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Introduction. Philip Melanchthon Presents His Greeting to the Reader.
필립 멜란히톤이 독자에게 인사를 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한 환난과 위험을 마땅히 견뎌야 한다고 믿으며, 본분에 대한 우리의 이 신실함이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확신하고, 우리에 관한 후대의 판단이 더 공정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교 교리의 여러 주제, 곧 교회 안에서 그 존재가 가장 중대한 주제들이 우리 신학자들에 의해 드러나고 해명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주제들이 전에 수도사들과 교회법학자들과 궤변적 신학자들의 글 속에서 어떤 종류의 견해 아래, 또 얼마나 위험하게 묻혀 있었는지를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생각은 없다. [이는 나중에 다루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가장 큰 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많은 선한 사람들의 공적 증언을 가지고 있다. 곧 여러 필수적인 주제에 관하여 이 교리가, 우리 대적들의 책 어디에서나 읽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가르쳤다는 증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대의를, 언젠가 이 논쟁들을 심판하실 그리스도께 맡기며, 그분께서 고난받고 흩어진 교회들을 굽어보시고, 그들을 경건하고 영원한 일치로 되돌려 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러므로 알려지고 분명한 진리가 발아래 짓밟힌다면, 우리는 이 대의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맡기겠다. 그분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와 모든 버림받은 자의 재판장이시니, 우리가 확실히 아는 대로 이 대의를 바르게 심판하시고 판결하실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는 주의 거룩한 복음이며 주의 대의입니다. 주께서 마귀로 말미암아 불안과 고통을 겪는 주의 교회들과 작은 무리들을 굽어보시고, 주의 진리 안에서 그들을 붙드시고 강하게 하소서. 모든 위선과 거짓을 무너뜨리시고, 평화와 일치를 주셔서, 주의 영광이 나아가게 하시고, 음부의 모든 권세에 맞서 강한 주의 나라가 끊임없이 자라고 흥하게 하소서.]
I Article I: Of God.
제1조: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 고백의 제1조를 우리 대적들도 인정한다. 이 조항에서 우리는 나뉘지 않은 하나의 신적 본질이 있으며, 그러면서도 같은 신적 본질을 지니시고 영원히 함께 계시는 세 구별된 위격,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심을 믿고 가르친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언제나 이 조항을 가르치고 변호해 왔으며, 이 조항이 성경에 무너뜨릴 수 없는 확실하고 견고한 증언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달리 생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회 밖에 있으며 우상숭배자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라고 한결같이 단언한다.
II Article II (I): Of Original Sin.
제2조(제1조): 원죄에 관하여.
원죄에 관한 제2조를 대적들은 인정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 제시한 원죄의 정의를 비난하는 식으로 그렇게 한다. 여기 바로 문턱에서 황제 폐하께서는 「반박서」의 저자들이 판단력에서뿐 아니라 정직함에서도 부족했음을 발견하실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마음으로 원죄가 포함하는 것들을 지나가는 길에 열거하고자 했을 뿐인데, 이 사람들은 악의적인 해석을 꾸며 내어, 그 자체로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는 명제를 교묘하게 왜곡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 믿음이 없는 것은 현실적 죄책이다"라고 하며, 따라서 그것이 원죄의 죄책임을 부인한다.
그러한 궤변이 황제의 회의에서가 아니라 학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 그러나 이 궤변은 아주 쉽게 반박될 수 있지만, 모든 선한 사람이 우리가 이 문제에서 터무니없는 것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독일어 고백서를 살펴보기를 청한다. 이는 우리를 새로운 것을 지어냈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Weiter wird gelehrt, dass nach dem Fall Adams alle Menschen, so natuerlich geboren werden, in Suenden empfangen und geboren werdenen, das ist, dass sie alle von Mutterleibe an voll boeser Lueste und Neigung sind, keine wahre Gottesfurcht, keinen wahren Glauben an Gott von Natur haben koennen. [또한 가르치기를, 아담의 타락 이후 본성적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나니, 곧 그들 모두는 모태로부터 악한 욕망과 성향으로 가득하며, 본성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두려움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육신적 본성을 따라 번식된 자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신뢰를 산출하는 행위뿐 아니라 그럴 능력이나 은사까지도 부인한다는 것을 증언한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난 자들이 정욕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참된 두려움과 신뢰를 산출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흠잡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선한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충분히 변명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라틴어 서술은 본성에게서 [죄 없는 유아에게서조차] 그 능력을, 곧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신뢰를 산출할 은사와 활력을 부인하며, 또한 어른들에게서는 [마음의 이 타고난 악한 성향에 더하여] 그 행위들도 부인한다. 그래서 우리가 정욕을 언급할 때, 우리는 그 행위나 열매만이 아니라 본성의 항구적인 성향[우리가 성령과 믿음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그치지 않는 내면의 악한 성향]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후에 우리의 서술이 통상적이고 고대적인 정의와 일치한다는 것을 더 충분히 보일 것이다. 먼저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 말들을 즐겨 쓰게 된 의도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학파에서 대적들은 그들이 일컫는 대로 "원죄의 질료가 정욕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정의를 세울 때 이것을 빠뜨려서는 안 되었으니, 특히 어떤 이들이 종교의 교사답지 않은 방식으로 이에 관해 철학하고 있는 이때에는 더욱 그러하다[이 타고난 악한 욕망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경을 따르기보다 이방인처럼 철학에서 끌어와 말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원죄가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부패나 타락이 아니라, 다만 종살이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타고난 악한 본성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흠 또는 부과된 짐이나 부담]일 뿐이며, 아담에게서 번식된 자들이 다른 이[곧 아담]의 죄책 때문에, 자기 자신의 어떤 타락도 없이 그것을 지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들은, 여종에게서 난 자들이 종이 되어, 자기 자신의 본성적 흠 없이 다만 어머니의 불행 때문에 그 처지를 지게 되는 것처럼, 아무도 원죄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정죄받지 않는다고 덧붙인다[그들 자신으로는 다른 사람들처럼 흠 없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죄는 타고난 악이 아니라 아담 이래로 우리가 지게 된 결함과 짐이며, 그렇다고 우리가 그로 인해 인격적으로 죄와 유전된 수치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 불경한 견해가 우리에게 못마땅함을 보이기 위해 우리는 "정욕"을 언급하였고, 가장 선한 의도로 그것을 "질병"이라 일컫고 설명하여, "사람의 본성이 부패하고 허물로 가득한 채 태어난다"[사람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전체 본성을 지닌 온 인격이 유전병에 걸린 것처럼 죄 가운데 태어난다]고 하였다.
참으로 우리는 정욕이라는 말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믿음이 결여되어 있다"고도 말하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도로 이것을 덧붙였다. 스콜라 교사들도 교부들에게서 받은 원죄의 정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여 근본의 죄를 가볍게 본다. 그들은 그 불씨[혹은 악한 성향]에 관하여 그것이 몸의 한 성질[몸의 흠]이라고 주장하며, 늘 그러하듯 어리석게도 이 성질이 사과의 전염에서 온 것인지 뱀의 입김에서 온 것인지, 또 약으로 더 늘어나는지 묻는다. 이런 물음들로 그들은 핵심을 억눌러 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근본의 죄를 말할 때 인간 본성의 더 심각한 허물들,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함, 하나님을 멸시함,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확신이 없음, 하나님의 심판을 미워함,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폭군에게서 도망치듯] 하나님에게서 도망침, 하나님을 향한 분노, 은혜에 대한 절망, 눈앞의 것들[돈, 재물, 친구]에 신뢰를 둠 따위를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율법에 극도로 어긋나는 이 질병들을 스콜라 학자들은 주목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은 그동안 인간 본성에, 만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행위의 실체에 따라 하나님의 계명을 이행할 손상되지 않은 힘이 있다고 돌리며, 자기들이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자기 힘으로 만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 원의(原義)를 지니는 것[낙원에서 온전히 순결하고 거룩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스콜라 학자들이 확신 있게 단언하듯 인간 본성에 스스로 만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할 만한 그런 힘이 있다면, 원죄란 대체 무엇이 되겠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힘]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인간의 힘이 스스로 만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이행할 수 있다면, 성령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 대적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을 품고 있는지 누가 보지 못하겠는가? 그들은 인간 본성의 가벼운 질병들은 인정하지만 더 심각한 질병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관하여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를 깨우치며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탄식하니[시편 13편과 다른 몇몇 시편이 말하는 대로, 시 14:1-3; 5:9; 140:3; 36:1], 곧 육신적 안일, 하나님을 멸시함, 하나님을 향한 미움, 그리고 우리와 함께 태어난 이와 비슷한 허물들이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불어 넣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태어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콜라 학자들이 본성의 완전함[이성의 빛]에 관한 철학을 그리스도교 교리와 뒤섞고, 자유 의지와 거기서 나오는 행위들에 충분한 것 이상을 돌리며, 사람이 철학적 또는 시민적 의(우리도 그것이 이성에 종속되며 어느 정도 우리 능력 안에 있음을 고백한다)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가르친 뒤로는, 그들은 사람의 본성의 내적 더러움을 볼 수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판단될 수 없으며, 스콜라 학자들은 그들의 논의에서 그 말씀을 자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원죄를 서술할 때 정욕도 언급하고, 사람의 본성적 힘에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신뢰를 부인한 까닭이다. 우리는 원죄가 이 질병들도,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함, 하나님을 멸시함,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신뢰가 없음,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함도 포함한다는 것을 가리키고자 하였다. 이것들이 인간 본성의 으뜸가는 허물이며, 특히 십계명의 첫째 돌판과 충돌한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말하지도 않았다. 바르게 이해된 고대의 정의는 "원죄는 원의의 결여이다"[낙원에서의 첫 순결과 의의 결여]라고 할 때 정확히 같은 것을 표현한다. 그러나 의란 무엇인가? 여기서 스콜라 학자들은 변증적 물음들을 두고 다투지만, 원의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에서 의는 십계명의 둘째 돌판[이웃을 섬기는 선한 행위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첫째 돌판도 포함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원의는 몸의 성질들의 고른 균형[그들이 주장하듯 완전한 건강, 모든 면에서 순수한 피, 손상되지 않은 몸의 힘]뿐 아니라 이 은사들, 곧 하나님에 대한 아주 확실한 지식,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에 대한 확신, 또는 적어도 이 정서들을 내어 줄 올바름과 능력도 포함해야 했다[그러나 저 고귀한 첫 피조물에게서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과 그분의 일을 아는 마음속의 밝은 빛이었다]. 성경은 창세기 1장 27절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졌다고 말할 때 이를 증언한다. 이것은 사람 안에 하나님을 파악하고 하나님이 비치는 그러한 지혜와 의가 깃들여 있었다는 것, 곧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같은 은사들이 주어졌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레나이우스와 암브로시우스가 하나님과의 닮음을 그렇게 해석하는데, 그중에서도 후자는 이런 취지의 많은 말을 할 뿐 아니라 특히 이렇게 선언한다. 하나님이 항상 계시지 않은 그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서 5장 9절과 골로새서 3장 10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의와 진리임을 보여 준다. 또한 롬바르두스도 원의가 곧 하나님이 사람에게 심으신 하나님과의 닮음 자체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대인들의 견해를 열거하거니와, 이는 형상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과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대의 정의는, 죄가 의의 결여라고 말할 때, 사람의 낮은 능력에 관한 순종만을 부인하는 것[사람이 그 몸과 그 가장 천하고 낮은 기능들에서만 부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에 대한 확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 또는 적어도 이 정서들을 산출할 능력[이런 일들을 향한 사랑과 갈망을 일으키는 마음속의 빛]도 부인한다. 신학자들 자신도 그들의 학파에서, 이것들이 어떤 은사들과 은혜의 도움 없이는 산출되지 않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이해되도록, 우리는 바로 이 은사들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확신이라 일컫는다. 이 사실들로 보아 고대의 정의가 우리가 말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을 말함이 드러난다. 곧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확신을,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위를 산출할 은사와 능력까지도 부인하는 것이다[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선한 마음, 곧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며, 단지 우리가 어떤 온전히 선한 행위를 행하거나 이룰 수 없다는 것만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에 나오는 정의도 같은 취지이니, 그는 원죄를 정욕[악한 욕망]으로 정의하곤 한다. 그가 뜻하는 바는, 의가 상실되었을 때 정욕이 그 자리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병든 본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믿을 수 없으므로 육신적인 것들을 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편안할 때는 멸시하고, 철저히 두려움에 떨 때는 미워한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결함과 그 자리에 들어온 악한 습성을 둘 다 포함한다. 참으로 정욕은 몸의 성질들의 부패만이 아니라, 더 높은 능력들에서도 육신적인 것들로 향하는 악한 돌이킴이다. 또한 동시에 사람에게, 성령으로 온전히 멸하여지지 않은 정욕과 만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함을 함께 돌리는 자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죄를 서술하면서 이 두 가지를 다 표현한 것은 옳았으니, 곧 이 결함들,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할 수 없음, 그리고 마찬가지로 정욕을 지님이다. 정욕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육신적인 것들을 구하니, 곧 몸의 쾌락만이 아니라 육신적 지혜와 의도 구하며,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이것들을 선한 것으로 신뢰한다. 고대인들[아우구스티누스와 그 밖의 이들]뿐 아니라 더 근래의 이들[교사들과 스콜라 학자들], 적어도 그들 가운데 더 지혜로운 이들도, 원죄가 동시에 참으로 이것들, 곧 내가 열거한 결함들과 정욕임을 가르친다. 토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원죄는 원의의 상실을 포함하며, 이와 더불어 영혼의 부분들의 무질서한 성향을 포함한다. 따라서 그것은 순전한 상실이 아니라 부패한 습성[무언가 적극적인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말한다. 원죄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것이 지나친[억제되지 않은] 정욕이라고 답하는 것이 옳다. 또한 그것이 마땅히 있어야 할 의의 결여라고 답하는 것도 옳다. 그리고 이 두 답 가운데 하나에 다른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후고도 같은 견해이니, 그는 원죄가 정신 안의 무지요 육신 안의 정욕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그는 우리가 태어날 때 하나님에 대한 무지, 불신앙, 불신, 멸시, 하나님에 대한 미움을 지니고 나온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가 무지를 언급할 때 이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견해들[가장 근래의 교사들의 견해까지도]은 성경과도 일치한다. 바울은 때로 그것을 명시적으로 결함[신적 빛의 결여]이라 일컬으니,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한다"고 한다. 다른 곳, 로마서 7장 5절에서는 그것을 우리 지체 안에서 역사하여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정욕이라 일컫는다. 우리는 이 두 부분에 관한 더 많은 구절을 인용할 수 있겠으나, 명백한 사실에 관해서는 증언이 필요 없다. 분별 있는 독자라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믿음이 없는 것이 현실적 죄책 이상임을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새로워지지 않은 본성 안에 머무르는 결함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죄에 관하여 우리는 성경과도 보편 교회와도 다른 것을 전혀 주장하지 않으며, 다만 근래 신학자들의 궤변적 논쟁으로 덮여 있던 성경과 교부들의 가장 중요한 선언들을 부패에서 정결하게 하여 다시 빛으로 회복시킨다. 근래 신학자들이 교부들이 결함[원의의 결여]을 말할 때 무엇을 뜻했는지 주목하지 못했음은 주제 자체로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죄에 대한 지식은 필요하다. 우리의 질병이 인식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은혜의 위대함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복음이 제시하는 형언할 수 없이 큰 신적 호의와 은혜의 보화를 위해 아무도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갈망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9장 12절, 마가복음 2장 17절에서 말씀하시듯,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다.] 우리의 마음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과 확신이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 한[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수치 가운데 있는 비참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한], 사람의 모든 의는 하나님 앞에서 한낱 위선[과 가증한 것]일 뿐이다. 이런 까닭에 예언자 예레미야는 31장 19절에서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넓적다리를 쳤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시편 116편 11절에서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다", 곧 하나님에 관하여 바르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 대적들은 루터가 "원죄는 세례 후에도 남아 있다"고 쓴 것 때문에 그를 비난한다. 그들은 이 조항이 레오 10세에 의해 정당하게 정죄받았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황제 폐하께서는 이 점에서 명백한 중상을 발견하실 것이다. 우리 대적들은 루터가 원죄가 세례 후에도 남아 있다는 이 말을 어떤 의미로 의도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는 늘 이렇게 썼으니, 곧 세례는 원죄의 죄책을 제거하지만, 그들이 일컫는 대로 그 죄의 질료, 곧 정욕은 남는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그 질료에 관하여, 세례로 주어진 성령이 그 정욕을 죽이기 시작하시고 사람 안에 새로운 움직임[새로운 빛, 새로운 감각과 영]을 일으키신다고 덧붙였다. 같은 방식으로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하기를, 죄는 세례에서 사하여지되,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식이 아니라 전가되지 않는 식으로 사하여진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죄가 존재한다는 것, 곧 전가되지는 않으나 남아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고백한다. 그리고 이 판단은 그를 이은 자들에게 매우 흡족하여 교령들에도 인용되었다. 또한 율리아누스를 반박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지체 안에 있는 율법은 영적 거듭남으로 폐하여졌으되, 죽을 육신 안에 남아 있다. 신자들이 거듭나는 성례로 죄책이 사하여졌으므로 폐하여졌고, 신자들이 맞서 싸우는 욕망들을 일으키므로 남아 있다. 우리 대적들은 루터가 이렇게 믿고 가르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 없으므로, 이 술책으로 무죄한 사람을 짓밟으려고 그의 말을 왜곡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욕이 형벌이지 죄가 아니라고[하나의 부담이며 부과된 형벌이지, 사망과 정죄에 매인 그런 죄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루터는 그것이 죄라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를 정욕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하였다. 이 견해에 무언가 불리한 점이 있다면,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다투게 하라. 게다가 바울은 로마서 7장 7절과 23절에서 말한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욕(정욕)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또한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 증언들은 어떤 궤변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다. [모든 마귀, 모든 사람이 그것들을 무너뜨릴 수 없다.] 그것들은 정욕을 분명히 죄라고 일컫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전가되지 않으나, 본성상 용서받지 못한 곳에서는 사망에 합당한 것이다. 이처럼 모든 논쟁을 넘어 교부들은 그렇게 믿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긴 논의에서, 사람 안의 정욕이 허물이 아니라 아디아포론(중립적인 것)이라고, 마치 몸의 색이나 병약함이 아디아포론이라 일컬어지듯[검은 몸을 가지거나 흰 몸을 가지는 것이 선도 악도 아니듯] 여긴 자들의 견해를 반박한다.
그러나 대적들이 그 불씨[혹은 악한 성향]가 아디아포론이라고 주장한다면, 성경의 많은 구절뿐 아니라 그야말로 온 교회[와 모든 교부]가 그들을 반박할 것이다. [온전한 동의가 아니라 다만 그 성향과 욕망만 있을지라도] 이 일들이, 비록 완전한 일치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아디아포라라고 누가 감히 말하였겠는가? 곧 하나님의 진노에 관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의심함, 하나님의 심판에 분노함, 하나님이 환난에서 곧장 건져 주지 않으신다고 노여워함, 악인이 선인보다 더 나은 형편을 누린다고 원망함, 분노와 정욕과 영광과 부에 대한 욕망에 내몰림 따위가 그러하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은 시편과 예언서에 나타나듯 이것들을 자기 안에서 인정한다. [모든 시험받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아아, 이 악들이 사람의 살갗 속에 싸여 있음을 안다. 곧 돈과 재물과 그 밖의 모든 것을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고, 우리 삶을 안일 속에 보내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육신적 안일을 좇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실제만큼 그리 진지하고 크지 않다고 늘 상상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 중에 속히 도우시지 않고 우리 일을 우리 마음에 들게 처리해 주지 않으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심과 뜻을 거슬러 원망하는 것이다. 또한 다윗과 모든 성도가 탄식하였듯,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이 형통한 것을 보는 일이 우리를 괴롭게 함을 날마다 경험한다. 이 외에도 모든 사람은 자기 마음이 때로는 야망으로, 때로는 노여움과 분노로, 때로는 음란으로 쉽게 타오름을 느낀다.] 그러나 학파에서 그들은 철학에서 전혀 다른 관념들을 이리로 옮겨 왔으니, 곧 정념 때문에 우리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칭찬받을 만하지도 책망받을 만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의적인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죄가 아니라는 것[내적 욕망과 생각은 내가 거기에 온전히 동의하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관념들은 철학자들 사이에서 시민적 의에 관하여 표현된 것이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하여 표현된 것이 아니다. [거기서는 법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L. cogitationis, 생각은 관습과 형벌에서 면제된다는 것이 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시니, 하나님의 법정과 심판에서는 다르다.] 그들은 더 분별 있는 것도 아니면서 다른 관념들도 덧붙이니, 곧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본성은 악하지 않다[그 자체로는 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자리에서는 우리도 이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비틀어 원죄를 가볍게 하는 데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이 관념들은 스콜라 학자들의 글에서 읽히니, 그들은 윤리에 관한 철학이나 시민적 교리를 복음과 부적절하게 뒤섞는다. 또한 이 일들은 학파에서만 논쟁된 것이 아니라, 흔히 그러하듯 학파에서 백성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 설득들[불경하고 그릇되고 위험하고 해로운 가르침들]이 우세하여 인간의 힘에 대한 확신을 길렀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지식을 억눌렀다. 그러므로 루터는 원죄와 인간의 연약함의 위대함[원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심각한 치명적 죄책인지]을 선언하고자, 이 원죄의 잔재가 [세례 후에도] 사람 안에서 그 본성상 아디아포라가 아니라, 그것이 전가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고, 마찬가지로 그것이 죽임을 당하려면 성령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스콜라 학자들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이행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죄와 형벌을 둘 다 가볍게 하지만, 창세기에서는 원죄 때문에 부과된 형벌이 달리 서술된다. 거기서 인간 본성은 죽음과 그 밖의 육신적 악들뿐 아니라 마귀의 나라에도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 창세기 3장 16절(15절)에서 이 무서운 선고가 선포된다.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원수를 두리라." 그 결함들과 정욕은 형벌이며 죄다. 죽음과 그 밖의 육신적 악들과 마귀의 지배는 본래적으로 형벌이다. 인간 본성은 종살이에 넘겨져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으니, 마귀는 악한 견해와 오류로 본성을 미혹하고 온갖 종류의 죄로 몰아간다. 그러나 마귀가 그리스도의 도움 없이는 정복될 수 없듯,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 종살이에서 우리를 풀어낼 수 없다. 세계의 역사도 마귀 나라의 권세가 얼마나 큰지 보여 준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모독과 악한 견해로 가득하고, 마귀는 세상이 보기에 지혜롭고 의로운 자들[거룩해 보이는 많은 위선자]을 이 사슬에 얽어맨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더 거친 악덕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죄들과 이 형벌들을 둘 다 제거하시고 마귀의 나라와 죄와 죽음을 멸하시려고 우리에게 주어지셨으므로, 우리의 악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은택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 설교자들은 이 주제들에 관하여 부지런히 가르쳤고, 새로운 것을 전한 것이 아니라 성경과 거룩한 교부들의 판단을 제시하였다.
우리는 이것이, 대적들이 우리 조항을 왜곡한 그 유치하고 하찮은 궤변에 관하여 황제 폐하를 만족시키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바르게,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와 조화롭게 믿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적들이 이 논쟁을 다시 일으킨다면, 우리 가운데 응답하고 진리를 변호할 자들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 대적들은 대체로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흔히 모순되는 말을 하며, 원죄의 본질에 속하는 것[곧 원죄의 본질에 본래 속하는 것과 속하지 않는 것]도, 그들이 결함이라 일컫는 것도 바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리에서 그들의 다툼을 아주 세밀하게 검토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우리도 따르는 거룩한 교부들의 믿음을 통상적이고 잘 알려진 말로 다시 진술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III Article III: Of Christ.
제3조: 그리스도에 관하여.
제3조를 대적들도 인정한다. 이 조항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있음을 고백하니, 곧 말씀이 자기 위격의 일치 안으로 취하신 인성이며, 또한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우리와 화목하게 하시려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으며, 다스리시고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려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을 따라 고백한다.
Article IV (Of Justification) §1 Article IV (II): Of Justification — Opening and the Charge of the Adversaries
제4, 제5, 제6, 그리고 아래 제20조에서 그들[반대자들]은 우리를 정죄한다. 우리가 사람이 죄의 용서를 자기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거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얻는다고 가르친다는 이유에서다. [그들은 이 두 명제를 모두 매우 완강하게 배척한다.] 곧 그들은 우리가 사람이 자기 공로 때문에 죄의 용서를 얻는다는 것을 부인한다는 이유로, 또한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사람이 죄의 용서를 얻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단언한다는 이유로, 우리를 정죄한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으니,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면 그리스도의 영예를 비추고 드높이며 [이는 성경 전체를 명료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특별히 유익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보화와 참된 지식에 이르는 길을 오직 그것만이 보여 주고, 성경 전체로 들어가는 문을 오직 그것만이 연다], 경건한 양심에 필요하고도 가장 풍성한 위로를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황제 폐하께서 이토록 중대한 사안에 관하여 우리의 말을 너그러이 들어 주시기를 청한다. 반대자들은 죄의 용서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를 모두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 주제를 슬프게도 왜곡하며,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덕을 흐리고, 경건한 양심에서 그리스도 안에 제시된 위로를 빼앗는다. 그러나 우리 신앙고백의 입장을 견고히 하고 또 반대자들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비난을 제거하기 위하여, 처음에 몇 가지를 미리 전제해 두어야 한다. 이는 두 종류의 교리의 근원, 곧 반대자들의 교리와 우리 자신의 교리의 근원이 모두 알려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Article IV (Of Justification) §2 The Law and the Promise; the Adversaries Choose the Law
모든 성경은 이 두 가지 주된 주제, 곧 율법과 약속으로 나뉘어야 한다. 성경은 어떤 곳에서는 율법을 제시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곧 [구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약속하며 그분을 위하여 죄의 용서와 칭의와 영생을 제공할 때이거나, 혹은 복음에서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미 나타나셨으므로, 죄의 용서와 칭의와 영생을 약속하실 때이다. 더욱이 이 논의에서 율법이라 함은, 성경 어디에서 읽히든, 십계명을 가리킨다. 모세의 의식법과 재판법에 관해서는 지금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 두 부분 가운데 반대자들은 율법을 택한다. 인간의 이성이 어떤 방식으로든 본성상 율법을 이해하기 때문이다(이성에는 동일한 판단이 하나님에 의해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 [자연법은 모세의 법, 곧 십계명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으로 죄의 용서와 칭의를 구한다. 그런데 십계명은 이성이 어느 정도 산출할 수 있는 외적인 시민적 행위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훨씬 넘어서는 다른 것들도 요구한다. 곧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참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참으로 확신하며, 죽음과 모든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것이다. 끝으로 그것은 죽음과 모든 환난 가운데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요구하니, 곧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지우실 때 우리가 그것들에서 도망하거나 그것들을 거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스콜라 학자들은 철학자들을 따라 오직 이성의 의, 곧 시민적 행위만을 가르치며, 게다가 성령 없이도 이성이 만물 위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꾸며 낸다. 인간의 정신이 평온하여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을 느끼지 않는 한,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한다고, 하나님을 위하여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한 위선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행함으로써, 곧 이성이 죄를 슬퍼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행위를 이끌어 내거나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일에 힘쓴다면, 그로써 죄의 용서를 공로로 얻는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 견해는 본성상 사람을 흐뭇하게 하므로, 교회 안에 많은 예배 행위와 수도 서원과 미사의 남용을 낳고 증식시켰다. 또 이 견해와 더불어 어떤 이는 세월이 흐르며 이런 예배 행위와 준수를, 다른 이는 저런 것을 고안해 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행위에 대한 신뢰를 기르고 키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는 자에게 반드시 은혜를 주신다고, 강요의 필연이 아니라 불변성의 필연으로 그리하신다고 단언하였다 [하나님께서 강요받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어기거나 바꾸지 않으실 질서라는 것이다].
