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f the Holy Scripture being the True Word of God
우리는 양편 성경 곧 거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정경적 성경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며,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한 권위를 가진다고 믿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조상들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말씀하셨고, 지금도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경 안에 그리스도의 보편적 교회는 구원하는 믿음에 속한 것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삶을 이루는 데 속한 모든 것이 온전히 밝혀져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명백히 명하셨다(신 4:2; 계 22:18,19).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에서 참 지혜와 경건, 교회의 개혁과 다스림, 또한 모든 경건의 의무에 대한 교훈을, 요컨대 교리의 확증과 모든 오류의 논박과 모든 권면을 취해야 한다고 판단하니, 사도의 말과 같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 에 유익하니라’(딤후 3:16,17). 또 사도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네게 알게 하려 함이라’(딤전 3:14,15) 하였다. 또 동일한 사도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으니 진실로 그러하도다’(살전 2:13) 하였다. 주께서 친히 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하셨으므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라’(눅 10:16; 요 13:20)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이 하나님의 말씀이 합법적으로 부르심 받은 설교자들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전파될 때에,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신실한 자들에게 받아들여진다고 믿으며, 다른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지어내거나 하늘에서 기대해서는 안 되고, 이제는 전파되는 말씀 자체를 주목해야지 전파하는 사역자를 주목할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 사역자가 악하고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참되고 선하게 남는다. 또한 우리는 참된 신앙의 가르침이 성령의 내적 조명에 달려 있다는 이유로, 또는 ‘사람마다 다시는 그 이웃을 가르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다 나를 앎이라’(렘 31:34) 하고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외적 전파를 무익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비록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고’(요 6:44) 성령으로 내적으로 비춤을 받아야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의 말씀이 외적으로도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의심 없이 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자기 성령으로나 천사의 사역으로 베드로의 사역 없이도 사도행전의 고넬료를 가르치실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를 베드로에게 보내셨으니, 천사가 베드로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가 네게 마땅히 할 것을 말하리라’(행 10:6) 하였다.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내적으로 비추시는 바로 그분이 명령의 방식으로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 사람 가운데 자색 옷감 장수 루디아에게 말씀을 외적으로 전파하였으나, 주께서는 내적으로 그 여자의 마음을 여셨다(행 16:14). 또 동일한 바울이 로마서 10장에 아름답게 배치된 점층법을 따라 마침내 결론짓기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4-17) 하였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이 외적 사역 없이도 자기가 원하시는 자를 원하시는 때에 비추실 수 있음을 아니, 이는 그분의 권능에 속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과 본보기로 우리에게 주신, 사람을 가르치시는 통상적인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성령에게서 나온 것임을 부인하거나, 성경의 일부를 받지 않거나 가필하고 변조한 아르테몬과 마니교도와 발렌티누스파와 케르돈과 마르키온파의 모든 이단을 미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의 어떤 책들이 옛 저자들에게 외경이라 불리고 다른 이들에게 교회용이라 불렸음을 부인하지 않으니, 곧 그들이 교회에서 읽히기를 원하였으나 그것들로 믿음의 권위를 입증하거나 확증하려 하지 않은 책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그의 『신국론』 제18권 38장에서 ‘열왕기에 어떤 선지자들의 이름과 책이 열거되어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러나 그것들은 정경에 들지 않으며’ ‘우리가 가진 책들이 경건에 충분하다’고 덧붙인다.
2 Of Interpreting the Holy Scriptures; and of Fathers, Councils, and Traditions
사도 베드로는 ‘성경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벧후 1:20)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종류의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로마 교회가 성경의 진정하고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부르는 그 의미—로마 교회의 옹호자들이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려는 그것—를 인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는 오직 성경 자체에서 취한 해석, 곧 성경이 기록된 언어의 정신에서 취하고, 정황을 따라 헤아리며,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은, 또 더 많고 더 분명한 본문들의 비례에 맞추어 해설된, 믿음과 사랑의 규범에 부합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에 뚜렷이 이바지하는 해석만을 정통하고 진정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헬라와 라틴의 거룩한 교부들의 해석을 멸시하지 않고, 그들의 논의와 논고가 성경과 일치하는 한 배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과 다르거나 전혀 반대되는 것을 진술한 것이 발견될 때에는 겸손히 그들에게서 견해를 달리한다. 또한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잘못을 행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으니, 이는 그들 모두가 한목소리로 자기들의 글이 정경적 성경과 동등하게 취급되기를 원치 않고, 도리어 그것들이 성경과 일치하거나 불일치하는 한도에서만 받아들이라고 우리에게 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차원에서 우리는 공의회의 결정과 법규도 둔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나 믿음의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 교부들의 단순한 증언이나 공의회의 결정에 짓눌리도록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며, 하물며 받아들여진 관습이나 한 견해를 가진 다수의 사람이나 오랜 시간의 관례에 짓눌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교나 믿음의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 우리는,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피해야 할지를 성경으로 선언하시는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어떤 재판관도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끌어 낸 영적인 사람들의 판단에만 안식한다. 분명히 예레미야와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거슬러 모인 제사장들의 모임을 격렬히 정죄하였고, 자기들의 고안 가운데 행하여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조상들의 말을 듣거나 그들의 길을 따르지 말라고 부지런히 우리에게 미리 경고하였다(겔 20:18). 우리는 또한 인간의 전통을 배척하니, 그것들이 비록 마치 신적이고 사도적인 것처럼, 사도들의 생생한 음성으로, 또 사도적 사람들의 손으로, 그들의 자리를 이은 감독들을 통하여 교회에 전해진 것처럼 그럴듯한 이름으로 내세워질지라도, 성경과 비교하면 그것들과 어긋나며, 그 어긋남으로 자기들이 결코 사도적이 아님을 드러낸다. 사도들이 교리에서 서로 어긋나지 않았듯이, 사도들의 제자들도 사도들에 반하는 것을 내세우지 않았다. 도리어 사도들이 생생한 음성으로 자기 글에 반하는 것을 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모독일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모든 교회에서 같은 것을 가르쳤다고 명백히 단언한다(고전 4:17). 또 그가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읽거나 아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후 1:13) 하였다.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자기와 자기 제자들 곧 사도적 사람들이 같은 길로 행하고 같은 성령으로 함께 모든 것을 행하였다고 증언한다(고후 12:18). 유대인들도 옛적에 장로들의 전통을 가졌으나, 주께서는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방해하며 그러한 자들이 헛되이 하나님을 예배함을 보이사 그 전통을 엄히 논박하셨다(마 15:8,9; 막 7:6,7).
3 Of God; the Unity and the Trinity
우리는 믿고 가르치노니, 하나님은 본질 곧 본성에 있어 하나이시며, 스스로 계시고, 자기 안에서 온전히 자족하시며, 보이지 않으시고, 몸이 없으시며,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시요, 최고선이시며, 살아 계셔서 만물을 살리고 보존하시고, 전능하시며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인자하시며 자비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참되시다. 그리고 우리는 신들이 많다는 것을 미워하니, 이는 ‘주 너의 하나님은 한 분이신 여호와시니라’(신 6:4),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출 20:2,3),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 …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5,21),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명백히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믿고 가르치노니, 이 무한하시고 한 분이시며 나뉠 수 없는 동일하신 하나님이 위격에 있어 분리될 수 없고 혼동 없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구별되신다. 곧 성부께서 영원 전부터 성자를 낳으셨으니 성자는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셨고, 성령은 그 둘에게서 나오시되 영원 전부터 그러하시며 그 둘과 함께 예배받으셔야 한다. 그리하여 세 하나님이 아니라 세 위격이 계시니, 동일 본체시요 함께 영원하시며 함께 동등하시되, 그 위격에 관하여는 구별되시고, 순서에 있어 하나가 다른 하나에 앞서나 아무런 불평등도 없으시다. 그 본성 곧 본질에 관하여는 그들이 너무도 결합되어 있어 한 하나님이실 뿐이며, 신적 본질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공통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위격들의 분명한 구별을 전해 주었으니, 천사가 여러 말 중에 복되신 동정녀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하였다. 또 그리스도의 세례 때에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마 3:17) 하는 음성이 들렸다. 성령도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다(요 1:32). 그리고 주께서 친히 세례를 베풀라 명하실 때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명하셨다(마 28:19). 마찬가지로 복음의 다른 곳에서 그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시리라’(요 14:26) 하셨다. 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시리라’(요 15:26) 하셨다. 요컨대, 우리는 사도신경을 받아들이니, 그것이 우리에게 참 믿음을 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거룩하고 경배받으실 삼위일체를 모독하는 유대인과 마호메트교도와 모든 자를 정죄한다. 또한 우리는 성자와 성령이 이름으로만 하나님이라 가르치는 모든 이단과 이단자, 또 삼위일체 안에 무언가 창조된 것이 있어 다른 것을 섬기고 봉사한다거나, 끝으로 그 안에 무언가 불평등하거나 더 크거나 작거나 육체적이거나 육체적으로 형성된 것이, 또는 태도나 의지에 있어 서로 다른 것이, 혼동되었거나 홀로 떨어진 것이 있다고—마치 성자와 성령이 한 분 하나님 아버지의 정서와 속성인 것처럼—가르치는 자들을 정죄하니, 곧 단일신론자, 노바티아누스파, 프락세아스, 성부수난설자, 사벨리우스, 사모사타의 바울, 아에티우스, 마케도니우스, 신인동형론자, 아리우스와 그와 같은 자들이 그렇게 생각하였다.
4 Of Idols; or of Images of God, of Christ, and of Saints
또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요 헤아릴 수 없는 본질이시므로, 어떤 기술이나 형상으로도 표현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성경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들을 순전한 거짓이라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의 우상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형상들도 배척한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본성을 취하셨을지라도, 조각가와 화가에게 본을 제시하려고 그것을 취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기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하셨으나(마 5:17), 형상은 율법과 선지자에서 금지되어 있다(신 4:15; 사 44:9). 그분은 자기 육신의 임재가 교회에 유익하지 않으리라고 하셨으나, 자기 영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6:7; 고후 5:5). 그렇다면 누가 그분 육신의 그림자나 그림이 경건한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유익하다고 믿겠는가? 그분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거니와(고전 3: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6)? 또 하늘에 있는 복된 영들과 성도들이 여기 살 때에 자기들에게 행해지는 모든 예배를 미워하고(행 3:12; 14:15; 계 19:10; 22:9) 형상을 반대하여 말하였거늘,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천사들이 사람들이 무릎 꿇고 머리를 벗으며 그러한 존경을 바치는 자기들의 형상을 기뻐한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이 신앙에 있어 가르침을 받고 하늘의 일들과 자기 구원을 기억하도록, 주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지(막 16:15) 그림으로 평신도를 가르치라 하지 않으셨고, 또 성례를 제정하셨으나 어디서도 형상을 정하지 않으셨다. 더욱이 우리가 눈을 어느 쪽으로 돌리든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살아 있고 참된 피조물들을 볼 수 있으니, 그것들을 마땅히 주목하면 모든 사람의 형상이나 헛되고 움직이지 못하며 썩고 죽은 모든 그림보다 훨씬 더 효과 있게 보는 자를 감동시킨다. 선지자가 그것들에 관하여 참되이 말하기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시 115:5)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저술가 락탄티우스의 판단을 옳게 여기니, 그가 말하기를 ‘의심 없이 그림이 있는 곳에는 종교가 없다’ 하였다. 또 우리는 복된 감독 에피파니우스가 잘 행하였다고 단언하니, 그가 교회 문에서 그리스도나 어떤 성도의 그림이 그려진 휘장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잘라 치웠으니, 이는 그가 성경의 권위에 반하여 사람의 그림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후로 종교에 반하는 그러한 휘장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걸지 말고, 도리어 그리스도의 교회와 모든 신실한 백성에게 합당치 않은 그러한 걸림돌을 치우라고 명하였다. 더욱이 우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말을 옳게 여기니, ‘사람의 작품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에게 종교가 되지 않게 하라. 그러한 것을 만드는 일꾼들 자신이 더 나은데, 우리가 그들조차 예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참된 종교에 관하여』 55장) 하였다.
5 Of the Adoration, Worship, and Invocation of God through the only Mediator Jesus Christ
우리는 오직 참되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예배하기를 가르친다. 우리는 이 영예를 누구에게도 돌리지 않으니, 주의 명령을 따름이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예배하라’ 또는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 참으로 모든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이 오직 참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 신들을 경배하고 예배할 때마다 그들을 간절히 책망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예배하라 가르치신 대로, 곧 ‘영과 진리로’(요 4:24)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치니, 어떤 미신으로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따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 이는 그분이 어느 때라도 우리에게 ‘누가 이것을 너희 손에서 요구하였느냐’(사 1:12; 렘 6:20) 하지 않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도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행 17:25) 하였다. 우리는 삶의 모든 위험과 재난 가운데 오직 그분만을 부르되, 유일한 중보자요 우리의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부른다. 우리에게 명백히 명령되었으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더욱이 주께서 가장 큰 약속을 하셨으니 ‘너희가 내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그가 너희에게 주시리라’(요 16:23) 하셨고,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셨다. 또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롬 10:14) 기록되었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으므로, 우리는 오직 그분만을, 그것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른다. 사도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하였고, 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나 다른 신들을 경배하거나 예배하거나 그들에게 기도하지 않으며,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의 우리의 중재자나 중보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중보자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충분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 아들께 마땅한 영예를 다른 이들에게 돌리지 않으니, 이는 그분이 명백히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하셨고, 베드로가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니 곧 그리스도의 이름이라’(행 4:12) 하였기 때문이다. 의심 없이 믿음으로 그분 안에 안식하는 자들은 그리스도 밖에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성도들을 멸시하거나 그들을 낮게 여기지 않으니,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지체요 하나님의 친구요 육신과 세상을 영광스럽게 이긴 자들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형제로 사랑하고 또한 존경하되, 어떤 예배로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존경할 만한 생각과 그들에 대한 정당한 칭찬으로 한다. 우리는 또한 성도들을 본받으니, 가장 간절한 정과 기도로 그들의 믿음과 덕을 따르는 자가 되기를, 또 그들과 함께 영원한 구원에 참여하기를, 그들과 함께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를, 그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기를 사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 우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책 『참된 종교에 관하여』에서 한 말을 옳게 여기니, ‘떠난 사람들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종교도 되지 않게 하라. 그들이 거룩히 살았다면 그러한 영예를 구하는 자로 여겨질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비춤으로 우리가 상에 관하여 함께 종 된 자임을 그들이 기뻐하는 그분을 우리가 예배하기를 그들이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받기 위하여 존경받을 것이요 종교를 위하여 예배받을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성도들의 유물이 경배받고 예배받아야 한다고는 훨씬 더 믿지 않는다. 저 옛 거룩한 사람들은,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 후에 그 몸을 정직하게 땅에 맡겼다면 자기 죽은 자들을 충분히 존경한 것으로 여겼고, 자기 조상들의 가장 고귀한 유물은 그들의 덕과 교리와 믿음이라 생각하였으니, 그것을 죽은 자에 대한 칭송으로 기리는 동시에 자기들이 땅에 사는 동안 그것을 그대로 나타내기를 힘썼다. 저 옛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명령된 대로 오직 한 분 여호와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방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출 23:13; 수 23:7)이 금지된 것같이, 우리는 비록 요청을 받을지라도 성도들로 맹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있어 하늘에 있는 성도들에게 지나친 영예를 돌리는 그 교리를 배척한다.
6 Of the Providence of God
우리는 믿노니,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 안의 만물이 이 지혜롭고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떠받쳐지고 다스려진다. 다윗이 증언하여 말하기를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 113:4-6) 하였다. 또 ‘주께서 나의 모든 길을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3,4) 하였다. 바울도 증언하여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하고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하였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책 『그리스도의 싸움에 관하여』 8장에서 참되이, 또 성경을 따라 말하기를 ‘주께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그분은 사람이 가장 천하게 여기는 무엇이든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능으로 다스려짐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려 하셨다. 우리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 말한 진리께서, 또한 공중의 새가 그분께 먹임을 받고 들의 백합화가 그분께 입혀진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하나님이 하늘의 축들에만 매여 계시고 우리나 우리 일을 보지도 돌아보지도 않으신다고 모독적으로 단언하는 모든 자를 정죄한다. 군왕 같은 선지자 다윗도 이 사람들을 정죄하여 말하기를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 그들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3,7-9) 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일하는 수단들을 마치 무익한 것처럼 정죄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에게 권하여진 한 우리가 그것들에 힘써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이 하나님의 섭리로 다스려진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무익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다스림에 맡기거나 내버려 두면 충분하고, 이후로 어떤 일에도 조심하여 처신하거나 행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의 경솔한 말을 싫어한다. 바울은 ‘네가 로마에서도 나를 증언하여야 하리라’(행 23:11) 하시고 또 ‘너희 중 한 사람의 생명도 잃지 않고 너희 머리에서 머리카락 하나도 떨어지지 아니하리라’(행 27:22,34) 약속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자기가 항해함을 고백하였으나, 그럼에도 사공들이 피할 길을 찾아 꾀할 때에 그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27:31) 하였다. 모든 것에 그 끝을 정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가 그 끝에 이를 시작과 수단도 정하셨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은 일을 눈먼 운수와 불확실한 우연에 돌리나, 성 야고보는 우리로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사고팔겠다’ 하지 말고 도리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약 4:13,15) 말하라 하였다. 또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기를 ‘헛된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의도적으로 행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것이, 다만 그분의 명령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분의 말씀을 이룰 뿐이다’ 하였다. 또 그가 시편 148편 해설에서 ‘사울이 자기 아버지의 나귀들을 찾다가 선지자 사무엘을 만난 것이 우연히 된 듯 보였으나’ 주께서 이미 선지자에게 ‘내일 내가 베냐민 지파의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삼상 9:16) 하셨다고 하였다.
