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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ING, CHRISTIAN Painting, Christian
회화, 기독교 (Painting, Christian) 초기 기독교 조각가와 화가들을 지배한 첫 번째 법칙은 그리스도를 그들 생명의 근원이자 중심으로 제시하는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구성에서 다른 인물들이 그로부터 발산되는 광선처럼 보이도록 그를 묘사하는 것이었다. 표현의 내용과 정신에 관하여 말하자면, 초기 기독교 미술의 전 시기 동안 조각과 회화는 대부분 상징적 표현에 한정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오직 상징적 표현만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곧 미술의 충동이 이 족쇄에서 부분적으로 벗어났다. 그럼에도 미술은 여전히 일종의 *빈자의 성경(biblia pauperum)*으로 남아 있었으며, 주로 거룩한 역사의 주제들을 단순히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후대에 이르러 미술 작품이 교회 장식을 위하여 다수 사용되었을 때에도, 성경의 장면들, 특히 묵시록(Apocalypse)에서 가져온 장면들이 여전히 선호되었다. 이미 4세기에 우리는 이러한 미술적 상징의 형식과 더불어 거룩한 인물들의 초상화 같은 표현을 발견한다. 심지어 그리스도와 마돈나(Madonna)와 사도들의 진정한 초상이, 성 누가(St. Luke)의 손에서 나온 회화 속에, 그리고 니고데모(Nicodemus)의 손에서 나온 조각 속에, 성 베로니카(St. Veronica)의 수건 속에, 그렇다, 심지어 이른바 ἀχειροποιήτοις("천상에서 기원한 형상들") 속에 존재한다고까지 믿어졌다. 초기 기독교 시기의 첫 삼분의 일, 곧 3세기부터 5세기 후반까지의 시기에는 이른바 묘지(로마, 나폴리, 시라쿠사 등의 카타콤)에 수많은 미술 작품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 시기에 회화는 여전히 고대의 조형적 표현 방법을 유지하였다(이는 묘지의 회화에서, 그리고 로마의 산타 코스탄차(Santa Costanza)와 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 라벤나(Ravenna)의 산 조반니 인 폰테(San Giovanni in Fonte)와 산 나차로 에 첼소(San Nazario e Celso)의 모자이크에서도 볼 수 있다). 두 번째 삼분의 일, 곧 8세기까지의 시기에 회화는 점점 더 고대의 형식을 기독교의 이상주의적·초월적 정신에 맞추려고 하였으니, 이는 로마의 산타 푸덴치아나(Santa Pudentiana)와 산티 코스마 에 다미아노(Santi Cosma e Damiano), 라벤나의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San Appollinare Nuovo)와 산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San Appollinare in Classe)와 산 비탈레(San Vitale)의 모자이크, 그리고 일부 세밀화에서 볼 수 있다. 8세기 이후 회화는, 그리고 사실상 초기 기독교의 전체 미술은, 11세기까지 점점 더 깊어지는 쇠퇴에 빠져들었으니, 이는 로마의 산 프라세데(San Prassede)와 산 마르코(San Marco) 등의 모자이크, 여러 사본의 세밀화, 그리고 그리스 교회와 러시아 교회의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 q.v.)에서 볼 수 있다. 11세기가 서방 기독교 세계에 가져온 새로운 생명과 더불어, 건축은 그 자체의 발전의 정점에 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각과 회화에 대하여도 결정적인 우위를 주장하였다. 하나의 정신과 하나의 생명이 이 세 자매 예술 모두에 두루 통하였다. 새로이 깨어난 미술의 충동은 북방에서, 특히 독일에서 발전하였고, 이탈리아에서는 훨씬 더 늦게 발전하였다. 여기서 가장 이른 움직임은 12세기에 일어났으며, 비잔틴 양식을 고대 이탈리아 양식과 융합시켜 옛 기독교 유형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첫 시도가 보다 낮은 등급의 개별 화가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전에 다음 세기가 이미 시작되었다.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의 회화는 조반니 치마부에(Giovanni Cimabue)와 시에나(Sienna)의 두초 디 부오닌세냐(Duccio di Boninsegna, 1282년경 활동)에 이르러 처음으로 완성에 도달하였다. 이리하여 두 회화 유파, 곧 피렌체(Florence) 유파와 시에나 유파가 생겨났다. 피렌체 유파는 보다 엄격한 유형으로 초기 기독교(비잔틴) 양식에 더 가까이 접근하였고, 시에나 유파는 보다 부드러움과 감성으로 특징지어지며, 보다 독립적이고, 또한 형태의 묘사에서 보다 우아하였다. 이 두 거장의 뒤를 이어 피렌체의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76-1336)가 나왔으니, 그는 "이탈리아 회화의 아버지"라는 칭호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다만 고딕(Gothic) 양식의 회화의 창시자에 불과하였다. 그는 대담한 개혁가였으며, 미술의 전통과 초기 기독교 유형에 대한 비굴한 추종을 깨뜨렸다. 조토의 가장 뛰어난 제자들은 타데오 가디(Taddeo Gaddi)와 그의 아들 안젤로 가디(Angelo Gaddi), 조티노(Giottino), 오르카냐(Orcagna), 스피넬로(Spinello), 아레티노(Aretino), 안토니오 베네치아노(Antonio Veneziano) 등이었다. 독일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시작은 11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2세기에는 개선이 분명히 나타나니, 특히 유명한 베르됭(Verdun) 제단(1180년의 것으로 지금은 빈 근처 노이부르크(Neuburg) 수도원에 있다), 쾰른(Cologne) 근처 브라우바일러(Brauweiler) 수도원 대강당의 벽화, 그리고 힐데스하임(Hildesheim)의 성 미하엘(St. Michael) 중앙 회랑의 천장에서 그러하다. 고딕 양식의 시기로부터 여전히 보존되어 있는 작품들은 훨씬 더 많고 중요하니, 이 양식에서 중세주의의 고유한 정신이 처음으로 완전한 미술적 표현에 도달하였다. 특히 유리화(glass-painting)의 발전을 주목해야 하니 — 이는 아마도 10세기 말에 시작된 독일의 발명이었을 것이다 — 그 예들은 쾰른의 성 쿠니베르트(St. Cunibert)의 창문, 쾰른 대성당(Cologne Cathedral)의 성가대석, 오펜하임(Oppenheim)의 성 카타리나 교회(Church of St. Catharine), 그리고 스트라스부르 대성당(Strasburg Cathedral)에서 볼 수 있다. 이전에는 거의 그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이젤 그림(easel pictures)에서는 14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더 높은 미술적 시도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로는 세 개의 별도 유파를 구별할 수 있다: **1.** 보헤미아(Bohemian) 유파, 곧 카를 4세(Charles IV)가 창설한 프라하(Prague) 유파; **2.** 뉘른베르크(Nuremberg) 유파, 그 주요 대표 기념물은 뉘른베르크의 프라우엔키르헤(Frauenkirche), 성 로렌스(St. Laurence), 성 제발트(St. Sebald)에 있는 여러 제단 성소이다; **3.** 쾰른 유파, 단연 가장 중요한 유파로, 그 주요 대표자는 빌헬름 거장(master Wilhelm, 1360년경)과 슈테판 로흐너 거장(master Stephan Lochner, 1430년경)이었다. 15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중세주의의 정신에 대항하여, 미술에서 더 큰 표현의 진실을 향한 결정적인 시도가 분출하였으니 — 빛과 색채와 소묘와 구성에서 표현의 영적 의미를 자연의 법칙과 원리와 조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이 자연주의적 발전은 이탈리아에서 피렌체 유파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프라 조반니 안젤리코 다 피에솔레(Fra Giovanni Angelico da Fiesole, 1387-1455)는 다른 면에서는 전적으로 중세주의의 정신에 지배되었으나, 그럼에도 인간 얼굴의 심리적 의미를 꿰뚫고자 한 첫 사람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이미 중세주의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나 있는 인물로, 마사초(Masaccio)라 불리는 톰마소 디 산 조반니 다 카스텔(Tommaso di San Giovanni da Castel, 1401-28)이 있으니, 15세기의 가장 위대한 거장 가운데 하나이다. 프라 안젤리코와 더불어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와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의 이름이 연관되고, 마사초와 더불어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와 그의 아들 필리피노(Filippino),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jo), 바스티아노 마이나르디(Bastiano Mainardi)의 이름이 연관된다.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Antonio Pallajuolo)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occhio) 같은 다른 피렌체 화가들은 또한 조각가이기도 하였는데, 해부학 연구를 통하여 인간 형상의 보다 힘찬 조형으로 조형적 형태를 회화에 옮기려고 애썼다. 한편 코르토나(Cortona)의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1440-1521)는 그 구성의 고귀함과 미술적 진실로써, 움브리아(Umbrian) 유파의 보다 깊은 감성과 강한 대조를 이루는데, 움브리아 유파는 그 주된 무대가 아시시(Assisi) 인근에 있으며 피렌체 유파의 대척점이다. 움브리아 유파의 유명한 거장들로는 라파엘로(Raphael)의 스승인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46-1526)와, 라파엘로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Giovanni Santi, 1494년 사망), 그리고 라파엘로의 친구 프란체스코 프란차(Francesco Francia, 1517년 사망)가 있다. 이탈리아의 나머지 유파들, 곧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경-1516)를 둔 베네치아(Venetian) 유파, 프란체스코 스콰르초네(Francesco Squarcione)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 같은 거장을 둔 파도바(Padua)와 만토바(Mantua) 유파는 피렌체 유파를 따른다. 이탈리아 회화는 16세기에 그 정점에 도달하였다. 그 시기의 가장 유명한 거장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체사레 다 세스토(Cesare da Sesto), 안드레아 살라이노(Andrea Salaino), 프란체스코 멜치(Francesco Melzi), 특히 루이니(Luini)였다. 16세기 베네치아 유파는 색채를 수단으로 하여 레오나르도가 도달한 고귀한 결과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색채의 질에서 이 유파는 다른 모든 유파보다 우월함을 이루었다. 그 주요 거장은 티치아노(Titian)였다. 그와 더불어 조르조네(Giorgione)의 뛰어난 제자들이 일하였으니, *일 베키오(Il Vecchio)*라 불리는 프라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Fra Sebastiano del Piombo), 자코포 팔마(Giacopo Palma), 그리고 포르데노네(Pordenone)이다. 티치아노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는 틴토레토(Tintoretto)라 불리는 자코포 로부스티(Jacopo Robusti)였다. 저명한 파올로 베로네세(Paul Veronese)에게서 우리는 최고 등급의 색채의 거장을 본다. 16세기 롬바르드(Lombard) 유파의 주된 본거지는 파르마(Parma)였다. 그 주요 거장은 코레조(Correggio)였다. 피렌체 유파, 그리고 후에는 16세기 초 이후 이탈리아의 거의 전체 회화가 미켈란젤로(Michael Angelo)에 의하여, 그리고 리차렐리(Ricciarelli), 베누스티(Venusti), 사르토(Sarto) 등의 보다 작은 빛들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다섯 위대한 거장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이는 라파엘로(Raphael)이다.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들은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1492-1546), 가우덴치오 페라리(Gaudenzio Ferrari), 조반니 다 우디네(Giovanni da Udine)였다. 네덜란드(Netherlands)에서는 유화의 발명자, 아니 차라리 개량자인 후베르트 반 에이크(Hubert van Eyck, 1426년 사망)와 그의 더 젊은 동생이자 제자인 얀 반 에이크(John van Eyck, 1441년 사망)에 의하여 기독교 회화에 새로운 충동이 주어졌다. 그들의 주요 제자들은 피터르 크리스투스(Pieter Christus), 로히어르 반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특히 한스 멤링(Hans Memling)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영향은 홀란트(Holland)에서도 느껴졌으니, 그곳에 비슷한 유파가 창설되었으며, 그 주요 거장들은 루카스 반 레이던(Lucas van Leyden)과 그의 동시대인 얀 모스타르트(Jan Mostaert)였다. 16세기 초에는 다수의 화가들이 반 에이크 형제의 양식을 따랐다.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는 안트베르펜(Antwerp)의 대장장이 퀸텐 마시스(Quintin Massys, 1529년 사망)였다. 이 시기 독일 미술의 경로도 비슷하였다. 고딕 양식이 오래도록 우위를 차지하였으나, 15세기 중엽경 모든 독일 유파가 이탈리아 유파를 따랐다. 이 시기의 주요 거장들은, 쾰른 유파에서는 *동정녀의 죽음(Death of the Virgin)*을 그린 화가 요한 폰 멜렘(Johann von Mehlem); 베스트팔렌(Westphalia) 유파에서는 리스보른(Liesborn) 수도원의 거장; 울름(Ulm)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유파에서는 마르틴 신(Martin Schin, 1480년경)과 약간 더 젊은 바르톨로모이스 차이트블롬(Bartholomatus Zeitblom)과 그의 후계자인 울름의 마르틴 샤프너(Martin Schaffner), 그리고 저명한 소(小) 홀바인(Holbein the younger)의 아버지인 아우크스부르크의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뉘른베르크 유파에서는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hlgemuth, 1434-1519), 그리고 더욱 특히 그의 제자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였다. 또한 작센(Saxon) 유파도 언급해야 하니, 그 수장은 잘 알려진 루터(Luther)의 친구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1553)였고,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들은 그의 아들들인 요한(John)과 소(小)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younger)였다. 뉘른베르크의 위대한 거장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화가는 소(小)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54)이다. 그의 가장 특징적인 작품들은 다름슈타트의 *마돈나(Madonna)*(그 사본이 드레스덴(Dresden)에 있다)와 잘 알려진 그의 *죽음의 춤(Dance of Death)*이다. 16세기 후반에 독일과 네덜란드의 회화는 이탈리아 거장들에 대한 비굴한 모방으로 그 독립성을 잃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도 우리는 미술이 그 정점을 지났음을 분명히 증거하는 갑작스러운 쇠퇴를 발견한다. 두 번째 세대의 제자들은 단순한 모방자가 되었으며, 심지어 티치아노와 코레조와 미켈란젤로의 일면성을 과장하기까지 하였다. 이른바 "마니에리스트(mannerists)"의 가장 좋은 예는 프란체스코 살비아티(Fr. Salviati)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였다. 이 혼란에 맞서, 세기말에 카라치 일가(Caraccis)의 볼로냐(Bolognese) 유파가 일어났으니, 그 등장은 이탈리아에게 근대 회화의 *제4기*의 시작을 표시한다. 루도비코 카라치(Ludovico Caracci)와 그의 조카이자 제자인 아고스티노 카라치(Agostino Caracci)와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acci)는 일종의 절충 체계를 확립하였으니, 그 목적은 다섯 위대한 회화 거장들의 주요한 특징적 자질들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가장 뛰어난 제자들은 도메니키노(Domenichino, 1581-1641), 구에르치노(Guercino, 1590-1666), 프란체스코 알바니(Franc. Albani, 1578-1660), 그리고 특히 그 모든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귀도 레니(Guido Reni, 1575-1642)였다. 위대한 거장들의 이상주의에 맞서, 일면적인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발전시킨 이탈리아 회화의 두 번째 유파가 17세기 초에 창설되었다. 그 주요 대표자는 미켈란젤로 아메리기 다 카라바조(Mic. Angelo Amerighi da Caravaggio)였으며, 그의 제자들인 두 프랑스인 모이즈 발랑탱(Moyse Valentin)과 시몽 부에(Simon Vonet), 그리고 *스파뇰레토(Spagnoletto)*라 불리는 저명한 스페인 거장 주세페 리베라(Gius. Ribero)가 그들의 영향을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이식하였다. 이탈리아 회화의 명성을 떠받치기 위하여 발휘된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18세기에 이르러 그것은 그 가장 낮은 쇠퇴의 수준에 도달하였다. 미술에서 가톨릭주의의 새로운 부흥이 17세기에 가장 강력한 지지를 발견한 곳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 회화의 가장 완전한 발전을 대표하는 다섯 위대한 거장은 거의 모두 세비야(Seville) 유파 출신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1. 호세 리베라(Jose Ribera); 2. 프란시스코 수르바란(Francesco Zurhbaran, 1598-1662); 3.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 가운데 하나인 디에고 벨라스케스 다 실바(Diego Velasquez da Silva, 1599-1660); 4. 알론소 카노(Alonzo Cano); 5. 바르톨로메 무리요(Bartolome Murillo). 스페인 회화의 융성기는 짧게 지속되었으며, 17세기의 마지막 사분기에 스페인의 유파들은, 이탈리아의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가 도입한 것과 같은 단순한 미술 공장으로 전락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회화가 다소 더 오랜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높은 등급을 유지하였다. 여기서 두 개의 별개 유파, 곧 브라반트(Brabant, 벨기에) 유파와 홀란트 유파가 국가적 분열에서 발전하였다. 전자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와 그의 제자들, 곧 야코프 요르단스(Jac. Jordaens), 카스파르 데 크라이어(Caspar de Crayer),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톤 반 다이크(Aniton van Dyck, 1599-1641)를 거장으로 두었다. 후자는 테오도르 데 케이서(Theodor de Keyser), 프란스 할스(Franz Hals), 바르톨로메우스 반 데르 헬스트(Barth. Van der Helst) 등으로 대표되었는데, 이들은 거의 전적으로 초상화가였다. 그러나 훨씬 더 높은 발전은 저명한 렘브란트(Rembrandt)에게서 도달되었으니,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이자 후계자들은 헤르브란트 반 데르 에이크하우트(Gerbrandt van der Eeckhout), 솔로몬 코닝(Solomon Koning), 페르디난트 볼(Ferdinand Bol)이었다. 프랑스와 독일은 기독교 회화의 간략한 개관에서 이 시기 동안 어떤 중요한 위치도 주장할 수 없다. 독일에서는 30년 전쟁(Thirty Years' War)이 거의 모든 문화의 요소를 뿌리 뽑았으며, 18세기에 그 나라가 이 황폐로부터 회복하기 시작하였을 때, 발타자르 데너(Balth. Denner), 디트리히(Dietrich), 그리고 라파엘 멩스(Raphael Mengs, 1728-79) 같은 다만 하급의 거장들만이 무대에 등장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니콜라 푸생(Nic. Poussin), 외스타슈 르 쉬외르(Eustache Lesueur) 등 더 나이 많고 더 나은 거장들이 루이 14세(Louis XIV)의 총신인 샤를 르브룅(Charles Lebrun)이 대표하는 연극적 양식에 맞서 헛되이 애썼다.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에 선행하고 뒤따른 그 부도덕하고 비종교적인 정신이 유럽 전역에 퍼진 이래로, 기독교 회화는 자연히 현저한 쇠퇴를 겪었다. 그러나 독일과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개별 유파들이 다시 성장하였으니,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에서 그 탁월함은 부인될 수 없다. 독일에서는 뮌헨(Munich), 뒤셀도르프(Disseldorf), 베를린(Berlin), 그리고 근래에는 빈(Vienna)이 부흥된 회화의 주요 본거지로 언급되어야 하니, 그곳에서 거룩한 주제들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이는 가톨릭의 정신과 개신교의 정신 양쪽에서 다루어진다. 전자는 코르넬리우스(Cornelius), 오버베크(Overbeck), 퓌리히(Fiirich), 하인리히 헤스(H. Hess), 슈라우돌프(Schraudolp) 등에 의하여, 후자는 레싱(Lessing), 휘브너(Hiibner), 벤데만(Bendemann), 데거(Deger), 폰 게프하르트(Von Gebhardt) 등에 의하여 다루어진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근대의 종교 회화는, 현재의 종교적 상태에 상응하여, 한편으로는 사라져 버린 위대함과 힘을 되살리려는 단순한 시도로,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어둠에 싸여 있는 새로운 목표에 도달하려는 맹목적인 노력으로 보인다. 기독교 회화의 역사에 관한 가장 좋은 근대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Kugler, *Handbuch der Geschichte der Malerei seit Constantin dem Grossen*(2판 Berlin, 1847; Liibke의 4판, 1872); Ch. Blanc, *Histoire des Peintres de Toutes les Ecales depvlis la Renaissance jusque nos Jours*(Paris, 1851 이하); W. Lubke, *Geschichte deritalienischen Malerei voum 4. bis 16. Jahrhundert*(8판 Stuttgart, 1880); A. Woltmann, *Geschichte der Malerei*(Leipsic, 1878; 영역본 Lond. and N.Y. 1881); Ruskin, *Modern Painters*(Lond. 1843-60, 5권); Crowe and Cavalcaselle, *Storia della Pittura in Italia dal Secole II al Secolo XVI*(Florence, 1875); Plitt-Herzog의 *Real-Encyklop.*에 실린 *Malerei* 항목; Lichtenberger의 *Encyclop. des Sciences Religieuses*에 실린 *Peinture* 항목, s.v. (B.P.)
PAISIELLO, GIOVANNI Paisiello, Giovanni
파이시엘로, 조반니 (Paisiello, Giovanni) 세속 음악과 교회 음악을 모두 작곡한 저명한 이탈리아 작곡가로, 1741년 타란토(Taranto)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폴리(Naples)의 산토노프리오 음악원(Conservatorio St. Onofrio)에서 저명한 음악가 두란테(Durante)의 지도 아래 음악 교육을 받았다. 파이시엘로의 초기 작품들 가운데는 우리에게 특별히 흥미로운 것이 없으니, 그것들은 주로 세속적 성격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좋은 작품들 가운데 하나인 *세비야의 이발사(II Barbiere de Seviglia)*를 포함한 일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8년간 거주하는 동안 쓰였다. 빈(Vienna)에서 그는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열두 편의 교향곡과 오페라 부파(opera buffa) *왕 테오도로(II Re Teodoro)*를 작곡하였다. 1785년에서 1799년 사이에 그는 나폴리 극장을 위하여 다수의 오페라를 만들어 냈으며, 페르디난도 4세(Ferdinand IV)에 의하여 그의 *예배당 악장(Maestro di Capella)*으로 임명되었다. 혁명 정부 아래에서 음악의 국가 감독직을 수락한 결과로, 그는 왕정 복고 후 2년 동안 그 직무에서 정직되었으나, 결국 복직되었다. 1802년에 그는 집정 정부 예배당의 음악을 지휘하기 위하여 파리(Paris)로 갔으며, 그 직위에 있는 동안 나폴레옹(Napoleon)의 대관식을 위한 *테 데움(Te Deum)*을 썼다. 그 직후 그의 오페라 *프로세르피네(Prosepine)*가 받은 냉담한 반응으로 인하여 그는 나폴리로 돌아갔으며, 그곳에서 1816년에 죽었다. 그의 작품들은 선율의 감미로움과 우아함, 그리고 구조의 단순함으로 특징지어진다. 90편이 넘는 오페라 외에도, 그는 기악 사중주, 하프시코드 소나타, 협주곡, 미사, 진혼곡, 칸타타, 오라토리오, 그리고 오슈 장군(General Hoche)을 기리는 크게 칭송받은 장송 행진곡을 작곡하였다. 다음을 보라: Dhoron et Fayolle, *Dictionnaire Historique des Musiciens*, s.v.; Quatremere de Quincy, *Notices sur Paisiello*; Fetis, *Biographie Universelle des Musiciens*,
PAJON, CLAUDE Pajon, Claude
파종, 클로드 (Pajon, Claude) 저명한 프랑스 개신교 신학자로, 새로운 교리의 변증가로서 유명하였으나 또한 정통 가르침에 다소 이질적인 인물로 구별되는데, 1626년 바스 블레주아(Low Blesois)의 르모랑탱(Remorantin)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열렬하게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을 받아들인 가문에 속하였으므로, 클로드 파종은 그 선한 대의에 충실함을 입증할 수 있도록 큰 정성으로 교육받았으며, 그가 목회 사역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을 때 소뮈르(Saumur)의 신학교로 보내졌으니, 그곳에서 아미로(Amyraut), 플라케우스(Placaeus), 카펠루스(Capellus)의 지도 아래 그의 평생의 일을 위하여 준비하였다. 1650년에 그는 마르슈누아르(Marchenoir)의 목사가 되었으며, 1666년까지 그 자리를 지키다가, 그 후 그의 모교에서 크게 저명한 아미로(Amyraut, q.v.)의 후임으로 신학 교수직에 부름을 받았다. 그 선한 사람은 예정과 은혜에 관한 칼뱅주의(Calvinistic) 교리에 대하여 이단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파종도 마찬가지로 이 주제들에 관한 그의 독특한 견해로 상당한 동요를 일으켰다. 그는 섭리에서의 직접적인 협력(concursus)과 회심에서의 성령의 직접적인 영향을 부인하였다. 그는 성령의 은혜로운 영향이 말씀의 효력과 너무도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성령이 마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없으며, 그 영향은 주로 성경과 한 사람의 삶 전체의 과정을 매개로 하여 지성에 미친다고 보았다. 극단적 칼뱅주의자들에게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라고 규탄받은 이 견해들로 인하여 그는 불신을 받게 되었으며, 그의 교수직을 사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다. 1668년에 그는 오를레앙(Orleans)의 개신교회의 목사로 부름을 수락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의 이단적 가르침을 계속 옹호하였으므로, 그는 프랑스 개신교회의 주요 신학자들의 연합된 반대에 부딪혔고, 많은 괴롭힘과 혹독한 대우를 당하였다. 쥐리외(Jurieu)와 다른 이들의 영향으로, 그의 이단적 교의를 검토하기 위하여 여러 노회(synods)가 열렸으며, 그를 옹호하고 지지하기 위하여 결집한 많은 친구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회에 의하여, 처음에는 1677년에, 그리고 그 뒤 여러 노회에서 정죄받았다. 스당 아카데미(Academy of Sedan)도 그의 교리를 정죄하였는데, 그것도 청문 없이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변호하고자 하였을 때, 그가 다만 그의 이단을 전파할 기회를 원할 뿐이라는 이유로 그 특권이 거부되었다. 파종은 1695년 9월 27일 오를레앙 근처 카레(Carre)에서 죽었다. 그의 견해는 옹호자들을 발견하였으며, *파종주의(Pajonism)*는 오늘날에도 소멸한 이단이 아니다. 이 이단의 기원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쉽게 설명된다. 프랑스 교회는 본래 수정되지 않은 칼뱅주의 예정 교의를 채택하였다. 프랑스 개신교회의 사색하는 많은 정신들이 성경에 대한 상식적 해석에 보다 부합하는 더 온건한 교리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17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교회에서 논쟁과 분열이 일어났다. 스당, 그리고 후에 소뮈르의 스코틀랜드인 신학 교수였던 존 캐머런(John Cameron)은 절제된 선택(election) 체계를 옹호하였으며, 따라서 프랑스 신학자 아미로, 플라케우스, 파종이 그 열매를 대중이 처음 받아들인 그대로는 즐기지 않을 나무를 가지치기하는 데 그들의 능숙한 손을 시험하였다는 것은 특별히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정(PREDESTINATION) 항목을 보라*. *파종주의*의 가장 유능한 옹호자들 가운데는 이자크 파팽(Isaac Papin, q.v.), 랑팡(Lenfant), 알릭스(Alix), 뒤 비달(Du Vidal), 그리고 많은 다른 이들이 있었다. 파종이 저술한 50편의 저작 가운데 그는 단 세 편만을 출판하였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관한 설교(Sermon on 2 Corinthians 3:17)*(Saumur, 1666), 그 교리는 이자크 파팽에 의하여 *파종주의*라는 이름으로 보다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 *법적 선례에 대한 검토(An Examination of the Legal Precedents)*(*P. 니콜(P. Nicole)의 것*)(q.v.)(Orleans, 1673, 2권); 로마 가톨릭교도(Romanists)에 맞선 개신교 신앙의 탁월한 변호이다: — *목회적 부름에 관한 논평(Remarks on the Pastoral Call)*(Amsterdam, 1685). 파종의 교리적 견해는 특히 개혁주의 측에서 클로드(Claude)와 쥐리외에 의하여 능숙하게 반박되었으니, *Traite de Ta Nature et de la Grace, ou de Concours general de la Providence, et du Concours particulier de Grace effcace, contre les nouvelles hypotheses de M. P.[ajon] et de ses Disciples*(Utrecht, 1687); 또한 레이데커(Leydecker)와 스판헤임(Spanhelm)에 의하여; 루터교(Lutheran) 측에서는 발렌틴 에른스트 뢰셔(Val. Ernest Lischer)에 의하여(*Exercitatio Theol. de Claudii Pajonii ejusque Sectatorbus quos Pajonistas vocant Doctrina et Fatis*[Lips. 1692]). 그의 개인적 견해와 개혁주의 교회의 일반적 교의 체계 사이의 관계,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에서 그것의 의의에 관하여는 다음을 보라: Zeller의 *Theol. Jahrb.* 1852, 1853; Schweizer, *Centraldogmen*, ii, 564 이하; Ebrard, *Dogmatik*, i권, §43; Gass, *Dogmengesch.* ii, 359 이하; Dorner, *Gesch. d. prot. Theol.* p. 448 이하; Frank, *Gesch. d. prot. Theol.* ii, 49 이하. 또한 다음을 보라: Schriickh, *Kirchengesch. s. d. Ref* 7:722 이하; De Chaufepie, *Dictionnaire historigue*, s.v.; Herzog, *Real-Encyklopadie*, 10:775-778. 파종, 루이-에자이(Pajon, Louis-Esaie)는 같은 가문의 일원으로, 1725년 5월 21일 파리(Paris)에서 태어나 1796년 7월 24일 베를린(Berlin)에서 죽었다. 그는 라이프치히(Leipsic)와 베를린의 프랑스 교회들을 섬겼으며, 종교회의(consistory)의 고문이 되었다. 그는 보주브르(Beausobre)의 *종교개혁사(Hist. of the Reformation)*를 편집하였으며, 겔러트(Gellert)의 *도덕 교훈(Moral Lessons)*을 번역하였다(Leips. 1772, 2권). 다음을 보라: Hoefer, *Nouv. Biog. Generale*, s.v.
PAJONISM Pajonism
파조니즘(Pajonism) *파종, 클로드 보라SEE PAJON, CLAUDE*.
PAKINGTON, DOROTHY Pakington, Dorothy
패킹턴, 도로시(Pakington, Dorothy)는 박학한 영국의 여성 저술가로, 실천적인 종교적 주제에 관해 많이 썼으며, 17세기 중엽 무렵에 활동하였다. 그녀는 코번트리 경(lord Coventry)의 딸이자 존 패킹턴 경(Sir John Pakington)의 아내였다. 그녀는 1679년에 죽었다. 그녀는 그 경건함과 덕행으로 동시대인들에게 높이 존경받았다. 그녀는 *The Gentleman's Calling(신사의 소명):— The Lady's Calling(숙녀의 소명) *(옥스퍼드, 1675, 8절판):— *The Government of the Tongue(혀의 다스림):— The Christian's Birthright(그리스도인의 타고난 권리): — The Causes of the Decay of Christian Piety(그리스도인의 경건이 쇠퇴하는 원인): — The Art of Contentment(만족의 기술) *(프리든[Pridden] 편, 1841, 소형 8절판)을 썼다. 그녀가 죽을 무렵에는 *The Government of the Thoughts(생각의 다스림)*라는 제목의 저작에 매여 있었다. 이 부인은 *The Whole Duty of Man(인간의 온전한 본분)*의 저자로도 지목되어 온 많은 이들 가운데 하나이다. 힉스 박사(Dr. Hicks)는 자신의 *Anglo Saxon Grammar*를 존 패킹턴 경에게 헌정하는 글에서 이러한 인상을 지지하며, 제임스 매킨토시 경(Sir James Mackintosh)(*Edinb. Rev.* 14, 4, n.)은 이 설을 채택한다. 이 주제는 앨리본(Allibone), *Dict. of Brit. and Amer. Authors, *2, 803의 "호킨스, W. B.(Hawkins, W. B.)" 항목에서 어느 정도 길게 다루어진다.
PAKKUOTH Pakkuoth
파쿠오트 (Pakkuoth) *박(GOURD) 항목을 보라*.
PAKUDA, BACHJA BEN-JOSEPH, IBN Pakuda, Bachja Ben-joseph, Ibn
파쿠다, 바흐야 벤요세프, 이븐 (Pakuda, Bachja Ben-Joseph, Ibn) 저명한 유대인 도덕가로, 주후(A.D.) 1050년에서 1100년 사이에 살았다. 그의 개인적 역사에 관하여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으니,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어떻게 어디서 교육받았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아랍어로 된 한 저작의 저자로 구별되는데, 그것은 히브리어로 הִלּבָבות חוֹבוֹת*, 마음의 의무들(The Duties of the Heart)*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종의 시적 산문으로 쓰인 윤리적 논고이나, 실제 운율보다는 그 문체와 언어의 숭고함 때문에 시로 여겨진다. "단순한 합법성보다 내면의 도덕성에 더 큰 강조점을 두는" 이 저작은 요셉 킴히(Joseph Kimchi, q.v.)와 랍비 예후다 벤사무엘 이븐티본(Jehuda ben-Samuel ibn-Tibbon, q.v.)에 의하여 두 차례 히브리어로 번역되었고, 그 후 다른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거의 모든 유대인 서재에 자리를 잡았다. 바흐야의 체계에는 시도 없고, 이상주의도 없고, 신지학(theosophy)도 없다. 그는 법률가이자 재판관이며, 실제적인 법학자로서, 그에게는 인간과 그의 행복이, 이승과 저승에서, 철학적 사색의 대상이다. 그는 신학에서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원천들, 곧 성경과 전통의 인정에서도 예외 없이 정통적이며, 그 둘 가운데 어느 것도 어떤 비판에 부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 두 정보의 원천에 세 번째 것, 곧 이성(reason)을 더하는데, 그는 그것을 맨 앞에 놓으며, 그리하여 이성과 성경과 전통을 수단으로 하여 "영적 의무의 수행이 율법에 대한 순종에서 나타나는 경건에 대한 단순한 부가적 잉여가 아니라, 모든 율법의 기초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시인으로서 바흐야는 특히 "자기 성찰(Self-examination)"에 관한 시, בִּקָּשָׁה 또는 שַׁיר תּוֹכָחָה로 유명한데, 그 첫머리에서 따와 בָּרכַי נִפשַׁי라고도 불리며, 일반적으로 *마음의 의무들(Choboth ha-Lebaboth)*의 판본들에 부록으로 붙어 있고, 아랍 *말카지미(Malkazimi)*의 양식, 곧 운율 없는 압운으로 쓰였다. 이 시는 아스카랄리(Ascaralli)와 알라트리니(Alatrini)에 의하여 이탈리아어로, 작스(Sachs)와 M. E. 슈테른(M. E. Stern)에 의하여 독일어로, 그리고 M. 야스트로 목사(Rev. M. Jastrow)에 의하여 *유대인 색인(Jewish Index)*(Phila. 1872년 10월과 11월)에서 영어로 번역되었다. 바흐야가 이븐게비롤(Ibn-Gebirol, q.v.)보다 앞서 살았는지, 뒤에 살았는지, 아니면 동시대에 살았는지는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게비롤이나 그의 책들 가운데 어느 것도 결코 언급하지 않으니,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가 게비롤보다 앞서 살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다음을 보라: Gratz, *Geschichte d. Juden*, 6:43 이하; Braunschweiger, *Geschichte d. Juden in den roman. Staaten*, p. 51 이하; Jost, *Gesch. d. Judenth. u. s. Sekten*, ii, 412 이하; Furst, *Bibl. Judaica*, i, 76 이하; De Rossi, *Dizionario storico degli autori Ebrei*(Hamburger의 독일어 번역), p. 54 이하; Jellinek, *Introduction to the Chobot ha-Lebaboth*(Leipsic, 1849); Stern, *Germ. Transl. of the Chobot ha-Lebaboth*, 주해 주석 포함(Vienna, 1866); Ueberweg, *Hist. of Philosophy*, 1, 418, 420, 426; Munk, *Esquisse historique de la Philosophie chez les Juifs*; Sachs, *Religiose Poesie der Juden in Spanien*, p. 63 이하, 273 이하; Etheridge, *Introduction to Hebr. Literature*, p. 247 이하; Finn, *Sephardim*, p. 177; Lindo, *Hist. of the Jews in Spain and Portugal*, p. 61; Da Costa, *Israel and the Gentiles*, p. 290; Wise, *Lecture on Bachja*(*The Israelite*[Cincinnati], 1872년 12월호 수록); Zunz, *Literaturgeschichte der synagogalen Poesie*, p. 201; 같은 저자, *Additamenta ad Catal. codd. Hebr. Bibl. Sen. civ.*(Lips.), p. 318; Eisler, *Vorlesungen über die jüdischen Philosophen des Mittelalters*(ibid. 1876), 1, 43 이하; 그러나 특히 Kaufmann, *Die Theologie des Bachja ibn-Pakudah*(ibid. 1874). (B. P.)
PAL, KRISHNU Pal, Krishnu
팔, 크리슈누(Pal, Krishnu)는 인도 세람포어(Serampore)에서의 첫 그리스도인 개종자로, 지난 세기 말엽에 조상들의 신앙을 버리고 본토인 그리스도인 목사가 되었다. 그는 많은 개종자를 얻었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히 그리고 승리에 차서 죽었다. 그는 "오 내 영혼아, 더 이상 잊지 말지어다(O thou, my soul, forget no more)"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찬송가의 저자로 그리스도교 세계에 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1801년에 조슈아 마시먼(Joshua Marshman)이 번역하였다. (S. S.)