Article IV (Of Justification) §3 The Errors of the Scholastic Opinion on Merit
이 견해에는 크고 해로운 오류가 많이 있으니, 그것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지루할 것이다. 신중한 독자는 다만 이것만 생각해 보라. 만일 이것이 기독교적 의라면, 철학과 그리스도의 교리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이런 [우리 정신에서 솟아나는] 이끌어 낸 행위로써 죄의 용서를 공로로 얻는다면, 그리스도가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만일 우리가 이성과 이성의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면, 어찌 그리스도나 거듭남이 필요하겠는가 [베드로가 벧전 1장 18절 이하에서 선언하듯이]? 그리고 이러한 견해들로부터 이제 사태는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많은 이들이 우리가 철학적 의와는 다른 의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이유로 우리를 비웃는다. [아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루뱅과 파리 등지의 위대한 신학자들조차도(바울의 모든 글자와 음절이 달리 가르치는데도) 철학자들이 가르치는 경건 외에는 어떤 다른 경건이나 의도 알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기이한 가르침으로 여기고 비웃어야 마땅하건만, 도리어 그들이 우리를 비웃으며, 그렇다, 바울 자신을 조롱거리로 삼는다.] 우리는 어떤 이들이 복음을 제쳐 놓고 설교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설명하였다고 들었다. [나 자신이, 그리스도와 복음은 언급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설교한 어느 위대한 설교자의 말을 들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설교하는 유치하고 어리석은 방식이 아니겠는가?] 반대자들이 옹호하는 것들이 참이라면, 그런 사람들도 잘못하지 않은 셈이다 [반대자들의 교리가 참이라면, 윤리학은 귀한 설교집이요 멋진 새 성경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적 도덕에 관하여 매우 박식하게 썼으므로, 이에 관해서는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어떤 말씀이 소크라테스와 제논과 다른 이들의 말과 비교되는 책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본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죄의 용서를 공로로 얻을 만한 어떤 율법을 주시려고 오신 것처럼, 마치 우리가 이 용서를 그분의 공로로 말미암아 거저 받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여기서 반대자들의 교리, 곧 이성의 행위로써 우리가 죄의 용서와 칭의를 공로로 얻는다는 교리를 받아들인다면, 철학적 의 혹은 분명히 바리새적 의와 기독교적 의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반대자들은 그리스도를 아주 지나쳐 버리지는 않으려고, 그리스도에 관한 역사의 지식을 요구하며, 우리에게 한 습성(habitus)이 주어지는 것이, 혹은 그들이 말하는 대로 prima gratia 곧 '첫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그분의 공로라고 그분께 돌린다. 그들은 이 습성을, 우리를 더욱 기꺼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기울게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 습성에 돌리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께 돌려질 것이 미약하고 보잘것없고 작고 빈약한 작용이다]. 그들은 의지의 행위가 이 습성 이전과 이후에 동일한 종류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지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그럼에도 이 습성은 의지가 그 일을 더 기꺼이 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먼저 선행하는 공로로써 이 습성을 공로로 얻으라 하고, 그다음에는 율법의 행위로써 이 습성의 증대와 영생을 공로로 얻으라 한다. 이렇게 그들은 그리스도를 묻어 버려, 사람이 그분을 중보자로 의지하여 그분을 위하여 죄의 용서와 화해를 거저 받는다고 믿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자기 자신의 율법 성취로써 죄의 용서를 공로로 얻으며 자기 자신의 율법 성취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망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율법은 결코 만족되지 않으니, 이성은 어떤 시민적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그러는 동안 [마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보신다고 참으로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 습성을 말하기는 하나, 믿음의 의가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람 안에 존재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될 수도 없다.
Article IV (Of Justification) §4 The Distinction of meritum congrui and condigni
그들이 meritum congrui[적합 공로]와 meritum condigni[합당 공로] 사이의 구별을 [당연한 공로와 참되고 완전한 공로] 꾸며 내는 것은, 드러내 놓고 펠라기우스주의로 보이지 않으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meritum congrui[적합 공로]에 대하여 반드시 은혜를 주신다면, 그것은 더 이상 meritum congrui가 아니라 meritum condigni[참된 의무요 완전한 공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사랑의 습성이 [있은] 후에는 사람이 merit de condigno[합당 공로]를 획득할 수 있다고 그들은 상상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에게 그 습성이 있는지 의심하라고 명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merit de congruo를 획득하는지 de condigno를 획득하는지 [온전히인지 절반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사안은 한가한 자들이 꾸며 낸 것이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 이것들은 성경을 별로 실천하지 않는 한가하고 가련하며 경험 없는 자들의 한낱 공허한 관념과 꿈일 뿐이다]. 그들은 죄의 용서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또 하나님의 심판과 양심의 두려움 가운데 행위에 대한 신뢰가 어떻게 우리에게서 쫓겨나는지 알지 못하였다. 안일한 위선자들은 습성이 있든 없든 자기들이 merit de condigno를 획득한다고 늘 판단하니, 사람은 본성상 자기 자신의 의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양심은 흔들리고 망설이며, 그다음에는 안식을 찾으려고 다른 행위들을 구하고 쌓는다. 그런 양심은 결코 자기가 merit de condigno를 획득한다고 생각하지 못하며, 율법의 교리에 더하여 죄의 거저 주시는 용서와 믿음의 의에 관한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절망으로 치닫는다. [그리하여 어떤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맨발의 수도사들이 임종의 시각에 어떤 선한 양심들에게 자기들의 수도회와 선행을 헛되이 칭송하다가, 마침내 자기들의 수도회와 성 프란치스코에 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이여,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위하여 죽으셨소." 이것이 환난 가운데 그를 소생시키고 새롭게 하였으며, 오직 이것만이 평안과 위로를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반대자들은 오직 이성의 의, 혹은 분명히 율법의 의 외에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니, 그들은 마치 유대인들이 모세의 가려진 얼굴을 바라보듯 그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기들이 율법을 만족시킨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위선자들 안에는 주제넘음과 행위에 대한 헛된 확신 [그들은 사람을 모래 기초, 곧 자기 자신의 행위 위에 세운다] 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멸시를 일으킨다. 반면에 그들은 소심한 양심을 절망으로 몰아가니, 그 양심은 의심으로 시달리며 믿음이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얼마나 효력 있는지 결코 경험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완전히 절망한다.
Article IV (Of Justification) §5 Concerning the Righteousness of Reason or of the Law
이제 우리는 이성의 의에 관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곧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시며, 하나님의 계명 때문에 십계명이 명하는 명예로운 행위들이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 "율법이 우리의 몽학선생이 되었다"는 말씀과, 또한 디모데전서 1장 9절 "율법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세운 것이다"라는 말씀을 따라서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적인 자들[큰 죄인들]이 시민적 규율로 억제되기를 원하시며, 이것을 유지하시려고 율법과 문서와 교훈과 위정자와 형벌을 주셨다. 그리고 이 의는 이성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으나, 흔히 본성의 연약함에 의해, 또 마귀가 그것을 명백한 범죄로 몰아감에 의해 압도당한다. 이제 우리가 이 이성의 의에 마땅한 찬사를 기꺼이 돌리기는 하나(이 부패한 본성에는 이보다 더 큰 선이 없으며 [이 세상의 삶과 세속적 본성에서는 정직과 덕보다 더 나은 것이 결코 없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르게 말하였듯이 "저녁 별도 새벽 별도 의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육신적 보상으로 영예롭게 하신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면서 칭송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써 죄의 용서를 공로로 얻는다는 것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결론지으며, 그것이 허구요 참이 아님을 확신한다].
또한 사람이 이성의 의 [행위와 외적 경건]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도 거짓이다.
또한 이성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만물 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 곧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심을 참으로 확신하며, 죽음과 하나님의 다른 처분 가운데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일 등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거짓이다. 비록 이성이 시민적 행위는 할 수 있을지라도 그러하다.
또한 은혜 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 [성령과 은혜가 마음에 없이 단지 외적인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도 거짓이며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우리의 믿음을 위한 증거를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교부들에게서도 가지고 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반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가 우리의 공로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길게 논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본성과 은혜에 관하여』(De Natura et Gratia)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자유의지를 통한 본성적 능력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워 아는 데에도, 또 바르게 사는 데에도 충분하다면,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요, 그렇다면 십자가의 거리낌이 무효가 된 것이다." 어찌하여 나도 여기서 부르짖지 못하겠는가? 그렇다, 나는 부르짖을 것이며, 기독교적 슬픔으로 그들을 꾸짖을 것이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라디아서 5장 4절, 참조 2장 21절. "저희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0장 3-4절. 또 요한복음 8장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으로써 죄에서 자유롭게 되거나 죄의 용서를 공로로 얻을 수 없다. 또 요한복음 3장 5절에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필요하다면, 이성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지 못하며 율법을 성취하지도 못한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곧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의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로마서 8장 7-8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이 증거들은 너무도 명백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경우에 사용한 말을 빌리자면, 예리한 이해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깊은 청자만이 필요하다. 만일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라면, 육신은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만일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라면, 육신은 우리가 외적인 시민적 행위를 행할 때에도 죄를 짓는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인간의 판단으로 보아 탁월하고 칭찬받을 만한 행위를 지닐 때에도 분명히 죄를 짓는다. 반대자들은 이성이 이해하는 시민적 의를 담고 있는 둘째 돌판의 계명들만을 고려한다. 이것으로 만족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첫째 돌판을 보지 못하니,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하나님께서 죄에 진노하심을 확실한 것으로 선언할 것을,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을,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심을 확실한 것으로 선언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성령 없는 인간의 마음은 안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하거나, 혹은 형벌 가운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분에게서 도망하고 그분을 미워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첫째 돌판에 순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멸시와, 하나님의 말씀과 그 경고와 약속에 대한 의심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기에, 사람은 성령 없이 덕스러운 행위를 행할 때에도 참으로 죄를 짓는다. 이는 그들이 악한 마음으로 그것을 행하기 때문이니, 로마서 14장 23절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는 말씀을 따라서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자기 행위를 행하기 때문이니, 마치 에피쿠로스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보신다거나 자기가 하나님께 주목받거나 들으심을 받는다고 믿지 않는 것과 같다. 이 멸시가 겉보기에 덕스러운 행위들을 오염시키니, 하나님께서 마음을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끝으로, 반대자들이 영원한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이 자기 정신에서 솟아나는 사랑의 행위로써 죄의 용서를 공로로 얻는다고 쓴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다. 죄의 용서가 먼저 믿음으로 붙들리지 않는 한 하나님을 사랑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을 참으로 느끼는 마음은, 그분이 화해되셨음이 보여지지 않는 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그분이 우리를 두렵게 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 던지시는 듯 보이는 한, 인간의 본성은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며 형벌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만큼 용기를 낼 수 없다 [가련하고 연약한 본성은 낙심하고 용기를 잃을 수밖에 없으며, 그토록 두렵게 위협하고 형벌하는 그 큰 진노 앞에서 떨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하시기 전에는 결코 한 점 사랑의 불꽃도 느낄 수 없다]. 한가한 자들이 사랑에 관하여 그런 꿈을, 곧 치명적 죄(mortal sin)를 범한 자가 만물 위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식의 꿈을 꾸며 내기는 쉬우니,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심의 고뇌 가운데, 또 [사탄과의] 싸움 가운데 양심은 이 철학적 사변들의 공허함을 체험한다. 바울은 로마서 4장 15절에서 말한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느니라." 그는 율법으로써 사람이 죄의 용서를 공로로 얻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율법은 언제나 양심을 고발하고 두렵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롭다 하지 못하니, 율법에 의해 두려워진 양심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도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써, 자기 자신의 행위로써 죄의 용서를 공로로 얻는다고 신뢰하는 자들은 잘못한다. 반대자들이 가르치는 이성의 의 혹은 율법의 의에 관해서는 우리가 이것들을 말한 것으로 충분하다. 잠시 후에 우리가 믿음의 의에 관한 우리의 믿음을 선언할 때에는, 주제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증거를 끌어오게 할 것이며, 그 증거들은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반대자들의 오류를 무너뜨리는 데에도 유익할 것이다.
Article IV (Of Justification) §6 We Are Justified by the Free Promise, Received by Faith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할 수 없고, 모두가 죄 아래 있으며 영원한 진노와 죽음에 매여 있기에, 이런 까닭에 우리는 율법으로써 죄에서 자유롭게 되거나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도리어 죄의 용서와 칭의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그분은 세상의 죄를 위하여 만족(satisfaction)을 이루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바 되셨고, [유일한] 중보자요 화목제물(Propitiator)로 세우심을 받으셨다. 그리고 이 약속은 우리의 공로를 조건으로 삼지 않으며 [이렇게 쓰여 있지 않다. "네가 공로로 얻으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는 은혜와 구원 등을 얻는다"], 도리어 죄의 용서와 칭의를 거저 제공한다. 바울이 로마서 11장 6절에서 말하듯이 "만일 행위로 말미암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또 다른 곳에서 로마서 3장 21절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죄의 용서가 거저 제공된다는 것이다. 화해 또한 우리의 공로에 달려 있지 않다. 만일 죄의 용서가 우리의 공로에 달려 있고 화해가 율법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무익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율법을 성취하지 못하므로, 우리가 결코 화해의 약속을 얻지 못한다는 결론도 따라 나올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4장 14절에서 이렇게 논증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만일 약속이 우리의 공로와, 우리가 결코 성취하지 못하는 율법을 조건으로 요구한다면, 약속이 무익하리라는 결론이 따라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의는 거저 주시는 약속을 통하여 얻어지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롭다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약속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 어찌하여 바울이 은혜를 그토록 높이 기리고 칭송하겠는가?] 약속은 믿음으로가 아니고는 받을 수 없으므로, 본래 그리스도를 위한 죄의 용서와 칭의의 약속인 복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를 선포하며, 이는 율법이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율법의 의가 아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완전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와 죽음에 패배한 우리에게 화해를 거저 제공하니, 이 화해는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의 공로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오직 약속에 대한 신뢰,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긍휼에 대한 신뢰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이 특별한 믿음, 곧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죄가 용서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이 화해되시고 자비로우시다고 믿는 그 믿음이 죄의 용서를 얻고 우리를 의롭다 한다. 그리고 회개 가운데, 곧 두려움 가운데, 그 믿음이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므로, 그것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성령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되니,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심을 참으로 확신하고, 모든 환난 가운데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그것은 정욕(concupiscence)을 죽이는 일 등을 한다. 이렇게 죄의 용서를 거저 받는 믿음은 중보자요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진노에 맞세우므로,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사랑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것은 폭풍에 작은 깃털 하나처럼 날려가 버릴 것이다]. 이 믿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이요, 그리스도의 은덕을 활용하며, 마음을 거듭나게 하고, 율법의 성취에 앞선다. 그리고 이 믿음에 관해서는 우리 반대자들의 교리에 단 한 음절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대자들을 책망하니, 그들이 오직 율법의 의만을 가르친다는 이유에서나,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를 선포하는 복음의 의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나, 똑같이 그러하다.
Article IV (Of Justification) §7 (What Is Justifying Faith?) What Is Justifying Faith?
반대자들은 믿음이 단지 역사에 대한 지식일 뿐이라고 꾸며 내며, 따라서 그것이 치명적 죄(mortal sin)와 공존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그토록 자주 말하는 믿음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자들은 치명적 죄 가운데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롭다 하는 그 믿음은 단지 역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 등의 이야기를 안다는 것만이 아니다(그것은 마귀들도 안다)], 하나님의 약속에 동의하는 것이니, 그 약속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의 용서와 칭의가 거저 제공된다. [그것은 마음 안의 확신 혹은 확실한 신뢰이니, 곧 내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확실하고 참된 것으로 여길 때, 그 약속을 통하여 나의 공로 없이 죄의 용서와 은혜와 모든 구원이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에게 제공된다.] 그리고 그것이 한낱 지식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는 더 덧붙이겠다. 그것은 제공된 죄의 용서와 칭의의 약속을 바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이란 나의 온 마음이 이 보화를 자기 것으로 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행함이나, 나의 바침이나 드림이나, 나의 일이나 준비가 아니라, 마음이 스스로를 위로하며 이것에 관하여 온전히 확신하는 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과 은사를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것이 아니며,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모든 보화를 우리 위에 부어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과 율법의 의 사이의 차이는 쉽게 분간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은덕을 받는 latreia[예배, 섬김]이며, 율법의 의는 하나님께 우리의 공로를 바치는 latreia[예배, 섬김]이다. 믿음으로써 하나님은 이렇게, 곧 우리가 그분에게서 그분이 약속하시고 제공하시는 것들을 받음으로써 예배 받기를 원하신다.
이제 믿음이 단지 역사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약속에 동의하는 그러한 믿음을 뜻한다는 것을, 바울이 로마서 4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할 때 분명히 증언한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 굳게 하려 하심이라." 그는 약속이 믿음으로가 아니고는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둘을 서로 속한 것으로 묶어 놓으며, 약속과 믿음을 연결한다. [거기서 바울은 이 둘을 이렇게 단단히 동여맨다. 약속이 있는 곳에는 믿음이 요구되며, 반대로 믿음이 요구되는 곳에는 반드시 약속이 있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사도신경을 살펴보면 믿음이 무엇인지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니, 거기에 이 조항이 분명히 서 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역사의 목적인 이 조항, 곧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도 더해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이 조항에 연결되어야 하니,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공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죄의 용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의 공로가 만족을 이룰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내어 주신 바 될 필요가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하는 믿음을 말할 때마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함께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곧 약속, 그것도 거저 주시는 약속과, 값이요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다. 약속은 믿음으로 받으며, '거저'라는 말은 우리의 공로를 배제하고 그 은덕이 오직 긍휼을 통해서만 제공됨을 뜻하며, 그리스도의 공로는 값이니, 우리의 죄를 위한 어떤 화목제물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주 긍휼을 간구하며, 거룩한 교부들도 우리가 긍휼로 구원받는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므로 긍휼이 언급될 때마다 우리는 거기에 믿음이, 곧 긍휼의 약속을 받는 믿음이 요구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믿음을 말할 때마다 우리는 한 대상이, 곧 약속된 긍휼이 이해되기를 원한다. 믿음이 의롭다 하고 구원하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행위라는 근거에서가 아니라, 오직 그것이 약속된 긍휼을 받는다는 이유에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지자들과 시편 전체에 걸쳐 이 예배, 이 latreia가 높이 칭송되니, 비록 율법이 죄의 거저 주시는 용서를 가르치지는 않으나 그러하다. 그러나 교부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를 용서하기를 원하신다는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값이 되실 것을 이해하였기에, 우리의 행위가 그토록 큰 일을 위한 값이 아님을 [그토록 큰 빚을 갚을 수 없음을] 알았다. 따라서 그들은 거저 주시는 긍휼과 죄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았으니, 신약의 성도들과 꼭 같다. 여기에 시편과 선지자들 가운데 긍휼과 믿음에 관한 저 잦은 반복이 속하니, 이를테면 시편 130편 3절 이하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가 그러하다. 여기서 다윗은 자기 죄를 자백하며 자기 공로를 늘어놓지 않는다. 그는 덧붙인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신뢰함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 약속을 인용한다. "나 곧 내 영혼이 ⋯ 기다리며 나는 그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곧 주께서 죄의 용서를 약속하셨으므로 내가 이 주의 약속으로 붙들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들도 율법으로가 아니라 약속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그리고 반대자들이 믿음을 그토록 깎아내리는 것은 놀라운 일이니, 시편 50편 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에서처럼 믿음이 도처에서 탁월한 섬김으로 칭송되는 것을 그들이 보면서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친히 알려지기를 원하시고, 이렇게 예배 받기를 원하시니, 곧 우리가 그분에게서 은덕을 받되, 그것도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긍휼 때문에 받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환난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삶에서든 죽음에서든, 모든 경건한 자들이 아는 대로] 가운데 가장 풍성한 위로다. 그리고 반대자들은 믿음을 깎아내리고 폄하하며, 오직 행위와 공로로써 사람이 하나님과 거래한다고 [우리가 위대한 위엄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비참하고 거지 같은 행위와 공로로써 거래한다고] 가르칠 때, 그러한 위로들을 폐한다.
Article III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1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1)
여기서 반대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다그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또한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롬 2:13), 그 밖에 율법과 행위에 관한 비슷한 말씀들이 많다. 이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사랑과 율법의 성취에 관하여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를 밝혀야 한다.
선지자에게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렘 31:33). “내가 나의 율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리라.” 또한 바울은 롬 3:31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마 19:17에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고전 13:3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한다. 이러한 말씀과 그와 유사한 말씀들은 율법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우리에 의하여 점점 더 지켜져야 함을 증언한다[곧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율법을 지키며, 그리하여 성령 안에서 점점 더 자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예식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에 관하여 명령하는 그 율법, 곧 십계명(Decalog)에 관하여 말한다. 참으로 믿음은 성령을 가져오고 마음에 새 생명을 낳으므로, 그것이 마음에 영적인 움직임들을 낳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이 움직임들이 무엇인지를 선지자가 렘 31:33에서 보여 주는데, “내가 나의 율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리라”라고 말할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거듭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기를, 그분께 기도하기를, 그분에게서 도움을 기대하기를, 감사하며 그분을 찬송하기를, 그리고 환난 중에 그분께 순종하기를 시작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기를 시작하는데, 이는 우리 마음에 영적이고 거룩한 움직임들이 있기 때문이다[이제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새 마음과 정신과 영이 그 안에 있다].
Article III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2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2)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거듭나 성령을 받기까지는 일어날 수 없다. 첫째로, 율법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가 없이는 지켜질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율법은 성령이 없이는 지켜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은 믿음으로 받게 되는데, 바울의 선언을 따른 것이다(갈 3:14).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또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무섭게 진노하시며 일시적이고 영원한 재앙으로 우리를 짓누르신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율법은 항상 우리를 고발하며, 항상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스콜라 학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관하여 말하는 바는 한낱 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긍휼을 붙잡기까지는 하나님이 사랑받지 못하신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분은 사랑할 만한 대상이 되신다.
그러므로 시민적 행위들, 곧 율법의 외적인 행위들은 그리스도가 없이도, 성령이 없이도[우리의 타고난 빛으로부터] 어느 정도 행해질 수 있으나, 그럼에도 우리가 말한 바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신적 율법에 고유하게 속한 것들, 곧 첫째 돌판에 명령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정감들은 성령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은 훌륭한 신학자들이다. 그들은 둘째 돌판과 정치적 행위들에 주목한다. 첫째 돌판[그 안에 최고의 신학이 담겨 있고 그 위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에 대해서는 마치 그것이 아무 상관 없는 것인 양 전혀 마음 쓰지 않으며, 적어도 외적인 준수만을 요구한다. 그들은 영원하며 모든 피조물의 감각과 지성을 훨씬 초월하여 놓여 있는 율법[참 신성과 영원한 위엄의 영광에 관한 것]을 결코 고려하지 않는다(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들은 이것을 마치 신학에 속하지 않은 것인 양 그토록 하찮고 작은 일로 취급한다.]
Article III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3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어지신 것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함이니, 곧 그분 때문에 우리에게 죄 사함이 베풀어지고, 또 성령이 우리 안에 새롭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의를 낳도록 하기 위함이다[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니, 요 16:15에 기록된 바와 같다.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마찬가지로 그분은 또한 다른 은사들, 곧 사랑, 감사, 자비, 인내 등도 이루신다]. 그러므로 율법은 성령이 믿음을 통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참으로 지켜질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이 믿음으로 굳게 서며 폐하여지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는 율법이 오직 성령이 주어질 때에만 그렇게 지켜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은 고후 3:15 이하에서, 모세의 얼굴을 덮었던 수건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곧 그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는 그 믿음에 의해서만 벗겨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는 그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오늘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바울은 그 수건을, 율법 전체 곧 십계명과 예식들에 관한 인간적 견해, 곧 외식하는 자들이 외적이고 시민적인 행위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킨다고, 그리고 제사와 준수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일 자체로(ex opere operato) 의롭게 한다고 여기는 견해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수건은 우리에게서 벗겨지는데, 곧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우리의 더러움과 죄의 가증함을 보여 주실 때에 우리는 이 오류에서 벗어난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율법을 성취하기에 멀리 있음을 본다. 그때에 우리는 육신이 안일과 무관심 속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우리가 하나님께 주목받고 있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도리어 사람이 우연히 나고 죽는다고 상상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들으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복음과 죄 사함을 들을 때에 우리가 믿음으로 위로를 받으면, 우리는 성령을 받아, 이제 하나님에 관하여 바르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믿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율법이 그리스도와 성령이 없이는 지켜질 수 없음이 분명하다.
Article III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4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4)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또 계속해서 점점 더 지켜져야 함이 필요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영적인 움직임들과 외적인 선행들을 함께 포괄한다[안의 선한 마음과 밖의 행위들]. 그러므로 반대자들이 우리 신학자들은 선행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우리를 거짓으로 고발하는 것이니, 정작 우리는 선행을 요구할 뿐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행해질 수 있는지도 보여 준다[마음이 이 행위들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한낱 생명 없고 차가운 외식자의 행위가 될 뿐이다]. 그 결과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외식자들이 자기가 시도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음을 드러낸다. [그들이 미움, 시기, 다툼, 분노, 진노, 탐욕, 간음 등에서 자유로운가? 어찌하여 이러한 악덕들이 수도원과 거룩한 시설들에서보다 더 큰 곳이 없었던가?] 인간의 본성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마귀에게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인데, 마귀는 믿음을 통하여 풀려나지 못한 모든 자를 포로로 붙잡고 있다. 마귀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하니, 곧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들으심을 받고 약속을 가졌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성령의 다스리심과 보호하심을 구하여, 우리가 속아 그르치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행하도록 떠밀리지도 않게 되기를 기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매시간 오류와 가증한 악덕에 빠질 것이다.] 시 68:18이 가르치는 바와 같다. “주께서 포로를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으셨도다.”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이기시고 우리에게 약속과 성령을 주셨으니, 이는 신적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도 또한 이기게 하려 하심이다. 또한 요일 3:8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라고 한다. 다시 우리는 율법이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지뿐 아니라, 무언가가 행해질 때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도 가르치니, 곧 우리가 율법에 만족을 드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며, 이는 조금 뒤에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행을 요구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참으로 우리는 또한 이것을 덧붙인다.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것이 비록 작을지라도 믿음에서 떼어 놓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버지께 나아가고, 죄 사함을 받았으므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모셨다는 것,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참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을 부르며,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며, 그분을 사랑하니, 요한이 그의 첫째 서신 4:19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그는 말하니, 곧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믿음이 앞서고 사랑이 뒤따른다는 것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하는 믿음은 회개 안에 존재하니, 곧 그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고 죄 사함을 구하며 죄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양심의 공포 가운데 잉태된다. 그리고 그러한 공포와 다른 환난들 가운데서 이 믿음은 자라고 강하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며 자기 자신의 정욕으로 기뻐하여 그것에 순종하는 자들 안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롬 8:1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곧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니라.” 또한 12, 13절에서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며 죄에서 도피하는 마음 가운데서 죄 사함을 받는 믿음은, 자기 욕망에 순종하는 자들 안에 머물지 않으며, 사망에 이르는 죄와 공존하지도 않는다.
