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tome, Comprehensive Summary, Rule and Norm Comprehensive Summary, Rule and Norm
모든 교리가 그것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고, 발생한 오류 교설[논쟁]이 그것에 따라 그리스도교적으로 결정되고 설명되어야 하는 포괄적 요약, 규범과 척도.
1.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모든 교리가 모든 교사들과 함께 그것에 따라 평가되고 판단되어야 하는 유일한 규범이자 척도는 오직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적·사도적 성경뿐이라는 것이다. 시편 119편 105절에 기록된 바와 같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또한 사도 바울이 말한 바,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너희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그러나 고대든 현대든 어떤 이름을 지녔든 다른 교사들의 저술은 성경과 동등하게 여겨져서는 안 되며, 그것들 전부가 성경에 종속되어야 하고, 사도들의 시대 이후 선지자와 사도들의 [순수한] 교리가 어떤 방식으로 어느 곳에서 보존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증언으로서만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 이상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2. 또한 사도들의 시대 직후, 그리고 그들이 아직 살아 있던 동안에도 거짓 교사와 이단자들이 일어났고, 이에 맞서 초대 교회에서 신조들, 곧 간결하고 압축적인 [정형적] 고백들이 작성되었으며, 이것들은 정통적이고 참된 교회의 일치되고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신앙과 고백으로 여겨졌으니, 곧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이다. 우리는 이것들에 우리를 결속시키며, 이로써 그것들에 반하여 하나님의 교회 안에 들어온 모든 이단과 교설을 배격한다.
3. 그러나 우리 시대에 발생한 신앙 문제의 분열들에 관하여, 우리는 특히 교황권과 그 거짓 예배, 우상숭배, 미신에 맞서, 그리고 다른 분파들에 맞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과 고백의 일치된 합의이자 선언으로서, 우리 시대의 신조로서 다음을 여긴다. 곧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의 대제국의회에서 황제 카를 5세에게 제출된 제1차 불변(不變)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그 변증서, 그리고 1537년 슈말칼덴에서 작성되어 당시 주요 신학자들이 서명한 조항들이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은 평신도와 그들 영혼의 구원에도 관계되므로, 우리는 루터 박사의 소교리문답과 대교리문답이 루터의 저작에 포함된 그대로를 평신도의 성경으로서 고백하는바, 거기에는 성경에서 더 길게 다루어진 모든 것이,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압축되어 담겨 있다.
위에서 공표한 바, 이 기준에 모든 교리가 부합되어야 하며, 이에 반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일치된 선언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배격되고 정죄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약과 신약의 성경과 그 밖의 모든 저술 사이의 구별이 보존되며,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심판자, 규범, 척도로 남으니, 그 유일한 시금석에 따라 모든 교리가 선한지 악한지, 옳은지 그른지 분별되고 판단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용된 다른 신조들과 저술들은 성경처럼 심판자가 아니라, 다만 그때그때 성경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논쟁이 된 조항들에 관하여 당시에 살던 이들에 의해 어떻게 이해되고 설명되었는지, 또 반대되는 교설이 어떻게 배격되고 정죄되었는지에 대한 신앙의 증언이자 선언일 뿐이다.
Epitome, Article I: Of Original Sin Article I. Of Original Sin
논쟁의 핵심(STATUS CONTROVERSIAE): 이 논쟁에서의 주된 물음.
원죄(原罪)가 본래적으로 또 아무런 구별 없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실체·본질 자체인가, 혹은 적어도 그 본질[실체]의 주요하고 가장 좋은 부분, 곧 가장 높은 상태와 능력에 있는 이성적 영혼 자체인가. 아니면 타락 이후에도 인간의 실체·본성·본질·몸·영혼과 원죄 사이에 구별이 있어서, 본성[자체]은 하나의 것이고, 타락한 본성에 내재하여 본성을 부패시키는 원죄는 다른 것인가.
긍정 명제(AFFIRMATIVE THESES).
1.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인간의 본성 사이에 구별이 있으니, 곧 그가 본래 하나님에 의해 순수하고 거룩하며 죄 없이 창조되었던 그대로의 본성뿐 아니라 타락 이후 지금 우리가 지닌 그 본성과 관련해서도 그러하다. 즉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로 남아 있는 본성 자체와 원죄 사이에 구별이 있으며, 이 구별은 하나님의 일과 마귀의 일 사이의 구별만큼이나 크다.
2. 우리는 또한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이 구별은 가장 큰 주의로써 견지되어야 한다. 우리의 타락한 인간 본성과 원죄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이 교설은 창조·구속·성화 및 우리 몸의 부활에 관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주요 조항들과 충돌하며, 그것들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원죄는 가벼운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너무도 깊은 부패여서, 인간의 몸이나 영혼 안에, 그 내적이거나 외적인 능력 안에 건전하거나 부패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니, 교회가 노래하는 바와 같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과 본질이 모두 부패하였도다." 이 손상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이성으로는 분별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분별할 수 있다. 또한 오직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본성과 이 본성의 부패를 서로 분리할 수 없다.
부정 명제(NEGATIVE THESES): 반대되는 거짓 교설의 배격.
1. 그러므로 우리는, 원죄가 다만 다른 이가 범한 것에 대한 죄책(reatus)이나 부채일 뿐이며 우리 본성에는 아무런 부패가 없다는 가르침을 배격하고 정죄한다.
2. 또한 악한 정욕이 죄가 아니라 본성에 함께 창조된 본질적 속성이라는 가르침도 그러하다.
3. 우리는 마찬가지로 펠라기우스주의의 오류를 배격하니,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 이후에도 부패하지 않았으며, 특히 영적인 일들과 관련해서도 그 자연적 능력(in naturalibus) 안에서 전적으로 선하고 순수하게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4. 또한 원죄가 다만 본성의 외면에 부딪쳐 생긴 가볍고 사소한 얼룩이나 불어닥친 흠집일 뿐이라는 주장도 그러하다.
5. 또한 원죄가 다만 선한 영적 능력들에 대한 외적 장애일 뿐, 그 능력들의 박탈이나 결핍은 아니라는 주장도 그러하다.
6. 또한 인간 안에서 인간 본성과 본질이 전적으로 부패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여전히 자기 안에, 심지어 영적인 일들에서도 무언가 선한 것, 곧 선한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행하거나 행하도록 돕는 영적인 일들에서의 역량·기량·적성·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도 그러하다.
7.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또한 마니교도의 거짓 교설을 배격하니, 그것은 원죄가 본질적이고 자존(自存)하는 무언가로서 사탄에 의해 본성에 주입되어 독과 포도주가 섞이듯 본성과 뒤섞였다고 가르친다.
8. 또한 자연적 인간이 아니라 인간에게 낯설고 외래적인 어떤 다른 것이 죄를 짓는 것이며, 그로 인해 본성이 아니라 다만 본성 안의 원죄만이 고발된다는 주장도 그러하다.
9. 우리는 또한 마니교적 오류로서, 원죄가 본래적으로 또 아무런 구별 없이 타락한 인간의 실체·본성·본질 자체라는 교설을 배격하고 정죄한다.
원죄는 범하여지는 죄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실체·본질에 내재하는 것이어서, 비록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어떤 악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헛된 말도 하지 않으며, 어떤 악한 행위도 행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본성은 원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어 있으니, 이 원죄는 죄된 씨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태어나며 다른 모든 자범죄(自犯罪)의 원천이 된다. 마태복음 15장 19절에 기록된 바와 같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라." 또한 창세기 8장 21절,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Epitome, Article II: Of Free Will Article II. Of Free Will
논쟁의 핵심(STATUS CONTROVERSIAE): 이 논쟁에서의 주된 물음.
인간의 의지는 서로 다른 네 가지 상태에서 발견되니, 곧 1. 타락 이전, 2. 타락 이후, 3. 중생(重生) 이후, 4. 몸의 부활 이후이다. 그러므로 주된 물음은 오직 두 번째 상태에서의 인간의 의지와 능력에 관한 것이다. 곧 우리 시조(始祖)의 타락 이후 중생 이전에 인간이 영적인 일들에서 스스로 어떤 능력을 지니는가,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영에 의한 중생에 앞서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스스로를 갖추고 준비하며, 말씀과 거룩한 성례전 안에서 성령을 통해 베풀어진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긍정 명제(AFFIRMATIVE THESES).
1. 이 주제에 관한 우리의 교리, 믿음, 고백은 이러하다. 영적인 일들에서 인간의 지성과 이성은 전적으로 눈멀어 있으며,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니,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기록된 바와 같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 어리석게 보임이라."
2. 마찬가지로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중생하지 못한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에게서 돌아섰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으니, 오직 악하고 하나님께 반하는 것을 향한 성향과 욕구만을 지닌다. 창세기 8장 21절과 로마서 8장 7절에 기록된 바와 같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율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참으로, 죽은 몸이 스스로를 육적 생명으로 살려낼 수 없는 것과 같이,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인간도 자기를 영적 생명으로 일으킬 수 없다.
3.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수단 없이 회심을 이루지 않으시고,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들음을 사용하시니, 로마서 1장 16절에 기록된 바와 같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또한 로마서 10장 17절,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느니라." 이 말씀과 함께 성령이 임재하시어 마음을 여시므로, 사람들이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이로써 오직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회심하니, 인간의 회심은 오직 성령의 일이다.
부정 명제(NEGATIVE THESES): 반대되는 거짓 교설.
1. 스토아 학파라 불리는 철학자들과 또한 마니교도들의 망령된 주장이니, 그들은 일어나는 모든 일이 반드시 그렇게 일어나야 하며 달리 일어날 수 없고,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이, 심지어 외적인 일들에서도 강제에 의해 행해진다고 가르쳤다.
2. 우리는 또한 노골적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오류를 배격하니, 그들은 인간이 성령의 은혜 없이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돌이키고, 복음을 믿으며,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여, 이로써 죄 용서와 영생을 공로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3. 우리는 또한 반(半)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오류를 배격하니, 그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회심의 시작은 이룰 수 있으나 성령의 은혜 없이는 그것을 완성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4. 또한, 비록 인간이 중생 이전에 자유의지로는 시작을 이루기에 너무 약하더라도, 성령께서 말씀의 선포로써 시작을 이루셨다면, 그때에는 인간의 의지가 자신의 자연적 능력으로 이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보탤 수 있고, 돕고 협력하며, 스스로를 은혜에 합당하게 하고 준비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도 그러하다.
5. 또한 인간이 거듭난 후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고 온전히 성취할 수 있으며, 이 성취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義)요 이로써 영생을 공로로 얻는다는 주장도 그러하다.
6. 또한 우리는 열광주의자들(Enthusiasts)의 오류를 배격하고 정죄하니, 그들은 하나님이 수단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 없이, 또한 거룩한 성례전의 사용 없이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시고 조명하시며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신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옳다. 곧 회심에서 하나님은 성령의 이끄심을 통하여 완고하고 마지못해 하는 자들로부터 기꺼이 원하는 자들을 만드시며, 그러한 회심 이후 중생한 인간의 의지는 놀고 있지 않고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행하시는 모든 일에 협력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회심에 앞서 오직 두 가지 작용인(作用因)만이 있으니, 곧 성령과, 성령께서 회심을 이루시는 도구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은 이 말씀을 들어야 하나, 그러나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은혜와 역사하심을 통해서만 그것에 믿음으로 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Epitome, Article III: Of the Righteousness of Faith before God Article III. Of the Righteousness of Faith before God
논쟁의 핵심(STATUS CONTROVERSIAE): 이 논쟁에서의 주된 물음.
우리 교회들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취지에 따라, 우리 가련한 죄인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을 얻으며, 따라서 참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義)라는 것이 일치되게 고백되니, 이는 그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인격적으로 서로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의 물음이 일어났다. 그리스도는 어느 본성에 따라 우리의 의가 되시는가? 이로써 일부 교회들에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오류가 일어났다.
긍정 명제(AFFIRMATIVE THESES).
1. 두 오류 모두에 맞서 우리는 일치되게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그리스도는 신성에 따라서만도 아니고 인성에 따라서만도 아니라, 두 본성에 따른 온전하신 그리스도로서, 오직 그분의 순종 안에서 우리의 의가 되시니, 그 순종은 그분이 하나님이자 사람으로서 죽기까지 아버지께 드리신 것이며, 이로써 우리를 위하여 죄 용서와 영생을 공로로 마련하셨다. 로마서 5장 19절에 기록된 바와 같다. "한 사람의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 그러므로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는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우리에 앞서거나 현재이거나 뒤따르는 어떤 행위·공로·합당함도 없이 순전한 은혜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전가(轉嫁)하시며, 그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로 받아들여지고 의롭다 여겨진다는 것이다.
3.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오직 믿음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유효한 그 의를 붙드는 수단이자 도구이며, 그 믿음으로 인하여 이 믿음이 우리에게 의로 전가된다(롬 4:5).
4.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역사(歷史)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복음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게 되고, 오직 그분의 순종으로 인하여 은혜로써 죄 용서를 받음을 그분 안에서 신뢰하게 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5.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성경의 용법에 따르면 이 조항에서 "의롭다 하다(justify)"라는 말은 사면하다, 곧 죄에서 풀려났다고 선언하다를 의미한다. 로마서 8장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6. 우리는 또한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참된 신자들에게 무덤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약함과 결함이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로 인하여 믿음으로 자기에게 전가된 의도, 자기 영혼의 구원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7.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의 의에 관한 순수한 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배타적 어구들(exclusive particles), 곧 거룩한 사도 바울의 다음 말들을 특별한 부지런함으로 역설할 필요가 있다. "은혜로, 공로 없이, 율법 없이, 행위 없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8.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비록 앞서는 통회(痛悔)와 뒤따르는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稱義) 조항에 속하지는 않으나,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는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니(갈 5:6), 그리하여 선행은 언제나 의롭게 하는 믿음을 뒤따르며, 그 믿음이 참되고 살아 있다면 반드시 그것과 함께 발견된다.
부정 명제(NEGATIVE THESES): 반대되는 거짓 교설의 배격.
1. 그리스도가 오직 그분의 신성에 따라서만 우리의 의라는 것.
2. 그리스도가 오직 그분의 인성에 따라서만 우리의 의라는 것.
3. 선지자와 사도들의 말씀에서 "의롭다 하다"와 "의롭다 하심을 받다"라는 말이 죄에서 풀려났다고 선언하거나 선언받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부어 주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의롭게 만들어짐을 뜻한다는 것.
4. 믿음이 그리스도의 순종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며 역사하는 그분의 신성을 바라보며, 이 내주(內住)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덮인다는 것.
5. 믿음이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그러한 신뢰여서, 사람이 참된 회개가 없고 그 안에 아무런 사랑도 뒤따르지 않으며 양심을 거슬러 죄에 머무를 때조차 그 안에 존재하고 머무를 수 있다는 것.
6. 신자들 안에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선물들만이 거한다는 것.
7. 믿음이 구원하는 까닭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갱신(更新)이 우리 안에 시작되기 때문이라는 것.
8. 믿음이 칭의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나, 그럼에도 갱신과 사랑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의에 속한다는 것.
9.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와 그들 안에 시작된 새로운 순종에 의해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
10. 은혜의 약속이 마음으로 믿는 믿음과 입으로 하는 고백과 그 밖의 덕들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
11. 믿음이 선행 없이는 의롭다 하지 못하므로, 선행이 의를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며, 그것이 없으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
Epitome, Article IV: Of Good Works Article IV. Of Good Works
논쟁의 핵심(STATUS CONTROVERSIAE): 선행(善行)에 관한 논쟁에서의 주된 물음.
선행의 교리에 관하여 일부 교회들에 두 가지 분열이 일어났다. 첫째로, 한쪽이 "선행은 구원에 필요하다. 선행 없이는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쓴 반면, 다른 쪽은 그와 반대로 "선행은 구원에 해롭다"라고 씀으로써 일부 신학자들이 갈라졌다. 그 후 "필요한"과 "자유로운"이라는 두 낱말에 관해서도 분쟁이 일어났다.
긍정 명제(AFFIRMATIVE THESES).
1. 선행은, 그것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좋은 나무의 열매처럼 확실하고 의심 없이 참된 믿음을 뒤따른다.
2. 우리는 또한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 조항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원에 관한 물음에서도 전적으로 배제되어야 하니, 사도가 증언하는 바와 같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3. 우리는 또한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모든 사람이, 특히 성령으로 거듭나고 새롭게 된 자들이 선행을 행할 의무가 있다.
4. 이런 의미에서 "필요한", "마땅히", "반드시"라는 말들은 중생한 자들과 관련해서도 올바르게, 그리스도교적인 방식으로 사용되며, 결코 건전한 말과 표현의 양식에 반하지 않는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성"과 "필요한"이라는 말이 중생한 자들에 관하여 사용될 때에는 강제가 아니라 다만 마땅한 순종으로 이해되어야 하니, 참되이 믿는 자들은 그것을 강제나 율법의 몰아댐에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심령에서 드리며, 이는 그들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롬 6:14).
6. 따라서 "중생한 자들은 자유로운 심령에서 선행을 행한다"라고 말할 때, 이는 중생한 사람이 원할 때 선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이 그의 임의에 달려 있으며, 그가 고의로 죄에 머물러도 그럼에도 믿음을 보유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7. 도리어 이는 주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 자신이 선언하는 대로만 이해되어야 하니, 곧 해방된 심령에 관하여, 그것은 종처럼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자녀처럼 의에 대한 사랑에서 이를 행한다는 것이다(롬 8:15).
8. 비록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녀들 안의 이 자발성이 온전하지 못하고 큰 연약함의 짐을 지고 있으나 — 사도 바울이 자신에 관하여 탄식하는 바와 같다(롬 7:14-25) —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주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연약함을 그의 택함받은 자들에게 전가하지 아니하시니, 기록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10. 우리는 또한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우리 안에서 믿음과 구원을 유지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영이시며, 선행은 그 영의 임재와 내주의 증거이다.
부정 명제(NEGATIVE THESES): 반대되는 거짓 교설의 배격.
1.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표현 방식을 배격하고 정죄한다. 곧 선행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쓰는 것, 또한 선행 없이 구원받은 자가 결코 없었다는 것, 또한 선행 없이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 우리는 "선행은 구원에 해롭다"라고 말하는 그 노골적인 표현을, 그리스도교적 훈육에 거치는 것이자 해로운 것으로서 배격하고 정죄한다.
3. 우리는 또한, 믿음과 성령의 내주가 고의적 죄로 인해 상실되지 않으며, 성도와 택함받은 자들이 간음과 다른 죄들에 빠져 그 안에 머물러도 성령을 보유한다는 교설을 배격하고 정죄한다.
Epitome, Article V: Of the Law and the Gospel Article V. Of the Law and the Gospel
논쟁의 핵심(STATUS CONTROVERSIAE): 이 논쟁에서의 주된 물음.
거룩한 복음의 선포가 본래적으로 죄 용서를 알리는 은혜의 선포일 뿐 아니라, 또한 불신앙을 책망하는 회개와 책망의 선포인가 — 그들이 말하기를, 이 불신앙은 율법에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을 통하여 책망된다고 한다.
긍정 명제(AFFIRMATIVE THESES).
1.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율법과 복음의 구별은 특별히 밝은 빛으로서 큰 부지런함으로 교회 안에서 견지되어야 하니, 사도 바울의 권고에 따라 이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옳게 나뉜다.
2.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율법은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교훈으로서, 무엇이 옳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가르치며, 죄이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것을 책망한다.
3. 그러므로 죄를 책망하는 모든 것은 율법의 선포이며 그것에 속한다.