PALACE Palace
궁전(Palace) (흠정역[A.V.]에서 통상 אִרמוֹן, *armon *[הִרמוֹן*, ha.rmn,* 암 4:3]을 옮긴 말로, *성채(castle)*를 뜻하며 잠 18:19에서만 그렇게 옮겨졌다. 또한 일관되게 בַּירָה*, birah, 성채(citadel)*를 옮긴 말로 대상 29:1,19에 나오며, 느헤미야서·에스라서·에스더서·다니엘서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본래는 הֵיכָל, *heykal, *왕 21:1; 왕하 20:18; 시 45:8,15; 시 144:12; 잠 30:28; 사 13:22; 사 39:7; 단 1:4; 나 2:6을 옮긴 말이며, 갈대아어 הֵיכִל, *heykdl, *스 4:14; 단 4:4,29; 단 6:18은 왕궁 건축물, 특히 다른 곳에서 그렇게 옮겨진 여호와의 *성전*을 뜻한다. 덜 본래적인 용법으로는 אִפֶּדֶן, *appeden, 요새(fortress, *단 1:21); טַירָה, *tirah, *아 8:9; 겔 25:4 — 다른 곳에서 주로 그러하듯 *성채(castle)*; 또한 בַּיתָן, *bithadn, 큰 집(large house, *에 1:5; 에 7:7-8); 그리고 בֵּית, *beth, 집(house, *특정 결합어에서); 신약[N.T.]에서는 αὐλή*, *마 26:3,58,69; 막 14:54,64; 눅 11:21; 요 18:15 — 다른 곳에서 때때로 그렇게 옮겨졌듯 *뜰(court)* 또는 *홀(hall)*; πραιτώριον*, *빌 1:13 — *프라이토리움(prcetorium)* [q.v.] — 막 15:16에서 그렇게 옮겨졌다)은, 성경에서 왕의 거처의 바깥 울타리 안에 포함된 것, 곧 모든 건물·뜰·정원을 가리킨다(대하 36:19; 비교 시 48:4; 시 122:7; 잠 9:3; 잠 18:19; 사 23:13; 사 25:2; 렘 22:14; 암 1:7,12,14; 나 2:6). 신약에서 궁전(αὐλή)이라는 용어는 지체 높은 사람의 거처에 적용된다(마 26:3; 막 14:66; 눅 11:21; 요 18:15). 구체적인 언급은 헤롯(Herod)이 지은 궁전을 가리키는데, 이는 후에 로마 총독들이 차지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빌라도(Pilate) 앞에 끌려갔을 때 그가 거하던 프라이토리움(praetorium), 즉 홀이었다(막 15:16). 위에 인용된 다른 구절들은 눅 11:21을 제외하고는 대제사장의 거처를 가리킨다. 집(HOUSE) 항목 아래에 주어진 세부 사항들 — *집을 보라 SEE HOUSE *(q.v.) — 은 궁전에 대한 적절한 관념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단지 확대되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부분들의 일반적 배치와 분배는 궁전에서나 집에서나 동일하되, 다만 궁전에서는 뜰이 더 많고 더 뚜렷하게 용도가 구별되며, 건물은 더 광대하고, 재료는 더 값지다는 점만 다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있던 유다(Judah) 왕들의 궁전은 솔로몬(Solomon)이 지은 것으로,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이것이 "레바논 나무 궁(the house of the forest of Lebanon)"이라 불린 것과 동일하다고 본다. 이에 관한 몇몇 세부 사항이 왕 7:1-12에 주어져 있다. 그리고 만일 이 구절을 요세푸스(Josephus)가 같은 건축물에 대해 주는 묘사(*Ant. *v, 5)와 함께 읽는다면, 인접한 뜰들 안에 있던 장엄한 건물군이 회랑과 주랑으로 연결되고 둘러싸인 모습으로서, 그것에 대한 어렴풋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이 유대 역사가에게 우리는 또한 헤롯 궁전에 대한 설명을 빚지고 있는데,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직접적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War, *v, 4:4). 두 건물은 분명히 같은 부지, 곧 시온(Zion)의 고지를 차지하였으며, 의심할 바 없이 다윗(David)의 성채, 즉 현재 이 수도의 성채에 바로 인접하고 그것을 포함하였다. *예루살렘을 보라 SEE JERUSALEM*. "두 가지 언어 기술(記述)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고대 건물을 복원하려는 시도보다 더 어렵거나 난해한 작업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은, 한쪽 기록이 히브리어 같은 언어로 쓰였을 때 매우 가중되는데, 그 언어의 전문 용어들은 우리의 무지로 인해 가장 폭넓은 해석의 여지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기록은, 우리가 더 명확한 지식을 가진 언어로 쓰였으되, 자신이 묘사하는 건물을 결코 본 적이 없었을 사람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한 후 십삼 년 동안 세우는 데 몰두한 그 궁전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건물이어서, 성경 연구자에게 흥미롭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이 주제를 특별히 연구하였고 동방 궁전의 배치에 정통한 이들이 이 주제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성경과 관련된 다른 모든 사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사안에서도 우리의 지식이 최신 시점까지 갱신되는 것은 중요하다. 성경의 초기 판본들에서 발견되는 이 유명한 건물의 복원도들은 거의 모두 이른바 비트루비우스식(Vitruvian)인데, 곧 그 저자들에게 알려진 유일한 원리였던 고전 건축의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금세기 전반부에는 이러한 복원에 이집트식 설계 원리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더욱 성과가 적었다. 유대인들은 애굽(Egypt)과 그 안에 든 모든 것을 미워하였으며, 그들이 행하거나 심지어 생각한 모든 것은 그 종살이의 땅의 예술과 정서에 적대적이었다. [그럼에도 성전(q.v.)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많은 이집트 구조물의 상당 부분을 모방한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다른 한편으로, 니느웨(Nineveh, q.v.) 궁전들의 발굴과,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 있는 궁전들에 대한 더욱 세심한 조사는 이 주제에 큰 빛을 던져 주었다. 이전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던 많은 표현들이 이제는 명료하고 쉽게 이해되며, 비록 아직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적어도 어디서 유사 사례를 찾아야 하는지, 그리고 비록 정확한 형태를 단언할 수는 없을지라도 문제의 건물들이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는 알게 되었다." "예루살렘과 그 밖의 곳에 있던 다른 궁전들에 대해 부수적으로 언급되기는 하나, 그것들은 모두 후대의 것이며 로마 예술의 영향 아래 지어졌으므로, 성경 연구자에게는 이 궁전만큼 흥미롭지 않다. 게다가 그것들 중 어느 것도 그 배치나 세부를 동일한 정도의 명료함으로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어디에서도 묘사되어 있지 않으며, 요세푸스가 그것들을 묘사할 때 탐닉하는 수사적 미사여구를 단지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교훈도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본 항목 같은 글에서 그 해명이 필수불가결하게 될 만큼 성경 자체에 묘사된 다른 곳은 없다." *건축을 보라 SEE ARCHITECTURE*. **1. **다음은 퍼거슨(Fergusson)이 그의 *건축 편람(Handbook of Architecture), *202쪽에서 제안한, 솔로몬의 유명한 궁전 복원안을 실질적으로 그대로 옮긴 것이다. 물론 그러한 궁전의 형태나 정확한 배치가 어떠하였는지 전혀 확신할 수는 없으나, 우리에게는 열왕기에 주어지고 요세푸스에 의해 확인된 세 주요 건물의 치수가 있으므로, 이를 척도로 삼아 그 건물이 대략 150,000 내지 160,000 평방피트 가량을 차지하였음을 상당히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 그보다 적으면 명시된 수용 공간으로 충분하지 못할 것이며, 그보다 많으면 우리가 가진 기록으로 보나 그것이 자리한 성읍의 크기로 보나 정당화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각 변 400피트의 정사각형이었는지, 아니면 첨부된 도면(그림 1)에 표현된 대로 약 550피트 × 300피트의 직사각형이었는지는 언제나 다소 추측의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여기 채택된 형태는 부지의 요구뿐 아니라 알려진 부분들의 배치에도 더 잘 들어맞는 듯하다. **(a.) **궁전 안에 자리한 주요 건물은, 모든 동방 궁전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사(國事)와 알현(謁見)의 큰 홀이었으니, 여기서는 "레바논 나무 궁(House of the Forest of Lebanon)"이라 불린다. 그 치수는 길이 100규빗, 곧 150피트였고, 너비는 그 절반인 75피트였다. 성경에 따르면(왕 7:2) 그것은 *"네 *줄의 백향목 기둥이 있고, 기둥 위에 백향목 들보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절에는 "마흔다섯 기둥 위, 곧 한 줄에 열다섯씩 놓인 들보 위에 백향목으로 덮였더라"고 덧붙여진다. 만일 묘사가 거기서 그쳤다면 이는 쉽게 설명될 것이며, 요세푸스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는 후에 성전의 *왕의 주랑(Stoa basilica)*을 묘사할 때처럼, 이 홀이 네 줄의 기둥으로 이루어지되 세 줄은 독립해 서 있고 넷째 줄은 외벽에 붙박여 있는 것으로 분명히 여겼다(*Ant. *11:5). 그리고 궁전 홀의 천장이 코린트식(Corinthian)이었다는 그의 표현(*Ant. *7:5, 2)은, 당시에는 아직 고안되지 않았던 그 *양식*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시대에 코린트식 케쿠스(Corinthian cecus)라 불리던 것, 곧 채광층(clerestory)을 가진 홀의 방식대로였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요세푸스처럼 이러한 시사(示唆)들로 만족한다면, 그 홀의 단면은 분명히 그림 2의 A에 보인 대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계속하여(4절) "창문이 세 줄로 있어 삼 층으로 광선이 서로 마주 대하였더라"고 말하고, 다음 절에서 "광선이 삼 층으로 서로 마주 대하였더라"고 되풀이한다. 요세푸스는 그것이 θυρώμασι τριγλύφοις, 곧 세 부분으로 나뉜 창문들로 채광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이 난점을 피해 가는데, 만일 성경이 그것에 관해 매우 구체적이지만 않았다면 이는 극히 그럴듯한 묘사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림 2의 B에 보인 것과 같은 어떤 배치를 채택할 수 있다. 요컨대 퍼거슨은 *채광층(clerestory)*을 제안하는데, 그는 요세푸스가 이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며, 성경 묘사가 요구하는 세 줄의 기둥을 보여 준다. 이 이론에 따르면 채광층 외에도 벽의 처마돌림띠 아래에 한 줄의 개구부가 있었고, 그다음 한 줄의 열린 문간이 있어서, 이로써 성경 묘사가 요구하는 세 개의 개구부를 이루게 된다. 더 더운 기후라면 첫째 배치(그림 2, A)가 더 그럴듯하겠으나, 예루살렘처럼 노출되고 때로는 매우 추운 부지에서는 궁전의 큰 홀이 한쪽이라도 영구히 열려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이 홀을 복원하려 할 때 또 하나의 난점은 기둥 수가 홀수라는 데서("한 줄에 열다섯") 생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마지막 이론(그림 2, B)을 채택한다면, 양 방향 모두 중앙에 한 줄의 기둥이 놓이게 된다. 퍼거슨은 평면도에 보인 대로 그것이 한쪽 끝에서 벽으로 막혀 있었다고 보는데, 그러면 열다섯 기둥에 열다섯 칸이 주어지고, 따라서 홀의 더 긴 치수의 중앙에 보좌가 놓일 수 있는 중심 공간이 마련된다. 만일 첫째 이론을 채택한다면, 보좌는 끝에 놓였거나 더 긴 변의 중앙에 놓였을 수 있으나, 동방 궁전의 배치에 관해 우리가 아는 바로 판단하건대 후자가 옳은 위치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다. **(b.) **방금 묘사한 건물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재판의 홀 또는 현관(7절)인데, 요세푸스는 이것이 큰 홀의 더 긴 변의 중앙 맞은편에 자리하였다고 분명히 우리에게 말한다(*Ant. *8:5, 2). 이 시사는 덜 주저하며 받아들여도 좋은데, 그러한 위치는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유사한 홀의 위치와 동일하며, 코르사바드(Khorsabad)에 있는 한 홀의 추정 위치와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 치수는 길이 50규빗, 너비 30규빗이었고(요세푸스는 적어도 한 방향으로 30이라 말한다), 그 배치는 우리가 가진 묘사들을 앗수르(Assyria)와 페르시아의 유적들과 비교함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퍼거슨은 그것이 중앙에 네 기둥으로 받쳐졌고 세 입구를 가졌을 것으로 본다. 주된 입구는 거리에서 열려 재판석을 마주하였고, 둘째 입구는 궁전 안뜰에서 열려 그곳을 통해 의원들과 국가 관리들이 들어올 수 있었으며(그림 1, M 방향), 셋째 입구는 궁전에서 열려 위에 보인 대로(그림 1, N 방향) 왕과 그 권속을 위해 마련되었다. **(c.) **셋째 건물은 단지 "현관(the Porch)"이라고만 불린다. 그 치수는 성경 본문에 모두 주어지지 않았다. 요세푸스는 그 건축을 묘사하지 않으며, 우리는 히브리어 건축 용어들의 동의어에 대한 무지 때문인 듯, 성경에 담긴 묘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용도는 의심스럽게 여겨질 수 없으니, 그것은 동방 궁전의 필수불가결한 부속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전의 일상적 집무 장소이자 접견실 — 객실(Guesten-Hall) — 로서, 거기서 왕은 일상적인 방문객을 맞이하고, 큰 국사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기 앉아 나라의 사무를 처리하였다. **(d.) **이 뒤에는, 우리가 듣기로, 정원과 분수로 꾸며지고 그늘을 위해 회랑으로 둘러싸인 안뜰이 있었다. 그리고 이 밖에도 시종들과 호위병들의 거처를 위한, 또 솔로몬의 경우에는 그의 후궁 삼백 명을 위한 다른 뜰들이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이 평면도(그림 1)에 언어적 묘사로 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명료하게 표시되어 있다. **(e.) **이 궁전과는 별개이되 요세푸스가 우리에게 말하는 대로 재판의 홀에 부속된 것으로, 바로(Pharaoh)의 딸의 궁이 있었다. 그녀는 너무도 자랑스럽고 중요한 인물이어서 후궁의 여인들과 한데 묶일 수 없었고, 자신의 거처를 필요로 하였다. **(f.) **요세푸스가 언급하는 또 하나의 건물이 더 있으니, 거대한 기둥들로 받쳐지고 재판의 홀 맞은편에 자리한 *나오스(naos)* 또는 신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읍 안 궁전 앞쪽 바깥에 있었을 수도 있으나, 평면도에 보인 대로 큰 뜰의 중앙에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퍼거슨은,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이 하나뿐이었고 그것은 골짜기 건너편에 자리하였으므로, 그것이 통상적 의미의 신전이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닫집(baldachino)으로 덮인 *제단(altar)*이었을 수 있다. 이는 묘사의 요구는 물론 사례의 개연성에도 똑같이 부합할 것이며, 그래서 위 평면도(그림 1 "제단")에 그렇게 표현되었다. 만일 궁전의 부지와 배치가 위에 시사된 대로였다면, 두 개의 큰 정문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하나는 성읍에서 큰 뜰로 통하는 것으로 N에 표시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성전과 왕의 정원으로 통하는 것으로 N에 있다. 이 마지막 것은, 퍼거슨이 추정하기로, 당시 다윗 성(City of David)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던 곳, 그리고 후에 다리가 성전을 성읍 및 궁전과 이은 곳에 자리하였다. 니느웨에서의 근래 발견들은 이 궁전의 많은 건축적 세부 사항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그것들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거의 전적으로 설명 불가능하였다. (*Jour. of Sac. Lit. *1852년 1월, 422쪽 참조.) 예를 들어 우리가 듣기로, 궁전 홀들의 벽은 세 층의 돌 — 다듬고 닦은, 보기에 색이 다른 대리석들 — 로 징두리널을 댔고, 그 위에 정교하게 잎사귀와 꽃의 모양을 새긴 넷째 층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위로 벽은 회칠하고 색칠한 아라베스크 무늬로 꾸며졌다. 니느웨에서는 벽이 이것들처럼 약 8피트 높이까지 징두리널을 댔으되 그 나라 특유의 산물인 설화석고(alabaster)로 하였고, 이것들은 위쪽의 채색된 공간과 건축적 띠로 구분되었다. 실제 차이는, 앗수르인들이 사람과 짐승의 조각 표현에 탐닉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이제 가져온 조각들로 보나, 에스겔서(23:14)의 구절 — 거기서 그는 "벽에 그린 사람들, 곧 주홍으로 그린 갈대아 사람들의 형상" 등을 묘사한다 — 으로 보나 우리가 아는 바이다. 이러한 장식 방식들은, 유대인들이 애굽에 거주한 결과로, 그리고 그로 인한 그들의 다형적 우상숭배 성향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둘째 계명에 의해 그들에게 금지되었다. 또 어느 정도의 차이는, 부드러운 설화석고가 얕은 돋을새김(bass-relief)에는 훌륭히 어울렸으나 요세푸스가 묘사한 것 같은 날카롭고 깊이 새긴 잎사귀 조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한편 유대인들이 쓴 단단한 재료는 그들이 장식을 한 줄의 띠로만 한정하도록 만들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궁전들의 장식에 상당량의 색채가 사용되었을 개연성이 크니, 솔로몬의 건물들에서 금과 금박이 끊임없이 언급되는 점, 그리고 금은 색채로서 단독으로 쓰이기 어렵다는 점에서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도 그러하다. "나를 위하여 넓은 집과 큰" — 곧 통풍이 잘되는 — "방들을 짓고 창문을 내며, 백향목으로 천장을 만들고 주홍으로 칠하리라"(렘 22:14). 또한 덧붙일 수 있는바, 동방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모든 건물이 내부를 색채로 꾸미는데, 대개는 세 원색을 그 강렬함을 다하여 쓰되, 가장 조화로운 결과를 내도록 균형을 맞춘다. *앗수르를 보라 SEE ASSYRIA*. **2. **테니우스(Thenius)가 *구약 주석 편람(Exeg. Handb. zum. A. T.)*에서 제안한 구상은 사뭇 다른데, 다음은 그것을 실질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a.) **이 안에서는, 바깥에서부터 들어가면서, 첫 부분이 "레바논 나무 궁"이었으니, 그렇게 불린 것은 아마도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알현실 또는 국사의 홀로 쓰였고(요세푸스 *앞의 책*), 값진 병기로 둘러 걸려 있었다(왕 10:16-17). 타르굼(Targum)은 이를 "왕의 피서궁"이라 부르는데, 아마도 그 크기와 높은 부지와 트인 구조가 그것에 확보해 준 상쾌한 공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일종의 겨울 정원 또는 온실이었다고 생각하나, 이는 개연성이 덜하다. 그 비례 — 길이 100규빗, 너비 50규빗, 높이 30규빗 — 는 내부 치수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홀의 면적은 성전의 면적보다 컸으며, 둘의 높이는 같았다(6, 2). 견고한 석조 벽이 목조부를 둘러쌌다(9절). 이 홀의 구역은 네 줄의 백향목 기둥으로 둘러싸였다. 2절의 진술은 흔히 네 직선 열의 기둥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가정에서 큰 곤혹은 그 뒤의 진술(3절), 곧 마흔다섯 기둥, 한 줄에 열다섯이 있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만일 홀을 세로로 가르는 4열과 그 너비를 가르는 15열이 있었다면, 기둥은 모두 60개여야 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어떤 이들은, 70인역(Sept.)을 제외한 모든 사본과 모든 역본에 어긋나게, 자의적으로 *넷 대신 셋으로 *읽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טוֹר는 직선상의 한 열을 뜻하지 않고 둘러싸거나 에워싸는 한 열을 뜻한다(비교 6:36; 7:18, 20, 24, 42; 겔 46:23). 그리하여 네 줄의 기둥은 홀을 빙 둘러서, 벽 안쪽에 네 통로를 이루었으니, 곧 불가타역(Vulgate)이 그 구절을 옮긴 대로 "quatuor *deambulacra *inter columnas cedrinas"(백향목 기둥들 사이의 네 산책로)이다(그림 3). 이 기둥들 위에 백향목 들보가 얹혀 정면에서 벽까지 걸쳐졌고, 위층을 받치는 든든한 받침을 이루었다. 이 위층은 곁방들 또는 회랑들(צלָעוֹת, 비교 6:5, 8)로 이루어졌으며, 3절의 진술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것들의 수와 배열이다. "그리고 들보 위에 있는 방들이 마흔다섯 [개]이니, 한 줄[둘레]에 열다섯씩 백향목으로 입혔더라"(그림 4, *a a*). 이것들은 세 줄로 들보(שׁקֻפַים, 흠정역 "창문", 그러나 그 낱말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로 지붕을 이었으니, 곧 세 층의 회랑이 있었다. 그리고 이 안에 *전망구(מֶחֵָזה; Sept. χῶρα)*가 삼 층으로 서로 마주 대하였으니, 곧 세 층의 각 방이 안쪽으로 트인 개구부를 가져 맞은편 방의 대응하는 개구부를 마주하였다(그림 4, *b b*). 회랑의 여러 칸은 문을 통해 서로 통하였다. 이것들도, 또 창문들도(70인역은 5절에 χῶραι를 가져, 현재의 독법이 הִמּזוּזוֹת인 곳에서 그것이 הִמֶּהזֵוֹת로 읽었음을 보여 주는데, 전자로는 뜻을 이룰 수 없다), 위에 들보를 얹은 네모꼴이었다. 이 회랑들은 아마도 성전에서처럼(6, 8) 외벽 안의 나선 계단으로 올라갔을 것이다(그림 3과 4, *d d*). 이 묘사로부터 우리가 "레바논 나무 궁"에 대해 형성하는 관념은 이러하다. 중앙이 하늘로 트인 큰 홀로서, 그 바닥은 네 줄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산책로를 이루고, 그 위에는 안쪽으로 트인 세 층의 회랑이 있어, 각 층이 극장의 칸막이 좌석처럼 열다섯 칸으로 나뉘되 서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건물 전체의 높이가 30규빗이었으므로, 우리는 이를 나누어 받치는 기둥에 8피트, 회랑에 18피트, 회랑의 들보와 바닥에 4피트를 배정할 수 있다. 이렇게 그려진 건물은 요세푸스의 묘사, 곧 Κορινθίως ἐστεγασμένος에 부합하는데, 그가 뜻하는 바는 그것이 코린트 양식의 건축이었다는 것이(카일[Keil]) 아니라, 코린트식으로 지어졌다는 것이니, 곧 무거운 처마도리를 얹은 한 줄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홀로서, 그 위에 벽까지 걸친 들보가 얹히고 그것이 바닥을 받치며, 그 바닥이 다시 더 짧은 기둥들을 받치고 그 사이에 창문이 있어 전체가 *하늘로 트인(hypoethral)* 구조였다는 것이다(*Vitruv. *6:3, 1). **(b.) **이제 우리가 이 건물(그림 5, *B*)을 한 뜰(*A*)의 한가운데에 세로로 놓인 것으로 본다면, 기둥들의 주랑(*D*) 배치를 이해하기 쉬운데, 그 길이는 건물의 너비와 같았다(6절). 이것들은 건물 옆을 따라 뻗은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어, 길이 50규빗 너비 30규빗의 주랑을 이루며 왕의 거처로 인도하였다. 이는 현관 또는 입구 홀로 끝났는데, 이는 기둥들과 עב, 곧 문지방 또는 층계참(흠정역 "두꺼운 들보"; 타르굼 סקופתא, *문지방[limen]*)을 가졌다. 이로써 보좌실 또는 재판의 홀(*E*)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었으니, 이 홀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백향목으로 입혀졌다(הִקַּירוֹת [이것이 불가타역과 시리아역이 따른 독법으로, 명백한 오류인 둘째 הִקִּרקָע 대신이다], 7:7). 그다음에는 보좌실 뒤의 또 다른 뜰(F)에 왕의 거처가 있었고, 이것의 일부로 왕비의 거처가 있었으니, 이는 후궁이었을 수도 아닐 수도 있으며 (아마도 뒷)부분을 이루었다. G 공간은 추측으로 덧붙인 것으로, 궁전의 부속실들과 아마도 "왕의 옥"을 담은 뜰을 위한 것이다. 이 모든 건물은 외부가 다듬은 돌로 되어 있었고, 전체가 뜰을 에워싸는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였다. **3. **또다시 사뭇 다른 것은 페인 교수(Prof. Paine)가 그의 *솔로몬의 성전(Solomon's Temple) *등에서 제안한 복원안인데, 그 구상의 간략한 개요를 여기 덧붙인다. 그는 그 구조물이 성전의 북쪽, 그 구역에 바로 인접한 곳, 곧 후에 안토니아(Antonia) 망대가 서게 된 곳에 자리하였다고 주장하며, 이 입장의 증거로 열왕기하 11장을 든다. 그는 전체 구조물이 하나였으며, 궁전이 다른 곳에서 "레바논 나무 궁"이라 불린 바로 그것이라고 본다. 그는 기둥들을 건물 바깥에, 높이가 다른 연속된 열들로 분포시켜, 벽을 계단식(terrace)으로 받치게 한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단 한 층이되, 외부로는 여러 층의 외관이 있고, 안에는 현대식 관람석의 단처럼 늘어선 일련의 좌석단이 있다. 이 전체 구상은 그 단순함이 두드러진다. 이는 솔로몬의 성전 구조에 대한 그 저자의 관념과 전적으로 일치하며, 다른 모든 제안된 복원안과의 본질적 차이는 건물이 위로 올라가며 점차 커진다는 점이다. *성전을 보라 SEE TEMPLE*.
PALACE (2) Palace (2)
궁(2) (Palace (2)) 교회 용어에서 이 말은 주교(bishop)의 집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노르만 침공(Norman invasion) 이전에는 *민스터하우스(minster-house)*라 불렸고, 그 안에서 주교가 그의 성직자들의 가족과 함께 거주하였다. 치체스터(Chichester)와 헤리퍼드(Hereford)에서는 그것에 문루(gatehouse)가 갖추어져 있었다. 웰스(Wells)에서는 해자가 둘러쳐지고 성벽으로 방어된다. 더럼(Durham)에서는 그것이 실제 성이다. 링컨(Lincoln)과 세인트 데이비즈(St. David's)에서는 그것이 다만 웅장한 폐허로만 존재한다. 예배당들은 요크(York), 윈체스터(Winchester), 치체스터, 더럼, 웰스, 솔즈베리(Salisbury)에 남아 있다. 큰 홀(hall)은 치체스터에 보존되어 있고, 우스터(Worcester)에는 일부 부분이 남아 있다. 일리(Ely)에는 매우 완전한 예가 있다. 주교들은 대부분 스트랜드(Strand)를 따라 도시 저택을 두었으며, 또한 판햄 로즈(Farnham Rose), 하틀베리(Hartlebury), 비숍스 오클랜드(Bishop's Auckland)와 같은 수많은 시골 저택도 두었다. 램버스(Lambeth)와 일리 플레이스(Ely Place, 홀번Holborn)의 예배당들, 피터버러(Peterborough)와 체스터(Chester)의 수도원장 저택들은, 종교개혁(Reformation) 때 궁으로 전환되었는데, 바이외(Bayeux), 상스(Sens), 누아용(Noyon), 보베(Beauvais), 오세르(Auxerre), 모(Meaux), 랑(Laon)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고대의 부분들을 간직하고 있다. 다음을 보라: Walcott, *Sacred Archceol.* s.v.
PALADINI, FILIPPO Paladini, Filippo
팔라디니, 필리포(Paladini, Filippo)는 하케르트(Hackert)가 칭찬한 이탈리아 화가로, 1600년 무렵에 활동하였으며, 시라쿠사(Syracuse)·팔마라(Palmara)·카타니아(Catania) 및 다른 곳의 교회들을 위해 여러 작품을 제작하였다. 란치(Lanzi)는 이 화가가 필리포 팔라디노(Filippo Palladino)(q.v.)와 동일 인물이라고 본다.
PALADINI, LITTERIO Paladini, Litterio
팔라디니, 리테리오 (Paladini, Litterio) 이탈리아 화가로, 하케르트(Hackert)에 따르면 1691년에 태어났다. 그는 로마(Rome)에서 세바스티아노 콘카(Sebastiano Conca) 아래에서 공부하였으며, 그 후 고대 모범들에 대한 부지런한 연구로 스스로를 향상시켰다. 메시나(Messina)로 돌아온 뒤에 그는 몬테 베르지네(Monte Vergine) 교회를 위한 여러 상당한 프레스코 작업에 고용되었다. 이 작품은 웅장한 규모이며, 그 도안의 정확성으로 높이 칭송받는다. 그는 1743년 메시나를 황폐하게 한 대역병으로 죽었다.
PALAEOGRAPHY Palaeography
고문서학(Palaeography) (그리스어 παλαιός*, 옛*, 그리고 γραφή*, 글쓰기*), 고대 문서(古文書)의 학문. 이는 단지 그것을 읽는 기술뿐 아니라, 그 모든 정황에 대한 비평적 지식 — 만일 그것이 연대가 없는 경우 그 연대를, 그리고 어떠한 형식적 인증도 없는 경우 그 진정성을 가려내는 데 도움이 될 — 까지 포괄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고문서학자는 다음을 알아야 한다. 곧 글쓰기에 사용되어 온 나무껍질·잎·가죽·종이 등 갖가지 재료, 통용되어 온 갖가지 글쓰기 방식과 그것들이 겪은 변화, 여러 시대에 사용되어 온 문서 인증의 갖가지 형식 — 인장·인새(印璽)·봉인(cachet)·서명·표제(superscription)·말미서명(subscription)·증명(attestation) 등, 그가 다루는 문서의 언어의 문법·어휘·철자법이 거쳐 온 갖가지 국면, 그리고 그 문서가 속한다고 표방하는 시대와 나라의 역사·법률·제도·문학·예술에 대해 경우에 따라 다소간의 지식이다. 고문서학은 박학한 프랑스 베네딕트회 수사 장 마비용(Jean Mabillon)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De Re Diplomatica*는 1681년에 1절판 1권으로 처음 출간되고 1709년에 재간되었으며 1789년에 다시 2절판 2권으로 나왔는데, 여전히 아마도 이 주제에 관한 가장 뛰어난 저작일 것이다. 생 모르(St. Maur)의 베네딕트회 수사들의 *Nouveau Traite de Diplomatie *(파리, 1750-1765, 4절판 6권) 및 M. 나탈리 드 와일리(Natalis de Wailly)의 *Elements de Paleographie *(파리, 1838, 4절판 2권)와 더불어, 이는 프랑스 고문서학의 큰 권위서이다. 영국 고문서학은 애슬(Astle)의 *Origin and Progress of Writing *(런던, 1803)에서 아마도 덜 호의적으로 대표되며, 스코틀랜드 고문서학은 앤더슨(Anderson)과 러디먼(Ruddiman)의 *Diplomata Scotire *(에든버러, 1739)에서 그러하다. 무라토리(Muratori)는 그의 대작 *Antiquitates Italicce Medii Evi*의 제3권에서 이탈리아 고문서학을 다룬다. 그리고 같은 주제에 관한 후대의 저작들 가운데는 마리노 마리니(Marino Marini)의 *Diplomatica Pontificia *(로마, 1841)를 들 수 있다. 그리스의 고문서학은 몽포콩(Montfaucon)의 *Palctographia Grceca *(파리, 1708)에 예시되어 있다. 스페인 고문서학은 돈 C. 로드리게스(C. Rodriguez)의 *Biblioteca de la Polygraphia Espaiola *(마드리드, 1738)에서 연구할 수 있다. 독일 고문서학에 관한 저작들로는 에카르트(Eckard)의 *Introductio in Rem Diplomaticam *(예나, 1742), 호이만(Heumann)의 *Commentarii de Re Diplomatica *(뉘른베르크, 1745), 발터(Walther)의 *Lexicon Diplomaticum *(괴팅겐, 1745), 그리고 코프(Kopp)의 *Palceographia Citica *(만하임, 1817)를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히브리어 고문서학은 게제니우스(Gesenius)가 그의 *Geschichte der HebrSischen Sprache und Schrift *및 다른 저작들에서 정교하게 다루었다. 도이치(Deutsch), *Literary Remains, *153쪽 이하를 보라. 고문서학 전반에 관한 대작 — 이 종류로는 이제껏 출간된 가장 호화로운 저작들 중 하나 — 은 M. J. B. 실베스트르(Silvestre)의 *Paleographie Universelle *(파리, 1839-1845, 1절판 5권)이다. *팔림프세스트를 보라, 글쓰기를 보라 SEE PALIMPSEST, SEE WRITING*.
PALAEOLOGUS Palaeologus
팔라이올로고스(Palaeologus)는 한 저명한 비잔틴 가문의 이름으로, 역사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대략 *11세기 무렵이며, 그 대표자들 중 많은 이가 중세의 교회사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 가문은 *미카엘 팔라이올로고스(Michael Palceologus)*(q.v.)의 대(代)에 황제의 존위에 이르렀다. *동방 교회를 보라 SEE EASTERN CHURCH*.
PALAESTINA Palaestina
팔라이스티나(Palaesti'na) (출 15:14; 사 14:29,31). *팔레스타인을 보라 SEE PALESTINE*.
PALAETYRUS Palaetyrus
팔라이티로스(Palaetyrus) *두로를 보라 SEE TYRE*.
PALAFOX, JUAN DE Palafox, Juan De
팔라폭스, 후안 데(Palafox, Juan De)는 스페인의 고위 성직자로 신학 저술가로 이름났으며, 1600년에 아라곤(Aragon) 왕국에서 태어났다. 한 저명한 가문의 후예이며 살라망카(Salamanca) 대학교의 뛰어난 학자였던 그는 펠리페 4세(Philip IV)에게 부름을 받아 "전쟁 위원회(commission of war)"의 한 자리에, 그 후에는 "인도 위원회(commission of the Indies)"의 같은 직위에 올랐다. 그는 조금 뒤에 성직(聖職)을 받아들였다. 왕은 1639년에 그를 멕시코(*Mexico*)의 푸에블라데로스앙헬로스(Puebla-de-los-Angelos) 주교로 임명하며 광범위한 행정 권한을 주었다. 그 직무를 수행하는 중에 팔라폭스는 예수회(Jesuit)와 몇 차례 분쟁을 겪었다. 그는 이 다툼을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Innocent X)에게 회부하였고, 자신의 주장을 지지받고자 유럽으로 갔다. 아메리카에서의 팔라폭스의 처신에 만족한 스페인 왕은 그에게 오스마(Osma) 주교직을 주었다. 그는 곧 그 후에 죽었으며(1659년 9월 13일), 경건함으로 높은 명성을 남겼다. 17세기 말경에 그의 시복(諡福)을 위한 절차가 개시되었으나, 그 안건은 오랫동안 지연되었고, 스페인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황청은 예수회의 공언된 적에게 그 영예를 수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팔라폭스의 저작들은 1762년에 마드리드에서 열다섯 권으로 수집되어 출간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Le Pasteur de la Nuit de Noel *(*Pastor de Noche-buena*) (브뤼셀, 1655) — *성탄 전야의 목자(The Shepherd of Christmas-eve), *프랑스어로 번역됨(파리, 1676) — *Le Conquete de la Chine par les Tartares *(*타타르인에 의한 중국 정복(The Conquest of China by the Tartars)*),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로 출간됨(같은 곳, 1678); 그리고 몇몇 신비주의 논고가 있으며, 그중 일부는 르 루아(Le Roy) 신부에 의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디노나르(Dinonart), *Vie du venerable Don Jean de Palafox, Eveque d'Angelopolis *(*Col. *1767); 니콜리니(Nicolini), *History of the Jesuits, *309쪽 이하; 회퍼(Hoefer), *Nouv, Biog. Generale, s.v.*를 보라.
PALAIRET, ELIAS Palairet, Elias
팔레레, 엘리아스(Palairet, Elias)는, 고전 그리스 저자들의 용례로부터 신약의 언어를 예증하려 시도한 고전 주석가들 가운데 가장 후기에 속하는 한 사람이었으니, 이 해석 노선은 지난 세기 전반부에 대륙과 우리나라 양쪽에서 많은 저명한 학자들에게 특히 호평을 받기에 이르렀다. 벨기에 투르네(Tournay)에 거하던 프랑스 개신교 목사였던 팔레레는 1752년에 라이덴(Leyden)에서 8절판 1권으로, 신약의 여러 구절에 대한 고전적 예증의 짧은 주석을 출간하였다. 이것에 그는 *Observationes philologico-criticoe in sacros Novi Faderis libros*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주석들은 많은 학식을 드러내나, 거룩한 그리스어와 고전 그리스어 저자들의 유사성을 과장함으로써 그 학파의 결함을 함께 지닌다. 팔레레는 그 후에 그리니치(Greenwich)의 한 프랑스인 회중의 목회를 맡은 듯한데, 1755년에 런던에서 인쇄된, 훨씬 더 큰 저작의 견본 한 편을 내었으니, 이는 자신의 *Observationes*의 원칙에 따라 신약의 모든 책에 대한 연속 주석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러나 예약 구독으로 출간될 예정이던 그 저작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PALAL Palal
팔랄 (Pa'lal) (히브리어 *Palal'*, פָּלִל, *재판관(judge)*; 70인역(Sept.) Φαλάξ, 이본(v.r.) Φαλάχ, Φαλάκ, 그리고 Φαλάλ), 우새(Uzar)의 아들이며,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하는 데 도운 자 가운데 하나이다(느 3:25). 주전(B.C.) 446년.
