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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정교 신앙고백(도시테우스)

Eastern Orthodox Confession (Dositheus)

신조·신앙고백 Dositheus 1672 orthod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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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23/23 원문 · 한 23/23 번역 · 0 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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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The Confession of Dositheus (Preface)
하나님의 자비로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된 도시테우스가, 그리스인 곧 동방 교회의 믿음과 예배에 관하여, 곧 정통 신앙에 관하여 그 교회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고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우리의 사도적 보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과 이 거룩하고 큰 도시 예루살렘에 머무르는 정통 예배자들의 공동의 이름으로(이들과 온 보편 교회는 믿음에 관한 모든 일에서 일치한다) 이 간결한 신앙고백을 펴낸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의 증거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진실한 양심으로, 일체의 거짓 꾸밈이 없이 작성한 것이다.
교령 1 Decree 1
우리는 한 분이신 참되고 전능하시며 무한하신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믿는다. 아버지는 나심이 없으시고, 아들은 영원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고,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 본질이시다. 한 본질 안에 계신 이 세 위격을 우리는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라 부르며, 모든 피조물이 그분을 영원히 송축하고 영화롭게 하며 경배해야 한다.
교령 2 Decree 2
우리는 거룩하고 신성한 성경이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것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하되, 보편 교회가 해석하고 전수한 그대로 믿어야 하며 달리 믿어서는 안 된다. 모든 더러운 이단은 거룩한 성경을 받아들이기는 하나, 은유와 동음이의와 사람의 지혜의 궤변을 사용하여 그것을 그릇되게 해석하며, 마땅히 구별해야 할 것을 뒤섞고 결코 희롱해서는 안 될 것을 희롱한다. 만일 성경을 달리 받아들여 사람마다 날마다 그것에 관하여 서로 다른 뜻을 품는다면, 보편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오늘날까지 동일한 믿음의 교리를 지니고 언제나 한결같고 흔들림 없이 믿는 교회로 존속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도리어 그 교회는 수많은 분파로 찢기고 이단들에 굴복하였을 것이며, 거룩하고 진리의 기둥과 터(디모데전서 3:15)이며 점도 주름도 없는(에베소서 5:27) 교회가 아니라 악한 자들의 교회(시편 25:5)가 되었을 것이다. 이단의 교회가 의심할 바 없이 그러하며, 특히 칼뱅을 따르는 자들의 교회가 그러하니, 그들은 교회에서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도 그 후에는 악하게 교회를 저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편 교회의 증거 또한 거룩한 성경의 권위보다 못하지 않다고 믿는다. 동일하신 한 성령께서 둘 다의 저자이시므로, 성경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과 보편 교회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같은 일이다. 또한 누구든지 자기에게서 말하는 사람은 잘못할 수 있고 속일 수 있으며 속을 수도 있으나, 보편 교회는 결코 자기에게서 말한 적도 말하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에게서 말하므로 — 그 영께서 교회의 스승이시니 교회는 언제나 변함없이 풍성하다 — 교회가 어떤 모양으로든 잘못하거나 결코 속이거나 속는 것은 불가능하며, 거룩한 성경과 같이 무오하고 영원한 권위를 지닌다.
교령 3 Decree 3
우리는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영광으로 예정하시고, 자기가 버리신 자들을 정죄로 넘기셨음을 믿는다. 그러나 한 편은 의롭다 하시고 다른 편은 까닭 없이 넘기시거나 정죄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모든 이의 공동의 아버지이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의 본성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한 편이 그들의 자유의지를 바르게 쓸 것을, 다른 편이 그릇되게 쓸 것을 미리 아셨으므로, 한 편을 예정하시고 다른 편을 정죄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의지의 사용을 이렇게 이해한다. 곧 우리가 선행 은혜라 부르는 신적이며 밝히 비추는 은혜가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모든 이에게 베풀어지며, 이 은혜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 이 은혜는 원하는 자에게만 유익하고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 또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요구되는 일에서 이 은혜와 협력하는 자들에게는, 그 결과로 특별한 은혜가 주어진다. 이 은혜는 우리와 협력하며 우리를 능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 안에, 곧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기를 원하시고 그분의 선행 은혜가 우리에게 행하라고 권고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는 데에 견디게 하며,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예정된 자로 삼으신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고 은혜와 협력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기를 원하시는 일을 지키지 않고, 선한 것을 자발적으로 행하라고 하나님께 받은 자유의지를 사탄을 섬기는 데에 오용하는 자들은 영원한 정죄에 넘겨진다. 그러나 가장 악한 이단들이 말하는 것처럼, 또 이 조항이 답하는 [키릴의 신앙고백의] 장에 담긴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거나 정죄하실 때에 예정된 자나 정죄된 자의 행위를 어떤 모양으로도 고려하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불경하고 무도한 일임을 우리는 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이 스스로 모순될 것이니, 성경은 믿는 자에게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약속하면서도, 하나님을 그 구원의 유일한 저자로 여겨, 선행하는 행위 없이 그분께서 베푸시는 밝히 비추는 은혜만으로 사람에게 신적인 일들의 진리를 보이시고, 그가 원한다면 어떻게 그 은혜와 협력하여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을 행하며 그리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가르치신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의지의 능력 — 그분께 순종하든 순종하지 않든 의지하는 능력 — 을 빼앗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신적 의지가 이처럼 홀로, 까닭 없이 그들의 정죄의 저자라고 단언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큰 비방을 씌울 수 있겠는가? 또 지극히 높으신 분께 더 큰 모욕과 신성모독을 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신성이 악으로 시험받지 아니하시며(약 1:13 참조) 그분께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으므로 모든 이의 구원을 똑같이 원하심을 안다. 자기 자신의 악한 선택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욕된 그릇이 된 자들에게는 정죄가 의롭게 선고됨을 우리는 고백한다. 그러나 영원한 형벌과 잔혹함과 무자비함과 비인간성의 저자가 하나님이시라고는 우리가 결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분은 회개하는 한 죄인을 두고 하늘에 기쁨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눅 15:7). 우리가 제정신인 한 이것을 믿거나 생각하는 일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으라. 우리는 그런 것을 말하고 생각하는 자들을 영원한 저주 아래 두며, 그들을 어떤 불신자보다도 더 악한 자로 여긴다.
