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Theology a Science
모든 학문에는 두 요소가 있으니, 곧 사실과 관념, 다시 말해 사실과 정신이다. 학문은 단순한 지식 이상이다. 지식이란 충분한 증거에 근거하여 무엇이 참인지를 확신함이다. 그러나 천문학이나 화학이나 역사의 사실들 자체가 그 지식 분야의 학문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사실들을 단지 질서 있게 배열하는 것만으로도 학문이 되지는 않는다. 연대순으로 배열된 역사적 사실들은 한낱 연대기일 뿐이다. 역사 철학은 그 사실들이 인과 관계 속에서 이해될 것을 전제한다. 어느 분야에서든 학자는 경험의 사실들을 규정하는 법칙들을 이해하는 자로 여겨지며, 그리하여 과거를 알 뿐 아니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천문학자는 앞으로 여러 세기에 걸친 천체들의 상대적 위치를 예언할 수 있다. 화학자는 특정한 화학적 결합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이 하나의 학문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사실을 아는 것 이상을 포함해야 한다. 신학은 그 사실들이 서로 간에, 또 각각이 전체에 대하여 맺는 내적 관계를 드러내는 일을 담아야 한다. 신학은 하나가 인정되면 다른 것들은 부정될 수 없음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이 신학의 체계가 아닌 것은, 자연이 화학이나 역학의 체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연에서 화학자나 역학 철학자가 검토하고 그것들로부터 그것들을 규정하는 법칙을 알아내야 할 사실들을 발견한다. 이와 같이 성경은 신학자가 수집하고 확증하고 배열하여 서로 간의 내적 관계 속에서 드러내야 할 진리들을 담고 있다. 바로 이것이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차이를 이룬다. 전자의 임무는 성경의 사실들을 확인하고 진술하는 것이다. 후자의 임무는 그 사실들을 취하여 서로 간의, 그리고 다른 동류(同類)의 진리들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또한 그것들을 변호하며 그 조화와 일관성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쉬운 일도, 사소한 일도 아니다.
**신학에 체계가 필요한 까닭**
하나님께서 진리들을 계시하기에 합당하다고 보신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그것들의 관계와 조화를 보이는 수고를 면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자연히 물을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첫째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정신의 구성이 그러하여, 정신은 참이라고 인정하는 사실들을 체계화하고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지식 분야에서도 사람들은 소화되지 않은 사실 더미를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한 적이 없다.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도 그렇게 만족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학의 체계를 세울 필요가 있다. 교회의 역사가 이에 대한 풍부한 증거를 제공한다. 모든 시대에 모든 교파 가운데서 그러한 체계들이 산출되어 왔다.
둘째로, 이로써 고립된 사실들을 단지 쌓아 두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종류의 지식을 얻는다. 예컨대 지면에 대양과 대륙과 섬과 산과 강이 있음을 아는 것과, 우리 지구의 표면에서 육지와 물의 분포를 규정한 원인들, 지구의 형상, 그 형상이 기후에, 식물과 동물의 종류에, 통상과 문명과 민족들의 운명에 미친 영향들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며, 후자가 훨씬 더 높다. 바로 이러한 원인들을 규정함으로써 지리학은 사실들의 모음에서 매우 중요하고 격조 높은 학문으로 끌어올려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력과 운동의 법칙들을 알지 못하면 천문학은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사실들의 모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학문들에 대하여 참인 것이 신학에 대하여도 참이다. 우리는 거기 담긴 개별 진리들이 서로에 대하여 서 있는 관계를 적어도 어느 정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무엇을 계시하셨는지 알 수 없다.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문제를 푸는 데, 곧 성경이 그 주제에 관하여 가르치는 모든 사실을 조정하여 조화로운 배열로 가져오는 데 교회는 여러 세기에 걸친 연구와 논쟁을 치렀다.
셋째로, 이 문제에서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진리의 교사요 변호자로서 우리의 의무를 다하려 한다면, 우리는 계시의 모든 사실을 체계적 질서와 상호 관계 속으로 가져오기를 힘써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그 진리됨을 만족스럽게 드러내고, 반론에서 그것들을 변호하며, 그것들이 온전한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작용하게 할 수 있다.
넷째로, 그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천문학이나 화학을 가르치지 않으시되, 그 학문들이 거기서 세워지는 사실들을 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조직신학을 가르치지 않으시되, 바르게 이해되고 배열되면 신학이라는 학문을 이루는 진리들을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신다. 자연의 사실들이 모두 물리 법칙에 의해 서로 관련되고 규정되는 것처럼, 성경의 사실들도 모두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들의 본성에 의해 서로 관련되고 규정된다. 또한 그분은 사람들이 그분의 일들을 연구하여 그것들의 놀라운 유기적 관계와 조화로운 결합을 발견하기를 뜻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여, 별들과 같이 그 진리들이 고립된 점들이 아니라 끝없는 조화와 장엄함 속의 체계요 순환이요 주전원(周轉圓)임을 배우기를 뜻하신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성경이 전체로서 신학의 체계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신약의 서신들에서 그 체계의 일부가 이미 우리를 위해 다듬어져 있음을 본다. 이것들이 우리의 권위요 인도자다.