7 Of the Creation of all Things; of Angels, the Devil, and Man
이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자기 영원한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또한 자기 영원한 영으로 그것을 보존하신다. 다윗이 증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하였고, 성경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이 심히 좋았으며’(창 1:31) 사람의 사용과 유익을 위하여 지어졌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시작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의 본체와 악의 본체라는 두 본체와 본성을, 또 서로 반대되는 두 시작과 두 신 곧 선한 신과 악한 신을 악하게 상상한 마니교도와 마르키온파를 미워한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천사와 사람이 가장 탁월하다. 천사에 관하여 성경이 말하기를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며 불꽃을 자기 사역자로 삼으시며’(시 104:4) 하였고, 또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 하였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마귀에 관하여 증언하여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르치노니, 어떤 천사들은 순종에 머물러 하나님과 사람의 신실한 섬김에 임명되었고, 다른 천사들은 자기 뜻으로 떨어져 멸망으로 곤두박질하여 모든 선과 모든 신실한 자의 원수가 되었다. 이제 사람에 관하여 성령이 말하기를, 태초에 그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고’(창 1:27), 하나님께서 그를 낙원에 두시고 모든 것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다 하니, 다윗이 시편 8편에서 이를 가장 고상하게 진술한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내를 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우리는 또한 말하노니, 사람은 한 위격 안에 둘, 곧 서로 다른 두 본체로 이루어지니, 죽지 않는 영혼(몸에서 분리되어도 잠들지도 죽지도 않는 것)과 죽을 몸이라, 그러나 그 몸은 마지막 심판 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킴을 받아, 이후로 온 사람이 영원히 생명이나 죽음에 머물게 된다. 우리는 영혼의 불멸을 조롱하거나 교묘한 논쟁으로 의심하게 하는 모든 자, 또는 영혼이 잠든다거나 영혼이 하나님의 일부라고 말하는 모든 자를 정죄한다. 요컨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적 교회에서 성경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것과 다르게 천사와 마귀와 사람의 창조에 관하여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모든 견해를 정죄한다.
8 Of Man’s Fall; Sin, and the Cause of Sin
사람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 가운데 선하고 올바르게 창조하셨다. 그러나 뱀의 충동과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그 선함과 올바름에서 떨어져 죄와 죽음과 여러 재앙에 굴복하게 되었다. 그가 타락으로 된 그러한 자같이, 그의 모든 후손도 그러하여 죄와 죽음과 여러 재앙에 굴복한다. 그리고 우리는 죄를, 우리의 첫 조상에게서 우리 모두에게 물려지거나 퍼진 사람의 그 본성적 부패로 본다. 그것으로 우리는 악한 정욕에 빠지고 하나님에게서 온전히 돌아서서 모든 악으로 기울며, 온갖 사악함과 불신과 하나님에 대한 멸시와 미움으로 가득하여, 스스로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으니, 참으로 어떤 선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마 12:34,35). 더욱이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의 법을 거슬러 범한 악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악한 나무에 합당한 부패한 열매를 맺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땅한 죗값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 정당한 형벌의 위험에 처하니, 만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시 데려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우리 모두가 자기 죄로 인하여 한 번 당할 육체적 죽음뿐 아니라, 우리의 부패와 죄에 마땅한 영원한 형벌로도 이해한다. 사도가 말하기를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고 본질상 다른 이들과 같이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죄로 죽었을 때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1-5) 하였다.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죄가 모든 사람 안에 있음을 인정하며, 거기서 솟아나는 다른 모든 죄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치명적이든 가벼운 것이든, 또는 결코 사함받지 못하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 불리는 것이든—죄라 불리고 또 실제로 죄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또한 죄들이 동일한 부패와 불신의 샘에서 솟아날지라도 동등하지 않고(요일 5:16,17), 어떤 죄들이 다른 죄들보다 더 무겁다고 고백한다(막 3:28,29).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복음의 말씀을 멸시하는 도시보다 ‘소돔이 더 견디기 쉬우리라’(마 10:15)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반하는 것을 가르친 모든 자, 특히 펠라기우스와 모든 펠라기우스주의자, 또 스토아주의자들과 함께 모든 죄를 동등하다 여기는 요비니아누스파를 정죄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온전히 일치하니, 그는 자기 주장을 성경에서 내어 옹호하였다. 더욱이 우리는 (이레나이우스도 반박하여 글을 쓴) 플로리누스와 블라스투스, 또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드는 모든 자를 정죄하니, 이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시 5:4-6) 명백히 기록되었고, 또 ‘마귀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하였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 자신 안에 죄와 부패가 충분히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거나 더 큰 분량의 사악함을 부어 넣으실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하시고(출 7:13), 눈멀게 하시며(요 12:40), 우리를 상실한 마음에 내어 주신다(롬 1:28)고 말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재판관이요 보응자로서 의로운 심판으로 그렇게 하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악을 행하신다고 말하거나 그렇게 보일 때마다, 그것은 사람이 악을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이 행해지도록 허용하시고 막지 않으심을 뜻하니, 그것도 원하시면 막으실 수 있는 분의 의로운 심판으로 그러하다. 또는 그분이 요셉 형제들의 죄에서 하시듯 사람들의 악을 선하게 사용하시기 때문이요, 또는 그분이 친히 죄들을 다스리사 그것들이 합당한 것보다 더 격렬히 터지고 날뛰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편람』에서 말하기를 ‘놀랍고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분의 뜻에 반하여 행해지는 것이 그분의 뜻 밖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니, 이는 그분이 그것이 행해지도록 허용하지 않으시면 그것이 행해질 수 없기 때문이요, 그럼에도 그분은 마지못해 그것이 행해지도록 허용하시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이시니 전능하셔서 악에서 선을 만들어 내실 수 없다면 어떤 악도 행해지도록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여기까지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하기를 원하셨는가, 또는 그를 타락하도록 강요하셨는가, 또는 왜 그 타락을 막지 않으셨는가 하는 등의 다른 질문들은, 우리가 호기심 어린 질문으로 여긴다(다만 이단자들의 완고함이나 그 밖에 끈질긴 사람들의 강요로, 교회의 경건한 박사들이 자주 했듯이 우리도 이 점들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밝혀야 하는 경우는 예외이다). 우리는 주께서 사람이 금지된 열매를 먹는 것을 금하시고 그 범죄를 벌하셨음을 알며, 또 행해진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권능에 관하여는 악한 것이 아니라 사탄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우리 의지에 관하여 악한 것임을 안다.
9 Of Free-Will, and of Man’s Power and Ability
우리는 늘 교회 안에서 많은 다툼의 원인이 되어 온 이 문제에 관하여, 사람의 세 가지 상태 곧 신분을 고려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첫째, 사람이 타락 전에 어떠하였는가—곧 올바르고 자유로워, 선함에 머물 수도 악으로 기울 수도 있었으나, 그는 악으로 기울어 자기 자신과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 얽어 넣었으니, 앞서 보인 바와 같다. 둘째, 사람이 타락 후에 어떠한가를 고려해야 한다. 그의 지각은 참으로 그에게서 제거되지 않았고, 그의 의지도 박탈되어 그가 온전히 돌이나 나무토막으로 바뀐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들이 사람 안에서 너무도 변하여, 이제는 타락 전에 할 수 있던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지각이 어두워졌고, 전에 자유롭던 그의 의지가 이제 종 된 의지가 되었으니, 이는 그것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죄를 섬기기 때문이다—그것은 ‘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하려는 의지’라 불린다. 그러므로 악 곧 죄에 관하여는, 사람이 하나님이나 마귀에게 강요받아서가 아니라 자기 뜻으로 악을 행하니, 이런 점에서 그는 가장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가장 악한 행위와 계획이 자주 하나님께 막혀 그 끝에 이르지 못함을 볼 때에, 이것이 악에 있어서의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권능으로 사람이 달리 자유로이 작정한 것을 막으시는 것이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기로 자유로이 작정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은밀한 경륜 가운데 달리 좋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함과 덕에 관하여는, 사람의 지각이 스스로 하늘의 일들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한다. 복음과 사도의 성경은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 각 사람에게 거듭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첫 출생은 구원에 아무 유익이 없다. 바울이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 2:14) 하였고,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넉넉함’을 부인한다(고후 3:5). 이제 마음 곧 지각이 의지의 인도자임이 분명하니, 그 인도자가 눈멀었으므로 의지가 얼마나 멀리 이를 수 있는지는 보기 쉽다. 그러므로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선을 향한 자유의지도, 선한 것을 행할 힘도 없다. 주께서 복음에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하셨고, 사도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하였다. 더욱이 타락 후에도 사람 안에 땅의 일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각이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 자비로 그에게 지혜를 남기셨으니, 비록 타락 전에 그 안에 있던 것과는 크게 다를지라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지혜를 단장하라 명하시고, 그와 함께 은사와 또 그 자라남을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 없이는 모든 기예에서 거의 진보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성경은 의심 없이 모든 기예를 하나님께 돌리며, 이방인들조차 기예의 시작을 그 저자로서 신들에게 돌린다. 끝으로, 거듭난 자들이 자유의지를 가지는지, 또 얼마나 가지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거듭남에 있어 지각은 성령으로 비춤을 받아 하나님의 비밀과 뜻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의지 자체도 성령으로 변화될 뿐 아니라 능력을 갖추어, 자기 뜻으로 선을 원하고 행할 수 있게 된다(롬 8:4).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부인하고 율법의 속박을 들이게 될 것이다. 게다가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전하니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리라’(렘 31:33; 겔 36:27). 주께서도 복음에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하셨다. 바울도 빌립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하였고, 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6절) 하였으며, 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첫째, 거듭난 자들이 선한 것을 택하고 행함에 있어 수동적으로만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일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행하는 것을 친히 행하도록 하나님께 움직임받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참되이 그 말을 인용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의 도우시는 이라 일컬어지거니와, 무언가를 행하는 자가 아니면 아무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하였다. 마니교도는 사람에게서 모든 행위를 빼앗아 그를 돌이나 토막같이 만들었다. 둘째, 거듭난 자에게 연약함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죄가 우리 안에 거하고 거듭난 자 안에서 육신이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성령을 거슬러 싸우므로, 그들은 자기가 작정한 것을 모든 점에서 곧바로 이행하지 못한다. 이것들은 사도가 확증한다(롬 7:13-25; 갈 5:17). 그러므로 모든 자유의지는,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아담의 잔재와 우리에게 그토록 가까이 붙은 인간의 부패로 인하여 약하다. 그동안 육신의 힘과 옛사람의 잔재가 성령의 사역을 온전히 끌 만큼 큰 힘은 아니므로, 신실한 자들은 자유롭다 불리되, 그들이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고 자기 자유의지를 조금도 자랑하지 않는 식으로 그러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도에게서 그토록 자주 되풀이하는 그 말을 신실한 자들이 늘 마음에 새겨야 하니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여기에 더하여, 우리가 작정한 것이 곧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일들의 결과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바울이 자기 여행이 형통하기를 주께 간구하였다(롬 1:10).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도 자유의지는 매우 약하다. 그러나 외적인 일들에 있어서는 거듭난 자나 거듭나지 못한 자나 자유의지를 가진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으니, 사람은 (자기가 못하지 않은)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어떤 것은 원하고 다른 것은 원치 않는 이 본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말하거나 잠잠할 수 있고, 자기 집에서 나가거나 안에 머물 수 있다. 비록 여기서도 하나님의 권능을 늘 주목해야 하니, 그분이 발람으로 자기가 원하는 만큼 가지 못하게 하셨고(민 24:13), 성전에서 나온 스가랴가 자기가 하려던 대로 말할 수 없게 하셨다(눅 1:22). 이 문제에 있어 우리는, 선하던 사람에게 악의 시작이 그 자유의지에서 왔음을 부인하는 마니교도를 정죄한다. 또 악한 사람이 선한 명령을 이행할 만큼 충분한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단언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를 정죄한다. 이 둘은 성경으로 논박되니, 전자에게는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전 7:29) 하고, 후자에게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한다.
10 Of the Predestination of God and the Election of the Saints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값없이, 오직 자기 은혜로, 사람에 대한 아무 고려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실 성도들을 예정하시거나 택하셨으니, 사도의 말과 같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 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딤후 1:9,10). 그러므로 우리의 어떤 공로로 인함은 아니나 수단 없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 이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임 받은 자들이 곧 택함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버림받았으니, 사도의 말과 같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 13:5).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한 목적에 이르도록 택함을 받았으니, 그 목적을 사도가 선언하여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하였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께서 누가 자기 백성인지 아시고 때때로 택자의 적은 수가 언급될지라도,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잘 소망하고 누구도 함부로 유기된 자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 내 하나님께 감사하노니’(이제 그는 빌립보의 온 교회에 대하여 말한다) ‘너희가 복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빌 1:3-7) 하였다. 또 주께서 구원받을 자가 적으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에, 적게 또는 많이 구원받거나 정죄받으리라고 대답하여 말씀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각 사람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고 권하셨다. 이는 마치 ‘이런 문제를 함부로 캐묻는 것은 너희가 할 일이 아니요, 도리어 좁은 길로 하늘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자들이 하는 사악한 말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들은 ‘택함받은 자가 적은데 내가 그 적은 수에 드는지 알지 못하니 나의 본성이 원하는 것을 빼앗지 않겠다’고 한다. 또 다른 자들은 ‘내가 하나님께 예정되고 택함받았으면, 내가 어느 때 무엇을 하든 이미 나에게 정해진 구원을 아무것도 막을 수 없고, 만일 내가 유기된 자의 수에 들면 어떤 믿음이나 회개도 나를 돕지 못하리니, 하나님의 작정은 변할 수 없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모든 가르침과 권면이 무익하다’고 한다. 이제 이 사람들을 거슬러 사도의 말이 크게 유효하니 ‘하나님의 종은 마땅히 … 가르치기를 잘하며 …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4-26). 게다가 아우구스티누스도, 값없는 택하심과 예정의 은혜와, 또한 유익한 권면과 교리를 함께 전파해야 한다고 가르친다(『견인의 선에 관하여』 14장).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라 다른 데서 자기들이 영원 전부터 택함받았는지, 또 하나님께서 모든 시작 전에 자기들에 관하여 무엇을 작정하셨는지 구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사람들은 전파되는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네가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네가 택함받았음을 의심 없이 확신할 수 있다. 성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기 예정의 영원한 판결을 계시하셨으니, 우리가 방금 사도에게서, 곧 디모데후서 1장 9,10절에서 보인 바와 같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이것을 가르치고 잘 헤아려야 하니, 곧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성부의 그토록 큰 사랑이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자기 복음에서 날마다 우리에게 전파하시는 것을 들어야 한다. 그분이 어떻게 부르며 말씀하시는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또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거울로 삼아, 그분 안에서 우리의 예정을 바라보자.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통하고, 그분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가 참 믿음으로 그분의 것이 되면,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를 가질 것이다. 예정에 관한 시험—이보다 더 위험한 것이 없는—가운데 이것이 우리를 위로하게 하자. 곧 하나님의 약속들이 신실한 자들에게 일반적이라는 것이니,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눅 11:9,10) 하셨다.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온 교회와 함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 기도하며, 세례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 받고, 그분의 교회에서 자주 그분의 살과 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양육받는다. 이로써 강건해져, 빌립보서 2장 12절의 바울의 그 교훈을 따라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을 받는다.
