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Preface to the Emperor Charles V
가장 무적이신 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가장 자비로우신 주여. 폐하께서 여기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하시어, 그리스도교의 이름과 신앙의 가장 잔혹하고 오래된 세습적 원수인 투르크에 맞설 방책—곧 강력하고 지속적인 군사적 대비로 그의 광포와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길—을 논의하시고, 또한 우리의 거룩한 신앙과 그리스도교 믿음의 문제에 관한 분열을 논의하시되, 이 신앙의 문제에서 각 편의 견해와 판단이 서로 면전에서 들리고 우리 가운데 서로의 사랑과 관용과 친절로 숙고되고 저울질되게 하시며, 양편의 글에서 서로 다르게 다루어지고 이해된 것들을 제거하고 바로잡은 뒤에 이 문제들이 해결되어 한 단순한 진리와 그리스도교적 화합으로 되돌려지고, 장차 한 순수하고 참된 신앙이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고 유지되어, 우리가 모두 한 그리스도 아래 그분을 위하여 싸우는 것같이 한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일치와 화합으로 살 수 있게 하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래에 서명한 선제후와 제후들인 우리는, 우리와 함께한 다른 이들과 더불어, 다른 선제후들과 제후들과 신분들과 마찬가지로 위의 의회에 부름받아, 제국의 명령에 순종하여 신속히 아우크스부르크에 왔으며—자랑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여기 가장 먼저 온 자들에 속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의회의 바로 첫머리에 폐하께서 선제후들과 제후들과 그 밖의 제국 신분들에게 여러 가지 가운데, 제국의 칙령에 근거하여 제국의 여러 신분이 독일어와 라틴어로 자기 견해와 판단을 제시하고 제출하도록 제안하게 하셨고, 그 다음 수요일에 충분한 숙고 끝에 폐하께 우리 편의 신앙고백 조항들을 다음 수요일에 제출하겠다고 답하였으므로, 폐하의 뜻에 순종하여 우리는 이 신앙의 문제에서 우리 설교자들과 우리 자신의 신앙고백을 드리니, 성경과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나온 어떠한 교리가 이제까지 우리 영지와 공국과 영토와 도시에서 제시되고 우리 교회에서 가르쳐져 왔는지를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선제후들과 제후들과 제국 신분들이 위의 제국 제안을 따라 비슷한 글, 곧 라틴어와 독일어로 이 신앙의 문제에 관한 자기 견해를 제시한다면, 우리는 위에 말한 제후들과 벗들과 더불어 여기 우리의 가장 자비로우신 주이신 폐하 앞에서, 가능한 모든 방도에 관하여 우호적으로 협의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명예롭게 할 수 있는 한 우리가 함께 모여, 양편 사이의 문제가 공격적 다툼 없이 평화로이 논의되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분열이 없어지고 한 참되고 일치된 신앙으로 되돌려지게 하려 함입니다. 우리가 모두 한 그리스도 아래 그분을 위하여 싸우므로, 폐하의 칙령의 취지를 따라 한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처리되어야 하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구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다른 편을 이루는 나머지 선제후들과 제후들과 신분들에 관하여는, 만일 폐하께서 지혜롭게 이 신앙의 사안이 다루어져야 한다고 여기신 방식—곧 이러한 상호 글 제출과 우리 가운데 차분한 협의—으로도 아무 진전이나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적어도 폐하께 분명한 증거를 남기노니, 곧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과 선한 양심으로 이룰 수 있는 그리스도교적 화합을 가져올 어떤 것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폐하와, 또 다른 선제후들과 제국 신분들과, 신앙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열심에 감동되어 이 문제를 공정히 들어 주실 모든 이가, 우리와 우리 동료들의 이 신앙고백에서 은혜로이 살피시고 깨달으실 바입니다. 폐하께서도 한 번만이 아니라 자주, 선제후들과 제후들과 제국 신분들에게 은혜로이 알리셨고, 주후 1526년 슈파이어 의회에서 폐하의 지시와 위임의 형식을 따라 주어지고 규정된 대로, 폐하께서 이 신앙의 문제를 다루심에 있어 폐하의 이름으로 제시된 어떤 이유들로 인하여 아무것도 결정하기를 원치 않으시고 결정하실 수도 없으나, 폐하께서 총공의회 소집을 위하여 로마 교황과 더불어 부지런히 직무를 사용하시겠다고 진술되고 공포되게 하셨습니다. 같은 사안이 한 해 전 슈파이어에서 열린 지난 의회에서 더 자세히 공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거기서 폐하께서는 우리의 벗이요 자비로우신 주이신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 페르디난트 전하를 통하여, 또 변사와 제국 위원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가운데 이것을 제출하게 하셨으니, 곧 폐하께서 제국 안의 폐하의 대리자와 의장과 제국 고문관들과 라티스본에 모인 다른 신분들의 사절들이 공의회 소집에 관하여 내린 결의를 살피고 숙고하셨으며, 폐하께서도 공의회 소집이 합당하다고 판단하셨고, 폐하와 로마 교황 사이에 조정될 문제들이 합의와 그리스도교적 화해에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로마 교황이 총공의회를 열도록 설득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 친히, 곧 발송될 서한으로 가능한 한 속히 공포될 그러한 총공의회를 폐하와 함께 소집하도록 그 으뜸 교황의 동의를 얻기에 힘쓰시겠다고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 결과가, 우리와 다른 편 사이의 신앙 문제의 차이가 우호적으로 또 사랑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라면, 여기 폐하 앞에서 우리는 이미 행한 것에 더하여 온전한 순종으로 제안하노니, 곧 우리 모두가 그러한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그리스도교 공의회에 나아가 우리의 주장을 변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의회의 소집을 위하여는 폐하의 통치 기간에 열린 모든 제국 의회에서 선제후들과 제후들과 그 밖의 제국 신분들 편에서 늘 일치된 행동과 투표의 합의가 있었습니다. 이 총공의회의 회집에, 또 동시에 폐하께, 우리는 이미 이전에 합당한 방식과 법적 형식으로 이 문제—단연 가장 크고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우리를 의탁하고 상소하였습니다. 폐하께 또 공의회에 드린 이 상소를 우리는 여전히 견지하며, 이 문서로든 다른 어떤 문서로든 그것을 포기할 뜻이 없고 또 그럴 수도 없으니, 다만 우리와 다른 편 사이의 문제가 최근 제국 소환장의 취지를 따라 우호적으로 또 사랑으로 해결되고 가라앉아 그리스도교적 화합으로 인도되는 경우는 예외입니다. 이에 관하여 우리는 여기서도 엄숙히 또 공적으로 증언합니다.
I Article I: Of God
우리 교회들은 공동의 동의로 가르치노니, 신적 본질의 단일성과 세 위격에 관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이 참되며 아무 의심 없이 믿어야 할 것이다. 곧 하나님이라 불리고 또 하나님이신 한 신적 본질이 계시니, 영원하시고 몸이 없으시며 부분이 없으시고 무한한 권능과 지혜와 선하심을 지니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자요 보존자이시다. 그럼에도 같은 본질과 권능을 지니시며 또한 영원히 함께 계신 세 위격,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신다. 그리고 그들은 '위격'이라는 용어를 교부들이 사용한 대로 사용하니, 다른 것 안의 부분이나 성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이 조항을 거슬러 일어난 모든 이단, 곧 선과 악이라는 두 원리를 가정한 마니교도와, 또한 발렌티누스파, 아리우스파, 에우노미우스파, 마호메트교도와 그 같은 모든 자를 정죄한다. 그들은 또한 옛 사모사타파와 새 사모사타파를 정죄하니, 이들은 위격이 하나뿐이라고 주장하여, 말씀과 성령이 구별된 위격이 아니라 '말씀'은 발설된 말을 뜻하고 '영'은 사물 안에 지어진 운동을 뜻한다고 궤변과 불경으로 논한다.
II Article II: Of Original Sin
또 그들은 가르치노니, 아담의 타락 이래로 본성적 방식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이 죄와 함께, 곧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하나님을 신뢰함이 없으며 정욕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리고 이 질병 곧 본성의 악덕이 참으로 죄이니, 세례와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게 지금도 정죄를 내리고 영원한 죽음을 가져온다. 그들은 원초적 부패가 죄임을 부인하는 펠라기우스파와, 또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덕의 영광을 흐리려고 사람이 자기 힘과 이성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고 논하는 그 밖의 자들을 정죄한다.
III Article III: Of the Son of God
또 그들은 가르치노니,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이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인성을 취하셨으니,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한 그리스도,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 안에 뗄 수 없이 연합되어 있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참으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시고 장사되셨으니, 성부를 우리와 화목하게 하시고, 원죄의 죄책뿐 아니라 사람의 모든 자범죄를 위한 제물이 되려 하심이었다. 그분은 또한 음부에 내려가셨고 참으로 사흘째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 후 하늘에 오르사 성부의 우편에 앉으시고 영원히 다스리며 모든 피조물을 주관하시고, 자기를 믿는 자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사 그들을 다스리고 위로하고 살리시며 마귀와 죄의 권세에 맞서 그들을 지키심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 동일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신경을 따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공공연히 오실 것이다.