1.2 Theological Method
모든 학문에는 그 고유한 본성에 의해 규정되는 자기 나름의 방법이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여서,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 세워지기까지 하였다. 현대 문헌에는 방법론(Methodology), 곧 방법의 학문에 관한 저작이 넘쳐난다. 그것들은 학문적 탐구를 지배해야 할 원리들을 규정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그릇된 방법을 택하면, 그는 결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할 잘못된 길로 접어든 자와 같다. 두 가지 큰 포괄적 방법은 선험적(à priori) 방법과 후험적(à posteriori) 방법이다. 하나는 원인에서 결과로 논증하고, 다른 하나는 결과에서 원인으로 논증한다. 전자는 오랜 세월 자연의 탐구에까지 적용되었다. 사람들은 정신의 법칙이나 가정된 필연적 법칙으로부터 자연의 사실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려 하였다. 우리 시대에도 절대적 존재의 본성과 그 필연적 전개 양식으로부터 우주에 관한 이론을 세우려는 이성적 우주발생론(Rational Cosmogonies)이 있었다. 귀납법을 굳건한 토대 위에 세우고 그 권위를 널리 인정받게 하는 데 얼마나 큰 대가가 치러졌는지는 누구나 안다. 이 방법에 따르면, 우리는 잘 확립된 사실들을 수집하는 데서 시작하여, 그것들로부터 그 발생을 규정하는 일반 법칙들을 추론한다. 물체들이 지구의 중심을 향해 떨어진다는 사실로부터 중력의 일반 법칙이 추론되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실제 경험의 한계를 훨씬 넘어 적용할 권한이 있다. 이 귀납법은 두 가지 원리에 근거한다. 첫째, 자연 현상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자연의 법칙들(힘들)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 법칙들이 한결같아서, 우리는 동일한 원인이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결과를 낳으리라 확신한다는 것이다. 이 법칙들의 본성에 대하여는 견해가 갈릴 수 있다. 그것들은 물질에 내재하는 힘으로 가정될 수도 있고, 한결같은 신적 작용 양식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우리가 주위에서 지각하는 현상들에는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하며, 그 원인은 한결같고 항구적이어야 한다. 이 원리들 위에 모든 귀납적 학문이 세워지며, 이것들에 의해 자연 철학자들의 탐구가 인도된다.
물리학에 적용되는 것과 같은 원리가 형이상학에도, 자연과학뿐 아니라 심리학에도 적용된다. 물질에 법칙이 있듯이 정신에도 법칙이 있으며, 그 법칙들은 종류는 다르되 외부 세계의 법칙들만큼 항구적이다.
신학 연구에 적용되어 온 방법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따로 다룰 수 없다. 그것들은 아마도 세 가지 일반 부류로 묶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사변적 방법, 둘째 신비주의적 방법, 셋째 귀납적 방법이다. 이 용어들은 사실 정밀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들은 교회에서 우세하였던 신학적 탐구의 세 가지 일반 방법을 가리키기에 더 나은 말이 없어 쓰일 뿐이다.
1.3 The Speculative Method
사변은 선험적인 방식으로 어떤 원리들을 가정하고, 그것들로부터 무엇이 있고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규정하려 한다. 사변은 모든 진리에 대하여 판단하거나, 정신의 법칙들로부터, 또는 우리 안의 사고하는 원리의 구성에 내포된 공리들로부터 무엇이 참인지를 결정한다. 어떤 선험적 철학적 가정 위에 세워진 모든 체계는 이 항목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이 사변적 방법이 신학에 적용되어 온 일반적 형태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이신론적이며 합리주의적인 형태**
1. 첫째는 자연과 인간 정신의 구성에서 발견되는 것 외에는 신적인 일들에 관한 어떠한 지식의 원천도 거부하는 형태다. 그것은 어떤 형이상학적·도덕적 공리들을 가정하고, 그것들로부터 자기가 기꺼이 인정하려는 모든 진리를 끌어낸다. 과거와 현세대의 이신론적이며 엄격히 합리주의적인 저술가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교의주의적 형태**
2. 둘째는 초자연적인 신적 계시를 인정하고 그러한 계시가 그리스도교 성경에 담겨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그렇게 계시된 모든 교리를 어떤 철학 체계의 형식으로 환원하는 이들이 택한 방법이다. 이는 πίστις(믿음)를 γνῶσις(지식)로, 곧 평범한 사람들의 믿음을 학식 있는 자들을 위한 철학으로 끌어올리려 한 많은 교부들이 행한 바였다. 이는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스콜라 학자들의 방법이기도 했으며,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인 안셀무스의 「쿠르 데우스 호모(Cur Deus Homo)」에서도 한 예를 찾을 수 있다. 후대에 볼프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계시의 교리들을 설명하고 입증하는 데 적용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은 자연신학의 보조 수단으로 쓰인다. 성경은 자연신학에 입증되어야 할 명제들을 제공한다. 따라서 철학자는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입증해야 한다.”(「자연신학」 서론 § 22; 프랑크푸르트·라이프치히, 1736년, 제1권 22쪽.) 이 방법은 여전히 유행하고 있다. 사람들은 공리 또는 이성의 제일 진리라 불리는 어떤 원리들을 세워 놓고, 그것들로부터 유클리드의 논증만큼이나 엄밀하고 가차 없는 일련의 논증으로 종교의 교리들을 연역한다. 이는 때로 성경의 교리들과, 또한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대다수 인류의 가장 깊은 도덕적 확신들까지 온통 무너뜨리는 데 이른다. 양심은 군림하는 오성(悟性) 앞에서 중얼거리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다. 옛 스콜라의 실재론 교리가 원죄와 구속이라는 성경의 교리들의 토대로 삼아지는 것도 바로 이 같은 방법의 정신에서다. 이 방법에는 다소 모호한 교의주의(Dogmatism)라는 용어가 붙여졌으니, 이는 그것이 성경의 교리들을 이성과 조화시키고 그 권위를 이성적 증거 위에 두려 하기 때문이다. 이 방법의 결과는, 성공한 만큼은 언제나 믿음을 지식으로 변질시키는 것이었으며,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이 한없이 변형되어 왔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가 아니라 이성의 권위에 근거하여 믿도록 요구받는다.