Article III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5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5)
이러한 믿음의 결과들 가운데서 반대자들은 하나, 곧 사랑을 골라내어, 사랑이 의롭게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그들이 오직 율법만을 가르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믿음을 통한 죄 사함이 먼저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곧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모셨다고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우리의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들은 말하지 않으며, 말할 수도 없다. 그들은 자기가 율법을 성취한다고 선포하나, 이 영광은 본래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맞서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한 확신을 세우니, 이는 그들이 은혜와 영생을 응분의 공로로(merit de condigno, 의에 따라) 받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확신은 전적으로 불경하고 헛되다. 이는 이 생애에서 우리가 율법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인데, 우리 안의 영이 그것들에 대항할지라도 육적 본성은 악한 성향[악한 경향과 욕망]을 낳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우리도 사랑이 성령의 일이라고 고백하고, 또 그것이 율법의 성취이므로 의라고 하면서, 어찌하여 우리는 그것이 의롭게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답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도 아니고 우리의 사랑 때문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으로만 받는다는 것이 확실하다. 약속을 바라보며,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지 않으셨기에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여겨야 함을 아는 오직 믿음만이 죄와 사망의 공포를 이긴다. 누구든지 자기의 죄가 사하여졌는지 의심한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그가 자기 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약속보다 더 크거나 더 효력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롬 5:20에서 이렇게 말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곧 긍휼이 죄보다 더 광대하다[더 강하고 더 풍성하며 더 능력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가 사랑하기 때문에 죄 사함을 얻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의 의에 대한 이 확신이 악하고 헛된 것임을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이 화해시키고 의롭게 함이 필연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율법의 다른 덕들을 통해서나 그것들 때문에, 곧 인내, 정결, 위정자에 대한 순종 등 때문에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며 그럼에도 이 덕들이 뒤따라야 하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나 그럼에도 이것이 뒤따름은 필연적이다. 게다가, 같은 낱말로 때때로 제유(synecdoche)에 의하여 원인과 결과를 함께 포괄하는 어법이 잘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눅 7:47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덧붙이실 때, 친히 [바로 이 구절을] 해석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자가 그 사랑의 행위로 죄 사함을 공로로 얻었다고 뜻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신 까닭이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을 거저 붙잡는 것이다[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말씀을 의지하며, 자기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이것이 믿음임을 부인한다면[누구든지 자기가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행위를 동시에 의지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두려움에 빠진 양심이 자기 자신의 행위로 만족하지 못하고, 도리어 긍휼을 부르짖어야 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위로받고 격려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이야기 자체가 그분께서 사랑이라 부르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께 대하여, 그분과 더불어 죄 사함을 구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나아왔다. 이 예배가 그리스도께 대한 최고의 예배이다. 그 여자가 그리스도께 돌릴 수 있는 것 가운데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그분에게서 죄 사함을 구하는 것은 참으로 메시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리스도를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그분을 예배하며, 이렇게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 참으로 믿는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이라는 말을 그 여자를 향하여서가 아니라 바리새인을 향하여 쓰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바리새인의 예배 전체를 그 여자의 예배 전체와 대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신 것은, 그가 손님과 위대하고 거룩한 사람에게 합당한 외적인 직무는 베풀었으나,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그 여자를 가리키시며 그의 예배, 향유, 눈물 등을 칭찬하시는데, 이 모든 것은 믿음의 표지요 고백이니, 곧 그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죄 사함을 구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큰 본보기로서, 그리스도께서 이유 없이 아니라 바리새인을 책망하시도록 움직인 것이니, 그는 지혜롭고 존경받는 사람이었으나 신자는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그를 불경으로 책하시고, 그 여자의 본보기로 그를 권면하시며, 그리하여 배우지 못한 한 여자는 하나님을 믿는데 율법의 교사인 그는 믿지 않고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분에게서 죄 사함과 구원을 구하지 않는 것이 그에게 수치임을 보이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그 예배 전체를 칭찬하시는데[그 열매들과 함께한 믿음을 칭찬하시되, 바리새인을 향하여서는 마음에 믿음이 있음을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열매들만을 거명하신다], 이는 성경에서 한 낱말로 여러 가지를 포괄하는 일이 흔히 일어나기 때문이며, 아래에서 우리는 비슷한 구절들, 곧 눅 11:41 같은 구절에 관하여 더 길게 말할 것이다.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그분께서는 구제뿐 아니라 믿음의 의도 요구하신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여기서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라고 말씀하시니, 곧 그가 믿음과 또 믿음의 실천과 표지로써 참으로 나를 예배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 예배 전체를 포괄하신다. 그러면서 그분께서는 이것을 가르치시니, 곧 죄 사함은 본래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며, 다만 사랑과 고백과 다른 선한 열매들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이 열매들이, 우리를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죄 사함이 주어지는 그 값이라거나 화목 제물이라고 뜻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큰 주제, 곧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하여, 그리고 선한 사람들이 어디서 확실하고 굳건한 위로를 구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곧 확신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우리의 행위에 두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논쟁하고 있다. 이제 만일 그것을 우리의 행위에 두어야 한다면, 중보자요 화목자이신 영광이 그리스도에게서 거두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이 확신이 헛되며 양심이 그로부터 절망으로 치닫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죄 사함과 화해가 그리스도 때문에 거저 이루어지지 않고 우리의 사랑 때문에 이루어진다면, 율법 전체를 성취하였을 때 외에는 아무도 죄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니, 이는 율법이 우리를 고발할 수 있는 한 의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가 그리스도 때문에 이루어지는 화해이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분명하니, 이는 오직 믿음으로만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 매우 확실하기 때문이다.
Article III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6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6)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위에서 진술한 반론에 답하기로 하자. [어찌하여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의롭게 하지 못하는가?] 반대자들이 사랑이 율법의 성취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으며, 율법에 대한 순종은 분명히 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을 지킨다면 사랑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이 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 명령한 대로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참으로 말하거나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우리는 위에서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의 약속을 세우셨음을 보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곳곳에서 우리가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잘못을 범한다. [반대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실패하고 핵심을 놓칠 수밖에 없으니, 이 일에서 그들은 오직 율법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이성과 지혜는 우리가 율법으로 경건하게 되어야 하며, 율법을 외적으로 준수하는 사람이 거룩하고 경건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돌이켜, 율법에서 신적 약속들로 향하게 하며,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으로 죄 사함과 화해를 받으며, 사랑이나 율법의 성취 때문이 아니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우리가 율법의 한 점을 성취하기 전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되고 먼저 죄 사함을 얻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하신 하나님이여,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을 여전히 부인하면서, 어찌 감히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거나 복음의 책들을 적어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거나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한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다.]
다시[둘째로], 이 율법의 성취 곧 율법에 대한 순종은, 그것이 온전할 때에는 참으로 의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그것은 작고 불순하다. [그들이 성령의 첫 열매를 받았고, 새로운, 참으로 영원한 생명이 그들 안에 시작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죄와 악한 정욕의 잔재가 남아 있으며, 율법은 여전히 그것이 우리를 고발해야 할 많은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기뻐하실 만한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로부터, 칭의가 새롭게 됨의 시작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후에도 받아들여지는 화해를 뜻한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이제 율법의 시작된(inchoate) 성취가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훨씬 더 분명하게 보일 수 있으니, 이는 그것이 오직 믿음 때문에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율법 성취를 신뢰하는 것은 순전한 우상숭배요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며, 결국 그것은 무너져 우리 양심을 절망에 빠뜨린다. 그러므로 이 기초는 영원히 설 것이니, 곧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며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우리의 사랑과 행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누구나 붙잡을 수 있도록 그토록 명백하고 확실하게 밝힐 것이다. 마음이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의로울 수 없으니,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도피하고 절망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심판하지 않으시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는 동안에는 의롭게 되거나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제 오직 믿음만이 마음을 만족하게 하며, 화평과 생명을 얻으니(롬 5:1), 이는 그것이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 있고 담대하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는 마음을 만족하게 하지 못하니, 이는 우리가 그것들이 순결하지 않음을 항상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뒤따라야 하는데, 곧 우리가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시는 것이 우리의 행위와 율법의 성취 때문이 아니라 순전한 은혜로,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결론짓는 때이다. 우리의 대적들이 이 논증에 맞서 무엇을 내세울 수 있는가? 그들이 명백한 진리에 맞서 무엇을 고안하고 꾸며 낼 수 있는가? 이는 매우 확실하며, 경험이 충분히 강력하게 가르치는 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참으로 느끼거나 환난을 당할 때, 우리의 행위와 예배는 마음을 쉬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충분히 자주 가리키니, 시 143:2 같은 구절이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리이다.” 여기서 그는, 성령을 가진 모든 성도, 모든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여전히 육신에 죄의 잔재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보인다. 다윗이 다른 곳에서 시 7:8에 “여호와여 나의 의를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라고 말할 때, 그는 자기의 송사를 가리키는 것이지 자기의 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자기의 송사와 말을 지켜 주시기를 구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여 나의 송사를 판단하소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 130:3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어떤 사람도, 가장 위대한 성도들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없음을 분명히 진술하니, 그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또한 욥은 9:28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나의 모든 행위(영역본은 ‘근심’)를 두려워하나이다.” 마찬가지로 9:30에서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구덩이에 빠지게 하시리니”라고 한다. 또한 잠 20:9은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라고 한다. 또한 요일 1:8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한다. 그리고 주기도문에서 성도들은 죄 사함을 구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조차도 죄책과 죄를 가지고 있다. 또한 민 14:18에 “결코 죄 없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였고, 슥 2:13은 “모든 육체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니라”라고 한다. 또한 사 40:6 이하는 “모든 육체는 풀이라”라고 하니, 곧 육신과 육신의 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욘 2:9은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시는 은혜(긍휼)를 버리거니와”라고 한다. 그러므로 순전한 긍휼이 우리를 보존하며, 우리 자신의 행위, 공로, 노력은 우리를 보존할 수 없다. 성경의 이러한 선언들과 그와 유사한 선언들은 우리의 행위가 부정하며 우리가 긍휼을 필요로 함을 증언한다. 그러므로 행위는 양심을 평안하게 하지 못하며, 오직 믿음으로 붙잡은 긍휼만이 그렇게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완전함과 율법의 성취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겨진다고 신뢰해서는 안 되며, 도리어 그리스도 때문에 그러함을 신뢰해야 한다.
Article III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7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7)
첫째[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새롭게 된 후에도 중보자이기를 그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오직 첫 은혜만을 공로로 얻으셨고, 그 후에는 우리가 율법의 성취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생을 공로로 얻는다고 상상하는 자들은 그르친다.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로 남아 계시며, 우리가 비록 합당하지 못할지라도 그분 때문에 우리가 화해된 하나님을 모셨음을 우리는 항상 확신해야 한다. 바울이 분명히 가르치는 바와 같으니, 그가 이렇게 말할 때이다[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또한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었느니라(롬 5:2). 이는 우리의 가장 좋은 행위들조차,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복음의 은혜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약하고 전혀 순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와 아담의 타락은 이성이 여기거나 상상하는 것처럼 그토록 사소한 일이 아니니, 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전해졌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이성과 생각을 초월한다. 인간 본성 전체의 충격적인 부패가 일어났으며, 이는 사람의 어떤 행위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회복하실 수 있다], 고전 4: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그러나 그는 자기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 여겨짐을 아니, 그 구절을 따른 것이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롬 4:7). [그러므로 우리가 많은 선행을 행하였을지라도 우리는 은혜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하심과 죄 사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사함은 항상 믿음으로 받는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의의 전가는 약속에서 비롯되므로, 그것은 항상 믿음으로 받으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 여겨진다는 것이 항상 확실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만일 거듭난 자들이 그 후에 율법의 성취 때문에 자기가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면, 우리가 결코 율법을 만족시키지 못하는데, 양심이 자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고 언제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약속으로 돌아가야 하며, 이로써 우리의 연약함이 지탱되어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 우편에 항상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롬 8:34)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 여겨진다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가 그리스도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율법 성취 때문에 의롭고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 대제사장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화목자요 중보자로서 배제될 때,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상상할 수 있는지도 이해될 수 없다.
다시[넷째로], 긴 논의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복음에 이르러 거듭난 후에, 믿음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우시도록 공로를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양심은 결코 안식을 찾지 못하고 도리어 절망으로 내몰릴 것이다. 이는 우리가 결코 율법을 만족시킬 수 없으므로 율법이 쉬지 않고 우리를 고발하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 온 교회가 율법이 만족될 수 없다고 부르짖는다. 그러므로 이 율법의 시작된 성취는 그 자체로 기뻐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기뻐하심을 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은 항상 우리를 고발한다. 누가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거나 두려워하는가? 누가 하나님께서 지우신 환난을 충분한 인내로 견디는가? 누가 인간사가 하나님의 경륜으로 다스려지는지 아니면 우연으로 다스려지는지를 자주 의심하지 않는가? 누가 자기가 하나님께 들으심을 받는지를 자주 의심하지 않는가? 누가 악인이 경건한 자보다 더 나은 처지를 누리기 때문에, 경건한 자가 악인에게 압제받기 때문에 자주 분노하지 않는가? 누가 자기 자신의 부르심에 만족을 드리는가? 누가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가? 누가 정욕에 시험받지 않는가? 그러므로 바울은 롬 7:19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마찬가지로 25절에서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한다. 여기서 그는 자기가 죄의 법을 섬긴다고 공공연히 선언한다. 그리고 다윗은 시 143:2에서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종조차 심판을 면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마찬가지로 시 32:2에서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는 전가될 수 있는 죄가 항상 있으며, 그가 조금 뒤 6절에서 이에 관하여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께 기도할지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성도들조차도 죄 사함을 구해야 함을 보인다. 육신의 악한 욕망이 죄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눈먼 자보다 더하니, 이에 관하여 바울은 갈 5:17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라고 말한다. 육신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현재의 것들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지라도 재앙 가운데서 사람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마땅히 견뎌야 할 환난에서 도피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의심하는 등이다. 우리 마음에 계신 성령은 그러한 성향들[아담의 죄]과 다투시는데, 이는 그것들[이 옛 아담의 독, 이 지극히 악한 성향]을 억누르고 죽이며 새로운 영적 움직임들을 낳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더 많은 증언을 모을 것인데, 그것들은 성경에서뿐 아니라 거룩한 교부들에게서도 곳곳에 분명히 나타난다.
Article III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8 Of Love and the Fulfilling of the Law (8)
아우구스티누스는 잘 말한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행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든 용서받을 때에 성취된다.” 그러므로 그는 선행에서조차도[성령께서 우리 안에 낳으시는 선행에서조차도] 믿음을 요구하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과, 또 그 행위들조차 그 자체로는 합당하거나 기뻐하실 만한 것이 아님을 우리가 믿게 하려 함이다. 그리고 히에로니무스(제롬)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반박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운 때는, 우리가 죄인임을, 그리고 우리의 의가 우리 자신의 공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에 있음을 고백할 때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의 시작된 성취 가운데는,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화해된 하나님을 모셨음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는 위에서 거듭 말한 바와 같이, 긍휼은 오직 믿음으로만 붙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위 때문에 받아들여진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양심을 절망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롬 3:31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로써, 믿음으로 거듭난 자들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하는 움직임들을 가진다는 것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가 율법의 완전함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이것을 덧붙여야 함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성취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겨진다고 결론지을 수 없으며, 도리어 양심이 평온해지기 위하여 칭의는 다른 데서 구해져야 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도피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분노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어야 한다. 곧 믿음으로 화해되어, 우리가 율법이나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 여겨지며, 다만 이 율법의 시작된 성취가 믿음 때문에 기뻐하심을 받고, 또 믿음 때문에 우리의 부정함의 모습이 우리를 두렵게 할지라도 율법 성취의 불완전함이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만일 칭의가 다른 데서 구해져야 한다면, 우리의 사랑과 행위는 의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의 순결함보다 훨씬 위에, 참으로 율법 자체보다 훨씬 위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만족(satisfaction)이 놓여야 하니, 그것이 우리에게 제시된 것은, 우리가 율법의 성취 때문이 아니라 이 만족 때문에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모셨음을 확신하게 하려 함이다.
바울은 갈 3:13에서 이것을 가르치니, 그가 이렇게 말할 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곧 율법은 모든 사람을 정죄하나,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이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제물이 되셨으므로, 그분을 믿는 자들을 고발하고 정죄하는 율법의 그 권리를 제거하셨으니, 이는 그분 자신이 그들을 위한 화목 제물이며, 그분 때문에 우리가 이제 의롭다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의롭다 여겨지므로, 비록 그들이 실제로 율법을 만족시키지 못하였을지라도, 율법은 그들을 고발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 같은 취지로 그는 골로새인들에게 2:10에서 이렇게 쓴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비록 너희가 아직 율법의 완전함에서 멀리 있을지라도, 죄의 잔재가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니, 이는 그리스도 때문에, 너희가 믿는다면, 비록 죄가 너희 육신에 내재할지라도 우리가 확실하고 굳건한 화해를 모셨기 때문이다.
약속이 항상 눈앞에 있어야 하니, 곧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 때문에, 율법이나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은혜를 베풀고 의롭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 약속 안에서 소심한 양심들은 화해와 칭의를 구해야 하고, 이 약속으로 그들은 자기를 지탱해야 하며,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의 약속 때문에, 자기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모셨음을 확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행위는 결코 양심을 평안하게 할 수 없으며, 오직 약속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칭의와 양심의 평안이 사랑과 행위가 아닌 다른 데서 구해져야 한다면, 사랑과 행위는, 비록 그것들이 덕이며 율법의 성취인 한 율법의 의에 속할지라도, 의롭게 하지 못한다. 그 정도까지는 율법의 이 순종도 율법의 의로써 의롭게 한다. 그러나 율법의 이 불완전한 의는, 믿음 때문이 아니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의롭게 하지 못하니, 곧 그것은 화해시키지도 못하고, 거듭나게 하지도 못하며, 그 자체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게 하지도 못한다.
이로부터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분명하다[곧 믿음은 그리스도 때문에 죄 사함과 은혜를 얻으며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으로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또한 우리의 행위와 이 율법의 시작된 성취가 그 자체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이제 비록 내가 바울이나 베드로처럼 선행이 넘칠지라도, 나는 나의 의를 다른 데서, 곧 그리스도의 은혜의 약속에서 구해야 하며, 또한 오직 믿음만이 양심을 잠잠하게 한다면, 참으로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한다는 것이 확실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바르게 가르치고자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율법 때문도 아니요 행위 때문도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이것을 고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이 율법이나 우리의 비참한 행위에게 주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가 죄 사함과 화해를 받기 때문이며, 화해 곧 칭의는 율법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약속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게 되며, 다만 성령이 주어질 때 율법의 성취가 뒤따른다.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1 반대자들의 논거에 대한 반박: 율법과 약속의 구별
이제 이 사안의 근거, 곧 율법과 약속(또는 복음) 사이의 구별이 이해되었으니, 반대자들의 반론을 푸는 일은 쉬울 것이다. 그들은 율법과 행위에 관한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약속에 관한 구절들은 생략한다. 그러나 율법에 관한 모든 견해에 대해 단번에 답할 수 있으니, 곧 율법은 그리스도 없이는 지켜질 수 없으며, 시민적 행위가 그리스도 없이 행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행위가 칭찬받을 때에는 믿음이 요구된다는 것, 행위가 믿음 때문에 칭찬받는다는 것, 행위가 믿음의 열매요 증거라는 것을 반드시 덧붙여야 한다. [참으로 우리의 이 교리는 명백하다. 그것은 빛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성경에 비추어 견지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이를 분명하고 올바르게 제시하였으니, 누구든지 가르침을 받고 알면서도 진리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은덕과 복음의 큰 보화(바울이 그토록 크게 찬양하는)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약속과 제시된 은혜를,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을, 하늘이 땅에서 떨어져 있는 것만큼 멀리 갈라놓아야 한다. 불안정한 사안에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좋은 사안에서는 한두 가지 철저한 설명이 사람들이 제기할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반론을 해소한다.] 모호하고 위험한 사안은 많고 다양한 해법을 낳는다. 옛 시인의 판단이 참되기 때문이다. "부당한 명분은 그 자체로 병들어 있으므로 솜씨 있게 처방된 치료를 요구한다." 그러나 정당하고 확실한 사안에서는 그 근원에서 끌어낸 한두 가지 설명이 거슬리는 듯 보이는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우리의 이 사안에서도 그러하다. 내가 방금 말한 규칙이 율법과 행위에 관하여 인용된 모든 구절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곧, 그리스도 없이는 율법이 참되게 지켜질 수 없으며, 비록 외적 행위가 행해질 수 있을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어떤 곳에서는 율법을, 다른 곳에서는 복음,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의 용서를 거저 주시는 약속을 가르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은, 믿음이 칭의한다는 것을 부인하고 사랑과 우리의 행위 때문에 우리가 죄의 용서와 화해를 받는다고 가르칠 때, 그 거저 주시는 약속을 전적으로 폐기한다. 만일 죄의 용서가 우리 행위라는 조건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불확실하다. [우리는 우리가 충분히 행위를 하는지, 또는 우리의 행위가 충분히 거룩하고 정결한지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죄의 용서도 불확실하게 되며, 바울이 로마서 4장 14절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약속이 사라지고 만다. "약속은 무효가 되었느니라"; 그리하여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약속은 폐기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경건한 마음들을 약속의 숙고로 돌이키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일어나는 죄의 거저 주시는 용서와 화해에 관하여 가르친다. 그 후에 우리는 율법의 교리도 덧붙인다. [율법으로 죄의 용서를 공로로 얻는다거나 율법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행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후서 2장 15절에서 말하듯이, 이것들을 올바로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성경이 무엇을 율법에 돌리고 무엇을 약속에 돌리는지 보아야 한다. 성경은 거저 주시는 약속을 제거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위를 찬양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약속과 참된 보화이신 그리스도를 그 행위보다 천 리나 위에 두는 방식으로].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2 선행을 행해야 하는 이유와 상급·공로의 가르침
선행은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행해져야 하며, 또한 믿음의 훈련을 위하여 [바울이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그리고 고백과 감사를 위하여 행해져야 한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선행은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그 행위는 아직 온전히 새로워지지 않은 육체 안에서 행해지므로, 그 육체가 성령의 움직임을 더디게 하고 어느 정도의 부정을 더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 때문에 거룩하고 신적인 행위요 제사이며, 그리스도의 통치에 속한 행위이니,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통하여 이 세상 앞에 자기 나라를 드러내신다. 이러한 행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을 거룩하게 하시고 마귀를 억누르시며, 사람들 가운데 복음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성도들의 고백을 마귀의 나라에 공공연히 맞세우시고,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사도 바울과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와 같이 교회를 가르친 이들의 위험과 수고와 설교는 거룩한 행위요,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참된 제사이며,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억누르시고 믿는 자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신 그리스도의 싸움이다. 다윗이 전쟁을 치르고 그의 나라를 다스린 수고는 거룩한 행위요 참된 제사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서 온전히 꺼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백성을 마귀에 맞서 지켜낸 하나님의 싸움이다. 우리는 가장 비천한 부르심과 사사로운 일들 가운데 행하는 모든 선행에 관하여도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에 대한 자기의 승리를 기념하시니, 마치 고린도 사람들이 행한 구제(고린도전서 16장 1절)가 거룩한 행위요 제사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도록 애쓰는 마귀에 맞선 그리스도의 싸움이었던 것과 같다. 그러한 행위, 곧 교리의 고백과 환난과 사랑의 행위와 육체의 죽임을 폄하하는 것은 참으로 사람들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 나라의 외적 통치를 폄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상급과 공로에 관하여 무언가를 덧붙인다. 우리는 믿는 자들의 행위에 상급이 제시되고 약속되었음을 가르친다. 우리는 선행이 공로가 있다고 가르치되, 죄의 용서나 은혜나 칭의를 위한 공로가 아니라(이것들은 오직 믿음으로 얻기 때문이다), 다른 상급, 곧 이 세상과 이 세상 이후의 육적이고 영적인 상급을 위한 공로라고 가르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 8절에서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수고에 따라 서로 다른 상급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용서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고 똑같으니, 마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시며,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는 모든 이에게 거저 제시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와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어떤 행위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니, 이는 양심의 두려움 가운데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진노에 맞세울 수 없기 때문이며, 바울이 로마서 5장 1절에서 분명히 말하듯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등이다. 그러나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므로,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로 삼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는 그 칭의를 공로로 얻지 못하므로, 우리의 행위로 영생을 공로로 얻지 못한다. 믿음이 이를 얻으니, 이는 믿음이 우리를 의롭다 하며 화해하신 하나님을 모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생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에게 마땅하니, 로마서 8장 30절의 구절을 따라 그러하다. "또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에베소서 6장 2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을, 그 명령에 더해진 상급을 언급함으로써 우리에게 권한다. 거기에서 그는 부모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다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 가운데 일어날 때 다른 큰 상급을 공로로 얻는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성도들을 여러 가지로 훈련하시며, 그들이 자기 자신의 의를 신뢰하지 않도록, 또 상급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도록 가르치시려고, 행위의 의에 따른 상급을 종종 미루신다. 이는 욥과 그리스도와 다른 성도들에게서 나타난다. 또한 많은 시편이 우리에게 이를 가르치며, 악인의 행복에 맞서 우리를 위로하니, 시편 37편 1절과 같다. "악인들 때문에 분을 품지 말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말씀하신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선행에 대한 이러한 찬양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선행을 행하도록 움직인다. 한편 회개의 교리도 경건치 않은 자들, 곧 그 행위가 악한 자들에 맞서 선포되며,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모든 자에게 위협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찬양하고 요구하며, 그것이 행해져야 할 많은 이유를 제시한다.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3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와 행위에 관한 불경건한 견해