11 Of Jesus Christ, being True God and Man, and the only Saviour of the World
더욱이 우리는 믿고 가르치노니,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성부께 세상의 구주가 되시기로 예정되고 미리 정해지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셨을 때에만, 또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조금 전에 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영원 전부터, 그것도 성부에게서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셨음을 믿는다. 이사야가 ‘누가 그 세대를 말하리요’(사 53:8) 하였고, 미가가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하였으며, 요한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자는 그 신성에 관하여 성부와 함께 동등하시고 동일 본체시니, 이름으로만이나 양자됨이나 특별한 은총으로가 아니라 본체와 본성에 있어 참 하나님이시다(빌 2:6). 사도가 다른 곳에서 말한 대로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바울도 ‘그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2,3) 하였다. 마찬가지로 복음에서 주께서 친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하셨다. 또 복음의 다른 곳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거슬러 발설된 아리우스와 모든 아리우스파의 모독적 교리를 미워하며, 특히 사탄이 그들을 통하여 마치 지옥에서 끌어낸 듯 가장 담대하고 불경하게 하나님의 아들을 거슬러 온 세상에 퍼뜨린 스페인 사람 미카엘 세르베투스와 그 동조자들의 모독을 미워한다. 우리는 또한 가르치고 믿노니,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씨에서 사람의 아들이 되셨으니(마 1:25), 에비온이 단언한 것처럼 사람의 방편으로가 아니라, 성령으로 가장 순결하게 잉태되시고 늘 동정녀이신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니, 복음의 역사가 선언하는 바와 같다. 바울이 ‘그가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하였고,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니’(요일 4:3)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육신은 발렌티누스와 마르키온이 꿈꾼 것처럼 겉모양만의 육신도, 하늘에서 가져온 육신도 아니었다. 더욱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폴리나리스가 생각한 것처럼 감각과 이성 없는 영혼을 가지신 것도, 에우노미우스가 가르친 것처럼 영혼 없는 육신을 가지신 것도 아니라, 그 이성을 지닌 영혼과 그 감각을 지닌 육신을 가지셨으니, 그 감각으로 그분은 고난의 때에 참 슬픔을 느끼셨다. 그분 자신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 하시고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요 12:27) 하실 때에 증언하신 바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분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이 둘이 너무도 결합되고 연합되어 삼켜지거나 혼동되거나 서로 섞이지 않고, 도리어 한 위격 안에 연합되고 결합되되(각 본성의 고유성이 보존되어 그대로 남아) 우리가 한 분 그리스도 우리 주를 예배하고 둘을 예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노니, 그분은 한 분 참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시며, 그 신성에 관하여는 성부와 동일 본체시요, 그 인성에 관하여는 우리와 동일 본체시며,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를 둘 그리스도로 만들어 위격의 연합을 해체하는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을 배격하는 것같이, 인성의 고유성을 뒤엎는 에우티케스와 단일의지론자와 단성론자의 광기를 미워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신성이 고난을 당하였다거나, 그리스도가 그 인성을 따라 여전히 세상에 있어 모든 곳에 계신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영화롭게 되신 후에 참 몸이기를 그쳤다거나, 그 몸이 신격화되되 그 몸과 영혼에 관한 고유성을 벗어 버리고 온전히 신적 본성이 되어 오직 하나의 본체이기 시작하였다고 생각하지도 가르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슈벵크펠트와 그 밖의 헛된 말장이들의 지각 없는 궤변과 얽히고 모호하며 일관성 없는 논쟁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며, 우리는 슈벵크펠트파가 아니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가 말한 대로(벧전 4:1) 우리를 위하여 육신으로 참으로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음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 주의 고난을 저주하는 야고보파와 모든 터키인의 가장 불경한 광기를 미워한다. 그러나 바울의 말대로 ‘영광의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부인하지는 않으니(고전 2:8), 우리는 성경에서 이끌어 내고 모든 고대가 처음 보기에 서로 어긋나 보이는 성경 구절들을 해설하고 조화시키는 데 사용한 속성 교류를 경외와 경건으로 받아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고 가르치노니, 그 동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참 육신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다른 육신으로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참 몸을 간직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제자들이 자기들 주 그리스도의 영을 본 줄로 생각할 때에, 그분이 못 자국과 상처가 있는 자기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이시며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하셨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동일한 육신으로 모든 보이는 하늘 위로 가장 높은 하늘 곧 하나님과 복된 영들의 처소에,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오르셨음을 믿는다. 그것이 영광과 위엄에 동등하게 참여함을 뜻할지라도, 또한 어떤 처소로도 받아들여지니, 주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가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리라’(요 14:2) 하셨다. 또 사도 베드로가 ‘하늘이 마땅히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그리스도를 받아 두리라’(행 3:21) 하였다. 그리고 그 동일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심판하러 다시 오시리니, 곧 세상에 사악함이 가장 크게 다스리고, 적그리스도가 참 신앙을 부패시켜 모든 것을 미신과 불경으로 채우며 불과 피로 교회를 가장 잔혹하게 황폐케 할 그때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고 그 오심으로 적그리스도를 멸하시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다(행 17:31). 죽은 자가 일어나고, 그날(모든 피조물에게 알려지지 않은 날)에 살아 있는 것으로 발견되는 자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변화되리니’(고전 15:51,52), 모든 신실한 자는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하여 끌어올려져(살전 4:17) 이후로 그분과 함께 하늘에 들어가 거기서 영원히 살 것이다(딤후 2:11).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 곧 경건치 않은 자들은 마귀들과 함께 지옥으로 내려가 거기서 영원히 타며 결코 고통에서 건짐받지 못할 것이다(마 25:41).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참된 부활을 부인하는 모든 자와, 영화롭게 된 몸에 관하여 그릇 생각하는 자들—제롬이 반박하여 글을 쓴 요안네스 히에로솔뤼미타누스가 그러하였듯이—을 정죄한다. 또 우리는 마귀들과 모든 악인이 마침내 구원받아 그 고통이 끝나리라고 생각한 자들을 정죄하니, 주께서 친히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4) 하고 단정적으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심판의 날 전에 땅 위에 황금시대가 있어 경건한 자들이 그 악한 원수들을 발 아래 밟고 세상 나라들을 차지하리라는 유대인의 꿈을 정죄하니, 복음의 진리(마 24·25장; 눅 21장)와 사도의 교리(데살로니가후서 2장; 디모데후서 3·4장)가 전혀 다르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 주께서는 자기 고난 곧 죽으심으로, 또 육신으로 오신 때부터 우리를 위하여 행하고 당하신 그 모든 것으로, 모든 신실한 자에게 자기 하늘 아버지를 화목하게 하시고(롬 5:10), 그들의 죄를 정결케 하시며(히 1:3), 죽음을 무너뜨리고 정죄와 지옥을 깨뜨리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생명과 불멸을 다시 가져오고 회복하셨다(롬 4:25; 고전 15:17; 딤후 1:10). 그분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부활이시며(요 11:25), 요컨대 모든 신실한 자의 충만이요 완전이며 구원이요 가장 풍성한 충족이시다. 사도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 하였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 2:10)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르치고 믿노니, 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는 인류, 참으로 온 세상의 유일하고 영원한 구주시니, 그분 안에서 율법 전에, 율법 아래에, 또 복음의 때에 모든 자가 구원받고, 세상 끝까지 장차 구원받을 모든 자도 그러하다. 주께서 친히 복음에서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요 10:1) ‘나는 양의 문이라’(7절) 하셨고, 또 같은 복음의 다른 곳에서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하셨다. 사도 베드로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노니, 우리 조상들이 그러하였듯이 우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을 것이다. 바울이 ‘우리 조상들이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3,4)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이 ‘그리스도는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라’(계 13:8) 한 것과,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증언한 것을 읽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유일한 구속자요 구주시며, 왕이요 대제사장이시며, 율법의 모든 그림자와 선지자들의 예언이 미리 보이고 약속한 참되고 고대하던 메시아, 저 거룩하고 복되신 분이심을 분명하고 공공연히 고백하고 전파한다. 또 하나님께서 그분을 우리에게 베풀어 보내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이를 찾을 것이 아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모두가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믿으며, 오직 그분께만 안식하고, 우리 생명의 다른 모든 도움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것뿐이다. 오직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서 구원을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요 그리스도를 자기에게 무가치하게 만드는 자이기 때문이다(갈 5:4). 많은 것을 몇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믿고 자유로운 말로 기꺼이 고백하노니, 성경에서 정의되고 신경들에, 또 니케아·콘스탄티노플·에베소·칼케돈에서 열린 저 처음 가장 탁월한 네 공의회의 결정에, 복되신 아타나시우스의 신경과 그와 같은 다른 모든 신경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비밀에 관하여 담긴 무엇이든 믿으며, 그것에 반하는 모든 것을 정죄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건전하고 보편적인 믿음을 온전하고 침해받지 않게 지키니, 앞서 말한 신경들에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며 믿음의 진실한 선언에 온전히 이바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12 Of the Law of God
우리는 가르치노니,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법에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으니, 곧 그분이 우리로 선하고 의로운 것을 행하고 악하고 불의한 것을 행하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다’(롬 7:12)고 고백하며, 이 법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되었거나’(롬 2:15)—그래서 본성의 법이라 불리거나—두 돌판에 새겨지고 모세의 책들에 더 자세히 해설되었다고 고백한다(출 20:1-17; 신 5:22). 분명함을 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도덕법—계명들 곧 모세의 책들에 해설된 두 돌판에 담긴 것—과, 의식법—의식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정하는 것—과, 정치적·가정적 일들을 다루는 시민법으로 나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온 뜻과, 이 삶의 모든 부분에 필요한 모든 교훈이 이 법에 온전히 전해졌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주께서 ‘이 법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신 4:2; 12:32)을 금하지 않으셨을 것이요, 우리에게 이 안에서 곧장 나아가 ‘좌로나 우로나 그 길에서 벗어나지 말라’(수 1:7)고 명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는 가르치노니, 이 법은 우리가 그것을 지킴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려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앎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죄와 정죄를 깨닫고, 그리하여 우리 힘을 절망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서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다. 사도가 분명히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롬 4:15) 하였고,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곧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1,22) 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24절). 우리 마지막 숨까지 우리 안에 남아 굳게 박혀 있는 우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일찍이 어떤 육체도, 오늘날에도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법을 만족시키고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가 다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요 우리를 위한 율법의 성취이시니,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를 제거하신 것같이(갈 3:13), 그 성취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달하시며 그분의 의와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은 이런 정도로 폐지되었으니, 곧 이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우리 안에 진노를 이루지 않는다.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롬 6:14).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모든 예표를 이루셨으니, 그러므로 실체가 오매 그림자가 그쳤고,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모든 진리와 충만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다고 율법을 업신여기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기억하노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하셨다. 우리는 율법에 덕과 악의 종류들이 우리에게 묘사되어 있음을 안다. 우리는 율법의 성경이 복음으로 해설되면 교회에 매우 유익하며, 따라서 그 읽기를 교회에서 추방해서는 안 됨을 안다. 비록 모세의 얼굴이 수건으로 가려졌을지라도, 사도는 ‘그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 3:14)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옛 이단자나 새 이단자가 하나님의 법을 거슬러 다시 가르친 모든 것을 정죄한다.
13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also of Promises; of the Spirit and of the Letter
복음은 참으로 율법과 대조된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고 저주를 선언하나, 복음은 은혜와 복을 전한다. 요한도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율법 전에 있던 자들과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 복음이 전혀 없지 않았음은 가장 확실하다. 그들에게 이러한 뛰어난 복음적 약속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49:10; cf. 22:18), ‘주께서 자기 형제 중에서 한 선지자를 일으키시리니’(신 18:15; 행 3:22; 7:37) 등이다. 그리고 우리는 조상들에게도 우리와 같이 두 종류의 약속이 계시되었음을 인정한다. 그중 어떤 것은 현재의 일시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니, 가나안 땅과 승리들에 관한 약속, 또 오늘날 우리의 일용할 양식에 관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때에도, 또 지금도 다른 약속들이 있으니, 하늘에 속한 영원한 것들에 관한 것 곧 하나님의 은총과 죄 사함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다. 이제 조상들은 외적이거나 땅에 속한 약속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약속도 가졌다.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이 구원에 대하여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벧전 1:10)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사도 바울도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하였다. 그러므로 조상들이 모든 복음이 전혀 없지 않았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우리 조상들이 선지자들의 글에 복음을 가져 그것으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렀을지라도, 복음은 본래 ‘기쁘고 복된 소식’이라 불린다. 그 안에서, 먼저 세례 요한으로, 그다음 그리스도 주 자신으로, 그 후에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세상의 시작부터 약속하신 것을 이제 이루셔서 자기 독생자를 보내시고, 참으로 우리에게 주시며, 그분 안에서 성부와의 화목과 죄 사함과 모든 충만과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이 세상에 전파된다. 그러므로 네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역사, 곧 이 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행해지고 이루어졌으며 그분이 무엇을 가르치고 행하셨는지, 또 그분을 믿는 자들이 모든 충만을 가짐을 선언하는 그 역사를, 내가 말하노니, 참으로 복음이라 부른다. 또한 사도들의 전파와 성경, 곧 그들이 성자가 성부께 우리에게 주어진 것과 그분 안에 생명과 구원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해설하는 그것도, 참으로 복음의 교리라 불린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그것이 진실하다면 그 합당한 이름을 잃지 않는다. 이 동일한 복음의 전파를 사도는 영이라, ‘영의 직분’(고후 3:8)이라 일컫는다. 이는 그것이 성령의 비춤으로 신실한 자들의 귀에, 참으로 그 마음에 믿음을 통하여 살아 역사하기 때문이다. 영과 대조되는 문자(letter)는 참으로 모든 외적인 것을 뜻하나, 더욱이 율법의 교리를 뜻하니, 그것은 영과 믿음이 없으면 진노를 이루고 참으로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에 죄를 일으킨다. 이런 까닭에 그것을 사도가 ‘죽음의 직분’(고후 3:7)이라 부르니, 사도의 그 말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6절)가 여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거짓 사도들은 율법을 섞어 부패시킨 복음을 전파하였으니, 마치 그리스도께서 율법 없이는 구원하실 수 없는 것처럼 하였다. 이단자 에비온에게서 나온 에비온파와, 전에 미네안이라 불린 나사렛파도 그러하였다 한다. 우리는 이 모든 자를 정죄하며, 말씀을 진실하게 전파하고 신자들이 율법으로가 아니라 오직 영(곧 그리스도)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칭의라는 제목 아래 더 충분히 해설될 것이다. 그리고 복음의 교리가 바리새인들의 율법 교리와 비교될 때에 (그것이 그리스도로 처음 전파되었을 때) 새 교리처럼 보였을지라도(예레미야도 신약에 관하여 이를 예언하였다), 사실 그것은 (교황주의자들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진 교황 교리에 비추어 새롭다 부를지라도) 옛 교리였고 지금도 옛 교리일 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교리이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로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미리 정하셨고, 이 자기의 예정과 영원한 경륜을 복음으로 세상에 열어 보이셨기 때문이다(딤후 1:9,10). 이로써 복음의 교리와 신앙이 일찍이 있었거나 있는 모든 것 중에 가장 오래된 것임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교리와 신앙을 갓 빚어낸 채 서른 해도 안 된 믿음이라 부르는 그들(교황주의자들)이 추하게 그릇 행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합당치 않은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이사야의 그 말이 매우 잘 들어맞으니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
14 Of Repentance, and the Conversion of Man
복음에는 회개의 교리가 결합되어 있으니, 주께서 복음에서 ‘내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니라’(눅 24:47) 하셨다. 회개로 우리는, 죄인이 복음의 전파로 성령을 통하여 일깨워지고 참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변화를 이해한다. 그것으로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받는 자기 본성적 부패와 모든 죄를 깨닫고 그것을 인하여 진심으로 슬퍼하며, 그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으로 한탄하고 기꺼이 자백할 뿐 아니라, 또한 분노로 그것을 싫어하고 미워하여, 즉시 고침과, 무죄함과 덕을 끊임없이 돌보아 그 남은 평생을 거룩히 그 안에서 훈련할 것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참으로 이것이 참된 회개이니, 곧 거짓 없이 하나님과 모든 선함으로 돌아서고, 마귀와 모든 악에서 진지하게 돌이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말하노니, 이 회개는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이요 우리 자신의 힘의 일이 아니다. 사도가 신실한 사역자에게 ‘진리를 거역하는 자들을 …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5) 하고 부지런히 지시하기 때문이다. 또 복음에서 자기 눈물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은 죄 많은 여인과, 자기 주를 부인한 것을 인하여 비통히 울며 한탄한 베드로가, 회개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곧 자기가 범한 죄를 매우 간절히 애통해야 함을 분명히 보여 준다. 더욱이 탕자와, 복음에서 바리새인과 비교되는 세리가 우리에게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는 가장 합당한 본을 제시한다. 탕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8,19) 하였다. 세리도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주께서 그들을 자비로 받으셨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노니, 오직 하나님께만—은밀히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서든, 또는 죄의 일반적 자백이 낭송되는 교회에서 공개적으로든—드리는 이 진실한 자백으로 충분하며,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누가 자기 죄를 사제에게 그 귀에 속삭여 자백하고 사제가 그 머리에 손을 얹어 사죄를 받아야 하는 것은 필요치 않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것의 어떤 명령이나 본보기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증언하여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하였다. 참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기도하고 또 우리 죄를 자백하기를 가르치사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9,12)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우리가 이웃에게 잘못하였으면 그와 화목해야 한다. 사도 야고보가 자백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라’(약 5:16) 하였다. 만일 누가 죄의 짐과 괴로운 시험에 짓눌려, 교회의 사역자나 하나님의 법에 정통한 다른 형제에게 은밀히 권면이나 교훈이나 위로를 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앞서 말한) 교회와 거룩한 모임에서 흔히 낭송되는 그 일반적이고 공적인 자백도, 성경과 일치하는 것이므로 온전히 인정한다. 주께서 자기 사도들에게 맡기신 천국 열쇠에 관하여, 그들(교황주의자들)은 많은 것을 지껄이며, 이 열쇠로 칼과 창과 규와 면류관을, 또 강한 나라들에 대한, 참으로 사람들의 영혼과 몸에 대한 온전한 권세를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올바로 판단하여 말하노니, 참으로 부르심 받은 모든 사역자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곧 자기에게 맡겨진 백성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책망하고 질서 있게 지킬 때에—그 열쇠 곧 그 사용을 가지고 행사한다. 그들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열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닫기 때문이다. 주께서 이 열쇠를 마태복음 16장 19절에서 사도들에게 약속하셨고, 자기 제자들을 보내사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죄를 사하라 명하실 때에 요한복음 20장 23절, 마가복음 16장 15,16절, 누가복음 24장 47절에서 그것을 주셨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주께서 ‘자기 사역자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후 5:18)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밝혀 ‘화목하게 하는 말씀 곧 교리’(19절)라 한다. 또 더 분명히 자기 말을 해설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마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신 행세를 하니, 마치 하나님 자신이 자기 사역자들로 백성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하시는 것 같다고 덧붙인다(20절)—곧 신실한 순종으로. 그러므로 그들은 믿음과 회개를 권할 때에 그 열쇠를 사용한다. 이같이 그들은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이같이 죄를 사하며, 이같이 천국을 열고 믿는 자들을 들인다. 이 점에서 그들은 주께서 복음에서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눅 11:52) 하신 자들과 크게 다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로써 죄 사함을 전파할 때에 올바르고 효과 있게 사죄하니, 그 죄 사함은 각 사람이 세례받는 것같이 믿는 각 사람에게 약속되며, 그것이 모두에게 특별히 속함을 증거한다. 또한 우리는 이 사죄가 어떤 사제의 귀에 중얼거려지거나 어떤 사람의 머리 위에 특별히 행해진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더 효과 있게 된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죄 사함을 구하도록 부지런히 가르쳐야 하며, 각 사람에게 죄 사함이 자기에게 속함을 일깨워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회개하는 각 사람이 새 생명을 향한 노력에,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일으키는 일에 얼마나 부지런하고 조심해야 하는지를 복음의 본보기들이 우리에게 가르친다. 주께서 중풍에서 고치신 자에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5:14) 하셨고, 마찬가지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하셨다. 이 말씀으로 그분은 사람이 이 육신으로 사는 동안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뜻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지런함과 간절한 돌봄을 권하사, 우리가 모든 수단으로 힘쓰고 기도로 하나님께 구하여, 우리가 거기서 일어난 죄에 다시 빠지지 않으며 육신과 세상과 마귀에게 이기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세리 삭개오가 주께 은총을 받자 복음에서 외치기를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하였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참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배상과 자비, 참으로 구제가 필요하다고 전파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도의 말을 따라 우리는 사람들에게 권하여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전파를 오용하여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매우 쉬우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정결케 하셨기 때문이라. 죄 사함은 쉽게 얻으니 그러므로 죄짓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 또 우리가 회개에 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하는 자들의 모든 경건치 않은 말을 정죄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죄인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열려 있으며, 이 하나님께서 오직 성령을 거스르는 그 한 죄를 제외하고는 신실한 자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고 늘 가르친다(막 3:28,29). 그러므로 우리는 옛 노바티아누스파와 새 노바티아누스파와 카타리파를 정죄하며, 특히 교황의 고통스러운 고해 교리를 정죄한다. 그리고 그의 성직 매매와 매매적 면죄에 대하여 우리는 시몬 베드로의 그 말을 사용하니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 네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행 8:20,21). 우리는 또한 자기들이 자기 자신의 보속으로 자기가 범한 죄를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기 죽으심과 고난으로 모든 죄의 보속이요 화목제요 정결케 하심이라 가르치기 때문이다(사 53:4). 그럼에도 우리는 앞서 말한 대로 육신의 죽임을 계속 촉구하며, 다만 그것을 우리 죄의 보속으로 교만하게 하나님께 들이밀어서는 안 되고(고전 8:8),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보속으로 얻은 구원과 온전한 보속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새로운 순종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합당하게 겸손히 행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15 Of the True Justification of the Faithful
칭의에 관한 사도의 논의에서 ‘의롭다 하다’는 죄를 사하고, 잘못과 그 형벌에서 놓아주며,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함을 뜻한다. 사도가 로마 사람들에게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롭다 함과 정죄함이 대조된다. 또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믿는 자마다 그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한다. 율법과 선지자에서도 우리가 읽기를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신 25:1) 하였고, 이사야 5장 22,23절에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하였다. 이제 우리가 모두 본성상 죄인이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불경건하다 정죄받고 죽음에 처한 자임이 가장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으니—곧 죄와 죽음에서 사면받으니—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의 어떤 고려나 공로로가 아니라 그렇게 된다. 바울이 한 말보다 더 분명한 것이 무엇이겠는가?—‘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친히 지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고난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죄에 자비로우사 그것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신다. 도리어 그분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우리에게 전가하시니, 이제 우리는 죄에서 깨끗해지고 정결케 되고 거룩하게 될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의를 갖추며, 참으로 죄와 죽음과 정죄에서 사면받는다(고후 5:19-21). 마침내 우리는 의로운 자요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그것도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심으로 하신다(롬 4:23-25). 그러나 우리가 이 칭의를 어떤 행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으므로, 우리는 사도와 함께 가르치고 믿노니, 죄인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율법이나 어떤 행위로가 아니다. 사도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하였고,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2,3,5; 창 15:6) 하였다. 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하였다. 그러므로 믿음이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모든 찬송을 돌리므로, 이런 점에서 칭의가 믿음에 돌려지니, 주로 그것이 받아들이는 그리스도 때문이요 그것이 우리의 행위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는다는 것을 주께서 자세히 보이시니(요 6:27,33,35,48-58), 거기서 그분은 먹음을 믿음으로, 믿음을 먹음으로 놓으신다. 우리가 먹음으로 음식을 받는 것같이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의 유익을 나누어 일부는 하나님의 은혜나 그리스도께, 일부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랑과 행위와 공로에 돌리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에, 그것도 믿음을 통하여 돌린다. 더욱이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행위는 의롭지 않은 자가 행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거나 어떤 의로운 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의로워야 한다. 우리는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니, 그분은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며,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믿음을 우리에게 의로 여기신다. 더욱이 사도는 사랑을 믿음에서 분명히 이끌어 내어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하였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있어 우리는 거짓되고 헛되거나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고 살리는 믿음을 말한다. 그것은 자기가 붙드는 그리스도(생명이시요 생명을 주시는 분)로 인하여 참으로 살아 있는 믿음이요 또 그렇게 불리며, 살아 있는 행위로 자기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이 교리에 반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니, 그는 어떤 자들이 자랑하였으나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하지 못한 헛되고 죽은 믿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또 야고보가 행위가 의롭다 한다고 말하나(2:14-26) 바울과 모순되지 않으니(그렇다면 그를 배격해야 할 것이다), 도리어 아브라함이 행위로 자기의 살아 있고 의롭게 하는 믿음을 나타냈음을 보인다. 모든 경건한 자들이 그러하니, 그들은 그럼에도 자기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 사도가 다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0,21) 하였기 때문이다.