**초월주의자들**
3. 셋째로, 그리고 가장 두드러지게, 현대의 초월주의자들이 사변적 방법에 빠져 있다. 넓은 의미에서 그들은 이성 외에 더 높은 진리의 원천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합리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성을 보통의 합리주의자들이 여기는 것과는 매우 다른 무엇으로 만들기 때문에, 두 부류는 실제로는 서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초월주의자들은 또한 교의주의자들과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후자는 외적이며 초자연적이고 권위 있는 계시를 인정한다. 그들은 인간 이성으로 발견할 수 없는 진리들이 그것을 통해 알려진다고 시인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교리들이 일단 알려지고 나면 이성의 원리들 위에서 참임을 보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의 교리들과 더불어 영혼의 불멸과 장래의 응보 상태에 대하여 성경과 무관한 입증을 제시하려 한다. 초월주의자들은 사람 안에서, 그리고 인류의 역사적 발전 속에서 발견되는 것 외에는 어떠한 권위 있는 계시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는 사고의 과정을 통해 발견되고 확립되어야 한다. 성경이 진리를 담고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그것이 철학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한에서일 뿐이다. 이방의 현인들의 저작에 대하여도 같은 시인이 거리낌 없이 주어진다. 예컨대 다우프의 신학은 셸링의 철학에 지나지 않는다. 곧 그것은 그 철학이 하나님과 사람과 죄와 구속과 장래 상태에 관하여 가르치는 바로 그것을 가르친다. 마르하이네케와 슈트라우스는 성경에서 헤겔주의를 발견하며, 따라서 그들은 그만큼은 성경이 진리를 가르친다고 인정한다. 같은 학파의 철학자인 로젠크란츠는, 그리스도교가 절대 종교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 근본 원리, 곧 하나님과 사람의 하나됨이 자기 철학의 근본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백과전서(Encyklopädie)」(3쪽)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성에 부합하는 유일한 종교는 그리스도교이니, 이는 그것이 사람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형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신학은 인간학이요, 그 인간학은 신학이다. 사람의 신성(神性, Gottmenschheit)이라는 관념이 그리스도교의 열쇠이며, 레싱이 말하듯 그 안에 그것의 이성성(理性性)이 있다.”
이상이 신학에 적용된 사변적 방법의 주요 형태들이다. 이 주제들은 이후의 한 장에서 더 충분히 다루어질 것이다.
1.4 The Mystical Method
신비주의만큼 그 의미가 폭넓게 쓰여 온 말도 드물다. 여기서 그것은 사변과 대립되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변은 사고의 과정이요, 신비주의는 감정의 문제다. 전자는 사고하는 능력이 우리가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수단이라고 가정한다. 후자는 이성을 불신하여, 적어도 종교의 영역에서는 오직 감정에만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방법이 부당하게 강요되어, 그 인도 아래 성경과 전혀 무관하거나 성경의 교리들이 변형되고 왜곡된 신학 체계들이 세워지기도 했지만, 종교의 일들에서 우리의 도덕적 본성에 큰 권위가 돌아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람들이 논리적 오성, 곧 그들이 자기 이성이라 부르는 것에 이끌려, 성경에 어긋날 뿐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 본성을 해치는 결론들에 이르도록 자신을 내버려 둔 것은 교회에서 늘 큰 해악이었다. 이성에 어긋나는 것은 무엇도 참일 수 없음은 시인된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적 본성에 어긋나는 것은 무엇도 참일 수 없음을 기억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또한 양심은 이성보다 훨씬 덜 그르치기 쉬우며, 둘이 실제로든 외견상으로든 충돌할 때 우리의 도덕적 본성이 더 강하여,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권위를 내세우리라는 것도 인정되어야 한다. 양심은 영혼 안에서 마땅히 최고이되, 이성 및 의지와 더불어 무한한 이성이요 무한한 도덕적 탁월함이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신학에 적용된 신비주의**
신학에 적용된 신비주의는 두 가지 주요 형태, 곧 초자연적 형태와 자연적 형태를 띠어 왔다. 전자에 따르면,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영이 영혼과 직접 교통하시며, 그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키심으로써 영혼에 진리의 직관을 주시고,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이를 수 없는 종류와 정도와 범위의 지식에 이르게 하신다. 이것이 고대와 현대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이론이었다. 만일 이로써 단지, 하나님의 영이 그 비추시는 영향으로 신자들에게 성경에 객관적으로 계시된 진리들의 지식—특별하고 확실하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을 주신다는 것을 뜻한다면, 그것은 모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 인정하는 바일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 영의 내적 가르침을 붙들기 때문에, 그들은 종종 반대자들에게 신비주의자라 불린다. 그러나 여기서 뜻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다. 신비주의적 방법은 그 초자연적 형태에서, 하나님께서 영혼과 직접 교제하심으로써 그분의 말씀의 외적 가르침과 무관하게 감정을 통하여 직관의 방식으로 신적 진리를 계시하신다고 가정하며,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성경이 아니라 바로 이 내적 빛이라고 가정한다.
