도 안 된다. 우리 인생의 지나간 때로 족하다(벧전 4:3). 비록 죄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죄 가운데 살지 않는 사람들, 곧 죄를 자기가 거할 본령(本領)으로 삼아 살지 않으며, 죄를 생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2.) 죄의 몸이 죽어야 한다(롬 6:6). 우리 안에 거하는 부패함이 곧 죄의 몸이니, 하나의 몸처럼 많은 부분과 지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도끼를 대어야 할 뿌리이다. 우리는 단지 죄의 행위를 그치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이는 외적인 제약이나 다른 유인책의 영향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사악한 습성과 성향을 약화시키고 멸하여야 하니, 단지 죄악의 우상들을 마음에서 내던지는 것만이 아니다.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실제의 범죄는, 본래의 부패함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확실히 상당 부분 방지된다. 죄의 몸을 멸하라, 그리하면 비록 그 땅에 가나안 족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종이 되지 않을 것이다. 홀을 휘두르며 쇠막대를 휘두르는 것은 바로 죄의 몸이니, 이것을 멸하라, 그리하면 그 멍에가 부서진다. 폭군 에글론이 죽임을 당한 것이 곧 압제당하던 이스라엘이 모압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3.) 우리는 참으로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롬 6:11). 압제자의 죽음이 해방이듯이, 압제받는 자의 죽음은 더욱 그러하다(욥 3:17,18). 죽음은 수고한 자에게 안식의 증서를 가져다준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하니, 죽은 사람이 자기의 옛(quandam) 감독자들을 더 이상 섬기지 않듯이, 죄에 순종하거나 죄를 따르거나 죄를 중히 여기거나 죄의 뜻을 이루지 말아야 하며, 죽어 가는 사람이 자기의 옛 오락에 무심하듯이 죄의 쾌락과 즐거움에 무심하여야 한다. 죽은 사람은 자기의 옛 동료, 옛 교제, 옛 일거리, 옛 향락, 옛 직무로부터 분리되어, 더 이상 전의 그가 아니며, 전에 행하던 일을 행하지 않고, 전에 소유하던 것을 소유하지 않는다. 죽음은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 성화는 영혼 안에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니, 그것은 죄와의 모든 교제를 끊어 버린다. (4.) 죄가 우리 죽을 몸을 지배하여 우리로 거기에 순종하게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롬 6:12). 비록 죄가 무법자처럼 남아 있을 수 있고, 폭군처럼 압제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왕처럼 다스리게 하지는 말라. 그것이 법을 제정하거나 의회를 주재하거나 군대를 지휘하게 하지 말라. 그것이 영혼 안에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여 우리로 거기에 순종하게 하지 말라. 비록 우리가 때때로 그것에 사로잡히고 압도당할 수 있을지라도, 결코 그 사욕에 있어서 그것에게 순종하지는 말라. 죄악된 정욕으로 너희에게 하나의 법이 되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 동의하는 순종을 바치는 일이 없게 하라. 그 사욕에—엔 타이스 에피튀미아이스 아우투(en tais epithymiais autou). 이것은 죄가 아니라 몸을 가리킨다. 죄는 상당 부분 몸을 만족시키고 몸의 비위를 맞추는 데 있다. 그리고 너희 죽을 몸이라는 어구 안에는 한 가지 이유가 함축되어 있으니, 곧 그것이 죽을 몸이며 빠른 속도로 흙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죄가 그 안에서 다스리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죽을 것으로 만든 것이 바로 죄였으니, 그러므로 그러한 원수에게 순종을 바치지 말라. (5.) 우리는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내주어서는 안 된다(롬 6:13). 몸의 지체들은 부패한 본성에 의하여 도구처럼 사용되어, 그것들로써 육신의 뜻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오용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몸의 지체들은 두렵고 놀랍게 지어졌으니(시 139:14 참조), 그것들이 죄에 이르는 불의의 마귀의 연장, 곧 죄악된 성향을 따라 죄악된 행위를 위한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불의는 죄에 이른다. 죄악된 행위는 죄악된 습관을 확증하고 강화한다. 한 죄는 또 다른 죄를 낳으니, 그것은 마치 물이 새어 나오는 것과 같으므로(잠 17:14), 그것을 건드리기 전에 그것을 버리라. 몸의 지체들이, 시험의 위력으로 인하여, 어쩌면 죄의 도구가 되도록 강요될 수도 있겠으나, 그것들을 그렇게 내주지 말라, 거기에 동의하지 말라. 이것이 성화의 한 가지로, 곧 죄를 죽이는 것이다.