16 Of Faith and Good Works; of their Reward, and of Man’s Merit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의견이나 인간적 설득이 아니라, 확실한 신뢰요 마음의 분명하고 흔들리지 않는 동의이며, 성경과 사도신경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참으로 최고의 복이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특히 하나님의 약속과 모든 약속의 완성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확실한 파악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니,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권능으로 자기 택자들에게 분량을 따라, 그것도 자기가 원하시는 때에, 누구에게, 얼마나 원하시는 만큼, 자기 성령으로, 복음 전파와 신실한 기도라는 수단을 통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또한 그 자라남의 분량이 있으니, 그것이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사도들이 결코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 17:5)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에 관하여 말한 이 모든 것을, 사도들이 우리보다 먼저, 우리가 진술한 그대로 가르쳤다. 바울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하였고, 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아멘 하여’(고후 1:20) 하였다. 같은 사도가 빌립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졌다’(빌 1:29)고 하였고, 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나누어 주셨다’(롬 12:3) 하였다. 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 하고,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니라’(살후 1:8) 하였다. 게다가 누가가 증언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도 믿음을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딛 1:1)이라 부르며, 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한다.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자주 사람들에게 믿음을 위하여 기도하라 한다. 같은 사도가 또한 믿음을 능력 있는 것, 사랑으로써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라 불렀다(갈 5:6). 이 믿음은 양심을 평안케 하고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갈 자유로운 길을 열어, 우리가 담대히 그분께 나아가 그분의 손에서 유익하고 필요한 무엇이든 얻게 한다. 같은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우리가 진 의무 가운데 지키고, 역경 중에 우리 인내를 굳게 하며, 참된 고백을 형성하고 만들어 내며, (한마디로) 온갖 선한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참으로 선한) 선행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믿음에서 나오며 하나님의 말씀의 뜻 곧 규범을 따라 신실한 자들에 의해 행해진다. 사도 베드로가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 더하라’(벧후 1:5,6) 하였기 때문이다. 앞서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법이 우리에게 선행의 본을 정해 주었다고 말하였다. 사도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너희가 모든 더러움을 버리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거나 속이지 말라는 것이니’(살전 4:3,6) 하였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좋을 대로 떠맡은 행위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곧 성 바울이 ‘자의적 숭배’(골 2:23)라 부른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거나 기쁨이 되지 않는다. 주께서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 복음에서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9)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모든 종류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른 것들을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촉구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이 행위들도 그것들로 영원한 생명을 공로로 얻으려는 목적으로 행해서는 안 되니, 사도가 말한 대로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롬 6:23)이기 때문이요, 주께서 배척하시는 과시를 위하여서도(마 6:1,5,16), 그분이 싫어하시는 이익을 위하여서도(마 23:23)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부르심을 단장하고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함을 드리기 위하여, 또 우리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행해야 한다. 주께서 복음에서 다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하셨고,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엡 4:1) 하였으며, 또 ‘말에나 일에나 무엇을 하든지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하였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빌 2:4) 하였으며,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선한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딛 3:14)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와 함께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어떤 선행으로가 아니라고 가르칠지라도(롬 3:28), 우리는 선행을 가볍게 여기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이 놀고 지내라고 믿음으로 창조되거나 거듭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쉬지 않고 선하고 유익한 것들을 행하라고 그렇게 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복음에서 주께서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느니라’(마 12:33) 하셨고, 또 ‘내 안에 거하는 자는 …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 15:5) 하셨다. 끝으로 사도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하였고, 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멸시하고 그것이 필요 없으며 돌아볼 것이 아니라고 지껄이는 모든 자를 정죄한다. 그럼에도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우리가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거나, 선행이 구원에 너무도 필요하여 그것 없이 구원받은 자가 일찍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은혜와 그리스도의 은덕으로 구원받기 때문이다. 행위는 믿음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나, 구원이 행위에 돌려지는 것은 부적절하니, 구원은 가장 본래적으로 은혜에 돌려진다. 사도의 그 말이 매우 두드러지니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이제 우리가 행하는 행위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인정되니, 그것을 행하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이요, 또 그 행위들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행해지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가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5) 하였고, 바울도 ‘너희로 하여금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기를 …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노라’(골 1:9,10)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거짓되고 철학적인 덕이 아니라 참된 덕과 참된 선행과 그리스도인의 참된 의무를 부지런히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부지런함과 간절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새기고 두드려 넣으니, 입으로는 복음을 찬양하고 고백하면서 부끄러운 삶으로 그것을 욕되게 하는 모든 자의 게으름과 위선을 날카롭게 책망한다. 이 경우에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와 큰 약속과 후한 상을 두되, 권면하고 위로하고 책망함으로 그리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큰 상을 베푸신다고 가르치니, 선지자의 그 말과 같다. ‘네 일에 보상이 있을 것인즉 … 네 울음 소리를 그칠지어다’(렘 31:16). 복음에서도 주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 하셨고, ‘누구든지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상을 그것을 받는 사람의 공로에 돌리지 않고, 그것을 약속하고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 곧 너그러움과 진실하심에 돌린다. 그분은 비록 누구에게도 빚지신 것이 없으나, 자기를 신실히 예배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그분이 또한 그들에게 자기를 예배할 은혜까지 주심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시다. 게다가 하나님의 위엄에 합당치 않은 것이 많고, 성도들의 행위에서조차 불완전한 것이 많이 발견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것들을 행하는 자들을 은총으로 받으시고 품으시므로, 그분은 그들에게 약속하신 상을 행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에 비유되며(사 64:6), 참으로 주께서 복음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선행에 상 주신다고 가르칠지라도, 우리는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면류관을 씌우시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선물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이 은혜요, 상이라기보다 도리어 은혜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행하는 그 선한 것들을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도리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행하기 때문이요, 또 바울이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하였기 때문이다. 복된 순교자 키프리아누스도 이 구절에서, ‘우리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가 아무것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이끌어 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만들려고 사람의 공로를 옹호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17 Of the Catholic and Holy Church of God, and of the one only Head of the Church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들이 구원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셨으므로(딤전 2:4), 늘 교회가 있어 왔고, 오늘날에도, 또 세상 끝까지 있어야 함이 반드시 필요하다. 교회란 곧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고 모인 신실한 자들의 무리요, 내가 말하노니, 모든 성도의 교제 곧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말씀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올바로 예배하고 섬기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베풀어지는 그 모든 선한 은혜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들의 교제이다. 이들은 모두 한 동일한 도성의 시민으로, 한 주 아래, 같은 법 아래, 모든 선한 것의 같은 사귐 가운데 산다. 사도가 그들을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엡 2:19)이라 부르며, 땅 위의 신실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거룩하게 된 성도라 일컫기 때문이다(고전 4:1). 우리 신경의 그 항목 ‘나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가 온전히 이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늘 ‘한 하나님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 중보자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가 계시며, 또한 온 양 떼의 한 목자, 이 몸의 한 머리, 결론적으로 한 영, 한 구원, 한 믿음, 한 언약이 있으므로, 한 교회만 있음이 반드시 따라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보편적이라 부르니, 그것이 우주적이어서 세상의 모든 부분과 지역에 두루 퍼지고 모든 시대에 미치며, 시간이나 장소의 한계 안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교회를 아프리카의 구석들 안에 가둔 도나투스파를 정죄해야 하며, 로마 교회만이 어떤 의미로 보편적이라 자랑하는 로마 성직자들에게도 동의하지 않는다. 교회는 어떤 이들에 의해 여러 부분이나 종류로 나뉘는데, 이는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찢기고 갈라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지체들의 다양성에 관하여 구별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 한 부분을 전투하는 교회, 다른 부분을 승리한 교회로 삼는다. 전투하는 교회는 여전히 땅에서 싸우며, 육신과 세상과 세상 임금 곧 마귀를 거슬러, 죄와 죽음을 거슬러 싸운다. 다른 교회는 이미 자유롭게 되어 이제 하늘에 있어 이긴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며, 끊임없이 주 앞에서 즐거워한다. 그럼에도 이 두 교회 사이에는 교제와 사귐이 있다. 더욱이 땅 위의 전투하는 교회는 늘 많은 개별 교회를 가져 왔으나, 그것들은 모두 보편적 교회의 통일성에 귀속되어야 한다. 이 전투하는 교회는 율법 전에 족장들 가운데서는 한 방식으로, 모세 아래 율법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정돈되고 다스려졌다. 대개 두 종류의 백성이 언급되니, 곧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 또는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서 모여 교회를 이룬 자들이다. 또한 두 언약 곧 구약과 신약이 있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백성은 한 동일한 메시아 안에서 한 사귐과 한 구원을 가져 왔고 지금도 가지니, 그분 안에서 그들은 한 몸의 지체로서 모두 한 머리 아래 한 믿음으로 연합되고, 모두 한 동일한 신령한 음식과 음료에 참여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때의 다양함과, 약속되고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보증과 표의 다양함을 인정하며, 또 이제 의식이 폐지되매 우리에게 빛이 더 분명히 비치고 우리의 은사와 은혜가 더 풍성하며 우리의 자유가 더 충만하고 넉넉함을 인정한다. 이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고후 6:16), ‘살아 있고 신령한 돌들로 지어진 것’(벧전 2:5), ‘반석 위에 세워진 것’(마 16:18), ‘흔들리지 않는 것’(히 12:28), ‘그 외에 능히 놓을 수 없는 터 위에 선 것’(고전 3:11)이라 불린다. 이에 그것이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라 불리니, 그것이 반석이신 그리스도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를 의지하는 한 그르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홀로 진리이신 그분을 저버릴 때마다 그르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교회는 또한 ‘처녀’(고전 11:2), ‘그리스도의 신부’(아 4:8), ‘그분의 유일한 사랑하는 자’(아 5:16)라 불린다. 사도가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하였기 때문이다. 교회는 ‘한 목자 곧 그리스도 아래 있는 양 떼’(겔 34:22,23; 요 10:16)라, 또한 ‘그리스도의 몸’(골 1:24)이라 불리니, 신실한 자들이 그리스도를 자기 머리로 모신 그분의 살아 있는 지체이기 때문이다. 머리는 몸에서 으뜸이 되고 거기서 온 몸이 생명을 받으며, 그 영으로 모든 일에 다스려지고, 또 그에게서 자라남을 받아 성장한다. 또한 몸에는 머리가 하나뿐이어서 몸과 일치하니,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머리를 가질 수 없다. 교회가 신령한 몸이므로 자기와 같은 신령한 머리를 반드시 가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영 외에 다른 어떤 영으로도 다스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하였고,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하였으며,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2,23) 하였고, 또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 연결되고 결합되어 … 자라게 하느니라’(엡 4:15,16)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황을 여기 땅 위의 전투하는 교회의 일반 목자요 최고 머리요 예수 그리스도의 바로 그 대리자로 삼아, (그들 말로) 교회 안에서 모든 권세의 충만과 주권적 권위를 가졌다 하는 로마 고위 성직자들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유일한 보편적 목자요 가장 높은 감독이시며 또 그대로 계시고, 세상 끝까지 교회 안에서 목자 곧 감독의 모든 직무를 행하시므로 자기 자리를 대신할 다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으심을 믿고 가르친다. 대리자는 부재한 자에게 있다 하거니와, 그리스도는 자기 교회와 함께 계시며 거기에 생명을 주시는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기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교회 안에서의 모든 우월함 곧 지배를 엄히 금하셨다. 그러므로 이토록 명백한 진리를 거슬러 자기를 세우고 다른 종류의 정치를 교회에 들이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언한 그 무리에 속한 것으로 여겨져야 함을 누가 보지 못하겠는가? 베드로후서 2장 1절, 사도행전 20장 29절, 고린도후서 11장 13절, 데살로니가후서 2장 8,9절, 그 밖의 많은 곳에서와 같다. 이제 우리는 로마의 머리를 제거함으로써 교회에 어떤 혼란이나 무질서도 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사도들이 정한 교회 정치가 교회를 합당한 질서 가운데 지키기에 충분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니, 그것은 처음에 이제 내세워지는 그러한 로마의 머리를 질서 유지를 위하여 가지지 않았을 때에도 무질서하거나 혼란으로 가득하지 않았다. 로마의 머리는 참으로 교회에 들어온 자기 폭정과 부패를 유지하나, 그동안 교회의 옳고 합법적인 개혁을 방해하고 저항하며 자기가 낼 수 있는 모든 힘으로 잘라 버린다.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 교회들이 로마 교회에서 갈라진 이래로 큰 다툼과 분열이 있었으니 따라서 참 교회가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마치 로마 교회 안에는 분파나 다툼이나 싸움이 결코 없었던 것처럼, 또 종교의 문제에 있어 학교에서뿐 아니라 거룩한 강단에서, 참으로 백성이 듣는 데서 유지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사도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 하고,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냐’(고전 3:3,4) 한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가 세운 그 교회에 하나님이 계셨음과, 그 안에 다툼과 분열이 있었을지라도 사도적 교회가 참 교회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를 책망하였고(갈 2:11), 바나바가 바울과 다투었다(행 15:39). 한 동일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 사이에 안디옥 교회에서 큰 다툼이 일어났으니, 누가가 사도행전 15장 2절에 기록한 바와 같다. 그리고 모든 시대에 교회에 큰 다툼이 있었고, 교회의 가장 탁월한 박사들이 적지 않은 문제에 관하여 견해를 달리하였으나, 그동안 교회는 이 모든 다툼에도 불구하고 교회이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일어나는 분열을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진리를 드러내기 위하여, 또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이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기를 그렇게 기뻐하셨기 때문이다(고전 11:19).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외에 교회의 다른 머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같이, 우리는 스스로 참 교회라 자랑하는 모든 교회를 참 교회로 인정하지 않고, 참 교회의 표지와 표가 발견되는 그 교회가 참으로 참 교회라고 가르친다. 첫째이며 으뜸으로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글에 우리에게 남겨진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합법적이고 진실하게 전파하는 것이니, 그 모든 글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 같다. 그분이 복음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 다른 이의 음성은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나니 이는 그 음성을 알지 못함이라’(요 10:5,27,28) 하셨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러한 자들은 모두 한 믿음과 한 영을 가지며, 따라서 한 하나님만 예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영과 진리로 섬기며,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유일한 중보자요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그분께 기도하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만 생명이나 의를 구한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자기 교회의 유일한 머리요 터로 인정하고, 그분 위에 확실히 세워져 날마다 회개로 자기를 새롭게 하며, 자기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인내로 지고, 게다가 거짓 없는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와 자기를 연합하여, 이로써 화평과 거룩한 일치의 끈 안에 계속함으로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정하시고 그 사도들로 우리에게 전하신 성례에 참여하되, 주께 친히 받은 그대로 외에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의 그 말이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으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고전 11:23). 이런 까닭에 우리는, 비록 그동안 감독의 계승과 일치와 오랜 연조를 자랑할지라도, 우리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들은 바와 같지 않은 모든 그러한 교회를 그리스도의 참 교회에서 벗어난 낯선 자로 정죄한다. 더욱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에게서 ‘우상숭배를 피하고’(고전 10:14; 요일 5:21) ‘바벨론에서 나와’ 그녀에게 임한 하나님의 모든 재앙에 그녀와 함께 참여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녀와 사귐을 갖지 말라(계 18:4; 고후 6:17)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참 교회와 교통하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그것을 너무도 높이 여겨, 하나님의 참 교회와 교통하지 않고 거기서 자기를 분리하는 자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살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노아의 방주 밖에서는 세상이 홍수로 멸망할 때에 피할 길이 없었던 것같이, 그리스도—교회에서 택자들에게 누리도록 자기를 내어 주시는 분—없이는 확실한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의 참 교회에서 자기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앞서 말한 그 표지 안에 그토록 엄격히 가두어, 성례에 참여하지 않는(자기 뜻이나 멸시로가 아니라 부득이함에 매여 자기 뜻과 달리 그것을 삼가거나 그것이 없는) 모든 자, 또는 그 안에서 믿음이 때때로 약해지나 아주 쇠하거나 온전히 죽지는 않은 자, 또는 그 안에 연약함의 어떤 실수와 오류가 발견될 수 있는 자를 교회 밖으로 내치지는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친구들을 세상에 두셨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중에 칠십 년 동안 제사 없이 지낸 일을 안다. 우리는 자기 주를 부인한 성 베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길을 잃고 연약함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신실하고 택함받은 자들 가운데 날마다 무슨 일이 흔히 일어나는지를 안다. 더욱이 우리는 사도들의 때에 갈라디아와 고린도의 교회들이 어떠한 교회였는지를 아니, 그 안에서 성 바울이 많고 가증한 죄를 정죄하면서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라 부른다(고전 1:2; 갈 1:2).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 의로운 심판으로 자기 말씀의 진리와 보편적 믿음과 자기 자신의 참 예배가 너무도 흐려지고 손상되도록 허용하셔서, 교회가 거의 온전히 지워진 듯, 교회의 외양조차 남지 않은 듯 보일 때가 있으니, 엘리야의 날(왕상 19:10,14)과 다른 때에 그렇게 된 것을 우리가 본다. 그럼에도 그동안 주께서는 이 세상에, 이 어둠 속에서조차 자기의 참 예배자들을 두시니, 그것도 적지 않게 칠천 명 이상이다(왕상 19:18; 계 7:4,9). 사도가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딤후 2:19) 외치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님의 교회는 보이지 않는다 일컬어질 수 있으나, 이는 그것을 이루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 시야에서 감추어져 오직 하나님께만 알려져 사람의 판단으로 분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수에 헤아려지는 모든 자가 다 성도요 살아 있는 참 교회의 지체인 것은 아니다. 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적으로 성례를 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듯하고, 그리스도가 자기들의 유일한 의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형제들에게 사랑의 의무를 행하며, 한동안 인내로 환난과 재앙을 견디는 많은 위선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내적 조명과 믿음과 마음의 진실함과 끝까지의 견인 곧 계속함이 온전히 없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대개 마침내 그 참모습이 드러난다. 사도 요한이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일 2:19)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신앙을 가장하는 동안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치 나라 안의 반역자들이 발각되기 전에 선량한 시민의 수에 헤아려지는 것같이, 또 가라지와 독보리와 쭉정이가 밀 가운데 발견되는 것같이, 또 혹과 종기가 온전한 몸 안에 있으되 도리어 몸의 참 지체라기보다 질병과 기형인 것같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끌어올리는 그물에, 또 독보리와 좋은 곡식이 함께 발견되는 밭에 매우 잘 비유된다(마 13:26,47). 그러므로 우리는 때가 이르기 전에 함부로 판단하지 않도록, 또 주께서 내치지도 잘라 내지도 않으려 하시는 자들, 또는 교회에 어떤 해를 끼치지 않고는 우리가 그것에서 분리할 수 없는 자들을 내치거나 버리거나 잘라 내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경건한 자들이 깊이 잠든 사이에 악한 자들이 더 강해져 교회에 어떤 해악을 행하지 않도록 매우 깨어 있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교회의 진리와 일치가 특히 어디에 있는지를 조심히 살펴, 우리가 교회에 분열을 함부로 일으키거나 기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외적 의식과 예식에 있지 않고, 도리어 보편적 믿음의 진리와 일치에 있다. 이 보편적 믿음은 사람의 규례나 법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가르쳐지니, 그 간결하고 짧은 요약이 사도신경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저술가들에게서 여러 가지 의식의 다양함이 있었으나 그것들은 늘 자유로웠고, 누구도 그로 인하여 교회의 일치가 깨지거나 해체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읽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참된 일치가 교리의 여러 요점에, 복음의 참되고 한결같은 전파에, 또 주께서 친히 명백히 정하신 그러한 예식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사도의 그 말을 매우 간절히 촉구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같은 것을 생각할지니라’(빌 3:15,16).