교령 4 Decree 4
우리는 삼위로 계신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심을 믿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천사의 권세들과 이성적 영혼들과 마귀들이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귀들을 그들이 나중에 자기 선택으로 되어 버린 그런 것으로 지으신 것은 아니다 — 그리고 보이는 것은 하늘과 하늘 아래 있는 것들이다. 지으신 이가 본성상 선하시므로 그분은 지으신 모든 것을 심히 선하게 지으셨으며(창 1:31 참조), 결코 악의 저자가 되실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어떤 악, 곧 죄가 있어 사람이나 마귀 안에서 신적 의지에 반하여 생긴다면 — 악이 단순히 본성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 — 그것은 사람에게서 나거나 마귀에게서 난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모양으로도 악의 저자가 아니시며 정당한 추론으로는 결코 악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다는 것은 참되고 무오한 법칙이기 때문이다.
교령 5 Decree 5
우리는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다스려짐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악한 일들을 미리 아시고 그것을 허용하실지라도, 그것들이 악인 한에서는 그분이 그 고안자도 저자도 아니시다. 악한 일들이 일어날 때에 그것들은 지극히 선하신 분에 의하여 무언가 유익한 것을 위하여 주관되실 수 있으니, 이는 그분이 그것들의 저자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더 나은 무언가를 접붙이시는 방식이다. 우리는 그 형언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만 계시된 판단 가운데 있는 신적 섭리를 경배해야 하며, 호기심으로 캐물어서는 안 된다(롬 11:33 참조). 다만 신적 섭리에 관하여 영원한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거룩한 성경에 우리에게 계시된 것은 정직하게 탐구하고, 그런 다음 하나님에 관한 으뜸 되는 관념들에 합당하게 주저 없이 그것을 해석해야 한다.
교령 6 Decree 6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첫 사람이 낙원에서 타락하였음을 믿으니, 그는 신적 계명을 무시하고 뱀의 속이는 권고에 굴복하였다. 그 결과로 원죄가 그의 후손에게 흘러내려, 육신을 따라 태어난 모든 이가 이 짐을 지며 이 현재의 세상에서 그 열매를 겪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열매와 이 짐을 [실제] 죄, 곧 불경, 신성모독, 살인, 남색, 간음, 음행, 원수 맺음, 그리고 그 밖에 우리의 타락한 선택으로 본성에서가 아니라 신적 의지에 반하여 저질러지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조상들과 선지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 또 율법의 그늘 아래 있던 이들이든 복음의 진리 아래 있던 이들이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이들, 곧 신적 선구자[세례 요한]와 특히 말씀이신 하나님의 어머니 영원한 동정녀 마리아는 이러한 [죄들]이나 그와 같은 허물들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신적 정의가 [원] 범죄에 대한 형벌로 사람에게 가하신 것, 곧 수고로운 땀과 고난과 육신의 질병과 해산의 고통,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순례 동안 수고로운 삶을 사는 것과 마지막으로 육신의 죽음을 겪을 뿐이다.
교령 7 Decree 7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음(빌 2:7 참조), 곧 자기 위격 안에 사람의 육신을 취하사 성령으로 잉태되어 영원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 계셨음을 믿는다. 또 사람이 되사 태어나시되 육신을 따른 자기 어머니에게 어떤 고통이나 수고도 끼치지 않으시고 그 동정도 손상하지 않으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고전 15:3,4 참조) 사흘 만에 영광 중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으셨음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그분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기다린다.
교령 8 Decree 8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자기를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심으로써 자기 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이루셨고, 친히 자기 백성을 돌보사 우리 죄를 위한 대언자요 화목제물이심을 믿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분을 향한 기도와 간구에서 성도들이 중보자라고 말하며, 무엇보다 바로 말씀이신 하나님의 더럽혀지지 않은 어머니가, 또한 우리 위에 세워진 것으로 우리가 아는 거룩한 천사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순교자들과 정결한 자들, 그리고 그분을 신실히 섬김으로 그분께서 영화롭게 하신 모든 이가 중보자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단 곁에 서 있는 주교들과 사제들과 덕으로 뛰어난 의로운 사람들도 이들과 함께 헤아린다. 우리는 거룩한 말씀에서 우리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의인의 기도가 큰 역사를 이룬다는 것(약 5:16), 또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자들보다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배운다. 성도들은 그들의 순례 동안만이 아니라 특히 그들의 죽음 이후에, 모든 반사적인 봄이 사라지고 그들이 그 무한한 빛 가운데서 거룩한 삼위일체를 분명히 뵙고 우리에게 관한 일을 아는 때에, 우리를 위한 하나님 앞의 중보자요 간구자로 여겨진다. 선지자들이 육신 안에서 감각의 지각을 지니고 있을 때에도 하늘에서 행해진 일을 알아 장차 될 일을 예언하였음을 우리가 의심하지 않듯이, 천사들과 천사처럼 된 성도들도 하나님의 무한한 빛 가운데서 우리에게 관한 일을 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도리어 주저 없이 믿고 고백한다.