IV Article IV: Of Justification
또 그들은 가르치노니, 사람은 자기 힘이나 공로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고, 도리어 그리스도로 인하여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으니, 곧 그들이 은총으로 받아들여지고 자기 죄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용서받음을 믿을 때에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위한 보속을 이루셨다.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자기 보시기에 의로 여기신다(롬 3·4장).
V Article V: Of the Ministry
우리가 이 믿음을 얻도록, 복음을 가르치고 성례를 집행하는 교역이 제정되었다.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마치 도구를 통하여 성령이 주어지니, 성령께서 복음을 듣는 자들 안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과 때에 믿음을 일으키신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공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기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혜로 받아들여짐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신다. 그들은 외적 말씀 없이 자기 자신의 준비와 행위로 성령이 사람에게 임한다고 생각하는 재세례파와 그 밖의 자들을 정죄한다.
VI Article VI: Of New Obedience
또 그들은 가르치노니, 이 믿음은 반드시 선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의 뜻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선행을 행하는 것이 필요하나, 우리가 그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칭의를 공로로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죄 사함과 칭의는 믿음으로 받아지기 때문이니, 그리스도의 음성도 이를 증언하여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할지니라'(눅 17:10) 하셨다. 같은 것을 교부들도 가르치니, 암브로시우스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구원받되,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로 정해진 바이다' 하였다.
VII Article VII: Of the Church
또 그들은 가르치노니, 하나의 거룩한 교회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회중이니, 그 안에서 복음이 올바로 가르쳐지고 성례가 올바로 집행된다. 그리고 교회의 참된 일치를 위하여는 복음의 교리와 성례의 집행에 관하여 일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이 제정한 인간적 전통 곧 예식이나 의식이 어디서나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바울이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엡 4:5,6) 한 것과 같다.
VIII Article VIII: What the Church Is
교회는 본래 성도들과 참 신자들의 회중이지만, 그럼에도 이생에서 많은 위선자와 악인이 거기 섞여 있으므로, 악한 사람이 집행하는 성례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니, 그리스도의 말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마 23:2)를 따른 것이다. 성례와 말씀은 둘 다 그리스도의 제정과 명령으로 인하여 효력이 있으니, 비록 악한 사람이 집행할지라도 그러하다. 그들은 교회에서 악한 사람의 직무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부인하고 악한 사람의 직무가 무익하고 효력이 없다고 생각한 도나투스파와 그 같은 자들을 정죄한다.
IX Article IX: Of Baptism
세례에 관하여 그들은 가르치노니, 세례는 구원에 필요하며,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진다. 또 어린아이들이 세례받아야 하니, 그들이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져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여진다. 그들은 어린아이의 세례를 거부하고 어린아이가 세례 없이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X Article X: Of the Lord's Supper
주의 만찬에 관하여 그들은 가르치노니,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참으로 임재하며 주의 만찬에서 먹는 자들에게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달리 가르치는 자들을 배격한다.
XI Article XI: Of Confession
고해에 관하여 그들은 가르치노니, 사적 사죄가 교회들에 보존되어야 하나, 고해에서 모든 죄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필요치 않다. 시편의 말씀대로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시 19:12).
XII Article XII: Of Repentance
회개에 관하여 그들은 가르치노니, 세례 후에 넘어진 자들에게도 그들이 돌이킬 때마다 죄 사함이 있으며, 교회는 이렇게 회개로 돌아오는 자들에게 사죄를 베풀어야 한다. 이제 회개는 본래 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통회이니, 곧 죄를 앎으로 양심을 치는 두려움이요, 다른 하나는 믿음이니, 그것은 복음 곧 사죄에서 나와,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가 용서됨을 믿고 양심을 위로하며 그것을 두려움에서 건진다. 그 다음에 반드시 선행이 따르니, 그것은 회개의 열매이다. 그들은 한 번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성령을 잃을 수 있음을 부인하는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또 어떤 이들이 이생에서 죄지을 수 없을 만큼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정죄한다. 노바티아누스파도 정죄되니, 그들은 세례 후에 넘어진 자가 회개로 돌아올지라도 사죄하지 않으려 하였다. 또 죄 사함이 믿음으로 온다고 가르치지 않고 우리 자신의 보속으로 은혜를 공로로 얻으라 명하는 자들도 배격된다.
XIII Article XIII: Of the Use of the Sacraments
성례의 사용에 관하여 그들은 가르치노니, 성례는 사람들 사이의 고백의 표가 되도록만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의 표와 증거가 되도록 정해졌으니, 그것을 사용하는 자들 안에 믿음을 일깨우고 굳게 하려고 제정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를 사용하되, 성례를 통하여 베풀어지고 제시되는 약속을 믿는 믿음이 더해지도록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례가 외적 행위로 의롭다 한다고 가르치고, 성례를 사용함에 있어 죄가 용서됨을 믿는 믿음이 요구된다고 가르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한다.
XIV Article XIV: Of Ecclesiastical Order
교회의 직제에 관하여 그들은 가르치노니, 정규로 부름받지 않은 자는 누구도 교회에서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성례를 집행해서는 안 된다.
XV Article XV: Of Ecclesiastical Usages
교회의 관습에 관하여 그들은 가르치노니, 죄 없이 지킬 수 있고 교회의 평안과 좋은 질서에 유익한 것들, 곧 특정 축일과 절기 등은 지켜야 한다. 그럼에도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 사람들은, 그 준수가 마치 구원에 필요한 것처럼 양심에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권면받는다. 또 그들은, 하나님을 달래고 은혜를 공로로 얻고 죄를 위한 보속을 이루려고 제정된 인간적 전통이 복음과 믿음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권면받는다. 그러므로 은혜를 공로로 얻고 죄를 위한 보속을 이루려고 제정된, 음식과 날 등에 관한 서원과 전통은 무익하고 복음에 어긋난다.
XVI Article XVI: Of Civil Affairs
국가적(시민적) 일에 관하여 그들은 가르치노니, 합법적 시민 규례는 하나님의 선한 일이며, 그리스도인이 시민의 직을 맡고, 재판관으로 앉으며, 제국법과 그 밖의 현행법으로 사안을 판단하고, 정당한 형벌을 내리고, 정당한 전쟁에 참여하고, 군인으로 복무하고, 합법적 계약을 맺고, 재산을 보유하고, 위정자가 요구할 때 맹세하고, 아내를 맞고, 시집가는 것이 옳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시민의 직을 금하는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또 복음적 완전을 하나님을 경외함과 믿음에 두지 않고 시민의 직을 버리는 데 두는 자들을 정죄하니, 복음은 마음의 영원한 의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동안 복음은 국가나 가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도리어 그것들이 하나님의 규례로 보존되며 그러한 규례 안에서 사랑이 실천되기를 매우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자기 위정자와 법에 순종해야 하니, 다만 죄를 범하라 명령받을 때는 예외이다. 그때에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행 5:29).
XVII Article XVII: Of Christ's Return to Judgment
또 그들은 가르치노니, 세상의 마침에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나타나사 모든 죽은 자를 일으키시리니, 경건한 자와 택자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기쁨을 주시고, 경건치 않은 자와 마귀들은 끝없이 고통받도록 정죄하실 것이다. 그들은 정죄받은 사람과 마귀들의 형벌에 끝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또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 전에 경건한 자들이 세상 나라를 차지하고 경건치 않은 자들은 어디서나 억눌리리라는 어떤 유대적 견해를 지금 퍼뜨리는 다른 자들을 정죄한다.
XVIII Article XVIII: Of Free Will
자유의지에 관하여 그들은 가르치노니, 사람의 의지는 시민적 의를 택하고 이성에 속한 일들을 행할 어느 정도의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성령 없이는 하나님의 의 곧 영적 의를 이룰 힘이 없으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을 받지 아니하기 때문이다(고전 2:14). 도리어 이 의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받을 때에 마음에 이루어진다. 이것들을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히포그노스티콘』 제3권에서 그대로 말하니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자유의지를 가졌음을 인정하되, 그것이 이성의 판단을 가졌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그로써 하나님 없이 하나님께 속한 일들을 시작하거나 적어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생의 일들에서 선하든 악하든 그러하다. 내가 〈선한〉 것이라 부르는 행위는 본성 안의 선에서 나오는 것이니, 곧 밭에서 일하려는 것, 먹고 마시는 것, 벗을 두는 것, 옷 입는 것, 집을 짓는 것, 아내를 맞는 것, 가축을 기르는 것, 여러 유익한 기예를 배우는 것, 또는 이생에 속한 무슨 선이든 그러하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하지 않음이 없으니, 참으로 그분에게서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이 있고 그 시작을 가진다. 내가 〈악한〉 것이라 부르는 행위는 우상을 섬기려는 것, 살인하려는 것 등이다' 하였다. 그들은 성령 없이 본성의 힘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유 위에 사랑할 수 있고 또 〈행위의 본체〉에 관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펠라기우스파와 그 밖의 자들을 정죄한다. 비록 본성이 어떤 식으로 외적 행위를 행할 수 있을지라도(손을 도둑질과 살인에서 지킬 수 있으므로), 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을 신뢰함과 정결과 인내 같은 내적 움직임은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XIX Article XIX: Of the Cause of Sin
죄의 원인에 관하여 그들은 가르치노니, 하나님께서 본성을 창조하고 보존하시지만, 죄의 원인은 악한 자 곧 마귀와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의지이다. 그 의지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돌아서니, 그리스도께서 '마귀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요 8:44) 하신 것과 같다.
