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The Definition and Scope of Theology
신학(Theology)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논의를 뜻한다. 그러나 지질학(geology), 연대학(chronology), 생물학(biology) 같은 다른 낱말들과 유비를 이루어, 그것은 하나님을 다루는 학문을 뜻한다.
신학은 자연히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다룬다. 하나님은 계신가, 그분을 알 수 있는가, 그분의 본성과 성품은 어떠한가, 그분이 우주와 맺고 계신 관계는 무엇인가, 특히 영적 본성을 지닌 지성적 존재들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로서 사람과 맺고 계신 관계는 무엇인가, 그분은 어떤 방식들로 자신을 알리셨는가, 그리고 특별히 죄인인 사람들에게 어떤 면모로 자신을 계시하시는가 하는 물음들이다.
이 마지막 관계와 관련하여 신학은 특히 사람을 다룬다. 곧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도덕법의 다스림 아래 놓인 존재로서 사람을 다룬다. 신학은 사람의 본래 무죄와 행복의 상태, 그가 거기서 타락하게 된 경위, 그리고 그의 현재의 죄와 정죄의 상태, 스스로를 구해 낼 수 없는 무능함을 탐구한다.
이로써 신학은 또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본질을 논하게 된다.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에서 드러나며, 구원은 그분을 통하여 왔고, 그분이 능동적·수동적 순종의 사역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어 내셨다.
같은 방식으로 신학은 또한 성령의 본성과 사역을 살핀다. 성령을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마련하심을 받아들이게 되고, 뉘우침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 구원은 정죄에서 벗어남에만 있지 않고, 죄의 지배와 더럽힘에서 벗어남에도 있으며, 또한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누리는 거룩함과 행복에 이름에도 있다.
신학은 또한 몸의 죽음 너머까지 사람을 따라가, 의인과 악인 모두의 장래 상태를 — 몸의 부활 이전과 이후 모두에 걸쳐 — 알리며, 아울러 이 두 부류에 대한 최후의 심판과, 그들 각자가 영원히 거할 처소인 천국과 지옥을 알린다.
끝으로 신학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모든 일을 통하여 이루고 계신 위대한 목적을 가르친다. 곧 이 타락한 인류를 다루심에 있어 긍휼과 공의라는 두 측면으로 드러나는, 자기 자신의 영광을 모든 피조물에게 나타내심이 그것이다.
1.2 The Term "Theology" Applied to Treatises and Systems of Opinion
"신학"이라는 용어는 학문 그 자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학문을 다룬 모든 논저에도 적용된다. 이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관한 논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수많은 거짓 신들에 관한 논의에도 해당한다. 또한 그것이 학문적 논의가 아니라 단지 서사적이거나 시적인 형식을 띠고, 성품과 본성보다는 행적을 묘사하는 글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해당한다. 그리하여 "오르페우스와 호메로스는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신학자라 불렸으니, 그들의 시가 신들의 본성을 다루었기 때문이다."(찰스 하지, 「조직신학」 제1권, 19쪽.) 오시안의 시들도, 비록 아마 지난 한 세기 안에 영국에서 쓰였겠지만, 한 권의 신학서이다. 신화 역시 거짓 신들을, 그것도 상상의 작품들 속에서 다룬다고 해서 신학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학"이라는 용어는 하나님 혹은 신들에 관한 학식 있고 학문적인 저작들에 특히 적절하게 적용된다. 이런 저작들 가운데 다수가 이교(異敎)와 연관되어 발견된다. 힌두교도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베다가 그러하며, 고대 페르시아인의 젠다베스타가 그러하다. 스칸디나비아 신화를 펼쳐 보이는 에다는 시가(詩歌)들과, 또한 신들의 기원과 세계의 창조와 그 밖의 비슷한 주제들에 관한 대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드너, 「세계의 신앙들」 제1권, 795쪽 참조.]
그러나 이교도 가운데 가장 값진 논의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저작에서 발견되는데, 그 대부분은 직접 신들의 본성을 다루지 않을 때에는 세계의 기원과 그 안에 있는 신적 주관자이신 영의 임재에 관한 물음들, 그리고 영혼의 본성과 그 의무와 불멸성에 관한 물음들을 다루었다. 그들의 저작 가운데 다수는 단편으로만 우리에게 전해졌고, 그들이 가르친 것의 많은 부분은 그들 가운데 다른 이들이 남긴 기록과 보고에서만 발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변을 펼친 저자들이 직접 썼다고 표방하는 온전한 저작들도 많이 있다. 이 그리스 저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인정하듯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과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다. 그러나 탈레스와 피타고라스에서 시작된 그리스 철학이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서 절정에 이르기까지는 채 이백 년이 되지 않았으며, 그 전체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육 세기 반과 오신 후 오 세기에 걸친 기간을 아우른다. 이 기여들의 가치에는, 또한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계시를 지닌 이들에게까지 끼친 영향에는, 사람의 어떤 가늠도 매길 수 없다.
라틴 저술가들도 신학적 성격의 저작을 여럿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으뜸은 키케로의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이다.
또한 신학은 어느 한 저술가나 한 부류의 저술가들이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저작에서 드러낸 견해의 집합을 가리키는 데에도 자주 쓰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칼뱅의 신학, 아르미니우스의 신학, 백스터의 신학, 종교개혁의 신학, 프린스턴 신학, 뉴잉글랜드 신학을 말한다. 사람들은 또한 구약 혹은 신약의 신학, 시편의 신학, 여러 복음서 기자, 특히 요한의 신학, 그리고 베드로의 신학과 바울의 신학을 말하기도 한다.
1.3 Theology as a Science
신학은 하나의 학문(과학)으로 정의된다. 신학은 그 이름에 더없이 합당하다. 신학에는 학문을 이루는 어떤 요소도 결여되어 있지 않다. 신학은 사실들의 탐구에 관여한다. 신학은 그 사실들의 존재, 서로 간의 관계, 체계적 배열, 그것들을 지배하는 법칙들, 그리고 그것들의 존재와 관계의 토대가 되는 위대한 원리들을 탐구한다.
다른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에는 절대적으로 알려진 것이 많고, 그것을 넘어 거의 의문시되지 않는 것이 많으며, 여전히 사변의 영역에 있는 것이 많고, 의견이 분명히 갈리는 것도 많다. 다른 학문에서처럼 이 학문에서도 새로운 사실들이 끊임없이 드러나며, 그것들은 지금까지 받아들여진 사실과 원리가 옳을 때에는 그것을 검증하게 하고, 그릇될 때에는 수정하게 한다.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들이 제시되고, 그것들은 이 사실들과 이후 발견된 다른 사실들로 검증되어, 확인된 정확성에 따라 받아들여지거나 배척된다. 과거의 지식 위에 미래를 향한 진전이 쌓여 간다.
사실들의 발견은 다른 모든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분야가 제공하는 것을 연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지질학은 땅을 살피고 그 땅의 구조에서 사실들을 이끌어 낸다. 천문학은 별들을 탐구한다. 신학도 이와 같이 자기 지식의 원천들을 연구한다. 각 학문은 진리에 이르고자 한다. 각 학문에 헌신하는 이들은 진리가 부분적으로든 온전하게든 자기 분야에서 발견되리라 확신한다. 모든 사실을 온전히 획득함은 학문적 지식의 정확성을 위한 준비가 된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그 지식은 불완전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사실을 올바로 일반화하는 일은 다른 모든 종류의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학문에서도 필수적이다. 모든 사실에 대한 온전한 지식과 그것들의 완전한 일반화가 신학을 정밀한 학문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신학은 또한 다른 어떤 학문 못지않게 사실의 결여에 민감하다. 천문학자는 올바른 이론에 근거한 자기 계산이 정확히 검증되지 않음을 발견하면, 즉시 이 편차의 원인으로 어떤 교란하는 천체의 존재를 의심한다.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작더라도 단 하나의 사실을 빠뜨리면 교리의 온 세계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보통 사람의 생각은 이를 깨닫지 못하며, 따라서 새로운 사실의 발견을 귀히 여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신학자는 그렇게 가능해진 새롭고 더 정밀한 조정 속에서 자기 체계 전체의 진리됨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며, 그러므로 때로는 마땅한 정도를 넘어서까지 그것을 귀히 여긴다.
1.4 The Classification of Theology
학문으로 여겨질 때, 신학은 여러 방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1. 계시의 방식에 따라, 자연신학과 초자연신학으로 나뉜다.
자연신학은 사람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연구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을 아우른다. 이는 하늘과 땅에서 그분에 관하여 보이는 것뿐 아니라, 사람 자신의 지성적·영적 본성에서 보이는 것에까지 미친다.
초자연신학은 우리가 흔히 계시라 부르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정보에서 이끌어 낸 신학이다.
2.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에 따라, 교수신학(Didactic) 혹은 교의신학(Dogmatic)이라고도 불리는 조직신학과, 논쟁신학(Polemic)과, 실천신학 혹은 경험신학으로 나뉜다.
3. 그것과 결부된 주된 종교 관념에 따라, 범신론적 신학, 이신론적 신학, 합리주의 신학 등으로 나뉜다.
4. 그 창시자의 이름이나 그것이 기원하고 융성한 민족에 따라, 그리스도교 신학, 유대교 신학, 이슬람교 신학 등으로 나뉜다.
5. 그것이 도출되는 원천에 따라, 성경신학, 그리스도교 교의신학, 교회 교의학으로 나뉜다.
1.5 Biblical, Christian, and Ecclesiastical Dogmatics
성경신학은 성경의 사실들로 이루어지며, 성경적 비교로 조화시키고, 성경적 이론으로 일반화하며, 성경적 교리로 결정(結晶)시키고, 가르쳐진 진리의 체계를 — 그것이 체계인 한도까지, 그 이상은 아니게 — 보여 주도록 체계화한 것이다. 식물학에서 사람이 세계의 모든 식물을 모아, 분명한 빈자리를 메우려고 새로운 식물을 끌어들이려 하지 않은 채 배열하듯이, 성경신학도 마땅히 제시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그대로의 온전함과 불완전함 속에서 성경의 진리를 보여 준다.
참된 성경신학은 그 가르침이 흘러나오는 영감된 원천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문적으로 쓰이는 의미에서 성경신학은, 성경의 영감을 전제하거나 부정하지 않은 채, 여러 성경 기자들에 의한 교리의 진술과 전개, 달리 말하면 유대 종교 사상의 전개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교 교의학은 진리의 체계를 완성하거나 사람들이 그 사실들을 더 잘 이해하게 하는 데 필요해 보이는 철학적 설명들을 성경신학에 덧붙인다. 이러한 설명들이 반드시 비(非)성경적인 것은 아니며, 결코 반(反)성경적이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중력 이론이 자연 계시의 일부인 것과 똑같이 성경의 일부일 수 있다. 그것들은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용된다. 대부분의 사실에 대하여, 어느 사실과도 모순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한, 그것들은 자신의 개연적 정확성을,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확실한 정확성을 입증한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신뢰를 잃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사실이라도 그 이론과 모순됨이 드러나 정면으로 어긋나면, 그것만으로도 그 이론이 그릇되었음을 보이기에 충분하다.
그리스도교 교의학은 두 가지 점에서 교회 교의학과 다르다.
(1) 후자는 교회임을 표방하는 어떤 그리스도인 단체가 내놓은 권위 있는 교리 진술이다. 그것은 신경, 신앙고백서, 교령, 결의, 변증서에서 발견된다. 또한 그 신경이나 교리 체계에 대한 권위 있는 논의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2) 교회 교의학은 연합과 일치의 토대로 놓을 수 있는, 확인된 사실만을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한낱 사변적인 물음들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 교의학은 확인된 물음들뿐 아니라 사변적인 물음들도 다룬다.
이로써 온전한 신학 체계는 이 모든 부류를 결합하리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은 성경 교의학에 근거할 터인데, 성경 교의학은 온전한 계시의 모든 가르침을 그리스도교 교의학의 사실 및 교리와 합치하도록 수집하고 체계화했을 것이다. 교회 교의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승인한 범위를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므로 성경 교의학과 합치하며, 한편 계시의 충만함은 그리스도교 교의학에 사변적인 물음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고, 그 모든 논의에서 그리스도교 교의학은 사실들에 대한 온전한 지식과 모든 교리의 확정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치는 오직 신학이 정밀한 학문으로 환원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는 이 세상의 삶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교리적 차이의 원인들이 분명해진다.
만일 사람들이 전혀 편견 없는 마음으로, 동일한 지적 능력으로, 동일한 분량의 연구를 가지고 성경신학 연구에 임한다면, 모두가 그 사실과 교리에 대하여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지적 능력은 저마다 다르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편견을 지닌다. 모두가 연구할 시간을 똑같이 가진 것이 아니며, 가진 시간을 똑같이 쓰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성경신학을 연구하는 데서조차 차이는 확실하다.
같은 원인들이 그리스도교 교의학에서는 이 차이를 더욱 키운다. 여기서는 성경신학에서보다 인간적 요소가 더 크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한편 옛것에 대한 존숭, 변화에 대한 반대,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학자들의 영향은 교회 교의학의 토대가 되는 교회의 신경들이 바뀌지 못하게 막으며,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오류에 머물고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만든다.
1.6 The Spirit in Which Theology Should Be Studied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신학을 연구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1. 진리에 대한,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쳐진 진리에 대한 경외함으로.
2. 신적 도우심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로.
3. 편견에 맞서 마음을 주의 깊이 살핌으로.
4.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이고 퍼뜨리는 일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움으로.
5. 그러나 참되다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또 간절히 살피고 받아들이려는 자세로.
6. 그리고 저 가르침 받을 만한 겸손으로. 곧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존재하는 모든 진리를, 심지어 많은 개별 주제에 관한 모든 진리조차 우리에게 가르치지는 않으셨음을 알기에, 그분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온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현재 모든 곤혹을 없애 줄 저 더 충만한 계시를 위하여 그분 자신의 때를 기다리는 겸손으로.
1.7 The Advantages of Studying Theology Systematically
신학을 조직적으로 연구하는 데에는 여러 유익이 있다.
1. 우리는 이로써 각 주제에 관하여 자연과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확인하게 된다.
2. 우리는 이 모든 가르침을 서로 비교하여, 그것들의 상호 한계를 규정할 수 있게 된다.
3.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의 계시로 한계 지어진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되고, 계시를 그 지식의 원천으로 인정하게 된다.
4. 따라서 우리는 어떤 원천에서든 확인된 진리를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또한 거기에 본래 포함되지 않은 것을 더하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는다. 이 원칙에서 벗어나면 불가피하게 오류에 빠지게 된다.
5. 어떤 원천에서 이끌어 내든 하나님의 모든 가르침에서 발견될 조화와 일관성은 계시의 신적 기원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될 것이다. 이는 이성과 자연이 가르치는 바를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와 비교하는 데서뿐 아니라, 성경의 여러 책을 서로 비교하는 데서, 특히 구약 전체를 한 권의 책으로, 신약 전체를 또 다른 한 권의 책으로 비교하는 데서 나오는 결과이다.
6. 우리는 이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각 교리를 귀히 여기도록 인도된다. 각 교리는 참되다. 각 교리는 믿게 하려고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하나라도, 그것의 꺼리게 하는 면모 때문에, 또는 대수롭지 않아 보임 때문에, 또는 신비로운 본성 때문에, 또는 큰 개인적 희생을 요구함 때문에, 또는 그것의 낮추는 듯한 단언이나 요구 때문에, 또는 그것이 생명과 구원을 보증하는 값없는 조건 때문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
2.1 God Can Be Sufficiently Known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어떤 학문에 대하여 이런 반론이 제기된다. 곧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그분은 알려질 수 없으며, 따라서 참된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이 말이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적 본성을 알 수 없다는 뜻이라면, 그 원리대로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우리는 그 어떤 것의 본질적 본성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 어떤 존재의 본질도, 심지어 가장 작은 물질의 원자의 본질조차 규명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어떤 것이 지닌 것으로 지각되는 성질들로부터, 또는 그것의 나타남으로부터 그것이 무엇임에 틀림없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 자신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여러 방식 속에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낼 수 있다.
이 말이,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의 본성과 너무도 다를 수 있거나 다를 수밖에 없기에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없다는 뜻인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본성이 크게 다른 많은 것을 실제로 안다. 우리의 몸은 물질이지만, 그 몸을 아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다. 그리고 정신과 물질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또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우리 자신의 존재 양식과 다른 사물들의 존재 양식을 안다. 그러나 이 존재 양식들은 그 안에 존재하는 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게다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전에는, 우리는 그분이 모든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고 확신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유사점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있는 한도까지 그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어떤 점에서든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것이 참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적어도 그분의 더 분명한 완전하심들을 알아보고, 그 완전하심들 때문에 그분이 마땅히 경외와 예배를 받으셔야 함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의 온전함에 이를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본성과의 유비를 따라, 우리는 그분 안에서 인격적이고 의식적이며 지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를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 기대는 우주 안에서 그분의 임재와 일하심이 나타남으로써 확증된다.
이 유비만으로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식을 제한하는 것도 아니다. 이 유비는 어떤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도 사람처럼 물질적인 몸을 가지셨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분이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은 다른 사실들로부터 규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유비는 적어도 이만큼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곧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영이시거나, 아니면 의식적 인격성과 지성적 목적을 이루는 저 모든 영의 속성이 속한 더 높은 본성을 가지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우리가 동료 사람들과는 감각을 통해 접촉하면서 그들의 행실과 행동을 통해 그들의 본성을 배우는 것과 달리, 하나님과는 감각을 통해 접촉할 수 없기에 그분을 알 수 없다는 뜻인가? 그러나 우리가 동료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은 그들과의 인격적 접촉을 통해서만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그들의 작품들로 이것을 판단하는데, 비록 그들을 직접 보거나 인격적으로 안 적이 없더라도 그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다. 그분은 비록 물질이 아니시지만 물질적인 것들을 만드시는 분이시며, 우리 둘레의 우주 안에서 그분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의 증거를 우리 앞에 펼쳐 보이셨다. 참으로, 어떤 사람의 것을 그토록 놀랍게 능가하는 사고의 파악력과 수행의 능력을 나타내고, 가장 강력한 현미경적 검사로도 그 한계를 헤아릴 수 없는 세부와 실행과 마무리의 정밀함을 나타내는 이토록 거대한 구조물은, 우리가 그 지은이를 알고자 힘쓸 것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분이 우리보다 헤아릴 수 없이 더 크고 더 지혜로우시다는 증거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 말이, 우주의 외적 현상들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영적 관계에 필수적인 그런 정신적·영적 지식을 하나님에 관하여 줄 수 없다는 뜻인가? 이는 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지식이 우리 자신의 영적·정신적 현상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됨을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존재와 사고와 목적의 의식을 발견하며, 이것들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으로부터, 우리는 그것들이 지성을 지닌 어떤 존재 안에서 작동하는 본성을 안다. 우리는 정신이 물질의 법칙들 못지않게 구속력 있고 효력 있으며, 못지않게 규칙적이고 항구적인 그 자신의 법칙들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물질의 법칙들을 그 창조자에게 돌리는 것 못지않게 이 법칙들을 그 지은이에게 돌려야 한다. 그것들을 연구할 때 우리는 정신과 영의 본성을, 본질을 배움으로써가 아니라, 물질에서처럼 현상을 연구함으로써 지각한다. 그 본성을 우리는 신적 정신과 영께 돌리며, 그분은 적어도 이와 동등한 본성을 지니셔야 한다. 사람들 안의 정신적·영적 능력의 차이는 이것들이 더 크고 더 작은 정도로 존재함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가장 높은 정도로 하나님께 돌린다. 그것들의 지은이로서 그분은 자신의 모든 정신적·영적 피조물보다 친히 더 크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더하여, 우리에게는 독특한 정보의 원천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직관적 지식을 가질 수 있음을 발견한다. 어떤 추상적 사실들은 이해되기만 하면 곧바로 그것이 참이라는 확신이 뒤따른다. "전체는 그 어느 한 부분보다 크다"라는 명제는 이해되는 즉시 참으로 지각된다. "한 사물이 동시에 있으면서 있지 않을 수는 없다"라는 진술도 마찬가지다. 이 지식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정신이 달리 믿을 수 없도록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누가 그것을 그렇게 구성하였는가? 그것은 우리가 본성이 가르치는 바를 받아들일 때 그 진실하심을 신뢰하는 어떤 분에게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만일 어떤 분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창조하는 정신이 있는 것이며, 그 정신은 물질의 개입 없이 정신에 직접 작용하여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친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높은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의존, 그분께 대한 의무의 책임,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분별, 옳은 것을 행하고 그른 것을 행하지 않을 의무에 관하여 같은 본성의 다른 확신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이 직관들이 같은 원천에서 오며 우리의 도덕적 관계와 그분께 대한 의무에 관한 그분의 가르치심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부분적 지식만을 얻을 뿐이라는 반론이 제기된다. 이는 기꺼이 인정된다. 그러나 부분적 지식도 그것이 미치는 한도까지는 실제의 지식이다. 우리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부분적이다. 자식은 그 부모를 부분적으로만 안다. 신민은 그 군주를 부분적으로만 안다. 그러나 의존을, 그리고 순종과 사랑의 의무를 알아보기에는 충분한 만큼이 알려져 있다. 만왕의 왕이신 하늘 아버지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소발의 물음들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경외와, 그분이 마땅히 그러하시리라 믿어지는 그런 분께 대한 간절한 예배와 함께, 모든 시대 경건한 자들의 언어가 되어 왔다. "네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찾아낼 수 있겠느냐? 네가 전능하신 분을 완전히 알 수 있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무엇을 알겠느냐."(욥기 11:7,8)
그러나 또한 이런 반론이 제기된다. 곧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분은 절대자, 무한자, 무조건자이셔야 하며, 따라서 본성이 유한하고 존재 양식이 상대적이고 유한하며 조건적일 뿐인 우리에게는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반론은 그 자체로 자신을 반박한다.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분이 그러하셔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어떤 방식으로 이것을 알든,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에 관하여 그분이 절대자, 무한자, 무조건자이셔야 한다는 그만큼은 안다. 그러므로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안다고 여겨지기 이전에도, 우리는 그분의 본성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바를 이만큼 알며, 그분의 존재에 대한 첫 증거 위에서 거기에 담긴 모든 것을 그분께 돌릴 권리를 가진다. 그렇게 그분께 돌려진 특성들은, 그러므로 그분을 우리에게 무한한 존재로 계시한다. 곧 그분 자신의 본성 혹은 본질 안에 있는 것 외에는 다른 한계가 없으며, 절대자로서 의존적일 수 없고 도리어 다른 모든 것의 근원이요 주권자이셔야 하며, 무조건자로서 시간과 공간과 물질에 종속될 수 없고, 따라서 성장이나 증가의 가능성 없이, 어제·오늘·내일 같은 시기의 연속 없이, 그리고 물질에 속한 공간과 위치의 그런 척도 없이 존재하셔야 하는 존재로 말이다. 그러므로 알려질 수 없다고 선언되는 그 하나님은 적어도 자존하시는 영, 곧 그분의 본성에 속한 모든 완전하심에 있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시는 분으로 알려진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가장 작은 증거라도 나타나기만 하면, 이 본성은 즉시 그분께 돌려질 수 있다.
2.2 The Almost Universal Belief in God, and Its Sources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 가운데 거의 보편적이었다. 완전에 대한 같은 이상이 모든 곳에서 발견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감각에 이끌려, 자신들이 종속되고 의지하는 어떤 힘을 믿는 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만큼은 가장 낮은 형태의 물신 숭배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이런 의존의 감각을 느끼는 대상들의 수와 형태를 늘려 여러 신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도 한 분 하나님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니, 그들은 신들 자체를 하나의 기원적 근원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사람의 본성과의 유비를 지나치게 가까이 따라, 하나님을 세계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혼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높은 영적 관념은 오직 그분의 계시를 받은 민족들에게서만 발견되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기록들은 가장 이른 시대에 모든 이가 지녔던 지식이 비교적 단순하고 순수했음을 보여 준다.
이 믿음이 너무도 보편적이어서, 모든 시대 인류의 수백만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 극소수가 자신들의 실제 확신에 대하여 스스로 속은 것인지, 아니면 무신론을 표방함에 있어 진실하지 못했던 것인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란 너무도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많은 수가 회의에 빠졌는데, 때로는 타락과 죄에서 비롯된 바람에 이끌렸고, 또 때로는 철학적 사변에 잘못 이끌렸으나 겉으로는 진리를 알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 믿음이 정상 상태의 어떤 사람에게도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부재는 그의 필수적인 도덕적 역량이 어떻게든 짓눌리거나 지워진 데서 비롯된다는 인류 일반의 확고한 확신은, 사람들이 무신론을 표방하는 자들에 대하여 갖는 일반적 혐오에서뿐 아니라, 그런 자들에게 법정에서 증언할 권리를 부인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1. 사람들의 이 거의 보편적인 일치는 일차적으로 전승에 돌려야 한다. 그것은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지나간 모든 세대를 통하여 전해 내려왔다. 오늘날 어떤 신학자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기를 꺼려 왔다. 어떤 이들은 이 일반적 보급의 근원을, 정신 안에 본유적인 하나님 관념에서 찾았다. 또 어떤 이들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다른 논증들에 의지하면서, 인류의 보편적 동의를, 이 관념이 그들에게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 받아들였으니, 그들이 흔히 제시되는 그 증거들에 선뜻 동의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승된 가르침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 논증이 약해지지는 않는다. 설령 약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정되어야 할 사실이다.
이것을 이 일반적 믿음의 일차적 근원으로 보는 데 유리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이것이 우리 가운데 모든 아이가 하나님에 관하여 배우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라는 것이다. 아이 자신의 물음이나, 이 지식의 중요성에 대한 부모의 확신은, 그 지식이 이른 시기에, 그러한 직접적 가르침으로 전해지게 한다.
(2) 여행자들, 특히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얻은 정보는, 우리 자신의 관습이 이교 민족들의 관습과도, 또 그리스도교 세계 일반의 관습과도 일치함을 가르쳐 준다.
(3) 이것은 다음 사실을 설명해 준다. 곧 이 믿음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져 왔으면서도, 한 시기 한 민족 안에서는 거의 모든 이가 동일한 형태로 그것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4) 또한 그것이 어느 한 백성 가운데 여러 세대에 걸쳐 한결같이 이어져 온 그 한결같음 역시 이 진리의 증거이다.
(5) 우리가 인류의 기원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이 더 순수한 형태로 일반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것이 사람의 원초적 믿음이었으며, 거기서부터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전해 내려와 우리 자신의 시대와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6) 이것은 또한 다음 사실을 설명해 준다. 곧 그 믿음이 부패하였을 때, 어떤 새로운 정신적·영적 힘이 일어나 변화를 일으키고 한동안 그 믿음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그 부패한 형태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이 전승된 가르침에 의존하는 믿음은 이 교리의 진리됨에 대한 증거로서 큰 가치가 있다.
(1) 그것이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음은 이 교리가 온 인류에게 적합함을 보여 준다. 그것은 비록 가장 지혜로운 사고에 값하는 것이지만, 그 받아들임에 있어 철학적 관념이나 추상적·논리적 추론에 의존하지 않는 교리이다. 가장 무지한 사람들도 그것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일반 백성이 즐겁게 들었던" 저 위대한 선생님의 가르침과 같다. 그것 안에, 또는 그것과 연관된 어떤 것이 있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믿게 만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후에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가르침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모든 시대를 통하여, 인류 대중의 마음속에 강력하고 지배적인 영향력으로 자리 잡게 하기에 충분했다는 사실은, 그것의 진리됨에 대한 강한 증거일 뿐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에 대한 강한 증거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보편적 선물은 모두에게 공통된 이런 단순한 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2. 그것이 모든 시대를 통하여 전해 내려왔다는 것은, 그것이 인류의 가장 지혜로운 자들의 온갖 최선의 사상과 접촉해 왔음을 보여 준다. 그것을 연구함에 있어, 이교도 가운데서도 가장 지혜롭고 가장 선한 자들이, 그것에 대한 자신들의 가장 고귀한 관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받았다고 믿는 바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사실은, 이 가장 고귀한 관념에 유리할 뿐 아니라 그것을 계시하는 신적 말씀에도 유리한 설득력 있는 논거가 된다.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곧 온갖 다양한 사상과 철학적 사변에 부쳐진 뒤에도, 이 전승된 믿음은 진리로서 스스로를 지켜 왔으며, 그것에 제기된 모든 반론을 설득력 있게 견뎌 냈다는 것이다.
3. 그것이 나타난 다양한 형태들은, 모든 이에게 공통되고 모든 사람이 그 옳음을 지각해 온 어떤 단순한 진리 혹은 진리들이 그 토대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비록 어떤 이들만이 자연의 빛을 통하여 다른 진리들을 지각하여, 그로써 다른 이들보다 하나님에 대한 더 나은 관념을 형성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4. 이 가장 단순한 진리들은 더 높은 이교의 이상에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계시 자체가 주는 관념 속에도 들어 있음이 드러난다.
5. 이로써 또한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존재가 나타나는데, 그 지식은 예배와 경외의 의무를 강제하며 그분께 대한 책임을 지운다.
6. 자기 이익이 죄로 인하여 자연히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거부하게 했을 법한 자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이 이어져 왔다는 것은, 그것이 견지되어 온 진실함에 대한 강한 증거이다.
2.3 Is the Knowledge of God Innate?
III.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본유적(innate)인가.
어떤 교리의 진리성을 입증하는 데 단순한 전통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인류의 이 보편적 믿음에 대한 다른 근거를 찾게 된다. 전통은 이 신앙의 일차적 원천으로 지목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일차적인 것은 오직 시간의 순서에서일 뿐이며, 이 교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대한 실제 원인으로서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안된 여러 논증들 가운데 어느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은 이 주제에 관한 어떤 논의를 듣기도 전에 이미 확신에 도달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 논증들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논증들은 확증적 증거로서 제시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이 지속적이고 일반적인 믿음에 대해 또 다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에 대한 참된 이유는, 인간 정신의 구성이 이러하여, 그것이 하나님에 대해 획득한 관념을 자연스럽게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의심해서는 안 될 사실로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의지한다는 데 있다.