교령 9 Decree 9
우리는 아무도 믿음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믿는다. 믿음이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과 신적인 일들에 관한 바른 관념을 뜻하며, 이 믿음이 사랑으로, 곧 신적 계명을 [지킴으로] 역사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의롭다 하니, 이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교령 10 Decree 10
우리는 우리가 믿도록 가르침받은바,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적인 교회라 불리는, 아니 참으로 그러한 교회가, 아직 순례 중에 있어 아버지의 나라[하늘]에 있는 본향에 이르지 못한 그리스도 안의 모든 신자를 일반적으로 포함함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순례 중에 있는 이 교회를 아버지의 나라에 있는 교회와 결코 혼동하지 않으니, 이는 어떤 이단들이 말하는 것처럼 두 교회의 지체가 다 으뜸 목자이신 하나님의 양(시 95:7 참조)이며 동일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하늘 교회와 땅의 교회를 혼동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가능하니, 하나는 아직 싸우며 그 여정 가운데 있고, 다른 하나는 승리하여 아버지의 나라에 자리 잡고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죽을 사람이 이 보편 교회의 머리가 보편적으로 또 영원히 될 수 없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머리이시며, 친히 키를 잡으사 거룩한 교부들을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는 일에서 방향을 잡으신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주교들을 세우사, 참된 교회이며 [보편 교회의] 참된 지체로 이루어진 개별 교회들 위에 지도자와 목자가 되게 하셨다. 이 권위와 머리들은 남용으로가 아니라 정당하게 [세워졌으며], 우리 구원의 창시자요 완성자(히 2:10; 12:2 참조)를 바라보고, 머리로서 행하는 바를 그분께 돌린다. 그러나 칼뱅주의자들은 그 밖의 불경과 더불어 이것도 상상하였으니, 곧 단순한 사제와 대사제[주교]가 아마 동일하며 대사제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가 몇몇 사제들에 의하여 다스려질 수 있고, 대사제뿐 아니라 [단순한] 사제도 사제를 안수할 수 있으며 여러 사제가 대사제를 안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동방 교회가 이 악한 관념에 동의한다고 거창한 말로 단언하며 — 이를 위하여 키릴[키릴 루카리스의 신앙고백]이 제십장을 썼다 — 우리는 동방 교회에서 처음부터 견지되어 온 마음을 따라 분명히 선언한다. 곧 주교의 직분은 교회에 너무나 필요하여, 그가 없이는 교회도 그리스도인도 존재하거나 일컬어질 수 없다. 그는 사도들의 계승자로서, 안수와 지극히 거룩한 영의 부르심으로 매고 푸는 은혜를 주께로부터 끊임없는 계승을 통하여 받았으므로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형상이며, 으뜸 되는 일꾼이신 성령의 역사에 지극히 풍성히 참여함으로 보편 교회의 모든 신비[성례전]의 샘이니, 우리는 이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 또한 그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숨이 사람에게, 해가 세상에 필요한 것처럼 교회에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대사제직의 존엄을 기리며 우아하게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처음 난 자들의 하늘 교회(히 12:23 참조)에 계신 분이시고 해가 세상에 있는 것과 같이, 모든 대사제는 자기 개별 교회 안에 그러하니, 그를 통하여 양 떼가 밝아지고 양육되며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엡 2:21 참조) 주교직의 이 위대한 신비와 존엄이 끊임없는 계승으로 우리에게 전해 내려왔음은 분명하다. 주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그분이 다른 은혜의 수단과 신적 역사로 우리와 함께하실지라도, 더욱 뛰어난 방식으로는 으뜸 일꾼인 주교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신적 신비[성례전]를 통하여 우리와 연합하신다. 주교는 성령을 통한 으뜸 사역자요 으뜸 일꾼이며, 우리가 이단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보낸 그의 넷째 서신에서 보편 교회가 도처에서 주교들의 돌봄에 맡겨졌다고 말하였다. 로마인의 첫 주교 클레멘스, 안디옥의 에보디우스, 알렉산드리아의 마가는 베드로의 인정받은 계승자였다. 또한 신적 안드레가 콘스탄티노플의 보좌에 자기를 대신하여 스타키스를 앉혔으며, 이 크고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는 우리 주께서 친히 야고보를 세우셨고, 야고보 후에 또 한 사람이, 그 다음에 또 한 사람이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승하였다는 것도 인정된다. 그러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파피아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모든 주교를 사도들의 계승자라 불렀다. 그들이 사도들의 존엄과 권위를 계승한 데 대하여 팜필루스의 [벗] 에우세비우스가 증언하고 모든 교부가 증언하니, 그 명단을 일일이 들 필요가 없다. 보편 교회의 공통되고 가장 오래된 관습이 이를 확증한다. 그리고 주교직의 존엄이 단순한 사제의 존엄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제는 주교에 의하여 안수받으나, 주교는 사제에 의하여 안수받지 않고 사도 규범이 지시하는 대로 두세 명의 대사제에 의하여 안수받기 때문이다. 또 사제는 주교에 의하여 선택되나, 대사제는 사제들이나 장로들에 의하여 선택되지 않고, 세속 군주들에 의하여 선택되지도 않으며, 안수받을 자가 받게 될 도시가 속한 그 나라 수위 교회의 시노드에 의하여, 또는 적어도 그가 주교가 될 지방의 시노드에 의하여 선택된다. 혹 도시가 그를 선택할지라도 절대적으로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은 시노드에 회부된다. 그리고 그가 규범에 합당하게 [선택된] 것으로 드러나면, [주교] 당선자는 지극히 거룩한 영의 부르심과 함께 주교들의 안수로 세워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시노드가 택하는 자가 세워진다. [단순한] 사제는 자기가 받은 사제직의 권위와 은혜를 자기에게 보유하나, 주교는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 준다. 또 주교에게서 사제직의 존엄을 받은 자는 다만 거룩한 세례와 기도 기름을 베풀고, 피 없는 제사를 제사장적으로 집전하며, 백성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를 나누어 주고, 세례받은 자에게 거룩한 미론[성유]을 바르며, 합법적으로 혼인하는 신자들에게 관을 씌우고, 병든 자를 위하여, 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도록(딤전 2:4 참조), 특히 산 자와 죽은 자의 신자들의 죄 사함과 용서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또 그가 경험과 덕으로 뛰어나면, 주교에게서 권위를 받아 자기에게 오는 신자들을 인도하고 하늘 나라를 소유하는 길로 이끌며, 거룩한 복음의 전파자로 세워진다. 대사제 또한 이 모든 일의 사역자이니,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사실상 성령을 통한 신적 신비와 은혜의 샘이며, 그만이 거룩한 미론[성유]을 축성한다. 교회의 모든 직급과 등급의 안수가 그에게 속하며, 으뜸 되고 가장 높은 의미에서 그가 매고 풀며,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의 판결이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마 16:19). 또 그는 거룩한 복음을 전파하고 정통 신앙을 위하여 싸우며, 듣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교회에서 내쫓고(마 18:17 참조), 이단들을 출교와 저주 아래 두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 10:11 참조). 이로써 주교가 단순한 사제와 다름이 모순 없이 분명하며, 그가 없이는 세상의 모든 사제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목회를 행하거나 그것을 다스릴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 교부가 잘 말하기를, 깨달음 있는 이단을 찾기란 쉽지 않다고 하였다. 이들이 교회를 저버릴 때에 성령께서 그들을 버리시므로, 그들 안에는 깨달음도 빛도 남지 않고 오직 어둠과 눈멂만 남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일이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가장 명백한 일들에 맞서지 않았을 것이니, 그 가운데 하나가 참으로 위대한 주교직의 신비이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모든 교회사와 거룩한 사람들의 글이 기록하고 증언하며, 보편 교회가 언제나 견지하고 인정하여 온 것이다.