이와 같이 바울도 행위에 관하여 가르치니, 그가 로마서 4장 9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말할 때 그러하다. 그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지는 것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도리어 할례가 더해진 것은, 그가 자기 몸에 새겨진 표를 가지고 그 표로 권면을 받아 믿음을 훈련하며, 또한 그 표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 믿음을 고백하고, 자기의 증언으로 다른 이들을 믿음으로 초청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므로 그가 믿음으로 의로웠기에 그가 드린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으니, 이 행위로 죄의 용서와 은혜를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믿음을 훈련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나타내어 그들을 믿음으로 초청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이런 방식으로 선행이 믿음을 따라야 하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가 거저 용서받았다는 것과 그리스도 때문에 거저 화해하신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행위를 전혀 다르게 사용한다. 그들은 성도들의 행위를 볼 때, 성도들이 이 행위들을 통하여 죄의 용서와 은혜를 공로로 얻었다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을 본받아, 비슷한 행위를 통하여 자기들도 죄의 용서와 은혜를 공로로 얻는다고 생각하며, 이 행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달랜다고 생각하고, 이 행위들 때문에 자기들이 의롭다 여겨지는 것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행위에 관한 이 경건치 않은 견해를 우리는 정죄한다. 첫째로, 사람들이 이 행위들을 값과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때 그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께만 합당한 이 영예가 우리의 행위에 돌려진다. 둘째로, 그럼에도 그들은 이 행위들 안에서 양심의 평안을 찾지 못하고, 도리어 참된 두려움 가운데 행위에 행위를 쌓다가 마침내 절망에 이르니, 충분히 정결한 행위를 [곧 하나님을 달래고, 확실하게 영생을 얻으며, 한마디로 양심을 진정시키고 평정하기에 충분히 중대하고 귀한 행위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언제나 정죄하며 진노를 일으킨다. 셋째로, 그러한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또는 그분의 뜻을]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그들이 자기를 심판하고 괴롭히시는 하나님에게서 진노 가운데 도망치므로, 자기가 들으심을 입었다고 결코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니, 하나님께서 거저 용서하시고 우리를 들으신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4 세상에 늘 있어 온 행위에 관한 불경건한 견해
더욱이 행위에 관한 이 경건치 않은 견해는 세상에 늘 있어 왔다 [세상에 아주 단단히 붙어 있다]. 이방인들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제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조상들의 행위를 본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들의 믿음을 보존하지 않고, 그 행위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화해하실 화목제물이요 값이라고 생각하였다. 율법 아래 있던 백성[이스라엘 사람들]은, 말하자면 이른바 행위의 작용 자체로(ex opere operato) 이 행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달랜다는 견해를 가지고 제사를 본받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지자들이 얼마나 간절히 백성을 꾸짖는지 본다. 시편 50편 8절은 "내가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라 하고, 예레미야 7장 22절은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한다. 그러한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이 통치 안에서 외적 훈련으로 분명히 명하신 행위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 행위들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랜다고 생각하여 믿음을 내버린 그 경건치 않은 견해를 정죄한다. 그리고 어떤 행위도 양심을 평정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더하여 때때로 새로운 행위가 고안되었다 [그럼에도 위선자들은 맹목적인 추측과 무모한 방종으로,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 없이 악한 양심으로 행하며, 우리가 교황권에서 본 것처럼 하나의 행위에 또 하나의 행위를, 하나의 제사에 또 하나의 제사를 잇따라 만들어내곤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들이 산당에서 [그리고 수풀에서] 제사하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성도들의 본보기는, 그 성도들이 은혜를 얻은 것처럼 비슷한 행위로 은혜를 얻기를 바라는 자들의 마음을 매우 크게 움직인다. [그러나 성도들은 믿었다.] 그러므로 백성은 놀라운 열심으로 이 행위를 본받기 시작하였으니, 그러한 행위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어] 죄의 용서와 은혜와 의를 공로로 얻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산당에서 제사한 것은 이 행위들로 죄의 용서와 은혜를 공로로 얻고자 함이 아니라, 이 장소에서 가르쳤기 때문이며, 따라서 거기에서 자기 믿음의 증거를 제시한 것이었다. 백성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제물로 드렸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그들도 가장 잔혹하고 어려운 행위로 하나님을 달래고자 자기 아들들을 죽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행위가 값이요 화목제물이어서 그 때문에 자기가 의롭다 여겨진다는 견해로 자기 아들을 제물로 드린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서 주의 만찬이 제정된 것은, 이 표로 우리에게 권면된 그리스도의 약속을 기억함으로써 우리 안에 믿음이 강해지고, 우리가 공공연히 우리 믿음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은덕을 선포하게 하려 함이었으니,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서 말하듯이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등이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은 미사가 행위의 작용 자체로(ex opere operato) 우리를 의롭다 하는 행위요, 그것을 위하여 미사가 거행되는 자들에게서 죄책과 형벌의 책임을 제거한다고 주장하니, 가브리엘이 그렇게 쓰기 때문이다.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5 교부들의 본보기와 그리스도의 중보자 영예
안토니우스, 베르나르두스, 도미니쿠스, 프란치스쿠스와 다른 거룩한 교부들은 연구를 위하여 [곧 성경을 더 쉽게 읽기 위하여] 또는 다른 유익한 훈련을 위하여 일정한 종류의 생활을 택하였다. 그동안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진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그러한 훈련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 이후 무리는 교부들의 믿음을 본받지 않고 믿음 없는 그들의 본보기만을 본받았으니, 그러한 행위로 죄의 용서와 은혜와 의를 공로로 얻고자 함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이것들을 거저 받는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정신은 언제나 행위를 너무 높이 떠받들며 그것을 잘못된 자리에 둔다. 그리고 이 오류를 복음이 책망하니, 복음은 사람이 율법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 여겨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오직 믿음으로 붙잡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진다.] 이와 같이 세상은 모든 행위에 관하여, 그것이 하나님을 달래는 화목제물이며, 우리가 의롭다 여겨지게 하는 값이라고 판단한다. 세상은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심을 믿지 않으며,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 여겨지는 것에 거저 이른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행위가 양심을 평정하지 못하므로, 다른 행위가 끊임없이 택해지고, 새로운 의식이 행해지며, 새로운 서원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넘어 새로운 수도회가 만들어지니, 이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맞세울 만한 어떤 큰 행위를 찾고자 함이다. 성경에 어긋나게 반대자들은 행위에 관한 이 경건치 않은 견해들을 떠받친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에 이러한 것들, 곧 그것이 화목제물이며, 죄의 용서와 은혜를 공로로 얻으며, 이 행위들 때문에 그리고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으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겨진다고 돌리는 것은, 그리스도께 중보자요 화목제물이신 영예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선행이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고 믿고 가르치지만(율법의 시작된 성취가 믿음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분 자신의 영예를 돌린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겨진다는 것,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없이 행위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행위로 우리가 죄의 용서와 은혜와 의를 공로로 얻지 못한다는 것, 우리의 행위를 하나님의 진노와 의에 맞세울 수 없다는 것, 행위가 죄의 두려움을 이길 수 없다는 것, 도리어 죄의 두려움이 오직 믿음으로 정복된다는 것,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맞서 오직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가 믿음으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고 가르친다. 누구든지 달리 생각한다면, 그는 화목제물이 되시려고 세워지셔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신 그리스도께 합당한 영예를 돌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것으로 우리가 사람과 다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상대하는 의, 곧 그것으로 우리가 은혜와 양심의 평안을 붙잡는 의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양심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와 화해하셨음을 확신하는 오직 믿음으로가 아니고는 하나님 앞에서 평정될 수 없으니, 로마서 5장 1절에 따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화평을 누리자" 함과 같다. 이는 칭의가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거저 약속된 일이기에,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6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 대한 반박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사랑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반대자들이 인용하는 구절들에 답할 것이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서 "내게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를 인용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들은 크게 의기양양해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믿음만으로는 의롭다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바울이 온 교회에 증언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사랑과 행위에 관하여 견지하는 바를 보였으니, 답하기는 쉽다. 바울의 이 구절은 사랑을 요구한다. 우리도 이를 요구한다. 우리는 위에서, 예레미야 31장 33절에 따라 새롭게 됨과 율법의 시작된 성취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누구든지 사랑을 내버린다면, 비록 큰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는 그것을 보존하지 못하니, 성령을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어져서 이제 다시 성령과 믿음 없는 육적인 자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성령의 다른 열매들이 없는 곳에는 성령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칭의의 방식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성령을 잃지 않도록 선한 열매를 맺으라고 권면받아야 할 자들에게 쓰는 것이다. 더욱이 반대자들은 이 일을 거꾸로 다룬다. 그들은 바울이 열매에 관하여 가르치는 이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가 정연한 순서로 칭의의 방식을 논하는 매우 많은 다른 구절들은 생략한다. 게다가 그들은 믿음을 다루는 다른 구절들에는 언제나 교정을 덧붙이니, 곧 그것이 형성된 믿음(fides formata)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리가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 여겨진다고 견지하는 믿음도 필요하다는 교정을 덧붙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반대자들은 칭의에서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오직 율법의 의만을 가르친다. 그러나 바울에게로 돌아가자. 누구도 이 본문에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 이상을 추론할 수 없다. 이것을 우리는 고백한다. 이와 같이 도둑질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누가 거기에서 이러한 논증을 짜내고자 한다면 그 추론은 옳지 않을 것이다. "도둑질하지 않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므로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 의롭다 한다." 칭의는 어떤 행위에 대한 승인이 아니라 전인(全人)에 대한 승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 구절은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 다만 반대자들이 자기들 좋을 대로 무엇이든 상상으로 거기에 덧붙이지만 않으면 된다. 그는 사랑이 의롭다 한다고 말하지 않고,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곧 믿음이 아무리 컸을지라도 꺼진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이 죄와 사망의 두려움을 이긴다고 말하지 않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우리 사랑을 맞세울 수 있다거나, 우리 사랑이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킨다거나,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없이 우리가 우리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거나, 우리 사랑으로 약속된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사랑이 의롭다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우리는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셨음을 믿을 때에만 의롭다 하심을 받기 때문이다.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생략하고서는 칭의를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다면, 만일 우리 사랑으로 사망을 이길 수 있다면, 만일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없이 우리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반대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을 제거하고, 복음을 [곧 우리가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며, 우리의 율법 성취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받아들여진다고 가르치는 복음을] 폐기하라. 반대자들은 매우 많은 구절을 변질시키는데,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견해를 그 구절들에 가져오고, 그 구절들 자체에서 뜻을 끌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칭의가 무엇인지 또는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반대자들이 자기들의 생각으로 거기에 덧붙인 해석을 우리가 제거한다면, 이 구절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고린도 사람들은 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아 많은 탁월한 은사를 받았다. 처음에 그들은 흔히 그러하듯이 열심으로 불타올랐다. 그 후에 바울이 가리키듯이 그들 가운데 분쟁이 [당파와 분파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좋은 교사들을 싫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을 꾸짖으며, 그들을 [연합으로 그리고] 사랑의 직무로 다시 불러들인다. 이것들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사람과 상대하고 하나님과는 본래 상대하지 않는 둘째 돌판의 행위가 우리를 의롭다 한다고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칭의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상대한다. 그분의 진노가 달래져야 하고, 양심이 하나님께 대하여 평정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 어느 것도 둘째 돌판의 행위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으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믿음으로 일어난다. 다만 사랑을 잃으면 성령과 믿음을 잃는다는 것은 참되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랑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 한다는 긍정의 진술은 덧붙이지 않는다].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7 사랑이 믿음보다 앞선다는 반론에 대한 반박
그러나 그들은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앞에 놓인다고 반론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가장 크고 으뜸가는 덕이 의롭다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 구절에서 본래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며, 사랑이 가장 큰 까닭은 그것이 가장 많은 열매를 가지기 때문이라고 가리킨다. 믿음과 소망은 오직 하나님과만 관계하지만, 사랑은 밖으로 사람들을 향하여 무한한 직무를 가진다. [사랑은 땅 위에서 사람들 가운데로 나아가, 사사로이 그리고 공공연히 위로하고 가르치며 교훈하고 돕고 권면함으로써 많은 선을 행한다.] 그럼에도 반대자들에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덕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가장 큰 계명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네 하나님 주를 사랑하라"(마태복음 22장 37절).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서 어떻게 사랑이 의롭다 한다고 추론하겠는가? 그들은 가장 큰 덕이 의롭다 한다고 말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우리의 덕 때문에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모신다면 그것은 참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우리가 우리의 덕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받아들여지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우리의 덕은 부정하기 때문이다.] 가장 크거나 으뜸가는 율법이 의롭다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율법의 가장 큰 덕도 의롭다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과 덕이 더 높을수록 그것을 행할 우리의 능력은 그만큼 더 낮아지므로, 우리는 사랑 때문에 의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에게 전달하며,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은혜와 평안을 받는 그 덕이 의롭다 한다. 그러나 이 덕은 믿음이다. 자주 말하였듯이, 믿음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 안에서 제시되는 것들을 받아들이거나 붙잡으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을 향한 이 순종, 곧 제시된 약속을 받아들이려는 것은, 사랑에 못지않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 곧 라트레이아(latreia)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분에게서 복을 받기를 원하시며, 이것을 참된 예배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반대자들이 칭의를 사랑에 돌리는 것은, 그들이 어디에서나 율법의 의를 가르치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율법의 가장 높은 행위라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는 율법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칭의를 구한다. 따라서 스콜라 박사들도, 크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것을 율법의 가장 높은 행위로 선포하고 이 행위에 칭의를 돌린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에 속아, 그들은 모세의 벗겨진 얼굴이 아니라 가려진 얼굴을 바라보았으니, 마치 바리새인과 철학자들과 마호메트교도와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어리석음을 전파하니, 그 안에서 다른 의가 나타난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셨음을 믿을 때,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 여겨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교리가 이성과 율법의 판단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 않는다. 또한 사랑에 관한 율법의 교리가 훨씬 더 그럴듯해 보인다는 것도 모르지 않으니, 그것은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이를 변호하며, 우리가 이를 분명하고 명백하게 할 수 있도록 그분의 성령으로 우리를 도우시기를 그리스도께 간구한다.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8 골로새서 3장 14절(완전의 띠)에 대한 반박
반대자들은 또한 변박서(Confutation)에서 골로새서 3장 14절을 우리에게 맞서 인용하였다.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거기에서 그들은 사랑이 사람을 온전하게 하므로 의롭다 한다고 추론한다. 온전함에 관하여 여기에서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지만, 우리는 다만 바울의 뜻을 그대로 말하겠다. 바울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한 것은 확실하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칭의나 온전함을 첫째 돌판의 행위보다 둘째 돌판의 행위에 돌리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일 사랑이 사람을 온전하게 한다면,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곳에서 우리가 우리의 사랑이나 우리의 행위나 율법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받아들여진다고 가르친다. 어떤 성도도(앞서 말하였듯이)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모든 곳에서 이 세상에서는 우리의 행위에 온전함이 없다고 쓰고 가르치므로, 그가 여기에서 인격적 온전함을 말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믿음은 오직 화목제물로서 그리스도를 붙잡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뜻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바울은 결코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가 배제되도록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인격적 온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공통된 온전함(integritas)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의 연합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며, 그들이 온전함으로 해석하는 그 말은 찢어지지 않음 외에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 까닭에 그는 사랑이 띠 또는 연결이라고 말하니, 이는 그가 교회의 많은 지체가 서로 결속되고 연합됨에 관하여 말하고 있음을 나타내려 함이다. 모든 가정과 모든 나라에서 화합이 상호의 직무로 길러져야 하고, 사람들이 서로의 어떤 잘못을 못 본 체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평온이 유지될 수 없는 것과 같이, 바울은 교회 안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명하니, 이는 교회가 화합을 보존하고, 필요한 대로 형제들의 더 거친 태도를 견디며, 어떤 덜 심각한 잘못을 못 본 체함으로써, 교회가 여러 분열로 흩어지지 않고 그 분열에서 적대와 당파와 이단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 함이다.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9 교회의 화합과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대한 반박
감독들이 [까닭 없이] 백성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우거나 백성의 연약함을 돌아보지 않을 때마다 화합은 반드시 찢어지고 만다. 그리고 백성이 교사들[감독이나 설교자들]의 처신[행실과 생활]에 관하여 너무 가혹하게 판단하거나 [성급히 책망하고 비난하거나], 어떤 덜 심각한 허물 때문에 교사들을 업신여길 때 분쟁이 일어난다. 그때 또 다른 종류의 교리와 다른 교사들이 추구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온전함, 곧 교회의 온전함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견디고, 백성이 자기 교사들의 처신상의 어떤 허물을 선의로 받아들이며 [자기 설교자들에 대하여도 인내하며], 감독들이 백성의 연약함을 어느 정도 헤아릴 때 [형편에 따라 온갖 종류의 연약함과 허물에 대하여 백성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알 때] 보존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공동의 평온을 위하여 서로 많은 것을 헤아려 주어야 한다는 이 공평의 교훈으로 모든 지혜자의 책이 가득하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에서나 다른 곳에서나 이를 자주 가르친다. 그러므로 반대자들은 바울이 공동의 온전함과 평온을 말하는데도 "온전함"이라는 말에서 사랑이 의롭다 한다고 분별없이 논증한다. 또한 암브로시우스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곧 건물이 그 모든 부분이 서로 알맞게 맞추어졌을 때 온전하다거나 완전하다고 일컬어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더욱이 반대자들이 사랑에 관하여 그토록 많이 설교하면서 어디에서도 그것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교회를 찢어 갈라놓고, 법을 피로 쓰며, 그것이 공포되도록 가장 인자하신 군주이신 황제께 제안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명백한 폐습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조금이라도] 내비치기만 해도 제사장들과 다른 선한 사람들을 도륙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경건치 않은 교리에 한마디라도 거스르는 자는 누구든지 다 죽기를 바란다.] 이러한 일들은 그들이 따른다면 교회가 평온해지고 나라가 평화로울 사랑에 관한 그 큰소리치는 말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만일 반대자들이 경건에 무익한 어떤 전통들을, 그것을 가장 열심히 변호하는 바로 그 사람들조차 대부분 지키지 않는 그 전통들을, 너무 심한 쓰라림으로 [순전히 복수심에 찬 앙심과 바리새적 시기로, 자기들이 깨달은 진리를 거슬러] 고집하지 않는다면, 이 소요는 가라앉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은 쉽게 용서하면서도 다른 이는 그같이 용서하지 않으니, 시인의 구절을 따라 이러하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한다고 마이비우스가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여기에서 바울에게서 인용하는 그 사랑에 대한 찬사들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들은 그 말을 그것을 되돌려 주는 벽보다도 더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베드로에게서도 이 구절을 인용한다. 베드로전서 4장 8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는 것은 분명하니, 그가 이 구절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는 교훈에 잇대어 놓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사랑이 죄와 사망을 이긴다는 것, 사랑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배제하고서 하나님께서 화해되시는 화목제물이라는 것, 사랑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없이 의라는 것은 어느 사도의 마음에도 떠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사랑이,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율법의 의일 것이요, 우리가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아버지께서 화해하셨음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에게 베풀어졌음을 믿으면 우리에게 화해와 의를 약속하는 복음의 의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조금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도록 그리스도께 나아오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는 베드로전서 2장 4~6절에서 덧붙인다.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정죄하실 때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부끄러움에서 [우리의 행위와 생활로 인하여 우리가 참으로 수치를 당함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이 두려움 가운데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니,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받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10 잠언 10장 12절과 야고보서 2장 24절에 대한 반박
게다가 사랑에 관한 이 문장은 잠언 10장 12절에서 끌어온 것인데, 거기의 반대 대구가 그것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그것은 골로새서에서 가져온 바울의 그 구절과 똑같은 것, 곧 어떤 분쟁이 일어나거든 우리의 공평하고 너그러운 처신으로 누그러뜨리고 가라앉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것이 이르기를, 분쟁은 미움으로 말미암아 커진다고 하니, 우리가 가장 사소한 거슬림에서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 작은 불티에서 큰 화재가 일어나는 것을] 자주 보는 것과 같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어떤 사소한 거슬림이 있었는데, 만일 한쪽이 다른 쪽에게 아주 조금만 양보하였더라면 내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의 미움을 따르는 동안, 아무것도 아닌 일에서 가장 큰 동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이단이 오직 교사들의 미움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사랑은 죄를 가리느니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의 허물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허물을, 곧 다른 이들의 허물을, 그것도 사람들 가운데서, 곧 비록 이러한 거슬림이 일어날지라도 사랑이 그것을 못 본 체하고 용서하며 양보하고 모든 것을 정의의 극단까지 끌고 가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사랑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의 용서를 공로로 얻는다거나, 사랑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배제하는 화목제물이라거나, 사랑이 거듭나게 하고 의롭다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들에 대하여 까다롭거나 가혹하거나 다루기 어렵지 않다는 것, 사랑이 자기 친구들의 어떤 잘못을 못 본 체한다는 것, 사랑이 다른 이들의 더 거친 태도조차 선의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니, 잘 알려진 격언이 명하는 것과 같다. "벗의 태도를 알되 미워하지는 말라." 사도가 철학자들이 에피에이케이아(epieicheia), 곧 너그러움이라 부르는 이 직무에 관하여 그토록 자주 가르친 것은 까닭 없는 일이 아니었다. 이 덕은 [교회와 시민 정부 안에서] 공공의 화합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니, 목자와 교회들이 서로 많은 것을 못 본 체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모든 결함을 지나치게 따지려 하고 많은 것을 알아채지 않고 흘려보내지 않으면] 그 화합은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야고보서 2장 24절에서도 인용한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우리의 믿음에 이보다 더 거스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구절은 없다. 그러나 그 답은 쉽고 명백하다. 만일 반대자들이 행위의 공로에 관한 자기들의 견해를 덧붙이지 않는다면, 야고보의 말에는 불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행위가 언급되는 곳마다 반대자들은 거짓되이 자기들의 경건치 않은 견해를 덧붙이니, 곧 선행으로 우리가 죄의 용서를 공로로 얻는다는 것, 선행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시는 화목제물이요 값이라는 것, 선행이 죄와 사망의 두려움을 이긴다는 것, 선행이 그 선함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받아들여진다는 것, 선행이 자비나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 가운데 어느 것도 야고보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반대자들은 야고보의 이 구절을 빌미로 그것을 변호한다. 그러므로 첫째로, 우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하니, 곧 이 구절은 우리에게보다 반대자들에게 더 거스른다는 것이다. 반대자들은 사람이 사랑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에 관하여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은 이 믿음을 정죄하며, 판결과 글로만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칼과 사형으로도 교회에서 그것을 근절하려 한다. 야고보는 얼마나 더 잘 가르치는가! 그는 믿음을 빠뜨리거나 사랑을 믿음보다 앞세우지 않고 믿음을 보존하니, 이는 칭의에서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가 배제되지 않게 하려 함이다. 바울 또한 그리스도인 생활의 요점을 다룰 때 믿음과 사랑을 함께 포함하는 것과 같으니, 디모데전서 1장 5절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이다. 둘째로, 그 주제 자체가, 여기에서 믿음을 따르며 믿음이 죽은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살아 효력 있음을 보이는 그러한 행위를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선행으로 우리가 죄의 용서와 은혜를 공로로 얻는다고 믿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미 화해되어 받아들여졌으며, 죄의 용서를 얻은 자들의 행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대자들이, 야고보가 우리가 선행으로 죄의 용서와 은혜를 공로로 얻으며 우리의 행위로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가르친다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Apol. IV §1 (Part 8) Article IV: Of Justification (Reply, Part 8)
셋째로, 야고보는 바로 앞에서 중생(重生)에 관하여 말하였으니, 곧 중생이 복음을 통하여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가 1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그가 우리가 복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할 때,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 다시 태어났고 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은, 우리가 그것을 죄와 죽음의 공포에 맞세울 때, 오직 믿음으로만 붙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art04d §2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8-9)
이로부터 다음의 사실이 분명하다. 즉 야고보는 우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는 게으르고 안일한 마음, 곧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자들을 책망하면서, 죽은 믿음과 산 믿음을 구별하였다. 그는 선한 행위[와 성령의 열매, 곧 순종, 인내, 정결, 사랑]를 맺지 못하는 것을 죽은 것이라 하고, 선한 행위를 맺는 것을 산 것이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무엇을 믿음이라 부르는지 이미 자주 밝혔다. 우리는 마귀들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게으른 지식[곧 그리스도에 관한 역사만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공포에 맞서 떨고 있는 마음을 북돋우고 위로하는 믿음[성령께서 마음 안에서 일으키시는 새로운 빛과 능력, 이로써 우리가 죽음과 죄 등의 공포를 이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믿음은 대적자들이 꿈꾸는 것처럼 쉬운 일[곧 그들이 "믿으라, 믿으라, 믿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등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능력[내가 스스로 지어낼 수 있는 생각]도 아니며, 우리를 살리고, 그로써 우리가 마귀와 죽음을 이기게 하는 신적 능력이다. 바울이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효력을 발하며 죽음을 이긴다고 말한 것과 같다. 곧 "또 그 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한다. 이 믿음은 새로운 생명이므로, 필연적으로 새로운 움직임과 행위를 낳는다. [그것은 마음 안의 새로운 빛이요 생명이며, 이로써 우리가 또 다른 마음과 영을 얻으니, 그것은 살아 있고, 결실하며, 선한 행위가 풍성하다.] 따라서 야고보가 행위 없는 그러한 믿음으로는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고 부인한 것은 옳다. 그러나 그가 우리가 믿음과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할 때, 그는 우리가 행위로 거듭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그는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목제물이시고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화목제물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의롭게 됨의 방식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미 의롭다 함을 받고 거듭난 의로운 자들이 어떤 본성을 가지는지를 기술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믿음을 뒤따라야 할 행위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다음과 같이 말함이 옳다. 곧 믿음과 선한 행위를 가진 자는 의롭다, 다만 행위로 인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또한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되 그 열매가 나무를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선한 행위는 새로운 출생을 뒤따라야 하되, 그것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무가 먼저 좋아야 하는 것처럼, 사람 또한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행위는 그 자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우시게 하기에는 너무 보잘것없으니,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로우시지 않다면 그러하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성 바울과 모순되지 않으며, 우리의 행위로 우리가 공로를 세운다 등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악한 사람에게서 의로운 사람이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법정적 의미에서 의롭다고 선언된다는 뜻이다. 이는 또한 로마서 2장 13절의 구절에서도 그러하다. 곧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는 이 말이 우리의 교리에 반하는 것을 전혀 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야고보의 말에 관해서도 그렇게 믿는다. 곧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고 함은, 믿음과 선한 행위를 가진 사람들이 분명히 의롭다고 선언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성도들의 선한 행위는 의로우며 믿음으로 인하여 기쁘게 받아들여진다. 이는 야고보가 오직 믿음이 낳는 행위만을 칭찬하기 때문이니, 그가 아브라함에 관하여 야고보서 2장 21절에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였다"고 증언할 때 그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한 것이다. 곧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 후에 믿음으로 인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열매를 맺는 자들이 의롭다고 선언되며, 따라서 그들이 율법의 성취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단순하게 말하면 어떤 오류도 담고 있지 않으나, 대적자들이 자기 생각에서 나온 불경한 견해를 거기에 덧붙여 왜곡한다. 이로부터 행위가 죄 사함을 받을 공로를 세운다든지, 행위가 마음을 거듭나게 한다든지, 행위가 화목제물이 된다든지,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없이도 행위가 기쁘게 받아들여진다든지, 행위가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 야고보는 이러한 것들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대적자들은 야고보의 말에서 이를 뻔뻔스럽게 추론해 낸다.
art04d §4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8-9)
그러므로 이사야 1장 16절과 18절에서 선지자가 회개를 설교하여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고 압제당하는 자를 건져내며 고아를 위하여 심판하고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자, 우리가 서로 논의하자,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고 할 때, 선지자는 이처럼 회개를 권면하는 동시에 약속을 덧붙인다. 그러나 이러한 문장에서 "압제당하는 자를 건져내며 고아를 위하여 심판하라"는 말만을 헤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첫머리에서 "악행을 그치라"고 말하고 있으며, 여기서 그는 마음의 불경건함을 책망하고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선지자는 "압제당하는 자를 건져내며 고아를 위하여 심판하라"는 행위를 통하여 사람이 죄 용서를 업적의 행위 자체로(_ex opere operato_) 공로로서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새 생명에 필요한 그러한 행위들을 명령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죄 용서는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뜻하며, 그에 따라 약속이 덧붙는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유사한 구절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회개를 설교하시며, "그리하면 너희도 용서받으리라"(누가복음 6장 37절)는 약속을 덧붙이신다. 실로 그분은 우리가 용서할 때 이 우리의 행위를 통하여, 그들이 일컫는 대로 업적의 행위 자체로(_ex opere operato_) 죄 용서를 공로로서 얻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새 생명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분은 죄 용서가 믿음으로 받는 것임을 뜻하신다. 이와 같이 이사야가 58장 7절에서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라"고 말할 때, 그는 새 생명을 요구한다. 선지자는 이 행위 하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가리키는 대로 회개 전체를 말하며, 그러면서도 그동안 그는 죄 용서가 믿음으로 받는 것임을 의도한다. 이 명제는 확실하며 지옥의 어느 문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으니, 곧 회개를 설교함에 있어 율법의 설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진노를 이루고 항상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설교가 덧붙여져야 하니,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가 용서되었음을 믿으면 이처럼 죄 용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이 왜 필요하며, 그리스도가 왜 필요하겠는가? 이 믿음은 항상 시야에 두어야 하니, 그리스도를 내던지고 복음을 지워버린 채 우리의 행위로 죄 용서를 산다고 사악하게 성경을 인간적 견해로 왜곡하는 자들을 대적하기 위함이다.