1. 이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본유적(innate)"이라는 진술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 표현은 적절하지 못한 듯하다.
(1.) 본유적이라는 단어의 통상적인 의미에서 본유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은 모든 시사(suggestion)나 내적 관조와 독립된 어떤 관념도 소유하지 않는다. 어떤 진리도 그것이 진리임을 지각하기 전까지는 정신에게 진리가 되지 못한다.
(2.) 만일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본유적이라는 말이 흔히 이해되는 대로, 정신 안에 있다면, 그 관념은 한 사람에게서나 다른 사람에게서나 동일하게 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 완전성에는 여러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 차이들은, 그 관념을 완전한 형태로 구성하는 요소들이 시사되는 서로 다른 정황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정도의 교양과 사고에서 비롯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3.)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그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성경의 가르침의 결과이거나, 적어도 사색하는 사람들의 철학적 개념의 결과이므로, 이 관념의 본유성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이유로 주장될 때, 우리는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설령 전부는 아니더라도, 자신들에게는 그러한 본유적 관념이 없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4.) 우리가 지닌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도 그분 자신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그분과 인간 또는 우주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관계들에 대한 관념이거나, 우리가 이것들과 관련하여 지각하는 어떤 사실들에 대한 그분의 관계에 대한 관념이다.
2.4 The Intuitive Basis of the Belief in God
2. 그러므로 더 나은 진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함축하는 어떤 진리들을 정신이 직관적으로 지각하는 데 근거하며, 정신은 그 진리들의 참됨에 대해 절대적 확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직관적 개념들에 도달한다는 것은 이미 진술된 바 있다. 그는 지식을 얻는 단 하나의 방법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감각을 통해 진리에 도달한다. 그는 경험에 의해 그것을 배운다. 그는 증언을 믿는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어떤 진리들에 관해서는,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지적으로 이해하기만 하면 자명한 것이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에 관한 어떠한 추론도 그것들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들 수 없다. 그것들에 대한 어떠한 연구도, 단언된 사물들의 본성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진리성에 대한 더 깊은 확신을 주지 못한다. 어떠한 개인적 경험도, 타인의 어떠한 증언도, 그것들의 신뢰성에 대한 더 강한 증거를 주지 못한다. 각 개인의 정신 안에서, 언급된 사물들이 의미하는 바를 그 정신이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그것들이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는 개인적 확신이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이 관념들이 인간에게 본유적이라고 단언될 때 실제로 의미하는 바이다.
그러한 직관적 개념에 앞서 필요한 것은, 직관적으로 지각될 그 진리의 의미에 대한 지식뿐이다. 예를 들어, 앞서 인용된 수학적 공리 "전체는 그 부분들 중 어느 하나보다 크다"를 보자. 이것의 진리가 지각되기 전에, "전체"와 "부분"과 "크다"가 의미하는 바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들이 알려지자마자, 그 단언의 진리는 즉시 드러난다. 바로 이런 까닭에 "하나님"이라는 용어, 또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이라는 표현은 직관적 개념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그 참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에 대한 어떤 참된 관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술은, "인간 정신의 구성이 이러하여, 그것이 하나님에 대해 획득한 관념을 자연스럽게 참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주장에 국한되었다.
이 직관적 개념들은 본래 단일하다. 윌리엄 해밀턴 경은 단순성을 직관적 진리의 한 특성으로 삼는다. 그가 인용하는 이 진술에 반대하여, 찰스 하지 박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유클리드 제1권의 모든 명제들은 뉴턴에게는 처음 보았을 때 공리들만큼이나 명백하였으며, 우리의 도덕적·종교적 본성에서도 같은 것이 참이다. 그 본성이 정화되고 고양될수록, 그 시야는 더 명료해지고, 그 직관들의 범위는 더 넓어진다. * * * * 어떤 명제가 더 단순한 요소들로 분해될 수 있다 하더라도, 강력한 지성에게는 그것이 여전히 자명하게 참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증명의 개입 없이 즉각적으로 참이라고 보이는 것은, 통상적인 표현 방식에 따르면, 직관적으로 보인다고 일컬어진다." 『조직신학』 제1권, 193쪽. 이 두 저자는 둘 다 옳은 듯하면서도 둘 다 그른 듯하다. 해밀턴은 단순성이 직관적 진리의 한 특성이라고 진술한 점에서는 옳지만, 그 결과로 어떠한 복합적 진리도 직관적으로 지각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그르다. 왜냐하면 정신은, 두 직관적 진리의 정당함을 각각 따로 지각하면서, 만일 그것들이 동질적이라면, 동시에 그것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떤 대상, 예컨대 탁자나 의자의 서로 다른 성질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용어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정신은 그것들을 그렇게 연결하기에 앞서 각각을 따로 파악한다. 실로 정신은 그것들을 결코, 그 분리 가능한 성격을 여전히 보존하고 그것들을 그러한 것으로서 인식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결합하지는 않는다. 하지의 비유적 표현을 빌리자면, "그 시야가 더 명료해지고", "그 직관들의 범위가 더 넓어질수록", 이 직관들은 더욱 뚜렷이 분리되고, 더욱 분명하게 복수로 나타난다.
3.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관념 안으로 들어오는 직관적 개념들을 찾을 때, 그것들이 단순하다는 것에, 그러면서도 그것들 중 둘 또는 그 이상이 그분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서 결합될 수 있다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다. 이리하여, 하나님이 알려지는 한, 그분의 존재는 직관적으로 알려지는데, 이는 관여하는 직관들이 적든 많든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본래 그것들을 각각 따로 지각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을 함께 결합하며, 각각의 결과로서뿐 아니라 전체의 결과로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언되는 바의 의미는, 단 하나의 직관에만 관련될 때에는, 둘이나 셋, 또는 전부에 관련될 때보다 훨씬 덜하다.
이 직관적 개념들 가운데 오직 가장 단순한 것들만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더 큰 지성과 교양과 사려 깊음은 어떤 이들로 하여금 다른 직관들을 알게 한다. 만일 이것들이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진술된다면, 그것들은 어느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모든 사람에게도 온전히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들의 수용이 제한되는 것은, 그것들이 덜 참되기 때문도 아니고, 한 사람의 본성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데 다른 사람의 본성은 거부하기 때문도 아니라, 그것들이 지성에 시사되지 않았거나, 혹 시사되었더라도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더 많이 알수록, 그리고 그것들이 전달하는 사고의 본성이 더 높을수록,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더 순수하고 더 위대해질 것이다.
4. 이것들 가운데 더 분명한 몇 가지를, 그것들의 본성과 인간이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는 방식의 예로 취할 수 있다.
(1.) 의존적인 것은 순전히 독립적인 어떤 것에서 그 최종적 지지를 가져야 한다.
(2.) 파생된 존재는 자존하는(self existent) 것에서 그 궁극적 기원을 가져야 한다.
(3.) 모든 결과는 그 자신 안에든 밖에든 그 원인을 가져야 한다.
위 단언들의 진리는 그 의미가 지각되자마자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첫째 것이 참이라면, 인간이 의존하는 어떤 존재가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그 존재에게 의무와 순종의 책무를 지고, 그를 두려워해야 하며, 그의 보호를 구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관념이다. 둘째 것이 참이라면, 인간이 의존하는 그 존재는 또한 그를 통해 인간이 존재하게 되는 그 존재이거나, 아니면 두 존재가 있어서, 하나는 생명의 근원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보존과 유지의 원인이다. 이들 중 하나는 독립적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존적일 것이다. 교양 없는 자가 이 둘이 필연적으로 하나임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러할 가능성이 다신교의 존재를 허용해 왔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렇게 결합될 때,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독립적이고 자존하는 존재라는 관념이 되어 왔으며, 이는 복합적 관념으로서, 하나가 아니라 두 직관적 개념에 의식적으로 근거하고 있으나, 그것들은 이제 함께 결합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것들 중 셋째 것도 이해되자마자 받아들여진다.
다만 필요한 것은 "결과"라는 용어와 "그 자신 안에든 밖에든 있는 원인"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를 아는 것뿐이다. 이것은 관찰과 경험을 통해 획득된다. 원인과 결과의 관념은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서조차 발견되는데, 그들은 어떤 일이 원인 없이 일어났다고 설득될 수 없다. 또한 "그 자신 안에든 밖에든 원인을 가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가르치는 일도 어렵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기계 장치로 인해 자신의 바늘을 움직이는 시계와, 어떤 사람에 의해 움직여지는 같은 시계의 바늘 사이의 차이로 예시될 수 있다. 또는 자기 운동의 힘을 가진 말과, 그 말이 끌기 때문에만 움직이는 수레 사이의 차이로 예시될 수 있다. 이 직관적 시사의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에 근거한 하나님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특히 보통 사람의 정신에게, 그것은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그리하여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의 존재를 설명한다고 가르치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추천해 왔다. 이 경우에도, 인간은 우리가 보는 사물들을 언제나 한 분 하나님과 결부시킨 것은 아니었다. 어떤 형태의 믿음에서는, 그들은 우주를 하나 이상의 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른 형태에서는, 그들은 자신들이 인정하는 위대한 지존자(Great Supreme)보다 열등한 한 신에 의해 그것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은 인과성의 관념과, 그것을 이해할 때 생겨나는 직관적 개념에 대한 보편적 수용을 보여 주었다. 그것에 대해 제기된 유일한 반론은 흄과 칸트의 것인데, 그들은 인과의 지식이 우리의 경험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분명히 경험은 그 법칙의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가르칠 뿐이며, 그 법칙 자체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5. 그리 단순하지는 않으나, 그것들을 이해하는 자들에 의해 똑같이 참되게 믿어지는 다른 직관적 개념들이 덧붙여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완전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관념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 중 몇 가지를 보자.
(1.) 옳음과 그름의 구별은 어떤 절대적 표준을 가져야 하는데, 그 표준은 인격적이고, 의식적이며, 불변하고,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이 없다. 그런데 이것이 곧 하나님이다.
(2.) 도덕적 완전은 단지 관념적인 것일 수 없고, 어떤 실재적 구현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불완전도 있을 수 없을 것이며, 특히 어떠한 정도의 불완전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도라는 것은, 불완전이 그것에 접근해 가거나 그것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그 무엇의 존재를 함축하며, 이것은 오직 절대적 완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대적 완전은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이다.
2.5 The Arguments A Priori
IV. 이 믿음을 확증하는 논증들.
유신론적 증명들은 선험적(a priori) 논증과 후험적(a posteriori) 논증으로 나뉘어 왔다. 이는 편리한 구분이기는 하나, 선험적 논증 가운데 일부는 후험적 성격의 요소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으며, 후험적 논증 가운데 일부는 선험적 원리에 의존한다. 또한 그중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정확한 경계선을 긋고 이쪽 부류 혹은 저쪽 부류로 배정하기가 어렵다.
선험적 논증이란, 선행하는 원인에 관하여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부터, 혹은 사물의 본성 안에 있는 어떤 이유나 원리—그것이 어떤 결과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함축하는—로부터, 어떤 결과 또는 사실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증이다.
1.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선험적 논증의 일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선험적 논증이란, 사물의 본성 안에 있는 어떤 이유, 혹은 인간의 정신이 인지하는 어떤 원리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어떠한 검토와도 무관하게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존재를 추론하게 하는 논증이다.
(1.) 이 모든 논증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우리가 정신 안에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이다. 이는 잉글랜드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Anselm)가 그의 저작 Proslogium seu Allogium de Dei natura, 제2·3·4장에서 처음으로 제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논증 형식은 간략히 다음과 같이 진술될 수 있다. 정의상 하나님은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존재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비존재가 불가능한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그 정의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존재하셔야 한다.
정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에서 출발하는 이 논증은 스콜라 학자들이 애호하던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여러 저작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데카르트(Des Cartes)에 의해 탁월한 역량으로 개진되었기에, 흔히 데카르트적 논증이라 불려 왔다. 그가 그것을 제시한 한 형태는 정신 안에 있는 최고 완전성(Supreme Perfection)의 관념에 기초한다. 우리 자신은 불완전한 피조물에 불과한데도 우리는 이 관념에 이른다.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반드시 전적으로 완전하신 분(the All Perfect)으로부터 와야 하니, 그분이 마치 장인이 자기 지성의 작품에 자신의 상표를 새겨 넣듯이 그것을 우리 존재에 새겨 두셨다.
그는 또한 다음의 삼단논법으로, 안셀무스의 것에 더 가깝게 닮은 논증을 제시한다.
"어떤 속성이 한 사물의 본성 또는 관념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그 속성이 그 사물에 대하여 참이며, 또한 그것이 확실히 그 사물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
그런데, 필연적 존재는 신성(the Deity)의 본성과 관념 안에 포함되어 있다 ;
그러므로, 필연적 존재는 신성의 참된 속성이다 ; 곧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신다."
[Blunt의 신학 사전, 「유신론(Theism)」 항목을 보라. 거기에는 위에 언급된 이 논증의 모든 형태에 대한 보다 충실한 진술도 들어 있다.]
그러나 이 논증을 가장 완전하고 가장 명료하게 제시한 것은 스틸링플릿 주교(Bishop Stillingfleet)이다. Origines Sacrae, 제1권, 484-492쪽. 다음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은 생략한 채, 제시된 삼단논법 형식만을 단순히 진술한 것이다.
어떤 사물의 본성과 본질에 속한다고 우리가 분명하고 또렷하게 지각하는 것은, 그 사물에 대하여 참으로 단언될 수 있다. 정신 안의 분명하고 또렷한 지각이야말로 우리가 그 진리에 관하여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존재의 필연성이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하고 또렷하게 지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은 반드시 존재하셔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관념에서 출발하는 이 논증은 강력하게 반박되어 왔다. 칸트는 이를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반대하였다. 곧 "완전한 존재의 단순한 상정 가능성, 즉 논리적 가능성은 그러한 존재의 객관적 혹은 실재적 가능성에 대한 증명이 되지 못하며, 존재는 단순한 관념으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는 것이다. Knapp의 신학, 86쪽.
그러나 이 반론에 대한 답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곧 그 반론이 겨냥하는 논증은 단순한 논리적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존재에 대한 논리적 확실성 혹은 필연성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모든 주관적 관념이 반드시 객관적 실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떤 관념들은 그러한 실재를 가질 수 있으며, 특히 이 관념—그 자체가 필연적 존재의 관념을 함축하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그렇게 함축된 관념의 결과로서 그 실재를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Hodge)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곧 만일 그 논증이 "어떤 타당성을 지닌다 해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다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실제로 있다고 말하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그러한 추상적 진술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필연적 존재가 그분의 본성에 속한다는 우리의 관념이 옳다는 증명에 근거하여, 어떤 것—곧 하나님의 존재—이 실제로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 논증에 대하여 "그것은 관념적 존재와 실재적 존재를 혼동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분명히 거기에는 관념적 존재와 실재적 존재를 추상적으로 혼동하는 일도 없고, 관념적 존재의 형태들과 실재적 존재의 형태들을 일반적으로 혼동하는 일도 없다. 다만 그 논증들은 관념적 존재의 단 하나의 형태가 실재함을 보일 뿐인데, 이는 바로 그 관념의 본성 자체가 그에 상응하는 실재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둘째 선험적 논증은 모세스 로먼(Moses Lowman)이 고안한 것으로, 존재의 본성 및 필연적 존재와 우연적 존재 사이의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다음은 그 논증의 요점들을 더욱 간략하게 진술한 것으로, J. 파이 스미스 박사(Dr. J. Pye Smith)가 그의 First Lines of Christian Theology, 99-101쪽에서 제시한 것이다.
1. 적극적 존재(positive existence)는 가능하다. 그것은 아무런 모순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2. 모든 가능한 존재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 자체의 본성상 없을 수 없는 필연적 존재이거나, 혹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우연적 존재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3. 어떤 존재는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존재가 우연적이라면, 모든 존재는 있을 수 있는 만큼이나 없을 수도 있을 것이며, 없을 수도 있는 그것은 자신의 존재의 선행 원인이 되는 어떤 다른 것 없이는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결과는 반드시 원인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모든 가능한 존재가 우연적이라면, 모든 존재는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관념은 원인 없는 결과의 관념이 될 터인데, 이는 모순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4. 필연적 존재는 반드시 현실적 존재여야 한다.
5. 필연적 존재는 반드시 언제나 있어야 한다.
6. 필연적 존재는 어떤 존재든 가능한 곳이라면 어디에나 반드시 있어야 한다.
7.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일 수 있다. 둘이라면 서로 어떤 점에서도 다를 수 없을 것이니, 곧 그 둘은 하나이며 동일한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8. 그 유일하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는 반드시 모든 가능한 완전성을 가져야 한다.
9. 그 유일하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는 반드시 자유로운 행위자여야 한다.
10. 그러므로, 모든 우연적 존재의 원인, 곧 자신을 제외한 모든 다른 존재들의 원인이 되는 유일하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존재가 있다. 그리고 이 존재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모든 가능한 완전성을 지니고, 지성적이며 자유로운 행위자이다. 곧 이 존재가 하나님이시다.
(3.) 셋째 선험적 논증은 새뮤얼 클라크 박사(Dr. Samuel Clarke)가 그가 행한 보일 강좌(Boyle Lectures)에서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간략히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어떤 것은 영원 전부터 반드시 존재해 왔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무언가가 존재하는 이상, 어떤 것은 언제나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그렇지 않다면 지금 있는 것들은 절대적으로, 또 원인 없이 무로부터 산출되었어야 할 터인데, 이는 불합리하다. 아무것도 원인 없이 산출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것이 영원 전부터 존재해 왔다면, 언제나 어떤 불변하고 무한한 존재가 있었거나, 아니면 어떠한 본래적 원인도 없는 변화하고 의존적인 존재들의 무한한 연쇄가 있었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는데, 후자는 불합리하다.
클라크 박사는 과거에 있어서의 무한 연쇄의 불합리성을 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연쇄의 불가능성은 그 본성 자체로부터 드러난다. 과거의 무한 연쇄란 있을 수 없으니, 무한 연쇄란 그 마지막 항에 결코 도달하거나 그것을 완결할 수 없는 연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는 무한 연쇄에서, 지금 현재의 항은 그 연쇄의 첫째 항이지 마지막 항이 아니다. 그 연쇄의 마지막 항은 실로 존재에 있어 첫째 항이다. 그러나 그 첫째 항은 둘째 항보다 먼저 완결되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그 연쇄는 그 모든 항이 이미 나타난 연쇄이며, 따라서 그 항들의 수가 아무리 무한정하다 할지라도 그 연쇄는 여전히 완결된 것이요, 그러므로 유한한 연쇄이다. [이 문제는 조지프 트레이시 목사(Rev. Joseph Tracy)가 Bibliotheca Sacra, 제7권 613-626쪽에서 능숙하게 논한 것을 보라. 또한 투레티누스(Turretine), Theol. 제1권, 제3편, 문 1, 6항, 154쪽을 보라.]
선험적 논증의 가치는 의문시되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들에게 이 논증들은, 하나님께서 정신에 부여하신 그 구조를 통하여, 또 근저에 놓인 원리들에 대한 직관적 관념을 위한 그 능력을 통하여,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권위로 옷 입은 것처럼 보였다. 이 원리들을 지각하는 이들에게, 그 증명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식만큼이나 결정적이며, 양심의 지시만큼이나 권위가 있다. 이 원리들은 받아들여지고, 그 위에 논증들이 수학적 증명에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세워지며, 그 진리를 지각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실제적 증명을 제공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것들을 그릇된 것으로 여겨 왔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데 대한 논증적 증명의 가능성을 부정해 왔다. 그러한 이들에게는 오직 후험적 논증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이 참이든 아니든, 후험적 논증은 일반적으로 확실히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니는데, 이는 그것이 훨씬 더 단순하고, 인류 대중의 정신에 확신을 강제하는 데 더 잘 적합하기 때문이다.
2.6 The Arguments A Posteriori: The Cosmological Argument (Part 1)
2. 후험적 논증들.
이 논증들의 가치는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해 왔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이른바 수학적이라 불리는 종류의 증명을 기대해 왔는데, 그러한 증명은 오직 인정된 공리에 근거하여 거기서부터 불가항력적인 논리적 과정을 거쳐 결론에 이르는 논증에서만 나올 수 있다. 그러한 논증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앞서 고찰한 선험적 논증과 같은 성질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후험적 논증은 다른 어떤 주제에 관한 유사한 논증만큼이나 결정적이다. 그 성질은 모든 자연과학이 근거로 삼는 논증, 그리고 사람들이 삶의 모든 일에서 의거하여 행동하는 논증과 정확히 같다.
자연과학은 귀납적 방법을 추구한다. 그것은 어떤 사안에 관한 모든 사실을 수집한다. 그것은 이 사실들을 어떤 하나의 원리로 묶어 주는 일반 법칙이 있음을 인식하며, 이를 연구하는 자들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을 고안한다. 그러한 이론은 모든 사실을 설명해야 하며, 그 가운데 어느 하나에 의해서도 반박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일련의 사실이 매우 보편적으로 추적될 수 있고, 어떤 이론이 그것을 보편적으로 설명하는데 다른 어떤 이론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처음에는 몇 가지 사실 앞에서 단지 개연적이었던 그 이론이 점점 더 확실해지며, 마침내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된다.
그리하여 중력 이론은 우주를 하나로 묶고, 그 모든 부분을 그 모든 궤도 안에 유지하며, 고정된 수의 비율에 따라 어디서나 동등하게 작용하는 우주의 위대한 법칙으로 받아들여져 왔으나, 그럼에도 그것은 오직 그 결과를 통해서만 보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장 엄밀한 과학적 귀납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존재에 이른다. 우주를 그 모든 현상과 더불어 설명하는 유일한 이론은, 그것이 그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만이 모든 역사 기록의 시초부터 대다수 사람들의 눈에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인류는 이를 부정해 온 자들의 제정신이나 진실성을 의심해 왔다. 어떤 과학 이론도 그토록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그토록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들을 다룬 적이 없었다. 어떤 이론도 더 중대한 중요성을 지니거나 더 깊은 관심을 끄는 사안을 다룬 적이 없었다. 어떤 이론도 이 이론처럼 지성을 지닌 모든 인간의 사유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어떤 이론도 실천적인 사람들과 철학자들 모두에게 동시에 그토록 스스로를 천거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이론도, 죄와 무지로 인해 그 이름으로만 기억되고 그 가장 단순한 사실들에 관해서만 기억될 정도로 그렇게까지 잊혀졌다가, 다른 무엇보다도 그리스 철학의 영광을 이루는 관념의 아름다움에로 다시 떠오른 적이 없었으니, 그러는 동안에 동시에 그 신앙은 또 다른 한 민족 가운데 그 순수함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이는 그 이론을 부패시키려는 온갖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대로 가장 순수한 형태로 유지해 온 한 문헌에 의한 것이었다.
(1.) 고찰할 첫 번째 후험적 논증은 흔히 우주론적 논증이라 불리는데, 이는 그것이 세계에서 보이는 결과들로부터 제일 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목적론적 논증 및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주론적인 다른 논증들과 구별하기 위해, 인과(因果)로부터의 논증이라 불려야 한다.
이 논증의 매우 인상적인 형태가 버클리 주교에 의해 제시되었으며, 그것은 드와이트의 『신학』 제1권 79쪽과 80쪽에 인용되어 있는데,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가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감각으로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가 사람이라 부르는 살아 있고 사유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직관적으로 확실하다. 도리어 그것들은 단지 결과일 뿐이며, 그 살아 있고 활동하는 것이 그것들의 원인이다. 우리는 결과로부터 원인의 존재를 추론한다.
그리하여 우리를 둘러싼 우주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산출하기에 충분한 어떤 원인에 의해 산출된 매우 다양한 결과들을 지각한다.
이 원인이 곧 하나님이시니, 다시 말해 그것들을 고안하고 이루기에 충분한 지성과 권능을 지니신 한 존재이시다.
만일 이것들이 단지 물질과 정신의 어떤 내재적 능력들의 결과일 뿐이며, 따라서 어떤 외재적 작용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이것은 단지 그 결론을 추론의 과정에서 한 걸음 더 뒤로 물리는 것에 의해서만 결론에 영향을 미칠 뿐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의미하는 바는, 이 내재적 능력들 자체가 단지 결과일 뿐이며, 그것들 자체가 적절한 원인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 논증이 인과율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과로부터의 논증이라 불려야 한다.
이제 나는 이 논증을 또 다른 형태로 제시하겠으니, 실로 더 단순하면서도 더 완전한 형태이다.
그것은 삼단논법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술될 수 있다:
A. 모든 사실 또는 결과는 그 자신 안에든 밖에든 그 적절한 원인을 가져야 한다.
B. 우주에는 그 자신 안에도 우주 안에도 적절한 원인을 갖지 않는 결과들이 있다.
C. 그러므로 그것들의 존재에 대해, 개별적으로나 전체로서나, 밖에 있는 어떤 존재 안에 적절한 원인이 있어야 하며, 그 존재가 곧 최고 존재이시며 만물의 원인이시다.
우리는 먼저 이 삼단논법의 대전제, 곧 A, 즉 모든 결과는 그 자신 안에든 밖에든 그 적절한 원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의 증명을 고찰한다.
반론 1. 이에 대해 인과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단지 선행(先行)과 후속(後續)에 불과하다는 반론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어떤 후속하는 것들 안에는 특정한 선행하는 것들과의 관계 및 그 안의 능력의 결과인 결과들이 있다는 것을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대답할 수 있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없는 많은 선행하는 것들과 후속하는 것들이 존재함을 인정하지만, 다른 것들에서는 그러한 관계가 있음을 경험이 분명히 가르쳐 준다.
이는 흄과 칸트가 단지 인과 법칙을 우리의 경험에 한정하려고 시도한 정도까지는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1.) 원인이 우리의 경험과 독립하여 존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결과(곧 그 산출을 위해 어떤 능력을 분명히 요구하는 무엇)를 볼 때, 비록 우리가 그 특수한 원인을 경험한 적이 없을지라도, 그것이 그 적절한 원인을 가졌음을 우리가 안다는 것은 명백하다. 실로 과학적 탐구의 가장 중요한 분야 중 하나는 현존하는 현상들의 알려지지 않은 원인들에 대한 탐구이니, 경험이 없이도 우리는 그것들이 적절한 원인의 결과임이 틀림없음을 안다. [그리하여 지질학에서, 암석의 층화, 화석 유물의 존재, 층화의 붕괴된 융기 등은 이에 대한 예시이다. 마찬가지로 천문학에서, 행성의 섭동, 별들의 운동, 별들의 소멸, 태양의 흑점, 그리고 달의 험준한 화산성 상태 등등은 유사한 예시이다. 또한 의학에서, 황열병과 같은 질병의 발생도 그러하다. 인간의 의지나 우연이 외적 원인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워 보였던 사안들, 예컨대 도시의 건설, 혼인의 수 등에서조차, 사회과학은 적절한 물리적 원인을 찾는다.]
(2.) 또한 정당하게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이 점은 증명이 필요 없다는 것인데, 이는 모든 결과가 그 원인을 가져야 한다는 관념이 인간 정신의 직관적 관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처음 지각할 때 일어난다. 그 진리에 대한 확신은 유아기의 가장 이른 단계에서 이미 보인다.
반론 2. 다시, 우리가 이 인과의 관념을 더 멀리까지 밀고 나아가 위대한 제일 원인에 적용해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만일 이후의 결과들이나 사실들이나 존재들이 원인을 가졌어야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라 부르며 그 본성에 있어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경이로우신 이 존재가 어찌하여 그분 자신이 결과가 아니며 그분 자신이 원인을 갖지 않는단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경험은 모든 것이 그 자신 밖에 원인을 가진다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신 안에 원인을 갖지 않는 모든 것만이 그러하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생명의 원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적어도 제한된 정도까지는, 그 전개에 있어 자기-원인(self-causation)이 있다.
(1.) 그리하여 나무는 그 자신의 잎과 꽃과 열매를 내놓는다. 물론 그것은 그 씨앗이 유리한 위치에 심어지고 유리한 환경에 둘러싸여야 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조차, 비록 매우 제한된 방식으로나마, 자기-원인이 있다.
시계의 운동도 마찬가지이니, 그 원인은 그 자신의 기계 장치 안에 있다.
(2.) 이는 우리가 더 높은 형태의 생명에 이를수록 더 뚜렷하게 보인다. 여기서는 그 운동이 자기-원인적이다. 새가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운동이나, 짐승이 그 먹이를 향해 뛰어오르는 운동이 그러하다. 이것의 더 높은 형태는 분명하다. 시계는 그 안의 태엽이 작동하기 전에 밖으로부터의 어떤 작용을 필요로 했으나, 여기서는 어떤 외적인 추동하는 원인도 그 능력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는 사람들의 인도 아래 기계 장치에 의해 움직이는 증기선과, 그 자신의 능력으로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의 운동 사이의 차이로 예시될 수 있다.]
(3.) 이는 사람에게서 한층 더 높은 정도로 보인다. 여기에는 자기-결정적인 의지가 있어, 더욱 확신을 가지고 자기-기원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결과들을 내놓는다. 여기에는 어쩌면 단지 동물로 하여금 맹목적으로 행동하도록 충동하는 한낱 본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통해 그 원하는 대로 행하며, 오직 그 자신의 자기-선택으로 자신이 굴복하는 동기들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의지가 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존재(self-existence)와 독립성, 혹은 그분이 어떻게 원인들의 원인을 그분 자신 안에 가지심으로써 자기-원인적이신지를 우리에게 설명해 준다고 감히 말하지 않으며, 다만 단순히 다음을 주장할 뿐이다. (a) 원인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결과에 대해, 따라서 우리가 제일 원인 또는 최종 원인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외부의 원인을 찾도록 강요하지 않으며, 단지 그 자신 안에 존재와 작용의 원인을 갖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서만 원인을 찾도록 한다는 것이다.