PALAMAS, GREGORIUS Palamas, Gregorius
팔라마스, 그레고리오스(Palamas, Gregorius, Γρηγόριος ὁ Παλαμᾶς)는 14세기의 저명한 그리스 교회 인물로, 당시 축소된 비잔티움 제국의 아시아 쪽 영토에서 태어났으며, 분명히 안드로니쿠스 팔라이올로구스(Andronicus Palaeologus) 대제(大帝)의 치세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가문과 부(富)와 황제의 총애가 전망케 하였던 세속적 영달의 기회를 외면하고, 아직 매우 젊었을 때 두 형제와 함께 아토스 산(Mount Athos)의 한 수도원의 거주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셋 가운데 막내가 죽었으며, 곧이어 그 수도원의 원장이 사망하자 살아남은 두 형제는 다른 원장 아래에 들어갔다. 그들은 그와 함께 8년을 머물렀고, 그가 죽자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는 베르헤아(Berrhea) 근처의 스케테(Scete)로 물러나 그곳에 거처를 짓고, 10년 동안 전적으로 신적 관상(觀想)과 영적 수련에 몰두하였다. 그의 엄격한 생활 규율과 거처의 추위는 거의 죽음에 이를 만한 병을 일으켰다. 그곳의 다른 수도사들의 간곡한 권유로 그는 그제야 스케테를 떠나 아토스 산으로 돌아갔으나, 이 변화로도 회복에 충분하지 못하여 그는 데살로니가(Thessalonica)로 옮겨갔다(칸타쿠제누스Cantacuzenus, *History,* 2, 39). 그의 논쟁이 바를라암(Barlaam)과 더불어 시작된 것은 분명히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였는데, 그 칼라브리아(Calabria)의 수도사는 더 젊은 황제 안드로니쿠스 팔라이올로구스의 즉위(주후 1328년) 직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였고, 자신이 그리스 교회의 추종자이며 라틴 교회로부터의 개종자라고 자처하면서—그는 라틴 교회에 반대하여 여러 저술도 남겼다—황제의 호의와 후원을 얻었다. 바를라암은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비잔티움 그리스인들의 관습을 깎아내릴 기회를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거만한 기질에 아토스 산 수도사들의 거친 광신은 더할 나위 없는 소재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영적 경지를 추구하는 자들은 며칠 밤낮을 한꺼번에 처소의 한 구석에 틀어박혀, 그곳에서 자신의 생각을 모든 세속적 대상으로부터 추상해 내곤 하였다. 그들은 수염을 가슴에 괴고 눈을 자기 배에 고정하면서,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영혼의 자리가 신비한 빛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드러난다고 상상하였고, 그것을 발견할 때 황홀한 향유의 상태로 들어 올려졌다. 기번(Gibbon)이 "텅 빈 위장과 텅 빈 머리의 산물"이라고 묘사한 이 빛의 존재는 비밀로 지켜진 듯하며, 한 경솔한 수도사에 의해서만 바를라암에게 드러났는데, 칸타쿠제누스는 그 수도사가 말이 많았던 것을 두고 욕한다. 바를라암은 이 발견이 제공한 기회를 열렬히 붙잡아, 이 헤시카스트들(Hesychasts, ἡσυχάζοντες, *헤시카스트들 보라SEE HESYCHASTS*), 곧 정적주의자들(Quietists)의 광신을 신랄한 비난으로 공격하면서, 그들을 옴팔로프시코이(Ο᾿μφαλόψυχοι, *Omphalopsychi*), "자기 배꼽에 영혼을 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그들을 4세기의 마실리아파(Massilians) 또는 에우키테스파(Euchites)와 동일시하였다. 수도사들은 이러한 공격에 분개하였고,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가 그들 가운데 가장 유능하고 학식 있는 자였으므로, 그를 자기들의 투사로 앞세워 그의 혀와 펜을 모두 이 비꼬는 칼라브리아인의 공격에 맞세웠다. 팔라마스와 그의 벗들은 처음에는 친절한 권면으로 바를라암의 비난을 잠재우려 하였고, 그 신비한 빛에 관해서는 교회 역사상 박해의 때에 성도들을 둘러싼 신적 광채의 유사한 사례들이 여러 차례 있었으며, 성스러운 역사가 구주의 변모(變貌, transfiguration) 때에 신적이고 창조되지 않은 빛이 나타났음을 기록하고 있다고 확언하였다. 바를라암은 이 빛이 창조되지 않은 것이라는 언급을 붙잡아,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반면 다볼 산(Mount Tabor)의 빛은 육안에 보였으므로 수도사들은 두 신(神)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고—하나는 만물의 창조주로서 분명히 보이지 아니하는 자요, 다른 하나는 이 보이면서도 창조되지 않은 빛이라고—확언하였다. 이 중대한 고발은 논쟁에 새로운 추동력을 주었으며, 두세 해 뒤에 바를라암은 데살로니가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의 모든 수도원에서 분쟁의 현장으로 몰려든 격분한 적수들이 자신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할까 두려워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와 그곳의 주교들에게 호소하였고, 팔라마스가 *옴팔로프시코이*의 광신을 공유하고 결함 있는 기도를 사용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신성모독적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교회의 신학에 새로운 용어들을 끌어들인다고 고발하였다. 그 결과 134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소피아(St. Sophia) 교회에서, 황제와 주요 원로들과 학자들과 일반 백성의 거대한 무리가 모인 가운데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신학의 신비를 잡다한 군중 앞에서 논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졌으므로, 하나님에 관한 신성모독적 관념을 가졌다는 팔라마스와 수도사들에 대한 고발은 억제되었고, 오직 기도에 관한 옛 마실리아파의 이단을 견지하고 결함 있는 기도를 사용한다는 고발만이 진행되었다. 바를라암이 먼저 자신의 고발을 뒷받침하여 공의회에 연설하였고, 이어서 팔라마스가 응답하여 신성모독과 왜곡의 혐의를 도리어 바를라암에게 되돌렸다. 공의회는 수도사들에게 유리하게 결정하였고, 칸타쿠제누스에 따르면 바를라암은 자신의 오류를 시인하고 적수들과 화해하였다. 그러나 공개적 패배에 굴욕을 느낀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라틴 교회와 화해하였다. 니케포루스 그레고라스(Nicephorus Gregoras)는 수도사들에게 씌워진 마실리아파 이단 문제에 관한 공의회의 결정이 보류되었으며, 바를라암은 악의와 오만으로 유죄가 입증되었고, 만일 1341년 황제의 죽음으로 공의회의 절차가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팔라마스와 그 일파의 이단도 아마 정죄되었을 것이라고 진술한다. 바를라암이 저버린 명분은 아킨디누스(Acindynus)라 불리는 또 다른 그레고리우스가 떠맡았으나, 수도사들의 일파는 계속 우세를 유지하였고, 팔라마스는 당시 미성년인 황제 요한 팔라이올로구스(John Palaeologus)의 궁정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요한 칸타쿠제누스(John Cantacuzenus)의 총애를 누렸다. 심지어 칸타쿠제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폐위시키고 팔라마스를 그 자리에 올리려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 뒤에 칸타쿠제누스와, 그를 밀어낸 제독 아포카우쿠스(Apocaucus)가 자리 잡은 궁정 사이에 일어난 내전(1342–1347년) 가운데, 팔라마스는 칸타쿠제누스에 대한 우정 때문에 1346년에 투옥되었는데, 이는 어떤 정치적 혐의가 아니라 그의 종교적 견해를 이유로 한 것이었다. 이는 총대주교가 이제 아토스 산의 수도사들—칸타쿠제누스에게 우호적이었던 자들—에 맞서 그레고리우스 아킨디누스와 바를라암파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바를라암파가 우세를 얻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한 공의회에서 그 반대자들이 부르던 대로의 팔라마스파(Palamites)가 정죄되었다. 그러나 총대주교와 궁정은 특히 팔라마스의 투옥에 있어 정치적 동기로 행동하였다는 의심으로부터 자신을 벗고자 몹시 애를 썼다. 1347년 1월 칸타쿠제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성공적으로 입성하여 궁정이 항복할 수밖에 없게 되자, 팔라마스는 풀려나 정복자와 협상하도록 보내졌다. 총대주교 칼레카스(Calecas)는 칸타쿠제누스의 승리 직전에 황제의 모후(母后) 안나(Anna)의 영향으로 폐위되었고,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는 칸타쿠제누스를 설득하여 한 시노드(synod)를 소집하게 하였는데, 그 시노드에 의하여 폐위가 확정되었고 칼레카스는 디뒤모티쿰(Didymotichum)으로 유배되었다. 아킨디누스와 바를라암파는 이제 반대로 정죄되었고, 팔라마스파가 다시 한번 우세를 얻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이시도루스(Isidore)가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팔라마스 자신도 곧이어 데살로니가의 대주교(archbishop)로 임명되었으나, 그 도시가 칸타쿠제누스에게 적대적인 일부 귀족들의 수중에 있었으므로 그는 입성을 거부당하여 렘노스(Lemnos) 섬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는 입성을 허락받았다. 이것은 1349년의 일이었다. 그동안 교회의 분란은 계속되었으며, 바를라암파는 교회의 친교에서 떨어져 나갔고, 그들의 진영은 끊임없이 증가하였으며, 역사가 니케포루스 그레고라스는 1347년 그녀의 어린 아들 안드로니쿠스(Andronicus)의 최근 죽음이 황제 칸타쿠제누스가 팔라마스파에게 보인 호의에 대한 신적 진노의 표징이라고 설득함으로써 칸타쿠제누스의 아내인 황후 이레네(Irene)를 교묘하게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였다. 가능하다면 교회에 평화를 회복하기 위하여, 황제와 총대주교 이시도루스와 팔라마스와 니케포루스 그레고라스 사이에 여러 차례 회담이 열린 뒤에 한 시노드가 소집되었다. 이시도루스는 시노드가 모이기 전인 1349년에 죽었고, 그의 후임자인 칼리스투스(Callistus)가 시노드를 주재하였다. 1351년에 시노드가 모였을 때, 니케포루스 그레고라스가 바를라암파의 투사였는데, 그들의 지지자 가운데는 에베소(Ephesus)의 대주교와 가누스(Ganus) 혹은 가우누스(Gaunus)의 주교가 있었으며, 그 자리에 참석한 두로(Tyre)의 대주교도 같은 편이었던 *듯하다.* 팔라마스는 반대편의 지도자였는데, 그 편은 큰 다수와 황제의 지지를 얻어 모든 것을 자기들 뜻대로 처리하였다. 에베소의 대주교와 가누스의 주교는 폐위되었다. 바를라암과 아킨디누스(둘 다 참석하지 않았다)는 출교(出敎)된 것으로 선언되었고, 그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견해를 전파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민중은 패배한 바를라암파를 편들었고, 팔라마스는 가까스로 폭력을 면하였다. 그의 이후 행적과 죽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는 듯하다. 팔라마스파의 독특한 주요 교의는, 더 저명한 수도사들과 은수자들이 추상적 관상과 기도의 오랜 수련 가운데 발견한 신비한 빛의 존재와, 그리스도의 변모 때에 보인 다볼 산의 빛의 창조되지 않은 본성이었다. 첫째 것은 그 반대자들의 주목과 비난을 끌었으나, 둘째 것은 거기에서 실제로 혹은 외견상 도출되는 귀결들과 더불어 공격의 큰 표적이 되었다. 니케포루스 그레고라스의 *비잔티움 역사(Historia Byzantina)*의 마지막 일곱 권(18–24권)은 이 논쟁의 역사에 바쳐져 있으며, 그 논쟁적 정신의 신랄함 가운데 그는 팔라마스를 다신론(多神論)으로—신성의 속성들을 그만큼 많은 별개의 독립적 신들로 바꾸어 놓는다고, 성령이 하나뿐이거나 일곱 중 하나조차 아니라 "칠십 번씩 일곱 번" 중 하나라고 확언한다고, 하나님과 천사들 사이의 중간 등급에 새롭고 독특한 한 부류의 창조되지 않은 권능들(καινόν τι καὶ ἴδιον ἀκτίστων γένος ἐνεργειῶν)—팔라마스가 "하나님의 광휘(λαμπρότητα)와 형언할 수 없는 빛"(φῶς ἄῤῥητον)이라 부른 것—을 둔다고, 어떤 사람이든 그 마르지 않는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 빛의 흐름에 참여함으로써 마음대로 창조되지 않고 시작이 없는 자가 될 수 있다고(ἀκτίστῳ ἐθέλοντι γίνεσθαι καὶ ἀνάρχῳ) 주장한다고 고발하며, 그 밖에 수많은 오류로 고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된 이단들은 대부분, 전부가 아니라면, 니케포루스 그레고라스와 다른 반대자들이 창조되지 않은 빛이라는 팔라마스파의 교리로부터 도출한 추론들이었지, 팔라마스파가 인정한 교의는 아니었다. 이 논쟁의 발생과 지속과 격렬함은 그 시기 그리스 지성의 세밀함과 그릇된 방향성을 보여 주는 특이한 사례이다. 다볼 산의 창조되지 않은 빛이라는 교의는 외견상 그리스 교회의 공인된 정통 교리로 계속 남아 온 듯하나(카페로니에리우스Capperonnerius, *니케포루스 그레고라스 주해Not. ad Niceph. Gregor.* ii, 1821, 본Bonn 판), 아마도 지금은 소홀히 되거나 잊혀졌을 것이다. 팔라마스는 다작(多作)의 저술가였으며, 그의 많은 저작이 사본(MS.)으로 현존하고, 케이브(Cave)의 *부록(Appendix)*에서 와튼(Wharton)과 게리(Gery)에 의하여, 그리고 파브리키우스(Fabricius)에 의하여 열거되어 있다. 니케포루스는 그가 육십 편이 넘는 *연설(orationes)*을 썼다고 말하며, 부아뱅(Boivin)은 파리의 왕립 도서관에 있는 한 사본에 칠십 편이 넘는 설교나 그 밖의 짧은 글이 들어 있었다고 진술한다. 그러므로 그레고라스의 진술은 팔라마스가 그와 벌인 논쟁을 계기로 쓴 글들에만 국한된 것이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낮게 추산한 것임이 틀림없다. 다음의 것들이 출판되었다. *Prosopopceia,* 곧 *Prosopopceia, s. Orationes duce judiciales, Mentis Corpus accusantis, et Corporis sese defendetis, una cum Judicum: Seentntia*(파리, 1553): — Εἰς τὴν σεπτὴν μεταμόρφωσιν τοῦ Κυρίου καὶ Θεοῦ καὶ Σωτῆρος ἡμῶν ῾Ιησοῦ Χριστοῦ· ἐν ῃ παράστασις ὅτι τὸ κατ᾿ αὐτὴν φῶς ἄκτιστόν ἐστιν. λόγος ά*, In venerabilem Domini et Dei ac Salvatoris nostri Jesu Christi Transformationem, ubi probatur quod in ea est lumen increatum esse. Oratio Prima.* ῾Ομιλία εἰς τὴν αὐτὴν τοῦ Κυρίου σεπτὴν μεταμόρφωσιν ἐν ῃ παράστασις ὡς εἰ καὶ ἄκτιστόν ἐστι τὸ κατ᾿ αὐτὴν θειότατον φῶς, ἀλλ᾿ οὐκ ἔστιν οὐσία Θεοῦ. λόγος β᾿*, Tractatus in eandem venerandam Domini Transjfrmationem; in uo probatur, qulangquam increatum est illius divinissimum Lumen, haud tamen Dei. Essentiiam esse. Oratio Secunda.* 이 두 연설은 콩베피스(Combefis)가 그의 *Auctarium Novissimum*(파리, 1672), ii, 106에서 라틴어 역본과 함께 출판하였다. Λόγοι β᾿, ἀποδεικτικοἱ ὅτι οὐχὶ καὶ ἐκ τοῦ Υἱοῦ ἀλλ᾿ ἐκ μόνου τοῦ Πατρὸς ἐκοπεύεται τὸ Πνεῦμα τὸ ῞Αγιον*, Orationes duce demonstrativce qudd non ex Filio, sed ex solo Patre procedat Spiritus Sanctus.* 이것들은 날짜 없이(그러나 아마도 1624년에) 런던에서, 칼라브리아인 바를라암(Barsaam)의 여러 다른 글들 및 비교적 근래의 여러 그리스 저술가들의 글과 함께 출판되었다. — Α᾿ντεπιγραφαί*, Refutatio Expositionum,* 곧 *Epigrapharum Joannis Vecci,*는 페트루스 아르쿠디우스(Petrus Arcudius)의 *Opuscula Aurea*(로마, 1630, 1671)에서 추기경 베사리온(Bessarion)의 *Confutatio*와 함께 출판되었다. — *S. Petri Athonitee*(곧 *de Monte Atho*) *Encomium*(*Acta Sanctorum,* Junii, a. d. 12:ii, 535에 수록): — Ε᾿πὶ Λατίνων συντομία*, Adversus Latinos -Confessio*: Ε᾿πιστολὴ πρὸς τὴν θεοστεφῆ βασιλίδα κυρὰν ῎Ανναν τὴν Παλαιολογίναν*, Epistola ad divinitus coronatam Augustam Annam Palceologinam,*는 부아뱅이 니케포루스 그레고라스의 *비잔티움 역사(Hist. Byzant.)*에 대한 그의 주해(파리, 1702), 787쪽에 인쇄하였다. 부아뱅은 또한 팔라마스의 한 저술에서 두 발췌문을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다소 분량이 있는 *Adversus Joannem Calecam*이요, 다른 하나는 *Epistola ad Joannem Gatram*에서 가져온 매우 짧은 것이다. 그의 저작들로부터 여러 인용문이 니케포루스 그레고라스에 의하여 제시된다. 135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노드가 바를라암파에 맞서 발표한 *토무스(Tomus)* 곧 선언문은 팔라마스에 의하여, 혹은 그의 감수 아래 작성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그것은 콩베피스가 라틴어 역본과 함께 그의 *Auctarium Novissimum*(파리, 1672), 2, 135에 제시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제목이 붙어 있다. Τόμος ἐκτεθεὶς παρὰ τῆς θείας καὶ ἱερᾶς συνόδου τοῦ συγκροτηθείσης κατὰ τῶν φρονούντων τὰ Βαρλαάμ τε καὶ Α᾿κινδύνου ἐπὶ τῆς βασιλείας τῶν εὐσεβῶν καὶ ὀρθοδόξων βασιλέων ἡμῶν Καντακουζενοῦ καὶ Παλαιολόγου*, Tomus a divina sacracque Synodo adversus eos coacta qui Barlaam et Acindyni opinionis sunt, Cantatcuzeno ac Palceologo religiosis orthodoxisque Imperatoribus nostris, editus ac expositus.* 알라티우스(Allatius), 니콜라우스 콤네누스(Nicolaus Comnenus), 파파도폴리(Papadopoli)를 비롯하여 로마 교회에 속한 그리스 저술가들은 팔라마스에게 온갖 비난의 표현을 퍼붓는다. 다른 한편 정통 그리스인들은 그를 높이 칭송하며 그의 유물에 기적적 효력을 돌린다. 케이브, *Hist. Litter.*(옥스퍼드, 1740–1743); 와튼과 게리의 *부록(Appendix),* vol. 2, p. 54 이하; 파브리키우스, *Biblioth. Graeca,* 10:454–462, 790; 옛 판본 11:494 이하를 보라. 할레스(Harles) 판본; 오우댕(Oudin), *De Scriptoribus Eccles.* vol. 3, col. 843; 칸타쿠제누스, *Hist.;* 니케포루스 그레고라스, *Hist. Byzant.* 스미스(Smith), *Dict. of Gr. and Rom. Biog. and Mythot,* 해당 항목; 닐(Neale), *Hist. of the Eastern Church,* 서론 ii, 745, 746과 비교하라.
PALAMITES Palamites
팔라마스파(Palamites) *팔라마스를 보라 SEE PALAMAS*.
PALANQUIN Palanquin
팔랑킨(Palanquin) *가마 보라SEE LITTER*.
PALATINI Palatini
팔라티니(Palatini)는 특별히 주교(bishop)를 시중들도록 임명된 로마의 세 부류 부제(副祭, subdeacon)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이름이다.
PALATINUS Palatinus
팔라티누스 (Palatinus) *아폴로(Apollo)*의 별칭으로, 이 이름으로 그는 로마(Rome)에서 숭배되었으며, 그곳 팔라티노 언덕(Palatine hill)에 그의 신전이 있었다.
PALATIUS, JOANNES Palatius, Joannes
팔라티우스, 요안네스 (Palatius, Joannes) 17세기의 교회 저술가로, 그의 개인적 역사에 관하여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나, 교황들의 역사를 저술한 자인데, 그 제목은 *Gesta Pontificum Romanorum a S. Petro usque Innocentium XI, addit. Pontificum imaginibus numismatib. sigillis* 등(Venetia, 1685, 2권 폴리오판)이다. 그것은 매우 철저하나 비평적인 저작은 아니다. 팔라티우스는 또한 *Fasti Cardinalium omniumn Romance eccles. cum stemmatib. eorum*(ibid. 1703, 2권 폴리오판)의 저자이기도 하다.
PALDAH Paldah
팔다(Paldah) *강철 보라SEE STEEL*.
PALEAE Paleae
팔레아이 (Paleae) 그라티아누스의 교령집(Gratian's Decretum)에 추가된 150개의 교령(decretals)과 공의회 규정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것들은 *법전(Corpus Juris)*에 삽입되어 있으나, 어떤 법적 권위에도 도달하지 못하였다. *팔레아이(Palece)*라는 이름은 παλαιοι, 곧 *낡은 것(obsolete)*의 변형이거나, 그라티아누스의 제자이자 그것들의 첫 수집자인 *파우카팔레아(Paucapalea)*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다음을 보라: Bickell, *Disquisitio hist. critic. de paleis*(Marburg, 1827); Philipps, *Kirchenrecht*, 4:160.
PALEARIO, AONIO Paleario, Aonio
팔레아리오, 아오니오(Paleario, Aonio. 혹은 그의 이름이 본래 쓰인 대로 하면 *아오니오 델리 팔리아리Aonio degli Pagliari*)는 종교개혁 시기 이탈리아 인물들 가운데 가장 이름난 자 중 하나요 개신교 대의의 순교자로서, 로마의 캄파냐(Campagna di Roma)에 있는 베롤리(Veroli)에서 태어났으며, 부모 양쪽으로 모두 고귀하고 유서 깊은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는 죽음이 갑자기 그에게서 부모를 앗아갈 때까지 은둔 가운데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 그의 아버지의 벗인 마르텔리(Martelli)라는 이가 아오니오를 돌보고 그의 교육을 인도하였다. 그 교구의 주교(bishop)인 엔니오 필로나르디(Ennio Philonardi) 또한 그 조숙한 청년에게 관심을 기울여 그의 인격 형성과 재능 계발에 주의를 쏟았다. 팔레아리오는 일찍이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전념하여 큰 진보를 이루었고, 이어서 철학과 신학으로 나아갔다. 그가 가진 지식에 대한 열망은 그로 하여금 열일곱 살에 외국으로 나가게 하였으며,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두루 여행하면서 방문하는 곳마다 늘 가장 유명한 교수들의 교제와 가르침을 구한 뒤에, 로마에 정착하여 학업에 힘썼고 그곳에서 여섯 해를 계속 머물렀는데, 그 도시가 카를 5세(Charles V)에게 점령되어 그 군주의 군대가 저지른 혼란이 평온을 누릴 희망을 남기지 않게 되자 팔레아리오는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1523년). 이 무렵 그는 프랑스, 독일, 심지어 그리스에까지 멀리 여행하고 싶은 큰 갈망이 있었으나, 그의 빈한한 재정 형편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자기 조국의 여러 지방을 방문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는 시에나(Siena), 피렌체(Florence), 페라라(Ferrara), 파도바(Padua), 볼로냐(Bologna)에 오래 머무르면서 곳곳에서 새로운 학식의 보고(寶庫)를 쌓고 가장 저명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그는 다시 로마로 돌아왔으나, 1527년에 시에나로 떠나 이제 그곳을 영구 거처로 삼기로 결심하였는데, 그 위치의 쾌적함과 주민들의 발랄함과 명민함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베롤리의 자기 영지를 팔고 시에나 근교에 체키니아나(Ceciniana)라 불리는 시골집을 샀는데, 그것은 이전에 키케로(Cicero)의 의뢰인 가운데 하나인 케키나(Cecina)에게 속하였던 까닭에 그렇게 불렸다. 이곳에서 그는 또한 평생토록 열렬히 사랑한 한 젊은 여인과 혼인하였다. 그녀는 그에게 사내아이 둘과 여자아이 둘, 네 자녀를 낳아 주었다. 1534년 팔레아리오는 고대 언어와 철학의 교수가 되었고 많은 수의 학생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는데, 그의 우월한 광채에 자기 명성이 가려지는 것을 못마땅해하던 한 동료와의 다툼으로 그의 이력이 갑자기 어지러워졌다. 성경을 연구하고 독일 종교개혁자들의 글을 읽은 까닭에, 도덕 철학에 관한 그의 강의는 그 동료의 강의와는 자유로운 사고의 어조로 구별되었다. 이는 학생들에게는 흡족한 것이었으나 옛 사상을 완고히 고수하던 그 교수에게는 불쾌한 것이었다. 추기경 사돌레트(Sadolet)는 자기 벗들의 이름으로 팔레아리오에게 새로운 것들에 빠지는 위험을 일러 주고, 시대를 고려하여 소요학파(peripatetic)의 사상을 우아한 언어로 입히는 더 안전한 일에 자신을 국한하라고 충고하였다. 이 신중한 충고는 팔레아리오의 솔직한 정신과 그가 진리에 대하여 느낀 헌신에는 전적으로 맞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헛된 학식과 종교의 가식자(假飾者)들을 검열한 자유로움은, 적수를 억압하고 파멸시키는 데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으며 그에게 이단의 혐의를 씌울 기회를 열렬히 붙잡은 한 부류의 사람들을 격분시켰다. 그의 사사로운 행실이 감시당하였고, 사사로운 대화의 의심 없는 신뢰 가운데 그에게서 흘러나온 표현들이 그에게 불리하게 유포되었다. 그러나 팔레아리오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익에 관하여 그가 쓴 책, *그리스도의 은덕(Il Beneficio di Christo)*(1542년)으로 가장 큰 노여움을 샀다. 그 내용의 개요는 발췌문과 함께 허스트(Hurst) 박사가 그의 *전도지 대의의 순교자들(Martyrs to the Tract Cause)*(뉴욕, 1872, 12절판), 68–80쪽에 제시한다. 그 작은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과 교부들—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오리게네스(Origen), 바실리우스(Basil), 힐라리우스(Hilary), 암브로시우스(Ambrose), 이레나이우스(Irenaeus), 그리고 성 베르나르두스(St. Bernard)—의 인용으로 풍부하게 채워져 있는데,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큰 주목을 끌었으니, 그것이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어 주목할 만한 보급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파울 베르게리우스(Paul Vergerius)는 그것이 출현한 뒤 여섯 해 동안 베네치아(Venice) 한 곳에서만 사만 부가 인쇄되어 팔렸다고 전한다. 복음의 원수들 또한 이 저작에 주의를 기울여 그것을 억누르고 그 저자를 파멸시키려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그들은 곧 그의 자취를 따라잡았다. 시에나에 있던 그의 적수들은 그가 로마를 방문하고 있는 동안 그에 맞서 공모하여 그를 이단으로 고발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그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급히 돌아왔다. 그의 재판관 대부분은 그에게 격렬히 적대적이었다. 그는 변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가장 무죄한 행위를 죄로 선언하려는 자들은 냉혹하고 불평하는 자들이니, 그리하여 사람이 모든 행복의 주관자요 모든 민족과 백성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벌받지 않고서는 감히 칭송하지도 못합니다. 내가 올해 토스카나(Tuscan)어로 한 권의 책을 써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인류에게 돌아온 유익들을 칭송한 사실이 나에 대한 형사 고발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가증한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신성이 육체로 거하신 그분이 우리의 구속(救贖)을 위하여 자기 피를 흘리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관하여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온전한 평화와 안식을 누려야 한다고 나는 말하였습니다. 가장 의심할 수 없는 고대의 권위, 곧 성경과 교부들의 권위에 의지하여, 나는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 눈을 향하고 그의 약속들을 신뢰하며 그분께만 자기 소망을 두는 자는 그분께로부터 자기 죄의 용서와 모든 악으로부터의 구속을 받으리라고 주장하였으니, 이는 그분이 우리의 소망을 저버리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것들이 저 열두 배심원—더 이상 사람이라는 이름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어찌나 끔찍하고 두려워 보였던지, 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저자가 화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만일 내가 이 형벌을 받아야 한다면—나는 나의 글을 비난문이라기보다 훨씬 더 신앙고백으로 여기는 까닭에—원로 여러분, 이보다 더 나은 운명은 내게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와 같은 시대에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기 침상에서 죽어서는 안 됩니다!* 고발당하고, 투옥되고, 채찍질당하고, 교수형당하고, 자루에 꿰매여 넣어지고, 들짐승에게 던져지고, 불길에 구워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오직 그러한 죽음으로 영광스러운 진리가 더욱더 빛으로 나아오기만 한다면!" 그의 연설 중에 팔레아리오는 자기 고발자들을 향하여, 그들에게 그들의 악행을 드러내 보이고 자기 생애의 온 행로를 선포하였다. 자기 형편을 언급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유일한 현세적 행복은 내 책들 가운데서 사는 데 있습니다. 추위를 막아 줄 모직 깔개 하나, 이마의 땀을 닦을 아마포 한 조각, 쉴 침상 하나, 그리고 앉을 단순한 걸상 하나—이것들이 내가 필요로 하는 전부입니다. 그리고 자비로우신 주 그리스도여, 주께서 내게 주신 이 선물들을 보존하고 더하여 주옵소서! 주께서는 내 안에 모든 세상 재물에 대한 멸시와, 진리에 부합하여 말하며 나 자신의 마음과 나 자신의 의지를 따라 말하지 아니하려는 굳은 결심을 일으키셨나이다. 이 은혜들에 경건과 절제와 자기 부인을 더하시고, 주와 주의 자녀들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덕으로 나를 단장하여 주옵소서!" 대담함과 솔직함이 신중함과 능란함으로 조절된 팔레아리오의 웅변적 변론은 그의 적수들의 폭력과 음모를 이겼다. 그는 고발자들의 혐의로부터 무죄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무죄 방면으로 인하여 도리어 더욱 격앙된 적수들로 인하여 곧 시에나를 떠나야만 하였다. 그러나 거처를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입은 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우리는 나중에 그가 일찍이 예견하였던, 그리고 그가 자기 생각을 그것에 대비시키는 것을 줄곧 자기 목표로 삼았던 듯한 그 순교를 견디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543년경 시에나 사람들을 떠나면서 그는 루카(Lucca) 원로원의 초청을 받아들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라틴 고전을 가르치고 엄숙한 행사 때에 공화국의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이곳까지 그의 옛 적수 가운데 하나인 마르코 블라테로네(Marco Blaterone)가 그를 뒤따라왔는데, 그는 속된 귀를 사로잡는 그 능변(能辯)을 지닌 천박한 학자였으며, 그의 무지와 다변(多辯)은 아레티노(Aretino)의 풍자적 펜에 의하여 호되게 징계받았으나 교정되지는 못한 자였다. 당시 루카에는 계몽되고 명예로운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풍부하였으며, 그 영혼의 고매한 기상으로 떠받쳐진 팔레아리오의 웅변은 그가 그 무가치한 경쟁자를 쉽게 이기게 하였으니, 그 경쟁자는 망신을 당하고 도시에서 쫓겨나 로마의 도미니쿠스회(Dominicans)를 통하여 복수를 꾀하였다. 그러나 콘클라베(conclave) 안의 자기 벗들의 도움으로 팔레아리오는 그때 자기 고발자의 밀고를 무력화시켰다. 1553년경 밀라노(Milan)의 관리들로부터 그곳으로 옮겨와 웅변학 교수가 되어 달라는 매우 따뜻한 초청이 그에게 왔다. 그에게 제시된 후한 봉급은 그 종교개혁자로 하여금 호의적으로 응답하게 하였으며, 그가 밀라노에 정착하였을 때 그는 천상의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떠남 이외에는 더 이상의 변화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이단을 사냥하는 종교재판관들은 그의 원수들과 더불어 달리 결정하였다. 약 열 해 동안 그때 이탈리아에서 꾸준히 추종자를 얻어 가던 새로운 대의에 헌신한 많은 영혼에게 날마다 박해와 투옥과 사형이 가해져 왔다. 팔레아리오의 벗들은 그를 위하여 두려워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아무 위험도 알지 못한다는 확언으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모두가 이탈리아의 개혁 교리에 죽음을 전하는 사자(使者)로 여긴 피우스 5세(Pius V)의 즉위 때에, 팔레아리오의 벗들이 그를 볼로냐로 옮기는 데 대한 그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을 무렵, 그는 1568년에 갑자기 체포되었고, 교황의 권위에 의하여 이제 이십 년이 넘게 종결되었던 그의 사건이 로마에서 재심리에 부쳐지도록 명령되었다. 재판 동안 그는 로마의 종교재판소가 가진 세 감옥 가운데 가장 비참한 토레 디 노나(Torre di Nona)에 투옥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익에 관한 그의 책, 오키노(Ochino, q.v. 해당 항목을 보라)에 대한 그의 칭송, 시에나의 원로들 앞에서 한 자기 변호, 그리고 그곳과 루카에 거주하는 동안 그가 산 의심들이 모두 그에게 불리하게 되살아났다. 모든 것이 수집되고 가려진 뒤에, 그 고발은 마침내 다음 네 항목으로 귀결되었다. 곧 그가 연옥(purgatory)을 부인하였다는 것, 죽은 자를 교회 안에 매장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고 도시의 성벽 밖에 매장하는 고대 로마의 방식을 선호하였다는 것, 수도(修道) 생활을 조롱하였다는 것, 그리고 칭의(稱義)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에만 돌리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견해를 지녔다는 이유로 그는 두 해의 투옥 끝에 교수대에 매달리고 그의 몸을 불길에 넘기는 형에 처해졌으며, 그 선고는 1570년 7월 3일, 그의 나이 일흔 되던 해에 집행되었다. 그의 마지막 순간에 그를 시중든 도미니쿠스회 수사들의 공식 문서라고 자처하나 아무 이름도 서명도 없는 한 비망록은 팔레아리오가 고해하고 통회하며 죽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그가 죽던 날 자기 가족에게 쓴 두 통의 편지는 이 진술에 반하는 증인이다. 만일 그가 그 편지들이 그로 인하여 수신처에 닿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 놓고 표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편지들 전체에는 그를 늘 특징지어 온 동일한 복음의 정신이 보인다. 그것들은 또한 그가 신앙을 철회하였다는 보고가 근거 없음을 소극적으로 증명해 준다. 이는 만일 그가 정말로 자기 생각을 바꾸었다면 그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기를 간절히 원하지 않았겠는가, 또는 만일 그 변화가 거짓이었다면 수사들이 그에게 편지 쓰는 것을 허락할 때 회개자의 언어를 사용하라고 고집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까닭이다. 팔레아리오는 자기가 체포되기 전에 자기 저술들을 억압의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그것들을 자기가 신뢰할 수 있는 벗들의 보호에 맡겨 두는 데 마음을 썼으며, 개신교 국가들에서의 그 거듭된 출판은 그것들을, 그렇게 많은 그의 동포들의 저작이 당한 그 훼손으로부터 구해 주었다. 그의 편지들로부터, 팔레아리오가 그 시대 교회와 학문의 공화국 양쪽에서 가장 저명한 인물들의 우정과 서신 교환을 누렸음이 드러난다. 전자에 속하는 이로는 추기경 사돌레트, 벰보(Bembo), 폴(Pole), 마페이(Maffei), 바디아(Badia), 필로나르도(Filonardo), 스폰드라티(Sfondrati)가 있었고, 후자에 속하는 이로는 플라미니오(Flaminio), 리치오(Riccio), 알키아티(Alciati), 비토리오(Vittorio), 람프리디오(Lampridio), 부오나미치(Buonamici)가 있었다.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그의 시(詩), 곧 *De immortalitate animoe, libri tres*(1636년, 16절판)는 학자들에게 갈채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연설들에 관하여는, 로마 연설가의 문체에 대한 부지런한 모방으로 키케로주의자(Ciceronians)라는 이름을 얻은 모든 근대인 위에 그를 놓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마도 높은 칭찬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분명 우아함과 기운으로 쓰여 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보낸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에 관한 그의 편지와, 로마 교황들에 맞선 그의 증언과 변론(*Actio in ponifices Romanos et eorum asseclas, ad imperatoremn Rom. reges et principes Christiance reipublicce sunmmos Œcumenici concilii prcesides, cum de consilio Tridentino habendo deliberatretur,*—이는 황제의 사절들이 트렌트 공의회에 제출하도록 할 의도로 작성되었으며, 개신교도들을 옹호하는 정연한 계획이요, 1606년 라이프치히Leipsic에서 출판되었다. 1696년 1월의 *Acta Eaudita,* 44쪽을 보라)은 종교개혁자요 진리의 고백자에 합당한 성경 지식, 신앙의 건전함, 솔직함, 그리고 뜨거운 열심을 입증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익에 관한 그의 소책자를 짓는 데에는 추기경 폴이 큰 부분을 담당하였고, 플라미니오(Flaminio, q.v. 해당 항목을 보라)가 그것을 옹호하는 글을 썼으며, 그것을 유포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이 추기경 모로네(Morone, q.v. 해당 항목을 보라)가 투옥되고 카르네세키(Carnesecchi)가 불길에 넘겨진 죄목 가운데 하나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한 사람에 관하여 맥크리(M'Crie)가 다음과 같이 쓰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그의 재능과 그의 열심과 그의 저술의 유익과 그가 견딘 고난을 고려할 때, 팔레아리오는 이탈리아에서 개혁 대의의 가장 큰 보배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한다." *Opera, ad illam editionem quam ipse auctor recensuerat et auxerat excusa, nunc novis accessionibus locupletata*라는 제목의 팔레아리오의 저작들은 1696년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출간되었고 1728년 예나(Jena)에서 재인쇄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익에 관한 소책자는 그 저자보다 나은 운명을 맞지 못하였다. 종교재판소는 그 책을 어찌나 성공적으로 사냥하였던지 거의 모든 사본이 그 손에 들어와 불태워졌다. 삼백 년 동안 역사가 전한 것 외에는 그것에 관하여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1843년에 이탈리아어 판본 한 부가 잉글랜드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교에서 발견되었으며, 처칠 배빙턴(Churchill Babington)이 1552년의 프랑스어 번역본과 1548년의 영어 번역본과 함께 케임브리지에서 그것을 출간하였고, 1856년 라이프치히에서 티셴도르프(Tischendorf)의 독일어 번역본과 함께 출간하였다. *Young, Life and Times of Paleario*(런던, 1860, 2권, 8절판); 블랙번(Blackburn), *Aonio Paleario and his Friends,* *The Benefit of Christ's Death*의 개정판과 함께(필라델피아 장로교 위원회, 1867); 구를리트(Gurlitt), *Leben des A. Paleario*(함부르크Hamb., 1805); 보네(Bonnet), *A. Palleario et la Ref. de l'Italie*(파리, 1863); 맥크리, *Hist. of the Ref. in Italy,* p. 131 이하, 278 이하; *Jahrb. deutsch. Theol.* 1870, 3, 419를 보라.
PALEMBANG Palembang
팔렘방 (Palembang) 이전에는 수마트라(Sumatra) 동쪽 해안의 독립 왕국이었으나 지금은 네덜란드령 거주지(residency)로, 북쪽으로는 잠비(Jambi), 북서쪽으로는 벵쿨렌(Bencoolen), 남쪽으로는 람퐁(Lampong) 지방들, 남동쪽으로는 방카 해협(Strait of Banca)과 접하며, 면적은 61,911제곱마일이고, 인구는 1885년에 573,697명에 달하였다. 그 땅의 많은 부분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덤불의 황야로 뒤덮인 저지대 늪이지만, 남쪽에서는 산악지대로 솟아오르는데, 그 가운데 욀로에 모에시(Oeloe Moesi)는 높이가 6,180피트이다. 사금, 철광석, 비소를 함유한 유황, 갈탄, 일반 석탄이 발견되며, 또한 거친 도기 등을 만드는 데 적합한 점토도 발견된다. 발리 보에킷(Bali Boekit)의 탄전 근처에는 순수한 기름의 샘이, 여러 곳에는 광천수의 샘이 솟는다. 쌀, 면화, 사탕수수, 후추, 담배가 재배되며, 내륙에서는 코코야자가 재배된다. 삼림에서는 구타페르카(gutta-percha), 검고무(gum-elastic), 등나무, 밀랍, 안식향(benzoin), 새틴우드(satinwood) 등이 산출된다. 강에는 물고기가 풍부하며, 코끼리, 코뿔소, 호랑이, 표범, 그리고 표범의 일종이 숲을 돌아다니고, 사슴, 멧돼지, 염소, 그리고 많은 종류의 원숭이도 그러하다. 건기에는 온도계가 화씨 80도에서 92도 사이를 오르내리고, 우기에는 76도에서 80도 사이를 오르내리지만, 기후는 늪 인근을 제외하고는 건강에 해롭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원주민들은 16세기 또는 그 이전에 팔렘방에 정착하여 온 땅을 다스렸던 자바인(Javanese)의 후손이다. 그러나 그 종족은 다른 말레이인(Malays)과 섞이게 되었고, 언어도 그 순수성을 잃었다. 북서쪽 내륙에는 코에보에스(Koeboes, Kubus)라 불리는 부족이 있는데, 그 기원에 관하여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마도 원주민의 잔존자일 것이다. 그들은 농업을 따르지 않고, 거의 벌거벗은 채로 돌아다니며, 주로 어업과 수렵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죽음 이후의 존재를 믿기는 하지만, 지고한 존재(Supreme Being)에 대한 명확한 관념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말레이인(MALAYS) 항목을 보라*.
PALENCIA, ALONSO DE Palencia, Alonso De
팔렌시아, 알론소 데(Palencia, Alonso De)는 저명한 스페인 저술가로, 실천적 종교 문헌에서의 노고와 그의 요세푸스(Josephus) 판본으로 인해 여기에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팔렌시아는 1423년에 태어났다. 열일곱 살에 부르고스(Burgos) 주교의 시동(侍童)이 되었고, 이탈리아와 대륙을 여행한 후에 왕실 사료편찬관(historiographer)이 되었다. 그는 그의 세기가 거의 끝날 무렵에 죽었다. 그는 *El Espejo de la Cruz *(1485)와, 여전히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 같은 성격의 여러 다른 저작을 썼으며, 그 밖에 그의 명성이 의거하는 큰 역사 저작들도 있다. 그의 요세푸스 번역본은 1492년에 완성되었다. 프레스콧(Prescott), *Ferdinand and Isabella, *1, 136; *English Cyclop. *s.v., 그리고 거기 제시된 문헌을 보라.
PALEOTTI, GABRIEL Paleotti, Gabriel
팔레오티, 가브리엘 (Paleotti, Gabriel) 이탈리아 추기경으로, 1524년 10월 4일 볼로냐(Bologna)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가브리엘도 그 직업을 갖게 할 작정이었으나, 그는 성년이 되어 성직 생활을 택하였고, 단순한 참사회원직에 만족하며, 캄페조(Campeggio)가 그에게 양도하려 한 마요르카(Majorca) 주교직을 거절하였다. 1556년에 그는 *금서 목록 위원회(Index Expurgatorius)*에 임명되었다. 그는 교회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에 파견되었고, 비오 4세(Pius IV)는 1565년 3월 12일 그에게 추기경의 자주색 옷을 입혀 주었다. 비오 5세(Pius V)는 1566년 1월 30일 그에게 볼로냐 주교직을 수여하였다. 성 카를로 보로메오(St. Charles Borromeo)와 식스투스 5세(Sextus V)의 각별한 친구였던 그는, 후자의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서른 표 이상을 받았다. 사비나(Sabina) 주교직이 1591년 3월 20일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1597년 7월 23일 로마에서 죽었다. 그는 다음을 출판하였다. *노년의 선에 관하여(De Bono Senectutis)* (안트베르펜, 1598): — *거룩한 형상과 세속의 형상에 관하여(De imaginibus sacris et profanis)* (로마, 1594): — *볼로냐 대주교직(Archiepiscopale Bononiensis)* (같은 곳, 1594): *— 사생아와 서자에 관하여(De nothis spuriisque filiis)* (프랑크푸르트, 1573): *— 추기경 회의 자문에 관하여(De consistorialibus consultationibus)*. 그는 자신이 참여한 회기들에 대해 *트리엔트 공의회 의사록(Acta Concilii Tridentini)*을 작성하였으며, 팔라비치니(Pallavicini)와 오데리크 레노(Oderic Regnaud)가 이 저작의 상당 부분을 출간하였으나, 그 전체가 출판되지는 않았다. 다음을 보라. 레데스마(Ledesma), *De vita et rebus gestis G. Paleotti* (볼로냐, 1647).
PALES Pales
팔레스 (Pales) 고대 로마인들에 의해 숭배된 신으로, 목자들과 그들의 양 떼를 주관하는 자였다.