4. 그러나 복음은 본래적으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율법에 의해 정죄된 인간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그러한 교훈이니, 곧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를 속(贖)하시고 만족을 이루셨으며, 그의 아무런 공로도 없이 그를 위하여 죄 용서와 하나님 앞에 유효한 의와 영생을 얻으셨다는 것이다.
5. 그러나 "복음"이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동일한 한 가지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복음"이라는 용어로써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에서 — 그의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 제시하신 그리스도의 교훈 전체를 의미한다면, 복음이 회개와 죄 용서의 선포라고 말하고 쓰는 것은 옳다.
6. 그러나 율법과 복음이, 마찬가지로 율법의 교사인 모세 자신과 복음의 선포자인 그리스도가 서로 대조될 때에는,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복음은 회개나 책망의 선포가 아니라, 본래적으로 위로의 선포요, 책망하거나 두렵게 하지 않고 율법의 공포에 맞서 양심을 위로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가리키고,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에 대한 사랑스러운 선포로써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기쁜 소식일 뿐이다.
7. 죄의 드러남에 관하여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율법의 헐벗은 선포만을 듣고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한, 모세의 수건이 그들의 눈앞에 드리워져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그의 손에 취하시고 그것을 영적으로 설명하신다(마 5:21 이하; 롬 7:14).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죄인을 향하여 그것이 얼마나 큰지 하늘로부터 드러나며, 이 수단으로 그들은 율법으로 인도되고, 그제야 비로소 율법에서 자기 죄를 바르게 알게 된다.
8.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고 인간을 두렵게 하는 한, 그것은 아직 본래적으로 복음의 선포가 아니라 모세와 율법의 선포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낯선 일(foreign work)이니, 그분은 이를 통하여 그분의 본래적 직무, 곧 은혜를 선포하고 위로하며 살리는 일에 이르시며, 이것이 본래적으로 복음의 선포이다.
부정 명제(NEGATIVE THESES): 배격되는 반대 교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이 본래적으로 회개나 책망의 선포이며 오직 은혜의 선포만은 아니라는 교설을 그릇되고 해로운 것으로 여겨 배격한다. 그로 인해 복음이 다시 율법의 교리로 바뀌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경이 가리워지며,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위로를 빼앗기고, 교황권의 오류와 미신에 다시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Epitome, Article VI: Of the Third Use of the Law Article VI. Of the Third Use of the Law
논쟁의 핵심(STATUS CONTROVERSIAE): 이 논쟁에서의 주된 물음.
율법이 사람들에게 세 가지 이유로 주어졌으니, 첫째는 그로써 사납고 불순종하는 자들에 맞서 외적 훈육이 유지되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그로써 사람들이 자기 죄를 알도록 인도되게 하기 위함이요, 셋째는 그들이 중생한 후에도 여전히 육신이 그들에게 달라붙어 있으므로, 이로 인하여 그들이 자기 온 삶을 규제하고 인도할 고정된 규범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율법의 제3용법에 관하여, 곧 그것을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설해야 하는가 아닌가에 관하여 분쟁이 일어났다. 한쪽은 "그렇다"라고 했고, 다른 쪽은 "아니다"라고 했다.
긍정 명제(AFFIRMATIVE THESES).
1.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그리스도를 참되이 믿고 하나님께 참되이 돌이킨 사람들은 율법의 저주와 강제에서 풀려나 면제되었으나, 그럼에도 이로 인하여 율법 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밤낮으로 그 안에서 자신을 연단하도록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구속되었다(시 119편). 타락 이전 우리 시조도 율법 없이 살지 않았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 마음에도 새겨져 있었다(창 1:26 이하).
2.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율법의 선포는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뿐 아니라, 참되이 돌이키고 중생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참된 신자들에게도 부지런히 역설되어야 한다.
3. 그들이 그 마음의 영에서 중생하고 새롭게 되었으나, 이 현세의 삶에서는 이 중생과 갱신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다만 시작되었을 뿐이며, 신자들은 그 마음의 영으로 육신, 곧 죽기까지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타락한 본성과 성향에 맞서 끊임없는 싸움 중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모든 능력에 여전히 내재하는 이 옛 아담으로 인하여, 주의 율법이 언제나 그들 앞에 비추는 것이 필요하니, 이는 그들이 인간적 경건에서 방종하고 스스로 택한 예배를 세우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옛 아담도 자기 뜻을 행하지 못하고, 율법의 권고와 위협뿐 아니라 징벌과 매로써도 자기 뜻에 거슬러 제압되어, 영(靈)에게 사로잡혀 굴복하고 따르게 하기 위함이다(고전 9:27; 롬 6:12; 갈 6:14).
4. 이제 율법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 사이의 구별에 관하여, 우리는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율법을 따라 행해지는 행위들은, 그것들이 다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징벌과 위협을 역설함으로써 인간에게서 억지로 짜내어지는 한, 율법의 행위이며 또 그렇게 불린다.
5.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신자들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께서 중생한 자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행위들이며, 신자들이 중생한 만큼 마치 아무런 명령이나 위협이나 보상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행하는 행위들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율법 안에 살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행하니,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이를 그리스도의 법이요 마음의 법이라 부른다(롬 7:25; 8:7; 갈 6:2).
6. 이와 같이 율법은 회개하는 자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중생한 자와 중생하지 못한 자에게 하나의 동일한 율법, 곧 하나님의 불변하는 뜻으로 있고 또 그러하게 남는다. 그리고 순종에 관한 한 차이는 오직 인간 안에 있으니,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는 율법이 그에게 요구하는 바를 강제에 의해 마지못해 행하며(중생한 자도 육신을 따라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신자는 중생한 만큼, 율법의 어떤 위협으로도 결코 그에게서 짜낼 수 없었던 바를 강제 없이 기꺼이 원하는 심령으로 행한다.
부정 명제(NEGATIVE THESES): 반대되는 거짓 교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이 위에서 언급한 방식과 정도로 그리스도인들과 참된 신자들에게는 역설되어서는 안 되고 다만 불신자, 비그리스도인,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만 역설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그리스도교적 훈육 및 참된 경건에 해롭고 그것과 충돌하는 교설이자 오류로서 배격한다.
Epitome Art. VII Epitome VII: Of the Holy Supper
츠빙글리파의 교사들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동조하는 신학자들에 속하지 않으니, 이 신앙고백이 제출되던 바로 그 시점에 그들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스스로 끼어들어, 이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오류를 퍼뜨리려 하므로, 우리는 이 논쟁에 관해서도 필요한 진술을 하고자 한다.
논쟁의 쟁점(STATUS CONTROVERSIAE): 이 조항에 관한 우리의 교리와 성례주의자(Sacramentarii)들의 교리 사이의 주된 논쟁.
성찬(Holy Supper)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가 참으로 또 본질적으로 임재하며, 떡과 포도주와 함께 분배되고, 이 성례를 사용하는 모든 자 — 합당하든 합당치 않든, 경건하든 불경건하든, 믿든 믿지 않든 — 가 입으로 받되, 믿는 자에게는 위로와 생명을 위하여,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을 위하여 받게 되는가? 성례주의자들은 아니라 하고, 우리는 그렇다 한다.
이 논쟁의 해명을 위하여 우선 성례주의자에 두 종류가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노골적인 성례주의자로서, 그들이 마음으로 믿는 바를 명백하고 분명한 말로 선언하니, 곧 성찬에는 떡과 포도주 외에 아무것도 임재하지 않으며 입으로 분배되고 받는 것도 그뿐이라 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교묘한 성례주의자로서 가장 해로운 자들이니, 부분적으로 우리 자신의 용어를 빌려 매우 그럴듯하게 말하며, 자기들도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참되고 본질적이며 살아 계신 몸과 피의 참된 임재를 믿노라고 가장하되, 다만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일어난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그럴듯한 말 아래 정확히 앞서의 노골적 견해를 그대로 간직하니, 곧 성찬에는 떡과 포도주 외에 아무것도 임재하지 않고 입으로 받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영적으로'라는 말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靈), 또는 부재(不在)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능력과 그분의 공로를 뜻할 뿐이며, 이것만이 임재한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결코 어떤 방식으로도 임재하지 않으며 오직 가장 높은 하늘 위에만 있으니, 우리는 믿음의 사념(思念)으로 하늘로 올라가 거기서 이 몸과 피를 구해야 하고, 성찬의 떡과 포도주 안에서는 결코 구할 수 없다 한다.
긍정 명제(AFFIRMATIVE THESES): 성례주의자들에 맞선 성찬에 관한 순정한 교리의 고백.
1. 우리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참으로 또 본질적으로 임재하며, 떡과 포도주와 함께 참으로 분배되고 받게 됨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언약(testamentum)의 말씀이 글자 그대로 읽히는 것과 달리 이해되어서는 안 됨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니, 곧 떡이 부재하는 몸을, 포도주가 부재하는 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례적 연합(sacramental union) 때문에 그것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것이다.
3. 이제 축성(consecratio)에 관하여, 우리는 사람의 어떤 행위나 봉사자의 낭송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이 임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능력에만 돌려져야 함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
4.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또한 성찬을 사용할 때 그리스도의 제정의 말씀이 결코 생략되어서는 안 되고 공적으로 낭송되어야 함을 만장일치로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니, 고린도전서 10:16에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등으로 기록된 바와 같다. 이 축복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낭송을 통하여 일어난다.
5.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에서 성례주의자들에 맞서 서 있는 근거는 루터 박사가 그의 성찬에 관한 「대고백」(Large Confession)에서 제시한 것들이다. 첫째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 조항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위격(person) 안에서 참되고 본질적이며 본성적이고 완전한 하나님이자 사람이시니,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으신다. 둘째: 하나님의 오른편은 어디에나 있으며, 그곳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성(人性)에 따라 실제로 또 참으로 두임을 받으사, 임재하여 다스리시며,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또 그의 발 아래 두시니, 그곳에는 다른 어떤 사람도 천사도 아니요 오직 마리아의 아들만이 두임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이를 행하실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되지 않으며 속이지 않는다. 넷째: 하나님은 어떤 장소에 존재하는 여러 양식(樣式)을 가지시고 또 아시니, 철학자들이 국소적(localis)이라 부르는 그 하나만이 아니다.
6.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와 함께 믿음으로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입으로도(orally) 받아짐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 그러나 가버나움적(Capernaitic) 방식이 아니라, 성례적 연합 때문에 초자연적이고 천상적인 방식으로 그러하니, 그리스도께서 받아 먹고 마시라 지시하시고 사도들이 그대로 행한 데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분명히 보여 주는 바와 같다. 마가복음 14:23에 '다 이를 마시매'라 기록되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0:16에서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communion)이 아니냐?' 곧 이 떡을 먹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고 말하며, 교회의 주요 고대 교사들인 크리소스토무스, 키프리아누스, 레오 1세, 그레고리우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만장일치로 증언하는 바이다.
7. 우리는 참된 신자와 합당한 자들뿐만 아니라 합당치 않은 자와 믿지 않는 자들도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를 받음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니, 다만 생명과 위로를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회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심판과 정죄를 위함이다(고전 11:27-29).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자기에게서 밀어내더라도, 그들은 자기 뜻을 거슬러서라도 그분을 엄정한 심판자로 인정해야 하니, 그분은 참된 신자와 합당한 손님들의 마음에 생명과 위로를 이루시려 임재하시는 것과 똑같이, 회개치 않는 손님들에게 심판을 행하고 내리시려 임재하신다.
8. 우리는 또한 합당치 않은 손님에는 오직 한 종류만 있으니 곧 믿지 않는 자들임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니, 그들에 관하여 요한복음 3:18에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정죄를 받은 것이니라'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 심판은 성찬을 합당치 않게 사용함으로 가중되어 더욱 크고 더욱 무거워진다(고전 11:29).
9. 우리는 어떤 참된 신자도, 그가 살아 있는 믿음을 간직하는 한,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자기 심판에 이르도록 성찬을 받지 아니함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니, 성찬은 특히 믿음이 연약하되 회개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위로하고 강건케 하려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10. 우리는 이 천상의 잔치의 손님들의 모든 합당함이 오직 그리스도의 가장 거룩한 순종과 완전한 공로에만 있고 그것으로 이루어짐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니, 우리는 참된 믿음으로 이를 우리에게 적용하며, 성례로 말미암아 그에 관하여 확신을 얻는다. 결코 우리의 덕이나 내적·외적 준비에 있지 아니하다.
부정 명제(NEGATIVE THESES): 성례주의자들의 반대되고 정죄되는 교리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위에 제시된 교리와 단순한 믿음과 성찬에 관한 고백에 대립되고 반대되는 다음의 모든 오류 조항을 만장일치로 배격하고 정죄한다.
1. 교황주의적 화체설(transubstantiatio), 곧 교황권에서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 실체와 본성적 본질을 잃어 소멸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고 외형만 남는다고 가르치는 것.
2. 산 자와 죽은 자의 죄를 위한 교황주의적 미사의 제사.
3. 평신도에게 성례의 한 형태만을 주며, 그리스도의 언약의 명백한 말씀을 거슬러 잔을 보류하여 그들에게서 그분의 피를 빼앗는 것.
4. 그리스도의 언약의 말씀을 읽히는 그대로 단순히 이해하거나 믿어서는 안 되고, 그것이 모호한 표현이어서 그 의미를 먼저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
5.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함께 입으로 받아지지 않고, 입으로는 오직 떡과 포도주만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은 믿음으로 영적으로만 받는다고 하는 것.
6.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표지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
7. 떡과 포도주가 멀리 부재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형상과 유비와 표상일 뿐이라고 하는 것.
8. 떡과 포도주가 기념과 인(印)과 보증에 지나지 않아서, 믿음이 하늘로 올라갈 때 우리가 성찬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만큼이나 참되게 거기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됨을 확신케 한다고 하는 것.
9. 성찬에서 우리 믿음의 확신과 확증이 오직 떡과 포도주라는 외적 표징을 통하여 일어나고, 참으로 임재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하여서는 아니라고 하는 것.
10. 성찬에서 오직 부재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능력과 효력과 공로만이 분배된다고 하는 것.
11.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갇혀 있어서, 그의 성찬이 거행되는 땅 위의 여러 곳 또는 모든 곳에 동시에 한 때에 결코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
12. 그리스도께서 자기 취하신 인성의 본성과 속성이 그것을 견디거나 허용할 수 없으므로, 성찬에서 자기 몸과 피의 본질적 임재를 약속하지 않으셨고 이루실 수도 없었다고 하는 것.
13. 하나님이 그의 모든 전능을 따라서도 자기 몸을 한 때에 한 곳 이상에 본질적으로 임재케 하실 수 없다고 하는 것.
14.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임재를 일으키고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의 언약의 전능한 말씀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는 것.
15. 신자들이 성찬의 떡과 포도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구하지 말고, 떡으로부터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거기서 그리스도의 몸을 구해야 한다고 하는 것.
16. 믿지 않고 회개치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를 받지 않고 오직 떡과 포도주만 받는다고 하는 것.
17. 이 천상의 잔치의 손님들의 합당함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에만 있지 않고 사람들의 외적 준비에도 있다고 하는 것.
18. 참된 신자들조차, 곧 그리스도에 대한 참되고 살아 있고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간직하는 자들조차, 그들의 외적 삶이 아직 불완전하므로 이 성례를 자기 심판에 이르도록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
19. 떡과 포도주라는 외적이고 가시적인 요소를 성례에서 경배해야 한다고 하는 것.
20. 마찬가지로 우리는 또한, 성례주의자들이 이 성례의 초자연적이고 천상적인 신비에 관하여 노골적이고 육적이며 가버나움적인 방식으로 가장 모독적이고 큰 거리낌을 끼치며 제기하는 모든 주제넘고 경박하며 모독적인 질문과 표현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맡긴다.
21. 그러므로 우리는 이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가버나움적으로 먹는 것, 곧 그의 육신을 이로 찢어 다른 음식처럼 소화한다는 듯한 견해를 전적으로 정죄하니, 이는 성례주의자들이 자기 양심의 증언을 거슬러, 우리의 잦은 항변에도 불구하고 고의로 우리에게 뒤집어씌워 이런 식으로 우리 교리를 그들의 청중에게 가증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그리스도의 언약의 단순한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참되되 초자연적으로 먹는 것과 그의 피를 마시는 것을 견지하고 믿으니, 이는 인간의 감각과 이성이 깨닫지 못하되, 다른 모든 신앙 조항에서와 같이 우리 이성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사로잡히는 바이며, 이 신비는 오직 믿음으로만 파악되고 오직 말씀 안에서만 계시된다.
Epitome Art. VIII Epitome VIII: Of the Person of Christ
성찬에 관한 논쟁으로부터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순정한 신학자들과 칼뱅주의자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위격(person)과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과 그 속성에 관한 불일치가 일어났으니, 칼뱅주의자들은 또한 다른 몇몇 신학자들마저 혼란케 하였다.
논쟁의 쟁점(STATUS CONTROVERSIAE): 이 분쟁의 주된 논쟁.
그러나 주된 물음은, 위격적 연합(personal union) 때문에 신성과 인성이 또한 그 속성들도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실재적으로(realiter), 곧 실제로 또 참으로 서로 교통(communion)을 가지는가, 그리고 이 교통이 어디까지 미치는가 하는 것이었다.
성례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이 위격적으로 연합되되, 어느 쪽도 실재적으로, 곧 실제로 또 참으로 다른 본성에 고유한 것을 서로 공유하지 않으며, 오직 이름만을 공유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명백히 말하기를, 연합(unio)은 공통의 이름을 만들 뿐(facit communia nomina)이니, 곧 위격적 연합은 이름만을 공통되게 하여 하나님이 사람이라 일컬어지고 사람이 하나님이라 일컬어지되, 하나님은 인성과, 또 인성은 신성 및 그 위엄(majesty)과 속성과 실재적으로, 곧 실제로 또 참으로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터 박사와 그를 따른 자들은 성례주의자들에 맞서 그 반대를 주장하였다.
긍정 명제(AFFIRMATIVE THESES):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그리스도 교회의 순정한 교리.
이 논쟁을 해명하고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지침을 따라 그것을 정착시키고자, 우리의 교리와 믿음과 고백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이 위격적으로 연합되어, 두 그리스도 —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 다른 하나는 사람의 아들 — 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동일한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시다(눅 1:35; 롬 9:5).
2. 우리는 신성과 인성이 한 실체로 혼합되지 않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하지도 않으며, 각각이 자기의 본질적 속성을 간직하니, 그 속성은 결코 다른 본성의 속성이 될 수 없음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
3. 신성의 속성은 전능하고 영원하고 무한하며, 그 본성의 속성과 본성적 본질을 따라 스스로 어디에나 임재하고 모든 것을 아는 것 등이니, 이는 결코 인성의 속성이 되지 않는다.
4. 인성의 속성은 육체적 피조물이며 살과 피이고 유한하고 한정되며 고난당하고 죽으며 오르고 내리며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주리고 목마르며 춥고 더운 것 등이니, 이는 결코 신성의 속성이 되지 않는다.
5. 두 본성이 위격적으로, 곧 한 위격 안에서 연합되었으므로, 우리는 이 연합이 두 본성이 위격적으로, 곧 위격적 연합 때문에 서로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그런 결합과 연결 — 마치 두 널빤지를 아교로 붙여 어느 쪽도 다른 쪽에 무엇을 주거나 받지 않는 것과 같은 — 이 아님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 오히려 여기에 하나님이 취하신 사람과 참으로 가지시는 가장 높은 교통이 있으니, 이 위격적 연합과 거기서 비롯되는 가장 높고 형언할 수 없는 교통으로부터, 하나님에 관하여 말해지고 믿어지는 모든 인간적인 것과, 사람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해지고 믿어지는 모든 신적인 것이 흘러나온다. 교회의 고대 교사들은 이 본성들의 연합과 교통을 불에 달궈진 쇠의 비유로, 또한 사람 안에서 몸과 영혼의 연합으로 설명하였다.