(b)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로부터 다음을 주장할 수 있다. 곧, 만일 생명 없는 흙덩이와 그것으로 지어진 사람 사이에 그러한 차이가 존재하여, 한쪽은 그 자신 안에 전혀 아무런 원인도 아니고 다른 한쪽은 그러한 자기-원인의 능력이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우주를 지으신 위대한 존재에게로 올라갈 때, 우리는 그분이 사람에 대해 그토록 무한히 우월하시어, 그분이 만물의 원인이실 뿐 아니라, 자기-존재하시는 분으로서, 그분 자신 안에 그분 자신의 존재의 원인 혹은 근거를 가지셔야 한다고 기대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위대한 제일 원인이 없을 수도 있고 없다는 것은 누구의 부인도 넘어선다. 그분의 존재에 대해 정신을 만족시키는 것은, 정신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어, 위대한 제일 원인이 자기-존재 혹은 그분 자신의 존재의 원인을 그분 자신 안에 가지신다는 관념이 제시되기까지는, 이 인과의 확신 아래에서 안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참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영원으로부터 유한한 원인들의 무한한 계열이 있었거나, 그러한 계열의 무한한 연속이 있었던 것이 되니, 그 각각은 불가능하면서도 부조리하다.
B. 우주에는 그것들 자신 안에도, 전체로서의 우주 안에도 적절한 원인을 갖지 않는 결과들이 있다.
1. 이는 전체로서의 우주로부터, 곧 현존하는 실체(하나의 실재)로서 논증될 수도 있고, 혹은 그 구성 부분들로부터, 곧 현존하는 실체들(실재들)로서 논증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물질 세계의 현상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눈에 제시되는 그대로, 그것은 사람이 고안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기계 장치보다 더 경이로운 기계 장치이며, 그 자체에 있어서나 그 부분들에 있어서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능력과 기술을 지닌 원인을 요구하는 결과를 나타낸다.
그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 만들어졌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현상들을 설명할 원인은 얼마나 위대한가?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파괴와 갱신과 변형을 동반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친 점진적 발전에 의해 도달되어 현재의 형태에 이른 하나의 성장이라고 주장된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시사하는 모든 증거의 힘을 인정한다.
그러나 결국 이 성장 또한 하나의 결과이다. 그것은 어떤 내재적인 자기-발전의 능력에서 비롯되었거나, 혹은 어떤 외적 원인의 능력과 의지에 의해 산출되었다.
반(反)유신론자들은 그것이 물질의 자기-발전이라고 주장하니, 물질이 이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형태에 형태를 거듭 취해 왔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모든 성장과 생명과 정신이 본래의 무기물의 산물이라는 관념을 포함한다. 그것은 궁극적 분석에서 우리가 물질의 단순한 분자들에 이르며, 이것들의 발전으로부터 이 우주 전체의 구조가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이제 반유신론자들에 의해 사실로 주장되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심지어 한때 분자들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 그것이 단지 몇 개였든, 단지 두 개뿐이었든, 원한다면 단 하나뿐이었든; 온 물질 우주를 모래 한 알의 백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한 점으로 환원시켜 보라, — 그래도 우리는 그 분자 안에, 그것이 그 모든 광대한 가능성과 더불어 어떤 창조적 에너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외에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 하나의 결과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조차 자기-존재하는 원인에 대한 요구가 있다.
그러나 위의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인정해야 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참이라고 가정할 만한 조금의 이유도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니; 이는 우주가 창조된 이래 어떤 물질이 우주에 더해졌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물질은 팽창하고 수축하며, 한 형태를 취했다가 또 다른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소멸의 증거도, 다른 한편으로 증가의 증거도 없다. 그러나 만일 세계가 그 분자 시기에 지금 현존하는 만큼의 물질을 그 자체 안에 담고 있는 만큼의 많은 분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러한 물질의 증가가 있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계에 어떤 성장이나 발전이 돌려질 수 있든, 그 전체는 처음부터, 조직된 형태로든 단순한 분자들로든, 존재해 왔다. 그러나 산출하는 원인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 분자들의 세계-덩어리를, 심지어 단 하나의 분자조차도 설명하는 것이, 오늘날 나타나는 형태들로 창조된 우주를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2.7 The Cosmological Argument (Part 2): Actual Effects in the Universe
2. 이제 외부 원인에 대한 더 나아간 증거로서, 우주 안에서 관찰되는 어떤 실제 결과들을 고찰해 보자.
(1.) 운동. 우주 안의 운동 원리는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우주는 규칙적이다. 그것은 고정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그 운행에는 조화가 있다. 중력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구심 작용과 원심 작용의 원리는 이 운동을 조절할 뿐 아니라, 우주가 스스로 균형을 이루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람이 모방하기 불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로서 보고 인정하면서도 그 원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기계 장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운동은 어디서 온 것인가? 활동성이 없는 물질에는 운동이 없다. 한 조각의 바위나 한 덩이의 흙, 심지어 한 그루의 나무도,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는 한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물질의 이 무활동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유아의 공이 외부로부터 교란되지 않는 한 놓인 자리에 영원히 머물러 있으리라는 것을 알 정도다.
그렇다면 우주의 이 운동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공을 쳐서 주어지는 것과 같은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원과 타원과 포물선을 그리는 일을 포함하는 복합 운동이며, 더욱이 각각을 혼란이나 산란 없이 그 궤도 안에 유지시키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포함하는 운동이다.
평평한 표면 위에 놓인 일만 개의 공이 한 개보다 더 큰 운동의 능력을 가지리라거나, 또는 운동 없이 창조된 그러한 공들의 우주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전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정지해 있지 않으리라고, 누가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것인가가 그 운동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은 모든 운동이 일차적으로 정신이나 의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정신에 의해 영향을 받은 의지의 결과로서 공을 움직인다. 설령 내가 의도하지 않고 우연히 그것을 차서, 그렇게 한 줄도 모른다 하더라도, 이것은 여전히 참이다. 나는 내 몸을 움직이려는 의지를 가졌고, 그 몸이 운동하는 중에 공과 접촉함으로써 공을 움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운동에 앞서 우리에게는 정신이 있고, 이 원자들의 운동에 앞서 방향을 정하는 정신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창조를 위해서뿐 아니라 분자들의 운동을 위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운동이 바람에 의해 일어났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바람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그것 자체가 운동에 의해 산출된 것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운동의 일차적 원인일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운동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가정으로 떠밀려 간다.
그것이 열에서 왔다고 주장한다면, 그 열은 어디서 왔는가? 열 또한 운동의 결과다. 그 존재로 이끈 그 움직임은 무엇이 일으켰는가?
그 운동이 우연의 문제였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우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한 실재가 과연 있는가? 우리는 그 명칭을 여러 가지로 적용하지만, 모든 경우에 사려 깊은 정신은 원인 없고 의지되지 않은 힘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의 "우연"이란 없음을 안다.
그리하여 나는 주사위를 상자에 넣고 던진다. 나는 그 결과로 나온 숫자가 우연에 의해 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 결과가 거기 있는 힘들로부터 법칙 아래 어김없이 따라 나왔음을 안다. 그런데 법칙은 법칙을 세운 자의 정신을 전제하며, 그의 법칙의 결과는 우연에서가 아니라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잠언이 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 16:33.
또한 내가 뉴욕에서 텍사스에서 온 지인을 만날 때, 나는 "우리가 우연히 만났다"고 말한다. 이로써 내가 뜻하는 바는 그 만남이 우리 둘 다의 목적이나, 우리 중 어느 한 사람의 목적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각자를 지배해 온 법칙들을 부인하지는 않으니, 그 법칙들을 통하여 더 높으신 능력의 인도를 받아 우리는 그분이 정하신 대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연이라는 단어의 어떤 용법에서도 우리는 목적의 부재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우연이란 없으며, 그러한 어떤 우연으로도 우리는 우주 안의 운동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2.) 형태와 생명도 우주의 결과들 가운데 나타난다.
물질은 단순히 운동에 의해 그것에 부여되었을 형태와 모양을 지닌 무기물에 그치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생명의 특별한 형태들을 취한다.
무기물과 이 유기적 생명 사이에는 넓은 간격이 있다. 식물 생명의 가장 낮은 형태들에서조차도 운동과 성장, 그리고 흡수하고 증가하며 내어주는 능력이 있어, 자연 안의 새로운 왕국을 보여 준다.
여기서 그 전체 실체가 물질적이며, 식물의 성장이란 이미 무기적 자연 안에 있던 것을 생명 속으로 흡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형태와 생명을 취하는 이 능력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 변화가 오직 하나의 형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형태들은 무수하다. 이뿐 아니라, 일단 어떤 특정한 형태가 취해지면, 그것은 본래의 것 안에서 고정성을 획득할 뿐 아니라, 그 종 안에서 자신과 같은 것을 계속하여 재생산하는 능력을 획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한계 안에서 변이가 있게 하는 어떤 적응의 능력이 있다.
이것이 식물의 법칙이다. 동물에게서는 더 높은 정도로 그러하다.
그렇다면 무기물에서 그러한 유기물로의 이 변화는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이 물질에 내재한 것인가? 그렇다면 물질은 끊임없이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을 그렇게 발전시키는 일에 종사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결정(結晶) 작용에서 보는 바로부터 분명하다. 여기에는 특별한 형태들을 취하는 능력이 물질 안에 있다. 각 종류에서 이것이 이루어지는 법칙은 알려져 있으며, 결정 작용에서의 모양들은 오직 그러한 법칙에 따라서만 취해지고 그 외의 방식으로는 취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적절한 실체들을 그것들의 알맞은 관계 속에 두어 그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 왜인가? 여기서 어떤 물질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 내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다른 형태들을 취할 수 없다. 다른 물질은 이 형태들을 취할 수 없다. 그리하여 물질이 그 자체로서 형태를 취하는 내재적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능력이 오직 특정한 법칙의 작용 아래 어떤 종류의 물질에만 부여되어 있을 뿐, 그것 자체의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그런데도 이 결정 작용의 능력으로부터 물질이 식물 생명과 동물 생명을 둘 다 산출하는 능력이 논증되어 왔다. 최대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물질이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는 그러한 물질이) 어떤 상황 아래에서 (지금 그렇게 작용하는 그러한 상황 아래에서) 식물 생명과 동물 생명을 산출할 능력이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오직 같은 것에서 같은 것으로의 번식과 생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만을 본다. 그러므로 그러한 생명과 형태가 이제까지 물질 단독으로부터 산출되어 왔다고 추론하도록 우리가 허락받는 것은 오직 그러한 방식으로뿐이다. 이것은 여전히, 물질이 이 능력을 가지게 되는 통로가 되는 최초의 형태들의 창조를 필연적인 것으로 남겨 둔다.
자연 발생에 의해 동물과 식물을 산출하려는 여러 시도가 행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지금까지 완전히 실패해 왔다.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을 직접 어떤 수단으로도 산출하지 못하는 이 무능력 때문에, 반신론자들은 이런 관념을 (증거 없는 한낱 관념을) 채택하도록 떠밀려 왔다. 곧 그들이 원형질이라 부르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이 공통의 실체가 식물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명 형태의 밑바탕을 이루며, 그 다양한 변화 속에서 보통의 무기 물질이 마침내 이 원형질에 이른다는 관념이다.
이에 관하여 우리는 다음을 기억해야 한다. (a) 원형질은 무기물로부터 발전된 것으로 발견된 어떤 실체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실체는 아직 발견된 바 없다. 이것은 만일 그러한 실체가 있다면 그것에 주어졌을 이름일 뿐이다.
(b) 그 이름은, 만일 무기물로부터 그렇게 발전된다면 원형질이 그러할 바로 그것으로서, 유기적 생명의 가장 초기 형태들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발견되는 그 실체는 실제로는 유기적 생명의 한 부분이며, 이런 종류의 물질이 생명과 형태가 되는 통로인 번식 또는 생식의 과정에 의해 산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형질이라는 관념 전체는, 유기적 생명의 한계 안에서를 제외하고는, 하나의 허구다.
그러나 이것이 참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보는 최초의 형태들(원형질)이 유기물이 아니라 무기물로부터 직접 나온 결과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다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지금까지 검사된 모든 원형질에는 아무런 변이가 없고, 그 전부가 정확히 동일하며, 조사로 알아낼 수 있거나 물질적 요소들이 지시할 수 있는 한, 원형질의 배종(胚種)은 오직 한 종류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형질의 여러 표본으로부터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생명이 나온다. 그것은 마치 정확히 동일한 씨앗으로부터 밀과 보리와 쌀과 호밀과 옥수수가 나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 보기에 동일한 실체로부터 서로 다른 생명 형태들을, 어떤 것은 식물이고 어떤 것은 동물이며, 또 여러 식물뿐 아니라 여러 동물을 산출하고, 더욱이 한 동물 종에서 취한 원형질이 언제나 다른 종이 아니라 바로 그 종을 산출하도록 변이 없이 그것들을 산출하는, 방향을 정하는 능력은 무엇인가? 만일 이것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유기적 생명이며 종을 번식시키는 법칙들 아래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한낱 원형질이 되어 버린 한낱 물질에 대해서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그 자체에 있어 어떤 점에서도 차이가 없는 실체이며, 따라서 그 결과들의 차이를 위해서는 어떤 다른 방향을 정하는 능력에 빚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형질에서 우리가 가진 것은 자기 발전의 과정 중에 있는 물질이 아니라, 종을 재생산하는 법칙 아래 이미 유기적 형태들로 조직된 물질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법칙은 어떤 점에서도 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를 종 자체의 직접적 창조라는 관념으로 다시 떠민다.
그러나 이것이 참이라면, 우주 안의 형태와 생명의 원리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한 하나님을 말해 준다.
(3.) 정신 또한, 오직 한 하나님의 가정 위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우주 안의 결과들 가운데 나타난다.
인간의 역사 전체는,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의식하고 다른 이들 안에서 경험으로 배우는 그것, 곧 인간 정신의 능력들이 놀랍다는 것을 가르친다.
식물과 동물 안의 본능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왜 덩굴이 휘감는 덩굴손을 내미는지, 또는 식물의 뿌리가 뼛조각을 찾거나 우물물을 향해 뻗어 나가는지, 또는 왜 새들이 남쪽으로 날아가는지, 또는 말이나 개가 사람은 감지할 수 없는 위험을 두려워하는지, 또는 소가 피 냄새에 고통의 울음을 내는지, 또는 벌이 가장 경제적인 모양으로 그 방을 짓는지를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성 없는 짐승들을 그것들의 보호와 행복을 위해 그렇게 구성하셨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반신론자는 이것들이 물질에 내재한 성질들이며, 그리하여 덩굴 안에서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짐승 안에서 작용하는 것은 물질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신이라는, 이렇게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정신은 한낱 본능이 아니다. 참으로 그것은 본능과 크게 다르다. 곧,
(a) 정신은 개별적 의지 또는 목적이다. 본능은 종 전체에 공통된 것이다.
(b) 그 의지 또는 목적은 맹목적 경향이 아니라, 정신적 지각, 사실들의 파악, 논리적 추론, 개인적 상상 등등의 결과다.
(c) 그것의 지배 원리는, 그것의 우세한 동기로서, 다른 이의 욕구가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욕구도 아니며, 심지어 양심이나 지혜의 명령도 아닌, 단지 자기 선택이라는, 개인 자신의 욕구다.
(d) 그것은 흔히 식욕과 욕망과 정념에 반하여 작용한다. 의지는 그 사람이 본능적으로 충동을 받는 그것을 행하기를 거부한다. 이것은 그 능력의 지혜로운 사용에서뿐 아니라 그 능력 자체의 소유에서도, 탁월함의 독특한 표지다. 그것의 지혜로운 행사에서의 가치는 솔로몬의 지혜로운 잠언으로 예시될 수 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16:32.
이것들은 정신이 본능보다 훨씬 우월함이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세부 사항들 가운데 일부다. 그것들은 본능이 물질의 한 성질임을 인정하는 듯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인정에는 아무 이유가 없다. 본능은 동물들을 다스리는 지배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그들 안에서의 성장인가, 아니면 그분이 우리에게 양심을 주시듯 그들의 통제를 위해, 또는 그분이 우리에게 직관적 관념들을 주시듯 그들의 인도를 위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하신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전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장이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어떤 물질 안에는 그러한 성장의 능력이 있고 모든 물질 안에는 없는 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만일 그것이 이 결합된 분자들 중 일부, 또는 이 원형질의 입자들 중 일부의 속성이라면, 어찌하여 모든 물질이 이 성장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어찌하여 그 성장이 모든 것 안에서 똑같이 자신을 발전시키지 않는가?
본능의 현상들에 대해, 한낱 물질 단독으로 그렇게 발전한다는 관념을 거부하지 않는 어떠한 이유도 제시될 수 없다. 다음 중 하나다. 곧
(1.) 이 본능을 싹틔우도록 어떤 분자들에 그 능력이 처음으로 부여되었거나, 또는
(2.) 그것이 동물 생명의 발전과 연관하여 더 직접적으로 주어졌거나, 또는
(3.) 그 동물이 본래 이러한 기능들을 지니고 창조되었고, 그것들이 번식에 의해 그 종 전체에 걸쳐 계속 나타나 온 것이다.
이러한 방식들 중 어느 것에서 비롯되었든, 그 본능의 존재는 조절하고 비롯하게 하거나 창조하는 한 정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정신은 본능보다 여전히 더 높으며, 만일 본능이 물질적 성장으로서 설명될 수 없다면, 정신은 훨씬 더 그러하다. 물질로부터 생명이 발전한다는 가장 집요한 옹호자들조차도, 정신과 그것이 거하는 몸 사이에는 넓은 간격이 있음을 인정하며, 후자가 도움받지 않은 물질의 작품으로서 원형질을 통해 발전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은 정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자신들이 결코 발견할 수 없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만일 정신이 물질적 우주 안에 그 존재의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무한한 정신, 곧 지성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직접적 산물임에 틀림없다. 유대인에게서 기원한 창세기라 불리는 오래된 책이 있는데, 그 책에는 인간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시대보다 훨씬 전에, 그 기원을 탐구하는 자를 만족시켜 왔거나 앞으로도 만족시킬 유일한 설명이 주어져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이것은 신적 경륜의 성취였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등등." 창 2:26 (원문 표기). 그 시대의 어떤 기록자가 사람의 몸이 땅의 무기 물질과 동일한 재료로 되어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 이상하며, 그가 사람의 정신과 영혼에 대해, 물질과의 그 결합과 영혼의 존재를 충분히 설명하는 그러한 기원을 돌렸다는 것은 더욱 이상하고, 가장 이상한 것은, 그가 그 사이의 시대들의 모든 지혜를 지닌 이 세상이 오늘날까지도 더 낫게 만들지 못한, 도리어 그 진리성에 대한 받아들임을 모두에게 강제해 온 그러한 이론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바를 말씀하시고 정신의 참된 기원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닌가?
(4.) 선택될 수 있는 세상의 많은 다른 현상들 가운데, 오직 하나, 곧 양심만이 언급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무엇의 결과인가? 그것은 물질의 결과인가, 정신의 결과인가? 그것은 각 사람 안에 자리 잡고 그의 본성의 한 부분이 되어, 그에게 옳은 것을 행하고 그른 것을 피하라고 명령하며, 그 명령에 대한 불순종에 대해 그를 책망하고 꾸짖고 벌하는 지배하는 능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이론 위에서는 그것의 현존과 그 현상들이 설명될 수 있으나, 다른 어떤 이론 위에서도 설명될 수 없다.
만일 한 하나님이 계시다면, (a) 양심의 토대를 이룰 수 있는, 옳고 그름의 영원한 원리들이 있어야 한다.
(b) 이 원리들에 따라 행할 의무가 있어야 하며, 그것의 불이행은 하나님에 의한 형벌을 수반하고, 양심의 불안에 대한 한 이유가 될 것이다.
(c) 만일 사람을 그 동료들과 더불어 창조하신 한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인류 자체의 행복을 추구하실 것인데, 그 행복은 도덕적 의무들이 무시되면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따라서 이 의무들을 강제하기 위해 각 사람 안에 양심을 두실 것이다.
(d) 만일 한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분은 옳은 것을 사랑하고 그른 것을 미워하셔야 한다. 그분이 양심을 통하여 사람으로 옳은 것을 행하고 그른 것을 피하게 하려 하시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다른 한편으로, 만일 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그렇다면
(a) 양심이 가르치는 것과 같은 옳고 그름이 도대체 있는가?
(b) 우리는 우리의 동료 사람들에 대해 어떤 의무 아래 있는가? 그들에게 우리가 존중해야 할 어떤 권리가 있는가?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만이 그것을 소유할 우리의 권리를 한정하는 것이 아닌가?
(c) 저질러진 범죄들에 대해 사람들을 엄습하는 공포, 곧 이 세상에서의 형벌이 아니라 내세에서의 형벌에 대한 공포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양심은 어쩌면 정신보다도 더 놀랍게 한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한다. 왜냐하면 양심은, 중력의 법칙이 물질적 우주에 대해 하는 것만큼이나, 그리고 그만큼 참되게, 도덕적 우주를 존재 안에 유지시키고 그 방황의 한계를 정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류 안에 생긴 그것의 결함들조차도 그 법칙의 능력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그것의 필요성을 더욱 결정적으로 증명할 뿐이다. 그것은, 오성과 연관하여,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안내자이며, 옳은 것을 강제하고 그른 것을 금하는 권위이며,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복수하는 재판관이기도 하니, 이 모든 것이 동시에 그러하다. 무죄의 상태에서 그것은 그 안내와 권위에 있어 완전하였고, 그 승인에 있어 평화로웠다. 우리의 현재 상태에서 그것은 그 안내에 있어 불완전하며 오직 부분적인 권위와 제한된 처벌 능력만을 가진다. 장차 그것은 죽지 않는 구더기와 꺼지지 않는 불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양심은 어디서 온 것인가? 만일 그것이, 별이 빛나는 하늘이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사람에게, 한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이 사람을 다스리시고, 옳고 그름의 법칙들로 사람을 통치하시며, 죄짓고 불순종하는 자를 벌하시고 순종하며 의로운 자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며, 하나님이 마음에 두신 사자(使者)가 아니라면 말이다.
언급된 우주 안의 네 가지 결과, 곧 운동, 형태와 생명, 정신, 그리고 양심은 우리의 삼단논법의 이 두 번째 요점 [B], 곧 우주 안에는 그 자체 안에도 우주 안에도 충분한 원인을 가지지 않는 결과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A와 B로부터 결론 C가 따라 나온다. 즉, 그러므로 우주와 그 사실들의 존재에 대해, 개별적으로도 또 전체로서도, 외부에 있는 어떤 존재 안에 충분한 원인이 있어야 하며, 그 존재는 최고의 존재이자 만물의 제일 원인이어야 한다.
이 결론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유일한 반론은, 우리의 우주를 만든 그 존재가 그분 자신이 어떤 다른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을 수 있으며, 그분은 최고의 정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분이 그렇지 않다면, 그분을 창조한 어떤 존재가 있어야 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한 걸음 더 뒤로 거슬러 보게 되며, 마침내 창조되지 않았으되 자존성을 가지고 그분 자신이 다른 모든 존재와 사물의 원인이신 한 무한한 존재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인과로부터의 논증에 의해 이 결과로, 그렇지 않으면 유한한 존재들의 무한한 연속이라는 관념의 채택으로 몰아 넣어지는데, 후자는 부조리하며 불가능한 것이다.
2.8 The Teleological Argument (from Design)
후험적 논증들 가운데 나머지는 원인으로부터의 이 첫 번째 논증보다 더 간략하게 제시될 수 있다. 이 논증에 포함된 원리들이 어느 정도 나머지 모든 논증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후험적 논증은 설계로부터의 논증으로, 흔히 목적론적 논증이라 불린다.
이는 다음과 같이 삼단논법으로 표현될 수 있다 :
A. 설계의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은 무엇이든 설계자를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B. 우주는 설계의 증거를 보여 준다.
C. 그러므로 우주는 설계자를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설계는 배열에서든 적응에서든 볼 수 있다. 이 두 측면 모두에서 우주는 설계의 증거를 보여 준다.
그 배열에 있어서는, 특수한 적응에서 그러하듯 그 구체적인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주 전체에 걸쳐 설계를 특징짓는 통일성과 보편성이 그 배열 안에 증거로 주어져 있다.
툴로크 학장의 삼단논법은 이 논증을 간편한 형태로 제시한다. [버넷 현상 논문집(Burnett Prize Essay on Theism), 147면.] I. 질서는 보편적으로 정신을 증명한다.
II. 자연의 작품들은 질서를 드러낸다. III. 자연의 작품들은 정신을 증명한다.
여기서 증명되어야 할 점은 대전제이다. 우주 전체에 걸친 질서와 배열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는 보편적 경험의 문제이다. 또한 이는 모든 과학의 증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질서는 보편적으로 정신을 증명하는가? 우리는 질서가 언제나 배열이 일어나게 하는 법칙으로부터 나오거나, 아니면 직접적인 배열로부터 나온다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질서가 정신을 증명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정신이 그 질서의 원인이며, 따라서 정신은 그 질서에 의해 증명된다. 질서의 기원이 이 두 가지 방식 중 하나에 있다는 것은 보편적 경험의 문제이며,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적어도 그러한 일이 어디서나 참이라고 논증할 수 있다. 이 규칙에는 예외가 없다.
그러나 다시, 우리는 인간 정신의 구성이 다음과 같다는 사실로부터 이것이 참임을 논증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질서의 현상들 가운데서 어디서나 이성적 의지 또는 정신의 작용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으니, * * * 우리의 이성적 본성의 법칙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강제한다. 이 법칙들은 우리가 그러한 현상들에 대한 궁극적 설명으로서 정신에 이르기 전에는 머물러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툴로크, 50면.
앞선 논증에서 원인 작용의 존재를 증명하였으므로, 우리는 여기서도 그 원리들을 적용할 권리를 가진다. 질서는 하나의 결과이며, 모든 결과가 그에 합당한 원인을 가져야 하듯이, 이것은 정신의 결과이므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최고 정신의 존재를 논증한다. 그러한 조화와 배열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것은 오직 최고 정신뿐이다.
끝으로 우리는 질서라는 말의 바로 그 의미로부터 이것을 논증할 수 있다. 만일 질서가 배열을 뜻한다면, 그것은 배열하는 자의 존재를 함축한다. 만일 질서가 계획을 뜻한다면, 이는 그러한 계획을 고안할 정신을 요구한다. 만일 질서가 법칙이나 규율을 뜻한다면, 그 말은 입법자의 관념을 함축한다.
이와 같이 단순히 설계를 질서 또는 배열로 간주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정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러나 설계를 의도된 대상에 대한 적응으로 바라볼 때, 그 증명은 훨씬 더 강력해진다.
여기서도 툴로크의 삼단논법에서와 동일한 논증들이 대전제를 증명한다 — 즉 설계의 표지를 보여 주는 것은 무엇이든 설계자를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소전제의 예증들은 수없이 많으며 설득력이 있다.
1. 식물계에서, 곧 식물의 구조와 배열에서, 그것들이 토양·기후·대기와 맺는 연관에서, 주위의 동물 생명의 필요와 맺는 관계에서, 그리고 양분을 받아들이고 동화하며 대기를 호흡하고 그 기체를 흡수하며 스스로 번식하기에 알맞도록 되어 있는 그 물질적 구조에서 설계가 보인다.
2. 동물계에서, 곧 기후에 대한 적응에서, 양분이 되는 식물 산물에서, 그리고 어떤 동물들에게는 여러 장소에서 생명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모든 동물에게는 그렇지 않게 하는 모든 정황에서, 특히 인간이 모든 기후에 적합하게 되어 있고 그와 함께 있어야 할 동물들도 그와 동등한 다양한 기후에 견딜 수 있다는 특이성에서 설계가 보인다.
3. 또한 설계는 신체의 여러 부분의 형성에서도 보이는데, 특히 눈은 설계의 두드러진 증거들을 보여 준다. 곧 보기 위한 그 구조에서, 운동하는 그 능력에서, 위험에 대비하는 그 본능에서, 그리고 그 보호 장치에서 그러하다.
손과 발에서도 마찬가지이며, 특히 인간의 엄지손가락은 다른 모든 동물에 대해, 심지어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유인원에 대해서까지 인간에게 그러한 우월성을 부여한다. 곧 나무를 베고, 장작을 패며, 옷을 짓고, 기계공의 연장을 사용하는 일에서, 그리고 단순히 짐승의 힘을 능가하는 신체적 능력뿐 아니라 고도의 문명 상태와 긴밀하고도 본질적으로 결부된 수없이 많은 다른 점들에서 그러하다.
이 세상의 생명의 형태들 가운데 천에 천을 곱한 만큼의 특수한 설계의 표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모든 것은 설계자를 증명하며, 그 설계자가 세상과 그 안의 생명의 형태들의 창조자임을 증명한다.
이 모든 것이 능력의 행사를 통해 더 낮은 성취로부터 자라났다고 말하는 것은 헛되다.
오늘날의 개체들에게서 이러한 세부 사항들의 구조가, 가장 일찍 나타난 개체들에게서와 다르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1878년 9월 26일자 「인디펜던트(Independent)」지 18면에는 다음과 같은 표제가 붙은 기사 형식의 광고를 볼 수 있다 :
풍차의 로맨스. 그것이 어떻게 한 조각의 널빤지에서 세계의 진보에 없어서는 안 될 기계로 자라났는가.
그 기사는, 옥수수를 빻기에 충분한 작은 풍차가 필요에 의해 한 조각의 널빤지로 만들어졌고 — 그것이 어떻게 때때로 자라나서 마침내 서부 지방의 가장 훌륭한 풍차 중 하나가 되기에 이르렀는지를 이야기한다.
자, 이제 누구에게든, 그것이 정신이 단계마다 그 과정을 이어가서 최종 결과가 그 완성된 기계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닌 다른 어떤 의미로 자라났다고 말해 보라. 그러면 누가 그러한 터무니없는 소리를 믿으려 하겠으며, 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세상의 설계의 표지들이 정신 이외의 다른 어떤 근원에서 나왔다고 누구에게든 말하는 것 또한 꼭 그와 같이 터무니없는 일이다.