PALESTINE Pales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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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ESTINE, COLONISTS IN Palestine, Colonists in
팔레스타인의 식민자들 (Palestine, Colonists In) 이 주제에 관하여 우리는 콘더(Conder) 중위의 *Tent Work in Palestine,* 2:305 이하에서 발췌한 글을 제시한다: "독일인 식민자들은 '성전(Temple)'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종교 단체에 속하는데, 이 단체는 뷔르템부르크(Wiirtemburg)의 경건파(Pietists) 가운데서 일어났다. 이들은 루터교회(Lutheran Church)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였고, 주일 모임에서 기도와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썼다. 경건파는 벵겔(J. A. Beugel) 박사가 그의 *신약성경 그노몬(Gnomon of the New Test.)*에서 요한계시록(Revelation)의 예언들에 대하여 제시한 해석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 벵겔(Bengel)의 친구이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호프만(Hoffmarin) 박사가 있었는데, 그는 뷔르템부르크의 기이한 왕 프리드리히(Frederick)로부터 코른탈(Kornthal)의 척박한 땅 한 구획을 얻어, 그곳에 그의 제자들이 경건파 식민지를 세우게 하였고, 그는 그것을 후에 팔레스타인으로 옮길 작정이었다. 그러나 호프만은 죽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땅에 만족하며 머물렀다. 그러나 호프만의 아들은 아버지의 계획을 잊지 않고, 키르셴하르트호프(Kirschenhardthof)에 새 식민지를 세웠는데, 이는 마침내 거룩한 땅(Holy Land)으로 옮기는 것을 특별한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그의 초기 제자들 가운데 하르데크(G. D. Hardegg) 씨가 있었는데, 그는 때가 되어 성전 경건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젊은 호프만(크리스토퍼[Christopher])은 1858년경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였고, 1867년에는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시험 원정대가 파견되었다. 그들은 나사렛(Nazareth) 서쪽, 에스드라엘론 평원(Plain of Esdraelon) 가장자리의 셈피니에(Semfinieh) 근처 갈대 오두막에 정착하였다. 그곳의 건강에 해로운 기후를 아는 친구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샘 근처 저지대의 말라리아성 대기 속에 머물다가 모두 열병으로 죽었다. "1868년 8월 6일, 크리스토퍼 호프만(Christopher Hoffmann)과 하르데크(G. D. Hardegg)는 키르셴하르트호프를 떠나, 10월에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였다. 여러 곳을 방문한 후 그들은 하이파(Ihaifa)와 야파(Jaffa)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두 곳 모두에 땅을 샀다. 하이파(Haifa) 식민지가 처음으로 세워졌고, 야파의 식민지는 약 여섯 달 더 늦게 세워졌다. 하르데크는 전자의 회장이 되었고, 호프만은 후자의 회장이 되었다. **I.** 식민자들의 종교적 견해는 쉽게 이해되지 않으며, 나는 그들 대부분이 자신들의 의도에 대하여 오히려 막연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팔레스타인에 식민지를 세우려는 그들의 주된 동기는, 그들이 머지않아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는 요한계시록과 스가랴(Zechariah)의 예언들의 성취에 유리한 조건을 촉진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고, 가능한 한 사도 시대(apostolic age)의 모범에 가깝게 공동체 생활의 본을 보이는 것을 의무로 여긴다. 독일에서 불신앙(infidelity)이 퍼지는 것이 경건파 가운데 이러한 분리적 경향의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 "성전 협회(Temple Society)의 교리는 아마도 호프만 씨가 발행한 '성전 신앙고백(Profession of Faith of the Temple)'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을 것이며, 다음 다섯 조항을 포함한다: **1.** 시대의 징조로 보아 가까이 다가온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의 재림(second Coming)의 크고 두려운 날을 준비하는 것. 이 준비는 모든 땅에서, 특히 예루살렘(Jerusalem)에서 영적 성전을 세움으로써 이루어진다. "**2.** 이 성전은 참된 교회(Church)를 이루는 성령의 은사들(고전 12:4)로 구성되며, 모든 사람은 이것들을 소유하기를 힘써야 한다. "**3.** 이것들을 얻는 수단은 선지자들이 묘사한 대로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구하는 것이다(사 2:2; 사 19:25; 겔 40:48). "**4.** 예루살렘의 성전은 죽은 돌이 아니라 산 돌들의 건물이며, 영과 진리(spirit and truth)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연합한 모든 민족의 사람들(벧전 2:4-10)로 이루어진다. "**5.** 성전의 예배는 신약성경에 묘사된 것과 같은 제물들(롬 12:1; 히 13:15-16; 약 1:27)로 이루어진다. "하르데크의 글들은 훨씬 더 산만하고 신비적이다. 내가 거기에서 끌어낼 수 있었던 주된 특징은,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에 대한 예언들이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야 할 대상이 유대인(Jews)이 아니라 참 이스라엘(true Israel)—그가 보기에 이것은 성전 협회를 의도한 것으로 이해되는 듯하다—이라는 믿음이다. "나는 가능한 한 이 공동체의 외견상의 종교적 믿음을 진술하였으나, 그들 가운데는 교리의 여러 음영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모두가 세상사에서 어떤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 아마겟돈(Armageddon)과 천년왕국(Millennium)의 도래에 대한 기대, 그리고 모든 예언의 성취에 대한 기대에서는 일치한다. "1875년에 나는 하이파 식민지의 주일 예배 가운데 하나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회중은 경건하고 진지하였으며, 예배는 단순하고 어떤 종류의 과장도 없었다. 회장이 독일어로 긴 기도를 드렸고, 독일인 특유의 음악적 좋은 취향으로 찬송이 불렸으며, 스가랴 예언의 한 장이 낭독되었다. 그런 다음 회장은 권면을 베풀며,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실' 구주(Savior)의 즉각적인 강림을 선포하였다. 다른 장로들이 뒤이어 매우 진지하게 말하였고, 또 다른 찬송이 불렸으며, 그 후 회중은 그들이 모였던 휑한 학교 교실에서 조용히 흩어졌다. 식민지의 일들에 관한 토의가 종교적 예배 직후에 종종 이어진다. "야파 식민지의 역사에 관하여 우리는 비교적 적게 모았다. 그들은 두 정착지를 가지고 있는데—하나는 사로나(Sarona)라고 불리며 그 도시 북쪽으로 약 2.5마일 떨어져 있고, 1872년에 열 채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두 번째 정착지는 야파 성벽에 더 가까웠으며, 좌초한 미국인 식민지의 생존 회원들로부터 사들인 것이었다. 이 정착지에는 학교와 호텔을 포함하여 열세 채의 집이 있었으며, 그 호텔은 하르데크의 아들이 운영하였는데 그는 또한 야파에서 독일 정부를 대표하였다. "1872년에 야파 식민지는 남자 백 명, 여자 일흔 명, 어린이 서른다섯 명에 달하였다. 식민자들 가운데 둘은 의사였고, 스무 명가량은 기계공이었으며, 나머지는 농부였다. 그들은 몇몇 원주민을 고용하였고, 사백 에이커의 곡물 경작지를 경작하며 터키인들에게 통상적인 세금을 냈다. 어린이들은 아랍어와 유럽어들, 그리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도 배운다. 집들은 깨끗하고 통풍이 잘되며 잘 지어졌고, 그 식민지는 원주민 마을들의 누추함과 쇠락과 대조되는 근면과 진취의 모습을 띠고 있다. "하이파 식민지와 우리는 더 친밀하게 알게 되었는데, 1872-73년 겨울에 세 달 동안 그곳의 집 한 채에 거주하였고, 1875년에 다시 약 두 달 동안 그 식민지의 호텔에 머물면서 그 공동체의 운영을 많이 보게 되었다. "1872년에 식민자들은 254명에 달하였는데—독신 남자 마흔 명과 기혼 남자 마흔일곱 명, 독신 여자 서른두 명과 기혼 여자 쉰한 명(과부 넷), 그리고 어린이 여든네 명이었다. 약 쉰 명의 기계공이 있었으며, 정착지는 서른한 채의 주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토지는 450에이커의 경작지였으며, 백사십 그루의 올리브나무와 17에이커의 포도원이 있었다. "그 존재의 처음 삼 년 동안 식민지에서 일곱 명만 사망하였으나, 후에 사망률이 증가하였다. 1872년에 야파의 식민자 이백오 명 가운데 열여덟 명이 사망하였는데, 이는 주로 열병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망률은 하이파에서는 아직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잘 지어진 돌집들로 이루어진 그 작은 마을은 갈멜(Carmel) 산맥의 그늘 아래, 성벽으로 둘러싸인 하이파 시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넓은 거리 하나가 해안에서 산을 향하여 올라가며, 대부분의 건물들이 그 양쪽의 정원 안에 서 있다. 해변 가까이에 갈멜 호텔(Carmel Hotel)이 있는데, 매우 친절하고 가격이 적당한 주인이 운영한다. 그리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학교와 집회소가 한 건물 안에 있다. 하르데크 씨의 거처는 더 동쪽에 있으며, 식민지에서 가장 큰 집이다. 농업용 건물들을 포함하여 전체 수는 여든다섯 채로 알려져 있다. "1875년에 식민자들은 311명에 달하였는데, 주로 독일에서 새로 도착한 이들로 보강되었다. 따라서 1872년 이래 수용 시설의 증가는 정착민의 증가보다 훨씬 컸다. 토지 또한 같은 기간에 600에이커로 증가하였으며, 백 에이커의 포도원과 정원이 있었다. 그러나 갈멜 서쪽 평원의 티레(Tireh) 근처에 새로 취득한 부동산의 토양은 매우 척박하며, 독일인들은 기후와 토양이 모두 좋은 산 정상의 땅을 얻으려는 그들의 숙원을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가축은 소 일흔다섯 마리, 양과 염소와 돼지 이백오십 마리, 그리고 말 여덟 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수한 미국제 탈곡기가 수입되어 있었다. 종사하는 직종은 석재 절단과 미장공 일, 목공과 마차 제작이다. 대장장이, 구리장이, 양철장이, 소목장, 제화공, 재단사, 푸주한, 마구장이, 조련사, 비누 제조공, 포도주 양조공, 채석공도 식민자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비누, 올리브유, 올리브나무 제품으로 거래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러한 사업에는 현재 독일인들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자본이 필요하다. 좋은 풍차와 올리브 압착기가 영국에서 들여왔다. 무두질 공장도 1875년에 세워지고 있었으며, 원주민들도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드나드는 잡화점이 하나 있다. "식민자들 다수는 나사렛의 영국 고아원에서 고용되었는데, 그것은 슈마허(Shumacher) 씨가 설계하고 지은 것이며, 모든 미장공과 목공 일은 독일인들이 수행하였다. 식민자들은 또한 하이파에서 나사렛에 이르는 도로를 닦는 데 많은 일을 하였으나, 그것을 *만들지는* 않았으니, 전문적 관점에서 그것이 아직 전혀 완성된 도로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의 마차가 그 두 곳 사이를 다니며, 원주민들은 곡물을 운반하기 위해 그것들을 이용한다. "식민지에는 어린이와 젊은이를 위한 학교가 둘 있다. 상급 학교에서는 아랍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산술, 도화, 지리, 역사, 수학, 음악을 가르치고, 하급 학교에서는 아랍어와 독일어, 쓰기, 산술, 노래를 가르친다. 둘 다에서 종교 교육이 주어지며, 여자아이들은 뜨개질, 바느질, 자수를 배운다. "이렇게 그 식민지를 종교적 측면과 실제적 측면에서 묘사하였다. 거룩한 땅을 식민화하는 문제에 관하여 많은 논의가 쏟아졌으나, 성전 협회의 시도와 중요성에서 견줄 만한 다른 실제적 시도는 없다. 그 사업의 성공 여부는 두고 볼 일이다. "식민자들은 전적으로 농민 계층과 기계공 계층에 속하며, 그들의 지도자들조차 비교적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대체로 그들은 부지런하고 절제하며 정직하고 강건하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 아무리 신비적일지라도, 그들은 세상과의 거래에서 본질적으로 영리하고 실제적이다. 그들은 경건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백성이며, 그들의 타고난 가정적 성향은 그들이 이전의 미국인 식민지를 좌초시킨 암초에서 결코 분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매우 개연성 있게 만든다. 그 식민지의 회장은 일부다처제를 도입함으로써 브리검 영(Brigham Young)의 본을 따르려 한 것으로 보인다. 독일인 식민자들은 또한 유럽의 개량을 팔레스타인에 도입하는 데에 좋은 진취의 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원주민들에 의해 다소간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경쟁할 다른 공동체가 없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문명화된 교육을 자본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파는 포도주는 비교적 우수하여 즉시 시장을 찾으며, 그들의 제조품 다수도 그러하다. "이것이 그 그림의 한 면이지만, 다른 면으로 돌아서면 우리는 식민지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듯한 약점의 요소들을 발견한다. "첫째로, 그 공동체에는 그 사업을 통제하고 발전시키는 데 요구되는, 충분히 뛰어난 재능이나 교육, 또는 정력과 강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분명히 없는 듯하다. 브리검 영의 천재성은 그의 대담한 사업의 거의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들을, 일부다처제의 확립이 그의 제자들에게 자연히 일으킨 편견에도 불구하고 이겨냈다. 하이파 식민지의 지도자가 경건함과 동기의 순수함에서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들은 영(Young)의 성공의 원인이 된 자질들에서 그 몰몬(Mormon) 수령과 견줄 수 없다. "둘째로, 식민자들은 그들 가운데서 분열되어 있다. 1875년에 우리는 하르데크 씨가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가 견해를 바꿀 때까지 일시적으로) 식민지의 지도력에서 물러났으며, 슈마허(Shumacher) 씨가 그를 계승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슈마허는 석공 장인이자 건축가이며, 더욱이 하이파에서 미국 정부의 대표이다. 원래 지도자의 이러한 면직은 독일인들 가운데 분쟁을 일으켰으며, 영향력 있는 회원 여럿이 주일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내부의 문제에 외부의 문제가 더해졌다. 식민자들은 원주민에게서도 유럽인에게서도, 이슬람교도에게서도 그리스도인에게서도 호감을 받지 못한다. 터키 정부는 그들의 식민화의 진정한 동기를 이해할 능력이 전혀 없으며, 유럽인이 그 나라에 정착하는 것에 대하여 정치적인 이유 외에는 어떤 이유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식민자들은 그들이 사들인 땅에 대한 권리 증서를 결코 얻지 못하였으며, 만일 터키인들이 그것이 유리하다고 여긴다면 독일인들이 그 재산을 보유할 권리를 전적으로 부인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그들은 그 식민지에 어떤 호의도 베풀지 않을 뿐만 아니라—그 존재가 이웃에 매우 유익하였음에도—하급 관리들은 독일인들이 '그 나라의 관습'(즉 뇌물)에 전혀 개의치 않고 법정에서 정의를 얻으려 시도하는 것에 분개하여,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그 공동체의 앞길에 그들이 고안할 수 있는 온갖 장애물을 놓았다. "식민자들의 어려움은 갈멜 수도사들의 시기심으로도 가중되었다. 그 수사들은 좋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땅은 그들의 요새 수도원을 둘러싸고 갈멜을 따라 점차 확장되고 있다. 그들은 독일인들의 침범을 못마땅하게 보며, 이탈리아인의 온갖 교묘함이 독일인의 이익에 맞서 동원된다. "더욱이 식민자들의 독특한 견해는 그 나라에서 영향력 있는 유럽인들—그들을 도울 수 있을 사람들—에게 그들이 못마땅하게 여겨지게 만든다. 그들은 종교적 몽상가로 회피되는데, 그들의 세상적 지혜의 결핍이 언제든지 그들의 보호자들을 쉽게 무마되지 않는 곤경에 휘말리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 공동체는 명백히 적대적인 정부와 씨름해야 하면서도, 그 누구로부터도 그리 강력한 지원을 받지 못한다. 이러한 어려움은 원주민 농민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그들은 시리아인 특유의 비열함으로, 처벌받지 않고 모욕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무례하게 대할 기회를 잡는다. 식민자들의 재산은 무시되고, 원주민 염소치기들은 자기 가축들을 곡물밭으로 몰아넣으며, 여러 차례 폭동이 일어났는데, 그 결과 재판이 벌어졌으나 식민자들은 아무 만족도 얻지 못하였다. "젊은이들의 무분별함은 그 공동체에 더 큰 어려움을 가져왔다. 그들은 무례함을 즉결 처벌로 갚았으며, 정부로부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자 많은 경우에 스스로 법을 집행하였다. 이리하여 그 식민지는 주변 마을들과 반목하게 되었으며, 그 적대적 감정은 민중 흥분의 어떤 계기에 매우 심각한 어려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식민지의 최종적 성공이라는 생각에 거스르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시리아의 기후는 유럽인에게 맞지 않으며, 해마다 그것은 햇볕과 독기(miasma)에 노출된 독일인들에게 틀림없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이파가 아마도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건강한 곳임은 사실이지만, 여기서조차 그들은 열병과 이질로 고통받으며, 만일 그들이 내륙으로 퍼지려 시도한다면 기후로 인한 어려움이 열 배로 늘어남을 발견할 것이다. "현 세대의 어린이들은 아마도 팔레스타인의 십자군(Crusading) 정착자들의 자녀들처럼 체격과 인내력에서 그들의 아버지들보다 못할 것이다. 원주민과의 통혼 사례가, 내가 믿기로는, 이미 일어났다. 그러한 결혼의 자녀들은 두 민족의 나쁜 자질을 결합할 가능성이 적지 않으며, 십자군 시대의 풀라니(Pullani)에 비길 만하다. 내가 보기에는, 오직 독일로부터의 끊임없는 보강에 의해서만 식민지의 본래 성격이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독일에 있는 전체 공동체는 오천 명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예언의 즉각적 성취에 대한 기대는 또한 그 공동체의 더 가난한 회원들 다수의 파멸을 초래하였는데, 그들은 자기 자본으로 살다가 그 성취가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다 써버렸다. 이리하여 그 식민지는, 본래 가장 많은 자본을 소유한 자들의 손에 재산이 점차 흡수됨으로써 해체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 그것은 사도적 단순함이라는 본래 성격을 잃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일부 회원들은 다른 이들의 종과 고용 노동자가 되고 있다. "돈이 없는 처지에 놓인 회원들의 자연스러운 욕구는 자기 능력껏 어떤 수단으로든 생계를 꾸리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을 위해 일하는 곳에서는, 전체로서의 식민지의 진보는 잊힐 가능성이 적지 않으며, 회원들은 그들의 여러 직업을 따라 가장 돈을 벌 수 있는 곳에서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흩어질 개연성이 매우 높다."
PALESTINE, MISSION IN Palestine, Mission in
팔레스타인, 선교 (Palestine, Mission In). 팔레스타인에 첫 선교사를 파송한 영예는 미국에 속한다. 1819년 10월 31일, 팔레스타인에 지명된 선교사 레위 파슨스 목사(Rev. Levi Parsons)와 플리니 피스크 목사(Rev. Pliny Fisk)(q.v.)에게 "미국 해외선교위원회 상임위원회의 지침"(Instructions from the Prudential Committee of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이 보스턴의 올드 사우스 교회(Old South Church)에서 전달되었다. 1821년 2월 17일 파슨스 씨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였고, 피스크 씨는 스미르나(Smyrna)에 머물렀다. 이듬해 피스크 씨는 그의 동료를 잃었는데, 그는 1822년 2월 10일 이 땅의 거처를 떠나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 공백은 곧 조나스 킹 목사(Rev. Jonas King)로 채워졌으며, 그는 피스크 씨 및 저명한 선교사 요셉 울프(Joseph Wolff)(q.v.)와 함께 1823년에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한편 또 다른 사업이 시작되었다. 요셉 울프 목사가 영국에 보낸 고무적인 소식은 고귀한 인물 루이스 웨이(Lewis Waye)로 하여금 동방에 선교를 세울 목적으로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도록 이끌었다. 이 사업에서 그는 W. B. 루이스 목사(Rev. W. B. Lewis)와 동행하였다. 웨이 씨는 안투라(Antunra)에 수도원을 빌려 선교사들이 그곳에서 스스로 준비할 수 있는 장소로 삼고자 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824년 의사인 돌턴 박사(Dr. Dalton)가 루이스 씨를 도와 예루살렘에 정착지를 세우도록 파송되었으나, 후자는 그해 가을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에 돌턴 박사는 두 미국인 선교사 킹과 플리니 피스크와 협의하여 그들의 거처를 위해 작은 수도원 하나를 빌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플리니 피스크는 그 협의가 완료되기 전인 1825년 11월에 사망하였고, 돌턴 박사는 다시 홀로 남게 되었다. 그를 돕기 위하여 니콜라이슨 목사(Rev. Mr. Nicolayson)(†1856)가 1825년 12월에 팔레스타인으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직후인 1826년 1월, 돌턴 박사는 베들레헴으로의 여행 중 걸린 병으로 사망하였다. 니콜라이슨 씨는 베이루트(Beiruit)로 돌아가 그 겨울 동안 더욱 철저히 언어를 연구하였다. 같은 해(1826) 여름에 반란이 일어났고, 니콜라이슨 씨는 사페드(Safed)로 물러나 1827년 6월까지 그곳에서 살며 유대인들과 많은 교류를 가졌다. 그 이후의 해들에 일어난 분란은 니콜라이슨 씨가 1832년까지 그 나라를 떠나 있게 만들었으며, 그 해에 그는 돌아와 가족과 함께 베이루트로 갔는데, 이는 파샤(pasha)가 아크레(Acre)를 거의 점령하였을 무렵이었다. 이제 그 나라는 완전히 열려 있었다. 개종한 유대인인 캘먼 씨(Mr. Calman)와 함께 니콜라이슨 씨는 그 나라를 두루 다니는 몇 차례의 여행을 시작하였으며, 베이루트로 돌아왔을 때 두 미국인 선교사 도지 박사(Dr. Dodge)와 W. M. 톰슨 목사(Rev. W. M. Thomson)가 토착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사역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도착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 또한 성도(聖都, the Holy City)에 집을 빌리려 시도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833년 가을에 니콜라이슨 씨와 그의 가족은 시온산(Mount Zion)에 있는 한 집으로 예루살렘에 이주하였다. 1834년 봄에 톰슨 씨가 도착하였고, 거의 같은 시기에 반란이 일어났다. 톰슨 부인은 그 경악과 여러 정황으로 인해 생긴 뇌염으로 1834년 7월 22일에 사망하였다. 니콜라이슨 부인은 몇 주 동안 앓았고, 그 직후에는 니콜라이슨 씨도 병이 들어, 그들은 베이루트로 떠나야 했다. 1835년 봄에 미국 선교회 소속의 도지 박사와 화이팅 씨(Mr. Whiting)가 도착하였으나, 도지 박사는 그가 나간 같은 해인 1835년 6월 28일에 사망하였다. 다른 선교사들이 미국 선교위원회에 의해 파송되었으나, 그 특정 선교지는 곧 그들에 의해 포기되었다. 베이루트 및 그 인근의 미국 선교 학교들, 다마스쿠스의 장로교 선교, 야파(Jaffa)의 독일인 식민지, 나사렛의 에든버러 진료소 등에 관한 설명은 *시리아, 선교 (SYRIA, MISSIONS IN)를 보라*. 1835년에 시온산에 히브리 교회를 세우는 문제가 영국에서 논의되었고, 1836년에 니콜라이슨 씨는 그에 관해 협의하기 위하여 영국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1837년 7월에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1년간 홀로 사역하였다. 이듬해 선교 부지의 매입이 이루어졌으며, 니콜라이슨 씨를 돕기 위하여 의료 선교사인 게르스트만 박사(Dr. Gerstmann)가 파송되었다. 같은 해에 페스트가 예루살렘을 덮쳤는데, 이 정황이 그 가장 유익한 기관인 예루살렘 병원의 첫 싹이 되었다. 그동안 선교 사역은 좋은 결과와 함께 수행되었다. 1839년 12월에 그 교회의 기초를 위한 굴착이 시작되었고, 1840년 2월 10일에 새 건물들의 기초가 놓였다. 같은 해에 유명한, 혹은 악명 높은 다마스쿠스 박해가 시작되었고, 개종한 유대인인 피에리츠 씨(Mr. Pieritz)가 박해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하여 중재하도록 니콜라이슨 씨에 의해 파송되어 다마스쿠스로 갔다(그의 *다마스쿠스에서의 유대인 박해에 관한 진술서(Statement respecting the Persecution of the Jews at Damascus*, 런던 1840)를 보라). 1840년의 골치 아픈 정치적 사건들을 지나쳐, 우리는 1841년에 이르는데, 이 해는 유대인 선교의 연대기에서 여러 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한 사건으로 특기되었다. 우리는 예루살렘 주교구(bishopric)의 설립을 언급하는 것이며, 그에 관한 설명은 본 *백과사전(Cyclopoedia)*에 표제어 "예루살렘, 성 야고보의 새 주교좌 (JERUSALEM, THE NEW SEE OF ST. JAMES IN)"로 실려 있다. 1841년 1월 21일에 새로 선출된 감독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는데, 그의 사제(chaplain)인 G. 윌리엄스 목사(Rev. G. Williams), 유대교에서 개종한 F. C. 이왈드 목사(Rev. F. C. Ewald)(†1874), 그리고 의료 선교사 맥고완 박사(Dr. Macgowan)가 동행하였다. 이듬해 5월에 개종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대학, 곧 집이 개설되었고(그러나 이는 1844년에 폐쇄되었다), 1844년 12월 12일에 병원이 개설되었다. 1845년 11월에 그 선교는 알렉산더 감독(bishop Alexander)이 이 땅에서의 생애 무대에서 갑작스럽게 소환됨으로써 심한 시련을 겪었다. 그 슬픈 사건은 가나안과 애굽 사이의 광야에서 일요일인 11월 23일 아침에 일어났다. 알렉산더 감독의 뒤를 이은 이는 현재의 감독 고바트(bishop Gobat)인데, 그는 이전에 몰타 개신교 대학(Malta Protestant College)의 부총장이었고, 여전히 성 야고보의 주교좌를 차지하고 있으며, 1846년 12월 23일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1847년에 팔레스타인 선교는 예루살렘의 교회와 선교에 상당히 중요한 한 공적 행위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 대사인 카울리 경(lord Cowley)이 포르테(Porte, 오스만 정부)의 개신교 신민들을 별도의 교회이자 공동체로 인정하는 칙령(firman)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1848년 12월 21일에 노동의 집(House of Industry)이 개설되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그 선교의 훌륭한 부속 기관으로 여겨지고 있다. 첫 개신교 감독이 성도에 들어온 일곱 번째 기념일이 그곳에 세워진 최초의 개신교 교회—여러 세기 만에 처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순수하고 성경적인 예배에 봉헌된 교회—의 봉헌을 위한 날로 선택되었다. 이 자리에서 감독이 설교한 본문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였다. 이는 1849년 1월 21일에 거행되었다. 1851년에는 그 선교의 필요와 상태를 새로이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니콜라이슨 씨에게 직접 협의를 위해 영국을 방문하도록 청하기로 결의되었고, J. C. 라이하르트 목사(Rev. J. C. Reichardt)가 친절하게도 그의 자리를 임시로 대신해 주기로 하였다. 후자는 그리하여 10월에 영국을 떠났는데, 특별한 임무를 위탁받았으니,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대로 니콜라이슨 씨를 대신하여 행하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1849년에 "그 선교를 더 효과적이고 만족스러운 토대 위에, 활용 가능한 그러한 지원과 함께 두기 위하여" 구성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졌던 현지의 지역 위원회와 협력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계획들은 이후 위원회가 종종 바라던 바, 곧 본국에서 어느 정도의 경험과 지위를 가진 영국인 성직자를 시온산의 사역에 합류시키는 일을 섭리적으로 성취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크게 촉진되었다. 이는 H. C. 크로퍼드 목사(Rev. H. C. Crawford)가 시리아에서의 선교 사역을 위하여 그 협회에 자신의 봉사를 제안하였을 때 이루어졌다. 그는 1852년 2월 21일에 성도에 도착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대의는 이로부터뿐만 아니라 다른 원천들로부터도 강화되었다. 교회선교협회(Church Missionary Society)는 팔레스타인에 한 사역자를 파송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겼고, 또한 고(故) 프로이센 왕도 그 직무가 개신교 공동체의 독일인 회원들을 포괄하도록 한 목사를 임명하였다. 이 후자의 직무를 위하여 F. P. 발렌티너 목사(Rev. F. P. Valentiner)가 선택되었는데, 그는 즉시 영혼의 구원을 위한 사역에서 자신보다 앞서간 이들과 협력하려는 간절한 소망을 표명하였으며, 이후 그 대의에 더없이 귀한 인물임을 입증하였다. 같은 해에 또 하나의 귀중한 추가가 여집사 기관(Deaconesses' Institution)의 설립으로 의료 부문에 이루어졌다. 한 질병의 시기 동안 적절한 간호사의 부족이 심각하게 느껴졌었다. 이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고바트 감독은 테오도르 플리트너 목사(Rev. Theodor Fliedner)에게 편지하여 카이저스베르트(Kaiserswerth)의 경건한 여집사 두 명을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1851년 4월에 플리트너 씨 자신이 네 명의 여집사를 데려왔다. 1854년에는 그 선교의 커져 가는 영향력을 저지하기 위한 일반적 성격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코헨 씨(Mr. Cohen)가 로스차일드 남작(baron Rothschild)과 영향력 있는 다른 유대인들에 의해 파견되어, 특히 예루살렘에서 동방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들의 처지를 개선할 목적으로 방문하였다. 그러나 그 선교에 타격을 가하려고 의도되었던 것이 도리어 그 선교를 더 잘 알려지게 하는 수단이 되었을 뿐이다. 1856년에 하나님께서 니콜라이슨 목사를 그의 안식으로 부르시기를 기뻐하셨고, H. C. 크로퍼드 목사가 그 선교의 수장에 임명되었다. 1860년 2월 5일에 맥고완 박사가 그의 안식으로 부름을 받았고, 그보다 몇 달 앞선 1859년 11월 22일에는 자비로 유대인 여성을 위한 기관(Institution for Jewesses)을 설립하였던 쿠퍼 양(Miss Cooper)도 부름을 받아 떠났다. 그 직후 건강 악화로 크로퍼드 씨는 예루살렘을 영구히 떠나야 했고, 그의 자리는 J. 바클레이 목사(Rev. J. Barclay)가 차지하였다. 예루살렘 선교의 현재 상태를 살펴보면, 우리는 가장 최근의 보고서로부터 다음을 기록할 수 있다. 감독 외에도 스물한 명의 사람이 고용되어 있으니, 곧 안수받은 선교사 세 명, 안수받지 않은 선교사 및 상급 평신도 사역자 두 명, 권서인(colporteur)·성경 낭독자(Scripture reader)·보관 담당자(depositary)·조수 여덟 명, 그리고 남녀 교사 여덟 명으로, 모두 런던 유대인 협회(London Jews' Society)에 의해 고용되어, 일부는 직접적인 선교 사역에, 병원, 노동의 집, 유대인 여성 기관, 남자 학교에 종사하고 있다. 또한 고바트 감독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학교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제는 그의 보살핌 아래 500명이 넘는 어린이가 있는 열세 개가 넘는 학교가 있다. 그곳에는 모든 교파가 대표되어 있으니—이슬람교도, 그리스인, 라틴인, 아르메니아인, 드루즈인, 아비시니아인 등이다. 우리는 또한 야파 문(Jaffa gate) 앞에 있는 감독의 *고아원(Orphan Asylum)*도 주목할 수 있는데, 이는 두 독일인 팔머(Palmer)와 발덴스페르거(Baldensperger)의 보살핌 아래 있다. 고대의 세겜(Sichem)인 나블루스(Nablus)에서는 선교사 팔샤이어(Fallscheer)가 감독을 위하여 일하고 있고, 그룰러(Gruhler)는 야파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은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다. 이 모든 기관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아비시니아, 애굽, 시리아, 칼데아에서의 선교를 위한 고바트 감독 기금(Bishop Gobat's Fund for Missions in Abyssinia, Egypt, Syria, and Chaldcea)*이 조성되었다. *일반 교회선교협회(Common Church Missionary Society)* 또한 예루살렘, 나사렛 등에 한 거점을 두고 있다. 후자의 곳에는 작은 아랍어 회중이 있는데, 그곳에서 감독의 사위인 첼러 박사(Dr. Zeller)가 복음주의 교회를 짓고 있으며, 이는 그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복음주의 교회 중 하나가 될 것을 약속한다. 모든 선교 사역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이 중심으로부터 그 지칠 줄 모르는 감독 아래 거점과 학교와 기관의 그물망이 팔레스타인 전역에 펼쳐지고 있으니, 이는 미래를 위한 큰 일들을 약속한다. *유대인 가운데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위한 런던 협회의 연례 보고서 및 월간 회보(Annual Reports and Monthly Proceedings of the London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ity among the Jews)*; *스코틀랜드 교회의 유대인 조사 선교 이야기(Narrative of a Mission of Inquiry to the Jews from the Church of Scotland)*(에든버러 1859); 앤더슨(Anderson), *동방 교회들(Oriental Churches)*(보스턴 1873) 제1권; 돌턴(Dalton), *동방 여행기(Reisebilder aus dem Orient)*(상트페테르부르크 1871); 칼카르(Kalkar), *이스라엘과 교회(Israel und die Kirche)*(함부르크 1869), 164쪽 이하; 슈테거(Steger), *이교도와 유대인 가운데서의 복음주의 선교(Die evangelische M.ission unter Heiden und Juden)*(할레 1857)를 비교하라. (B. P.)
PALESTRINA, GIOVANNI PERLUIGI DA Palestrina, Giovanni Perluigi Da
팔레스트리나,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Palestrina, Giovanni Perluigi Da)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음악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자신의 성(姓)을 로마 영지의 도시 팔레스트리나(Palestrina)에서 따왔는데, 그곳에서 1524년 매우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살에 그는 로마로 가서 클로드 구디멜(Claude Goudimel) 아래서 음악을 공부하였는데, 구디멜은 후에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St. Bartholomew massacre)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551년 팔레스트리나는 율리오 예배당(Julian Chapel)의 *마에스트로 디 카펠라(maestro di capella)*가 되었고, 1554년에는 미사곡 모음집을 출판하였는데, 그것이 헌정 대상인 교황 율리오 3세(Julius III)에게 매우 높이 인정받아, 교황은 그 저자를 교황 예배당의 가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더 높은 교황 예배당 직무의 자격으로 독신을 필수로 여긴 바오로 4세(Paul IV)가 교황직에 오르자, 팔레스트리나는 해임되었다. 한동안 그는 자신의 궁핍한 형편을 심히 느꼈으며, 성 마리아 마조레(St. Maria Maggiore)의 성가대 지휘자 임명조차 그에게 큰 위안을 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1571년에 음악 예술에 대한 그의 공헌이 보답을 받아, 그는 성 베드로 교회(St. Peter's)의 직무로 복귀하였다. 1560년까지 팔레스트리나는 교회를 위해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는데, 그 가운데 바이니(Baini)는 특히 *즉흥적으로 지은* 것들을 언급하며, "그것들은 학문의 깊이와 말의 뜻에 음악을 완벽하게 맞춘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고 한다.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가 교회의 음악을 개혁하는 일에 착수하여, 미사곡에 도입된 세속적인 가사와 음악을 정죄하였을 때, 팔레스트리나의 몇몇 작품이 모범으로 지목되었으며, 그 저자는 종교 예배의 이 부분을 개작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개혁된 방식으로 세 개의 미사곡을 작곡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교황 마르첼루스 미사(Mass of Pope Marcellus)*(그의 기억에 헌정됨)로 알려져 있으며, 그것보다 앞선 어떤 것보다 무한히 뛰어난 전형을 확립함으로써 교회의 음악을 구하였다고 여겨질 수 있고, 그 후 음악이 겪은 모든 개량 가운데서도 여전히 귀히 여겨지고 찬탄받는다. 그의 생애의 남은 해 동안 그가 산출한 작품들의 수와 질도 똑같이 주목할 만하다. 그의 출판된 작품들은 미사곡 열세 권, 모테트 여섯 권, 애가(Lamentations) 한 권, 찬송가 한 권, 봉헌송(Offertories) 한 권, 마니피캇(Magnificats) 한 권, 호칭기도(Litanies) 한 권, 영적 마드리갈(Spiritual Madrigals) 한 권, 그리고 마드리갈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생활에서도 똑같이 존경할 만하고 음악가로서 재능이 있었던 팔레스트리나는 여덟 교황의 재위 동안 가난한 삶을 헤쳐 나갔다. 그의 활동기 대부분의 날 동안 그의 봉급은 빈약하였고, 그의 출판물은 수익이 없었다. 그는 1594년에 죽었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은 학구적이고 진중하다. 그리고 교회를 위해 쓰인 그의 음악은, 그것에 맞는 종류의 장소에서, 장엄함과 화려함을 동반하여 들을 때 매우 감동적이며, 감수성 있는 마음에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연주회장이나 실내에서 그의 작품들은, 사적이든 세속적이든,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단순하고 견고하며 가벼운 화성에 대한, 또는 천재성보다 연구에 더 빚진 솜씨로 잘 짜인 푸가 기법의 정교함에 대한 취향을 기르지 않은 청중에게는 아무 매력이 없다. 팔레스트리나의 작품들이 비판을 넘어선 것은 아니지만, 그가 그의 모든 선배들과 동시대인들보다 머리와 어깨만큼 우뚝 솟아 있으며, 음악적 학문과 음악적 예술을 화해시킨 첫 음악가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요컨대 그의 작품들은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시대를 이룬다. 그의 전기는 아베 바이니(abbe Baini, 1828)와 빈터펠트(Winterfeld, 1832)가 썼다.
PALET Palet
팔레트(Palet) *BETH-PALET(벧-발렛)를 보라*.
PALETZ, STEPHEN Paletz, Stephen
팔레츠, 스테판 (Paletz, Stephen) 저명한 보헤미아의 신학자로, 15세기의 종교개혁 이전 운동 시기에 활동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후스(Huss)의 친구였으나, 결국 등을 돌려 그의 가장 격렬한 고발자이자 박해자가 되었다. 팔레츠의 초기 개인사에 관하여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를 위대한 보헤미아 종교개혁자의 친구이자 가장 친밀한 동반자로서 처음 만난다. 우리는 그들이 잠자리와 식탁을 함께 나누었다고 전해 듣는다. 팔레츠는 후스의 편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열렬히 위클리프(Wickliffe)의 저술과 견해를 칭송하였으며, 그것들을 옹호하여 자주 발언하였다. 그리하여 프라하(Prague)의 대학 앞에서 열린 한 공개 토론에서, 그가 위클리프의 견해를 제시하고 설명함으로써 선한 대의를 위한 연설 중 하나를 마쳤을 때, 그는 자신이 인용하던 책을 청중의 한가운데로 던지며 외쳤다. "누구든 한 마디라도 반박하려거든 하라, 내가 그것을 옹호하리라." 1409년경 당시 "위클리프파"라 불리던 후스의 가장 충실한 추종자들 중 몇이 벤첼 왕(king Wenzel)에 의해 투옥되었다. 이 박해받은 자들 가운데 팔레츠가 있었고, 마침내 십팔 개월의 수감 끝에 풀려났을 때, 그는 훨씬 더 잠잠해지고 교황파를 크게 두려워하며 나왔다. 후스는 이 모든 시간 동안 흔들림 없이 머물러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입증하였으나, 팔레츠는 철저히 겁에 질려 그에 못지않은 힘으로 자신의 무능을 입증하였다. 사실 그는 여전히 그 종교개혁 이전 개혁자의 추종자로 남아 있었고, 십자군을 위한 교황의 칙서(papal bull)가 나왔을 때(1411년 9월 9일) 팔레츠는 그 안에 "명백한 오류들"이 있음을 인정하였다(*Mon. Hussi,* i, 265). 그러나 1412년 초, 대학이 후스를 교황과 왕에 맞서 어느 정도까지 지지하는 것이 현명한지 심의하기 위하여 회의를 열었을 때, 팔레츠는 후스에게서 물러나 다시 교황파를 지지하였으니(*ibid.* i, 175), 그것이 너무도 비겁하고 무기력한 방식이어서 후스는 팔레츠에 관하여 "그는 게처럼 걷고 뒤로 돌아섰다"고 말하였다. 사실인즉, 팔레츠는 세속적 신중함에 지배되었다. 그는 그 개혁자의 대의가 절망적인 것임을 보았다. 수가 적은 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왕과 교황의 권력에 맞서야 했고, 성공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시의적절한 후퇴가 모든 과거의 잘못을 덮어 주고 곧 그를 교황의 총애로 회복시켜 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셈에서 상대를 빼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교황파는 그가 후스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맞설 것을 요구하였고, 자신의 판을 잃느니 차라리, 팔레츠는 그 싸움에 뛰어들어 가장 격렬한 고발자이자 박해자가 되었다. 후스는 성경의 지고하고 유일한 권위를 자신의 특별한 요점으로 삼았는데, 팔레츠는 가시적 교회 안에서의 교황 수위권의 옹호로 응수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자신의 옛 친구에게 능히 맞설 수 있는 자 이상이었고, 그는 자유롭고도 가차 없이 일격을 가하였다. 마침내 후스는 자신의 사안을 가지고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 앞에 나아갔다. 그곳으로 팔레츠 또한 후스를 뒤따랐으니, 그 교황파 옹호자의 쓰라린 열심은 그동안 그 개혁자의 건전한 논리의 맹공 아래 자주 당한 패배의 불쾌한 기억으로 인해 크게 격화되어 있었다. 추기경들이 사적 회의를 위해 공의회에 모여 후스를 어떻게 처리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팔레츠는 입장을 확보하여, 그 이단자가 다시 풀려나서는 안 된다고 촉구하고 주장하였으며, 그들은 마침내 팔레츠의 방침을 채택하였다. 이 일이 후스에게 전해지고, 그가 공의회 앞에서의 공개 청문을 주장하였을 때, 팔레츠는 다시 술책과 음모를 동원하여 후스의 요청에 대한 호의적인 회답을 막았다. 팔레츠는 후스의 웅변의 힘을 알았고, 그도, 이 음모에서 그와 동맹한 다른 교황파도, 그것이 공의회를 상대로 시험되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그의 협력자들도 후스를 청문 없이 정죄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지기스문트 왕(King Sigismund)이 그러한 행위의 불의함을 보고 그 음모를 막았으나, 허락된 청문에서조차 팔레츠는 자신의 경쟁자를 논쟁에서 이길 기회를 늘 주의 깊게 노렸다. 이 무렵 그의 행보는 여러 면에서 경멸스러운 것이었으나, 팔레츠는 아마도 그 모든 적의에도 불구하고 단지 후스의 굴욕을 구하였을 뿐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 무렵 팔레츠를 지배한 것은 당파적 정신이었다는 점에서 정상참작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후스가 정죄받고 그의 이단 철회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질 때, 팔레츠는 옥중의 후스를 방문한 이들 가운데 있었으며, 그가 자신의 옛 친구를 대한 온유한 태도는 그가 전혀 감정이 없는 자가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가 본래의 재능과 지칠 줄 모르는 근면으로 그 자신이 위대하였음에도, 그보다 더 위대한 한 사람의 면전에 있었음을, 곧 그 사람은 이 모든 탁월함에 명예와 진실성의 덕을 결합하였기에 그러함을 보여준다. 팔레츠는 후스에 의해 그의 임종의 순간에 그의 고해 사제로 선택되었으나, 그 교황의 종은 이 박해의 슬픈 결말을 너무도 절실히 느낀 나머지 후스의 요청에 응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예로니모(Jerome)가 박해받을 때, 팔레츠는 다시 고발하였으나, 덜한 신랄함과 끈질김으로 하였다. 팔레츠는 15세기 중엽경에 죽었다. 그의 저술 중 지금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길렛(Gillett), *후스의 생애와 시대(Life and Times of John Huss)*, 제1권 및 제2권; 위에서 언급한 대로 *Mon. Hussi*; 젠킨스(Jenkins), *추기경 율리아누스의 생애와 시대(Life and Times of Cardinal Julian)*, 46쪽; *Ep. Huss.* i, 그의 *Opp.* 제1권 수록; 팔라츠키(Palacky), *보헤미아사(Bohmische Geschichte)*, iii, 161쪽 이하를 보라.