18 Of the Ministers of the Church, their Institution and Offices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교회를 모으고 세우시며 그것을 다스리고 보존하시기 위하여 늘 자기 사역자들을 사용하셨고, 지금도 사용하시며, 교회가 땅에 남아 있는 한 늘 그렇게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의 첫 시작과 제정과 직분은 하나님 자신의 가장 오래된 규례요, 사람들이 정한 새 고안이 아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권능으로 아무 수단 없이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에게 교회를 취하실 수 있으나, 도리어 사람의 사역으로 사람을 다루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그들만으로의 사역자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여겨야 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회심과 가르침에 속한 것들을 성령의 은밀한 능력에 돌리되 교회의 사역을 무효로 만들 정도로 그리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한다. 우리는 늘 사도의 말을 마음에 두어야 하니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4,17). 또 주께서 복음에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요 13:20) 하신 것과, 아시아에 있던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난 마게도냐 사람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고 한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또 다른 곳에서 같은 사도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사역자와 사역에 너무 많은 것을 돌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니, 여기서도 주께서 복음에서 하신 말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와, 사도의 말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5,7)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으로 자기 사역자들을 통하여 외적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자기 성령으로 내적으로 자기 택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설득하여 믿게 하심을 믿자.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온 은덕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리 이 선언의 제1장에서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시작부터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가장 뛰어난 사람들을 자기 사역자로 사용하셨으니(그들 중 어떤 이는 세상 지혜나 철학에 미숙하였으나 참 신학에는 가장 탁월하였다), 곧 족장들이다. 그분은 자주 자기 천사들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족장들은 그 시대의 선지자 곧 교사였으니,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위하여 그들로 여러 해를 살게 하사 마치 세상의 아비요 빛이 되게 하셨다. 그들의 뒤를 모세와 온 세상에 이름난 선지자들이 이었다. 그 후에 이 모든 이의 뒤를 이어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세상의 가장 완전한 교사이신 자기 독생자를 보내셨으니, 그분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감추어져 있고, 그분에게서 우리가 그 가장 거룩하고 완전하며 순수한 복음의 교리를 이끌어 낸다. 그분이 자기에게 제자들을 택하사 사도로 삼으셨고, 그들이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의 전파로 곳곳에 교회를 모았다. 그 후 그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모든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세웠으니, 그분은 그들을 이은 자들로 말미암아 오늘까지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려 오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옛 백성에게 족장들과 모세와 선지자들을 주신 것같이, 새 언약 아래 있는 자기 백성에게도 자기 독생자를, 또 그와 함께 이 교회의 사도들과 교사들을 보내셨다. 더욱이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여러 이름으로 일컬어지니, 곧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감독, 장로, 목사, 교사라 불린다(고전 12:28; 엡 4:11). 사도들은 어떤 일정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온 세상에 두루 여러 교회를 모았으니, 그 교회들이 일단 세워지면 더 이상 사도가 없게 되었고 그 자리에 각 교회마다 개별 목사가 임명되었다. 선지자들은 옛적에 장차 올 일들을 미리 보고 예언하였으며, 게다가 성경을 해석하였으니,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그러한 자들이 더러 있다. 복음 전하는 자라 불린 자들은 복음의 역사를 기록한 자요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였으니,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일을 이루라’(딤후 4:5)고 명한 것과 같다. 감독은 교회의 감독자요 파수꾼으로, 건전한 권면으로 교회를 다스린다. 목사는 주의 양 떼를 지키며 또한 그것에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 교사는 참 믿음과 경건을 교훈하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교회의 사역자들은 감독, 장로, 목사, 교사라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사역자의 이름이 교회에 들어왔다. 어떤 이는 총대주교로, 다른 이는 대주교로, 다른 이는 부주교로 세워졌고, 또 관구장, 부집사장, 집사, 부집사, 시종, 구마사, 성가대원, 문지기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밖의 자들, 곧 추기경, 사제장, 수도원장, 큰 대수도원장과 작은 대수도원장, 높고 낮은 품계가 생겼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관하여 우리는 그것들이 옛적에 무엇이었는지, 또는 지금 무엇인지 별로 개의치 않는다. 사역자에 관한 한 우리가 사도들의 교리를 가진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도사와 그들의 수도회 곧 분파가 그리스도로도 그 사도들로도 제정되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아, 그들이 유익하기는커녕 하나님의 교회에 해롭고 유해하다고 가르친다. 비록 옛적에는 그들이 (홀로 살며 자기 손으로 생계를 얻고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며 모든 곳에서 평신도처럼 자기 목사에게 순종하였을 때에는) 용납될 만하였으나, 지금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온 세상이 보고 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어떤 서원을 내세우나 그 서원과 전혀 어긋나는 삶을 사니, 그들 중 가장 나은 자라도 사도가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살후 3:11) 한 그 무리에 정당히 헤아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들에는 그러한 자가 없으며, 또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 떼 지어 돌아다니도록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더욱이 누구도 교회 사역의 영예를 찬탈해서는, 곧 뇌물이나 어떤 악한 수단으로나 자기 마음대로 그것을 탐욕스럽게 자기에게 끌어와서는 안 된다. 도리어 교회의 사역자는 합법적이고 교회적인 선거와 부르심으로 부름받고 택함받게 하라. 곧 교회가 경건하게, 합당한 질서로, 어떤 소동이나 선동이나 다툼 없이 그들을 택하게 하라.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유념해야 하니, 원하는 자마다 택함받을 것이 아니라, 합당하고 충분한 학식—특히 성경에 있어—과 경건한 언변과 지혜로운 단순함을 가진 자들, 결론적으로 절제와 정직한 삶으로 좋은 평판을 받는 자들이, 성 바울이 디모데전서 3장 2-7절과 디도서 1장 7-9절에 주는 그 사도적 규범을 따라 택함받게 하라. 그리고 택함받은 자들은 장로들이 공적 기도와 안수로 안수하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택함받지도 보내심받지도 안수받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달려가는 모든 자를 정죄한다. 우리는 또한 합당치 않은 사역자와, 목사에게 요구되는 은사를 갖추지 못한 자들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는, 초대 교회의 어떤 목사들의 순결한 단순함이 때로는 지나치게 높고 교만한 다른 어떤 자들의 다양하고 정교하며 까다로운 학식보다 교회에 더 유익하였음을 모르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우리도 오늘날, 모든 지식과 학식이 전혀 없지는 않은 어떤 사람들의 정직한 단순함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제사장’이라 일컫는데, 이는 그들의 사역에 관하여서가 아니라, 모든 신실한 자가 왕과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출 19:6; 벧전 2:5,9; 계 1:6). 그러므로 사역과 제사장직은 서로 크게 다른 것이다. 제사장직은 방금 말한 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되나, 사역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교황주의의 제사장직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몰아냈다고 해서 교회의 사역을 없앤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는 유대인의 옛 교회에 있던 것과 같은 그러한 제사장직이 더 이상 없으니, 그 옛 제사장직은 외적 기름 부음과 거룩한 옷과,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예표였던 매우 많은 의식을 가졌으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것들을 이루시고 폐하셨다(히 9:10,11). 그리고 그분 자신이 영원히 유일한 제사장으로 계시니,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무엇을 깎아내릴까 하여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사역자 중 누구에게도 돌리지 않는다. 주께서 친히 교회에 신약의 제사장—부주교에게서 권위를 받아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하여 날마다 제물 곧 우리 구주의 바로 그 살과 바로 그 피를 드릴 수 있는 자—을 세우지 않으시고, 도리어 가르치고 성례를 집행할 사역자를 세우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우리가 신약의 사역자 곧 그리스도의 교회의 사역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그들에게 무엇을 돌려야 하는지를 분명하고 짧게 선언하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한다. 그리하여 사도는 사역자를 사역자로 여기기를 원한다. 이제 사도가 그들을 ὑπηρέτας(휘페레타스) 곧 자기 키잡이만 바라보는 아랫노잡이같이 부르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하여나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다른 이 곧 자기 주인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라, 그 명령과 지시에 그들이 매여야 한다. 교회의 사역자는 그 직무의 온 부분에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오직 자기 주께 명령으로 받은 것만 행하라고 온전히 명령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누가 우리의 주인인지 명백히 선언되니 곧 그리스도시라, 사역자들은 그 사역의 모든 직무에서 그분께 복종한다. 그분은 또한 교회의 사역자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요 나누어 주는 자’(고전 4:1)라고 덧붙인다. 이제 하나님의 비밀을 바울이 여러 곳에서, 특히 에베소서 3장 4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례도 옛 저술가들에게 비밀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이 목적으로—곧 신실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하기 위하여—부름받는다. 우리는 또한 복음의 다른 곳에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청지기’에 관하여 읽으니, ‘주인이 그를 자기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로 세운다’(눅 12:42). 또 복음의 다른 곳에서 한 사람이 타국으로 가며 자기 집을 떠나 자기 종들에게 거기에 대한 권위를 주고 자기 소유를 맡기며 각 사람에게 그 일을 정한다(마 25:14). 이제 여기서 교회의 사역자의 권세와 직분에 관하여도 좀 말할 합당한 곳이다. 그리고 그들의 권세에 관하여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분주히 논하여, 가장 큰 것들조차 모든 것을 자기들 관할 아래 두려 하니, 그것은 자기 제자들에게 모든 지배를 금하시고 겸손을 높이 칭찬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다(눅 22:26; 마 18:3). 참으로 순전하고 절대적인 한 종류의 권세가 있으니, 권리의 권세라 불린다. 이 권세를 따라 온 세상의 만물이 만유의 주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니, 그분이 친히 증언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하시고, 또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 내가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18) 하시며, 또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계 3:7) 하셨다. 이 권세를 주께서 자기에게 두시고 다른 이에게 옮기지 않으시니, 자기 사역자들이 일하는 동안 한가로이 곁에 앉아 구경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가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사 22:22) 하였고, 또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사 9:6) 하였기 때문이다. 그분은 정사를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메우지 않으시고 여전히 자기 권세를 지키고 사용하사 그로써 만물을 다스리신다. 더욱이 또 다른 권세가 있으니, 곧 직분의 권세 곧 사역적 권세로, 충만하고 절대적인 권세와 권위를 가지신 분에 의해 제한된다. 그리고 이것은 지배라기보다 섬김에 더 가깝다. 우리가 보거니와, 주인이 자기 집 청지기에게 자기 집에 대한 권위와 권세를 주고 그 까닭에 그에게 열쇠를 맡겨, 주인이 들이거나 내치려는 자들을 들이거나 내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권세를 따라 사역자가 자기 직분으로 주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것을 행하고, 주께서 그가 행한 것을 비준하고 확증하시며, 자기 사역자들의 행위가 자기 자신의 행위로 인정되고 여겨지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하여 복음의 그 말씀들이 있으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또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 그러나 사역자가 모든 일에 주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지 않고 믿음의 한계와 경계를 넘으면, 주께서 그가 행한 것을 무효로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역자의 교회적 권세는,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되 교회의 모든 일을 그분이 그 말씀에 정하신 대로 행하는 그 직무이다. 이렇게 행해질 때에 신실한 자들은 그것을 주께서 친히 행하신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열쇠에 관하여는 앞서 좀 말하였다. 이제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권세 곧 직무는 모두에게 동일하고 같다. 분명히 처음에 감독 곧 장로들이 공동의 동의와 수고로 교회를 다스렸으니, 아무도 다른 이 위에 자기를 높이지 않았고, 아무도 동료 감독에 대하여 더 큰 권세나 권위를 찬탈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의 말씀 ‘너희 중에 큰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6)를 기억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겸손으로 자기를 지키고 교회의 다스림과 보존에서 서로 도왔다. 그럼에도 질서를 위하여 사역자 중 어떤 한 사람이 회중을 함께 불러 모으고, 회중에게 의논할 문제들을 제시하며, 나머지의 의견 곧 견해를 모으고, 요컨대 자기에게 있는 한 아무런 혼란도 일어나지 않게 마련하였다. 성 베드로도 그렇게 하였으니, 우리가 사도행전 11장 4-18절에서 읽거니와, 그럼에도 그가 나머지보다 위에 있거나 나머지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순교자 키프리아누스가 그의 책 『성직자의 단순함에 관하여』에서 한 그 말이 매우 참되니 ‘의심 없이 나머지 사도들도 베드로와 같은 자들이어서 영예와 권세에 있어 그와 동등한 사귐을 가졌으나, 이것의 시작은 통일성에서 나오니, 한 교회만 있음을 우리에게 알리려 함이라’ 하였다. 성 제롬도 바울의 디도서 주석에서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은 말을 하니 ‘마귀의 충동으로 신앙에 당파가 일어나기 전에는 교회들이 장로들의 공동 권고로 다스려졌으나, 각 사람이 자기가 세례 준 자를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 여기게 된 후에, 장로 중 하나를 택하여 나머지 위에 세워 온 교회의 돌봄을 그에게 맡기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분열을 제거하게 하기로 정해졌다’ 하였다. 그러나 제롬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로 단언하지 않으니, 곧바로 덧붙이기를 ‘장로들이 교회의 계속된 관습으로 자기들이 자기 위에 세워진 자에게 복종함을 안 것같이, 감독들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규정된 규범보다 도리어 관습으로 장로들 위에 있음을, 또 자기들이 마땅히 교회의 다스림을 그들과 공동으로 가져야 함을 알아야 한다’ 하였다. 제롬의 말은 여기까지이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도 우리가 하나님의 옛 정하심으로 돌아가 사람이 고안한 관습보다 도리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떤 권리로도 금할 수 없다. 사역자의 직무는 다양하나,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둘로 제한하니, 그 안에 나머지 모두가 포함된다.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과 성례를 합법적으로 집행하는 것이다. 거룩한 회중을 함께 모으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하며, 또 일반 교리를 교회의 형편과 쓰임에 적용하여,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가 듣는 자들에게 유익이 되고 신실한 자들을 세우게 하는 것이 사역자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노니, 사역자의 의무는 배우지 못한 자를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요, 참으로 주의 길에서 멈추어 섰거나 머뭇거리며 더디 가는 자들을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더욱이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고 강하게 하며 사탄의 여러 시험에 맞서 그들을 무장시키고, 범죄자를 책망하며, 길 잃은 자를 데려오고, 넘어진 자를 일으키며, 거역하는 자를 설복하고, 주의 양 떼에서 이리를 쫓아내며, 사악함과 악한 사람을 지혜롭고 엄히 책망하되 큰 사악함을 눈감거나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성례를 집행하고 그 올바른 사용을 권하며, 모든 사람을 건전한 교리로 준비시켜 그것을 받게 하고, 모든 신실한 자를 거룩한 일치 가운데 함께 지키며, 분열에 맞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무지한 자를 교리문답으로 가르치고, 가난한 자의 필요를 교회에 천거하며, 병들거나 여러 시험에 얽힌 자들을 심방하고 교훈하여 그들을 생명의 길에 지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 외에, 필요할 때에 공적 기도와 간구가 금식 곧 거룩한 절제와 함께 드려지도록 부지런히 마련하고, 교회의 평안과 화평과 안전에 속한 것들을 가장 조심히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사역자가 이 모든 것을 더 잘, 더 쉽게 행하도록,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지런히 기도하며 성경 읽기에 자기를 많이 바치고, 모든 일에 모든 때에 깨어 있어 모든 사람에게 거룩한 삶의 선한 본을 나타내는 자일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교회에 권징이 있어야 하고, 옛 교부들 가운데 출교가 시행되었으며,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경건한 사람들이 이 권징을 시행하는 교회적 재판이 있었으므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때와 공적 형편의 정황을 따라, 또 필요를 따라 이 권징을 조절하는 것도 사역자의 의무에 속한다. 여기서 늘 지켜야 할 이 규범이 있으니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곧 모든 것이 세움을 위하여 행해져야 하며 어떤 압제나 소동도 없어야 한다. 사도가 ‘권세는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후 10:8)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또 주께서 친히 주의 밭에서 가라지를 뽑지 말라 하셨으니, 가라지와 함께 곡식까지 뽑힐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마 13:29). 그러나 도나투스파의 오류에 관하여는, 우리가 여기서 그것을 전적으로 미워한다. 그들은 사역자의 선하거나 악한 삶에 따라 교리와 성례의 집행이 효력이 있거나 없다고 여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악한 사역자의 입에서 나올지라도 들어야 함을 알기 때문이니, 주께서 친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바는 다 지켜 행하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3) 하셨다. 우리는 성례가 제정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며, 비록 경건치 않은 사역자가 집행할지라도 경건한 자들에게 효력이 있음을 안다. 이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의 복된 종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나투스파를 거슬러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논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역자들 가운데 권징이 있어야 하니—대회에서 사역자의 삶과 교리에 관하여 분별 있는 조사가 있어야 하며—범죄하는 자는 장로들에게 책망받고, 회복 불능이 아니면 바른길로 인도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직에서 면직되어 회복 불능일 경우 참 목자들에게 이리처럼 주의 양 떼에서 쫓겨나야 한다. 그들이 거짓 교사라면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사도들의 본을 따라 교회의 구원을 위하여 그 멸망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소집된다면, 일반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신실한 사역자들은 또한 (선한 일꾼으로서) 그 삯을 받기에 합당하니, 그들이 보수와 자기 자신과 그 가족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도 잘못이 아니다. 사도가 이것들이 정당한 이유로 교회에 의해 주어지고 사역자들에게 받아진다는 것을 고린도전서 9장 14절과 디모데전서 5장 17,18절, 그 밖의 곳에서도 보이기 때문이다. 재세례파도 이 사도적 교리로 논박되니, 그들은 사역으로 사는 사역자들을 정죄하고 욕한다.