art04d §5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8-9)
다니엘 4장 24절의 강론에서도 그와 같이 믿음이 요구된다. [믿음과 영으로 가득 찬 선지자의 이 말씀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나 그 밖의 이교도의 말처럼 이교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알렉산드로스에게 권하기를, 그 권력을 자신의 방종을 위해 쓰지 말고 나라와 사람들을 개선하는 데 쓰라고 하였다. 이는 옳고 잘 기록된 것이며, 왕의 직무에 관하여는 이보다 더 좋게 설교하거나 기록할 수 없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의 왕에게 말하되, 그의 왕으로서의 직무에 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라, 회개와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화해에 관하여, 그리고 인간의 생각과 행위를 훨씬 초월하는 숭고하고 위대하며 영적인 주제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다니엘이 뜻한 바는, 왕이 단지 구제를 베푸는 것[이는 위선자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만이 아니라, “긍휼을 가난한 자에게 베풂으로 네 죄악을 끊어 버리라[불가타역은 ‘속량하라’]”라고 말할 때 회개를 포괄한다는 것이니, 곧 마음과 행위의 변화로 네 죄를 끊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믿음이 요구된다. 또한 다니엘은 오직 한 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관하여 그에게 많은 것을 선포하며, 왕을 구제를 베푸는 데로만 아니라 더욱이 믿음으로 돌이키게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한 왕의 탁월한 고백을 가지고 있으니, “이렇게 사람을 건져 낼 다른 신이 없느니라”(단 3장 29절)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강론에는 두 부분이 있다. 그 한 부분은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생명의 행위에 관하여 명령하는 것이다. 다른 부분은 다니엘이 왕에게 죄 사함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제 약속이 있는 곳에는 믿음이 요구된다. 약속은 마음이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자신의 합당함이나 합당하지 못함을 돌아보지 않는 것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니엘 또한 믿음을 요구하니, 그 약속이 이르기를 “네 죄과가 치유되리라”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죄 사함의 약속은 율법의 설교가 아니라 참으로 선지자적이며 복음적인 음성이니, 다니엘은 분명 이것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뜻하였다. 다니엘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 사함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약속되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왕에게 죄 사함을 약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의 공포 가운데서 특히, 하나님의 뜻에 관한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이 진노하기를 그치신다고 단언하는 것은 사람의 능력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니엘의 말은 그 자신의 언어로 회개에 관하여 더욱 분명하게 말하며, 그 약속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의로써 네 죄를, 가난한 자를 향한 자비로써 네 죄악을 속량하라.” 이 말씀은 회개의 전체에 관하여 가르친다. [이는 곧 ‘네 삶을 고치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가 삶을 고칠 때 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참되다.] 이 말씀은 그에게 먼저 의롭게 되고, 그다음에 선한 행위를 행하며, 왕의 의무였던 대로 비참한 자들을 불의에서 지키도록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란 마음의 믿음이다. 더 나아가 죄는 회개로 속량되니, 곧 그 책무 또는 죄책이 제거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기 때문이며, 에스겔 18장 21~22절에 기록된 바와 같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로부터 하나님이 뒤따르는 행위 때문에, 구제 때문에 용서하신다고 추론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의 약속 때문에 그의 약속을 붙드는 자들을 용서하신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참으로 믿어 믿음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의 약속을 붙들지 못한다. 이들은 거듭난 자로서, 요한이 마태복음 3장 8절에서 말한 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하면 네 죄과가 치유되리라”(단 4장 24절)라는 약속이 덧붙여진 것이다. [다니엘은 단지 행위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써 네 죄를 속량하라”라고 말한다. 이제 성경에서 의가 외적인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포괄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바울이 말한 대로 “Iustus ex fide vivet”, 곧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히 10장 38절)라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니엘은 의를 언급할 때 먼저 믿음을 요구하며 말하기를 “의로써, 곧 네가 의롭게 되는 그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네 죄를 속량하라”라고 한다. 이에 더하여 선한 행위를 행하라, 곧 네 직무를 수행하고, 폭군이 되지 말며, 네 통치가 네 나라와 백성에게 유익하도록 힘쓰고, 평화를 지키며, 가난한 자를 부당한 폭력에서 보호하라. 이것이 군주의 구제이다.] 히에로니무스는 여기에 의심을 표하는 불변화사를 덧붙였는데, 이는 본문과 무관하며, 그의 주석에서는 더욱 지혜롭지 못하게 죄 사함이 불확실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이 죄 사함에 관한 확실한 약속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죄 사함에 관한 확실한 약속이 있어야 함을 부인하는 것은 복음을 완전히 폐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 관하여는 히에로니무스를 물리치자. 비록 그 약속은 ‘속량하라’라는 말에서도 드러나지만 말이다. 이는 죄 사함이 가능함을, 곧 죄가 속량될 수 있음을, 다시 말해 그 책무 또는 죄책이 제거되거나 하나님의 진노가 누그러질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대적자들은 약속들을 간과하고 도처에서 오직 계명만을 고려하며, 본문이 그렇게 말하지 않고 도리어 믿음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행위 때문에 죄 사함이 일어난다는 인간적 견해를 거짓되이 결부시킨다. 약속이 있는 곳마다 믿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약속은 믿음에 의하지 않고는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의 본문, 곧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받으리라”라는 구절에 관하여도 동일한 답이 주어져야 한다. 이것 또한 바로 그러한 회개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첫 부분은 삶의 고침과 선한 행위를 요구하고, 다른 부분은 약속을 덧붙인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로부터 우리의 용서함이 우리에게 ‘행위의 수행 자체로(ex opere operato)’ 죄 사함을 공로로 얻게 한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바는 그것이 아니며, 도리어 다른 성례들에서 그리스도가 약속을 외적인 표징에 결부시키셨듯이, 이 자리에서도 죄 용서의 약속을 외적인 선한 행위에 결부시키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의 만찬에서 우리가 믿음 없이 ‘행위의 수행 자체로’ 죄 사함을 얻지 못하듯이, 우리가 용서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용서함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죄를 용서하신 사람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선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용서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용서 뒤에 따라와야 한다. 대개 그리스도는 이 둘, 곧 율법과 복음, 믿음과 선한 행위를 결합하시는데, 이는 선한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곳에는 믿음도 없음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며, 또한 우리가 복음과 죄 용서를 우리에게 일깨우는 외적인 표지들을 가져 우리의 위로로 삼고,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이 여러 모양으로 훈련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그러한 구절들을 이해하여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복음 전체와 정면으로 모순될 것이며, 우리의 빈약한 행위가 그리스도의 자리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홀로 화목제물이 되셔야 하니, 그 누구도 이를 결코 멸시해서는 안 된다. 또한 만일 이 구절들이 행위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죄 사함은 매우 불확실하게 될 것이니, 그것이 빈약한 토대, 곧 우리의 비참한 행위에 의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art04d §7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8-9)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에 대한 모든 찬사와 율법의 설교에서 이 규칙을 지켜야 한다. 곧 율법은 그리스도 없이는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또한 이러하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느니라"(히 11:6). 이는 율법의 교리가 복음을 제거하고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제거하려는 것이 아님이 매우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대적자인 바리새인들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들은 율법을 그릇 풀이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행위에 돌리니, 곧 그 행위가 화목제물이며 죄 사함을 공로로 얻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다음의 결론이 나온다. 행위가 늘 이렇게 칭찬받는 것은, 곧 그것이 믿음을 인하여 기쁘심이 되기 때문이며,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없이는 행위가 기쁘심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으며(롬 5:2),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없이 행위로 말미암아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는 그 계명들이 지켜지지 않으며 그분 없이는 기쁘심이 될 수 없음을 믿어야 한다. 이와 같이 십계명 그 자체에서도, 첫째 계명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는 율법의 가장 너그러운 약속이 더해져 있다. 그러나 이 율법은 그리스도 없이는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은 율법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양심을 늘 고소하며, 그리하여 두려움 가운데 율법의 심판과 형벌로부터 도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느니라"(롬 4:15).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셨다는 것을 들을 때 율법을 지킨다. 비록 우리가 율법을 만족시킬 수 없을지라도 그러하다.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붙들 때, 마음이 안식을 얻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록 율법의 시작된 성취가 완전함과는 거리가 멀고 매우 부정할지라도, 이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줄을 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회개의 설교에 관하여도 판단해야 한다. 회개의 교리에서 스콜라 학자들이 믿음에 관하여는 전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대적자들 가운데 누구도 사죄(赦罪)가 복음의 한 음성임을 부인할 만큼 미친 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죄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양심을 격려하도록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art04d §8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8-9)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에 대한 모든 칭찬과 율법의 설교에서 다음의 원칙을 유지한다. 곧 율법은 그리스도 없이는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 11장 6절). 율법의 교리가 복음을 없애고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지극히 확실하다. 그리고 우리의 대적자인 바리새인들, 곧 그리스도의 영광을 행위에 돌리는 방식으로, 즉 행위가 화목제물이고 행위가 죄의 용서를 공로로 얻게 한다고 율법을 해석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따라서 행위가 항상 이런 방식으로 칭찬받는다는 결론이 따른다. 즉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없이는 행위가 기쁘시지 못하는 것처럼, 행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기쁘시게 한다.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롬 5장 2절),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없이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 19장 17절에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는 계명이 지켜지지 않으며 그분 없이는 기쁘시지 못한다고 믿어야 한다. 이처럼 십계명 자체에서도, 제1계명(출 20장 6절)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여 율법의 가장 풍성한 약속이 더해진다. 그러나 이 율법은 그리스도 없이는 지켜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은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양심을 항상 고발하며, 따라서 양심은 공포 속에서 율법의 심판과 형벌을 피하여 달아난다. 이는 율법이 진노를 이루기 때문이다(롬 4장 15절).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셨다는 것을 들을 때, 비록 우리가 율법을 만족시킬 수 없을지라도 율법을 지킨다.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중보자로 붙잡힐 때, 마음은 안식을 얻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율법을 지키기 시작하고, 비록 율법의 초보적 성취가 완전함에서 멀고 심히 불결할지라도 이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쁘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회개의 설교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처럼 판단해야 한다. 비록 스콜라 학자들이 회개의 교리에서 믿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우리 대적자 중 누구도 사죄선언이 복음의 음성임을 부인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죄선언은 두려움에 빠진 양심을 북돋우기 위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art04d §9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8-9)
토비트서 4장 11절의 말씀도 그와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곧 자선은 모든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과장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나, 다만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것이 그분의 고유한 권한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는 율법의 교리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규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화해 또는 칭의에 뒤따르는 자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 그에 앞서는 자선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행위 자체의 효력으로(ex opere operato)가 아니라, 우리가 앞서 회개에 관하여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믿음과 그 열매를 받아들여야 하듯이, 여기서 자선에 관하여도 이 생명의 전적인 새로움이 구원한다고 말해야 한다(곧 그것들이 믿는 자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또한 자선은 믿음의 훈련이니, 그 믿음은 죄의 용서를 받고 죽음을 이기며, 점점 더 자신을 단련하고 이러한 훈련 속에서 힘을 얻는다. 우리는 또한 이것을 인정한다. 곧 자선이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공로로 얻으며(그러나 그것들은 죽음과 지옥과 마귀와 죄들을 이기거나 양심에 평화를 줄 수는 없으니,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형벌을 덜어 주며, 우리가 조금 전에 회개 전체에 관하여 말한 바와 같이 죄와 죽음의 위험 속에서 우리의 변호를 공로로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의미이며, 성경의 다른 본문들과도 일치한다. 성경 어디에서든 선한 행위가 칭찬받는 곳에서는 우리가 항상 바울의 규칙을 따라 그것들을 이해해야 하니, 곧 율법과 행위가 그리스도 위로 높여져서는 안 되며, 도리어 그리스도와 믿음은 하늘이 땅 위에 있는 것만큼 모든 행위 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비트서의 말씀은 전체로 보면 자선에 앞서 믿음이 요구됨을 보여 준다. 4장 5절에 이르기를, 너의 평생에 주 너의 하나님을 기억하라 하였고, 그 후 19절에 이르기를, 항상 주 너의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분께 네 길이 인도되기를 구하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그 믿음에 본래 속하는 것이니,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긍휼 때문에 자기와 화해하셨음을 믿으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며 다스림 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대적들은, 그 매혹적인 자들은, 숙련되지 못한 자들을 속이려고 잘린 문장들을 골라낸다. 그 후에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견해에서 무언가를 덧붙인다. 그러므로 본문 전체가 요구되어야 하니, 이는 통상적인 준칙에 따르면 율법 전체가 철저히 검토되기 전에 그 어느 한 조항이 제시되었을 때 판단하거나 답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문들은 그 전체로 제시될 때 매우 자주 그 해석을 함께 가져온다.
art04d §10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8-9)
누가복음 11장 41절도 잘린 형태로 인용되니, 곧 '너희가 가진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는 것이다. 적대자들은 매우 우둔하다 [귀가 먹었고 굳은 귀를 가졌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그토록 자주 등을 거듭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거듭거듭 말한 바, 율법의 선포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 더해져야 하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선행이 기뻐하심을 받는다고 했음에도, 그들은 가는 곳마다 [수치도 없이] 그리스도가 배제된 채 율법의 행위로 칭의가 공로로 얻어진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이 잘리지 않고 온전히 제시되면, 그것은 믿음이 요구됨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들이 잦은 씻음으로 [온갖 _baptismata carnis_, 곧 온갖 몸과 그릇과 의복의 목욕과 씻음과 정결케 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되었다 곧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다. 마치 어떤 교황이 소금 뿌린 물에 대하여 그것이 백성을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한다고 말하고, 주석은 그것이 소죄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신 바리새인들의 견해도 그러한 것이었으니, 그분은 이 거짓된 정결케 함에 대하여 이중의 정결, 곧 하나는 내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외적인 것을 대치하신다. 그분은 그들에게 안으로 [(이는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 깨끗하게 되라 명하시고, 외적 정결에 관하여 더하여 말씀하시니, '너희가 가진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고 하신다. 적대자들은 '모든 것'이라는 보편적 불변화사를 바르게 적용하지 못하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 결론을 두 부분 모두에 더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안으로 깨끗하고 또 밖으로 구제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이는 그분이 외적 정결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행위에 관련된 것이지, 그 당시의 씻음들과 매일의 물 뿌림, 수도사들의 의복, 음식의 구별, 그리고 지금의 이와 유사한 과시 행위들과 같은 인간의 전통에 관련된 것이 아님을 가리키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대자들은 보편적 불변화사를 한 부분에만 궤변적으로 옮김으로써 그 뜻을 왜곡하니, '구제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리라'고 한다. [마치 어떤 이가 다음과 같이 추론하는 것과 같다. 안드레가 있으니, 그러므로 모든 사도가 있다. 그러므로 전제에서 두 부분이 결합되어야 하니, 곧 믿고 또 구제하라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온 사명, 곧 온 직분이 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을 믿게 하려고 그분이 오신 것이 이 목적을 위함이다. 이제 두 부분, 곧 믿음과 구제가 결합되면, 모든 것이 깨끗하다는 것이 바르게 따라오니, 곧 마음은 믿음으로, 외적 삶은 선행으로 깨끗해진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온 설교를 결합하여야 하며, 부분들을 뒤집어 그 본문이 마음이 구제로 죄에서 깨끗해진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반어적으로 하신 것이라고 여기니, 마치 그분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려는 것과 같다. 그래, 나의 사랑하는 주인들아, 빼앗고 도둑질하라, 그러고 나서 가서 구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즉시 깨끗하게 되리라.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소 풍자적이고 조롱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바리새적 위선을 찌르려 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불신앙과 탐욕과 온갖 악한 행위에 넘쳤음에도, 여전히 그들의 정결 예식을 지키고 구제하며 자기들이 아주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성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해석은 본문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도행전 15장 9절에서 마음이 믿음으로 깨끗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온 구절을 살펴보면, 그것은 나머지 성경과 조화를 이루는 뜻을 제시하니, 곧 마음이 깨끗해지고 그런 다음에 외적으로 구제, 곧 사랑의 모든 행위가 더해지면, 그들은 이와 같이 전적으로 깨끗하다 곧 안으로만이 아니라 밖으로도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온 담론이 거기에 더해지지 않는가? 그 책망에는 여러 부분이 있으니,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믿음에 관하여 명하고 다른 것은 행위에 관하여 명한다. 믿음에 관한 구절들은 빠뜨린 채 행위에 관한 명령들만 골라내는 것은 공정한 독자의 일이 아니다.
art04d §11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8-9)
끝으로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경계해야 한다. 곧, 반대자들이 선행을 통하여 죄의 사함을 공로로 얻는다고 가르칠 때, 그들은 경건한 양심들에게 가장 나쁜 조언을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은 선행을 통해 사함을 얻으려 할 때 그 행위가 하나님을 만족시키리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양심은 항상 괴로움을 당하며, 완전히 절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다른 선행과 다른 예배 행위를 고안해 낸다. 이 과정은 바울이 로마서 4장 6절에서 서술한 바이다. 거기서 그는 의의 약속이 우리의 선행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데, 우리는 화해된 하나님을 모셨다고 결코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항상 고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 약속은 헛되고 불확실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는 이에 따라 죄의 사함과 의에 관한 이 약속이 선행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이것이 바울의 참되고 단순하며 진정한 뜻이며, 그 안에서 경건한 양심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주어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난다. 실로 그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곧 그를 통하여 우리가 은혜와 의와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다.
art04d §12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8-9)
여기까지 우리는 믿음이 의롭다 하지 않으며 우리가 행위로 죄 사함과 은혜를 공로로 얻는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대적자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주요 구절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경건한 양심들에게 다음을 충분히 분명하게 보였으리라 소망한다. 곧 구절들은 우리의 교리에 반대되지 않으며, 대적자들은 성경을 자신들의 견해에 맞게 악하게 왜곡하고, 그들이 인용하는 구절들 대부분을 변조했으며, 믿음에 관한 가장 명백한 구절들은 빼놓고 오직 행위에 관한 구절들만 성경에서 골라내며 그것조차 왜곡하고, 도처에서 성경 말씀이 말하는 바에 어떤 인간적 견해를 덧붙이며, 율법을 가르치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적자들의 교리 전체가 한편으로는 인간의 이성에서 나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이 아닌 율법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두 가지 칭의 방식을 가르치기 때문인데, 그 하나는 이성에서 나왔고 다른 하나는 복음이나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이 아닌 율법에서 나왔다.
art04d §14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8-9)
또 다른 칭의의 방식이 스콜라 신학자들에 의해 전해진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습성, 곧 사랑을 통하여 의롭게 되며, 이 습성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지키고, 이 율법의 성취가 은혜와 영원한 생명에 합당하다고 가르친다. 이 교리는 분명히 율법의 교리이다. 율법이 말하는 바가 참되기 때문이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등(신 6:5). "네 이웃을 사랑하라"(레 19:18).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성취이다.
art04e §1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10)
여기에는 또한 그리스도의 선언이 속하니, 누가복음 17장 10절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그 모든 것을 행하였을 때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라."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긍휼로써, 그리고 자신의 약속을 인하여 구원하시는 것이지 우리 행위의 가치를 인하여 마땅히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선언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대적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놀랍게 농락한다. 첫째로, 그들은 환치법(antistrophe)을 만들어 이를 우리에게 돌려세운다. 그들은 말하기를, 도리어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믿었거든,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라." 그런 다음 그들은 행위가 하나님께 유익이 되지 않으나 우리에게는 유익이 없지 않다고 덧붙인다. 궤변의 유치한 탐닉이 대적들을 어떻게 즐겁게 하는지를 보라. 비록 이 부조리들이 반박할 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우리는 몇 마디로 그들에게 답하고자 한다. 그 환치법은 결함이 있다. 왜냐하면 첫째로, 대적들은 믿음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속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악인들과 마귀들 안에도 있는 그 역사(history)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대적들이 "우리가 모든 것을 믿었거든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라"고 말하면서 믿음이 무익하다고 논증하는 것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역사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긍휼에 대한 신뢰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약속에 대한 이 신뢰는 우리가 무익한 종임을 고백한다. 참으로 우리의 행위가 무가치하다는 이 고백이야말로 믿음의 바로 그 음성이니, 우리가 조금 앞서 인용한 다니엘 9장 18절의 이 예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우리의 의를 인하여 주 앞에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등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의 행위가 무가치할지라도, 긍휼 곧 은혜의 약속을 붙잡기에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곧 우리의 행위가 무가치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면, 그 환치법은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 "너희가 모든 것을 믿었거든,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라." 우리가 긍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온 교회와 더불어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유비로부터 논증하려 한다면, 곧 "너희가 모든 것을 행하였을 때에 너희 행위를 신뢰하지 말라, 그러므로 또한 너희가 모든 것을 믿었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말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연결점이 없다. [그 추론은 잘못되었으니, "행위가 돕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음도 돕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양 없는 자들에게 소박한 예를 들어 주어야 한다. 반 페니가 돕지 못하므로 따라서 한 플로린도 돕지 못한다는 것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 플로린이 반 페니보다 훨씬 높은 단위이며 가치가 큰 것과 같이, 또한 믿음이 행위보다 훨씬 더 높고 더 효력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믿음이 그 가치 때문에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긍휼을 신뢰하기 때문에 돕는다. 믿음은 그 가치 있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강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매우 상이하니, 앞의 명제에서 신뢰의 원인과 대상이 뒤의 것의 그것과 크게 상이하기 때문이다. 앞의 것에서 신뢰는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신뢰이다. 뒤의 것에서 신뢰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행위에 대한 신뢰를 정죄하시지, 그분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하여 절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행위를 무가치한 것으로 고발하시지만, 긍휼을 값없이 베푸는 그 약속을 고발하지는 않으신다. 그리고 여기서 암브로시우스가 잘 말하였다. 은혜는 인정되어야 하지만, 본성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은혜의 약속을 신뢰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본성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적들은 자기들의 관례대로 행하여, 믿음을 위하여 주어진 판단들을 믿음에 거슬러 왜곡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행위를 신뢰하는 것을 금하시니, 그것들이 그들을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그분은 바로 그 이유, 곧 우리가 무익한 종이며 행위가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그 이유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러한 신뢰를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그 악한들은 우리 자신의 가치 있음에 대한 신뢰를 다루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부당하게 적용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궤변을 분명히 드러내고 무너뜨린다. 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거룩한 말씀을 이렇게 훼손하는 궤변가들을 속히 부끄럽게 하시기를! 아멘.] 그러나 우리는 이 가시 돋친 논점들을 학교들에 맡겨 둔다. 그들이 "무익한 종"을 그 행위가 하나님께는 무익하나 우리에게는 유익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때, 그 궤변은 명백히 유치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은혜의 빚진 자로 만드는 그 유익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니, 비록 여기서 무엇이 유익하거나 무익한지를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나 그러하다. 왜냐하면 "무익한 종"이란 "불충분한"을 의미하니, 아무도 마땅히 그러해야 할 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적들의 이 냉랭한 트집들은 떨쳐 버리자. 그것들에 관하여는, 만일 언젠가 빛 가운데로 드러난다면, 분별 있는 자들이 그것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를 쉽게 결정할 것이다. 그들은 매우 평이하고 분명한 말씀에서 흠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신뢰가 정죄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본다.
art04e §2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10)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고백하는 이것, 곧 우리가 긍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누군가가 "우리가 긍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구원을 얻는 자들 안에 그들을 얻지 못하는 자들과 구별되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선행하지 않을진대, 소망은 불확실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는 그에게 충분한 답변을 주어야 한다. 스콜라 학자들은 이 논거에 이끌려 적합공로(meritum condigni)를 고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고려가 사람의 마음을 크게 동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략히 답하고자 한다. 소망이 확실해지기 위한 바로 그 이유에서, 구원을 얻는 자들과 얻지 못하는 자들 사이에 선행하는 구별이 있게 하기 위한 바로 그 이유에서, 우리가 긍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굳게 붙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이처럼 무조건적으로 표현하면 불합리해 보인다. 민사 법정과 사람의 심판에서는 권리에 속하거나 빚진 것은 확실하고, 긍휼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해서는 그 사정이 다르다. 여기서는 긍휼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분명하고 확실한 약속과 명령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본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믿으라고 명하는 그 명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7, 18절). 그러므로 긍휼을 말할 때마다 약속에 대한 믿음이 더해져야 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확실한 소망을 낳으니,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만일 소망이 행위에 의지한다면, 참으로 그것은 불확실할 것이니, 이는 위에서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행위는 양심을 평안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구원을 얻는 자들과 얻지 못하는 자들 사이를 구별한다. 믿음은 합당한 자와 합당하지 못한 자를 구별하니, 이는 영생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에게 약속되었고, 믿음이 의롭게 하기 때문이다.
art04e §3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10)
그러나 여기서 다시 반대자들은, 선행이 영원한 생명을 공로로 얻게 하지 못한다면 선행은 필요하지 않다고 외칠 것이다. 이러한 비방은 위에서 이미 반박하였다. 물론 선행을 행하는 것은 필요하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 약속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육신을 따라 행하는 자는 믿음도 의도 보유하지 못한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함이니, 곧 의롭게 되어 선행을 시작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게 하려 함이다. 우리가 거듭나고 성령을 받는 것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함이니, 곧 새 생명이 새로운 행위와 새로운 성향, 즉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 정욕에 대한 미움 등을 낳게 하려 함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 믿음은 회개 가운데서 일어나며, 선행과 시험과 위험 한가운데서 굳게 세워지고 자라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를 돌보시고 용서하시며 들으신다는 것을 끊임없이 더욱 굳게 확신하게 된다. 이것은 많고 큰 싸움 없이는 배워지지 않는다. 양심은 얼마나 자주 일깨워지며, 옛 죄든 새 죄든, 또는 우리 본성의 부정함을 눈앞에 가져올 때 얼마나 자주 절망에까지 몰아가는가! 이 죄의 증서는 큰 싸움 없이는 지워지지 않으니, 그 싸움 가운데서 경험은 믿음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증언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두려움 한가운데서 격려를 받고 위로를 얻는 동안, 동시에 다른 영적 움직임들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소망,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라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울이 골로새서 3장 10절과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거듭나며, 주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니, 즉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받아 그분을 참으로 두려워하고, 우리가 그분의 돌보심을 받고 그분께 들으심을 받는다는 것을 참으로 신뢰하게 된다. 이 거듭남은,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니, 바울이 로마서 8장 10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생명이니라. 또 고린도후서 5장 2절과 3절에서, 우리는 덧입기를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한다. 이러한 진술들로부터 공정한 독자는, 우리가 분명히 선행을 요구한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으니, 이는 우리가 이 믿음이 회개 가운데서 일어나며 회개 가운데서 끊임없이 자라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바로 이러한 일들에 기독교적이고 영적인 완전을 두니, 곧 회개와 믿음이 회개 가운데서 함께 자라는 데에 둔다. 이것은 반대자들이 관상이나 완전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들보다 경건한 자들에 의하여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칭의가 믿음에 속하는 것처럼, 영원한 생명 또한 믿음에 속한다.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1장 9절에서, 너희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한다. 반대자들도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임을 시인하기 때문이다. 그 후에 행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다른 육체적이고 영적인 상급을 공로로 얻는다. 이는 성도들의 영광에 차등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art04e §4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10)
그러나 여기서 반대자들은 영생이 보상이라 불리며, 따라서 선행에 의하여 합당한 공로로(de condigno) 공로화된다고 응답한다. 우리는 간략하고 명료하게 응답한다. 바울은 로마서 6장 23절에서 영생을 선물이라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어진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요한이 3장 36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를 따르는 매우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물들에 우리 안에서 면류관을 씌우신다." 다른 곳에서는 실로 누가복음 5장 2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다." 만일 이 구절들이 반대자들에게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들 스스로 그것들을 설명해 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정한 재판관이 아니니, 이는 그들이 선물이라는 단어를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전체 사안의 근원(즉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가 하는 핵심 부분, 또한 그리스도께서 항상 중보자로 머무신다는 점)을 빠뜨리고, 보상이라는 단어를 골라잡아, 이를 성경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언어의 용법에도 어긋나게 매우 가혹하게 해석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것이 보상이라 불린다는 점으로부터, 우리의 행위가 영생이 마땅히 주어져야 할 대가가 되어야 한다고 추론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은혜와 영생을 받기에 합당하며, 긍휼이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나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우리가 보상이라는 용어를 듣는다고 하여, 그로부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나,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이 필요 없다고 추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앞뒤가 맞지 않는 비논리(anacoluthon)임을 누가 보지 못하겠는가? 우리는 보상이라는 용어를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안, 곧 선행이 그 자체로 은혜와 영생을 받기에 합당한가, 아니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붙드는 믿음 때문에만 기뻐하심을 받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한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행위에 이것, 곧 그것들이 은혜와 영생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돌릴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고 또 그것으로 남을 의롭게 할 수 있는 잉여 공로를 가지고 있다고 거짓되게 주장한다. 마치 수도사들이 자기 수도회의 공로를 남에게 파는 것과 같다. 그들은 이 보상이라는 한 단어가 들리는 곳에서 이 괴물 같은 주장들을 크리시포스의 방식으로 쌓아 올린다. 곧 "그것은 보상이라 불린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보상이 마땅히 주어져야 할 대가가 되는 행위가 있다. 따라서 행위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기뻐하심을 받는다. 그리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공로를 가지므로, 어떤 이들은 잉여 공로를 가진다. 그리고 그것을 공로로 쌓은 자들은 이 공로를 남에게 베풀 수 있다." 멈추라, 독자여. 그대는 아직 이 연쇄추론(sorites)의 전부를 듣지 못하였다. 이 증여에 관한 어떤 성례들이 더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곧 두건이 죽은 자 위에 씌워진다. (맨발 수도사들과 다른 수도회들이 자기 수도회의 두건을 죽은 시신 위에 씌우며 부끄러움 없이 행한 것과 같다.) 이러한 축적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복들과 믿음의 의가 가려졌다. (이것들은 예리하고 강력한 논변들이니,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보상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부터 자아내어, 그로써 그리스도와 믿음을 가린다.)
art04e §5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10)
그러나 여기서 반대자들은 영생이 상(reward)이라 불리며, 따라서 그것은 선행에 의해 적격공로(de condigno)로 공로되어진다고 응답한다. 우리는 간략하고 명료하게 답한다. 바울은 로마서 6장 23절에서 영생을 선물(gift)이라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어진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가 되기 때문이다. 요한이 3장 36절에서 말하듯,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를 따르는 매우 많은 이들도 함께 말하듯,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선물들에 면류관을 씌우신다. 다른 곳에서도, 누가복음 5장 23절에 기록되기를, 너희 상이 하늘에서 크다 하였다. 만일 이 구절들이 반대자들에게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들 스스로가 그것들을 설명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정한 재판관이 아니니, 그들은 선물이라는 단어를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이 전체 사안의 근원들도 빠뜨리는데 [곧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가 하는 핵심 부분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중보자로 머무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이라는 단어를 골라내어, 이것을 성경에 거슬러서뿐 아니라 그 말의 용법에도 거슬러서 가장 가혹하게 해석한다. 이로써 그들은 그것이 상이라 불린다는 그 까닭에 우리의 행위가 영생이 마땅히 돌아가야 할 값이 되는 그러한 것이라고 추론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추론에 따르면 행위는 은혜와 영생에 합당하며, 긍휼이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나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전혀 새로운 것이니, 우리가 상이라는 용어를 듣고는, 따라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도,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 우리의 행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믿음도 필요 없다고 추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비논리적 비약(anacoluthon)임을 누가 보지 못하겠는가? 우리는 상이라는 용어를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안을 두고 논하니, 곧 선행이 그 자체로 은혜와 영생에 합당한가, 아니면 그것들이 오직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붙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기쁘시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행위에 대하여, 곧 그것들이 은혜와 영생에 합당하다는 것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남에게 베풀 수 있고 그것으로 남을 의롭게 할 수 있는 잉여 공로를 가졌다고 거짓되이 주장하니, 수도사들이 자기 수도회의 공로를 남에게 파는 것과 같다. 그들은 이 한 단어 상이 들리는 곳에서, 크리시포스(Chrysippus)의 방식으로 이러한 괴이한 것들을 쌓아 올린다. 곧, "그것은 상이라 불린다. 따라서 우리는 상이 마땅히 돌아가야 할 값이 되는 행위를 가졌다. 따라서 행위는 그 자체로 기쁘시게 하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공로를 가지므로, 따라서 어떤 이들은 잉여 공로를 가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공로한 자들은 이 공로들을 남에게 베풀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자여, 멈추라. 그대는 아직 이 연쇄추론(sorites)의 전부를 듣지 못하였다. 이 양도에 대한 어떤 성례들이 더해져야 하기 때문이니, 곧 죽은 자 위에 수도복 두건이 씌워진다. [맨발의 수도사들과 다른 수도회들이 죽은 시신 위에 자기 수도회의 두건을 씌우면서 뻔뻔스럽게 행해 온 것과 같다.] 이러한 누적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가져와진 복들과 믿음의 의가 흐려져 왔다. [이것들은 예리하고 강력한 논거들이니,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상이라는 단 한 단어에서 자아낼 수 있으며, 그것으로 그리스도와 믿음을 흐리게 한다.]