XX Article XX: Of Good Works
우리 교사들이 선행을 금한다고 거짓되이 고발당한다. 십계명에 관한 그들의 출판된 글과 그 같은 취지의 다른 글들이, 그들이 삶의 모든 신분과 의무에 관하여, 곧 어떤 삶의 신분과 각 부르심의 어떤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에 관하여 좋은 목적으로 가르쳤음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에 관하여 설교자들은 이제까지 거의 가르치지 않았고, 다만 유치하고 불필요한 행위, 곧 특정 축일, 특정 금식, 형제회, 순례, 성인을 기리는 예배, 묵주 사용, 수도생활 등만 권하였다. 우리 대적들이 이런 것들에 관하여 권고받은 뒤로 이제 그것들을 버리고 있으며, 전처럼 이 무익한 행위들을 전파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이 믿음을 언급하기 시작하니, 이에 관하여는 이제까지 놀라운 침묵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행위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되, 믿음과 행위를 결합하여 우리가 믿음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 교리가 이전 것보다 더 견딜 만하고 그들의 옛 교리보다 더 큰 위로를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으뜸이어야 할 믿음에 관한 교리가 그토록 오래 알려지지 않은 채 있었고—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듯 그들의 설교에서 믿음의 의에 관하여 가장 깊은 침묵이 있었고 교회에서는 오직 행위의 교리만 다루어졌으므로—우리 교사들은 믿음에 관하여 교회들을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첫째,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거나 죄 사함과 은혜와 칭의를 공로로 얻을 수 없고,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총으로 받아들여짐을 믿을 때 오직 믿음으로 이것을 얻는다. 그리스도만이 중보자요 화목제로 세워지셨으니(딤전 2:5), 그분으로 말미암아 성부께서 화목하게 되시려 함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행위로 은혜를 공로로 얻는다고 신뢰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멸시하고, 그리스도 없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자기에 관하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하셨음에도 그러하다. 믿음에 관한 이 교리를 바울이 곳곳에서 다루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엡 2:8) 한다. 또 누가 우리가 바울에 대한 새 해석을 고안하였다고 교활하게 말하지 못하도록, 이 온 문제가 교부들의 증언으로 뒷받침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많은 책에서 행위의 공로에 맞서 은혜와 믿음의 의를 옹호하고, 암브로시우스도 『이방인의 부르심에 관하여』와 다른 곳에서 같은 취지로 가르친다. 그가 『이방인의 부르심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말하니 '은혜로 이루어지는 칭의가 앞선 공로에 마땅한 것이어서 베푸시는 이의 값없는 선물이 아니라 일꾼에게 마땅한 삯이 된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속은 무가치하게 될 것이요, 사람의 행위의 우월함이 하나님의 자비로 밀려나지도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비록 이 교리가 미숙한 자들에게 멸시받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번민하는 양심은 그것이 가장 큰 위로를 가져옴을 경험으로 안다. 양심은 어떤 행위로도 평안해질 수 없고, 다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화목하신 하나님을 가졌다는 확실한 근거를 붙들 때 믿음으로만 평안해지기 때문이다. 바울이 가르치되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였다. 이 온 교리는 두려워하는 양심의 그 싸움에 비추어 이해해야 하니, 그 싸움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의가 다름 아닌 시민적·철학적 의라고 꿈꾸는 미숙하고 속된 자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그릇 판단한다. 이제까지 양심은 행위의 교리로 시달렸고 복음의 위로를 듣지 못하였다. 어떤 자들은 양심에 쫓겨 광야로, 수도원으로 들어가 거기서 수도생활로 은혜를 공로로 얻기를 바랐다. 어떤 자들은 은혜를 공로로 얻고 죄를 위한 보속을 이루려고 다른 행위들을 고안하였다. 그러므로 번민하는 양심이 위로 없이 있지 않고, 도리어 은혜와 죄 사함과 칭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아짐을 알도록,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의 교리를 다루고 새롭게 할 큰 필요가 있었다. 또 사람들은, 여기서 '믿음'이라는 용어가 경건치 않은 자와 마귀에게도 있는 역사(歷史)에 대한 지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뿐 아니라 그 역사의 효과—곧 이 조항, 죄 사함, 곧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의와 죄 사함을 가진다는 것—를 믿는 믿음을 뜻함을 권고받는다. 이제 자기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가졌음을 아는 자는 참으로 하나님을 알며,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보심을 알고 하나님을 부른다. 한마디로 그는 이방인처럼 하나님 없는 자가 아니다. 마귀와 경건치 않은 자는 이 조항 곧 죄 사함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그분을 부르지 않으며 그분에게서 아무 선도 기대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믿음'이라는 말에 관하여 독자들에게 권고하여, '믿음'이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경건치 않은 자에게 있는 지식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확신을 가리켜 받아들여진다고 가르친다. 더욱이 우리 편에서 가르치노니, 선행을 행하는 것이 필요하되, 그것으로 은혜를 공로로 얻기를 신뢰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죄 사함은 오직 믿음으로, 그것도 값없이 받아진다. 그리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으므로 마음이 새로워지고 새 정서를 갖추어 선행을 맺을 수 있게 된다. 암브로시우스가 '믿음은 선한 의지와 옳은 행함의 어머니이다' 하였기 때문이다. 성령 없는 사람의 능력은 경건치 않은 정서로 가득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행위를 하기에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들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어, 마귀가 사람을 여러 죄와 경건치 않은 견해와 드러난 범죄로 몰아간다. 우리는 이것을 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으니, 그들이 정직한 삶을 살려고 애썼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많은 드러난 범죄로 더럽혀졌다. 사람이 믿음 없고 성령 없이 오직 인간의 힘으로 자기를 다스릴 때 그 연약함이 이러하다. 그러므로 이 교리가 선행을 금한다고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어떻게 선행을 행할 수 있게 되는지를 보이므로 더욱 칭찬받아야 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믿음 없이는 인간 본성이 첫째나 둘째 계명의 행위를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도움을 구하고 그것을 신뢰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을 때 온갖 정욕과 인간적 고안이 마음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하셨고, 교회가 노래하기를 '주의 신적 은총이 없으면 사람 안에 아무것도 없고, 그 안에 해롭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네' 한다.
XXI Article XXI: Of the Worship of the Saints
성인 숭배에 관하여 그들은 가르치노니, 성인의 기억이 우리 앞에 놓여, 우리가 우리의 부르심을 따라 그들의 믿음과 선행을 본받게 할 수 있다. 마치 황제가 자기 나라에서 투르크를 몰아내려 전쟁할 때 다윗의 본을 따를 수 있는 것과 같으니, 둘 다 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인을 부르거나 성인에게 도움을 구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니, 한 분 그리스도를 중보자요 화목제요 대제사장이요 중재자로 우리 앞에 두기 때문이다. 그분께 기도해야 하며, 그분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예배를 그분이 무엇보다 인정하시니, 곧 모든 환난 중에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요일 2:1). 이것이 우리 교리의 대략의 요지이니, 보다시피 그 안에 성경에서나 보편적 교회에서나, 또는 그 저술가들로 알려진 로마 교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우리 교사들을 이단자로 여겨야 한다고 고집하는 자들은 가혹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권위 없이 교회에 스며든 어떤 폐습에 관하여는 이견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에서조차 어떤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방금 살펴본 신앙고백을 보아 감독들 편에서 우리를 너그러이 참아 주는 합당한 관용이 있어야 한다. 교회법조차 어디서나 같은 예식을 요구할 만큼 엄하지 않으며, 어느 때에도 모든 교회의 예식이 같았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가운데 대부분 옛 예식이 부지런히 지켜지고 있을지라도 그러하다. 모든 의식과 옛적에 제정된 모든 것이 우리 교회들에서 폐지되었다는 것은 거짓되고 악의적인 고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폐습이 통상적 예식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 흔한 불평이었다. 이것들은 선한 양심으로 인정될 수 없었으므로 어느 정도 바로잡혔다. 「개정된 폐습을 검토하는 조항들」 그러므로 우리 교회들이 보편적 교회와 신앙의 어떤 조항에서도 다르지 않고, 다만 새롭고 시대의 부패로 교회법의 본의에 어긋나게 그릇 받아들여진 어떤 폐습만 생략하므로, 우리는 폐하께서 무엇이 바뀌었는지, 또 백성이 자기 양심을 거슬러 그 폐습을 지키도록 강요받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은혜로이 들어 주시기를 간구한다. 또 폐하께서, 우리 편에 대한 사람들의 미움을 일으키려고 백성 가운데 이상한 비방을 퍼뜨리는 자들을 믿지 마시기를 바란다. 그들은 이렇게 선한 사람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먼저 이 논쟁의 빌미를 주었고, 이제 같은 술수로 불화를 키우려 한다. 폐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있는 교리와 의식의 형태가 이 경건치 않고 악의적인 자들이 묘사하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실 것이다. 게다가 진리는 떠도는 소문이나 원수들의 욕설로 모아질 수 없다. 도리어 의식이 교회에서 올바로 지켜지는 것보다 의식의 존엄을 유지하고 백성 가운데 경외와 경건한 헌신을 기르는 데 더 좋은 것이 없음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XXII Article XXII: Of Both Kinds in the Sacrament
주의 만찬 성례에서 평신도에게 양형(兩形)이 주어지니, 이 관행이 주의 명령을 마태복음 26장 27절에 두기 때문이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하시매, 그리스도께서 잔에 관하여 모두가 마셔야 한다고 분명히 명하셨다. 또 누가 이것이 사제에게만 해당한다고 교활하게 말하지 못하도록,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 27절에 온 회중이 양형을 사용하였음이 드러나는 본보기를 든다. 그리고 이 관행이 교회에 오래 남아 있었고, 언제, 또 누구의 권위로 바뀌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추기경 쿠사누스가 그것이 승인된 때를 언급한다. 키프리아누스가 몇 곳에서 피가 백성에게 주어졌음을 증언하고, 제롬도 같은 것을 증언하여 '사제들이 성찬을 집행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백성에게 나누어 준다' 하였다. 참으로 교황 겔라시우스가 성례를 나누지 말라고 명한다(거룩히 함 편 제2구분, Comperimus 항). 그리 오래되지 않은 관습만이 달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들어온 어떤 관습도 허용되어서는 안 됨이 분명하니, 교회법이 이를 증언한다(제3구분, Veritate 항 및 다음 항들). 그러나 이 관습은 성경뿐 아니라 옛 교회법과 교회의 본보기를 거슬러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누가 성례의 양형을 사용하기를 원한다면,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되게 달리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성례를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의 규례와 일치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제까지 사용되어 온 (성체) 행렬을 생략하는 것이 관례이다.