교령 11 Decree 11
우리는 보편 교회의 지체란 모든 신자, 곧 오직 신자뿐임을 믿으니, 이들은 구주 그리스도의 흠 없는 믿음을 그리스도 자신과 사도들과 거룩한 세계 시노드들에게서 참으로 받아, 비록 그들 가운데 더러는 온갖 죄를 범할지라도 흔들림 없이 그 믿음을 고수하는 자들이다. 신자들이 죄 가운데 살고 있을 때에도 교회의 지체가 아니라면 교회에 의하여 판단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교회에 의하여 판단받고 회개로 부름받으며 교회의 유익한 교훈의 길로 인도받으니, 비록 여전히 죄로 더럽혀져 있을지라도, 다만 그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았고 보편되고 정통된 믿음에 붙어 있다는 이 한 가지로 인하여, 그들은 보편 교회의 지체이며 또 그렇게 여겨진다.
교령 12 Decree 12
우리는 보편 교회가 성령에 의하여 가르침받음을 믿는다. 그분은 참된 보혜사이시니,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내사(요 15:26 참조) 진리를 가르치게 하시고(요 16:13 참조) 신자들의 마음에서 어둠을 몰아내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의 가르침은 교회를 직접 비추는 것이 아니라 보편 교회의 거룩한 교부들과 지도자들을 통하여 [그리하신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말씀이며 그렇게 일컬어지니, 그분께서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참으로 생명을 주시는 영에 의하여 가르침받되 거룩한 교부들과 박사들을 매개로 하여 그리한다(그들의 규범은 거룩하고 세계적인 시노드들로 인정되니, 우리는 이것을 만 번이라도 말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편 교회가 잘못하거나 결코 속거나 진리 대신 거짓을 택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단지 확신할 뿐 아니라 참되고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것으로 고백한다. 지극히 거룩한 영께서 신실히 섬기는 거룩한 교부들과 지도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역사하사 교회를 온갖 종류의 오류에서 건지시기 때문이다.
교령 13 Decree 13
우리는 사람이 단지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곧 믿음과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음을 믿는다. 그러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붙잡는 손의 기능을 다하여 그 의를 우리에게 구원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모든 정통에서 멀리 떨어진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렇게 이해된 믿음은 모든 이에게 가능할 것이고, 그러면 아무도 구원을 놓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명백히 거짓이다. 도리어 우리는 의롭다 하는 것이 믿음의 상관물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행위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의롭다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를 우리의 부르심을 증명하는 증인으로 여기지 않고, 그 자체로 열매가 되어 그것을 통하여 믿음이 효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또 신적 약속들로 말미암아(고후 5:10 참조) 그 자체로 공로가 되어 신자 각 사람이 선이든 악이든 자기 몸으로 행한 것을 받게 하는 것으로 여긴다.
교령 14 Decree 14
우리는 사람이 [원] 범죄로 타락하여 짐승과 비교될 만하고 비슷하게 되었음, 곧 완전히 망하여 그의 완전함과 무감정에서 떨어졌음을 믿는다. 그러나 그가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께 받은 본성과 능력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성적이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사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자기가 창조될 때에 받은 그 본성과, 그 본성의 동일한 능력, 곧 살아 있고 작용하는 자유의지를 지니어, 본성상 선한 것을 택하여 행하고 악한 것을 피하여 미워할 수 있다. 지극히 선하신 분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본성이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본성을 악하다고 하는 것이 될 터이니, 그보다 더 불경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작용하는 능력은 본성에 달려 있고 본성은 그 저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니, 비록 그 방식은 다르다. 또 사람이 본성상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주께서 친히 암시하시며 이방인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신다(마 5:46; 눅 6:32). 그러나 이것은 바울도 로마서 1:19[실은 롬 2:14]과 다른 곳에서 명백히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로써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선이 참으로 죄가 될 수 없음도 분명하다. 선한 것이 악한 것이 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본성으로만 행해져 행한 자의 영적 성품이 아니라 본성적 성품을 이루는 데에 기울지라도, 그것은 믿음 없이는 그 자체로 구원에 이바지하지 못한다. 또한 그것은 정죄로 이끌지도 않으니, 선이 그 자체로 악의 원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난 자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또 은혜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은 행한 자를 온전하게 하며 그를 구원에 합당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사람은 거듭나기 전에 본성상 선한 것에 기울고 도덕적 선을 택하여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거듭난 자가 영적 선을 행하기 위하여는 — 신자의 행위는 구원에 이바지하며 초자연적 은혜로 이루어지므로 마땅히 영적이라 일컬어진다 — 예정에 관하여 말한 대로 그가 은혜로 인도받고 선행 은혜로 앞서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그는 은혜와 협력하기를 의지하거나 의지하지 않는 것을 자기 권한 안에 지니고 있을지라도, 스스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합당한 어떤 일도 행할 수 없다.