또 다른 형태, 곧 신비주의적 방법의 자연적 형태에 따르면, 종교적 지식의 원천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개인의 정황에 의해 자극되고 영향을 받는 사람의 자연적 종교 의식이다. 종교적 감정이 깊고 순수할수록 진리에 대한 통찰도 또렷해진다. 이 비춤 곧 영적 직관은 정도의 문제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종교적 본성이 있으므로, 그들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종교적 진리를 파악한다. 서로 다른 시대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의 종교 의식은 다양한 영향 아래 역사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이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라는 다양한 종교 형태가 있다. 이것들은 참과 거짓으로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더 순수함과 덜 순수함으로 관계 맺는다. 그리스도의 출현, 그분의 생애, 사역, 말씀, 죽음은 사람들의 마음에 놀라운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종교적 감정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깊이 일렁이고, 더 정화되고 고양되었다. 그리하여 그분의 영향에 자신을 내맡긴 그 세대의 사람들은 인류가 이전에 이른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종교적 진리의 직관을 가졌다. 이 영향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 영향 아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이는 자기 종교적 감정의 순수함과 고양됨에 비례하여, 사도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누린 것과 같은 신적인 일들의 직관을 가진다. 온전한 거룩함은 온전한 지식을 확보해 줄 것이다.
**신비주의적 방법의 귀결들**
이 이론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따라 나온다. (1) 확립된 신학적 의미에서의 계시와 영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계시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진리가 초자연적으로 객관적으로 정신에 제시되거나 전달됨이다. 그러나 이 이론에 따르면 그러한 진리의 전달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종교적 감정이 섭리적으로 자극되고, 그 자극으로 말미암아 정신이 진리를 더하거나 덜한 정도로 또렷이, 또는 더하거나 덜한 정도로 불완전하게 지각할 뿐이다. 성경적 의미의 영감이란 그 받는 자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에게 진리를 전함에 있어 무오하게 하는 영의 초자연적 인도하심이다. 그러나 이 이론에 따르면 교사로서 무오한 사람은 없다. 계시와 영감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도들의 시대에서만큼 오늘날의 어떤 신자들에게서도 온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2) 성경은 교리의 문제에서 무오한 권위를 갖지 않는다. 거기 담긴 교리적 명제들은 영에 의한 계시가 아니다. 그것들은 유대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 감정과 직관에 표현을 부여한 형식들일 뿐이다. 다른 문화에 속하고 다른 정황 아래 있던 사람들이라면 다른 형식을 쓰거나 다른 교리적 진술을 채택했을 것이다. (3)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교리의 체계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그러한 체계를 담고 있지도 않다. 그것은 하나의 생명이요 영향이요 주관적 상태다. 또는 그것이 어떤 용어로 표현되거나 설명되든, 그것은 각 그리스도인 개인 안에서 그의 감정과 신적인 일들에 대한 견해를 규정하는 하나의 힘이다. (4) 따라서 신학자의 의무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의식을 해석하는 것, 곧 하나님을 향한 자기 감정에 함축된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이 무엇인지, 그리스도를 향한 자기 감정에 담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들이 무엇인지, 그 감정들이 죄와 구속과 영생 등에 관하여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확인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슐라이어마허에게서 가장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옹호자를 만났으니, 그의 「신앙론(Glaubenslehre)」이 이 원리 위에 세워져 있다. 베를린 대학교에서 그의 신학 교수직 후임자였던 트베스텐에게서는 이 방법이 성경의 규범적 권위에 더 크게 복종된 채로 견지된다. 또 같은 학파의 다른 이들에게서는 그것이 극단에까지 밀고 나아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은 그 원리에만 관여할 뿐, 그 적용의 세부 사항이나 그에 대한 논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1.5 The Inductive Method
그것이 귀납적 방법이라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자연과학에 적용된 귀납적 방법과 본질적인 모든 점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다.
첫째, 학자는 어떤 가정들을 가지고 자연의 연구에 임한다. (1) 그는 자기 감각 지각의 신뢰성을 가정한다. 잘 확증된 감각의 증언에 의지할 수 없다면, 그는 탐구를 수행할 모든 수단을 빼앗긴다. 자연의 사실들은 우리의 감각 능력에 자신을 드러내며,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알려질 수 없다. (2) 그는 또한 자기 정신 작용의 신뢰성을 가정해야 한다. 그는 자기가 지각하고 비교하고 결합하고 기억하고 추론할 수 있음을, 또 이 정신 능력들을 그 정당한 행사에서 안전하게 의지할 수 있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3) 그는 또한 경험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우리 본성의 구성에 주어진 진리들의 확실성에 의지해야 한다. 곧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 같은 상황에서 같은 원인은 같은 결과를 낳으리라는 것, 원인은 단지 한결같은 선행 사건이 아니라 그 결과가 일어나는 이유를 자기 안에 담고 있는 것이라는 진리들이다.
둘째, 자연의 연구자는 디딜 이 발판과 다룰 이 도구들을 갖추고서, 자기 사실들을 지각하고 모으고 결합하는 일로 나아간다. 그는 그 사실들을 만들어 내는 체하지 않으며, 함부로 변형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다만 그것들이 실재하는지, 그리고 자기가 그것들을 다 가졌는지, 적어도 그것들로부터 끌어낼 어떤 추론이나 그 위에 세울 어떤 이론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는지를 확실히 하려고 주의할 뿐이다.