XXIII Article XXIII: Of the Marriage of Priests
정결치 못한 사제들의 사례에 관하여 흔한 불평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교황 비오도, 사제에게서 혼인을 빼앗은 어떤 이유들이 있으나 그것을 돌려주어야 할 훨씬 더 무거운 이유들이 있다고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플라티나가 그렇게 기록한다. 그러므로 우리 사제들이 이 드러난 추문을 피하기를 원하여 아내를 맞고, 자기들이 혼인을 맺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르쳤다. 첫째, 바울이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라'(고전 7:2), 또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 7:9) 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마 19:11) 하사 모든 사람이 독신생활에 적합한 것은 아님을 가르치시기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육을 위하여 창조하셨다(창 1:28). 또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와 역사 없이는 이 창조를 바꾸는 것이 사람의 능력에 있지 않다. [그것이 (그 시도에서) 어떤 선하고 정직하고 정결한 삶도, 어떤 그리스도교적이고 진실하고 올바른 행실도 나오지 않고, 도리어 많은 이가 끝까지 끔찍하고 두려운 불안과 양심의 고통을 느꼈음이 분명하고 또 많은 이가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신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은 혼인을 맺어야 한다. 사람의 어떤 법도, 어떤 서원도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무효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제들은 자기들이 아내를 맞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르친다. 또 옛 교회에서 사제들이 결혼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바울이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는 자로 택해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딤전 3:2). 그리고 독일에서 사백 년 전 처음으로 사제들이 독신생활을 하도록 강제로 강요당하였는데, 그들이 참으로 그토록 저항하여, 마인츠 대주교가 이 문제에 관한 교황의 교령을 공포하려 할 때 격분한 사제들이 일으킨 소동에서 거의 죽을 뻔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의 처리가 너무도 가혹하여, 장차의 혼인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기존 혼인까지, 신적·인간적 모든 법을 거슬러, 참으로 교황들뿐 아니라 가장 유명한 대회들이 만든 교회법 자체를 거슬러 찢어졌다. [더욱이 높은 지위에 있는 많은 경건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그러한 강요된 독신과 사람에게서 혼인(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사람에게 자유로 두신 것)을 빼앗는 것이 결코 어떤 선한 결과도 낳지 못하고 도리어 많은 크고 악한 악덕과 불의를 가져왔다는 우려를 자주 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세상이 늙어 가면서 사람의 본성이 점점 약해짐을 보아, 더 많은 악덕이 독일에 스며들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좋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혼인을 인간의 연약함에 맞서는 도움이 되도록 정하셨다. 교회법 자체가, 옛 엄격함은 후대에 사람의 약함으로 인하여 때때로 완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니, 이 문제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또 혼인이 더 이상 금지된다면 교회들이 언젠가 목사가 부족하게 되리라 예상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 유효하고, 교회의 관습이 잘 알려져 있고, 부정한 독신이 많은 추문과 간음과 의로운 위정자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다른 범죄들을 일으키는데도, 사제의 혼인에 대하여보다 더 큰 잔혹함이 어디에도 행해지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혼인을 귀히 여기라 명령하셨다. 이방인 가운데서도 잘 정돈된 모든 나라의 법에서 혼인이 가장 높이 존중된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이, 그것도 사제들이, 교회법의 본의를 거슬러 혼인 외에 다른 아무 이유 없이 잔혹하게 사형당한다. 바울이 디모데전서 4장 3절에서 혼인을 금하는 그것을 귀신의 가르침이라 부른다. 혼인을 금하는 법이 이러한 형벌로 유지될 때에 이것이 이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어떤 법도 하나님의 명령을 무효로 할 수 없는 것같이, 어떤 서원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이에 키프리아누스도, 약속한 정결을 지키지 못하는 여자들이 혼인해야 한다고 권한다. 그의 말은 이러하다(제1권 서신 XI) '그러나 그들이 견디기를 원치 않거나 견딜 수 없으면, 정욕으로 불에 빠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그들에게 나으니, 그들이 분명히 형제자매에게 거리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교회법조차, 이제까지 대체로 그러하였듯이, 합당한 나이 전에 서원한 자들에게 어느 정도 관용을 보인다.
XXIV Article XXIV: Of the Mass
우리 교회들이 미사를 폐지한다고 거짓으로 고발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서는 미사가 보존되어 있으며, 가장 높은 경외심으로 거행된다. 통상적인 의식들도 거의 모두 보존되어 있다. 다만 라틴어로 노래하는 부분들 사이사이에 독일어 찬송들이 여기저기 섞였는데, 이는 백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더해진 것이다. 의식은 오직 이 목적, 곧 배우지 못한 이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을] 배우게 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바울이 교회에서 백성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사용하라고 명하였을 뿐 아니라(고전 14:2, 9), 사람의 법으로도 그렇게 정해졌다. 백성은 자격 있는 이가 있으면 함께 성례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이며, 이것도 공적 예배의 경외와 헌신을 더한다. 먼저 문답과 검토를 받지 않은 이는 아무도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백성은 또한 성례의 존엄과 사용에 관하여, 그것이 번민하는 양심에 얼마나 큰 위로를 가져오는지에 관하여 권고받는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모든 선한 것을 그분에게서 기대하며 구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들은 성례에 관한 다른 거짓 가르침들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받는다.] 이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성례의 이러한 사용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헌신을 기른다. 그러므로 우리 대적들 가운데서 미사가 우리 가운데서보다 더 경건하게 거행된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오랫동안 모든 선한 사람들의 공적이고도 가장 심각한 불평이 이것이었음은 분명하다. 곧 미사들이 비천하게 더럽혀져 이익을 얻는 목적에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교회에서 이 폐습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오직 수수료나 보수를 위하여 미사를 드렸는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교회법을 거슬러 그것을 거행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찬을 합당하지 않게 다루는 자들을 엄히 경고하여 말한다.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범하는 것이니라”(고전 11:27). 그러므로 우리 사제들이 이 죄에 관하여 권고받았을 때, 우리 가운데서는 사적 미사가 중단되었다. 사적 미사는 거의 모두 이익을 위하여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감독들도 이 폐습들을 모르지 않았다. 그들이 제때 바로잡았더라면 지금 분열은 더 적었을 것이다. 이전에 그들은 자기들의 묵인으로 많은 부패가 교회 안으로 스며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제 너무 늦은 때에 그들은 교회의 혼란을 불평하기 시작하지만, 이 소동은 단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명백했던 그 폐습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미사에 관하여, 성례에 관하여 큰 분열들이 있었다.
아마도 세상은 그토록 오랫동안 이어진 미사의 모독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모독들은 여러 세기 동안 교회들 안에서, 그것을 바로잡을 능력도 있고 의무도 있었던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하여 묵인되었다. 십계명에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세상이 시작된 이래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 가운데 미사만큼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남용된 것은 없어 보인다.
또 사적 미사를 무한히 늘린 견해가 더해졌다. 곧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수난으로 원죄에 대하여 보속하셨고, 날마다의 죄, 곧 소죄와 대죄를 위하여 봉헌이 이루어지도록 미사를 제정하셨다는 견해이다. 여기서 미사가 외적 행위 자체로 산 자와 죽은 자의 죄를 없앤다는 일반적 견해가 생겨났다.
그 다음에는 여러 사람을 위하여 드린 한 미사가 개인들을 위한 특별 미사들만큼 가치가 있는지 논쟁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무수한 미사의 무리를 낳았다. [사람들은 이 행위로 하나님께 자기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얻고자 했으며, 그 사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참된 예배는 잊혔다.]
이러한 견해들에 관하여 우리 교사들은 그것들이 성경에서 떠나며 그리스도의 수난의 영광을 축소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원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죄에 대해서도 봉헌과 보속이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기록된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또 10장 14절도 말한다. “그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원죄에 대해서만 보속하셨고 다른 모든 죄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은 교회 안에서 들어 보지 못한 혁신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 오류가 충분한 이유 없이 책망받은 것이 아님을 이해하기 바란다.]