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이시고 사람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니, 신성과 인성이 실제로 또 참으로 서로 전혀 교통이 없다면 이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마리아의 아들인 그 사람의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과 위격적으로 연합되지 않아서 그분과 실재적으로, 곧 실제로 또 참으로 하나님이라는 이름 외에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 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거나 그러할 수 있겠는가?
7.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가 한낱 사람만을 잉태하고 낳은 것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았음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그녀 또한 정당히 하나님의 어머니라 일컬어지며 참으로 그러하다.
8.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고 죽으며 장사되고 지옥에 내려가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며 하늘에 오르고 하나님의 위엄과 전능한 권능으로 높임을 받은 것이 한낱 사람이 아니라, 그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과 더불어 심오하고 형언할 수 없는 연합과 교통을 가져 그분과 한 위격이 된 사람임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참으로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셨으니, 다만 그가 그의 신적 위격의 통일성 안으로 취하여 자기 것으로 삼으신 인성의 속성을 따라서이며, 이는 그가 고난당하실 수 있고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위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려 함이니, 고린도전서 2:8에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리라' 기록되었고, 사도행전 20:28에 '하나님의 피로 사신 바' 되었다 기록된 바와 같다.
10.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그 인성을 따라 실재적으로, 곧 실제로 또 참으로 하나님의 전능한 위엄과 권능의 오른편으로 높임을 받았음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니, 이는 그가 성령으로 그 어머니의 태중에서 잉태되실 때 하나님 안으로 취하여졌고 그 인성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과 위격적으로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11. 이 위엄을 그는 위격적 연합을 따라 언제나 가지셨으나, 그의 비하(卑下) 상태에서는 이를 절제하셨고, 그런 까닭에 참으로 모든 지혜와 하나님과 사람 앞의 은총에서 자라셨다. 그러므로 그는 이 위엄을 항상 행사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기뻐하실 때에 행사하셨으니, 마침내 부활 후에는 종의 형체를 — 그러나 그 본성은 아니요 — 온전히 벗으시고, 신적 위엄의 충만한 사용과 현시와 선포 가운데 세워지사 그의 영광에 들어가셨다(빌 2:6 이하). 그리하여 이제 하나님으로서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으며 모든 피조물과 함께 임재하시고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와 손안에 두시니, 그가 친히 증언하시되 마태복음 28:18, 요한복음 13:3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 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10에 이르되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그의 권능을, 그는 임재하사 어디서나 행사하실 수 있으며,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알려져 있다.
12. 그러므로 그는 또한 임재하시는 분으로서 성찬에서 그의 참된 몸과 피를 나누어 주실 수 있고 또 그에게 매우 쉬우니, 이는 인성의 양식이나 속성을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편의 양식과 속성을 따라서이며, 루터 박사가 어린이를 위하여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을 따라 말한 바와 같다. 이 임재는 땅에 속한 것도 가버나움적인 것도 아니나, 그럼에도 참되고 본질적이니, 그의 언약의 말씀이 '이것은, 이것은, 이것은 내 몸이라' 운운하는 바와 같다.
우리의 이 교리와 믿음과 고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위격은, 네스토리우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 그는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곧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의 속성의 참된 교통을 부인하여 위격을 나누었으니, 루터가 그의 책 「공의회에 관하여」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 나뉘지 않는다. 또한 본성들이 그 속성과 더불어 서로 혼동되거나 한 본질로 섞이지도 않으며(유티케스가 오류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위격 안의 인성이 부인되거나 소멸되지도 않고, 어느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한 나뉘지 않은 위격 안에서 하나님이자 사람으로 계시고 또 그렇게 머무시니, 이는 사도가 디모데전서 3:16에서 증언하는 바와 같이 거룩한 삼위일체 다음으로 가장 높은 신비요, 우리의 유일한 위로와 생명과 구원이 그에 달려 있다.
부정 명제(NEGATIVE THESES):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반대되는 거짓 교리.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모든 오류 조항이 가르쳐질 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단순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반대되는 것으로 배격하고 정죄한다.
1.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과 사람이 한 위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따로 있고 사람의 아들이 따로 있다고 가르치는 것, 네스토리우스가 미쳐 날뛴 것처럼.
2. 신성과 인성이 서로 한 본질로 혼합되어 인성이 신성으로 변했다고 가르치는 것, 유티케스가 광신적으로 주장한 것처럼.
3. 그리스도가 참되고 본성적이며 영원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 아리우스가 주장한 것처럼.
4. 그리스도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참된 인성을 가지지 않았다고 가르치는 것, 마르키온이 상상한 것처럼.
5. Quod unio personalis faciat tantum communia nomina, 곧 위격적 연합이 오직 이름과 칭호만을 공통되게 한다고 하는 것.
6. '하나님이 사람이시다, 사람이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오직 어법이요 말하는 방식(phrasis et modus loquendi)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니, 그들의 말로는 신성이 실재적으로, 곧 실제로 또 참으로 인성과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고 인성도 신성과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7.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게 되셨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한낱 말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 곧 오직 언어적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verbalis)만 있다는 것.
8. 그리스도 안의 인성이 신성과 같은 방식으로 무한한 본질이 되었으며, 인성에 전달되고 부어진 이 본질적 능력과 속성 때문에 신성과 같은 방식으로 어디에나 임재하되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하는 것.
9. 인성이 그 실체와 본질에서, 또는 그 본질적 속성에서 신성과 동등하고 같게 되었다고 하는 것.
10.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늘과 땅의 모든 곳으로 국소적으로 확장되었다고 하는 것이니, 이는 신성에도 돌려서는 안 되는 바이다.
11. 인성의 속성 때문에 그리스도가 그의 몸으로 동시에 한 곳 이상에, 더욱이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
12. 오직 한낱 인성만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고 우리를 구속하였으며, 하나님의 아들은 그 고난에서 실제로 인성과 아무 교통도 없어 그것이 자기와 상관없는 듯하였다고 하는 것.
13.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례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 오직 그의 신성을 따라서만 우리와 함께 임재하시고, 이 임재가 그의 인성에는 전혀 속하지 않으며, 그들의 말로는 그가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후에는 그 인성을 따라 더 이상 땅 위에서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
14.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종의 형체를 벗으신 후에는 그의 전능의 모든 일을 그의 인성 안에서, 인성을 통하여, 인성과 더불어 행하시지 않고 다만 일부만, 그리고 오직 그의 인성이 국소적으로 있는 곳에서만 행하신다고 하는 것.
15. 그의 인성을 따라서는 그가 전혀 전능과 신성의 다른 속성들을 가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는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는 그리스도의 명백한 선언과, 골로새서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는 사도 바울의 선언에 반한다.
16. 그에게 하늘과 땅에서 더 큰 권능, 곧 모든 천사와 다른 피조물보다 더 크고 많은 권능이 주어졌으되, 그가 하나님의 전능과는 아무 교통이 없고 이것이 그에게 주어지지도 않았다고 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은 중간 권능(media potentia), 곧 하나님의 전능한 권능과 다른 피조물의 권능 사이의 권능 — 하나님의 전능한 권능보다는 작고 다른 피조물의 권능보다는 큰 — 이 높임을 통하여 그 인성을 따라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고 지어낸다.
17. 그리스도가 그의 인간적 정신을 따라 얼마나 알아야 할지에 관하여 일정한 한계를 가지며, 심판자로서의 그의 직무에 합당하고 필요한 것 이상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18. 그리스도가 아직 하나님과 그의 모든 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니, 그에 관하여 골로새서 2:3에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기록되었다.
19. 그리스도가 그의 인간적 정신을 따라 영원부터 있었던 것, 지금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 영원토록 있을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
20. 마태복음 28:18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등의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고 모독적으로 왜곡하여 가르칠 때, 곧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부활과 승천 때에 신성을 따라 그리스도에게 회복되어, 다시 말해 다시 넘겨졌으니, 마치 그가 그의 신성을 따라서도 이를 그의 비하 상태에서 버리고 내려놓았던 것처럼 하는 것. 이 교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언약의 말씀이 왜곡될 뿐 아니라 저주받은 아리우스 이단으로 가는 길이 예비되어,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이 부인되고, 그리하여 이 거짓 교리가 신적 말씀과 우리의 단순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로부터 굳게 반박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와 그와 함께 우리의 구원이 온전히 상실된다.
Epitome Art. IX Epitome IX: Of the Descent of Christ to Hell
논쟁의 쟁점(STATUS CONTROVERSIAE): 이 조항에 관한 주된 논쟁.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서명한 일부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 조항에 관하여 또한 논쟁이 있었으니, 곧 우리의 단순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따라 주 그리스도께서 언제 또 어떤 방식으로 지옥에 내려가셨는가, 이것이 그의 죽음 이전에 일어났는가 이후에 일어났는가, 또한 그것이 영혼만을 따라 일어났는가, 신성만을 따라 일어났는가, 아니면 몸과 영혼으로, 영적으로 또는 육적으로 일어났는가, 또한 이 조항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속하는가 아니면 그의 영광스러운 승리와 개선에 속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은 앞선 조항과 마찬가지로 감각이나 우리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파악되어야 하므로, 이에 관하여 논쟁이 있어서는 안 되고, 다만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믿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만장일치의 견해이다. 복된 기억의 루터 박사가 1533년 토르가우(Torgau)에서의 설교에서 이 조항을 온전히 그리스도교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 거기서 모든 무익하고 불필요한 질문을 떼어내며, 모든 경건한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단순함을 권면한 바와 같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사 모든 신자를 위하여 지옥을 멸하시고, 그들을 사망과 마귀의 권세에서, 영원한 정죄와 지옥의 아가리에서 건지셨음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는 저 세상까지 유보해 두어야 하니, 거기서는 이 점뿐만 아니라 우리가 여기서 단순히 믿되 우리의 어두운 이성으로 깨달을 수 없는 다른 것들도 계시될 것이다.
Epitome Art. X Epitome X: Of Church Rites, Called Adiaphora or Matters of Indifference
흔히 아디아포라(adiaphora) 또는 무관한 사항(matters of indifference)이라 불리는 것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령되지도 금지되지도 않았으나 선한 질서와 합당함을 위하여 교회에 도입된 예식 또는 교회 관습에 관하여,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신학자들 사이에 또한 불일치가 일어났다.
논쟁의 쟁점(STATUS CONTROVERSIAE): 이 조항에 관한 주된 논쟁.
그러나 주된 물음은, 박해의 때와 신앙고백을 요구받는 경우에, 비록 복음의 원수들이 교리에서 우리와 합의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그 자체로는 무관한 사항이며 하나님이 명령하지도 금지하지도 않으신 어떤 폐지된 예식들을, 대적자들의 압력과 요구에 따라 양심에 해를 끼치지 않고 다시 세울 수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가 그런 예식과 아디아포라에서 그들과 일치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한편은 그렇다 하고 다른 한편은 아니라 하였다.
긍정 명제(AFFIRMATIVE THESES): 이 조항에 관한 옳고 참된 교리와 고백.
1. 이 논쟁을 또한 정착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령되지도 금지되지도 않았으나 오직 합당함과 선한 질서를 위하여 제정된 예식 또는 교회 관습은 그 자체로 신적 예배가 아니며 그 일부조차 아님을 만장일치로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 마태복음 15:9에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다.
2. 우리는 모든 곳과 모든 때의 하나님의 회중이 그 형편을 따라 그런 예식을, 하나님의 회중에게 가장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방식으로 변경할 권한을 가짐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
3. 그럼에도 여기서 모든 경솔함과 거리낌을 피해야 하며,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고전 8:9; 롬 14:13).
4. 우리는 박해의 때에, 곧 우리에게 명백한 고백이 요구될 때에는 그런 아디아포라에 관하여 원수들에게 양보해서는 안 됨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니, 사도가 갈라디아서 5:1에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또한 고린도후서 6:14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운운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하고, 또한 갈라디아서 2:5에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바와 같다. 이는 그런 경우에 더 이상 아디아포라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에 관한 문제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문제요, 공공연한 우상숭배를 승인하는 일에 관한 문제이며, 또한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게 막는 일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양보할 것이 없고, 다만 명백히 고백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과 그가 그의 말씀의 원수들이 우리에게 가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5. 우리는 또한, 만일 그 밖에 교리와 그 모든 조항에서, 또한 거룩한 성례의 바른 사용에서 그들 사이에 일치가 있다면, 한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으신 외적 예식을 더 적게 또는 더 많이 가진다고 하여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를 정죄해서는 안 됨을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니, 잘 알려진 격언과 같다: 금식의 불일치가 믿음의 일치를 깨뜨리지 않는다(Dissonantia ieiunii non dissolvit consonantiam fidei).
부정 명제(NEGATIVE THESES): 이 조항에 관한 거짓 교리.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질 때 그것을 그릇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것으로 배격하고 정죄한다.
1. 교회 안의 인간적 규례와 제도가 그 자체로 신적 예배 또는 그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고 하는 것.
2. 그런 예식과 규례와 제도가, 외적인 것에서 회중이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반하여, 필요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회중에게 강제로 부과되는 것.
3. 또한 박해와 공적 고백의 때에 우리가 그런 아디아포라와 예식에서 복음의 원수들에게 양보하거나 그들과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니, 이는 진리에 해를 끼친다.
4. 또한 이 외적 예식과 아디아포라가, 마치 하나님의 회중이 그 형편을 따라 교회에 언제든 가장 유익한 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 안에서 이것이나 저것을 사용함이 자유롭지 않은 듯한 방식으로 폐지되는 것.
Epitome Art. XI Epitome XI: Of God's Eternal Foreknowledge and Election
이 조항에 관하여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신학자들 사이에 공적인 불일치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조항은 합당하게 다루어진다면 위로가 되는 조항이며, 장차 이에 관하여 거리끼는 논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이 글에서도 설명한다.
긍정 명제(AFFIRMATIVE THESES): 이 조항에 관한 순정하고 참된 교리.
1. 우선, 예지와 예정(praescientia et praedestinatio), 곧 하나님의 예지(豫知)와 그의 영원한 선택 사이의 구분을 정확히 지켜야 한다.
2. 하나님의 예지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아심이니, 다니엘 2:28에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기록된 바와 같다.
3. 이 예지는 경건한 자와 악한 자에게 동일하게 미치되, 악의 원인도 죄, 곧 그릇된 일을 행하는 것(이는 본래 마귀와 사람의 악하고 비뚤어진 의지에서 비롯된다)의 원인도 아니며, 그들의 멸망 — 이에 대하여는 그들 자신이 책임이 있다 — 의 원인도 아니다. 다만 그것을 규제하고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한계를 정할 뿐이니, 이 모든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는 악할지라도 그의 택하신 자들의 구원에 봉사하게 하려는 목적을 위함이다.
4.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 또는 영원한 선택은 오직 경건하고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미치니, 이는 그들의 구원의 원인이 되며, 하나님은 또한 구원을 베푸시고 그에 속한 것을 마련하신다. 우리의 구원은 이 위에 견고히 세워져 지옥의 문들이 이를 이기지 못한다(요 10:28; 마 16:18).
5. 이는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 가운데서 탐구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또한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구해야 한다.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니, 그는 생명책이시며, 영원히 구원받을 자는 모두 그 안에 기록되고 택함받았으니, 에베소서 1:4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기록된 바와 같다.
7. 이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을 자기에게로 부르시며 그들에게 안식을 약속하시고,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와서 도움받기를 진실로 원하시니, 그는 자기 말씀 안에서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 주시며, 그들이 그것을 듣고 귀를 막거나 말씀을 멸시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더욱이 그는 성령의 능력과 역사하심, 그리고 인내와 영원한 구원을 위한 신적 도우심을 약속하신다.
8.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의 우리의 이 선택에 관하여 이성으로도, 하나님의 율법으로도 판단해서는 안 되니, 이는 우리를 무모하고 방탕한 에피쿠로스적 삶이나 절망으로 이끌고 사람들의 마음에 해로운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성을 따르는 한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를 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구원으로 택하셨다면 내가 무엇을 하든 정죄받을 수 없다, 또 반대로: 만일 내가 영원한 생명으로 택함받지 못했다면 내가 무슨 선을 행하든 소용없고 어차피 다 헛되다.
9. 오히려 이는 오직 그리스도에 관한 거룩한 복음에서 배워야 하니, 거기서 분명히 증언되기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요, 그가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모두가 회개에 이르러 주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하심이라 하였다(롬 11:32; 겔 18:23; 33:11; 벧후 3:9; 요일 2:2).
10.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이렇게 마음을 두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지킨 순서 —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신비를 말하기에 앞서 먼저 사람들을 회개로, 죄에 대한 지식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신적 순종으로 인도한다 — 를 따라 나아가는 자에게는 이 교리가 유익하고 위로가 된다.
11. 그러나 부름받은 자는 많되 택함받은 자는 적다(마 22:14) 함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치 않으심을 뜻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고 고의로 멸시하며 귀를 막고 마음을 완악케 하여 이런 식으로 성령께 이르는 통상의 길을 막아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그의 일을 행하실 수 없게 하거나, 또는 그것을 들었을 때 다시 가벼이 여기고 유의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들이 멸망함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나 그의 선택이 아니라 그들의 악함이 책임이 있다.
12. 그리스도인은 여기까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관한 조항에 마음을 두어야 하니,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대로이며, 그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생명책으로 제시하고, 그는 거룩한 복음의 선포로써 이를 우리에게 열어 계시하신다. 로마서 8:30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기록된 바와 같다. 우리는 그 안에서 아버지의 영원한 선택을 구해야 하니, 그는 그의 영원한 신적 경륜 가운데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참으로 믿는 자 외에는 아무도 구원하지 않으시기로 정하셨다. 다른 생각들은 내쫓아야 하니, 그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가 아니라 악한 원수의 부추김에서 나오며, 그로써 그가 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교리 안에서 우리가 가지는 영광스러운 위로 — 곧 순전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어떤 공로도 없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택함받았으며 아무도 우리를 그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음을 우리가 안다는 것 — 를 약화시키거나 우리에게서 온전히 제거하려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은혜로운 선택을 한낱 말로만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맹세로 확증하시고 거룩한 성례로 인치셨으니, 우리는 가장 혹독한 시험 가운데서 이를 기억하여 그 안에서 위로를 얻고 그로써 마귀의 불화살을 끌 수 있다.
13.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에 가장 큰 힘을 써야 하며,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10에서 권면한 대로 우리의 부르심을 굳게 하고, 특히 계시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니, 그것은 우리를 저버릴 수 없고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14.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관한 이 간략한 설명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광이 온전히 또 충만히 하나님께 돌려지니, 곧 그가 우리의 모든 공로 없이 오직 순전한 긍휼로 그의 뜻의 목적을 따라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며, 또한 누구에게도 낙심이나 천박하고 방종한 삶의 빌미가 주어지지 않는다.
부정 명제(NEGATIVE THESES): 이 조항에 관한 거짓 교리.
따라서 우리는 믿고 견지한다: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으로의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에 관한 교리를, 괴로워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로써 자신을 위로할 수 없고 도리어 낙심이나 절망으로 이끌리며, 회개치 않는 자가 그 방종 가운데 강해지는 방식으로 가르친다면, 그런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서가 아니라 이성과 저주받은 사탄의 부추김을 따라 다루어진 것이다. 사도가 로마서 15:4에서 증언하듯이,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되었으니,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인내와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오류들을 배격한다.
1.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기를 원치 않으신다고 가르치는 것.