2. 살림, 곧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이니, 그것은 무엇인가? (1.) 그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롬 6:4). 새 생명은 새 마음을 전제하니, 이는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며(잠 4:23), 그 시냇물을 달게 만드는 길은 오직 그 샘을 달게 만드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행함"은 삶의 행로와 기조를 가리키는데, 이것이 새로워져야 한다. 새로운 규칙을 따라, 새로운 목적을 향하여, 새로운 원리로부터 행하라. 그 길에 대하여 새로운 선택을 하라. 걸어갈 새로운 길을 택하고, 따라갈 새로운 인도자를 택하고, 함께 걸어갈 새로운 동반자를 택하라. 옛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것이 되어야 한다(고후 5:17). 그 사람은 전에 그러하지 않던 자가 되고, 전에 행하지 않던 일을 행한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것이다(롬 6:11).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을 중히 여기며,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고, 그분을 향하여 마음을 쓰며, 영혼이 매사에 마음에 드는 대상을 향하듯이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 그분 안에서 흡족함을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것이다. 마음 안에 다스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곧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생명이다. 아니마 에스트 우비 아마트, 논 우비 아니마트(Anima est ubi amat, non ubi animat)—영혼은 그것이 거하는 곳이 아니라 그것이 사랑하는 곳에 있다. 그것은 애정과 갈망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 것이다. 또는 (육신 안에서의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 곧 그분의 영광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우리의 규칙으로 삼아 사는 것이니, 우리의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고 우리의 눈이 항상 그분을 향하게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 생명이시니,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길이 없다. 그분은 중보자이시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가 되는 받음도, 하나님을 향한 합당한 경배도 있을 수 없으며, 죄악된 영혼들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주 예수의 중보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교류도 있을 수 없다. 이 생명의 창시자요 보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생명의 영향을 받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수액과 양분을 끌어와 살게 되는 뿌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시다. (3.) 그것은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롬 6:13). 거룩함의 바로 그 생명과 본질은 우리 자신을 주께 헌신함, 곧 우리 자신을 주께 드림에 있다(고후 8:5). "너희 자신을 그분께 드리라. 이는 정복당한 자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정복자에게 항복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자기의 사모함이 향한 그 남편에게 자기 자신을 드리듯이, 제자가 가르침과 다스림을 받기 위하여 자기를 교사에게 드리듯이, 도제(徒弟)가 자기를 주인에게 드리듯이 하는 것이다. 너희의 재산을 그분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너희 자신을 드리라. 너희의 온전한 자신, 그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것을 드리라." 파라스테사테 에아우투스(parastesate eautous)—아코모다테 보스 입소스 데오(accommodate vos ipsos Deo)—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맞추라. 트레멜리우스(Tremellius)가 시리아어 역본에서 이렇게 옮겼다. "단지 그분께 복종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맞추라. 단지 단번에 너희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항상 그분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으라. 인장에 대한 밀랍처럼 너희 자신을 그분께 드려, 어떤 인상이든 받아들이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되고, 가지고, 행하라." 