PALEY, WILLIAM, DD Paley, William, Dd
페일리, 윌리엄(Paley, William), D.D. 저명한 영국의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18세기의 가장 이름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며, 1743년 7월 피터버러(Peterborough)에서 태어났다. 그는 요크셔(Yorkshire) 웨스트 라이딩(West Riding)의 크레이븐(Craven)에 있는 유서 깊고 존경받는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가 유아였을 때 그의 아버지는 가문의 소유지 인근인 요크셔의 기글스윅(Giggleswick)으로 이주하였는데, 그곳에 있는 킹 에드워드 학교(King Edward's School)의 교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아버지의 집에서 교육받았으며, 곧 뛰어난 능력과 학구적인 기질, 그리고 원숙하고 분별력 있는 지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7세 때 그는 케임브리지(Cambridge)의 크라이스트 칼리지(Christ's College)에 사이저(sizar, 면학생)로 입학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몇몇 방탕하고 방종한 동무들의 영향에 이끌려, 대학 생활의 처음 두 해는 완전히 헛되이 흘려보내거나 잘못 보냈다. 이 방랑하는 생활의 나쁜 열매는 그를 더 슬프되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지혜와 함께 이 수치스러운 교제에서 스스로를 풀어내도록 도와준 그 불굴의 정신이 찾아왔고, 그는 헌신적인 학업의 길로 나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의 진보가 어찌나 빨랐던지 1763년에 그는 최고의 영예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그는 그리니치(Greenwich)의 한 학원에서 3년 동안 가르쳤다. 1765년에 그는 라틴어 산문 논문에서 첫 번째 상을 받았는데 — 그 주제는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을 각각이 한 민족의 도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비교함*이었고, 여기서 그는 그답게 후자(에피쿠로스 철학)를 옹호하는 논변을 폈다. 이듬해 그는 자신의 모교인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펠로(fellow, 특별연구원)로 선출되었으며, 곧이어 도덕·정치 철학뿐 아니라 신약성경에 관한 로(Law) 박사의 공개 강의에서 그의 동료가 되었다. 이 초기의 일은 페일리의 마음을 어떤 주제들로 이끌었으니, 그가 더 원숙하게 연구한 뒤 그것들을 저작으로 세상에 내놓아 저술가로서 그에게 광범위한 명성을 안겨 주었다. 대학 강사로서나 설교자로서나 그는 건전한 분별력과 신중함, 특히 가장 난해하고 어려운 주제들을 단순화하여 가장 미천한 자의 이해 수준까지 끌어내리는 비범한 솜씨로 크게 존경받았다. 그는 1767년에 사제직에 들어갔고, 1776년 결혼하면서 당연히 자신의 펠로직을 내놓아야 했다. 그의 초기 후원자인 로는 칼라일(Carlisle)의 주교가 되어 있었으며, 페일리의 공로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제 교회 안에서 그를 승진시켜, 먼저 컴벌랜드(Cumberland) 댈스턴(Dalston)의 사제직(vicarage)을, 다음으로 웨스트모얼랜드(Westmoreland)의 애플비(Appleby)를 그에게 수여하였고, 마침내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칼라일의 부주교(archdeacon, 1782년)와 교구의 챈슬러(chancellor, 1785년)에까지 올랐다. 그는 노예무역 폐지의 큰 벗이었으며, 1789년 하원에서 첫 대규모 토론이 예상되었을 때, 짧지만 적절하고 분별 있는 논고를 작성하였는데, 그 제목은 *노예 무역이 폐지될 경우 노예 상인과 보유자가 공공 비용으로 금전적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부당한 주장에 반대하는 논평*이었으며, 이를 위원회에 보냈다. 더럼(Durham)의 주교는 그를 크게 존경하였고, 페일리가 폐지 운동에 바친 값진 봉사를 인정하여, 연 1,200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비숍 웨어머스(Bishop Wearmouth)의 값진 교구목사직(rectory)을 그에게 수여하였다. 그의 말년은 대체로 문필 노동에 바쳐졌는데, 손상된 신체 상태로 인해 극히 고통스러웠으나, 그는 자신의 육신의 고통을 온유하게 견디며,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자애로운 처분을 늘 신뢰하였다. 페일리의 경건은 그가 생애를 더해 갈수록 합당한 진전과 함께 더욱 뜨겁고 고양되고 굳건해졌다. 그는 자신의 질병의 악성에도 불구하고 1805년 5월 25일까지 연명하다가, 그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페일리 박사는 비만의 경향이 있었으며, 그의 용모는 그를 돋보이게 한 지성적·도덕적 속성 — 곧 온화함, 자비, 강한 양식(良識), 맑은 판단력 — 의 표지가 되지 못하였다. 그의 벗들 가운데 페일리 박사보다 더 높이, 더 정당하게 존경받은 사람은 없었으니, 그의 문필적 성취는 다만 그의 솔직함과 호의라는 많은 사랑스러운 품성에 의해서만 능가되었다. 의견의 문제에서 그는 자유로운 정신을 지녔고 너그러웠다. 그는 자유로운 탐구의 벗이었고, 위에서 노예무역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 보았듯이 시민적 자유의 원리를 유능하게 지지하는 자였다. 그의 신학에서 그는 이단의 의심을 받았으니, 아리우스파(Arian)의 견해에 강하게 기우는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저술가로서 그는 독창성으로보다는, 한 주제를 그 모든 국면에서 파악하여 전적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루는 그 지성의 힘으로, 그리고 자신의 논변을 배치하고 끝까지 따라가는 그 완숙한 솜씨로, 또한 철학적 탐구에 특히 알맞은 — 강하고 정확하고 명료하며, 비록 때로는 소박하더라도 그의 뜻을 가장 강력하고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고 예시하는 단어와 어구가 풍부한 — 문체로 두드러진다. 페일리의 철학적 가르침을 늘 기꺼이 지지하지는 않는 제임스 매킨토시 경(Sir James Mackintosh)은 저술가로서의 페일리에 대하여 이러한 열렬한 찬사를 보낸다: "이 탁월한 저술가는, 클라크(Clarke)와 버틀러(Butler) 다음으로, 18세기 영국 교회의 가장 빛나는 영광들 가운데 마땅히 자리매김되어야 하며, 철학사에서는 자연히 터커(Tucker) 다음에 놓이는바, 칭찬할 만한 관대함으로 그는 터커에게 자신의 광범위한 빚을 인정한다. 그의 문체는 그 종류에서 우리 언어의 어느 것 못지않게 완전에 가깝다"(*Works *[1854], 1, 183). 페일리의 저작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정치 철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Moral and Political Philosophy*, 1785년; 알렉산더 베인[Alexander Bain]의 논고와 주석 첨부, 1853년; 리처드 훼이틀리[Richard Whately] 주석, 1859년)이다. 그것의 전반적 윤곽은 그가 대학에서 튜터(tutor)로 있을 때 자기 제자들에게 강의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원리"의 제1부, 즉 도덕 철학만을 다루는 부분에서(명예의 법, 국법, 그리고 행위의 규칙으로서의 성경에 관해 어느 정도 설명하고; 로크[Locke]를 따라 도덕 감각, 곧 도덕 판단의 선천적 능력이라는 관념을 거부하며; 인간의 행복과 덕으로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정의한 뒤), 페일리는 그 원리들을 설명하고 자기 체계의 기초를 놓기에 이른다. 자기 체계의 기초에 논증적 과학의 정밀성을 너무 많이 도입하려는 그의 욕망은, 때때로 그로 하여금 본성상 불확정적이며 정밀하고 형식적인 정의의 한계 안에 가둘 수 없는 것들을 정의하게 만들었다. *명예의 법*과 *덕*에 대한 그의 설명이 이러한 성격을 띤다. 그는 또한 분리적(disjunctive) 명제들을 내세우고 마치 그것들이 망라적인 것처럼 그것들 위에서 추론하기를 지나치게 좋아하는데, *정의(正義)를 시행하는 방법들*의 사례에서 그러하다. 그리하여 그의 적용은 때때로 속박되고 그의 결론은 결함이 있다. 이 주제들에 관한 그의 견해의 요지는 제2권 "*도덕적 의무에 관하여*"에서 발견된다. 사람은 타인의 명령에서 비롯되는 격렬한 동기에 의해 촉구될 때 의무를 진다고 일컬어진다. 도덕적 문제에서 그 동기는 미래의 상이나 벌에 대한 기대이며, 그 명령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사적 행복이 동기이고, 하나님의 의지가 규칙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는 어떻게 알려지는가? 두 원천으로부터이니 — 곧 성경의 선언과 본성의 빛이며, 어떤 행위에 관한 하나님의 의지에 본성의 빛으로 다다르는 방법은 그 행위가 일반적 행복을 증진하거나 감소시키는 경향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페일리는 "무릇 합당한(expedient) 것은 옳다. 어떤 도덕 규칙의 효용(utility)만이 그것의 의무를 구성한다"는 자신의 원리에 다다른다. 그 효용은 일반적 결과들을 고려함으로써 결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전체적으로, 장기적으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결과뿐 아니라 부수적이고 먼 모든 결과에서도 합당해야 한다. 자신의 원리를 확정한 뒤, 그는 그것을 도덕적 의무들을 규정하는 데 적용하기에 나아간다. 그는 의무를 셋으로 나눈다: 곧 사람이 자기 이웃에게 지는 의무, 즉 상대적 의무; 자기 자신에게 지는 의무; 그리고 하나님께 지는 의무이다. 첫째 부류는 확정적이거나 비확정적인데 — 약속, 계약, 맹세 같은 것이 확정적이다. 약속을 지킬 의무는, 합당성의 원리에 따르면, "약속에 대한 신뢰가 인간 생활의 교제에 필수적"이라는 사정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약속이 해석되어야 할 의미는 약속하는 자가 알면서 또한 기꺼이 그 약속을 받는 자의 마음에 전달하는 그 의미이다. 계약은 상호 약속이며, 따라서 같은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그 결과 한쪽에 의해 기대되고 다른 쪽에 의해 그렇게 기대되는 줄로 알려진 것은 무엇이든 계약의 일부 또는 조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맹세는 "animus imponentis", 곧 부과하는 자가 그것으로 의도하는 의미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비확정적 의무는 자선, 감사 등이다. 그것들이 비확정적이라 불리는 까닭은 그 실행에 정밀하고 형식적인 한계를 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첫째 부류의 의무에 속하는 또 다른 종류는 양성(兩性)의 구성에서 비롯된다. 둘째 부류의 의무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지는 것이다. 그 효과가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의무나 죄악은 거의 없으므로, 그것들에 관해서는 적게 언급된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지는 의무는 자기 기능의 보살핌과 자기 인격의 보존, 그리고 그 둘 중 하나를 해치는 경향이 있는 행위들에 대한 경계에 있다. 셋째로 나뉜 의무는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이다. 한 의미에서 모든 의무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저자이실 뿐 아니라 대상이기도 하신 의무들이 있으니, 곧 예배와 경외이다. 정치적 지식의 요소들에 바쳐진 제2부는, 시민 정부의 근거와 그에 대한 복종의 이유를 규정함에 있어, 그의 도덕 체계의 기초를 이루는 것과 같은 원리, 곧 "효용"이 일관되게 관통한다. 공공의 효용이 모든 정부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최고 권력의 획득에서 어떤 불법이나 형평의 위반, 또는 사기와 폭력이 자행되었더라도, 일단 국가가 평화롭게 안정되고 그 신민들의 선이 증진되면, 그것에 대한 복종이 의무가 된다. 반면에 지배 권위의 본래 정당성이 어떠하였든, 그것이 부패하고 공공 복리를 소홀히 하며 피치자의 기대를 만족시키기를 그친다면, 그것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세우는 것이 옳다. 교회와 국가의 결합을 견지하는 정부 아래서 글을 썼던 페일리는 당연히 종교적 확립(religious establishments)을 두드러지게 다루었으며, 여기서도 그는 합당성의 교리가 자신의 견해와 결론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한다. 그는 신약성경에 어떤 형태의 교회 정치도 규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종교적 확립은 기독교의 일부가 아니며, 다만 그것을 가르치는 수단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 수단은 그 효율성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며; 이것이 유일한 기준이고; 따라서 교회 확립의 권위는 그 효용에 근거한다. 같은 이유로 시험(tests)과 서명(subscriptions)은 가능한 한 단순하고 쉽게 만들어져야 하지만; 현재 필요가 이례적인 엄격성을 요구하지 않을 때, 신앙 고백은 화평의 조항(articles of peace)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종교를 확립함에 있어, 만장일치를 유지할 수 없는 곳에서는 다수의 의지가 참고되어야 하니, 다른 어떤 방안보다 이 방안에 더 적은 악과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에서 박해는 정죄되고 관용은 정당화되는데, 전자는 결코 어떤 진정한 의견의 변화도 낳지 못한 반면, 후자는 탐구를 장려하고 진리의 진보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페일리가 자기 체계의 토대로 삼는 원리들에 대해서는 자주 반론이 제기되었으나(두걸드 스튜어트[Dug. Stewart], *Elements, *제2권, 그리고 그의 *Philos. of the Active and Moral Powers; *로버트 홀[Robert Hall], *Infidelity*에 관한 설교; 프랜시스 웨이랜드[Fr. Wayland], *Elem. of Moral Philos.; *그리고 웨인라이트[Wainwright]의 옹호, *Paley's Theory of Morals, *등[1830] 참조), 그의 예시들의 명료함과 적절함은 모든 칭찬을 넘어선다. 그의 논고가 심오하게 철학적인 저작으로 여겨질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쨌든 영국인에 의해서조차 일찍이 쓰인 것 중 가장 명료하고 가장 분별 있는 것 중 하나이며; 적어도 그것은 오랫동안 정치 철학을 감싸 왔던 얕고 흐릿한 신비주의를 망각 속으로 쓸어 내었다. 그것이 "도덕적 의무"의 깊이를 헤아리는 데 실패하였다 하더라도, 이 실패에는 변명거리가 있다. 블래키 박사(Dr. Blackie)는 말한다, "페일리의 덕에 대한 정의 — 곧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여 인류에게 선을 행하는 것 — 는 그 사람, 그 책, 그 시대, 그 나라, 그리고 그가 속했던 직분을 감탄스럽게 특징짓는다. 그것은 사실의 문제로 받아들여질 때, 십중팔구 프랑스 혁명 직전 세대에 살았던 영국 그리스도인 1,000명 중 999명의 감정을 표현하였을 정도의 정의이다"(*Four Phases of Morals, *p. 308). 1790년에 페일리의 가장 독창적이고 값진 저작인 *호라이 파울리나이*(*Horæ Paulinæ*), 곧 *그의 이름을 지닌 서신들을 사도행전 및 서로 간에 비교함으로써 입증한 성 바울의 성경적 역사의 진실성*이 출간되었다. 이 감탄할 만한 저작의 목표는 매우 다양한 "의도되지 않은 일치점들(undesigned coincidences)"을 통하여, 그 시대의 통상적인 불신앙적 가설, 곧 신약성경이 "교묘하게 꾸며낸 우화"라는 가설의 개연성 없음을, 아니 불가능함을 증명하는 데 있다. 그것은 그의 벗 존 로(John Law) — 당시 아일랜드 킬랄라(Killala)의 주교였으며, 페일리가 자신의 성직 임명 대부분을 그의 호의에 빚지고 있었던 — 에게 헌정되었다. 1794년에 페일리의 다음으로 중요한 저작인 *기독교 증거론 개관*(*A View of the Evidences of Christianity*, 27년 동안 17번 재판되었고, 자주 편집되어 널리 보급되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훼이틀리에 의함[N.Y. 1865. 12mo])이 출간되었다. 그것은 독창성에서 그 전작에 견줄 수는 없으나, 라드너(Lardner)와 더글러스(Douglas) 주교 같은 저명한 학자들의 노고를 활용한 솜씨는 대체로 가장 능란하고 효과적이라 평가되니, 그 자료가 그토록 능숙하게 가공되고 그토록 솜씨 있게 배치되며, 그 논변이 그토록 명료하고 설득력 있는 형태로 독자 앞에 제시되어, 그것은 그 종류의 가장 값지고 중요한 책 가운데 하나로 선언되어야 한다. 비범한 능력으로 펼쳐지고 예시된 그 논변은 간략히 이러하다: 계시는 오직 기적적 개입의 수단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지존자(至尊者)의 유일한 특권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종교를 확증하기 위하여 기적들이 행해졌다면, 그것들은 그 종교의 신적 권위에 대한 하나님의 가시적 증언이다. 따라서 만일 기독교를 위하여 주장된 기적들이 실제로 행해졌다면, 기독교는 참된 종교임에 틀림없다. 기적들이 실제로 행해졌는지 아닌지는 그것들의 증인이라고 공언한 자들, 곧 사도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의 신빙성에 달려 있으며; 그들의 신빙성은 다음 고려에서 입증된다 — "그들은 자기들이 전한 기사(記事)들을 증언하기 위하여, 그리고 오직 그 기사들에 대한 자기들의 믿음의 결과로서, 자발적으로 떠맡은 수고와 위험과 고난 속에서 자기들의 생애를 보냈으며; 또한 같은 동기에서 새로운 행위의 규칙에 자기들을 복종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속을 수 없었으니, 그리스도가 사기꾼이었는지 아닌지를 그들은 알았을 것이고; 그가 행한 기적들이 실제였는지 가장된 것이었는지를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속이는 자일 수도 없었으니, 그들은 속임으로써 이룰 어떤 알 만한 목적도 없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잃을 뿐이었다. 반면에 잠잠히 있음으로써 — 그 일을 묻어 둠으로써 — 그들은 자기들이 견딘 고난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거짓인 줄 알면서 그것을 퍼뜨리기 시작하고, 그러면서도 그것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명백한 결과 — 적대와 증오, 위험과 죽음 — 에 자기들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전혀 생각할 수 없으며, 인간 행동의 모든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1802년에 페일리는 그의 모든 저작 중 아마도 가장 널리 인기 있는 *자연 신학, 곧 신의 존재와 속성의 증거*(*Natural Theology, or Evidences of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the Deity*)를 출간하였는데, 그러나 이것은 니우언테이트(Nieuwentyt)라는 한 네덜란드 철학자의 저작인 *종교적 철학자*(*the Religious Philosopher*)에 — 그 영역본이 1718-1719년에 나왔다 — 근거하고 있고 또 대체로 그것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 표절은 매우 명백하나, 페일리 자신의 저술 방식으로 해명되어 왔다. *자연 신학*은 그가 대학 튜터였을 때 쓴 그의 흩어진 종이와 메모들에서 "엮어 만든" 것이며, 그것이 처음 편찬된 이후 경과한 그토록 긴 시간 동안 페일리는 그것들을 끌어온 출처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또한 그가 크게 개선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 공정하다 — "nihil tetigit, quod non ornavit(그가 손댄 것 가운데 그가 꾸미지 않은 것은 없다)." 페일리는 원전에서 혼란스럽고 비논리적이며 지루하던 것을 명료하고 인상적이며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또한 차용한 것보다 더 많이 더하였으며; 그의 다른 모든 저작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자료는 완숙한 판단으로 배치되고 그 논변은 끝까지 추구된다. 그의 목적은 눈에 보이는 창조의 작품들 속에 자비로운 설계(design)가 있다는 사실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고의 설계하는 지성(Supreme Designing Intelligence)의 존재가 추론되고; 그분의 인격성, 단일성, 그리고 선하심이 증명된다. 그것은 영어로 된 가장 설득력 있는 책 중 하나일 뿐 아니라 가장 즐거운 책 중 하나이다. *쿼털리 리뷰*(*Quarterly Review*)는 말한다, "신앙의 옹호자라는 성격에서 우리는 페일리를 거의 순전한 감탄으로 떠받든다; 다른 어떤 성격에서든 그에 대한 칭찬은 더 제한되어야 한다. 페일리가 철저히 정통하였던 신학의 분야는 *증거론*이었다. 그는 *교리들*에 대한 완전한 탐구에 필요한 자질은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어떻게 보든, 우리는 언제나 평이하고 영민하며 실천적인 요크셔 사람의 건전한 양식이 종교의 이 분야들에서 발휘되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불신자가 그의 배열 순서대로 *증거론*을 읽고서도 흔들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자연 신학*은 가장 높고 가장 고귀한 의미에서의 철학이니, 과학의 전문 용어 없이도 과학적이며; 심오하되 그 깊이가 가려질 만큼 명료하다. 그는 자기 예시들을 어디서 가져오든 개의치 않으니, 다만 그것들이 목적에 맞기만 하면 된다." 주석과 과학적 예시를 곁들인 이 저작의 값진 판본이 브로엄 경(lord Brougham)과 찰스 벨 경(Sir C. Bell)에 의해 출간되었는데(1836-39년), 전자가 자연 신학에 관한 서론적 강론을 붙였다. 이 강론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은 자연 신학이 근거하는 증거의 본성과 성격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으며, 그것이 물리 철학이나 정신 철학 못지않게 귀납의 과학임을 증명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둘째 부분은 그 연구가 줄 수 있는 이점과 즐거움에 대한 고찰에 바쳐진다. 그 책에는 그 주제와 관련된 여러 형이상학적 논점에 관한 몇몇 주석이 부록으로 붙어 있다. 위의 저작들 외에도 페일리는 여러 설교와 소책자의 저자였다. 그의 전집의 여러 판본도 출간되었다. 그의 아들 에드먼드 페일리(Edmund Paley) 목사가 1838년에 출간한, 사후 설교들도 담고 있는 네 권짜리 판본은 표준판으로 여겨질 수 있다. *생애*(*Life*)가 딸린 미국판도 있다(Phila. 1851, 8vo). 이미 인용한 권위들 외에, W. 미들리(W. Meadley)의 *윌리엄 페일리 회고록*(*Memoirs of Wm. Paley,* Sunderl. 1809, 8vo, 및 여러 차례); 우에버베크(Ueberweg), *Hist. of Philos. *ii, 91, 391; 맥코시(McCosh), *Scotch Philos. *p. 301; 모렐(Morell), *Hist. Philos. *19*th Century, *p. 103, 267 sq.; 하겐바흐(Hagenbach), *Hist. of Doct. *vol. ii(색인 참조); *The Quart. Rev. *(Lond.), ii, 83 sq.; 9:388 sq.; *Encyclop. Brit. s.v.; English Cyclop. s.v.*; 앨리본(Allibone), *Dict. of Brit. and Amer. Auth. s.v.*를 보라.
PALGRAVE, FRANCIS, SIR Palgrave, Francis, Sir
팔그레이브, 프랜시스 경 (Palgrave, Francis, Sir) 열성적이고 명민한 고고학자로서, 또한 역사가로서 똑같이 두드러진 영국 기사로, 1788년 런던에서 *코헨(Cohen)*이라는 이름의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는, 여덟 살에 호메로스(Homer)의 *개구리와 쥐의 전쟁(Batrachomyomachia)*을 라틴어 번역본에서 프랑스어로 옮겼다는 사실(1797, 4절판)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코헨이 언제 그리스도교회(Christian Church)에 합류하였는지는 진술할 수 없으나, 아마도 그가 이너 템플(Inner Temple)의 법정 변호사로 부름받기(1827) 훨씬 전, 그리고 기사의 영예를 받기(1832) 전이었을 것이다. F. 팔그레이브 경은 여러 해 동안 영국 공공 기록물의 부보관관(deputy keeper of the Public Records of Britain)이었다(약 1836년부터). 그는 1861년 7월 6일에 죽었다. 그의 많은 저작 가운데 우리는 다음의 것들만 언급하겠다: *영국 공동체의 발흥과 진전; 앵글로색슨 시대, 정복 이전에 통용된 법률과 관습에서 비롯된 앵글로색슨 정책과 제도들을 담음(The Rise and Progress of the English Commonwealth; Anglo-Saxon Period, containing the Anglo-Saxon Policy and the Institutions arising out of Laws and Usages which prevailed before the Conquest)*(1832, 2 *권*): *— 영국사; 앵글로색슨 시대(The History of England; Anglo-Saxon Period)*(1831, 1850, 1868; 머리[Murray]의 "*가정 문고[Family Library]*" 제21권): *—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스코틀랜드 및 영국 왕실 간 거래를 예증하는 문서와 기록들(Documents and Records illustrating the History of Scotland and the Transactions between the Crowns of Scotland and England)*(1837): *— 중세의 진실과 허구: — 상인과 수사(Truths and Fictions of the Middle Ages: — The Merchant and the Friar)*(1837, 1844): — *노르망디와 영국의 역사(The History of Normandy and of England)*(1851, 1857, 1864, 4권). 다른 많은 저작 외에도 그는 *런던 계간 평론(Lond. Quar. Rev.)*과 다른 정기 간행물에 글을 기고하였다. 그의 역사 저술에서 그의 큰 공로는 원본 문서를 광범위하게 사용한 데 있으니, 그는 그것의 도움으로 중세의 역사와 사회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스스로 매우 크게 넓혔을 뿐만 아니라, 정보의 원본 자료를 주의 깊게 연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을 다른 이들에게도 지적해 주었다. 다음을 보라. 알리본(Allibone), *Dict. of Brit. and Amer. Auth.* 해당 항목; *Edinb. Rev.* 1832년 7월; 1852년 1월, p. 153; 핼럼(Hallam), *Middle Ages,* 보유 주석 서문, 1, 11 (뉴욕, 1872); 스미스(Smyth), *Lectures on Modern History,* 강의 8; *Einb. Rev.* 66, 36; *Westminster Rev.* 1857년 7월; (런던) *Athenceun,* 1857, 2월 28일; *North Amer. Rev.* 1858년 4월; 마갈리우스(Margaliouth), *Vestiges of the Historic Anglo-Hebrews in East Anglia* (런던, 1870), p. 105 이하; 픽(Pick), *Evangel.* (Lutheran) *Quar. Rev.* 1876년 7월, p. 373.
PALI Pali
팔리 (Pali)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Prakrit]*, q.v.[해당 항목 참조]의 와전)는 불교도(Buddhists)의 거룩한 언어의 이름이다. 그 기원은 *프라크리트(Prakrit)*라는 일반 명칭으로 묶이는, 고대 인도의 하나 또는 여러 통속 방언 가운데서 찾아야 하는데, 이것들은 로망스어(Romance languages)가 그 초기에 라틴어에 대하여 가졌던 것과 비슷한 관계를 산스크리트어(Sanscrit)에 대하여 가진다. *산스크리트(SANSCRIT)를 보라.*
PALI VERSION OF THE SCRIPTURES Pali Version of the Scriptures
팔리어 성경 역본(Pali Version Of The Scriptures) 팔리어(Pali)는 비록 더 이상 어느 나라에서도 일상어가 아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실론(Ceylon)섬, 버마(Burman) 제국, 시암(Siam), 라오스(Laos), 페구(Pegu), 아바(Ava), 그리고 인도 동부 반도의 거의 전역에 걸친 불교도들의 종교적·학술적 언어로 확립되어 왔다. 언어로서 그것은 산스크리트어(Sanscrit)에서 직접 파생되었으며, 아마도 붓다(Buddha)의 출생지인 마가다(Magadha)의 토착어였을 것이다. 팔리어로의 번역은 1813년에 콜롬보 성서 공회(Colombo Bible Society)의 후원 아래, 톨프레이(Tolfrey) 씨에 의해, 두 명의 학식 있는 불교 승려의 도움을 받아 시작되었다. 그 역본은 빌레몬서의 끝까지 진척되었을 때, 1817년에 톨프레이 씨가 죽었다. 1825년에 벤저민 클러프(Benjamin Clough) 목사가 그 작업을 재개하였고, 마침내 1835년에 신약성경 전체가 팔리어로 인쇄되었다. 톨프레이 씨를 도와 번역에 참여하였던 불교 승려 중 한 사람은 기독교로의 진실한 회심자가 되었으며, 그 후 이 중요한 작업의 완성과 개정에 자신의 온 정력을 바쳤다. *Bible of Every Land, *page 91 sq.를 보라. (B.P.)
PALICI Palici
팔리키 (Palici) (곧 *다이몬들[daemons]*), 시칠리아(Sicily)의 에트나산(Mount AEtna) 인근에서 고대에 숭배된 신들이다. 그들은 제우스(Zeus)와 헤파이스토스(Hephaestus)의 딸 탈레이아(Taleia) 사이의 쌍둥이 아들이라고 일컬어졌다. 먼 옛날에는 그들에게 인신 제사로 제물이 바쳐졌다. 팔리키의 신전은 도망친 노예들에 의해 피난처로 의지되었다.
PALILIA Palilia
팔릴리아(Palilia) 고대 로마의 축제로, 목자들의 신 *팔레스*(*Pales*)를 기리어 해마다 4월 21일에 거행되었다. 같은 날에 이 축제는 후에 로물루스(Romulus)에 의한 도시의 첫 건설을 기념하는 것으로 지켜졌다. 이날 행해진 의식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오비디우스(Ovid)의 *파스티*(*Fasti*)에 나온다. 이 축제가 향한 첫째 대상은 불과 연기에 의한 공적 정결례였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시월의 말(October-horse, q.v.)의 피와, 케레스(Ceres) 축제에서 희생된 송아지들의 재와, 콩의 껍질을 태웠다. 사람들은 또한 물로 뿌림을 받았으며; 그들은 샘물에 손을 씻고, 머스트(must, 포도 과즙)를 탄 우유를 마셨다. 저녁에는 외양간을 물로 청소하고, 월계수 가지를 사용해 물을 뿌렸으며, 그 가지들은 또한 장식으로 매달았다. 양과 그 우리를 위한 정화의 연기를 내기 위하여 목자들은 유황, 로즈메리, 전나무 목재, 그리고 향을 태웠다. 그 밖에도 과자, 기장, 우유, 그리고 다른 먹을 것들로 이루어진 제물이 바쳐졌으며, 그 후에 목자들이 그들의 주재하는 신 팔레스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런 다음 짚 더미로 만든 불을 피웠고, 흥겨운 음악 가락 가운데 양들을 연기 사이로 세 번 지나가게 함으로써 정화하였다. 모든 의식은 야외에서의 잔치로 마무리되었다. 후대에 팔릴리아는 목자 축제로서의 성격을 잃고, 로마의 건축이 시작된 그날을 기념하여 오로지 거행되기에 이르렀다. 칼리굴라(Caligula)는 자신이 왕좌에 오른 날을 팔릴리아라는 이름으로 축제로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가드너(Gardner), *Faiths of the World, *p. 589, 590을 보라.
PALIMPSEST Palimpsest
팔림프세스트 (Palimpsest) (παλίμψηστος, *다시 지워진*), 옛 글자가 지워져 양피지나 종이를 다시 그 위에 글을 쓰는 데 쓰이게 된 고대 필사본에 적용되는 용어이다. 좋은 예로는 볼펜뷔텔 사본(Wolfenblittel MS., q.v.[해당 항목 참조])이 있다.
PALINGENESIA Palingenesia
팔링게네시아 (Palingenesia) (그리스어 πάλιν, *다시*, 와 γένεσις *남[birth]*)는 스토아학파(Stoics) 가운데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용어로, 그들은 이를 데미우르고스(Demiurgus) 곧 창조자가 모든 존재를 자신 안으로 흡수한 후 그것을 새로운 창조로 재생산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데 사용하였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것(마 19:28, 여기서는 이 세상의 심판과 αἰῶν μέλλων[다가올 세대]에 대한 암시로 사용된다, 그리고 딛 3:5, 여기서는 세례를 통한 거듭남, λουτρὸν παλιγγενεσαίς[중생의 씻음]에 대하여 사용된다)은 그것에 그리스도교 신학에서의 한 자리를 부여하였으며, 신학자들은 사람들의 부활, 개별 영혼의 거듭남, 그리고 세상이 타락으로 잃어버린 그 완전한 상태로의 회복—곧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표현하는 데 그것을 다양하게 사용해 왔다. 이 용어는 또한 지구가 겪어 온 거대한 지질학적 변화들과, 애벌레가 나비로 되는 것 등과 같은 곤충계의 변태들을 가리키는 데에도 적용된다. *거듭남을 보라; 부활을 보라 (SEE NEW BIRTH; SEE RESURRECTION)*.
PALINGENIUS, MARCELLUS Palingenius, Marcellus
팔링게니우스, 마르켈루스(Palingenius, Marcellus) 16세기의 이탈리아 시인으로, 페라라(Ferrara)의 스텔라다(Stellada) 태생이었다. 그는 주로 그의 *조디아쿠스 비타이*(*Zodiacus Vitae*)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그를 곤경에 빠뜨렸으니, 그 안에 수도사들과 교회의 폐단에 대한 풍자적 공격이 많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루터파 이단자로서 *금서 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에 올라 있다. 그 책의 제목은 *Zodiacus Vitae, id est de hominis vita, studio ac moribus optime instituendis libri 12 nunc demum ad exemplaria primaria sedule castigati *(Rott. 1722, small 8vo)이다.
PALISSY, BERNARD Palissy, Bernard
팔리시, 베르나르(Palissy, Bernard) 위그노(Huguenot) 장인으로,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에 대한 신실한 고수로 유명하며, 또한 복음 전도자들(Gospellers, q.v.) 가운데 가장 걸출한 한 사람이었고, 자연 철학자, 화학자, 지질학자, 그리고 예술가로서 출중하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위대한 도공 팔리시(Palissy, the great Potter)"로 알려져 있다. 그는 페리고르(Perigord)의 가난한 마을 라 샤펠 비롱(La Chapelle Biron)에서 약 1510년경에 태어났는데,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생업인 유리공(glazier)의 일을 그에게 가르치며 길렀다. 그 소년은 천성적으로 영민하고 재간이 있었으며, 그림 그리기, 도안, 장식에 취미가 있었고, 그러한 기술이 요구될 때마다 인근 마을 교회들에 자신을 유용하게 썼다. 도제 기간이 끝나자 그는 자신의 "편력(wanderschaft)"에 나서 널리 여행하였으니, 이는 유럽 대륙 장인들의 관습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사람들이 루터(Luther)가 로마에 맞서 일으킨 최근의 반란으로 가장 깊이 동요하던 시기에 스페인,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독일 영토를 방문하였다. 물론, 다소 교양 있는 기능공 계층에 속하고, 게다가 천성적으로 영민한 관찰자이자 독립적인 사상가였던 이 사려 깊은 젊은이는 그 대중적 동요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손에 들어온 한 성경을, 그는 평신도가 이러한 자유를 누리는 것에 대한 교황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읽었다. 그것은 탐구적이고 사려 깊은 팔리시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서른 살에 그는 성경의 자유로운 보급과, 사제직의 매개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옹호하는 편으로의 회심자가 되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고국에 있었으나, 이러한 견해를 옹호하는 자들이 처한 위험을 알고 있었으므로 파리(Paris)를 피하여 프랑스 남서부의 생통주(Saintonge)에 거주하였다. 팔리시는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도록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이곳에 오래 살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마치 그가 그들의 목사인 양 그에 의해 종교적으로 인도되었다. 처음에 작은 회중이 형성되었고, 이들에게 그는 주일뿐 아니라 평일에도 영적 양식을 베풀었다. 그들은 특별히 "종교인들(the Religionists)"이라 지칭되기에 이르렀고, 마을 전체에 걸쳐 흠 없는 생활을 하며 평화롭고 선량하고 근면한 사람들로 알려졌다. 그들의 수가 빠르게 늘어나자 로마 가톨릭 신자들(Romanists)도 그와 같은 헌신과 거룩한 신앙 고백으로 떠밀리는 것을 느꼈고, 곧, 팔리시의 말을 빌리자면, "이 마을에는 이쪽 편과 저쪽 편 양쪽 모두 날마다 기도가 있었다." 양쪽 모두 진지하였다는 것은 모두를 다스린 자선적 정서로 입증되었다. 그들은 같은 교회를 번갈아 사용하였으며, 박해에 대한 어떤 성향도 없었다. 그러나 팔리시가 자신의 시간 가운데 그토록 큰 몫을 종교에 바쳤음에도, 그는 장인으로서도 진보를 이루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실로 여러 면에서 그의 생애의 이 시기는 가장 기억할 만한 때 중 하나이다. 이때에 그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가 속하는데, 우리가 전해 듣기로는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우연히 본 '파이앙스(Faience)'의 한 유약 입힌 잔이 그에게 흰색 유약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하려는 결심을 불어넣었다. 다른 모든 일을 등한히 한 채 그는 16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탐구와 실험에 몰두하였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모든 자원을 소진하였고, 연료를 살 돈이 없어 가재도구를 한 점씩 태워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이웃들은 그를 비웃었고, 그의 아내는 그를 비난으로 압도하였으며, 굶주린 그의 가족은 그를 둘러싸고 먹을 것을 달라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 모든 낙담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탐색을 고집하였고, 끝내 성공으로 보상받았다." 자연을 본떠 채색된 동물 형상으로 장식된 몇몇 그릇이 높은 값에 팔렸고,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그 탐구들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위그노였음에도, 그는 1559년에 자신의 예술 작품들로 저택을 꾸미도록 그를 고용한 왕과 귀족들에 의해 보호받고 장려되었다. 1560년에 그는 튀일리(Tuileries)에 거처를 두었으며, 카타리나(Catharine) 왕비에 의해 성 바돌로매 학살(massacre of St. Bartholomew)에서 특별히 면제되었는데, 이는 친절에서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의 이익을 고려해서였다. 1575년 3월에 그는 자연사와 물리학에 관한 일련의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프랑스에서 철학자들의 공상적 해석을 실증적 사실과 엄밀한 논증으로 대체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 강의 과정에서 그는 (1584년) 샘의 기원과 돌 및 화석 조개의 형성에 관한 최초의 올바른 견해를 제시하였고, 비료제로서의 이회토(marl)의 중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것들은, 물을 정화하는 최선의 방법에 관한 그의 이론들과 함께, 최근의 발견과 탐구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어 왔다. 1588년에 그는 체포되어 이단으로 바스티유(Bastile)에 갇혔으며, 철회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쇠약하고 무덤 가장자리에서 떨고 있었음에도, 그의 정신은 젊은 시절과 마찬가지로 용감하였으며, 그는 단호하게 자신의 종교를 고수하였다. 그를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았으나; 그는 선고가 내려지기 전인 1590년에 죽었으니, 끝까지 그 대의에 용감하게 충실히 남아, 참된 신앙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려놓도록 부름받은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팔리시는 자연사의 표본 수집물을 남겼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형성된 최초의 것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거의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이며, 그의 장식과 아라베스크는 르네상스(Renaissance)의 가장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속한다. 스마일스(Smiles), *Huguenots, *p. 35-44; 카프(Cap), (*Euvres Completes de Bernard Palissy *(Paris, 1844); 뒤메닐(Dumesnil), *B. Palissy, Le Potier de Terre *(ibid. 1851); 몰리(Morley), *The Life of B. Palissy, his Labors and his Discoveries *(Lond. 1852, 2 vols.); 뒤플레시(Duplessis), *Etude sur Palissy *(Paris. 1855); *Free-Will Baptist Quar. *7:354 sq.를 보라.
PALL Pall
팔(Pall) 문장학(heraldry)에서, 새틀(saltire, X자형)의 윗부분이 페일(pale, 세로띠)의 아랫부분과 결합된 것이다. 그것은 교회 관구(ecclesiastical sees)의 문장(紋章)에 많이 나타난다.