셋째, 이렇게 확인되고 분류된 사실들로부터 그는 그것들을 규정하는 법칙들을 연역한다. 무거운 물체가 땅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익숙한 사실이다. 관찰은 그것이 고립된 사실이 아니라, 모든 물질이 다른 모든 물질을 향해 끌리며, 이 경향 곧 인력이 물질의 양에 비례하고, 그 세기가 끌어당기는 물체들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모든 것이 관찰의 영역 안에서 보편적으로 또 항상 그러함이 밝혀지므로, 정신은 거기에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이 실제 관찰의 한계를 넘어 의지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이 법칙이 과거에 늘 작용해 왔으므로, 학자는 그것이 미래에도 작용하리라 확신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현대 학문의 방대한 체계가 세워졌으며, 천체들의 운동을 규정하는 법칙들,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들, 식물과 동물의 구조와 성장과 번식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확인되고 확립되어 왔다. 유의할 것은, 이 법칙들 곧 일반 원리들이 정신에서 끌어내어져 외부 대상들에 부여된 것이 아니라, 그 대상들로부터 끌어내어지거나 연역되어 정신에 새겨진 것이라는 점이다.
**신학에 적용된 귀납적 방법**
학자에게 자연이 그러하듯, 신학자에게는 성경이 그러하다. 성경은 그의 사실 창고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확인하는 그의 방법은 자연 철학자가 자연이 가르치는 바를 확인하기 위해 채택하는 방법과 동일하다. 첫째로, 그는 위에서 말한 모든 가정을 가지고 자기 과업에 임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본성에 새겨 두신 믿음의 법칙들의 타당성을 가정해야 한다. 이 법칙들에는 자연과학에 직접 적용되지 않는 것들도 포함된다. 예컨대 옳음과 그름 사이의 본질적 구별, 덕에 어긋나는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명하실 수 없다는 것, 선이 오게 하려고 악을 행하는 것이 옳을 수 없다는 것, 죄는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도덕적 존재의 구성에 심어 두셨으며 어떤 객관적 계시도 결코 거스를 수 없는 다른 비슷한 제일 진리들이다. 그러나 이 제일 원리들을 자의로 가정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자기 자신의 견해를, 아무리 굳게 붙든 것이라도, 내세워 그것을 “이성의 제일 진리”라 부르고, 그것을 그리스도교 교리의 원천이나 시금석으로 삼을 권리가 없다. 보편성과 필연성의 시험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무엇도 제일 진리 또는 믿음의 법칙의 범주에 정당하게 넣을 수 없으며, 많은 이들은 여기에 자명성을 더한다. 그러나 자명성은 보편성과 필연성에 포함되니, 자명하지 않은 것은 보편적으로 믿어질 수 없고, 자명한 것은 모든 지성적 피조물의 정신에 스스로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수집되어야 할 사실들**
둘째로, 그리스도인 신학자의 의무는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또 우리가 그분과 맺는 관계에 관하여 계시하신 모든 사실을 확인하고 수집하고 결합하는 것이다. 이 사실들은 모두 성경에 있다. 이것이 참인 까닭은, 자연에서, 또 사람의 구성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그분과 맺는 관계에 관하여 계시된 모든 것이 성경에 담기고 확증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오직 성경만이 개신교도의 종교다”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신학자가 학문으로 환원해야 할, 더 겸손히 말하자면 배열하고 조화시켜야 할 진리들이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외적 일들에, 부분적으로는 우리 본성의 구성에, 부분적으로는 신자들의 종교적 체험에 계시되어 있음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일들로부터 추론함에 그르치지 않도록, 우리는 그분의 말씀 안에서 자연이 계시하는 모든 것에 대한 더 또렷한 계시를 가진다.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식과 우리 본성의 법칙들을 오해하지 않도록, 그 원천에서 정당하게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이 성경에서 인정되고 확증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연적 정감의 작용을 영의 가르침으로 돌리지 않도록, 우리는 성경에서 모든 참된 종교적 체험의 규범과 표준을 발견한다. 성경은 진리뿐 아니라, 그 진리가 성령에 의해 구원의 능력으로 적용될 때 마음과 양심에 미치는 효과가 무엇인지도 가르친다.
**학자와 같은 규칙의 인도를 받아야 할 신학자**
셋째로, 신학자는 학자를 지배하는 것과 동일한 규칙의 인도를 받아 사실들을 수집해야 한다.
1. 이 수집은 부지런함과 주의로 행해져야 한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탐구 분야에나 오류에 빠질 큰 위험이 있다. 학문의 거의 모든 그릇된 이론과 신학의 거의 모든 그릇된 교리는 사실의 문제에 관한 잘못에 크게 기인한다. 한 저명한 자연학자는 어떤 결과를 확립된 사실로서 학계에 발표할 권한이 있다고 느끼기까지 한 가지 실험을 천 번 되풀이했다고 말했다.