2.9 Providence and Miracles (Third and Fourth A Posteriori Arguments)
3. 또 하나의 후험적 논증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보살핌과 통치의 증거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다.
이 논증은 다음과 같이 진술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 속에서, 또 여러 민족과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다스리고 인도하며 보호하는, 그리고 때로는 지극히 사소하거나 미미한 수단을 통하여 크고 작은 목적을 성취하는 어떤 감독하는 권능의 증거를 인식한다. 이 권능의 작용 속에는 설계하는 목적의 흔적이 추적 가능하게 드러나는데, 그 흔적이 워낙 뚜렷하여, 이것이 단순한 맹목적 힘이나 확립된 법칙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자유 의지의 존재로 말미암아 필요하게 된 그러한 감독을 행사하는 지성적 행위자임을 보여 준다. 만일 우주와 그 거주자들이 순전히 기계적인 법칙에 의해서만 다스려지는 한낱 기계에 불과하였다면 그러한 목적들은 단지 법칙만으로도 확실하게 달성될 수 있었겠으나, 그러한 감독이 없다면 인간의 자유 의지는 그러한 목적의 성취를 가로막을 것이다. 또한 이 감독은 세계의 진보의 특정 단계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정보와 자원을 공급하며, 세계와 그 여러 부분에서 양식과 노동의 평형을 지나침이나 모자람으로부터 보존하는 그러한 감독이기도 하다.
전지(全知)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며 전능(全能)한 최고 정신(Supreme Mind) 외에는 아무도 그러한 보살핌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보살핌이 행사된다는 증거는 곧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이다.
이로부터, 섭리적 보살핌에 대하여 제시될 수 있는 모든 증거가 곧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 논증은 매우 강력하고 결정적이며, 개별 인간들의 끊임없는 증언 속에서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적 기록 속에서도 발견된다.
네 번째 후험적 논증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使者)들이 행한 기적으로부터 나온다.
기적이란 자연의 확립된 법칙을 통해서도, 단순한 섭리적 통치를 통해서도 아니라, 작용하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적인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수행하시거나 일어나게 하시는 비범한 행위 또는 사건이다.
따라서 기적의 행함은 자연보다 우월한 권능의 임재와 작용을 보여 주는데, 그 권능은 다름 아닌 자연의 창조자요 입법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기적은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이다.
이 논증은 기적이 실제로 행해졌다는 증거에 의존한다. 이 사실에 관하여는 우리에게 풍부한 증언이 있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그 증언의 신빙성은, 예컨대 신약성경의 기적의 경우,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만일 그 증언이 신빙성이 있다면 그 사실은 입증된 것이다.
(1.) 증인들이 이해관계가 없는(disinterested) 자들이 아니었기에 신빙성이 없다는 비난이 제기된다.
(a) 그러나 증인에게 이해관계 없음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법정이 이를 요구하였으나, 이제는 보다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모든 증거가 청취되고, 증언된 다른 모든 정황 및 사실과 연관하여 각 부분에 합당한 비중이 부여된다.
(b) 기적의 증인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들이 증언한 사실이 참이라는 가정 위에서가 아니고는,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거짓으로 증언할 아무런 목적도 가질 수 없었다.
(c) 그들은 기적이 행해졌다고 하는 그 시기와 장소에 함께 있었던 무수한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던 때에 자신들의 증언을 공포하였다. 만일 그러한 일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모든 사람에게 믿어지지 않았더라면, 그 사실들은 반박되었을 것이고 증인들은 폭로되었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행한 기적의 경우 특히 그러하였다.
(d) 위에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이 기적들에 관하여 행해진 진술들이 공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인격과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성격의 것이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그 기적을 인정한 의회의 통치자들의 행위에 호소하기까지 하였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면 누구도 감히 그러한 진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증인들 자신이 속았다는 비난이 제기된다.
그러나 많은 기적에 있어서 속임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재앙들에 관하여, 또는 홍해를 건넌 일이나 요단강을 건넌 일에 관하여, 또는 여리고 성벽이 무너진 일에 관하여, 또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하심에 관하여 속을 수 있었겠는가, 등등.
그러나 이성주의자(rationalist)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사건들의 역사는 그 사건들 자체와 같은 시기에 기록된 것이 아니며, 광야의 백성은 그 기록을 결코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다고.
이러한 주장이 구약성경에 대하여는 인정되지 않거니와, 신약성경의 역사에 대하여는 정당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진술들은 목격자들에 의한 것이다. 그들이 물결을 잔잔케 하신 일에 관하여, 한 번은 오천 명을, 또 한 번은 사천 명을 먹이신 일에 관하여,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특히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일에 관하여, 그리고 더욱 놀랍게는 그리스도 자신을 살리신 일에 관하여 속을 수 있었겠는가. 이 사실들을 살펴보는 자는 이 증인들이 속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거짓을 알면서 진술하였든지, 아니면 그들의 증언이 참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3.) 그러나 흄(Hume)과 그 밖의 사람들은, 설령 기적이 행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그것을 본 자들에게만 증거가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어떠한 증언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확신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논증은 이러하다. 자연 법칙의 균일성은 보편적 경험의 문제이며, 우리의 그 균일성에 대한 지식이 워낙 확고하여,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사실의 존재에 대하여는 어떠한 증언도 우리를 확신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역사는 그 반대를 보여 준다. 흄은 그러한 증거가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논증을, 실제로는 이미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는 자연의 균일성에 어긋나 보이는 사건이 많은데, 무지한 정신에게 그것이 그러한 정도는 교육받은 자에게 가장 놀라운 기적이 그러한 정도와 같다. 그러한 일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그 예로는 예고된 일식이나 월식이 있으며, 또한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 조수의 밀물과 썰물, 곧 물이 이처럼 흐르거나 위로 부풀어 오르는 현상이 있다.]
그럼에도 그 사실들에 대한 증언은 기꺼이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진실은 이러하다. 사람들은 반대할 만한 명백한 이유가 없는 한, 거의 보편적으로 자기 동료들의 진실성과 또 일어난 일을 인식하는 그들의 능력을 믿는다. 심지어 낯선 사람들도 이 정도까지는 신뢰를 받는다. 그러나 알려진 청렴함을 지니고, 속일 동기가 없으며, 스스로 속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 어떤 사실을 증언할 때에는, 그것이 아무리 믿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그러한 사람들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이 자연의 균일성에 대한 믿음보다 더 강하다.
[표면의 대부분이 물인 세계가 불로 타 버린다는 것보다 더 놀라워 보일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이전에는 그 열 가운데 아홉이 그러한 일을 믿기 어렵게 여겼을 청중 전체가, 단 한 사람의 과학자의 진술만으로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논증에서 성경의 진술들은 영감된 진리로서가 아니라, 단지 인간의 증언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사용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논증에서도 성경은 그 신적 성격과는 무관하게, 단지 한 권의 책으로서 그 자체의 외견상 가치에 의거하여 다루어진다.
2.10 The Arguments from Scripture and History (Fifth through Seventh A Posteriori Arguments)
5. 다섯 번째 후험적 논증은 우리가 성경이라 부르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는 한 권의 책의 내용으로부터 나온다. 만일 이 내용이 초자연적 기원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자연보다 위에 있는 최고의 정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이 증거는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1.) 성경의 예언과 관련하여서이다. 여러 사건이 그것이 일어나기 오랜 기간 전에, 심지어 수 세기 전에, 성경 기자들에 의하여 예고되고 기록되었다. 그 가운데 많은 것이 그 본질, 장소, 인물, 시기, 정황, 원인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그러한 묘사는, 추측에 의한 지식을 사용하지 않고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를 확실하게 아는 자에게만 속하는 지식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처럼 먼 미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완전한 지식으로부터가 아니고는 달리 생겨날 수 없다.
(2.) 이 증거는 성경의 위대한 중심 인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제시될 수 있다.
성경 전체는 곧 그의 전기(傳記)이다. 인간의 본래 상태와 타락한 상태, 그리고 죄 많은 우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존재의 원인들, 그의 오심을 위한 준비, 그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교리의 점진적 발전, 그의 나라에 대한 예언, 그의 나타나심과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 땅에서 승천하신 후 천국에 보좌를 세우신 일, 성령의 선물, 그의 종교의 능력과 진보 및 죄 많은 우리 인류에게 적합함, 이 모든 것이 가장 놀라운 허구의 창작만큼이나 분명하게 창조적 정신의 결과인,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생애를 보여 준다. 목적의 통일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드러난다. 처음에는 가르쳐지는 바를 흐릿하게만 보고 줄거리의 윤곽을 희미하게만 포착하지만, 우리가 진행해 나아갈수록 그것은 참된 창작으로서 우리 안에서 자라난다. 처음에 흐릿하던 것은 무엇이든 최종 기록에 의하여 밝혀지며, 우리가 그것을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할 때에, 그 완전한 통일성, 군더더기 없는 세부의 정확성, 처음에는 특별한 중요성도 없는 듯 무심코 진술되었던 사실들의 중요성이 먼 미래에 가서 전개되는 모습, 부차적 인물과 사건을 솜씨 있게 짜 넣은 것, 그리고 그것들을 그 충만함 가운데 모두 사용하여 최종적 파국과 그 결과를 이끌어 내는 방식, 주제를 다루는 위대한 힘, 곳곳에 배어 있는 장엄한 단순함, 이 모든 것이, 그토록 수많은, 그토록 서로 다른 능력을 지닌, 그토록 다양한 정황 아래 있던 기자들의 도구를 통하여, 그토록 명백한 통일성을 가지고 한 인격과 사역을 창조하는 한 거장(巨匠) 예술가를 보여 준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정신만이 그러한 인격과 사역을 구상할 수 있었고, 오직 그분만이 그것을 이처럼 인간에게 계시하실 수 있었으며, 또 오직 그분만이 제시된 그 관념을 구현하는 실제 인물과 사건을 창조하실 수 있었음을 선포한다.
(3.) 성경으로부터의 또 하나의 증거가 니치(Nitsch)에 의하여 제시되는데, 그것은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행하는 계시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에 고유하며, 독립적이고 역사적인 그 증거는, 어떤 이들이 지칭하듯이 기적이 아니라, 이사야 40장 9절의 구절의 성취이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 그것은 탁월한 의미에서의 계시이니,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이다(요한복음 14:9)." [니치, 『기독교 교리 체계』, 140면.]
이것은 앞의 논증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앞의 것은 수천 년에 걸쳐 펼쳐진 발전으로부터의 논증으로서, 그 모든 세월과 동시대에 존재하며 인류의 구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인격을 이루어 가신 한 분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에게서 보인 신적 완전함의 증거에 근거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우주 속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본성의 계시는, 거기에 나타난 본성이 그러한 존재에게 합당한 것이므로, 그분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천거한다. 바로 여기에 로마서 1장 20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의 힘이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또한 이와 똑같이 스스로를 천거하면서, 성경의 말씀 속에 제시된 하나님의 성품이 다가오는데, 그 말씀 속에서 그분께서는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자신의 영적 본성을, 그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과 공의와 선함과 진리와 더불어, 또 그 무한한 능력과 지혜와 더불어, 오직 하나님께만 합당한 성품으로 천거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즉시 이렇게 말하게 하신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성품이다. 만일 그분께서 존재하신다면, 그분은 반드시 이처럼 묘사된 그러한 분이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분의 성육신하신 아들 안에서 우리는 이전에는 한낱 이상(理想)으로만 나타났던 것의 구현을 본다. 비록 이 땅에서 가장 명백하게 한 인간으로 나타나셨으나, 그에게서 신적 속성과 성품이 너무도 분명히 드러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빌립에게 말씀하신 그 진실함을 인식하게 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한복음 14:9)
6번째와 7번째 후험적 논증.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위의 논증들에, 물질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유한한 존재들의 무한한 연속이 있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 주는 두 가지를 덧붙일 수 있다.
6. 그 첫째는 역사의 기록이 그토록 짧은 기간만을 다룬다는 사실에 근거한 역사적 논증이다. 만일 인간이 영원토록 살아왔다면, 그 삶의 기록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수천 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어떠한 역사적 기념물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7. 그 둘째는 지질학으로부터의 논증이다. 이 학문은 다음을 가르친다:
(1.)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이 모두 이 지구상에 시작된 때가 있었다는 것.
(2.) 그 시작의 시기가 아무리 무모한 가설을 따른다 하더라도 그 까마득함을 계산해 낼 수 있다는 것.
(3.) 우리가 화석의 잔해를 가지고 있는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 양쪽 모두에 있어서, 적은 수로 시작하여 점차 그 절정에 이르도록 증가하였다가 다시 점차 감소한, 뚜렷이 구별되는 연속적인 속(屬)들이 있어 왔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설령 이 속들 각각의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창조의 증거는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형태의 영원성에 반하는 증거이며, 또 유한한 존재들의 무한한 연속에 반하는 증거이다.
3.1 Reason and Revelation: The Two Sources, and the Five Means of Knowledge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과 우리에 대한 관계를 연구하기에 앞서 그분의 존재를 증명하였으니, 이제는 그분께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알리셨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이것이 곧 우리가 신학을 인식하는 원천을 이루는데, 그 원천은 두 가지, 곧 이성과 계시이다.
이성이란 인간 안에 있는 능력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적 지각을 갖게 하고, 사고와 성찰을 행하게 하며, 사실들을 알게 하고, 그 사실들의 상호 관계를 탐구하게 하며, 그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연역하게 하는 능력이다.
이성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연적 인식 수단에 대하여 행사될 수도 있고, 초자연적 인식 수단에 대하여 행사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이성을 계시와 구별되는 인식의 원천으로 언급할 때에는, 이 기능을 사용하여 오직 자연적인 것과 관련하여 얻은 정보를 의미한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초자연적 가르침으로 전달하시는 지식을 의미하며, 무엇보다도 성경(Bible)이라 불리는 책 안에서 알려진 지식을 가리킨다.
이성은 인간의 모든 인식 능력을 포함하는데, 이 능력들은 정신이 지식을 얻는 통로가 되는 기능들이다. 이 기능들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신의 도구일 뿐이다.
정신 자체는 성경처럼 지식의 본원적 원천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그 합당한 기능들을 행사함으로써 지식을 얻는 도구일 뿐이다. 어떤 지각된 사실들과 관련하여 합당한 사고와 성찰을 행사하지 않고도 존재하는 본유관념(innate ideas)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이 그 기능들을 행사함으로써 지식을 얻는 수단은 다섯 가지이다.
1. 의식을 통하여 얻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와, 우리가 사고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적 생애의 기간 동안 인격적 동일성을 지닌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2. 감각을 통하여, 곧 우리 주위 세계를 관찰하고 경험함으로써 얻는다.
3. 직관적 관념을 통하여 얻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외적 대상으로 말미암아 어떤 원리가 시사될 때, 즉시 그 정당성을 확신하게 된다.
4. 우리 본성의 성향과 본능과 경향을 통하여 얻는다.
5. 자연 속 사건들의 진행을 통하여 얻는데, 이는 그 사건들이 선이나 악으로, 바람직한 것이나 재난적인 것으로 향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3.2 The Imperfection of Natural Knowledge and the A Priori Necessity of Revelation
이러한 다양한 원천에서 얻은 지식이, 인간이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의지하고 있는 단순한 사실들을 인간에게 가르치기에 풍성함은 명백하다. 곧 그 사실들이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빚지고 있고 따라서 경외와 섬김과 사랑을 드려야 할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이 이 의무를 강제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지식은, 그 의무가 이행되지 않았다는 것과, 인간에게 그것을 이행할 성향이 없다는 것을 인간에게 보여 주며, 그 결과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안해하고, 그분을 달래며 그분의 용서와 인정에 대한 어떤 확신을 얻고자 갈망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또한 많은 이들은 인간이 이성만으로도 불멸과 장차 있을 상벌의 상태에 대한 확신에 이른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에게 전달된 정보가 아무리 풍성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방면에서 인간의 지식이 여전히 매우 불완전한 채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인간이 무죄의 상태에 있었을 때조차도 사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유한한 본성과 그를 둘러싼 유한한 조건들로 인해, 그는 여전히 바람직한 많은 사안들에 대하여 무지한 채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전달을 받았으리라고 믿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그러한 전달은 마땅히 계시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불완전함은, 그 후에 무죄의 상태에서 타락함으로써 크게 증대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옳고 그름에 대한 지각이 흐려지고, 옳은 것을 강제하는 양심의 힘이 손상되며, 옳은 것을 행하려는 욕구가 줄어들고, 옳은 것에 대한 편견이 생겨나며, 하나님에 대한 애정이, 비록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더라도, 크게 감소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그분의 뜻을 인식하는 어떤 추가적 원천의 필연성을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 계시의 본성에 관하여 선험적으로(a priori) 논증할 수 있다.
1. 그것은 우리의 다른 모든 지식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한다. 다른 어떤 존재도 그것을 줄 수 없으며, 다른 어떤 존재가 그렇게 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2. 그것은 우리의 현재 상태에 적합해야 하며, 이미 알려진 진리를 확증하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인 인간에게 실천적으로 유익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3. 그것은 오류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그 가르침이 이성의 가르침과 동등하거나, 혹은 그보다 더 큰 확신으로 신뢰될 수 있어야 한다.
4. 그것은 권위를 가지고 와야 한다. 곧 명령하실 권리와 자기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벌하실 권리를 가지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고 또 그 주장을 입증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인간이 그것이 내미는 용서와 평강의 약속과 소망을 확신을 가지고 믿고 신뢰할 수 있도록 권위를 가지고 와야 한다.
5. 그것이 난점과 신비를 동반하리라는 것은 능히 예상할 수 있는 바이니, 이것들은 이성에서 얻은 지식에도 빈번히 따르는 것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계시를 베푸시는 일은 물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그것이 베풀어지기에 앞서, 그것이 반드시 주어질지 아니면 주어지지 않을지를 인간이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있음 직하지 않은 일이 아님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연 안에서 여러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셨다는 사실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우리가 더 나아간 계시를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랄 수 있다.
이에 반대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였으므로 그분께서 우리를 우리의 운명에 내버려 두기로 택하셨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계시가 우리의 죄된 상태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확증하기까지는 참되게 이해되지 못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여전히 베푸시는 은택과, 그분께서 마련해 주시는 그분을 계속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은, 그분께서 아직 우리를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운명에 넘기지 않으셨으며, 우리를 향한 긍휼의 목적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을 매우 있음 직한 일로 만드는 것은, 인간 안에서 보이는 기대, 곧 인간이 하나님을 희생제사로 달래야 할 분, 기도로 나아가야 할 분으로 형성한 관념들 속에서 보이는 기대이다.
3.3 How God Reveals New Truth, and the Attestation of His Messengers by Miracles
이렇게 형성된 기대가 확증되려면,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새로운 진리를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리실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물음이 일어난다.
이 일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언하는 자들은 명백히 경솔하게 말하는 것이다.
만일 그분께서 그렇게 택하신다면, 우리가 직관적 관념을 얻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각 사람에게 새겨 주실 수 있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개인들에게 꿈과 환상으로 계시하셔서, 각 사람으로 하여금 그 환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느끼고 알게 하실 수도 있다. 그분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데 통로로 삼으신 자들은 이와 같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리고 자기를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절대적 확신에 이르렀으니, 하나님께는 인류의 각 개인의 정신 위에 그와 같은 확실성을 일으키시는 일에 불가능함도, 어려움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대개 수단을 통하여 행하시므로, 자신을 소수에게 계시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일반 인류에게 계시하셨다.
그렇다면 유일한 물음은, 그분께서 영감을 주신 사람들이 참으로 그분의 사자(使者)라는 증거를 어떻게 인류 전체에게 주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으나, 그분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행하신 기적으로 그들의 사명을 입증하심으로써 그 일을 행하기로 택하셨다.
이 기적들에 돌려야 할 권위의 정도에 관하여는 사람들의 의견이 갈린다.
어떤 이들은 행해진 어떤 기적이든 그 자체로 그 사자와 그가 가르치는 진리에 대한 충분한 입증이 된다고 가르친다.
또 어떤 이들은, 기적이란 오직 그것을 목격하는 자들에게만 증거가 될 뿐이며, 그때조차도 의심스러운 증거라고 하며, 기적의 참된 목적은 하나님의 권위의 인(印)을 찍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의를 일깨우고 경외심을 불러일으켜, 그리하여 신적 메시지가 합당하게 청취될 길을 예비하는 데 있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계시가 오직 알려진 진리 자체의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본성의 권위만을 가지고 우리에게 임한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의견의 차이 속에서 참된 이론을 신중히 찾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계시 자체보다 더 나은 어떤 원천에서도 그것을 얻을 수 없으니, 그 계시의 가르침이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확증됨이 드러날 것이다.
3.4 The Scripture Theory, and Its Scriptural Authority that Both Doctrine and Miracle Are Required
성경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듯하다. 곧 어떤 새로운 계시에서든 하나님의 선지자는 과거의 어떤 계시와도, 그리고 자연이 전달하는 지식과도 완전히 일치하는 교리를 제시해야 하며, 동시에 기적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온 교사로서의 자기 권위를 확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적이 없으면, 그 새로운 진리는 그것이 단지 인간 이성이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증거를 갖지 못한다. 교리상의 일치는 거짓 기적과 파렴치한 자들의 술책을 막기 위하여 필요하다. 게다가 새로운 진리는 옛 진리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옛 진리를 대체할 수 없으니, 옛 진리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1. 이 이론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결정적이다.
모세는 기적만으로는 결정적이지 않음을 보여 주는 율법을 선포하였다. 신명기 13:1,2,3을 보라.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면서 이르기를, 네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지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이 본문은, 이미 받아들인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교리를 가르치는 자가 행한 기적일지라도, 그 기적을 행한 자의 신적 권위를 믿도록 유혹하지 못하게 하여야 함을 보여 준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이와 비슷한 가르침을 준다. 갈라디아서 1:8.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 사자의 공인된 권위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가르침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기적을 폄하하지 않는다. 모세 시대의 기적들은, 그것을 의심할 여지 없이 신적인 것으로 표시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언급된다. 니고데모는 유대인들이 그 기적들에 부여한 높은 위치를 인정하였다. 요한복음 3:2.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10:25.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성경의 이 이론이, 참된 기적이 신적 능력 외에 다른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반드시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때때로 사용되는 표현은 이러한 해석에 빠질 소지가 있다. 그리고 많은 것이 기적의 정의에 달려 있다. 만일 기적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하여 세우신 고정된 법칙들의 정지라면, 그 정지는 오직 그분의 특별한 허락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을 그 말의 참된 의미로 삼는다면, 우리는 성경이 어찌하여 모세의 기적들과 그리스도의 기적들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는지 이해할 수 있으니, 그 기적들 중 많은 것은 오직 신적 능력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기적'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제한된 의미를 가지지 않고, 마찬가지로 어떤 두드러진 초자연적 사건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기적들과 동일한 수준에 놓을 소지가 있으므로, 만일 그것이 이미 받아들인 진리에 반하는 가르침을 동반한다면, 그렇게 초자연적으로 행해진 것을 좇지 말라고 경고를 받는다.
애굽의 술객들과 관련된 그러한 기적들의 외관상의 실재를 출애굽기 7:11에서 시작하여 출애굽기 8:7에 이르기까지 보라. 또한 술객들이 티끌에서 이를 내지 못하였을 때 표현한 확신을 보라, 출애굽기 8:19,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보라. 마가복음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또한 요한계시록 16:13,14를 보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이렇게 미혹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이는 데 기적과 그에 수반하는 교리, 둘 다를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한다.
3.5 The Scripture Theory Corroborated by Nature, Progressive Revelation, and Infinite Wisdom
2. 오직 이 이론만이, 자연이 우리를 필연적으로 몰아가는 행로와 일치한다.
우리가 어떤 교리의 진리성을 온전히 확신하는 정도만큼, 그 어떤 후속 계시도 우리의 믿음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의심을 품고 있을 때에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이 확고할 때에는, 우리는 흔들릴 수 없다. 이러한 지식에 이른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본성이 순결하고 거룩한 것과 다르다거나, 그분이 마음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를 기뻐하신다거나, 그분이 공의와 거룩함과 선하심과 긍휼과 진실하심에 있어 무한하지 않으시다거나, 그분이 자기 율법에 대한 합당한 만족 없이 죄를 사하시리라는 것을, 그 어떤 기적으로도 납득시킬 수 없을 것이다.
3. 이 이론은 신적 계시의 점진적 성격과 부합한다.
가장 이른 계시는, 그때까지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인도되어 온 자들에게 임하였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시초에 이르기까지도 사실이었으며, 그 경륜에서는 다만 장차 임할 신약 계시의 영광을 위한 예비만이 마련되었다. 그러므로 가르쳐진 진리들은 대부분, 이성으로 발견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들거나, 합당한 시사가 주어졌을 때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안에 드는 것들뿐이었으니, 곧 한 분 하나님의 존재, 창조의 사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도덕적 의무의 법, 죄인들에 대한 형벌, 회개의 의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긍휼, 그리고 대속과 만족을 동반한 희생제사의 법이었다.
새로운 경륜은 그 명료한 가르침에서 더 나아간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를 가르치는데, 이는 그분 안에서의 대표와, 또한 아담 안에서의 대표를 포함하며, 신격(Godhead) 안의 삼위일체 교리, 그리스도의 인격 안의 신비로운 연합, 그리고 그때까지 오직 매우 희미하게만 계시되었던 많은 다른 진리들을 가르친다.
이것들은 그때까지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가르침을 받아 온 자들에게 제시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서 있던 계시가 여러 방식으로 그것들을 예표하였다. 본래 그 계시만으로는 그것들이 발견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이 알려진 바, 그 계시가 새로운 진술들과 부합함이 드러나며, 명료하게 표현된 교리들이 과거에 있던 그것들의 단순한 윤곽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공통의 저자를 가지며 그 신적 계시자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는 마치 이른 시기의 동일한 속(屬)에 속한 동물들 안에, 후에 나타나는 종(種)들 속에서 그 발전을 이루는 배아가 있는 것과 같다.
4. 이것은, 무한한 지혜가 어떤 행로를 고안하였을지 우리가 판단하는 수단과 부합한다.
과거의 진리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확신은, 우리가 그것을 내버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 확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우리는 그보다 더 높은 증거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매우 있음 직하게, 혹은 심지어 확실하게 참일 수도 있는 다른 진술들과 교리들이, 사람들이 스스로 속았거나 다른 이들을 속이려 할 때, 자기에게 계시된 것이라고 하여 가르쳐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증하는 기적을 가져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무엇이 초자연적인 것인지에 관하여, 특히 그 초자연적인 것 안에서 무엇이 피조된 능력의 한계 안에 있는 것인지에 관하여 속을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간계나 악한 영들의 초인간적 능력에 의해 그릇 인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받아들인 진리에 반하는 어떤 교리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3.6 The Relation and Office of Reason with Respect to Revelation
우리가 기술한 바와 같은 계시가 주어지고 또 입증된 후에, 또 다른 물음이 일어난다. 곧 이성이 그것에 대하여 지니는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제시할 수 있다.
1. 이성은 첫째 계시이며, 따라서 그 어떤 다른 계시에서도 전제된다.
2. 이성의 사실들은 그 어떤 후속 계시에 의해서도 부인될 수 없다. 어떤 진리도 다른 진리를 파괴할 수 없다.
그러나 이성의 영역에는 한계가 두어져야 한다. 이성이 판단할 수 있는 교리는 오직 그 영역 안에 드는 것들뿐이다. 새로운 교리가 제시될 때, 이성은 그것이 이전의 지식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판정할 수 있다. 만일 그것과 부합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만일 그것에 반한다면, 그것은 배척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이성 위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머지 계시와 함께 서거나 함께 무너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긍휼 가운데, 초자연적 교리의 계시로써 믿음을 시험하기를 삼가실 수도 있으나, 만일 그분께서 그것을 계시하신다면, 그것은 그 교리 자체나 그것에 수반하는 계시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남부 장로교 평론」(Southern Presbyterian Review) 제1권 1–34쪽에 실린 「이성과 계시」(Reason and Revelation)에 관한 탁월한 논문에서, 손웰(Thornwell) 박사는 이성에 이러한 한계를 두는데, 곧 이성은 자기 자신의 범위 안에서는 유일한 결정자이나, 그 범위를 넘어서는 재판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이성이 교리의 검증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론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옳다. 그것은 다만, 성경이 이성을 결정자로 끌어들이는 정확한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류를 범하는데, 그 방식이란 이성을 과거와 단절된 진리의 재판관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리를 가르치신 여러 시기와 형식에 관련된 결정자로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성은 새로운 계시를, 오직 이성만으로 가르쳐진 진리들로써 판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이전의 계시에서 알려진 진리들로써도 판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계시에 대한 이성의 직무는 다음과 같음이 드러난다.
1. 계시가 의지하고 있는 기적들의 증거를 검토하는 것.
2. 계시의 교리들을 과거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그것들이 그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혹은 그것에 반하는지를 인지하는 것.
3. 계시가 하나님의 진리라는 데 대해 주어진 증거에 따라, 그 계시를 채택하거나 배척하는 것.
4. 학문이 제공하는 최상의 빛에 따라, 계시의 내용을 해석하는 것.
4.1 Unity of God — Preliminary, and the Argument from Universal Consent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한 논증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주었다:
1. 인과(因果)의 논증으로부터 — 그분이 자존(自存)하시는 분, 곧 자신의 존재 원인을 자신 안에 가지신 분이라는 것.
2. 설계의 증거와 그분의 영(靈) 창조로부터, 그분이 지성적이며 인격적이고 영적인 존재라는 것.
3. 물질의 비영원성으로부터, 그분만이 홀로 영원하시다는 것.
4. 섭리와 기적으로부터, 그분이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계속하여 다스리고 통치하신다는 것.
이 모든 논증 안에는 그분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속성에 대한 증거가 근거하는 토대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정보는 충분하지 못하며, 더 깊은 검토를 통해 크게 확장될 수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하였으니, 우리는 자연히 그분이 어떤 분이며 누구이신지를 더 알고자 하게 된다.