art04e §6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10)
그러나 반론자들은 선행이 영생을 받을 자격을 얻게 한다고, 그것이 선행의 고유한 권리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 2장 6절에서 "그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말하기 때문이며, 또한 10절에서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요한복음 5장 29절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아온다고 하며, 마태복음 25장 35절에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운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비슷한 구절들, 곧 성경에서 행위가 칭송되는 구절들에서, 외적인 행위뿐 아니라 마음의 믿음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위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동반한 마음의 의에 관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율법과 행위가 언급될 때마다, 우리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가 배제되어서는 안 됨을 알아야 한다. 이는 그분이 율법의 마침이 되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규칙을 따라 우리는 행위에 관한 모든 구절이 판단될 수 있다고 위에서 말하였다. 그러므로 영생이 행위에 주어진다고 할 때, 그것은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 곧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리는 사람들 외에는 그 누구도 선행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며, 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에 따라, 믿음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가 없이는 선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리라"고 말할 때, 외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모든 의나 불의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자에게 영광이 있으리라"는 것은 곧 의로운 자에게 영광이 있으리라는 뜻이다.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다"는 말씀은 마음의 의와 믿음의 열매이자 증거로 인용되며, 그러므로 영생은 의에 대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인정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행위만을 뜻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곧 그 마음이 하나님을 올바로 존중하고, 그분에 관하여 바르게 믿기를, 다시 말해 긍휼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믿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영생이 의로운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리스도께서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은 그 열매와 더불어 동시에 마음의 의를 포괄한다. 그리고 성경은 종종 그 열매를 거명하는데, 이는 미숙한 자들이 더 잘 이해하게 하려 함이요, 또한 위선이 아니라 새 생명과 거듭남이 요구된다는 것을 나타내려 함이다. 그러나 거듭남은 회개 가운데서 믿음으로 일어난다.
art04e §7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10)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달리 판단할 수 없으며, 우리는 여기서 열매를 마음의 의(義)로부터 분리하려는 따위의 헛된 궤변을 부리지 않는다. 다만 대적자들이, 열매가 믿음 때문에 그리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하심을 받는 것이며, 그 자체로는 은혜와 영생에 합당하지 않다는 점만 인정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가 대적자들의 교리에서 정죄하는 바는 이것이다. 곧 그들이 성경의 그러한 구절들을 철학적 방식으로든 유대적 방식으로든 이해하여 믿음의 의를 폐하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구절들로부터 행위가 은혜를 공로로 얻는다고 추론하는데, 때로는 적합 공로(de congruo)로, 또 때로는 — 곧 사랑이 더해질 때 — 합당 공로(de condigno)로 그렇게 한다고 한다. 즉 행위가 의롭게 하며, 행위가 의(義)이기 때문에 영생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 오류는 믿음의 의를 명백히 폐하는바, 믿음의 의란 우리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며, 제사장이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인도되고 화목하게 된 아버지를 모신다고 믿는 것이니, 이는 위에서 충분히 말한 바와 같다. 그리고 믿음의 의에 관한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되는데, 이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직분을 고려할 수 없고, 남는 칭의 교리란 율법의 교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도리어 우리는 복음을,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주어진 약속에 관한 교리를 굳게 지켜야 한다.
art04e §8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10)
[여기서 우리는 불필요한 궤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들에 관하여 신뢰할 만한 설명을 반드시 가져야 할 큰 이유가 있다. 우리가 행위가 영원한 생명을 공로로 얻게 한다고 대적자들에게 양보하자마자, 그들은 이 양보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긍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것, 또한 우리가 잉여 공로의 행위들, 곧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행위들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라는 거북한 교설을 자아낸다. 이리하여 믿음에 관한 교리 전체가 억눌린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하고 또 지속되어야 한다면,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의 의에 관한 순수한 교리가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대한 바리새적 오류들에 맞서 싸워야 하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의 영예와 그리스도의 영예를 구하여 내고,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위하여 참되고 항구하며 확실한 위로를 보존하려 함이다. 환난 가운데서, 또 죽음의 고뇌 가운데서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심판과 그분의 목전에서 온전히 티끌이 될 때, 사람이 긍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의 행위나 그들의 율법 성취를 위함이 아니라 구원받는다는 것이 믿음으로 확실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마음이나 양심이 안식을 얻거나 구원을 소망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참으로 성 라우렌티우스는 석쇠 위에 놓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문을 당할 때에, 이 행위로써 자기가 율법을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성취하고 있다거나, 자기가 죄 없다거나, 자기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선지자와 함께 자기 처지를 의탁하였으니, 선지자는 이르되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리이다’(시 143:2)라고 하였다. 또한 성 베르나르두스도 ‘페르디테 윅시(Perdite vixi)’, 곧 ‘나는 죄된 삶을 살았노라’ 등으로 말할 때에, 자기 행위가 영원한 생명에 합당하다고 자랑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담대히 자기를 위로하며, 은혜의 약속을 붙들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가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믿었으니, 시편 32:1이 가르치는 바와 같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또 바울은 로마서 4:6에서 이르되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라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비록 어떤 선한 행위도 행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가 전가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참되고 항구한 위로이니, 이로써 마음과 양심이 굳건해지고 격려를 받을 수 있다.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의와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제 만일 행위를 다루는 구절들이 믿음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면, 그것들은 우리의 교리에 배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참으로 그리스도를 중보자에서 배제하지 않도록, 언제나 믿음을 덧붙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율법의 성취는 믿음을 뒤따르니, 이는 생명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이 조항에 관하여는 이것으로 족하다.]
art04e §10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10)
그리고 이 외에도 매우 많은 구절을 저들은 학계에서 왜곡한다. 이는 그들이 믿음의 의(義)를 가르치지 않고, 믿음을 단지 역사나 교의(教義)에 대한 지식으로만 이해하고, 그것을 은혜와 의의 약속을 붙잡으며 죄와 죽음의 공포 가운데서 마음을 살리는 그 덕(德)으로는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10장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저들도 여기서 시인이 의롭다 하거나 구원하는 것이 일의 수행 자체(_ex opere operato_)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오직 마음의 믿음을 인해서임을 인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울이 시인이 구원한다고 말한 것은, 어떤 종류의 믿음이 영생을 얻는지, 곧 굳고 활동적인 믿음임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러나 시인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굳지 않다. 이와 같이 다른 선한 일들도 믿음을 인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이는 교회의 기도도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받아들여지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구한다. 이는 기도의 끝에 언제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구절이 더해지는 것에서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며, 믿음으로 거듭나게 됨을 결론짓는다. 이 믿음은 회개 중에 은혜의 약속을 붙잡고, 두려움에 빠진 마음을 참으로 살리며,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목하고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확신한다. 베드로가 벧전서 1장 5절에서 말하듯이, 이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나타나기로 예비된 구원에 이르도록 보존된다. 이 믿음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하며, 모든 환난 속에서 가장 풍성한 위로를 가져다주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직분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음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가 중보자이시며 화목제물이시라는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은혜의 약속과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칭의(稱義)에 관하여 오직 이성의 교리나 율법의 교리만을 가르친다. 우리는 이 안건의 기원을 여기서 할 수 있는 한도에서 보였고, 저들의 반론들을 설명하였다. 선한 사람들은 사랑이나 행위에 관한 구절이 인용될 때마다, 율법은 그리스도 없이는 지켜질 수 없으며, 우리가 율법으로는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없고 다만 복음으로,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은혜의 약속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것들을 쉽게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논의가 비록 간략할지라도 선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굳건히 하고 양심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데 유익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한 것들이 선지자와 사도의 성경과, 거룩한 교부들인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매우 많은 이들, 그리고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시며 의롭다 여기시는 분이심을 틀림없이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온 교회와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art04e §12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10)
또한 그들의 정신에 관하여는, 그들이 이제까지 대다수의 선한 사람들에게 행하여 온 것이 분명한 전례 없는 잔혹함으로부터 하나의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우리는 한 존경받는 신부가 우리의 신앙고백에 관한 의견들이 개진될 때에 제국의 원로원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잉크로 써서 제출한 신앙고백에 대하여 피로 쓴 답변을 작성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안은 그에게 없어 보인다고 한 것을 들었다. 팔라리스인들 무엇을 이보다 더 잔혹하게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제후들 또한 이러한 표현이 그러한 회합에서 발언되기에 합당치 아니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런즉 비록 대적자들이 교회라는 이름을 자기들의 것으로 주장할지라도,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과 함께 있으며, 복음에 반하는 악한 의견들을 옹호하는 자들과 함께 있지 아니함을 안다. 주께서 요한복음 10장 2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하심과 같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문제는 이것이니, 곧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 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말 속에서 구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그 머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구하여야 하는가? 나는 우리가 진리이시며 자신의 몸을 가장 잘 아시는 그분의 말씀 속에서 그것을 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대적자들의 판단은 우리를 동요시키지 못할 것이니, 이는 그들이 복음에 반하고, 교회 안에서 글을 남긴 거룩한 교부들의 권위에 반하며, 경건한 마음들의 증언에 반하는 인간적 의견들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art04e §13 Article IV: Reply to the Arguments of the Adversaries (Part 10)
그들의 정신에 관해서는, 그들이 지금까지 대부분의 선한 사람들에게 행사해 온 것이 분명한 전례 없는 잔혹함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이 회의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에 관한 의견들이 개진되었을 때, 어느 한 존경받는 신부가 제국 의회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잉크로 써서 제출한 신앙고백에 대해 피로 쓴 답변을 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안은 없어 보인다고 하였음을 들었다. 팔라리스라 한들 이보다 더 잔혹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일부 군주들도 이러한 표현이 그러한 회합에서 말해지기에는 합당치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그 대적들이 교회라는 이름을 자기들의 것으로 주장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과 함께 있으며, 복음에 어긋나는 악한 견해들을 옹호하는 자들과 함께 있지 않음을 안다. 이는 주께서 요한복음 10장 21절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으니, 곧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하심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이것이니,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말 속에서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 머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하는가? 나는 우리가 진리이시며 자신의 몸을 가장 잘 아시는 그분의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 대적들의 판단은 우리를 동요시키지 못할 것이니, 이는 그들이 복음에 어긋나고, 교회 안에서 글을 남긴 거룩한 교부들의 권위에 어긋나며, 경건한 자들의 증언에 어긋나는 인간적 견해들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Apol. VII-VIII §2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이 조항은 필연적인 이유에서 제시되었다. [온 세상 만민 가운데서 함께 모인 보편적(가톨릭) 교회 곧 우주적 교회에 관한 조항은 매우 위로가 되며 지극히 필요하다.] 우리는 교회의 멸망을 위협하는 무수한 위험을 본다. 교회 안에서조차 교회를 압제하는 악인의 무리가 무수하다 [그들은 말씀을 멸시하고 격렬히 미워하며 가장 맹렬하게 핍박하니, 예컨대 투르크인, 무함마드교도, 그 밖의 폭군과 이단자 등이 그러하다. 이런 까닭에 참된 가르침과 교회가 흔히 철저히 억눌려 사라지므로, 마치 교회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며, 교황권 아래서 일어났듯이 교회가 완전히 멸망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잦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도리어 교회가 그럼에도 [세상 끝날까지] 존속하리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또한 악인의 무리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그 교회는] 여전히 존재하며,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약속하신 그 선물들 곧 죄를 용서하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성령을 주시는 일을 베푸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시려고, 신경(信經)의 이 조항이 우리에게 이러한 위로를 제시한다. 그리고 신경은 '보편적(가톨릭) 교회'라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교회를 어떤 민족들의 외형적 통치로 이해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며 [로마 교황이 말하려는 것처럼 교회가 다른 외형적 정체와 같이 이 땅이나 저 땅, 이 왕국이나 저 나라에 매여 있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오히려 온 세상에 흩어진 사람들 [세상 여기저기,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 흩어진 사람들], 곧 복음에 관하여 일치하며 동일한 그리스도와 동일한 성령과 동일한 성례를 지닌 사람들로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니, 그들이 동일한 인간적 전통을 지녔든 서로 다른 전통을 지녔든 마찬가지다. 또한 교령(敎令)에 붙은 주해는 이르기를, 교회는 그 넓은 의미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다 포괄한다 하며, 마찬가지로 악인은 이름으로만 교회 안에 있을 뿐 실상으로는 그렇지 않으나 선한 자는 실상으로도 이름으로도 교회 안에 있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취지의 구절이 교부들에게 많이 있다. 이는 제롬이 이르기를, 그러므로 어떤 오점으로든 더럽혀진 죄인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라 불릴 수 없으며 그리스도께 속하였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였기 때문이다.
Apol. VII-VIII §3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그러므로 비록 위선자들과 악한 자들이 외적 예식[직함과 직분]에 따라 이 참된 교회의 지체라 할지라도, 교회를 정의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이며 이름으로나 실제로나 교회인 것[그리스도의 몸이라 일컬어지며 외적 표징만이 아니라 마음속에 은사 곧 성령과 믿음을 지닌 것]을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러 까닭이 있다. 무엇이 우리를 교회의 지체로, 그것도 살아 있는 지체로 주되게 만드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를 단지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로 이루어진 외적 정체(政體)로만 정의한다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마음의 의이며 성령의 은사임을[그리스도의 나라가 영적이며, 실제로 그러하여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내적으로 다스리시고 마음을 굳세게 하시며 위로하시고 성령과 여러 영적 은사를 베푸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어떤 외적 예배 형식과 예식의 준수일 뿐이라고 여길 것이다. 또한 만일 교회가 외적 정체라면, 율법 아래 있던 백성과 교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율법 아래 있던 백성과 교회를 이렇게 구별한다. 곧 교회는 영적 백성이니, 이는 교회가 이방인과 구별되되 시민적 예식[정체나 시민적 사무]으로가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율법 아래 있던 백성 가운데서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떠나서도 육신적 후손[본래 유대인으로 나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모든 자]이 통치 등 육적인 것들에 관한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 때문에 그들 가운데 악한 자들까지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렸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이 육신적 후손을 어떤 외적 규례와 약속으로 다른 민족들과 구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복음은[교회에서 전파되는 복음은] 단지 영원한 것들의 그림자만이 아니라 영원한 것들 그 자체, 곧 성령과 의를 가져다 주며,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땅에서도 영원한 복, 곧 영원한 위로와 영원한 생명과 성령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에 참여하는 자이며, 마침내 오는 세상에서 온전히 구원받기에 이른다.]
Apol. VII-VIII §4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그러므로 복음에 따른 백성은 오직 이 성령의 약속을 받는 자들뿐이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니, 마귀의 나라와 구별된다. 그러나 악한 자들이 마귀의 권세 아래 있으며 마귀 나라의 지체임은 확실하니, 바울이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마귀가 이제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역사한다고 말할 때 가르치는 바와 같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교회와—곧 율법 아래 있던 백성 가운데 성도들과—외적 교제를 가졌던 바리새인들에게(이는 그들이 직분을 맡고 제사를 드리며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 하셨다(요한복음 8장 44절). 그러므로 참으로 그리스도의 나라인 교회는 본래 성도들의 모임이다. 이는 악한 자들이 마귀에게 다스림을 받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영에게 다스림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Apol. VII-VIII §5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명백한 일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반대자들은 명백한 진리에 맞선다.] 만일 참으로 그리스도의 나라인 교회가 마귀의 나라와 구별된다면, 악한 자들은 마귀의 나라에 속하므로 교회가 아니라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비록 이 생애에서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에 그들이 교회에 섞여 있고 교회 안에서 직분[교사 직과 그 밖의 직분]을 맡고 있을지라도 그러하다. 또한 악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아닌 까닭은 단지 그 계시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 살리시는 그것이 언제나 그 나라이기 때문이니, 그것이 드러나든 십자가에 가려져 있든 그러하며, 마치 이제 영광을 받으신 분이 전에 고난받으셨던 바로 그 그리스도이신 것과 같다. 그리고 이와 명백히 부합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비유들이니, 그분은 마태복음 13장 38절에서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밭은 세상이요 교회가 아니라고 하신다. 이와 같이 요한도[마태복음 3장 12절: 그가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사르리라] 유대인의 온 족속에 관하여 말하며, 참된 교회가 그 백성에게서 분리되기에 이르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반대자들에게 유리하기보다 오히려 그들에게 불리하니, 이는 참되고 영적인 백성이 육신적 백성에게서 분리되어야 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교회의 외적 모습에 관하여 말씀하시니, 마태복음 13장 47절에서 천국은 그물과 같다 하시고, 마찬가지로 열 처녀와 같다 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교회가 수많은 악에 덮여 있음을 가르치시니, 이는 이 걸림돌이 경건한 자들을 넘어지게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요, 또한 우리로 하여금 말씀과 성례가 악한 자들에 의해 시행될 때에도 효력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고 그동안 그분은 이 경건치 않은 자들이 비록 외적 표징의 교제를 가졌더라도 참된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님을 가르치시니, 이는 그들이 마귀 나라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자들이 악하게 비방하듯이, 우리가 플라톤적 국가를 꿈꾸는 것이 결코 아니라, 우리는 이 교회가 실재함을, 곧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참으로 믿고 의로운 사람들이 존재함을 말한다. [우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가상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사는 이 교회가 이 땅 위에 참으로 있으며 머물러 있음을 말하고 또 확실히 안다. 곧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더러는 온 세상 여기저기, 여러 나라와 섬과 땅과 도시에,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 있으니, 이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참으로 알게 된 자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표지를 덧붙이니, 곧 복음의 순수한 교리[복음의 사역]와 성례이다. 그리고 이 교회가 본래 진리의 기둥이다(디모데전서 3장 15절). 이는 교회가 순수한 복음을 보존하며,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말하듯[: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그 터, 곧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과 믿음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들 가운데[참된 터 곧 그리스도와 믿음 위에 세워진 몸 안에] 멸망할 짚을 그 터 위에 세우는 연약한 자들, 곧 어떤 무익한 견해들[어떤 인간적 생각과 의견들]을 세우는 자들이 많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이 그 터를 무너뜨리지는 않으므로 그들에게 용서되기도 하고 또한 교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거룩한 교부들의 글이 증언하기를, 때로는 그들조차 그 터 위에 짚을 세웠으나 이것이 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이 옹호하는 오류들 대부분은 믿음을 무너뜨리니, 이를테면 죄 사함에 관한 조항에 대한 그들의 정죄가 그러하며, 거기서 우리는 죄 사함이 믿음으로 받아진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반대자들이 사람들이 은혜에 앞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죄 사함을 공로로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명백하고 해로운 오류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자리에 자기들의 행위와 수도회와 미사를 세우니, 마치 유대인과 이방인과 터키인들이 자기 행위로 구원받으려 하는 것과 같다.] 이 또한 "그 터" 곧 그리스도를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성례가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선한 마음의 자세 없이도 사효적(事效的, ex opere operato)으로 의롭게 한다면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믿음 없이 말이다. 이제 믿음을 필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를 잃은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성인 숭배를 세우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대신 성인들을 부른다.] 그러나 교회가 항상 성령을 모시리라는 약속을 가진 것처럼, 또한 악한 교사들과 이리들이 있으리라는 경고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에서 교회란 성령을 모신 교회이다. 비록 이리들과 악한 교사들이 교회 안에서 창궐할지라도[날뛰며 해를 끼칠지라도], 그들은 본래 그리스도의 나라가 아니다. 리라(Lyra)도 이렇게 증언한다. 곧 교회는 권세나 교회적 또는 세속적 지위와 관련하여 사람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많은 군주와 대주교와 그보다 낮은 지위의 다른 자들이 믿음에서 배교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믿음과 진리에 대한 참된 지식과 고백이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고백에서 리라가 여기서 말한 것[더 명백히 말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 말로 한 것] 외에 무엇을 더 말하였겠는가?
Apol. VII-VIII §6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그러나 반대자들은 아마도 [새로운 로마식 정의를] 요구하여, 교회가 이렇게 정의되기를 바랄 것이다. 곧 교회란 온 세상의 최고 외적 군주국이며, 그 안에서 로마 교황이 필연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권세를 가지니, 누구도 이를 논박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그가 그 권세를 옳게 사용하든 오용하든 상관없이], 그는 신앙의 조항들을 제정하고, 자기 뜻대로 성경을 폐기하며[모든 신적 율법에 반하여, 자기 자신의 교령에 반하여, 모든 황제의 권리에 반하여, 자기가 원하는 만큼 자주, 자기가 원하는 만큼 광범위하게, 자기가 원할 때마다 성경을 왜곡하고 해석하여, 돈을 받고 면죄부와 면제를 팔며], 예배와 제사의 예식들을 정하고, 마찬가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법을 제정하며, 신적이든 교회법적이든 시민적이든 자기가 원하는 어떤 법으로부터도 면제하고 제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서[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서] 황제와 모든 왕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자기 나라를 보유할 권세와 권리를 받으며,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그분께 복종시키셨으므로 이 권리가 교황에게 이전되었다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은 필연적으로 [땅 위의 신, 최고의 존엄자,] 온 세상과 세상의 모든 나라와 사적이고 공적인 모든 것의 주가 되어야 하며, 세속적이고 영적인 일에서 절대 권세를 가지고 영적 검과 세속적 검 두 자루를 다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교황의 나라에 관한 이 정의는 교회법 학자들뿐 아니라 다니엘 11장 36절 이하도 그 출처로 삼는다. [선지자 다니엘은 적그리스도를 이런 방식으로 묘사한다.]
Apol. VII-VIII §7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이제 만일 우리가 교회를 이런 방식으로[교황의 통치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화려한 위세라고] 정의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더 공정한 재판관들을 얻을 것이다. 이는 로마 교황의 권세에 관하여 지나치고 악하게 쓰인 것들이 많이 남아 있으되, 그 때문에 아무도 고발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만이 비난을 받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택을 선포하기 때문이요[또 사도들의 명백한 말씀과 가르침을 기록하고 전파하기 때문이며],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으며 교황이 고안한 [위선이나 무수한] 예배 예식으로는 얻지 못한다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교황의 나라와는 전혀 다르게 정의한다. 또한 우리는 참된 교회에 속한 것, 곧 그들이 진리의 기둥이라는 것과 그들이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황들에게 옮겨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자가 복음을 돌아보거나 복음을[그 한 작은 페이지, 그 한 글자라도] 읽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겠는가? 많은 자들이[이탈리아와 그 밖의 곳에서] 모든 종교를 공공연히 조롱하기까지 하며, 혹 무엇을 인정한다 해도 오직 인간 이성과 조화되는 것들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꾸며낸 이야기요 시인들의 비극과 같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따라, 본래의 의미에서 교회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참으로 믿고 성령을 모신 성도들의 모임[세상 여기저기에 있는 자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생애에서 많은 위선자들과 악한 자들이 이들과 섞여 외적 표징의 교제를 가지며, 이 외적 표징의 교제에 따라 교회의 지체가 되고, 그에 따라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고 있음[설교하고 성례를 시행하며 그리스도인의 칭호와 이름을 지님]을 고백한다. 또한 성례가 합당치 못한 자들에 의해 시행된다는 사실이 그 효력을 감하지 않으니, 이는 교회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대표하며 자기 자신의 인격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누가복음 10장 16절에서 증언하시는 바와 같다. 곧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라 하셨다. [이와 같이 유다조차 전파하라고 보냄을 받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풀 때, 성례를 베풀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분의 자리에서 그것을 베푸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그 말씀은 우리에게 사역자들의 합당치 못함으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말 것을 가르친다.
Apol. VII-VIII §8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그러나 이 일에 관하여 우리는 신앙고백에서 충분히 명백하게 말하였으니, 곧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합당치 못한 자들에게서 성례를 받을 때 사람들이 죄를 짓는다고 여겼던 도나투스파와 위클리프파를 정죄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제시한 교회에 관한 서술을 변호하기에 당분간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우리는 본래의 의미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 일컬어질 때, 그것이 우리가 서술한 것과 달리 서술되어야 할 까닭을 알지 못한다. 이는 악한 자들이 마귀의 나라와 몸에 속함이 분명하기 때문이니, 마귀는 악한 자들을 충동질하고 사로잡는다. 이러한 것들은 한낮의 빛보다 더 명백하다. 그러나 만일 반대자들이 여전히 이것들을 왜곡하기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더 길게 답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Apol. VII-VIII §9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반대자들은 또한 제7조의 한 부분을 정죄하니, 거기서 우리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는 복음의 교리와 성례의 시행에 관하여 일치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인간이 제정한 인간적 전통이나 예식 또는 의식이 어디서나 동일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보편적 예식과 개별적 예식을 구별하여, 우리 조항이 개별적 예식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면 인정하나, 보편적 예식에 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참으로 정교한 듯하나 어설픈 구별이로다!] 우리는 반대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우리는 참된 일치, 곧 영적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우리는 한 그리스도를 믿고, 한 복음과 한 영과 한 믿음과 동일한 성례를 가진 자들이 하나의 조화로운 교회라고 말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 일치 없이는 마음속의 믿음, 곧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의가 존재할 수 없다. 이를 위해 우리는 보편적이든 개별적이든 인간적 예식의 동일함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니, 이는 믿음의 의가, 율법의 의가 모세의 의식에 매여 있던 것처럼 어떤 전통[인간적 규례의 외적 의식들]에 매인 의가 아니기 때문이며, 이 마음의 의는 마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살리는 일에 인간적 전통은, 그것이 보편적이든 개별적이든,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한다. 또한 그것들은 정절과 인내와 하나님을 경외함과 이웃 사랑과 사랑의 행위들이 그러한 것처럼 성령의 열매도 아니다.
Apol. VII-VIII §10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우리가 이 조항을 제시한 까닭도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전통에 관한 많은 [큰 오류와] 어리석은 견해가 교회 안으로 스며들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떤 자들은 인간적 전통이 칭의를 공로로 얻기 위한 필수적 봉사라고 여겼다[그러한 인간적 규례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함과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으며, 또한 그러한 전통이 한낱 외적 규정에 불과함에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은 어찌하여 하나님이 그토록 다양하게 예배되는가를 두고 논쟁하였으니, 마치 이러한 준수들이 예배 행위이지, 마음의 의나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사정에 따라 어떤 그럴듯한 이유로 때로는 이런 방식으로 때로는 저런 방식으로 달라지는 외적이고 정치적인 규례가 아니라는 듯이 여겼다[마치 세속 정부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와 다른 관습을 가진 것처럼]. 마찬가지로 어떤 교회들은 부활절 준수나 형상(畵像) 등과 같은 그러한 전통 때문에 다른 교회들을 출교하였다. 이로 인해 무지한 자들은 이러한 준수 없이는 믿음, 곧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의가 존재할 수 없다[또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이는 이 일에 관한 결의론자(Summists)들과 그 밖의 자들의 어리석은 글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Apol. VII-VIII §11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그러나 낮과 밤의 길이가 서로 다른 것이 교회의 일치를 해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인간이 제정한 서로 다른 예식이 교회의 참된 일치를 해치지 않는다고 믿는다. 비록 우리는 평온[일치와 좋은 질서]을 위하여 보편적 예식이 준수되는 것을 기쁘게 여기니, 이는 우리 교회들에서도 우리가 미사의 순서와 주일과 그 밖의 더 두드러진 축일들을 기꺼이 준수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는 유익하고 오래된 규례들을 매우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니, 특히 그것들이 백성과 무지한 자들[젊은이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데 유익한 규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평화나 육적 유익을 위하여 그것들을 준수하는 것이 이로운지 아닌지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다루어지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이 논쟁의 쟁점은 인간적 전통의 준수가 하나님 앞에서 의를 위하여 필수적인 예배 행위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논쟁에서 판단되어야 할 요점이며, 이것이 결정되면 그 후에 교회의 참된 일치를 위하여 인간적 전통이 어디서나 동일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이는 만일 인간적 전통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위하여 필수적인 예배 행위가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 받아들여진 전통을 가지지 않은 자들도 의로울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들일 수 있다는 결론이 따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독일식 의복 양식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 곧 하나님 앞에서 의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독일식이 아니라 프랑스식 복장을 쓰더라도 의로울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 있다는 결론이 따른다.