교령 15 Decree 15
우리는 교회 안에 복음적 신비[곧 복음 경륜의 성례전]가 있으며 그것이 일곱임을 믿는다. 우리는 교회 안에 그보다 적거나 많은 수의 신비를 두지 않으니, 일곱 외의 어떤 수의 신비도 이단적 광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일곱은 거룩한 복음에서 제정되었으며, 보편 신앙의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그 복음에서 모아진 것이다. 첫째로 우리 주께서는 거룩한 세례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마 28:19)는 말씀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는 말씀으로 제정하셨다. 또 견진, 곧 거룩한 미론 또는 거룩한 성유의 신비는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 성에 머물라”(눅 24:49)는 말씀으로 제정하셨다. 그들은 성령의 임하심으로 그 능력을 입었으니, 이것을 견진의 신비가 표시한다. 이에 관하여는 바울도 고린도후서 1장에서 썼고,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가 더 명백히 썼다. 또 사제직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는 말씀과, “너희가 땅에서 매고 푸는 것이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고 풀리리라”(마 18:18)는 말씀으로 제정하셨다. 또 피 없는 제사는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 막 14:22; 눅 22:19 참조)는 말씀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새 언약의 내 피니라”(마 26:27; 막 14:24; 눅 22:20 참조)는 말씀과,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는 말씀으로 제정하셨다. 또 혼인은, 그분이 구약에서 그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들을 되새기신 다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는 말씀으로 마치 거기에 자기 인을 치신 것이니, 이것을 신적 사도도 큰 신비라 부른다(엡 5:32). 또 고해, 곧 성례적 고백이 결합된 것은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는 말씀과,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5)는 말씀으로 제정하셨다. 마지막으로 거룩한 기름 또는 기도 기름은 마가복음(막 6:13)에 언급되어 있고, 주의 형제[야고보]가 명백히 증언한다(약 5:14). 또 신비들은 자연적인 무언가와 초자연적인 무언가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약속의 헐벗은 표징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비들은 할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니, 그 [생각]보다 더 나쁜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신비들이 받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은혜를 끼치는 효력 있는 수단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비의 온전함이 땅의 것의 사용[곧 그것을 받음에 달려 있음]을 요구한다는 관념을 그리스도교 교리에 낯선 것으로 배척한다. 이는 봉헌의 신비[곧 성찬의 성례전]에 반하기 때문이니, 그것은 본질적 말씀으로 제정되고 성령의 부르심으로 거룩하게 되어, 표시된 것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임재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의 완성은 그것의 사용에 필연적으로 앞선다. 만일 그것이 사용 전에 완성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을 그릇 받는 자가 자기에게 임할 심판을 먹고 마실 수 없을 것이니(고전 11:27,28,29), 그는 단지 떡과 포도주에 참여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합당하지 않게 참여하는 자는 자기에게 임할 심판을 먹고 마시니, 그러므로 성찬의 신비는 그것의 사용 안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사용 전에 이미 그 완성을 지닌다. 또한 우리는 믿음이 약할 때에 신비의 온전함이 손상된다는 관념을 가증하고 해로운 것으로 배척한다. 자기 이단을 버리고 보편 교회에 합류하는 이단들은 비록 믿음이 약한 가운데 유효한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교회가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후에 온전한 믿음을 지니게 될 때에 그들은 다시 세례받지 않는다.
교령 16 Decree 16
우리는 주께서 제정하시고 거룩한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거룩한 세례가 지극히 필요함을 믿는다. 주께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말씀하신 대로, 세례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유아들에게도 필요하니, 그들 또한 원죄 아래 있어 세례 없이는 그 사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께서 이것을 보이셨으니, 어떤 이들에 관하여서만이 아니라 단순하고 절대적으로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아니하면”이라 말씀하셨다. 이는 곧 “구주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는 모든 자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또 유아도 사람이며 그러한 자로서 구원이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하므로 세례도 필요하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유전된 죄의 사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필연적으로 영원한 형벌 아래 있고, 따라서 세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유아도 필연적으로 세례받아야 한다. 또 마태복음에 말한 대로(마 19:14 참조) 유아는 구원받으나 세례받지 않은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 따라서 유아도 필연적으로 세례받아야 한다. 또 사도행전(행 8:12; 16:33)에 온 집안이 세례받았다고 하였으니, 따라서 유아들도 세례받은 것이다. 고대 교부들도 이를 명백히 증언하니, 그 가운데 디오니시우스가 그의 「교회 위계론」에서, 또 유스티누스가 그의 쉰여섯째 질문에서 그러하다. 유스티누스는 분명히 말하기를 “그들은 세례로 데려오는 자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례의 유익을 보증받는다”고 하였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린아이가 세례로 구원받는 것이 사도적 전통이라 말하며, 다른 곳에서는 “교회는 아기들에게 다른 이들의 발을 주어 오게 하고, 다른 이들의 마음을 주어 믿게 하며, 다른 이들의 혀를 주어 약속하게 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우리 어머니인 교회가 그들에게 특별한 마음을 마련해 준다”고 말한다. 이제 세례의 질료는 순수한 물이요 다른 어떤 액체도 아니다. 또 그것은 사제만이 행하며, 부득이한 필요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행하되 그가 정통이며 신적 세례에 대한 바른 의향을 지닌 자라야 한다. 세례의 효력은 간략히 말하면, 첫째로 유전된 범죄의 사함과 세례받은 자가 범하였을 온갖 종류의 죄의 사함이다. 둘째로 그것은 그가 원죄로 인하여, 또 그가 개별적으로 범하였을 죽을죄로 인하여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에서 그를 건진다. 셋째로 그것은 그 사람에게 불멸을 주니, 지난 죄에서 그들을 의롭게 함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전에 범하였을 어떤 죄가 비록 전가되지 않을지라도 세례로 씻기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불경의 극치요, 경건의 고백이 아니라 도리어 그 부인일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세례 전에 있었거나 범한 모든 죄는 지워지며, 결코 있은 적도 범한 적도 없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세례의 형식과 세례에 앞서고 세례를 완성하는 그 모든 말이 양편으로 완전한 정결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또한 세례의 바로 그 이름들도 같은 것을 표시한다. 세례가 성령과 불로 하는 것이라면(마 3:11), 그것이 모든 면에서 완전한 정결임이 분명하니, 성령께서 완전하게 정결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빛이라면(히 6:4) 어둠을 몰아낸다. 그것이 거듭남이라면(딛 3:5) 옛것이 지나간 것이다. 이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례받은 자가 옛사람을 벗는다면(골 3:9) 죄도 벗는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면(갈 3:27) 사실상 세례로 말미암아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에게서 멀리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울도 더 분명히 가르치며 말하기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우리가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된다”(롬 5:19)고 한다. 의롭다면 죄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생명과 죽음이 같은 [사람] 안에 있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으셨다면, 성령으로 말미암는 죄 사함도 참되다. 이로써 세례받고 아기 때에 잠든 모든 자가 의심할 바 없이 구원받음이 분명하니,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죄도 없으니 — 모든 이에게 공통된 죄가 없음은 신적 씻음으로 그것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요, 자기 자신의 죄가 없음은 아기로서 죄를 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구원받는다. 또한 세례는 사제직과 마찬가지로 지워지지 않는 인을 새긴다. 누구도 같은 사제직의 직급을 두 번 받을 수 없는 것처럼, 한 번 바르게 세례받은 자가 비록 수만 가지 죄에, 심지어 믿음에서의 실제 배교에 빠질지라도 다시 세례받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주께로 돌아오기를 원할 때에 그는 잃었던 아들의 지위를 고해의 신비를 통하여 다시 받기 때문이다.