바울이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행 9:6)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때에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죽은 시체를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조롱하는 것이다. "살아 있고 무언가에 쓸모 있는 자같이, 산 제물로 너희 자신을 드리라"(롬 12:1). 우리의 영적 생명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함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들(이는 법적인 죽음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곧 의롭다 하심을 받고 사망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이, 자기들을 그처럼 구속하신 분께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4.) 그것은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 몸의 지체들이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났을 때, 그것들은 빈둥거리며 놀고 있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 무장한 강한 자가 쫓겨났을 때, 그 권리를 가진 자로 하여금 노략물을 나누게 하라. 비록 영혼의 능력과 기능들이 거룩함과 의의 직접적인 주체이기는 하나, 몸의 지체들도 도구가 되어야 하니, 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영혼을 섬길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롬 6:19)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그것들을 하나님의 의로운 법의 인도와 명령 아래에 두며, 또한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영혼 안에 심으시는 내재적 의의 원리 아래에 두라." 의에게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함은 성장과 진보, 그리고 얻은 터전을 시사한다. 모든 죄악된 행위가 죄악된 습관을 확증하여 그 본성을 점점 더 죄에 기울게 만들듯이(이런 까닭에 여기서 본성적인 사람의 지체들은 불법에 이르는 불법에게 종이 되었다고 일컬어진다—한 죄가 마음으로 하여금 또 다른 죄에 더 기울게 만든다), 모든 은혜로운 행위는 은혜로운 습관을 확증한다. 의를 섬기는 것은 거룩함에 이르니, 한 가지 의무가 우리를 또 다른 의무에 합당하게 만들며,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면 행할수록 더욱 많이 행할 수 있게 된다. 또는 의를 섬기는 것, 에이스 하기아스몬(eis hagiasmon)—성화의 증거로서이다.

II. 여기서 성화의 필요성을 보여 주기 위하여 사용된 동기 또는 논증들. 우리 마음에는 본성적으로 거룩함에 대한 그러한 반감이 있어서, 마음을 거룩함에 복종하도록 이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사역이니, 성령께서 영혼에 다음과 같은 유인책들을 적용하심으로 설득하신다.

1. 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례적으로 일치하는 데서 논증한다. 우리의 세례는 그 의도와 목적과 더불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 할 큰 이유를 그 안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세례를, 죄에서 우리를 막아 주는 제어의 굴레로서, 또한 의무로 우리를 재촉하는 박차로서 활용하여야 한다. 이 논증을 살펴보라.

(1.) 대체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니, 곧 신앙고백에 있어서, 또한 의무에 있어서 그러하다. 우리의 세례는 우리가 죄의 나라로부터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죄와 더 이상 상관할 것이 없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죄를 죽이는 덕과 능력에 참여함으로써, 또한 죄를 죽이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분 안에서 누리는 몫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만일 우리가 죄 가운데 계속 거한다면 이 모든 것이 헛되니, 우리는 신앙고백을 부인하고 의무를 어기며, 우리가 죽었던 그것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서, 마치 걸어 다니는 유령과 같으며, 이보다 더 어울리지 않고 더 모순된 것은 없다. 이는(롬 6:7)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음이니, 곧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죄의 지배와 통치에서 벗어났으니, 마치 죽은 종이 자기 주인에게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욥 3:19). 그런데 우리가 이미 면제받은 그 종살이로 다시 돌아갈 만큼 어리석은 자가 되겠는가? 우리가 애굽에서 건짐을 받았는데, 그리로 다시 돌아갈 것을 말하겠는가?