2. 이 사실 수집은 주의 깊게 수행되어야 할 뿐 아니라, 포괄적이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남김이 없어야 한다. 불완전한 사실 귀납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오랜 세월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돈다고, 또 지구가 펼쳐진 평면이라고 믿었다. 신학에서도 개별 사실들에 대한 부분적 귀납이 그와 같은 심각한 오류들로 이끌었다. 성경이 그리스도께 전지(全知)를 돌린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로부터 그분께서 유한한 지성을 가지셨을 리 없으며, 그분 안에서 로고스가 동물적 생명을 지닌 인간의 몸을 입었을 뿐이라고 추론되었다. 그러나 전지뿐 아니라 무지와 지적 진보도 우리 주님께 돌려진다는 것 또한 성경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두 사실이 다 그분의 위격 교리에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 신적 지성뿐 아니라 인간적 지성도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죄 없는 사람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성경에서 그리스도께 돌려진다는 것은 사실이며, 하나님에 대하여 말해지는 모든 것이 우리 주님께 돌려진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두 그리스도, 곧 두 위격—하나는 인간적이요 다른 하나는 신적인—이 있어서, 그들이 마치 영이 신자 안에 거하시듯, 또는 악한 영들이 귀신 들린 자들 안에 거하듯 함께 거하였다고 추론되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그리스도의 개별적 인격성을 증명하는 수많은 사실을 간과하였다.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이도,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신 이도 동일한 위격이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변화를 확보하기 위해 의도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소키누스는 그분의 죽음이 죄에 대한 속죄 또는 공의의 만족이었음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후자의 사실도 전자만큼이나 또렷이 계시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에 관한 교리를 진술할 때 두 가지가 다 고려되어야 한다.
**완전한 귀납의 필요성**
우리의 교리적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들의 포괄적 귀납이 필요함을 보여 주는 예는 한없이 들 수 있다. 이 사실들을 고의로 부정하거나 부주의하게 간과하거나 부당하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자연의 참된 연구자가 자기 귀납에서 정직하듯, 우리도 여기서 정직해야 한다. 학자조차 때로 자기가 아끼는 이론에 어긋나는 사실들을 숨기거나 왜곡하도록 이끌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부정직에 대한 유혹은 그들의 경우가 신학자의 경우보다 훨씬 덜하다. 종교의 진리들은 자연과학의 진리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들은 마음과 양심에 사무친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일깨우거나 그들의 소망을 위협할 수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들을 간과하거나 왜곡할 강한 유혹 아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계시하셨는지 참으로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알리신 사실들을 수집하고 그것들에 마땅한 무게를 부여함에 양심껏 부지런하고 신실해야 한다. 지질학자가 이른 시대의 퇴적층에서 사람 손으로 만든 도구들을 발견한다면, 그는 그것들이 자연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그 퇴적층의 연대에 관한 자기 결론을 수정하거나, 사람의 존재를 더 이른 시기로 소급해야 한다. 달리 도리가 없다. 학문은 사실을 만들 수 없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공의에 대한 만족이었다고 단언한다면, 신학자는 자기 속죄 이론에 맞추려고 공의를 자비 속으로 녹여 넣어서는 안 된다. 성경이 사람들이 죄 가운데 태어난다고 가르친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모면하려고 죄의 본성을 바꾸어, 그것을 악으로 향하는 경향일 뿐 실제로는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영혼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의식적 활동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적 사실이라면, 우리의 인간론이 영혼은 몸 없이는 어떤 개별성도 활동도 없다고 가르친다는 이유로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이 의식적 활동을 영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들 모두를 온전히 아우르도록 우리의 체계를 세워야 한다.
**사실들로부터 연역되어야 할 원리들**
넷째로, 자연과학에서와 같이 신학에서도 원리는 사실들로부터 끌어내어지는 것이지 사실들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다. 물질의 속성들, 운동과 자기(磁氣)와 빛 등의 법칙들은 정신이 지어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고의 법칙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실들로부터의 연역이다. 탐구자는 물질 현상을 규정하는 법칙들이 무엇인지를 관찰로 보거나 확인하는 것이지, 그 법칙들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로 뒷받침되지 않는 한, 학문의 문제에 관한 그의 사변은 무가치하다. 신학자가 덕이나 죄나 자유나 도덕적 의무의 본성에 관한 어떤 이론을 가정해 놓고, 그런 다음 성경의 사실들을 자기 이론에 맞추어 설명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비학문적이다. 그가 취할 유일한 올바른 길은 덕과 죄와 자유와 의무에 관한 자기 이론을 성경의 사실들로부터 끌어내는 것이다. 그는 자기 일이 자기 진리 체계를 내세우는 것(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체계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드러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니,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대한 문제다. 그가 성경의 사실들이 참이라고 가정하는 바를 믿을 수 없다면, 그렇다고 말하게 하라. 성경 기자들은 그들의 교리를 갖게 하고, 그는 자기 자신의 교리를 갖게 하라. 오랜 씨름 끝에 현대의 적지 않은 주석가와 신학자가 실제로 이 입장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기가 구약의 교리들로 여기는 것을 제시하고, 다음에 복음서 기자들의 교리들을, 다음에 사도들의 교리들을, 그런 다음 자기 자신의 교리들을 제시한다. 이는 공정하다. 