교령 17 Decree 17
우리는 위에서 차례로 넷째로 열거한 거룩한 성찬의 지극히 거룩한 신비가, 우리 주께서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 주시던 그 밤에 전하신 것임을 믿는다. 그분은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자기의 거룩한 제자들과 사도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고 말씀하셨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하시고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위하여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라”(마 26:28)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거행할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심을 믿는다. 그분은 다른 신비들에서처럼 모형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넘치는 은혜로 임재하시는 것도 아니요, 어떤 교부들이 세례에 관하여 말한 것처럼 헐벗은 임재로 임재하시는 것도 아니며, 루터를 따르는 자들이 가장 무지하고 비참하게 상정하듯 떡 안에 깃드심으로 말미암아 말씀의 신성이 성찬의 차려 놓인 떡과 위격적으로 연합하시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그분은 참으로 또 실제로 임재하시니, 떡과 포도주의 축성 후에 떡은 주의 참된 몸 자체로 변화하고 화체되며 바뀌고 변형된다. 그 몸은 베들레헴에서 영원한 동정녀에게서 나시고 요단에서 세례받으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다시 살아나시어 들려 올라가사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으시고 하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그 몸이다. 또 포도주는 주의 참된 피 자체로 바뀌고 화체되니, 그 피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흘리신 것이다(요 6:51). 나아가 [우리는] 떡과 포도주의 축성 후에 더 이상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남지 않고, 떡과 포도주의 형상과 모양 아래, 곧 떡의 우유성 아래 주의 몸 자체와 피가 있음을 [믿는다]. 나아가 주의 지극히 순전한 몸 자체와 피가 경건한 자든 불경한 자든 영하는 자들의 입과 위장에 전해지고 들어감을 [믿는다]. 그럼에도 그것은 경건하고 합당한 자에게는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나, 불경하고 합당하지 않은 자에게는 정죄와 영원한 형벌을 안긴다. 나아가 주의 몸과 피가 손과 이로 나뉘고 갈라지되 오직 우유성에서만, 곧 그것들이 보이고 만져지는 떡과 포도주의 우유성에서만 그러함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전혀 나뉘거나 갈라지지 않은 채로 남는다. 그러므로 보편 교회는 또한 말한다. “쪼개지고 나뉘는 분은 쪼개지되 갈라지지 아니하시며, 늘 먹히되 결코 소진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참여하는 자들을”, 곧 합당하게 참여하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나아가 변화된 떡과 포도주의 모든 부분, 곧 가장 작은 조각에도 주의 몸과 피의 한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요 악한 일이다 — 전체이신 온 주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으로, 곧 그분의 영혼과 신성과 더불어, 곧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사람으로 계심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므로 같은 시각에 세상에 많은 거행이 있을지라도, 많은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또 실제로 임재하시는 분은 하나이며 동일한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의 한 몸과 피가 신자들의 여러 교회 모두에 계신다. 이는 하늘에 계신 주의 몸이 제단 위로 내려오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 교회 모두에 차려 놓인 봉헌의 떡이 바뀌고 화체되어 축성 후에 하늘에 계신 그 몸과 하나이며 동일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의 한 몸이 많은 곳에 있되 여럿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신비는 가장 위대하며, 놀라운 것으로, 또 오직 믿음으로만 깨달을 수 있고 사람의 지혜의 궤변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으로 일컬어진다. 신적인 일들에 대한 그 헛되고 어리석은 호기심을 우리의 경건하고 하나님께서 전하신 신앙은 배척한다. 나아가 성찬의 신비 안에 있는 주의 몸 자체와 피는 지극히 높은 방식으로 존귀히 여겨지고 라트리아[흠숭]로 경배되어야 함을 [우리는 믿는다].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한 경배와 주의 몸과 피에 대한 경배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든 정통 신자를 위하여, 또 모든 이의 유익을 위하여 드려지는 참되고 화목케 하는 제사이니, 이는 사도들이 주께 받은 명령을 따라 교회에 전한 신비의 기도들에 명백히 밝혀진 대로이다. 나아가 그것의 사용 전, 곧 축성 직후에도, 또 그것의 사용 후에도, 떠나려는 자들[곧 죽어 가는 자들]의 영성체를 위하여 거룩한 합에 보관되는 것은 주의 참된 몸이며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축성 후 그것의 사용 전에도, 그것의 사용 중에도, 그것의 사용 후에도 그것은 모든 면에서 주의 참된 몸이다. 나아가 우리는 “화체”라는 말로써 떡과 포도주가 주의 몸과 피로 바뀌는 방식이 설명되는 것이 아님을 믿는다. 그 방식은 전적으로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 자신 외에는 불가능하며, 그것을 깨닫는다고 상상하는 자들은 무지와 불경에 빠진 것이다. 도리어 [그 말이 뜻하는 것은] 떡과 포도주가 축성 후에 모형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넘치는 은혜로나 독생자의 신성만의 전달이나 임재로가 아니라 주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또한 떡이나 포도주의 어떤 우유성이 어떤 전환이나 변경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어떤 우유성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 대로 참으로, 실제로, 본질적으로 떡이 주의 참된 몸 자체가 되고 포도주가 주의 참된 피 자체가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성찬의 이 거룩한 신비는, 동방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정통되고 규범적인 주교에게서 사제직을 받은 정통 사제 외에는 누구도 거행할 수 없다. 이것이 이 신비에 관한 보편 교회의 교리요 참된 고백이며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간추린 것이니, 정통되기를 원하고 이단들의 새로운 것들과 불경한 헛됨을 배척하는 자들은 어떤 모양으로도 이를 떠나서는 안 된다. 도리어 제정의 전통이 온전하고 손상 없이 지켜져야 한다. 이를 어기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는 배척하고 저주한다.