PALL (2) Pall (2)
팔(Pall) (2) 팔은 로마교회 및 다른 교회들이 사용하는 교회 복식의 여러 부분에 영어로 붙여진 이름이다. **1.** 그것은 (라틴어 *pallium;* 그리스어 Ειλητον) 교황, 대주교, 총대주교만 착용하는 교황 복식의 한 부분에 적용되며, "교황직의 충만함"을 상징하는 명예의 띠(scarf of honor)이다. 그것은 너비가 손가락 세 개쯤 되는 흰 모직 띠로, 둥글게 만들어져 어깨에 걸치며, 앞에서 교차되어 한 끝이 가슴 위로 늘어지고, 그 뒤의 다른 한 끝에는 자주색 십자가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세 개의 금바늘 또는 금핀으로 고정되는데, 그 수는 사랑(charity), 또는 십자가의 못을 의미한다. 그것은 완전히 흰 양들의 양털로 만들어지는데, 그 양들은 해마다 성 아그네스(St. Agnes)의 축일에 로마의 노멘탄 가(Nomentan Way)에 있는 그녀에게 봉헌된 교회에서, 거룩한 성찬(eucharist)을 거행하는 가운데 바쳐지고 축복받는다. 그 양들은 성 요한 라테란(St. John Lateran) 교회의 두 참사회원이 받아, 사도 대학(apostolic college)의 부제들에게 맡기며, 그들이 양털 깎는 때가 올 때까지 그것들을 기르고 먹인다. 팔리움(pallium)은 언제나 이 양털로 만들어지며, 완성되면 성 베드로(St. Peter)와 성 바울(St. Paul) 교회로 옮겨져, 그 성인들의 무덤 위 제단에 그들의 축일 전야에 놓이고, 밤새도록 거기에 남겨졌다가, 다음 날 그것들을 맡아 관리하는 것이 직무인 부제들에게 전달된다. 교황만이 그가 어디에서 집전하든 *항상* 팔리움을 착용하여, 다른 모든 개별 교회들에 대한 그의 자임한 권위를 나타낸다. 대주교와 총대주교는 교황으로부터 팔을 받으며, 공의회, 서품식, 그리고 미사 거행 중의 큰 축일과 같은 특정 경우에만 그것을 착용할 수 있다. 마콩 공의회(Council of Macon, A.D. 581)는 대주교가 팔 없이 미사를 드리는 것을 금하였다. 로마교회의 대주교는, 비록 주교로 축성받고 직위에 취임하였다 할지라도, 팔리움을 청원하여 받고 그 값을 치르기 전에는, 자신을 대주교라 칭할 수도 없고 "더 큰 관할권"에 속하는 행위들—즉 그가 주교로서가 아니라 대주교로서 행사하는 것들, 이를테면 공의회를 소집하거나 그의 관구를 순시하는 것 등—을 행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선출이 확정되었을 때, 팔리움을 받기 전이라도 주교 서품의 일에 관하여 자신의 직무를 자기 보좌주교들에게 위임할 수 있으며, 그들은 그의 명령에 의해 합법적으로 그것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로마교회의 어떤 대주교가 팔리움을 받기 전에, 그것의 소유에서 직접 비롯되는 직무들—예컨대 성품과 도유(chrism)에 관한 것들 등—을 수행한다면, 그 행위 자체는 유효하지만 그 대주교는 교회의 법규와 법을 어기는 것이다. 팔은 황제 복식의 일부였으며, 본래 황제들이 총대주교들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는 팔의 사용을 로마의 주교, 아마도 리누스(Linus) 또는 실베스테르(Sylvester)에게 주었고,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총대주교 안티무스(Anthimus)는 자기 직위에서 추방되었을 때 그 팔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336년에 그것은 처음으로 오스티아(Ostia) 직의 주교에게 주어졌는데, 그는 그때 교황의 축성을 집전하고 있었으니, 그 교황이 선출 당시 주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를(Arles) 주교직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팔을 받았다. 오툉(Autun) 주교직은 A.D. 600년경에 그것을 받았다. 세비야의 이시도루스(Isidore of Seville)는 그것이 한때 모든 주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분명히 예외적 명예로서만 주교들에게 주어졌으니, 성 보니파키우스(St. Boniface)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y II)로부터 받았을 때, 밤베르크(Bamberg) 주교가 1046년에, 루카(Lucca) 주교가 1057년에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로부터 받았을 때가 그러하다. 펠라기우스(Pelagius) 또는 다마수스(Damasus)는 모든 수도대주교(metropolitan)가 축성 후 석 달 안에 그들의 팔을 가져가도록 요구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y I)는 그것을 전달할 때 어떤 관리도 돈을 받는 것을 금하였으나, 그 여정과 수수료는 시간이 흐르면서 쓰라린 부담이 되어, 마인츠(Mayence) 대주교에게는 금화 3만 닢이 들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of Canterbury)에게 팔을 보냈고, 734년에 요크(York)의 에그브라이트(Egbright)는 큰 어려움 끝에 같은 영예를 얻었는데, 그것은 644년 이래 보류되어 있었다. 1472년에 세인트 앤드루스(St. Andrew's) 대주교들은 팔의 권리로써 요크로부터 독립하여 스코틀랜드의 수도대주교가 되었다. 1152년 켈스 공의회(Council of Kells)에서 처음으로 네 개의 팔이 교황 특사에 의해 아일랜드 대주교들에게 주어졌는데, 이것이 교황 수위권에 대한 그들의 최초의 인정이었다. 로마 교황좌가 인노켄티우스 2세(Innocent II) 아래 그 권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을 때, 그 교황은 팔을 오늘날까지 거기에 부여된 것과 같은 표지로 선포하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대주교의 직무도 칭호도 그것 없이는 자임할 수 없으며, 그것을 교황 재정의 수입원으로 삼기 위해, 모든 대주교는 자기 팔과 함께 매장되어, 그의 후계자가 또 다른 것을 얻으려 교황에게 신청하고 그 특권의 값을 치를 수밖에 없게 한다. 팔은 선한 목자(Good Shepherd)의 어깨에 메인 어린양(lamb)을 나타내며, 또한 겸손, 열심, 명예의 사슬, 목회적 경계를 나타낸다. 그것의 다른 이름들은 *아나포리온(anaphorion), 수페르누메랄레(supernumerale)*, 그리고 테오도레투스(Theodoret)와 성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제누스(St. Gregory Nazianzen)에게서는 ἱερὰ στολή였다. 8세기 이전에는 두 개 또는 네 개의 붉은색 또는 자주색 십자가로 장식되었으나, 지금은 여섯 개의 검은 십자가로 장식되며, 4세기의 더 이른 장식인 선한 목자 또는 한 개의 십자가를 대체한 금핀으로 고정된다. 그것은 점차 그 라티클라브(laticlave)로 축소된, 간략화된 토가(toga)의 마지막 유물로 여겨져 왔다. 대(大) 그레고리우스(Gregory the Great) 때에 그것은 솔기나 바느질 없는 흰 아마포로 만들어져 어깨에서 늘어뜨려졌다. 그것은 교황의 이중 짐을 나타내기 위해 뒤와 앞으로 늘어지는 늘어진 부분(pendant)을 가지고 있다. **2.** *팔* (그리스어 ἐνδυτόν, τραπεζοφόρον, ἃπλωμα)은 또한 제단 앞에 걸리는 천의 이름이기도 한데, 곧 금 제단의 청색 천(민 4:11)과 같은 현대의 *안테펜디움(antependium)*이다. 1630년 우스터 대성당(Worcester cathedral)에서는 상부 정면과 하부 정면, 그리고 팔 곧 중앙 덮개가 언급된다. 옥스퍼드의 스티플 애스턴(Steeple Aston)에는 15세기 성인들의 행적이 담긴 것이 하나 있다. 또한 루페르투스(Rupert)에 따르면 승리한 교회(Church triumphant)의 미래 영광을 나타내는 벽걸이들이 있다. **3.** 엄밀히 전례적 의미에서 *팔*이라는 단어는 미사 거행에 사용되는 제단의 식탁 또는 석판을 덮는 아마포에 적용된다. 그것은 라테란 공의회와 랭스 공의회(councils of Lateran and Rheims), 그리고 교황 보니파키우스 3세(Boniface III)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리스 교회(Greek Church)에서는 거룩한 식탁의 네 모서리에 *복음서 기자들(the Evangelists)*이라 불리는 네 조각의 천이 고정되는데, 이는 그들의 초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며, 세상 사방에서 신자들을 그리스도께로 부르는 교회를 상징한다. 그 위에는 무덤 속 주님의 수의(요 20:7)를 나타내는, 몸 천(body cloth)이라 불리는 아마포가 놓이며, 더 고운 재질의 두 번째 천은 제단을 자기 보좌로 삼아 앉으신 하나님의 *아들(Son)*의 영광을 상징하고, 세 번째 천은 코르포랄(corporal) 본체이다. 라틴 교회(Latin Church)에서 세 개의 천을 사용하는 것은 피우스 1세(Pius I) 때부터 존재하였다고 한다. 밀레비스의 성 옵타투스(St. Optatus of Milevi)는 제단 천을 언급한다. 6세기에는 성 그레고리우스 투로넨시스(St. Gregory of Tours)가 우리에게 알려주듯 비단과 값진 천이 사용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금실로 짠 천의 팔을 성 베드로 교회에 주었고, 자카리아스(Zachary)는 그리스도 탄생(Nativity)이 수놓아지고 진주가 박힌 것을 헌상하였다. 현대 로마의 팔은 정사각형의 아마포 조각인데—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잔의 입구를 덮기에 충분히 크게 마분지를 끼워 빳빳하게 만든다. 윗면은 흔히 비단에 자수를 놓거나 금실로 짠 천이다. 잔과 닿는 면은 언제나 아마포여야 한다. 영국 교회(English Church)에서는 고운 흰 아마포와 비단이나 점잖은 천으로 된 깔개가 요구된다. 그 형태는 고대의 팔이며, 고와야, 곧 다마스크 직물이거나 장식되어 그토록 아름다워야 하고(사 4:2; 겔 16:17), 그것은 희며(계 15:6; 계 19:14), 눈처럼 심히 흰(막 9:3) 그리스도의 옷과 같다. 그것은 제단 정면 위로 약간 늘어져야 하지만, 그 끝은 거의 바닥까지 닿아야 한다(월콧[Walcott], *Sacred Archaeology* 해당 항목). **4.** 이 모든 것 외에도 *장례용 팔(the funeral pall)*이 있는데, 이는 검은 벨벳이나 다른 천으로 된 넓은 덮개로, 관이 매장지로 운반되는 동안 그 위에 씌운다. 팔의 끝들은 장례 행렬 동안 고인의 친구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이들이 잡으며, 일반적으로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은 자들 가운데서 선택된다. 다음을 보라. 지겔(Siegel), *Christl. Alterthumer,* iii, 48 이하; 빙엄(Bingham), *Orig. Eccles.;* 월콧(Walcott), *Sacred Archceol.* 해당 항목; 리들(Riddle), *Christian Antiquities.* (색인 참조); 헤펠레(Hefele), *Conciliengesch.* 제1, 3, 4권; 엘리엇(Elliott), *Delineation of Romanism* (색인 참조).
PALLADINO, FILIPPO Palladino, Filippo
팔라디노, 필리포 (Palladino, Filippo) 이탈리아 화가로, 1544년경 피렌체(Florence)에서 태어났다.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란치(Lanzi)는 그가 토착 화가들보다 롬바르드(Lombard) 화파를 더 연구한 듯하고, 바로치오(Baroccio)와 친분이 있었던 듯하다고 말한다. 피렌체의 그 성인(聖人)의 교회에 있는 *세례 요한의 참수(Decollation of St. John)* 그림과, 밀라노(Milan)의 산 자코포 아 코르볼리니(S. Jacopo a' Corbolini)에 있는 제단화로 상당한 명성을 얻은 후, 그는 어떤 소동 때문에 그 도시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는 로마로 피신하였는데, 그곳에서 콜론나(Colonna) 공의 영접을 받았으나, 추격을 당하자 시칠리아(Sicily)로 가서, 콜론나 가문 소유의 영지가 있는 마차리노(Mazzarino)에 거주하였다. 그곳에서, 또한 시라쿠사(Syracuse), 팔레르모(Palermo), 카타니아(Catania), 그 밖의 여러 곳에서 그는 교회들을 위해 작품들을 제작하였는데, 란치는 그것들이 우아하게 구성되고 정교하게 채색되었으나 매너리즘에서 자유롭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는 1614년 마차리노에서 죽었다.
PALLADIO, ANDREA Palladio, Andrea
팔라디오, 안드레아 (Palladio, Andrea) 유명한 이탈리아의 건축가로, 1518년 11월 30일 비첸차(Vicenza)에서 태어났다. 비트루비우스(Vitruvius)의 저술과 로마의 고대 기념물들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후, 그는 자신의 고향 도시에 정착하였고, 비첸차의 바실리카(Basilica of Vicenza)를 복원함으로써 처음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 다음에 교황 바오로 3세(Pope Paul III)가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St. Peter's)에서 진행 중이던 공사의 시행을 그에게 맡기려는 의도로 그를 로마로 초청하였으나, 불행히도 바오로는 팔라디오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비첸차와 그 인근에서 수많은 건물의 건축에 고용되었으며, 그 모든 건물에서 그는 가장 정교한 취향을 가장 독창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장식과 결합하여 드러내었다. "팔라디오 양식(the Palladian)"으로 알려진 그의 양식은 혼합적(composite)이며, 시공의 큰 화려함과 비례의 정확성으로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북부 이탈리아의 건축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교회 건축에서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베네치아(Venice)의 *산 조르조 마조레(San Giorgio Maggiore)*와 *일 산티시모 레덴토레(II Santissimo Redentore)* 교회들, 델라 카리타 수도원(convent Della Carith)의 *아트리움(atriuns)*과 *회랑(cloister)*, 그리고 같은 도시에 있는 산 프란체스코 델라 비냐(San Francesco della Vigna)의 *파사드(fagade)*가 있다. 팔라디오는 1580년 8월 6일 비첸차에서 죽었다. 그는 건축에 관한 한 저작을 썼는데 이는 매우 높이 평가된다. 가장 좋은 판본은 비첸차에서 4권으로 출간된 것이다(1776). 카트르메르 드 캥시(Quatremere de Quincy), *Histoire des plus celebres architectes*; 테만차(Temanza), *Vite degli architetti Teneziani*; 티코치(Ticozzi), *Dizionario*, s.v.를 보라.
PALLADIUM Palladium
팔라디움(Palladium)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 사이에서 *팔라스*(*Pallas*, q.v.)의 상(像)을 일컫는 이름으로, 그것을 한 성소에 정성껏 간수하는 것에 공공의 안녕이 달려 있다고 믿었다. 트로이(Troy)의 팔라디움이 특히 유명하다. 통용되는 신화에 따르면, 그것은 제우스(Zeus)에 의해 하늘에서 던져져 트로이 평원에 떨어졌으며, 그곳에서 그 도시의 창건자 일루스(Ilus)가 그것을 길조로서 주워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을 잃으면 도시의 멸망이 뒤따르리라는 믿음이 퍼졌고; 그리하여 그것은 율리시스(Ulysses)와 디오메데스(Diomede)에 의해 도둑맞았다. 후에 여러 도시가, 특히 아르고스(Argos)와 아테네(Athens)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다른 기록들은 그것이 그리스 수령들에 의해 도둑맞은 것이 아니라 아이네아스(Æneas)에 의해 이탈리아(Italy)로 옮겨졌다고 단언하며, 로마인들은 그것이 베스타(Vesta) 신전에 보존되었으나 너무도 은밀하여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조차 그것을 볼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이 이름의 모든 상은 다소 거칠게 나무로 깎아 만든 것이었다.
PALLADIUS OF HELENOPOLIS Palladius of Helenopolis
헬레노폴리스의 팔라디우스 (Palladius Of Helenopolis) 동방의 교회 인물로, 5세기에 활동하였다. 그의 이름은 5세기 초의 교회사 및 문헌사에 거듭 등장한다. 그에 관하여는 그가 그 저자로 알려진 *라우시아쿠스 역사(Lausiac History)*에 담긴 그 자신의 기록을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아마도 367년경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는 갈라디아인이었던 듯하며,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 of Pontus)의 동료 또는 제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역사 두 곳에서 그는 자신이 갈라디아와 안키라(Ancyra)에 오랫동안 있었음을 언급하지만, 이 구절들이 그가 그곳에서 태어났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는 스무 살의 나이에 은수(隱修, solitary) 생활을 받아들였는데, 만일 그의 출생이 367년이었다면 이는 387년이 될 것이다. 그가 여러 시기에 거주한 장소들은 *라우시아쿠스 역사*의 부수적 언급들로부터만 추정될 수 있다. 틸몽(Tillemont)은 그의 금욕적 생애의 시작에 카파도키아의 엘피디우스(Elpidius of Cappadocia)와 함께 요단강 기슭 가까이 있는 루카스산(Mount Lucas)의 어떤 동굴들에서 거한 일과, 베들레헴 및 팔레스타인의 다른 장소들에서 거주한 일을 둔다. 틸몽은 이 무렵에 그가 그 나라에 거하던 여러 다른 성인들을 보았으며, 그들 가운데 아마도 성 히에로니무스(St. Jerome)도 보았으리라고 추정하는데, 그에 대한 팔라디우스의 인상은 주로 또는 전적으로 포시도니우스(Posidonius)의 진술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팔라디우스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대제(Theodosius the Great)의 집정관 재임 시, 곧 388년에 처음으로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였으며, 그 도시의 장로 이시도루스(Isidorus)의 권고에 따라 은수자 도로테우스(Dorotheus)의 가르침 아래 자신을 두었는데, 그의 생활 방식이 너무도 엄격하여 팔라디우스는 자신이 머무르려 의도했던 삼 년을 채우지 못한 채 병으로 인해 그를 떠나야만 하였다. 알렉산드리아 인근에서 잠시 머문 뒤, 그는 니트리아(Nitria) 사막의 산악 지대에 있는 은수자들 가운데서 일 년간 거처를 두었는데, 그들은 오천 명에 달하였으며, 그는 그들의 거처와 생활 방식을 묘사한다. 니트리아로부터 그는 광야로 더 들어가 "수도실들(the cells)"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갔는데, 그곳에 그는 이집트인 마카리우스(Macarius the Egyptian)가 죽은(390년 또는 391년) 다음 해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그는 구 년간 머물렀고, 그중 삼 년은 알렉산드리아 사람인 젊은 마카리우스(Macarius the younger)의 동료로서 보냈다. 그는 한동안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의 동료이자 제자였는데, 에바그리우스는 오리게네스주의 견해를 품은 혐의를 받았다. 그가 에바그리우스와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한곳에만 머무르지 않았으니, 그는 탁월한 거룩함을 지닌 사람들과 대화할 목적으로 도시나 마을이나 사막을 방문하였으며, 그의 역사는 그의 여행의 범위에 관하여 부수적인 증언을 한다. 테바이드(Thebaid), 곧 상부 이집트로 타벤나(Tabenna)까지, 그리고 시에네(Syene), 리비아(Libya), 시리아(Syria), 팔레스타인(Palestine),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심지어 로마(Rome)와 캄파니아(Campania), 그리고 그가 막연하고도 과장되게 진술하듯 로마 제국 전역을 그가 방문하였으며, 그것도 거의 전적으로 도보로 하였다. 심한 병으로 인하여 팔라디우스는 다른 은수자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로 보내졌고, 그 도시로부터 그의 의사들의 권고에 따라 팔레스타인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비티니아(Bithynia)로 갔는데, 거기서 그는 감독으로 안수받았다. 그는 자신의 임명 날짜도 자신의 주교구의 이름도 밝히지 않으나, 그것이 그에게 큰 고통의 계기가 되었음을 시사하니, 그리하여 그는 "음울한 독방에 열한 달 동안 숨어 지내는 동안" 리코폴리스의 요안니스(Joannis of Lycopolis)의 한 예언을 기억하였는데, 그 예언은 팔라디우스가 병이 들어 알렉산드리아로 보내지기 삼 년 전에 그의 주교직으로의 승격과 그에 따른 고난을 예언하였던 것이다. 그가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의 죽음 무렵—이는 아마도 399년에 일어났을 것이다—에 그와 함께 있었으므로, 그는 그해 이전에는 이집트를 떠날 수 없었을 것이며, 우리는 그의 감독 안수를 400년 이전으로 잘 둘 수 없으니, 그해에 그는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한 시노드(synod)에 참석하였고, 에베소의 감독에 대한 한 고발에 관한 증거를 입수하기 위하여 소(小)아시아 속주(Proconsular Asia)로 파견되었다. 크리소스토무스(q.v.)의 폐위는 팔라디우스를 고난에 휘말리게 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그의 *라우시아쿠스 역사*에서 배우는 바이다. 크리소스토무스는 그의 유배 중에 "감독 팔라디우스"에게 자주 편지하여, 그의 은둔이 그에게 기회를 주는 기도에 계속 머물 것을 권고하였다. 앞의 모든 세부 사항은 *라우시아쿠스 역사*의 저자에 관한 것으로, 그에 관한 언급들은 그 책의 페이지들에서 추려낸 것이다. 우리는 포티우스(Photius)로부터, 403년에 개최되어 요안니스 곧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hn Chrysostom)가 정죄받은 "떡갈나무 시노드(Synod of the Oak)"에서 그에 대한 고발 중 하나가 비티니아의 헬레노폴리스의 감독이며 오리게네스의 견해를 따르는 한 팔라디우스의 안수와 관련된 것이었음을 배운다. 그 주교구가 위치한 속주, 오리게네스주의 견해(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로부터 받아들였거나 그에 의해 품게 된), 그리고 그의 안수에 무언가 이의를 제기할 만한 것이 있었다는 시사는, *라우시아쿠스 역사*의 저자가 자신의 승격에 관하여 말하는 모호한 방식과 비교할 때, 그 역사가가 헬레노폴리스의 팔라디우스와 동일 인물임을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듯하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에 의해, 그리고 히에로니무스 자신에 의해 오리게네스주의로 고발된 그 팔라디우스이다. 그러나 틸몽은 오리게네스주의자 팔라디우스가 헬레노폴리스의 감독이 아니었음을 보이려 시도한다. 자신의 적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헬레노폴리스의 팔라디우스는 405년에 로마로 피신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아마도 그와 다른 도피한 감독들, 곧 시르마다의 키리아쿠스(Cyriacus of Syrmada), 비티니아의 아파메이아의 알리시우스 또는 에울리시우스(Alysius or Eulysius of the Bithynian Apameia), 그리고 페시누스의 데메트리우스(Demetrius of Pessinus)에게 보내진 격려의 편지를 받았을 것이다. 이 무렵 팔라디우스는 아마도 로마와 캄파니아의 수도사들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일부 감독들과 장로들이 서방 황제 호노리우스(Honorius)와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Innocent I), 그리고 서방 교회의 감독들 일반에 의해 위임되어, 크리소스토무스의 추방에 대하여 동방 황제 아르카디우스(Arcadius)에게 항의하고 그의 사안을 심의할 새로운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게 되었을 때, 팔라디우스와 그의 동료 망명자들은 외견상 그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동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귀환은 때를 잘못 만났고 불운하였으니,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에 접근하다가 모두 체포되었고, 사절들과 망명자들 모두 트라키아의 아티라(Athyra)에 구금되었으며, 그 후 귀환한 네 명의 도피자는 따로따로 멀리 떨어진 장소들로 추방되었으니, 팔라디우스는 블렘미에스(Blemmyes)족 인근의 상부 이집트 끝으로 추방되었다. 틸몽은 412년에 크리소스토무스의 큰 적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Theophilus of Alexandria)가 죽은 후에 팔라디우스가 자신의 형벌의 어떤 완화를 얻었으나, 헬레노폴리스로 돌아가거나 그의 감독 직무를 재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고 추정하며, 412년과 420년 사이의 기간에 *라우시아쿠스 역사*가 저술되었다고 말한다. 팔라디우스는 테바이드의 안티노에(Antinoe) 곧 안티노폴리스(Antinopolis)에서 사 년간, 그리고 예루살렘 인근 감람산(Mount of Olives)에서 삼 년간 거주하였으며, 그 후 또한 동방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였다. 얼마 후 그는 헬레노폴리스의 주교구로 복귀하였으나, 거기서 갈라디아의 아스포나(Aspona) 또는 아스푸나(Aspuna)의 주교구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그의 복귀와 전임의 날짜는 확정될 수 없으니, 그것들은 아마도 417년에 크리소스토무스의 사안으로 일어난 분열이 치유된 후에, 그리고 아마도 *라우시아쿠스 역사*가 저술된 후인 419년 또는 420년에 일어났을 것이다. 팔라디우스는 아마도 431년 이전에 죽었을 것인데, 그해에 제3차 보편(제1차 에베소) 공의회에서 아스포나의 주교좌가 다른 사람에 의해 차지되어 있었다. 그는 헬레노폴리스로부터 통상적으로 지칭되는 것으로 보아, 아스포나의 감독으로는 짧은 기간만 있었던 듯하다. 팔라디우스의 주요 저작, 아니 어쩌면 그의 유일한 저작은 ῾Η πρὸς Λαύσωνα τὸν πραιπόσιτον ἱστορία περιέχουσα βίους ὁσίων πατέρων*-Ad Lausum Prepositum Historia, quce Sanctorumn Patrum vitas complectitur — *라는 제목으로, 흔히 *라우시아쿠스 역사(Historia Lausiaca)*, 곧 *라우시아쿠스 역사(Lausiac History)*로 인용된다. 팔라디우스가 말하기를, 이 저작은 그의 쉰세 번째 해, 그의 수도 생활 서른세 번째 해, 그리고 그의 주교직 스무 번째 해에 저술되었다고 하는데, 이 마지막 연대는 그의 개인사에서 여러 다른 연대를 결정할 수단을 제공한다. 이 저작은 팔라디우스가 개인적으로 알았거나, 그들을 알았던 다른 이들을 통해 정보를 얻은 다수의 금욕가들에 관한 전기적 기록과 일화를 담고 있다. 이 저작의 가치는 기적과 다른 경이에 관한 저자의 경신(輕信, 그러나 이는 그의 시대와 부류에 특징적인 것이다)으로 인해 줄어들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종교적 경향을 보여주며, 저명한 인물들에 관한 다양한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서 가치가 있다. 그 저작이 헌정된 라우수스(Lausus) 또는 라우손(Lauson)은 외견상 젊은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the younger)의 시종(chamberlain)이었다. 그리스어 본문의 초판은, 그러나 매우 불완전한 것으로, 뫼르시우스(Meursius)의 것이었다(레이덴 1616). 그리스어 본문과 역본은 뒤캐우스(Ducaeus)의 *부록(Auctarium)*에서 *교부 문고(Bibliotheca Patrum)*의 판본들(파리 1644, 1654)에 재인쇄되었다. 인쇄된 본문은 여전히 매우 결함이 많을 것이다. 팔라디우스에게 돌려지는 또 다른 저작은 Διάλογος ἰστορικὸς Παλλαδίου ῾Ελενουπόλεως γενόμενος πρὸς Θεόδωρον διάκονον ῾Ρώμης, περὶ βίου καὶ πολιτείας τοῦ μακαρίου Ι᾿ωάννου ἐπισκόπου Κωνσταντινοπόλεως τοῦ Χρυσοστόμου *— Dialogus Historicus Palladii episcopi Helenopolis cunm Theodoro ecclesice Romnance diacono, de vita et conversatione Beati Joannis Chrysostomi, episcopi Constantinopolis. *라는 제목이다. 이 저작의 제목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것이 헬레노폴리스의 팔라디우스에 의해 저술되었다고 믿게 오도하였으나, 더 주의 깊은 검토는 *대화(Dialogus)*의 저자가 그보다 여러 해 연장자인 다른 사람이었음을 입증하니, 다만 그 감독의 투옥과 유배를 초래한, 크리소스토무스를 위한 서방 황제와 교회의 사절단에서 팔라디우스의 동료이자 함께 고난받은 자였다. 틸몽은 *대화*의 저자가 팔라디우스라 불렸다고 가정하면서, 그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371년 또는 372년에 편지를 쓴 그 사람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Περὶ τῶν τῆς Ι᾿νδίας ἐθνῶν καὶ τῶν Βραγμάνων- *De Gentibus Indice et Bragmanibus — *역시 그 저작권이 팔라디우스에게 돌려지나, 오우댕(Oudin)과 케이브(Cave)는 그 시대의 다른 저술가의 저작으로 본다. 람베키우스(Lambecius)는 그 저작을 메토네의 팔라디우스(Palladius of Methone)에게 돌린다. 그 저작 자체로부터 추려낼 수 있는 모든 것은 저자가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로마 제국이 아직 존재하던 동안에 살았다는 것이나, 이 시간적 표지는 거의 가치가 없으니, 비잔틴 제국이 끝까지 로마라는 이름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블리스(Blisse)가 출간한, 성 암브로시우스(St. Ambrose)의 것으로 추정되는 저작은 그 교부의 베네딕도회 편집자들에 의해 부인되며, 콜라르(Kollar)에 의해 팔라디우스에게 돌려지는 저작의 자유로운 번역임이 밝혀졌다. 케이브(Cave), *Hist. Litter.* ad ann. 401, i, 376(옥스퍼드 1740-43); 파브리키우스(Fabricius), *Bibl. Grceca,* i, 727; 8:456; 10:98 등; 오우댕(Oudin), *Comnent. de Scriptor. Eccles.* 1, col. 908 등; 틸몽(Tillemont), *Memoires,* 11:500 등; 세이에(Ceillier), *Hist. des Auteurs ecclesiast.* 7:484-493; 보시우스(Vossins), *De Historicis Grcecis,* lib. 2, c. 19; 스미스(Smith), *Dic. of Greek and Roman Biog. and Mythol.* s.v.를 보라.
PALLADIUS OF SUEDRA Palladius of Suedra
수에드라의 팔라디우스 (Palladius Of Suedra) 교회 저술가로, 그의 개인사에 관하여 우리는 그가 팜필리아(Pamphylia)의 수에드라(Suedra)에서 활동하였다는 것만 알 뿐이다. 살라미스(Salamis) 곧 콘스탄티아(Constantia)의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의 *앙코라투스(Ancoratus)*에 앞에 붙어 있는 것은, *에피파니우스를 보라(SEE EPIPHANIUS)*, 그 교부에게 보낸 팔라디우스의 편지이다. 그것은 Ε᾿πιστολὴ γραφεῖσα παρὰ Παλλαδίου τῆς αὐτῆς πόλεως Σουέδρων πολιτευομένου καὶ ἀποσταλεῖσα πρὸς τὸν αὐτὸν ἃγιον Ε᾿πιφάνιον αἰτήσαντος καὶ αὐτοῦ περὶ τῶν αὐτῶν*--Palladii ejusden Suedrorunm urbis civis ad Sanctum Epiphanium Epistola, qua idem ab eo postulat — *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니, 곧 그 안에서 그는 수에드라의 어떤 장로들(그들의 편지가 팔라디우스의 편지에 앞선다)이 행한 요청, 곧 에피파니우스가 삼위일체에 관한 어떤 질문들에 답하여 주기를 바라는 요청을 거드는데, 그에 대한 해답을 *앙코라투스*가 담고 있다.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Opera*, 2, 3(페타비우스[Petav.] 편, 파리 1622, 2절판); 파브리키우스(Fabricius), *Bibl. Graec.* 10:114를 보라.
PALLADIUS, PETRUS Palladius, Petrus
팔라디우스, 페트루스 (Palladius, Petrus) 저명한 덴마크의 고위 성직자로, 루터파 종교개혁 이후 덴마크 셸란(Zealand)의 초대 감독이었으며, 그의 시대의 가장 학식 있는 신학자 중 한 사람이자 가장 저명한 종교개혁자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쳤다. 로마의 *금서 목록(Index)*은 그를 이단 저술가의 제1급에 명기한다. 그의 본래 이름은 *페데르 플라데(Peder Plade)*였으나, 이는 당시의 관행에 따라 *페트루스 팔라디우스(Petrus Palladius)*로 라틴어화되었다. 그는 1504년에 리베(Ribe)에서 태어났고, 잠시 오덴세(Odense)에서 교사로 있었으나, 스물일곱 살이 되었을 때 루터(Luther)와 멜란히톤(Melancthon)의 지도 아래 진리를 찾아 비텐베르크(Wittenberg)로 갔다. 그는 그곳에 육 년간 머물렀으며, 그의 스승들의 존경과 신임을 얻어, 그의 왕 크리스티안 3세(Christian III)가 그들의 요청에 따라 1537년에 그의 젊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셸란의 감독이자 코펜하겐 대학(University of Copenhagen)의 신학 교수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부겐하겐(Bugenhagen)에 의해 안수받았으며, 후자가 덴마크를 떠난 후에는 팔라디우스가 덴마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고, 그의 목소리는 모든 교회 문제를 결정하고 교회 사무를 전반적으로 정비하는 데 있어, 그 자신의 교구뿐만 아니라 당시 덴마크 왕국의 다른 지역들, 특히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지녔다. 또한 그는 코펜하겐 대학의 재편에서 그가 맡은 역할로도 큰 공로를 인정받을 만하다. 그는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넓은 교구의 모든 교회를 자주 방문하였으며, 그의 건강이 무너져 여행이 허락되지 않게 되었을 때에는, 일부는 학술적이고 일부는 대중적인 일련의 책들을 쓰는 데 시간을 보냈는데, 이로써 그는 덴마크에서 종교개혁의 발판을 강화하고, 경건의 대의를 진작하며, 부도덕과 만취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는 코펜하겐, 룬드(Lund), 로스킬레(Roskilde)의 가톨릭 참사회원들(canons)에 맞선 주요 논객 중 한 사람이었다(1543-1544). 그는 성인 숭배, 순례, 그리고 그 나라의 여러 지역에 여전히 남아 있던 로마주의의 다른 모든 어리석은 잔재들에 맞서 열심히 설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대함에 있어 매우 관대하였으며, 요한 아 라스코(John a Lasco)가 이끌어 덴마크로 온 개혁파 피난민들에 대한 학대에 그가 동의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팔라디우스는 이른바 크리스티안 3세 성경(Christian III's Bible)의 번역을 도왔고, 루터의 교리문답(Catechism)과 *소교리문답서(Enchiridion)*를 번역하였으며, 1556년에 최초의 덴마크어 예식서(ritual)를 출간하였다. 그의 많은 다른 직무로 인하여 그는 1545년에 신학 교수직을 사임하였으나, 1550년에 다시 그것을 맡도록 설득되었으니, 대학이 그 없이는 운영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1558년에 다시 사임하였고, 1560년에 죽었다. 헬비그(Helvig), *종교개혁 이후의 덴마크 교회사(Den danske Kirkes Historie after Reformationen)*, 제2판; *북유럽 회화 사전(Nordisk Conversations lexicon)*, s.v. 팔라디우스; 바르포드(Barfod), *Fortrellinger*, 434쪽을 보라. (R. B. A.)
PALLADIUS, SCOTORUM EPISCOPUS Palladius, Scotorum Episcopus
팔라디우스, 스코토룸 에피스코푸스(Palladius, Scotorum Episcopus) 초대 교회의 이름난 아일랜드 고위 성직자로, 아마도 5세기 중엽 무렵에 활동하였다. 프로스페르 아퀴타누스(Prosper Aquitanus)의 *연대기*(*Chronicon*)에서, 바수스(Bassus)와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집정관 재임 시기(A.D. 431)에 다음 구절이 나온다: "*Ad Scotos *in Christum credentes ordinatur a papa Coelestino Palladius, et primus episcopus mittitur(그리스도를 믿는 스코티족[Scoti]에게 팔라디우스가 교황 코엘레스티누스[Coelestinus]에 의해 안수되어, 첫 주교로 파송된다)." 같은 저자의 다른 저작(*Contra Collatorem, *c. 21 sec. 2)에서, 펠라기우스(Pelagius)의 교설을 억누르려는 코엘레스티누스의 노력에 관해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Ordinato Scotis episcopo, dum Romanam insulam studet servare Catholicam, facit etiam barbaram Christianam(스코티족에게 주교를 안수하여, 그가 로마의 섬을 가톨릭으로 보존하려 애쓰는 동안, 그는 또한 야만의 섬을 그리스도교적으로 만든다)"(*Opera, *col. 363, ed. Paris, 1711). 동시대 저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유일한 것인 이 빈약한 기록들에(혹자처럼, 프로스페르의 *De Ingratis, *vs. 330-332의 시구들을 스코티족의 회심에 결부시키지 않는다면), 중세의 연대기 작가들과 역사가들은 갖가지 모순된 세부 사항을 덧붙여, 팔라디우스의 역사에서 실제 사실들을 추출해 내기란 어렵고, 아니 불가능하다. 팔라디우스의 사명의 대상이 아일랜드인이었는지 스코트인이었는지를 두고 아일랜드인과 스코트인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어 왔으나; 프로스페르 시대의 "Scoti"라는 단어의 용법과, 그가 "*insulam *Romanam(로마의 섬)"과 "*insulam *barbaram(야만의 섬)" 사이에 그은 구별은 그 문제를 아일랜드인 쪽으로 결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해결은 또 다른 난점으로 이어진다. 프로스페르에 따르면 팔라디우스가 아일랜드인을 회심시켰으나 — "fecit barbaram (sc. insulam) Christianam(그가 야만의[즉 섬을] 그리스도교적으로 만들었다)" —, 교회 고대의 일치된 증언은 아일랜드의 회심을 팔라디우스보다 조금 뒤의 인물인 파트리키우스(Patricius, 성 패트릭[St. Patrick])에게 돌린다. 그러나 어쩌면 팔라디우스의 성공은, 프로스페르의 진술을 떠받치기에는 한참 못 미치더라도, 성 패트릭의 명예를 위해 열심을 내어 그의 선배들의 성공을 깎아내림으로써 그의 성공을 과장하려 했던 후대 저자들이 인정하려 했던 것보다는 더 컸을 수 있다. 또 다른 난점이 있으니, 프로스페르의 두 구절 사이의 외견상 모순에서 비롯되는바, 한 구절은 팔라디우스에게 그 섬의 회심을 돌리는 반면, 다른 구절은 그를 "ad Scotos in Christo credentes(그리스도를 믿는 스코티족에게)" 파송된 자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 외견상 모순은, 팔라디우스가 안수받아 그들의 주교로 다시 파송되기 전에 그 섬을 방문하여 어느 정도 회심자를 만들었다는 가정으로 조화될 수 있다. 이 가정은 프로스페르가 기록한 한 정황을 설명해 주는데, 곧 (플로렌티우스와 디오니시우스의 집정관 재임 시기, 즉 A.D. 429년에) 팔라디우스가 아직 부제(deacon)에 불과하였을 때, 브리튼(Britain)에서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오세르의 게르마누스(Germanus of Auxerre)를 파송하도록 교황 코엘레스티누스를 설득하였다는 것이니, 이는 팔라디우스 편에서 브리튼 제도(諸島)의 상황에 대한 지식과 그것에 대한 관심 — 이전의 방문이 부여하였을 법한 — 을 가리킨다. 중세 저자들의 갖가지 진술은 어셔(Usher)가 그의 *Britannicar. Ecclesiar. Antiq. *c. 16 p. 799 sq.에서 수집하였다. 또한 살레리우스(Sallerius), *De St. Palladio, *in the *Acta Sanctor. *Jul. 2, 286 sq.도 보라. 팔라디우스는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1월 27일에, 스코틀랜드 신자들에 의해 7월 6일에 성인으로 기념된다. 스코틀랜드 메언스(Mearns)의 포던(Fordun)에 있는 그의 성소(shrine), 곧 그의 것으로 알려진 성소는 종교개혁 이전에 가장 큰 경의로 여겨졌으며, 인근의 여러 지역이 여전히 그의 역사와 연관된 곳으로 지목된다. 12세기의 수도사 저술가인 퍼니스의 조슬린(Jocelin of Furness)은 성 패트릭의 생애에 관한 그의 글(*Acta Sanctor. *Martii, 2, 545; Julii, 2, 289)에서, 팔라디우스가 아일랜드에서의 자신의 미미한 성공에 낙담하여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으로 건너가, 픽트족(Picts)의 영토에서 죽었다고 진술하는데 — 포던의 지역 전승에 의해 뒷받침되는 이 진술은 진실의 일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중세 저자들은 어떤 경우에는 스코티족의 사도 팔라디우스를, 헬레노폴리스의 팔라디우스(Palladius of Helenopolis)와 이상하게 혼동하였으며; 트리테미우스(Trithemius, *De Scriptor. Eccles. *c. 133)와, 심지어 바로니우스(Baronius, *Annal. Eccles. *ad ann. 429, sec. 8) — 포세비누스(Possevinus)가 그를 따른다 — 도 전자를 *크리소스토무스의 생애에 관한 대화*(*Dialogus de Vita Chrysostomi*)의 저자로 만든다. 바로니우스는 또한 그에게(*동상*) *Liber contra Pelagianos, Homiliarum Liber unus, *그리고 *Ad Coelestinum Epistolarum Liber unus*와, 그리스어로 쓰인 다른 저작들을 돌린다. 이 진술들에 대하여 그는 트리테미우스의 권위를 인용하나, 트리테미우스는 *대화*(*Dialogue*)만을 언급할 뿐이다. 이 진술은 매우 신뢰할 수 없는 베일(Bale)의 권위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베일(Bale), *Script. Illustr. Maj. Britann. *cent. 14 sec. 6; 어셔, 위와 같음; 살레리우스, 위와 같음; 소움스(Soames), *Hist. of the Anglo-Saxon Church;* 헤더링턴(Hetherington), *Hist. of the Church of Scotland; *티유몽(Tillemont), *Memoires, *14. 154 sq., 737; 파브리키우스(Fabricius), *Bibl. Med. et Inf. Lat. *v. 191 sq.를 보라.
PALLANT Pallant
팔란트 (Pallant) 팔란트는, 치체스터(Chichester)에 있는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의 특수 관할권(peculiar)과 같은, 독립적인 감독 관할권을 가리키는 교회 용어이다.
PALLAS Pallas
팔라스(Pallas) *아테네*(*Athene*, 미네르바[Minerva])의 별칭으로, 호메로스(Homer)의 글에서는 언제나 그녀의 이름과 함께 결합되지만, 후대의 저술가들에 의해서는 독립적으로 사용된다.