2.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에게로 부르실 때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오기를 진실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
3. 또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치 않으시며, 어떤 자들은 그들의 죄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과 의지로 정죄로 정해져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
4. 또한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가장 거룩한 공로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선택의 원인이 있어서, 그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택하셨다고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모독적이고 두려운 오류 교리이니, 그로써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복음과 거룩한 성례의 사용에서 가지는 모든 위로가 빼앗기므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한동안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적으로 다투어지고 가르쳐진 논란의 조항들에 대한 간략하고 단순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순정한 교리가 진술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반대되는 오류 교리도 부인되고 배격되어, 일어났던 거리끼는 분열들이 철저히 정착되었으니, 모든 단순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단순한 교리문답의 지침을 따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할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의 성령의 은혜를 베푸사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하나 되어, 그가 기뻐하시는 이 그리스도교적 일치 가운데 항상 거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Epitome Art. XII Epitome XII: Of Other Heresies and Sects
이러한 이단과 종파가, 앞선 설명에서 우리가 그것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은연중에 우리에게 돌려지지 않도록, 우리는 이 글의 끝에서 그들이 오류하고 우리가 자주 언급한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과 고백에 반하여 가르치는 조항들을 단지 열거하고자 한다.
재세례파(Anabaptists)의 오류 조항.
재세례파는 그들끼리 여러 분파로 나뉘어 어떤 이는 더 많은 오류를, 어떤 이는 더 적은 오류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교회에서도, 국가와 세속 정부에서도, 가정생활에서도 용납되거나 허용되어서는 안 될 교리를 내세운다.
교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조항.
1.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과 피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취하지 않으시고 하늘에서 가지고 내려오셨다고 하는 것.
2.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 다만 다른 어떤 거룩한 사람보다 성령의 은사를 더 많이 가졌을 뿐이라고 하는 것.
3.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義)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있지 않고 갱신에,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우리 자신의 경건함에 있다고 하는 것. 이는 대부분 자기 자신의 특별하고 스스로 택한 영성에 기초하며, 실은 새로운 종류의 수도원주의(monkery)에 다름 아니다.
4. 세례받지 않은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롭고 무죄하며, 아직 이성의 사용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그 무죄함 가운데 세례 없이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 그러므로 그들은 원죄와 그에 속한 것에 관한 모든 교리를 배격한다.
5. 아이들이 이성의 사용에 이르러 스스로 자기 믿음을 고백할 수 있기까지는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
6. 그리스도인의 아이들이 그리스도인이며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므로 세례 없이도, 세례 이전에도 거룩하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 이런 까닭에 그들은 아이의 세례를 중히 여기지도, 권하지도 않으니, 이는 오직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것을 멸시하지 않는 자에게만 관계되는 하나님의 약속의 명백한 말씀(창 17:7 이하)에 반한다.
7. 죄인이 여전히 발견되는 회중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회중이 아니라고 하는 것.
8. 전에 교황주의적 미사가 거행되고 드려졌던 교회에서는 어떤 설교도 듣거나 참석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
9.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따라 복음을 전하고 재세례파의 설교와 오류를 책망하는 교회의 봉사자들과는 아무 상관도 하지 말아야 하며, 그들을 섬기거나 어떤 식으로도 그들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로서 그들에게서 피하고 멀리해야 한다고 하는 것.
정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조항.
1. 신약 아래에서 위정자(magistracy)의 직분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
2. 그리스도인이 선하고 온전한 양심으로 위정자의 직분을 보유하거나 수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
3. 그리스도인이 양심에 해를 끼치지 않고는 일어나는 사안에서 악인을 상대로 위정자의 직분을 사용할 수 없으며, 백성이 자기의 보호와 방어를 위하여 위정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보유한 권세를 의지할 수 없다고 하는 것.
4. 그리스도인이 선한 양심으로 맹세할 수 없으며, 맹세로써 자기 나라의 세습 군주나 주권자에게 충성을 서약할 수 없다고 하는 것.
5. 신약 아래에서 위정자가 양심에 해를 끼치지 않고는 악행자에게 사형을 가할 수 없다고 하는 것.
가정생활에서 용납될 수 없는 조항.
1. 그리스도인이 선한 양심으로 재산을 보유하거나 소유할 수 없고, 그것을 공동 금고에 바칠 의무가 있다고 하는 것.
2. 그리스도인이 선한 양심으로 여관 주인, 상인, 또는 무기 제조인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
3. 부부가 신앙을 이유로 이혼할 수 있으며, 한쪽이 다른 쪽을 버리고 자기와 같은 신앙을 가진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슈벵크펠트파(Schwenkfeldians)의 오류 조항.
1. 그리스도를 육신을 따라 피조물로 여기는 모든 자는 하늘의 통치하시는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다고 하는 것.
2. 그리스도의 육신이 그의 높아지심으로 모든 신적 속성을 취하여, 사람이신 그리스도가 권능과 능력과 위엄과 영광에서 본질의 정도와 지위에 관하여 아버지와 말씀(Word)과 온전히 동등하게 되어, 이제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의 본질과 속성과 의지와 영광이 오직 하나뿐이며, 그리스도의 육신이 거룩한 삼위일체의 본질에 속한다고 하는 것.
3. 교회의 봉사직, 곧 전파되고 들려지는 말씀이, 하나님 성령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그들 안에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지식과 회심과 회개와 믿음과 새로운 순종을 일으키시는 수단이 아니라고 하는 것.
4. 세례의 물이 주 하나님이 아들 됨의 입양을 인치시고 중생을 일으키시는 수단이 아니라고 하는 것.
5.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통하여, 그것으로써 그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시는 수단이 아니라고 하는 것.
6. 하나님의 영으로 참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이 생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
7. 공적인 출교(出敎)나 통상적인 책벌의 절차가 지켜지지 않는 회중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회중이 아니라고 하는 것.
8. 그 자신이 참으로 갱신되고 중생하고 의롭고 경건하지 않은 교회의 봉사자는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가르치거나 진정하고 참된 성례를 베풀 수 없다고 하는 것.
새 아리우스파(New Arians)의 오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 및 성령과 더불어 한 영원한 신적 본질을 지니신 참되고 본질적이며 본성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다만 성부 하나님보다 열등하게 또 그와 나란히 신적 위엄으로 꾸며졌을 뿐이라고 하는 것.
반(反)삼위일체파(Anti-Trinitarians)의 오류.
이는 그리스도교계에서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전적으로 새로운 종파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유일하고 영원한 신적 본질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세 구별된 위격인 것처럼 각 위격이 신격(Godhead)의 다른 위격들과 구별되고 분리된 자기 본질을 가진다고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는 자들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치 세 사람이 그 본질에서 서로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는 것과 같이, 셋 모두가 권능과 지혜와 위엄과 영광에서 동등하다고 하거나, 또는 이 세 위격과 본질이 본질과 속성에서 서로 동등하지 않아 오직 성부만이 본래적으로 또 참으로 하나님이라고 한다.
이러한 조항과 그와 유사한 조항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고 그것들에 의존하고 그것들로부터 따라 나오는 다른 어떤 오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세 신경(Creeds)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및 변증서와 슈말칼덴 조항과 루터의 교리문답에 반하는 그릇되고 거짓되며 이단적인 것으로 배격하고 정죄하니, 높고 낮은 모든 신분의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영혼의 복지와 구원을 사랑하는 만큼 이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교리요 믿음이요 고백이며, 이에 대하여 우리가 마지막 날에 의로운 심판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답할 것이요, 이에 반하여 은밀히도 공공연히도 어떤 것을 말하거나 쓰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안에 굳게 머물고자 함을, 우리는 충분히 숙고한 후에,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자신의 손으로 이 「개요」(Epitome)에 서명함으로 증언하였다.
SD Art. I Original Sin — Controversy (1-4) 원죄의 본질을 둘러싼 논쟁의 제기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따르는 일부 신학자들 사이에서 원죄(original sin)가 본래 무엇인가를 두고 논쟁이 발생하였다. 한 편은, 아담의 타락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과 본질이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므로, 타락 이후 부패한 인간의 본성과 실체와 본질, 또는 적어도 그 본질의 가장 높고 주요한 부분 곧 이성적 영혼의 최고 능력 자체가 원죄 그 자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가 아니라 모든 다른 죄가 뿌리에서 솟아나듯 흘러나오는 본성 그 자체이므로 본성죄(nature-sin) 또는 인격죄(person-sin)라 불렸으며, 따라서 이제 인간의 본성과 본질과 원죄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편은 이에 맞서, 원죄는 본래 인간의 본성이나 실체나 본질, 곧 타락 이후에도 우리 안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이자 피조물로 남아 있는 인간의 몸이나 영혼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몸과 영혼과 그 모든 능력 안에 있는 어떤 것 곧 그것들의 끔찍하고 깊으며 형언할 수 없는 부패임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인간은 원래 창조될 때 지녔던 의(righteousness)를 상실하고, 영적인 일에 있어 선에 대하여 죽었으며 모든 악으로 굽어졌다는 것이다. 원죄를 둘러싼 이 논쟁은 불필요한 언쟁이 아니다. 이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올바르게 제시되고 모든 펠라기우스적·마니교적 오류에서 분리될 때, 주 그리스도의 은덕과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가 더욱 잘 알려지고 높이 기려질 수 있으며,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일과 피조가 본성을 부패시킨 마귀의 일과 올바르게 구별될 때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glory)이 돌려진다.
SD Art. I Original Sin — Affirmative Thesis (5-15) 원죄에 관한 교리 (적극적 주장)
첫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실제로 범하는 것만을 죄(sin)로 여길 것이 아니라, 전 본성을 부패시키는 그 끔찍하고 두려운 유전적 질병 자체를 무엇보다도 죄로, 실로 모든 실제 죄의 뿌리이자 원천인 으뜸 죄로 여겨야 한다. 루터 박사는 이를 본성죄 또는 인격죄라 부르는데, 이는 사람이 아무런 악한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지 않더라도 그 본성과 인격은 여전히 죄로 가득하며, 곧 영적 나병처럼 원죄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감염되고 부패하였음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이 부패로 인하여 본성은 하나님의 율법(law)에 의해 고발되고 정죄되며,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건짐 받지 않는 한 본성상 진노와 죽음과 정죄의 자녀이다. 둘째,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나 저자나 원인이 아니며, 마귀의 선동으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롬 5:12; 요일 3:8). 이 유전적 악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본성상 진노의 자녀가 되게 한 죄책(guilt)이며, 함께 창조되었던 유전적 의, 곧 하나님의 형상의 전면적 결여이고, 또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대신에 자리한, 전 본성과 그 모든 능력 곧 특히 지성과 마음과 의지(will)라는 영혼의 최고 능력을 지배하는 깊고 악하며 헤아릴 수 없는 부패이다. 원죄의 형벌은 죽음과 영원한 정죄이며 마귀의 압제이다. 이 유전적 악은 너무도 크고 끔찍하여, 오직 주 그리스도를 위하여서만 세례받고 믿는 자 안에서 하나님 앞에 덮어지고 용서받을 수 있으며, 인간 본성은 오직 성령의 중생(regeneration)과 갱신(renewal)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데, 이는 이생에서 시작될 뿐 다가올 생명(life)에 이르기까지는 완전하여지지 않는다.
SD Art. I Original Sin — Rejected Pelagian errors (17-25) 배척되는 펠라기우스적 오류
첫째, 옛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새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 맞서 다음과 같은 거짓 교리들이 책망되고 배척된다. 곧 원죄는 우리 본성의 아무런 부패 없이 다른 자가 범한 바에 따른 단지 죄책(reatus)일 뿐이라는 것, 죄되고 악한 정욕은 죄가 아니라 본성과 함께 창조된 본질적 속성(conditiones)이라는 것, 앞서 말한 결함이 하나님 앞에서 본래 참으로 죄가 아니라는 것, 타락 이후에도 본성은 부패하지 않았고 그 본연적 능력에 있어 완전하다는 것, 원죄는 본성에 입힌 외적이고 사소한 얼룩이나 우연적 성질의 부패에 불과하다는 것, 원죄는 박탈이 아니라 마늘즙을 자석에 바르면 그 힘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방해될 뿐인 것처럼 외적 장애일 뿐이라는 것, 또는 본성이 크게 약화되었을지라도 영적 일에서 모든 선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며 영적 일을 시작하거나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작은 능력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리들이 배척되는 이유는, 부패한 본성은 그 자체로는 영적·신적 일에서 아무런 선한 것도, 심지어 가장 작은 선한 생각조차도 할 힘이 없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오직 죄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기 때문이다(창 6:5; 8:21).
SD Art. I Original Sin — Manichean errors & distinction (26-48) 배척되는 마니교적 오류와 본성·원죄의 구별
마찬가지로 이 교리는 마니교적 오류에 대하여도 지켜져야 한다. 다음이 배척된다. 곧 인간 본성이 처음에는 순결하고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그 후 사탄이 외부로부터 원죄를 본질적인 어떤 것으로서 본성에 주입하고 섞었으니 마치 포도주에 독이 섞이듯 하였다는 주장이다. 아담과 하와 안에서 본성은 원래 순결하고 선하고 거룩하게 창조되었으나, 사탄이 악한 실체를 창조하여 그들의 본성에 섞은 것처럼 죄가 그들의 본성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 타락을 통한 사탄의 유혹으로 함께 창조되었던 유전적 의를 상실하였기에, 인간 본성은 이 박탈로 인하여 심히 굽고 부패하여 자연적으로 잉태되고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전달된다. 원죄는 본성 안에 혹은 본성과 별도로 자존하는 어떤 것이 아니며, 부패한 인간의 실제 본질이나 몸이나 영혼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고 보존하시며 그 안에 죄가 내주하는 우리의 본성과, 그 본성 안에 거하는 원죄 사이에는 구별이 유지되어야 한다. 신앙의 주요 조항들이 이 구별을 강제한다. 창조 조항에서 하나님은 타락 이후에도 인간 본성의 창조자로 나타나시며(욥 10:8; 시 139:14), 구속 조항에서 하나님의 아들(Son)은 죄 없이 우리의 인간 본성을 취하셨고(히 2:14), 성화 조항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씻으시며(요일 1:7), 부활 조항에서 바로 이 우리 육신의 실체가, 그러나 죄 없이, 다시 살아난다. 그러므로 원죄가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나 실체나 본질 그 자체이며 그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없다는 교리는 배척되어야 한다.
SD Art. II Free Will — Controversy (1-5) 자유의지를 둘러싼 논쟁의 제기
자유의지(free will)를 둘러싸고 교황주의자들과 우리 사이뿐만 아니라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따르는 일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발생하였다. 인간은 그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네 가지 서로 다른 상태에서 고찰될 수 있으나, 여기서의 주된 문제는 오직 이것이다. 곧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지성과 의지(will)가, 타락 이후 남은 자신의 힘으로 그 회심과 중생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은혜(grace)가 제시될 때 스스로 은혜를 위해 준비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것에 동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 편은, 인간이 성령의 은혜 없이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성취하거나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중생 이전에 은혜를 위해 어느 정도 스스로를 준비하고, 비록 희미하게나마 동의할 만한 자연적 힘을 아직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고대와 현대의 열광주의자(enthusiasts)들은 그 반대를 가르쳤으니, 하나님이 어떤 피조된 수단도 없이, 곧 하나님의 말씀의 외적 선포와 듣는 일 없이 그의 영으로 인간을 회심시킨다는 것이다. 이 둘 모두에 맞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순수한 교사들은 타락으로 인해 인간이 너무도 부패하여, 그의 회심과 구원에 관한 신적 일에 있어 본성상 눈멀었고, 말씀이 선포될 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할 수도 없고 도리어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며,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자신의 아무런 협력 없이 오직 은혜로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회심되고 중생되기까지 하나님의 원수로 남아 있다고 가르쳤다.
SD Art. II Free Will — Affirmative Thesis (6-13) 자유의지의 무능력에 관한 교리
우리의 교리와 신앙과 고백은 다음과 같다. 곧 영적·신적 일에 있어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지성과 마음과 의지(will)는 자신의 본연적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의욕하고 시작하고 이루고 행하고 일하거나 그 일에 협력할 능력이 전혀 없으며, 선한 것에 대하여 전적으로 죽고 부패하였다. 그리하여 타락 이후 중생 이전의 인간 본성에는,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 준비하거나 제시된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영적 힘의 작은 불티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도리어 그는 죄의 종(요 8:34)이자 마귀의 포로(엡 2:2; 딤후 2:26)이다.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앎과 율법(law)에 관한 희미한 불티를 아직 지니고 있으나(롬 1:19 이하), 그것은 너무도 멀고 굽어서 가장 학식 있는 자들조차 복음(gospel)을 들을 때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믿을 수 없다. 자연적 인간은 하나님의 영(spirit)의 일을 받지 않으니, 이는 그에게 어리석음이 되기 때문이다(고전 2:14). 육신적으로 죽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다시 이생의 생명을 얻도록 스스로를 준비할 수 없듯이, 죄 안에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살아나지 않는 한 자신의 힘으로 영적 의와 생명(life)을 얻는 데 자신을 적용할 수 없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 않고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롬 8:7).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셨다(요 15:5).
SD Art. II Free Will — Conversion God's work alone (24-44) 회심은 오직 하나님의 일임
인간이 성령에 의해 조명되고 회심되고 중생되고 이끌리기 이전에는, 그는 자신의 본연적 힘으로 영적 일과 자신의 회심에 있어 돌이나 통나무나 진흙이 할 수 있는 만큼만, 곧 전혀 시작하거나 협력할 수 없다. 그가 외적 지체를 움직이고 복음(gospel)을 듣고 어느 정도 그것을 묵상할 수 있을지라도, 그는 그것을 어리석음으로 여기며 믿을 수 없고, 이 점에서 그는 성령이 그 안에서 역사하시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고 적대적이므로 통나무보다도 더 나쁘게 행한다. 성경은 회심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faith)과 중생과 갱신을 자연적 자유의지의 인간적 힘에게 전혀도, 절반도, 그 어떤 가장 작은 부분에도 돌리지 않고, in solidum 곧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께 돌린다. 이성과 자유의지는 어느 정도 외적으로 단정한 삶을 살 수는 있으나, 새롭게 태어나고 내적으로 다른 마음과 지성과 성향을 얻는 것은 오직 성령만이 이루신다. 그분은 그 기뻐하심을 따라 우리 안에서 의욕함과 행함을 이루시며(빌 2:13), 회개(repentance)를 주시고(행 5:31), 믿음을 일으키신다(빌 1:29). 아버지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요 6:44). 그러므로 거듭나지 못한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고자 원할 만큼의 힘을 아직 지니고 있으며 자연적 인간 의지가 회심에 어느 정도 협력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가르침이다. 이런 오류된 견해는 성경과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그 변증서, 슈말칼덴 조항, 루터의 대·소 요리문답에 반한다.
SD Art. II Free Will — Means of grace; abuse warning (46-54) 은혜의 수단과 교리 남용에 대한 경고
우리의 자연적 자유의지의 무능력과 우리의 회심에 관한 이 교리, 곧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일이요 우리 힘의 일이 아니라는 교리는 열광주의자들과 에피쿠로스주의자들에 의해 비그리스도적으로 남용되어, 그들은 기도와 독서와 묵상에 게으르고 나태해져, 자신의 힘으로는 스스로 회심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강제로 회심시킬 때까지 기다리겠다 하거나, 말씀을 듣거나 읽지도 않고 성례를 사용하지도 않은 채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그 은사를 부어주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이에 맞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회심되며 어떤 수단을 통해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서술한다. 아무도 멸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요, 모든 사람이 회심하여 영원히 구원(salvation)받는 것이 그 뜻이다(겔 33:11; 요 3:16).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아들의 구원하는 복음(gospel)이 공개적으로 선포되게 하시고, 이 선포를 통하여 영원한 교회를 모으시며 참된 회개(repentance)와 죄에 대한 앎과 참된 믿음을 일으키신다. 바로 이 수단을 통하여, 그 밖의 다른 어떠한 방식으로도 아니라, 곧 그의 거룩한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와 그의 말씀에 따라 성례를 사용할 때,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시고 자신에게 이끄시며 회심시키고 중생시키고 성화시키고자 하신다(고전 1:21; 롬 10:17).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이는 이 선포를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듣는 일은 성령의 도구이며, 그분은 이를 통해, 이와 함께, 이로 말미암아 효과적으로 역사하시고 사람들을 하나님께 회심시키고자 하신다.