이는 그분의 본성 혹은 본질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본성과 본질은, 심지어 우리 자신의 것조차도, 오직 그 존재 양식과 그 성질과 그 나타나는 방식을 고찰함으로써만 알 수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과, 그분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신 속성 및 사역에 대해 탐구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앞서 먼저 주목을 요하는 두 가지 주제가 있으니, 곧 하나님의 단일성(유일성)과 하나님의 영성(靈性)이다.
1. 지금까지 도달한 증명은, 적어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소한으로 보아도, 그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실로 한 분 하나님이야말로 그 증명이 요구하거나 그 안에 함축하는 전부이다.
오직 한 분의 제일원인이 필요하며, 오직 한 분의 설계자만이 시사되고, 다른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의존감에서 비롯되는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오직 한 분의 존재이며, 세계에 대한 섭리적 보살핌의 증거를 설명하는 데에도 오직 한 분만이 요구되고, 기적의 경이를 설명하는 데에도 오직 한 분만이 필요하다. 예언과 그리스도 및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담은 성경에도 오직 한 분만이, 그리고 인류의 공통된 동의에도 오직 한 분만이 필요하다.
이 마지막 항목만이 유일하게 외견상 예외로 보인다.
그러나 1. 보편적 동의는 한 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까지만 미친다.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신이 여럿이라고 가정해 왔으나, 하나 이상의 신에 대한 믿음은 보편적이지 않다.
2. 하나 이상의 신에 대한 믿음은 가장 이른 형태가 아니었으며, 도리어 진리가 부패한 결과였다. 이는 신성(神性)의 표상으로서의 대상들 — 예컨대 하늘의 빛들, 혹은 하나님의 신격화된 속성을 표상하는 동물이나 조상(彫像) — 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되었거나, 혹은 죽은 뒤에 그와 같은 것의 대표로 여겨진 사람들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3. 이렇듯 모든 민족의 가장 이른 기록들 속에서 발견되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이교(異敎)의 시대에조차 대다수 지성적인 사람들 가운데 유지되었다. 고대 라틴, 그리스, 페르시아, 이집트에 관하여는 커드워스의 『우주의 지적 체계』 제1권 293~638면을 보라.
브라만교에 관하여는 모리스의 『세계의 종교들』 59면을 보라. 불교에 관하여는 모리스의 책 102~103면을 보라.
고전 저술가들에 관하여는 보온 문고(Bohn's library)에 실린 번역본 11~13면의 키케로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de Natura deorum)의 증언도 보라.
이교 전반의 대중에 관하여는 톨룩의 『이교에 관하여』 23면에 인용된 테르툴리아누스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그들의 정신 가장 깊은 감정 속에서,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거짓 신들을 향해 외치지 않았고, 도리어 '하나님께 맹세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이 진실하듯이',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신전(카피톨)으로 향하지 않고 하늘로 향하였다."
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페르시아인들 가운데 일어난 저 이원론에서조차 참되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에 죄가 존재함과 결부된 선과 악의 투쟁을 알고 있었기에 그러한 이원론을 가졌으나, 이 투쟁의 두 경쟁자보다 우월하신 한 하나님을 믿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단일성 관념을 받아들인 것으로 주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커드워스 제1권 411면 이하 등을 보라. 그러므로 보편적 동의의 논증은 하나 이상의 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4.2 Unity Rendered Probable by Design, the Objection from Evil, and Established by the A Priori Arguments
2.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하나님의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단일성을 매우 개연성 있게, 실로 거의 확실하게 만든다.
제일원인의 단일성과 설계자의 단일성은, 창조와 섭리에서 산출된 결과들 속에서 드러나는 의지 혹은 목적 혹은 설계의 단일성 안에, 필연적이지는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들은, 만일 신이 하나 이상 있다고 한다면, 모든 신의 의지 사이에 적어도 그토록 완전한 조화와 일치가 있음을 보여 주는데, 이러한 조화와 일치는 오직 한 존재로부터 비롯되거나, 혹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온전히 서로 합의하는 여럿으로부터만 비롯될 수 있다.
그러나 의지라는 관념 자체가 선택을 포함하며, 선택은 둘 이상의 것 가운데서 고를 권리와 가능성을 포함하는데, 이는 서로 다른 두 존재 사이의 선택에 있어서 본래적 합의를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선택의 차이가 있어 균일성을 파괴하든지, 아니면 한 의지가 다른 의지에 종속됨이 있어 그 존재들 중 하나에게 최고권을 부여하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한다. 후자의 결과는 그 하나를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의지 혹은 행동의 제일원인으로 만드는 것이며, 따라서 그분만을 홀로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만일 자연의 설계와 사역에 균일성이 있다면, 그것은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신다는 거의, 아니 어쩌면 완전히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 균일성은 다음에서 드러난다.
1. 자연을 구성하는 물질들에서.
2. 이 물질들이 지닌 성질들에서.
3. 그것들이 발현시키는 힘들의 본성에서.
4. 모든 생명체 사이의 설계의 단일성에서 — 곧 물고기, 파충류, 새, 포유류 등, 공기와 물과 땅 어디에 적응하였든, 과거의 화석이든 현재의 살아 있는 유기체이든, 세계 모든 지역에 걸친 그 단일성에서, 그리고 한 종(種)에서는 오직 배아(胚芽)로만 보이다가 그것과 오랜 시간 간격으로 분리된 다른 종에서는 발달된 형태로 나타나는 배아들에서.
3. 세계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유일한 반론은 고통과 재해, 슬픔과 괴로움, 죄책과 죄의 존재, 그리고 자연의 격렬하고 파괴적인 힘들의 존재로부터 일어난다.
1.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님의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a.) 만일 이것들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막으실 수 있었다면, 그것들은 단일성의 결여가 아니라 선하심의 결여를 증명할 것이다.
(b) 만일 이것들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그것들을 막으실 수 없다면, 그것들은 그분보다 더 큰 어떤 다른 존재가 있음을 증명할 것이며, 그렇다면 그 존재가 하나님이 될 것이다.
2. 그러나 이것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증거는 없으며, 또한 이것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a.) 그것들은 그것들과 결부되어 존재할 때 가장 잘 존재하는 어떤 체계의 일부일 수 있다. 우리는 세계의 파괴적인 힘들에 관한 한 이를 부분적으로 본다.
(b.) 우리는 그것들 가운데서 최종적이고 중간적인 선한 목적을 위해 함께 작용하는 흔적을 발견하며, 따라서 그것들은 선하심에도 단일성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안전하게 말할 수 있다.
(c.) 언급된 악들은, 우리에게 알려진 다른 어떤 것들과 마찬가지로 명백히 균일한 일반 법칙 아래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단일성과 완전히 일치한다.
4.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논증들 가운데 어떤 것은 단지 그분의 단일성과 일치하면서 그것을 강하게 시사할 뿐이고, 다른 어떤 것은 그것을 거의 확실할 정도로 매우 개연성 있게 만들 뿐인데, 또 다른 것들은 그 절대적 확실성을 확립한다.
1. 정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관념, 곧 거기에 필연적 존재라는 관념이 결부된 그 관념은, 한 분 하나님, 오직 한 분의 관념이다. 둘 이상의 신이라는 개념은 자기모순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우리의 하나님 관념인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독립적인 존재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험적(아 프리오리) 논증들 중 첫째 논증에 담긴 하나님에 대한 모든 증거는 한 분 하나님, 오직 한 분에 대한 것이다.
2. 필연적 존재의 본성으로부터의 논증(둘째 선험적 논증)에서 일곱째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만 있을 수 있으니, 왜냐하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두 존재는 어떤 면에서도 결코 서로 다를 수 없으며, 즉 그 둘은 하나이며 동일한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연적 존재의 본성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증명한다.
4.3 The Unity of God Confirmed by Scripture, and the So-Called Gods Explained
5. 우리가 지금까지 자연으로부터 제시한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증거들은 성경의 진술들에 의해 풍성히 확증된다.
1.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구절들. 신명기 6:4. 말라기 2:10. "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지 아니하셨느냐." 마가복음 12:29, 32. 갈라디아서 3:20. 디모데전서 2:5. 에베소서 4:6. 야고보서 2:19.
2. 그분 외에는 다른 이가 없고 그분 곁에는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는 구절들. 신명기 4:35, 39. 신명기 32:12. 사무엘상 2:2. 사무엘하 7:22. 열왕기상 8:60. 역대상 7:20. 이사야 44:6,8. 이사야 45:5,6,21,22. 이사야 46:5. 요엘 2:27.
3. 그분과 같은 이가 없고 그분과 비교될 이가 없다는 구절들. 출애굽기 8:10. 출애굽기 9:14. 출애굽기 15:11. 사무엘하 7:22. 열왕기상 8:23. 역대상 7:20. 역대하 6:14. 이사야 40:25. 이사야 46:5. 이사야 45:22. 예레미야 10:6.
4. 그분만이 홀로 하나님이시라는 구절들. 사무엘하 22:32. 열왕기상 19:15. 에스라 1:3. 느헤미야 9:6. 시편 18:31. 시편 86:10. 이사야 37:16. 이사야 43:10, 11, 12. 이사야 45:22. 이사야 46:9. 요한복음 17:3. 고린도전서 8:4, 5, 6.
5. 그분만이 홀로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구절들. 출애굽기 20:5. 출애굽기 34:14. 사사기 13:16. 사무엘상 7:3. 열왕기하 17:36. 마태복음 4:10. 로마서 1:25. 요한계시록 19:10.
6. 다른 어떤 이도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금하는 구절들. 출애굽기 20:3. 신명기 5:7. 이사야 42:8. 호세아 13:4.
7. 이른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분으로 그분을 선포하는 구절들. 신명기 10:17. 여호수아 22:22. 시편 96:4,5. 예레미야 14:22. 고린도전서 8:4, 5, 6.
8. 그분이 참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구절들. 예레미야 10:10. 데살로니가전서 1:9.
(a.) 하나님의 단일성에 관한 성경의 교리는, 이방인의 신들이 그들의 신들로 언급되는 경우처럼 다른 신들을 인정하는 듯이 보이는 표현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사사기 8:33, 9:27, 11:24, 16:23, 24. 사무엘상 5:7. 열왕기상 11:33. 열왕기하 1:2, 16, 그리고 다른 많은 구절들이 그러하다. 신명기 10:17.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신들 중의 신이시며 주들 중의 주시라." 여호수아 22:22.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알리라. 시편 96:4, 5.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민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
예레미야 14:22. 이방인의 헛된 것들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혹은 하늘이 소나기를 내릴 수 있나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고린도전서 8:4, 5, 6. 그러므로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것들을 먹는 일에 관하여는, 우리가 알기로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한 분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느니라. 비록 하늘에든 땅에든 신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어 (이른바 신도 많고 주도 많으나) 우리에게는 한 분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 안에 있느니라.
1. 그러한 신들은 한낱 이른바 신들일 뿐이며, 사람들의 그릇된 관념에 의해 그러한 자리에 높여진 것들이다.
2. 그것들 중 많은 것은 오로지 상상에 불과한 존재를 가진다.
3. 거기에 어떤 상응하는 존재가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들은 한낱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존재함에 있어서, 심지어 권능과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락받는 데 있어서까지도 그분께 의존한다.
4. 이러한 신들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쫓아내신 귀신들과 동일시되는데, 그 귀신들은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에게 복종하였고, 사탄의 천사 혹은 사자(使者)에 불과하며, 따라서 타락한 피조 천사들이다.
사도행전 17:18. 아테네에서 바울을 만난 철학자들 중 어떤 이들이 그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가 이상한 신들(다이몬)을 전하는 자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쫓겨난 귀신들을 가리키는 데 늘 사용되는 그 단어가, 이 그리스인들이 자기들의 신들에 적용하는 데 본디 사용하던 단어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 자신이 그 단어를 이 신들에 적용한 곳들도 있다.
고린도전서 10:20, 21.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우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없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함께 참여할 수 없느니라.
요한계시록 9:20. 이 재앙들로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여, 귀신들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지도 못하는 금, 은, 동, 돌, 나무로 된 우상들에게 절하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더라.
(b.) 모세에게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적용하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있다.
출애굽기 4:16. 그(아론)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가 곧 그가 네게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리라.
출애굽기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노라.
요한복음 10:34,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이 인용은 시편 82:6, 7을 가리킨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엘로힘)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 중 하나처럼 넘어지리로다.
모세를 가리키는 이 구절들에 관하여는, 그 뜻이 명백히, 그가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아론과 바로 앞에 서되, 그분의 권위를 입고서 자기 말에 대한 신뢰와 자기 명령에 대한 순종을 요구할 권리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떤 신적 본성에 참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사신(使臣)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인용하신 시편의 구절에 관하여는, 이것이 높여진 존엄과 강대한 권능의 인정을 가리키기 위한 그 단어들의 은유적 사용이었음이 마찬가지로 명백하다. 그 말씀을 기록한 시편의 제1절에서 이르기를,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그가 신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라고 한다. 이 표현과 제6절의 사람처럼 죽으리라는 위협은, 그것이 단지 은유적으로 신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4.4 The Doctrine of the Trinity Not Opposed to the Unity of God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단일성에 반대되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그 단일성에 대해 올바른 관념을 형성할 수 있게 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 위격(位格)을 제시하는데, 이들은 세 신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이후에 보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단일성은 그분의 본성 혹은 본질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그 본질 안의 위격적 관계들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따라서 신적 본성 혹은 본질은 오직 하나요, 한 존재요, 한 하나님이시되, 그 안에 세 위격이 자존(自存)하시며, 그 자존하심으로 말미암아 각 위격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단일성 교리에 의해, 아버지는 최고의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종속적인 의미에서의 신적 존재일 뿐이라는 아리우스주의(Arian)의 관념을 채택하도록 이끌리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한 위격이시되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의 관념을 가르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옳지 않다. 또한 그것은, 마치 세 사람이 동일한 인간 본성을 지녔기에 하나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처럼, 이 세 위격이 동일한 본성을 지녔기에 하나로 여겨질 뿐 실제로는 세 신이라는 삼신론(Tritheistic)적 단일성을 조금도 가르치지 않는다. 길(Gill) 제1권 183, 184면을 보라. 이 내용은 거기서 요약한 것이다.
5.1 The one God has undoubtedly a spiritual nature
I. 한 분 하나님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영적 본성을 지니신다.
1. 그분은 영들의 창조자이시다. 그런데 영은 존재의 가장 높은 등급이며, 그 창조자는 자신도 그 등급에 속한 본성을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한다.
2. 세계의 창조와 통치는 지혜, 기량, 지식, 목적을 입증하는데, 이것들은 영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영적 본성을 지니고 계셔야 한다.
3. 우리는 모든 불완전함을 배제하고 모든 완전함을 귀속시킴으로써 완전한 존재라는 관념에 이른다. 그런데 영적 본성은 모든 면에서 하나의 완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귀속시킨다.
4. 성경은 하나님께 영적 본성을 귀속시킨다.
이는 하나님의 영에 관한 풍부한 표현 속에 담겨 있는데, 다만 그 표현에서는 삼위일체의 제삼위격을 특별히 가리킨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 돌려지는 모든 지성적·도덕적·정서적 사고와 행위 속에도 담겨 있다.
그러나 그것은 두 곳에서 직접적으로 단언된다. 요한복음 4:24, 곧 우리 주께서 수가의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그분께 예배해야 한다."
또 히브리서 12:9에서는 육신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가 대조된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는 우리를 징계하던 우리 육신의 아버지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들을 공경하였거니와,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지 않겠는가.
또한 사도행전 17:24, 25를 비교하라. "세상과 그 안의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이시므로 손으로 지은 성전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아니하신다"는 등이다.
5.2 The nature of God is exclusively spiritual
II.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영성을 귀속시킬 때, 우리는 단지 그분이 영적 본성을 지니고 계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본성이 오로지 영적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그분께는 물질적 조직이 없으며, 우리가 가진 것과 같은 몸도 몸의 지체도 없고, 모양도 형태도 없으며, 정념도 한계도 없고, 오직 영적 본성만을 지니신다는 것이다.
1. 이것은 그분의 광대하심과 영원하심(시간과 공간에서의 무한성)으로부터 명백하다.
무소부재하고 영원한 존재 양식을 갖는 것은 영적 본성에게는 가능한데, 영은 시간의 연속이나 위치의 특정한 한정을 반드시 갖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필연적으로 물질에 속한다. 물질이 여기를 갖되 모든 곳을 갖지 못함은 필연적이다. 오직 영만이 그 둘, 곧 여기와 모든 곳을 결합할 수 있다. 또한 물질이 시간 속에 존재함도 필연적이다. 우리는 그것이 지금 존재하고, 어제 존재하였으며, 내일 존재할 수 있음을 안다. 우리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이러한 시간의 연속과 차이를 지님을 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시간의 연속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분은 물질적 본성을 가지실 수 없고 순전히 영적이셔야 한다.
2. 그것은 또한 그분의 독립성과 불변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만일 하나님께 몸이 있다면, 그분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는데, 모든 물질은 그처럼 영향을 받고, 움직여지고, 나뉘고, 더해지고,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그처럼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그분은 독립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독립적이신 하나님은 물질적일 수 없다.
또한 만일 그분이 몸이라면 그분은 가변적인데, 모든 물질은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변하시는 하나님은 물질적일 수 없다.
3. 이것은 그분의 절대적 완전성으로부터 증명될 수 있다.
(가.) 소극적으로. 절대적 완전성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우리는 한계나 변화를 허용하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그런데 몸은 한계가 있고 또한 가변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은 몸의 조직을 배제한다.
(나.) 적극적으로. 절대적 완전성에 우리는 지성과 의지와 도덕적 분별의 소유를 귀속시킨다. 그런데 이것들은 몸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몸은 부분으로든 전체로든 절대적으로 완전한 자가 될 수 없다.
4.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물질적 조직의 결함들을 자각한다. 곧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가두는지, 어떻게 고통과 괴로움을 일으키는지, 어떻게 우리에게 감각적 쾌락에서의 기쁨을 부과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 자체로 지식과 능력에 있어 얼마나 무능한지를 자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처럼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조직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리라고는 자연히 믿지 않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의 영적 본성이 놀라운 능력과 역량을 지녀, 지성과 기량과 지혜를 부여받았고, 옳고 그름과 참되고 거짓됨을 알 수 있으며, 선택의 자유를 소유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그러한 본성을 무한한 정도로, 곧 무한한 지성과 기량과 지혜를, 그리고 외부로부터 절대적으로 구속받지 않는 의지를 지니심으로 귀속시킨다.
하나님의 순전한 영성에 관한 이 교리에 표면상 대립하는 것으로 다수의 본문이 있는데, 이것들은 하나님을 몸의 형태 안에 또는 몸의 형태와 함께 표상한다. 이러한 표현은 부분적으로는 비유적이며,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사고와, 오로지 신적인 것들을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 언어의 무능함에 대한 적응으로서 사용된다. 그러한 표현은 신인동형론적이라 불리며, 일반적으로 그러한 것으로 인식되므로 가장 무지한 자에게조차 잘못된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께 몸이 있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초기의 일부 이단자들과 심지어 테르툴리아누스가 그러한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영이실지라도 누가 하나님이 몸이심을 부인하겠는가(Quis negabit Deum Corpus esse etsi Deus Spiritus est)."
무함마드는 하나님 안에 몸의 형태가 있다는 관념을 견지하였다. 후대의 일부 소키누스파도 그러하였으며, 이 관념은 라코비안 교리문답에서 가르쳐진다.
그러한 견해들을 형성함에 있어 그들은 이 본문들에 의해,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성경의 진술에 의해 오도되었다.
5.3 Anthropomorphic passages and four further remarks
다음은 웨스트의 『분석(West's Analysis)』 17-19쪽에 수집된 본문들의 목록이다.
그분을 위치를 가지신 분으로 말하는 본문들. 창세기 4:16. 출애굽기 19:17, 21. 출애굽기 20:21과 출애굽기 33:14, 15.
움직임을 가지신 분으로. 창세기 17:22. 창세기 18:33. 출애굽기 19:20. 민수기 12:5. 민수기 23:4. 신명기 33:2. 사사기 5:4. 사무엘상 4:7. 시편 47:5. 시편 68:7, 8. 에스겔 11:23. 미가 1:3. 하박국 3:3. 스가랴 2:13.
탈것을 사용하시는 분으로. 사무엘하 22:11. (그룹과 바람의 날개, 시편 18:10.) 시편 104:2. 구름과 바람의 날개, 하박국 3:8, 15. 스가랴 9:14.
땅 위에 거하신다고 일컬어짐. 출애굽기 25:8. 출애굽기 29:43, 44. 열왕기상 6:11, 12. 열왕기상 8:13. 역대하 6:2. 시편 132:14. 미가 1:2. 학개 2:20.
사람과 함께 거하심. 출애굽기 29:45. 레위기 26:11, 12. 역대하 6:18. 스가랴 2:10. 요한계시록 21:3.
사람 안에 거하심. 고린도전서 3:16, 17.
얼굴을 가지신 분으로. 창세기 32:30. 출애굽기 33:11, 20. 신명기 5:4. 신명기 34:10. 요한계시록 20:11. 눈. 역대하 16:9. 잠언 22:12. 콧구멍. 사무엘하 22:9, 16. 시편 18:15. 입. 민수기 12:8. 시편 18:8. 입술과 혀. 이사야 30:27. 호흡. 이사야 30:28. 어깨. 신명기 33:12. 손과 팔. 시편 21:8. 시편 74:11. 시편 89:13. 시편 118:16. 이사야 52:10. 하박국 3:4. 손가락. 시편 8:3. 등. 출애굽기 33:21, 22, 23. 예레미야 18:17. 발. 시편 18:9. 음성. 출애굽기 19:19. 출애굽기 20:22. 레위기 같은 곳. 민수기 7:89. 민수기 12:4. 민수기 22:9. 신명기 4:12, 36. 열왕기상 19:12, 13. 시편 68:33. 예레미야 25:30. 에스겔 43:6.
음성, (두려워하는 것으로서.) 출애굽기 20:19. 신명기 4:33. 신명기 5:24, 25, 26. 요엘 2:11. 요엘 3:16. 아모스 1:2. 히브리서 12:19, 26.
웃음을 행하심. 시편 2:4. 시편 69:8.
사람에게 나타나심. 창세기 35:9. 창세기 48:3. 출애굽기 3:6. 출애굽기 19:9. 열왕기상 9:2. 욥기 42:5, 6. 아모스 9:6.
그리하여 그분의 외양이 묘사됨. 출애굽기 24:10. 신명기 31:15. 이사야 6:1. 이사야 60:1, 2. 에스겔 1:1. 에스겔 8:1, 2, 4. 에스겔 43:2. 다니엘 7:9, 10. 요한계시록 4:5.
인간의 형태로. 창세기 18:1. 에스겔 1:26, 27. 요한계시록 4:2, 3.
네 가지 추가 소견,
1. 하나님의 영성은 필연적으로 다음을 함의한다,
1. 그분은 보이지 않으시고 만져지지 않으시며, 곧 몸의 감각으로는 파악될 수 없으시다는 것.
2. 그분은 불변하시고 썩지 않으시며 멸하지 않으신다는 것.
3. 그분은 단순하시며 합성되지 않으신다는 것.
4. 그분은 살아 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며, 지성적이고 도덕적이며 자유롭고 활동적이시라는 것.
5. 그분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다는 것.
2. 하나님의 영성에 다음의 것들이 의존한다.
1. 모든 사건에 대한, 특히 그분의 영적 피조물들에 대한 그분의 지식.
2. 모든 사건에 대한 그분의 통제.
3.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작정하심.
3. 그것 때문에, 그분은 반드시 영적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
1. 몸만의 예배가 아니라,
2. 외적 형식의 예배도 아니라,
3. 겉으로 드러난 봉사의 예배도 아니라,
4. 진정한 정서의 예배이다.
4. 그것 때문에, 그분은 그 예배에서 외적 형상이나 형상물로 표상될 수 없다. 그분은 몸의 감각으로가 아니라 마음의 교제로 나아가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이 있으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의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애굽기 20:4, 5.
6.1 Divine Attributes; Classifications
하나님의 속성이란 그분의 본성을 표시하거나 규정하며 그분의 성품을 구성하는 고유한 특성들이다.
이 속성들은 그분의 본질이나 본성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그 본질 자체인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존재의 근거 또는 원인을 그 본질 안에 두고 있으며, 동시에 그 본질이 존재하는 양태와 본성을 이루는 고유한 특성들이다.
이 속성들이 그분의 본질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서로 다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그분께 속하는 여러 상이한 능력이나 특성 또는 기능들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Hodge 1:369.
그렇게 보는 것은 신적 본성의 단순성을 제거하여 그것을 복합적인 것으로, 따라서 분할 가능하고 가변적인 것으로 만들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속성들이 단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상이한 관념들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그분의 피조물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속성들 사이의 구별에는 하나님 자신 안에 어떤 참된 근거가 있으니,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고 말할 때와 다르게 그분을 관념한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지혜와 공의라는 서로 다른 측면 아래에서 그분을 관념하는 것이 마땅하게 되는 그 무엇이 있음을 뜻한다.
분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는 여러 구분이 이루어져 왔다.
1. 하나는 전달 가능한 속성과 전달 불가능한 속성으로 나누는 것이다.
전달 가능한 속성이란, 제한된 정도로나마 그분이 자신의 피조물에게도 부여하실 수 있는 속성이다. 능력, 지식, 지혜, 사랑, 거룩함 등이 그러하다.
전달 불가능한 속성이란, 그렇게 부여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오직 하나님 안에만 존재하는 속성이다. 광대함, 영원, 불변성을 포함하는 무한성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속성을 배열하여 한쪽과 다른 쪽에 동일한 목록을 부여하는 다른 두 구분으로는,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내재적 속성과 이행적 속성이 있다.
2. 또 다른 구분은 자연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으로 나누는 것이다.
자연적 속성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구별되는 그분의 본성을 기술하는 속성을 뜻하며, 도덕적 속성이란 그분의 성품을 기술하는 속성을 뜻한다.
하지(Hodge)는 이 구분에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도 그분의 능력이나 지식 못지않게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무한성과 영원이 뚜렷이 도덕적인 완전성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도덕적 완전성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다." "자연적이라는 단어의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의미에서, 자연적이라는 용어와 도덕적이라는 용어는 실제적인 구별을 표현한다." Hodge 375:6.
3. 또한 부정적 속성과 긍정적 속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하지 박사는 이 구분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속성들에 대한 지식에 이르는 방식에 따라 속성을 배열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다음의 방식으로 형성한다. (1.) 인과(因果)의 방식, 즉 그분이 산출하시는 결과들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덕을 그 위대한 제일 원인이신 그분께 돌리는 방식이다. (2.) 부정(否定)의 방식, 즉 그분의 피조물에게 속하는 한계와 불완전함을 그분께는 부인하는 방식이다. (3.) 탁월(卓越)의 방식, 즉 무한한 존재에게 속하는 완전성을 무한한 정도로 또는 한계 없이 높이는 방식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 방법들 가운데 하나로 관념되는 속성들은 한 부류에 속하고, 다른 방법으로 관념되거나 그 지식에 이르게 되는 속성들은 또 다른 부류에 속한다. 이 분류 원리가 아마도 가장 널리 채택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단지 두 부류만을 낳는데, 곧 긍정적 부류와 부정적 부류, 즉 하나님에 관하여 무언가가 긍정되는 속성들과 무언가가 부인되는 속성들이다. 부정적 부류에는 통상 단순성, 무한성, 영원, 불변성이 속하고, 긍정적 부류에는 능력, 지식, 거룩함, 공의, 선하심, 진실하심이 속한다." Hodge, vol. 1, p. 375.
6.2 The Simplicity of God
하나님의 단순성.
이 말로써 우리는 그분의 본질과 속성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본성이 단순하거나 복합되지 않은 순수한 영이심을 뜻한다.
이것은 그분의 단일성 이상을 의미한다 — 왜냐하면 후자는 단지 오직 한 분의 존재, 곧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물질이면서 동시에 영이시거나, 어떤 다른 방식으로 복합되어 계시다 하더라도, 그분의 단일성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사람이 단 하나뿐이라면, 우리는 그에게 단일성을 돌릴 것이며, 만일 단 하나만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본질적 단일성을 돌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성(靈性) 이상을 의미하는데, 영성은 단지 그분이 영적이셔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순수하게 영적이셔야 한다는 것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조된 영들이, 예컨대 지성, 영혼, 영이라는 세 개의 구별된 본질로 구성된 복합적인 영적 본성을 가질 수 있다거나, 영적 본성이 영적 영혼뿐만 아니라 영적 몸도 가질 수 있다는 관념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어떠한 합성도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분의 영적 본성은 복합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그분의 속성과 본성조차도, 그분의 속성이 그 본성 안에 본질적으로 내재하여 그 본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여야 하니, 이는 실로 속성들을 그 본성과 하나가 되게 한다.
1. 왜냐하면 합성(또는 함께 결합함)은 분리의 가능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소멸 가능성과 가변성을 포함할 것이며, 그 각각은 절대적 완전성 및 필연적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
2. 합성은 합성되는 부분들이 따로 존재하던 시기를 포함한다. 만일 그러하다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셨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이는 그분 본성의 부분들이 아직 결합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또는 그분이 불완전하게 존재하셔서 그분의 본질적 본성에 후에 더해진 것들을 아직 받지 못하셨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절대적 완전성 및 필연적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
3. 만일 그 부분들이 합성되었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어떤 힘에 의해 이루어졌거나 그분의 본성 안에서의 성장이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외부로부터 더해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독립적이시므로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외적 형태와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것은 그분 안에서 그 기원을 가졌으며, 그분은 그것에 앞서 하나님으로 존재하셨다. 그것들은 그분 안에서의 성장도 아니었으니, 만일 그러했다면 그분은 불변하시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더해진 그러한 어떤 첨가나 그분 안에서의 성장도 절대적 완전성 및 필연적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단순성을 돌릴 때, 우리는 그분의 본성이 너무도 순수하게 또는 단순하게 하나여서, 물질과 영처럼 분리된 실체들로, 또는 심지어 동일한 실체가 서로 다른 형태로, 또는 분리 가능한 속성을 지닌 어떤 실체로 합성되지 않으셨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속성조차도 그분의 본질과 하나이며, 그분이 본질적으로 영적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본질적으로 지혜롭고 선하시며, 거룩하고 공의로우시며, 진실하시고, 전능하시며, 만유에 능하심을 단언한다.