PALLAVICINI, BATISTA Pallavicini, Batista
팔라비치니, 바티스타 (Pallavicini, Batista) 학식 있는 이탈리아의 고위 성직자로, 14세기 말경에 베네치아(Venice)에서 태어났다. 그는 1441년까지 토리노(Turin)의 부주임 사제(archdean)였으며, 그해에 레조(Reggio)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1466년에 죽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장사를 애도하는 역사,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에게 바침(Historia flendoe crucis et funeris Domini nostri Jesu Christi, ad Eugenium IV papam)*(파르마 1477, 4절판)을 썼다. 우겔리(Ughelli), *Italia Sacra*, 제2권을 보라.
PALLAVICINI, NICCOLO-MARIA Pallavicini, Niccolo-maria
Pallavicini, Niccolo-Maria 이탈리아의 신학자로, 1621년 제노바에서 태어났으며 앞 항목의 인물과 친족 관계에 있었다. 1638년에 예수회에 들어갔고, 마침내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에 의하여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큰 총애를 받았으며, 교황들에게 여러 중요한 일에 고용되었다. 인노켄티우스 11세는 팔라비치니에게 추기경의 자주색 예복을 수여하였고, 그 밖에도 그를 후대하였다. 그는 1672년 12월 15일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많은 저술 가운데 다음이 주목할 만하다. *Di Jesa della Provideniza divina conti-o i 'nemici' di ogni religione *(로마, 1799): — *Difesa del pontificato Romano e della Chiesa, Cattolica *(같은 곳, 1686, 전 3권 fol.)가 그것이다. 두 작품 모두 능력 있는 변증서이며, 특히 후자는 많은 이들에게 교황 수위권에 대한 가장 일관되고 능숙한 옹호로 평가된다. 현대 로마 가톨릭 변증가들도 이 책을 자유롭게 인용한다. Sotwel, *De Script. Soc. Jesu; *Steinmetz, *Hist. of the Jesuits *(제3권 색인 참조)를 보라.
PALLAVICINO, FERRANTE Pallavicino, Ferrante
Pallavicino, Ferrante 평판이 의심스러운 이탈리아의 수도자로, 1615년 파르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 성 아우구스티누스 참사회 수도회(Order of the Canons of St. Augustine)에 들어가 서원을 하였으나, 몇 해 뒤 자신이 경솔하게 행동했으며 자신이 받아들인 생활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장상의 허락을 받아 여행을 떠났다. 먼저 베네치아로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음란한 책들을 썼다. 그 뒤 한 귀족의 사제로 독일에 갔다가, 파르마 공작 에도아르도 파르네세와 교황 우르바누스 8세 사이에 카스트로 공국 문제로 전쟁이 일어나던 때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팔라비치노는 자기 군주인 공작을 지지하는 글을 쓰면서 교황과 그의 조카들인 바르베리니 가문을 향해 격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의 소책자 가운데 하나는 *Il Divorzio Celeste *라는 제목이었는데, 이는 교회와 그 신적 창시자 사이에 이혼이 일어났음을 암시한 것이었다. 팔라비치노는 이제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프랑스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사람을 끄는 태도를 지닌 한 젊은 프랑스인과 동행하였는데, 그는 바르베리니 가문의 첩자로 드러났고, 그를 부지중에 교황령 아비뇽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팔라비치노는 즉시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는 배교와 대역죄로 재판을 받았고, 1644년 3월 5일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사형 선고를 받고 참수되었다. Poggiali, *Memorie per la Storia Letteraria di Piacenza*를 보라.
PALLAVICINO, PIETRO SFORZA Pallavicino, Pietro Sforza
Pallavicino, Pietro Sforza 매우 저명한 이탈리아의 고위 성직자이며, 특히 역사 저술가로 두드러진 인물이다. 알렉산드로 팔라비치노 후작과 프란체스 스포르차의 아들로, 1607년 11월 20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큰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성직자의 삶을 선택하였다. 피에트로의 품행은 매우 모범적이어서 일찍부터 로마의 "콩그레가치오네스(congregations)"라 불리는 회의들을 보좌하는 고위 성직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유명한 유머리스트 아카데미에 받아들여졌고, 그곳에서 자주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또 교황 우르바누스 8세 아래에서 예시(Jesi)의 총독이었고, 뒤이어 오르비에토와 카메리노의 총독도 지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이점도 교황의 불쾌감이 그에게 닥치려 할 때 그가 세상을 버리고 1637년 예수회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수련기를 마치자 그는 철학을 가르쳤고, 이어 신학을 가르쳤다. 팔라비치노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고 교황직이 학식을 인정하는 것이 정책상 유익하다고 여긴 인노켄티우스 10세는, 그를 교황직과 관련된 여러 문제, 그 가운데 얀센주의 논쟁(1651-1653)을 조사하도록 임명하였다. 알렉산데르 7세는 1657년에 그를 추기경으로 삼았다. 이 교황은 단순히 파비오 키지(Fabio Chigi)로서 처음 로마에 왔을 때 팔라비치노가 도와주었던 오랜 친구였다. 팔라비치노는 키지의 세속적 출세를 앞당기는 데에도 기여하였고 그를 유머리스트 아카데미에 받아들였는데, 키지는 이에 감사하여 자기 책 *Philomathi Musae Juveniles*에 실린 몇 편의 시를 그에게 헌정하였다. 팔라비치노가 성직자단의 한 자리를 얻은 것은 1659년에 이르러서였는데, 그는 제안된 영예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였다. 그는 또한 주교 심사관으로 임명되었고, 뒤이어 성무성, 곧 종교재판소의 회중과 트리엔트 공의회 회중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이 트리엔트 공의회의 역사를 매우 뛰어난 방식으로 저술하였다. 그는 1667년 6월 5일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Historia del Concilio de Trento *(로마, 1656-1657, 전 2권 fol.; 1665, 전 3권 4절판)인데, 이는 더 유명하고 자유주의적이지만 로마 가톨릭 측에서 깊이 의심한 파울 사르피(Paul Sarpi)의 저작에 대한 답변으로 의도된 것이었다. 팔라비치노는 물론 예수회 회원답게 교황권을 변호하고 울트라몬탄적 색채를 띠고 썼다. 따라서 그의 저작의 고전적 가치는 제한되지만, 문체는 탁월하며 그의 학식에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Ranke, *Gesch. der rom. Papste, *ii, 237 이하; 3권 부록; Britschar, *Beurtheilunq der Controversen Sarpis u. Pallanicino's — *(튀빙겐, 1844); Buckley, *Hist. of the Council of Trent *(런던, 1852), 서문; Danz, *Gesch. des Tridentinischen Concils *(예나, 1846, 8절판), 서문을 비교하라. 그의 다른 저술로는 *Vindicationes Soc. Jes. *(로마, 1649): *— .Del Bene, *철학 논문: — *Arte della Perfezione Cristiana-I Fasti Sacri *(미간행 필사본은 파르마 도서관에 있음): *— Ermengilda, *비극(같은 곳, 1644): *— Gli Avvertimenti Gramm*(*tticali *(같은 곳, 1661): — *Trattato dello Stilo e delDialogo *(같은 곳, 1662): — 그리고 *Lettere *(같은 곳, 1668)를 들 수 있다. Tiraboschi, *Storia della Letter. Ital. *8:132-136; Sotwel, *Script Soc. Jesu; *Burnet, *Hist. of the Reformation; *Schrockh, *Kirchengesch. seit der Reformation, *vol. iv; Stillingfleet, *Works, *vol. i; Mosheim, *Eccles. Hist. *vol. iii; Hagenbach, *Hist. of Doctrines *(색인 참조)를 보라.
PALLENIS Pallenis
Pallenis 아테네와 마라톤 사이에서 숭배되던 아테네(Athene, 미네르바)의 별칭이다.
PALLIERE, LOUIS VINCENT LEON Palliere, Louis Vincent Leon
Palliere, Louis Vincent Leon 프랑스의 화가로, 1787년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로 가서 뱅상(Vincent)에게 배웠으며, 그 아래에서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1812년에 그는 *율리시스가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죽임 *이라는 그림으로 아카데미 1등상을 받았고, 이 상으로 정부 연금을 받아 로마로 갈 자격을 얻었다. 로마에서 그는 여러 고전적 주제를 그렸고, 특히 칭찬을 받은 *그리스도의 채찍질 *도 그렸다. 파리로 돌아온 뒤 그는 1819년에 루브르에서 *성 베드로가 다리 저는 사람을 고침; 토빗이 자기 아버지의 시력을 회복시킴; 쉬고 있는 목자; 로마의 밤 설교 *및 다른 주제들을 전시하였고, 1등급 금메달을 받았다. 그는 1820년에 한창 장년의 힘을 지닌 때 사망하였으며, 큰 가능성을 지닌 예술가로 깊이 애도되었다.
PALLIUM Pallium
Pallium 교황권적 예복의 한 부분이다. 이는 수석 주교, 대주교구장, 대주교, 그리고 특권을 받은 몇몇 주교들의 고유한 표지로서, 공의회와 서품식 및 교회 안의 특정한 경우에 착용된다. 다른 이름으로는 *anophorion, superhumerale*가 있으며, 테오도레트와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의 글에서는 *hiera stole*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꾸밈없는 어린양 털로 만든 둥근 스카프로, 목 둘레에 깃처럼 두르고, 두 갈래로 늘어진 끝을 제의 위에 고정한다. 이때 왼쪽 어깨와 가슴과 등 쪽에 꽂은 세 개의 금핀으로 고정하는데, 세 개라는 수는 사랑 또는 십자가의 못을 뜻한다. 8세기 이전에는 붉은색이나 자주색 십자가 두 개 또는 네 개로 장식되었으나, 지금은 금핀으로 고정한 여섯 개의 검은 십자가가 붙어 있다. 이는 4세기에 쓰이던 더 이른 장식, 곧 선한 목자 또는 하나의 십자가를 대신한 것이다. 팔리움은 토가가 점차 라티클라브(laticlave) 형태로 줄어든 것의 마지막 유물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레고리우스 대제 시대에는 이음매나 바느질이 없는 흰 아마포로 만들어져 어깨에서 아래로 드리워졌다. *PALL*을 보라.
PALLOR Pallor
Pallor 창백함 또는 두려움의 신격화로, 고대 로마인들은 이를 마르스의 동반자로 여겼다.
PALLORII Pallorii
Pallorii *창백함의 신*의 제사장들에게 붙여진 칭호이다(해당 항목 참조).
PALLU Pallu
Pal'lu 히브리어 *Pallu'*(פִּלּוּא, *구별된*; 칠십인역 Φαλλός, Φαλλούς)로, 르우벤의 아들이며 자기 지파 안에서 한 가문, 곧 팔루 사람들의 우두머리였다(창 46:9["Phallu"]; 출 6:14; 민 26:5, 8; 대상 6:3). 주전 약 1870년.
PALLU, FRANCOIS Pallu, Francois
Pallu, Francois 프랑스의 성직자로, 1625년 투르에서 태어났다. 성품성사를 받은 뒤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한 여러 직책에 부름을 받았다. 그는 해외 선교 사역에 들어가기 위해 성 마르탱 교회의 참사회원직을 사임하였다. 교회는 그가 그러한 사역에 적합하다고 인정하여 그를 헬리오폴리스의 주교이자 중국 푸젠의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예수회에 반대했기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았고, 두 차례나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선교 총관리자의 직책을 맡은 채 1684년 10월 29일 사역 중에 사망하였다. 그는 *Relation abregge des Missions et des Voyages des Evdques Frangais envoyes aux Royaumes de la Chine, Cochinchine, Tonquin, et Siam*(파리, 1862, 8절판)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A A
A. *ALPHA 항목을 보라*
A BECKET, THOMAS A Becket, Thomas
A 베킷, 토머스(A Becket, Thomas). *BECKET, THOMAS A 항목을 보라*.
A REND (OR ARENTS), BALTHAZAR A Rend (or Arents), Balthazar
A 렌트(또는 아렌츠), 발타자르(A Rend [Or Arents], Balthazar) 독일의 신학자로, 예나(Jena), 라이프치히(Leipsic), 코펜하겐(Copenhagen)의 독일 대학들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1687년에 죽었다. 그는 다음 저작들을 남겼다. *Geistlicher Krieg, das Himmelreich mit Gewalt erstürmen*(글뤽슈타트[Gluckstadt], *1671):-Des Leibes und der Seelen Zustand nach dem Tode*(같은 곳, 1776) *:-Disputatio Historico-teologica de Resurrectione Christi adversus Haereticos et Hostes alios*(슈트라스부르크[Strasb.], *1664):-Exilium Mortis,* 등. Hoefer, *Nouv. Biog. Generale, 해당 항목을* 보라.
AA Aa
Aa *(고대형),* 고대 애굽 신화에서 두 진리의 전당(Hall of the Two Truths)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고발하는 정령(daemon) 중 하나였다. 또한 아아트(Aat) 성읍에서 숭배된 신이기도 하였다.
AA, CHRISTIAN CHARLES HENRY Aa, Christian Charles Henry
Aa, 크리스티안 카를 헨리(Aa, Christian Charles Henry) (네덜란드어로 *Christian Karel Hedrik) VAN DER,* 박식한 루터교 신학자로, 1718년 8월 25일 네덜란드 오버레이설(Overyssel)의 즈볼러(Zwolle)에서 태어났다. 그는 1737년 레이던(Leyden)과 예나(Jena)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1752년 하를럼(Haarlem)에서 창립을 도왔던 네덜란드 과학협회(Society of Sciences)의 초대 종신 사무총장(secretary-perpetual)이었다. 그는 51년 동안 그곳 루터교회의 목회 직무를 수행하였고, 1793년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여러 편의 설교를 출판하였다. 그의 자연과학 저술들은 1793년에 출판된 *Algemeene Vaderlandsche Letteroefeningen*이라는 제목의 네덜란드 정기간행물 모음집에 실려 있다. Hoefer, *Nouv. Biog. Generale,* 해당 항목; *Biog. Universelle* 해당 항목을 보라.
AACS (OR ACS), MIHALY (MICHAEL) (1) Aacs (or Acs), Mihaly (Michael) (1)
Aacs(또는 Acs), 미하이(미하엘) (Aacs [Or Acs], Mihaly [Michael]) (1), 헝가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1631년 7월 9일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의 센트 마르톨니(Szent Martolny, 또는 Martonhegy)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일에서 학업을 마쳤으며, 헤메게스 알라(Hemegges Ala), 라브(Raab), 로제나우(Rosenau)에서 목사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708년 12월 23일 로제나우에서 죽었다. 그는 라틴어와 헝가리어로 *Fontes Calvinismi Obstructi*(튀빙겐[Tubingen], 1669): *— Bodag Halalak Szekere*(슈트라스부르크[Strasb.], 1700)를 저술하였다. Hoefer, *Nouv. Biog. Gen.; 해당 항목을* 보라.
AACS, MIHALY (2), Aacs, Mihaly (2),
Aacs, 미하이(Aacs, Mihaly) **(2),** 헝가리의 신학자로, 1672년 2월 28일 라브(Raab)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텐베르크(Wittenberg)와 튀빙겐(Tubingen)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헝가리 연대의 군목(chaplain)이 되었다. 그는 1711년 2월 2일 바르트펠트(Bartfeld)에서 죽었다. 그는 라틴어와 헝가리어로 *Dissertatio Historicotheologica de Catechumenis*(슈트라스부르크[Strasb.], *1700): — Magyar Theologia*(바르트펠트[Bartfeld], *1709): — Currus Mortis ex Pestilentia, in quo Hominibus Salutarem Mortem Cupientibus Gratiam* *ipsemet Dominus Jesus Preparet*(슈트라스부르크[Strasb.], 1702)를 저술하였다. Hoefer, *Nouv. Biog. Generale, 해당 항목을* 보라.
AADRAK Aadrak
Aadrak *AAZRAK 항목을 보라*
AAEDE Aaede
Aaede 고대 애굽인들의 본래 세 뮤즈(muse) 중 하나이다. 나머지 둘은 멜레테(Melete)와 므네메(Mneme)였다.
AAGAARD, CHRISTIAN Aagaard, Christian
Aagaard, 크리스티안(Aagaard, Christian) 덴마크의 시인이자 신학자로, 1616년 비보르(Viborg)에서 태어났다. 그는 쇠로(Siore)에서 시학 교수였으며, 이후 유틀란트(Jutland)의 리펜(Ripen)에서 신학 강사였다. 그는 1664년 2월에 죽었다. 그의 시 가운데에는 *De Hommagio Frederici III, Dania et Norw. Regis*(코펜하겐[Hafniae], 1660, *2절판[fol.]): Threni Hyperborai,* 곧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의 죽음에 관한 시가 있다. 그의 모든 작품은 로스트고르(Rostgaard)의 *Deliciae quorundam Poetarum Danorum*(레이던[Leyden], 1695, 12절판 2권)에 수록되어 있다. Moreri, *Dict. Hist. 1810을* 보라.
CAABA Caaba
Caaba *KAABA를 보라*.
CAB Cab
Cab (קִב, *kab*, 속이 빈 *그릇*; 칠십인역 κάβος), 마른 것을 재는 되[度量]로, 왕하 6:25에 언급된다. 랍비들은 이것을 *세아*(*seah*, q.v.) 곧 *사툼*(*satum*)의 6분의 1, 그리고 에바의 18분의 1로 본다. 이것은 영국 도량형으로 거의 *2쿼트*에 해당한다. *도량형(MEASURE)을 보라*.
CABALA Cabala
Cabala 여기에 몇 가지 추가적인 세부 사항을 제시한다. **1. ***세피로트(Sephiroth). *카발라는 이것들에 관하여 다음의 요점들을 주장한다: **i. **그것들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엔-소프(En-Soph)로부터 유출(נאצל)된 것이다. **ii. **그것들은 자기들끼리, 그리고 엔-소프와 더불어 엄밀한 통일성을 이루며, 단지 하나의 동일한 존재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나타낼 뿐이다. **iii. **열 개의 유출물 모두가 똑같이 엔-소프의 완전성에 참여한다. **iv. **무한자의 유출물로서 세피로트는 엔-소프와 마찬가지로 무한하고 완전하며, 그러면서도 첫 번째 유한한 것을 구성한다. 첨부된 목판화에는 열 개의 세피로트를 나타내는 원형적 인간(archetypal man)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또 다른 배열은 다음 면의 표에 제시되어 있다. **2. ***천사들의 창조. *조하르(Sohar)는 말한다. "하나님은 궁창의 각 부분에 별개의 영을 불어넣으셨고, 즉시 모든 하늘의 군대가 그분 앞에 있게 되었다"(iii, 68a). 이 천사적 존재들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의 두 부류로 이루어지며, 각기 자신의 군주를 가지고, 다음 순서로 세 개의 거주 가능한 세계를 차지한다: 천사 메타트론(Metatron)은 둘째 세계, 곧 창조의 세계(World of Creation)에 거한다. 그 홀로 순수한 영들의 세계를 이루며, 샤다이(Shaddai)의 옷, 즉 신성(Deity)의 보이지 않는 현현이다. 그의 이름은 수치상으로 주의 이름과 동등하다. 이 세계에 거하는 천사 군대는 열 개의 세피로트에 상응하여 열 등급으로 나뉘며, 각각은 우주의 서로 다른 부분을 다스린다. 천사들의 둘째 부류를 이루는 마귀들은 넷째 세계, 곧 행위의 세계(World of Action)에 거한다. 그것들이 모든 형상 중에서 가장 조잡하고 가장 결함이 많기는 하나, 그래도 열 개의 세피로트에 상응하여 열 단계를 이룬다. 이 어둠의 영역의 군주는 독 혹은 죽음의 천사 사마엘(Samael)이다. 그는 하와를 유혹한 악한 영이며, 창녀(the Harlot) 혹은 음행의 여인(Woman of Whoredom)이라 불리는 아내를 두는데, 그 여인은 그와 함께 한 인격으로 취급되어 "짐승(the Beast)"이라 불린다. **3. ***인간과 우주의 운명. *영혼이 그 안에 심긴 완전성의 씨앗들을 땅에서 발전시킨 후, 자신이 유출되어 나온 무한한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영혼의 절대적 조건이다. 만일 영혼이 인간의 몸을 취한 뒤, 땅에서의 첫 체류 동안 자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까닭이 된 그 경험을 획득하지 못하고 죄로 오염된다면, 정화된 상태로 상승할 수 있을 때까지 거듭거듭 몸에 다시 거해야 한다. 그러나 이 윤회는 세 번으로 제한된다. 세계는 신성 자신의 실체가 확장된 것이므로, 그것이 첫 진화에서 누렸던 그 복됨을 궁극적으로 함께 나누어야 한다. 사탄 자신, 곧 악의 대천사조차도 천사적 본성으로 회복될 것인데, 이는 그 역시 만물의 무한한 근원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마지막 인간 영혼이 시련을 통과하고 나면, 그때에 구주가 나타날 것이며, 대희년(great jubilee year)이 시작될 것인데, 그때에는 정결케 되고 정화된 영혼들의 충만함(pleroma) 전체가 무한한 근원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CÁBALA CábAla
Cábala, 중세 이래로 줄곧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양편의 신학적·주해적 문헌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저 유명한 종교 철학 체계, 더 엄밀히 말하면 신지학(theosophy)의 명칭이다. *철학(PHILOSOPHY)을 보라*. 다음의 서술은 일부 헤르초크(Herzog)의 *실용 백과사전(Real-Encyclopädie)*에서 편집한 것이다. **I. ***명칭. — *KABBALA(히브리어 קִבָּלָה Kabbala' *받은 것*에서 유래)는 본래 *받음(reception)*을, 그 다음에는 *구전 전승으로 받은 교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용어 자체는 라틴어 *traditio-Massora*와 마찬가지로 "전달(transmission)"과 거의 동등한데, 실제로 후자에 대하여 탈무드는 그것을 호환적으로 사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모세는 시내 산의 율법을 받아(קַבֵּל) 여호수아에게 전달하였다(מָסִר)." 그러나 이 단어와 מִסּוֹרָה(מָסִר, 곧 넘겨주다에서 유래) 사이의 차이는, 전자는 *받는 행위*를 표현하는 반면 후자는 *넘겨주고, 양도하고, 전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카발라는 또한 어떤 이들에 의해 חָכמָה נַסתּרָה, 곧 *비밀의 지혜*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그것이 매우 오래되고 비밀스러운 전승임을 자처하기 때문이며, 또 이 두 단어의 첫 글자들에서 ן"ִח, 곧 *은혜(grace)*라고도 불린다. *카발라(Kabbalah)*라는 용어는 유대 문헌에서 여러 전통적 교리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예컨대 율법 수여 이전 족장 시대의 신조를 이룬 것; 유대인들이 믿기로 하나님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셨고 마침내 글로 기록되어 미쉬나(Mishna)를 형성했다는 저 기록되지 않은 의식 해석. 이것들과 그 밖의 유사한 전승들에 적용되는 것 외에도, 그것은 비교적 근대에 이르러 구약을 해석하는 어떤 독특한 신비적 방식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어 왔다. 이 막연한 명칭은 우리에게, 동방의 대부분에 걸쳐 그러하듯 유대인들에게서도 역사적이든 학문적이든 인간의 지식이 주로 일종의 *계승(succession)*에 의존했으며, 그 수용을 위한 가장 좋은 근거는 끊어지지 않은 전승적 증거의 사슬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모세로부터 여호수아와 이른바 대선지자들을 거쳐, 거기서 다시 에스라와 "대회당(the Great Synagogue)"을 거쳐 후대의 교사들에 이르기까지 진리의 거룩한 수호자들의 규칙적 계승을 확립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으며, 마침내 특정 랍비들과 그 세습적 추종자들의 여러 학파 혹은 시대로 세분되었다. 그러므로 진리가 율법서와 선지서와 탈무드의 기록들 속에서 점진적으로 제시되는 동안, 카발라는 이것들과 더불어 구두로 전승되었으나 일반 백성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더 깊거나 더 철저히 전수된 양식의 가르침을 담은 이것들에 대한 언어적 해설을 가리킨다. 이리하여 그것은 마침내 유대교의 품 안에서 발생하여 자리 잡았으나, 어느 정도는 그것과 독립적인, 아니 오히려 그것에 보충적인 어떤 특정한 신학적·철학적 체계를 지칭하기에 이르렀다. **II. ***원전 문헌*. — 유대교에서의 가르침은 주로 구두로 이루어졌고 기억에 근거했으므로, 그 발전의 국면들은 필연적으로 역사에 거의 흔적을 남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철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히, 적어도 후대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신비가 되었으므로, 카발라의 기원과 진전은 여전히 대체로 추측의 문제이며, 그 사변적 형태에 있어서 그것이 중세보다 더 이른 시기로 분명히 소급될 수 있는지조차 학문적 논쟁의 주제이다. 비록 그 주요 원리들이, 이른바 아담·아브라함·모세·에스라 등의 계시라 불리는, 그 본질이 아직도 매우 불완전하게만 이해되는 고대 문헌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외경(APOCRYPHA)을 보라*. 사실 탈무드는 (*하기가(Chagiga)* 논편의 미쉬나와 게마라 양쪽 곳곳에서) 신중히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전수된 어떤 교리를 언급하며, 심지어 그것에 (창 1:1과 겔 1:1의 표현에서 따온) 어떤 공상적 명칭들을 적용하여 각기 사변적 *우주론(cosmology)*과 사변적 *신학(theology)*을 의미하게 한다. 그러나 이 명칭들이 일정한 논저들을 지칭하는지, 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식별 가능한 어떤 형태로든 근대에까지 전해졌는지는 불확실하다. 이 가장 이른 견해들을 담고 있다고 합당하게 자처할 수 있는 유일한 저작들은 다음 두 가지로, 이것들은 중세 후반에 카발라의 공인된 텍스트가 되었다. 제3의 카발라 논저(סֵפֶר בָּחַיר, *세페르 바히르(Sepher Bachir)*, 곧 *선택의 책(Choice Book)*이라 불리며, 암스테르담 1651년 판본에 수록되어 1세기의 랍비 네호니아 벤-하카나(Nechoniah Ben-Hakana)의 것으로 돌려진다)는, 비록 같은 제목의 카발라 저작이 이미 14세기에 언급되기는 하지만, 오래전부터 일반적으로 위작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 중 첫째는 *창조의 책(Book of Creation, *יצַירָה סֵפֶר, *세페르 예치라(Sepher Yetsirah)*, 여러 번 재인쇄되었으며, 예컨대 Steph. Rittangel 편, 암스테르담 1642년 판은 라틴어 번역 및 주석과 함께, 또 J.F. van Meyer 판은 독일어 번역 및 주석과 함께, 라이프치히 1830년, 4절판)으로, 저명한 랍비 아키바(Akiba, 주후 120년)의 것으로 돌려진다. 그것은 다소 짧은 논저로, 신탁적 문장들로 되어 있으며, 그 언어는 형식보다 의미에서 더 모호하여 미쉬나의 히브리어와 닮지 않았다. 같은 제목의 책이 게마라에서 이미 언급된 것으로 보이고, 거기서 그것에 놀라운 능력이 돌려지며, 또 랍비 사아디아(Saadias)가 이미 10세기에 그것에 대해 주석했다고 하므로, 그 권위를 추적함에 있어 우리가 상당한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은 확실하다. *예치라(JEZIRAH)를 보라*. 다른 하나이자 더 중요한 카발라 텍스트는 저 유명한 *광채의 책(Book of Light, *סֵפֶר הִזּוהִר*, 세페르 하즈-조하르(Sepher haz-Zohar), *단 12:3에서 유래)으로, 크레모나와 만토바에서 1560년에 처음 인쇄되었고 이후 여러 번 재인쇄되었는데, 예컨대 1684년 줄츠바흐(Sulzbach) 2절판은 여러 부록과 함께 나왔다. 전승은 이 저작을 랍비 아키바의 동시대인, 곧 랍비 시므온 벤 요하이(Simeon Ben Jochai)의 것으로 돌리는데, 그는 탈무드에서 그의 위대한 지혜와 율법 지식으로 크게 칭송받는 교사이나, 거기서 그의 저술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된 바는 없다. 회의적 비평은 그것을 문학사에 처음 등장한 시기인 13세기의 산물로 여기며, 그것을 스페인 유대인 모세 데 레온(Moses of Leon)의 것으로 돌린다. 그러나 그것은 이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본래 동방에서 간헐적으로 단편적으로 나타났다가, 전체가 현재의 형태로 8세기경에 완성된 듯하다. 그것은 특정한 특수 소론(小論) 혹은 논저들을 포함하는데, 거기서 저자는 특히 자신의 견해를 전개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것들은 말하자면 전수하려는 학문의 핵심을 이룬다. 이 가운데 셋은 특정한 이름으로 지칭되는데 (*신뢰의 책(The Book of Confidence)*, 그리고 *대(大) 모음집*과 *소(小) 모음집(Greater and Less Collections)*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대(大) 조하르와 소(小) 조하르 사이에 두는 통속적 구별은 때로 단지 판본들의 분량 차이를 가리킬 뿐이다. *조하르(ZOHAR)를 보라.* **III. ***근본 교리. — *이것들은 위에 언급한 책들에서 (따라서 독자는 충분한 세부 사항을 위해 각각에 관한 별도의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소 다르게 설명되며, 후자에서 가장 상세하게 설명된다. 그러나 다음은 그 학파의 후대 저자들의 일반적 저술에 표현된 카발라적 견해의 요약이다: **1. ***신성의 본질.— *하나님은 만물 위에, 심지어 존재와 사유 위에도 계신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해 의지, 의향, 욕구, 사유, 언어, 행위 중 어느 것을 가지신다고 말할 수 없으니, 인간을 꾸미는 이 속성들은 한계를 지니는 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모든 면에서 무한하시기 때문이다. 절대적 통일성과 불변성을, 그리고 그분 바깥에 아무것도 없음을, 즉 τὸ πᾶν(전체)이 그분 안에 있음을 필연적으로 함의하는 그분의 본성의 이 무한함으로 인하여, 그분은 EN-SOPH *= 끝이 없는, 무한한* 이라 불리며, 지성으로 파악될 수도 말로 묘사될 수도 없으니, 그분을 우리에게 붙잡아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불가해성 혹은 무한함 속에서 하나님, 곧 *엔-소프(En-Soph)*(אֵין סוֹף)는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으시니(אִיַן); 우리 정신에 관한 한, 불가해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가해(可解)하게 만들지 않고서는 그분의 존재가 결코 알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자신의 존재가 지각될 수 있도록 활동적이고 창조적이 되셔야 했다. **2. ***신성의 전개. — *그러나 한편으로, 한계를 함의하는 창조하려는 의지와, 이 세계의 제한되고 불완전한 본성은, 그것을, 아무런 의지도 가질 수 없고 자신과 같은 것 곧 무한하고 완전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산출할 수 없는 분의 직접적 창조물로 여기는 관념을 배제하며; 다른 한편으로, 세계에 나타난 아름다운 설계와 질서는 지성적이고 활동적인 의지를 분명히 가리켜, 우리가 그것을 우연의 소산으로 여기는 것을 금하므로, *엔-소프*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곧 *엔-소프*로부터 유출된 열 개의 "*세피로트(Sephiroth)*" 곧 *지성(intelligences)*을 매개로 하여 세계의 창조자로 여겨져야 한다. 이 단어의 어원과 정확한 의미는 모호하다. 그것은 ספִירָה의 복수형 ספִירוֹת, *세피로트(sephiroth')*인데, 최초의 카발라주의자 랍비 아사리엘(Asariel)은 그것을 *세다, 헤아리다*를 뜻하는 סָפַר, *사파르(saphar')*에서 끌어내며, 후대의 카발라주의자들은 그것을 *사파이어*를 뜻하는 סִפַּיר, *사피르(sappir')*에서, 혹은 시 19:1의 "선포하다"를 뜻하는 단어 מסַפּרִים에서, 혹은 심지어 그리스어 σφαῖραι, 곧 *천구(spheres)*에서 끌어낸다. 자신의 무한한 빛의 충만함으로부터 *엔-소프*는 처음에 하나의 영적 실체 곧 지성을 내보냈다. 영원 전부터 *엔-소프* 안에 존재했고 단지 하나의 행위로써 실재가 된 이 지성은 다른 아홉 개의 지성 곧 *세피로트*를 포함했다. 첫 번째 *세피라(Sephirah)*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단지 유출(אֲצַילָה)이었다는 사실에 큰 강조가 주어지며, 창조와 유출 사이의 차이는 이렇게 정의된다. 즉 전자에서는 힘의 감소가 일어나는 반면 후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첫째 *세피라*로부터 둘째가, 둘째로부터 셋째가, 셋째로부터 넷째가 유출되었고, 이런 식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나아가 열의 수에 이르렀다. 이 열 개의 *세피로트*는 자기들끼리, 그리고 *엔-소프*와 더불어 엄밀한 통일성을 이루며, 단지 하나의 동일한 존재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나타낼 뿐인데, 마치 불에서 나오는 불꽃과 불티들이 눈에는 서로 다른 것으로 보여도 동일한 불의 서로 다른 현현들을 이룰 뿐인 것과 같다. 이리하여 단지 동일한 빛의 서로 다른 색깔들로서 서로 다른 이 열 개의 유출물은 모두 똑같이 *엔-소프*에 참여한다. 그것들은 무한하면서도 첫 번째 유한한 것들을 구성하니, 그리하여 무한하면서 동시에 유한하다. 그것들은 *엔-소프*가 자신의 충만함을 그것들에 나누어 줄 때에는 그분처럼 무한하고 완전하며, 그 충만함이 그것들로부터 거두어질 때에는 유한하고 불완전하다. *세피로트* 유출의 유한한 측면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는 그것으로 인해 불가해한 *엔-소프*가, 척도와 한계와 관계를 지닌 것만을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지성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시기 때문이다. 그 유한한 측면에서 *세피로트*는 심지어 물체적이라고도 불릴 수 있으며, 이것이 그것들 안에 내재하시는 *엔-소프*가 물체적 형태를 취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3. ***이 전개의 형태들. — *각기 자신의 이름을 가진 열 개의 *세피로트*는 각각 세 개의 *세피로트*로 된 세 무리로 나뉘며, 각각 세 세계, 곧 지성의 세계(עוֹלָם הִשֵּׂכֶל), 영혼의 세계(עוֹלָם הִנֶּפֶשׁ), 물질의 세계(עוֹלָם הִטָּבַע)에 작용한다. 1. 첫째 무리는 지성적 세계에 작용하며, *세피로트* 1, 곧 כֶּתֶר, 또는 רוּם מַעֲלָה, *왕관(crown)*, 혹은 *헤아릴 수 없는 높음(inscrutable height)*; 2, 곧 חָכמָה, *창조적 지혜(creative wisdom)*; 3, 곧 בַּינָה, *구상하는 지성(conceiving intellect)*으로 이루어진다. 후자의 둘이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결합한 결과 또한 דַּ-עת, 곧 *지식(knowledge)*, 즉 구체적 사유, 정신의 우주, 로고스(λόγος)의 결과로 표현된다. 2. 둘째 무리는 도덕적 세계에 그 능력을 행사하며, *세피로트* 4, 곧 הֶסֶד, 무한한 *은혜(grace)*(또한 גּדוּלָה, *위대함(greatness)*); 5, 곧 דַּין, 또는 גּבוּרָה, 신적 *공의(justice)*, 혹은 사법적 *권능(judicial power)*; 6, 곧 תִּפאֶרֶת, *아름다움(beauty)*이라 불리며 서로 대립하는 *세피로트* 4와 5 사이의 연결 고리이다. 3. 셋째 무리는 물질적 세계에 그 능력을 행사하며, *세피로트* 7, 곧 נֶצַח, *견고함(firmness)*; 8, 곧 הוֹד, *광휘(splendor)*; 9, 곧 יסוֹד, 일차적 *기초(foundation)*라 불리며 서로 대립하는 두 *세피로트* 7과 8 사이의 연결 고리이다. *세피라* 10은 מַלכוּת, 곧 *나라(kingdom)*라 불리며, 섭리 혹은 계시된 신성(שׁכִינָה, 셰키나(Shekinah))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유대 백성 가운데 거하며, 그들의 모든 유랑과 포로 생활에서 그들과 함께 가고 그들을 보호한다. 첫째 삼조(三組)는 위에 놓이고, 둘째와 셋째 삼조는 그 단일자(unit)와 함께 아래에 놓여, *왕관, 아름다움, 기초, 나라*라 불리는 네 개의 *세피로트*가 *중앙 기둥(the middle pillar)*(עמּוּד אֶמצָעִי)이라 불리는 중앙의 수직선을 이루게 된다. 이 구분은 카발라주의자들이 열 개의 *세피로트*를 나타내는 세 가지 서로 다른 형태를 산출하는데, 서술을 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그것들을 덧붙인다. 첫째는 거꾸로 된 나무를 나타내며 עֵוֹ חַיִּים, 곧 *생명나무(tree of life)*라 불리고, 둘째와 셋째는 인간의 형상으로 אָדָם קַדמוֹן, 곧 *원초적 인간(primeval man)*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 세 형태의 외양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세피로트*는 그 각각에서 세 삼조와 중앙 기둥이 구별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4. ***신적 전개의 과정들. — *이 *세피로트*, 혹은 그것들을 통한 하나님이 더 낮고 보이는 세계를 창조했는데, 그 세계의 모든 것은 위의 세계에 그 원형을 가진다. "온 세계는 가지와 잎이 가득한 거대한 나무와 같으니, 그 뿌리는 *세피로트*의 영적 세계이다. 혹은 그것은 굳게 연결된 사슬과 같으니, 그 마지막 고리가 위의 세계에 매여 있다. 혹은 끊임없이 자신의 흐름을 영원히 뿜어내는 샘에 의해 계속 채워지는 광대한 바다와 같다." *세피로트*는 그것들 안에 내재한 신적 능력을 통하여, 자기들이 창조한 세계를 떠받치며, 열두 통로(צַנּוֹרוֹת)를 통해 그 세계에 신적 자비를 전달한다. 이 신적 자비의 전달은 기도, 제물, 종교적 의식에 의해 촉진될 수 있다. 그리고 유대 백성은 그 계시와, 그들에게 주어진 613계명에 의하여 *(학교(SCHOOLS)를 보라)*, 특별히 온 세계를 위해 이 복(שֶׁפַע)을 얻도록 정해졌다. 그러므로 유대 의식의 큰 신비(סוֹד הִתּפַילָה)가 있고; 그러므로 기도 정형문의 모든 단어와 음절에 담긴 심오한 비밀이 있으며;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이 세계의 기초를 이룬다"(צַדִּיק יסוֹד עוֹלָם)는 선언이 있다. *엔-소프*가 *세피로트*를 통해 자신을 계시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또한 성육신하는데, 이것이 성경과 하가다(Hagada)의 의인화(anthropomorphisms)를 설명해 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땅으로 내려오셨다, 하늘로 올라가셨다, 제물의 향기를 맡으셨다, 마음으로 후회하셨다, 진노하셨다" 등으로 말해질 때, 혹은 하가다 저작들이 하나님의 몸과 거처 등을 묘사할 때, 이 모든 것은 *엔-소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중간 존재들을 가리킨다. 이 *세피로트*는 다시 족장들 안에서 성육신했으니, 예컨대 *세피라 4, 사랑*은 아브라함 안에서; 5, *권능*은 이삭 안에서; 6, *아름다움*은 야곱 안에서; 7, *견고함*은 모세 안에서; 8, *광휘*는 아론 안에서; 9, *기초*는 요셉 안에서; 10, *나라*는 다윗 안에서 성육신했으며, 그것들은 병거 보좌(מֶרכָּבָה)를 이룬다. **5. **카발라의 *심리학(psychology)*은 그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세피로트*의 세계 안에 선재(先在)하며, 예외 없이 인간의 몸에 거하여 일정 기간의 시련 동안 땅 위에서 그 과정을 밟도록 정해져 있다. 만일 몸과의 결합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모든 지상의 속박에 저항하여 순결하게 남는다면, 그것은 죽음 후 영적 나라로 상승하여 *세피로트*의 세계에 참여한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그것이 지상적인 것에 의해 오염된다면, 그 영혼은 거듭된 시련을 통하여 정화된 상태로 상승할 수 있을 때까지 거듭거듭 몸에 거해야 한다(עיבוּר, גִּילגוּל)(나흐마니데스(Nachmanides)와 후대 카발라주의자들에 의해 *세 번*의 윤회로 제한됨). 경건한 자들이 이 땅에서 때때로 겪어야 하는, 외견상 부당해 보이는 고난은 단지 그들의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이 고난당하고 악인이 번성할 때 하나님의 공의가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영혼의 윤회에 관한 이 교리는, 형제가 후사 없이 죽으면 그 형제의 과부와 결혼해야 한다는 성경의 명령에 호소함으로써 뒷받침되는데, 카발라주의자들이 말하기로 이것에 의해 죽은 자의 영혼이 다시 태어나 그 지상의 과정을 마치도록 의도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영혼은 아주 적게만 세상에 들어오는데, 이미 몸에 거했던 많은 옛 영혼들이 그 이전의 몸의 존재에서 스스로를 더럽혔던 까닭에, 태어나는 자들 안에 다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대속량(great redemption)을 지연시키는데, 그것은 모든 선재하는 영혼들이 땅 위에 태어나기까지는 일어날 수 없으니, 다른 모든 영혼들과 마찬가지로 *세피로트*의 영들의 세계에 선재하는 메시아의 영혼이 *마지막 날들에* 가장 마지막으로 태어날 자이기 때문이며, 이는 탈무드 *(예바못(Yebamoth), *63, a)*에 호소함으로써 뒷받침된다. 