SD Art. III Righteousness of Faith — Controversy (1-8) 신앙의 의를 둘러싼 논쟁과 그리스도교 제일 조항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따르는 일부 신학자들 사이의 세 번째 논쟁은 그리스도의 의 혹은 신앙의 의(righteousness of faith)에 관한 것으로, 이는 하나님이 은혜(grace)로, 믿음을 통하여, 가난한 죄인에게 의로 전가하시는 그것이다. 한 편은, 사도가 하나님의 의라 부르는 신앙의 의가 하나님의 본질적 의, 곧 참되고 본성적이며 본질적인 하나님의 아들(Son)로서의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분이 믿음으로 택함 받은 자 안에 거하시며 그들을 올바르게 행하도록 움직이시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가 오직 그 인성(human nature)에 따라서만 우리의 의라고 주장하였다. 이 둘 모두에 맞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다른 교사들은 그리스도가 오직 그 신성에 따라서도, 오직 그 인성에 따라서도 아니라 두 본성 모두에 따라 우리의 의가 되신다고 가르쳤다. 그분은 하나님이자 사람으로서 그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속하고 칭의(justify)하고 구원하셨으며, 따라서 신앙의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을 인하여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와 하나님의 자녀로의 양자 됨이다. 이 순종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 순수한 은혜로, 모든 참 신자에게 의로 전가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justification by faith)에 관한 이 조항은 그리스도교 교리 전체에서 제일 조항이며, 이것 없이는 어떤 가난한 양심도 굳건한 위로를 얻거나 그리스도 은혜의 풍성함을 참으로 알 수 없다. 루터가 기록했듯이, 만일 이 하나의 조항만 전장에서 순수하게 남아 있으면 그리스도의 교회도 순수하게 남아 있으나, 그것이 순수하게 남아 있지 않으면 어떤 오류나 광신적 영도 막을 수 없다.
SD Art. III Righteousness of Faith — Affirmative Thesis (9-17) 칭의와 신앙의 의에 관한 교리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의 의(righteousness of faith)에 관하여 우리는 만장일치로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기를, 가난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칭의(justify)되어 곧 그의 모든 죄와 당연히 받아야 할 정죄의 선고에서 풀려나고 자유롭고 면제되었다고 선언되며, 영원한 생명(life)의 자녀이자 상속자로 입양된다 한다. 이는 우리 자신의 아무런 공로나 가치도 없이, 또한 선행하는 행위도 현재의 행위도 뒤따르는 행위도 없이, 순수한 은혜로, 오직 우리 주 그리스도의 유일한 공로와 완전한 순종과 쓰라린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인함이며, 그의 순종이 우리에게 의로 여겨진다. 이 보화는 성령이 거룩한 복음(gospel)의 약속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오직 믿음(faith)만이 우리가 그것을 붙잡고 받아들이고 적용하고 자기 것으로 삼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gift)로서, 그것으로 우리는 복음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구속자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고 그분을 신뢰하여, 오직 그의 순종을 인하여 은혜로 죄의 용서를 받는다. 믿음이 칭의하는 것은 그것이 그리 좋은 행위이거나 그리 아름다운 덕이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약속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merit)를 붙잡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은혜로 믿음에 전가되는 의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고난과 부활이니,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율법에 대하여 만족을 이루시고 우리 죄를 속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칭의하다(justify)는 말은 그리스도의 의를 인하여 의롭다 선언하고 죄에서 자유롭게 하며 영원한 형벌에서 풀어주는 것을 의미하며, 이 의는 하나님이 믿음에 전가하신다(빌 3:9; 롬 8:33).
SD Art. III Righteousness of Faith — Faith alone (22-43) 오직 믿음,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행위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고 칭의된다고 가르칠 때, 그 뜻은 중생 이후에 칭의된 자에게 아무런 불의가 달라붙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 완전한 순종으로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믿음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순종을 인하여 의롭다 선언되고 여겨지나, 그들의 부패한 본성 때문에 무덤에 이르기까지 죄인으로 남는다. 또한 그 뜻은 회개(repentance)와 갱신 없이 우리가 죄 안에 머물러도 된다는 것도 아니다. 참된 통회가 먼저 있어야 하며, 오직 중보자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런 행위 없이, 순수한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들에게 성령이 또한 주어져, 그들을 갱신하고 성화하시며 그들 안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일으키신다. 그러나 이생에서 시작된 갱신은 불완전하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의 의는 우리 행위의 더함 없이 그리스도의 의를 은혜롭게 전가받는 데 있다. 따라서 믿음에 선행하는 것과 뒤따르는 것이 칭의 조항에 섞이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랑은 참된 믿음을 반드시 따르는 열매이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가 행위 없이 믿음으로 칭의된다(롬 3:28)고 말할 때, 그는 선행하는 통회도 뒤따르는 행위도 칭의 조항에 속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선한 행위는 칭의에 선행하지 않고 뒤따르며, 사람은 먼저 칭의된 뒤에야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 루터가 말하듯이, 믿음과 선한 행위는 잘 부합하고 분가분리 연결되어 있으나, 축복을 붙잡는 것은 행위 없는 오직 믿음이며, 그러면서도 그 믿음은 결코 홀로 있지 않다.
SD Art. III Righteousness of Faith — Rejected errors (44-66) 배척되는 오류들
우리는 다음의 오류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것으로 배척하고 정죄한다. 곧 우리의 사랑이나 선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의 공로나 원인이라는 것(전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선한 행위로 사람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을 만한 자격을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는 것,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실제 의가 성령이 우리 안에 이루는 사랑이나 갱신이라는 것, 신앙의 의에 두 부분이 속하니 곧 은혜롭게 죄를 용서하심과 또한 갱신이라는 것, 믿음은 오직 초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만 칭의하고 우리의 갱신이나 사랑이 하나님 앞에서 완결적으로 혹은 이차적으로 칭의한다는 것,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부분적으로는 새 순종의 시작으로 칭의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칭의되는 방식과 다른 어떤 방식으로 구원받는다고, 곧 우리가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 칭의되나 행위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도 그릇되니, 이는 롬 4:6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다음을 배척한다. 그리스도가 오직 그 신성에 따라서만 우리의 의라는 것, 그리스도가 오직 그 인성에 따라서만 우리의 의라는 것, 칭의하다·칭의된다는 말이 죄에서 자유롭다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부어넣은 사랑으로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을 뜻한다는 것, 믿음이 참된 회개도 없고 양심을 거슬러 죄에 머무는 사람 안에도 남을 수 있는 신뢰라는 것, 믿는 자들 안에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만 거한다는 것이다. 이들과 이와 같은 오류들을 우리는 만장일치로 배척하며,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그 변증서에 담긴 바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의 의에 관한 교리에 굳건히 머문다.
Solid Declaration, Article IV: Of Good Works Of Good Works
선행에 관하여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따르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불일치가 발생하였다. 한편에서는 선행이 구원에 필요하며, 선행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고, 누구도 선행 없이 구원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선행이 믿음의 열매로서 참 신자에게 요구되며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만 그러한 사랑이 구원의 원인은 아니라고 보았다. 반면 다른 편에서는 선행이 참으로 필요하기는 하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그리스도의 공로가 약화되지 않고 구원의 약속이 신자에게 확고히 남도록 위의 표현들을 교회 안에서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 논쟁에서 일부는 선행이 구원에 해롭다는 명제를, 또 일부는 선행이 율법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심령과 기쁜 마음에서 행해져야 하므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사용하였으며, 이에 맞서 다른 편은 선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필연(necessitas)과 자유(libertas)라는 용어에서 비롯되었으니, 필연이라는 말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를 지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질서뿐 아니라 때로 율법이 사람을 선행으로 강제하는 강요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에 따라 이 불일치를 설명하는 우리의 교리와 믿음과 고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자가 선행 가운데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질서요 명령이라는 점, 참으로 선한 행위는 사람이 스스로 고안하거나 사람의 전통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말씀 안에 친히 명하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참된 선행은 우리 본성의 능력에서가 아니라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행을 위하여 새로 지음받을 때 비로소 행해진다는 점(엡 2:10)에 관하여는 우리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없다. 또한 신자의 선행이 이 육신 안에서 불순하고 불완전함에도 어떻게 그리고 어찌하여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가에 관하여도 논쟁이 없으니, 곧 주 그리스도를 인하여 믿음으로, 그 인격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불신자와 회심하지 않은 자가 행하는 일은 세상 앞에서 칭찬받을 만할지라도 참된 믿음에서 나오지 않으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죄이니, 부패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 7:18; 롬 14:23). 그러므로 참으로 선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에는 믿음이 그 어머니요 근원이 되어야 하며, 바울은 이를 믿음과 성령의 참된 열매라 일컫는다. 루터 박사가 로마서 서문에서 쓴 바와 같이, 믿음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나게 하며 옛 아담을 죽이고 성령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것은 살아 있고 분주하며 활동적이고 능력 있는 것이어서 쉼 없이 선을 행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불에서 열과 빛을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에서 행위를 분리하기란 불가능하다. 선행의 필연성 또는 자발성에 관하여 보건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그 변증서에서 선행이 필요하다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며,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규례를 인하여 우리가 마땅히 행할 바에 관하여 필요·당위·반드시라는 말이 사용된다(롬 13:5; 고전 9:9; 행 5:29; 요 15:12; 요일 4:21). 그러므로 이러한 명제들은 이 그리스도교적이고 올바른 의미에서는 부당하게 정죄될 수 없으니, 회개도 선행도 없는 죽은 믿음이라는 안일한 에피쿠로스적 망상을 책망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의미는 강요의 필연(necessitas coactionis)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규례·명령·뜻과 우리의 의무의 필연(necessitas ordinis, mandati et voluntatis Christi ac debiti nostri)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약의 백성은 자원하는 백성이어야 하며(시 110:3), 억지로가 아니라 기쁘게 드려야 하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고후 9:7). 선행이 신자에게 자유로워서 그것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거나, 하나님의 율법을 거슬러 행하고도 믿음과 은혜를 보전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거짓이며 책망받아야 한다. 둘째, 선행이 필요하다고 가르칠 때에는 어떤 이유로 필요한지 설명해야 하며, 여기서 우리는 행위가 칭의의 조항에 끌어들여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선행이 구원에 필요하여 선행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명제는 정당하게 거부되니, 이는 바울이 우리의 행위와 공로를 칭의에서 전적으로 배제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돌린 칭의와 구원의 조항에서의 배타적 한정사(de particulis exclusivis in articulo iustificationis et salvationis)에 정면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롬 4:6).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제6조에는 우리가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루터 박사는 갈라디아의 거짓 선지자들, 교황주의자들, 재세례파, 그리고 자기 추종자 가운데 일부에게서 이러한 명제들을 거부하였다. 셋째, 선행이 구원을 보전하는지, 혹은 믿음과 의와 구원을 보전하는 데 필요한지에 관하여 보건대, 거짓된 에피쿠로스적 망상, 곧 믿음과 구원이 어떤 죄로도, 심지어 고의적인 죄로도 상실될 수 없다는 망상을 엄히 거부해야 한다. 이에 맞서 하나님의 위협의 말씀을 각인시켜야 한다(고전 6:9; 갈 5:21; 엡 5:5; 롬 8:13; 골 3:6). 변증서는 베드로후서 1:10에 관하여, 어떻게 선행에의 권면이 믿음의 교리를 흐리지 않으면서 촉구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곧 선행은 우리가 우리의 부르심을 확고히 하여 떨어져 나가 성령을 잃지 않도록 행해야 하나, 죄악된 삶을 살며 성령을 잃고 회개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믿음이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은 믿음이 처음에만 의와 구원을 붙들고 그 후에는 그 직무를 행위에 넘겨준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바울은 처음과 중간과 끝을 오직 믿음에 돌린다(롬 5:2; 11:20; 골 1:22; 벧전 1:5,9).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이 구원을 보전한다거나 받은 믿음의 의가 우리의 행위로 보전된다는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은 정당하게 거부되어야 하며, 건전한 말의 본을 굳게 지키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딤후 1:13). 넷째, 선행이 구원에 해롭다는 명제에 관하여 보건대, 누구든 선행을 칭의의 조항에 끌어들이거나 구원을 위한 신뢰를 그 위에 두려 한다면, 바울과 함께(빌 3:7 이하) 그의 행위는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롭다 하겠으나, 이는 행위 자체의 잘못이 아니라 그 위에 둔 거짓된 신뢰의 잘못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선행이 신자의 구원에 해롭다고 단순하게(simpliciter) 말해서는 결코 안 되니, 신자 안에서 선행은 참된 원인으로 말미암아 참된 목적을 위하여(propter veras causas et ad veros fines) 행해질 때 구원의 표징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신자가 성령께서 그들 안에 이루시는 선행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무분별한 명제는 우리 교회에서 거짓되고 거치는 것으로 책망되고 거부되니, 그리스도인은 선행에서 만류될 것이 아니라 가장 부지런히 권면받고 촉구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Solid Declaration, Article V: Of the Law and the Gospel Of the Law and the Gospel
율법과 복음의 구별은 특별히 빛나는 광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옳게 나뉘고 거룩한 선지자와 사도들의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도록 하는 데에 기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교리가 서로 혼합되지 않도록, 혹은 복음에서 율법이 만들어져 그리스도의 공로가 가려지고 괴로운 양심이 그 위로를 빼앗기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하여 지켜야 한다. 여기에서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따르는 일부 신학자들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하였다. 한편에서는 복음이 본래 은혜의 선포일 뿐 아니라 동시에 회개의 선포, 곧 가장 큰 죄인 불신앙을 책망하는 선포라고 주장하였고, 다른 편에서는 복음이 본래 회개나 책망의 선포가 아니며 그것은 모든 죄, 따라서 불신앙도 책망하는 하나님의 율법에 속한다고 보았으며, 복음은 본래 그리스도를 인한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의 선포로서 이를 통하여 회심한 자의 불신앙이 용서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이 불일치는 주로 복음이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그리고 고대와 근래의 교회 교사들에 의해 한 가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때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사역에서 선포하시고 신약에서 선포하도록 명하신 그리스도의 전체 교리로 이해되며, 그 안에 율법의 해설과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를 포함한다(막 1:1; 눅 24:46~47; 행 20:21). 이 넓은 의미에서, 율법과 복음의 고유한 구별 없이, 복음이 회개와 죄 사함의 선포라고 말하는 것은 옳으니, 요한과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회개로써 그 선포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율법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용어는 그 고유한 의미로도 사용되어, 회개의 선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만을 포함한다(막 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찬가지로 회개라는 용어도 한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으니, 어떤 구절에서는 사람의 전체 회심을 가리키고(눅 13:5; 15:7),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회개가, 또는 회개와 죄 사함이 구별되어 언급되는 곳에서는 회개가 다름 아니라 참으로 죄를 인정하고 마음으로 통회하며 그것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식은 율법에서 오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더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로의 구원에 이르는 회심에 충분하지 않으니, 복음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율법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모든 통회하는 죄인에게 제시한다. 복음은 죄 사함을 무감각하고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상한 자 곧 통회하는 자에게 선포하며(눅 4:18), 율법의 두려움이 절망으로 변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되도록 한다(고후 7:10). 그리스도 없이 율법만을 선포하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거나 전적인 절망으로 몰아넣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그 손에 취하사 영적으로 해설하시며(마 5:21 이하; 롬 7:14; 1:18) 모든 죄인에게 하늘로부터 그 진노를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은 위로하실 뿐 아니라 율법의 직무를 통하여 세상으로 죄에 대하여 책망하셔야 하며(요 16:8), 그 고유한 일 곧 위로하고 은혜를 선포하는 일(opus proprium)을 행하시기 위하여 낯선 일(opus alienum)을 행하신다(사 28:21). 이런 까닭에 그는 보혜사라 불리니, 루터 박사가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관하여 선포하는 모든 것은 율법의 선포요,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은혜와 용서만을 보이고 주는 선포이다. 슈말칼덴 조항은 신약이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는 율법의 직무를 보유하고 강조하나 이 직무에 즉시 복음을 통한 은혜의 약속을 더한다고 말하며, 변증서는 참되고 구원에 이르는 회개에는 율법의 선포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복음이 더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두 교리는 함께 속하여 나란히 강조되어야 하되 일정한 순서와 올바른 구별로 행해져야 하며, 교회에서 율법의 선포를 폐하고 회개와 통회를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율법폐기론자(Antinomians)는 정당하게 정죄된다. 우리는 율법이 본래 하나님의 의롭고 불변하는 뜻이 계시된 신적 교리로서, 사람이 그 본성·생각·말·행위에서 어떠해야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질지를 드러내며, 그 범법자들을 하나님의 진노와 현세적·영원한 형벌로 위협한다고 일치하여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 죄를 책망하는 모든 것이 율법에 속하며(롬 3:20; 7:7), 불신앙이 모든 죄의 뿌리이므로 율법은 불신앙도 책망한다. 그러나 율법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조명되고 해설되지만, 죄를 책망하고 선행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은 여전히 율법의 고유한 직무로 남는다. 이제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범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죽음과 지옥불의 형벌 아래 있으므로, 복음은 본래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죄 사함을 얻을지 가르치는 교리이니, 곧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친히 지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하여 갚으셨으며, 오직 그를 통하여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화친하고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으며 죽음에서 건짐받아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율법의 범법자에게 위로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를 제시하는 모든 것이 본래 복음이라 불리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죄를 용서하시리라는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모든 통회하는 죄인은 오직 주 그리스도께 그 신뢰를 두어야 하니, 그는 우리의 범죄를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으며(롬 4:25),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시고(고후 5:21),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며(고전 1:30), 그의 순종이 우리에게 의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율법은 의문(letter)으로 죽이고 정죄를 선포하는 직분이나(고후 3:7), 복음은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세상 처음부터 이 두 선포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올바른 구별과 함께 나란히 끊임없이 주입되어 왔으니, 족장들은 여자의 후손(창 3:15), 아브라함의 후손(창 22:18), 다윗의 자손(시 110:1; 사 49:6; 53:5; 눅 2:32)에 관한 선포로 자신을 위로하였다. 이 두 교리는 세상 끝까지 부지런히 주입되어야 하니, 율법의 선포를 통하여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마음이 두려워하고 회개로 인도되도록 하되,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며(갈 3:24)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므로(롬 10:4)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며, 또한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다시 위로받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순전한 은혜로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시되, 그들이 은혜를 남용하여 은혜를 바라며 죄를 짓지 않도록 한다(고후 3:7 이하).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의 참된 구별이 온 힘을 다하여 보전되어야 하며, 본래 의미의 복음을 회개나 책망의 선포로 바꾸는 것은 위험하고 그릇된 일이니,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덕이 가려지고 복음이 교황제도에서 일어난 것처럼 다시 율법의 교리로 변하며, 그리스도인이 율법의 두려움에 맞서 복음 안에서 가지는 참된 위로를 빼앗기기 때문이다.