6.3 Infinity of God; His Eternity
하나님의 무한성.
하나님이 무한하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분의 본성이나 본질에 있어서 모든 한계를 그분께 부인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의 유한한 본성도 의식하고 있으니, 그것은 장소와 시간과 능력에 관하여 한계를 지닌다. 부정의 방식으로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에 이를 때, 우리는 그분께는 그러한 모든 한계를 부인하며, 따라서 그분께 시간과 공간에 관한 무한성을 돌릴 뿐만 아니라, 그분의 존재 양태에 있어서, 그분의 능력, 지혜, 선하심, 공의, 거룩함, 진실하심에 있어서 무한한 완전성을 돌린다.
시간에 관한 하나님의 무한성은 그분의 영원이라 불린다. 이로써 우리는 다음을 뜻한다.
1. 그분에게는 시작도 끝도 없으시다는 것.
2. 그분에게는 순간들의 연속이 없다는 것.
이렇게 그분께 돌려지는 존재 양태에 관하여 어떤 관념에 이르기란 어렵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 양태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성에 무엇이 함축되어 있는지 잠시만 숙고해 보면, 우리가 이러한 진술들로 표현하는 관념이 정당하고 참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1.) 그분에게 시작도 끝도 없으시다는 진술에 관하여.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되리라고 말할 때, 한 번 시작된 생명이 결코 완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만큼 똑같이 영원히 뒤로 거슬러 올라가는 생명을 관념하기란 어렵다. 과거는 언제나 완결된 것이며, 완결된 것으로서 측정될 수 있어야 한다. 순간들 또는 날들의 연속으로 존재해 온 것은, 그것이 시작된 어떤 첫 날 또는 첫 순간을 가졌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그 외의 다른 관념을 형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후방으로부터의 영원(eternity a parte post)이라 불리는 영원의 그 구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으나, 그것과 결합되어 무한한 지속을 표현하는 그것의 보충, 곧 전방으로부터의 영원(eternity a parte ante)은, 우리가 참되어야 함을 알면서도 부적절하게 관념되고 또한 부적절하게 표현되었음을 지각하는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정신의 시도된 관념임이 즉각 느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시작이 없으셨음을 알면서도, 그분의 존재 양태가 과거에 있어서, 미래에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 것에 상응하는 그 무한한 지속을 그분이 가지셨던 그러한 양태였을 수는 없음을 보게 된다.
다시. 어떤 기간과 관련하여 어떤 존재가 항상 존재해 왔고 항상 존재할 것이라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그 기간 중에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간 동안 그가 순간들의 끊임없는 연속 속에서 존재해 왔고 또 존재할 것임을 뜻한다. 시작 이후에는 항상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으며, 끝까지는 미래가 있을 것이다. 한 순간이 지나가고 또 다른 순간이 뒤따른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순간들의 연속이 있을 수 없다.
(1.) 왜냐하면 그렇다면 그분이 시작을 가지셨던 것이 되며, 이는 그분의 무한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2.) 왜냐하면 그렇다면 그분은 불변하시지 않은 것이 되니, 어제는 참이 아니었고 내일도 참이 아닐 무언가가 오늘 그분께 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분은 완전하시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날마다 그분께 무언가가 더해질 수 있어서, 그분이 더 나이 들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그분의 능력, 지혜 등등에 증가나 감소가 있게 될 것이다.
스콜라 학자들은 하나님의 영원을 그것이 정지한 점(punctum stans), 또는 항상 정지해 있는 지금(nunc semper stans)이라고 말함으로써 표현하고자 했다. 시인 카울리(Cowley)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올 것도 없고 지나간 것도 없으니, 다만 영원한 지금이 언제나 지속할 뿐이로다."
이것이 우리가 도달하고자 애쓰는 영원의 관념이다. 그렇게 하는 데 있어 우리의 어려움은, 우리가 전방으로부터의 영원(eternity a parte ante)을 관념할 수 없는 것 못지않게 연속 없는 지속을 관념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관념에 있어서는 우리가 다른 경우에서처럼 그 자체로 오류인 어떤 사상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간에 관한 하나님의 존재 양태가 우리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뿐임을 보게 된다.
우리의 존재 양태는 순간들의 연속을 가지며, 기간의 길이가 증가하고, 그 전부를 동시에 소유하지 못하며, 시작을 가졌고 끝을 가질 수 있으며,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도 가진다.
하나님은 연속이 없으시고, 생명의 증가가 없으시며, 그분의 존재 전체를 단번에 소유하시고 영원히 소유하시며, 시작이 없으셨고 끝이 있을 수 없으시며,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직 현재 안에서만 사신다.
이것은 성경의 진술들과 부합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 시제로 말씀되신다.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I am) 하신다. 그분의 이름 여호와(Jehovah)는 신비적으로 이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시편 90편 2절에서,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리하여 우리 주께서는 아버지와의 자신의 동등하심을 선언하고자 하실 때 각각에 대하여 현재 시제를 사용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또한 마찬가지로 그분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신성을 선언하셨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시간과 영원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시간은 영원의 한 부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러하다면 영원은 연속을, 곧 시간 이전, 시간 동안, 시간 이후를 가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실제로는 서로 같지 않은 상이한 존재 양태들이니, 시간은 창조의 기간들과 피조물의 생명을 측정하는 데 적합하다. 참된 영원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에만 속한다.
그러나 시간은 영원의 한 부분이 아닐지라도 영원과 함께 공존한다.
신적 목적을 통하여 시간의 모든 사건은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영원토록 현존해 왔으며, 그분에 의해 그처럼 잘 알려지고 실현되어 왔다. 그리고 시간의 실제적 존재에 있어서, 시간은 비록 영원의 한 부분을 구성하지는 않으나 하나님께 그리고 영원과 함께 실제로 현존해 왔다.
이러한 관계들의 본성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관념은 모호하며, 우리가 그것들을 전하고자 하는 언어는 우리가 지각하고 아는 것조차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이 점에 관하여 장래에 더 나은 지식의 가능성이 있다는 데 대해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문이 없다. 그 어려움은 실제로 하나님의 광대함과 편재(遍在) 사이의 연관에서의 어려움보다 더 크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몸의 현존과 비교한 우리 영의 현존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 함께 편재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하니, 그것들이 존재하는 공간이 그분의 광대함의 한 부분이 아닌 것은, 시간이 그분의 영원의 한 부분이 아닌 것과 같다.
6.4 His Immensity and Omnipresence
시간에 관한 하나님의 무한성에 상응하는 것이 공간에 관한 그분의 무한성이니, 이것은 다음과 같이 불린다
그분의 광대함.
하나님이 시간으로 측정되지 않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간에도 갇히지 않으신다.
공간은 그 한계를 가져야 하는데, 이는 그 존재가 오직 우주와만 같은 정도로 미치기 때문이다. 창조가 없는 곳에는 공간도 시간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창조는 무한할 수 없으며 그 경계를 가져야 하니, 비록 우리에게는 공간의 비존재를 상상하기란 불가능할지라도 그러하다. 우리의 존재 양태에서 공간과 시간은 너무도 필수적이어서, 우리는 그 존재를 함축하는 말들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그 존재를 부인조차 할 수 없다. 그리하여 만일 내가 "우주가 없는 곳에는 공간이 없다"고 말한다면, "곳"과 "없는"이라는 바로 그 말들이 공간이라는 관념을 함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이 창조가 존재하는 기간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공간은 창조가 존재하는 장소임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광대함을 말할 때, 우리가 그분의 영원을 말할 때 그분이 모든 시간 동안 존재하신다는 것 이상을 뜻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분이 모든 공간을 채우신다는 것 이상을 뜻한다.
우리는 다른 경우에서 무한한 시간이라는 가상으로써 그 관념을 표현했듯이, 오직 무한한 공간이라는 가상으로써만 그 관념을 표현할 수 있다.
광대함은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이며, 이에 상응하는 상대적 속성이 있으니 곧
그분의 편재(遍在)이다.
이 말로써 우리는 창조와 함께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관계를 표현한다.
그분은 모든 곳에 현존하신다. 그분은 동시에 모든 곳에 현존하신다.
그분의 현존은 단지 접촉만이 아니라 능력이요 권능이다.
그것은 단지 그것에 대한 그분의 지식이나 그것에 대한 그분의 권능 행사를 통한 것만이 아니라, 그분은 그것을 자신의 본질로 채우신다.
그분은 부분이 부분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신격 전체가 창조의 각 지점에서, 시간의 각 순간에 온전히 나뉨 없이 현존하신다.
다음의 귀중한 문답은 하지의 『신학 개요(Outlines of Theology)』 신판 141면에서 취한 것이다.
"신적 현존의 상이한 양태들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여러 양태로 어떤 장소에든, 또는 어떤 피조물과 함께 현존하시는 것으로 관념될 수 있다. 첫째, 그분의 본질에 관하여, 둘째, 그분의 지식에 관하여, 셋째, 어떤 지성적 피조물에게 그 현존을 나타내심으로써, 넷째, 그분의 피조물 안에서 또는 그 위에 그분의 권능을 행사하심으로써이다. 본질과 지식에 관하여는 그분의 현존이 모든 곳에서 그리고 항상 동일하다. 그분의 자기 현현과 권능 행사에 관하여는, 그분의 현존이 서로 다른 경우들에서 정도와 양태에 있어 끝없이 다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으신 방식으로 교회에 현존하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의로운 진노의 현현과 집행 가운데 지옥에 현존하시며, 한편으로는 은혜로운 사랑과 영광의 현현과 전달 가운데 천국에 현존하신다.
그분이 그분의 본질에 관하여 모든 곳에 현존하심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그분의 본질에 관하여 모든 곳에 현존하심은 성경으로부터 증명된다. 열왕기상 8:27. 시편 139:7-10. 이사야 66:1. 사도행전 17:27,28. 그리고 이성으로부터도 증명된다. (1.) 그것은 그분의 무한하심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 (2.) 그분의 지식은 아시는 그분의 본질이요 그분의 행위는 행하시는 그분의 본질이라는 사실로부터, 그럼에도 그분의 지식과 권능은 만물에 미친다는 사실로부터 증명된다.
물체와 피조된 영들과 하나님이 공간에 대하여 지니는 상이한 관계들을 진술하라.
투레틴(Turretine)은 말한다. "물체는 공간 안에 국한적으로(circumscriptively) 존재하는 것으로 관념되는데, 이는 공간의 일정 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사방으로 공간에 의해 경계 지어지기 때문이다. 피조된 영들은 공간의 어떤 부분도 차지하지 않으며 어떤 공간에 의해 감싸이지도 않으나, 다만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다는 식으로 한정적으로 공간 안에 있다. 반면에 하나님은 공간 안에 충만적으로(repletively) 계시는데, 이는 초월적인 방식으로 그분의 본질이 모든 공간을 채우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어떤 공간에도 포함되지 않으시며, 어떤 공간으로부터도 배제되지 않으신다. 각 지점에 온전히 현존하시면서 그분은 모든 공간을 단번에 포괄하신다.
7.1 The Doctrine of Immutability: Its Grounds and Scriptural Proof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분으로 하여금 변화할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그분의 영원에 속한 지속의 측면에서든, 본성·성품·의지·행복의 측면에서든 마찬가지다. 이 가운데 어느 것에서도, 또한 그 밖의 어떤 측면에서도 변화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1. 이는 그분의 절대적 완전성에 함축되어 있다. 완전성은 마치 그분에게 무엇이 결핍된 것처럼 증가하는 것도, 마치 그분이 무엇을 잃을 수 있는 것처럼 감소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변화란 더 나빠지거나 더 나아지는 것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더 나빠지실 수도, 더 나아지실 수도 없다.
2. 그것은 또한 같은 방식으로 그분의 본성의 순수한 단순성에서 비롯된다. 합성되어 있지 않고 합성될 수도 없는 것은 변화될 수 없다.
3. 그것은 성경에서 여러 항목에 걸쳐 명시적으로 가르쳐진다. (a.) 성경은 그분이 생명에 있어서 불변하시다고 선언한다. 창세기 21장 33절.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라 불리신다. 로마서 16장 26절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명기 32장 39, 40절.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내가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내가 영원히 살리라." 시편 55편 19절에서 그분은 "하나님 * * * 곧 옛부터 계신 자"라 불리신다. 또한 시편 90편 1절,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 102편 12절과 시편 9편 7절에서는 "여호와여, 영원히 계시리이다"라는 말씀을 본다. 하박국 1장 12절에서 선지자는 묻는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영원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디모데전서 1장 17절. "영원하시고 죽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는 왕, 곧 홀로 지혜로우시며 참되신 하나님께."
디모데전서 6장 16절.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사람이 능히 가까이 가지 못할 빛 가운데 거하시는도다."
(b.) 성경은 그분이 그분의 본성에 있어서 불변하시다고 선언한다.
말라기 3장 6절.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로마서 1장 23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변하게 하였느니라."
야고보서 1장 17절. "빛들의 아버지께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시편 104편 31절.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로다."
(c.) 그분의 의지에 있어서 불변하시다.
시편 33편 12절.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마음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잠언 19장 21절.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심지어 다른 이들의 의지로부터도 독립적이시다.
욥기 23장 13절. "그러나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d.) 그분의 성품에 있어서 불변하시다.
그분의 공의에 있어서.
창세기 18장 25절. "온 땅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욥기 8장 3절.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이와 유사한 것이 욥기 34장 12절이다.
로마서 2장 2절.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그분의 자비에 있어서.
말라기 3장 6절.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출애굽기 34장 7절. "천대까지 인자를 베푸시며."
신명기 4장 31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시편 107편 1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 23절.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그분의 진실하심에 있어서.
신명기 23장 19절. (원문 표기상의 인용으로)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며,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사무엘상 15장 29절. "이스라엘의 능력이신 이는 거짓이나 후회가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후회함이 없으심이니이다."
로마서 11장 2절.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로마서 3장 3절.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미가 7장 20절.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진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자를 더하시리이다."
디모데후서 2장 13절.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디도서 1장 2절.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로마서 11장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그분의 거룩하심에 있어서.
욥기 34장 10절. "하나님은 결코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하신 이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야고보서 1장 13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박국 1장 13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그분의 지식에 있어서.
사도행전 15장 18절.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곧 하나님께는 창세로부터 그의 모든 일이 알려져 있느니라)."
이사야 40장 13, 14절.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를 공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그에게 지식을 가르쳤으며, 그에게 명철의 도를 보였느냐." 이런 식으로 40장 끝까지 이어지며, 특히 28절에서 "그의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라고 한다.
7.2 Objections from Creation and from God's "Repenting"
I.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하여, 우주를 창조하실 때 그분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이 틀림없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그분이 새로운 목적을 형성하셨음이 틀림없고, 안식의 상태에서 활동의 상태로 넘어가셨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a.) 그러나 이 반론은 그분 안에는 계기(繼起)도 없고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의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데 근거한다. 우주의 창조가 외적인 행위인 것은, 우주가 존재하는 시간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시간 안에서, 그리고 시간과 더불어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시간 그 자체를 제외하고는 시간도 없고 시간의 관계도 없다. 우주의 창조 이전이라는 것은 없었다. 창조 안에 더 이상 시간이 없을 때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그러한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으나, 그 사실이 반드시 그러함은 안다.
이런 까닭에,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어느 한 때에 형성되고 다른 때에는 형성되지 않은 새로운 목적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 목적은, 참으로 그분의 의지 전체는 영원하다. 무엇이 그 목적을 일으켰든 간에, 그것이 이 사실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b.) 그분에게 영향을 미칠 외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분은 전적으로 그분 자신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셨다. 그 의지가 전적으로 자발적이었는지, 아니면 그분의 본성 안의 어떤 필연성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지금 우리가 고찰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둘 중 어느 것이었든, 어느 경우에도 그것은 영원하였으니, 이는 그분의 본성이 영원하다면 그분의 본성의 어떠한 필연성도 영원한 필연성이며, 필연으로든 자발적으로든 그분이 형성하시는 어떠한 목적도 영원한 의지 작용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목적을 상정한 데 근거한 반론에 대해서는 이만하면 충분하다.
안식에서 노동으로의 이행에서 비롯된다는 반론도 똑같이 근거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노동과 수고가 있다고 상정한다. 그러나 창조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물론 이성의 명령도 이를 금한다. 하나님께는 수고로운 일이 없었다. 그런 것은 결코 없으며, 결코 있을 수도 없다. 그분의 무한한 능력은 단지 원하심만으로 그분의 무한한 의지를 성취하신다. 그리고 창조에 있어서 그러하듯, 우주의 보존에 있어서도, 하나님께는 사람이 통치를 유지하거나 그에게 의존하는 자들의 생명을 부양할 때에 따르는 그러한 분주하고 노심초사하는 생각이나 길고 지친 노력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이성에 부합한다. 오직 이 견해만이 모든 지혜와 모든 능력을 지니신, 독립적이고 자존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다.
그것은 성경에 의해 확립된다. 히브리서 11장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3절에 이르는 창조의 기록 전체가 이 진리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경우에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이르시되" 등이다.
시편 33편 9절.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그분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할 때, 그것은 그분이 더 이상의 창조에 관하여 그치셨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우주의 보존은 그 창조와 동일한 능력과 의지의 행사를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II. 또 다른 반론은, 성경이 하나님을 "후회하시는" 분으로 말할 때 그분 안의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창세기 6장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사무엘상 15장 35절.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시편 106편 45절.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아모스 7장 3절.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이르시되,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나 3장 10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사."
이 반론에 대한 답으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곧 이것들은 단지 신인동정적(神人同情的, anthropopathic) 표현으로서, 단순히 죄에 대한 그분의 큰 진노와, 그분께 죄를 지은 자들의 회개에 대한 그분의 따뜻한 인정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하나님 안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서의 행위의 변화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죄는 그들을 그분의 정당한 노여움을 받기에 합당하게 만들었다. 회개는 그들을 그분의 자비의 가능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만일 그분이 그들을 달리 대우하지 않으셨다면, 도리어 그분 안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분의 불변성이, 무죄한 자와 유죄한 자를, 그분께 대하여 스스로 완악해지는 자와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구하여 그분께로 돌이키는 자를 달리 대우하시는 것을 필연적으로 만든다. 이 구절들 가운데 첫째 것에 관한 한, 그것은 단지 인류라는 위대한 종족이 빠져든 그 큰 악함에 대한 항의일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러한 죄와 관련하여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계셨음을 보여 주는데, 그 목적은 처음부터 사람의 타락과, 여러 시대에 그 타락에 수반된 악함의 서로 다른 단계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7.3 Objections from the Answering of Prayer and from the Incarnation
III. 또한, 하나님이 가변적이셔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기도에 응답하실 수 없으리라는 반론이 제기되어 왔다. 만일 그분의 목적이 영원히 서 있고 그분이 그분의 의지를 바꾸지 않으신다면, 기도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기로 약속하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참되다. 또한 기도가 응답되어 왔고, 그리하여 인간 사건의 진행이 만일 기도와 그에 대한 응답이 없었더라면 되었을 바와 달라졌다는 것도 참되다.
그러나 그 오류는, 하나님이 언제나 의도하셨던 바로부터 그분의 목적이나 행위에 변화가 있었다고 상정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 난점은 기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과 관련해서도, 또는 사람을 통하여 새로운 힘이 우주 안으로 도입되는 다른 어떠한 행위와 관련해서도 똑같이 발생한다.
그것은 사람이 자발적 행위자로서 자기 생애의 어느 순간에든 선택에 따라 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 선택은 그의 행위를 우주의 단순한 기계적 운동들 바깥에 놓는다. 이 운동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절대적 통제를 가지시며 그것들에 관한 그분의 목적에 변화가 없다는 것이 인정된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이것이나 저것을 선택할 수 있고, 또는 자기가 원하는 어떤 특정한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다면, 미래의 그만큼이 그의 행위나 의지 작용에 의존하며 그로부터 귀결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그 행위나 의지 작용에 부합하도록 그분의 목적을 바꾸셔야 한다고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곧 설명이 없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경우가 있을 수 없음을 아는데, 이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의 독립성을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분의 의지 작용을 사람의 의지 작용에 의존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자유롭게 두는 그러한 기계적 행위를 자기 편에서 행하지 않고서는 자유로운 행위자일 수 없다는 것이 참되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행위가 그에게 속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를 너무도 온전히 의식하고 있어서, 그 의식이 우리에게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가장 높은 계시가 된다. 그렇다면 기도가 드려질 때, 그 효력이 변하지 않는 하나의 능력이자 힘으로서의 기도에 관한 유일한 의문은, 과연 하나님이 그것에 응답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말씀에서 이것을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셔서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측면에서 기도를 보아야 하는가. 분명히 이 단순한 방식으로이니, 곧 기도는 하나의 이차적 원인으로서, 다른 모든 이차적 원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자리를 가지며, 그러한 다른 원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결과를 산출하는 데 필요하고, 하나님이 우주의 운행 안으로 효력 있게 들어갈 수단을 부여하신 것이며, 그 존재가 다른 어떠한 이차적 원인과도 마찬가지로 온전히 알려지고 의도된 것이고, 그 임함이 결코 하나님을 놀라게 하거나 그분 편에서 어떤 새로운 목적이나 행위를 필요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실 때 그분의 목적을 바꾸시기는커녕, 실제로는 단지 그 목적을 이루어 가실 뿐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어떤 의지나 행위가 마치 우주의 어떤 기계적 행위에 관한 작정이거나 그분 자신의 개인적 목적인 것처럼 하나님께 그토록 확정되고 확실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에게는 완전히 자발적이어서 그가 스스로 선택하는 대로 의지하거나 의지하지 않거나, 행하거나 행하지 않거나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의식과 하나님의 본성이 어떠한가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그것이 반드시 그러함을 완전히 확신한다.
IV.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제이위(第二位)의 성육신(incarnation)의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 안에 변화가 있었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내가 이 반론을 여기서 다루는 것은, 비록 그 설명이 우리가 삼위일체와 그 안에서 신격(Godhead)의 위격들의 관계를 논하기까지는 온전히 이해되지 않을 수 있으나, 우리의 과정에서 그렇게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육신에 관한 성경의 교리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다.
1. 성육신하신 것은 신적 본성이 아니라, 단지 그 안에 자존하시는 위격들 가운데 하나였다.
2. 신적 본성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과 신성은 그분께, 또 서로에게 그렇게 관련되어 있어서, 그분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참으로 사람이시어 각각의 모든 특성을 지니시는 동안, 두 본성은 각각 그 자신의 고유성과 속성을 지닌 채 전적으로 구별된 채로 남아 있었다. 신적 본성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 이후에도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참으로 신적이셨다.
3. 이 본성들이 너무도 구별되어 있었으므로, 사람이 되심에 있어서 아들은 단지 인간의 몸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도 취하셨다. 이것들은 그분이 신적 본성 안에 자존하시는 그 위격과 연합되었으나, 신적 본성 자체와 연합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는 인간의 위격을 제외하고는, 그분을 다른 어떤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게 만드는 데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분은 신적 본성 안에 자존하시는 것과 동일한 위격으로 인성 안에 자존하심으로써, 자신의 인성을 자신께 연합시키셨다.
4. 아들은 우리가 바울과 베드로의 인성을 말할 때의 그 배타적 의미에서 그분의 신적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아버지와 성령으로부터 분리된 신적 본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 인간의 본성은 개개인 사이에 분배되어 있어서,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의 것을 가지며 결코 다른 이와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신적 본성은 세 위격에 공통된다.
이러한 진술들은 성육신의 행위에서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신 까닭을 보여 줄 것이다.
(1.) 만일 인성이 신성에,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그러한 성질·속성·조건들을 더하도록 연합되었더라면,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신적 위격이 자신이 취하신 인성 안에서 소유하실 수는 있으니,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본성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신적 본성을 무한할 뿐 아니라 유한하게, 영적일 뿐 아니라 물질적이게, 무류(無謬)할 뿐 아니라 오류 가능하게, 불멸할 뿐 아니라 가멸(可滅)하게 만들지 않고서는 신적 본성으로 옮겨질 수 없다. 이러한 모순된 상태들은 한 위격 안에는 존재할 수 있으나, 그러한 어떠한 합성된 본성 안에는 존재할 수 없다.
(2.) 만일 신적 본성이 인성의 영혼이 되었더라면,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 본성을 인간의 정념과 욕구에, 인간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에 종속시키고, 고통과 고난과 시험에, 또 선함·지식·능력·지혜에 있어서의 제한에 매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의 참된 교리에 대한 앎은, 그 안에서 하나님께 아무런 변화도 없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 준다.
7.4 The Objection from Christ's Suffering and the Question of Voluntary Suffering
V.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동안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변화 없이 계실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 논변은 다음과 같다.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선언들이 단지 인성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두 본성을 결합한 것에 대해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고난을 당한 것이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도였다고 배운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께서 신적 본성뿐 아니라 완전한 인성도, 곧 단지 인간의 몸만이 아니라 이성적 영혼도 가지셨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이 취한다. 그것은 또한 그분께 인간의 영혼이 없었고 그분의 신적 본성이 이성적 영혼의 자리를 대신하였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입장이기도 할 수밖에 없다.
이 논변에 대한 답은, 성경의 진술들이 신적 본성이 고난을 당하였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에서도 말해지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이 되신 삼위일체의 제이위가 고난을 당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그 고난을 분명히 그분의 인성에만 돌린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분의 본성들과 그분의 위격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그분이 각각에 따로 속한 속성과 성질을 변함없이 보존하셨으며, 이것이 특히 신적 본성에 대해 참되었음을 가르친다. 참으로 신적 본성에서 인성으로의 어떤 전달은 있었으나, 인성에서 신성으로의 전달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구별되어 있으면서도, 그것들은 하나의 단일한 위격 안에 함께 연합되어 있었고, 그러한 연합에 의해, 어느 한 본성에 대해 참되다거나 행해진다거나 고난받는다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연합된 그 위격에 대해서도 단언될 수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신적 본성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인성에서 이를 행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성경의 선언들은, 하나님이 고난을 당하셨다거나 하나님이 이 점에서 변화하실 수 있다는 증거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위의 진술들을 이 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해설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신적 본성의 고난을 단언하는 해석을 필연적인 것으로 주장한다. 참으로 신적 본성이 인간 영혼의 자리에 있다고 보는 자들은 그러한 해석을 견지할 수밖에 없다. 신적 본성의 불변성이 그러한 어떠한 해석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것은 바로 이 두 부류 모두에 대한 답으로서이다. 그들의 입장에 맞서, 하나님이 변하지 아니하시며 그분이 그분의 본성과 그분의 여러 완전성에 있어서 불변하시다고 단언하는 성경의 수많은 진술들이, 동일한 진리를 견지하는 이성의 논변들과 함께 제시된다. 이러한 진술들과 추론들이 너무도 논박할 수 없는 것이어서, 반론자들은 그분의 의지에 반하여 하나님을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떠한 능력이나 존재도 없으며 강요된 고난이라는 관념은 혐오스럽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의 변화와 고난의 가능성이 그분 자신의 의지와 그분 자신의 자발적 선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 편에서의 자발적 고난의 가능성에 관한 물음을 제기한다.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두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로 발생함이 틀림없다. 곧 하나님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한 것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의지가 그분의 본성을 한동안 변화시켜 그것이 고난을 받을 수 있게 만들 능력이 있는 것이다. 첫째 경우에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나, 그분의 의지의 명령에 따라 서로 다른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상정된다. 다른 경우에는 본질 자체가 의지에 의해 변화되어, 그렇지 않았더라면 가질 수 없었을 그것을 할 수 있게 된다.
첫째 경우에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고난을 가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분의 의지의 작용에 매여 있는 그분의 생명의 우연적 조건들로 인하여 고난을 받으실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경우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그분의 의지에 너무도 의존하여 그분이 임의로 그것을 변화시키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견해는 하나님의 의지와 그분의 본성의 관계에 대한 그릇된 관념에 근거한다. 그 관계는 인과적이지 않다. 의지는 본성을 창조하지도, 본성에 그 능력들을 부여하지도, 본성에 통제하는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본성이다. 그분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거룩함과 공의와 선함을 의지하시는 것이며, 또 그분만이 무한히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시기 때문에 이것들을 그분 자신 안에서 의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의지는 인과적이기는커녕 단지 시인적(是認的)이고 흡족해하는 것일 뿐이며, 그분의 본질은 조금도 그 의지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본성은 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임이 틀림없고 그 의지에 의존함이 틀림없을 것이다. 모든 탁월함과 의로움과 거룩함의 기초는 하나님이 어떠하신가가 아니라, 그분이 어느 한 때에 우연히 무엇을 의지하시는가가 될 것이고, 만일 그분이 그분 자신에 대하여 달리 의지하신다면 또 다른 때에는 또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는 변덕스러울 것이니, 의지를 본성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선이나 악으로, 또는 이 방향이나 저 방향으로 향하는 선택의 모든 이유가 제거되고, 그분은 동기 없이 단지 우발적이거나 변덕스러운 의지 작용에만 내맡겨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만일 하나님이 어떤 한 측면에서 이런 종류의 변화를 겪을 수 있으시다면, 그분은 다른 모든 측면에서도 그러하시니, 이는 신적 본성에 하나의 변경을 일으키는 의지의 능력이, 다른 어떤 또는 모든 그러한 변경을 일으키는 능력을 필연적으로 함의하기 때문이다.