(2.)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롬 6:3). 우리는 에이스 크리스톤(eis Christon)—그리스도에게로 세례를 받았으니, 고전 10:2에서 에이스 모센(eis Mosen)—모세에게로 (세례를 받았다고 한 것과) 같다.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매니, 우리를 우리의 교사이신 그리스도께 도제로 매며, 우리의 통치자이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맹세하게 한다. 세례는 엑스테르나 안사 크리스티(externa ansa Christi)—그리스도의 외적인 손잡이이니,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붙드시고 사람들이 자기를 그리스도께 드린다. 특별히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으니, 곧 그의 죽으심으로 사신 특권에 참여함으로 들어가고, 또한 두 가지 의무로 들어간다. 곧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속량하시는 것이 목적이었던 그의 죽으심의 의도에 순응할 의무와, 그의 죽으심의 본을 따를 의무이니,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죽으셨듯이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세례의 고백이요 약속이었으니, 만일 우리가 이 고백에 응답하지 않고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옳게 행하는 것이 아니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우리가 일치하는 것은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도록 의무를 지우니, 그로써 우리는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게 된다(빌 3:10).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다고 일컬어지니(롬 6:5), *토 호모이오마티(to homoiomati)*는 단지 닮음만이 아니라 동질화(conformation)를 가리킨다. 마치 접붙임을 받은 줄기가 그 가지의 모양으로 함께 심겨, 그 가지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심는 것은 생명과 결실을 위함이니,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양으로 포도원에 심겨졌으며, 우리는 그 닮음을 성화로써 증거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우리의 신조는, 다른 것들과 더불어,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셨다는 것이니, 사도가 여기서 주목하는 바와 같이, 세례는 이 각각의 것에 있어서 그분께 성례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첫째,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롬 6:6). 십자가의 죽음은 더딘 죽음이었다. 몸은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도 여러 차례 몸부림치며 여러 차례 발버둥쳤으나, 그것은 확실한 죽음이어서 숨이 끊어지기까지 오래 걸리기는 했어도 결국에는 숨이 끊어졌다. 신자들 안에서 죄를 죽이는 일이 바로 이러하다. 그것은 저주받은 죽음이었다(갈 3:13). 죄는 멸망에 바쳐진 죄인처럼 죽으니, 그것은 저주받은 것이다. 비록 그것이 더딘 죽음이기는 하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옛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틀림없이 재촉할 것이니, 그것은 그 힘이 한창일 때가 아니라 쇠하여 가는 때이다. 낡아 가는 것은 곧 사라지려 하는 것이다(히 8:13).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쉬네스타우로테(synestaurothe)*는 시간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인과(因果)의 측면에서이다.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 안에서 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데 영향을 끼친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롬 6:8).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그가 죽으셨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 죄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의도와 본보기 둘 다에 일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 곧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것을 의미하며 인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와 함께 죽은 자이며, 그가 죄와 상관하지 않으셨던 것 이상으로 우리도 죄와 더 이상 상관하지 않기로 매인 자이다. 셋째, 우리는 세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롬 6:4). 우리의 일치는 완전하다. 마치 장사된 자들이 온 세상으로부터 온전히 끊어지듯이, 우리는 신앙고백에 있어서 죄와의 모든 교류와 교제로부터 온전히 끊어진 자이니, 단지 산 자에 속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산 자들 가운데 있지 않으며, 그들과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죄와 죄인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우리는 장사되었으니, 곧 신앙고백과 의무에 있어서이다. 우리는 그러하다고 고백하며, 또한 그러하도록 매여 있다. 그것은 세례에서 맺은 우리의 언약이요 약속이었으니, 우리는 주께 속하도록 인침을 받았고, 그러므로 죄로부터 끊어지도록 인침을 받았다. 세례에 있어서 이 "장사됨"이, 우리의 세례적 십자가 처형과 죽음이 그러한 어떤 언급도 담고 있지 않은 것 이상으로, 세례에서 물 아래로 잠기는 어떤 관습을 조금이라도 암시한다고 보아야 할 이유를 나는 솔직히 알 수 없다. 사도가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됨이라 부르는 것은 세례에 있어서 표징이 아니라 그 표징이 의미하는 실체임이 분명하며, 장사된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새롭고 더 천상적인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시기 위하여 장사되셨듯이, 우리도 세례에서 장사되었으니, 곧 죄의 생명에서 끊어져, 믿음과 사랑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기 위함이다.