성경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곧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을 때 그러하다. 이제 만일 미사가 외적 행위 자체로 산 자와 죽은 자의 죄를 없앤다면, 칭의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미사의 행위에서 오는 것이 된다. 성경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명하신다. 그러므로 미사는 성례를 사용하는 이들의 믿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는 유익들을 기억하고, 번민하는 양심을 기쁘게 하며 위로하도록 제정되었다.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분의 유익들을 기억하고, 그것들이 참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역사적 사실만 기억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유대인들과 경건치 않은 자들도 그것은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사는 이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곧 거기서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성례[성찬]가 베풀어지게 하는 것이다. 암브로시우스가 말하듯이, “나는 항상 죄를 짓기 때문에 항상 약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성례는 믿음을 요구하며, 믿음 없이는 헛되이 사용된다.]
이제 미사가 이와 같이 성례를 주는 것이므로, 우리는 모든 성일마다 한 성찬을 지키며, 누가 성례를 원하면 다른 날에도 그것을 구하는 이들에게 베푼다. 그리고 이 관습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 이전의 교부들은 어떤 사적 미사도 언급하지 않고, 도리어 공동 미사[성찬]에 관하여 매우 많이 말하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톰은 사제가 날마다 제단에 서서 어떤 이들은 성찬으로 초대하고 다른 이들은 물러서게 한다고 말한다.
또 고대 교회법에서 보아도, 한 사람이 미사를 거행하고 그에게서 다른 모든 장로들과 집사들이 주의 몸을 받았음이 드러난다. 니케아 교회법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이다. “집사들은 그들의 순서에 따라 장로들 뒤에, 감독이나 장로에게서 거룩한 성찬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성찬에 관하여 “서로 기다리라”(고전 11:33)고 명하여, 공동의 참여가 있게 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있는 미사는 성경과 교부들에게서 취한 교회의 본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배척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특히 지금까지 사용되어 온 것과 대체로 같은 공적 의식들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미사의 수만 다르다. 이는 매우 크고 명백한 폐습들 때문에 의심할 여지 없이 유익하게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교회들에서조차 미사가 날마다 거행되지 않았다. 『삼부 역사』 제9권 33장이 증언하듯이, “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성경이 읽히고, 교사들이 그것을 해설하며, 성찬의 엄숙한 예식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이 행해진다.”
XXV Article XXV: Of Confession
우리 가운데서는 교회들 안의 고해가 폐지되지 않았다. 주의 몸은, 미리 심문을 받고 사죄를 받은 사람들에게가 아니면 보통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성은 사죄 안의 믿음에 관하여 매우 주의 깊게 가르침을 받는다. 전에는 이 점에 관하여 깊은 침묵이 있었다. 우리 백성은 사죄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선포되는 것으로 여겨 매우 귀히 받아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는다.
열쇠의 권세가 그 아름다움 가운데 제시되고, 그것이 번민하는 양심에 얼마나 큰 위로를 가져오는지도 일깨워진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죄를 하늘에서 울려 나오는 음성처럼 믿는 믿음을 요구하시며, 그리스도 안의 그러한 믿음이 참으로 죄 사함을 얻고 받아들인다는 것도 가르쳐진다. 이전에는 보속이 지나치게 높여졌고, 믿음과 그리스도의 공로와 믿음의 의에 관하여는 언급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우리 교회들은 결코 비난받을 수 없다.
이 점에 관하여는 우리 대적들도, 회개에 관한 교리가 우리 교사들에 의해 매우 부지런히 다루어지고 명확히 밝혀졌음을 우리에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고해에 관하여 그들은 가르치노니, 죄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으며, 모든 죄를 열거해야 한다는 염려로 양심이 짐 지워져서는 안 된다. 모든 죄를 다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편이 증언하기를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시 19:13) 하며, 또한 예레미야 17장 9절도 “마음은 거짓되니 누가 능히 알리요?” 한다. 만일 열거된 죄만 용서된다면, 양심은 결코 평안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매우 많은 죄를 보지도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옛 저술가들도 죄의 열거가 필요하지 않다고 증언한다. 『교령집』에는 크리소스토무스가 인용되어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대가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라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고발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네 길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라’고 말하는 예언자에게 순종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참된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그대의 죄를 고백하라. 그대의 허물을 혀로가 아니라 양심의 기억으로 말하라” 등이다. 그리고 『주해』도 회개에 관하여, 제5구분 Consideret 장에서 고해는 오직 인간법에 속한 것임을 인정한다[성경이 명령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정한 것]. 그럼에도 사죄의 큰 유익 때문에, 또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도 양심에 유익하기 때문에, 고해는 우리 가운데 보존된다.
XXVI Article XXVI: Of the Distinction of Meats
백성뿐 아니라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들 사이에서도 일반적으로 이런 확신이 있었다. 곧 음식의 구별과 그와 같은 사람의 전통들이 은혜를 공로로 얻는 데 유익한 행위이며, 죄를 위한 보속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이것에서 드러난다. 날마다 새 의식, 새 수도회, 새 축일, 새 금식이 제정되었고, 교회의 교사들은 이러한 행위들을 은혜를 공로로 얻기 위해 필요한 예배로 요구하였으며, 사람들이 그중 무엇이라도 빠뜨리면 그들의 양심을 크게 두렵게 하였다. 전통에 관한 이러한 확신에서 교회 안에 많은 해가 생겨났다.
첫째, 그로 말미암아 은혜의 교리와 믿음의 의의 교리가 가려졌다. 이것은 복음의 으뜸가는 부분이며, 교회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서 있어야 할 것이니, 그리스도의 공로가 잘 알려지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가 용서됨을 믿는 믿음이 행위보다 훨씬 높이 세워지게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이 조항에 가장 큰 무게를 두어, 율법과 인간의 전통을 제쳐 두고 그리스도인의 의가 그런 행위들과 다른 것, 곧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가 값없이 용서됨을 믿는 믿음임을 보인다. 그러나 바울의 이 교리는 전통들에 의해 거의 완전히 숨 막히게 되었고, 그 전통들은 음식의 구별과 그와 같은 섬김으로 우리가 은혜와 의를 공로로 얻어야 한다는 견해를 낳았다. 회개를 다룰 때에도 믿음은 언급되지 않았고, 오직 저 보속의 행위들만 제시되었으며, 회개 전체가 그 행위들 안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둘째, 이 전통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가렸다. 전통들이 하나님의 계명보다 훨씬 높이 놓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전적으로 어떤 축일과 예식과 금식과 예복을 지키는 데 있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준수들은 스스로 영적 생활과 완전한 생활이라는 높은 칭호를 얻었다. 그동안 각자의 부르심에 따른 하나님의 계명들은 존중받지 못하였다. 곧 아버지가 자녀를 기르고, 어머니가 아이를 낳고, 군주가 공공체를 다스리는 일들은 세속적이고 불완전한 일로 여겨졌으며, 저 번쩍이는 준수들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 오류는 경건한 양심들을 크게 괴롭혔다. 그들은 혼인, 위정자의 직무, 또는 다른 시민적 봉사 안에 있는 자신들이 불완전한 삶의 상태에 묶여 있다고 슬퍼하였다. 반대로 그들은 수도사들과 그와 같은 사람들을 우러러보았고, 그런 사람들의 준수가 하나님께 더 받으실 만하다고 그릇 상상하였다.
셋째, 전통들은 양심에 큰 위험을 가져왔다. 모든 전통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준수들이 필요한 예배 행위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게르손은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졌고, 어떤 이들은 전통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느껴 스스로 목숨까지 끊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믿음의 의와 은혜에 관한 아무 위로도 듣지 못하였다. 우리는 요약가들과 신학자들이 전통들을 모으고, 양심을 덜어 주기 위한 완화책을 찾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양심을 충분히 풀어 주지 못하고, 때로는 오히려 양심을 더 얽어매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들을 모으는 일에 학교와 설교가 너무 많이 매여 있었으므로, 그들은 성경을 다루고 믿음, 십자가, 소망, 시민적 일의 존엄, 심하게 시험받는 양심의 위로라는 더 유익한 교리를 찾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게르손과 몇몇 다른 신학자들은 전통에 관한 이러한 다툼 때문에 더 나은 종류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되었다고 몹시 탄식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사람들의 양심이 그러한 준수들로 짐 지워지는 것을 금하고, 야누아리우스에게 그것들이 무관한 것들로 지켜져야 함을 알아야 한다고 신중하게 권고한다. 이것이 그의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거짓으로 의심하듯이, 우리 교사들이 이 문제를 경솔하게 또는 감독들을 미워해서 다룬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전통을 오해함에서 생겨난 이러한 오류들을 교회들에게 경고해야 할 큰 필요가 있었다. 복음은 우리에게 교회들 안에서 은혜의 교리와 믿음의 의의 교리를 힘써 주장하도록 강권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이 택한 준수들로 은혜를 공로로 얻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교리는 이해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인간의 전통을 지킴으로 우리는 은혜를 공로로 얻거나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준수들을 필요한 예배 행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여기에 성경의 증언들을 덧붙인다.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15장 3절에서 통상적 전통을 지키지 않은 사도들을 변호하셨다. 그 전통은 분명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 무관한 일에 속하며, 율법의 정결례와 어느 정도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9절에서 말씀하신다. “사람의 계명으로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그러므로 그분은 무익한 섬김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조금 뒤에 그분은 덧붙이신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 바울도 로마서 14장 17절에서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도 말한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안식일에 관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또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처럼 규례에 복종하느냐.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느냐.” 그리고 베드로는 사도행전 15장 10절에서 말한다.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을 줄을 믿노라.” 여기서 베드로는 모세의 것이든 다른 이들의 것이든 많은 예식들로 양심에 짐을 지우는 것을 금한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4장 1, 3절에서 바울은 음식을 금하는 것을 귀신들의 가르침이라 부른다. 그러한 행위로 은혜를 공로로 얻으려 하거나, 마치 그리스도교가 그런 하나님 섬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일을 제정하거나 행하는 것은 복음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대적들은 우리 교사들이 요비니아누스처럼 훈련과 육체의 죽임을 반대한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우리 교사들의 글에서 그 반대가 배워질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십자가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되고 진지하며 거짓 없는 죽임이다. 곧 여러 고난으로 단련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가르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은 포만이나 게으름이 죄로 유혹하지 못하도록 신체적 절제나 몸의 훈련과 수고로 자신을 훈련하고 굴복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런 훈련으로 은혜를 공로로 얻거나 죄를 위한 보속을 이루려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러한 외적 훈련은 몇몇 정해진 날에만이 아니라 모든 때에 권장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누가복음 21장 34절에서 “너희 마음이 방탕함으로 무거워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고 명하신다. 또 마태복음 17장 21절은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으로밖에는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분명히, 그 훈련으로 죄 사함을 공로로 얻기 위해 몸을 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복종시켜 영적인 일들과 자기 부르심에 따른 의무 수행에 알맞게 하려는 것임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금식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만 양심의 위험을 걸고 특정한 날과 특정한 음식을 규정하여, 그런 행위들이 필요한 섬김인 것처럼 만드는 전통들을 정죄한다.