19 Of the Sacraments of the Church of Christ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자기 교회에서 말씀의 전파에 자기 성례 곧 성례적 표를 더하셨다. 이것을 성경이 분명히 증언한다. 성례는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신비적 상징 곧 거룩한 예식 곧 거룩한 행위로, 그분의 말씀과 외적 표와 가리켜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으로 그분은 자기 교회에서 사람에게 베푸신 자기 큰 은덕을 끊임없이 기억하게 하고 다시 마음에 떠올리게 하시며, 자기 약속을 인 치시고, 자기가 우리에게 내적으로 행하시는 것들을 외적으로 나타내며 마치 우리 눈앞에 내어 주시며, 그와 함께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우리 믿음을 강하게 하고 자라게 하신다. 끝으로 그것으로 그분은 우리를 다른 모든 백성과 종교에서 분리하시고, 우리를 온전히 자기에게 거룩히 구별하여 매시며, 자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깨닫게 하신다. 이 성례는 옛 교회의 것이거나 새 교회의 것이다. 옛 것의 성례는 할례와, 드려진 유월절 어린 양이었으니, 이 이름 아래 세상의 시작부터 사용된 제사들이 언급된다. 새 교회의 성례는 세례와 주의 만찬이다. 어떤 이들은 새 교회의 성례를 일곱으로 헤아린다. 그중에 우리는 회개와 혼인과 사역자의 임직(우리는 교황주의의 임직이 아니라 사도적 임직을 뜻한다)이 매우 유익하나 성례는 아님을 인정한다. 견신례와 종부성사로 말하면, 그것들은 순전히 사람의 고안이니, 교회가 아무런 손해나 불편 없이 능히 없앨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들에는 그것들이 없으니, 그 안에 우리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로마 고위 성직자들이 자기 성례를 베풀 때 행하는 그 장사로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전적으로 미워한다. 모든 성례의 저자요 제정자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결코 성례를 제정할 수 없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예배에 속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을 정하고 규정하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주께서 자기에게 가르치신 것을 받아들이고 간직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례적 표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결합되어 있어 반드시 믿음을 요구하니, 이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글 곧 편지에, 성례는 인에 비유되니, 주께서만 자기 자신의 편지에 그 인을 찍으신다. 그리고 주께서 성례의 저자이신 것같이, 그분은 성례가 올바로 사용되는 그 교회에서 끊임없이 일하신다. 그리하여 신실한 자들은 사역자들에게서 그것을 받을 때에 주께서 자기 자신의 규례 안에서 일하심을 알고, 따라서 그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받듯 받으며, 사역자의 허물(그들에게 어떤 악명 높은 허물이 있을지라도)은 그들을 해할 수 없으니, 그들이 성례의 선함이 주의 규례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성례의 집행에 있어 주 자신과 그 사역자를 구별하여, 성례의 본체는 주께서 자기들에게 주시고 외적 표는 주의 사역자들이 준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모든 성례에서 주께서 베푸시고 모든 시대의 경건한 자들이 주로 바라보는 그 중심된 것(어떤 이들이 성례의 본체요 내용이라 부른 것)은 우리 구주 그리스도시니, 곧 그 유일한 희생(히 10:12)이요, 세상의 기초부터 죽임을 당하신 그 하나님의 어린 양(계 13:8)이요, 또 우리 조상들이 다 마신 그 반석(고전 10:4)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택자가 성령을 통하여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로 할례받고(골 2:11,12), 자기 모든 죄에서 씻음을 받으며(계 1:5),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바로 그 몸과 피로 양육된다(요 6:54). 이제 그 중심된 것 곧 성례의 바로 그 내용이요 본체에 관하여는, 두 언약의 성례가 동등하다. 신실한 자들의 유일한 중보자요 구주이신 그리스도가 그 둘 다에서 중심된 것이요 본체이시며, 한 동일한 하나님이 그 둘 다의 저자이시고, 그것들이 두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표와 인으로 주어져, 하나님의 큰 은덕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그 기억을 새롭게 하며, 신실한 자들을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구별하고, 끝으로 믿음으로 영적으로 받아져 받는 자들을 교회에 매며 그 의무를 일깨워야 한다. 내가 말하노니, 이런 것들과 그와 같은 것들에 있어 두 교회의 성례는 다르지 않으나, 외적 표에 있어서는 다양하다. 참으로 우리는 그것들 사이에 더 큰 차이를 두니, 우리의 것은 더 견고하고 영속적이어서 세상 끝까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또 우리의 것은 그 본체와 약속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성취되었음을 증언하나, 다른 것은 그것들이 장차 이루어지리라는 것만 가리켰다. 또 우리의 것은 더 단순하여 그토록 수고롭지도, 그토록 화려하지도, 그토록 의식으로 가득하지도 않다. 더욱이 그것들은 온 땅 위에 흩어진 더 큰 백성에 속하며, 더 탁월하여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 안에 더 큰 분량의 믿음을 일으키므로, 더 풍성한 분량의 영이 그것들을 따른다. 그러나 이제 참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은혜의 풍성함이 신약의 백성에게 부어졌으므로, 옛 율법의 성례는 분명히 폐지되어 그쳤고, 그 대신 신약의 성례가 놓였으니—곧 할례 대신 세례, 유월절 어린 양과 제사들 대신 주의 만찬이다. 그리고 옛 교회에서 성례가 말씀과 표와 가리켜지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같이, 오늘날에도 그것들은 마치 같은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에는 성례가 아니던 것을 성례로 만들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말씀으로 거룩히 구별되고, 그것들을 처음 제정하신 분에 의해 거룩하게 되었다고 선언된다. 어떤 것을 거룩히 하거나 구별한다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께, 또 거룩한 용도에 바치는 것이니, 곧 그것을 통상적이고 일상적인 용도에서 취하여 어떤 거룩한 용도에 정하는 것이다. 성례의 표는 통상적 용도에서, 곧 외적이고 보이는 것들에서 취해지기 때문이다. 세례에서 외적 표는 물이라는 요소와 사역자가 행하는 보이는 씻음이나, 가리켜지는 것은 거듭남과 죄에서 깨끗하게 됨이다. 마찬가지로 주의 만찬에서 외적 표는 흔히 먹고 마시는 데 쓰이는 것에서 취한 떡과 포도주이나, 가리켜지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분의 피, 곧 주의 몸과 피에 참여함이다. 그러므로 물과 떡과 포도주는 그 자체의 본성으로, 또 주의 이 거룩한 용도와 제정 밖에서 보면, 다만 그것들이 불리는 것이요 우리가 그것들로 발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부름과 그 첫 제정과 거룩히 함의 새롭게 함과 더불어 더해지면, 이 표들은 거룩히 구별되고 그리스도로 거룩하게 되었다고 선언된다. 그리스도의 성례에 대한 첫 제정과 거룩히 함이 하나님의 교회에 여전히 효력을 가지므로, 주께서 처음부터 정하신 것과 다르지 않게 성례를 거행하는 자들은 오늘날에도 그 첫째이며 가장 탁월한 거룩히 함의 사용과 유익을 여전히 가진다. 이런 까닭에 성례의 집행에 그리스도의 바로 그 말씀이 되풀이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표들이 통상적인 것과는 다른 목적과 용도에 정해졌음을 배우므로, 우리는 그것들이 이제 그 거룩한 용도에서 가리켜지는 것들의 이름을 취하며, 더 이상 단순한 물이나 떡이나 포도주라 불리지 않고, 도리어 물이 ‘거듭남과 새롭게 하심의 씻음’(딛 3:5)이라, 떡과 포도주가 ‘주의 몸’(고전 10:16) 곧 그분의 몸과 피의 보증과 성례라 불린다고 가르친다. 표가 가리켜지는 것으로 변하거나, 그 자체의 본성으로 그것인 바이기를 그치는 것이 아니라(그렇다면 그것들이 성례일 수 없으니, 성례는 가리켜지는 것만으로 이루어지고 표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도리어 표가 사물의 이름을 지니는 것은, 그것들이 거룩한 것들의 신비적 표이기 때문이요, 표와 가리켜지는 것이 성례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노니, 그것들을 처음 제정하신 분의 목적과 뜻에 의해, 또 신비적 의미에 의해 결합되거나 연합되었다. 물과 떡과 포도주는 통상적인 표가 아니라 거룩한 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례에 물을 제정하신 분은 신실한 자들이 다만 세례의 물에 잠기기만 하라는 마음과 목적으로 그것을 제정하신 것이 아니요, 만찬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라 명하신 분은 신실한 자들이 자기 집에서 떡을 먹듯 아무런 더 깊은 신비 없이 떡과 포도주만 받으라는 뜻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가리켜지는 것에 영적으로 참여하고 믿음으로 자기 죄에서 참으로 정결케 되며 또한 그리스도께 참여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의 거룩히 함을 알 수 없는 어떤 음절에, 곧 거룩히 하는 자가 거룩히 할 의도를 가지고 발음하는 어떤 말의 낭송에, 또는 그리스도나 그 사도들의 말이나 본보기로 우리에게 남겨지지 않은 어떤 다른 우연한 것들에 돌리는 자들을 인정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성례를 거룩하게 되지도 효력 있지도 않은 통상적 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의 교리를 싫어한다. 우리는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 때문에 보이는 것들을 멸시하고 자기들이 이미 그것들 자체를 누리므로 표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정죄하니, 기록된 대로 메살리아파가 그러하였다. 우리는 또한, 은혜와 가리켜지는 것들이 표에 너무도 매이고 그 안에 포함되어, 외적으로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반드시 내적으로 은혜와 가리켜지는 것들에 참여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성례의 선함을 사역자의 합당함이나 합당치 못함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같이,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것을 받는 자들의 형편으로 달아 보지 않는다. 우리는 성례의 선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곧 진실하심과 순전한 선하심에 달려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아—그것이 전파될 때에 단순한 말만 발설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그 말이 가리키는 것들이 하나님께 베풀어지되, 악인과 불신자는 그 말을 듣고 깨달을지라도 가리켜지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니 참 믿음으로 받지 않기 때문인 것같이—그렇게 성례도, 말씀과 표와 가리켜지는 것으로 이루어져, 참되고 온전한 성례로 계속되니, 그것이 거룩한 것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리켜지는 것들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불신자가 베풀어진 것들을 받지 못할지라도 그러하다. 이것은 그것들의 저자요 베푸시는 분이신 하나님의 어떤 허물로가 아니라, 그것들을 믿음 없이 불법하게 받는 사람들의 허물로 일어난다.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롬 3:3). 이제 처음에 우리가 성례가 무엇인지 보일 때에 그것들이 어떤 목적으로 정해졌는지도 곁들여 진술하였으므로, 이미 다룬 것을 다시 되풀이하여 수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순서로, 그리스도 교회의 성례를 따로따로 말하는 것이 남았다.