[2.] 그리스도의 부활에 우리가 일치하는 것은 우리로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도록 의무를 지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토록 알기를 사모하던 그 부활의 권능이다(빌 3:10).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니, 곧 아버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곧 그분의 영광이니, 그것은 영광스러운 능력이다(골 1:11). 그런데 세례에서 우리는 그 본에 일치하도록, 곧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하도록(롬 6:5), 그와 함께 살도록(롬 6:8) 의무를 진다. 골 2:12을 보라. 회심은 죄의 죽음에서 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첫째 부활이며, 이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일치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렇게 일치하는 것은, 그토록 많은 성도들의 몸이 다시 살아난 데서 시사되는 듯하니, 이것이 비록 앞당겨서 언급되기는 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과 동시에 일어났다고 여겨진다(마 27:52).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두 가지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일치하여야 한다. 첫째, 그는 다시 죽지 아니하시려고 살아나셨다(롬 6:9).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다른 많은 사람들에 관하여 읽지만, 그들은 다시 죽기 위하여 살아났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을 때, 그는 다시 죽지 아니하시려고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세마포를 뒤에 남겨 두셨으니, 다시 죽어야 할 나사로는 그것을 다시 사용할 일이 있을 자처럼 그것을 두르고 나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사망이 다시 주장하지 못한다. 그는 참으로 죽으셨으나, 살아 계시며, 너무도 살아 계셔서 세세토록 살아 계신다(계 1:18). 이와 같이 우리는 죄의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다시는 그리로 돌아가지 아니하며, 어둠의 일들과 더 이상 아무 교제도 갖지 아니하여, 흑암 그 자체와 같은 그 흑암의 땅인 그 무덤을 떠나야 한다. 둘째,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려고 살아나셨으니(롬 6:10), 곧 천상의 생명을 살려고, 자기 앞에 놓인 그 영광을 받으려고 살아나셨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다른 이들은 모든 점에서 전에 살던 그 동일한 생명으로 돌아갔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는 세상을 떠나려고 다시 살아나셨다. 내가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아니하옵고(요 13:1; 17:11).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려고, 곧 중보하시고 다스리시려고,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려고 살아나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 대하여 살려고 다시 살아나야 하니, 이것이 바로 그가 새 생명이라 부르는 것이다(롬 6:4). 곧 우리가 전에 살던 것과는 다른 원리로부터, 다른 규칙을 따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헌신한 삶은 곧 새 생명이다. 전에는 자아가 가장 으뜸가고 가장 높은 목적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이시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니, 곧 우리의 눈을 항상 그분께 두며 우리의 모든 행위의 중심으로 그분을 삼는 것이다.

2. 그는 새 언약의 보배로운 약속들과 특권들에서 논증한다(롬 6:14). 우리가 죄를 정복하고 굴복시킬 수 없으며,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너무 버겁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아니다, 너희가 씨름하는 원수는 너희가 너희 자리를 굳게 지키고 너희 무기를 들고 서 있기만 하면 능히 다룰 수 있고 능히 굴복시킬 수 있는 원수이다. 그것은 이미 좌절되고 패퇴된 원수이다. 너희가 사용하기만 한다면 너희를 돕기 위하여 은혜의 언약 안에 비축된 힘이 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은 죄를 죽이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약속들보다 더 강력하고 더 효력이 있다. 죄는 신자 안에서 발버둥칠 수 있고 그에게 많은 괴로움을 끼칠 수 있으나, 그를 주장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를 괴롭힐 수는 있으나 그를 다스리지는 못한다. 이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곧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에 우리를 움직이던 것과는 다른 원리들로 움직여진다. 새 주인, 새 법이다. 