Apol. VII-VIII §12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6~17절에서 이것을 명백히 가르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마찬가지로 20절 이하에서도,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니, 이것은 다 쓰는 대로 부패하리라), 이는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좇는 것이라.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에서 참으로 지혜 있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그 뜻은 이러하다. 곧 마음의 의는 마음을 살리는 영적인 일이며, 인간적 전통은 이웃 사랑과 정절 등이 그러한 것처럼 마음을 살리지 못하고 성령의 열매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성례가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여 믿게 하시는 도구도 아니요, 다만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쓰는 대로 부패하는 일들에 관한 관습일 뿐임이 분명하므로, 우리는 그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위하여 필수적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다만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외적인 육체의 규율일 뿐이다.] 그리고 같은 취지로 그는 로마서 14장 17절에서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러나 많은 증거를 인용할 필요는 없으니, 이는 그것들이 성경 곳곳에서 명백하며 우리도 신앙고백의 뒤편 조항들에서 그 가운데 매우 많은 것을 모아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논쟁에서 결정되어야 할 요점은 얼마 후에 다시 되풀이되어야 하니, 곧 인간적 전통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위하여 필수적인 예배 행위인가 하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이 일을 더 충분히 논할 것이다.
Apol. VII-VIII §13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반대자들은 보편적 전통은 사도들에게서 전해 내려온 것으로 여겨지므로 준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참으로 경건한 자들이로다! 그들은 사도들에게서 유래한 예식은 보존되기를 바라면서도, 사도들의 교리는 보존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이러한 예식에 관하여 사도들 자신이 그들의 글에서 판단하는 그대로 판단해야 한다. 이는 사도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예식을 통하여 우리가 의롭게 된다거나 그러한 예식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위하여 필수적이라고 믿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양심 위에 그러한 짐을 지우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날과 음식 등을 지키는 데에 의와 죄를 두기를 원하지 않았다. 참으로 바울은 그러한 견해들을 귀신의 가르침이라 부른다(디모데전서 4장 1절). 그러므로 사도들의 뜻과 권고는 그들의 글에서 도출되어야 하며, 그들의 본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이 어떤 날들을 지킨 것은 이 준수가 칭의를 위하여 필수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이 어느 때에 모여야 하는지를 알게 하려 함이었다. 그들은 또한 모일 때마다 어떤 다른 예식과 성구 봉독의 순서를 지켰다. 백성은[교회의 초기에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은] 또한, 흔히 그러하듯이, 조상들의 관습[그들의 유대교 절기와 의식들]에서 어떤 것들을 보존하였으니, 사도들은 그것들을 다소 변경하여 복음의 역사에 맞추었다. 유월절과 오순절이 그러한데, 이는 가르침으로뿐 아니라 이러한 본을 통해서도 가장 중요한 일들에 대한 기억을 후세에 전하려 함이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것들이 칭의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으로 전해진 것이라면, 어찌하여 그 후에 주교들이 바로 이 일들에서 많은 것을 변경하였는가? 이는 만일 그것들이 신적 권리에 속한 일이었다면 인간의 권위로 그것들을 변경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는 어떤 자들은 부활절을 어느 한 때에 지키고 다른 자들은 다른 때에 지켰다. 그리고 이 균일하지 못함이 믿음을 해치지 않았다. 그 후에 우리의 유월절[부활절]이 유대교 유월절과 같은 때에 들지 않게 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유대교에서 회심한 형제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도록 교회들에 명하였었다. 그러므로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 어떤 민족들은 유대교의 때에 지키는 관습을 완강히 고수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이 이 결정으로 교회들에 필연성을 지우려 한 것이 아님을 그 결정의 말이 증언한다. 이는 그 결정이, 비록 형제들이 부활절을 지킬 때에 그 때를 바르게 계산하지 못할지라도, 아무도 동요하지 말 것을 명하기 때문이다. 그 결정의 말은 에피파니우스에게 남아 있다. 곧, 계산하지 말고, 너희의 할례받은 형제들이 지킬 때마다 그것을 지키라. 그들과 같은 때에 그것을 지키되, 비록 그들이 잘못하였을지라도 이것을 너희의 근심거리로 삼지 말라. 에피파니우스는 이것이 부활절에 관한 한 결정에 제시된 사도들의 말이라고 기록하는데, 거기서 사려 깊은 독자는, 사도들이 계산에 잘못이 있을지라도 동요하지 말 것을 금할 때, 그들이 백성을 정해진 때에 대한 어리석은 견해로부터 자유롭게 하려 하였음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게다가 동방에서 그 교의의 창시자를 따라 아우디우스파(Audians)라 불린 어떤 자들은 사도들의 이 결정을 근거로 유월절을 유대인과 함께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에피파니우스는 그들을 논박하면서 그 결정을 칭찬하여, 그것이 교회의 믿음이나 규칙에서 벗어나는 바가 전혀 없다고 말하고, 아우디우스파가 그 표현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책망하며, 우리가 해석하는 의미로 그것을 해석한다. 곧 사도들은 유월절을 어느 때에 지켜야 하는지를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다만 자기들의 관습을 지키던 유대인 출신의 저명한 형제들이 회심하였으므로, 화합을 위하여 나머지 사람들도 그들의 본을 따르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은 지혜롭게도 독자에게 복음의 자유를 제거하지도 말고 양심에 필연성을 지우지도 말 것을 권고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계산에 잘못이 있을지라도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이기 때문이다.
Apol. VII-VIII §14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이런 종류의 많은 사례를 역사에서 모을 수 있으니, 거기서 인간적 준수의 균일하지 못함이 믿음의 일치를 해치지 않음[그 누구도 보편적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떼어 놓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논의할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반대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지 않은 음식과 날과 의복 등에서 준수의 균일함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할 때, 믿음의 의가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 그 경건한 자들을 보라. 그들은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균일한 인간적 준수를 요구하면서도, 정작 자기들은 성찬의 사용에서 그리스도의 규례를 변경하였으니, 그것은 분명히 전에 보편적 규례였다. 그러나 만일 보편적 규례가 그토록 필수적이라면, 어찌하여 그들 자신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인 그리스도의 성찬의 규례를 변경하는가? 그러나 이 논쟁 전체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여러 번에 걸쳐 말하여야 할 것이다.
Apol. VII-VIII §15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제8조 전체가 승인되었으니, 거기서 우리는 위선자들과 악한 자들이 교회에 섞여 있음을, 또 성례가 악한 사역자들에 의해 베풀어질지라도 효력이 있음을 고백한다. 이는 사역자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하며 자기 자신의 인격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니, 누가복음 10장 16절에 따른 것이다. 곧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라 하셨다. 경건치 않은 교사들은 버려야 하니[받아들이거나 들어서는 안 되니], 이는 이들이 더 이상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하지 않고 도리어 적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 말씀하신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또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9절에서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Apol. VII-VIII §16 Article VII-VIII: Of the Church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관한 비유들에서 우리에게 경고하시기를, 제사장이든 백성이든 그 사사로운 악덕으로 인해 걸려 넘어질 때에도, 도나투스파가 악하게 행한 것처럼 분열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제사장이 소유와 재산을 보유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부인하여 분열을 일으킨 자들에 관하여는, 우리는 그들이 전적으로 선동적이라고 본다. 이는 재산을 보유하는 것이 시민적 규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시민적 규례를 사용하는 것은 합당하니, 마치 그들이 공기와 빛과 음식과 음료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는 이 세상의 질서와 천체의 정해진 운행이 참으로 하나님의 규례이며 이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는 것처럼, 합법적 정부도 참으로 하나님의 규례이며 하나님에 의해 마귀에 맞서 보존되고 보호받기 때문이다.
Apology IX Article IX: Of Baptism
제9조는 승인되었으며, 거기서 우리는 세례(Baptism)가 구원에 필요하고, 어린아이들도 세례를 받아야 하며, 어린아이의 세례가 헛되지 않고 도리어 구원에 필요하며 효력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복음이 순전하고 부지런하게 가르쳐지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또한 복음에서 이 열매를 받는바, 곧 우리 교회들에서는 재세례파(Anabaptists)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우리 교회들에서 세력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백성이 이 강도들의 사악하고 선동적인 도당에 맞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무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재세례파의 적지 않은 다른 오류들을 정죄하듯이, 우리는 이것도 정죄하니, 곧 그들이 어린아이의 세례가 무익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구원의 약속이 어린아이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이 매우 확실하기 때문이다[은혜와 성령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어른들에게만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도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그리스도(Christ)의 교회 밖에 있는 자들, 곧 말씀(Word)도 성례(Sacraments)도 없는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오직 말씀과 성례와 함께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Apology IX Article IX: Of Baptism (continued)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필요하니, 이는 그리스도의 명령, 곧 마태복음 28장 19절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베풀라"에 따라 구원의 약속이 그들에게 적용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구원이 모든 이에게 제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례도 모든 이에게, 곧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와 갓난아이에게 제공된다. 그러므로 갓난아이들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분명히 따라 나오니, 이는 세례와 함께 구원[복음(Gospel)의 보편적 은혜와 보화]이 제공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어린아이의 세례를 인정하신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세례를 정죄하는 재세례파는 사악하게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린아이의 세례를 인정하신다는 것은 다음 사실로 드러나니, 곧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례받은 자들에게 성령(Holy Ghost)을 주신다는 것이다[어린 시절에 세례받은 많은 이들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만일 이 세례가 헛된 것이라면, 성령은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며, 마침내 교회(Church)도 없을 것이다.[이는 교회 안에 달리 세례받지 아니한 거룩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선하고 경건한 마음들을 재세례파의 불경하고 광신적인 견해들에 맞서 충분히 굳게 세울 수 있다.
Article X (Of the Holy Supper) Article X: Of the Holy Supper.
제10조는 승인되었으니, 거기서 우리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참으로 또한 실체적으로 임재하며, 보이는 것들 곧 떡과 포도주와 함께 성례를 받는 자들에게 참으로 베풀어진다고 믿음을 고백한다. 이 신앙을 우리는, 이 주제가 신중히 검토되고 숙고되었으므로, 한결같이 변호한다. 바울이 고전 10:16에서 그 떡은 주의 몸에 참예함이라고 말하므로, 만일 주의 몸이 참으로 임재하지 않는다면 그 떡은 몸에 참예함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영에 참예함일 뿐이라는 결론이 따라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로마 교회만이 아니라 헬라 교회도 지금 믿으며 또 예전부터 그리스도의 몸의 임재를 믿어 왔음을 확인하였다. 그들 가운데서 행해지는 미사 정문(正文, canon)이 이를 증언하니, 거기서 사제는 그 떡이 변하여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를 분명히 기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보기에 어리석은 저술가가 아닌 불가리우스(Vulgarius)는 떡이 한낱 표상이 아니라 참으로 살로 변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키릴루스가 요한복음 15장을 강해한 긴 글이 있으니,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에서 우리에게 육체적으로(corporeally)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참된 믿음과 진실한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을 따라서는 그분과 아무런 연합의 방식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 이것을 우리는 참으로 전적으로 부인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말하건대, 신적 성경에 전적으로 낯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방식으로 포도나무시며 우리는 가지로서 거기서 우리를 위한 생명을 길어 내는 것임을 누가 의심하였는가? 바울이 고전 10:17, 롬 12:5, 갈 3:28에서 말하는 것을 들으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한 몸이니, 우리가 비록 많으나 그분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가 다 그 한 떡에 참예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혹 신비적 축복의 능력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우리 안에 있으므로, 그것이 또한 그리스도의 살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육체적으로 거하시게 하지 않는가?" 그리고 조금 뒤에.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습성을 따라서만이 아니라 또한 본성적 참여(natural participation)에 의해서도 계심을 헤아려야 한다" 등이다. 우리가 이 증언들을 인용한 것은 여기서 이 주제에 관한 논의를 하려 함이 아니니, 황제 폐하께서 이 조항을 못마땅히 여기시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읽을 모든 이가, 우리가 온 교회가 받아 온 교리 곧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참으로 또한 실체적으로 임재하며 보이는 것들 곧 떡과 포도주와 함께 참으로 베풀어진다는 교리를 변호함을 더 분명히 알게 하려 함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살아 있는 몸]의 임재를 말한다. 우리는 사망이 다시는 그분을 주관하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롬 6:9).
Article XI (Of Confession) §1 Article XI: Of Confession.
제11조 곧 "교회에서 사죄(赦罪, absolution)를 보존함에 관하여"는 승인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백(confession)에 관하여 하나의 정정을 덧붙이니, 곧 「옴니스 우트리우스케(Omnis Utriusque)」라는 표제의 규정을 준수하여, 해마다 고백을 행할 것이며, 비록 모든 죄를 다 열거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 죄들을 기억해 내려고 부지런히 힘쓸 것이요 기억해 낼 수 있는 것들은 빠짐없이 진술하라는 것이다. 이 조항 전체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우리가 회개에 관한 우리의 견해 전체를 설명할 때 더 길게 말하겠다. 우리가 사죄의 유익과 열쇠의 권능을 매우 분명히 밝히고 높이 기려[곧 그리스도인다우며 올바르고 순전한 방식으로 설교하고 기록하고 가르쳐] 많은 괴로워하는 양심들이 우리의 교리에서 위로를 얻었음은 잘 알려진 바이다. 그들은 우리가 사죄를 믿어야 하며 죄 사함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진다고 확실히 여겨야 하고, 또 이 믿음으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은 것처럼]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도리어 복음 자체의 바로 그 음성임을 들은 후에 그러하였다. 이 신앙은 많은 경건한 마음을 격려하였고, 처음에 루터에게 모든 선한 사람들로부터 지극한 칭송을 가져다주었으니, 이는 그것이 양심에 확실하고 굳건한 위로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사죄의 권능 전체[회개에 관하여 필요한 교리 전체]가 행위에 관한 교리들에 의해 억눌려 있었으니, 궤변가들과 수도사들이 믿음과 거저 주시는 죄 사함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도리어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행위로 향하게 하였으며, 거기서는 놀란 양심에 절망 외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Article XI (Of Confession) §2 Article XI: Of Confession.
그러나 시기(時期)에 관해 말하자면, 확실히 우리 교회들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성례 곧 사죄와 성찬을 일 년에 여러 번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성례의 가치와 열매에 관해 가르치는 자들은 백성으로 하여금 성례를 자주 사용하도록 권하는 방식으로 말한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우리 신학자들이 기록한 많은 글이 있으니, 대적자들이 만일 선한 사람들이라면 의심 없이 그것들을 시인하고 칭찬할 것이다. 또한 드러내 놓고 악한 자들[음행, 간음 등 명백한 악덕 가운데 사는 자들]과 성례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출교(出敎, excommunication)가 선언된다. 이런 일들은 복음을 따라서도, 또 옛 정경(正經, canons)을 따라서도 그렇게 행해진다. 그러나 정해진 시기가 규정되지는 않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때에 똑같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만일 모든 사람이 같은 때에 와야 한다면 그들은 차례대로 [그토록 부지런히] 들음과 가르침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옛 정경과 교부들도 정해진 시기를 정하지 않는다. 그 정경은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누구든지 교회에 들어와서 한 번도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드러나거든, 그들에게 권면하여, 만일 성찬에 참여하지 않거든 회개에 이르도록 하라. 만일 그들이 성찬에 참여하거든[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기를 원하거든] 내쫓지 말고, 만일 그리하지 않거든 출교하라." 그리스도[바울]께서는 고전 11:29에서 합당치 않게 먹는 자들은 자기에게 임할 심판을 먹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합당하지 않은 자들에게 성례 사용을 강요하지 않는다.
Article XI (Of Confession) §3 Article XI: Of Confession.
고백에서의 죄의 열거에 관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을 옭아매지 않는 방식으로 가르침을 받는다. 비록 경험 없는 사람들이 [그들을 괴롭히는] 어떤 것들을 열거하는 데 익숙해지게 하는 것이 그들이 더 쉽게 가르침을 받게 하는 데 유익할지라도, 우리는 지금 신적 율법(divine Law)을 따라 무엇이 필요한지를 논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적자들은 우리에게 「옴니스 우트리우스케」라는 규정을 들이댈 것이 아니라 —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바가 아니다 — 죄의 열거가 죄 사함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신적 율법으로부터 보여 주어야 한다. 온 유럽에 걸친 전체 교회는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명하는 이 규정 조항이 양심들 위에 어떤 올무를 던져 놓았는지 안다. 그 본문 자체가 가진 해악도, 뒤에 죄의 정황(情況)들을 모아 놓은 결의론자들(Summists)이 덧붙인 것만큼 크지는 않다. 거기에 얼마나 미궁(迷宮)들이 있었던가! 가장 선한 마음들에게 얼마나 큰 고문이었던가! 방종하고 속된 자들은 이런 공포의 도구들에 결코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에 자기 고유의 사제(司祭)에 관한 물음들이 목사들과 형제들[여러 수도회의 수도사들] 사이에 어떤 비극[어떤 시기와 미움]을 일으켰던가. 그들은 고백의 관할권을 두고 다툴 때에는 결코 형제가 아니었으니[권위와 고해 사례비를 두고 다투게 되었을 때 모든 형제애와 우정이 그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적 율법을 따라서는 죄의 열거가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이는 또한 파노르미타누스와 매우 많은 다른 학식 있는 법학자들에게도 흡족한 바이다. 또한 우리는 「옴니스 우트리우스케」라는 규정으로 우리 백성의 양심에 필연성을 지우기를 원하지 않으니, 우리는 그것을, 다른 인간적 전통들과 마찬가지로, 칭의를 위해 필요한 예배 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규정은 불가능한 일 곧 우리가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대부분의 죄를 기억하지도 깨닫지도 못함[참으로 가장 큰 죄들조차 보지 못함]은 시 19:13을 따라 분명하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Article XI (Of Confession) §4 Article XI: Of Confession.
목사들이 선한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젊은이들과 그 밖에] 경험 없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이 어디까지 유익한지를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의론자들의 고문[양심에 대한 폭정]을 인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일 그들이 양심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믿음에 관해 한마디라도 덧붙였더라면 그것은 덜 견딜 만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이 믿음에 관해서는, 그 방대한 규정과 주석과 요약과 고백 지침서의 더미 속에 한 음절도 없다. 거기서는 그리스도를 어디서도 읽을 수 없다.[아무도 거기서 자기가 그리스도를, 또는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는 한마디 말도 읽지 못할 것이다.] 다만 죄의 목록들만 읽을 뿐이다[죄를 모으고 쌓아 올리려는 목적으로 그러하니,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죄들을 깨달았더라면 이것도 어느 정도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인간적 전통을 거스르는 죄들에 할애되어 있으니, 이것은 지극히 헛되다. 이 교리는 많은 경건한 마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으니, 그들은 신적 율법을 따라 열거가 필요하다고 믿었으나 그것이 불가능함을 경험하였으므로 안식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개에 관한 대적자들의 교리에는 이에 못지않게 중대한 다른 결함들이 들어 있으니, 우리는 이제 그것들을 열거하겠다.
Article XII (Of Repentance) §1 Article XII (V): Of Repentance.
제12조에서 그들은 첫째 부분을 승인하니, 거기서 우리는 세례 후에 타락한 자들이 어느 때든, 또 회심할 때마다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진술한다. 그들은 둘째 부분을 정죄하니, 거기서 우리는 회개의 부분들이 통회(痛悔, contrition)와 믿음[참회하며 통회하는 마음과, 곧 내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는다는 믿음]이라고 말한다.[이제 대적자들이 무엇을 부인하는지 들으라.] 그들은[부끄러움 없이] 믿음이 회개의 둘째 부분이라는 것을 부인한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오 카를이여, 가장 무적(無敵)이신 황제여? 복음의 바로 그 음성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이다.[이 말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요 말씀이다.] 「반박서(Confutation)」의 이 저자들은 복음의 이 음성을 정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반박서」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그토록 구원에 이르게 하며 위로가 넘치는 복음의 음성을 정죄할 수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와 죽음을 멸시로 다루는 것 외에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대에게 간구하노니, 오 가장 무적이신 황제 카를이여, 복음의 으뜸 주제와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과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를 담고 있는 이 지극히 중대한 주제를 인내하며 부지런히 들으시고 살피시기를 [곧 우리 자신의 영혼과 양심에, 참으로 또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전체와 복음 전체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이 썩어질 생에서만 아니라 다가올 생에서도 가장 높고 가장 큰 것 곧 우리 모두의 하나님 앞에서의 영원한 복락 혹은 멸망에 관계되는, 이 크고 가장 높고 중대한 일들을 들으시기를] 간구한다. 모든 선한 사람들은 특별히 이 주제에 관해 우리가 참되고 경건하며 구원에 이르게 하며 온 그리스도의 교회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쳤음을[온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경건한 마음에 지극히 중대한 것들, 곧 그들의 구원과 복락 전체가 거기에 달려 있으며, 그에 관한 가르침이 없이는 어떤 직분도 어떤 그리스도의 교회도 있거나 존속할 수 없는 것들임을] 확인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 신학자들의 글에서, 복음에 매우 많은 빛이 더해졌으며, 스콜라 신학자들과 교회법학자들의 견해를 통하여 이전에 회개의 교리를 덮고 있던 많은 해로운 오류들이 바로잡혔음을 확인할 것이다.
Article XII (Of Repentance) §2 Article XII (V): Of Repentance.
우리의 입장을 변호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이것을 말해야 한다. 모든 계층의, 또한 신학자 계층의 모든 선한 사람들은, 루터의 글이 나타나기 전에는 회개의 교리가 매우 혼란스러웠음을 의심 없이 시인한다. 「명제집(Sententiae)」 저자들의 책들이 남아 있으니, 거기에는 어떤 신학자도 결코 만족스럽게 풀어내지 못한 무수한 물음들이 있다. 백성은 그 문제의 요지를 파악하지도, 회개에서 무엇이 특별히 요구되는지, 양심의 평안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를 보지도 못하였다. 대적자들 가운데 누구든 와서 우리에게 죄 사함이 언제 일어나는지 말해 보라. 오 선하신 하나님, 거기에 얼마나 큰 어둠이 있는가! 그들은 죄 사함이 반회(半悔, attrition)에서 일어나는지 통회(contrition)에서 일어나는지 의심한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통회 때문에 일어난다면, 사죄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만일 죄가 이미 사하여졌다면 열쇠의 권능이 무엇을 이루는가? 여기서 참으로 그들은 더욱 많이 애쓰며, 열쇠의 권능을 사악하게 깎아내린다. 어떤 자들은 열쇠의 권능으로 죄책이 사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이 잠정적 형벌로 바뀐다고 망상한다. 그리하면 가장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 권능은 생명과 성령의 직분이 아니라 다만 진노와 형벌의 직분이 되고 말 것이다. 다른 이들 곧 더 조심스러운 자들은 열쇠의 권능으로 죄가 교회 앞에서 사하여지고 하나님 앞에서는 사하여지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이것도 해로운 오류이다. 만일 열쇠의 권능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로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양심을 평안케 하겠는가? 뒤따르는 것은 더욱 뒤얽혀 있다. 그들은 우리가 통회로 은혜를 공로로 얻는다(merit grace)고 가르친다. 이에 관해 만일 누가, 어찌하여 사울과 유다와 끔찍하게 통회한 비슷한 자들이 은혜를 얻지 못하였는지 묻는다면, 그 답은 믿음으로부터, 또 복음을 따라 취해져야 마땅하였으니, 곧 유다가 믿지 않았으며 복음과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자신을 떠받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믿음이 유다의 통회와 베드로의 통회의 구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적자들은 그 답을 율법에서 취하여, 유다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형벌을 두려워하였다고 한다.[이것이 회개에 관해 불확실하고 합당치 않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힌 양심이, 특히 시편과 선지자들에 묘사되어 있고 참으로 회심한 자들이 확실히 맛보는 저 진지하고 참되고 큰 공포 가운데서, 자기가 하나님을 그분 자신을 위하여[사랑으로 자기 하나님이신 그분을] 두려워하는지, 아니면 영원한 형벌에서 도망하고 있는지를 언제 능히 판단할 수 있겠는가? [이 사람들은 이런 번민을 별로 겪어 보지 못하였을 것이니, 그들은 말장난을 하며 자기들의 꿈을 따라 구별을 짓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에 시험이 닥칠 때 그 일은 사뭇 다르게 드러나며, 양심은 보잘것없는 음절과 말로는 안식을 얻지 못한다.] 이 큰 정서들은 글자와 용어로는 구별될 수 있으나, 이 달콤한 궤변가들이 망상하는 것처럼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분리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선하고 지혜로운 사람들[또한 진리를 알기 원하는 자들]의 판단에 호소한다. 그들은 의심 없이, 대적자들의 글에 있는 이 논의들이 매우 혼란스럽고 뒤얽혀 있음을 시인할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중대한 주제 곧 복음의 으뜸 주제인 죄 사함이 걸려 있다. 우리가 살펴본 이 물음들에 관한 이 교리 전체는, 대적자들의 글에서 오류와 위선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리스도의 은택과 열쇠의 권능과 믿음의 의를 [말할 수 없이 양심을 해치며] 흐리게 한다.
Article XII (Of Repentance) §3 Article XII (V): Of Repentance.
이런 일들은 첫째 막(幕)에서 일어난다. 그들이 고백에 이를 때에는 어떠한가? 죄의 끝없는 열거 속에 얼마나 큰 수고가 있는가. 그 열거는 그럼에도 대부분 인간적 전통을 거스르는 죄들에 바쳐져 있다! 그리고 선한 마음들이 이로써 더욱 고통받게 하려고, 그들은 이 열거가 신적 권리(divine right)에 속한다고 거짓되이 주장한다. 그리고 신적 권리라는 구실 아래 이 열거를 요구하면서, 그 사이에 그들은 참으로 신적 권리에 속하는 사죄에 관해서는 냉랭하게 말한다. 그들은 성례 자체가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선한 마음 자세 없이도 행위 자체로(ex opere operato) 은혜를 베푼다고 거짓되이 주장한다. 사죄를 붙드는 믿음, 양심을 위로하는 믿음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다. 이것이 참으로 일반적으로 일컫는 바 "신비 앞에서 떠남(apienai pro tohn mustehriohn)" 곧 신비 의식 전에 물러감이다.[이런 사람들은 진짜 유대인이라 불린다.]
Article XII (Of Repentance) §4 (False Dogmas I–XI) Article XII (V): Of Repentance.
[이 연극의] 셋째 막이 남아 있으니, 곧 보속(補贖, satisfactions)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혼란스러운 논의들을 담고 있다. 그들은 영원한 형벌이 연옥의 형벌로 바뀐다고 상상하며, 그 일부는 열쇠의 권능으로 사하여지고 일부는 보속의 수단으로 갚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더 나아가 보속이 잉여 공로의 행위(works of supererogation)이어야 한다고 덧붙이며, 이 보속을 순례나 묵주 기도나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지 않은 그와 비슷한 가장 어리석은 준수들로 채운다. 그런 다음, 그들이 보속의 수단으로 연옥을 갚아 내는 것처럼, 보속을 사고파는 지극히 수익이 많은[매우 짭짤하고 돈벌이가 되는 사업이요 큰 장(場)이 된] 제도가 고안되었다. 그들은 [부끄러움 없이] 면벌부(免罰符, indulgences)를 파는데, 이것을 보속의 면제라고 풀이한다. 그리고 이 수익[이토록 파렴치하게 행해지는 이 장사, 이 장]은 산 자들에게서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서 훨씬 더 푸짐하게 나온다. 또한 그들은 죽은 자들의 보속을 면벌부로만이 아니라 미사의 제사(sacrifice of the Mass)로도 갚아 낸다. 한마디로 보속이라는 주제는 끝이 없다. 이 추문들(우리는 모든 것을 다 열거할 수 없으므로) 곧 귀신의 교리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은택이 묻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선한 사람들은 회개에 관한 궤변가들과 교회법학자들의 교리가 유익하고 경건한 목적을 위해 비판받았음을 이해한다. 다음의 교의들은 명백히 거짓이며, 거룩한 성경에만이 아니라 교부들에게도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 1. 우리가 신적 언약으로부터, 은혜 없이 행한 선행으로 은혜를 공로로 얻는다는 것.
2. 우리가 반회(attrition)로 은혜를 공로로 얻는다는 것.
3. 죄를 지우는 데에는 그 범행을 미워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4. 통회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가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
5. 열쇠의 권능이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교회 앞에서 죄 사함에 유효하다는 것.
6. 열쇠의 권능으로 죄가 하나님 앞에서 사하여지지 않으며, 도리어 열쇠의 권능은 영원한 형벌을 잠정적 형벌로 바꾸고 양심에 일정한 보속들을 부과하며 새로운 예배 행위들을 제정하고 양심을 그러한 보속들과 예배 행위들에 매이게 하기 위해 제정되었다는 것.