그럼에도 우리 편에서는 교회의 좋은 질서에 도움이 되는 매우 많은 전통들을 지킨다. 예컨대 미사 안의 성경 봉독 순서와 주요 축일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그러한 준수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지 못하며, 그런 것들에서 거리낌 없이 생략된 것을 죄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받는다. 인간적 예식에 관한 이러한 자유는 교부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동방에서는 로마와 다른 때에 부활절을 지켰고, 이 차이 때문에 로마인들이 동방 교회를 분열이라고 비난했을 때, 다른 이들은 그러한 관습이 어디서나 같을 필요는 없다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이레네우스는 말한다. “금식에 관한 다양성은 믿음의 조화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교황 그레고리우스도 Dist. XII에서 그러한 다양성이 교회의 일치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암시한다. 또한 『삼부 역사』 제9권에는 서로 다른 예식의 많은 예가 모여 있으며, 다음과 같은 진술이 나온다. “사도들의 뜻은 축일에 관한 규칙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과 거룩한 삶을 선포하는 것이었다[믿음과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XXVII Article XXVII: Of Monastic Vows
수도 서원에 관하여 우리 편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는, 수도원들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또 바로 그 수도원들 안에서 교회법을 거슬러 날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행해졌는지를 기억하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수도원들은 자유로운 결사체였다. 그 뒤 규율이 부패하자, 마치 세심하게 설계된 감옥처럼 규율을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곳곳에 서원이 덧붙여졌다. 차츰 서원 외에도 많은 다른 준수 사항들이 더해졌다. 그리고 이 결박들은 교회법을 거슬러, 적법한 나이가 되기 전에 많은 이들에게 씌워졌다. 또 많은 이들이 무지로 이러한 삶에 들어갔으니, 충분한 나이가 되었더라도 자기 힘을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올무에 걸린 그들은 머물도록 강요받았고, 비록 어떤 이들은 교회법의 친절한 규정으로 풀려날 수 있었음에도 그러하였다. 이것은 남자 수도사들의 집보다 여자 수녀원에서 더 심하였으니, 약한 성에게는 더 큰 배려가 보여졌어야 했음에도 그러하였다. 이러한 엄격함은 이때 이전에도 많은 선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였다. 그들은 젊은 남자들과 처녀들이 생계를 위하여 수도원에 던져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이 절차에서 어떤 불행한 결과가 나오는지, 어떤 추문이 생기는지, 양심 위에 어떤 올무가 놓이는지를 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중대한 문제에서 교회법의 권위가 완전히 제쳐지고 멸시되는 것을 슬퍼하였다. 이러한 악들에 더하여 서원에 관한 어떤 확신이 덧붙여졌는데, 잘 알려져 있듯이 그것은 이전 시대에도 더 사려 깊은 수도사들조차 불쾌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들은 서원이 세례와 같다고 가르쳤고, 이러한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과 칭의를 공로로 얻는다고 가르쳤다. 참으로 그들은 수도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공로로 얻을 뿐 아니라 더 큰 것들까지 얻는다고 덧붙였으니, 그것이 계명뿐 아니라 이른바 '복음적 권고'까지 지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도 서약이 세례보다 훨씬 낫고, 수도생활이 위정자들의 삶이나 목사들의 삶과 그와 같은 이들의 삶보다 더 공로가 크다고 믿게 하였다. 그 사람들은 사람이 만든 예배 행위 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기 부르심을 섬기는 자들이다. 이 중 어느 것도 부인될 수 없으니, 그것들이 그들 자신의 책들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렇게 올무에 걸려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거의 배우지 못한다.] 그렇다면 수도원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전에는 그것들이 교회에 유익한 신학과 다른 학문의 학교였고, 거기서 목사들과 감독들이 나왔다. 이제는 다른 것이 되었다. 모두가 아는 일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이전에는 배우기 위하여 모였지만, 이제 그들은 그것이 은혜와 의를 공로로 얻도록 제정된 삶의 방식인 것처럼 꾸민다. 참으로 그들은 그것이 완전의 상태라고 전파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다른 모든 삶의 방식보다 그것을 훨씬 높이 둔다. 우리는 혐오감을 부추기는 과장 없이 이 일들을 되짚었으니, 이 점에 관한 우리 교사들의 교리가 더 잘 이해되게 하려는 것이다. 첫째, 혼인을 맺는 사람들에 관하여, 우리 편에서는 독신생활에 맞지 않는 모든 사람이 혼인을 맺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르친다. 서원이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무효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고린도전서 7장 2절에 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라.' 또한 명령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규례도,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로 예외가 되지 않은 자들을 혼인하도록 이끈다. 창세기 2장 18절의 말씀대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명령과 규례에 순종하는 자들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무슨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서원의 의무를 마음껏 높인다 하더라도, 그 서원이 하나님의 명령을 무효로 하게 만들 수는 없다. 교회법은 모든 서원에서 상급자의 권리가 예외로 남는다고 가르친다. [서원은 교황의 결정에 반하여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이 서원들이 효력을 가질 수는 더욱 없다. 이제 서원의 의무가 어떤 이유로도 바뀔 수 없다면, 로마 교황들은 결코 관면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신적인 의무를 사람이 무효로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교황들은 이 의무에서 관용이 지켜져야 한다고 신중히 판단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여러 번 서원에서 관면을 주었다고 읽는다. 수도원에서 다시 불려 나온 아라곤 왕의 사례는 잘 알려져 있고, 우리 시대에도 예들이 있다. [이제 세속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관면이 허락되었다면, 영혼의 고통 때문에 관면이 허락되는 것은 훨씬 더 합당하다.] 둘째, 우리 대적들은 왜 서원의 의무나 효과를 과장하면서도, 동시에 서원 자체의 본질, 곧 그것은 가능한 일에 관한 것이어야 하고, 자유로워야 하며, 자발적이고 숙고된 선택이어야 한다는 점에 관하여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가? 그러나 영구적 정결이 사람의 능력 안에 어느 정도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발적이고 숙고하여 서원한 사람이 얼마나 적은가! 젊은 처녀들과 남자들이 판단할 수 있기 전에 설득당하고, 때로는 강요까지 받아 서원한다. 그러므로 의무를 그렇게 엄격하게 주장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인정하듯, 자발적이고 숙고된 행위 없이 서원하는 것은 서원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회법은 열다섯 살 전에 한 서원을 무효로 한다. 그 나이 전에는 한 사람이 평생의 삶에 관하여 결정할 충분한 판단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교회법은 사람의 약함을 더 배려하여 몇 해를 더한다. 그것은 열여덟 살 전에 서원하는 것을 금한다. 그런데 이 두 교회법 중 어느 것을 따를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수도원을 떠날 변명이 있다. 그들 대부분이 이 나이에 이르기 전에 서원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설령 서원을 어긴 일이 책망받을 수 있다 해도, 곧바로 그런 사람들의 혼인이 해소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따르는 것 같지는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들이 해소되어서는 안 된다고 부인한다(XXVII. Quaest. I, Cap. Nuptiarum). 그의 권위는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되니, 비록 뒤에 다른 사람들이 달리 생각했더라도 그러하다. 그러나 혼인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이 매우 많은 사람을 그 서원에서 건져 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 교사들은 서원이 무효임을 보이기 위하여 서원에 관한 또 다른 논증도 제시한다. 하나님의 명령 없이, 칭의와 은혜를 공로로 얻으려고 사람이 정하고 선택한 모든 하나님 섬김은 악하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 9절에서 '사람의 계명으로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바울은 의가 사람이 고안한 우리 자신의 준수 사항과 예배 행위에서 찾아져서는 안 되고, 자기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받아들여짐을 믿는 자들에게 믿음으로 온다고 곳곳에서 가르친다. 그러나 수도사들이 사람이 만든 예배 행위가 죄를 보속하고 은혜와 칭의를 공로로 얻는다고 가르쳤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깎아내리고 믿음의 의를 흐리며 부인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러므로 이렇게 흔히 행해진 서원들은 악한 예배 행위였고, 따라서 무효라는 결론이 따른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한 악한 서원은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법이 말하듯 어떤 서원도 사람을 악에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4절에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 서원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아무 효력이 없게 되며, 그들은 은혜에서 떨어진다. 서원에 칭의를 돌리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고유하게 속한 것을 자기 행위에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수도사들이 자기 서원과 준수 사항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죄 사함을 공로로 얻는다고 가르쳤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은 더 큰 부조리도 만들어 내어, 자기 행위에 다른 이들을 참여시킬 수 있다고 말하였다. 누군가 악한 의도로 이 일들을 확대하려 한다면, 지금은 수도사들 자신도 부끄러워하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모아 낼 수 있겠는가! 이뿐 아니라 그들은 사람이 만든 예배 행위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상태라고 사람들을 설득하였다. 