또는, 벽돌은 요구하면서 짚은 주지 않고, 조금만 실패해도 정죄하며,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행하지 말라 그러면 죽으리라"라고 외치는 행위 언약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도리어 은혜 언약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 은혜 언약은 진실함을 우리의 복음적 온전함으로 받아 주며, 그것을 행할 힘을 약속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이 점에서 잘 정돈되어 있으니, 곧 언약 안에서의 모든 범죄가 우리를 언약 밖으로 내쫓지 않으며, 특히 우리의 구원을 우리 자신의 손에 맡겨 두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중보자의 손에 비축하여 두는 것이다. 그 중보자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보증하시며, 친히 그것을 정죄하셨고 또한 그것을 멸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승리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롬 8:37). 그리스도께서는 은혜의 금홀로 다스리시며, 그 다스림에 기꺼이 복종하는 백성을 죄가 주장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은 모든 참된 신자에게 매우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만일 우리가 법 아래에 있었다면 우리는 망했을 것이니, 이는 법이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저주하기 때문이다(갈 3:10). 그러나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으니, 이 은혜는 자원하는 마음을 받아 주며, 우리가 잘못 행하는 것을 지나치게 따지지 아니하며, 회개의 여지를 남겨 두며, 회개할 때에 용서를 약속한다. 그러니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자에게 이것보다 더 강한 동기, 곧 죄와 아무 상관도 갖지 말아야 할 동기가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그토록 큰 선하심을 거슬러 죄를 짓고, 그러한 사랑을 욕되게 하겠는가? 어떤 이들은 어쩌면 이 꽃에서 독을 빨아내어, 이것을 죄를 짓는 격려로 부정직하게 사용할지도 모른다. 사도가 그러한 생각에 어떻게 소스라치는지를 보라(롬 6:15).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친구의 비범한 친절과 호의의 표현을 빌미로 도리어 그를 모욕하고 노엽게 할 기회로 삼는 것보다 더 검고 더 고약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한 깊은 자비를 짓밟고, 그러한 사랑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라면 온 세상이 수치라고 외칠 그러한 일이다.

3. 그는 이것이 우리의 상태에 대하여, 곧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든 불리한 것이든, 어떤 증거가 될 것인지에서 논증한다(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느니라. 모든 사람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종이거나 죄의 종이거나 둘 중 하나이니, 이것이 두 가족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두 가족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두 주인 중 누구에게 순종을 바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죄의 법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사망이 매여 있는 그 가족에 속한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족과 우리가 관계되어 있음을 증거할 것이다.

4. 그는 그들의 옛 죄악됨에서 논증한다(롬 6:17-21).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들이 전에 어떠한 자였고 무엇을 행하였는가. 우리는 우리의 옛 상태를 자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자기 자신에 관하여, 또한 그가 편지를 쓰는 자들에 관하여 그것을 자주 기억한다. [1.] 너희가 죄의 종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종이 된 자들은 자기들이 죄의 종이었던 그때를 기억하여, 자기를 겸손하고 회개하며 깨어 있게 하고,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활기를 더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토록 수천 명이 그 종살이를 그만두고 그 멍에를 벗어 던졌다는 것, 그리고 진심으로 그것을 버리고 자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드린 자치고 그 누구도 이전의 종살이로 돌아간 적이 없다는 것은, 죄를 섬기는 일에 대한 책망이다. "너희가 그러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곧 너희가 비록 그러했으나 그럼에도 순종하였음을 감사하노라. 너희가 그러했으나, 우리가 그것을 지나간 일로 말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너희가 그러했으나, 너희는 이제 더 이상 그러하지 않다. 