20 Of Holy Baptism
세례는 하나님께서 제정하고 거룩히 하셨으며, 처음 세례를 베푼 이는 요한이니, 그가 요단에서 그리스도를 물에 잠기게 하였다. 그에게서 그것이 사도들에게 이르렀고, 그들도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 주께서 분명한 말씀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마 28:19) 명하셨다. 베드로도 여러 사람이 자기에게 어떻게 하여야 할지 물었을 때에 사도행전에서 그들에게 ‘너희가 각각 죄 사함을 받으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하였다. 이에 세례는 어떤 이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입문의 표라 불리니, 그것으로 하나님의 택자들이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된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한 세례만 있으니, 한 번 세례받고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한 번 받은 세례는 사람의 평생 동안 계속되며 우리 양자됨의 영속적 인 침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언약과 가족에, 그리하여 그 기업에 등록되고 들어가고 받아들여지는 것이요, 참으로 이생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따라 불리는 것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이며, 또한 죄의 더러움에서 정결케 되고 새롭고 무죄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여러 은혜를 갖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인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큰 은덕을 상기시키고 기억에 간직하게 한다. 우리는 모두 죄의 오염 가운데 태어났고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우리를 값없이 죄에서 정결케 하시고, 그분 안에서 우리를 자기 아들로 양자 삼으시며, 거룩한 언약으로 우리를 자기에게 매시고, 우리가 새 삶을 살도록 여러 은사로 우리를 풍성하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이 세례에서 우리에게 인 쳐진다. 내적으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거듭나고 정결케 되고 새로워지며, 외적으로 우리는 물로 가장 뛰어난 은사들의 인 침을 받으니, 그 물로 또한 그 큰 은덕들이 나타나고 마치 우리 눈앞에 바라보도록 놓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받으니, 곧 보이는 물로 씻기거나 뿌림을 받는다. 물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고 지치고 피곤한 몸을 새롭게 하고 식혀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영혼에 대하여 같은 방식으로, 그것도 보이지 않게 영적으로 행하신다. 더욱이 세례의 성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모든 종교와 민족에서 분리하시고 우리를 자기에게 속한 특별한 백성으로 거룩히 구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받음으로 우리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순종과 육신의 죽임과 새 삶을 드릴 의무를 지며, 참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싸움에 등록된 군사가 되어 평생토록 세상과 사탄과 우리 자신의 육신을 거슬러 싸워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교회라는 한 몸에 세례받아, 같은 신앙과 서로의 의무에 있어 교회의 모든 지체와 잘 일치하게 된다. 우리는 세례의 가장 완전한 형식이 그리스도께서 세례받으신 그것이요 사도들이 사용한 그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후에 사람의 고안으로 더해지고 교회에서 사용된 것들을, 우리는 세례의 온전함에 필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구마와 등불과 기름과 침을 사용하는 것과 그 밖의 그러한 것들, 곧 세례를 해마다 두 번 여러 의식으로 거룩히 한다는 것 등이 이런 종류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뿐인 교회의 세례가 하나님의 첫 제정으로 거룩히 되었고, 말씀으로 거룩히 구별되며, 이제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첫 복으로 온전히 효력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세례가 교회에서 여자나 산파에 의해 베풀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바울이 여자를 교회의 직무에서 제외하거니와, 세례는 교회의 직무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실한 부모에게서 난 어린 유아들이 세례받아서는 안 된다고 부인하는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복음의 교리를 따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 18:16) 하였고,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행 3:25). 그렇다면 어찌 하나님의 언약의 표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그들이 어찌 거룩한 세례로 거룩히 구별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또한 재세례파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러 고수하는 그 밖의 특이한 견해들에 있어서도 그들을 정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세례파가 아니며, 그들에게 속한 어떤 점에서도 그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21 Of the Holy Supper of the Lord
주의 만찬(주의 상 곧 성찬, 곧 감사라 불린다)은 흔히 만찬이라 불리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마지막 만찬에서 그것을 제정하셨고 지금도 그것을 나타내며, 또 그 안에서 신실한 자들이 영적으로 먹임과 양육을 받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의 저자는 천사나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분이 무엇보다 먼저 그것을 자기 교회에 거룩히 구별하셨다. 그리고 그 동일한 복과 거룩히 함이, 주께서 제정하신 바로 그 만찬 외에 다른 것을 거행하지 않고, 거기서 주의 만찬의 말씀을 낭송하며, 모든 일에 참 믿음으로 한 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든 자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은 교회의 사역자들의 사역으로 받는 것을, 마치 그분의 손에서 받듯 받는다. 주께서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자기가 인류를 위하여 이루신 그 큰 은덕을 새로이 기억하게 하려 하셨으니, 곧 자기 몸을 죽음에 내어 주고 자기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마귀의 권세에서 구속하셨으며, 이제 자기 살로 우리를 먹이시고 자기 피를 마시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참 믿음으로 영적으로 받아져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양육한다. 그리고 이토록 큰 은덕이 만찬이 거행될 때마다 새로워진다. 주께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이 거룩한 만찬으로 우리에게 인 쳐지니, 곧 그리스도의 바로 그 몸이 참으로 우리를 위하여 주어졌고 그분의 피가 우리 죄의 사함을 위하여 흘려졌음이라, 우리 믿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례에서 사역자에 의해 외적으로, 보이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마치 우리 눈앞에 보이도록 놓이거니와, 내적으로는 영혼 안에서 성령에 의해 보이지 않게 이루어진다. 외적으로 떡이 사역자에 의해 베풀어지고 주의 말씀이 들리니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또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내 피니라’(마 26:26-28; 눅 22:17-20). 그러므로 신실한 자들은 주의 사역자들이 주는 것을 받아 주의 떡을 먹고 주의 잔을 마신다. 그리고 동시에 내적으로,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역사로, 그들은 또한 주의 살과 피를 받아 그것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먹는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참 음식과 음료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어지신 분이요 우리의 구주이신 그분이, 만찬의 그 특별한 것이요 본체시니,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자리에 다른 어떤 것도 놓이도록 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어떻게 신실한 자들의 음식과 음료가 되며 신실한 자들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받는지를 더 잘, 더 분명히 깨닫도록,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덧붙인다. 먹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1) 육적 먹음이 있으니, 음식이 사람의 입에 들어가 이로 씹히고 삼켜져 소화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옛적에 가버나움 사람들이 주의 살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분에게 논박당하였다(요 6:60-63). 그리스도의 살이 큰 사악함과 잔혹함 없이는 육적으로 먹힐 수 없는 것같이, 모든 사람이 고백하듯 그것은 몸을 위한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황의 교령 중 ‘에고 베렝가리우스’(거룩히 함 편, 제2구분)라는 그 법규를 인정하지 않는다. 경건한 고대가 믿지 않았고 우리도 믿지 않으니, 곧 그리스도의 몸이 육신의 입으로 육적으로, 실체적으로 먹힐 수 있다는 것이다. (2)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먹음이 있으니, 바로 그 음식이 영으로 변한다고 생각될 그런 것이 아니라, (주의 몸과 피가 그 자체의 본질과 고유성에 남아 있되) 그것들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육적 방식이 아니라 영적 방식으로 성령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거룩히 구별된 우리 주의 살과 피로 우리를 위하여 마련된 것들(곧 죄 사함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적용하고 베푸시니,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이제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가 그분 안에 살고, 우리로 참 믿음으로 그분을 붙들게 하사, 그분이 우리에게 그러한 영적 음식과 음료 곧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신다. 육적 음식과 음료가 우리 몸을 새롭게 하고 강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생명 가운데 지키는 것같이,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어진 그리스도의 살과 우리를 위하여 흘려진 그분의 피가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하고 강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살아 있게 보존하니, 그것들이 육적으로 먹히고 마셔지는 한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에게 영적으로 전달되는 한에서 그러하다. 주께서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 6:51) 하셨고, 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곧 육적으로 먹는 것)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먹음으로 음식을 우리 몸에 받아들여야 그것이 우리 안에서 일하고 그 효력을 우리 안에 나타내는 것같이(음식이 우리 밖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전혀 유익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그분이 우리의 것이 되고 그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분 안에 살게 된다. 그분이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하셨고, 또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 그가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57) 하셨다. 이 모든 것으로 명백히 드러나니, 영적 음식으로 우리가 뜻하는 것은 어떤 상상의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 주 예수의 바로 그 몸이라, 그것이 신실한 자들에게 육적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영적으로 받아진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 주요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교리를 온전히 따른다. 그리고 주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이것이 구원에 너무도 필요하여, 그것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영적 먹음과 마심은 주의 만찬 없이도,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마다 어디서나 일어난다. 이를 위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그 말이 잘 들어맞으니 ‘어찌하여 네 이와 배를 준비하느냐? 믿으라, 그러면 네가 이미 먹은 것이라’ 하였다. (3) 앞서 말한 영적 먹음 외에, 주의 몸을 성례적으로 먹음이 있으니, 그것으로 신자는 주의 참 몸과 피에 영적으로 또 내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또한 주의 상에 나아옴으로 주의 몸과 피의 보이는 성례를 외적으로 받는다. 참으로 신자는 믿음으로 전에도 생명을 주는 그 음식을 받았고 여전히 받고 있으나, 그가 성례를 받을 때에는 무언가 더 받는다. 그는 주의 몸과 피에 계속해서 교통하며, 그의 믿음이 영적 양식으로 날마다 점점 더 불붙고 더 강해지고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동안 믿음은 끊임없는 자라남을 가지며, 외적으로 참 믿음으로 성례를 받는 자는 표만 받는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가 말한 대로) 그것 자체를 누린다. 더욱이 그는 주의 제정과 명령에 순종하고, 기쁜 마음으로 자기와 온 인류의 구속을 인하여 감사하며, 주의 죽으심을 신실히 기념하고, 자기가 그 몸의 지체인 교회 앞에서 그것을 증언한다. 또한 성례를 받는 자들에게 인 쳐지니, 곧 주의 몸이 주어지고 그 피가 흘려진 것이 사람 일반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특별히 신실한 성찬 참여자 각 사람을 위해서이며, 그분이 그에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음식과 음료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 없이 주의 이 거룩한 상에 나아오는 자는 외적 성례에만 참여하는 자가 되고, 구원에 이르는 생명이 나오는 성례의 내용은 전혀 받지 못하니, 그러한 자들은 합당치 않게 주의 상에서 먹는다. ‘누구든지 주의 떡을 합당치 않게 먹고 주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요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6-29). 그들이 참 믿음으로 나아오지 않을 때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모독하며 따라서 자기에게 정죄를 먹고 마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와 결합하되, 떡이 성례적 방식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거나, 그리스도의 몸이 떡 아래 육적으로 숨어 있어 떡의 형태 아래 예배받아야 한다거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 자체도 받는다고 생각할 만큼 결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성부의 우편에 있으니,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높이 들려야 하고 떡에 고정되어서는 안 되며, 주께서 떡 안에서 예배받으셔서도 안 된다. 그러나 주께서 자기 교회가 만찬을 거행할 때에 그 교회에 부재하시는 것은 아니다. 해가 하늘에서 우리에게 부재하면서도 그럼에도 우리 가운데 효력 있게 임재하거니와, 하물며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비록 몸으로는 하늘에서 우리에게 부재하실지라도, 우리 가운데 육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그 살아 있는 역사로, 또 그분 자신이 그 마지막 만찬에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임재하심이 얼마나 더하겠는가(요 14·15·16장). 이로써 따라오니, 우리가 그리스도 없이 만찬을 가지는 것이 아니요,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가 모든 고대가 그렇게 부른 대로 피 없는 신비적 만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주의 만찬을 거행할 때에, 우리가 그 지체인 그 몸을 유념하라고 권면받으며, 따라서 우리가 우리 형제들과 화목하고, 거룩히 살며, 사악함과 이방 종교로 우리를 더럽히지 말고, 도리어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참 믿음 가운데 견디어 거룩한 삶에 뛰어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만찬에 나아오려 할 때에 사도의 명령을 따라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이 매우 필요하니, 첫째로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곧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고 그들을 회개로 부르러 오셨음을 우리가 믿는지, 또 각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건짐받고 구원받은 자의 수에 드는지 믿는지를 살펴야 한다. 또 그가 이 사악한 삶을 바꾸어 거룩히 살기로, 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참 신앙과 형제들과의 화목 가운데 견디기로, 또 자기 구원을 인하여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를 드리기로 작정하였는지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주의 첫 제정과 사도들의 교리에 가장 가까운 만찬의 예식 곧 방식 곧 형식이 가장 단순하고 탁월하다고 생각하니,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경건히 기도하며, 주께서 사용하신 그 행위 자체와 그것의 되풀이를 행하고, 주의 몸을 먹고 그 피를 마시며, 주의 죽으심을 유익하게 기념하고 신실히 감사하며, 교회의 몸의 연합 안에서 거룩히 사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실한 자들에게서 성례의 한 부분 곧 주의 잔을 빼앗은 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마 26:27) 하신 주의 제정을 심히 거스르기 때문이니, 그분이 떡에 관하여는 그토록 분명히 말씀하지 않으셨다. 교부들이 사용한 미사가 어떤 종류였는지, 그것이 용납될 만하였는지 용납될 수 없었는지를 우리는 지금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자유로이 말하노니, 이제 로마 교회 전역에서 사용되는 미사가 많고 정당한 이유로 우리 교회들에서 온전히 폐지되었으니, 간략함을 위하여 우리는 지금 그것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다. 참으로 우리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가장 유익한 행위를 헛된 구경거리로 바꾸었기 때문이요, 또 미사가 공로의 일로 만들어져 돈을 받고 드려지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사제가 주의 바로 그 몸을 만들어 산 자와 죽은 자의 죄 사함을 위하여서까지 그것을 실제로 드린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더하니, 그들이 그것을 하늘에 있는 성도들의 영예와 예배와 경의를 위하여(또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구제를 위하여) 행한다는 것 등이다.
22 Of Holy and Ecclesiastical Meetings
비록 모든 사람이 사적으로 집에서 성경을 읽고 가르침으로 서로 참 신앙 안에서 덕을 세우는 것이 합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에게 합법적으로 전파되고, 기도와 간구가 공적으로 드려지며, 또한 성례가 합법적으로 집행되고, 가난한 자를 위하여 또 모든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거나 교회의 부족을 채우기 위하여 헌금이 모아지도록, 거룩한 모임과 교회적 회집이 있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사도적이고 초대적인 교회에 경건한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그러한 회집이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멸시하고 그것들에서 자기를 분리하는 자들은 참 신앙을 멸시하는 자들이니, 목사와 경건한 위정자들이 그들을 권하여 거룩한 회집에 완고히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제 교회적 회집은 숨겨지고 은밀해서는 안 되고 공개적이고 공동의 것이어야 하나, 그리스도와 교회의 원수들의 박해가 그것들을 공개적이게 두지 않을 때는 예외이다. 우리는 초대 교회가 로마 황제들의 폭정 아래 있을 때에 옛적에 은밀한 구석에서 어떤 회집을 가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이 함께 모이는 그 장소들은 단정하고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교회에 합당하게 하라. 그러므로 그 목적을 위하여 크고 아름다운 집이나 예배당을 택하되,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것에서 정결케 하라. 그리고 모든 것을 단정함과 필요와 경건한 합당함에 가장 맞게 정돈하여, 예식과 질서와 교회의 필요한 용도에 요구되는 것이 하나도 부족하지 않게 하라.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손으로 지은 전에 거하지 않으심을 믿는 것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안에서 거행되는 거룩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예배에 바쳐진 장소가 속되지 않고 거룩함을 안다. 그러므로 거기에 드나드는 자들은 거룩한 장소에 있는 자로서,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 있는 자로서 경외와 단정함으로 처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러 모이는 교회와 장소에서 모든 지나친 옷차림과, 모든 교만과, 그 밖에 그리스도인의 겸손과 절제와 단정함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다 버려야 한다. 교회의 참 단장은 상아와 금과 보석에 있지 않고, 교회에 있는 자들의 절제와 경건과 덕에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결론적으로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그러므로 거룩한 회집에서는 모든 낯선 언어가 잠잠하게 하고, 모든 것을 그 모임의 모든 사람이 알아듣는 통용 언어로 발설하게 하라.
23 Of the Prayers of the Church, of Singing, and of Canonical Hours
참으로 사람이 자기가 아는 어떤 언어로든 사적으로 합법적으로 기도할 수 있으나, 공적 기도는 거룩한 회집에서 통용 언어 곧 모든 이에게 알려진 언어로 드려야 한다. 신실한 자들의 모든 기도가 오직 하나님께,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로, 참 믿음과 순수한 사랑에서 부어지게 하라. 성인을 부르거나 그들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할 중재자로 사용하는 것으로 말하면, 우리 주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참 신앙이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기도는 위정자와 왕들과 권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교회의 사역자들을 위하여, 또 교회의 모든 필요를 위하여 드려야 하며, 특히 교회의 어떤 재난 가운데서는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기꺼이 기도해야지 강요로나 어떤 상을 위하여 기도해서는 안 되며, 마치 교회에서가 아니면 기도하는 것이 합당치 않은 것처럼 미신적으로 기도를 어떤 장소에 매어서도 안 된다. 공적 기도가 모든 교회에서 형식과 때에 있어 동일하거나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모든 교회가 자기 자유를 사용하게 하라. 소크라테스가 그의 『역사』에서 ‘어느 나라나 민족에서든 기도에 있어 온전히 일치하는 두 교회를 찾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 차이의 장본인은, 내 생각에, 여러 시대에 교회를 다스린 자들이었다. 그러나 어떤 교회들이 일치한다면 그것은 큰 칭찬을 받을 만하고 다른 교회들이 본받을 만하다. 이 밖에, 다른 모든 일에서와 같이 공적 기도에도 정도와 절도가 있어야 하니, 그것이 지나치게 길고 지루하지 않게 하라. 그러므로 그러한 거룩한 회집에서는 복음을 가르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주고, 회집의 백성이 지나치게 긴 기도로 지치지 않도록 부지런히 유의하여, 복음의 전파를 들어야 할 때에 그들이 지루함으로 스스로 나가거나 회집을 온전히 해산하기를 바라지 않게 하라. 그러한 자들에게는 다른 때라면 충분히 짧은 설교도 지나치게 길게 보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설교자들도 절도를 지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회집에서의 찬송도, 그것이 사용되는 곳에서는 절제되어야 한다. 그들이 그레고리안 성가라 부르는 그 노래에는 많은 천박한 것이 들어 있으니, 그러므로 우리 교회와 대부분의 다른 개혁교회가 정당한 이유로 그것을 배척한다. 어떤 교회들이 아무 찬송 없이 좋은 방식으로 신실히 기도한다면, 그렇다고 정죄받을 것이 아니니, 모든 교회가 거룩한 음악의 유익과 기회를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대의 증언으로 확실하니, 찬송의 관습이 동방 교회에서 매우 오래된 것같이, 서방 교회에서는 그것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오래 걸렸다. 옛적에는 정시과(定時課) 같은 것, 곧 하루의 어떤 시간에 맞춘 고정된 기도를 정하여 그 안에서 영창하거나 자주 되풀이하는 것—교황주의자들의 방식 같은 것—이 없었으니, 이는 그들의 정시과에 정해진 많은 과업과 여러 다른 논거로 입증될 수 있다. 더욱이 그들에게는 (내가 더 말하지 않을) 불합리한 것이 많으니, 우리 교회가 그것들을 잘 생략하고 하나님의 보편적 교회에 더 유익한 것으로 대체하였다.
24 Of Holydays, Fasts, and Choice of Meats
비록 신앙이 때에 매여 있지는 않으나, 때를 합당하게 나누고 배분하지 않고는 신앙이 심기고 행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가 공적 기도와 복음 전파와 성례 거행을 위하여 자기에게 어떤 때를 택하니,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이 교회의 정함을 뒤엎는 것이 합당치 않다. 신앙의 외적 행위에 어떤 합당한 때와 여유가 배분되지 않으면, 의심 없이 사람들이 자기 일로 인하여 그것에서 온전히 끌려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옛 교회들에 한 주에 모임을 위하여 정해진 어떤 시간이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주의 날 자체가 사도들의 때 이래로 신앙의 행위와 거룩한 쉼에 거룩히 구별되었음을 본다. 이것을 이제 우리 교회들도 하나님의 예배와 사랑의 증진을 위하여 매우 잘 지킨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날을 유대인처럼 지키는 것이나 어떤 미신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우리는 한 날을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하게 여기지 않고, 단순한 쉼 자체가 하나님께 받으실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유대인의 안식일이 아니라 주의 날을 거행하고 지키되, 자유로운 준수로 한다. 더욱이 교회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따라 주의 나심과 할례와 고난과 부활과 하늘로 오르심과 그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심의 기억을 경건히 거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매우 잘 인정한다. 그러나 사람이나 떠난 성인을 위하여 정해진 축일로 말하면, 우리는 그것들을 인정할 수 없다. 참으로 축일은 율법의 첫째 돌판에 속하며 하나님께만 특별히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성인을 위하여 정해지고 우리가 폐지한 그 축일들에는 무익하고 용납될 수 없는 천박한 것이 많이 들어 있다. 그동안 우리는 성인의 기억이 합당한 때와 장소에서 설교 가운데 백성에게 선한 유익으로 천거될 수 있고, 거룩한 사람들의 거룩한 본보기가 모두에게 본받도록 그들의 눈앞에 놓일 수 있음을 고백한다.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가 폭식과 만취와 온갖 정욕과 무절제를 더 날카롭게 정죄할수록, 그만큼 더 간절히 그리스도인의 금식을 우리에게 천거한다. 금식은 다름 아니라 경건한 자의 절제와 자제요, 우리 육신을 깨어 지키고 징계하는 것으로, 당장의 필요를 위하여 취하는 것이니,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육신을 기르는 것들을 육신에게서 거두어, 육신이 더 기꺼이 또 쉽게 영에 순종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돌아보지 않고, 하루 한 번 배를 채우고 정해진 기간 동안 어떤 음식을 삼가면 금식한 것이라 상상하며, 바로 이 행한 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공로를 얻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전혀 금식하지 않는 것이다. 금식은 성도들의 기도와 모든 덕을 돕는 것이나, 유대인이 음식에서는 금식하되 사악함에서는 금식하지 않은 그 금식은 하나님께 전혀 기쁨이 되지 않았으니, 우리가 선지서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제 금식은 공적이거나 사적이다. 옛적에 그들은 어려운 때와 교회의 환난에 공적 금식을 거행하였으니, 그 안에서 함께 저녁까지 음식을 삼가고 그 온 시간을 거룩한 기도와 하나님의 예배와 회개에 바쳤다. 이것들은 애곡과 한탄과 별로 다르지 않았으니, 이것들에 관하여 선지서, 특히 요엘 2장에 자주 언급된다. 이러한 금식이 교회가 곤경에 처한 오늘날에도 지켜져야 한다. 사적 금식은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안에서 영이 약해짐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사용하니, 그렇게 그는 육신을 기르고 강하게 할 것을 거둔다. 모든 금식은 자유롭고 기꺼운 영에서, 참으로 겸손해진 자에게서 나와야 하며, 사람의 갈채와 환심을 얻으려고 꾸며져서는 안 되고, 하물며 사람이 그것으로 의를 공로로 얻으려는 목적으로는 더더욱 안 된다. 도리어 각 사람은 육신을 기를 것을 육신에게서 빼앗고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려는 이 목적으로 금식하라. 사순절 금식은 고대의 증언은 있으나 사도들의 글에서는 없으니, 그러므로 신실한 자들에게 부과해서도 안 되고 부과할 수도 없다. 옛적에 이 금식에 여러 방식과 용법이 있었음이 확실하니, 이에 가장 오래된 저술가 이레나이우스가 ‘어떤 이는 이 금식을 하루만 지켜야 한다 하고, 다른 이는 이틀, 다른 이는 더, 어떤 이는 사십 일로 한다. 이 금식을 지키는 이 다양함은 우리 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훨씬 전에, 내 생각에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전해진 것을 단순히 지키지 않고 게으름이나 무지로 곧 다른 관습에 빠진 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였다. 더욱이 역사가 소크라테스가 ‘이 문제에 관하여 옛 기록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내 생각에는 사도들이 이것을 각 사람 자신의 판단에 맡겨, 각 사람이 두려움이나 강요 없이 선한 것을 행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제 음식의 선택에 관하여는, 우리는 금식에 있어 육신을 더 정욕적이게 하고 육신이 무절제하게 즐기며 육신이 무엇보다 응석받이가 되는 모든 것을, 그것이 생선이든 향신료든 진미든 좋은 포도주든 다 육신에게서 거두어야 한다고 본다. 그 밖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사람의 사용과 섬김을 위하여 지어졌음을 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니(창 1:31),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것들 사이에 아무 차별을 두지 않고 합당한 절제로 사용해야 한다. 사도가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딛 1:15) 하였고, 또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25) 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사도가 음식을 삼가라고 가르치는 자들의 교리를 ‘귀신의 가르침’이라 부르니, ‘하나님이 지으신 바 음식은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1,3,4) 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사도가 골로새서에서, 지나친 절제로 자기에게 거룩하다는 평판을 얻으려는 자들을 책망한다(골 2:20-23). 그러므로 우리는 타티아누스파와 엔크라티테스파와, (세바스테의) 에우스타티우스의 모든 제자를 전적으로 싫어하니, 그들을 거슬러 강그라 대회가 소집되었다.