이것이 행위에 칭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령 없이 사람이 고안한 예배 행위를 백성 앞에 내세우고, 그러한 예배 행위가 사람을 의롭다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교회 안에서 가벼운 범죄가 아니다. 교회에서 으뜸으로 가르쳐져야 할 믿음의 의가, 가난과 겸손과 독신의 외양을 지닌 이 놀라운 천사 같은 예배 형태들이 사람들의 눈앞에 던져질 때 흐려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들이 오직 수도사들만 완전의 상태에 있다고 들을 때, 하나님의 계명과 참된 하나님 섬김이 흐려진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러면서도 큰 믿음을 품으며,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 화목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구하며, 우리의 부르심을 따라 행해야 할 모든 일에서 그분의 도움을 확실히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외적 선행에 부지런하고 자기 부르심을 섬기는 것이다. 참된 완전과 참된 하나님 섬김은 이런 것들 안에 있다. 그것은 독신이나 구걸이나 천한 옷차림에 있지 않다. 그러나 백성은 수도생활에 대한 거짓 칭송에서 많은 해로운 견해를 품게 된다. 그들은 독신이 지나치게 칭송되는 것을 듣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혼인생활을 양심의 거리낌 속에서 이끌어 간다. 그들은 오직 구걸하는 자들만 완전하다고 듣는다. 그러므로 자기 소유를 지니고 장사하는 일을 양심의 거리낌 속에서 한다. 그들은 복수하지 않는 것이 복음적 권고라고 듣는다. 그러므로 사생활에서 어떤 이들은 복수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권고일 뿐이라고 듣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시민의 직무를 맡거나 위정자가 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혼인과 국가의 행정을 버리고 수도원에 숨어 들어간 사람들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이것을 세상에서 달아나는 것,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할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명령들 안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사람이 고안한 명령들 안에서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선하고 완전한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근거로 가진 것이다. 사람들에게 이 일들을 권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시대 이전에도 게르송은 완전에 관한 수도사들의 이 오류를 책망하고, 자기 시대에 수도생활이 완전의 상태라는 말이 새로 생긴 주장이라고 증언하였다. 이처럼 많은 악한 견해가 서원 안에 내재해 있다. 곧 서원이 의롭다 한다는 것, 서원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룬다는 것, 서원이 권고와 계명을 지킨다는 것, 서원에는 공로가 남아도는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거짓되고 헛되므로 서원을 무효로 만든다.
XXVIII Article XXVIII: Of Ecclesiastical Power
감독들의 권한에 관하여 큰 논쟁이 있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교회의 권한과 칼의 권한을 서투르게 뒤섞었다. 이 혼동에서 매우 큰 전쟁과 소요가 일어났으니, 교황들은 열쇠의 권한으로 담대해져서 새 예배들을 제정하고, 유보 사건과 무자비한 파문으로 양심에 짐을 지웠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왕국들을 옮기고 황제에게서 제국을 빼앗으려 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잘못들은 오래전부터 교회 안에서 학식 있고 경건한 사람들에게 책망받아 왔다. 그러므로 우리 교사들은 사람들의 양심을 위로하기 위하여, 교회의 권한과 칼의 권한의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고, 또 이 둘이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으뜸가는 복으로서 경외와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이러하다. 복음에 따른 열쇠의 권한, 곧 감독들의 권한은 복음을 전하고, 죄를 사하거나 그대로 두며, 성례를 집행하라는 하나님의 권한 또는 명령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명령으로 사도들을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20장 21절 이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마가복음 16장 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 권한은 오직 각자의 부르심에 따라 많은 사람에게든 개인에게든 복음을 가르치거나 전하고 성례를 집행함으로 행사된다. 그로 말미암아 육신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들, 곧 영원한 의와 성령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통해서가 아니면 올 수 없다. 바울이 로마서 1장 16절에서 말하듯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한은 영원한 것들을 주며 오직 말씀의 사역으로 행사되므로, 세속 정부를 방해하지 않는다. 노래하는 기술이 세속 정부를 방해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세속 정부는 복음과는 다른 것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세속 통치자들은 마음이 아니라 몸과 몸에 속한 것들을 명백한 해악에서 보호하고, 시민적 정의와 평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칼과 육체적 형벌로 사람들을 제어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한과 시민적 권한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권한은 복음을 가르치고 성례를 집행하라는 자기 고유의 위임을 가진다. 그것이 다른 직무에 침입하지 않게 하라. 이 세상의 왕국들을 옮기지 않게 하라. 세속 통치자들의 법을 폐하지 않게 하라. 합법적인 복종을 없애지 않게 하라. 시민적 규례나 계약에 관한 판결에 간섭하지 않게 하라. 국가의 형태에 관하여 세속 통치자들에게 법을 지시하지 않게 하라.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8장 38절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하셨고, 또 누가복음 12장 14절에서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셨기 때문이다. 바울도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하며, 고린도후서 10장 4절에서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강력”이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 교사들은 이 두 권한의 직무를 구별하며, 둘 다 하나님의 선물과 복으로 존중받고 인정되어야 한다고 명한다. 감독들에게 칼의 권한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권한은 감독으로서 복음의 위임에 따라 가진 것이 아니라, 왕들과 황제들에게서 자기 소유에 대한 시민 행정을 위하여 받은 인간 법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사역과는 다른 직무이다.
그러므로 감독들의 관할권이 문제될 때에는 시민적 권위와 교회적 관할권을 구별해야 한다. 다시 말해, 복음에 따르면, 또는 그들이 말하듯 신적 권리에 따르면, 감독으로서의 감독들, 곧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맡은 자들에게 속한 관할권은 죄를 사하고, 교리를 판단하며, 복음에 반대되는 교리들을 거부하고, 악함이 알려진 악한 사람들을 교회의 교제에서 배제하는 것 외에는 없다. 이것도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단순히 말씀으로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회중들은 필요상 또 신적 권리에 따라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누가복음 10장 16절,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듣는 것”이라 하신 대로이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거나 명할 때에는, 회중들이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 7장 15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갈라디아서 1장 8절,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린도후서 13장 8절,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 또한 “주께서 내게 주신 권한은 세우기 위한 것이요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교회법도 이와 같이 명한다(II. Q. VII. Cap., Sacerdotes 및 Cap. Oves).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도 『페틸리아누스의 서신에 반박하여』에서 말한다. “가톨릭 감독들이 혹 오류에 빠지거나 하나님의 정경 성경에 반대되는 어떤 것을 주장할 경우, 우리도 그들에게 복종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혼인이나 십일조 등의 어떤 사건을 듣고 판단하는 다른 권한이나 관할권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적 권리에 따른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서 보통 관할자가 직무를 다하지 않을 때, 제후들은 원하지 않더라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 백성에게 정의를 베풀 의무가 있다.
더 나아가, 감독들이나 목사들이 교회 안에 의식을 도입하고, 음식과 거룩한 날과 등급, 곧 교역자의 직분 등에 관한 법을 만들 권리가 있는지 논쟁된다. 이 권리를 감독들에게 주는 자들은 요한복음 16장 12-13절의 증언을 들어 말한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그들은 또한 사도들이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멀리하라고 명한 사례를 든다(행 15:29). 또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것을 십계명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로 든다. 그들은 안식일 변경보다 더 크게 내세우는 예가 없다. 그들은 교회가 십계명 가운데 하나를 면제하였으니 교회의 권한이 크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 편에서는, 위에서 보인 것처럼 감독들이 복음에 반대되는 어떤 것도 제정할 권한이 없다고 가르친다. 교회법도 같은 것을 가르친다(Dist. IX). 이제 어떤 전통의 준수를 세우거나 요구하여, 그 준수로 우리가 죄에 대한 보속을 이루거나 은혜와 의를 공로로 얻으려 하는 것은 성경에 반한다. 그런 준수로 우리가 칭의를 공로로 얻으려 할 때 그리스도의 공로의 영광이 손상을 입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 때문에 교회 안에서 전통들이 거의 끝없이 늘어난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 믿음과 믿음의 의에 관한 교리는 억눌렸다. 점차 더 많은 거룩한 날이 만들어지고, 금식이 정해지고, 새 의식들과 성인을 기리는 예배들이 제정되었는데, 그런 것들의 제정자들이 이 행위들로 은혜를 공로로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옛날에는 보속 규정들이 늘어났고, 우리는 아직도 그 흔적을 보속들 가운데서 본다.