Solid Declaration, Article VI: Of the Third Use of the Law Of the Third Use of the Law
하나님의 율법은 거칠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에 맞서 외적 규율과 단정함을 유지하는 데에, 또한 사람들이 그 죄를 알게 되는 데에 유익할 뿐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 주께로 회심하였을 때 율법 안에서 살고 행하는 데에도 유익하므로, 율법의 이 셋째이자 마지막 용법에 관하여 소수의 신학자들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하였다. 한편에서는 거듭난 자가 새로운 순종이나 어떤 선행 가운데 행해야 할지를 율법에서 배우지 않는다고 가르쳤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어 성령의 권고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스스로 자유로이 행하기 때문이며, 마치 해가 아무 외적 추동 없이 그 정해진 길을 마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에 맞서 다른 편은, 비록 참으로 믿는 자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움직여 속사람을 따라 자유로운 심령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지라도, 성령께서 그들에게 기록된 율법을 가르침으로 사용하시며 이로써 그들이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록된 율법과 말씀, 곧 경건한 삶과 행실의 확실한 규범과 표준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기를 배운다고 가르쳤다. 이 불일치의 해결을 위하여 우리는 일치하여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 곧 참으로 믿고 회심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고 자유롭게 되었을지라도, 그들은 날마다 주의 율법 안에서 자신을 연단해야 한다(시 1:2; 119:1).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정확히 그려진 거울이므로 신자에게 끊임없이 들어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율법이 의인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자를 위함이라 할지라도(딤전 1:9), 이는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율법 없이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니,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뜻은, 율법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를 그 저주로 짐 지울 수 없으며, 거듭난 자가 속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하므로 그 강요로 거듭난 자를 괴롭힐 수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만일 믿고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 생에서 완전히 새롭게 되어 그 본성과 모든 능력에서 죄에서 온전히 자유롭다면, 그들은 율법도 그것으로 몰아갈 자도 필요로 하지 않고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할 것이니, 마치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강요 없이 그 정한 길을 가며, 거룩한 천사들이 전적으로 자발적인 순종을 드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신자는 이 생에서 완전하게(completive vel consummative) 새롭게 되지 못하니, 그들의 죄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덮여 정죄로 전가되지 않고 옛 아담의 죽임과 심령의 새롭게 됨이 성령으로 시작되었을지라도, 옛 아담이 그 본성과 모든 안팎의 능력에 여전히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롬 7:18 이하; 갈 5:17). 그러므로 이 육신의 정욕으로 인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이 생에서 율법의 날마다의 교훈과 권면, 경고와 위협뿐 아니라 종종 형벌도 필요로 하니, 이는 그들이 일깨움을 받아 하나님의 영을 따르게 하려 함이다(시 119:71; 고전 9:27; 히 12:8). 그러나 우리는 복음이 신자의 새로운 순종을 향하여 무엇을 행하며 율법의 직무가 무엇인지 구별하여 설명해야 한다. 율법은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나 그것을 시작하고 행할 능력은 주지 못하며, 율법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주어지고 받는 성령께서(갈 3:14)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 그 후에 성령께서 율법을 사용하사 거듭난 자를 가르치시고 십계명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가리켜 보이시며(롬 12:2; 엡 2:10) 그들을 권면하시고, 그들이 육신으로 인하여 게으르고 태만하고 반역할 때 율법을 통하여 책망하신다. 그리하여 그는 두 직무를 함께 수행하시니, 죽이고 살리시며 음부로 내리고 다시 올리신다. 그의 직무는 위로하실 뿐 아니라 책망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16:8). 오해를 막기 위하여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합당한 선행을 말할 때 율법이라는 말은 오직 한 의미, 곧 사람이 그 삶에서 따라야 할 하나님의 불변하는 뜻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다만 차이는 행위에 있으니, 이 율법과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차이 때문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은 채 형벌의 두려움이나 보상의 욕망에서 명령받은 대로 율법을 따라 행하는 한, 그는 여전히 율법 아래 있으며 그의 행위는 바울이 본래 율법의 행위라 부르는 것이니, 종의 행위처럼 율법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이들은 가인의 계열을 따른 성도, 곧 위선자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을 때, 그는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불변하는 뜻을 따라 살며 모든 것을 자유롭고 기쁜 심령에서 행하니, 이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행위와 열매, 곧 바울이 일컫는 마음의 법이요 그리스도의 법이라 불린다. 그러한 사람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롬 8:2; 7:23; 고전 9:21). 그러나 신자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새롭게 되지 못하고 옛 아담이 무덤에 이르기까지 달라붙어 있으므로, 그들 안에는 영과 육 사이의 싸움이 남아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속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하나 그 지체 안의 법이 마음의 법과 싸우니, 따라서 그들은 결코 율법 없이 있지 않으며 그럼에도 율법 아래가 아니라 율법 안에 있어 주의 율법 안에서 살고 행하되 율법의 강제에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에게 달라붙어 있는 옛 아담에 관한 한, 그는 율법뿐 아니라 형벌로도 몰아쳐야 하며, 경건치 않은 자가 율법의 위협으로 순종 가운데 붙들리는 것과 다름없이 모든 것을 자기 뜻을 거슬러 강요 아래 행한다. 율법의 이 교리는 신자에게 필요하니, 그들이 자기 나름의 거룩과 경건을 고안하여 성령을 빙자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 없이 스스로 택한 예배를 세우지 않게 하려 함이다(신 12:8,28,32). 또한 필요한 까닭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자기 행위와 삶이 전적으로 순수하고 완전하다고 쉽게 상상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율법이 거울처럼 이 생에서 그것들이 여전히 불완전하고 불순함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고전 4:4; 롬 13:9; 7:7 이하; 시 119:32; 143:2). 그러나 신자의 선행이 육신 안의 죄로 인하여 불완전하고 불순함에도 어떻게 그리고 어찌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가는 완전하고 순수한 순종을 요구하는 율법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제사가 그리스도를 인하여 믿음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가르치는 복음이 가르친다(벧전 2:5; 히 11:4 이하).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으니,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 인격이 율법의 저주와 정죄에서 자유롭게 되고, 그들의 선행이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인하여 받아들여지며, 속사람을 따라 거듭난 한에서 그들이 율법의 강요가 아니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를 행하되, 그럼에도 옛 아담에 맞서 끊임없는 싸움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옛 아담은 다루기 힘들고 완고한 짐승과 같아서, 죄의 몸이 온전히 벗겨지고 사람이 부활에서 완전히 새롭게 될 때까지 율법의 교훈과 위협뿐 아니라 형벌의 매로도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강제되어야 한다. 그때에는 율법의 선포도 그 위협과 형벌도, 또한 복음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니, 이것들은 이 불완전한 생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뵈올 때에는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전한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온전한 순수와 완전함 가운데 행하며 그 안에서 영원히 즐거워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 언급한 방식과 정도로 율법이 그리스도인과 참된 신자에게 촉구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불신자와 비그리스도인과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만 촉구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그리스도교적 규율과 참된 경건에 해롭고 유해한 오류로 거부하고 정죄한다.
Solid Declaration, Article VII: Of the Holy Supper Of the Holy Supper
성찬에 관하여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따르는 신학자들과 성례주의자들(Sacramentarians)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일부 성례주의자들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하며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신자들에 의해 참으로 받아들여진다고 고백하지만, 그 의미를 분명히 진술하도록 압박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곧 그리스도의 참되고 본질적인 몸과 피는, 가장 높은 하늘이 땅에서 떨어져 있는 만큼이나, 축성된 떡과 포도주에서 떨어져 있으며, 입으로는 떡과 포도주 외에 다른 것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제정의 말씀인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를 문자 그대로의 본래 의미로 해석하지 않고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이 곧 믿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며, "이다"라는 말을 성례적(sacramentaliter)으로 또는 표징적 방식(modo significativo)으로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육신이 땅 위에 현존한다고 여기지 못하게 한다.
이에 맞서 우리는 루터 박사가 『대요리문답』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곧 제단의 성례(Sacrament of the Altar)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로서,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고 그 아래에(in and under) 있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먹고 마시도록 명령받은 것이다. 이 성례를 만들고 구별하는 것은 말씀이니, 그리하여 그것은 단지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며 또 그렇게 일컬어진다. 비록 악인이 이 성례를 받거나 분배한다 할지라도 그는 가장 합당하게 받는 자와 똑같이 참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으니, 이는 사람의 거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까닭이다. 이 현존은 믿는 자와 합당한 자에게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와 합당하지 않은 자에게도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떡 아래, 떡과 함께, 떡 안에"라는 표현은 교황주의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배격하고, 변하지 않은 떡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몸의 성례적 연합(sacramental union)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되고 변하지 않는 두 본성이 나뉠 수 없이 연합되어 있는 것과 같이, 성찬에서도 두 실체 곧 자연적인 떡과 그리스도의 참되고 자연적인 몸이 성례의 정해진 시행 가운데 여기 땅 위에 함께 현존한다. 그러나 이 연합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연합과 같은 위격적 연합(personal union)이 아니라 성례적 연합이다. 우리는 영원하시고 참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이성에 그럴듯해 보이는 우의적·비유적 표현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단순한 믿음과 마땅한 순종으로 그 말씀을 읽히는 그대로, 본래의 분명한 뜻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이중의 참여(two-fold participation)를 구별한다. 곧 믿음으로 영적으로 먹는 것과, 합당한 자와 합당하지 않은 자 모두에 의해 이루어지는 입으로 먹는 것이다. 참된 현존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위가 아니며, 집례자의 공로나 낭송도 아니고, 성찬을 받는 자들의 먹음이나 믿음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제정과 명령에 돌려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첫 제정 때 하신 전능한 말씀은 항구히 유효하며 지금도 효력을 발휘하니,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제정을 따라 성찬이 거행되고 그분의 말씀이 사용되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참으로 현존하며 분배되고 받아진다. 그러므로 제정의 말씀은 회중 앞에서 분명하고 또렷하게 공적으로 말하거나 노래해야 하며 결코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
제정의 말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유익한 규칙이 도출되었다. 곧 Nihil habet rationem sacramenti extra usum a Christo institutum --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사용(use) 밖에서는 어떤 것도 성례의 본질을 갖지 못한다." 여기서 "사용"이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의 전체적이고 외적이며 가시적인 행위 전부를 뜻하니, 곧 축성, 분배, 그리고 축성된 떡과 포도주를 입으로 받음이다. "영적으로"라는 말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에서 현존하시는 영적·초자연적·천상적 방식을 이해하니, 그분은 믿는 자에게는 위로와 생명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정죄를 이루신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교회에 거짓으로 돌려지는 거칠고 육적인 현존이라는 가버나움적(Capernaitic) 관념을 배격한다. 이 조항에 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 주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하심과 전능하심 위에 서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과 입으로 다음의 것들을 거짓되고 그릇되며 미혹하는 것으로 배격하고 정죄한다. 곧 떡과 포도주가 그 실체를 잃는다고 하는 교황주의의 화체설,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 제사(sacrifice of the mass)와 평신도에게 한 가지 형태만 베푸는 것과 같은 이 성례에 대한 모든 교황주의적 남용, 그리고 모든 성례주의적 견해들이다. 즉 제정의 말씀을 비유(tropi)로 비틀어 낯선 뜻으로 만드는 것,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입으로 받음을 부인하는 것, 떡과 포도주를 멀리 떨어진 그리스도의 몸의 단순한 표지나 형상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갇혀 계셔서 성찬에서 우리와 참으로 함께하실 수 없다고 하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과 전능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몸을 현존하게 한다고 하는 것, 신자들을 성찬의 떡으로부터 하늘로 향하게 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합당하지 않은 자가 자신의 정죄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만 받는다고 하는 가르침과, 이 천상적 신비에 관하여 제기되는 모든 주제넘고 신성모독적이며 가버나움적인 질문들을 배격한다.
Solid Declaration, Article VIII: Of the Person of Christ Of the Person of Christ
그리스도의 인격(Person of Christ)에 관하여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따르는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으니, 이는 본래 성례주의자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루터 박사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참되고 본질적인 현존을 견지하였을 때,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동시에 하늘과 땅에 현존한다면 그것은 실제적이고 참된 인간의 몸일 수 없으며, 그러한 위엄은 오직 하나님께만 고유한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을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의 일치된 교리와 믿음과 고백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곧 하나님의 아들은 비록 영원부터 구별되고 온전한 신적 위격으로서 아버지 및 성령과 함께 참되시고 본질적이며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때가 차매 인성(human nature)도 그분의 위격의 통일성 안으로 취하셨다. 그리하여 이제 두 위격이나 두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한 위격 안에서 동시에 영원부터 아버지에게서 나신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참사람이시니, 기록된 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 9:5) 한 것과 같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곧 이 나뉘지 않은 한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 두 구별된 본성이 있으니, 곧 영원부터 있는 신성과, 때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의 통일성 안으로 취하여진 인성이다. 이 두 본성은 결코 서로 분리되거나 혼합되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하지 않으며, 각각 그 본성과 본질을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영원토록 보존한다. 두 본성이 그 본성과 본질에 있어 혼합되지도 파괴되지도 않은 채로 남아 있으므로, 각 본성은 또한 그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속성들을 보존하며 영원토록 그것들을 버리지 않으니, 한 본성의 본질적 속성이 결코 다른 본성의 본질적 속성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무한하심, 그 본성의 속성을 따라 동시에 어디에나 본래적으로 현존하심, 그리고 만물을 아심은 신성의 본질적 속성들이니, 이는 영원토록 결코 인성의 본질적 속성이 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형체를 지닌 피조물이 되심, 살과 피가 되심, 유한하고 한 곳에 국한되심, 고난을 당하심, 죽으심, 오르내리심,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심, 주리고 목마르며 춥고 더움을 겪으심은 인성의 속성들이니, 이는 결코 신성의 속성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곧 성육신 이후로 그리스도 안의 각 본성은 각기 따로 자존하여 별개의 위격을 이루거나 구성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이 연합하여 단 하나의 위격을 구성하니, 그 안에서 신성과 취하여진 인성이 동시에 자존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위격에는 그분의 신성뿐 아니라 취하여진 인성도 위격적으로 속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두 구별된 위격이 아니라 단 하나의 위격이시니, 비록 그 안에서 본성적 본질과 속성에 있어 혼동되지 않는 두 구별된 본성이 발견될지라도 그러하다.
또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믿고 가르치며 고백한다. 곧 그리스도 안에 취하여진 인성은 그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속성들을 지니고 보존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 신성과의 위격적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이후 영화(glorification)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일컬을 수 있는 모든 것 위에 위엄과 능력과 권세의 우편으로 높여졌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인성을 따라 높여지신 이 위엄에 관하여는,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을 때 비로소 받으신 것이 아니라, 모태에 잉태되어 사람이 되시고 신성과 인성이 위격적으로 연합하셨을 때 받으셨다. 이 위격적 연합은, 어떤 이들이 그릇되게 설명하듯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마치 두 널빤지를 아교로 붙인 것처럼 서로 아무런 교통도 없이 연합되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곧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의 오류요 이단이었으니, 그것은 두 본성을 서로 분리하여 두 그리스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Solid Declaration, Article IX: Of the Descent of Christ to Hell Of the Descent of Christ to Hell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에 관한 조항에 대하여는 교회의 고대 그리스도교 교사들 가운데서도, 또한 우리 교사들 가운데 일부에게서도 서로 다른 설명이 발견되므로, 우리는 사도신경에 담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단순함에 그대로 머무른다. 이는 루터 박사가 1533년 토르가우 성에서 행한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에 관한 설교에서 우리를 인도한 바이니, 거기서 우리는 고백한다. 곧 나는 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지옥에 내려가셨음을 믿는다. 이 고백에서 그리스도의 장사됨과 지옥 강하는 서로 다른 조항으로 구별되며, 우리는 다만 그 전 인격, 곧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께서 장사된 후 지옥에 내려가사 마귀를 정복하시고 지옥의 권세를 멸하시며 마귀에게서 그 모든 위력을 빼앗으셨음을 단순하게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관하여 높고 예리한 사변으로 스스로를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어찌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능과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는가 하는 앞의 조항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성과 다섯 감각으로는 이 조항을 거의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단순하게 믿고 그러한 믿음의 신비 가운데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옥도 마귀도 우리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사로잡거나 해할 수 없다는 그 실체와 위로를 보전한다.