7.5 Contingent Conditions Excluded by God's Necessary Existence, Eternity, Simplicity, and Perfection
그러므로 의지가 하나님의 본질을 변화시킬 수 없고 도리어 그 본질에 의해 스스로 통제되므로, 의지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가지지 않으셨을 고난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만일 이 고난의 능력이 신적 본성에 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신적 본성에 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필연적으로 그리고 항상 속하는 하나의 성질임이 틀림없고, 따라서 성경에서 하나님께 그토록 충만하고 탁월하게 돌려지는 그 복되심을 파괴하는 것임이 틀림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로 인해 우리가 행복의 상태에서 고난의 상태로, 다시 행복의 상태로 옮겨 갈 수 있는 우리 생명의 우연적 조건들의 방식을 따라 그 안에 존재함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이 이 상태들 가운데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겨 가는 것은 신적 의지 작용의 행사의 결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러한 우연적 조건들이 있을 수 없다.
1. 그분의 필연적 존재의 바로 그 본성이 그것을 금한다. "나는 변하지 아니하나니"와 "그에게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라는 성경의 표현은 그러한 상정에 명시적으로 반한다.
2. 변화에 관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대조는, 사람 안에 있는 그 우연성에 분명히 근거하는데, 하나님께는 그것과 유사한 것이 전혀 없다.
3.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신실하심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변할 자리에서,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이는 그분이 확고하고 한결같으시기 때문이다—바로 그 행사의 사실로 인하여 더욱 크게 드러난다. "나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의지가 변화를 유도하리라고 추정될 만한 문맥에서 제시되며, 이것이 그분의 본성이라는 단언은 어찌하여 그 의지가 그분께 그렇게 작용하지 않을 것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 이루어진다.
4. 이 모든 것에 더하여, 그러한 우연적 조건이나 상태는 그분의 영원의 본성과 양립할 수 없으니, 영원은 계기(繼起)가 없는 것으로서 변화를 배제하며, 또한 그분의 단순성과도 양립할 수 없으니, 단순성은 그분의 본질과 그분의 속성 사이의 분리를 부정하고 따라서 변화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한편 그러한 조건이나 상태는 하나님의 완전성에 의해 절대적으로 배제되니, 만일 그분의 존재의 상태나 조건이 변화될 수 있다면 완전성은 그분께 언제나 단언될 수 없기 때문이다—다만 이 모든 상태에서 그분이 모든 면에서 똑같이 완전하실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그것은 행복과 고난이라는 두 상태에 대해서는 분명히 단언될 수 없다.
8.1 The Nature and Definition of the Power of God
우리는 능력에 대한 지식을,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 또는 의도에 대한 의식과, 그 목적을 실제로 성취하였다는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하여, 우리의 의지는 우리에게 알려진 어떤 수단의 개입도 없이 직접 작용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팔을 움직이려고 의지하면 팔이 움직이지만, 신경의 작용이나 근육의 운동에 어떠한 필연성이 있든 간에, 우리는 이러한 것들과 우리의 의지 사이에 그러한 연결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다만 의지가 이것들을 작동하게 한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다른 물질적 대상들에 대하여, 우리는 오직 우리의 몸과, 접촉을 위한 그 밖의 필요한 수단들을 통해서만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은 우리에게, 정신이 그러한 접촉 없이도 다른 정신에 작용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비록 이것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물질적 구조에 작용하고 또 다른 정신들에 작용한다는 사실은 또한, 우리가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몸에 작용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정신이 어떤 미묘한 연결을 통해 외부의 물질에 작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오늘날의 심령론적 이론들의 증거로 잘못 사용되어 온 여러 기이한 현상들이 아마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 어떠하든 간에, 그 능력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는가에 관해서도 한계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 때에는, 우리는 그러한 모든 한계를 배제하여야 한다. 그분은 전능하실(전능자) 뿐만 아니라, 도구적 접촉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시는 많은 일을 도구적 접촉의 성격을 띠는 이차적 수단들을 통하여 이루신다. 그렇지만 그러한 행위는 그분에게 있어서 필연성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직접적인 행위로도 그만큼 완전하고 그만큼 쉽게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시는 그분의 경륜적 방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능력은, 그분이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게 하는, 그분의 본성에 내재한 효력 있는 에너지로 정의될 수 있다. 그 능력의 행사는 그분의 의지 또는 의도에 달려 있으며, 그분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무엇을 하기로 택하시는가에 의해 한정된다.
8.2 Grounds for Ascribing Power to God and Scriptural Proof
우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린다.
1. 능력의 소유가 우리 안에서 하나의 완전성임을 우리가 인식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것은 온전히 완전하신 존재께 돌려져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우주의 존재와 현상을, 그것들을 산출한 능력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우리 자신의 의존감(依存感)이, 우리가 그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는 그분 안에, 우리를 창조하고 보존하며 보호할 능력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기 때문이다.
4. 성경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께 능력을 돌리라고 가르친다.
(a.) 다음과 같이 그분께 능력을 직접적으로 돌리는 구절들에서이다. 예레미야 32:17. "아 ! 주 하나님이여, 보소서 주께서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지으셨사오니, 주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나이다."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에베소서 1:19. "또한 그분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그분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에베소서 3:20. "이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수 있는 그분께."
(b.) 그분의 무한한 일들을 언급함으로써이다.
예레미야 10:12. "그분은 그분의 능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분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으며, 그분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도다."
요한복음 1:3.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분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도행전 17:24. "세상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
(c.) 그분이 행하시는 것은 단지 의지에 의하여, 수고 없이, 그분의 말씀으로 행해진다고 선언함으로써이다. 창세기 1:1에서 창세기 2:3까지, 곧 창조의 전체 기사에서와 같다.
시편 33:9. "그분이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그분이 명령하시매 굳게 섰도다."
(d.) 거대한 수단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그분이 행하시는 것은 많은 것으로든 적은 것으로든 행해질 수 있다고 단언함으로써이다.
사무엘상 14:6. "많은 사람으로든 적은 사람으로든, 구원하시는 데에 주께는 막을 것이 없느니라."
역대하 14:11. "주여, 많은 자로든 힘없는 자들로든, 돕는 것은 주께 아무것도 아니니이다."
(e.) "손," "하나님의 오른손," "강한 손," "팔," "짧지 아니한 팔"과 같은 비유적 또는 의인적(擬人的) 표현들로써이다.
출애굽기 15:6. "오 주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스럽게 되셨으며 ; 오 주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산산이 부수셨나이다."
민수기 11:23. "주의 손이 짧아졌느냐?"
여호수아 4: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주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느헤미야 1:10. "주께서 주의 큰 능력과 주의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자들이니이다."
욥기 40:9. "네게 하나님과 같은 팔이 있느냐?"
시편 98:1. "그분의 오른손과 그분의 거룩한 팔이 그분께 승리를 가져다 드렸도다."
이사야 50:2. "내 손이 조금이라도 짧아져서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이사야 59:1.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니라."
8.3 Absolute and Actual Power, Its Limitations, and the Problem of Sin
하나님의 능력은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다.
I. 절대적(Absolute) 능력. 이는 그분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에 상응하며, 그분의 본성에 의해 가늠된다.
II. 실제적(Actual) 능력. 이는 그분이 무엇을 행사하시는가이며, 그분의 의지에 의해 가늠된다. 그것은 그분에 의해 실제로 작동되는 것이다.
크납(Knapp)은 절대적 능력과 질서적 능력으로 구분하는데, 절대적 능력은 그분이 무(無)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신 능력이라 하고, 질서적 능력은 그분이 정하신 법칙에 따라, 곧 식물과 동물 등의 산출에서처럼 이차적 원인을 통하여 계속해서 창조하거나 산출하시는 능력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능력의 서로 다른 행사 방식들일 뿐, 서로 다른 종류의 능력은 아니다.
우리의 능력은 세 가지 점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다르다.
1. 우리는 우리가 택하는 것을, 그것이 옳은 일일지라도, 무엇이든 다 행할 수는 없다.
2. 우리는 그것을 중간 수단 없이는 행할 수 없다.
3.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원하는 어느 순간에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상황이 유리할 때에만 행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한계들에 종속되지 않으시지만, 그분 또한 그분의 능력에 있어서 한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한계들은 밖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본성의 탁월성과 완전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한계들은 그분의 의지와 일치하며, 그 의지는 그분의 본성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결코 행하고자 할 수 없다.
1.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본질적이며 전달될 수 없는 속성들, 즉 영원과 광대함을 포괄하는 무한성, 그리고 자존성(自存性)이 부여될 수 있는 어떤 존재나 세계를 창조하실 수 없다.
2. 그분은 본성이 죄악된 존재를 창조하실 수 없다.
3. 그분은 의와 거룩함에 부합하지 않는 법을 부과하실 수 없다.
4. 그분은 자신의 피조물 중 어느 것이라도 불의하게 다루실 수 없다.
5. 그분은 죄를 범하실 수 없다.
6. 그분은 자신의 본성을 바꾸실 수 없다.
7. 그분은 자신의 작정이나 의도를 바꾸실 수 없다.
8. 그분은 불가능한 일들을 행하실 수 없다.
만일 그분이 어찌하여 이러한 일들 중 아무것도 행하실 수 없는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분 자신의 본성이 그분에게는 그분이 행하시는 것의 법일 뿐만 아니라 그분이 의지하시는 것과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의 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의지하시기 때문에 의롭고 거룩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에 의롭고 거룩하기를 의지하신다. 그분의 의지가 그분의 본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분의 본성이 그분의 의지를 다스린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한 가지 외견상의 반론은 우주 안에 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 그리고 심지어 선하심은, 죄가 하나님께 아무래도 상관없는 어떤 것으로서 창조되거나 허용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분은 죄가 나타나는 곳마다 그것을 미워하시고 그것을 벌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죄의 존재는, 그분이 그것을 막으실 수 없었다는 사실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분이 어떤 지혜로운 목적을 위하여 그것을 허용하셨기 때문이다.
그 지혜로운 목적이 무엇인지는, 악의 존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리에서 마땅히 제시되어야 한다.
죄의 존재가 하나님의 능력의 부족 때문이라기보다 그러한 목적 때문이라는 것은, 그분이 그것을 막으실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1.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들을 창조하지 않으심으로써.
2. 그들이 죄로 이끌 만한 상황에 놓이도록 허락하지 않으심으로써.
3.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그들을 붙드시고 견고하게 하사, 유혹을 막아 내고 그들이 죄짓지 않도록 지키심으로써.
4. 그리고, 이 반론이 죄의 기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죄의 지속적인 존재에 대한 것이므로, 죄지은 자들을 즉각 멸하심으로써.
그러나 죄의 존재는 하나님 안에 능력이 부족함을 보여 주기는커녕, 도리어 그 능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데에 이바지하여 왔다.
1. 죄 자체에 대하여, 죄를 멸하시고 벌하심으로써.
2. 죄의 최종적 희생자들에 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분의 진노의 무서운 능력을 느끼고 인정하게 하심으로써.
3. 다른 이들에 대하여, 그분의 능력을 통한 그들의 두드러진 구원으로써, 곧 형벌로부터뿐만 아니라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으로써.
4. 죄 자체 안에서, 하나님께서 악 그 자체로 하여금 자신의 선과 영광의 목적들을 이루어 내게 하시는 그 억제하시고 정복하시는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9.1 God is an Intelligent Being, and the Manner of His Knowledge
하나님은 지식을 소유하신 지성적 존재이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증명될 수 있다.
1. 그분의 영성으로부터 증명된다. 지성은 영적 존재의 본질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2. 그분의 완전성으로부터 증명된다. 완전한 자는 그 완전함 가운데 하나로서 지성을 반드시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3. 다른 존재들에 대한 그분의 인과적 관계로부터 증명된다.
(1.) 다른 존재들 안에 있는 정신적 능력과 활동의 원인으로서, 그분 자신이 반드시 정신을 소유하고 계셔야 한다. 성경이 적절하게 묻는 바와 같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 그러므로 우리 또한 물을 수 있다. 정신을 만드시고 사고와 지식의 능력을 주신 그분이 지성을 결여하고 계시겠는가.
(2.) 그분이 산출하신 결과들은, 그것들이 그분이 형성하신 목적의 성취에 있어서 의식적 활동의 산물임을 보여 준다. 그분의 인과 작용은, 맹목적인 생산성으로 작동하거나 자신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미리 정해지지 않은 목적들을 향해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기계적 힘이나 화학적 힘의 인과 작용과 같지 않다. 이러한 것은 이차적 원인들에는 가능한데, 그것들은 그 자체로 지성적이며 목적을 가진 어떤 다른 원인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과 목적은, 위대한 제일 원인이시며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의 으뜸가는 동인이자 설계자이신 그분 안에 필연적으로 현존한다. 그러므로 창조 가운데 있는 모든 설계의 증거들은, 그 창조에 대해 제일 원인의 관계를 지니시는 그분의 지성을 증명한다.
(4.) 때때로 그분의 편재(遍在)로부터 논증되기도 하는데, 그러나 편재만으로는 지성을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지성이 일단 확립되고 나면, 그분의 편재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지식의 범위를 결정할 수 있게 해 준다.
하나님은 어떻게 아시는가? 곧 그분은 어떤 방식으로 지식을 소유하시는가?
1. 우리가 지식을 획득하기에 적합한 기능들을 사용하여 그것을 얻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시는 것은 아니다. 그분 안에는 관찰, 비교, 일반화, 연역, 곧 우리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나아가는 추론의 과정들에 상응하는 것이 전혀 없으며, 또한 우리가 사실들을 설명하고자 할 때 동원하는 가정이나 이론들에 대한 숙고나 추측에 상응하는 것도 없다.
2. 흔히 그렇게 하듯이 그분이 직관에 의해 아신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적절하다.
3.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그분의 지식이 곧 그분의 본질 혹은 본성이 아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획득된 어떤 것이 아니라 그 본성 자체에 속하고 그것과 동일한 어떤 것이니, 이는 그분의 사랑과 진리와 공의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분의 본성에 너무도 본유적이어서, 우리가 활동이라 부르는바, 그것을 획득하거나 지각하는 어떠한 수단과도 무관하게 존재한다.
4.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식은 획득된 것이 아니므로 증가될 수 없다. 시간이 그것에 더해 주지 못한다. 사건들의 연속이 그것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오지 못한다. 그분의 지식의 모든 대상은 그분께 영원히 현존하며 알려져 있다.
9.2 The Objects of His Knowledge, and His Knowledge of Future Events
그렇다면 그분의 지식의 대상들은 무엇인가.
1. 그분 자신, 그분의 본성 또는 본질이다. 곧 그 본질 안에 존속하는 위격적 관계들, 그 본성이 무엇이며 그 발현 가운데 어떠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의 전부, 하나님의 작정이 포함하는 모든 것, 그리고 행해지든 허용되든 그분에 의해 작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2. 그분의 창조 세계 전체로서, 그 충만함의 전부, 그 전 범위에 걸쳐, 그것이 크기로든 미세함으로든 다양함으로든 표지되어 있든 그러하다. 무수한 세계들을 거느린 온 우주가 항상 그분 앞에 있으며, 동시에 한 티끌의 원자도, 또 감각을 지닌 존재 중 가장 미세한 것조차도 철저히 지각되지 않는 것이 없다.
3. 단지 무생물적 물질이나 단순한 동물적 본성뿐 아니라 모든 영적 존재들도 그러한데, 그분은 그것들 자신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그것들의 본질을 아시며, 그것들의 마음의 의도와 생각을 완전하게 지각하신다. "탈레스가 사람들의 행위 중 일부가 하나님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그들의 생각조차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크납의 신학. 영감받은 한 기자(記者)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우리를 아신다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 3:20) 그분의 지식은 영적 존재들의 발현과 작용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것들의 본질에까지 미치며, 그것들이 무엇인지뿐 아니라 그것들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가리키는 그 경향들까지도 포함한다.
4. 그분은 모든 것의 과거, 현재, 미래 전부를 아시며, 현재와 과거를 아시는 것과 동일한 확실성과 정확성으로 미래를 아신다. 그 미래는 이미 그분께, 마치 피조물들과 함께, 그리고 거기에 속한 시간과 함께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현존하며, 또 그때 지각될 것과 똑같이 분명하게 지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 사건들에 대한 그분의 지식에 관하여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그분은 확실하거나 고정된 모든 사건을 아신다. 그것들이 일어나리라는 확실성은 그분의 작정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그분은 일어날 모든 일을 아신다.
2. 그분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을 아신다. 이것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그분의 무한한 지식에 근거하는데, 이 지식에 의해 어느 때든 또 어떤 상황 아래서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물 또는 사건이 그분께 알려져 있다.
이 두 부류에는 지식의 모든 대상이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9.3 Scientia Media (Middle Knowledge): The Two Less Harmful Forms Examined
크납은 제3의 지식, 곧 우연적 사건들, 혹은 특정한 상황 아래서 일어날 수도 있는 사건들에 대한 지식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만일 제임스가 자라기까지 산다면 그가 살인을 저지를 것임을 예견하시고, 그러므로 그를 생명에서 거두심으로써 이것을 막기로 결정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살인에 대한 지식은 우연적 사건에 대한 지식이라고 주장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것이 또 다른 종류의 지식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나 이것을 검토해 보자. 그 살인이 확실한 일들 혹은 작정된 일들의 분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인정되는데, 그것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한 일들의 항목에는 속하며, 그것과 다른 모든 가능한 일들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도 지을 수 없다. 모든 가능한 일은, 작정에 의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우연적이다. 모든 가능한 일은 오직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과 연관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가능한 일들과 우연적 일들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으며, 따라서 제3의 부류를 추가할 것도 없다.
이처럼 그가 우연적이라고 말하는 그 종류의 지식은, 크납에 의하면, 이른바 중간지(Scientia Media)라 불리는 것이다. 그것은 중간지를 주장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한 가지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중간지의 또 다른 형태가 어떤 이들에 의해 견지된다. 이에 따르면, 그것이 가리키는 미래 사건은 일어날 사건으로서 하나님께 알려져 있되, 그 사실에 대한 그분의 지식은 그분의 작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 아래서 한 사람이 다른 행동 노선보다 어떤 한 행동 노선을 추구하리라는 그분의 예지를 통하여 획득된다.
이러한 종류의 중간지는 다음을 가르친다.
(1.) 그 미래 사건이 확실하다는 것.
(2.)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러한 것으로 아신다는 것.
(3.) 이 지식이 그분의 작정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4.) 도리어 그 사람의 본성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그를 둘러쌀 상황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그분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하리라는 것을 아신다는 것.
여기서 유일한 문제는 제3항과 제4항에 관한 것인데, 첫째로 그것이 확실하다는 점과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러한 것으로 아신다는 점을 말하는 데 있어서는 통상적인 정통적 진술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항과 제4항은, 이 지식이 한 사람이 특정한 상황 아래서 어떻게 행할지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의 결과라고 단언하며, 이 예지에는 필연적으로 그가 그렇게 행하도록 허용하시는 결정이 수반된다.
이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일어난다. 이것이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활동 방식인가? 만일 그러하다면, 하나님은 그분으로부터의 아무런 영향도 없이 세계를 전적으로 그 자체에 내맡기신 것이 된다. 모든 것은 그분의 의지와 활동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세계를 그 아래 두신 일반 법칙들이 그분 편에서의 아무런 활동이나 영향 없이 그 결과들을 산출하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명백히 사실이 아니고 비성경적이어서,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그것을 주장한 적이 없으며, 또한 이 중간지 개념을 제시한 것도 오직 그리스도인 저술가들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의도하는 바가 이것이라는 점은 부인되는데, 다만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안들에 있어서는 세계 안에서 작용하시고 개입하시며 그분 자신의 목적들을 수행하시지만, 다른 사건들에 있어서는 아무런 영향도 행사하지 않기로 택하시고, 단지 삼가시며 그 사건들이 그 자체의 결과들을 산출하도록 내버려 두시며, 또 이 사건들에 대해 그분이 가지신 지식은, 만일 그분이 그처럼 개입하지 않으신다면 그것들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제시된 이론은, 보게 되겠지만, 모든 사물이 그 모든 능력과 더불어 계속 보존됨을 인정한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적 활동으로부터만 비롯될 수 있으며,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 편에서의 그 모든 협력을 함의하는데, 오직 이 협력을 통해서만 사물들은 그분이 그것들에게 주신 능력들을 효과적으로 보존하고 행사한다.
이것이 인정된다면, 이 당사자들이 견지하는 견해는, 그들이 그것을 견지할 수 있는 어떠한 형태로 진술된다 하더라도, 모든 정통 신학자가 인정하는바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과 허용적 작정 사이의 구별 외에 어떠한 추가적 사실도 함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이 일들이 그렇게 작용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작정, 결정, 의향, 목적, 혹은 사람들이 달리 무엇이라 부르든, 가장 넓은 표현으로 하나의 의지 혹은 의욕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의지 혹은 작정에 근거하여, 이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그분의 지식이 성립한다. 이는 그러한 목적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어떻게 그분이 어느 때엔가 그 상황을 바꾸거나 그 사건의 성취를 막기로 택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아실 수 있겠는가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중간지의 두 형태 중 어느 것에도 진리와의 어떠한 심각한 불일치도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에 대한 반대는 오히려 정확성의 결여와, 어떤 새로운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잘못된 관념에 있다. 아니 차라리 가장 큰 반대는, 사람들이 그것에 이끌리게 된 목적, 곧 구원에 있어서 조건적 작정의 구별을 정립하려는 욕구에 있었다. 이 작정들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2.) 그러나 그의 구원이나 정죄를 작정하지는 않으신다.
(3.) 도리어 그가 믿으면 그의 구원만을 작정하시고,
(4.) 혹은 그가 믿지 않으면 그의 정죄를 작정하신다.
(5.)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 사건에 대해 가지셨다고 인정되는 지식은, 그 사람이 놓인 상황 아래서 그가 믿음을 행사할지 혹은 행사하지 않을지에 대한 예견으로부터 일어난다.
그러므로 중간지는, 한 사건이 어떻게 실제로 일어날 어떤 것으로 알려질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고정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따라서 작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어떤 근거 위에서 알려진 어떤 것으로 알려질 수 있는지를 보이기 위해 도입된다. 이것이 이미 검토한 형태들에서 잘못된 관념임을 우리는 보였다.
9.4 The Third Form of Scientia Media Refuted, and the Scripture Passages
그러나 중간지의 제3의 종류는, 그 불합리함이 쉽게 드러나기는 하지만, 이미 제시된 두 가지만큼 결코 무해하지 않다. 그것은 J. 파이 스미스 박사의 『기독교 신학 강요』(First Lines of Christian Theology) 145면에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유 행위자들의 의지에 달려 있는 모든 미래 사건을(즉 모든 가능한 존재와 모든 가능한 존재의 모든 가능한 행동을), 끝없이 다양한 선행 조건들의 배치 아래서 예견하시며, 그리하여 모든 경우에 어떤 특정한 후속 결과들이 뒤따르리라는 것을 예견하신다. 신(神)은, 끝없이 많은 수의 가능한 선행 조건들 가운데서 자유로운 피조물이 어느 것을 택하여 실행할지를 확실히 알지는 못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이 선행 조건들의 모든 가능한 변이 아래서 그 결과가 무엇이 될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그 피조물이 자신의 선택을 행하고 자신의 행동 노선을 완수하였을 때, 신은 자신이 그 전체를 미리 알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도식에 대한 반대들은 명백하다.
1. 그것은, 그 목적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보는 그 하나님을, 전혀 아무런 목적도 없는 하나님으로 만든다. 그분은 아무런 목적을 가지실 수 없고, 다만 우주 안의 어느 주어진 때에 무수히 많은 목적들 가운데 어떤 하나의 목적이 성취되는 그것일 수도 있다는 것만을 아실 수 있을 뿐이다.
2.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행사하신바, 주어진 때에 일어날 실제 사건들을 예언하는 능력에 어긋난다.
3. 그것은 그분의 독립성에 배치되는데, 그것은 그분을 그분의 피조물들의 의지에 의존하게 만들고, 그것들의 행동을 그분께 의존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4. 그것은 그분의 완전성에 배치되는데, 그 완전성은 외부로부터의 증가나 부가의 관념을 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견해에 따르면, 그분의 피조물들이 행하는 바에 관하여 그분의 지식이 끊임없이 증가한다. 매 순간, 이제까지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하던 것이 확실한 사건이 되어 버린다.
5. 적어도 어떤 측면들에서는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의지가 효력을 발휘하지 않을 아무런 이유가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목적에 의해서라도 그처럼 정신에 작용하셔서는 안 된다는 관념에 의지하는 이 중간지는 필시 오해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선물이나 성령의 선물에 의한 것처럼, 지성적 피조물들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기에 합당한 그러한 영향들을 그것들에게 베푸실 수 있겠는가. 심지어 내면의 양심조차도 그 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고, 사람 안에 존재해서조차도 안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오직 당사자의 자유로운 동의와 더불어서만 작용한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작정과 연관하여 일어나는 모든 영향이 바로 그러한 경우라고 답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오직 선을 위한 영향들이라고 말하는가? 그분의 작정과 연관해서도 또한 그러하다. 어떤 측면에서든 그분의 피조물들의 의지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효과적 작정들은 전적으로 선을 위한 영향들과 연관되어 있다. 다른 모든 측면에서는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알려져 있으며, 또한 그들을 그처럼 행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의 작정 때문에 알려져 있다.
6. 하나님께서 그분의 지성적 피조물들에 대해 아무런 영향도 행사하지 않으셔야 한다는 것은, 또한 그분이 물리적 우주로부터 배제되심을 함의한다. 중간지에서 사람들이 행한다고 상정되는 바로 그 상황들은 내면의 것들뿐 아니라 주변의 것들로부터도 일어나는 상황들이다. 또한 이 상황들을 제어하실 수 있는 그분이, 자유 행위자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리라고 그분이 아시는 그 물리적 사건들의 제어로부터 차단되실 수도 없다. 만일 의지의 책임 있는 자유에, 사람이 전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아야 함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우주로부터 배제되셔야 하며, 참으로 사람 외의 다른 모든 존재와 사물도 그러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야 하며, 심지어 그가 순종의 의무를 전혀 지지 않는다고 상정하고, 또 아무도 그의 행동을 알지 못하리라고 상정할 정도로까지 그러해야 한다. 이러한 불합리한 결론들은 더 멀리까지도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중간지를 지지한다고 여겨지는 성경 구절들은 그것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창세기 3:22, 출애굽기 4:8, 사무엘상 23:5,14, 예레미야 38:17,20, 마태복음 11:21,23이다. 또한 사도행전 27:22,31도 보라.
9.5 The Wisdom of God
지혜란, 어떤 이로 하여금 그가 소유한 지식과 기량을 실천적으로 사용하게 하고, 행동의 지혜로운 목적들을 택하게 하며, 지혜로운 수단들로써 이 목적들을 성취하게 하는 그 능력이다. 그것은, 그 인도 아래서 의지가 자신의 뜻을 지혜롭게 결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바, 지성의 그 인도이다.
하나님 안의 지혜는 무한하며 그르침이 없으니, 언제나 최선의 목적과 그것을 성취하는 최선의 수단을 택한다. 그것은 창조와 섭리 가운데서 드러나지만, 구속(救贖)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현된다.
10.1 Holiness and Goodness
우리의 정신 조직의 특성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고찰한 후에, 우리는 때때로 도덕적이라 불리는 속성들을 다룬다. 이는 그것들이 우리의 도덕적 품성을 이루는 것들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거룩하심, 선하심, 진실하심, 그리고 공의이다.
거룩하심.
그러나 거룩하심은 하나의 독자적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속성들의 결합이다. 우리는 어떤 존재를 상정할 수 있는데, 그 안에 공의나 진실함이 없이 사랑이 있을 수 있고, 또는 다른 두 가지를 배제한 채 이것들 중 어느 하나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이 모든 것과 다른 모든 도덕적 완전함을 결합하지 않는 존재는 거룩할 수 없다. 또한 우리가 그러한 결합을 갖추었을 때, 거룩한 품성을 구성하기 위해 더 보태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거룩하심이란 그러한 모든 탁월함의 총합이요, 그러한 모든 속성의 결합이며, 이것들이 그 완전한 구성 부분을 이룬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구성 요소들을 연구함에 있어, 우리는 먼저
선하심을 고찰한다.
이 단어의 한 측면에서, 그것은 단지 거룩하심과 동등하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우리가 사람에 관하여 종종 사용하듯이, 하나님의 본성의 탁월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단지 거룩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어떤 사람을 두고 그는 선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방금 거룩하심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적된 바와 같은 품성의 특성들의 결합을 단언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 안에서 종결되는 선하심이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은 다른 이들을 향한 친절, 자비, 혹은 선행으로 말해질 수 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그것은 그분 자신의 밖에서 종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매우 선하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의 평생에 나를 따르리이다." 시 23:6.
이 단어의 이러한 모호함 때문에, 그것을 그 첫 번째 측면에서는 단지 거룩하심으로 간주하여 우리가 그것에 관하여 말한 바에서 이미 다루어진 것으로 보고, 두 번째 의미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나뉘는 구분들 가운데 하나에 귀속시키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으로
10.2 Love: Complacency, Benevolence, and Compassion
사랑.
이것에는 다섯 종류가 있는데, 그것들은 사랑이 행사되는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하나님 안의 그 속성은 동일하다. 그러나 그 발현, 곧 그 종결되는 지점에서 그것은 이 서로 다른 형태들을 띠게 된다.
1. 만족, 곧 인정의 사랑이 있다. 이것은 탁월함이 인지되는 합당한 대상을 향하여 행사된다. 그것은 우리 안의 아름다운 것, 선한 것, 혹은 유익한 것에 대한 사랑의 성질을 지닌다. 그것은 대상 안에 그러한 관심을 받을 만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만족스럽게 또는 인정하면서 그것을 바라본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가장 높은 정도로 그분 자신에 대한 사랑, 그분 자신의 본성과 품성에 대한 사랑에서 행사된다. 왜냐하면 무한히 탁월한 것은 하나님께 만족의 사랑의 가장 높은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한 위격에 불과하셨다면,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그러한 사랑이 행사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격의 삼위일체 안에는, 구별된 위격들이 서로를 향하여 갖는 사랑 가운데, 이 만족의 사랑이 이 가장 높은 의미에서 행사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이 발견된다.