그러나 성경의 구속력 있는 권위가 인정되는 한, 성경의 사실들을 우리가 미리 품은 이론들에 맞추어 밀어 넣으려는 유혹은 매우 강하다. 어떤 사람이 행위의 확실성은 행위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고, 또 자유로운 행위자는 (그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한) 자기에게 가해지는 아무리 큰 영향에도 언제나 반대로 행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는 성경이 그 반대를 가르친다는 것을 필연코 부정할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의지와 의지 행위를 절대적으로 다스리심을 증명하는 모든 사실을 둘러대어 없애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가 죄성은 오직 법을 거스르는 지성적이고 자발적인 행위에 대하여만 말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는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든 사람들이 죄 가운데 태어남을 부정해야 한다. 그가 능력이 의무를 한정한다고 믿는다면, 그는 성경과 무관하게, 또는 성경에 맞서—어느 쪽이든 상관없이—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을 조금도 받지 않고도 언제 어느 때나 회개하고 믿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며 죄 없이 살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가 무죄한 자가 죄 있는 자를 위해 형벌의 악을 정당하게 당할 수 있음을 부정한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지셨음을 부정해야 한다. 그가 한 사람의 공로가 다른 사람들의 사면과 구원의 사법적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부정한다면, 그는 칭의에 관한 성경의 교리를 배척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철학으로 성경을 설명하는 대신 성경으로부터 우리 철학을 끌어내기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계시된 진리의 온 체계가 송두리째 파괴되고 말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성경이 죄가 유전된다고 가르친다면, 우리는 그 사실에 맞는 죄 이론을 채택해야 한다. 성경이 사람들은 성령의 초자연적 도우심 없이는 회개하거나 믿거나 영적으로 선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면,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의무 이론을 그 사실에 부합하게 만들어야 한다. 성경이 우리가 아담의 첫 죄의 죄책을 진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책을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셨다고 가르친다면, 이것들은 우리의 원리들을 그것들에 일치시켜야 할 사실들이다. 신학의 모든 분야에서—하나님의 본성, 그분이 세상과 맺는 관계, 구원의 계획,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죄의 본성, 신적 은혜의 작용에 관하여—사람들이 성경의 사실들을 취하여 그것들이 어떤 원리를 함축하는지, 어떤 철학이 그 밑에 깔려 있는지를 보는 대신, 성경과 무관하게 자기 철학을 채택하고 성경의 사실들을 거기에 굽히게 하였음을 보이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비철학적이다. 이론이 사실에 의해 규정되어야 하며 사실이 이론에 의해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학문의, 그리고 그 가운데 신학의 근본 원리다. 자연과학이 귀납의 원리가 인정되고 신실하게 수행되기 전까지 혼돈이었던 것처럼, 신학도 사람들이 동일한 원리를 하나님의 말씀 연구에 적용하기를 거부할 때에는 지푸라기만큼의 가치도 없는 인간 사변의 뒤범벅이 되고 만다.
1.6 The Scriptures contain all the Facts of Theology
이는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존재로 구성되어 있음에서 비롯되는 지성적·도덕적 직관 진리들을 인정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영의 내적 가르침, 다시 말해 우리의 종교적 체험이 우리의 믿음에 행사하는 통제하는 힘을 인정하는 것과 완전히 양립한다. 그 두 가지 이유는 이러하다. 첫째, 모든 진리는 서로 일관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모순하실 수 없다. 그분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본성의 구성으로 우리가 어떤 것을 믿도록 강요하시면서, 그분의 말씀에서는 그 반대를 믿으라고 명하실 수 없다. 둘째, 우리 본성의 구성이나 종교적 체험이 가르치는 모든 진리는 성경에서 인정되고 확증된다. 이것이 하나의 안전장치요 한계다. 우리는 이런저런 원리가 직관적으로 참이라거나, 이런저런 결론이 입증 가능하게 확실하다고 가정하여, 그것들을 성경이 따라야 할 표준으로 삼을 수 없다. 자명하게 참인 것은 그것이 참임이 증명되어야 하며, 또 언제나 성경에서 참으로 인정된다. 신학의 온 체계들이 이른바 직관 위에 세워지거니와, 만일 모든 사람이 자기 직관—사람들이 흔히 자기의 강한 확신을 그렇게 부르듯—을 떠받들 자유가 있다면, 세상에는 사상가의 수만큼이나 많은 신학이 있게 될 것이다. 같은 말이 종교적 체험에도 적용된다. 영의 내적 가르침에서 일어나는 확신보다 더 친밀하고 거역할 수 없는 확신의 형태는 없다. 모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그분의 증거 곧 입증하심 위에 근거한다(고전 2:4). 신자들은 거룩하신 이에게서 기름 부으심을 받았으며, 그들은 진리를 알고 또 모든 거짓(곧 거짓 교리)이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안다. 이 내적 가르침은 어떤 궤변으로도 흐리게 할 수 없고 어떤 논변으로도 흔들 수 없는 확신을 낳는다. 그것은 의식 위에 근거하여, 사람이 자기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 떠나도록 논변으로 설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하나님께 이렇게 가르침 받은 것이 참이라는 확신에서 떠나도록 설득할 수 없다. 그러나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 이 영의 내적 가르침 곧 입증하심은 성경에 객관적으로 계시된 진리들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사도가 말하듯, 그것은 우리가 거저 주신 것들, 곧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들을 알게 하시려고 주어진다(고전 2:10-16). 그러므로 그것은 새로운 진리들의 계시가 아니라, 정신이 이미 계시된 것들의 진리됨과 탁월함과 영광을 파악하도록 정신을 비추심이다. 둘째, 이 체험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창조자요 구속자와 맺는 관계에 관한 사실들을 줄 뿐 아니라, 그 진리들이 신자들의 마음에 미치는 정당한 효과들도 기록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내적 체험을,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거룩한 사람들의 체험과 일치함을 보일 수 없는 한, 근거나 인도자로 내세울 수 없다.