Solid Declaration, Article X: Of Church Rites (Adiaphora) Of Church Rites (Adiaphora)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령되지도 금지되지도 않았으나 선한 의도로, 곧 좋은 질서와 단정함을 위하여 혹은 그리스도교적 규율을 유지하기 위하여 교회에 도입된 예식과 교회 관습에 관하여,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따르는 일부 신학자들 사이에서 마찬가지로 불일치가 일어났다. 한편에서는, 박해의 때와 신앙고백을 요구받는 경우에도, 복음의 대적들이 교리에서 우리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아디아포라(adiaphora)이며 하나님께서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으신, 오래전에 폐지된 어떤 예식들은 양심을 해치지 않고 대적들의 압력과 요구에 응하여 다시 세울 수 있으며, 그러한 아디아포라 곧 무관한 사항에서는 그들과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는, 박해의 때와 신앙고백을 요구받는 경우, 특히 대적들이 강압과 강요로든 음흉한 방식으로든 순수한 교리를 억누르고 점차 우리 교회에 그들의 거짓 교리를 다시 들여오려는 의도를 품을 때에는, 아디아포라에서도 양심을 해치고 신적 진리를 손상하지 않고는 결코 그리할 수 없다고 맞섰다. 이 논쟁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침내 종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의 단순한 진술을 제시한다. 곧 외적 아디아포라라는 명목과 구실 아래, 원리상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들이 제시될 때에는, 그것은 사람이 임의로 행할 수 있는 아디아포라로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으로 피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과 교황주의자들의 신앙이 멀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여 박해를 면하려 하거나, 그러한 예식을 통하여 상반된 두 종교가 화해하여 한 몸이 되는 것처럼 그 목적으로 요구되고 그 의미로 받아들여지거나, 혹은 그로 말미암아 교황제도로 다시 들어가고 복음의 순수한 교리에서 떠나는 일이 일어나거나 점차 뒤따르는 그러한 예식은 참되고 자유로운 아디아포라에 헤아려서는 안 된다. 이 경우에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6:14~17에 기록한 바가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곧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 따로 있으라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또한 좋은 질서에도, 그리스도교적 규율에도, 교회의 복음적 단정함에도 유익하지 않은 무익하고 어리석은 과시들도 참된 아디아포라가 아니다. 그러나 참된 아디아포라에 관하여는, 그러한 예식이 그 자체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아니며 그 일부도 아니라는 것, 그러나 예배인 것과는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니, 기록된 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함과 같다(마 15:9). 그러므로 우리는 각 처소와 각 시대의 하나님의 회중이 그 형편에 따라, 좋은 질서를 보전하고 그리스도교적 규율을 유지하며 교회를 세우는 데 가장 유익하고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대로, 경솔함과 거치게 함이 없이 질서 있고 합당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바꾸고 줄이고 더할 정당한 권리와 권능과 권위를 가진다고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 더욱이 그러한 외적 아디아포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선한 양심으로 믿음이 약한 자에게 양보하고 물러설 수 있는지는 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가르치며 자기 본으로 입증한다(행 16:3; 21:26; 고전 9:19). 또한 우리는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니, 신앙고백을 요구받는 때 곧 하나님의 말씀의 대적들이 거룩한 복음의 순수한 교리를 억누르려 할 때에는, 온 하나님의 회중, 참으로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하나님의 회중의 지도자로서 말씀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그 교리와 순수한 종교 전체에 속한 것을 말로뿐 아니라 행위와 실천으로도 자유롭고 공공연히 고백할 의무가 있으며, 그때에는 그러한 아디아포라에서도 대적들에게 양보하거나, 참된 하나님의 예배를 해치고 우상숭배를 도입·승인하게 하려는 폭력이나 술책으로 그들이 그것을 자기들에게 강요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기록된 바 갈라디아서 5:1: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또한 갈라디아서 2:4 이하: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니, 그들이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러 가만히 들어왔으나, 우리가 복음의 진리가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하여 한시도 그들에게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 구절에서 바울이 할례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분명하니, 그것은 그때 아디아포라가 되어 다른 경우에는 바울도 지켰으나, 거짓 사도들이 율법의 행위가 의와 구원에 필요하다는 그들의 거짓 교리를 세우려 할례를 강요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그 오류를 굳히는 데 오용하자,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손상되지 않고 지속되도록 한시도 양보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바울은 음식과 때나 날의 준수에 관하여는 약한 자에게 양보하고 물러선다(롬 14:6). 그러나 이것들을 필요한 것으로 양심에 지우려 한 거짓 사도들에게는, 그 자체로 아디아포라인 일에서도 양보하지 않으니, 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에 관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또한 베드로와 바나바가 그러한 위급한 때에 다소 양보하자, 바울은 그들이 이 일에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는 자로서 공공연히 책망한다(갈 2:11 이하). 여기서는 그 본성과 본질상 본디 자유로워 사용하거나 생략하라는 명령이나 금지를 둘 수 없는 외적 무관 사항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것은, 사도가 증언하듯, 첫째로 복음의 진리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탁월한 조항의 문제이니, 그러한 강요나 명령으로 그 진리가 가려지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이는 그러한 아디아포라가 그때에 거짓 교리·미신·우상숭배의 승인과 순수한 교리·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억압을 위하여 공공연히 요구되거나, 적어도 대적들에 의하여 이 목적으로 오용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조항도 여기서 위태로우니, 성령께서 거룩한 사도의 입을 통하여 그 교회에 보전하라 그토록 간절히 명하신 바이다. 이것이 약화되어 사람의 규례가, 생략하는 것이 그릇되고 죄인 것처럼 강압으로 교회에 강요되는 즉시, 이미 우상숭배의 길이 예비되며, 이로써 사람의 규례가 그 후 늘어나 하나님의 규례와 동등할 뿐 아니라 그 위에 놓이는 신적 예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리에서 먼저 그리스도교적 연합이 없었던 경우 그러한 외적인 일에서 양보하고 동조함으로써 우상숭배자들은 그 우상숭배에 굳어지고, 반면 참 신자들은 슬픔을 당하고 거치며 그 믿음이 약해지니,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영혼의 복지와 구원을 위하여 이 둘 다 피할 의무가 있다. 기록된 바 거치게 하는 일들로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또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거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편이 나으리라(마 18:6,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특별히 기억해야 하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하리라(마 10:32). 그러나 그러한 무관한 사항에 관하여 이것이 우리가 그 발자취를 따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주된 교사들의 신앙이요 고백이 언제나 어디서나 이러하였음은, 1537년에 작성되어 서명된 슈말칼덴 조항에서 끌어온 증언들이 보여 준다. 슈말칼덴 조항(교회에 관하여)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들 곧 교황의 주교들이 교회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실로 그들은 교회가 아니다. 또한 교회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명하고 금하는 것을 우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일곱 살 아이라도 교회가 무엇인지 아니, 곧 그 목자의 음성을 듣는 성도들과 신자들과 양들이다. 또한(안수와 부르심에 관하여): 만일 주교들이 참 주교가 되어 교회와 복음에 헌신하려 한다면, 사랑과 일치를 위하여, 그러나 필연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와 우리 설교자들을 안수하고 확정하도록 허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참 주교가 아니며 그리되기를 원하지도 않고 세상의 군주와 영주이므로, 교회는 그들을 인하여 사역자 없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 또한 교황제도에 관한 조항에서 슈말칼덴 조항은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 자신을 주와 하나님으로 예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의 사도인 교황 곧 적그리스도가 머리나 주로서 다스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또한 슈말칼덴 조항에 첨부된 교황의 권세와 수위에 관한 논고에는 이 말이 있다. 아무도 자기 전통으로 교회를 짐 지워서는 안 되며, 여기서는 누구의 권세나 권위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규칙이다. 그리고 그 직후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황의 불경한 교리와 신성모독과 부당한 잔혹에 동참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가장 부지런히 경계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로(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교황과 그 추종자들을 적그리스도의 나라로서 떠나고 저주해야 한다. 그토록 많은 나라와 민족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고 따로 교리를 고백하려는 것은 중대한 일이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서 있으니, 곧 모든 사람이 경계하여 거짓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과 합하지 말라는 것이다. 루터 박사 또한 예식 일반, 특히 아디아포라에 관하여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특별한 논고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충분히 가르쳤다. 이 설명으로부터, 모든 그리스도교 회중과 모든 그리스도인이, 특히 신앙고백의 때에, 그리고 무엇보다 설교자들이, 하나님께서 진노하지 않으시고 사랑이 상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대적들이 강해지지 않고 믿음이 약한 자들이 거치지 않도록, 아디아포라에 관하여 양심을 해치지 않고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규례가 그 자체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 혹은 예배의 일부로 여겨질 때 그것을 그릇된 것으로 배척하고 정죄한다. 2. 또한 이 규례가 필요한 것으로서 강압으로 하나님의 회중에 강요될 때 우리는 그것을 그릇된 것으로 배척하고 정죄한다. 3. 또한 박해의 때에 그러한 아디아포라를 다시 세우는 일에서 거룩한 복음의 대적들에게 응하거나 그들과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의 견해를 우리는 그릇된 것으로 배척하고 정죄한다. 4. 마찬가지로 박해의 때에 복음의 대적들을 위하여 무관한 사항에서든 교리에서든, 또 그 밖에 종교에 속한 것에서든, 그리스도교적 고백에 어긋나고 반하는 어떤 일이 행해질 때 우리는 그것을 책망받아 마땅한 죄로 여긴다. 5. 또한 이 아디아포라가, 마치 하나님의 회중이 그 형편에 따라 교회에 가장 유익한 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 가운데 그것들 중 하나 이상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사용할 자유가 없는 것처럼 폐지될 때 우리는 그것을 배척하고 정죄한다. 그리하여 교회들은, 교리와 그 모든 조항에서, 또한 거룩한 성례의 바른 사용에서 서로 일치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자유 가운데 어떤 교회가 예식을 더 적게 혹은 더 많이 가진다는 예식의 상이함을 이유로 서로 정죄하지 않을 것이니, 잘 알려진 격언과 같다. Dissonantia ieiunii non dissolvit consonantiam fidei, 곧 금식의 불일치가 믿음의 일치를 깨뜨리지 아니한다.
Solid Declaration, Article XI: Of God's Eternal Foreknowledge and Election Of Election (Predestination)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따르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원한 선택에 관하여 아직 거치게 하는 공공연한 불일치가 일어나지 않았으나, 이 조항이 다른 곳에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논쟁으로 끌려 들어갔으므로, 우리는 모두가 우리의 일치된 교리를 알 수 있도록 여기서 그것의 설명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 조항에 관한 교리는 신적 말씀의 본을 따라 가르쳐진다면 무익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니, 성경이 여러 곳에서 그것을 충분히 다루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오용이나 오해를 이유로 신적 말씀의 교리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까닭에 성경의 기초로부터 그 참된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영원한 예지(豫知)와 그 자녀들을 영원한 구원으로 선택하시는 영원한 선택 사이의 구별을 주의 깊게 지켜야 한다. 예지 곧 하나님께서 일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심은 선악을 막론한 모든 피조물에 미치니, 곧 지나갔든 장차 올 것이든 하나님 앞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 현존하므로, 하나님은 선이든 악이든 있거나 있을 모든 것을 미리 보시고 아신다(마 10:29; 시 139:16; 사 37:28).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곧 예정, 즉 구원에로의 하나님의 정하심은 경건한 자와 악한 자 모두에게 한꺼번에 미치지 않고, 오직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영생으로 선택되고 정해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미친다. 바울이 에베소서 1:4,5에서 말한 바와 같다. 곧 그가 그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자녀가 되도록 우리를 예정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예지는 악한 것도 미리 보시나, 그것이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인 것처럼은 아니다. 도리어 마귀와 사람의 비뚤어지고 악한 의지가 행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미리 보시고 아신다. 그리고 그 예지는 악한 행위에서도 그 질서를 지키니,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악에 대하여 그것이 얼마나 멀리 가야 하는지, 언제 어떻게 막고 벌하실지를 하나님께서 한계와 분량으로 정하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사 그것이 반드시 신적 이름의 영광과 그 택하신 자들의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그러나 악의 시작과 원인은 하나님의 예지가 아니니(하나님은 악을 행하지도, 돕지도, 조장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마귀와 사람의 악하고 비뚤어진 의지가 악의 원인이다. 기록된 바 호세아 13:9: 이스라엘아 네가 스스로 멸망하였나니 너를 도울 자가 내게 있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택하신 자들의 구원을 미리 보고 미리 알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과 기쁘심으로부터, 우리의 구원을 마련하고 이루고 돕고 증진하는 원인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이 위에 세워져 음부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한다(마 16:18; 요 10:28; 행 13:48). 또한 이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누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자가 구원받을지, 누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자가 정죄받을지를 미리 보셨다는 것 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거기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그가 다만 일종의 점호를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은밀하고 헤아릴 수 없는 경륜 안에서 그토록 헐벗은 방식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 관념으로부터 많은 자가 이상하고 위험하며 해로운 생각을 끌어내어, 안일과 무회개 혹은 낙심과 절망을 일으키니,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을 구원으로 미리 아셨고 하나님의 예지는 막거나 바꿀 수 없으므로, 내가 구원으로 미리 알려졌다면 회개 없이 온갖 죄를 행할지라도 아무것도 나를 해할 수 없고 그럼에도 나는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미리 알려지지 않았다면 회개하고 믿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또한 경건한 마음에도 이런 생각이 든다. 네가 영원부터 구원으로 미리 알려지지 않았다면 너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 이 거짓된 망상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의 분명한 논거로 맞서야 한다. 곧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은 안일과 무회개를 위해서가 아니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위하여 유익하며(딤후 3:1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것은 우리가 절망에 빠지도록이 아니라 인내와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도록 기록되었으므로(롬 15:4), 무회개나 절망이 그것으로 강해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영원한 예지에 관한 교리의 바른 사용이 아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며, 회개로 권면하고, 경건으로 촉구하며, 믿음을 강하게 하고, 우리 구원을 확신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한 선택에 관하여 바르게 생각하려면, 하나님의 헐벗고 은밀하며 헤아릴 수 없는 예지를 사변할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책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경륜과 정하심이 어떻게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되는가를 살펴야 한다. 곧 우리의 구속·부르심·칭의·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경륜·뜻·정하심에 관한 교리 전체가 함께 취해져야 한다(롬 8:29 이하; 엡 1:4 이하; 마 22:1 이하). 곧 하나님께서 그 목적과 경륜 안에서 정하신 바이다. 1. 인류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으로 구속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그는 그 순종과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유효한 의와 영생을 공로로 얻으셨다. 2. 그리스도의 그러한 공로와 은덕이 그의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되고 제공되고 분배될 것이다. 3. 그의 성령으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효력 있게 역사하사 마음을 참된 회개로 돌이키고 참된 믿음 가운데 보전하실 것이다. 4. 참된 회개로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은혜와 양자됨과 영생의 기업으로 받아들이실 것이다. 5. 또한 이같이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을 사랑 가운데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6. 또한 마귀와 세상과 육신에 맞서 그들의 연약함 가운데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다스리고 인도하시며, 그들이 넘어질 때 다시 일으키시고, 십자가 아래서 위로하실 것이다. 7.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부지런히 기도하며 받은 은사를 신실히 사용하면, 그들 안에 시작하신 선한 일을 끝까지 강하게 하고 붙드실 것이다. 8. 마침내 그가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원히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 경륜 안에서 하나님은 구원을 일반적으로만 예비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을 택한 자들의 각 사람을 은혜 가운데 택하셨다. 이 모든 것이 양자됨과 영원한 구원에로의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관한 교리에 포함되며, 우리가 구원으로의 하나님의 예정을 말할 때 결코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 또한 이 교리의 유익한 사용에 속한다. 곧 오직 택한 자만 구원받으므로, 우리가 어떻게 위로를 위하여 이 교리를 받을 수 있는 택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우리는 우리 이성을 따라서도, 어떤 외적 모양을 따라서도 판단해서는 안 되며, 신적 예정의 은밀한 심연을 탐구하려 해서도 안 되고, 도리어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유의해야 한다. 그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뜻의 비밀을 알리셨기 때문이다(엡 1:9 이하; 딤후 1:9 이하).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 8:29 이하에서 말한 대로 계시된다. 곧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들을 또한 부르셨다. 이제 하나님은 수단 없이 부르지 않으시고,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 사함을 전파하라 명하신 대로 말씀을 통하여 부르신다(눅 24:47; 고후 5:20; 마 22:2 이하).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한 선택을 유익하게 살피려면, 회개의 선포와 마찬가지로 복음의 약속도 보편적(universal)이며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것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눅 24:47; 요 3:16; 요 1:29; 요 6:51; 요일 2:2; 마 11:28; 롬 11:32; 벧후 3:9; 롬 10:12; 롬 3:22; 요 6:40). 그리고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우리는 속임수로 여기지 말고, 그로써 하나님이 그 뜻을 나타내사 친히 부르시는 자들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사 그들이 조명되고 회심하고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은 성령의 직분이요(고후 3:8)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롬 1:16). 이런 까닭에 택한 자들은 이렇게 묘사된다. 요한복음 10:27 이하: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며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은 택한 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주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롬 8:16,26). 성경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신실하사,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셨으니 우리 자신이 그에게서 돌이키지 않으면 끝까지 그것을 보전하실 것을 증언한다(고전 1:9; 빌 1:6; 벧후 3:9). 우리는 이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어야 하며, 누가복음 13:24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감추인 예정의 심연을 헤아리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름받은 자는 많되 택함받은 자는 적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마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뜻을 가져서가 아니다. 곧 내가 말씀으로 너희 모두를 겉으로는 부르나 내 마음으로는 모두에 대하여 이를 뜻하지 않고 다만 소수에 대하여만 뜻하니, 내가 말씀으로 부르는 자들의 대부분이 회심하지 않고 정죄된 채로 남는 것이 내 뜻이라 함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 상반된 뜻을 돌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영원한 진리이신 하나님이 자기와 모순되게 가르쳐지는 것이 되니, 도리어 하나님은 사람이 한 가지를 표명하고 마음에 다른 것을 품을 때 그 악함을 사람 안에서도 벌하신다(시 5:9; 12:2 이하). 또한 그로써, 우리가 우리를 향한 그의 뜻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배워야 한다고 날마다 권면받듯, 필요한 위로의 기초가 불확실해진다. 또한 성령께서 전파되고 들리고 묵상된 말씀과 함께 반드시 임하사 그것을 통하여 효력 있게 역사하기를 원하신다는 기초도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 뜻은 결코, 택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모독하고 박해하며,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성령을 거역하며, 회개 없이 죄에 머물고,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며, 다만 겉으로만 꾸미거나, 그리스도 밖에서 의와 구원의 다른 길을 찾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마 22:6; 행 13:46; 히 4:2,7; 행 7:51; 눅 14:18; 막 16:16; 마 7:22; 롬 9:31). 더욱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씀을 통하여 택한 자들을 부르고 조명하고 회심시키도록, 또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자를 의롭다 하고 구원하도록 정하신 것과 같이, 그 경륜 안에서 또한 말씀으로 부름받은 자들이 말씀을 배척하고 성령을 거역하면 그들을 완고하게 하고 유기하고 정죄하리라 정하셨다. 이런 방식으로 부름받은 자는 많되 택함받은 자는 적다. 적은 자만 말씀을 받아 따르고, 대다수는 말씀을 멸시하며 혼인 잔치에 오려 하지 않는다(마 22:3 이하). 이 멸시의 원인은 하나님의 예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심을 통하여 그에게 주시는 성령의 수단을 배척하는 사람의 비뚤어진 의지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너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이와 같이 많은 자가 말씀을 기쁘게 받으나 후에 다시 떨어져 나간다(눅 8:13). 그러나 그 원인은 하나님이 그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자들에게 끝까지 지킬 은혜를 주기를 원하지 않으셔서가 아니니, 그것은 바울에 어긋난다(빌 1:6). 도리어 그 원인은 그들이 고의로 거룩한 계명에서 다시 돌이켜 성령을 근심하시게 하고, 마음의 처소를 다시 마귀에게 꾸미는 데 있다. 그들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쁘다(벧후 2:20; 엡 4:30; 히 10:26; 눅 11:25). 예정의 신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이만큼 계시되었으며, 우리가 그에 머무르면 그것은 매우 유익하고 위로가 되는 교리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행위와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인하여 순전히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받는다는 조항을 굳게 세우기 때문이다(롬 9:11; 딤후 1:9). 더욱이 우리 본성적 의지의 능력에 관한 모든 그릇된 교리가 그로써 무너지니, 하나님께서 그 경륜 안에서 친히 그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회심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 안에 이루시리라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교리는 또한 영광스러운 위로를 주니, 곧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그토록 마음 쓰사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것을 숙고하시고, 어떻게 나를 구원으로 부르고 인도하며 그 안에 보전하실지 정하셨으며, 그것을 보전하기 위하여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손에 두셨으니 아무도 우리를 그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다(요 10:28).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8:28,39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부름받았으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고 말한다. 