7. 신적 권리를 따라, 대적자들이 가르치는 바 고백에서의 범죄 열거가 필요하다는 것.
8. 정경에 따른 보속들이 연옥의 형벌을 갚는 데 필요하다는 것, 혹은 그것들이 죄책을 지우는 데 대한 보상으로 유익하다는 것. 무지한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하기 때문이다.[비록 학교에서는 보속이 형벌에만 적용된다고 하나, 모두가 그로써 죄책의 사함이 공로로 얻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9. 회개의 성례를,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선한 마음 자세 없이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없이, 행위 자체로(ex opere operato) 받는 것이 은혜를 얻게 한다는 것.
10. 열쇠의 권능으로 우리의 영혼이 면벌부를 통하여 연옥에서 풀려난다는 것.
11. 사례(事例) 유보(reservation of cases)에 있어서, 정경에 따른 형벌만이 아니라 죄책까지도, 참으로 회심한 자에 관하여 유보되어야 한다는 것.
Article XII (Of Repentance) §5 (Contrition) Article XII (V): Of Repentance.
그러므로 경건한 양심들을 궤변가들의 이 미궁들에서 건져 내려고, 우리는 회개[혹은 회심]에 이 두 부분 곧 통회와 믿음을 돌렸다. 만일 누가 셋째 부분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 곧 온 삶과 성품을 더 나은 것으로 바꾸는 것[회심에 뒤따라야 하고 또 반드시 뒤따르는 선행]을 덧붙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무 반대도 하지 않겠다. 통회로부터 우리는 저 부질없고 끝없는 논의들 곧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슬퍼하고 언제 형벌을 두려워함에서 슬퍼하는가 하는 논의들을 떼어 낸다.[이것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양심의 상태를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자들의 한낱 말장난이요 쓸데없는 수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통회란 양심의 참된 공포 곧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진노하심을 느끼고 자기가 죄지은 것을 슬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통회는, 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받을 때에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복음 선포의 요지는 이것 곧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 사함과 의와 성령과 영원한 생명을 베풀며, 또 우리가 거듭난 사람으로서 선행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누가복음 마지막 장 24:47에서 복음의 요지를 한데 모아 말씀하시니, 곧 회개와 죄 사함을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공포들에 관해 성경이 말씀하니, 시 38:4, 8과 같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또 시 6:2, 3.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또 사 38:10, 13. "내가 말하기를 내 중년에 스올의 문에 들어가고 내 여생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내가 아침까지 평온하기를 바랐더니 주께서 사자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는도다."[다시 14절.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이런 공포들 가운데서 양심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니, 이는 [궤변가들과 그 같은 자들처럼] 육신을 따라 걸으며 안일한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양심은 죄의 추함을 보며, 자기가 죄지은 것을 진지하게 슬퍼하며, 그 사이에 또한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에서 도망하니, 이는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떠받쳐지지 않으면 그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 2:19에서 말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율법은 다만 양심을 정죄하고 두렵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포들 가운데서 우리 대적자들은 믿음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죄를 깨닫게 하는 말씀만을 내놓는다. 이것만이 가르쳐질 때 그것은 복음의 교리가 아니라 율법의 교리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슬픔과 공포로써,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한다면, 은혜를 공로로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참된 공포 가운데서 하나님의 두렵고 형언할 수 없는 진노를 느낄 때에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겠는가? 이런 공포들 가운데서 다만 율법만을 내보이는 자들이 절망 외에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Article XII (Of Repentance) §6 (Of Faith in Christ) Article XII (V): Of Repentance.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의 둘째 부분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하여"를 덧붙이니, 곧 이런 공포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 양심들에 제시되어야 하며, 그 복음에서 죄 사함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거저 약속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가 자기들에게 거저 사하여진다고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은 통회하는 자를 기쁘게 하고 떠받치며 살리니, 롬 5:1과 같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 믿음이 죄 사함을 얻는다. 이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니, 바로 그 구절이 증언하는 바와 같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이 믿음이 유다와 베드로의 통회, 사울과 다윗의 통회의 구별을 보여 준다. 유다나 사울의 통회는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이는 그것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물로 베풀어진 죄 사함을 붙드는 이 믿음이 더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이나 베드로의 통회는 유효하니, 이는 그것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베풀어진 죄 사함을 붙드는 믿음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으로 화목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사랑이 있지 않다. 그리스도 없이는 율법[하나님의 율법 혹은 첫째 계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엡 2:18; 3:12] 롬 5:2를 따라 그러하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었느니라." 그리고 이 믿음은 점차로, 또 온 생애에 걸쳐 자라나며,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려고 죄와 더불어 싸운다[여러 시험으로 단련된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위에서 말한 대로 믿음을 뒤따른다. 그리하여 자녀로서의 두려움(filial fear)은, 믿음과 결합된 그런 번민 곧 믿음이 번민하는 마음을 위로하고 떠받치는 그런 번민으로 분명히 정의될 수 있다. 그것이 종으로서의 두려움(servile fear)이 되는 것은 믿음이 번민하는 마음을 떠받치지 않을 때이다[믿음 없는 두려움, 곧 진노와 의심밖에 없는 곳에서이다].
Article XII (Of Repentance) §7 (Power of the Keys) Article XII (V): Of Repentance.
또한 열쇠의 권능은 사죄를 통하여 복음을 베풀고 내놓으니, 그 사죄는[내게 평안을 선포하며] 복음의 참된 음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말할 때에 또한 사죄를 포함시키니, 이는 믿음이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바울이 롬 10:17에서 말하는 대로이다. 복음이 들려지고 사죄[곧 신적 은혜의 약속]가 들려질 때, 양심은 격려를 받고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말씀을 통하여 살리시므로, 열쇠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죄를 사하니[여기 땅에서 죄가 참으로 취소되되, 또한 하늘에서 하나님 앞에서도 취소되는 그런 방식으로 취소되니], 눅 10:16을 따라 그러하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라." 그러므로 사죄하는 자의 음성은 우리가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믿는 것과 다름없이 믿어야 한다. 그리고 사죄[저 복된 위로의 말]는 본래적으로 회개의 성례라 일컬을 수 있으니, 또한 더 학식 있는 스콜라 신학자들도 그렇게 말한다. 그 사이에 이 믿음은 시험 가운데서, 복음의 선포[설교를 들음, 읽음]와 성례의 사용을 통하여 여러 모양으로 양육된다. 이것들은 신약(新約)의 [인(印)과] 표(signs)이니, 곧 [언약과 은혜의] 표요, [화목과] 죄 사함의 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죄 사함을 베푸니, 성찬의 말씀이 분명히 증언하는 바와 같다(마 26:26, 28).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 이것은 신약의 잔이니라" 등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사죄를 통하여, 복음을 들음을 통하여, 성례의 사용을 통하여 잉태되고 강건하게 되니, 이는 그것이 죄와 죽음의 공포들과 더불어 싸우는 동안 굴복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이 회개의 방식은 평이하고 명료하며, 열쇠의 권능과 성례의 가치를 높이고, 그리스도의 은택을 밝히 비추며,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중보자와 화목자로 의지하도록 가르친다.
Article XII (Of Repentance) §8 (Matt. 11; Mark 1) Article XII (V): Of Repentance.
그러나 「반박서」가 우리가 회개에 이 두 부분을 돌렸다고 우리를 정죄하므로, 우리는 [우리가 아니라] 성경이 이것들을 회개 혹은 회심의 으뜸 부분으로 표현함을 보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마 11:28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에 두 항목이 있다. 수고와 짐은 죄와 죽음의 통회와 번민과 공포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로 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가 사하여진다고 믿는 것이니,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 마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으로 살아난다. 그러므로 여기에 이 두 으뜸 부분 곧 통회와 믿음이 있다. 또 막 1:15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여기서 첫째 항목에서 그분은 죄를 깨닫게 하시고, 둘째 항목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며 죄 사함을 보이신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귀신들도 가진 저 일반적 믿음[복음의 역사(歷史)를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 사함이 베풀어졌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는 여기서 두 부분이 결합되어 있음을 보니, 곧 죄가 책망받을 때의 통회와,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될 때의 믿음이다. 만일 누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또한 회개의 열매들 혹은 새 삶 전체를 포함시키신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의를 달지 않겠다. 통회와 믿음이 으뜸 부분으로 일컬어진다는 것, 이것으로 우리에게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Article XII (Of Repentance) §9 (Mortification and Quickening) Article XII (V): Of Repentance.
바울은 거의 어디서나 회심 혹은 새로워짐을 묘사할 때 이 두 부분 곧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quickening)을 가리키니, 골 2:11과 같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고 그 뒤 12절. "너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이 두 부분에 관해 그는 롬 6:2, 4, 11에서 분명히 말하니, 곧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통회와 그 공포들로 일어나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우리가 다시 위로와 생명을 얻을 때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롬 5:1을 따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화평을 누리자"는 대로 양심에 위로와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양심에 먼저 공포와 번민이 있음이 따라 나온다. 이와 같이 통회와 믿음은 나란히 간다.] 하나는 죄의 몸을 벗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또한 이 말들 곧 죽임, 살림, 죄의 몸을 벗음, 다시 살아남은, 어떤 꾸며 낸 변화에 관한 플라톤적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죽임은 죽어 가는 자의 공포 같은 참된 공포들을 나타내니, 이는 본성이 믿음으로 떠받쳐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보통 통회라 부르는 것을 죄의 몸을 벗음이라 일컫는데, 이는 이 슬픔들 가운데서 본성적 정욕이 정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림은 플라톤적 공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통회 가운데서 꺼져 가는 생명을 참으로 떠받치는 위로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두 부분 곧 통회와 믿음이 있다. 양심은 믿음으로만 평안케 될 수 있으므로 믿음만이 살리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선언(합 2:4; 롬 1:17)을 따라 그러하다.
Article XII (Of Repentance) §10 (Col. 2:14) Article XII (V): Of Repentance.
그리고 골 2:14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스르는 증서(handwriting)를 지우신다고 말씀한다. 여기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곧 그 증서와, 그 증서를 지움이다. 그러나 그 증서는 우리를 깨닫게 하고 정죄하는 양심이다. 또한 율법은 죄를 책망하고 정죄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삼하 12:13에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말하는 이 음성이 곧 그 증서이다. 그리고 악하고 안일한 사람들은 이 음성을 진지하게 발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에 기록된 율법의 선고를 보지도 읽지도 않기 때문이다. 참된 슬픔과 공포 가운데서 이 선고가 지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를 정죄하는 그 증서는 통회 그 자체이다. 그 증서를 지운다는 것은, 우리가 정죄받으리라고 선언하는 이 선고를 지워 없애고, 우리가 이 정죄에서 풀려났음을 우리가 아는 그 선고를 새겨 넣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이전의 선고를 뒤집고 마음에 평안과 생명을 주는 새 선고이다.
Article XII (Of Repentance) §11 (Testimonies) Article XII (V): Of Repentance.
그러나 그 증언들이 성경 도처에 분명히 있는데, 많은 증거를 인용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시 118:18.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도다." 시 119:28.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여기서 첫째 항목에는 통회가 담겨 있고, 둘째 항목에는 우리가 통회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나는지 곧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나는 그 방식이 분명히 묘사되어 있다. 이것이 마음을 떠받치고 살린다. 또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이 중 하나로는 통회가 표시되고, 다른 하나로는 믿음이 표시된다. 또 사 28:21. "여호와께서 자기의 일을 행하시려고 일어나시리니 그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의 사역을 이루시려 하시니 그 사역이 기이할 것임이라." 그분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그것을 여호와의 기이한 일이라 일컫는 것은, 살리고 위로하는 것이 하나님의 고유한 일이기 때문이다.[두렵게 하고 죽이는 것 같은 다른 일들은 하나님의 고유한 일이 아니니, 하나님께서는 다만 살리실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를, 그분께서 두렵게 하시는 것은 이 까닭 곧 위로와 살림을 위한 자리가 있게 하시려는 까닭이라 하니, 이는 안일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지 못하는 마음들은 위로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은 이 두 가지 곧 공포와 위로를 결합하기를 즐겨 하니, 이는 회개에 이 으뜸 항목들 곧 통회와, 위로하며 의롭다 하는 믿음이 있음을 가르치려 함이다. 또한 우리는 회개의 본질이 이보다 더 분명하고 단순하게 제시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그분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와 같이 일하심을 확실히 안다.]
Article XII (Of Repentance) §12 (Law and Gospel) Article XII (V): Of Repentance.
사람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두 으뜸 사역은 이것이니, 곧 두렵게 하시는 것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살리시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이 두 사역으로 나뉘어 있다. 한 부분은 율법이니, 죄를 보이고 책망하고 정죄한다. 다른 부분은 복음이니, 곧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진 은혜의 약속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온 성경에 걸쳐 끊임없이 되풀이되니, 처음에 아담에게 베풀어졌고["내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등, 창 3:15], 그 뒤에 족장들에게, 그다음에 선지자들에 의해 더욱 분명히 선포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유대인들 가운데 설교되고 제시되었고 사도들에 의해 온 세계에 퍼졌다. 모든 성도가 이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자기들 자신의 반회나 통회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Article XII (Of Repentance) §13 (Adam) Article XII (V): Of Repentance.
그리고 [성도들이 어떻게 경건하게 되었는지를 보이는] 본들도 마찬가지로 이 두 부분을 보여 준다. 죄를 지은 후에 아담은 책망받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니, 이것이 통회였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약속하시고 장차 올 씨(복된 씨, 곧 그리스도)에 관해 말씀하시니, 그로 말미암아 마귀의 나라와 죽음과 죄가 멸망당할 것이며, 거기서 그분께서 죄 사함을 베푸신다. 이것들이 으뜸 되는 것들이다. 비록 형벌이 그 뒤에 더해질지라도, 이 형벌이 죄 사함을 공로로 얻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형벌에 관해서는 우리가 잠시 후에 말하겠다.
Article XII (Of Repentance) §14 (David; the Sinful Woman) Article XII (V): Of Repentance.
그래서 다윗은 나단에게 책망받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삼하 12:13에서 말한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이것이 통회이다. 그 뒤에 그는 사죄를 듣는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음성이 다윗을 격려하고, 믿음으로 그를 떠받치고 의롭다 하고 살린다. 여기에 또한 형벌이 더해지나, 이 형벌이 죄 사함을 공로로 얻게 하지는 않는다. 또한 특별한 형벌들이 늘 더해지는 것도 아니며, 다만 회개에 이 두 가지 곧 통회와 믿음이 늘 있어야 하니, 눅 7:37, 38과 같다. 죄인인 여자가 울며 그리스도께 나아왔다. 이 눈물로 그 통회를 알 수 있다. 그 뒤에 그는 사죄를 듣는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것이 회개의 둘째 부분 곧 믿음이니, 이것이 그를 격려하고 위로한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경건한 독자들에게 분명한 것은, 우리가 회개에, 회심 혹은 거듭남과 죄 사함에 본래적으로 속하는 그 부분들을 돌린다는 것이다. 합당한 열매들과 형벌들[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옛 아담 위에 지우시는 십자가와 형벌을 기꺼이 짊어지려는 인내]은 거듭남과 죄 사함을 뒤따른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이 두 부분을 언급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회개에서 요구하는 그 믿음[궤변가들과 교회법학자들이 모두 침묵해 온 그 믿음]이 더 잘 보이게 하려 함이다. 그리고 복음이 선포하는 그 믿음이 무엇인지는, 그것이 통회 및 죽임과 마주 놓일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Apol. XII §1 Article XII: Of Repentance (latter half)
그러나 상대편은 사람이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우리의 진술을 명시적으로 정죄하므로, 우리는 몇 가지 증거를 덧붙이려 한다. 이로써 죄 사함이 통회로 인하여 행한 일 자체(ex opere operato)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의 죄가 사하여졌음을 믿는 그 특별한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상대편과 다투고 있는 으뜸가는 조항이며, 그 지식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히 필요하다고 우리는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동일한 주제에 관하여 충분히 말한 것으로 보이므로, 여기서는 더 간략히 다루겠다. 회개의 교리와 칭의의 교리라는 주제는 서로 매우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Apol. XII §2 Article XII: Of Repentance (latter half)
상대편이 믿음을 말하며 그것이 회개에 앞선다고 할 때, 그들이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의롭게 하는 믿음이 아니라, 일반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 악인에게 형벌이 위협되어 있다는 것[지옥이 있다는 것] 따위를 믿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에 더하여 우리는 각 사람이 자기 죄가 사하여졌음을 믿을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다투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특별한 믿음에 관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약속이 아니라 통회와 고해와 보속 따위의 행한 일 자체(opus operatum)를 신뢰하라고 명하는 견해에 맞세운다. 이 믿음은 두려움을 이기는 방식으로 그 뒤를 이어, 양심을 평안케 한다. 우리는 이 믿음에 칭의와 중생을 돌리니, 그것이 두려움에서 자유케 하며, 마음속에 평화와 기쁨뿐 아니라 새 생명까지도 낳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영원토록 또한 음부의 모든 권세에 맞서 변호하려니와] 이 믿음이 죄 사함을 위하여 참으로 필요하다고 견지하며, 따라서 그것을 회개의 부분들 가운데 둔다. 상대편이[미친 개들처럼] 우리를 반박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달리 믿지 아니한다.
Apol. XII §3 Article XII: Of Repentance (latter half)
더욱이 먼저 우리는 상대편에게 사죄(赦罪) 선언을 받는 것이 회개의 한 부분인지 아닌지를 묻는다. 그러나 그들이 구별을 정교하게 짓듯이 그것을 고해에서 떼어 놓는다면, 우리는 사죄 선언 없는 고해가 무슨 유익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사죄 선언을 받는 것을 고해에서 떼어 놓지 않는다면, 그들은 믿음이 회개의 한 부분이라고 견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사죄 선언은 믿음으로가 아니고는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죄 선언이 믿음으로가 아니고는 받지 못한다는 것은 바울로부터 증명될 수 있으니, 그는 로마서 4장 16절에서 약속이 믿음으로가 아니고는 받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사죄 선언은 죄 사함의 약속이다[그것은 다름 아닌 복음,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에 대한 신적 약속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믿음을 요구한다. 또한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떻게 사죄 선언을 받았다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사죄 선언에 동의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되다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음이 의심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그것들을 불확실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일서 5장 10절에 기록되기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하였다.
Apol. XII §4 Article XII: Of Repentance (latter half)
둘째로, 우리는 상대편이 죄 사함은 회개의 한 부분이거나 그 목적이거나, 그들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회개가 도달하는 종착점(terminus ad quem)임을 인정하리라 생각한다.[죄 사함을 얻지 못한다면 회개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죄 사함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받아지는 그것은 회개의 부분들에 옳게 더하여진다[반드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어야 한다]. 그러나 음부의 모든 권세가 우리를 반박할지라도, 죄 사함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죄가 사하여졌음을 믿는 믿음만으로가 아니고는 받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확실하니, 로마서 3장 25절을 따른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그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그를 세우셨다 함이다. 또한 로마서 5장 2절도 그러하다. 곧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 함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양심은 하나님의 진노에 우리의 행위나 우리의 사랑을 맞세울 수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붙잡고 그를 인하여 주어진 약속을 믿을 때에 마침내 평안케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없이 마음이 평안케 된다고 꿈꾸는 자들은 죄 사함이 무엇인지, 또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6절에서 이사야 49장 23절과 28장 16절을 인용하여 이르되,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러므로 자기 죄 사함을 그리스도를 인하여서가 아니라 자기 행위를 인하여 받는다고 확신하는 위선자들은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여야 한다. 베드로는 또한 사도행전 10장 43절에서 이르되, 그를 믿는 자마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모든 선지자가 그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 하였다. 그가 그의 이름을 힘입어라고 한 말씀은 이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될 수 없거니와, 그는 덧붙이기를, 그를 믿는 자마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곧 그리스도를 인하여 죄 사함을 받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어떤 공로나 행위를 인하여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음을 믿을 때에 이루어진다.
Apol. XII §5 Article XII: Of Repentance (latter half)
우리 상대편은 자기들이 교회라고, 자기들이 교회의 일치된 견해[보편적 공교회가 견지하는 바]를 따른다고 소리친다. 그러나 베드로도 여기 우리의 쟁점에서 교회의 일치된 견해를 인용한다. 곧 그를 믿는 자마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모든 선지자가 그에 대하여 증언한다 함이다. 선지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분명히 보편 교회의 일치된 견해로 판단되어야 한다.[내가 진실로 생각하건대, 만일 모든 거룩한 선지자가 한 선언에 만장일치로 합의한다면(하나님께서는 한 선지자조차도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배로 여기시므로), 그것은 또한 보편적이며 공교회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이며 거룩한 교회의 결의요 선언이며 만장일치의 강력한 결론이 될 것이요, 정당히 그렇게 여겨질 것이다.] 우리는 교황에게도 교회에게도 이 선지자들의 일치된 견해에 거슬러 결의를 내릴 권세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레오의 교서는 이 조항 곧 죄 사함에 관한 조항을 공공연히 정죄하며, 상대편은 그것을 논박서(Confutation)에서 정죄한다. 이로써 우리가 이 사람들의 교회를 어떤 종류의 교회로 판단하여야 할지가 드러난다. 그들은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인하여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하여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자기들의 결의로 단죄할 뿐 아니라, 또한 힘과 칼로써 그것을 폐하라고, 또 온갖 잔혹함으로써[피에 굶주린 사냥개들처럼] 그렇게 믿는 선한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Apol. XIII §1 Article XIII: Of the Number and Use of the Sacraments
제13조에서 반대자들은 성례전이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 사람들 사이의 고백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의 표징과 증언이며,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믿게 하신다는 우리의 진술을 승인한다[그것들은 전쟁에서의 암호나 제복 등처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게 하는 단순한 표지가 아니라, 효력 있는 표징이며 확실한 증언 등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또한 우리에게 일곱 성례를 세라고 명한다. 우리는 성경에 제정된 일들과 예식들은 그 수가 얼마이든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또한 가르침의 목적상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계산한다 하더라도, 성경에 전해진 것들을 바르게 보존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대의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지 않았다[그러나 이 일곱 성례라는 수에 관하여 말하자면, 교부들도 그 열거에서 일치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 일곱 예식들이 모두 동일하게 필요한 것도 아니다].
Apol. XIII §2 Article XIII: Of the Number and Use of the Sacraments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은혜의 약속이 더해진 예식들을 성례전이라 부른다면, 무엇이 본래적 의미의 성례전인지 결정하기는 쉽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면 사람이 제정한 예식들은 본래적 의미의 성례전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약속하는 일은 인간의 권위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 없이 제정된 표징들은, 비록 그것들이 무지한 자들[어린이나 교양 없는 자들]을 가르치거나 무엇인가를[예컨대 그려진 십자가처럼] 일깨워 줄지라도, 은혜의 확실한 표징은 아니다. 그러므로 세례와 주의 만찬과, 회개의 성례인 사죄선언은 참으로 성례전이다. 이 예식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은혜의 약속을 가지고 있으며, 이 약속은 신약에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우리가 주의 몸을 먹을 때, 우리가 사죄를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참으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말씀과 예식으로 마음을 움직여 믿게 하시고 믿음을 품게 하시니, 바울이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말한 바와 같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치기 위하여 귀로 들어오는 것처럼, 예식 그 자체는 마음을 움직이기 위하여 눈을 친다. 말씀의 효력과 예식의 효력은 동일하니, 아우구스티누스가 잘 말한 바와 같이,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이다. 예식은 눈으로 받아들여지며, 말하자면 말씀의 그림이어서 말씀과 동일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의 효력은 동일하다.
Apol. XIII §3 Article XIII: Of the Number and Use of the Sacraments
견신례와 종부성사는 교부들에게서 받은 예식들로서, 교회조차도 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식들을,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과 은혜의 분명한 약속을 가진 앞의 예식들과 구별하는 것은 무익하지 않다.
Apol. XIII §4 Article XIII: Of the Number and Use of the Sacraments
상대편은 제사장직을 말씀의 직무나 다른 이들에게 성례전을 집행하는 일로 이해하지 않고, 마치 신약에도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과 같은 제사장직이 있어서 백성을 위하여 희생제사를 드리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죄 사함을 공로로 얻어야 하는 것처럼, 그것을 희생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충분하였으며, 마치 이것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그 외에 다른 희생제사가 더 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어떤 희생제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이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구속받았음을 믿는다면, 오직 이 그리스도의 한 희생제사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사장이라 불리는 것은, 율법에서처럼 백성을 위하여 어떤 희생제사를 드려 이로써 백성을 위한 죄 사함을 공로로 얻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을 가르치고 백성에게 성례전을 집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히브리서가 충분히 가르치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는 레위 지파의 것과 같은 또 다른 제사장직이 없다. 그러나 만일 안수례가 말씀의 직무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안수례를 성례전이라 부르기를 꺼리지 않는다. 말씀의 직무는 하나님의 명령과 영광스러운 약속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 로마서 1장 16절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고, 마찬가지로 이사야 55장 11절은 "내 입에서 나가는 내 말도 그러하여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바를 이루리라" 한다. 안수례가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안수를 성례전이라 부르기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사역자를 세우라는 명령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기쁜 일이어야 하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직무를 승인하시고 그 직무 안에 임재하심을[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곧 사람들에 의해 택함받은 자들을 통하여 설교하시고 일하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가능한 한 말씀의 직무를 온갖 찬사로 단장하는 것은, 광신적인 사람들에 맞서 유익하다. 그들은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옛적에 열광주의자들이 가르쳤고 지금 재세례파가 가르치는 것처럼, 사람이 외딴 곳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침묵 가운데 앉아 조명을 기다리는 그들 자신의 어떤 준비 때문에 주어진다고 몽상하는 자들이다.
Apol. XIII §5 Article XIII: Of the Number and Use of the Sacraments
혼인은 신약에서 처음 제정된 것이 아니라, 태초에 인류가 창조되자마자 곧바로 제정되었다. 더욱이 혼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있으며, 약속들도 가지고 있으니, 그 약속들은 본래 신약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의 삶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혼인을 성례전이라 부르고자 한다면, 그는 여전히 그것을 앞의 것들[앞의 두 가지]과 구별하여야 하니, 이것들은 본래 신약의 표징이요 은혜와 죄 사함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혼인이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성례전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가진 다른 신분들이나 직무들 또한 성례전이라 불릴 수 있으니, 예컨대 위정자의 직무가 그러하다.
Apol. XIII §6 Article XIII: Of the Number and Use of the Sacraments
끝으로, 만일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약속이 더해진 모든 것을 성례전 가운데 헤아려야 한다면, 어찌하여 우리는 참으로 성례전이라 불릴 수 있는 기도를 더하지 않는가?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과 매우 많은 약속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만일 성례전 가운데, 말하자면 더 탁월한 자리에 놓인다면, 사람들을 기도하도록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구제도 여기에 헤아릴 수 있고, 마찬가지로 고난도 그러하니, 이것들은 그 자체가 표징이며 하나님께서 거기에 약속을 더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냥 두기로 하자.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가진 그 대상들만 여전히 보존된다면,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수나 용어에 관하여 크게 다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Apol. XIV Article XIV: Of Ecclesiastical Order
제14조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성례전과 말씀의 집행이 정당하게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만 허락되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우리가 교회법적 안수(canonical ordination)를 시행한다는 조건을 달아 이를 받아들인다. 이 주제에 관하여 우리는 이 회의에서, 비록 교회의 직제(church-polity)와 등급들[옛 교회 규정들과 감독들의 통치]이 인간의 권위로 제정된 것일지라도 이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이라고 자주 증언하였다[감독들이 우리의 교리를 허용하고 우리의 사제들을 받아들인다는 조건에서]. 우리는 교회 권징(church-discipline)이 교부들에 의해, 고대의 교회법들에 규정된 방식대로, 선하고 유익한 의도로 제정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Apol. XIV Article XIV: Of Ecclesiastical Order
그러나 감독들은 우리의 사제들에게 우리가 고백한 이러한 종류의 교리를 거부하고 정죄하도록 강요하거나, 아니면 새롭고 전례 없는 잔혹함으로 가련하고 무죄한 사람들을 죽음에 처한다. 이러한 원인들이 우리의 사제들로 하여금 그러한 감독들을 인정하지 못하게 한다. 이처럼 감독들의 잔혹함이, 우리가 유지하기를 크게 바랐던 교회법적 통치가 일부 지역에서 해체된 까닭이다. 그들이 교회를 흩어지게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셈을 바칠 것인지 스스로 살펴보게 하라. 이 문제에서 우리의 양심은 위험에 처해 있지 않으니, 우리의 신앙고백(Confession)이 참되고 경건하며 보편적(catholic)임을 우리가 알기에, 이 교리를 박해하는 자들의 잔혹함을 인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