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인물이름의 뜻: 여호와께서 위로하신 자
하가랴의 아들로, 바사 궁정의 술 맡은 관원이었다가 예루살렘 총독이 되어 성벽을 재건하고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여호와께서 위로하신 자. (1.) 스 2:2; 느 7:7. (2.) 느 3:16.
(3.) 하가랴의 아들이며(느 1:1), 아마도 유다 지파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가문은 예루살렘에 속하였음에 틀림없다(느 2:3). 그는 "흩어진 유다인" 중 하나였으며, 젊었을 때 수산 궁에서 왕의 술 맡은 관원이라는 중요한 직책에 임명되었다. 왕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는 자기 시종과 친밀하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의 형제 하나니를 통하여, 그리고 어쩌면 다른 소식통을 통하여(느 1:2; 2:3) 거룩한 성의 슬프고 황폐한 상태를 듣고 마음에 슬픔이 가득하였다. 여러 날 동안 그는 금식하며 슬퍼하고 그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곳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마침내 왕이 그의 수심 어린 얼굴을 보고 그 까닭을 물었다. 느헤미야는 그 모든 것을 왕에게 설명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디르사다 곧 유다 총독으로 일할 허락을 얻었다. 그는 (에스라보다 십일 년 후인) 주전 446년 봄에 왕이 마련해 준 강력한 호위대와 함께, 또 그가 지나가야 할 지방의 모든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와 더불어, 왕의 산림지기 아삽에게 느헤미야를 도우라고 지시하는 편지를 가지고 올라갔다. 도착하자 그는 성을 살피고 그 재건 계획을 세우는 일에 착수하였는데, 이 계획을 큰 솜씨와 활력으로 수행하여 전체가 약 여섯 달 만에 완공되었다. 그는 십삼 년 동안 유다에 총독으로 머물며, 많은 반대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개혁을 수행하였다(느 13:11). 그는 옛 노선을 따라 나라를 세웠으니, "에스라의 사역을 보완하고 완성하며" 성의 안전과 선정을 위한 모든 조치를 마련하였다. 그의 공적 생애의 이 중요한 시기가 끝날 무렵, 그는 바사로 돌아가 수산 또는 엑바타나에서 왕을 섬겼다. 이 일이 있은 직후 옛 부패한 상태가 되돌아왔는데, 이는 성벽 봉헌의 절기에 행해졌던 신앙고백이 상당 부분 무가치하였음을 보여 준다(느 12장. 에스라 참조). 이제 말라기가 백성 가운데 나타나 엄한 책망과 엄숙한 경고의 말을 전하였다. 느헤미야는 (약 이 년의 부재 후) 바사에서 다시 돌아왔는데, 자기가 없는 동안 일어난 광범위한 도덕적 타락을 보고 비통해하였다. 그는 솟아난 노골적인 악습들을 바로잡는 일에 힘차게 착수하여, 공적 예배의 질서 있는 운영과 모세 율법의 외적 준수를 회복하였다. 그의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는 죽을 때까지(주전 413년경) 노년에 이르도록 총독의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고 묻힌 곳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불같은 열정에서, 활동적인 진취적 기상에서, 그리고 그 생애의 경건함에서 에스라와 닮았다. 그러나 그는 더 무뚝뚝하고 더 사나운 기질이었다. 그는 범법자들에 대한 인내가 더 적었고, 사색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행동하는 사람이었으며, 설득보다는 힘을 쓰기를 더 좋아하였다. 그의 실제적 명민함과 높은 용기는 성벽 재건을 끝까지 이루어 내고 대적들의 교활한 음모를 좌절시킨 그 처리 방식에서 매우 뚜렷이 드러났다. 그 마음의 경건함, 깊은 종교적 정신, 그리고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 및 절대적 의존의 의식은, 첫째로 1장 5-11절에 기록된 긴 기도에서, 둘째로 가장 두드러지게는 그의 글에 그토록 자주 나오는 이른바 '간투기도', 곧 깊이 감동된 마음의 본능적 토로이면서도 늘 하나님께 의지하며 환난 중에 도움을, 악한 계획의 좌절을, 마지막 상급과 받아들여짐을 오직 하나님께만 바라보는 그 짧지만 감동적인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린 호소에서 인상 깊게 나타난다"(롤린슨). 느헤미야는 바사 궁정에서 보낸 마지막 총독이었다. 이후 유다는 코엘레-수리아 총독령에 병합되었고, 수리아 총독의 관할 아래 대제사장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그 나라의 내치는 점점 더 신정 체제가 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