또 전통의 제정자들은 음식과 날과 그와 같은 것들에서 죄의 문제를 찾아내고, 마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칭의를 공로로 얻기 위하여 레위적 예배와 같은 것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 배열을 사도들과 감독들에게 맡기신 것처럼 교회를 율법의 종살이로 짐 지울 때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행한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이렇게 쓰고 있으며, 교황들도 어느 정도 모세 율법의 사례에 잘못 이끌린 듯하다.
여기서 이런 짐들이 생겨난다. 다른 사람에게 거리낌을 주지 않아도 거룩한 날에 손으로 일하는 것을 죽을죄로 만들고, 규정 시과를 빠뜨리는 것을 죽을죄로 만들며, 어떤 음식들이 양심을 더럽힌다고 하고, 금식들이 하나님을 달래는 행위라고 하며, 유보 사건의 죄는 그것을 유보한 자의 권위로만 용서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법 자체는 교회적 형벌의 유보만 말할 뿐, 죄책의 유보를 말하지 않는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15장 10절에서 제자들의 목에 멍에를 메우는 것을 금하고, 바울이 고린도후서 13장 10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은 세우기 위한 것이지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감독들은 어디서 양심을 옭아매기 위하여 이런 전통들을 교회에 부과할 권리를 얻었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왜 이런 전통들로 죄를 더하는가?
그러나 그러한 전통들이 은혜를 공로로 얻거나 구원에 필요하다는 듯이 그것들을 만드는 것을 금하는 분명한 증언들이 있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6-23절에서 말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없어질 것이요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 이런 것들은 실로 지혜 있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또한 디도서 1장 14절에서 그는 전통들을 공개적으로 금한다. “진리를 배반하는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말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 14절과 13절에서 전통을 요구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들을 내버려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그리고 그런 예배들을 거부하시며 말씀하신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다 뽑힐 것이다.”
만일 감독들에게 무한한 전통들로 교회에 짐을 지우고 양심을 옭아맬 권리가 있다면, 성경은 왜 그토록 자주 전통을 만들고 전통에 귀 기울이는 것을 금하는가? 왜 그것들을 “귀신의 가르침”이라 부르는가(딤전 4:1)? 성령께서 이 일들을 헛되이 미리 경고하셨단 말인가?
그러므로 필요하다고 제정되거나 은혜를 공로로 얻는다는 생각으로 세워진 규례들은 복음에 반하므로, 어떤 감독도 그러한 예배들을 제정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 교회들 안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교리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곧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기록된 것처럼, 율법의 종살이는 칭의에 필요하지 않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복음의 주된 조항이 보존되어야 한다. 곧 우리는 사람이 고안한 어떤 준수나 예배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은혜를 값없이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일과 하나님의 집 안의 그와 같은 예식들에 관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우리는 답한다. 감독들이나 목사들이 교회 안에서 모든 일이 질서 있게 이루어지도록 규례를 만드는 것은 합법적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가 은혜를 공로로 얻거나 죄에 대한 보속을 이루려 해서도 안 되고, 양심들이 그것들을 필요한 예배로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거리낌을 주지 않고 그것들을 어겨도 죄라고 생각하도록 묶여서도 안 된다. 이와 같이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5절에서 여자들이 회중 가운데 머리를 덮도록 정하고, 고린도전서 14장 30절에서 교회 안에서 통역자들이 차례대로 들리도록 정한다.
사랑과 평안을 위하여, 서로 거리끼게 하지 않도록, 교회 안의 모든 일이 질서 있고 혼란 없이 이루어지도록(고전 14:40; 빌 2:14 비교) 교회들이 그러한 규례들을 지키는 것은 합당하다. 그러나 양심이 그것들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도록 짐 지워져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 거리낌을 주지 않고 그것들을 어길 때 죄를 짓는다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오직 거리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머리를 덮지 않고 공공장소에 나가는 여인이 죄를 짓는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주일과 부활절과 오순절, 그리고 그와 같은 거룩한 날들과 예식들의 준수가 이런 종류이다. 교회의 권위로 안식일 대신 주일 준수가 필요한 것으로 정해졌다고 판단하는 자들은 크게 오류를 범한다. 성경은 안식일을 폐지하였다. 복음이 계시된 뒤에는 모세의 모든 의식들이 생략될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이 언제 모여야 하는지 알도록 어떤 날을 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이 목적을 위하여 주일을 지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이 날이 선택된 데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보기를 가지고 안식일이나 다른 어떤 날의 준수도 필요하지 않음을 알게 하려는 추가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율법의 변경, 새 율법의 의식들, 안식일의 변경에 관한 기괴한 논쟁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은 교회 안에 레위적 예배와 같은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감독들에게 구원에 필요한 새 의식들을 고안하라는 위임을 주셨다는 거짓 믿음에서 생겨났다. 믿음의 의가 충분히 분명하게 가르쳐지지 않았을 때 이러한 오류들이 교회에 스며들었다.
어떤 이들은 주일 준수가 참으로 신적 권리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는 그렇다고 논쟁한다. 그들은 거룩한 날들에 어디까지 일하는 것이 허용되는지 규정한다. 그러한 논쟁들이 양심의 올무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들이 전통들을 완화하려고 애쓴다 해도, 그것들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남아 있는 한 그 완화는 결코 감지될 수 없다. 믿음의 의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는 그 견해가 반드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사도행전 15장 20절에서 피를 멀리하라고 명하였다. 지금 누가 그것을 지키는가? 그러나 지키지 않는 자들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사도들 자신도 양심에 그러한 종살이를 지우려 하지 않았고, 다만 거리낌을 피하려고 한동안 그것을 금하였기 때문이다. 이 명령에서 우리는 복음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항상 살펴야 한다.
정확하게 지켜지는 교회법은 거의 없고, 전통의 가장 열심 있는 옹호자들 가운데서도 날마다 많은 것이 사용되지 않게 된다. 이 완화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양심을 제대로 돌볼 수 없다. 곧 우리는 교회법들이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고 지켜진다는 것과, 전통들이 사용되지 않게 되더라도 양심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감독들이 선한 양심으로 지킬 수 없는 그러한 전통들의 준수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백성의 합법적 순종을 쉽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들은 독신을 명하고, 복음의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교회들은 감독들이 자기 명예를 희생하여 화합을 회복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한 목자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교회들은 다만, 보편적 교회의 관습에 반하여 새로 받아들여진 부당한 짐들을 풀어 달라고 요구할 뿐이다. 처음에는 이 규례들 가운데 일부에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후대에는 맞지 않는다. 또한 어떤 것들은 잘못된 생각들 때문에 채택되었음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교황들의 자비에 합당한 일은 이제 그것들을 완화하는 것이다. 그런 수정은 교회의 일치를 흔들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법 자체가 보이듯이, 많은 인간 전통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경되었다. 그러나 죄 없이 지킬 수 없는 그러한 준수들의 완화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사도행전 5장 29절의 사도적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그것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명한다.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5장 3절에서 감독들이 주인 노릇하며 교회들을 지배하는 것을 금한다. 지금 우리의 뜻은 감독들에게서 통치를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를 요구할 뿐이다. 곧 그들이 복음이 순수하게 가르쳐지도록 허락하고, 죄 없이 지킬 수 없는 몇몇 준수들을 완화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 양보도 하지 않는다면, 그 완고함으로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답할지는 그들이 살필 일이다.
결론 Conclusion
이것들이 논쟁 중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주요 조항들이다. 우리가 더 많은 폐습에 관하여 말할 수도 있었으나,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을 피하려고 주요한 점들을 제시하였으니, 그로부터 나머지는 쉽게 판단될 수 있을 것이다. 면죄부와 순례와 파문의 남용에 관하여 큰 불평들이 있었다. 본당들은 면죄부 장사꾼들에게 여러 방식으로 괴롭힘을 받아 왔다.
본당권, 고해, 장례, 특별한 경우의 설교와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일들에 관하여 목사들과 수도사들 사이에 끝없는 다툼이 있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문제들을 지나쳤으니, 이 사안에서 주요한 점들이 간략히 제시되어 더 쉽게 이해되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어떤 사람을 비난하려고 말하거나 제시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들만을 서술하였다. 이는 교리와 의식에서 우리 편이 성경이나 보편적 교회에 반하여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 이해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새롭고 경건치 않은 교리가 우리 교회들 안으로 스며들지 않게 하려고 우리가 가장 부지런히 주의하였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위 조항들을 우리는 폐하의 칙령에 따라 제출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보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교사들의 교리 요약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이 신앙고백에서 누군가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우리는 성경에 따라 더 충분한 설명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
폐하의 충실한 신하들:
작센 공작 선제후 요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게오르크.
뤼네부르크 공작 에른스트.
헤센 방백 필리프.
작센 공작 요한 프리드리히.
뤼네부르크 공작 프란츠.
안할트 공 볼프강.
뉘른베르크의 원로원과 시 행정관.
로이틀링겐 원로원.