교령 18 Decree 18
우리는 잠든 자들의 영혼이 각자가 행한 바를 따라 안식에 있거나 고통에 있음을 믿는다. 그들이 그 몸에서 분리될 때에 즉시 기쁨으로 가거나 슬픔과 애통으로 가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누림이나 정죄가 아직 완전하지 않음은 분명히 인정된다. 공동의 부활 후에 영혼이 잘 처신하였든 잘못 처신하였든 그 몸과 연합할 때에, 각자가 누림이나 정죄의 완성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죽을죄에 연루된 자들의 영혼 가운데, 절망 가운데 떠나지 않고 아직 몸 안에 살아 있는 동안, 비록 회개의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하였을지라도, 눈물을 흘림으로, 기도하며 깨어 무릎 꿇음으로, 자기를 괴롭게 함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함으로, 마침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자기 사랑을 행위로 나타냄으로 회개한 자들 — 이것을 보편 교회가 처음부터 바르게 보속이라 일컬었다 — 그 [영혼들]은 하데스로 내려가 거기서 자기가 범한 죄에 합당한 형벌을 견딘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장차 풀려날 것을 알며, 사제들의 기도와 각 사람의 친척이 자기 떠난 이들을 위하여 행하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특히 가장 큰 유익을 끼치는 피 없는 제사로 말미암아 지극히 선하신 분에 의하여 건짐을 받는다. 이 제사는 각 사람이 잠든 자기 친척을 위하여 특별히 드리는 것이요, 보편되고 사도적인 교회가 날마다 모든 이를 위하여 똑같이 드리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들이 풀려날 때를 알지 못함은 분명히 이해된다. 우리는 그러한 자들에게 그 비참한 처지에서의 건짐이 있으며, 그것이 공동의 부활과 심판 전에 있음을 알고 믿으나,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지 못한다.
질문 1 Question 1
질문: 거룩한 성경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일상의 언어[통용되는 말]로 읽어야 하는가? 아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 유익하며(딤후 3:16 참조), [성경] 없이는 결코 정통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또 필연적으로 그러하다. 그럼에도 성경은 모든 이가 읽을 것이 아니라, 합당한 연구로 영의 깊은 것들을 살피고 거룩한 성경을 어떤 방식으로 탐구하고 가르치며 마침내 읽어야 하는지를 아는 자들만이 읽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훈련되지 않았거나 분별할 수 없거나 성경에 담긴 것을 오직 문자적으로만, 또는 정통에 반하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 자들에게는, 그로 인하여 생길 수 있는 해를 경험으로 아는 보편 교회가 [성경] 읽기를 금한다. 참으로 모든 정통 신자가 성경을 들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롬 10:10) 허락된다. 그러나 성경의 어떤 부분, 특히 구약을 읽는 것은 이러한 이유와 그 밖의 비슷한 이유로 금지된다. 훈련되지 않은 자들에게 모든 거룩한 성경 읽기를 금하는 것은 유아에게 단단한 음식을 삼가게 하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질문 2 Question 2
질문: 성경을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이 명백한가? 만일 거룩한 성경이 그것을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명백하다면, 주께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에게 성경을 상고하라고 명하지 않으셨을 것이고(요 5:39), 바울도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가르침의 은사를 두셨다고 까닭 없이 말하지 않았을 것이며(고전 12:28), 베드로도 바울의 서신들에 관하여 그 안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벧후 3:16). 그러므로 성경이 매우 심오하고 그 뜻이 높으며, 그 참된 의미와 옳고 모든 성경과 그 저자이신 성령께 합당한 뜻을 찾아내기 위하여 학식 있고 신적인 사람들이 필요함이 분명하다. [세례로] 거듭난 자들은 분명히 삼위일체에 관한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그분의 고난과 부활과 하늘로의 승천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거듭남과 심판에 관하여 — 많은 이들이 이를 위하여 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 성령께서 오직 지혜와 거룩함으로 훈련된 자들에게만 드러내신 것을 그들이 아는 것은 필요하지 않으며 참으로 불가능하다.
질문 3 Question 3
질문: 그대들은 어떤 책들을 성경이라 부르는가? 보편 교회의 규범을 따라, 우리는 키릴[루카리스]이 라오디게아 시노드에서 모아 열거한 모든 책을 성경이라 부르며, 그가 어리석고 무지하게, 아니 도리어 악의로 외경이라 부른 책들도 성경에 더한다. 곧 「솔로몬의 지혜」, 「유딧」, 「토비트」, 「용의 이야기」[벨과 용], 「수산나의 이야기」, 「마카베오」, 「시락의 지혜」이다. 우리는 이것들도 다른 진정한 성경의 책들과 함께 성경의 진정한 부분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고대의 관습, 아니 도리어 거룩한 복음서들과 그 밖의 성경의 책들을 진정한 것으로 우리에게 전한 보편 교회가, 의심할 바 없이 이것들도 성경의 부분으로 전하였으니, 이것들을 부인하는 것은 저것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혹 이 모든 책이 늘 다른 책들과 같은 수준으로 여겨진 것은 아닌 듯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이것들 또한 시노드들과 보편 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많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그 밖의 성경과 함께 헤아려지고 셈하여졌다. 우리는 이 모든 책을 또한 정경으로 판단하며, 이것들을 성경으로 고백한다.