25 Of Catechising, of Comforting and Visiting the Sick
주께서 자기 옛 백성에게 어려서부터 청년을 잘 가르치는 일에 큰 돌봄과 부지런함을 기울이라 명하셨고, 더욱이 자기 율법에서 그들에게 가르치고 성례의 비밀을 그들에게 선언하라고 명백히 명하셨다. 이제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들의 글로 분명하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새 백성의 청년에게도 못지않게 돌봄을 가지시니(그분이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14]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들이 자기 청년을 부지런히 또 일찍이 교리문답으로 가르쳐, 믿음의 첫 기초를 놓고, 십계명과 사도신경과 주기도문과 성례의 교리와 그 밖의 우리 신앙의 비슷한 원리와 주요 항목을 해설함으로 우리 신앙의 기초를 신실히 가르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다. 그리고 여기서 교회가 자기 자녀들이 잘 가르침받기를 사모하고 기뻐하여, 자녀들을 데려와 교리문답으로 가르치게 하는 일에 그 신실함과 부지런함을 행하게 하라. 사람들이 연약함으로 시달리거나 병들어 질병으로 쇠약해질 때보다 더 심각한 시험에 결코 더 많이 노출되지 않으므로, 교회의 목사들이 그러한 질병과 연약함에서보다 양 떼의 안전을 위하여 더 깨어 조심할 때는 결코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병자를 일찍이 심방하게 하고, 일이 그렇게 요구하면 병자가 그들을 속히 부르게 하라. 그들이 병자를 위로하고 참 믿음 안에 굳게 하며, 끝으로 사탄의 위험한 제안에 맞서 그들을 강하게 하라. 마찬가지로 그들이 병자와 함께 그 집에서 기도하게 하고, 필요하면 공적 모임에서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며, 그들이 이 생에서 복된 떠남을 가지도록 돌보게 하라. 종부성사로 심방하는 교황주의의 것으로 말하면, 우리가 앞서 말하였거니와,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 안에 불합리하고 정경적 성경에 인정되지 않는 것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6 Of the Burial of the Faithful, and of the Care which is to be had for such as are Dead; of Purgatory, and the Appearing of Spirits
성경은, 신실한 자들의 몸이 성령의 전이요 우리가 참으로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리라 믿는 것이므로, 아무 미신 없이 존귀히 땅에 맡겨져야 한다고 지시한다. 게다가 우리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을 존귀히 언급하고, 그들이 남긴 자들 곧 그 과부와 고아들에게 사랑의 모든 의무를 행해야 한다고 지시한다. 죽은 자를 위한 다른 돌봄을 우리는 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의 몸을 소홀히 하거나 부주의하고 멸시하듯 땅에 던지며 고인에 대하여 좋은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고 그들이 남긴 자들을 조금도 돌아보지 않은 견유학파를 크게 싫어한다. 또 우리는 죽은 자에게 지나치고 잘못된 방식으로 극진한 자들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들은 이방인처럼 자기 죽은 자를 크게 애곡하고 탄식한다(다만 사도가 허락하는 그 절제된 애곡[살전 4:13]은 우리가 책망하지 않으니, 슬픔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인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죽은 자를 위하여 제사하고 어떤 기도를 중얼거리되 그 수고에 대한 삯 없이는 하지 않으며, 이 기도로 자기 친구들을 고통에서 건진다고 생각하니, 곧 죽음에 싸인 그들이 그러한 애처로운 노래로 다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긴다. 우리는 신실한 자들이 육체의 죽음 후에 곧바로 그리스도께로 가며, 따라서 죽은 자를 위한 도움이나 기도나 산 자의 그 밖의 어떤 의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불신자들이 곤두박질하여 지옥에 던져지며, 거기서는 산 자의 어떤 봉사로도 악인에게 돌아올 길이 열리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연옥의 불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나는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죄의 절대적 정결케 하심과,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 말씀들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또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요 13:10). 이제 죽은 자의 영 곧 영혼이 때때로 산 자에게 나타나 자기를 자유롭게 할 어떤 의무를 그들에게 구한다고 기록된 것으로 말하면, 우리는 그러한 나타남을 마귀의 속임과 간계와 기만에 헤아리니, 그는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는 것같이, 참 믿음을 뒤엎거나 그것을 의심에 빠뜨리려고 이를 악물고 애쓴다. 주께서 구약에서 우리에게 죽은 자에게 진리를 묻거나 영들과 무슨 상관을 갖는 것을 금하셨다(신 18:10,11). 그리고 복음의 진리가 선언하는 대로, 고통에 매인 그 부자에게 땅의 자기 형제들에게 돌아갈 어떤 길도 거부되니, 하나님의 신탁이 선언하여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 만일 죽은 자 가운데서 누가 살아날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29,31) 하였다.
27 Of Rites, Ceremonies, and Things Indifferent
옛 백성에게 옛적에 어떤 의식이 주어졌으니, 율법 아래에서 마치 초등교사나 후견인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일종의 가르침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일단 오시고 율법이 제거되매,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롬 6:14), 의식은 쓰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것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보존하거나 회복하기는커녕, 교회에 아무 짐도 지우지 않겠다고 분명히 증언하였다(행 15:28). 그러므로 우리가 유대 교회의 방식을 따라 교회에 의식 곧 예식을 늘린다면, 우리는 유대교를 다시 들이고 세우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많고 다양한 예식에, 마치 일종의 가르침에 매이기를 바라는 자들의 견해에 속하지 않는다. 사도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식과 예식조차 그리스도인 백성에게 떠맡기려 하지 않았다면, 제정신을 가진 누가, 청컨대, 사람이 고안한 발명을 그것에 떠맡기겠는가? 교회에 의식의 더미가 클수록, 그리스도인의 자유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분을 믿는 믿음에서도 그만큼 더 많이 빼앗기니, 백성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해야 할 것을 의식에서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적고 절제되고 단순한 예식이 경건한 자들에게 충분하다. 그리고 교회들에 예식의 다양함이 발견된다고 해서 아무도 교회들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소크라테스가 그의 『교회사』에서 ‘도시와 나라마다 지켜지는 교회들의 모든 의식을 글로 적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어떤 신앙도 그것들에 관하여 한 동일한 교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지라도, 어디서나 같은 의식을 지키지는 않는다. 한 동일한 믿음을 가진 자들조차 의식에 관하여는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였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러하다. 그리고 우리도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서 주의 만찬 거행과 그 밖의 어떤 것들에 다양함을 가지나, 교리와 믿음에서는 다르지 않으며, 우리 교회들의 일치와 사귐이 찢기지도 않는다. 교회들은 늘 그러한 예식에서 자기 자유를 사용하였으니, 그것들이 상관없는 것(아디아포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오늘날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노니, 참으로 상관없지 않은 것을 상관없는 것에 헤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어떤 이들이 미사와 교회에서 형상 사용을 상관없는 것으로 헤아리곤 한 것처럼. 제롬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상관없는 것이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이니, 그것을 하든 하지 않든 그로 인하여 결코 더 의롭거나 불의해지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상관없는 것이 믿음의 고백으로 끌려가면, 그것은 자유롭기를 그친다. 바울이 보이듯, 사람이 우상에게 바쳐졌다고 아무도 일러 주지 않으면 고기를 먹는 것이 합당하나(고전 10:27,28), 그렇지 않으면 합당치 않으니, 그것을 먹는 자가 먹음으로 우상숭배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고전 8:10).
28 Of the Goods of the Church, and the Right Use of Them
그리스도의 교회는 군주들의 후함과, 자기 재물을 교회에 바친 신실한 자들의 너그러움으로 재물을 가진다. 교회가 그러한 재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요, 옛적부터 교회에 필요한 것들을 유지하기 위하여 재물을 가져 왔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 재물의 참된 용도는, 옛적에도 지금도, 학교와 거룩한 회집에서 배움을 유지하고 교회의 모든 섬김과 예식과 건물을 유지하는 것이요, 끝으로 교사와 학생과 사역자를 그 밖의 필요한 것들과 함께 유지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가난한 자를 돕고 구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회 재물을 합법적으로 분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지혜로운 자, 자기 가족을 다스림에 좋은 평판을 받는 자들을 택하라. 그러나 교회의 재물이 시대의 해악과 어떤 자들의 무모함과 무지와 탐욕으로 어떤 오용으로 돌려졌다면, 경건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그것을 다시 그 거룩한 용도로 회복하게 하라. 그러한 불경한 오용을 묵인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와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과 행실에 부패가 스며든 학교와 대학이 개혁되어야 하며, 거기서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하여 경건하고 신실하고 지혜롭게 마련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29 Of Single Life, Wedlock, and Household Government
위로부터 정결의 은사를 받아 마음 곧 온 정신으로 순결하고 자제할 수 있으며 정욕으로 심히 불타지 않는 자들은, 자기가 그 하늘의 은사를 받았다고 느끼는 동안 그 부르심 가운데 주를 섬기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다른 이들 위에 자기를 높이지 말고, 단순함과 겸손으로 날마다 주를 섬기게 하라. 그러한 자들은 가족의 사사로운 일로 마음이 분산되는 자들보다 하늘의 일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그 은사가 거두어져 끊임없는 불타오름을 느끼면, 사도의 말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 7:9)를 마음에 떠올리게 하라. 혼인(자제 못함의 약이요 자제 그 자체)은 주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셨으니, 그분이 그것을 가장 후하게 복 주시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뗄 수 없이 연합하여 큰 화목 가운데 함께 살기를 원하셨다(창 2:24; 마 19:5,6). 이에 우리는 사도가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히 13:4) 한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부다처와, 재혼을 정죄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우리는 혼인이 주를 경외함으로 합법적으로 맺어져야 하며, 혼인이 근친상간이 되지 않도록 어떤 촌수의 결합을 금하는 법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혼인은 부모나 부모를 대신하는 자들의 동의로, 또 주께서 혼인을 정하신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맺어지게 하라. 그리고 그것이 교회에서 기도와 축복으로 공적으로 확정되게 하라. 더욱이 연합한 사람들의 화평과 신실함과 의무와 사랑과 순결로 그것을 거룩히 지키게 하라. 그러므로 다툼과 논쟁과 정욕과 간음을 조심하게 하라. 교회에 합법적 재판과 거룩한 재판관을 세워, 혼인을 지키고 모든 부정직과 수치를 억누르며, 그 앞에서 혼인의 분쟁이 판결되고 끝맺어지게 하라. 또 자녀들이 부모에게 주를 경외함으로 양육되게 하라. 그리고 부모가 자기 자녀를 위하여 마련하되, 사도의 말 ‘누구든지 자기 친족 … 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를 기억하게 하라. 그러나 특히 자녀에게 정직한 기예와 직업을 가르쳐 그것으로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게 하라. 그들을 게으름에서 지키고,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 대한 참 신뢰를 그들 안에 심으라. 그들이 불신이나 지나친 무사안일이나 더러운 탐욕으로 방종해져 결국 좋지 못한 데 이르지 않게 하려 함이다. 이제 부모가 참 믿음으로 혼인의 의무와 가족의 다스림으로 행하는 그 일들이 하나님 앞에 참으로 거룩하고 선한 일이며, 기도와 금식과 구제 못지않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이 가장 확실하다. 사도가 그의 서신들에서, 특히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사도와 함께, 혼인을 금하거나 그것을 거룩하지 않거나 깨끗하지 않다고 드러내어 헐뜯거나 은밀히 깎아내리는 자들의 교리를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에 헤아린다. 또 우리는 부정한 독신과, 방탕한 정욕과, 드러난 음행이든 은밀한 음행이든 음행과, 위선을 가장하는 자들의 자제—그들이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자제 못하는 자일 때—를 미워한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는 부를 인정하지 않거나 부자를 멸시하지 않으니, 그들이 경건하고 자기 부를 잘 사용한다면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파(使徒派) 등의 분파를 책망한다.
30 Of the Magistracy
위정자는 어떤 종류이든 하나님 자신이 인류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정하셨으니, 그가 세상에서 으뜸 자리를 가지게 하셨다. 위정자가 교회의 대적이면 교회를 매우 크게 방해하고 어지럽힐 수 있으나, 그가 교회의 벗이요 지체이면 교회의 가장 유용하고 탁월한 지체이니, 교회를 매우 크게 유익하게 하고 끝내 매우 탁월하게 돕고 진전시킬 수 있다. 시민 위정자의 으뜸 의무는 평화와 공적 안정을 마련하고 유지하는 것이니,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함과 참 신앙으로 길들여질 때보다—곧 주의 백성의 가장 거룩한 왕들과 군주들의 본을 따라, 진리의 전파와 순수하고 진실한 믿음을 증진하고, 거짓과 모든 미신을 모든 불경과 우상숭배와 함께 뿌리 뽑으며, 하나님의 교회를 지킬 때보다—더 복되게 그것을 행할 때는 의심 없이 결코 없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신앙에 대한 돌봄이 주로 거룩한 위정자에게 속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손에 쥐고, 그것에 어긋나는 것이 아무것도 가르쳐지지 않도록 살피게 하라. 마찬가지로 그가 하나님께 맡겨진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만든 좋은 법으로 다스리게 하고, 그들을 권징과 의무와 순종 가운데 지키게 하라. 그가 올바로 재판함으로 심판을 행하게 하고, 어떤 사람의 외모도 보지 말며 뇌물을 받지 말게 하라. 그가 과부와 고아와 고난받는 자를 부당함에서 보호하게 하고, 속임으로나 폭력으로 불의한 자들을 억누르고 참으로 잘라 내게 하라. ‘그가 공연히 하나님의 칼을 가진 것이 아니니라’(롬 13:4). 그러므로 그가 이 하나님의 칼을 모든 악행자와 선동자와 도둑과 살인자와 압제자와 모독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벌하거나 처형하라 명하신 모든 자를 거슬러 빼게 하라. 그가 완고한 이단자(참으로 이단자인 자)—하나님의 위엄을 모독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며 참으로 끝내 그것을 멸하기를 그치지 않는 자들—를 억누르게 하라. 그리고 백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전쟁이 필요하면,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행하게 하라. 다만 먼저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평화를 구하고 전쟁 외에는 자기 백성을 결코 구할 수 없을 때에 그리하라. 위정자가 믿음으로 이런 일들을 행하는 동안, 그는 선한 그 일들로 하나님을 섬기며 주께 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재세례파를 정죄하니,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위정자의 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부인하는 것같이, 또한 누구도 위정자에게 정당히 사형당할 수 없다거나, 위정자가 전쟁을 할 수 없다거나, 위정자가 맹세를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등을 부인한다. 하나님께서 위정자—마치 세상의 아비가 되도록 주어진 자—로 자기 백성의 안전을 이루실 것이므로, 모든 백성은 위정자 안에 있는 이 하나님의 은덕을 인정하라 명령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위정자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존귀히 여기고 경외하며, 자기 아비처럼 그를 사랑하고 편들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며, 그의 모든 옳고 공평한 명령에 순종하게 하라. 끝으로 그들이 모든 관세와 세금과 그와 같은 종류의 다른 모든 의무를 신실하고 기꺼이 바치게 하라. 그리고 나라의 공동 안전과 정의가 요구하고 위정자가 부득이 전쟁을 하면, 그들이 공동의 안전과 위정자의 방어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려놓고 자기 피를 쏟게 하라.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꺼이, 용감히, 즐거이 그리하라. 위정자를 거슬러 자기를 세우는 자는 자기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정자를 멸시하는 모든 자와, 반역자와, 나라의 원수와, 선동하는 악당과, 한마디로 자기가 진 그 의무를 행하기를 드러나게든 은밀하게든 거부하는 모든 자를 정죄한다. 맺음말—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가장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의 유일한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백성의 통치자들과 우리와 그분의 온 백성에게 복 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분께 찬양과 영광과 감사가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