그때에 대희년이 시작될 것이며, 그때에는 정결케 되고 정화되어 땅에서 벗어난 영혼들의 충만함(אוֹצַר הִנּשׁמוֹת) 전체가 영광스러운 무리를 이루어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영혼윤회설(METEMPSYCHOSIS)을 보라*. **IV. ***카발라의 기원, 연대, 의도, 관계들. — *카발라주의의 발생은 큰 모호함에 싸여 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아담에게, 혹은 아브라함에게, 혹은 모세에게, 혹은 에스라에게 돌리는데, 마지막 것은 외경 에스드라 2서 14:20-48에 의해 외견상 지지되는 듯하다. 그리스도인 저자들의 견해도 그만큼이나 다양하게 갈리며, 카발라는 그토록 복합적인 전체이고 그토록 멀리 떨어진 시기들에 걸쳐 응집되어 온 것이라, 어떤 일반적 판단도 그것에 적용될 수 없다. 그 조잡한 형태에 있어서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위에 언급한 예치라(Jezirah)와 조하르(Zohar) 책들의 저자들에게 돌려져야 하며, 따라서 이 저술들보다 더 이른 연대로 지정될 수 없다. 그러나 위에 묘사한 바와 같은 그 더 충만하고 더 성숙한 교리들은 이 학파의 후대 대가들의 사변에 기인한다. 이 신지학에 대한 설명은, 카발라를 서술하면서 그 교리들을 *랍비 아키바의 알파벳(Alphabet of R. Akiba)*(אלפא ביתא דר' עקיבא, 또는 אותיות דר' עקיבא), *하나님의 몸에 대한 서술(Description of the Body of God)*(שיעור קומה), *하늘 성전들의 묘사(Delineation of the heavenly Temples)*(היכלות)라 불리는 저작들에서 제시된 *유대 신비주의*와 혼동한 근대 저자들에 의해 크게 흐려져 왔다. *예치라* 책조차도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은 카발라의 교리들을 담고 있지 않다. 이 모든 산물들과, 카발라를 분석하는 저자들에 의해 그토록 자주 인용되는 유사한 성격의 다른 것들은, *세피로트*에 관해서, 그리고 카발라의 본질을 이루는 *엔-소프* 혹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사변에 관해서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들은 의심할 바 없이 *카발라의 더 정교한 사변을 유발한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데, 이는 그것들이, 그것들을 거의 성경만큼이나 믿었던 프랑스 남부와 카탈루냐의 유대인들을 곤경에 빠뜨려, 그들로 하여금 이 하가다적 산물들에 담긴 신성과 하늘 들판에 대한 조잡한 묘사를 자신들에게도, 또 그들의 공격자들에게도 설명할 수 있는 이 체계를 고안하도록 몰아갔기 때문이다. 더 높은 의미를 찾지 않고 성경과 하가다의 난점들과 의인화를 가장 문자적인 의미로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프랑스 북부와 독일의 엄격한 문자주의자들의 극단으로 갈 수도 없었고, 하가다적·신비적 저술들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성경을 합리화한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추종자들의 또 다른 극단을 취할 수도 없었으므로, 추측하건대 맹인 이삭(Isaac the blind)이 고안하고 그의 두 제자 게로나(Zerona)의 에스라(Ezra)와 아사리엘(Azariel)이 이 두 극단 사이를 가로지르는 근대 카발라주의 체계를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약 1200~1230년). *세피로트*를 수단으로 하여 성경의, 하가다의, 심지어 *시우르 코마(Shiur Koma)*의 모든 의인화가 일거에 신성으로부터 제거되면서도 문자적으로 설명되며, 동시에 성경과 탈무드의 제사 제도와 계명과 의식이 심오한 영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현재 상태의 카발라는 일종의 해석학적 체계이며, 그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마이모니데스(q.v.)의 철학 학파에 맞서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카발라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사이의 관계는 명백하다. 카발라는 하나님을 존재와 사유 위로 높이며 모든 신적 속성을 부인하는데, 신플라톤주의도 그러하다. 카발라는 신플라톤주의와 마찬가지로 지성적 원리들 혹은 실체들을 신성과 세계 사이에 놓는다. 카발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세피로트*가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고 가르치며; 신플라톤주의는 하나의 존재로부터 나온 사유, 정신, 자연(νοῦς, ψυχή, φύσις)의 실체들이 그 기원과 동등하지 않다고 가르친다(οὐκ ϊσον δὲ τὸ προϊὸν τῷ μείναντι). 그리고 카발라는 *세피로트*를 지성, 영혼, 물질이라는 세 큰 영역으로 분류하는 바로 그 동일한 분류를 채택했다. *세피로트*가 *엔-소프*로부터 유출되는 것을, 내재성과 완전한 통일성을 묘사하기 위해 빛에서 나오는 광선에 비유하는 것은, 하나의 존재로부터의 유출을 예시하는 신플라톤주의적 형상과 동일하다(οἷον ἐκ φωτὸς τὴν ἐξ αὐτοῦ περίλαμψιν). 세상에 들어오는 영혼들의 대부분이 이전에 이 땅에서 몸을 차지했었다는 카발라의 교리는 신플라톤주의적이다(첼러(Zeller), *철학사(Geschichte der Philosophie), *III, 2:944 참조).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보라*. **V. ***카발라주의의 후대 과정들. — *카발라 학문의 후대 제자들의 손에서, 그 비밀 지식은 그 철학적 측면에서 연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니 오히려 더욱, 두 가지 새로운 측면 아래서 연구되었으니 (이것들은 그들의 선배들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그것을 처음보다 더 멀리 끌고 갔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어떤 적극적으로 새로운 첨가를 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곧 *실천적(practical)* 적용과 *해석학적(hermeneutical)* 방법이다. 우리는 옛 시대에 비밀 철학적 학문과 마술이 나란히 갔음을 본다. 사도행전 13장에 언급된 마술사는 아랍어 이름 עֵילָם, 곧 *비밀스러운(secret) 자*, 즉 학식 있는 자로 불렸으며; 사도행전 19장에서 우리는 에베소에 있던 마술 책들에 관해 읽는다. 탈무드에서 카발라에 대해 산발적으로 이루어진 언급들은 기적에 대한 묘사를 동반한다. 랍비 하니나(Chanina)와 랍비 오시아(Oshia)가 예치라 책을 연구했을 때, 게마라의 *산헤드린(Sanhedrim)* 논편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바로는, 그들은 또한 매번 세 살배기 암소 한 마리를 만들어 그것으로 살아갔다고 한다. 그러니 중세 후반의 유대 카발라주의자들이 그들의 학문 개념을 그들의 그리스도인 입문자들에게, 단지 사변적인(עיּוּנִית) 것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인(מַעֲשִׂית) 것으로도, 즉 평이한 영어로 말하자면, 참된 카발라주의자는 동시에 마술사여야 한다는 관념과 결부시켜 전했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신지학적 과도함과 단순한 요술을 구별해야 함은 자명하나, 실제 행위에 있어서는 그 차이를 분간하기 어려웠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술에서 바라거나 믿었던 효과들은, 일정한 글, 천사들의 이름, 혹은 신비로운 문자들로 이루어진 부적, 호부(護符), 주문, 형상, 표지 등의 사물들을 통해 외적으로 전달되었는데, 그것들의 연결은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돌아간다. 이 마지막 것, 곧 신성하지 않은 자에게는 발음될 수 없으나 카발라주의자에게는 알려진 그것은, 네 글자(יהוה), 열두 글자, 혹은 마흔두 글자(세피로트 체계의 조합에서 나오는 수들)로 이루어지든 간에, 그 자체로 הִמּפֹרָשׁ שֵׁם, 곧 *선포된 이름(the declared name)*이라 불렸으며; 그것을 사용할 줄 아는 자는 בַּעַל הִשֵּׁם, 곧 *이름의 주인(master of the name)*이었다. 솔로몬의 열쇠, 다윗의 방패 등 잘 알려진 마술 도구들은 이 일련의 관념에서 그 기원을 가진다. 애호가들은 아이젠멩거(Eisenmenger)의 *드러난 유대교(Entdecktes Judenthum)*, 슈트(Schudt)의 *유대 진기록(Jewish Curiosities)*, 그리고 같은 성격의 다른 저작들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설명을 발견할 것이다. *부적(AMULET)을 보라*. 카발라의 주해적 기발함은 신학자에게 흥미롭다. 성경의 신비적 해석의 원리는 보편적인 것이지, 이러저러한 학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니, 누구나 교회사에서, 심지어 그리스 문학사에서도 알아챌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필로(Philo)에게서, 신약에서, 교부들의 저술에서, *탈무드*에서, 그리고 *조하르*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거룩한 본문의 정신에서 멀어질수록, 후자는 그 의미를 왜곡함으로써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더욱더 동원되어야 했다. 그러한 작업에 대해서는 사안의 필요와 의미의 주관적 덩어리 외에 알려진 규칙이 없다. *신비주의(MYSTICISM)를 보라*. 그러는 동안 유대인들은 이미, 그들의 알파벳의 자의적 성격에 의해, 온갖 종류의 정교함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그것의 고립된 예들을 이미 더 이른 저술들에서 보았으나, 그것은 특히 조하르 이후 시대에 일종의 명인의 솜씨로 확립되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종류의 카발라적 변형이 생겨났다: **1. **גֵּמַטרִיָּא, *게마트리아(Gematria)*(γεωμετρία), 즉 문자들의 수치적 등가물을 수단으로 본문의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는 기술. 예컨대 히브리어 성경의 첫 절과 마지막 절에는 여섯 개의 א이 발견되는데, 이 방법에 따르면 그것은 세계가 6000년 동안 지속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첫 단어의 수치적 등가물은 913인데, 이는 또한 בּתוֹרָה יָצַר(*율법에 의해 그가 그것을 곧 세계를 지으셨다*)라는 말의 수이기도 하니, 이로부터 율법이 창조 이전에 존재했으며 후자가 전자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창세기의 둘째 단어(בָּרָא)를 첫째에 더하면 결과는 1116인데, 이는 또한 בּרֹאשׁ הִשָּׁנָה נִברָא(*해의 시작에 그것이 창조되었다*)의 등가물이니, 이로써 하나님이 해의 시작에, 곧 가을철에 세계를 창조하셨음을 알게 된다. 이 방법의 고대성은 계 13:18에서 이미 드러나는데, 거기서 그 풀이는 히브리어(혹은 그리스어) 알파벳의 도움으로 헤아려 내야 한다. 성경의 수들이 — 예컨대 건물의 치수가 — 문자로 표현되고 그것들로 다시 단어가 만들어질 때에도 게마트리아로 여겨진다. 더 후대에는 마소라 본문에 발견되는 더 크거나 더 작거나 거꾸로 되거나 매달린 문자들에 대한 사변이 나왔으니, 예컨대 신 6:4; 창 2:4; 민 10:35; 삿 18:30에서, 거기서 어떤 깊은 의미가 추구되나, 그것들은 어쩌면 본래 기억을 돕기 위한 독특한 표지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2. **특별히 이른바 "형상적(figurative)"(צוּרִיִּית) 카발라, נוֹטַריקוֹן, *노타리콘(Notarikon)*(라틴어 *notare*, 곧 추출하다에서 유래)으로, 한 단어의 각 글자로 여러 개의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데 있으니, 예컨대 창세기의 첫 단어로부터 여섯 개를 이렇게 만들 수 있다: בָּרָא, *그가 만들었다*; רָקִיעַ, *궁창*; אֶרֶץ, *땅*; שָׁמַיִם, *하늘*; יָם, *바다*; תּהוֹם, *심연*. 우리는 이리하여 본문의 본래 의미 외에도 우주의 올바른 과학적 본성을 배운다. 또한 그것은 여러 단어의 첫 글자들을 취하여 새 단어를 만드는 데 있으니, 예컨대 신 30:12, מִי יִעֲלֶה לָּנוּ הִשָּׁמַימָה, *누가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겠는가?* 답: מִילָה, *할례(circumcisio)*. **3. **תּמוּרָה, *테무라(Temurah, 치환)*, 곧 두 종류의 애너그램. 단순한 종류는 한 단어의 글자들을 단지 자리바꿈하는 것이니, 예컨대 우리는 이리하여 출 23:23의 천사(מַלאָכִי, *내 천사*)가 천사 미가엘(מִיכָאֵל)이었음을 배운다. 더 기발한 종류는, 어떤 확립된 규칙에 따라 알파벳의 각 글자가 다른 글자의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니: 아레프가 타브의, 베트가 아인의 의미를 얻는 식이다. 다시, 문자들은 앞으로도 뒤로도 읽힐 수 있으니(이것이 *아트바시(Athbash)*, אִתבַּשׁ의 알파벳을 이룬다), 혹 첫째 글자가 열두째의, 둘째가 열셋째의 의미를 얻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식이다(*알밤(Albam)*, אִלבַּם이라 불리는 알파벳을 이룬다). *아트바흐(ATBACH)를 보라*. 이 사소한 것들이 더 다양할수록, 주어진 매 경우에 어떤 결과에 이르기가 더 쉬워지고, 더 적은 재치나 사유가 요구된다. 그리하여 17세기의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 자체가 문자적 믿음으로 기울었고, 유대인들에 대한 강한 논쟁적 측면에 의해 카발라적 기술의 부지런한 연구로 이끌려, 그것들을 통해 구약 도처에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증거들을 발견했다(예컨대 창 1:1, בּרֵאשִׁית=בֵּן רוּחַ אָב שׁלשָׁה יחִידָה תָמָה, 곧 *아들, 영, 아버지; 완전한 셋의 통일(filius, spiritus, pater; tres unitas perfecta)*). 13세기에 우리는 스페인 사람 라이몬 룰루스(Raymond Lullus)의 저작들에서 카발라적 관념과 방법에 대한 지식의 증거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그의 직접적·간접적 추종자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이 유대 철학의 요소들이 웅대한 사변적 이론이라기보다는 기벽과 미신의 성격을 띤다. 이후 카발라가 실제로 그리스도교 정신 발전의 영역에 들어오기까지 두 세기가 흘렀다. 그 진입은,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낡아빠진 스콜라주의의 전복과 그에 따른 플라톤적 관념으로의 경향에 의해 준비되었는데, 물론 이 후자는 동방의 영향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 전해졌던 대로 아직 그 더 초보적 형태에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 연구에 대한 깨어나는 관심에 의해 같은 결과가 촉진되었는데, 그것은 사실 아직 시적이고 꿈결 같은 유아기에 있었으나, 아직 자연 법칙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던 만큼 신비로운 것들로 스스로를 즐겁게 하기에 더욱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에 셋째이자 더 강력한 영향이 더해졌으니, 곧 모든 민족의 지혜, 주로 플라톤 철학이 실제로 히브리 계시에서 그 기원을 취했으며; 통속적 종교사가 인정하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유대 백성이 시간이나 열성적 연구만이 드러낼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고의 소유자요 수호자였다는, 초기 세기 교부들에 의해 전해 내려온 믿음이다. 그러니 카발라주의자들이 그러한 보물을 소유했다는 주장이 신빙성을 얻고 그들에게 추종자들을 얻게 했다 한들 무엇이 놀랍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의 카발라로의 진전은 많은 수의 유대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크게 도움을 받았는데, 그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의 영지주의적 견해와 더 가까운 관계를 인식했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영지주의가 유대인들의 개종을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종한 유대인들 가운데 우리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시의(侍醫)이자 *천상의 농경(Coelestis Agricultura)*의 저자인 파울 리치(Paul Ricci); 저명한 포르투갈 주해가의 아들이자 *사랑에 관한 대화(Dialogi de amore)*의 저자인 유다스 벤 이삭 아브라바넬(Judas Ben Isaac Abrabanel, 레온 헤브라에우스(Leon Hebraeus))을 주목한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가장 중요한 두 사람만 언급할 것이니, 곧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John Pico della Mirandola)와 요한 로이힐린(John Reuchlin)이다. 전자는 매우 재능 있고 열정적인 혼합주의자로 *히브리인의 비밀 학문에 따른 카발라적 결론(Conclusiones cabbalisticae secundum secretam disciplinam sapientiae Hebr.)*(1486)의 저자이며; 다른 한 사람은 신비주의와 결부되었으나 스콜라주의와 수도원적 나태에 반대한 고전의 충실한 제자로, *경이로운 말씀에 관하여(De verbo mirifico)*(1494); *카발라 기술에 관하여(De arte cabbalistica)*(1517)의 저자이다. 그의, 그리고 같은 종류의 다른 몇몇 저술들은 J. 피스토리우스(Pistorius)의 장서에서 나온 *카발라 기술 즉 히브리인의 은비(隱秘) 신학 및 철학 저자 선집(Artes Cabbalisticae h. e. reconditae theologiae et philosophicae Scriptorum)*, 제1권(유일권)(바젤, 1587, 2절판)에 수집되어 있다. 16세기 첫 사분기에 감지되기 시작한, 종교적·교회적 관심사와 실천적 정치의 강력한 우세는, 정신에 적극적 추동력을, 학문에 실질적 기초를 부여하면서, 카발라의 더 이상의 발전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후대에 그것이 이따금 다시 다루어졌을 때에는, 옛 체계의 진정한 부활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설 만큼의 힘을 갖지 못한 이론들에 거창하고 신비로운 이름을 부여하려는 목적에서였다. **VI. ***문헌. — *이른바 동방학(Orientalism)의, 또 성경 학식의 일종의 부수적 주제로서, 카발라는 옛 고고학자들과 입문서 저자들(쿠네우스(Cuneus), *히브리 공화국(Respubl. Hebr.)*; 월턴(Walton), *서론(Prolegg.)*; 호팅거(Hottinger), *문헌학 보고(寶庫)(Thesaurus Philol.)*; 로이스덴(Leusden), *히브리 문헌학자(Philologus Hebr.)*; 파이퍼(Pfeifer), *거룩한 비평(Critica Sacra)* 및 그 밖의 다수)에 의해 언급되나, 그것들은 그것에 관해 중요한 것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훨씬 더 풍부하나 아직 완전하지는 않은 정보가 부데우스(Buddeus)의 *히브리인의 철학(Philosophia Ebraeorum)*(1702); 학스판(Hackspan), *잡록(Miscellanea)*; 브라운(Braun), *거룩한 선집(Selecta Sacra)*, 제5권; 라이만(Reimmann), *유대 신학(Jüdische Theologie)*의 저작들에 담겨 있다. 좀머(Sommer)의 저작 *조하르 신학 표본(Specimen theologiae Sohariae)*(고타, 1734)은 (파브리키우스(Fabricius)가 *고대 문헌지(Bibliographia Antiq.)* 246면에서 인용하는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단지 카발라에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추적하려는 논쟁적·변증적 시도일 뿐이다. 더 높은 철학적 성격을 띤 것은 바흐터(Wachter)의 저작들 *유대교 안의 스피노자주의(Spinozismus im Judenthum)*, 그리고 논쟁적 어조가 우세한 *카발라 해설가 즉 히브리인의 은비 철학의 간략한 개관(Elucidarius cabbalisticus s. reconditae Ebraeorum philosophiae brevis recensio)*(암스테르담, 1699)이다. 다음으로 바스나주(Basnage), *유대인의 역사(Hist. des Juifs)*(제3권), 그리고 브루커(Brucker), *철학사(Hist. Philosophiae)*(제2권)가 있으나, 후자는 원전에 대한 불충분한 연구로 인해 그 복잡한 역사를 다 파악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후대 저자들 가운데 우리는 테네만(Tennemann), 티데만(Tiedemann), 불레(Buhle)의 잘 알려진 저작들을 발견한다. 더 최근의 단행본 연구들의 계보는 클로이커(Kleuker)(리가, 1786)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랍비 문헌에 대한 초기 지식이 빠르게 쇠퇴해 온 그리스도인 저자들은 대체로 그것을 저버린다. 톨룩(Tholuck)의 논문 *카발라의 기원에 관하여(De ortu Cabbalae)*(1837)는 단지 예비적 문제만을 다룬다. 루터베크(Lutterbeck)는 그의 *신약 교리 체계(Neutest. Lehrbegriff)* 제1권에서 예치라와 조하르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장을 가지고 있다. 몰리토르(Molitor)의 방대한 저작 *전승의 역사 철학(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Tradition)*(1827, 제1~3부)은 주로 이론적이다. 로이힐린(*카발라 기술에 관하여(De arte Cabbalistica)*, 1517)은 여전히 가치 있는 권위서이다. 가장 최근의 것 중 하나는 에서리지(Etheridge)(*예루살렘과 디베랴(Jerusalem and Tiberias)*, 런던, 1856, 12절판)이다. 아돌프 프랑크(Ad. Franck)의 방대한 저작 *카발라 즉 히브리인의 종교 철학(La Kabbale ou la Philosophie religieuse des Hébreux)*(파리, 1842; 옐리네크(Jellinek) 역, 라이프치히, 1844) 다음으로, 우리는 M. 프라이슈타트(Freystadt)의 *카발라 철학과 범신론(Philosophia Cabbalistica et pantheismus)*(1832)을 든다. *절충 평론(Eclectic Review)*, 1856년 2월; *그리스도교 회상록(Christian Remembrancer)*, 1862년 4월을 보라. 가장 이른 카발라주의자는 아사리엘(Asariel)로, 문답 형식으로 된 그의 *세피로트 교리 주석(Commentary on the Doctrine of the Sephiroth)*(פֵּרוּשׁ עֶשֶׂר ספִירוֹת)이 출판되었으며(바르샤바, 1798; 베를린, 1850); 또한 그의 *아가 주석(Commentary on the Song of Songs)*(알토나, 1764)은 보통 그의 제자 나흐마니데스(Nachmanides) 혹은 람반(Ramban, q.v.)의 것으로 돌려진다. 가장 중요한 카발라주의자들 가운데 우리는 *믿음과 소망의 책(Books of Faith and Hope)*(אמוּנָה וּבִטָּחוֹן)의 저자 랍비 모세 벤 나흐만(Moses Ben Nachman); שִׁעֲרֵי אוֹרָה(*빛의 문(Doors of Light)*)의 저자, 카스티야의 랍비 요세(Jose); פִּרדֵּס רִמּוֹנִים(*석류 동산(Garden of Pomegranates)*)의 저자, 코르도바의 랍비 모세(Moses); סֵפֶר הִגִּלגּוּלִים(*영혼들의 윤회의 책(Book of the Wanderings of Souls)*)의 저자 랍비 이삭 로리아(Isaac Loria); עֵוֹ חַיִּים(*생명나무(Tree of Life)*)의 저자 랍비 하임 비탈(Chayim Vital); עֵמֶק הִמֶּלֶך(*왕의 골짜기(Valley of the King)*)의 저자 랍비 나프탈리 벤 야곱 엘하난(Naftali Ben Jacob Elchanan); שַׁעַר הִשָּׁמַיִם(*하늘의 문(Door of Heaven)*)의 저자, 헤레라(Herrera, 속칭 이리바(Iriva))의 랍비 아브라함 코헨(Abraham Cohen)을 발견한다. 이 저작들 중 일부는 (라틴어로 번역되어) 크리스티안 크노르 폰 로젠로트(Chr. Knorr von Rosenroth)의 *벗겨진 카발라(Kabbala Denudata)*(줄츠바흐, 1677, 3권, 4절판)에 온전히 혹은 그 주요 부분이 온갖 종류의 주해 장치와 *조하르*의 일부 텍스트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카발라 문헌은 바르톨로치(Bartolocci)의 *대(大) 랍비 문고(Bibliotheca Magna Rabbinica)*와 볼프(Wolff)의 *히브리 문고(Bibliotheca Hebraea)* 제2권 및 제4권에서, 비록 올바른 순서와 구성으로는 아니나, 충분히 다루어진다. 또한 P. 베어(Beer), *유대인의 모든 종파와 카발라의 교리의 역사(Geschichte der Lehren aller Secten der Juden, und der Cabbala)*(브륀, 1822, 2권, 8절판); 제네트(Senet), *유대인의 카발라에 관하여(De Cabbala Judaeorum)*(로스토크, 1702); 젠네르트(Sennert), *카발라에 관하여(De Cabbala)*(비텐베르크, 1655)를 보라. 그리고 특히 카발라주의의 평판상의 창시자인 시므온 벤 요하이의 저작들에 대한 풍부한 해설 목록은 퓌르스트(Furst)의 *유대 문고(Bibliotheca Judaica)*, 제3권, 329면 이하에 주어져 있다. 우리는 다음을 특정할 수 있다: 춘츠(Zunz), *유대인의 예배 강화(Gottesdienstliche Vorträge der Juden)*(베를린, 1832), 402면 이하; 란다우어(Landauer), *동방 문예지(Literaturblatt des Orients)*, 제7권(1845); 제8권 812면 이하; 요엘(Joel), *조하르의 종교 철학(Religionsphilosophie des Sohar)*(라이프치히, 1849); 옐리네크(Jellinek), *레온의 모세 벤-셈-토브(Moses ben-Schem-Tob de Leon)*(라이프치히, 1851); *카발라 역사에 대한 기여(Beiträge zur Gesch. der Kabbala)*(라이프치히, 1852); *카발라 신비주의 선집(Auswahl Kabbalischer Mystik)*(라이프치히, 1853); 그리고 *철학과 카발라(Philosophie und Kabbalah)*(라이프치히, 1854); 슈타인슈나이더(Steinschneider), *유대 문학(Jewish Literature)*(런던, 1857), 104-115면, 299-309면; 뭉크(Munk), *유대 및 아랍 철학 논집(Mélanges de Philosophie Juive et Arabe)*(파리, 1859), 190면 이하; 그리고 특히 이그나츠 슈테른(Ignaz Stern)의 *조하르*에 대한 탁월한 분석, *벤-하나냐(Ben-Chananja)*, 제1-5권; 그레츠(Gratz)의 명료한 논저, *유대인의 역사(Gesch. der Juden)*, 제7권, 442-459면; 그리고 뢰브(Low)의 그것에 대한 유능한 서평, *벤-하나냐*, 제5권, 325면 이하(또한 라이프치히, 1863, 73-85면). 긴스버그(Ginsburg)는 최근에 *카발라(The Kabbalah)* 등(런던, 1865)이라는 간결하면서도 풍부하고 명료한 저작을 출판했는데, 거기서 그는 그러나 랍비 아키바와 벤-요하이의 저작권에 관한 전통적 견해에 반박하고, 그것에 조하르보다 앞선 기원을 부여하면서, 조하르 자체는 모세 데 레온의 것으로 돌리고, 이것을 카발라주의의 부모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손으로 여긴다.
CABALLERO, RAYMONDO DIOSADA Caballero, Raymondo Diosada
Caballero, Raymondo Diosada 예수회 소속의 스페인 신학자로, 1740년 마요르카 섬의 팔마(Palma)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교육받았으나, 그의 수도회가 탄압받던 때에 로마로 피신하여 문학에 전념했다. 그의 저작은 거의 모두 *필리베로 데 파리팔마(Filibero de Parripalma)*라는 가명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1820년에 죽었다. 그는 *스페인 인쇄술 초기에 관한 표본(De Prima Typographiae Hispanicae Aetate Specimen)*(로마, 1793): — *적의 비난에 맞서 확증된 페르난도 코르테스의 영웅적 행위(L'Eroismo de Ferdinando Cortese Confirmato contro le Censure Nemiche)*(동지, 1806): *예수회 저자 문고에 대한 두 보유편(Bibliothecae Scriptorum Societatis Jesu Supplementa Duo)*(동지, 1814-16)을 썼다. 외퍼(Hoefer), *신(新) 일반 전기(Nouv. Biog. Générale)*, 해당 항목; 로즈(Rose), *일반 전기 사전(Gen. Biog. Dict.)* 해당 항목을 보라.
CABALLO, BONAVENTURA Caballo, Bonaventura
Caballo, Bonaventura 이탈리아의 고위 성직자로, 카세르타(Caserta)의 주교였으며, 1689년에 죽었다. 그는 그 경건함으로 주목할 만했다.
CABASILAS, NICOLAS Cabasilas, Nicolas
Cabasilas, Nicolas 1354년 테살로니카의 대주교로, 로마 교회에 맞서 그리스인들의 권리와 독립을 굳건히 지지한 자이다. 헤시카즘 논쟁(Hesychastic controversy)에서 그는 바를람(Barlaam, q.v.)에 맞서 아토스 산(Mount Athos)의 수도사들 편에 섰다. 그는 여러 저작을 썼는데, 그 가운데는 다음이 있다, **1. ***그리스 전례 해설(Exposition of the Greek Liturgy)*(그리스어)로, 헤르베(Hervet)가 라틴어로 번역하여 *교부 문고(Bibliotheca Patrum)*에 *신적 직무에 대한 간략한 해석(Compendiosa interpretatio in Divinum Officium)*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리고, **2. **Περὶ τῆς ἐν Χριστῷ ζωῆς,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Life of Jesus Christ)* 등(잉골슈타트, 1604; 조악한 라틴어 역본). 이 책은 비잔틴 저자들 가운데의 신비적 경향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가치가 있다. 케이브(Cave), *문학사(Hist. Lit.)*, 1350년조; *연구와 비평(Stud. u. Krit.)*, 1843, 724면; 가스(Gass), *N. 카바실라스의 신비주의(Die Mystik d. N. Kabasilas)* 등(그라이프스발트, 1849); 발흐(Walch), *신학 문고(Bibliotheca Theologica)*, 1:640; 2:570을 보라.
CABASILAS, NILUS Cabasilas, Nilus
Cabasilas, Nilus 앞 사람의 숙부로, 그리스 신학자이자 14세기 전반의 테살로니카 대주교이다. 그는 Περὶ τῶν αἰτιῶν τῆς ἐκκλησιαστικῆς διαστάσεως를 썼는데, 처음에는 런던(연대 미상)에서 인쇄되었고, 이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바젤(1544)에서; 다시 프랑크푸르트(1555)에서, 그리고 에노(Hainault)(1608)에서 인쇄되었다. 그 안에서 그는 교황권의 자의적 주장들이 동방과 서방 사이 분열의 참된 원인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또한 Περὶ τῆς ἀρχῆς τοῦ Πάπα(프랑크푸르트, 1555, 8절판; 하노버, 1608, 바를람의 저작들과 함께)를 썼다. 뒤팽(Dupin)은 이 저술들이 "학식으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교황 수위권에 관한 그 책은 그레솝(Gressop)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런던, 1560, 8절판). 카바실라스는 1350년에 죽었다.—외퍼(Hoefer), *신(新) 일반 전기(Nouv. Biog. Générale)*, 8:15; 케이브(Cave), *문학사(Hist. Lit.)*, 와턴(Wharton)의 부록; 뒤팽(Dupin), *교회 저술가(Ecclesiastical Writers)*, 14세기.
CABASSOLE, PHILIPPE DE Cabassole, Philippe De
Cabassole, Philippe De 프랑스의 고위 성직자로, 1305년 카바용(Cavaillon, 브네생(Venaissin))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칠리아의 재상,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추기경 및 교황 특사가 되었으며, 페트라르카(Petrarch)와 친밀하게 교류했다. 그는 1371년 페루자(Perousia)에서 죽었으며, 봉파스(Bonpas)의 카르투지오회 교회에 묻혔는데, 거기서 그의 대리석 묘소가 1791년에 보였다. 그는 라틴어로 몇 편의 설교와 실천적 저작을 썼다. 외퍼(Hoefer), *신(新) 일반 전기(Nouv. Biog. Générale)*, 해당 항목; 로즈(Rose), *전기 사전(Biog. Dict.)* 해당 항목을 보라.
CABASSUT (CABASSUTIUS), JEAN Cabassut (Cabassutius), Jean
Cabassut (Cabassutius), Jean 저명한 로마 교회법학자로, 1604년 또는 1605년 프로방스의 엑스(Aix)에서 태어나, 1626년 오라토리오회(Oratory)에 들어갔으며, 1685년 9월 25일 81세의 나이로 엑스에서 죽었다. 로마에서 그는 교회법과 결의론(casuistry)에 관한 모든 것에 있어 신탁(神託)으로 여겨졌으며, 훌륭한 동방학 학자였다. 그는 *교회법의 이론과 실제(Juris Canonici theoria et praxis)*(4절판, 1696, 1698, 그리고 지베르(Gibert)에 의해 주석 등과 함께, 1738); 또한 *서로 대조된 역사·공의회·교회법, 그리고 교회의 요람기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고대 교회 의식에 관한 교회사적 개관(Historiarum, Conciliorum et Canonum invicem collatorum veterumque Ecclesiae rituum, ab ipsis Ecclesiae incunabulis ad nostra usque tempora, notitia ecclesiastica)*(최선의 판본은 리옹(Lugd.), 1685, 2절판; 다시 리옹(Lyons), 1725; 그리고 축약된 형태로, 1776, 8절판)을 썼다.
EABA Eaba
Eaba 8세기 맘즈베리(Malmesbury)의 수도원장. Eadbald (라틴어 *AEdboldus), 런던의 *제12대 주교, A.D. 796년.
EACHARD JOHN, DD Eachard John, Dd
Eachard John, D.D. 영국의 신학자로, 1636년 서퍽(Suffolk)에서 태어났으며, 1653년 케임브리지의 캐서린 홀(Catharine Hall)에 입학하였다. 그는 1658년 자기 칼리지의 펠로(fellow)가 되었고, 1675년 학장(master)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697년 7월 7일에 죽었다. 그의 *저작집(Works)*은 3권으로, 12절판(12mo.)으로 수집되었으며(런던, 1784년), *그의 생애 개관(Sketch of his Life)*, *홉스의 자연 상태에 대한 논의(Discussion of Hobbes's State of Nature)*, 그리고 *성직자 멸시의 근거에 관한 에세이(Essay on The Grounds of the Contempt of the Clergy)*를 담고 있다. — New Genesis Biographical Dictionary *5:53; Kippis, *Biographical Britannica, *5:529.
EACHARD LAWRENCE Eachard Lawrence
Eachard Lawrence. *ECHARD 항목을 보라*.
EADBERT Eadbert
Eadbert (즉, *Albert *또는 *Adalbert).* **(1) **린디스판(Lindisfarne)의 주교, A.D. 688년; A.D. 698년 5월 6일(그의 기념일)에 죽었다. **(2) **런던의 제9대 주교(때로 *Filbrith*라고도 불림), 약 A.D. 772-788년. **(3) **레컬버(Reculver)의 수도원장(*Heahbert*라고도 불림), A.D. 747년. **(4) **머시아(Mercia)의 수도원장, A.D. 747년. **(5) **셔본(Sherborn)의 수도원장, A.D. 803년. **(6) **남(南)색슨족의 초대 주교, A.D. 711년. **(7) **레스터(Leicester)에 있던 중부 앵글족의 제5대 주교, A.D. 764-787년.
EADBURGA Eadburga
Eadburga (즉, *Ethelburga).* **(1) **동(東)앵글족의 왕 앨드울프(Aldwulf)의 딸로, 7세기에 렙턴(Repton)의 수녀원장이었다. **(2) **머시아(Mercia)의 왕 울프헤레(Wulfhere)의 미망인으로, A.D. 710-73년에 글로스터(Gloucester)의 성 베드로 수녀원의 제2대 수녀원장이었다.
EADFRID Eadfrid
Eadfrid (즉, *Alfred). EADFRITH 항목을 보라*. Eadgar (즉, *Edgar). ***(1) **린디스판(Lindisfarne)의 제3대 주교, 약 A.D. 706-731년. **(2) **런던의 제10대 주교, A.D. 787-793년.
EADFRITH Eadfrith
Eadfrith 698년부터 721년까지 린디스판(Lindisfarne)의 주교였다. 그는 때때로 성경을 앵글로색슨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로 일컬어지나, 이는 잘못이다. 그러나 에드프리스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쓴 훌륭한 사본이 코튼 도서관(Cottonian Library)에 있다. 그것은 *더럼 책(The Durham Book)*으로 알려져 있다. — Wright, Biographical Brittanica Literature, Anglo-Saxon Period, *242쪽.
EADHED Eadhed
Eadhed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왕 오스위(Oswy)의 사제였다. 664년 데우스데디트(Deusdedit)에 의해 안수받았고, 678년 린지(Lindsey)의 주교로 성별(聖別)되었으며, 그 직후 리펀(Ripon)으로 전임되었다.
EADIE, JOHN, DD, LLD Eadie, John, Dd, Lld
Eadie, John, D.D., LL.D. 스코틀랜드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의 저명한 신학자로, 1810년 5월 9일 스털링셔(Stirlingshire)의 앨바(Alva)에서 태어났다. 그는 글래스고 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를 졸업하고, 분리교회(Secession Church, 연합장로교회)의 신학원(Divinity Hall)에서 수학하였으며, 1835년에 글래스고의 케임브리지 스트리트 교회(Cambridge Street Church)의 목사로 안수받아, 그곳에서 신속히 큰 명성과 유익함을 얻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교단과, 늘 그 교단의 본거지였던 도시를 대표하는 으뜸가는 인물로 여겨졌다. 설교자로서 그는 견실한 상식과 이따금 번뜩이는 절묘한 예화, 강건한 경건, 깊은 진지함, 그리고 지성적이며 정서적인 양면의 폭넓은 공감으로 두드러졌다. 그는 다른 중요한 직임으로 자주 부름을 받았으나, 글래스고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하여 그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1836년 그는 자신의 회중과 함께 랜스다운 크레센트(Lansdowne Crescent)의 새롭고 아름다운 교회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그의 영향력은 1876년 6월 3일 그가 죽을 때까지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에이디 박사는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학식의 명망을 지녔으며, 1843년에 교회에 의해 신학원의 해석학 및 자연 종교와 계시 종교의 증거론 강좌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비평가로서 그는 예리하고 면밀하였으며, 해석자로서는 지극히 공정한 정신을 지녔다. 강단에서나 교수의 자리에서나, 그의 강점은 성경 비평의 가장 건전한 성과를—그것이 자신의 것이든 다른 이들의 것이든—가려내어, 그 실천적 적용을 끊임없이 염두에 두면서 명료하고 일관된 형태로 제시하는 그 재치에 있었다. 비록 이 마지막 특징이 그의 강의 일부에 비학문적인 면모를 부여하였더라도, 그것은 그의 강의를 덜 흥미롭게 만들지 않았으며, 청중에게 아마도 덜 유익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는 서로 별개의 두 직무에 종사하고 있었고, 그 어느 하나만으로도 그의 모든 정력을 다 쏟을 만하였음에도, 그럼에도 그는 제3의 영역에서도 상당한 양의 일을 할 시간을 찾아내었으니, 그 일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의 저작 대부분은 성경 비평 및 해석과 관련된 것으로, 그중 일부는 대중적 용도를 위해 기획되었고 다른 일부는 보다 엄밀히 학술적인 것이었다. 전자의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는 키토(Kitto)와 페어베언(Fairbairn)의 *성경 백과사전(Biblical Cyclopaedias)*에 기고한 글들, 크루든(Cruden)의 *콘코르단스(Concordianae)* 그의 편집본, *동방 역사(Oriental History)*, 그리고 그의 강론들이 있다. *키토 박사의 생애(Life of Dr. Kitto)*는 마땅한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청년을 위한 성경 사전(Dictionary of the Bible for the* *Young), 청년에게 주는 성경 강의(Lectures on the Bible to the Young)* 등도 그러하였다. 그의 마지막 저작인 *영어 성경의 역사(History of the English Bible)*(1876년, 2권)는 아마도 저술가로서의 그의 능력을 가장 오래 남길 기념비가 될 것이다. 그는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서의 그리스어 본문에 대한 귀중한 주해서들의 저자이다. 브라운(Brown)이 쓴 그의 *생애(Life)*를 보라(런던, 1878년). (W.P.S.)
EADRED Eadred
Eadred (또는 Heardred), 헥섬(Hexham)의 주교로, 797년 10월 29일 성별되어 800년에 죽었다. Eadric, 세인트올번스(St. Albans)의 제2대 수도원장, A.D. 796년. Eadsige,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로, 그의 가문과 출생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 듯하다. 그에 대한 가장 이른 언급은 그를 크누트(Canute)의 사제(chaplain) 중 한 사람으로 소개하는데, 그는 그때 재속(在俗, secular) 성직자였으며, 물론 사제 서품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1035년 성 마르틴(St. Martin's)의 주교로 성별되었고, 1038년 캔터베리 주교좌로 전임되어 팔리움(pallium)을 받기 위해 로마로 향하였다. 1043년 귀국한 후, 그는 에드워드 참회왕(Edward the Confessor)의 대관식을 집전하도록 요청받았으니—이는 그의 생애에서 기억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는 1050년에 죽었다. Hook, *Lives of the Abbs. of Canterbury, *1:489 이하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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