아니, 너희가 전에 그러했다는 사실은, 그 복된 변화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크게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다. 옛 죄악됨이 너희의 현재 거룩함에 그러한 대조와 그러한 박차가 됨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2.]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종으로 내주어 불법에 이르렀다(롬 6:19). 죄악된 상태의 비참함은, 몸이 죄에 종노릇하는 머슴이 된다는 것이니, 이보다 더 천하고 더 가혹한 종살이는 있을 수 없으며, 마치 들로 보내져 돼지를 치게 된 탕자와 같다(눅 15:15). 너희가 내주었다. 죄인들은 자원하여 죄를 섬긴다. 만일 그들이 자기를 죄에게 내주지 않았다면, 마귀는 그들을 그 종살이로 강요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죄인들이 망할 때에 하나님을 의롭다 할 것이니, 곧 그들이 악을 행하려고 자기를 팔았으며(왕상 21:25), 그것은 그들 자신의 행위요 소행이었다는 것이다. 불법에 이르는 불법. 모든 죄악된 행위는 죄악된 습관을 강화하고 확증한다. 곧 일로서의 불법에 이르고, 삯으로서의 불법에 이른다.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며(호 8:7), 점점 더 악하여지고 점점 더 완악하여진다. 이것을 그는 사람의 예대로 말하니, 곧 사람들 사이에 흔한 것, 곧 섬김과 복종이 바뀌는 데서 비유를 끌어온다. [3.] 너희가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다(롬 6:20). 주어진 어떤 자유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취한 자유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것이니, 그것은 곧 방종이다. "너희는 선한 것에 대하여 온전히 비어 있었으니, 곧 어떤 선한 원리나 충동이나 성향도 없이 비어 있었고, 하나님의 법과 뜻에 대한 모든 복종도, 그분의 형상에 대한 모든 일치함도 없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너희는 이것을 하나의 자유요 해방으로 여겨 매우 흡족해하였다. 그러나 의로부터의 자유는 가장 고약한 종류의 종살이이다."

(2.) 그 복된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1.]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였다(롬 6:17). 이것은 회심이 무엇인지를 묘사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자들에 의하여 우리에게 전하여진 그 복음에 우리가 일치하고 순응하는 것이다. 난외주(欄外註). 너희가 그것에게 넘겨진 바, 에이스 혼 파레도테테(eis hon paredothete)—그것 안으로 너희가 넘겨졌다. 그리하여 살펴보라. 첫째, 은혜의 규칙, 곧 그 교훈의 본—튀폰 디다케스(typon didaches). 복음은 진리와 거룩함 둘 다의 큰 규칙이니, 그것은 도장이요, 은혜는 그 도장의 인상(印象)이다. 그것은 바른 말의 본이다(딤후 1:13). 둘째, 은혜의 본질, 곧 그것이 그 규칙에 우리가 일치하는 것이라는 점. 1. 그것은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복음은 단지 믿어야 할 교리일 뿐 아니라 순종하여야 할 교리이며, 그것도 마음으로 순종하여야 하니, 이는 그 순종의 진실함과 실재함을 가리킨다. 곧 단지 고백으로만이 아니라 능력으로, 곧 마음으로, 우리의 가장 깊은 부분, 우리를 명령하는 부분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2. 그것은 그 안으로 넘겨지는 것이니, 마치 밀랍이 인장의 인상 속으로 부어져, 한 줄 한 줄, 한 획 한 획 그것에 응답하며, 그 모양과 형상을 온전히 나타내듯이, 하나의 틀 속으로 넘겨지는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복음의 모양과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니, 우리의 영혼이 그것에 응답하고, 그것에 순응하며, 그것에 일치하는 것이다. 곧 지각, 의지, 애정, 목적, 원리, 행위가 모두 그 교훈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

[2.] 죄로부터 해방되어 너희가 의의 종이 되었다(롬 6:18). 곧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롬 6:22). 회심은, 첫째, 죄를 섬기는 데서 벗어남이니, 그것은 그 멍에를 벗어 던지고 죄와 더 이상 아무 상관도 갖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의를 섬기는 일에 바침이니, 곧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의를 우리의 일로 삼는 것이다.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될 때, 그것은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살며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거룩한 산으로 인도되어 법을 받았고, 거기서 언약의 줄에 매여졌다(겔 20:37). 살펴보라, 우리가 죄의 권세와 지배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으니, 우리는 하나님과 죄처럼 서로 정반대인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 6:24). 우리는 탕자처럼, 그 나라 백성을 섬기는 머슴살이를 그만두어야만 비로소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올 수 있다.