질문 4 Question 4
질문: 우리는 거룩한 성상과 성도들에 대한 경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성도들은 제팔 교령에서 말한 대로 보편 교회에 의하여 중보자로 인정되므로, 이제 우리가 그들을 하나님의 벗으로, 또 만유의 하나님께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자로 존귀히 여긴다고 말할 때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드리는 존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가 휘페르둘리아라 부르는 방식으로, 우리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어머니를 존귀히 여긴다. 테오토코스[“하나님을 낳은 이”, 마리아의 칭호]가 참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종이실지라도, 그분은 또한 삼위일체 중 한 분을 육신으로 낳으신 그분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그분은 모든 천사와 성도 위에 계신 분으로, 비할 데 없는 분으로 찬송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 휘페르둘리아의 경배를 드린다. 그러나 다른 방식, 곧 우리가 둘리아[“공경”]라 부르는 방식으로 우리는 거룩한 천사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순교자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성도를 경배하되, 도리어 존귀히 여긴다. 또한 우리는 우리 구주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고난을 받으신 보배롭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의 나무와, 생명을 주는 십자가의 표와, 베들레헴의 구유 — 이로써 우리가 비이성에서 건짐을 받았다[비이성적 짐승이 먹이를 먹던 구유에 대한 암시 — 옮긴이] — 와, 해골의 곳[갈보리]과, 생명을 주는 무덤과, 그 밖의 거룩한 경배의 대상들을 경배하고 존귀히 여기며, 거룩한 복음서들과 피 없는 제사가 행해지는 거룩한 그릇들도 그러하다. 또 우리는 해마다의 기념과 대중적 축일과 거룩한 건물과 봉헌으로 성도들을 공경하고 존귀히 여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지극히 거룩한 테오토코스와 모든 성도, 또 어떤 조상들과 선지자들에게 나타난 거룩한 천사들의 성상을 경배하고 존귀히 여기며 입맞춘다. 우리는 또한 지극히 거룩한 영을 그분이 나타나신 대로 비둘기의 형상으로 나타낸다. 혹 어떤 이들이 우리가 성도들과 성도들의 성상과 그 밖의 것들을 경배함으로 우상숭배를 범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리석고 경솔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오직 삼위로 계신 한 분 하나님을 라트리아[흠숭]로 예배하며 다른 어떤 것도 그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두 가지 이유로 존귀히 여기니,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요 — 그분을 위하여 우리가 그들을 존귀히 여긴다 — 둘째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서이니, 그들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은 둘리아로 정의되었다. 그리고 거룩한 성상은 상대적으로 [경배하니], 그것들에 드리는 존귀는 그것들의 원형에게 돌려지기 때문이다. 성상을 경배하는 자는 성상을 통하여 원형을 경배하는 것이며, 성상에 드리는 존귀는 그려진 분께 [드리는 존귀]와 전혀 나뉘거나 다르지 않으니, 이는 왕의 사절에게 행하는 것과 같이 같은 분께 행하는 것이다. 또 그들이 자기들의 새로운 것들을 지지하려고 성경에서 끌어대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우리가 동의하는 바이다. 우리는 거룩한 성경을 읽을 때에 그 정황과 인물, 예와 까닭을 살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께서 어느 때에는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우상이나 형상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경배하지도 섬기지도 말라”(출 20:4,5; 신 5:8,9)고 말씀하시고, 또 다른 때에는 그룹들을 만들라고 명하시며(출 25:18), 나아가 황소들과 사자들이(왕상 7:29) 성전에 놓이게 하신 것을 우리가 살필 때에, 우리는 이 일들의 무게를 경솔히 헤아리지 않는다. 믿음은 단언에 있지 않고, 말한 대로 그 정황과 다른 사정을 살핌으로 우리가 그에 대한 바른 해석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우상이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 “너는 다른 신들을 경배하지 말라”(출 20:3 참조), 아니 도리어 “너는 우상숭배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고 결론짓는다. 그래야 사도 시대로부터 교회에 널리 퍼진 거룩한 성상을 상대적으로 경배하는 관습이 유지되고, 라트리아[흠숭]의 예배가 오직 하나님께만 보존되며,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모순되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만일 성경이 [절대적으로] “너는 만들지 말라”, “너는 경배하지 말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후에 비록 경배를 위하여서는 아닐지라도 어찌하여 형상을 만들도록 허락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계명이 오직 우상숭배에 관한 것이므로, 우리는 뱀들과 사자들과 황소들과 그룹들이 만들어지고, 천사들이 나타나는 형상과 모양들이 경배된 것을 본다. 또 그들이 성상을 경배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 것으로 내세우는 성도들에 관하여, 우리는 그들이 도리어 우리를 돕는다고 결론짓는다. 그들은 날카로운 논쟁에서 거룩한 성상을 라트리아[흠숭]로 경배하는 자들과 자기들의 죽은 친척의 성상을 교회에 들여오는 자들을 함께 논박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자들을 저주 아래 두었으나, 성도들이나 거룩한 성상이나 보배로운 십자가나 앞서 언급한 그 밖의 것들에 대한 바른 경배를 논박한 것이 아니다. 특히 거룩한 성상이 사도들의 때로부터 교회에 있었고 신자들에 의하여 경배되어 왔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이것은 매우 많은 이들에 의하여 기록되고 선포되었으니, 제칠 세계 성 시노드가 그들과 함께, 또 그들의 뒤를 이어 모든 이단의 뻔뻔함을 부끄럽게 한다. 거룩한 성상과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경배하는 것이 합당함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시노드는] 성상 [자체]를 라트리아[흠숭]로 경배하는 자들과, 정통 신자들이 성상을 경배함으로 우상숭배를 범한다고 말하는 자들을 다 저주하며 출교 아래 둔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들과 함께, 성도나 천사나 성상이나 십자가나 성도의 유물이나 거룩한 그릇이나 복음서나,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바다에 있는 그 밖의 어떤 것을 라트리아[흠숭]로 경배하는 자들을 저주하며, 라트리아의 경배는 오직 삼위로 계신 한 분 하나님께 돌린다. 또 우리는 성상 경배가 성상의 라트리아[여기서는 예배로서의 흠숭]라고 말하며 성상을 경배하지 않고 교회가 전한 대로 십자가와 성도들을 존귀히 여기지 않는 자들을 저주한다. 이제 우리는 밝힌 방식대로 성도들과 거룩한 성상을 경배한다. 우리는 우리 성전을 꾸미는 데에 그것들을 그려 두니, 그것들이 배우지 못한 자들의 책이 되게 하고, 그들이 성도들의 덕을 본받게 하며, 기억하여 사랑을 더하고, 주를 주권자요 아버지로, 또한 성도들을 그분의 종이요 우리의 돕는 자요 중보자로 항상 부르며 깨어 있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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