**영의 가르침**
영의 내적 가르침 곧 종교적 체험이 외적 계시를 대신할 수 없고 믿음의 규범의 일부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믿음의 규범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규정하는 데 더없이 값진 인도자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가르쳤고 중세 내내 라틴 교회의 더 순수한 신학자들이 가르쳤으며, 종교개혁자들이, 특히 칼뱅과 제네바의 신학자들이 내세운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영의 내적 가르침에 우리 신학을 규정함에 있어 그 마땅한 자리가 허락된다는 데 있다. 문제는 무엇이 오성에 참인가가 먼저요 주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새롭게 된 마음에 참인가다. 그 노력은 성경의 단언들을 사변적 이성과 조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이성을 그분의 말씀에 계시되고 우리 내적 생명 속에서 그분의 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에 복종시키려는 것이다. 호소가 오직 오성에만 향한다면, 사람들이 자기는 자발적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도록 이끌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호소가 모든 사람의, 특히 모든 그리스도인의 내적 체험에 향한다면, 그 반대의 결론에 이른다. 우리는 자발적 행위뿐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대하여도, 그 상태가 우리 자신의 작용의 결과가 아니고 의지의 힘에 종속되지 않을 때조차 죄성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죄 아래 팔린 것, 죄의 종이 된 것, 죄를 내재하고 타고나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 또는 법으로서 지닌 것을 의식한다. 이것이 성경의 교리요, 또한 하나님의 영의 영향 아래 있을 때 우리 종교 의식의 가르침이다. 신학의 참된 방법은 종교적 체험의 사실들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성경에 의해 마땅히 확증될 때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적 진술들을 해석하도록 허락될 것을 요구한다. 영의 이 내적 가르침이 어찌나 정당하고 강력한지, 사람들이 두 개의 신학—하나는 지성의 신학이요 다른 하나는 마음의 신학—을 가진 것을 보기란 드문 일이 아니다. 전자는 신경(信經)과 신학 체계에서, 후자는 그들의 기도와 찬송에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모든 교파의 참 그리스도인들의 경건 저작들이 뒷받침하지 않는 것은 무엇도 자기 신학에 들이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 사람에게 안전할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도, 루터교도, 개혁파, 항론파(抗論派)가 받아들이고 인정한 그러한 저작들로부터, 세상의 어떤 지성적이고 경건한 칼뱅주의자라도 만족시킬 만한 바울적 또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신학 체계를 세우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참된 방법은 귀납적 방법이니, 그것은 자연의 사실들이 자연과학의 내용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경이 신학의 내용을 이루는 모든 사실 곧 진리를 담고 있다고 가정한다. 또한 이 성경적 사실들이 서로 맺는 관계, 그것들에 함축된 원리들, 그것들을 규정하는 법칙들이 그 사실들 자체 안에 있으며, 자연의 법칙들이 자연의 사실들로부터 연역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사실들로부터 연역되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어느 경우에도 원리들이 정신에서 끌어내어져 사실들에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두 분야에서 똑같이 원리 곧 법칙이 사실들로부터 연역되어 정신에 의해 인정된다.
2.1 Its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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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The Facts of Nature Reveal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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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Insufficiency of Natural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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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Christian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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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Meaning and Usage of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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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Deistical R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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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The Second Form of R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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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Proper Office of Reason in Matters of Reli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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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Relation of Philosophy and Rev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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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Office of the Senses in Matters of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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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Meaning of the Words Enthusiasm and Myst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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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Mysticism in the Early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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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Mysticism during the Middle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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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Quie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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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The Quakers or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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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Objections to the Mystical The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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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Statement of the Doct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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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Roman Catholic Doctrine concerning the Scrip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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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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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The Office of the Church as Tea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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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Examination of the Romish Doct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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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Examination of the Doctrine of the Church of Rome on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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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Office of the Church as a Tea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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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Statement of the Doct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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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The Scriptures are Infallible, i. e., given by Inspiration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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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Adverse The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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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The Completeness of the Scrip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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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Perspicuity of the Scriptures. The Right of Private Judg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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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Rules of interpre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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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The Knowledge of God is Inn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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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The Knowledge of God is not due to a Process of 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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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Knowledge of God not due exclusively to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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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Can the Existence of God be pro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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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The Ontological Arg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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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The Cosmological Arg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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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The Teleological Arg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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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Objections to the Argument from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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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The Moral, or Anthropological Arg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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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What is meant by Anti-The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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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Polythe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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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Hylozo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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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Mater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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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Panthe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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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God can be 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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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God cannot be fully 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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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Hamilton's Doct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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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Definitions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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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Divine Attribu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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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Classification of the Divine Attribu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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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Spirituality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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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Infi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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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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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Immut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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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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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The Will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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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 The Power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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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 Holiness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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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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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 The Goodness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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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The Truth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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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Sovereig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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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Preliminary Rema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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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Biblical Form of the Doct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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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The Transitio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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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The Church Doctrine as presented by the Council of N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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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Points decided by these Counc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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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Examination of the Nicene Doct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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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Philosophical Form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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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Testimony of the Old Test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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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General Characteristics of the New Testament Teaching conce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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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Particular Passages which Teach the Divinity of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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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His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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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The Office of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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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History of the Doctrine concerning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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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The Nature of the Decr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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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Objections to the Doctrine of Divine Decr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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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Different Theories concerning the Origin of the Unive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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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Mediate and Immediate Cre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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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Proof of the Doct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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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Objections to the Doct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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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Design of the Cre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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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The Mosaic Account of the Cre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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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Preser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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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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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Different Theories of the Divine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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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Principles involved in the Scriptural Doctrine of Pr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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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Their Nature. Meaning and Usage of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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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The Possibility of Mira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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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Can a Miracle be known as s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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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The Value of Miracles as a Proof of a Divine Rev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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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Their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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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Their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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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Their Employ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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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Evil Ang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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