더욱이 이 교리는 십자가 아래와 시험 가운데서 영광스러운 위로를 주니, 곧 하나님께서 세상이 있기 전에, 모든 환난 가운데 우리를 도우시고 인내를 주시며 위로를 베푸시고, 우리 구원에 이바지할 결말을 이루시리라 작정하셨다는 것이다(롬 8:28,29,35,38,39). 이 조항은 또한 하나님의 교회가 음부의 모든 권세에 맞서 존속하고 머무를 것이라는 증거를 준다. 이 조항으로부터 또한 강한 권면들이 도출된다(눅 7:30; 14:24; 마 20:16; 눅 8:8,18). 그러나 이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명백히 계시된 것과 계시되지 않은 것 사이의 구별을 특별히 주의하여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신비에 관하여 많은 것을 여전히 감추시고 그 지혜에만 남겨 두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탐구할 것이 아니라 계시된 말씀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의 호기심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보다 이러한 감추인 것들에 관심을 두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이 있기 전에, 부름받은 자들 중 누가 믿고 누가 믿지 않을지, 누가 끝까지 견디고 누가 견디지 못할지를 가장 정확히 미리 보셨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신비를 그 지혜에 남겨 두시고 그에 관하여 우리에게 아무것도 계시하지 않으셨으며 도리어 우리를 그로부터 엄히 만류하셨으므로(롬 11:33 이하),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호기심으로 캐묻지 말고 그 계시된 말씀에 머물러야 한다. 이같이 하나님은 각 사람의 부르심과 회심의 때와 시각도 아시나, 그것이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늘 말씀을 권면하되 때와 시각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명령을 받았다(행 1:7).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한 곳에는 그 말씀을 주시고 다른 곳에는 주시지 않으며, 한 곳에서는 거두시고 다른 곳에서는 머물게 하시며, 한 사람은 완고하게 되나 같은 죄책을 가진 다른 사람은 다시 회심하는 것을 볼 때, 바울은 우리가 얼마나 멀리 나아가야 하는지 일정한 한계를 정한다(롬 11:22 이하). 곧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멸시한 까닭에 한 민족을 그 형벌이 후손에게까지 미치도록 벌하실 때, 그것은 죄의 마땅한 형벌이니 유대인에게서 보는 바와 같다. 그로써 하나님은 그 엄위를 나타내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러 악하게 행하고 자주 성령을 심히 근심하시게 하므로 우리 모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바를 우리가 배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고, 우리의 공로에 반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 본성이 죄로 부패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 아래 있으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도 성령도 은혜도 빚지지 않으셨으며, 그가 이 은사를 베푸실 때 우리는 자주 그것을 내치고 스스로 영생에 합당치 않게 만든다(행 13:46). 그리고 이 의로운 심판을 그가 어떤 사람들에게 나타내시니, 우리가 그들과 비교될 때 긍휼의 그릇들 안에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더욱 부지런히 찬송함을 배우게 하려 하심이다. 벌받아 그 죄의 삯을 받는 자들에게는 어떠한 불의도 행해지지 않으나,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주시고 보전하시는 나머지 자들에게는 그가 그 공로 없이 순전한 은혜와 긍휼을 나타내신다. 우리가 이 조항에서 이만큼 나아가면 우리는 바른 길에 머문다. 기록된 바 호세아 13:9: 이스라엘아 네가 스스로 멸망하였나니 너를 도울 자가 내게 있느니라. 그러나 이 한계를 넘어 너무 높이 솟구치려는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는 바울과 함께 입에 손가락을 대고 로마서 9:20을 말해야 한다. 곧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위대한 사도 바울도 계시된 말씀으로부터 이 조항에 관하여 많이 논한 후, 하나님께서 이 신비에 관하여 그 감추인 지혜에 남겨 두신 지점에 이르자, 로마서 11:33 이하의 말로 그것을 그친다. 곧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 영원한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그리스도 밖에서 혹은 그리스도 없이가 아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4 이하에서 증언하듯,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으니, 기록된 바 그가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셨다 함과 같다. 이 선택은 아버지께서 마태복음 17:5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실 때, 그의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하늘로부터 계시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신다. 또한 성령에 관하여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6:14에서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하신다. 그리하여 온 삼위일체,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모든 사람을 생명책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니, 그들은 그 안에서 아버지의 영원한 선택을 찾아야 한다. 이는 아버지께서 영원부터 작정하신 바이니, 곧 그가 구원하실 자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요한복음 14:6에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시고, 또 요한복음 10:9에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으리라 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영생으로의 우리의 영원한 선택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마가복음 1:15에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실 때이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6:40에서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이니라 하신다. 또한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하신다. 이 선포를 아버지께서 모든 사람이 듣기를 원하시며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오기를 바라시니,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내치지 않으신다. 기록된 바 요한복음 6:37: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오게 하시려고 성령께서 말씀을 들음으로 참된 믿음을 일으키신다(롬 10:17). 그러므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그도 택함받았는지에 관하여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에 대한 생각으로 자신을 괴롭게 해서는 안 되니, 비참한 사탄은 흔히 이로써 경건한 마음을 공격한다. 도리어 그들은 생명책이시며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책이신 그리스도를 들어야 한다. 그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죄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가 그에게 와서 쉼을 얻고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증언하신다(마 11:28). 이 교리를 따라 그들은 그 죄에서 떠나 회개하고 그의 약속을 믿으며 전적으로 그를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를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으므로, 성령께서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우리 안에 회개와 믿음을 일으키기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견디게 하시려고, 우리는 그가 거룩한 세례에서 약속하신 그 은혜를 구해야 하며, 그가 그 약속을 따라 그것을 베푸실 것이다(눅 11:11 이하). 그리고 성령께서 그 성전으로서 택한 자들 안에 거하사 한가로이 계시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순종으로 이끄시므로, 신자들도 한가로이 있지 말고 모든 그리스도교적 덕에 스스로를 훈련하며, 자기들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더 많이 경험할수록 그만큼 덜 의심하도록, 그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에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성령께서 택한 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하시기 때문이다(롬 8:16). 그리고 그들이 때로 그토록 심한 시험에 빠져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고 여겨 시편 31:22의 다윗처럼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을지라도, 그들은 곧 다윗처럼 다시 말해야 한다. 곧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도다. 그리고 영생으로의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경건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며 뜻과 본질에서 변함없으신 그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에만 기초하므로, 그 자녀들이 순종에서 떠나 넘어질 때, 그는 말씀을 통하여 그들을 다시 회개로 부르시며, 그 말씀에 떨며 마음으로 그에게 다시 돌아오는 모든 자에게 늘 옛 아버지의 마음을 나타내실 것이다. 기록된 바 예레미야 3:1과 같다. 더욱이 요한복음 6:44에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는 선언은 옳고 참되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이를 수단 없이 하지 않으시고 그 말씀과 성례를 통상의 수단으로 정하셨으며, 사람이 그 말씀의 선포를 멸시하고 말씀과 성례 없이 아버지의 이끄심을 기다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도 아들의 뜻도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성령의 능력으로 이끄시되, 그가 친히 정하신 통상의 질서를 따라, 그 거룩한 말씀을 들음으로, 마치 그물로 하듯 이끄시니, 그로써 택한 자들이 마귀의 입에서 건져진다. 그러므로 모든 가련한 죄인은 거룩한 선포에 나아가 그것을 주의 깊게 듣고 아버지의 이끄심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듣는 모든 자가 다 믿지는 않고 더러는 더 깊이 정죄받는 까닭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원을 아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배우려 함이 아니라 멸시하려는 식으로 말씀을 들었고, 말씀을 통하여 그들 안에 역사하기 원하시는 성령을 거역한 그들 자신의 잘못이니, 바리새인들에게서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사도는 홀로 존귀에 쓸 그릇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과, 마귀의 사주로 스스로를 비천에 쓸 그릇으로 만든 마귀와 사람의 일을 구별한다. 기록된 바 로마서 9:22 이하: 하나님이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으니 곧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라. 여기서 사도는 하나님이 진노의 그릇을 관용하셨다고 분명히 말하나, 그가 그들을 진노의 그릇으로 만드셨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그 뜻이었다면 그가 그 일에 큰 오래 참음을 요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멸망에 합당하게 된 잘못은 마귀와 사람 자신에게 속하며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 정죄를 위한 모든 준비는 마귀와 사람에 의하여 죄로 말미암으며, 어떤 점에서도 하나님께 말미암지 않으니, 그는 누구도 정죄받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 아니심같이 정죄의 원인도 아니시며, 정죄의 유일한 원인은 죄이다(롬 6:23). 그리고 하나님이 죄를 원하지 않으심같이 죄인의 죽음도 원하지 않으시며 그 정죄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겔 33:11; 18:23; 벧후 3:9). 그리고 바울은 비천에 쓸 그릇에서 존귀에 쓸 그릇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들어질 수 있음을 증언한다. 디모데후서 2:21: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쓸 그릇이 되리라. 자기를 깨끗하게 할 자는 먼저 더러웠어야 하니 곧 비천에 쓸 그릇이었다. 그러나 긍휼의 그릇에 관하여는 주께서 친히 그들을 영광을 위하여 예비하셨다고 말하니, 이는 스스로를 정죄의 그릇으로 준비한 정죄받은 자들에 관하여는 말하지 않는 바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죄를 죄로 벌하실 때, 곧 회심하였던 자들을 그 후의 무회개와 고의의 죄로 인하여 완고함으로 벌하실 때, 이것은 그러한 자들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러 구원받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아니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가 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기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은혜로 받아들이실 것이다. 둘째, 거룩한 계명에서 고의로 돌이켜 다시 세상의 더러움에 얽매이고 하나님의 영을 모욕하는 자들을 벌하시며, 그들이 그 가운데 머무르면 완고하게 되고 영원히 정죄될 것이다(벧후 2:20; 눅 11:25; 히 10:29). 따라서 바로도 멸망하였으니, 하나님이 그에게 구원을 아끼셨거나 그가 멸망하는 것이 그 기쁘신 뜻이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벧후 3:9; 겔 33:11). 그러나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은, 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한 그 선행한 죄와 끔찍한 폭정에 대한 형벌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말씀을 전파하게 하셨으나 바로가 그럼에도 모든 권면에 거슬러 고의로 일어섰으므로, 하나님이 그에게서 그 손을 거두셨고 그리하여 그 마음이 완악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다. 따라서 거룩한 사도는 무회개한 자와 그 말씀을 멸시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의를 입증하기 위하여만 바로의 예를 든 것이지, 결코 하나님이 그나 어떤 사람에게 구원을 아끼셨다거나, 그가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그 은밀한 경륜에서 그를 영원한 정죄로 정하셨다는 뜻으로 든 것이 아니다. 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 영원하고 구원에 이르는 선택에 관한 이 교리로써, 그가 그 뜻의 목적을 따라 우리의 어떤 공로나 선행 없이 순전한 긍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그 영광이 온전히 하나님께 돌려진다(엡 1:5 이하).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공로뿐 아니라 우리 안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영생으로 택하신 그 선택의 원인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되고 그릇되다. 우리가 어떤 선을 행하기 전뿐 아니라 우리가 나기 전,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 선택을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시려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으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함과 같다(롬 9:11 이하; 창 25:23; 말 1:2 이하). 더욱이 이 교리는, 사람들이 생명책이신 그리스도와 그 거룩한 복음 안에서 영원한 선택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쳐질 때, 누구에게도 낙심이나 방종한 삶의 빌미를 주지 않는다. 그 책은 회개하는 죄인을 아무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가난하고 무거운 짐 진 죄인을 회개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부르며,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약속하고, 이로써 모든 괴로워하는 자에게 가장 변함없는 위로를 준다. 곧 그들의 구원이 그들 자신의 손에 놓인 것이 아니라(그렇다면 낙원의 아담과 하와보다 더 쉽게 잃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에 놓여 있으며 그 손에서 아무도 우리를 빼앗을 수 없음을 안다는 것이다(요 10:28; 딤후 2:19). 따라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에 관한 교리를, 괴로워하는 그리스도인이 거기서 위로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절망에 내몰리거나 무회개한 자가 그 방종에 굳어지는 식으로 제시한다면, 그러한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서가 아니라 인간 이성의 눈먼 판단과 마귀의 사주를 따라 가르쳐진 것임이 확실하다. 사도가 증언하듯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와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라. 그러나 이 위로와 소망이 성경으로 약해지거나 제거된다면, 그것이 성령의 뜻에 반하여 설명된 것임이 확실하다. 견고하고 선한 기초를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둔 이 단순하고 바르며 유익한 설명에 우리는 머무르며, 모든 높고 예리한 물음과 논쟁을 피하고, 이 단순하고 유익한 설명에 반하는 것은 무엇이든 배척하고 정죄한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해 동안 논의된 논쟁의 조항들에 관하여는 이만큼이다. 이 우리의 설명으로부터 모두가, 우리가 일시적 평화와 일치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의 어떤 것도 양보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추론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순수한 교리의 부패와 명백히 정죄된 오류를 꾸미거나 감출 마음이 없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 없이 그에게 머물고, 거룩한 복음의 신적 진리의 어떤 것도 넘겨지지 않으며, 가련한 죄인들이 참된 회개로 인도되고 믿음으로 일으켜져 새로운 순종 가운데 굳게 되어, 이로써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의롭다 함을 받고 영원히 구원받는, 그 일치를 마음으로 사랑하며 진심으로 힘써 증진하고자 한다.
Solid Declaration, Article XII: Of Other Factions and Sects Of Other Factions and Sects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우리 설명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분파와 당파들, 곧 재세례파, 슈벵크펠트파, 신(新)아리우스파, 반(反)삼위일체파에 관하여는 그 오류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모든 교회에 의하여 일치하여 정죄되었으나, 우리는 이 설명에서 그들을 특별히 따로 언급하지 않으려 하였으니, 이는 현재로서는 무엇보다 우리 대적인 교황주의자들의 비난을 반박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우리 대적들이 뻔뻔한 입으로 주장하며 온 세상에 우리 교회와 그 교사들을 헐뜯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각 조항마다 일치하는 설교자가 둘도 없으며, 그들이 서로 갈라져 분열한 나머지 그들 자신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그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더 이상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였으므로, 우리는 짧은 말이나 이름으로만 공동의 고백을 하지 않고, 오직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만 논의되고 다투어진 모든 쟁점 조항에 관하여 순수하고 명료하며 분명한 선언을 하고자 하였다. 이는 모두가, 우리가 교활한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을 감추거나 덮으려 하거나 겉으로만 합의에 이르려 하지 않고, 도리어 이 일을 철저히 바로잡으려 함을 보게 하려는 것이며, 우리는 우리 의견을, 대적들 자신조차 이 모든 것에서 우리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참되고 단순하며 본연의 합당한 의미에 머물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하였으니,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끝까지 변함없이 머무르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의 직무에 달린 한, 전능하신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교사와 목자로 세우신 우리 교회와 학교에 그에 반하는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도록, 우리는 묵인하거나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당파와 분파들의 정죄된 오류가 우리에게 은연중 돌려지지 않도록 — 그러한 영들은 그 본성상 대부분, 특히 거룩한 복음의 순수한 말씀에 자리가 주어지지 않고 그 진실한 모든 교사와 고백자가 박해받으며 교황제도의 깊은 어둠이 여전히 지배하던 때에, 또 교황제도의 명백한 우상숭배와 거짓 신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던 가난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그 단순함 가운데 복음이라 불리고 교황적이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던 곳에 은밀히 스며들었으므로 — 우리는 또한 온 그리스도교 앞에서 그들에 대하여 공공연히 증언하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곧 그 오류가 많든 적든 우리는 그들의 오류와 아무 상관도 교제도 없으며, 그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릇되고 이단적이며, 선지자와 사도들의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선 우리 그리스도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반하는 것으로 배척하고 정죄한다. 곧 예를 들어,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생활에서도 용인되거나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재세례파의 그릇되고 이단적인 교리들이니, 그들이 가르치는 바이다. 1.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과 공로에만 있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행하는 우리의 갱신과 우리 자신의 경건에도 있다고 하는 것. 그들은 이를 대개 자기들의 독특한 규례와 스스로 택한 영성에, 일종의 새로운 수도(修道)에 기초한다. 2. 세례받지 않은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니라 의롭고 무죄하며, 따라서 세례 없이 그 무죄함 가운데 구원받으니 세례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 따라서 그들은 원죄에 관한 교리 전체를 부인한다. 3. 아이들이 이성을 쓸 수 있고 스스로 자기 믿음을 고백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 4. 그리스도인의 자녀가 믿는 부모에게서 났으므로 세례 없이도, 세례 전에도 거룩하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 이런 까닭에 그들은 아이의 세례를 그다지 중히 여기지도 권하지도 않으니,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며 멸시하지 않는 자들에게만 미치는 약속의 명백한 말씀에 어긋난다(창 17:9). 5. 여전히 죄인이 발견되는 회중은 참된 그리스도교적 모임이 아니라고 하는 것. 6. 이전에 교황의 미사가 행해졌던 교회에서는 어떤 설교도 듣거나 참석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 7. 신앙고백을 따라 거룩한 복음을 전하고 재세례파의 오류를 책망하는 교회의 사역자들과는 아무 상관도 하지 말아야 하며, 누구도 그들을 섬기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르치는 자로서 그들을 피하고 멀리해야 한다고 하는 것. 8. 신약 아래에서 위정자의 직(職)은 경건한 신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 9. 그리스도인이 선하고 온전한 양심으로 위정자의 직을 맡을 수 없다고 하는 것. 10. 그리스도인이 사정이 요구할 때 악인에 맞서 위정자의 직을 양심을 해치지 않고는 쓸 수 없으며, 그 백성도 그 권세에 호소할 수 없다고 하는 것. 11. 그리스도인이 선한 양심으로 법정에서 맹세하거나 맹세로 그 군주나 세습 주권자에게 충성을 표할 수 없다고 하는 것. 12. 위정자가 양심을 해치지 않고는 악행자에게 사형을 집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 13. 그리스도인이 선한 양심으로 어떤 재산도 가지거나 소유할 수 없고, 그것을 공동의 곳간에 바칠 의무가 있다고 하는 것. 14. 그리스도인이 선한 양심으로 여관 주인이나 상인이나 칼 만드는 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 15. 부부가 신앙(종교)의 차이를 이유로 이혼할 수 있으며, 한 편이 다른 편을 버리고 자기 신앙을 가진 다른 사람과 혼인할 수 있다고 하는 것. 16. 그리스도께서 그 살과 피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취하지 않으시고 하늘에서 가지고 오셨다고 하는 것. 17. 그가 참되고 본질적인 하나님도 아니며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고 높은 은사와 영광을 가지셨을 뿐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은 더 많은 조항이 있으니, 그들은 자기들끼리 여러 무리로 갈라져 어떤 이는 더 많은, 어떤 이는 더 적은 오류를 가지며, 그리하여 그들의 분파 전체는 실상 새로운 종류의 수도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슈벵크펠트파가 주장할 때이니. 1. 첫째, 그리스도를 육신을 따라, 혹은 그가 취하신 인성을 피조물로 여기는 모든 자는 하늘의 다스리시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육신이 승귀(昇貴)로 말미암아 모든 신적 속성을 취한 나머지 능력과 위엄과 영광에서 모든 점에서 아버지 및 영원하신 말씀과 동등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의 본질과 속성과 뜻과 영광이 동일하며, 그리스도의 육신이 삼위일체의 본질에 속한다고 하는 것. 2. 교회의 사역, 곧 전파되고 들리는 말씀이, 하나님 곧 성령께서 사람을 가르치시고 그들 안에 그리스도를 아는 구원의 지식과 회심과 회개와 믿음과 새로운 순종을 일으키시는 수단이 아니라고 하는 것. 3. 세례의 물이 하나님께서 양자됨을 인치시고 중생을 이루시는 수단이 아니라고 하는 것. 4.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께서 그 몸과 피를 분배하시는 수단이 아니라고 하는 것. 5. 하나님의 영으로 참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이생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 6. 공적인 출교나 정규의 권징 절차가 지켜지지 않는 회중은 참된 그리스도교적 회중이 아니라고 하는 것. 7. 자기 편에서 참으로 갱신되고 의롭고 경건하지 않은 교회의 사역자는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가르치거나 실제로 참된 성례를 집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 또한 신아리우스파가,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한 영원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참되고 본질적이며 본성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다만 성부 하나님보다 못하며 그 곁에 있는 신적 위엄으로 꾸며졌을 뿐이라고 가르칠 때이다. 또한 어떤 반삼위일체파가 고대의 공인된 상징, 곧 니케아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그 의미와 말 모두에서 배척하고 정죄하며, 성부·성자·성령의 영원한 신적 본질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 구별된 위격이 있는 것처럼 각 위격도 다른 위격과 구별되고 분리된 그 자신의 본질을 가지되, 셋 모두가 마치 세 사람처럼 본질에서 구별되고 분리되어 동일한 능력·지혜·위엄·영광을 가지거나, 혹은 본질과 속성에서 동등하지 않다고 가르칠 때이다. 그리고 성부만이 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들과 이와 같은 조항들을, 그에 속하고 그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과 함께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는 그릇되고 거짓되며 이단적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세 신경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및 변증서와 슈말칼덴 조항과 루터의 교리문답에 반하는 것으로 배척하고 정죄한다. 모든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그 영혼의 복지와 구원을 귀히 여기는 만큼 이 조항들을 경계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온 그리스도교 앞에서, 지금 사는 자들과 우리 뒤에 올 자들에게, 앞서 언급되고 설명된 모든 쟁점 조항에 관하여 여기 제시된 이 선언이, 그리고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교리요 고백임을 증언하고자 하니,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담대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 그것에 대하여 답할 것이며, 사사로이든 공공연히든 그에 반하는 어떤 것도 말하거나 쓰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으로 그에 머물기를 작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숙고한 후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이름을 부르는 가운데 우리 손으로 우리의 서명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