(3.) 그들이 이제 자기들의 옛 일과 옛 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는 그들 자신에게 호소한다(롬 6:21). 그들이 죄를 섬기는 일이 어떠했음을 깨닫지 않았는지. [1.] 무익한 섬김이었음을.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너희가 그것으로 무엇이라도 얻은 적이 있느냐? 앉아서 셈을 정리하고, 너희의 이익을 계산해 보라. 그때에 너희가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무한히 큰 장차의 손실은 차치하고라도, 죄의 현재의 이득 자체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무슨 열매를? 열매라는 이름에 합당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죄의 현재의 쾌락과 이득은 열매라 불릴 자격이 없다. 그것은 단지 쭉정이일 뿐이니, 곧 불의를 갈고 허무를 심어 그대로 거두는 것이다(욥 4:8). [2.] 그것은 부끄러운 섬김이니, 곧 우리가 이제는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곧 그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고, 그 더러움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수치는 죄와 더불어 세상에 들어왔으며, 지금도 죄의 확실한 산물이니, 곧 회개의 수치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영원한 수치와 멸시이다. 머지않아 자기가 반드시 부끄러워하게 될 일을, 누가 자진하여 행하겠는가?

5. 그는 이 모든 것의 마지막에서 논증한다. 이성적 피조물이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부여받아, 앞을 바라보며 사물의 나중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다. 우리를 죄에서 떠나 거룩함으로 설득하기 위하여, 여기에 복과 저주, 선과 악, 생명과 사망이 우리 앞에 놓여 있으며, 우리에게 선택이 주어진다. (1.) 죄의 마지막은 사망이다(롬 6:21). 그 일의 마지막은 사망이다. 비록 그 길이 즐겁고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마지막은 음울하다. 마침내 그것은 물며, 그것은 나중에 쓰디씀이 될 것이다(잠 5:4).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종이 자기 일을 마쳤을 때 그에게 삯이 마땅하듯이, 죄인이 죄를 지었을 때 그에게 사망이 마땅하다. 이것은 모든 죄에 대하여 참이다. 그 본성에 있어서 용서받을 만한(venial) 죄란 없다. 사망은 가장 작은 죄의 삯이다. 여기서 죄는 삯을 받기 위하여 행하는 일로, 또는 삯을 주는 주인으로 표현되어 있다. 죄의 종이 되어 죄의 일을 행하는 모든 자는 이렇게 삯을 받을 것을 예상하여야 한다. (2.) 만일 그 열매가 거룩함에 이른다면, 곧 참되고 자라 가는 은혜의 능동적 원리가 있다면, 그 마지막은 영생이 될 것이니, 참으로 행복한 마지막이다! 비록 그 길이 오르막이고, 비록 그것이 좁고 가시밭이며 (대적으로)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그 끝에 있는 영생은 확실하다. 그래서 롬 6:23은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고 한다. 천국은 생명이니, 하나님을 뵙고 누리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니, 거기에 따르는 어떤 연약함도 없고, 그것을 끝낼 어떤 죽음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사망은 죄의 삯이니, 그것은 응당한 대가로 온다. 그러나 생명은 은사이니, 그것은 은총으로 온다. 죄인은 지옥을 받을 만하나, 성도는 천국을 받을 만하지 못하다. 천국의 영광과 우리의 순종 사이에는 아무런 비례가 없으니, 우리가 천국에 이른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를 통하여서이다. 그것을 사신 분도, 그것을 예비하신 분도, 우리를 그것에 합당하도록 예비하신 분도, 우리를 그것에 이르도록 보존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니, 그는 알파와 오메가시며,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