그러한 사랑은 또한 하나님에 의해 그분의 목적들에 대해서도 느껴진다. 그분은 그것들이 의롭고 지혜로우며 은혜로움을 인지하시므로, 그것들을 인정하시고 만족의 사랑으로 바라보신다.
그러나 이 사랑은 또한 이 목적에서 비롯되는 피조물들에게로 확장된다.
이는 무생물 피조계에 대해서도 참되다. 그것이 그분의 의지에 부합하고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에 알맞은 한, 그것은 완전하며, 그러한 것으로서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보시고 좋다고 선언하실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이 창조에서 그렇게 하셨음을 발견한다. 창세기 1장 10절, 12절.
같은 기록이 25절에서 사람의 창조 이전의 동물 창조에 관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사람의 창조와, 식물과 동물을 지닌 땅에 대한 통치권에 사람을 세우신 후에, 우리는 31절에서 이런 말씀을 듣는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만족의 사랑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의지뿐 아니라, 그분의 모든 죄 없는 피조물, 심지어 무생물 자연에게까지도 확장된다.
그러나 이 만족의 사랑은, 그것이 그분 자신을 향하여 가장 높은 정도로 행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그것에 가장 가까운 방식으로, 그분 자신과 가장 닮은 존재들, 곧 그분의 본성과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들을 향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죄 없는 천사들과 죄 없는 사람은 본성상 하나님께 기쁨이 되니, 마치 자녀에게서 자기와의 독특한 닮음을 보는 아버지에게 그 자녀가 기쁨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죄 있는 자는 이렇게 사랑받을 수 없다. 죄 있는 사람은 죄 있는 동안에는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예수를 믿는 회개한 신자조차도, 장차 올 생명에서 그의 완전한 성화의 때까지, 그리고 어쩌면 그때조차도,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 자신으로서는 어떤 측면에서도 하나님의 인정을 확보할 수 없다.
2. 두 번째 종류의 사랑은 자비의 사랑이니, 이는 그분의 피조물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관념에 상응한다.
이것은 그들의 행복을 바라시는 그분의 소원의 산물이다. 그것은 만족의 사랑과 달리 그들의 품성에 의존하지 않으며, 죄 없는 자와 죄 있는 자 모두를 향하여 행사된다.
그것은 그 본질상 특수하지 않고 일반적이며, 모든 자, 심지어 마귀들과 악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은 자비롭고, 따라서 그분은 그분의 피조물들의 행복을 바라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 행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그분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죄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그분의 피조물들에게 좋은 것들을 베푸심에 있어 능동적으로 행사될 때, 그것은 그분의 선행이라 불린다. 전자에 의해 그분은 그들에게 행복을 바라시고, 후자에 의해 그분은 그들을 행복하게 하시려고 복을 베푸신다.
이것은 의로운 자에게뿐 아니라 악한 자에게도 행해진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5:45에서 언급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느니라."
3. 사랑의 세 번째 형태는 긍휼의 사랑이다.
이것은 우리의 측은히 여김의 관념에 상응한다. 그것은 고난을 당하거나 곤경에 처한 자들에 대한 자비로운 성향이다.
이것 또한, 만일 죄와 고난이 분리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죄 있는 자나 죄 없는 자를 향하여 행사될 수 있다.
이 둘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견해가 매우 일반적으로 견지되어 왔다. 아픔과 고난과 곤경은 죄의 결과이며, 따라서 죄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믿어져 왔다.
나는 그것들이 그렇다고 믿지 않는다. 죄 없는 상태의 사람은 육체적 고난을 받을 수 있도록 지음받았다. 그 능력은 그의 육체적 조직의 보호를 위해 필요하였다.
하등 동물들 또한 고난을 당한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는 능력에 어떤 것이 타락에 의해 더해졌든, 그리고 그것이 죄의 결과이든, 우리는 그 때문에 죄가 없었던 곳에는 어떤 고난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강제되지는 않는다.
고난을 받는 능력은 더 높은 조직에 속한 것이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능력을 지닌 그 더 높은 조직을, 그것이 없는 더 낮은 조직보다 선택하게 될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의롭게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실 수 있다.
그렇다면 만일 비참이 죄 없는 자의 몫이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은 그러한 자들을 향하여 행사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죄 있는 자를 향해서도 행사될 수 있고 또 실제로 행사된다. 우리는 이것을, 그분이 그들의 형벌을 미루시는 오래 참으심에서,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는 데서, 그들의 구원을 향한 그분의 갈망에서, 그리고 가장 두드러지게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분의 독생자를 주신 일에서 본다.
10.3 Love: Mercy and Affection; Grace Distinguished
4. 하나님의 사랑의 네 번째 형태는 우리가 자비라 부르는 것에 상응한다.
이것은 오직 죄인들을 향하여만 행사될 수 있다.
그 본질 자체가 그 대상들 안의 죄책을 염두에 둔다.
그것은 죄에 합당한 형벌을 가하지 않으려는 소원과, 그렇게 하기를 보류하고 거부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에 대한 실제적인 사면에 있다.
그것은 의로운 존재를 향하여는 행사될 수 없으니, 이는 그 안에는 사면되어야 할 죄나 죄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죄의 존재 때문에 생겨난, 따라서 그분의 속성들에 더해진 어떤 새로운 속성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본성에 내재한 덕이며, 특히 그분의 사랑이 자기를 나타내는 한 형태에 불과하니, 곧 죄 없는 피조물들이 불러일으키는 그 자비와 동일한 사랑이요, 또 다른 형태인 만족의 사랑으로서 신격 안에서 영원히 행사되어 온 것과 동일한 사랑이다.
이 자비가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공의에 부합하여 행사되어야 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에 대해 참된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하나도 다른 것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행사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혹은, 이 속성들이 분리된 기능들이 아니라는 우리가 앞서 진술한 바를 기억한다면, 이 경우에 뜻하는 바는, 다른 모든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과 조화롭게 행하셔야 한다는 것뿐이다.
이 속성이 행사되는 대상들은, 하나님이 어떤 종류의 범죄든 사면하시는 모든 자이다.
그들은 구속받은 죄인들에게 국한되지 않으니, 비록 이것이 가장 두드러진 나타남이기는 하다.
옛 경륜 아래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위에 신정적 통치자로서 다스리셨다. 나라의 죄들과,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개인들의 죄들이 사면되었다.
그 경륜 아래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지상의 통치자의 지위를 차지하셨으며, 따라서 회개 위에서, 그리고 단지 통치적 원리들, 곧 율법에 대한 순종과 평화와 질서와 나라의 안녕을 확보할 만한 그러한 원리들 위에서, 그분의 통치에 대한 죄들을 임의로 사면하실 수도 있었다. 이것들은 단지 왕의 인격이나 그 나라의 법들에 대한 범죄였지, 거룩함과 의의 근본 원리들에 대한 범죄가 아니었으니, 따라서 주권과 편의가 각 경우에 무엇이 행해질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었고, 자비가 행사되었으며, 공의가 그에 따라 베풀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자의적인 법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에 근거한 법, 곧 그것에 대한 본질적인 순종이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옳음을 보존하고 유지하며 영원한 법의 위반이 처벌 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그러한 법을 베푸시는,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경우와는 매우 다르다.
두 경우 모두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전 본성과 조화롭게 행하셔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신정적 왕에 대한 개인적, 국가적 죄들의 사면에 대하여 그 본성에 의해 어떤 장애물도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비가,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공의에 대한 보상 없이 베풀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면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속죄에 대한 예표적 관계가 있었으니, 곧 백성이 개인적, 국가적 정치적 죄들 모두에 대한 사면을 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요구된 제사 제물들 안에 있었다. 이는 그 속죄 안에,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하나님이 그러한 경우들에서조차도 의로우시면서 동시에 범죄자들을 의롭다 하실 수 있었던 이유가 발견됨을 보여준다.
5. 사랑의 다섯 번째 형태는 애정의 사랑이다.
이것은 그것이 항상 합당한 대상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만족의 사랑과 다르다. 이것은 "탕자"의 비유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그 대상이 다른 모든 자와 더불어 일반적으로 보아지지 않고,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자비의 사랑과 다르다.
그것은 그 대상이 곤경에 처해 있지도 않고 죄가 있지도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휼의 사랑이나 자비의 사랑과 다르다.
그것은 다음에서 일어난다,
1. 상호 관계에서. 곧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그리고 삼위일체 안의 다른 위격들에 대한 관계,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관계, 그리스도의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과 교회에 대한 관계, 양자된 아들들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관계.
2. 의존에서. 곧 피조물의 창조주에 대한, 구속받은 자의 구속주에 대한 의존과 같이.
3. 소유에서. 곧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받은 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소유와 같이. 누가복음 15:8,9의 동전에서 예시된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사람 안에서 이러한 각각의 방식으로 일어나며, 성경이 보여주듯이, 하나님 안에서도 발견된다.
은혜가 나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이 측면에서이며, 이 은혜는 사랑과 측은히 여김과 자비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사랑은 일반적 특성으로서, 이 다섯 가지 서로 다른 형태로 자기를 나타낸다.
자비는 이것들 중 하나이지만, 오직 죄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측은히 여김은 곤경이나 아픔이나 고난에 처해 있을 수 있는, 죄 있는 자나 죄 없는 자에게 주어진다.
은혜 또한 죄 있는 자나 죄 없는 자에게 주어지며, 그 대상 안의 곤경을 반드시 전제하지는 않으나, 그것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수반하니, 그 관심은 그것에 대한 독특한 관계에서, 혹은 그것에 대한 소유에서, 혹은 그 의존에 대한 긍휼에서 일어난다.
은혜는 애정에서 일어나는, (죄 없는 자나 죄 있는 자에 대한) 받을 자격 없는 호의이다.
자비는 (오직 죄 있는 자에 대한) 받을 자격 없는 긍휼이다.
10.4 The Truth of God
하나님의 진실하심.
하나님의 진실하심이라는 표현은 모호하므로, 그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는 구체적인 용어들 아래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I. 그분의 참되심.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본성이 절대적 완전함의 이상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 이상의 근거는 규명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본성 안에 있든, 혹은 그분의 본성에서 나오는 그분의 의지 안에 있든, 혹은 그 본성과 정확히 합치하는 합당한 것과 필연적인 것과 옳은 것의 영원한 원리들 안에 있든, 하나님과 그 이상은 완전한 대응물이어야 한다. 그 이상은 그분의 어떤 피조물에 의해서도, 그들의 불완전함 때문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그 모든 지극히 높은 탁월함 가운데 알려지며, 그분의 본성은 그렇게 알려진 그 이상에 온전히 부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성경이 그분을 참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의 이 측면에서이다. 대하 15:3, 렘 10:10, 요 17:3, 살전 1:9, 요일 5:20, 계 3:7을 보라.
II. 그분의 진실성.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진실하심, 곧 속이실 수 없으심이다. 그것은 그분의 본성의 한 속성으로서, 그분의 능력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대한 외부적 관계가 전혀 없을지라도 존재하며 그분을 그분 되게 한다. 그것에 의해 그분은 모든 진리의 근원이 되시니, 도덕적 진리만이 아니라 심지어 수학적 진리의 근원도 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피조물들과 갖는 관계에 있어서, 그것은 그들이 직관이든 관찰이든 이성이든 자기 자신의 기능들을 사용하여 얻은 지식에 대해 갖는 확신의 근거이다. 그러한 지식 안에 어떤 불완전함이 있든,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피조물 때문임이 인지된다. 또한 그것 위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하시는 계시들, 곧 단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사실들에 대한 계시들에 대한 믿음이 근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실성을 가장 강력한 표현으로 단언한다. 수많은 구절들에서의 단언에 더하여, 우리는 시 108:4에서 그분의 "진실하심이 궁창에 이르나이다"라는 말씀을 듣는다. 딛 1:2은 그분을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라 부른다.
III. 그분의 신실하심.
이것은 그분의 목적들, 곧 감추어진 것이든 계시된 것이든 그 목적들과의 관계에서 본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있다. 계시될 때, 이것들은 약속이나 위협이 된다. 그러나 약속으로서, 이 목적들이 성취되어야 하는 근거는, 피조물에 대한 어떤 의무가 아니니, 이는 하나님이 어떤 의무 아래에도 놓이실 수 없기 때문이며, 단지 그분 자신의 목적들에 대한 그분 자신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약속들의 이행만큼이나 그분의 위협들의 이행도 동등하게 요구한다.
이 신실하심은 위에서 고찰한 그분의 본성의 진실성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신실하셔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진실성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나타나는 새로운 한 측면이다.
이 신실하심은 소망의 근거이자 두려움의 근거이다. 성경에서 그것은 더 자주 소망과 신뢰의 이유로 제시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심판과 형벌의 근거이기도 하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들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분의 위협들에 대해서도 참되셨다. 그분의 신실하심은 그분이 그렇게 계속하실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11.1 The Nature of God's Justice: Absolute, Relative, Commutative, and Distributive
공의(justice)란 타인을 그 마땅한 응분(deserts)에 엄정히 따라 대우하도록 이끄는 성품의 올바름을 뜻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분의 이성적 피조물들 가운데서 보이는 이 속성과 어떤 점에서도 다르지 않으나, 다만 그분의 공의는 완전해야 하는 반면 피조물의 공의는 불완전하며, 그분의 공의는 공평무사해야 하는 반면 피조물의 공의는 편파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공의의 행사(行使)에 있는 것이지 공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차이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제한된 지식과 이성, 옳고 그름에 대한 제한된 분별에서, 또 사람들이 본성상 자신의 편견과 정념에 굴복하는 정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온전히 완전하신 존재 안에서는 공의가 이러한 결함을 전혀 지니지 않으며, 그 가장 엄정한 본성에 따라, 또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완전한 형태로 행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자에게, 그들이 무엇을 마땅히 받아야 하든, 오직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만을, 그 응분의 온전한 분량대로, 가장 절대적인 공의를 베푸셔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분 자신 안에 존재하는 그대로 고찰될 수도 있고, 그분의 피조물을 향하여 나타나는 그대로 고찰될 수도 있으므로, 이 두 측면에서 본 바에 따라 공의를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와 상대적 공의로 구분하여 왔다.
절대적 공의란 신적 본성의 올바름을 뜻하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분 자신 안에서 무한히 의로우시다. 이 올바름은 그분께 본질적인 것이며, 그것을 드러낼 창조 세계가 있기 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하나님의 상대적 공의란, 우주의 경륜 가운데서 그분의 피조물을 향하여 나타나며 그들에게 행사되는 그 공의를 뜻한다. 그것은 그분이 주시는 법의 본성에서, 그 법에 복종하는 자들을 대하시는 그분의 공평무사하심에서, 또 그분이 그 법에 덧붙이시는 위협과 약속으로써 의와 덕을 유지하심에서, 그리고 그 법을 어기는 자들을 벌하심에서 드러난다. 이 형태의 공의에는 흔히 통치적 공의(rectoral justice)라는 이름이 붙는데, 이는 통치자가 통치의 형태로, 또 법을 수단으로 하여 행사하는 공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가운데 교환적 공의(commutative justice)라고 알려진 공의의 한 형태가 있으니, 이는 상거래의 매매와 교환에서, 또는 삶의 그 밖의 어떤 상호 관계에서든, 각 사람에게 그의 마땅한 몫을 주는 것에 있다. 이것은 상호 의무라는 근거 위에 서 있으므로, 따라서 타인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는 존재에게는 적합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하나님께 합당하게 돌릴 수 없다.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의 결과로 베푸시는 복은 의무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문제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연관될 수 있는 유일한 측면은, 아들이 그 고난을 통하여 사신 그 복들을 그분의 백성에게 베푸심에 있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로서일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분의 피조물의 일을 다스리심에 있어 하나님은 분배적 공의(distributive justice)를 행사하신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그분의 법의 제재(sanctions)에 따라 그분의 신민(臣民)을 상 주시고 벌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그분의 공의는, 법이 어겨졌을 경우 형벌을 시행하심에서 드러나지만, 상을 베푸심에서는 드러나지 않으니, 이는 그 상이 의무를 다하도록 더욱 권면하기 위하여 은혜로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약속하신 모든 상을 주시되, 그것은 약속하셨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지 마땅히 주셔야 할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형벌들은 공평무사하게 시행되는 까닭에 하나님의 공의를 한층 더 드러낸다.
하나님의 법을 거스른 자들이 벌을 받는 근거는, 단지 하나님의 법이 어겨졌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어김에 있어 본질적인 의가 침해되고 불의가 저질러졌다는 데 있다. 통치자의 법이 어겨졌다는 것만으로도 형벌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단지 통치자의 의지를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이라면, 그 통치자의 의지가 형벌을 면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옳음과 그름, 죄와 거룩함 사이의 불변하는 구별 위에 서 있으니, 이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본성 안에 존재하는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그 법을 어김은 죄이다. 그것은 의의 파괴이다. 따라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벌하시게 하는 것은 그분의 통치자적 성품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본성이다. 공의가 이러한 측면에서 고찰될 때, 그것은 형벌적(punitive) 공의 또는 보응적(vindicatory) 공의라고 불린다.
11.2 Three Questions and Three Theories of God's Punishment of Sin
그러나 형벌적 공의는 모든 이가 인정하는 바가 아니며, 하나님이 죄를 그분의 의지에 대한 위반이라는 측면 외의 다른 어떤 측면에서 벌하신다는 것도 모두가 인정하는 바가 아니다. 아니, 그분이 자신의 의지에 대한 위반조차도 벌하시는지가 논란이 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세 가지 물음이 제기된다.
1. 하나님은 자신의 법에 대한 위반을 벌하시는가?
2. 그분은 그것들이 단지 위반이기 때문에 벌하시는가, 아니면 그것들이 죄이기 때문에 벌하시는가?
3. 이것이 행해지는 까닭은 그분의 본성 안에 있는 어떤 본질적인 것 때문인가, 아니면 통치적 목적이나 그 밖의 목적을 위하여 그것이 편의에 맞기 때문인가?
이 물음들에 관하여 여러 견해가 표명되어 왔다.
1. 만유구원론자(Universalists)와 일부 소키누스주의자(Socinians)는 하나님이 자신의 법에 대한 위반조차도 벌하신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에 제시된 도덕과 의무의 교훈을, 단지 이생에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으로 본다. 이생이 끝나면, 그러한 위반에 대하여 사람을 다루심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오직 일시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며, 그 목적을 이룬 뒤에는 더 이상 효력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오직 그분의 피조물의 선(善)만을 바라보시며, 만일 동일한 다루심의 방식이 이생 너머로 연장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한동안일 뿐이요 오직 고난받는 자들의 선을 위함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이것들은 형벌이 아니라 징계(chastisements)이며, 하나님은 공의가 아니라 선하심에 의하여 움직이신다.
2. 두 번째 이론은 이러하다. 곧 하나님이 주신 법은 단지 그분의 의지의 표현일 뿐이며, 그분이 명하시는 근거는 단지 그분의 주권일 뿐이고, 우주를 창조될 세계로서, 또 그분의 도덕적 피조물이 거할 세계로서 바라보시며, 그분은 그 피조물의 복지를 확보하기에 가장 좋게 여겨지는 그러한 법 체계를 택하셨으며, 이 법들은 개인이 아니라 전체의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실로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한 것이며, 또 하나님의 공의는 순종하는 자에게 상 주시고 불순종하는 자를 벌하심으로써 이 법들을 다스리시되, 그분의 통치를 유지하고 그리하여 전체의 복지를 확보하시는 데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체계 아래에서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되, 그 죄의 가증한 본성 때문에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그리하여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모두의 최선의 이익이 확보되기 때문에 벌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염두에 두신 목적은, 죄의 내재적 본성이 요구하는 행위를 수행하시는 것이라기보다는, 죄를 억제할 본보기를 제공하시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드러나는 것은 그분의 보응적 공의가 아니라 그분의 통치적 공의이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네 가지 요점을 포함한다.
(1.) 하나님은 범죄 또는 죄를 벌하신다.
(2.) 그 목적은, 그리하여 그분의 도덕적 피조물의 복지를 한층 더 잘 확보하는 데 있다.
(3.) 그분의 통치의 법들은 전적으로 그분의 단순한 의지에 근거한다.
(4.) 따라서 그분은 죄를 벌하시되, 그 죄의 내재적 응분 때문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거룩하심이 아니라 그분의 피조물의 일반적 행복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벌하신다.
3. 세 번째 이론은 이 요점들 가운데 첫째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점에서 다르다.
(1.) 이 이론은 하나님이 죄를 벌하신다는 데 동의한다.
(2.) 그러나 이 이론은 그분의 목적을 의(義)의 유지로 본다.
(3.) 그분의 법과 행위는 의의 불변하는 원리에 근거한다.
(4.) 그분이 죄를 벌하시는 것은, 그 죄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그분께 형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서 올바른 결론에 이르는 데 큰 어려움은, 이 법들의 기원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 법들은 동일했으리라는 점이다. 따라서 법들 자체의 본성으로부터는 아무 결론도 끌어낼 수 없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으로든 세계의 통치를 세우심에 있어, 자신의 본성에 어긋나는 법을 거기에 주지 않으시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동일한 결과가 이 원인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산출될 수 있다고 해서, 그러므로 그것을 그 둘 중 어느 것에 귀속시키든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의 원인만이 귀속되어야 하고, 또 그 원인이 하나님의 본성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확정되어야 할 중요한 이유들이 있을 수 있으며, 현재의 경우에는 그러한 이유들이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속죄와 관련하여, 또한 구원 계획의 다른 부분들과도 관련하여, 중대한 문제들이 참된 답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의 판단을 왜곡하거나 우리를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만 지금 고찰 중인 주제의 중요성을 보이기 위하여 언급한 것일 뿐이다.
11.3 Objections to the Second Theory and Transition to Scriptural Proof
이 이론들 중 첫째 것에 관하여는, 그것에 대한 반론이 부분적으로 둘째 이론에 대한 반론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과, 그것에 고유한 반론들은 너무도 분명하여 따로 제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 말하면 족하다.
둘째 이론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1. "그것은 거룩함과 덕이 아니라 행복을 하나님의 큰 목적으로 삼는다. 본성의 명령은 우리 모두에게, 행복이 이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가르친다." 하지(Hodge): 수기(手記) 강의.
2. "그것은 양심이 우리에게 가르치는바 옳음과 그름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파괴한다." 하지(Hodge): 수기 강의.
3.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명령으로 정반대의 법이 통용될 수 있는 세계를 만드실 수도 있었으며, 그리하여 동일한 행위에 대하여 이 세계에서는 그분의 피조물에게 상 주시고 저 세계에서는 벌하시는 것이 그분의 본분이 되리라고 상정한다.
4.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의지가 그분의 본성과 맺는 관계에 어긋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그 의지에 귀속시킨다. 그것은 그 법들이 오직 그 의지에서만 흘러나온다고 인정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법들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비롯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그러한 것이라는 점은 부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분의 의지보다도 더 높은 근거를 지닌다. 그 의지는 그분의 본성에 의하여 영향을 받으며, 그 본성의 표현이다. 그런데 그 본성 자체가 선과 의의 근거이든, 아니면 사물의 본질상 그것과 구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선과 의가 단지 그 본성과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든, 그 결과는 동일하다. 곧 그 의지는 본성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 옳음과 그름의 불변하는 원리에 따라 창조의 법을 세우게 된다.
5. 이 이론은 또한 하나님의 독립성에도 어긋나니, 그분은 이에 따라 죄를 벌하지 않을 수 없게 되되, 그 독립성을 여전히 유지시킬 그분 자신의 본성의 어떤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달리는 유지될 수 없는 그분의 피조물에 대한 통치를 고려함으로 인하여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의 『개요(Outlines)』에서 변용함.)
6. 사람 안에 있는 본능적인 공의의 감각은 죄의 악한 응분(ill desert)을 증언한다. 이것은 양심의 보편적 증언이다. 그런데 양심은 하나님을 대변하므로, 따라서 사회에 끼치는 해악과는 별개로, 악을 행하는 자는 그 죄과에 비례하는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7. 하지는 그의 『개요』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거룩함에 대한 사랑과 죄에 대한 미움으로부터 이를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만일 하나님이 벌하시는 이유가 오직 하나님의 자의적(恣意的) 의지에만 근거한 것이라면, 그분은 죄를 미워하신다고 할 수 없고 다만 자신의 의지를 사랑하신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며, 혹은 그분이 죄를 벌하시는 이유가 통치적 고려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그분은 엄밀히 말해 죄를 미워하신다고 할 수 없고 다만 그 결과들을 미워하신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심과 성경은 둘 다, 하나님이 참으로 죄를 미워하시고 거룩함을 사랑하신다고 가르친다.
둘째 이론에 관한 이러한 고찰을 이 반론들의 진술과 함께 마무리하고, 나는 성경의 가르침으로써 셋째 이론을 확립하는 데로 나아간다. 성경이 하나님을 의로우신 하나님으로 묘사하여 그분께 그러한 성품을 돌린다는 것, 또 성경이 그렇게 하되 그분의 공의가 단지 그분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본성의 일부임을 보이는 방식으로 한다는 것, 또 성경이 하나님의 행위가 의와 공의에 부합하며 그것도 그분의 주권에서가 아니라 그분의 절대적 공의로 인하여 그러하다는 입장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도전한다는 것, 또 성경이 그분을 보응적(vindicatory) 공의 또는 보복적(avenging) 공의를 실제로 주장하시는 분으로 제시하며, 그분의 공의를 통치를 유지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죄에 대한 미움으로 말한다는 것, 아니, 성경이 아담을 낙원에서 쫓아내심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에서 그 가장 높고 가장 두드러진 본보기로 절정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그 보복적 공의를 행사하신 사례를 잇따라 끊임없이 우리에게 보여 준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보응적 공의를 옹호하여 성경으로부터 확립될 수 있는 반면, 그분이 오직 그분의 통치를 유지하거나 그분의 피조물의 단순한 행복을 위하여만 활동하신다는 것을 증명할 구절은 단 하나도 제시될 수 없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참으로 성경 어디에서나, 무서운 대조 가운데 놓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욕됨, 그분의 거룩함과 죄,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공의이다.
11.4 Scriptural Proof of Vindicatory Justice (Nine Classes of Passages)
1. 하나님이 의로운 성품을 지니신 분으로 언급되며, 이것이 그분 안의 탁월함으로 제시되는 구절들. 만일 공의와 의지가 동일한 것이라면, 또는 공의가 그분의 계획에 따라 인간사를 다스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구절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 점이 이러한데도, 그분이 우리의 규범으로 정해진 본질적인 법들을 바꾸심에 있어 그분의 권능이나 선택이나 공의를 주장하시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신명기 32:4. 욥기 8:3; 34:10,12,21; 36:3. 시편 9:4; 11:7; 33:4,5; 71:19; 89:14; 92:15; 97:2; 99:4; 119:137,138. 스바냐 3:5. 로마서 2:2.
2.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대한 그분의 공의와 그분의 공평무사하심을 주장하심으로써, 이 성품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시는 구절들. 창세기 18:16-33, 신명기 10:17. 욥기 37:24. 전도서 3:17; 12:14. 에스겔 18:29. 사도행전 10:34,35; 17:31. 로마서 2:3-6, 11; 14:12; 갈라디아서 2:6. 에베소서 6:8. 골로새서 3:25. 베드로전서 1:17. 유다서 15.
3. 하나님의 공의가 언급되는 구절들에서, 그것은 결코 그분의 의지에도, 그분의 경륜(economy)에도 근거하지 않으며, 도리어
(a.) 심판은 언제나 그분의 의(義)에 근거한다. 시편 9:8; 50:4,6; 96:10,13; 98:9.
(b.) 유대인 가운데서 행하신 그분의 경륜은, 그것이 그분의 의지를 드러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공의 또는 의로 인하여 칭송된다. 신명기 4:8. 시편 19:7-9. 시편 119:138.
4. 하나님이 그분의 공의를 죄에 대한 미움으로 말씀하시는 구절들. 시편 5:4,5. 하박국 1:13.
5.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보복적 공의를 행사하시는 분으로 언급되는 구절들. 출애굽기 20:5. 신명기 32:34,35,39,41,42,43. 시편 94:1,2. 이사야 34:8, 66:6. 히브리서 10:26-31.
6. 하나님이 그분의 원수들을 다루심이, 노여움, 진노, 분노 등과 같은 말과 연관되어 언급되는 구절들. 민수기 12:9. 신명기 32:22. 사사기 10:7. 사무엘하 22:8. 욥기 19:11. 시편 2:5; 7:11; 21:9; 90:11. 이사야 28:21. 이사야 30:30; 65:15. 예레미야 30:24. 예레미야애가 2:3; 3:43. 에스겔 5:13; 38:18. 호세아 12:14. 나훔 1:6.
7. 천사들이 그러한 보응의 사역자로 언급되는 구절들. 이것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증거로서 도입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공의가 나타나는 사건들의 일부로서 도입된 것이다. 민수기 22:22,31. 사무엘하 24:16. 역대상 21:14,15,16,27. 시편 35:5,6. 요한계시록 7:1,2,3; 9:15; 15:1; 16:17.
8. 하나님의 진노가 실제로 행사된 사례로 제시된 것들은, 그분의 도덕적 통치에서 어떤 효과를 산출하려는 관념과도, 그분의 단순한 의지의 행사와도 연관되지 않으며, 죄에 대한 그분의 감정, 다시 말해 그분의 보복적 공의로 말미암아 산출된 결과로서 연관된다.
이러한 사례들 가운데 일부는 다음과 같다. (1.) 타락한 천사들, (2.) 우리의 시조(始祖), (3.) 소돔과 고모라, (4.) 홍수, (5.) 애굽의 재앙들, (6.)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내린 형벌들, (7.) 유대인의 포로 됨, (8.)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분의 진노를 행사하는 데 쓰인 그들의 악한 도구적 역할로 인하여 하나님이 이방 나라들에게 내리신 형벌, 그리고 (9.) 악인들에게 위협하신 영원한 형벌.
9. 하나님이 죄를 사하실 수 있기 전에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무언가를,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서 지적하는 구절들. 마태복음 26:39. 로마서 3:26. 고린도후서 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